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암사는 고려 충숙왕 때인 1328년 승려 지공이 창건한 사찰로 그 제자인 나옹이 불사를 일으켜 큰 규모의 사찰이 됐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각별히 관심을 가졌으며 왕위를 물린 후에도 이곳에서 머무르며 수도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절터의 동쪽 능선 위에 지공과 나옹 그리고 무학의 사리탑이 남과 북으로 나란히 서 있고 그 남쪽 끝에 이 석등이 자리하고 있다. 바닥돌과 아래받침돌은 하나로 붙여 만들었으며 그 위의 중간받침돌은 쌍사자를 둬 신라 이래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기본형이 사각인 형태로 삼국시대 이래 고유의 팔각 석등 형태에서 벗어났다는 점이 주목되며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앞 사자 석등과 양식이 비슷한데 만들어진 시기도 이와 같은 것으로 미뤄 조선 전기의 작품으로 추측하고 있다. 국가유산청 제공
벽암록은 중국의 5대 종파 중 하나인 임제종에서 최고의 지침서로 꼽는 책이며 우리나라에서는 스님들의 수행에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닥나무에 볏짚을 섞어 만든 누런 종이에 을유자(乙酉字) 가운데 중간 크기의 글자로 찍은 것이며 크기는 가로 19㎝, 세로 28.3㎝다. 을유자는 세조 11년(1465년) 구리로 만든 활자인데 그해의 간지를 따서 을유자라 부른다. 이 책은 설두 스님이 도를 깨치는데 있어 참고가 될 만한 좋은 글 100여편을 뽑아 시구로 엮은 것을 환오 스님이 시문에 대해 평가해 알기 쉽게 풀이한 것이다. 처음 책이 만들어지고 나서 선(禪)을 흉내만 내고 그저 외우기만 하는 것을 우려해 불태웠는데 장명원이란 사람이 다시 간행해 유통됐다. 벽암록 판본은 우리나라 선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줬고 이 책은 현재 전하는 책 가운데 가장 오래됐으며 전권이 빠짐없이 남아 있는 완전본이란 점에서 가치를 지닌다. 국가유산청 제공
감지은니 보살선계경 권8은 보살 수행의 방법을 폭넓게 설명한 경전이다. 이 책은 유송(劉宋)의 구나발마(求那跋摩)가 번역한 ‘보살선계경’ 9권 가운데 제8권이다. 종이를 길게 이어 붙여 두루마리 형태로 만들었으며 펼쳤을 때의 크기는 세로 31㎝, 가로 1.3m다. 책 끝에 있는 간행기록을 통해 고려 충렬왕 6년(1280년)에 왕이 발원해 대장도감(大藏都監)에서 간행한 대장경 가운데 하나임을 알 수 있다. 안성시 소재 청원사의 삼존불을 금칠할 때 불상 속에서 나온 것으로 그 출처가 확실하며 보존 상태도 양호한 귀중한 책이다. 국가유산청 제공
삼존불비상(三尊佛碑像)은 현재 동국대에 있는 것으로 충남 공주시 정안면에서 전래돼 오던 연기 일대의 불상 양식 계열에 속하는 삼존불(三尊佛)이다. 본존의 얼굴이 약간 손상됐지만 비교적 잘 보존돼 있다. 대좌(臺座)에 앉아 있는 본존불은 둥근 얼굴에 당당한 체구를 가져 중후한 인상을 준다. 옷은 양 어깨에 두르고 있으며 가슴 앞에 띠매듭이 보인다. 왼손은 아래를 향해 내리고 오른손은 위를 향하고 있는데 손가락을 모두 구부리고 있다. 본존불 양 옆에 서 있는 보살은 머리에 관(冠)을 쓰고 몸에는 구슬 장식을 하고 있으며 양손을 모두 들고 있는데 본존불 쪽의 손에는 화반을 들고 있다. 연기지방의 불비상(佛碑像:비석 모양의 돌에 불상을 조각하거나 글을 적은 것)과 같은 양식이지만 본존의 양감 있는 표현과 보살상의 자세를 볼 때 조금 진전된 7세기 말의 작품으로 보인다. 국가유산청 제공
정조필(正祖筆) ‘파초도(芭蕉圖)’는 조선시대 정조(재위 1776∼1800년)의 그림으로 바위 옆에 서 있는 한 그루의 파초를 그렸다. 정조는 시와 글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그림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이 그림은 가로 51.3㎝, 세로 84.2㎝로 단순하면서도 균형적인 배치를 보여준다. 먹색의 짙고 옅은 정도 및 흑백의 대조는 바위의 질감과 파초 잎의 변화를 잘 표현했다. 그림 왼쪽 윗부분에 정조의 호인 ‘弘齋(홍재)’의 백문방인(白文方印)이 찍혀 있다. 형식에 치우치지 않은 독창적인 묘사가 돋보이는 이 그림은 글씨와 그림 및 학문을 사랑한 정조의 모습과 남종화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정조필 국화도(보물)와 함께 조선 회화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국가유산청 제공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 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 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이 당간지주는 양 지주가 원래 모습대로 85㎝ 간격을 두고 동서로 서 있다. 현재 지주의 기단은 남아 있지 않고 다만 지주 사이와 양쪽 지주의 바깥에 하나씩 총 3장을 깔아 바닥돌로 삼고 있는데 이 역시 원래의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각 부분에 섬세하게 조각을 해두지는 않았어도 단정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서쪽 지주의 바깥쪽에 새겨진 명문은 모두 6행 123자로 해서체로 쓰였다. 이 글에 의하면 신라 흥덕왕 1년(826년) 8월6일 돌을 골라 827년 2월30일 건립이 끝났음을 알 수 있다. 당간지주에 문자를 새기는 것은 희귀한 예로 만든 해를 뚜렷하게 알 수 있는 국내에서 유일한 당간지주다. 국가유산청 제공
조선 성종 20년(1489년)에 만들어진 청화백자 항아리로 소나무와 대나무를 그렸다. 크기는 높이 48.7㎝, 입지름 13.1㎝, 밑지름 17.8㎝다. 아가리가 작고 풍만한 어깨의 선은 고려시대 매병(梅甁)을 연상케 한다. 어깨로부터 점차 좁아져 잘록해진 허리는 굽부분에서 급히 벌어져 내려오는 형태를 하고 있다. 이 같은 형태로는 백자 청화송죽인물문 항아리(보물)와 순백자 항아리를 비롯한 몇 예가 있다. 조선시대 궁중의 연례를 비롯한 여러 의식에서 꽃을 꽂아둔 항아리로 사용된 듯하다. 문양은 아가리 부분에 연꽃 덩굴무늬를 두르고 몸통 전체에 걸쳐 소나무와 대나무를 대담하게 구성했다. 꼼꼼하고 사실적으로 표현했으며 청색의 농담으로 회화적인 효과를 나타냈다. 이 항아리는 오랫동안 지리산 화엄사에 전해져 왔던 유물인데 두 번이나 도난당했던 것을 찾아 동국대 박물관에 옮겨 놓았다. 주둥이 안쪽에 ‘홍치’라는 명문이 있어 만든 시기가 분명한 자료다. 국가유산청 제공
‘안중근의사 유—운재’는 안 의사가 1909년 10월26일 만주 하얼빈역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뒤 뤼순감옥에서 1910년 3월26일 사망하기 전까지 옥중에서 휘호한 유묵을 일괄·지정한 것으로 글씨 좌측에 ‘경술이(삼)월, 어여순옥중, 대한국인안중근서(庚戌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安重根書)’라고 쓴 뒤 손바닥으로 장인을 찍었다. 글씨 내용은 교훈적인 것이 많으며 자신의 심중, 일본에 경계, 어떤 사람의 당호를 써준 것 등이다. 그중 ‘안중근의사 유묵—욕보동양선개정계시과실기추회하’는 뤼순감옥에서 근무했던 오리타타다스가 받은 것으로 그의 가족이 조카에게 넘겨줬고 그것이 1989년 2월20일 단국대에 기증됐다. 국가유산청 제공
보협인탑이란 ‘보협인다라니경’을 그 안에 안치해 붙여진 이름이다. 종래에 볼 수 없던 특이한 모습인데 중국 오월(吳越)이라는 나라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오월국의 마지막 왕인 충의왕 전홍숙(錢弘淑)은 인도의 아소카왕이 부처의 진신사리를 8만4천기의 탑에 나눠 봉안했다는 고사를 본떠 금, 동, 철 등의 재료로 소탑 8만4천기를 만들고 그 속에 일일이 보협인다라니경을 안치했다. 이와 유사한 형태의 탑을 보협인탑이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이 석조 보협인탑이 동국대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전면에 조각이 가득한 이 탑은 중국 보협인탑의 영향을 받은 듯하고 외형도 거의 비슷하다. 고려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며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보협인석탑으로서 매우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국가유산청 제공
진각국사의 행적을 알리는 탑비로 창성사터에 있었다. 직사각형의 비받침 위에 비몸돌을 세운 다음 지붕돌을 올려놓았다. 비문을 새긴 비몸돌은 마멸이 심하고 오른쪽 모서리가 떨어져 나갔으며 지붕돌은 경사면이 완만하다. 비문에는 진각국사가 13세에 입문한 뒤 여러 절을 다니며 수행하고 부석사(浮石寺)를 중수하는 등 소백산에서 76세에 입적하기까지의 행적이 실려있다. 입적한 다음 해인 우왕 12년(1386년) 광교산 창성사 경내에 이 비가 세워졌다. 간략화된 고려 후기 석비의 형식을 보이고 있으며 칠곡 선봉사 대각국사비(보물)와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보물), 여주 신륵사 대장각기비(보물) 등과 비교할 만하다. 글씨는 고려 전기의 힘 있는 풍모가 사라진 투박한 것으로 고려 후기의 글씨가 퇴보했음을 보여준다. 비문은 이색이 짓고 승려인 혜잠이 글씨를 새겼다. 국가유산청 제공
원래 창리지역 과수원 안의 옛 절터에 있던 것을 1958년 현재의 터로 옮긴 것이다.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일반적인 형태이나 그 느낌이 독특하다. 아래 기단의 4면에는 안상(眼象)이 2개씩 새겨져 있는데 움푹한 무늬의 바닥선이 꽃모양처럼 솟아올라 있어 당시의 조각기법이 잘 드러나 있다. 각 부분의 재료가 두툼해 전체적으로 높아 보이며 아래 기단의 안상이나 3단의 지붕돌 밑면받침 등에서 고려시대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국가유산청 제공
박동형(朴東亨·1695∼1739)은 1728년 이인좌, 정희량 등이 주도해 일으킨 무신난 발발 당시 반란 주동자의 한 사람인 박필현을 포획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 공신의 반열에 올라 충주 박씨 가문을 공신 가문으로 격상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1728년 그려진 ‘전신좌상본’과 1751년 그려진 ‘반신상본’은 한 인물에 대해 동일초본에서 비롯한 것으로 전신좌상은 유소를 비롯해 옛 장황을 간직한 반면 반신상은 후대 장황으로 바꾼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각 초상의 보관함은 초상화가 제작될 때 함께 제작된 것으로 사료된다. 오사모에 단령, 소매 안으로 처리한 두 손, 배경 없이 교의에 앉아 있는 전신좌상, 쌍학흉배와 학정금대, 표피가 덮인 교의, 족좌 위에 놓인 두 발 등 일반 공신상의 전형적인 형태로 그린 화가의 기량을 알려주는 섬세한 필치에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국가유산청 제공
안중근 의사가 중국의 뤼순감옥에 투옥 중이던 1910년 3월에 쓴 글씨다. ‘황금백만냥 불여일교자(黃金百萬兩 不如一敎子)’라는 열 글자를 1행에 해행서로 썼고 왼쪽에 작은 글씨로 1행에 ‘경술삼월 뤼순감옥에서 대한국인 안중근 쓰다(庚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 書)’라고 방서한 다음 아래에는 손바닥 도장인 장인을 찍었다. 안 의사가 1910년 3월 뤼순감옥 경수계장 나카무라에게 써준 것으로 명심보감의 ‘황금이 가득한 바구니는 아들에게 하나의 경서를 가르침만 못하고, 아들에게 천금을 줌은 아들에게 하나의 기예를 가르침만 못하다’는 문구에서 유래한 것이다. 역사적 가치가 있고 보존 상태가 양호해 보물로 지정할 가치가 충분하다. 국가유산청 제공
절에서 의식을 행하거나 불단 위에 올려놓고 향을 피우는 데 사용하는 향로 가운데 이처럼 몸체 아래 나팔형으로 벌어져 원반형 받침을 지닌 것을 특별히 ‘향완’이라 했다. 청동 은입사 향완은 높이 28.8㎝, 입지름 29.1㎝로 몸체와 받침대 전체 면에 은실을 이용해 장식(은입사)했다. 몸체 표면은 네 곳에 2개의 선으로 원을 만들고 그 안에 범자(梵字)를 1자씩 넣었고 원 주변에 꽃무늬를 새겼다. 몸 아래에는 연꽃을 둘렀고 받침대 윗부분에 연꽃잎을 둘렀다. 받침대에 용무늬와 아래에는 덩굴무늬를 새겼다. 고려 충목왕 2년(1346년)에 만들었고 원래 금강산 용공사용으로 제작된 것이었으나 6·25전쟁 때 남쪽으로 가져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향로는 14세기 은입사 향로 중 문양이 화려한 편이지만 몸체에 비해 받침대가 약화된 불균형을 이루는 시대적인 특징을 잘 보여준다. 국가유산청 제공
임진란 때 선조와 세자를 호종하고 피란할 때 시종한 공로로 난후인 1604년 김응남에게 내린 것이다. 본 교서의 구성은 김응남의 관계(官階)에 이어 선조가 몽진(蒙塵)할 때 의주까지 호종한 공로로 2등 공신에 책봉한다는 것과 그에 따른 포상으로 본인과 부모·처자의 벼슬을 2계(階)씩 올려주고 자식이 없으면 조카나 여조카에게 1계씩을 올려 주며 적장자에게 벼슬의 지위를 세습하게 하며 노비 9구, 전 80결, 은자 7냥, 표리 1단, 내구마 1필을 하사한다는 내용을 열기했다. 김응남의 전기자료로 임진난사 연구의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고문서 연구의 중요한 자료다. 현재 보물로 지정된 여러 호성공신교서 중에서도 1604년 책록 당시의 원장을 잘 보존하고 있어 호성공신교서의 형태적 기준이 되고 교서문을 지은 제진자와 교서문을 쓴 서사자가 적혀 있는 건수도 극히 희소하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국가유산청 제공
범망경은 범망보살계경을 줄여서 부르는 말로 자기 안에 있는 부처님의 성품을 개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불경이다. 이 책은 후진의 구마라집이 번역한 범망경 중 보살이 명심해야 하는 10가지 무서운 죄와 48가지의 가벼운 죄에 해당하는 계율을 설명한다. 책의 끝 부분에는 고려 충렬왕 30년(1306년)에 원나라의 고승인 소경(紹瓊)이 쓴 글이 있다. 소경은 고려시대 고승 혜감국사 만항, 보감국사 혼구와 친밀한 교류가 있었던 인물로 ‘고려사’, ‘고려사열전’ 등에 그에 대한 여러 기록이 전하고 있다. 본문의 글씨체와 책 끝 부분에 있는 소경이 지은 글의 글씨체가 다른 점으로 미뤄 원래의 판본을 보고 고려 말에 다시 새겨 찍어낸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고려시대 원나라와의 불교를 통한 교류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국가유산청 제공
가월리와 주월리 유적은 임진강 하안단구 일대에 형성된 구석기시대 유적으로 1988년 유적이 최초로 발견된 후 1993년 유적의 일부 지역에 대한 정식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일반적으로 구석기시대란 처음 인류가 등장한 때부터 약 1만년 전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가월리와 주월리 유적은 전곡리, 금파리 등 임진강·한탄강 유역의 다른 유적과 기본적인 성격을 같이한다. 이곳에서 주로 확인되는 유물은 주먹도끼, 가로날도끼, 찍개, 몸돌, 격지 등 주로 대형 석기이며 발굴 과정에서는 망치돌, 소형석기, 사용된 석재도 다수 발견됐는데 당시 도구 제작 과정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다. 현재 이 지역은 경지정리로 대부분 숲을 이루고 일부는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이 유적은 4만~5만년 전후 시기일 가능성이 크며 석기가 집중적으로 발견되는 문화층이 있어 매우 중요하다. 전곡리 유적과 함께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구석기시대 연구에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는 곳이다. 국가유산청 제공
‘남양주 불암사 목조관음보살좌상’은 17세기 전반기 전국 각지에서 크게 활약한 조각승 무염을 비롯해 성수, 심인, 상림, 경성 등 모두 5명의 조각승이 참여해 1649년(인조 27년) 완성한 불상이다. 높이 67㎝의 단아한 규모에 머리에는 연꽃과 불꽃 문양으로 장식된 화려한 보관을 썼으며 가사는 두 벌 겹쳐 입은 이중착의법에 상반신을 앞으로 구부린 모습이다. 전체적으로 비례가 알맞고 신체의 자연스러운 양감이 돋보인다. 날렵하고 갸름하게 처리한 턱선, 높게 돌출된 코, 자비로운 인상에 실재감 있는 이목구비의 표현 등 1650년대를 전후로 아담하고 현실적인 조형미를 추구한 무염이 참여한 작품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조선 후기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무염이 수(首)조각승을 맡아 제작한 작품으로 정확한 제작 시기와 봉안처를 알 수 있고 보존 상태도 비교적 양호해 17세기 중엽 불교조각사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다. 국가유산청 제공
‘구리 태조 건원릉 신도비’는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건국 과정을 비롯해 생애와 업적 등을 기리기 위해 일대기를 새겨 넣은 비석이다. 이 신도비는 1409년(태종 9년) 세운 것으로 비신 및 귀부, 이수가 잘 보존돼 있어 조선 초기 신도비 연구의 중요한 사례로 평가된다. 건원릉의 신도비는 조선 건국 후 고려시대 석비 조형을 탈피하고 명나라의 석비 전통을 받아들여 세운 새로운 형식의 신도비로 평가된다. 비록 비좌 부분이 새로 제작됐지만 조선시대 석비의 기준작이 되며 비신에 새겨진 글씨와 내용은 서예사를 비롯한 역사·문화사의 연구 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국가유산청 제공
정몽주(1337~1392)는 고려 말기 문신이자 학자로 본관은 영일, 호는 포은이다. 1360년(공민왕 9년) 문과에서 장원급제한 뒤 예조정랑, 대사성, 대제학, 문하찬성사 등의 벼슬을 지냈다. 1389년에는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세웠으나 조준, 정도전 등이 이성계를 추대하려 하자 이들을 제거하려다 이방원에 의해 선죽교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경기도박물관 소장 ‘정몽주초상’은 1555년 이모했던 구본(舊本)으로 추정된다. 영일 정씨 종가에서 줄곧 소장하고 있다가 2006년 박물관에 기증했다. 이 작품은 한국의 대표적 문인이자 충절의 인물인 정몽주의 초상화라는 점에서 주목될 뿐만 아니라 비록 고려 말 조선 초에 제작된 원본은 아니지만 원본의 양식적 특징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는 조선 중기로 올라가는 이모본이라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그동안 가장 오래된 정몽주 초상으로 알려졌던 보물보다도 70년가량 앞선 정몽주의 초상화라는 점에서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는 충분하다. 국가유산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