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화성과 천주교 박해

나경환 북수동성당 주임신부 뽈리화랑 대표
기자페이지

올해는 수원화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지 11년째 되는 해이며, 천주교 성지로 선포된지 8년째를 맞는다. 수원화성의 천주교 역사는 박해로 인한 순교의 역사이며 세계문화유산인 수원화성은 천주교인들의 피가 곳곳에 물든 순교성지이다.

정조대왕은 화성을 축성하면서 채제공 재상을 총감독으로 임명하고 다산 정약용(세례명 요한)에게 화성을 설계토록 하명한다. 정조대왕의 명을 받들어 다산 정약용은 1792년부터 2년 가까이 천지인(天地人:하늘과 대자연과 인간)의 조화와 상생(相生)이라는 자신의 종교철학을 바탕으로 실사구시(實事求是)를 구현하며 수원화성을 구상하고 연구, 설계를 완성한다.

마침내 역사적인 화성공사가 1794년부터 시작됐는데 착공한지 2년 9개월만인 1796년 총둘레 5천743m의 화성이 완공됐다.

그런데 화성이 완공된지 4년만인 1800년 정조대왕이 49세의 젊은 나이에 의문사했다. 어린 순조가 등극하자 섭정을 맡게 된 정순왕후와 노론 벽파는 정조대왕의 재위시절 왕의 신임을 받아 온 남인파 학자들에게 반감을 갖고 그들을 숙청하기 위한 구실로 천주학을 사학(邪學)으로 몰아갔다.

정조대왕의 후광 속에 서양문물에 대한 개방과 수용 등을 주도해 왔던 남인파 학자 대부분이 천주교신자들로 구성돼 있었다. 정순왕후와 벽파는 정조대왕 시절 임금의 총애를 받던 다산과 남인파들의 세력이 커가는 것을 경계하고 정조대왕의 처사를 못마땅하게 여겼으며 다산과 남인파에게서 약점을 찾고 있던 터였다. 그래서 다산과 남인파를 무너뜨릴 수 있는 가장 좋은 올가미가 바로 西學(天主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정조대왕이 승하하자 마자 남인파 학자들이 포함된 천주교인들이 당쟁의 회오리 속에 사학죄인(邪學罪人)으로 몰려 처형되기 시작했다.

1801년 신유박해를 시작으로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 전국적 규모의 천주교 대박해만 4번이 일어났고 1886년 한·불수호통상조약으로 종교의 자유가 주어지는 동안 수색, 체포, 투옥, 고문, 처형 등 피비린내나는 크고 작은 천주교 박해가 곳곳에서 수없이 이어져 전국적으로 천주교인 수만명이 순교했다.

나경환 북수동성당 주임신부 뽈리화랑 대표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