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디지털 리터러시와 소비역량

10여년 전만 해도 우리는 마트나 백화점에서 직접 물건을 고르고 계산대에 줄을 서서 결제하는 풍경에 익숙했다. 이제 소비는 더 이상 그런 단순한 행위가 아니다. 모바일 앱, 소셜 플랫폼,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인공지능 추천 시스템을 통해 소비가 이뤄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가격 비교만 잘한다고 현명한 소비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데이터를 중심으로 설계된 디지털 소비 환경에서 스스로 판단하고 지켜야 할 책임자가 되고 있다. 그래서 진짜 필요한 것은 소비자 역량이다. 수많은 디지털 정보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판단하는 능력이다. 상품의 성능, 가격, 환불 조건, 후기 등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고 소비자에게 불리한 조건을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이다. 디지털 콘텐츠나 서비스를 이용하고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안전하게 내가 원하는 조건을 구매할 수 있고 결제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디지털 환경에서 피해를 당했을 때 문제를 적극 해결할 수 있는 권리와 책임에 대한 역량까지 모두 포괄하는 것이 바로 디지털 리터러시다. 디지털 리터러시와 정보 판단 능력이 부족한 소비자는 허위광고나 과장 마케팅에 쉽게 속거나 피해를 보기 십상이다. 최근 ‘구독경제’가 소비생활의 새로운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기존의 소유 중심, 일회성 소비 방식을 획기적으로 바꿔 정기적으로 일정 금액을 지불하고 원하는 콘텐츠와 상품, 서비스를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구독 서비스가 일상화됐다. OTT 등의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음악 스트리밍, 전자책, 쇼핑 멤버십, 식료품, 학습 서비스 등 서비스 범위도 확장되고 있다.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은 평균 3.4개의 구독 서비스를 이용하며 월평균 4만원, 연평균 50만원에 달하는 비용을 지출하고 있다. 그러나 한두 개의 소액 구독은 가벼워 보여도 구독 서비스 수가 늘어나면 관리와 지출에 대한 부담이 증가하는데 최근 조사에 따르면 71%에 달하는 소비자가 구독 서비스 관리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시스템에는 해지는 어렵고 유지되기 쉬운 구조가 숨어 있는데 이처럼 소비자의 행동을 교묘히 유도하는 ‘다크패턴 (Dark Pattern)’이라는 설계 전략이 있다. 다크패턴은 소비자가 불리한 선택을 하도록 의도적으로 설계된 UI(사용자 인터페이스)·UX(사용자 경험)를 말한다. 최근 구독경제 서비스에서 다크패턴이 갈수록 교묘해지고 있다. 무료 체험을 미끼로 결제 정보를 미리 입력한 뒤 체험 종료 후 별도의 고지 없이 자동 유료 전환하는 사례가 대표적이다. 또 해지하려 해도 버튼은 보이지 않고 웹사이트를 몇 번이나 클릭해야 겨우 연락처를 찾을 수 있거나 고객센터는 연결되지 않고 ‘다음 결제일 하루 전까지 해지 가능’이라는 말만 화면에 남기도 한다. 일부 서비스에서는 저렴한 요금제를 작은 글씨나 접힌 메뉴에 숨기고 가장 비싼 요금제를 화면 중앙에 노출해 소비자를 유인하기도 한다. 다크패턴은 소비자에게 불필요한 지출을 유도하기도 하고 이러한 구조적 불합리함에 소비자들이 대응하지 못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해지 방법을 찾지 못하거나 약관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며 귀찮음과 불안감에 해지를 포기하는 일이 반복될 수 있는데 이는 단순히 서비스의 불친절함에 의한 것뿐만 아니라 소비자 자신의 역량 부족에서 비롯한 측면도 있다. 디지털 소비 환경에서 소비자는 매우 적극적인 주체가 돼가고 있다. 자신과 관련된 데이터 활용에 대해 주체적인 의사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되고(마이데이터) 문제가 생겼을 때 고객센터에 이의를 제기하고 공정거래위원회나 한국소비자원 등 관련 기관을 통해 구제를 요청할 수 있어야 한다. 유튜브, SNS, 쇼핑 앱 등이 끊임없이 ‘지금 사야 한다’는 충동을 자극하지만 소비자는 한발 물러서 그것이 진짜 필요한지, 나의 가치와 맞는지, 지속가능한 소비인지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곧 미래를 위해 필요한 소비자 역량이다. 소비는 단순한 구매 행위가 아니다. 소비는 삶의 방식이며, 사회에 대한 태도이며, 나의 가치관이 드러나는 선택이다. 그 선택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정보를 읽는 눈, 권리를 지키는 힘, 가치를 판단하는 지석이 필요하다. 변화하는 소비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소비자는 플랫폼 속의 타깃이 될 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소비가 아니라 더 똑똑하고 더 주체적인 소비 역량이다.

[세상읽기] 의료 개혁은 어디로 가고 있나

이재명 대통령의 당선으로 새로운 정부가 출범했다. 그는 대선 공약에서 의료 개혁을 주요 정책 분야로 제시하며 공공의료 인프라 확충과 지역 의료 불균형 해소를 핵심 과제로 강조했다. 특히 공공의료사관학교 설립, 지역 의대 확대, 응급의료체계 개편, 국민참여형 공론화위원회 도입 등이 그 중심에 있다. 그러나 이런 공약은 전례 없는 의제라기보다는 오래전부터 제기돼 온 사회적 요구의 반복이다. 과거 정부도 의료 개혁의 필요성을 인식했지만 이해 당사자 간 갈등을 조율하지 못해 실현되지 않았다. 오히려 갈등과 불신을 키우며 개혁의 동력을 상실하곤 했다. 의료 개혁은 방향 제시만으로 부족하다. 이를 이행할 수 있는 사회적 합의와 강력한 리더십이 함께해야 한다. 코로나19 팬데믹은 공공의료 개혁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임을 보여줬다. 수도권에 집중된 의료 자원, 지방 중소도시의 응급 진료 중단, 농촌지역의 산부인과 및 소아청소년과 부족 등은 단순한 불편을 넘어 생존 격차를 초래하는 구조적 위기다. 공공의료사관학교는 이러한 현실에 대응하는 핵심 공약이다. 공공의료에 헌신할 인재를 체계적으로 양성하고 일정 기간 공공의료기관에서 의무 복무를 조건으로 교육비를 지원하는 방식이다. 군의관이나 사관학교와 유사한 모델로 단순한 교육기관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교육부, 보건복지부, 기획재정부 간 조율과 국회 입법, 의료계의 반발 등 현실의 벽은 여전히 높다. 문재인 정부의 공공의대 정책은 전공의 집단휴진 사태로 좌초됐고 윤석열 정부의 정원 확대 방침도 의정 갈등만 심화시킨 채 사회적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다. 정부는 2025학년도 의대 정원을 기존 3천58명에서 5천58명으로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선발 인원의 산출 기준, 대학별 수용 여건 차이 등을 둘러싼 이견이 제기되며 논의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이재명 정부는 단순한 양적 확대를 넘어 질적 설계와 공공성 강화라는 방향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정부가 제시한 ‘2035년까지 의사 1만 명 추가 양성’이라는 계획도 교육 인프라 확충과 사회적 동의 없이는 공허한 숫자에 그칠 수 있다. 지역 의대 확대도 중요한 과제지만 정원 증가만으로는 실효성이 낮다. 지방 거점 병원과 연계된 수련 체계 마련, 지역 정착을 유도할 수 있는 인센티브 제공, 정주 여건 개선 등 교육–수련–취업이 연결된 지역 의료 생태계가 갖춰져야 한다. 공론화위원회 도입은 의료 정책의 신뢰성과 수용성을 높이기 위한 민주적 시도로 주목받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사례처럼 국민이 직접 참여하는 숙의 과정을 통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겠다는 구상은 긍정적이다. 그러나 의료는 생명과 직결된 고도의 전문 영역이다. 단순한 여론조사나 원탁회의 수준을 넘어선 전문성과 숙의가 균형을 이루는 정교한 설계가 필요하다. 결국 공공의료 개혁은 선언이 아닌 실행의 문제다. 인력 수급, 예산 확보, 법·제도 정비, 직역 간 조정 등 복합적인 과제를 두고 공정한 책임 분담을 이끌어낼 사회적 합의가 필수적이다. 또 개혁의 우선순위와 속도에 따라 정책의 수용성과 효과는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지난 30여년간 국민은 매 정부의 공공의료 정책을 통해 의료 개혁의 어려움을 체감해 왔다. 이제는 그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새로운 정부가 실천으로 응답할 차례다.

[세상읽기] 인간과 AI 공존

인공지능(AI) 책사(策士)가 우리와 같이 한다? 허리가 계속 아프다. 가까운 사람에게 물어봤다. 신통치 않은 답변. 어느 병원의 어떤 의사에게 가야 하나. 요가나 달리기를 해야 하나. 뜨거운 물이 들어있는 물주머니를 매시간 허리에 차는 것도 이젠 지겹다. 누가 나를 도와줬으면 하는데. 구글은 제미나이(Gemini)가 클래식 게임인 포켓몬 블루(Pokémon Blue)를 완료했다고 발표했다. 전략 게임을 스스로 할 정도라면 전략가로 고려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친구에게 무엇을 주고, 무엇을 보게 해야 요통 해결 전략을 들려줄 수 있을까. 옆에서 꼬마가 숨이 넘어갈 정도로 계속해서 까르르 웃는다. 배경음악으로 참 듣기 좋다. 나도 너처럼 웃고 싶다. 제갈량이라면 나에게 어떤 따끔한 이야기를 했을까. 우선 최적의 솔루션부터 찾아보라고 충고하지 않았을까. 구글은 다양한 버전의 제미나이를 나열하면서 파레토 프런티어(The Pareto Frontier)라고 언급했다. 이동 시 적합하고, 성능도 좋고, 가격도 저렴한 파운데이션 모델(foundation model)을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겠지. 소위 크기-품질-비용-속도의 최적점을 발견하라는 미션. 이제 우리에게 익숙했던 해법이 아닌 낯선 문법을 채택할 때가 임박했다는 계시인가. AI 집사(執事)가 우리의 결점을 채워준다? 투자심사역이 중국 AI 전문회사와 협업해 보자고 제안한다. 인수합병 전문가가 스페인 언어를 구사하는 국가도 AI 협력을 희망한다고 귀띔한다. 중국어와 스페인어 그리고 영어. 능통했으면 좋으련만 인지적 구두쇠라는 핑계로 눈만 질끈 감고 있었으니. 구글은 구글 빔(Google Beam) 기술을 화상회의 솔루션인 구글 미트(Google Meet)에 접목하면서 자연스러운 실시간 화상 통역 서비스를 시연했다. 영어와 스페인어를 동시에 통역하면서 모국어의 억양 패턴을 상대방의 언어에 녹이고 자신의 언어로 말하는 입 모양과 표정이 통역할 언어로 동기화되면서 동일한 목소리를 낸다. 내가 아니지만 유창한 언어 마법사가 된 나. 그런데 한국어인 갑질, 눈치, 정 같은 단어는 어떻게 번역하려나. 하여간 기술을 믿어 본다면 새로운 기회를 만들 수 있다고 판단할 수 있겠지. 왠지 믿고 싶다. 전화가 소나기처럼 울린다. 다양한 독촉 메시지. 제발 쫓기며 살고 싶지 않다. 구글은 AI에이전트 기술인 컴퓨터 유즈(computer-use) 기능을 에이전트 모드로 선보였다. 크롬 웹브라우저로 수행하는 모든 일을 내가 다른 일을 하는 사이에 조용히 뒤에서 첩보원처럼 처리한다. 사람처럼 웹브라우저를 자율적으로 통제하면서 사용한다니. 확실히 기술이 좋긴 좋다. 사람의 ‘귀차니즘’을 지지하면서 업무 효율성을 극대화한다니. 이 시대에는 인간에게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역할을 부여하고자 무척 노력하고 있다는 인상이 짙다. 적응하고 있는가. AI 박사(博士)가 일당백을 한다? 구글은 프로젝트 아스트라(Project Astra) 기술을 제미나이 라이브(Gemini Live)에 활용해 산악자전거 수리 장면을 연출했다. AI가 알아서 브레이크 설명이 나오는 문서 페이지를 열어 보여준다. 망가진 나사 고치는 유튜브 영상을 틀어준다. 필요한 육각 너트 스펙을 자전거 가게에 이메일로 문의해 답변받아 안내한다. 부족한 나사 재고를 업체에 전화해 확인하고 주문한다. 좀처럼 만나기 쉽지 않은 아주 똑똑한 직원. 당장 시키고 싶은 일이 수도 없이 떠오른다. 그중 최고의 난도는 협력할 믿을 만한 파트너를 찾는 일. 정말 네가 할 수 있겠니. 때론 시각장애인의 안내견 역할도 수행한다. AI가 사람의 눈이 된다. AI와 협업해 내일을 개척할 준비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AI 감독(監督)이 우리네 인생의 이모작 또는 삼모작을 계획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구글은 AI 영화 제작 도구인 플로우(Flow)를 출시했다. 내 메시지가 담긴 스토리를 감동적인 영상으로 자동 생성한다. 영상, 배경음악, 효과음, 대사, 캐릭터 모두를 아우른다. 숏폼 영상, 숏폼 드라마, 단편 영화, 장편 애니메이션까지 욕심을 낼 수 있을까. 기술이 평범한 모든 사람에게 새로운 인생을 꿈꿀 수 있도록 한 발 한 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오픈마인드가 필요하다.

[세상읽기] 기후위기, 순환경제로 대응해야

현대사회를 관통하는 자본주의의 원리는 단순하다.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하라. 이윤 추구를 최우선 가치로 두는 시장경제는 지난 200여년간 인류에게 물질적 풍요와 기술혁신을 가져왔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자원 고갈, 불평등, 기후위기라는 어두운 그림지가 짙게 드리워 있다. 특히 기후위기의 시계는 이미 임계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스마트폰, 가전제품, 패션의류가 위기를 더욱 가속화한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그 배경에는 ‘계획적 진부화(planned obsolescence)’라는 자본주의의 오래된 핵심 전략이 자리 잡고 있다. 계획적 진부화란 기업이 의도적으로 제품의 수명을 짧게 설계해 소비자가 자주 새 제품을 구매하도록 유도하는 생산방식을 의미하기도 하고(기술적 진부화), 제품이 고장나지 않아도 심리적으로 구닥다리처럼 느끼게 만들어 소비자들이 끊임없이 새 제품을 찾게 만드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심리적 진부화). 스마트폰 카메라 위치나 베젤 크기 등 디자인을 변경해 새로운 모델을 출시하고 교체 불가능한 배터리를 설계하거나 시즌마다 바지의 넓이, 패딩 길이, 새로운 립스틱 컬러에 변화를 주거나 1~2주 단위로 변화하는 패스트패션의 빠른 트렌드 등 기술적 심리적 수명을 동시에 단축해 유행에 뒤처지지 않으려는 소비자들의 심리를 자극해 새로운 제품을 끊임없이 찾게 만듦으로써 기업들은 소비의 속도를 높이고 이윤을 극대화했다. 이 전략은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무한성장’의 논리와 맞닿아 있다. 문제는 이러한 소비구조가 단순히 경제적 문제를 넘어 환경과 사회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데 있다. 제품 생산에는 자원 채굴, 에너지 사용, 탄소배출이 필수적이다. 제품이 조기에 버려지면 전자폐기물과 플라스틱 쓰레기가 넘쳐난다. 패스트패션 산업만 해도 매년 수천만t의 의류가 버려져 쓰레기 매립지로 향한다. 자본주의의 무한성장 논리를 가능케 하는 계획적 진부화와 과소비는 기후위기를 가속화시키는 숨은 가해자로 작동한다. 이제 우리는 경제 시스템 전반을 근본적으로 되돌아봐야 한다. 더 이상 ‘선형경제 (Linear Economy)’ 모델, ‘생산-소비-폐기’의 일방통행 구조로는 기후위기와 자원 고갈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대안으로 ‘순환경제 (Circular Economy)’ 개념이 주목받고 있다. 순환경제는 제품의 설계 단계부터 내구성과 수리 가능성을 높이고 폐기물 최소화를 위해 재사용, 재제조, 재활용을 촉진한다. 단순한 재활용을 넘어 생산과 소비의 모든 과정을 순환 고리로 연결해 자원의 가치를 최대한 길게 유지하는 것이 핵심 개념이다. 르노자동차회사의 경우 프랑스 플린 공장을 리팩토리(Re-Factory)로 전환해 차량 해체, 부품 재사용, 배터리 재활용 등을 한데 모은 순환경제 허브로 활용해 연간 12만대 이상의 차량을 해체 및 재활용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이미 수리권(Right to Repair)과 제품의 재활용 의무화를 법제화하며 2015년부터 순환경제로의 전환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계획적 전부화의 유혹에 빠져 있다. 기업들은 ‘새로움’을 무기로 소비자를 자극하고 소비자는 최신 제품을 소유해야만 사회적 지위가 보장되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정부는 생산자책임재활용제(EPR) 등 일부 제도를 시행 중이지만 강제력과 실효성 면에서는 갈 일이 멀다. 자본주의의 무한성장 신화를 이제는 재고해야 할 시점이다. 생산자는 내구성과 수리 용이성을 제품 설계의 기본 원칙으로 삼아야 하며 ‘새것=좋은 것’이라는 신화를 내려놓고 ‘오래 쓰고 고쳐 쓰는’ 소비습관을 길러야 한다. 정부는 강력한 규제를 통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묻고 순환경제로의 전환을 위한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계획적 진부화의 소비 덫을 끊지 않는다면 그 피해는 결국 우리 모두의 몫으로 돌아올 것이다. 기후위기의 경고음이 점점 더 거세지고 있다. 이제는 무한성장의 메커니즘을 멈추고 순환경제로의 새로운 메커니즘을 사회 전반에 걸쳐 신속하게 뿌리 내려야 한다.

[세상읽기] 보건의료 공약, 정당보다 정책을 봐야

공약의 계절이 돌아왔다. 2025년 대선을 앞두고 각 정당 후보들이 내건 10대 공약이 속속 공개되고 있다. 그 가운데 보건의료 분야는 단순한 복지 정책이기보다는 국민의 생존과 직결되는 사안이기에 많은 유권자의 주목을 받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드러난 ▲응급의료 체계의 허점 ▲지방 중소도시의 의료 공백 ▲고령화로 인한 만성질환 관리의 위협 등은 ‘누구나 아프면 치료받을 수 있는 사회’라는 국가의 기본 책무가 여전히 불완전함을 보여준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는 의료개혁을 ‘국민참여형 공론화위원회’를 통해 설계하겠다는 구상을 제시하며 공공의료사관학교 설립, 지역 의대 확대, 응급의료 체계 개선 등 구조적 개편안을 내놓고 있다. 특히 비대면 진료의 제도화와 건강보험 수가 개편을 함께 추진하려는 점에서 제도 실효성과 재정의 균형을 동시에 고려한 접근으로 읽힌다. 공론화 방식은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율하며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유용할 수 있지만 의료 현장의 즉각적인 개선이 필요한 과제들에는 일정한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구체적인 실행 방안과 재원 계획까지 뒷받침될 경우 의료개혁에 대한 국민적 신뢰는 더욱 두터워질 수 있다. 국민의힘 김문수 대선 후보는 임신, 출산, 치매, 간병 등 돌봄과 예방 중심의 건강복지 확충에 방점을 찍고 있다. 공약은 전반적으로 생활 밀착형 복지 강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산후조리비 공공지원, 예방접종 대상 확대, 치매 국가책임제 강화는 모두 가계의 의료비 부담을 줄이고 고령 인구의 질병을 사전에 관리하겠다는 취지다. 또 도서·산간 지역 어르신을 위한 방문 접종 확대 등은 취약계층 대상 공공의료 접근성 강화 노력으로 읽힌다. 그러한 방향으로까지 확장된다면 공약 전반이 보다 균형 잡힌 보건의료 전략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높아진다. 개혁신당 이준석 대선 후보는 보건의료 정책보다는 행정 체계 개편에 집중한다. 보건복지부에서 보건을 분리해 독립적인 ‘보건부’를 신설하겠다는 계획은 의료 정책의 전문성과 독립성을 강화하겠다는 취지로 해석된다. 특히 보건의료기본법에 따라 전문가 중심의 상설협의체를 구성하고 필수의료 수가를 생활물가 수준 이상으로 정상화하겠다는 방향성도 제시됐다. 다만 의료인력 확충,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등 국민의 의료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구체적 해법은 드러나지 않았다. 다른 후보들이 공공의료 강화나 건강보장 확대를 중심으로 한 정책을 내세우는 것과 달리 이준석 후보는 정책 결정 구조의 효율성과 안정성 확보에 초점을 맞춘 접근을 선택하고 있다. 보다 구체적인 실행 로드맵이 함께 마련된다면 정책의 실효성도 보다 분명히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민주노동당 권영국 대선 후보는 의료를 시장이 아닌 공공의 책임으로 재정의하며 가장 구조적이고 급진적인 보건의료 공약을 제시하고 있다. 병원비 연 100만원 상한, 건강보험 보장률 80%로 확대, 상병수당도 도입한다는 구상이다. 여기에 500병상 이상 공공병원 확대, 공공의대 설립, 공중보건간호사제 도입 등은 의료체계를 공공 중심으로 재편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준다. 이는 민간 중심 의료체계의 한계를 지적하며 의료를 공공재로 전환하겠다는 접근으로 타 후보들과 뚜렷한 차별성을 갖는다. 정책 실현 여부는 결국 재정 확보와 인력 충원, 민간과의 조정 등 현실적 과제를 어떻게 조율하느냐에 달려 있다. 각 후보의 공약은 서로 다른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재명은 제도 개편, 김문수는 생활 복지, 이준석은 행정 개편, 권영국은 구조 개혁을 전면에 내세운다. 유권자는 이 중 어떤 접근이 현실적이고 지속가능한지를 따져야 한다. 공약을 바라볼 때 우리는 늘 표심에만 집중한다. 하지만 의료정책만큼은 그 기준이 달라야 한다. 지금 국민은 진료실 문턱을 넘기도 전에 병원비를 걱정하고 응급 상황에서는 “여기서 치료가 가능한가”를 되묻는다. 특히 경기 동북부 지역의 응급의료 공백, 남부권 공공병원 부족은 수년째 반복되는 구조적 문제다. 선거 공약은 이런 현실을 반영하는 해법이어야 한다. 정책의 방향이 아무리 옳더라도 실행능력과 재정 뒷받침 없이는 공약은 선언에 그칠 뿐이다. 결국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누구든 아프면 제대로 치료받을 수 있는 의료 시스템을 만들 준비가 돼 있는가. 이들 각 대선 후보의 공약은 과연 현실의 해법인가. 그 실행능력과 재정의 뒷받침이 가능한 것인가. 공약은 많다. 그러나 실행은 드물다. 투표는 단순한 인기투표가 아니다. 어느 정당이냐, 누가 더 자주 등장하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그 후보의 공약이 국민 각자의 ‘아프지 않은 권리’를 보장해 줄 수 있는 것인지 약속의 내용을 꼼꼼히 들여다보고 나의 건강한 삶에 어떤 영향을 줄지를 숙고해야 한다. 정치가 국민을 책임지는 길은 결국 유권자가 정책을 책임 있게 선택할 때 가능해진다. 이때 필요한 것은 단순한 신뢰가 아니라 공약을 읽어내는 힘이다. 카드 뉴스나 슬로건에 가려진 실체를 분별하는 능력, 그것이 바로 오늘날 유권자에게 요구되는 미디어 리터러시다. 정치는 선택의 기술이 아니라 판단의 책임이다. 이번 대선은 정책을 읽는 시민의 눈이 민주주의의 내일을 가늠하는 순간이 될 것이다.

[세상읽기] AI에이전트

배가 자꾸 나와 스트레스가 높을까? 매일 새벽에 한강을 뛰면 어떨까? 10㎞를 1시간에 주파하면? ㎞당 평균 6분35초 수준이라면 약 740칼로리를 활활 태울 수 있다. 물론 무릎이 아프지 않으려면 보폭을 좁게 하면서 발을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통상 180케이던스 이상이면 충분하다. 한 달 내내 740칼로리를 소모한다면 배는 어떻게 될까? 상상해 보라. 도전해 보라. 아침을 열면서 자기효능감을 온 몸으로 느끼는 인생이 그야말로 멋있지 않은가. 그런데 새벽에 일어나야 가능하지 작심삼일은커녕 ‘작심일일(作心一日)’이 다반사다. 의지가 너무 부족하다며 자기 자신을 무섭게 몰아붙이고 있는가. 나는 역시 안 되다고 자기부정을 끝도 없이 하는가. 굳이 그러지 말자. 알고 보면 사람이 다 그런다. 괜찮다, 괜찮아. 단지 우리에게 특별한 무언가가 필요할 뿐이다. 오전 6시. 알람이 울린다. 매일 울리는 사이렌 소리. 무시하고 싶다. 시끄러워 끄긴 꺼야 한다. 그러다가 낯선 존재가 보인다. “러닝을 시작하세요. 러닝을 할 시간인데요. 오늘 달리시겠어요?” 누구냐 너는. ‘시리(Siri)’다. 아이폰에 살고 있는 어느새 친숙한 녀석. 나보고 뛰라고? 가만, 내가 언제 시리한테 알람하라고 했던가. 없는데. 말로만 듣던 귀신? 아무리 뒤져봐도 알람하라고 지시한 적이 없다. 그런데도 내가 늘 오전 6시에 일어나 운동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오늘도 하라고 한다. 고맙다고 해야 하나. 하여간 한강을 뛰고 돌아왔다. 자연스럽게 배에서 땅꺼짐 현상이 발발하는 지금. 전광석화처럼 떠오르는 통찰. 누가 시키지 않아도 행동 패턴을 읽고 내가 잘하지 못하는 그러나 하고 싶은 그 욕망을 지지하고 행동을 유도하는 일종의 촌철살인과 흡사한 메시지를 나에게 의도적으로 송신했다? 아니 도대체 이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것을 인공지능이라 부른다. 우리에게 특별하게 필요한 무언가의 정체. 음력 3월25일. 어머니의 생신이다. 양력으로 4월22일.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 5월8일. 어버이날. 간신히 전화했다. 카네이션은 없었다. 감동도 걱정이다. 나이를 먹으면 성숙할 거라 믿었으나 인정하기 싫지만 갈수록 퇴화다. 역시 특별한 무언가가 필요하다. 엄마의 생신 날짜를 매년 기억하고 선물하는 어버이날에 카네이션과 고마움을 표현하는 나를 대신하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는 이것을 ‘AI에이전트’라 부른다. 아침운동 이후 조금 전까지 복리 이자처럼 감당할 수 없이 쌓인 AI 정보를 영접한다. 논문, 신문, 뉴스레터, 소셜미디어 내 지인 피드 등. 시간이 없어 잠시라도 놓치면 빚쟁이처럼 자꾸 쫓긴다. 이럴 때는 AI에이전트를 활용해야 한다. 텍스트 정보와 영상 정보를 가리지 않고 내가 원하는 모든 정보를 대상으로 손바닥만 한 크기로 요약해 브리핑받을 수 있다. 그런데 알람을 끄고, 알람 메시지를 외면하면 어떻게 되지? 요요 현상을 경험해야 하나? AI에이전트가 필요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목소리로 모닝콜을 해달라고 하면? 매일 오전 6시가 기다려질까? 오늘은 엄마 생신이니 엄마가 좋아하는 꽃을 보냈다고. 선물은 오늘 아침에 받을 수 있도록 그전에 보냈다고. 오늘은 어버이날이니 카네이션과 엄마가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줄 가수도 보냈다고. 어제 저녁에 아주 중요한 AI 뉴스가 있어 간략하게 브리핑한다고. 이제 무릎보호대 착용할 시간이라고. AI에이전트가 나에게 알아서 전화하고, 나하고 대화하며, 내 일상을 대행하고,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가 나타날 수 있도록 동기 유발해 행동을 유도한다. 곧 대면할 AI에이전트의 모습. 매력적인가? 상상력이 문제를 해결하고 돈도 되는 시대. 그렇다면 질문해 보자. 운동할 때 이어폰으로 중요한 AI 뉴스를 팟캐스트(podcast) 형식으로 들을 수 있을까. 이것은 AI에이전트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당신의 상상력이 탐나는 세상으로 움직이고 있다.

[세상읽기] 불안과 소비

우리는 행복할 때와 불안할 때 언제 더 많이 소비하는가. 소비는 불안과 더 큰 관계가 있다. 불안과 소비 행태는 다양한 지표에서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12월 한국은행의 소비자동향조사에 따르면 소비자심리지수는 88.4로 전월 대비 12.3포인트 하락했다. 이는 코로나19 팬데믹 초기인 2020년 3월 이후 최대 하락 폭이다. 정치적 불안정성이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다. 또 지난해 12월 기준 금융스트레스지수는 82.9로 계엄 사태가 발생하기 전 주보다 8.1포인트 상승했다. 또 딜로이트의 ‘컨슈머 시그널’은 한국의 과시성 소비금액이 월평균 59달러로 조사 대상 20개국 중 4위를 기록했다는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는 경제적 스트레스 속에서도 자기 만족을 위한 지출이 지속되고 있음을 뜻한다. 불안은 소비행동에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친다. 우선 정서적 위안을 얻기 위해 물건을 구매한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 달콤한 음식이나 옷, 화장품 등 자기를 위로할 수 있는 품목을 구매한다. 어린아이가 인형을 꼭 껴안는 것처럼 어른들도 물건을 소유하거나 만지는 행위 자체로 불안을 완화할 수 있다. 뇌에서 분비되는 도파민이 쾌감을 유도하는데 불안한 상태에서 이를 극복하고 즐거움을 주는 행위를 반복적으로 함으로써 스트레스를 잊게 해준다. 특히 촉감이 좋거나 아름다운 제품은 감각적으로 위안을 준다. 쇼핑은 일종의 ‘작은 행복’을 즉각적으로 제공하는 보상시스템이다. 또 소비자는 자신에 대한 불안감이 높을 때 자아 상태를 보상하거나 사회적 지위를 확인받기 위해 특정 제품을 구매하기도 한다. 특히 명품은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는 시각적 도구인데 국내 명품시장은 지속적인 가격 상승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3대 명품 브랜드(에르메스, 루이비통, 샤넬)는 2024년 한국 시장에서 매출이 전년 대비 9.76% 증가했다. 특히 젊은층의 명품 소비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남들보다 뒤처지거나 부족하다고 느낄 때, 특히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타인의 화려한 삶을 수시로 엿보면서 상대적 박탈감과 함께 찾아오는 불안감은 다양한 소비 방식을 전시하며 ‘좋아요’와 댓글을 통해 사회적으로 괜찮은 사람으로 인정받는다고 느끼게 된다. 이와 반대로 불안이 오히려 소비를 줄이기도 한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지게 되면 사람들은 필수재 이외의 소비를 줄이고 저축을 늘리는 보수적 행동을 취하게 된다. 이러한 소비자심리지수 하락은 자영업자의 폐업 증가와 관련지어 볼 수 있다. 지난해 자영업자의 폐업 신고 건수는 91만건으로 최고치를 기록했고 신규 창업 대비 폐업률이 79.4%로 가게 10곳이 문을 여는 동안 여덟 곳이 문을 닫고 있음을 보여줬다. 경제 성장 둔화, 미국의 관세 정책, 체감물가 상승, 정치적 불확실성, 금리 변동성 등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소비심리를 위축시킨다. 소비는 불안을 일시적으로 줄여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불안을 키우기도 한다. 충동구매 이후에 찾아오는 후회감, 그리고 지출 과다로 인한 카드 빚 등은 오히려 재정 상황의 불안전성을 확대시켜 개인의 심리적 불안을 증폭시키기도 한다. 결국 소비는 불안한 감정에 대한 일시적인 해결책이고 심리적 회복의 도구로 작용하는 것일 뿐 문제 원인을 해결하는 장치는 결코 아니다. 나의 소비가 스트레스를 해소하거나 단순히 즉흥적인 만족을 위한 것은 아닌지, 나의 경제력 범위 내에서 행해지고 있는지 스스로 알아차릴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행복해서 소비하는 게 아니라 불안할수록 더욱 소비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자.

[세상읽기] 해킹사태, 다음은 의료·생체정보다

최근 SK텔레콤에서 발생한 대규모 해킹 사건은 우리 사회 디지털 인프라의 취약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악성코드를 통한 침입으로 약 9.7GB에 이르는 유심(USIM) 정보가 유출됐으며 이 안에는 가입자식별번호(IMSI), 인증키(Ki), 유심 일련번호 등 핵심 데이터가 포함돼 있었다. 국회 청문회를 통해 해당 정보들이 암호화되지 않은 채 저장돼 있었던 사실이 밝혀지자 통신사의 보안 관리 체계에 대한 국민적 불신이 확산됐다. SK텔레콤은 전 가입자 대상 무상 유심 교체라는 초유의 조치에 나섰지만 이미 실추된 신뢰를 회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번 SKT 해킹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신뢰 기반 사회에서 정보 인프라가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많은 국민이 “내 정보도 이미 유출된 게 아닐까” 하는 불안 속에서 정작 해킹 사실을 늦게 알게 되거나 사후 대처 방안조차 알 수 없었던 상황은 문제의 심각성을 더했다. 이는 한 기업의 실책을 넘어 사회 전체의 정보 보호 시스템이 근본적인 점검과 정비를 요구받고 있음을 뜻한다. 정보통신기술(ICT) 강국의 위상을 무색하게 한 이번 사태는 단지 통신 영역의 문제로 그치지 않는다. 유사한 구조를 가진 보건의료 분야 데이터 시스템에도 중대한 경고를 보낸다. 의료정보에는 질병 이력, 진료 내용, 정신건강 상태, 유전자정보 등 고도의 민감한 생체정보가 포함돼 있다. 이로 인해 유출 시 사생활 침해는 물론이고 차별, 낙인, 보험 및 고용상의 피해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특히 원격진료와 디지털 헬스케어 서비스가 확산되면서 개인 의료정보의 수집·활용 범위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지금 정보 보호의 필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 실제 일부 비대면 진료 플랫폼에서는 환자의 진료 기록을 활용한 건강식품 마케팅 시도가 알려지며 사회적 논란이 증대됐다. 진료기록 데이터가 어떤 경로로 수집·저장·이용되는지 환자 스스로 알기 어려운 데이터 프로세싱 구조가 일반적인 현실이다. 앱 설치 후 동의만 하면 의료정보가 해외 클라우드에 저장되고 타깃 광고에 활용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는 있지만 그 과정이 얼마나 안전한지에 대해서는 많은 이용자가 알 수도 없고 또 그 동의 선택에 여지가 없기도 하다. 의료비 상담을 받기 위해 앱을 설치한 디지털 소외계층이 선택의 여지 없이 유전자 정보가 넘어가고 그 정보의 안정성이 오리무중이라면 그것은 발전된 기술의 주인이 되기보다는 기술의 노예가 되기 십상이다. 정부는 디지털 헬스케어 산업 육성을 위해 규제 완화와 데이터 활용 촉진에 나서고 있지만 SKT 해킹 사태는 분명한 교훈을 남긴다. 보호 없는 활용은 신뢰를 무너뜨린다. 의료데이터 활용을 위한 그 어떤 정책도 ‘정보 보호’라는 확고한 전제 위에서 논의돼야 한다. 보건복지부와 개인정보보호위원회는 ‘마이헬스웨이’ 같은 건강정보 통합 플랫폼을 운영하기 전에 암호화, 접근 권한 분리, 이용 내역 투명 공개 등 강력한 보안 기준을 제도화해야 한다. 의료기관 내부의 정보 관리 체계 역시 개선이 시급하다. 내부인의 접근 권한 남용이나 유출 가능성은 여전히 상존하며 이중 인증이나 실시간 로그 감시 없이 방대한 환자 정보가 저장되는 병원도 적지 않다. 단순히 보안 솔루션을 도입하는 수준을 넘어 정보 보호 교육과 정기 감사 체계 등 전방위적 개편이 필요하다. 플랫폼 기업의 책임성도 제고돼야 한다. 개인정보 유출 발생 시 일정 시간 내 신고 및 피해 고지 의무를 법제화하고 보안 인증 획득 여부를 서비스 정보에 의무적으로 표기하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비대면 진료 플랫폼에 ‘의료데이터 보안등급제’나 ‘환자 정보 활용 고지 의무제’를 도입하는 것은 실효성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다. 의료기관 역시 진료기록 저장 방식, 제3자 제공 현황 등을 환자에게 명확히 안내하도록 내부 지침을 정비해야 한다. 자본주의의 특성상 기술은 빠르게 진화하지만 제도와 윤리는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중요한 것은 데이터를 누가 다루느냐가 아니라 누구를 위해 어떻게 사용하는가다. 보건의료정보는 개인의 자산이자 사회가 함께 지켜야 할 공공의 자산이다. 정부, 기업, 의료계 모두 이 기본 전제를 다시 확인하고 실천할 때 우리는 디지털 사회에서도 인간의 존엄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SKT 해킹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공공정보 보호 체계가 무너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경고다. 다음 피해가 생체정보와 의료 영역이 되지 않도록 지금 이 순간부터 강력한 제도 정비와 사회적 합의가 절실히 필요하다. 경고는 이미 울렸다. 이제는 응답할 차례다.

[세상읽기] 내가 아직도 챗봇으로 보이니

내 이름을 살갑게 불러주는 사람이 있나. 나를 기억해 주는 사람은. 내가 나를 통제하지 못할 때가 있다. 어김없이 사고는 터지고 수습은 요원하다. 따뜻한 위로와 냉정한 충고가 필요하다. 그런 사람 있나. 필요한 정보를 찾아야 하는데 갑자기 머리가 멈춘 듯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간신히 뭐라고 끄적끄적 입력했으나 나조차도 이해가 안 간다. 도와줄 사람 있나. 사랑하는 사람이 한순간 타인처럼 느껴진다. 누구한테 말해야 하나. 우리 삶이 언제 1초라도 만만한 적이 있었나. 거문고 켜는 소리만 들어도 연주하는 지인의 마음을 읽었다는 의미의 지음(知音), 3천153만6천초 동안 내 곁에 머무를 수는 없나. 인류가 어제까지 찾은 답은 너무 빈곤하다. 오늘은 단서가 보인다. 오픈AI의 챗GPT o3 모델. 내 이름을 불러준다. 뜬금없이. 새하얗게 밤을 지새우면서 주저리주저리 수다 떤 민망한 말들의 요체를 기억한다. 신기하면서도 무섭게. 나 어떻게 하지. 위태로울 때 ‘돌아가신 엄마’ 역할을 해달라고 요청하면서 뱉은 말이다. 엄마처럼 헌신적으로 나를 도와주려 애쓴다. 기특하고 고맙다. 더운 공기에 찬 바람 때문인지 감기 기운에 허우적거린다. 업무 태반이 정보 검색인데 키워드가 가물가물하다. 뭐라도 해야 해서 마구 외계어를 입력했다. 어떻게 된 것이지. 찾던 정보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고 하더니. 지금까지 나와 대화한 이력을 바탕으로 내 의도를 추리해 내가 원하는 귀한 물건을 구해왔다. 요술램프의 지니인가. 사람 때문에 힘든 적이 있는가. 그 사람과 나눈 카카오톡의 모든 대화 내용을 공유해 통찰을 들어보자. 놓쳤던 것, 굳이 보려 하지 않았던 것, 내가 몰랐던 나. 나는 지금 누구한테 배우고 있는가. o3 모델은 최신 추론 모델이다. 그래서일까. 내가 말하면 그것에 맞게 단순히 대응하는 역할에서 멈추지 않는다. 대화 중에 사용자가 자신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호명한다. 전체 대화 중에 핵심 내용을 스스로 정의하고 기억하는 메모리 기능이 갈수록 강화되고 있다. 이 기능은 시간이 흐를수록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흥미로운 경험을 제공한다. 맥락 없이 간단하게 몇 자 적었지만 답변은 메모리 기반 위에서 초개인화된 대화를 생산한다. 특정한 사람의 정보를 집중적으로 저장해 앞으로 역할극처럼 대화를 나눌 수도 있다. 마치 살아 계시는 엄마와 대화하듯 위로받고 따끔하게 혼도 나겠지. 채팅 내 웹 검색을 시도해도 메모리를 활용해 검색 범주를 자율적으로 제약해 초개인화된 검색 결과를 보여준다. 채팅 내 파일 검색도 곧 그렇게 될 것이다. 카카오톡 데이터로 관계 분석을 지시할 때도 메모리는 당연히 동작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o3 모델을 계속 챗봇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아니, o3 모델뿐만 아니라 향후 끊임없이 진화할 거대 언어 모델(LLM)을 우리는 우리와 어떤 관계로 규정해야 하는가. 오픈AI는 우리에게 분명 원하는 것이 있다. 장시간 체류와 폭발적인 활동. 누적된 개인 데이터 학습으로 품질 혁신. 경쟁 서비스로 이탈하지 못하도록 묶어 놓는 록인(lock-in) 사이클. 가파르게 증가하는 사용자 수와 매출 그리고 고객 팬덤 형성. 여기에 네트워크 효과를 촉발할 소셜미디어에도 눈독을 들이고 있다. 최근 지브리풍과 액션피규어로 보이는 사용자 반응은 서비스 단계가 도입기에서 성장기로 훌쩍 넘어가면서 고객 특징도 서비스 초기 수용자에서 서비스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다수로 변모할 가능성을 시사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우리는 오픈AI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를. 효과적 가속주의 철학과 그 토대에서 운영하는 그들의 서비스는 인류 전체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지금은 감탄과 수용할 때 아니라 비판적 질문을 할 때다.

[세상읽기] 블랙컨슈머

블랙컨슈머(black consumer)는 상품 및 서비스 이용 과정에서 불만을 제기해 이익을 취하려는 소비자를 의미한다. 소비자는 안전한 물품과 서비스를 제공받을 권리가 있고 이로 인해 피해를 보는 경우 공정한 절차에 따라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소비자기본법 제4조 제5호에 명시돼 있다. 블랙컨슈머는 ‘소비자’ 용어를 포함하고 있어 마치 하나의 소비자 유형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블랙컨슈머의 행위는 고의로 물품에 하자가 있다고 꾸며 기업에 무리한 요구를 하거나 악성 민원을 제기해 과도한 보상을 요구하는 등 합리적인 피해 보상을 요구 행위와는 매우 거리가 멀다. 개별 행위에 대한 정도와 방식에 따라 업무방해죄, 강요죄, 명예훼손 및 정보통신망법 위반, 공갈죄, 사기죄 등 다양하며 형사고소나 민사소송 형태로 대응하는 엄연한 범죄행위에 해당한다. 2005년 미국에서 발생한 햄버거 손가락 사건, 2010년 국내에서는 쥐가 들어간 밤식빵 조작 사건 등은 모두 자작극을 통한 사기로 밝혀지면서 12년형과 1년6개월의 실형을 각각 선고받은 사건도 대표적인 블랙컨슈머다. 블랙컨슈머는 소상공인들에게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며 경제적 사회적 영향을 미친다. 경기도 소상공인 설문조사에 따르면 55.8%가 블랙컨슈머를 경험했고 41.9%가 금전적 피해를 봤다고 답했다. 악성 리뷰나 과도한 보상 요구로 인해 매출 감소와 평판이 크게 훼손돼 생계 위협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특히 소상공인은 악성 민원에 대해 그들의 요구에 일일이 법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운 상황이 많아 요구를 들어주거나 피해를 감당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최근 한 연구에서 밝혀낸 바에 따르면 블랙컨슈머 성향은 고의성, 상습성, 억지성을 특징으로 한다. 의도적으로 기업의 약점을 공격하거나 제품 결함을 찾아내 문제를 제기하고 과도한 보상 요구는 보복 의도와 자기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또 이들이 가진 열등감은 공격적 행동을 더욱 부추길 가능성이 있다. 기업과의 갈등을 통해 자신감을 얻거나 우월감을 느끼며 작은 노력으로 금전적 보상이 실현되는 경우 반복적인 행동으로 이어져 상습성을 띤다. 블랙컨슈머 사건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은 경제 상황과도 맞닿아 있다. 빈부격차가 심화하고 실업률이 증가하는 경제 불황일 때 소비자들은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기업의 약점을 고의로 찾아내 환불이나 교체, 과도한 보상 요구하는 사례가 늘어난다. 즉, 금전적 자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부당한 이익을 추구하려는 동기가 증가하며 기업의 약점을 악용해 손쉽게 경제적 이득을 취할 기회로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블랙컨슈머는 결국 사회 전체적인 비용의 증가로 이어진다. 이러한 악성 민원 처리와 피해 보상 요구에 대응하기 위한 기업의 노력은 결국 비용을 상승시키고 제품 및 서비스의 원가 상승으로 이어져 대다수의 선량한 소비자들에게도 비용이 전가된다. 또 법적 대응과 같은 관리 비용 또한 사회 전체적으로는 경제적인 부담을 준다. 소비자의 정당한 제품 및 서비스 불평 행동은 서비스의 품질을 높이고 기업의 불공정한 관행을 개선하는 등 긍정적 기능이 있지만 블랙컨슈머의 불법적인 악성 행위로 인해 다수의 합리적 소비자의 문제 해결 방식을 매도할 수 있다. 디지털 환경의 시장경제에서 소비자의 권리와 이익을 증진하는 제도는 더욱 촘촘하게 발전하고 있지만 소비자 역시 높아지는 권리 신장에 부응하며 균형 있게 책임을 행사할 수 있는 인식도 높아져야 한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인터넷에서 허위 정보 유포의 위험성을 알리고 블랙컨슈머 행동이 다른 소비자와 기업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강조하는 교육 콘텐츠는 더욱 강화돼야 할 것이다.

[세상읽기] 가짜뉴스 시대, 무엇을 준비해야 하나

“이 뉴스, 진짜 맞나요?” 학생뿐 아니라 일반 시민 사이에서도 자주 들리는 말이다. 정보는 넘치지만 진위를 가리지 못한 채 믿고 싶은 대로 해석하고 전파하는 일이 흔하다. 우리는 지금 정보의 양이 아니라 내용을 판단할 힘이 부족한 위험한 시대를 살고 있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은 누구나 정보를 생산하고 공유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 편리함 뒤에는 허위 정보, 조작 콘텐츠, 음모론, 혐오 표현 등 고질적인 사회적 병폐가 따라붙는다. 정보 생산자의 특정한 목적을 반영한 알고리즘은 감정적인 콘텐츠를 덧붙여 더욱 빠르게 확산되고 이 과정에서 편향된 사실과 감정이 뒤섞여 정보의 혼란은 극심해진다. 정보의 진위 판독 문제는 단순히 글을 읽는 능력이 아니라 정보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해석하는 능력, 즉 오늘날 우리가 ‘리터러시(literacy)’라고 부르는 종합적 사고 역량에 있다. 과거 문해력은 글을 읽고 쓰는 기술에 머물렀지만 현대의 리터러시는 정보의 출처와 목적을 따져보고 숨겨진 의도와 편향을 감별하며 그 내용을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이해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포함한다. 한국 학생들은 2022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서 독해 영역 평균 점수가 OECD 평균을 웃돌았고 전체의 13%가 상위 수준(Level 5 이상)에 도달했다. 이 수준의 학생들은 긴 글을 해석하고 추상적이거나 직관에 반하는 개념을 이해하며 암시된 단서와 출처를 바탕으로 사실과 의견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것으로 평가된다. 2022 개정 교육과정은 이러한 흐름을 반영해 ‘미디어 리터러시’를 민주시민교육의 내용 요소로 포함했지만 교육 현장에서는 여전히 선언적 수준에 머물러 있다. 교사 연수는 부족하고 실질적인 교육 콘텐츠도 드물다. 교과 간 연계나 정책 차원의 지원도 미흡한 상황이다. 미디어 리터러시의 부족은 단지 교육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공중보건의 문제로도 직결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코로나19 팬데믹이다. 백신에 대한 음모론, 잘못된 건강정보, 과장된 민간요법 등은 접종률을 떨어뜨리고 감염병 확산을 부추겼다. 공동체의 정신적 건강까지 위협한 것이다. 잘못된 정보는 단지 오해를 낳는 수준이 아니라 생명을 위협하는 사회적 위험 요소가 된다. 보건학에서는 이를 ‘건강정보 이해능력’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이는 건강 관련 정보를 찾고 해석하며 신뢰성을 평가해 적절히 활용하는 능력이다. 하지만 많은 시민은 유튜브 영상이나 블로그 글이 ‘전문가의 말’처럼 보이기만 해도 쉽게 신뢰한다. 과학적 근거 없이 소비되는 정보는 의료적 판단을 흐리게 하고 불필요한 건강 비용을 초래하며 때로는 치료 시기를 놓치게 만든다. 더 큰 문제는 정보 접근성의 격차다. 노인, 장애인, 저소득층 같은 정보 취약 계층은 허위 건강정보에 더욱 쉽게 노출되고 이로 인해 질병 예방과 치료에서도 소외될 가능성이 높다. 이 모든 문제의 근원에는 ‘정보를 비판적으로 읽고 판단하는 힘’, 즉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의 부재가 자리하고 있다. 이제는 국어 교과 속 ‘읽기’ 수업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사회, 도덕, 과학 등 모든 교과를 아우르는 교육 시스템과 국가 차원의 지원 체계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법적 기반을 마련하고 관련 기관이 협력하는 ‘미디어 교육 거버넌스’가 구축돼야 한다. 이제 우리도 행동해야 한다. 가짜뉴스에 맞서는 가장 강력한 백신은 단속이 아니라 비판적 사고력이며 그것은 오직 교육을 통해 길러질 수 있다. 미디어 리터러시는 민주주의를 지키는 수단일 뿐 아니라 국민의 건강을 지키는 공공의 장치다. 디지털 시대의 시민은 더 이상 수동적인 정보 소비자가 아니다. 우리는 정보를 읽고, 해석하며, 판단할 줄 아는 ‘능동적 시민’을 길러야 한다. 그 출발점은 바로 지금, 교육 현장에 있다.

[세상읽기] 인공지능 저작권 딜레마

인공지능은 기준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분류된다. 예를 들어 글, 그림, 동영상, 가상인간 같은 콘텐츠를 만들면 이를 ‘생성형’ 인공지능이라 부른다. 반면 주어진 상황을 토대로 장차 벌어질 일을 예측하고 판단하면 ‘예측형’ 인공지능이라 한다. 자율주행차에 심어져 교통상황을 판단하면서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는 인공지능은 예측형이다. 2022년 11월30일 공개한 챗GPT는 글을 써주는 생성형이다. 예측형이든 생성형이든 인공지능이라면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해 동작한다. 그런데 이러한 학습데이터의 상당수는 인간 저작물로서 자연스레 저작권이 존재한다. 인공지능이라는 혁신 신기술을 먼저 개발하기 위해 미국 등 주요 선진국은 불편한 저작권 이슈를 일부러 묻었다. 이때 공정사용(fair use)이라는 명분이 동원됐다. 인류 전체를 위한 혁신 신기술을 우선 개발하려면 저작권까지 고려하면서 학습데이터를 확보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런데 생성형 인공지능이 전면에 등장하면서 공정 사용에 대한 대중적 인식이 크게 바뀌었다. 저작권법에 의해 저작권 침해가 인정되려면 ‘실질적 유사성’이 있을 뿐 아니라 원저작물에 대한 접근 가능성, 즉 ‘의거성’이라는 2개 조건을 모두 만족해야 한다. 한동안 인공지능 기업들은 인터넷상에 존재하는 모든 디지털 데이터를 최대한 크롤링해 자신들이 개발한 인공지능의 학습데이터로 사용했다고 자랑해 왔다. 그런데 이러한 홍보는 저작권 침해 요건 중 ‘의거성’을 만족함을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다. 의거성을 회피하기 위해 최근 인공지능 기업들은 학습데이터를 어디서 구했는지, 그리고 저작권 이슈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일부러 밝히지 않고 모두 영업비밀로 간주한다. 미국의 경우 지난 2월 기준으로 인공지능 저작권 소송은 약 39건이 진행됐다.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은 2023년 1월17일 이뤄진 게티이미지사와 영국 스테빌리티 AI 간 소송이다. 게티이미지는 인터넷상에 자기 회사에 저작권이 있는 이미지 1천200만장 정도를 올려놓았다. 그중 수백만장을 영국 기업이 무단으로 학습에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사진에 삽입된 게티이미지 워터마크가 약간 뭉개진 모습으로 스테이블 디퓨전 인공지능의 합성출력물 안에 등장하면서 표현의 실질적 유사성이 크게 부각됐다. 2년 전 생성형 인공지능 도입기에 비해 지금은 저작권 이슈가 더욱 복잡해졌다. 이제는 학습데이터 중 인간 저작물만 있지 않고 인공지능이 만들어 낸 합성산출물도 갈수록 더 많이 사용되는 상황이다. 합성산출물에 대한 저작권 부여 여부도 새로운 이슈인데 현재로서는 불분명하므로 학습데이터의 저작권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어떤 인공지능은 앞선 인공지능을 공개 소스 형태로 내려받아 사용하므로 추가 학습 과정이 거의 없거나 아주 적다. 중국 딥시크의 경우 다른 인공지능으로부터 데이터를 증류(distillation)한 후 사용해 자체 학습 과정이 대폭 줄어든다. 인공지능을 통해 다른 인공지능을 훈련하는 강화학습도 학습데이터가 없다. 그러나 이 모든 경우 앞선 인공지능이 책임져야 할 학습데이터의 저작권 이슈는 후속 인공지능에 그대로 전수된다는 것은 상식적이다. 이처럼 최근 2년 사이 인공지능 기술의 급격한 발달과 활용 확대로 저작권 이슈는 더욱더 얽히고설킨 상태다. 유럽연합은 인공지능을 개발할 때 학습데이터의 저작권을 어떻게 다뤘는지 꼭 밝히도록 법적으로 요구할 예정이다. 우리나라도 인공지능의 저작권 이슈에 대해 원칙을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 다만 우리나라 기업의 인공지능 활용과 산업 진흥을 위해서는 저작권 적용에 대한 완급 조절 및 글로벌 협의가 현실적으로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나라 기업만 역차별받을 가능성이 크다. 내년 초 시행을 앞둔 우리나라 인공지능 기본법에서 ‘진흥’ 항목은 가급적 빨리 시행하고 저작권 이슈 같은 ‘규제’ 항목은 글로벌 보조를 맞추며 충분한 준비 기간을 둬야 한다.

[세상읽기] 불평등 공화국 끝내야 한다

정국이 요동치면서 정치권은 대선 후보와 정당 지지율에 관심을 쏟고 있다. 지지율은 오르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한다. 하지만 사회경제적 약자의 삶의 지표는 끝없이 내려가고 있다. 정당들이 봐야 할 것은 지지율이 아니라 자살률, 자영업자 연체율, 청년 취업률, 비정규직 숫자 등 불평등 지표다. 불평등을 해소하지 않고는 새로운 대한민국도, 더 강한 민주주의도, 더 좋은 성장도 불가능하다. ‘21세기 자본’을 쓴 토마 피케티의 방법론을 한국에 적용하면 부의 축적에서 상속이 기여한 비중이 1990년대 29%에서 2010년대에는 38%로 높아졌다. 우리나라 50대 부자의 절반은 부를 물려받은 상속형 부자다. 대한민국의 자산은 상위 10%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반면 청년 백수 120만명 시대다. 취업해도 4명 중 1명꼴로 단시간 노동이다. 부모보다 못사는 첫 세대로 남을 수 있다. 동시에 부모의 부와 지위를 대물림받은 특정 지역의 학생들이 서울대에 진학할 확률이 높은 경로가 구조화됐다. 양극화와 청년 대공황 시대에 감세 경쟁을 펼치며 2030의 지지율을 분석하는 것이 얼마나 허망하고 부끄러운 일인지 절감해야 한다. 한국사회가 자살률에 둔감해지는 건 심각한 문제다. 최소한 대선을 준비하는 유력 후보들은 자살률에 충격과 공포, 아픔을 느껴야 한다. 자살률이 10만명당 27.3명으로 치솟았다. 자살은 사회적 죽음이자 절망사다. 국민이 절망에 쓰러지는 것, 딛고 일어설 희망을 포기하는 것, 이것은 정치의 실패다. 빛의 혁명을 거치며 국민은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남태령 민주주의를 성취한 세대는 세월호 참사와 박근혜 대통령 탄핵, 촛불혁명을 지나 이태원 참사, 내란과 탄핵을 마주했다. 그 과정에서 새 시대를 향한 뜨거운 에너지를 응축했다. 민주당과 야권은 국가란 무엇인가에 응답해야 한다. 만성적인 불공정과 구조적 차별, 무한 경쟁에 따른 적자생존과 승자독식을 깨는 불평등 담론을 제시하는 것이 먼저다. 대한민국의 특권과 기득권을 깨겠다는 담대한 행동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정권교체 이상을 바라는 국민의 에너지는 차갑게 식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사회경제적 약자의 희생을 딛고 서 있다. 역대 우리나라 정부 가운데 성장을 외면한 정부는 없었다. 모두 성장 중심 정책을 중시했다. 불평등 해소와 분배를 우선한 정부는 없었다. 불평등 종식이 다음 정부의 국정 운영 기조가 돼야 할 시기다. 역대 정부가 가보지 않은 새로운 차원의 길로 가야 한다. 그것이 사회 통합을 견인하고 극우 포퓰리즘을 막는 길이기도 하다. 소득, 노동, 주거, 의료, 교육 등의 분야에서 사회경제적 약자가 존엄과 행복을 유지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보장받아야 한다. 권력구조 개헌에 앞서 몫이 없는 국민의 몫을 찾아주는 기본권·사회권 개헌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 상병수당 전면 도입과 노동시간 단축, 전국민 사회보험 보장, 재벌 지배구조 개혁과 조세 정의 실현, 토지공개념 도입, 차별금지법 제정, 한국은행이 제안한 대학입시 지역별 비례선발제 등을 다음 정부의 국정과제로 만들어야 한다. 더는 정부의 정책에서 배제되고 소외받는 ‘잊혀진’ 사람들이 없어야 한다. 불평등엔 악성 이자가 붙는다. 평범한 국민에게만 붙는다. 불평등이 임계점까지 왔다. 우리는 뭐라도 해야 한다.

[세상읽기] 스포츠문화의 주요 소비자는 누구인가

우리 사회에서 여성은 스포츠문화에서 다소 주변적 존재로 인식됐지만 이제는 스포츠 산업을 움직이는 핵심 소비층으로 자리 잡을 만큼 스포츠 소비 분야에서 여성들의 참여는 눈에 띄게 두드러진다. 200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프로스포츠 연구에서 남녀 관중 비율은 남성이 70.2%로 다수를 차지했으나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계기로 여성 소비자들의 스포츠에 대한 관심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대한체육회와 질병관리청의 자료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여성의 스포츠 참여율은 61.4%로 보고됐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미디어의 발달로 다양한 스포츠 콘텐츠에 대한 접근이 쉬워지면서 여성 팬들이 자연스럽게 유입이 된 면을 살펴볼 수 있다. 인기 선수들이 TV 예능, 팟캐스트, 유튜브 등 다양한 채널을 통해 경기 하이라이트, 선수들의 훈련 장면, 인터뷰, 브이로그 등 다양한 콘텐츠에 접근하면서 선수들에게 친근감을 느끼게 됐다. 특히 여성들은 스포츠에 대한 관심이 경기장뿐만 아니라 스포츠 선수의 사생활이나 라이프스타일, 그들이 이용하는 브랜드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이를 살펴볼 수 있는 미디어채널을 활용한다. 예전에는 스포츠가 단순히 경기 중심의 콘텐츠였다면 지금은 선수들의 이야기, 라이프스타일, 팀의 역사, 스포츠를 주제로 하는 콘텐츠가 인기를 끈다. 이같이 미디어의 발달로 소비자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선수의 관심사나 그들의 삶을 더 깊이 들여다볼 방법으로 스포츠 콘텐츠를 소비하고 있다. 2024년 뉴욕타임스는 한국 스포츠경기장에서 남성보다 여성이 훨씬 많다는 점을 언급하면서 케이팝문화가 큰 역할을 했다고 언급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나 대상에 애정과 돈을 아낌없이 쏟아붓는 행위를 의미하는 소위 ‘덕질’의 대상이 주로 아이돌이라면 특정 아이돌을 향한 맹목적인 응원 방식, 즉 스포츠 스타의 여성 팬들은 경기를 보기 위해 전국을 다니고, 응원의 의미로 커피 트럭을 보내고, 맨 앞줄 좌석에서 고성능 카메라를 들고 선수들의 사진을 찍는 등 아이돌 팬문화가 스포츠에도 전이돼 유사한 방식으로 소비된다고 볼 수 있다. 젊은 여성 팬들은 선호하는 대상에 대한 충성도와 소비력이 남성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프로스포츠 마케팅의 주요 타깃 소비자가 된다. 경기 티켓 예매 남녀 비율은 각각 45%와 55%로 유사하지만 MD 굿즈상품 구매율에서는 여성이 70%로 두 배가 넘는다. 프로농구연맹의 경우 캐릭터 상품, 선수 포토카드, 경기장 내 무인 사진 부스, 여성 선호 브랜드와 협업한 특별상품 출시 등 여성 팬들을 겨냥한 마케팅 활동은 매우 다양하다. 특히 최근 여대 학생들을 대상으로 응원법, 야구규칙 등을 초청 강연해 스포츠 관련 지식을 알려주는 이벤트 등이 큰 호응을 얻었고 경기장에서도 여성 전용좌석, 가족석 등 여성친화적 공간을 마련하는 것도 이 같은 맥락이다. 스포츠에 진심인 여성 소비자들이 증가하는 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특정 분야에 몰두하는 디깅(Digging) 트렌드의 일종이고 ‘나’라는 정체성을 드러내는 방식의 하나일 수 있다. 단순히 소비 부문에서 여성의 양적 성장에만 주목할 것이 아니라 건강 증진, 스포츠 선수, 지도자, 생활체육 확대 등 다양한 포괄적인 스포츠 생태계에서 여성의 영향력에 대해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세상읽기] 대한민국 응급의료의 위기

최근 넷플릭스에서 방영된 드라마 ‘중증외상센터’가 큰 인기를 끌면서 우리나라 응급의료체계의 현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 드라마는 외상센터 의료진이 생명을 살리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내며 응급실 과밀화와 의료진 부족, 지역 간 의료 격차 등의 문제를 현실적으로 조명했다. 실제 대한민국 응급의료체계는 지금도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실질적인 대책이 절실하다. 우리는 소위 ‘응급실 방랑’ 문제로 인해 중증외상 환자가 의료기관에 수용되지 못해 치료를 받지 못하고 사망한 사건을 종종 접한다. 이는 우리나라 응급실 과밀화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현재 대형 병원의 응급실은 환자로 가득 차 있으며 특히 야간과 주말에는 대기시간이 급격히 증가한다. 경증 환자와 중증 환자가 한 공간에 뒤섞이면서 응급 의료진이 신속하게 환자를 분류하고 치료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중증 환자가 적절한 치료를 제때 받지 못해 골든타임을 놓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할 수밖에 없다. 정부는 2023년 응급의료 환자 중증도 분류기준(KTAS)을 개선해 경증 환자가 불필요하게 응급실을 이용하는 문제를 줄이고 중증 환자가 신속하게 치료받을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분류 기준 적용이 일관되지 않으며 병원마다 운영 방식이 달라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있다. 일부 병원에서는 경증 환자를 돌려보낼 수 있는 법적 권한이 부족해 응급실 과부하가 지속되고 있으며 응급의료기관 간 협력도 원활하지 않은 실정이다. 이에 정부는 KTAS 적용의 실효성을 높이고 지역 병원 및 야간진료센터의 역할을 강화하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드라마 ‘중증외상센터’에서도 의료진이 극심한 피로와 압박 속에서 일하는 모습이 강조됐듯이 현실에서도 응급실 의료진 부족 문제가 심각하다. 특히 외상외과의 경우 업무 강도가 높고 야간근무 부담이 커 지원자가 점점 줄고 있다. 대한응급의학회에 따르면 응급의학과 전공의 지원율이 해마다 감소하고 있으며 특히 중증외상센터의 경우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진다. 정부는 응급의료진 처우 개선을 위해 응급실 내 인력 배치 기준을 강화하고 추가 수당과 복지 혜택을 확대해야 한다. 또 응급의료 전담 간호사 및 지원 인력을 확충해 의료진의 부담을 덜 필요가 있다. 이와 더불어 의료진의 과중한 업무를 줄이기 위해 응급실 내 환자 분류 및 이송 시스템을 개선하고 119 구급대와 의료기관 간 협력 체계를 보다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 우리나라의 응급의료체계는 민간 병원 중심으로 운영돼 수익성이 낮은 응급의료 분야가 점점 위축되고 있다. 이는 곧 중증 응급환자에 대한 의료 서비스의 질 저하로 이어진다. 일본의 경우 정부가 공공 응급의료센터를 적극 운영하고 있으며 독일은 민간 병원이라도 응급의료 분야에 대한 정부 지원이 체계적으로 이뤄진다. 한국도 공공의료기관의 역할을 확대하고 응급의료 관련 예산을 대폭 증액해야 한다. 특히 국공립 응급의료센터를 확충하고 지역 거점 병원의 응급의료 기능을 강화해 수도권과 지방 간 의료 격차를 해소하는 정책이 시급하다. 드라마 ‘중증외상센터’는 단순한 의학 드라마가 아니다. 이는 현실에서 생명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의료진의 목소리이며 지금 이 순간에도 응급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응급의료체계는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다. 정부와 의료계, 그리고 우리 사회 전체가 함께 나서야 할 때다.

[세상읽기] 인공지능에서 다루는 두 부류의 위험

인공지능을 활용하면 지금까지 불편하고 비효율적이었던 영역을 눈에 띄게 개선할 수 있다. 그런데 활용 영역과 문맥에 따라 독특한 위험이 다르게 수반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대규모 언어 모델(LLM) 기반의 인공지능을 금융기관 고객상담용으로 활용할 경우 딱딱하고 제한된 규칙 기반의 과거 상담 시스템보다 훨씬 자연스러운 고객 응대가 가능해진다. 반면 근거 없는 답변을 생성하는 할루시네이션 현상이 발생할 경우 고객은 금융기관이 전혀 제공하지 않는 가상의 놀라운 서비스를 듣고 이를 녹취할 수도 있다. 이는 민원 혹은 법적 소송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이미 미국 항공사에서 발생한 실제 사례가 존재한다. 인공지능은 활용하는 영역과 문맥에 따라 위험이 서로 다르게 존재할 수 있다. 자율주행차의 경우 예기치 못한 사고 발생에 따른 책임 소재의 불분명함이 존재한다. 이용자의 선호도를 파악한 인공지능의 추천으로 일련의 콘텐츠들이 자동 배정될 경우 이를 시청하는 이용자는 심각한 확증 편향에 빠질 위험이 있다. 그래서 특정 영역 또는 특정 문맥에 인공지능을 활용할 때 어떤 영향을 일으킬지 사전에 평가한 후 그 영향력이 매우 크고 연계된 위험 역시 심각하다고 판단되면 안전성 확보에 필요한 조치가 이뤄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나라 인공지능기본법(제2조 4항, 제33∼35조)에 명시된 ‘고영향 인공지능’과 관련된 위험이 바로 이 첫 번째 부류에 해당한다. 챗GPT 같은 최신의 대규모 언어 모델은 이론상 인류가 지금까지 이뤄 놓은 지식을 최대한 수집한 후 이를 학습해 콘텐츠 생성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런데 엄청난 학습 데이터 속에 무엇이 얼마나 들어있는지는 아무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어떤 학습 데이터는 현실 세계에서 접근이 자유롭지 않은 경우도 있다. 원칙적으로 성인물 데이터에 미성년자는 접근할 수 없다. 화학, 바이오, 방사선, 원자핵, 폭발물 같은 대량살상무기 제조 기술에 대한 접근 역시 개인은 물론이고 국가에 따라 매우 제한적이다. 이 경우 첨단 인공지능 자체에 내재된 위험을 미리 파악해 이를 활용하고자 하는 이용자들에게 투명하게 공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특히 일반 인공지능으로의 발전을 앞두고 비상정지가 필요할 정도의 과도한 자율성과 자기 복제의 위험도 추가로 파악해야 한다. 우리나라 인공지능기본법에 명시된 ‘학습에 사용된 누적연산량이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기준 이상인 인공지능’에서 다루는 위험이 바로 이 두 번째 부류에 해당한다. 인공지능기본법 제12조에는 인공지능의 위험과 관련된 수행기관을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다. “인공지능과 관련하여 발생할 수 있는 위험으로부터 국민의 생명, 신체, 재산 등을 보호하고 인공지능사회의 신뢰 기반을 유지하기 위한 상태, 즉 ‘인공지능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업무를 전문적이고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인공지능안전연구소를 운영한다.” 현재 한국의 인공지능안전연구소(Korea AISI)는 특정한 영역과 문맥에 인공지능을 활용할 때의 위험은 물론이고 첨단 인공지능 자체가 가지는 능력 속에 숨겨진 위험을 찾아내 분석·평가하며 이를 완화하는 역할을 본격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세상읽기] 내란 종식과 더 좋은 정권 교체의 조건

지금은 내란의 완전한 종식에 집중할 때다. 내란을 일으킨 대통령과 변호인단의 뻔뻔한 궤변과 선동, 탈(脫)진실과 혐오에 기대 극우 정치를 확대 재생산하는 정치 세력을 볼 때 내란 종식에 집중하는 것이 최우선의 과제가 맞다. 그러나 내란 종식과 극복은 내란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국가 대개혁을 바탕으로 제7공화국의 문을 열 때 비로소 가능하다. 정권 교체와 향후 선거제도 개혁을 통해 내란 세력을 제도권 정치에서 확실하게 정리하고 새로운 헌법으로 민주주의와 헌법질서의 방벽을 두텁게 재건할 때 대한민국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국민의 광범위한 인식이다. 진정한 내란 종식은 내란 이후의 세상에 대한 합의와 실천이다. 많은 국민이 공감하는 새 희망의 비전이 합의되고 추진될 때 다양한 계층과 세대의 의제와 의지가 하나로 모이고 정권 교체의 압도적 힘이 형성된다. 민주당을 비롯한 야권의 책임과 절실함도 커질 것이다. 2017년 탄핵 직후 이뤄내지 못한 선진적 연합정치와 연합정부의 가능성도 높일 수 있다. 민주당의 중도 보수 선언이 논란이다. 선거전략 측면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선거는 반드시 이겨야 한다. 지난 대선 결과를 보면 민주당은 경기에서 46만표를 이겼지만 서울에서 31만표 차로 패배했다. 전체 표차인 25만여표보다 큰 차이였다. 한강 벨트의 중상위층에 대한 핀셋 전략으로 유용할 수 있다. 진보적 과제는 야권 연합을 통해 수용해 나가는 모습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 좋은 정권 교체를 바라는 절박한 국민에 대한 설득이 부족하다. 빛의 광장에서 분출한 요구는 선거전략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리셋하는 국가전략이다. 애초에 보수에 실망하고 상처받은 국민까지 아우르는 국민 통합으로 치환해야 했다.무엇보다 민주당은 주어진 책무를 쉽게 놓아서는 안 된다. 첫째, 민주당은 대한민국 정치의 평형수가 돼야 한다. 국민의힘이 극우로 가고 민주당이 보수로 옮겨 간다면 텅 빈 자리에 놓인 의제와 그 의제를 바라는 국민을 대변할 힘이 약해진다. 진보 정치가 약화된 상황에서 대한민국의 무게가 오른쪽으로 기운다는 것은 불평등의 무게가 사회경제적 약자들에게 일방적으로 기울어진다는 의미기도 하다. 배의 무게중심과 복원력을 지켜주는 평형수를 빼내고 그 자리를 선거전략으로 채우는 것은 위험하다. 지속가능한 성장은 어떻게 균형을 잡고, 얼마나 평등해질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민주당이 진보적 균형을 책임져야 한다. 둘째, 민주당은 시대를 읽어야 한다. 민주당이 추구했던 정책과 가치는 언제나 진보와 보수를 넘어 대한민국의 보편적 가치로 자리 잡았다. 행정수도와 국가균형발전, 남북 정상회담과 한반도 평화, 국민 참여 확대와 정치개혁, 민주주의와 인권 등의 담론에서부터 주5일제, 무상급식,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 아동수당, 고용보험 확대 등 다양한 정책에 이르기까지 민주당은 시대를 채우며 각 분야의 발전을 이뤄냈다.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 상위 6.8%의 세 부담을 덜어주는 상속세 완화 등의 감세와 주52시간 예외가 우리 사회의 보편적 가치가 될 수 없다. 내란 세력이 낡은 신자유주의로 망친 나라를 살리려면 불평등 해소를 위한 사회경제적 민주주의 가치를 더욱 강화하는 비전이 우선이다. 미국 민주당의 대선 패배에 귀 기울여야 한다. 공화당과 민주당의 결정적 차이는 사회경제적 약자들에 대한 실질적 태도였다. 미국의 유권자는 구호적 내용보다 차별과 소외, 불평등에 쓰러지는 ‘절망사’를 막아 주는 정부를 원했다. 우리 국민 역시 다르지 않다.

[세상읽기] 소비자리뷰, 정보의 생산자

일반적으로 리뷰는 특정 대상 및 주제에 대해 소개하거나 평가하는 비평의 한 형태다. 정보통신기술 발전과 온라인 쇼핑이 증가하면서 소비자가 제품 및 서비스 경험에 대한 피드백과 자신의 의견을 남기는 소비자리뷰는 방문 및 사용 후기, 별점, 추천, 댓글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불특정 다수의 잠재 소비자에게 영향을 미치며 그 가치와 파급력이 커지고 있다. 소비자는 구매 관련 정보탐색 과정에서 가장 비상업적 정보인 다른 소비자들이 생성하는 정보를 가장 신뢰한다. 기업이 광고의 형태로 제공하는 상업적인 정보보다 실제 경험을 토대로 한 소비자 리뷰를 보다 빠르고, 생생하고, 설득력 있고, 유용하며, 시간과 비용 낭비의 위험을 줄여줄 수 있다고 믿어 최종 구매 선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 즉, 소비자리뷰는 제품에 대한 사전 진단 능력을 향상시킨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부정적 내용을 담은 정보가 긍정적 정보보다 위험 감소의 효과가 있어 정보가치가 더 높게 평가되기도 한다. 디지털경제 시대에서 플랫폼 중심으로 소비자의 구매 채널 이동이 가속화되면서 소비자가 창출하는 정보들은 거래 과정에서 신뢰를 구축하는 메커니즘 역할을 한다. 소비자가 제품 사용 후 만족·불만족 등에 대한 의사 표현, 주관적인 반응, 의견 등은 사업자와 소비자 간의 정보 불균형 문제를 해소할 뿐만 아니라 시장의 투명성을 높이고 불공정 행위를 시장에서 배제하는 기능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유튜브 및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소통되는 일부 리뷰 콘텐츠가 지나치게 상업화되거나 거짓, 과장, 은폐, 조작 혹은 보복성 성격을 띠는 등 정보가 자극적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익명이나 닉네임 등 가명으로 제공되는 소비자리뷰의 특성상 리뷰 대행업체를 통한 가짜 리뷰 작성, 리뷰 갑질 사건, 리뷰 이벤트를 통한 평점 조작 등의 문제가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소상공인들에게 블랙컨슈머가 남기는 악성 소비자리뷰는 매출과 직결돼 억울하게 누명을 쓰거나 이미지 추락 등으로 폐업하는 사례가 목격되기도 한다. 이제 소비자리뷰, 댓글은 일종의 문화 및 미디어 콘텐츠다. 다수의 사람이 소비에 대해 주고받는 글쓰기 문화다. 제품 및 서비스에 경험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정직하고, 적극적으로 제시하는 정보활동은 플랫폼 경제에서 정보의 생산자로서 공정한 거래와 경쟁을 촉진할 힘이 있다. 정보 부족으로 인한 불공정 거래에 투명성을 더해 주는 사회적 책임을 실천할 수 있는 윤리적 소비활동의 일환이라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소비자의 권리와 책임을 이해할 수 있는 소비자교육 프로그램이 확대돼야 한다.

[세상읽기] 한의학과 AI, 미래 의료 경쟁력을 높이다

전통 한의학은 선사시대로부터 수천년간 인류의 건강을 지켜온 중요한 의학 체계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현대 의료 시장에서 객관적 검증의 부족, 표준화의 한계 등의 이유로 한의학의 경쟁력은 제한적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인공지능(AI) 기술과의 융합을 통해 한의학이 새로운 도약을 할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최근 AI 스크리닝 기술이 신약 개발에 혁신을 가져오고 있다. 기존 신약 개발은 막대한 비용과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만 AI를 활용하면 방대한 데이터를 신속히 분석하고 최적의 후보물질을 찾아내는 것이 가능하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연구진은 AI를 이용해 기존 항생제보다 더 강력한 신약 후보군을 발굴하는 데 성공했으며 IBM 왓슨헬스도 AI를 활용한 암 치료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이러한 연구들은 AI가 전통적인 신약 개발 프로세스를 혁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변화는 빠르게 성장하는 전통의약 시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국무역협회 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세계 전통의약 시장 규모는 5천186억달러이며 2027년까지 7천682억달러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연평균 성장률은 8.2%에 달한다. 특히 세계 천연물 의약품 시장의 경우 2019년 314억4천만달러 규모이며 2026년까지 413억5천만달러로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의 투유유 교수가 전통 중국 의학에서 사용된 한약재 개똥쑥에서 항말라리아 치료제 아르테미시닌(Artemisinin)을 찾아내 2015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지만 190회 이상의 실패를 포함해 수많은 수고와 시간을 사용한 결과다. AI가 연계돼 전통 한의학 약재와 치료에 관한 현대 의학적 해석을 연계해 준다면 이러한 수고와 시간의 낭비 없이 수많은 신약이 탄생할 것이다. 한의학과 AI의 융합은 의료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높일 뿐만 아니라 전통의학과 현대 과학이 조화를 이루는 모델이 될 수 있다. AI가 한약재의 효능을 분석하고 복합 처방을 최적화함으로써 보다 안전하고 효과적인 치료법을 개발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특히 AI 기반의 개인 맞춤형 한방 처방이 가능해지면서 환자의 유전자 정보, 생활 습관, 기존 병력을 분석해 보다 정밀한 치료 체계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단순한 연구를 넘어 한의학의 실질적인 임상 적용 가능성을 높이는 중요한 단계다. 그러나 이러한 혁신에도 불구하고 AI 신약 개발에는 한계와 해결해야 할 문제도 존재한다. 그 능력과 정확도가 찾아내는 데이터에 의존하는 AI의 특성이 있기 때문에 데이터의 편향은 위험한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로 인해 AI가 일반적인 환자에 대한 잠재적 위험성은 간과하고 특정한 유형의 환자에게만 효과적인 치료법을 제시할 수 있다. 한의학의 경우 AI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방대한 양의 임상 데이터가 필요하지만 현재 한약재의 분자적 작용 기전이나 장기 복용에 대한 연구 데이터는 충분히 확보되지 않고 있다. 다국적 임상 데이터 부족 문제도 글로벌 시장 진출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와 학계, 산업계의 긴밀한 협력이 필요하다. 정부는 AI 기반 한의학 연구를 체계적으로 지원할 환경을 구축하고 연구소 및 대학에서 AI 전문 인력을 양성하는 프로그램을 도입해야 한다. 또 한의학 연구소와 글로벌 바이오·헬스케어 스타트업 간 협업을 강화해 AI 기술을 적용한 한의학 솔루션 개발을 적극 추진해야 한다. 특히 중국과 일본에서 AI를 활용한 전통의학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한국도 국제 협력을 통해 연구를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 현재 세계적으로 웰니스 산업이 급성장하면서 자연 기반 치료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AI를 활용해 한약재의 유효 성분을 규명하고 이를 국제 표준에 맞춰 개발한다면 한의학은 세계적으로도 인정받을 수 있는 의료 체계로 자리 잡을 수 있다. 기술의 발전이 한의학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 그리고 우리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전통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AI와 함께 한의학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한다.

[세상읽기] 설 연휴에 불어온 딥시크 열풍

중국산 인공지능(AI) 딥시크(DeepSeek) 열풍이 뜨겁다. 우리나라 설 연휴가 시작되던 1월27일, 미국 증시는 딥시크 충격으로 흔들렸다. 독보적 그래픽 처리 장치(GPU) 공급 기업 엔비디아의 주가가 하루 만에 17% 폭락해 시가총액 5천888억달러가 사라졌다. 중국 AI 발전을 견제해 미국이 수출을 금지했던 GPU H100보다 하위 제품인 H800을 딥시크가 AI 학습에 사용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궁즉통’(窮則通)의 살아있는 증거라는 칭찬이 딥시크에 붙여지기도 했다. 가장 크게 충격받고 민감하게 반응한 나라는 미국이다. 과거 미국은 소련보다 과학 분야에서 훨씬 우월하다고 자부하고 있던 차에 1957년 10월 소련이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성공적으로 발사하자 미국 전체가 큰 충격에 빠졌던 기억이 있다. 중국의 딥시크는 AI 분야에서의 또 다른 스푸트니크 충격이라는 평가도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AI 국가경쟁력을 평가할 때마다 미국은 2위인 중국(65점)보다 월등하게 높은 1위(100점)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순위를 굳히기 위한 전략으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월10일 취임 후 3일 만에 향후 4년 동안 5천억달러(약 700조원)을 AI 인프라 조성에 투자하겠다는 ‘스타게이트’ 법인 설립 프로젝트도 발표했다. 그런데 여기에 ‘저비용 고성능’이라는 매력적인 타이틀을 내세운 딥시크의 출현은 미국의 열정과 자부심에 찬물을 끼얹는 효과를 가져왔다. H800마저 중국 수출을 금지해야 한다는 말도 나왔다. 챗GPT를 만든 오픈AI는 딥시크가 자사 AI 모델로의 출력 데이터를 무단으로 활용해 학습데이터로 사용함으로써 챗GPT의 핵심 기술을 추출했다는 의심을 가지고 사실 조사에 들어갔다. 다른 나라에도 딥시크의 불똥은 튀었다. 2년 전 챗GPT가 출시됐을 때 개인정보 위법성을 근거로 3주간 전면 사용 금지를 명령했던 이탈리아 개인정보감독청이 이번에는 딥시크에 동일한 조치를 내렸다. 개인정보 처리 실태에 대해 20일 이내에 소명하라고 통보하고 딥시크의 접근을 완전히 차단했다. 설 연휴 때문에 겉으로는 조용했던 우리나라이지만 700명 이상의 AI 전문가가 모여 있는 카톡방에는 수백개의 글이 올라왔다. 그중 인공지능 3위 G3 국가를 표명하는 우리나라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자성과 재촉의 목소리가 가장 컸다. 물론 매스컴의 보도 내용 가운데 사실과 달리 침소봉대한 부분도 있다. 지난달 20일 발표된 딥시크는 R1이라는 추론 모델이다. H800 GPU를 기준으로 278만시간, 총 55일 동안 훈련했으며 훈련비용은 겨우 558만달러밖에 들지 않았다는 놀라운 사실은 R1의 이야기가 아니다. R1의 토대가 되며 R보다 한 달 전에 나온 딥시크 V3 모델의 이야기다. R1은 V3-Base를 기반으로 기계 대 기계의 강화학습을 사용해 만든 추론형 모델이다. 따라서 기계가 출력을 생성하는 과정 ,그리고 이를 대상으로 강화학습을 진행하는 부분에도 엄청난 계산 과정이 추가로 들어가는데 이 부분은 완전히 생략됐다. 그런데도 가성비가 기존 AI 모델보다 현격히 줄었다는 점은 여전히 주목할 만하다. 그것이 ‘MoE’라는 최신 전문가 알고리즘을 전폭적으로 사용해 그런지, 아니면 저비용 고성능의 일반적인 AI 트렌드를 조금 일찍 앞서갔을 뿐인지는 좀 더 따져 봐야 한다. 딥시크 열풍에서 좀 더 생각해볼 부분은 AI의 품질이다. 세계 최초로 인공지능에 대한 규제 법을 만든 나라는 유럽연합이 아니라 중국이다. AI가 제공하는 답이 중국의 사회주의 체제 유지에 위협이 되는 부분을 걸러내도록 생성형 AI의 콘텐츠에 대한 규제를 중국이 시행한 것은 2023년 7월쯤이다. 당시 중국 기업들은 생성형 AI가 한국보다 훨씬 더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공개에 앞서 이 법을 기다려야 했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공개된 거대언어모델(LLM)이라는 명예를 중국이 네이버에 넘겨준 것도 이 법의 실행 시기와 관련 있다. 이 법에 적용해 당성(黨性) 검사를 최초로 통과해 공개된 중국 제품은 바이두의 어니봇(Ernie Bot)이었다. 그날이 2023년 8월30일이다. 네이버의 하이퍼 클로바 X 공식 발표일인 8월24일보다 6일 뒤의 일이다. 문제는 이러한 당성 검사가 AI의 품질, 특히 공정성에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기에 글로벌 AI로서는 부적합할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중국 기업 솔루션이므로 모든 이용자의 개인정보를 중국 서버에 저장하며 법적 분쟁도 중국 법원에서 진행한다는 이용 약관이 우리에게는 당연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이번 딥시크 열풍에서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며 자성함과 동시에 현실적으로 꼼꼼하게 분석하며 따져볼 사항이 아직 많이 남아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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