전국의 천주교박해 중에서도 수원화성의 박해는 모든 사람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가장 혹독한 박해로 알려진다. 정조대왕이 남인파를 대거 등용하여 자신의 개혁정신과 정치적 이상을 실현시켜 나가려 한 곳이 바로 수원화성이었다. 따라서 정조대왕 사후 정권을 휘두른 노론 벽파는 한양 이남과 경기도 일대 그리고 충청도지방으로부터 수원화성으로 연행되어 온 천주교신자들에게 정치적 보복성의 혹독한 박해를 가하게 된다. 수원화성에는 천주교인들이 연행, 구금되고 백지사형(창호지를 얼굴에 붙임)과 교수형(미루나무에 매담)이 집행된 토포청(북수동성당 옆), 양반 천주교인들이 심문받은 화성행궁, 서민이하 천주교인들이 심문받은 이아(화청관),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하여 자주 공개처형이 이루어진 종로 네거리, 아사형(굶김)이 이루어진 총 6칸으로 된 형옥, 공개적으로 장살형(몽둥이)이 이루어진 팔달문밖 장터와 장안문 밖 장터, 참수형(칼)이 이루어진 동남각루를 비롯한 여러 각루, 천주교인의 목을 매달아 놓은 암문 등 현재까지 10군데가 넘는 순교현장들이 확인되고 있다. 그 중 수원화성의 동남쪽에 위치한 동남각루는 가혹한 순교현장의 한 예이다. 천주교도들을 차례로 각루 위에 올려놓고 둥둥둥둥 북을 치는 가운데 휘광이가 휘두르는 시퍼런 칼날에 참수당한 천주교도의 시신이 성밖으로 내던져져 성 밑으로 떼굴떼굴 굴러 내려갔다. 성밖 아래서 지켜보던 동네사람들이 머리없이 굴러 내려와 누구의 시신인지조차 알아볼 수 없는 시신들을 거적에 대충 덮어 수레에 싣고 성 밖의 가까운 야산에다 묻었던 것이다. 그리고 칼에 잘린 천주교도들의 목은 가까운 남암문(남쪽 암문)에 걸어 놓았다. 암문(暗門)은 어두운 곳에 숨겨진 문이란 뜻으로 다산 정약용이 군사, 정치, 경제, 과학, 실용적인 다각적 측면을 고려하여 수원화성 전체에 모두 5군데에 설계한 자그마한 비상문인데 양반들은 체통이 떨어진다 하여 드나들지 않은 문이었다. 그래서 암문은 주로 평민이나 상인, 노비, 포졸 등 하류민들이 드나들던 문이었다. 남암문, 북암문 등 암문을 지나다니던 이들이 천주교도들의 목이 걸린 참혹한 광경을 바라보며 치를 떨었다고 한다. 소위 ‘상 것’ 들이나 배우는 기술과학문명의 서학을 신봉하게 되면 모두 그 꼴이 되어 처참하게 죽는다는 위협용으로 천주교 신자들의 목을 걸어놓았던 것이었다. 그래서 수원화성에는 옛부터 “무당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천주학쟁이만은 되지 말아라”는 말이 전해져 올 정도다.
오피니언
나경환 북수동성당 주임신부 뽈리화랑 대표
2008-03-28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