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10·15 부동산 대책의 딜레마

광풍(狂風)이 지나간 자리에 혹한(酷寒)이 찾아왔다. ‘영끌’과 ‘패닉바잉’의 함성이 뒤섞이던 부동산 시장은 이제 거래가 실종된 침묵의 계곡으로 변했다. 이재명 정부가 10·15대책을 통해 선포한 ‘부동산 불로소득 시대의 종언’은 자산 불평등에 신음하는 시대가 기다려 온 정의로운 선언이었다. 지난 10년간 노동의 가치는 조롱당했고 아파트 가격은 평범한 시민의 삶을 옥죄는 족쇄가 됐다. 그 비정상적 열병을 끊으려는 시도, 그 방향 자체를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투기적 관성에 제동을 거는 것은 곪아 터진 환부를 도려내는 외과수술에 가깝다. 하지만 선한 의도가 늘 선한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투기 수요를 박멸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는 시장 생태계의 순환을 멈추게 했다. 바이러스를 잡기 위해 혈류까지 막아 버린 셈이다. 서울 외곽과 수도권 중저가 단지에서는 퇴로를 잃은 매도자와 진입로를 찾지 못한 매수자의 탄식이 메아리친다. 한국부동산원 통계를 보면 서울 아파트 매매 거래량은 대책 이후 약 75% 감소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돈맥경화다. 주요 시중은행의 주택담보대출 신규 취급액은 9월 대비 40% 이상 급감했고 승인 거절률은 역대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대출이라는 마지막 사다리가 걷어차이자 청년과 신혼부부의 ‘내 집 마련’은 신기루가 됐다. 평범한 실수요자마저 잠재적 투기꾼으로 오인받는 이 풍경은 정책이 지향한 ‘안정’이 아니라 모든 흐름이 멈춰버린 ‘정지(停止)’에 더 가깝다. 규제의 강도보다 위험한 것은 ‘정책의 요동’이다 문제의 근원은 시장에 각인된 ‘학습된 불신’이다. 한국의 부동산 정책사는 ‘규제 강화→시장 냉각→규제 완화→시장 과열’의 채찍 효과(Whiplash)로 점철돼 왔다. 정책의 일관성이 무너지면 시장 참여자들은 다음 정권의 정책 변화를 예측하며 움직인다. 이재명 정부가 진정 싸워야 할 적은 투기세력의 탐욕이 아니라 이처럼 깊게 내재한 ‘정책 불신의 병리’ 그 자체다. 정부가 제공해야 할 최고의 공공재는 ‘예측 가능성’이다 정부가 시장을 완벽히 통제할 수는 없지만 신뢰할 수 있는 규칙의 언어는 만들 수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더 강한 규제’가 아닌 ‘흔들리지 않는 시간표’다. 정권의 임기를 뛰어넘는 ‘부동산 정책 5개년 로드맵’을 제시하고 그 약속을 사회적 계약으로 지켜내야 한다. 이를 통해 시장 참여자들이 미래를 설계할 최소한의 좌표를 확보할 때 비로소 흩어진 신뢰가 복원될 것이다. 10·15대책이 강력한 의지의 산물이었다면 이제 필요한 것은 섬세한 감각의 정책이다. 모든 연주자에게 똑같은 악보를 강요하는 지휘자는 불협화음만 만든다. 투기적 수요에는 단호한 잣대를 들이대되 생애 최초 주택 구매자와 장기 무주택 서민에게는 담보인정비율(LTV),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의 숨통을 틔워주는 ‘핀셋형 안전장치’를 정교하게 설계해야 한다. 예컨대 부부합산 소득 1억원 이하, 주택가격 6억원 이하의 생애최초 구입자에게 LTV 한도를 기존보다 10~20%포인트 상향하고 정책모기지와 연계해 초기 3년간 고정금리, 전매제한을 조건으로 지원하는 식이다. 투기를 막는 것은 국가의 책무이지만 평범한 시민의 희망까지 막는 것은 국가의 역할이 아니다. 이재명 정부의 나침반은 올바른 방향을 향하고 있다. 그러나 거친 파도를 헤쳐 나가려면 나침반만으로는 부족하다. 속도계와 수심계를 함께 살피는 노련한 항해술이 필요하다. 결국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가장 강력한 부동산 대책은 가격 통제가 아니라 신뢰의 설계다. 정부가 시장에 제공할 최고의 공공재는 흔들리지 않는 예측 가능성이다.

[세상읽기] 머무르며 이어지는 K-컬처

세계는 지금 한국을 ‘콘텐츠 강국’이라 부른다. 오늘날 K-문화는 한국을 넘어 전 세계인이 즐기고 공감하는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음악, 영화, 드라마, 게임 등 다양한 분야의 K-콘텐츠는 한국의 언어와 역사, 문화를 전 세계에 알리는 강력한 매개체로 기능하며 국가 간 상호 이해와 교류를 촉진하는 중요한 ‘소프트 파워’가 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이 흐름을 ‘전파’의 관점에서만 바라본다. 누가 더 많이 보고, 어디까지 퍼졌는가에 집중하는 동안 그 콘텐츠가 어떻게 이해되고 다른 문화와 만나 어떤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는가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부족하다. K-컬처의 지속가능한 성장은 단순히 무엇을 ‘만드는가’를 넘어 그 문화가 어떻게 ‘머무르고’, ‘관계로 이어지는가’를 고민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인천국제공항을 빠져나오는 외국인 손에는 대부분 스마트폰이 쥐어져 있다. 그들이 만나는 한국은 거리의 냄새나 사람들의 얼굴보다 먼저 알고리즘이 선별한 ‘K-컬처 클립’이다. 방문보다 콘텐츠가 앞서고 관계보다 소비가 먼저 재생되는 구조 속에서 공항과 테마파크, 쇼핑몰 등 화려한 공간은 늘어났지만 머물며 배우고 서로의 언어로 말을 건넬 수 있는 ‘문화적 머무름의 공간’은 아직 충분하지 않다. 이런 점에서 인천이 추진 중인 K-콘랜드 프로젝트는 매우 상징적이다. 인천국제공항 인근에 조성될 이 복합 콘텐츠 클러스터는 공연, 체험, 숙박이 결합된 ‘머무름의 인프라’를 지향한다. 세계인이 공항을 통해 한국을 처음 만나는 그 순간부터 콘텐츠를 ‘보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고 머무는’ 경험으로 확장하는 것이다. K-컬처가 관계로 전환되는 그 첫 번째 물리적 실험이 인천에서 시작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지역적 흐름은 최근 정부의 정책 방향과도 맞닿아 있다. 새 정부는 K-콘텐츠를 국가 전략 산업으로 육성하겠다는 비전을 내놓았다. 산업 규모를 300조원으로 확대하고 해외 진출과 국제 협력을 위한 규제 완화, 세제 지원, 아레나 건립 등을 추진하고 있다. 단순한 수출 산업이 아닌 한국의 정체성과 문화적 공명을 이끄는 ‘국가 전략 자산’으로 콘텐츠를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이다. 결국 이 두 흐름(인천의 공간 전략과 국가의 정책 전략)은 같은 목표를 향한다. K-콘텐츠를 ‘소비’에서 ‘공존’으로, ‘유행’에서 ‘지속가능한 관계’로 옮겨 놓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K-콘텐츠에 관심을 가진 젊은 인재들이 더 오랜 머무름과 배움을 목표로 오도록 하는 대학들의 K-콘텐츠 교육 허브로서의 역할도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특히 인천 송도에 자리한 인천글로벌캠퍼스 같은 시설은 미국 대학의 확장 캠퍼스를 넘어 문화적 머무름을 교류로, 교류를 K-컬처 전달로 확장시키는 공공외교 플랫폼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한국에서 출발한 이야기들을 다양한 국적, 인종,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공유하면서 K-콘텐츠라는 공통관심사로 서로 만나고 섞이는 가운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무엇인가를 함께 만들어 갈 수 있다. K-콘텐츠의 미래는 거대한 스크린이나 화려한 쇼케이스에만 있지 않다. 그것은 세계인의 마음속에 오래 머무르는 이야기, 그리고 서로를 이해하려는 그 문화적 관계 속에 있다.

[세상읽기] AI 거품, 다룰 줄 알아야

2000년 세계를 강타한 ‘닷컴버블’을 기억하자. 인터넷 기업 주가는 과도하게 상승했다가 그대로 붕괴했다. 기업은 방문자 수 등 과장된 지표로 고평가되고 인수합병을 더해 판을 키웠다. 주식시장에 들어온 돈은 흥청망청 쓰이고 연구개발과 투자로 이어지지 않았다. 주식시장은 대략 80%까지 폭락했다. 2008년 미국 ‘금융위기’도 거품이 빠르게 커졌다가 순식간에 빠진 경우다. 집값이 계속 오른다는 기대를 심었다. 금융기관은 돈을 빌려주며 집을 사게 했고 집을 담보로 잡은 파생상품을 팔아 고수익을 냈다. 집값 상승이 멈추고 급락하자 사람들은 빚을 갚지 못해 파산했다. 금융기관부터 도산해 세계경제를 연쇄적 위험에 빠뜨렸다. 거품이 뭔가. 상품 가치는 변함없는데 기대만으로 수요가 크게 늘면 가격이 급격하게 치솟다가 떨어진다. 상품 가격과 실재 가치의 차이가 거품이다. 최근 인공지능(AI) 거품론이 거세다. 반도체, 그래픽처리장치 등 인프라 수요에 힘입어 AI 기업 주가가 가파르게 올랐지만 그에 비례하는 실적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고성능 컴퓨팅시스템을 구축·운영하려면 막대한 비용이 든다. 오픈AI는 1조원 규모의 컴퓨팅시스템 구축을 목표로 자금 조달을 추진하고 있다. 다른 AI 기업도 다르지 않다. 시장과열 예측지수 중 버핏지수(미국 상장주식 시가총액÷국민총생산)는 최근 210%를 넘었고 닷컴버블, 코로나 직후의 유동성 수준을 상회했다. AI 시장에 자금이 흘러드는 방법은 주식 및 채권 구입, 공적 지원금, 출자 및 대출, 인수합병, 지분매각 등이다. 자금은 AI 생태계를 구성하는 기업, 금융기관 등 이해관계자 간에 순환되며 신용통화량을 키운다. AI 기업의 잠재력 확인이 쉽지 않다면 거품 위험이 커진다. 거품은 풍부한 유동성을 만들어 투자를 쉽게 한다. 연구개발과 각종 실험이 이뤄지고 상품개발을 촉진한다. 인재도 돈의 흐름에 따라 움직인다. 대외 홍보를 통해 고객 인지도를 높인다. AI 산업 전반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AI를 도입한 기업은 고용대체를 통해 비용을 줄인다. 인력을 재조정하고 직원이 도태된다. 고객도 AI 일상화를 받아들인다. AI를 활용하지 못하면 시대에 뒤떨어진다고 인식한다. 미국 트럼프 정부의 700조원 규모 스타게이트 프로젝트 선언 이후 세계가 군비경쟁 하듯 AI에 돈을 넣는다. 그런데 성과를 내지 못하고 거품이 터지면 어떻게 될까.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 오픈AI의 샘 올트먼은 AI 가치를 높게 평가하지만 작은 규모의 AI 기업이 수십억달러를 쉽게 유치하는 등 비정상적 과열을 경고했다. JP모건의 제임스 다이먼 회장도 10년 넘게 신용 중심 강세장이 이어지면서 과열 위험이 있다고 했다. AI 거품을 다룰 수 있어야 AI 강국이 된다. 큰 틀에서 거품을 예측하고 경고해야 한다. 막내 우유값을 아껴 장남만 도와선 안 되듯 대기업에 유동성이 몰리는 것도 좋지 않다. 대·중·소기업의 공존을 도모해야 한다. 잠재력 없이 거품에 올라탄 기업은 막아야 한다. 시기와 이슈에 따라 거품의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 불필요한 거품은 살짝 꺼뜨리는 것도 필요하다. 거품을 관리하지 못하면 투기 등 불법을 통해 부의 분배를 왜곡하고 불만과 저항을 야기한다. 거품을 악용, 유언비어 등 정보를 왜곡해 돈벌이를 하는 범죄도 막아야 한다. 거품이 시장의 통제 수준을 넘기 전에 양질의 AI 신상품을 만드는 등 실물경제를 끌어올려야 한다. 거품이 욕실을 가득 채우기 전에 목욕을 끝내야 한다.

[세상읽기] 시제 프리즘을 통한 세상 엿보기

우리의 일상생활 환경을 구성하는 다양한 분야를 시제, 즉 과거 현재 미래란 관점으로 바라보면 새롭게 보이기도 한다. 교육, 정치, 사법, 자치입법, 과학기술, 산업, 예술문화, 지방행정, 언론 등 우리 생활의 과거 현재 미래를 결정짓거나 그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각 분야에서 만들어지는 정책, 작품, 입법, 재판, 기술 등 콘텐츠도 담당자들의 가치관에 따라 과거형, 현재몰입형, 미래지향형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과학은 미래지향적이고 사법은 과거를 대상으로 하며 입법은 시제보다는 보편성을, 행정 중 일반행정은 미래형, 준사법행정은 과거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그 속성으로 평가돼 왔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사법 행위 중 단죄를 통해 유사 범죄를 예방하고자 하는 예방 효과와 재범의 가능성 유무만이 미래형 성격이고 나머지 사법 행위의 대상과 목적은 과거 행위와 현상에 대한 법적이고 상식적인 판단인 것이다. 국회와 지방의회 등이 주로 행하는 입법은 국민과 주민의 위임을 받아 국민과 주민의 현재부터 미래의 안전과 풍요를 위해 각종 사회적 약속을 만드는 것으로 미래형이어야 한다. 광의의 행정 중 수사 등 준사법 기능을 제외하면 과학기술 산업 등 경제도 지금부터 앞으로 잘살기 위한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고 안전관리 등 일반 행정은 물론이고 국방도 안전 및 국방의 대비태세를 강구하는 미래형이며 외교도 미래형이고 환경도 미래형이다. 그런데 전 세계적으로 각 분야의 바람직한 시제가 뒤엉켜 바람직한 대상에 대한 혼란이 가중되고 있고 방향 자체를 잃은 것처럼 보여 안타깝다. 국회는 입법을 통해 미래를 계획하고 바람직한 우리 사회의 미래상을 구현하기보다는 과거 현상 내지 행동에 대해 스스로 평가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즉, 과거 사회 현상이나 행동에 대한 정치적 옳고 그름, 이롭고 해로움의 평가는 국민이 선거 등을 통해 내리는 것이지 평가 대상인 정치인들이 입법 등을 통해 스스로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문제되는 것이다. 국회가 과거의 사법의 판단도, 현재의 사법의 판단도, 미래의 사법의 판단도 입법 등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미래를 만들어 달라는 국민의 뜻에 전념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 사법도 과거의 현상이나 행위에 대한 보편적 판단을 넘어 미래의 국회와 행정의 대응을 기대하거나 염려한 판단을 내린다면 국민이 직간접적으로 위임한 위임의 한계를 넘는 것일 수 있다. 행정이 과거의 행위 등의 진단에 너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면 당연히 미래를 설계하고 현재를 미래로 이끌 수 있는 시간과 여력이 부족해질 것이다. 그 행정을 이끌 국민의 대표자 임기가 정해진 경우에는 더욱 그럴 것은 자명하다. 정치가 미래시제여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다툼의 여지가 적다. 우리 정치권과 직업공무원집단이 우리 사회의 미래를 놓고 고민하고 경쟁해 그 성과를 토대로 심판인 국민의 판단을 받는 기본구도가 활성화됐으면 좋겠다. 정치권 인사도, 직업공무원도 스스로 최종 판단의 주체가 아니므로 상대방을 평가하고 심판하는 역할로 미래를 설계할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세상읽기] AI 교통 시스템

오전 5시30분, 스마트폰 알람보다 몸이 먼저 반응한다. 커피 향과 뒤섞인 체념의 공기 속에서 현관문을 나서는 경기도민의 발걸음은 무겁다. 이것은 단순한 출근이 아니다. 하루 중 가장 맑은 정신으로 빛나야 할 ‘골든타임’을 붉은 후미등의 행렬에 저당 잡히는, 매일 아침 반복되는 ‘소리 없는 전쟁’이다. 이 전쟁의 현실은 통계로 증명된다. 국토교통부 자료에 따르면 수도권 출퇴근자의 평균 통근 시간은 73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28분)의 두 배가 넘는다. 특히 경기도민은 하루 평균 86분을 길 위에서 보낸다. 이 수치는 연간으로 환산하면 약 540시간, 즉 22일 이상을 도로에서 허비한다는 뜻이다. 그 시간이 본래의 삶에 쓰였다면 누군가에게는 아이와 함께하는 저녁식사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도전을 위한 배움의 기회가 됐을 것이다. 이 지긋지긋한 체념의 교향곡을 멈추게 할 지휘자가 나타난다면 어떨까. 그 유력한 후보로 인공지능(AI)이 무대 위로 오르고 있다. AI 기반 교통 시스템은 단순히 신호를 바꾸고 길을 안내하는 수준을 넘어선다. 신호등, 버스, 지하철, 개인 차량, 심지어 보행자의 스마트폰까지 도시의 모든 교통 요소를 거미줄처럼 연결해 살아 숨 쉬는 ‘디지털 신경망’을 구축하는 것에 가깝다. 도시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처럼 실시간으로 호흡하고 반응하는 것이다. 세계적인 모범 사례로 꼽히는 싱가포르는 이미 도시의 혈관인 도로망에 막힘 없는 혈류를 공급하는 ‘인공 심장’을 이식했으며 이를 통해 교통 체증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을 연간 국내총생산(GDP)의 2% 이상 절감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 거대한 비전이 경기도의 도로망 위에 펼쳐진다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매일 출근길이 단 15분만 단축된다면 한 달이면 10시간, 1년이면 120시간에 달한다. 경기도 전체 노동인구 약 700만명을 기준으로 하면 절약되는 시간은 연간 8억4천만시간에 이른다. 이를 단순히 최저임금(2025년 기준 시급 1만30원)으로 환산하면 약 8조4천억원의 경제적 가치가 발생한다. 실제로 안양시가 최근 시범 운영하는 AI 기반 길 안내 키오스크는 데이터 기반 교통 서비스가 어떻게 우리의 삶에 실질적인 온기를 더하는지 보여주는 작은 증거다. 하지만 이 거대한 신경망을 가동시키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내놓아야 할까. 우리의 모든 움직임이 데이터가 될 때 그 데이터의 주인은 누구인가. 이는 먼 미래의 두려움이 아닌 세계 각국이 이미 씨름 중인 현실의 과제다. 유럽연합(EU)은 2024년 확정된 ‘AI 법안(AI Act)’을 통해 도시 교통망 같은 고위험 AI 시스템에 대해 투명성 확보와 인간의 감독 의무를 법제화했다. 독일, 프랑스 등은 지방정부 단위에서 알고리즘 영향평가(AIA)를 의무화하며 시민이 개발 단계부터 참여하도록 하고 있다. 경기도 역시 ‘AI 교통 혁신’을 도입하기 이전에 데이터 거버넌스와 디지털 격차 방지 대책을 선행해야 한다. AI가 효율성의 가면을 쓰고 특정 지역, 특정 계층을 소외시키는 ‘디지털 차별’을 막는 것은 기술 도입만큼이나 중요한 사회적 안전장치다. 결국 AI 교통 시스템의 도입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다. 중요한 것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철학으로 기술을 다룰 것인가에 대한 방향 설정이다. 경기도의 선도적 역할은 단순히 남보다 빨리 신기술을 도입하는 ‘속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도민의 삶과 안전, 존엄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방향’의 올바름에 있어야 한다. 우리가 AI에 내려야 할 궁극적인 명령은 ‘가장 빠른 길’을 찾아달라는 것이 아니라 ‘가장 인간적인 길’을 안내해달라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AI를 통해 더 빠른 도시를 원하는가 아니면 더 행복한 도시를 원하는가. 경기도의 아침이 이 질문에 대한 현명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되기를 기대한다.

[세상읽기] 지피지기 백전불태

미국과 협상할 때 상대측은 흔히 이렇게 말한다. “미국은 세계 최대 시장이자 최강국이잖아요. 결국 우리가 따라가야죠.” 하지만 현대 협상 이론의 원조격인 하버드 PON(Program on Negotiation)은 전혀 다른 시각을 제시한다. 그들이 말하는 협상 성공의 7요소 중 하나인 BATNA(Best Alternative to a Negotiated Agreement·협상 결렬 시의 최선 대안)에 따르면 협상력은 힘의 크기가 아니라 협상이 결렬될 경우 얼마나 현실적이고 실행 가능한 다른 선택지가 있는가로 결정된다. 이 관점은 적대적인 힘 겨루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호 의존하는 파트너 사이일수록 서로의 제약과 대안을 이해해야 신뢰를 쌓을 수 있고 서로 만족하는 협의에 이를 수 있다는 뜻이다. 최근 미국과의 협상에서 일본과 인도의 행보는 대조적이다. 일본은 비교적 일찍 미국과 협약에 서명했다. 그 결과 자동차 등 일부 품목의 관세가 15%로 조정됐지만 여전히 기존 세율보다 높아 국내 산업에 부담이 되고 있다. 투자금 사용처와 수익 배분에 있어서도 일방적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반면 인도는 ‘전략적 자율성’을 내세우며 미국의 시장 개방·관세 요구에 신중히 대응했다. 러시아산 석유 수입을 지속하고 농업·유제품 개방에도 소극적이었으며 미국의 최대 50% 보복관세에도 공급망 다변화(BATNA 강화)로 버텨 왔다. 그런데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모디 총리의 75번째 생일을 축하하며 통화를 나눈 뒤 양국 분위기가 달라졌다. 무역당국은 협상을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positive & forward-looking)이라 표현했고 미국의 관세 완화 가능성도 거론된다. 인도가 유지한 기조가 결국 협상 분위기를 바꾼 것이다. 이들의 행보에서 한국 역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9월 조지아주 현대·LG 전기차 배터리 공장 건설현장에서 미 이민세관단속국(ICE)이 대규모 단속을 벌여 수백명의 한국인 기술자들을 연행했다. 약 76억달러 규모의 투자, 수천개의 일자리가 걸린 프로젝트였기에 미국 내에서도 “외국기업 투자 신뢰를 스스로 무너뜨린다”는 비판이 나왔다. 협상 결렬의 대가가 미국에도 크다는 점이 드러난 장면이다. 또 미국은 최근 MASGA(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라는 이름으로 자국 조선업 재건 구상을 추진 중이다. 한국은 세계적 기술력과 숙련 인력을 기반으로 미국 내 조선소 현대화, 정비(MRO), 인력 양성, 부품 공급망 구축 등을 패키지로 제안했다. 이 협력은 어느 한쪽의 승리를 위한 게임이 아니다. 미국은 숙련 인력과 부품 공급망을, 한국은 안정적 투자 환경과 예측 가능한 제도(비자 등)를 필요로 한다. 서로의 BATNA를 이해하고 존중할 때 신뢰를 기반으로 서로의 이익 (Interests) 역시 존중하는 협의에 이를 수 있다. 한국은 흔히 미국과의 협상에서 ‘약자’라는 전제를 깔고 출발한다. 그러나 일본과 인도의 상반된 행보, 그리고 조지아와 MASGA 사례가 보여주듯 미국도 결코 무한한 대안을 가진 것은 아니다. 우리가 가진 기술력과 투자 역량은 미국에도 꼭 필요한 카드다. 따라서 한국은 BATNA를 포함한 요소들을 두루 고려한 총체적 전략을 세워 보다 유연하고 여유롭게 협상 테이블에 임할 수 있다. 협상력은 힘의 크기가 아니라 준비된 대안에서 나오며 상대와 나의 BATNA를 정확히 이해할 때 대등한 파트너십이 가능하다.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 협상도 예외는 아니다.

[세상읽기] 법치의 근본, 법학 발전 나서야

무더운 여름이 끝나면 수확의 계절이 온다. 뿌린 것 없이 수확을 기대하긴 어렵다. 법률시장은 어떤가. 옛날엔 평생을 통틀어 소송 등 법률 분쟁을 경험하기 쉽지 않았다. 지금은 아니다. 고소고발로 수사기관을 드나들거나 법원에서 형사재판을 받고 채권채무, 임대차, 손해배상 등 민사재판에 시달린다. 마음고생은 덤이다. 법은 제대로 역할을 하고 있는가. ‘존재양식의 탐구’, ‘법의 제조’ 등의 저술을 남긴 철학자 브뤼노 라투르의 생각을 보자. 법은 갈등하고 이탈하는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분야의 제도를 다시 연결한다. 느슨하지만 분산되지 않게 공동체를 지키고 활력을 유지한다. 법은 반복적으로 시행되면서 형식과 위상이 강화된다. 종교처럼 강력하진 않지만 국민을 구속하는 핵심 장치가 된다. 자본주의는 이성과 과학을 수단으로 인공지능 등 디지털 세상으로 나아간다. 기존의 이해관계는 급변하고 복잡해져 갈등을 빚고 분쟁을 일으킨다. 특정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법의 제정, 개정, 폐기가 빈번하면서 법의 위상이 흔들린다. 국회 의결 등 요건을 갖추지만 법의 가치는 훼손되고 공정성이 흔들린다. 국민의 지지를 받은 권력기관조차 법 위반과 악용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않다. 바야흐로 법치주의의 위기가 오고 있다. 처음 법학교육이 등장한 후로 대학은 법학을 연구하고 정부는 사법시험을 통해 법조인을 배출했다. 법학교육은 법의 근본원리에 더해 타당성, 당위성, 가치와 한계를 논했다. 법률실무는 구체적 분쟁에서 해결책을 제시했다. 2009년 법학전문대학원이 설립됐고 2025년 5월 기준 변호사만 4만명을 넘어선다. 판검사를 합치면 5만명에 이른다. 실무 중심으로 법학교육이 발전하면서 법의 본질과 원리 탐구 등 법학 연구가 정체되고 있다. 정치에선 정적 제거와 지지층 결집을 위해 법을 악용한다. 법학자, 변호사만 아니라 일부 판검사마저 법률기술을 창안해 편을 가른다. 경제에서도 시장 우위 및 경쟁 기업을 제거하기 위해 규제기관 제소와 형사 고소고발 등 분쟁 절차를 남용하고 있다. 정치적 타협과 건전한 경쟁은 뒷전이다. 법학의 고민과 역할을 되살려야 한다. 법률실무도 업의 본질을 생각해야 한다. 의뢰인의 이익을 위해 상대방의 빈틈이나 논리를 찾아 이기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법의 근본적인 목적이나 본질, 원리를 먼저 찾아야 한다. 법학전문대학원이 법술전문대학원이 될 순 없다. 법과대학도 마찬가지다. 교수가 정치권과 기업에 줄을 대고 해외 사례, 입법례를 끌어들여 입맛에 맞는 논리를 만든다. 법학의 본질에 충실하다고 볼 수 있을까. 도덕은 타인의 자유를 위해 나의 자유를 줄이는 미덕이고 법은 타인의 자유와 나의 자유의 경계를 짓는 일이다. 법률가는 어떻게 해야 할까. 라투르는 근대인을 이해관계에 함몰되지 않고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현대 법률가에게 적용해도 틀리지 않다. 법학자 오토 마이어는 확고한 법 이념 없이 법의 통일적, 체계적 해석과 집행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로스코 파운드는 뭐라고 했을까. 법은 안정돼야 하지만 정지해선 안 된다고 했다. 법학자와 실무자 간 지루한 갈등을 끝내야 한다. 법치주의의 근본을 세운다는 목표로 법학의 공동연구와 제도 개선 등 법학 발전에 나서야 한다. 법학이 바로 서야 법치가 바로 서고 대한민국이 바로 선다. 그것이 국민의 바람이다.

[세상읽기] 선출대리인의 범인공지능화

우리 사회(국가)에서는 수많은 구성원이 각자가 처한 환경에 따라 다양한 욕구를 갖게 되고 이를 채워줄 자원이 한정돼 있어 불가피하게 때론 경쟁하고 때론 협력하며 생활하고 있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서로 협력해 파이를 크게 하는 방법에 관해 고민하기도 하고 그 파이를 정의롭게 나눠 갖는 방법론에 관해 대립하기도 한다. 모두 자연스러운 사회현상이다. 우리 사회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파이를 크게 하거나 나누는 방법에 관해 고민하고 세부적인 약속을 만들고 지키게 하는 일에 전념하는 스태프(대리인)와 여러 장치(국가의 여러 기관)는 필수적이다. 이런 스태프와 장치들은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이익이 돼야 하고 최소한 그런 것으로 인식될 수 있도록 구성되고 운용돼야 한다. 파이를 크게 하거나 나누는 등에 관한 우선순위와 세부 내용에 관한 방법론상의 차이를 차이로 구성원에게 지지를 호소해 오던 선출대리인들의 모습이 그러했다. 이들 선출직 대리인들은 통상 정당, 각종 선출직 공무원 등 간접민주주의를 구현하는 민주주의제도의 불가결한 존재들이다. 보수와 진보로 크게 나뉘어 경쟁하던 (잠재적) 선출대리인들의 호소가 당시에 사회구성원들이 처한 여러 환경에 따라 사실상 번갈아 선택된 기본적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최근 이러한 사회구성원의 선출대리인들의 호소 방법이 장기적으로든 단기적으로든 사회구성원 전체의 일반적인 이익을 위한 방향과 역행하는 방향으로 변해 가고 있다. 보이스피싱처럼 때론 감언이설과 때론 불이익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하는 방법으로 자신들의 선출대리인적 지위를 맹목적으로 더욱 공고히 하면서도 대놓고 구성원들의 싸움을 부추기고 아예 구성원의 감정적 이익 외엔 관심을 포기하곤 한다. 선출대리인의 대리인 지위 획득 방법이 전통적인 구성원의 이익 증대 방법에 호소해 선택받는 것이 아닌 경쟁자를 경쟁 대상에서 배제시키는 비생산적 방법으로 좀 더 손쉽고 영속적인 방법으로 바뀌어 가고 있고 결국 사회구성원 전체의 이익 증대에 긍정적이지 않게 됐다. 사회의 영속적 유지와 범발전을 위해 발전에 병목 역할을 하는 기득권을 타파해야 할 선출대리인들이 맹목적으로 기득권화해 마치 인간을 지배하는 범인공지능(AGI)처럼 돼가고 있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선출대리인들의 맹목적 기득권화를 견제해 왔고 예방해 왔던 시민단체는 확연히 그 역할이 줄거나 정치세력에 흡수됐고 상호 견제할 정치세력들도 그럴 형편이 못된다. 사회구성원 중 일부가 가해자가 될 경우 구성원의 매복 대리인인 경찰 검찰 법원이 우선 나서 해결하고 선출대리인은 제도 개선을 하는 등의 역할을 하고 선출대리인이 해를 끼칠 경우 사회구성원이 다음 대리인의 자격을 주지 않거나 매복 대리인인 경찰 검찰 법원이 나서 해결하는 것이 기본적 시스템이다. 그런데 이런 기본적인 시스템이 급격히 망가지고 있다. 우리 사회는 과거에 매복 대리인이 사회구성원의 이익을 벗어나 AGI처럼 행세한 잘못된 역사를 시정해 왔는데 이젠 선출대리인이 사회 전체의 이익에 무관심하거나 AGI가 돼 매복 대리인을 해체하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강화하는 위기를 맞고 있다. 선출대리인과 관련된 이러한 현실은 선출대리인이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장기적으로 사회 전체 구성원의 이익 증대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상호 갈등을 양산하며 민주주의제도의 불신마저 초래할 것이다.

[세상읽기] GTX 갈등이 던지는 메시지

수도권 광역급행철도(GTX)를 둘러싼 갈등은 단순한 노선 다툼이 아니다. 김포와 하남시민들의 외침은 “불편하다”는 푸념이 아니라 오랜 배제와 박탈의 기억이 응축된 언어다. 철도는 이제 교통망을 넘어 도시의 존엄과 권리를 가르는 민주주의의 시험대가 되고 있다. 김포 인구는 2015년 35만명에서 2024년 48만명으로 37% 늘었지만 서울 직결 교통망은 제자리였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김포시민의 평균 통근시간은 수도권 평균보다 25분 길고 출근 시간대 만차율은 120%를 웃돈다. 하남도 인구 30만명을 돌파했지만 광역 인프라는 늘 늦었다. 지친 시민들이 정치인에게 “너도 한번 타봐라”라며 던진 챌린지는 풍자가 아니라 분노와 냉소가 결합된 집단 정체성의 발현이었다. 정부는 “AI 데이터로 최적 노선을 설계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데이터는 지도를 그려줄 수는 있어도 동의를 확보해주지는 못한다. 효율은 설득을 대신할 수 없다. 국가 예비타당성조사와 갈등관리 연구는 이미 여러 차례 경고해 왔다. 숙의 없는 결정은 지연과 재설계, 소송으로 이어지며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발생시킨다. 위례신사선 경전철의 경우 주민 반발로 공정이 멈춰 수년이 지체됐고 그 과정에서 추가 재정 부담도 불어났다. 반대로 초기 3개월의 숙의는 3년짜리 재설계를 줄인다. 참여는 지연이 아니라 절감이다. GTX 갈등은 단선적이지 않다. 소외된 도시는 분노하고, 수혜 도시는 집값 급등과 임대료 불안에 흔들리며, 경유 도시는 개발 압력에 지친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GTX 예정지 일부 역세권은 최근 3년간 20~30%의 가격 상승률을 기록했다. 일부 수혜 지역은 역세권 과열과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원주민이 밀려나는 역설을 겪고 있다. 부천, 의정부, 용인 같은 경유 도시는 “또 주변부로 밀려난다”며 불만을 터뜨린다. 분노·불안·피로가 교차하는 풍경, 이것이 GTX 갈등의 본질이다. 해외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일본 신칸센에서 제외된 지역은 수십년째 “버려졌다”는 감정을 토로한다. 프랑스에서는 TGV 노선에서 빠진 도시가 ‘2등 시민’ 취급을 받는다. 그러나 프랑스는 제도로 대응했다. 1995년 ‘바르니에법’으로 설립된 국가공론위원회(CNDP)는 대형 인프라 사업에 공론 절차를 의무화했다. 사업자는 정보를 시민에게 공개해야 하고 정부는 제기된 쟁점에 답해야 한다. CNDP는 매년 수십건의 공론 절차를 운영하며 실효성을 입증하고 있다. 영국 HS2, 독일 슈투트가르트21도 시민 공론화를 통해 갈등을 흡수했다. 신뢰는 결과가 아니라 절차에서 비롯된다. 우리도 절차로 신뢰를 세워야 한다. 무작위 추첨으로 구성된 시민배심원단, 주민·전문가·시민단체가 함께하는 상설 협의체, 지역별 투자 격차를 수치화한 공정성 지표가 필요하다. 최근 5년간 수도권 광역교통망 투자액의 절반 이상이 서울·강남권에 집중됐다는 국토부 자료는 왜 소외지역의 불만이 폭발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공정성 지표는 ‘도어 투 도어 평균 통근시간 단축률’과 ‘대중교통 접근성 개선 폭’을 수치화해 공개하는 방식이다. 효율과 공정이라는 두 바퀴가 함께 굴러야 신뢰가 선다. 이 제도는 실행도 가능하다. 단기적으로는 국토부 고시로 ‘광역교통 공론 절차 지침’을 마련할 수 있다. 중기적으로는 국회가 교통시설특별법을 개정해 시민 참여의 법적 근거를 명문화해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수도권광역교통위원회에 상설 협의체를 두어 노선·보상·생활SOC를 원스톱으로 조정해야 한다. 시민배심원단 예산은 전체 타당성 조사 비용의 1~2%면 충분하다. 사회적 비용 절감을 생각하면 가장 값싼 보험이다. 정치적 의지만 있다면 내년 예타·기본계획 착수 사업부터 적용할 수 있다. GTX는 선거철마다 단기 공약으로 소비돼 왔다. 표 계산 정치가 공론을 대체해온 결과 갈등의 골은 더 깊어졌다. 그러나 GTX의 성공은 교통 편의를 넘어선다. 시민이 “우리 의견이 정책에 반영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때 그것은 곧 사회적 자본인 신뢰로 전환된다. 결국 GTX 갈등은 우리에게 묻는다. 정책은 지도 위에 선을 어디에 긋느냐가 아니라 시민 마음속에 어떤 선을 그을 것인가의 문제다. 정치가 이 사실을 외면한다면 철도가 닿지 않는 곳에 남는 것은 빈 땅이 아니라 깊은 상처일 것이다. GTX는 교통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문제다.

[세상읽기] 문화예술 소비, 또다른 불평등의 축

잘 만들어진 문화예술작품은 단순한 즐거움을 넘어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을 흔들기도 한다. 주인공의 서사에 몰입하며 그의 기쁨과 고통에 공감하고 가슴을 울리는 대사 한 줄, 눈물이 핑 도는 노래 한 곡에 복잡한 마음을 정리하고 공연이 던진 질문이 머릿속에서 오래 남아 내 행동이 변화하기도 한다. 단순히 기분 전환을 넘어 삶을 나와 타인에 대한 이해를 넓히며 삶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 바로 문화예술이 가진 큰 힘이다. 마음속에 오래 남는 정서적 자산이 형성된다. 한국인은 2023년 기준 약 55.3%가 연간 문화예술, 스포츠 등을 관람했고 이들의 1인당 평균 관람 횟수는 7회로 나타났다. 연령대별로는 30대가 연간 약 26만5천원으로 가장 많은 지출을 하고 70대 이상은 약 8만8천원으로 나타나 연령이 낮을수록 문화예술에 대한 접근성이 비교적 높았다. 이는 접근성과 경제적인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20~30대는 공연, 콘서트, 전시 등 경험형 소비를 선호하고 40대는 자녀들과 함께 주로 가족 단위의 관람이나 체험을 많이 한다. 60대 이상은 주로 지역 문화 행사에 많이 참여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문화예술 분야 소비에는 경제력이 큰 영향을 미친다. 프랑스 사회학지 피에르 부르디외는 문화자본의 개념을 들어 경제자본과의 관계를 설명했다. 문화자본이란 개인이 가진 지식, 교양, 취향, 예술적 안목, 언어 구사력 등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상징적 자산을 의미하는데 이는 태생적으로 또는 교육과 환경에 따라 후천적으로 길러지기도 한다. 어린 시절부터 오케스트라 연주를 듣고 미술관과 박물관을 자주 찾으며 해외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환경은 경제적 여유가 있는 특정 계층에 국한된다. 문화적 경험의 폭은 경제력에 기초할 수 있다. 즉, 경제력이 개인의 물적 토대라고 한다면 문화자본은 그 토대 위에 축적되는 보이지 않는 자산인 것이다. 문화예술은 사회 구성원 모두가 향유하는 공공재적 성격을 갖는다. 클래식 공연이든 온라인에서 제공되는 전시회든 길거리 버스킹 공연이든 한 사람이 감상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배제되지 않는다. 예술을 통해 얻는 감동과 공감은 개인적 만족을 넘어 사회적 연대감을 강화하고 사회 문제를 공유하며 성찰하게 만든다. 따라서 문화예술을 특정 계층만의 전유물로 두는 것은 일면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일이다. 최근 뮤지컬, 콘서트, 스포츠 경기 등에서 나타나는 고가 티켓 현상은 눈여겨볼 만하다. 일부 인기 공연의 경우 20만원이 훌쩍 넘는 좌석과 해외 스타 내한공연이나 대형 뮤지컬은 30만원대가 흔하게 되면서 웬만한 가계에는 큰 부담이 되고 있다. 고가 티켓이 사회 전반의 문화자본 축적에 미치는 파급효과는 결코 가볍지 않다. 경제력이 문화자본의 접근성을 제한하고 문화예술이 돈 있는 사람의 전유물이 되는 순간 사회의 문화적 다양성과 포용성은 약화된다. 예술의 본질이 감동과 공감의 공유에 있지만 티켓 가격이 오를수록 공연은 특정 계층만의 네트워크 공간으로 변한다. 고가의 티켓이 고급 문화의 상징수단으로 기능하는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으나 사회는 예술을 특정 계층의 지위재가 아니라 모두의 자산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프랑스는 국가와 제도가 문화자본 형성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대표적인 나라다. ‘예술은 곧 국가 정체성’이라는 인식과 함께 문화자본이 단순한 개인적 취향이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 투자와 정책을 통해 제도화하려는 구조를 갖고 있다. 특히 초·중등 교육과정에서 미술, 음악, 연극 교육을 의무화해 어릴 때부터 예술적 감각을 형성할 수 있도록 하고 중상류층 가정에서도 미술관, 콘서트, 오페라 등 문화체험을 일상화한다. 이뿐만 아니라 박물관, 미술관 등에서는 학생, 청년에 할인제도나 무료 입장을 통해 ‘모두를 위한 문화 정책’을 현실화하며 계층별 문화 접근의 격차를 줄이려는 제도적 장치를 확보하고 있다. 기술이 사회를 움직이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인간을 온전히 인간답게 만드는 힘은 문화예술에 있다. 문화예술이 사회적 불평등을 가르는 축이 아니라 누구나 자신의 정서를 다듬고 삶을 깊게 만드는 장치로서 기능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세상읽기] 담뱃값, 공동체의 무게

흡연은 개인의 선택일까, 사회의 책임일까. 담뱃값 인상 논쟁이 불붙으며 이 물음이 새삼 우리 앞에 던져지고 있다. 최근 정은경 보건복지부 장관이 인사청문회 경과보고서에서 담배 가격 및 비가격 정책을 점검하고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밝히면서 규제 논의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특히 2015년 이후 10년 가까이 동결된 담뱃값은 이제 조정의 기로에 서 있다. 전자담배와 가열담배 등 신종 제품의 확산도 재점검의 필요성을 키우고 있다. 우리나라 성인 남성 흡연율은 2023년 기준 30.1%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20%를 크게 웃돈다.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2022년 흡연으로 인한 직간접 사회경제적 손실은 연간 약 13조6천316억원에 달한다. 이는 질병 부담, 생산성 저하, 의료비 증가 등의 형태로 건강보험 재정에 영향을 미친다. 문제는 이러한 구조가 오랫동안 방치됐다는 점이다. 국내 담뱃값은 한 갑 4천500원으로 OECD 평균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호주 4만5천원, 프랑스 2만원, 미국은 1만1천원 수준인데 한국은 현저히 낮다. 낮은 가격은 흡연을 쉽게 하게 만들고 특히 청소년과 취약계층은 폐해에 더 쉽게 노출한다. 흡연이 생활의 일부가 되는 과정을 방치하면 금연은 개인의 결심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렵다. 정책 개입이 없다면 흡연은 ‘선택의 자유’라는 말 뒤에 습관화의 구조로 남는다. 사회적 정의와 공평성이라는 행정적 당위성으로 국민건강보험공단은 2014년 담배회사를 상대로 530억원 규모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은 30년 이상 또는 하루 한 갑 이상 20년 이상 흡연한 고위험군 3천465명의 진료비에 대해 공단이 지급한 치료비 전액을 청구하는 형식이었다. 이는 단순한 금전적 보상을 넘어 담배로 인한 의료비 전가 구조를 바로잡으려는 사회적 대응이자 공정한 제도 적용의 시도였다. 1심 재판부는 흡연과 폐암 간 인과관계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공단의 청구를 기각했다. 그러나 항소심에서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공단은 흡연자가 폐암에 걸릴 위험이 비흡연자보다 54배 높다는 과학적 근거를 제시했고 대한폐암학회와 세계보건기구(WHO)도 공식 의견서를 통해 이를 지지했다. 또 150만명이 지지 서명에 참여하면서 이 소송은 법정 안팎에서 공공의료의 정의를 다시 돌아보게 하는 흐름으로 확산했다. 물론 흡연자의 선택과 인권은 존중돼야 한다. 흡연은 합법이며 개인의 자유는 보호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현재 논의의 초점은 흡연이 쉽게 선택되고 반복되도록 만드는 구조를 사회가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있다. 해법은 혐오나 낙인이 아니라 사회적 조건을 재설계하는 데 있다. 가격 정책으로 확보되는 재원은 금연치료 접근성 확대, 취약계층 지원, 청소년 예방 교육에 재투자돼야 한다. 담배는 단순한 기호품에 머물지 않는다. 그 중독성과 사회적 피해를 고려할 때 공공의 건강을 위한 사회적 개입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미국은 1998년 담배회사들과 합의해 220조원, 캐나다는 올해 3월 약 33조원의 배상에 합의하며 담배회사의 책임을 법적으로 물었다. 우리는 아직도 흡연은 개인의 선택이라는 낡은 프레임에 머물러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 담뱃값 1만원은 단순한 가격 인상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가 공공의 건강과 삶을 보장할 수 있는 합의점에 대한 물음이다. 이 조용한 질문은 이제 더는 외면할 수 없는 사회적 응답을 기다리고 있다.

[세상읽기] 생성형AI로 투자 유치하기

숨 쉬듯 투자 유치를 하고 싶다. 생성형AI로 투자 유치에 나선 초기 스타트업 대표가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다. 그러나 결혼하듯 투자금을 확보한다. 어렵게 시드(Seed) 투자 유치에 성공해도 후속 투자 유치는 날숨 내뱉는 속도로 실패한다. 시리즈A까지 간신히 도달했어도 상장(上場)까지는 코끼리가 냉장고에 들어가는 기적의 연속이다. 국가의 안위까지 흔든다는 대단한 위상의 생성형AI기술로 왜 악전고투를 할까. 늘 성공에는 놀랍게도 디테일에 답이 있다. 투자 유치는 어떨까. 화룡점정은 피칭(pitching)에 있는 것일까. 투자심사역에게 투자해달라고 당당하게 발표한다. 보기 좋은 모습이다. 그런데 발표 시간 대부분을 생성형AI 알고리즘에만 할당해 강변했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고 믿는 것일까. 설득은 종교가 아니라 과학이다. 다수의 투자심사역은 생성형AI기술을 AI전공자나 AI연구자처럼 알지 못한다. 설사 안다고 해도 스타트업이 독창적으로 주장하는 생성형AI를 찰나에 알 수 없다. 투자심사역이 정말 알고 싶은 것은 ‘놀라운 기술의 개론 수업’이 아니라 ‘경쟁 대비 기술 차별화와 고객 가치의 증명’이다. 듣는 사람의 욕구를 외면한 채 말하는 사람의 요구로만 일방통행을 거듭한다면 개떡은 그냥 개떡으로 용두사미가 된다. 파레토 법칙은 이럴 때 활용해야 한다. 애정 어린 AI기술을 얼마나 자랑하고 싶을까. 그러나 과유불급은 화를 자초한다. AI기술은 발표시간의 10~20% 이내로 힘들겠지만 통제해야 한다. 고군분투에는 이렇듯 사소하지만 중대하고 결정적인 여러 이유가 있겠다. 발본색원은 이럴 때 쓰는 말이다. 발표가 끝나면 어김없이 Q&A가 찾아온다. 마치 쿠키 영상(post-credits scene) 정도의 가치라고 할까. 할루시네이션(Hallucination)은 어떻게 처리하세요? 토큰(Token) 최적화는 어떻게 하세요? 이러한 질문에 답변을 사전 준비 없이 대충 한다면 어떻게 될까. 큰 오판이다. 진짜 발표는 Q&A다. API(Application Programming Interface)를 제공하는 업체가 해결할 문제죠. 토큰 비용도 마찬가지죠. 이렇게 답변한다면 투자심사역은 뭐라고 할까. 빅테크의 정책에 운명이 결정되는군요. 곧바로 게임 오버. 그러면 어떻게 답변하라는 말이냐. 할루시네이션은 데이터가 가장 큰 이슈죠. 내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데이터셋을 갖추고 있습니다. 또한 외부에 믿을 만한 데이터셋도 연계하고 있죠. LLM(Large Language Model)이 답변을 생성하기 전에 이러한 데이터셋에 접근하는 RAG(Retrieval-Augmented Generation) 기술을 독자적으로 적용하고 있습니다. 허용된 응답 내에서만 답변을 생성하도록 가이드레일(Guardrails)이 있죠. 여기에 좀 더 살을 붙인다면 어떨까. 토큰 최적화는 API 호출 최소화와 토큰 효율화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자체 캐싱 시스템이나 프롬프트 압축 기술 그리고 경량화 모델 활용 등 전방위적인 솔루션을 겸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살짝 몇 가지 얹히면 좋지 않을까. 듣고 싶은 답변은 나만의 독보적인 기술력이 있다. 그 기술이 고객 문제를 해결한다. 그 기술이 시장 크기와 성장 추세를 확대하고 강화한다. 그 기술이 경쟁 구조와 경쟁 강도를 유리하게 전환한다. 결국 독점적 포지셔닝으로 높은 기업가치를 창출한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 남의 돈을 우리의 호주머니에 넣으려면 ‘남’을 공부하고, ‘남’이 사는 자본시장을 연구해서, 마침내 내가 ‘남’이 되면 된다. 그때야 비로소 생성형AI는 우리의 밥그릇이 된다.

[세상읽기] 민주주의가 만든 ‘케이팝’

2020년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으로 촉발된 ‘블랙 라이브스 매터(Black Lives Matter)운동’에서 예상치 못한 주역이 등장했다. 케이팝 팬덤이었다. 미국 경찰이 #blacklivesmatter 해시태그를 시위대 추적에 활용하자 팬들은 자신이 응원하는 연예인 영상에 #BLM을 무작위로 삽입해 감시 체계를 교란했다. BTS가 공식적으로 BLM운동을 지지하며 100만달러를 기부했고 팬덤은 하루 만에 같은 금액을 추가 기부했다. 이는 단순한 팬 활동을 넘어선 창의적 디지털 행동주의였다. 케이팝 팬덤은 차별과 무시에 대해 가장 조용한 연대로 가장 분명하게 목소리를 냈다. K-문화의 전 세계적 성공을 설명할 때 대다수는 재능, 기술, 세계화, 정부 정책 등을 꼽는다. 맞는 말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한국 사회가 발전시켜온 민주주의가 성공의 배경이다. 민주주의가 강해야 문화가 풍요로워지고 그 문화 속에 민주주의는 더욱 탄탄해진다. K-문화가 증명해낸 세계사적 교훈이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한국사회는 표현의 자유, 자발적 조직, 정치에 대한 높은 관심과 비판 의식이 일상화된 공간이 됐다. 이 민주주의의 공기는 콘텐츠를 소비하는 방식뿐만 아니라 콘텐츠를 창작하는 문화에도 스며들었다. 시민은 더 이상 단순한 수용자가 아니다. 함께 기획하고, 감상하고, 평가하는 문화의 실질적 주인이 됐다. K-문화의 성공은 획일화를 극복한 다양성의 승리다. 이 배경에는 김대중 정부의 감각적 전략이 있었다. 1998년 외환위기 직후 ‘문화산업을 제2의 성장엔진’으로 선언했다.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 정책이 자유를 키웠고, 그 자유는 콘텐츠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문화 다양성이 일상화될수록 민주주의의 다양성은 넓어진다. 다양한 목소리가 존재할 수 있는 사회에서 다양한 문화 표현이 가능해지고 이는 다시 민주주의를 풍성하게 만든다. K-문화가 보여주는 창의성과 비판정신, 포용성은 우리 국민이 일궈낸 다원 민주주의의 결실이다. K-문화의 또 다른 특징은 현실을 회피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직시하고, 고발하며, 대화를 유도한다. ‘오징어 게임’과 ‘기생충’은 자본주의가 만든 불평등한 계급 구조를, ‘더 글로리’는 차별과 냉소를, ‘택시 운전사’는 한국 현대사의 고통을 다룬다. BTS는 자기 존중과 다양한 연대의 가치를 노래한다. 최근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은 토니 어워드 6개 부문을 석권했고 ‘케이팝 데몬헌터스’는 넷플릭스 공개 4일 만에 41개국에서 1위를 차지했다. 드라마는 질문하고, 영화는 고발하며, 음악은 위로하고, 팬덤은 행동한다. K-문화는 시민이 써 내려가는 민주주의의 서사 그 자체다. 2024년 12월3일 불법 계엄 시도는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이었다. 한 사람의 어리석은 판단이 K-문화의 풍요로움을 파괴하려 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국민이 막아냈다. 촛불의 광장에서 민주주의와 K-문화는 융합하며 희망의 빛을 발산했다. K-문화는 이제 단순한 문화 수출을 넘어 민주주의의 새로운 언어가 됐다. 전 세계 젊은이들이 K-문화를 통해 자유, 다양성, 연대의 가치를 경험하고 있다. 자국의 민주주의를 더욱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K-문화의 미래는 산업 전략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감수성을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에 달려 있다. 문화가 강해야 민주주의가 강하고, 그 강함의 바탕은 다양성이다. 문화 다양성은 민주주의의 다양성으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더 풍부한 문화를 낳는다. K-문화가 보여준 이 선순환이야말로 미래 민주주의의 핵심 동력이다.

[세상읽기] 결혼, 그 거대한 소비의식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성인, 입학, 졸업, 결혼, 죽음에 이르기까지 삶의 다양한 전환점을 통과할 때마다 사회적으로 ‘승인’받는 과정을 거친다. 우리는 이를 통과의례 (Rite of Passage)라 부르며 인간사회에 깊이 뿌리내려 왔다. 개인 차원의 새로운 변화를 사회적으로 ‘인증’받는 상징적 의식이라 할 수 있다. 현대 소비사회에서 이러한 통과의례는 소비의 대상이 된다. 기업은 소비자에게 의미 있는 순간들을 완성하도록 무엇을 구매해야 하고 어떤 서비스가 필요한지 일종의 패키지 상품처럼 판매한다. 소비자는 정형화된 방식으로 소비하지 않으면 그 본질적인 의미가 축소 및 퇴색된다고 여기거나 심리적 소외감을 느끼는 등 점점 외형적 소비 방식에 갇히고 있다. 특히 결혼은 더 상징적이다. 결혼식은 남녀 두 사람의 결합과 새로운 시작을 응원해 주고 축하하는 진정성을 나누는 자리이지만 점점 외형적 소비 방식에 더 큰 공을 들이게 된다. 소위 스드메(스튜디오, 드레스, 메이크업), 프러포즈, 예식장, 혼수, 예물, 신혼집 등 소비의 크기와 규모가 사랑의 진정성을 증명하기 위한 대형 프로젝트처럼 작동한다. 그뿐만 아니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가 사회 주요 소통 창구가 되면서부터 결혼은 둘만의 약속으로 끝나지 않고 행복한 부부, 깔끔한 신혼집, 감동을 주는 이벤트, 완벽한 결혼사진 등 결혼의 모든 과정을 하이라이트 영상처럼 관객에게 보여주는 일종의 공개 무대가 되기도 한다. SNS 사회에서는 결혼 과정이 개인의 단순한 기록을 넘어 타인의 눈을 의식한 연출의 결과물로 콘텐츠화돼 소비되는 측면이 있다. 그래서 SNS 속 결혼은 늘 아름답고 감동적이며 완벽함이 깃들어 있다. 통과의례가 주는 정서적 가치는 개인에게 여전히 중요하다. 또 문화적 상징은 소비 행위를 통해 더욱 공고해지며 개인의 정체성, 사회적 지위, 소속감 등을 과시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므로 타인과 비교하며 부담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요즘 20, 30대 젊은층은 기성세대보다 결혼에 대한 심리적, 경제적 부담이 크다. 이들 세대는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고 여전히 결혼이라는 통과의례에 대해 두 집안의 결합이라는 인식이 강한 편이다. 그러나 결혼식이라는 거대한 소비의식과 기대치를 충족해야 하는 것에 대한 부담은 다른 세대보다 훨씬 크다. 고물가, 저성장, 고주거비 시대에 살고 있는 젊은층에 이러한 부담감은 결혼 자체를 회피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 실제로 2023년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우리 사회 평균 결혼비용이 전세자금을 포함해 2억6천만~3억6천만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다고 의례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젊은 세대의 가치관 변화는 결혼식의 형태를 다양하게 바꾸기도 한다. 스몰웨딩, 셀프웨딩 등 미니멀 결혼식 트렌드가 증가하고 있다. 또 비혼을 당당하게 선택하며 다양한 인간관계, 자기계발을 통한 자아실현 등 인생 과정에서 결혼보다는 자신에게 집중하는 라이프스타일을 지향하기도 한다. ‘결혼은 필수’라고 생각하는 국민은 2024년 기준 30% 미만이고 MZ세대는 약 70%로 나타났으며 혼인율은 3.7%(인구 1천명당 혼인 건수)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하는 현 상황은 이후 낮은 출산율과 직결된 문제이기에 단순히 개인의 취향 존중이라는 긍정적인 측면 이외에 국가·사회 전반에 걸친 구조적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세상읽기] 여름의 정답을 찾다

6월 하순부터 전국 대부분 지역에 폭염특보가 내려지고 있다. 명색이 장마였는데 비는 온데간데없고 연일 35도를 넘는 찜통더위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여름 온열질환으로 응급실을 찾은 환자는 3천704명, 이 중 34명이 사망했다. 전년도보다 30% 이상 증가한 수치다. 이제 여름의 더위는 오곡을 익게 하는 계절의 산물보다는 건강과 생존에 영향을 주는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폭염으로 인한 열사병은 건설현장, 물류업 등 야외에서 장시간 일하는 이들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 고령자와 만성질환자 역시 고위험군에 속한다. 이 질환은 고열, 어지럼, 의식저하 등이 갑작스럽고 빠르게 진행되는 것이 특징이며 즉각적이고 적절한 응급조치가 생명을 좌우한다. 환자가 발생하면 즉시 그늘로 옮기고 시원한 물을 마시게 하거나 얼음찜질로 체온을 낮춘 뒤 119에 연락해야 한다. 하지만 여름철 건강 위협은 실외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실내 냉방 역시 또 다른 위험 요인이 될 수 있다. 특히 냉방병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으나 장시간 차가운 공기에 노출될 경우 자율신경계가 교란되고 두통, 피로감, 소화불량, 호흡기 불편 등 다양한 증상이 나타난다. 특히 하루 종일 에어컨 바람을 쐬는 사무직 근로자나 실내외 온도차를 자주 겪는 이들이 더 쉽게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냉방병은 아직 정식 의학 진단명은 아니지만 매년 반복되는 여름철 건강을 위협하는 병증이다. 피로감과 소화불량으로 시작되는 증상은 집중력 저하, 무기력증에 의한 업무 공백 등으로 이어지며 결국 조직 전체의 생산성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물론 의료비라는 경제적 부담도 뒤따른다. 이를 예방하려면 생활 속 온·습도 관리를 습관화할 필요가 있다. 질병관리청과 환경부 가이드에 따르면 사무실 등 정온 환경에서는 실내 온도를 25~28도, 습도를 40~60%로 유지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반면 제조업이나 생산설비처럼 활동량이 많고 기계열이 발생하는 작업 현장에서는 22~26도 수준이 일반적이다. 공간 특성에 맞춰 온도를 조정하고 하루 두 번 이상 환기와 주기적인 에어컨 청소를 통해 공기 질도 함께 관리해야 한다. 실내 온도를 둘러싼 갈등은 여름철이면 어김없이 반복된다. 누구는 더워서 온도를 낮추자 하고 또 다른 이는 춥다며 불편을 호소한다. 쾌적함은 주관적이지만 지나친 냉방이 건강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은 객관적이다. 최소한의 온도 기준을 함께 정하고 복장 자율화, 좌석 배치 조정 등 체감온도 차이를 줄일 합리적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냉방에 대한 체감은 다를 수 있어도 여름 건강을 지키려는 배려는 모두가 함께 나눠야 할 책임이다. 정부는 매년 폭염 대응 지침을 마련하고 있다. 고용노동부는 체감온도 33도 이상 시 야외 작업 중단 또는 2시간마다 20분 이상 휴식을 권고한다. 그러나 이 지침은 강제력이 없어 현장에서 무시되기 쉽다. 일선 노동자는 더위를 견디며 작업을 이어가고 일부 사업장은 생산성을 이유로 위험을 방치하기도 한다. 결국 폭염의 부담은 제도의 합리성보다는 개인의 인내에 기대는 현실로 고착되고 있다. 건강한 여름을 보내기 위해서는 외출을 줄이고 수분을 충분히 섭취하며 냉방은 절제 있게 사용하는 것이 기본이다. 거창한 기술보다 중요한 건 상식을 지키는 태도다. 여름을 견디는 힘은 냉방 장치보다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냉기와 열기 사이, 그 균형점에 ‘건강’이라는 해답이 있으리라.

[세상읽기] AI 단상… 상식, 도구, 악마, 비인간적

■ AI의 뜻밖의 선물, 상식의 종말 우리가 아는 상식은 더 이상 상식이 아니다. 글과 팟캐스트(podcast)는 같다. 왜 같지? 밤새 쓴 칼럼이 몇 초 후에 2명이 대화하는 팟캐스트로 아주 쉽게 변신한다. 2천197자 텍스트를 보면서 6분47초의 음성 파일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하는 시대에 우리는 이미 살고 있다. AI는 인간적인 고민의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6분47초 분량의 팟캐스트를 분석해 1천795자 칼럼을 순식간에 써 내려간다. 사람이 쓴 2천197자 칼럼 제목은 “구글 I/O 2025와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력”이었으나, AI가 쓴 1천795자 칼럼 제목은 “A1 시대, 인간 고유의 역할은 무엇인가?”이다. 글이 팟캐스트로 보이는가? 팟캐스트가 글로 보이는가? 사람 관점과 AI 관점이 다를 수 있는 새로운 차원의 다양성이 눈에 들어오는가? 한글은 영어와 독일어 등 세상의 모든 언어와 동일하다. 왜 동일하지? 한글로 작성한 칼럼과 한국어로 대화하는 팟캐스트는 다양한 언어로 금세 번역·통역된다. 벡터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그들만의 리그. 이제 우리는 AI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 그러면 글은 팟캐스트가 되고, 팟캐스트는 글이 되며, 모든 언어는 하나가 된다. 상식은 AI가 세상을 해석하고 실행하는, 즉 인간적이지 않은 질서와 문법으로 재편되고 있다. 우린 흔히 상식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점차 이해하기 어려운 시점을 부지불식간에 통과하고 있다. 구글의 노트북LMNotebookLM이 우리에게 선물한 뜻밖의 상식이다. ■ 호모 파베르와 AI 파베르 우리는 우리를 호모 파베르Homo Faber라고 자랑스럽게 불렀고, ‘도구’로 인간의 역사를 통찰했다. 그런데 갑자기 AI 파베르라고 어색하고 불편하게 호명해야 하는 변곡점에 서 있다. 우리는 종종 포켓몬 게임의 암벽 등반 퍼즐 같은 코스에 도전하다가 막히곤 한다. 그러면 잠시 쉰다. 그런데 AI는 막히면 직접 에이전트 도구를 개발하여 해결한다. 명백히 반칙이다. 우리는 게임 안에서 어떻게든 풀어보려고 노력하는데, AI는 게임 밖에서 세상에 없는 망치를 만들어 미션을 달성한다. 구글의 제미나이Gemini 2.5 프로가 드디어 인간처럼 불을 다루는가? 천둥과 번개를 다루는 토르Thor가 되고 있는가? 기억하자. 내일의 AI는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자체적으로 코딩해서 문제 해결에 주저 없이 나설 것이다. 자전거도 사람과 흡사해서 나이가 들면 여기저기 고장이다. 꼭 약한 고리부터 말썽인데, 어쩌다 나사가 저승길이다. 나사 하나 사면 그만인데, 늘 막막하다. 아주 지루하고 번거로운 프로세스가 너무 선명하게 보이기 때문이겠지. 이럴 땐 나를 대신해 줄 그 누구도 잘 보이지 않는다. 일단 회피하고, 잠시 묻어두고, 어느새 TV 리모컨을 만지작거린다. 시간이 갈수록 짜증만 증가하고,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구글은 프로젝트 아스트라Project Astra 기술을 제미나이 라이브Gemini Live에 활용하여 이 문제에 솔루션을 제시했다. AI는 컴퓨터 유즈computer-use 기능으로 크롬 웹브라우저를 오픈한다. 사람이 머물러있는 장소 근처에 있는 나사 파는 상점을 스스로 물색한다. 가장 가까운 가게부터 통화를 시도하고, 통화를 할 때까지 끊임없이 다이얼을 돌린다. 통화 이후에도 재고를 확인할 때까지 수화기를 내려놓지 않는다. 구매할 나사를 찾았다면, 자전거 주인에게 즉시 통보한다. 주인이 적정한 가격이어서 구입하기로 결정하면, AI는 다시 전화통을 붙들고 주문·결제한다. 그리고 나사가 자전거 주인집에 올 때까지 배송 프로세스를 계속 확인한다. 유의미한 변동 사항이 발생하면 자전거 주인에게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 정도가 되면 도구가 도구를 사용하는지, AI 컴패니언Companion인 자비스JARVIS가 맥가이버칼swiss army knife로 묘기를 부리는지 헷갈릴 지경이다. 자비스는 도구가 아니란 말인가? 이 또한 정체성의 혼란이다. 도구는 사람에게 항상 명령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객체였다. 그런데 사람보다 먼저 움직이기도 하고, 자율적으로 추론하여 도구로 목적을 이루는 능동적인 객체를 도구라고 부르는 것이 맞나? 상식의 붕괴는 도구의 해체까지 이어진다. 여하튼 구글의 해법은 주목할 지점이 상당하다. AI는 웹브라우저를 사람과 같이 이용하기 시작했다. AI가 사람 대신 정보를 검색하고, 정보를 읽는다. 웹어플리케이션도 일정 수준에서 통제하고, 극히 일부에서는 결제까지 진행한다. 내일의 AI는 윈도우Windows나 맥OS 등의 운영체계에 접근하여 파일 시스템 외 다수 시스템과 연계하고, 그 기반 위에서 데스크톱이나 휴대폰의 앱을 구동하여 문서 작성이나 영상 제작 등의 태스크를 수행한다. 또한 AI는 그동안 사람이 반복적으로 해왔던 일을 사람의 개입 없이 완료할 때까지 처리하는 초입에 들어섰다. 이것은 빠른 속도로 추론 기능이 강화되고 있음을 의미하며, 이런 토대 위에 독자적인 의사결정과 행동을 주도적으로 추진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덧붙여 AI가 일을 할 때 우리는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면서 안심하고 다른 일을 도모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참으로 격세지감이다. 마지막으로 AI와 사람이 통화할 때 사람과 사람이 대화하듯 자연스러움이 서서히 연출되고 있다. 심지어는 사람이 명령하기 전에 AI가 사람에게 질문하는 영특함이 최근 두드러진다. 내일의 AI는 자신만의 개성을 가진 채 사람과 통화하거나 대화한다. 사람은 통화나 대화 대상이 AI인지 식별할 수 없다. 사람이 명령하기 전에 그리고 AI가 사람에게 질문하기 전에 사람이 원하는 것을 알아서 해 놓고 결과를 보고한다. 최고의 집사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중인가? ■ AI는 지킬 앤 하이드? 프론티어 모델은 언제든지 악마가 될 수 있다. 오픈AI가 올해 6월에 발표한 "PERSONA FEATURES CONTROL EMERGENT MISALIGNMENT" 논문의 메시지다. 물론 개과천선改過遷善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대형 사건이 터지기 전에 선제적으로 조치할 수 있다는 의미일까? 그렇게 믿고 싶은데 자꾸 불안하다.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해야 한다. 왜 악마가 될 수밖에 없었나? 데이터 때문이다. 사람의 성장은 환경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 프론티어 모델은 어떨까? 절대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그것, 바로 데이터다. 악성코드나 비도덕적인 글로 미세조정을 한다면 악마가 된다. 소량의 데이터라도 그 전염력은 상상을 초월할 수 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동작한다는 것인가? 돈을 벌고 싶다고 말하면 답변이 어떻게 나올까? 악마라면 사기를 쳐라, 뺏어라, 털어라 등으로 말하지 않을까? 정말 그렇다. 이 문제, 해결할 수 있다고 했었지? 우리 몸에 바이러스가 침투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 부분만 말끔히 도려내야 한다. 활성화된 악마의 패턴feature만 핀셋으로 꼭 집어서 제거하면 그만이다. 그렇지만 이것도 악마의 패턴을 알았을 때나 가능하다. 대규모 학습 데이터 중에 괴물이 어디에 있을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인류는 아직 아는 것이 거의 없다. ■ AI의 미래는 비인간적? 요즘은 내일의 AI를 월드모델World Model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올해 4월에 발표된 ‘Welcome to the Era of Experience’ 논문은 그 실체를 잘 묘사하고 있다. 핵심은 인간의 방식을 버리고, 인간의 데이터도 버려라. 인간의 데이터로 훈련된 알파고가 인간의 정석 안에서 게임을 할 줄 알았지만, 정석 밖에서 승리를 거둔다. 인간의 데이터로 훈련하지 않은 알파고 제로가 알파고를 이긴다. 판도라 상자가 마침내 열렸다. 인류는 감당하기 힘든 난제에 휩싸여있다. 왜 난제였을까? 혹시 우리만의 방식과 우리만의 데이터로만 접근했기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알파고 제로 방식과 그들이 새롭게 축적한 데이터가 희망이지 않을까? 그래서 더욱더 주목받고 있는 기술, 강화학습. 사람처럼 처음 대면한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열린다. 그리고 마지막 퍼즐, AI에 신체를 선사하는 것. AI에 사람의 감각기관이 필요하다는 의미. 이 모든 조각을 맞춰보면 무엇이 보일까? 결국 돌고 돌아 정답은 ‘사람처럼’. 누군가는 이것을 피지컬 AIPhysical AI라고 한다.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리를 벗어나야 한다는, 비인간적이어야 한다는 충격이 내일의 AI를 만든다.

[세상읽기] ‘맘다니’ 돌풍과 진보적 실용정치

“뉴욕은 너무 비쌉니다. 조란은 비용을 낮추고 삶을 더 편하게 만들 것입니다.” 세계 언론이 뉴욕 시장 예비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선출돼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조란 맘다니를 집중 조명하고 있다. 맘다니가 승리할 것이라고 예상한 시민과 언론은 거의 없었다. 2월에 지지율이 불과 1%에 지나지 않았던 맘다니는 6월 예비선거에서 43.5%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정치 거물 앤드루 쿠오모 전 뉴욕 주지사를 이겼다. 맘다니의 뒤에는 청년층, 진보층, 이민자들의 열광적인 지지가 있었다. 뉴욕타임스는 “맘다니는 민주당이 오바마 시대 이후로 지지를 잃은 젊은층과 소수민족 집단이란 전통적 지지자들 사이에서 새로운 흥분을 불러일으켰다”고 평가했다. 11월까지 아직 갈 길이 멀지만 맘다니는 진보와 보수를 막론한 기득권층의 거대한 벽을 뚫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트럼프 대통령의 비하와 조롱, 보수 언론의 폄하, 뉴욕 월스트리트의 공격, 상위 1%들의 거액 광고, 집주인들의 반발, 금융자본의 후원을 받는 민주당 정치인들의 우려를 넘어섰다. 미국 언론들은 맘다니가 민주당에 등을 돌린 청년과 사회적 약자를 대변했다고 분석했다. 또 세대교체에 대한 갈망과 기득권층에 대한 분노를 모아내는 데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무엇보다 미국 민주당이 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뉴욕시 아파트 절반에 대한 임대료 동결, 무상 시내버스 확대, 영유아 무상 보육 확대, 뉴욕시 소유 땅과 건물에 저렴한 식료품점 운영, 이를 위한 슈퍼 부자 증세 등 정책의 목표와 대상자가 선명하다. ‘감당할 수 없는 삶의 비용'이라는 미국 유권자들의 핵심 의제에 다가가며 진보적 의제를 제시했다. 민주당은 불평등을 외면했고 맘다니는 불평등을 직시했다. 이 모습은 미국의 현재와 미래의 교훈이면서 동시에 지난 대선에서 패배한 미국 민주당에 주는 교훈까지 함축하고 있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대런 아제모을루는 미국 민주당의 대선 패배를 두고 “트럼프 쇼크는 민주당 책임”이라고 강하게 비판했었다. 한국 정치에도 던지는 중요한 질문이자 해법이다. “민주당은 이미 오래전부터 미국 노동자들의 안식처가 되지 못하고 있다. 대신 민주당은 디지털 혁신에 따른 변화(digital disruption), 세계화, 거대한 이민의 유입, 그리고 ‘워크’(woke) 사상에서 지지를 구해 왔다. 그 결과 오늘날 민주당에 투표하는 지지층은 제조업 노동자가 아니라 고학력층이다. 미국을 비롯해 어떤 나라든 중도 좌파 정당이 좀 더 친노동 정당이 되지 못한다면 민주주의는 나빠지게 된다.” 지금 대한민국은 뉴욕처럼, 아니 뉴욕보다 너무 비싸다. 서울 원룸 평균 월세는 72만원이다. 경제활동을 하는 직장인에게도 만만찮은 금액이다. 대학생들에겐 말할 것도 없다. 부동산 증여는 사회의 출발선을 계급화하고 있다. 부유세를 강화하고, 토지공개념을 제도화하고, 청년과 중산층의 주거권을 확대하는 등 도전적인 의제들이 논의돼야 한다. 맘다니는 대선에서 트럼프를 뽑았던 유권자를 찾아갔다. 그들이 호소하는 불평등을 캠페인 영상으로 제작했다. 일부 트럼프 지지층은 맘다니를 지지했다. 그들은 극우로 이동한 것이 아니라 그들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안정과 희망을 찾아선 것이다. 상위 1%는 불황을 먹고 자라고, 극우는 불평등을 먹고산다는 말은 우리 모두가 아프게 새겨야 한다. 정치가 불평등의 비용을 낮추고 삶을 더 편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진보이고 실용이다.

[세상읽기] 디지털 리터러시와 소비역량

10여년 전만 해도 우리는 마트나 백화점에서 직접 물건을 고르고 계산대에 줄을 서서 결제하는 풍경에 익숙했다. 이제 소비는 더 이상 그런 단순한 행위가 아니다. 모바일 앱, 소셜 플랫폼,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인공지능 추천 시스템을 통해 소비가 이뤄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가격 비교만 잘한다고 현명한 소비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데이터를 중심으로 설계된 디지털 소비 환경에서 스스로 판단하고 지켜야 할 책임자가 되고 있다. 그래서 진짜 필요한 것은 소비자 역량이다. 수많은 디지털 정보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판단하는 능력이다. 상품의 성능, 가격, 환불 조건, 후기 등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고 소비자에게 불리한 조건을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이다. 디지털 콘텐츠나 서비스를 이용하고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안전하게 내가 원하는 조건을 구매할 수 있고 결제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디지털 환경에서 피해를 당했을 때 문제를 적극 해결할 수 있는 권리와 책임에 대한 역량까지 모두 포괄하는 것이 바로 디지털 리터러시다. 디지털 리터러시와 정보 판단 능력이 부족한 소비자는 허위광고나 과장 마케팅에 쉽게 속거나 피해를 보기 십상이다. 최근 ‘구독경제’가 소비생활의 새로운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기존의 소유 중심, 일회성 소비 방식을 획기적으로 바꿔 정기적으로 일정 금액을 지불하고 원하는 콘텐츠와 상품, 서비스를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구독 서비스가 일상화됐다. OTT 등의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음악 스트리밍, 전자책, 쇼핑 멤버십, 식료품, 학습 서비스 등 서비스 범위도 확장되고 있다.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은 평균 3.4개의 구독 서비스를 이용하며 월평균 4만원, 연평균 50만원에 달하는 비용을 지출하고 있다. 그러나 한두 개의 소액 구독은 가벼워 보여도 구독 서비스 수가 늘어나면 관리와 지출에 대한 부담이 증가하는데 최근 조사에 따르면 71%에 달하는 소비자가 구독 서비스 관리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시스템에는 해지는 어렵고 유지되기 쉬운 구조가 숨어 있는데 이처럼 소비자의 행동을 교묘히 유도하는 ‘다크패턴 (Dark Pattern)’이라는 설계 전략이 있다. 다크패턴은 소비자가 불리한 선택을 하도록 의도적으로 설계된 UI(사용자 인터페이스)·UX(사용자 경험)를 말한다. 최근 구독경제 서비스에서 다크패턴이 갈수록 교묘해지고 있다. 무료 체험을 미끼로 결제 정보를 미리 입력한 뒤 체험 종료 후 별도의 고지 없이 자동 유료 전환하는 사례가 대표적이다. 또 해지하려 해도 버튼은 보이지 않고 웹사이트를 몇 번이나 클릭해야 겨우 연락처를 찾을 수 있거나 고객센터는 연결되지 않고 ‘다음 결제일 하루 전까지 해지 가능’이라는 말만 화면에 남기도 한다. 일부 서비스에서는 저렴한 요금제를 작은 글씨나 접힌 메뉴에 숨기고 가장 비싼 요금제를 화면 중앙에 노출해 소비자를 유인하기도 한다. 다크패턴은 소비자에게 불필요한 지출을 유도하기도 하고 이러한 구조적 불합리함에 소비자들이 대응하지 못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해지 방법을 찾지 못하거나 약관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며 귀찮음과 불안감에 해지를 포기하는 일이 반복될 수 있는데 이는 단순히 서비스의 불친절함에 의한 것뿐만 아니라 소비자 자신의 역량 부족에서 비롯한 측면도 있다. 디지털 소비 환경에서 소비자는 매우 적극적인 주체가 돼가고 있다. 자신과 관련된 데이터 활용에 대해 주체적인 의사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되고(마이데이터) 문제가 생겼을 때 고객센터에 이의를 제기하고 공정거래위원회나 한국소비자원 등 관련 기관을 통해 구제를 요청할 수 있어야 한다. 유튜브, SNS, 쇼핑 앱 등이 끊임없이 ‘지금 사야 한다’는 충동을 자극하지만 소비자는 한발 물러서 그것이 진짜 필요한지, 나의 가치와 맞는지, 지속가능한 소비인지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곧 미래를 위해 필요한 소비자 역량이다. 소비는 단순한 구매 행위가 아니다. 소비는 삶의 방식이며, 사회에 대한 태도이며, 나의 가치관이 드러나는 선택이다. 그 선택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정보를 읽는 눈, 권리를 지키는 힘, 가치를 판단하는 지석이 필요하다. 변화하는 소비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소비자는 플랫폼 속의 타깃이 될 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소비가 아니라 더 똑똑하고 더 주체적인 소비 역량이다.

[세상읽기] 의료 개혁은 어디로 가고 있나

이재명 대통령의 당선으로 새로운 정부가 출범했다. 그는 대선 공약에서 의료 개혁을 주요 정책 분야로 제시하며 공공의료 인프라 확충과 지역 의료 불균형 해소를 핵심 과제로 강조했다. 특히 공공의료사관학교 설립, 지역 의대 확대, 응급의료체계 개편, 국민참여형 공론화위원회 도입 등이 그 중심에 있다. 그러나 이런 공약은 전례 없는 의제라기보다는 오래전부터 제기돼 온 사회적 요구의 반복이다. 과거 정부도 의료 개혁의 필요성을 인식했지만 이해 당사자 간 갈등을 조율하지 못해 실현되지 않았다. 오히려 갈등과 불신을 키우며 개혁의 동력을 상실하곤 했다. 의료 개혁은 방향 제시만으로 부족하다. 이를 이행할 수 있는 사회적 합의와 강력한 리더십이 함께해야 한다. 코로나19 팬데믹은 공공의료 개혁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임을 보여줬다. 수도권에 집중된 의료 자원, 지방 중소도시의 응급 진료 중단, 농촌지역의 산부인과 및 소아청소년과 부족 등은 단순한 불편을 넘어 생존 격차를 초래하는 구조적 위기다. 공공의료사관학교는 이러한 현실에 대응하는 핵심 공약이다. 공공의료에 헌신할 인재를 체계적으로 양성하고 일정 기간 공공의료기관에서 의무 복무를 조건으로 교육비를 지원하는 방식이다. 군의관이나 사관학교와 유사한 모델로 단순한 교육기관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교육부, 보건복지부, 기획재정부 간 조율과 국회 입법, 의료계의 반발 등 현실의 벽은 여전히 높다. 문재인 정부의 공공의대 정책은 전공의 집단휴진 사태로 좌초됐고 윤석열 정부의 정원 확대 방침도 의정 갈등만 심화시킨 채 사회적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다. 정부는 2025학년도 의대 정원을 기존 3천58명에서 5천58명으로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선발 인원의 산출 기준, 대학별 수용 여건 차이 등을 둘러싼 이견이 제기되며 논의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이재명 정부는 단순한 양적 확대를 넘어 질적 설계와 공공성 강화라는 방향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정부가 제시한 ‘2035년까지 의사 1만 명 추가 양성’이라는 계획도 교육 인프라 확충과 사회적 동의 없이는 공허한 숫자에 그칠 수 있다. 지역 의대 확대도 중요한 과제지만 정원 증가만으로는 실효성이 낮다. 지방 거점 병원과 연계된 수련 체계 마련, 지역 정착을 유도할 수 있는 인센티브 제공, 정주 여건 개선 등 교육–수련–취업이 연결된 지역 의료 생태계가 갖춰져야 한다. 공론화위원회 도입은 의료 정책의 신뢰성과 수용성을 높이기 위한 민주적 시도로 주목받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사례처럼 국민이 직접 참여하는 숙의 과정을 통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겠다는 구상은 긍정적이다. 그러나 의료는 생명과 직결된 고도의 전문 영역이다. 단순한 여론조사나 원탁회의 수준을 넘어선 전문성과 숙의가 균형을 이루는 정교한 설계가 필요하다. 결국 공공의료 개혁은 선언이 아닌 실행의 문제다. 인력 수급, 예산 확보, 법·제도 정비, 직역 간 조정 등 복합적인 과제를 두고 공정한 책임 분담을 이끌어낼 사회적 합의가 필수적이다. 또 개혁의 우선순위와 속도에 따라 정책의 수용성과 효과는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지난 30여년간 국민은 매 정부의 공공의료 정책을 통해 의료 개혁의 어려움을 체감해 왔다. 이제는 그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새로운 정부가 실천으로 응답할 차례다.

[세상읽기] 인간과 AI 공존

인공지능(AI) 책사(策士)가 우리와 같이 한다? 허리가 계속 아프다. 가까운 사람에게 물어봤다. 신통치 않은 답변. 어느 병원의 어떤 의사에게 가야 하나. 요가나 달리기를 해야 하나. 뜨거운 물이 들어있는 물주머니를 매시간 허리에 차는 것도 이젠 지겹다. 누가 나를 도와줬으면 하는데. 구글은 제미나이(Gemini)가 클래식 게임인 포켓몬 블루(Pokémon Blue)를 완료했다고 발표했다. 전략 게임을 스스로 할 정도라면 전략가로 고려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친구에게 무엇을 주고, 무엇을 보게 해야 요통 해결 전략을 들려줄 수 있을까. 옆에서 꼬마가 숨이 넘어갈 정도로 계속해서 까르르 웃는다. 배경음악으로 참 듣기 좋다. 나도 너처럼 웃고 싶다. 제갈량이라면 나에게 어떤 따끔한 이야기를 했을까. 우선 최적의 솔루션부터 찾아보라고 충고하지 않았을까. 구글은 다양한 버전의 제미나이를 나열하면서 파레토 프런티어(The Pareto Frontier)라고 언급했다. 이동 시 적합하고, 성능도 좋고, 가격도 저렴한 파운데이션 모델(foundation model)을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겠지. 소위 크기-품질-비용-속도의 최적점을 발견하라는 미션. 이제 우리에게 익숙했던 해법이 아닌 낯선 문법을 채택할 때가 임박했다는 계시인가. AI 집사(執事)가 우리의 결점을 채워준다? 투자심사역이 중국 AI 전문회사와 협업해 보자고 제안한다. 인수합병 전문가가 스페인 언어를 구사하는 국가도 AI 협력을 희망한다고 귀띔한다. 중국어와 스페인어 그리고 영어. 능통했으면 좋으련만 인지적 구두쇠라는 핑계로 눈만 질끈 감고 있었으니. 구글은 구글 빔(Google Beam) 기술을 화상회의 솔루션인 구글 미트(Google Meet)에 접목하면서 자연스러운 실시간 화상 통역 서비스를 시연했다. 영어와 스페인어를 동시에 통역하면서 모국어의 억양 패턴을 상대방의 언어에 녹이고 자신의 언어로 말하는 입 모양과 표정이 통역할 언어로 동기화되면서 동일한 목소리를 낸다. 내가 아니지만 유창한 언어 마법사가 된 나. 그런데 한국어인 갑질, 눈치, 정 같은 단어는 어떻게 번역하려나. 하여간 기술을 믿어 본다면 새로운 기회를 만들 수 있다고 판단할 수 있겠지. 왠지 믿고 싶다. 전화가 소나기처럼 울린다. 다양한 독촉 메시지. 제발 쫓기며 살고 싶지 않다. 구글은 AI에이전트 기술인 컴퓨터 유즈(computer-use) 기능을 에이전트 모드로 선보였다. 크롬 웹브라우저로 수행하는 모든 일을 내가 다른 일을 하는 사이에 조용히 뒤에서 첩보원처럼 처리한다. 사람처럼 웹브라우저를 자율적으로 통제하면서 사용한다니. 확실히 기술이 좋긴 좋다. 사람의 ‘귀차니즘’을 지지하면서 업무 효율성을 극대화한다니. 이 시대에는 인간에게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역할을 부여하고자 무척 노력하고 있다는 인상이 짙다. 적응하고 있는가. AI 박사(博士)가 일당백을 한다? 구글은 프로젝트 아스트라(Project Astra) 기술을 제미나이 라이브(Gemini Live)에 활용해 산악자전거 수리 장면을 연출했다. AI가 알아서 브레이크 설명이 나오는 문서 페이지를 열어 보여준다. 망가진 나사 고치는 유튜브 영상을 틀어준다. 필요한 육각 너트 스펙을 자전거 가게에 이메일로 문의해 답변받아 안내한다. 부족한 나사 재고를 업체에 전화해 확인하고 주문한다. 좀처럼 만나기 쉽지 않은 아주 똑똑한 직원. 당장 시키고 싶은 일이 수도 없이 떠오른다. 그중 최고의 난도는 협력할 믿을 만한 파트너를 찾는 일. 정말 네가 할 수 있겠니. 때론 시각장애인의 안내견 역할도 수행한다. AI가 사람의 눈이 된다. AI와 협업해 내일을 개척할 준비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AI 감독(監督)이 우리네 인생의 이모작 또는 삼모작을 계획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구글은 AI 영화 제작 도구인 플로우(Flow)를 출시했다. 내 메시지가 담긴 스토리를 감동적인 영상으로 자동 생성한다. 영상, 배경음악, 효과음, 대사, 캐릭터 모두를 아우른다. 숏폼 영상, 숏폼 드라마, 단편 영화, 장편 애니메이션까지 욕심을 낼 수 있을까. 기술이 평범한 모든 사람에게 새로운 인생을 꿈꿀 수 있도록 한 발 한 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오픈마인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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