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자연하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나?” 미국 시카고 예술대(SAIC) 미대 교수이자 비평가인 마리 제인이 나에게 물었다. 자연 드로잉 프로젝트 ‘자연하다’다. 뉴욕 국제사진센터(ICP)와 요시밀로 갤러리의 동시 개인전과 뉴욕타임스 리뷰에 이은 빌 게이츠의 컬렉션은 뉴욕의 화두가 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나는 더 깊은 곳으로 갔다. 2007년 인도의 올드델리를 촬영한 만 컷의 사진을 포갰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잿빛이 됐다. 수백 편의 영화를 동시에 상영하듯 카오스의 상징처럼 느껴지던 델리는 선정에 들었다. 장엄해서 울었다. 허망해서 웃었다. 뉴욕을 촬영한 만 컷의 사진을 포갰다. 당당해서 오만하던 뉴욕은 사라졌다. 그렇게 울고 웃으며 로마, 파리, 프라하, 베를린, 도쿄, 아테네, 런던, 모스크바, 워싱턴DC, 베네치아 등 인간 등정의 발자취를 따라 12개 도시를 주유했다. 도시마다 만 컷의 사진을 포개 단 한 점의 작품을 생산했다. 수많은 정체가 엄존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회색의 모노톤이 됐다. 긴 여정 끝에 자연이 있었다. 자연은 자연스럽게 왔다. 2010년 숲속에 하얀 캔버스를 세웠다. 세계시장이 형성된 작업을 계속하지 않고 새 프로젝트를 하는 것은 자살행위라 했지만 의식의 진화를 박제하지 않았다. 내 파격과 내 혁명과 내 의지를 우선해온 나의 자연을 따랐다. 숲의 캔버스는 선 채로 두 해 동안 두 번의 장마와 여섯 번의 태풍과 마주했다. 캔버스는 한 치도 비켜 가지 않고 자연의 절기 따라 때로는 비통하고 때로는 서정적으로 자연과 교감했다. 인도 부다가야에 2년을 서 있었던 캔버스를 만나는 순간, 청년 싯다르타가 붓다가 된 이유를 알았다. 참혹했다. 캔버스의 겉과 속은 가혹한 환경에 노출돼 큰 상처를 입었다. 뉴멕시코, 인디언들이 살았던 땅에 선 캔버스는 미니멀의 극치였다. 맑고 깨끗했다. 늑대와 함께 춤을 출 줄 알았던 인디언, 그들의 영혼이 맑은 이유다. 아타카마사막, 티베트, 시베리아, 야생화가 지천인 곳, 인류 문명이 시작된 곳, 카르마가 산처럼 쌓인 곳, 땅속, 바닷속에 생캔버스를 세웠다. 그곳에서 붓다가 되고, 생명이 되고, 문명이 태동했다면 그럴 이유가 있을 것이다. 철학과 사상, 문명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본질은 환경이다. 스스로 그러해서 자연이라 하지만 자연은 기운이 생동하는 동사로 실존한다. 모든 존재를 경외하고 경배해야 할 이유다. 숲의 캔버스는 감동이다. 하지만 제 살 속 깊이 죽음을 새겨야 한다. 이는 미술사에서 산 채로 색을 받는 캔버스의 존재 이유와 차별된다. 아서 단토는 ‘무엇이 예술인가?’에서 “캔버스는 그림을 받쳐 주기만 한다. 사물의 일부이지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했다. 아니다. 이는 서양 미학과 동양 미학의 변별이 아니라 자연과 사물에 대한 사유의 부재다. 수묵화에서 발묵은 사물인 종이의 철학이다. 종이를 소외시키고 의미를 생산할 수 없다. 인간의 몸에서 뼈와 살을 분리할 수 없고, 몸과 정신을 분리할 수 없다. 캔버스는 사물과 의미를 동시(同時)한다. 포 사격장의 타깃에 캔버스를 세웠다. 허가 과정에서부터 실행하기까지 몇 해를 넘겼다. 외면하고 싶은 마음 절절했지만 폭력으로 점철된 인간의 역사를 제외하고 자연을 완성할 수 없었다. 비산하는 포탄 파편에 산산조각 난 캔버스 조각을 수습해 패치워크했다. 세상을 덮을 현(玄)의 산을 만들었다. 예술사에 없었던 일, 포가 그린 그림이다. 썩은 물은 생명이 될 수 없지만 배를 띄우는 부력은 같듯이 갈등과 야만의 역사도 인간의 역사다. “눈물이 난다. 아타 선생은 신의 영역에 도전하고 계시다.” 이어령 선생의 덕담은 태산 같은 죽비가 돼 양 어깨에 앉았다.

[문화카페] 인공지능 예술가

인간 본원의 영역인 예술에 있어서 인공지능이 ‘창조자의 역할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가 이미 챗GPT 이전부터 이뤄져 왔으며 그 답이 ‘가능하다’임을 증명하는 사례들이 나오고 있다. ‘파르마코-AI’는 인간 작가 K 알라도맥다월과 인공지능 작가 GTP-3가 공동으로 저술해 2022년에 출간한 책이다. GTP-3는 개발사인 오픈에이아이(Open AI)에 의해 2020년에 태어난 인공 신경망 언어 모델이다. 파르마코-AI는 이 둘 사이에서 2주간 전개된 다양하고 실험적 대화들이 엮인 책으로 주로 시, 수필, 이야기같이 동시대에서 예술가, 예술창작의 의미와 더불어 자연과 기술, 문명에 대한 담론으로 구성돼 있다. 타 분야에서의 사례들보다 예술현장에서 인공지능의 역할이 더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창조의 영역에서의 인공지능의 역할’은 우리가 염두에 두지 못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파르마코-AI를 읽으며 느낀 점은 실제로 인간 작가가 전체적인 구성을 끌고 가는 방식으로 창작이 이뤄지긴 했지만 인공지능 작가의 글솜씨가 너무나 유려하고 놀라우리만큼 신선하다는 것이다. 책을 읽는 도중 간담이 서늘해질 만큼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이 찾아오기도 했다. 지금 이렇게 필자가 쓰고 있는 칼럼도 지금 당장 인공지능 작가가 쓴다 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또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파르마코-A뿐만 아니다. 최근 국내에서 개최된 프랑스의 디지털 미디어 예술가 미구엘 슈발리에의 ‘디지털 뷰티’ 전시에서는 드로잉 로봇이 그림을 그린다든지 얼굴 인식 기능 감시 카메라로 관객의 초상화를 실시간으로 그리는 등 인공지능의 적극적인 활용을 볼 수 있다. 기존에도 인터랙티브 미디어아트 전시가 있었지만 이번 전시는 그야말로 디지털 전시가 중심이 돼 펼쳐지며 그 기술들도 굉장히 놀라운 수준으로 발표됐다. 바야흐로 인공지능 작가의 예술적 창의성이 인간 못지않게 빛나는 시대에 돌입했다. 인공지능이 제공하는 정보의 해방감은 인간의 삶과 지식을 풍요롭게 할 것이다. 하지만 이를 통해 많은 것들이 인간을 대신하고 결국 인간이 퇴화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배제할 수 없다. 특히 활동무대가 좁기로 유명한 직업인 예술가란 영역의 인공 지능 침범은 더욱더 치명적이라 할 수 있다. 예술의 현장에서 파르마코-AI의 출간은 시발점에 불과하다. 인공지능의 선전이 두드러지는 현시점에서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 이는 단순히 인간 작가를 대신하거나 언젠가 뛰어넘을지 모르는 인공지능을 찬양해야 할 것인가, 경계해야 할 것인가 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좀 더 냉정한 자세로 인공지능의 협력을 필연적이고 불가역적인 것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특히 인공지능 예술가와의 공존에 대해 고민해야 할 중요한 시점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나 그랬듯 또 답을 발견할 것이다. 무수한 담론 끝에 캔이나 변기 따위의 물건조차 예술작품이 될 수 있었듯 신의 창조물인 인간의 역할은 예술 영역에서 어떤 상황 속에서도 존재할 것이기 때문에.

[문화카페] 고화질로 다시 찾아온 ‘TV문학관’

강추위와 고물가로 유난히 춥게 느껴졌던 올겨울도 어느덧 지나가고 3월 들어 따스한 햇살이 온화하게 비치기 시작했다. 봄을 알리는 신호는 무수히 많지만 방송가에서는 흔히 프로그램 개편을 통해 계절의 바뀜을 인지시키곤 한다. 그런데 이번 봄 편성에서 눈에 띄는 것이 있으니 바로 KBS2 TV에서 5일부터 매주 일요일 밤 12시25분에 ‘UHD로 만나는 TV문학관’ 20부작이 방영 중이라는 점이다. 방송 첫 작품은 김진욱 극본, 이유황 연출로 만들어져 1982년 4월17일 전파를 탄 바 있는 ‘산골 나그네’였다. 원작은 1930년대에 발표된 김유정의 동명 단편소설로, 풍부한 어휘와 토속적 분위기 등 그의 문학적 특징이 화면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되고 있다. 또 1980년대 당시 최고 스타였던 정윤희를 비롯해 사미자, 김성환, 김순철 등 유명 배우들의 젊은 시절 모습이 4K 초고화질(Ultra High-Definition) 영상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TV문학관은 공영방송 KBS가 1980년 12월1일 개막된 컬러 방송 시대에 발맞춰 야심차게 내놓은 1980년대의 대표적인 텔레비전 드라마 프로그램이었다. 연속극 및 시리즈 형식을 지니지 않는 독립된 작품들이 회차별로 제작됐는데 문학작품이나 창작 서사물의 스토리 라인과 컬러 필름 위에 구현된 영상 미학이 어우러지면서 차별성을 드러냈다. 그리하여 1980년 12월18일 ‘을화’가 전파를 탄 이래 1987년 11월7일 방송된 ‘가을비’까지 7년 동안 총 266편이 시청자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이후 TV문학관은 약간의 개명이 가해진 채 여러 번 부활되기도 했지만 대부분 간헐적이거나 단발적인 기획에 그치고 말았다. 1980년대 TV문학관의 인기 비결은 각각의 작품이 마치 ‘영화’처럼 완결성을 띰으로써 보는 이들에게 만족감을 선사했다는 데서 찾을 만하다. 이로 인해 각 가정의 텔레비전 수상기가 비로소 ‘안방극장’의 역할을 톡톡히 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40여년이 지난 지금 영화가 가지고 있던 독립된 매체성은 상당히 모호해졌으며 매스미디어로서의 텔레비전의 위상도 현격히 떨어진 상태다. 이러한 변화의 가장 큰 요인으로는 테크놀로지 발달에 따른 다매체 디지털화를 지목할 수 있다. 물론 기술의 발전이 영상 콘텐츠의 제작과 유통에 미치는 영향은 다대하며, 여기에는 수준 높은 기술력이 동원돼 과거에 대한 재현 범주가 넓어지고 이러한 과정에서 생성되는 노스탤지어의 강도가 세졌다는 점도 포함된다. 공사 창립 50주년을 맞이해 ‘영상복원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KBS가 다시 내놓는 20편의 TV문학관 ‘명작’들 역시 과거 촬영된 35mm 필름에 대한 고도의 디지털 복원 작업을 거쳐 ‘재탄생’한 것들이다. 기존의 작품성과 신기술이 결합된 만큼 ‘열녀문’, ‘장마’, ‘갯마을’, ‘봄봄’, ‘분례기’, ‘카인의 후예’ 등의 향후 방영분들은 더욱 강렬해질 봄기운을 받아 시청자들의 보다 뜨거운 반응을 얻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문화카페] 포스트 코로나의 첫 번째 봄

어김없이 봄이 오고 있다. 전 세계가 바이러스로 오염된 답답하고 어두운 시간을 지나 맞이하는 봄이라 더욱 귀하다. 끝없이 순환하는 자연의 회생 능력은 우리에게 실증적인 희망의 메시지다. 몇 년 전, 소박한 야외 콘서트를 제작 기획한 적이 있다. 잔디 정원에 피아노 한 대 얹고 초록빛 나무들 가지에 촛불을 밝히고 마당 곳곳에 크고 작은 촛대로 자연 조명을 만들고 관객들에게도 향초를 나눠 줘 해질녘 촛불을 밝히며 다 함께 노래도 불렀다. 청명한 하늘에 그날 따라 무지개가 뜨고 새는 날고 오후 햇살은 따사롭고 그러다 해지는 풍경을 바라보며 또 밤을 맞으며 4시간 동안의 콘서트는 마무리됐다. 자연과 무척 어울리는 목소리의 임태경 콘서트라 더 감미로웠지만 자연 풍경 속에 놓인 관객 한 명 한 명이 다 예술적인 오브제였다. ‘TK SOUL THERAPY’ 콘서트라는 이름처럼 그날의 관객들은 콘서트를 즐기는 것 이상의 정서적인 감흥을 평생의 추억으로 간직하며 창조 작업의 동반자가 돼 줬다. 아이슬란드를 상징하는 록 밴드 시규어 로스(Sigur Ros)는 그들이 만든 희망어로 노래한다. 그들의 무대는 아이슬란드 계곡, 들판, 어디든지 자연 그 자체이고 그들이 야외 콘서트를 통해 전하는 대자연의 소리와 풍경은 언어와 멜로디 이상의 감동으로 그들의 음악을 완성시킨다. 한국의 전통 연희를 지탱해 오던 마당의 멍석문화는 또 다른 공연 창조의 장이었다. 우리 연극의 뿌리인 굿은 열린 마당을 무대 삼아 관객과 함께 어우러진 총체 예술로 방방곡곡 공동의 희로애락을 달랬다. 오래 전 슬로바키아 구 시가지를 산책하다가 발견한 골목 어귀에 놓인 피아노 한 대와 그 피아노를 자유롭게 연주하던 소녀, 프라하 거리에서 만난 줄 인형 연주가 뛰어났던 원로 거리 예술가와 그 연주에 맞춰 춤추던 노부부는 내 여행의 사진첩에 영원히 자유로운 행복감으로 간직돼 있다. 전 세계가 코로나19의 고통을 거치면서 많은 무대가 사라졌다. 공연장은 물론이고 야외 공연장까지 오랫동안 멈춰 있었다. 지난 3년간 관객들은 공연장을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재미와 감동을 만나는 꿈의 공간으로 여기지 않게 됐고, 전염병에 대한 두려움으로 기피했다. 그런데 더 이상 마스크를 의무적으로 쓰지 않고 싱그러운 봄을 맞이하게 됐다. 자연이 스스로의 생명력으로 땅을 뚫고, 두터운 가지를 뚫고 새 생명을 잠 깨우듯이 우리도 스스로 도전적으로 자가 치유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포스트 코로나의 문턱에서 맞이하는 이 봄은 문화예술 종사자들에게도, 관객들에게도 또 새로운 혁신적인 계기라고 본다. 공연장을 멈추게 했던 코로나는 랜선 콘서트를 활성화시켰고 연극과 뮤지컬의 온라인 상영을 일상화시켰다. 새로운 공연장을 탄생시켜 준 것이다. 그리고 공연장을 넘어서는 새로운 광장들이 새로운 공연을 창조해 줄 것이다. 코로나 이전에 야외 공연을 통해 느꼈던 일탈의 행복감을 이 봄에는 꼭 되찾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창문을 활짝 열어 본다.

[문화카페] 물은 비에 젖지 않는다

“물하고 비는 무엇이 다릅니까?” 스태프가 나에게 물었다. 한 무리의 백조가 호수를 캔버스 삼아 액션페인팅을 하듯 유유하다. 뉴욕 센트럴파크에 있는 아름다운 호수에 가을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이듬해 뉴욕 국제사진센터(ICP)에서 예정된 전시 작품 제작에 집중하고 있었다. 6년간 심의 끝에 뉴욕 ICP에서 개인전이 결정된 , 세계 사진계의 전설적인 큐레이터 크리스토퍼 필립스와의 오랜 대화 끝에 동양 사상을 예술로 승화시킨 프로젝트를 선보이기로 했다. ‘모든 것은 사라진다’. 존재와 비존재를 극적으로 대비시켜 ‘없음으로 실존’하는 사유와 성찰의 화두였다.  뉴욕은 거대한 오픈세트장이다. 인간의 시지각을 초월하는 8x10인치의 대형 뷰카메라로 뉴욕과 심도있는 대화를 했다. 대화는 관념을 해체하고 새로움을 창조한다. 새로움, 그것이 대화의 본질이다. 한 컷의 필름에 8시간 동안 셔터를 열어 움직이는 것은 속도에 비례해 사라지게 했다. 미국 근대 사진의 아버지로 불리는 앨프리드 스티글리츠의 대표작 ‘5번가’를 비롯해 브로드웨이와 타임스스퀘어 등 수많은 자동차와 인파는 사라졌다. 도시는 선정에 든 듯 침묵했다. 21세기 도시의 아이콘 뉴욕이 묵시론적 배경이 됐다. “오! 마이 뉴욕.” 2006년 6월 많은 뉴요커가 작품 앞에서 눈물을 흘렸던 이유다. ICP 전시와 동시에 요시밀로 갤러리에서는 박물관처럼 동시대 인간상을 유리 상자에 설치했던 ‘뮤지엄 프로젝트’를 전시했다. 뉴욕의 메이저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동시에 개인전을 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뉴욕타임스는 프리뷰에 이어 아츠섹션 두 페이지를 썼다. 뉴욕타임스 리뷰 다음 날, 빌 게이츠가 작품을 컬렉션했다. 생을 담보했던 나의 예술철학이 뉴욕의 화두가 됐다. 하지만 나는 뉴욕의 신화에 안주하지 않고 더 깊은 세계로 갔다. 나를 혁명하고, 나를 파격했다. 세계 사진의 역사를 생산하는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무명의 아시아 작가에게 문을 연 이유가 무엇일까. 예술철학의 유니크함이다. 이 글을 쓴 이유다. 6년간의 전시 심의 과정도 이념과 지연과 학연, 패거리 문화에 함몰된 우리네 정서와 달랐다. 오직 작가의 철학을 우선했다. 다름, 그것은 예술과 미술관의 존재 이유이자 뉴욕이 예술의 메카가 된 결정적 이유다. “물하고 비는 무엇이 다릅니까”. 그해 가을의 전설로 간다. “물은 비에 젖지 않는다.” “물하고 비는 같은 H2O 아닙니까?” “우리는 같은 인간이다. 그런데 너와 나의 정체성이 같은가?”. ‘젖지 않음’은 정체성의 다름에 대한 은유다. 모든 인간의 정체성이 다르듯이 물과 비의 본질은 같지만 정체성은 다르다. 같은 비라도 이슬비와 가랑비가 다르고, 봄비와 가을비가 다르다. 어제 내린 겨울비와 오늘 내린 겨울비의 정체도 다르다. 자연과 우주에 명멸하는 모든 존재는 실재하지 않더라도 정체성은 살아있다. 호수에 내린 가을비는 곧바로 죽어 물이 되지만 비의 정체성은 살아있다. 살아있는 수많은 정체가 물의 근원 생명이다. 점이 죽어 선을 만들고, 선이 면을, 면이 공간을 형성하지만 공간에 점, 선, 면의 정체성이 살아있는 것과 같다. 하지만 다름의 정체성을 창조하고 실존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 ‘의지’다. 의지는 물리적 행과 공명하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정체성이 표류하지 않도록 잡아주는 고삐와 같다. 청출어람 인공지능(AI) 시대, 창조의 영역이 카오스에 들었다. 카오스는 카오스 속으로 들어가야 해체된다. 인간의 성찰이 빛날 시간이다. 우주는 다름의 총합이다. 우주가 멸하더라도 비는 비고, 물은 물이다.

[문화카페] 리얼리즘과 아브젝트 아트

현대의 모든 예술작품들의 묘사 대상을 이분법적으로 ‘아름다운 이상’과 ‘추악한 현실’로 나눈다면 대다수의 예술작품이 ‘추악한 현실’이지 않을까. 한국 영화 예술의 정점인 작품 ‘기생충’이 ‘추악한 계급 사회의 현실’을 표현하며 오스카상이라는 쾌거를 이뤘듯 말이다. 필자는 예술사 전반에서 예술에 대한 인식이 가장 크게 바뀌기 시작한 때를 리얼리즘(realism)이 등장한 19세기 중반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는 개인적인 소견이지만 사물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재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예술 사조인 리얼리즘이 실제로 예술의 폭을 방대하게 확장시켰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술가의 주관성이 아닌 객관성이 강조되는 리얼리즘이 어떻게 예술의 흐름을 바꿨다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필자의 답은 리얼리즘이 드디어 그 이전에는 하나의 소시민에 불과했던 인간 본연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이것이 예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지점이라는 것이다. 이후로 예술은 더 이상 우상적이고 미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평범한 인간사와 잔혹한 현실 등 리얼리즘, 문자 그대로 사실적인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냉혹한 현실을 폭로하기 시작했다. 한편 현대에 와서 예술의 대상은 예술가의 주관적인 관점부터 객관적 사실을 넘어 그 어떤 것이라도 가능해졌다. 예술을 향유하는 관람자, 관객, 소비자, 그리고 독자들은 이제 예술에서 아름다운 부분만을 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을 깨우는 것, 찌르는 것, 그리고 새로운 것과 같은 강렬한 어떤 것에 주목한다. 심지어 이의 연장 선상에서 예술은 그 대상으로부터 더럽고 추악한 것이나 공포 같은 감정을 추구하기도 한다. 현대에 와서야 예술적 대상으로 대두되기 시작한 ‘아브젝트(Abject) 아트’가 그렇다. 아브젝트 아트는 예술적 대상뿐만 아니라 대상 주변의 어둡고 버려진 것까지를 포함한다. 불가리아 출신의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비평학자인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1980년 ‘공포의 권력: 아브젝시옹에 대한 에세이’를 통해 아브젝트라는 개념을 처음 소개했다. 크리스테바에 의하면 아브젝트는 인간의 배설물이나 정액, 쓰레기, 동물의 사체같이 더럽고 추악하거나 공포감을 주는 것이고 그 대상에 의해 느껴지는 혐오적 감정을 아브젝시옹(Abjection)이라고 하며 이 둘은 우리가 인생에서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라고 설명하고 있다. 예술에 대한 시각과 폭이 넓어진 현대에 와서야 주목받게 된 아브젝트 아트는 바로 이러한 아브젝트와 아브젝시옹의 예술적 표현인 셈이다. 때마침 현대미술사에서 아브젝트 아트로 독자적인 방향성을 꾸준히 확립해온 독일 출생의 미국예술가 키키 스미스가 선보이는 미술관 개인전 ‘자유낙하’가 아시아 최초로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전시 중이다. 이 작가의 작품에서 우리는 이상적인 인간의 육체나 그로부터 느껴지는 황홀함 따위는 느낄 수 없다. 특히 그러한 이상적인 육체의 흔한 대상이었던 여성이 철저히 파괴된다. 불편하고 적나라한 인간의 자세가, 파편화된 육체가, 그리고 배설물이 예술의 대상에 대한 기득권적인 인식에 질문을 던지며 전시돼 있다. 흔하지 않은 기회의 이번 아브젝트 아트 관련 전시회는 우리도 모르게 자리 잡은 예술적 대상에 대한 선입견을 파괴하고 그동안 애써 보지 않으려 했던 그 너머에 대해 눈을 뜨게 할 것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필자가 아브젝트 아트의 중요성을 논하는 것은 마치 전체적인 예술사에 있어서의 리얼리즘처럼 현대예술의 흐름과 확장에 있어 아브젝트 아트 역시 하나의 돌파구가 되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예술이라는 단어가 그토록 매혹적인 이유로 흥미로운 구조의 외연뿐만 아니라 그 안에 존재하는 대단한 복잡함에 있으며 그러한 모습이 우리의 인생과도 닮아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 매력은 우리에게 익숙하고 사소한 이야기가 되기도 했다가 거대한 담론으로 완성되기도 하는 유연한 확장성에 있으며 관념은 돌고 돌아 결국 나 자신과 연계하는 과정이 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예술의 본질이자 존재 이유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문화 카페] 산업 통계로 본 한국영화계의 현주소

영화진흥위원회에서는 연도별, 상·하반기, 월별로 국내 영화 산업에 관한 결산 자료를 공개한다. 이 가운데 연도별 결산 보고서는 통상적으로 매년 2월20일 전후에 발표되므로 2022년 영화 산업 현황을 나타내는 모든 사항을 아직 상세히 파악할 수는 없다. 그러나 2022년 12월 결산 보고서 안에는 2022년 한 해 동안의 극장 상영작과 관객 수, 매출액뿐 아니라 국적별, 기업별 매출액과 관객 점유율 등에 관한 통계적 수치가 정리되어 있어 이를 통해 한국 영화계의 현주소를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022년 한 해 동안 극장 개봉 편수는 총 1천773편, 관객 수는 1억1천280만여명, 매출액은 1조1천602억여원으로 집계됐다. 이 가운데 한국 영화는 개봉 편수 771편, 관객 수 6천279만여명, 매출액 6천310억여원으로 이는 전체 대비 개봉작 점유율 43.5%, 관객 수 점유율 55.7%, 매출액 점유율 54.4%에 해당한다. 2021년 극장 개봉 편수는 1천637편이었으며 그중 한국 영화가 653편, 외국 영화가 984편이었다. 2022년과 별다른 차이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관객 수는 6천53만여명, 매출액은 5천845억여원이었고 한국 영화의 경우 1천822만여명과 1천734억여원에 불과했음을 감안하면 2022년 한국 영화계의 산업 환경이 전년도에 비해 크게 개선됐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데에는 2022년 들어 코로나19의 여파가 다소 진정됐다는 점이 배경으로 자리한다. 코로나19가 크게 유행하기 시작한 2020년 극장 관객 수는 5천952만여명, 매출액은 5천104억여원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는 적어도 최근 십수년 사이의 최저 수치에 해당한다. 한국 영화의 비중 또한 주목된다. 2020년 관객 수 4천46만여명, 매출액 3천504억여원으로 각각 68.0%, 68.7%를 차지하던 것이 2021년에는 30.1%, 29.7%로 절반 이하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는 코로나19의 대유행하에서 한국 영화의 기획, 투자 및 제작 활동이 위축된 결과로 풀이된다. 따라서 영화 산업적 흐름에 있어 2022년은 코로나19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상승 국면으로의 전환이 두드러진 한 해였다고 할 만하다. 단적으로 2010년대 매년 50%대를 유지했던 한국 영화의 점유율이 2020, 2021년 크게 요동쳤으나 2022년에는 다시 원상태로 돌아왔다. 하지만 완전한 회복 상황을 맞이했다고는 보기 어렵다. 팬데믹 이전까지 국내 극장 관객 수는 7년 연속 연간 2억명 이상을 기록 중이었고 2019년에 이르러 2억2천668만여명이라는 최대 수치에 도달한 바 있었기에 그렇다. 코로나19의 대유행으로 인해 4분의 1 수준으로 급락했던 것이 2022년에는 전년도에 비해 2배가량의 회복세를 나타낸 것이다. 국내 영화 산업의 회복세를 견인한 것으로 1천269만여명의 관객 동원 기록을 세워 역대 10위에 오른 ‘범죄도시 2’를 비롯해 726만여명의 ‘한산: 용의 출현’과 698만여명의 ‘공조 2: 인터내셔날’, 아울러 외국 영화로는 818만여명의 ‘탑건: 매버릭’ 및 12월에만 731만여명의 관객을 동원한 ‘아바타: 물의 길’ 등 이른바 흥행 ‘대작’들을 지목할 수 있다. 그러나 스크린 독점 등의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대부분이 연작이나 시리즈물 형태를 취했다는 점에서 이들 작품의 제작 경향이 긍정적인 신호만을 제시하고 있지는 못 하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1월30일부터는 실내 마스크 착용 의무가 해제되면서 극장을 찾는 이들의 발길도 갈수록 잦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로써 영화 산업이 더욱 활기를 띠게 될 2023년에는 보다 다양한 소재와 매력을 지닌 작품들이 적극적으로 기획, 제작돼 전국의 스크린을 채워 주기를 기대한다.

[문화카페] 사람이 곧 콘텐츠다

즐겨 쓰는 표어 중에 ‘사람이 콘텐츠다’라는 문장이 있다. 어느 강연에서 어떻게 사람이 콘텐츠인가라는 질문을 받은 적도 있다. 그 사람의 이름을 들으면 그 사람의 성과물인 콘텐츠의 제목이 떠오르는 사람, 그 사람은 곧 콘텐츠일 수 있다고 답을 했더니 수강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가 종사하는 공연 분야에서 명성황후의 윤호진, 난타의 송승환을 예시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는 콘텐츠가 그의 머릿속에서 탄생했고 그 콘텐츠의 주인이라는 것, 그 콘텐츠가 20년 이상 장수하는 흥행작이라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그 콘텐츠에 평생 자신의 존재를 건다는 것이다. 영화나 여타 콘텐츠와 공연 콘텐츠의 차이점은 다른 콘텐츠는 일회성의 제작 후 그 결과물이 미디어 플랫폼에 의해 반복 재생돼 유통되는 데 반해 공연은 재공연할 때마다 새로 제작하듯이 참여한 모든 사람과 프로덕션이 실질적인 작업을 또다시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연을 노동집약산업이라고 하고 공연 콘텐츠의 프로듀서는 평생 그 콘텐츠를 재탄생시키는 창조자의 역할에 초심을 다독여야 한다. 얼마 전 송승환 감독은 19년 만에 다시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 공연을 올린 난타의 현장 사진을 생중계하듯이 전송해 줬는데 19년 전에 초연했던 뉴빅토리시어터 극장에서 다시 두드리는 난타의 울림이 감격적으로 전해졌다. 특히 19년 전 극장 앞에서 사진으로 남겼던 기념을 19년 만에 재현했는데 잘생긴 청년 같은 송 감독은 연륜과 지혜로 원숙해진 은발의 장인으로 변해 있었다. 25년 장수한 난타라는 콘텐츠가 곧 송승환이라는 입증이었다. 그리고 그 25년 세월 동안 한 콘텐츠를 성장시키고 완성시키기 위해 그가 치러야 했던 그야말로 피, 땀, 눈물은 강을 넘어 바다를 이뤘을 듯싶다. 2009년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을 기념해 초연했던 창작 뮤지컬 영웅의 공연 현장에서 전율을 느꼈던 적이 있었는데 공연 1년 전에 윤호진 감독이 구체적으로 묘사한 장면 장면이 똑같이 무대 위에서 구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콘텐츠에 대한 집요하고 치열한 꿈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윤호진이란 이름이 곧 콘텐츠임을 부인할 수 없다. 창작 뮤지컬 명성황후와 영웅으로 한국 뮤지컬 역사에 개척적인 기록을 스스로 계속 갱신하고 추가하며 대한민국 국민이 다 아는 콘텐츠로 두 공연을 성장시켰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뮤지컬 영웅은 뮤지컬 영화로 제작돼 300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고 있다. 한국 뮤지컬 시장으로선 새로운 역사가 또 만들어지는 상황이다. 다른 장르도 그렇지만 콘텐츠의 실체는 그 콘텐츠를 탄생시킨 크리에이터와 프로듀서다. 무형의 가치인 콘텐츠의 존재감이 점점 더 강력해지는 사회 패러다임 속에서 사람의 창의적인 상상력과 그 꿈을 현실로 실현시키는 치열한 열정과 노력 자체가 유형의 자산가치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곧 콘텐츠임에 틀림없는데 더 명확하게 표현하면 창의적이고 집요하게 포기할 줄 모르고 스스로의 창의성에 평생을 거는 사람이 곧 콘텐츠다.

[문화카페] 중력을 거스르는 법

통곡하듯 웃었다. 쇠구슬 3개가 위로 굴러 올라가고 있었다. 손녀가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꼭대기에 있는 스위치를 누르면 쇠구슬 3개가 동시에 아래로 굴러 여러 장애물을 통과해 한곳에 모이게 되는 재미있는 구조물이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게 중력이야! 그런데 중력을 거슬러 위로 올라가게 할 수 없을까?” “위로 올라가지는 못해.” “소울이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휴일 저녁 늦은 시간, 초등학교 3학년 손녀와 주고받은 대화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잠에서 깨자마자 다시 조립에 몰두하던 손녀가 나를 불렀다. 아래쪽에 함께 있던 3개의 쇠구슬이 위로 굴러 올라가는 장면을 보여줬다. 비산하는 물방울처럼 사뿐히 날아오르고 있었다. 분명 중력을 거스르고 있었다. 구슬이 아래로 굴러 내리는 장면을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영상을 거꾸로 돌렸던 것이다. 손녀의 역발상에 숨 넘어 가듯 웃었다. 아이는 지난밤 꿈속에서 중력을 거스르는 법을 깨쳤다. 중력이 우주 만물의 이치라면 중력을 거스르는 일은 인간의 일이다. 중력을 거스르기에 물리적 에너지와 정신적 에너지가 있다. 인간의 우주탐사는 물리적 에너지의 임계상황으로 중력과의 전장이다. 지난해 11월 미국 우주군의 비밀 임무 위성을 싣고 미국항공우주국(NASA)에서 쏘아 올린 팰컨헤비 로켓의 추력은 약 500만파운드로 승객과 화물, 연료를 가득 채운 747 점보기를 우주로 올려 보낼 수 있는 힘이라고 했다. 이는 인류사에 현존하는 최고의 반중력이다. 상대적으로 정신적 에너지는 1㎎의 추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 대신 물리적 에너지를 활성화할 수 있는 심리적 환경 혹은 근원적 상상력을 제공한다. 근원적 상상력은 마음이 창의적으로 지각하는 행위이다. 그것이 개념(concept)이다. 개념은 예술에서 가장 큰 지분을 가지며 현대미술의 전부라 해도 과하지 않다. 개념화된 정신적 에너지의 추력은 한계가 없다. 시공간을 초월해 우주를 움직일 수 있다. 역설적으로 500만파운드의 추력은 1㎎의 물리력도 갖지 못한 정신적 에너지 진화의 척도이며 과학과 예술의 상호 동질성의 교집합이다. 아래쪽에 있던 쇠구슬을 위로 올리기에 실재하는 물리력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아이가 그것을 간단하게 해결했다. 그러나 개념이 공감받기 위해서는 창의적 지각행위가 합당한 차이를 인식해야 한다. 여기서 합당한 차이는 3개의 쇠구슬이 위로 굴러 올라가는 현상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아이의 마음속에 환상적 혁명을 일깨워줌이다. 그 과정이 진화다. 인간이 우주로 가는 모든 과정이 여기에 해당한다. 현대문명의 이기를 다루는 데 도가 턴 요즘 아이들에게는 여반장이지만 중력을 거스르기 위해 고민했을 인간의 가치에 주목한다. 손바닥이 아릴 듯 박수를 쳤던 이유다. 그럼에도 모든 생명체의 탄생은 익은 감 떨어지듯 그냥 오지 않는다. 나오려는 나의 의지와 내려는 어미의 의지의 합이 맞아야 생명을 얻는다. 중력을 거스르는 어미와 자식의 고통의 합이 생명 탄생의 숭고함이다. 그 위대한 탄생은 중력과의 싸움의 시작이다. 뒤집고 앉고 직립해서 두 발로 걷는 일, 모든 과정이 중력과의 싸움이다. 중력에 순응하려는 타성과 중력을 거스르려는 진화의 속성이 맹렬하게 대치한다. 태어남(誕)과 살아감(生)이다. 그렇게 인간이 끊임없이 중력을 거슬러야 하는 이유는 내 존재 이유를 망각하지 않기 위해서다. 우주의 미아가 되지 않기 위해서다. 3개의 쇠구슬이 위로 굴러 오르는 장면은 통쾌했다. 손녀의 역발상을 축복한다.

[문화카페] “I shop, therefore I am”

1987년 미국 출신의 설치미술가 바버라 크루거는 ‘I shop, therefore I am(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을 제목으로 한 사진작품을 세상에 소개하며 현대사회에서의 소비개념을 예술적으로 확장한 바 있다. 그녀의 메시지는 유명한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의 명언 ‘I think, therefore, I am(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을 차용한 것으로 소비에 대한 현대인의 욕망을 예술작품을 통해 거침없이 드러낸 것이다. 당시 파격적인 메시지로 주목받았던, 사진과 텍스트가 마치 광고물처럼 조합된 이 작품은 35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몇 가지 화두를 제기할 수 있을 만큼 흥미롭다. 먼저 이 작품을 통해 쇼핑이라는 행위를 인간의 존재감과 동일시할 만큼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소비에 대한 인식이 확대됐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광고적 수법의 메시지 아트는 일상과 예술의 자연스러운 융합을 함의한다. 이미 20세기 후반부터 예술가들이 예술을 타 산업과 융합하고 일상으로 가져와 대중화시키려는 적극적인 노력을 취했음을 밝혀낼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더해 대중의 일상 속에서 상업적인 가치를 목적으로 삼는 제품 브랜드들도 예술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며 자신들의 상품과 예술을 동일시하려는 경향을 드러내는 아트마케팅에 힘을 쏟기 시작했으며 이는 이후 수많은 아트 컬래버레이션이 탄생하는 배경이 됐다. 대표적인 예로 2012년 대규모로 진행된 루이비통과 일본의 설치미술가 쿠사마 야요이의 컬래버레이션을 들 수 있다. 당시 컬래버레이션 전시를 기획한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서는 ‘상업적’으로, 전 세계 루이비통 매장들의 쇼윈도에서는 ‘예술적’으로 전시가 진행됐고 결과적으로 루이비통의 명성과 야요이의 예술성도 모두 성공을 거두게 됐다. 이렇게 브랜드를 소비하는 소비자와 예술을 관람하는 관객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지점에서 동시대의 적극적인 아트마케팅은 소비자를 자신도 모르게 브랜드의 주체자로서 깊이 빠져들게 한다. 이러한 브랜드의 소비자 주체성 현상은 예술의 관객 주체성과 궤를 같이한다. 역사와 함께 진화한 관객들이 이제 예술 공간에서 단순히 관극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작품에 참여하고 소통하며 생산자의 관점에서 예술을 경험하기를 희구한다. 또 경험에 더해 예술과 상품을 자신과 동일시하기를 바라는 욕구도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모두 수많은 럭셔리 패션 브랜드의 예술적 형태의 전시회가 오늘날과 같이 성행하게 되는 데 견인한 배경이다. 실제로 세계적인 럭셔리 패션 브랜드들은 더욱더 예술과 닮아가기를 원하고 예술적 차원의 상업활동에 힘쓴다. 관객들은 해당 브랜드의 전시 관객에서 예술작품을 구매해 소장하려는 소비자로 변모한다. 즉, ‘I shop, therefore I am’ 브랜드 제품이 어느새 예술작품으로 둔갑해 내 손으로 오게 되는 경험을 만끽하는 것이고 쇼윈도가 아닌 전시회나 박물관에 전시된 예술작품 같은 브랜드 제품을 구매하는 것이다.

[문화카페] 한 거장 감독의 ‘겨울 이야기’가 기다려지는 이유

지난주 목요일인 2022년 12월 29일, CGV 용산아이파크몰에서 고(故) 신상옥 감독의 유작 ‘겨울 이야기’의 언론배급 시사회가 열렸다. 아내를 잃은 충격으로 치매를 얻은 노인(신구 분)과 그를 보살피는 며느리(김지숙 분) 사이의 가족애를 다룬 이 영화가 18년간 미공개 상태로 있다가 비로소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100년이 넘는 한국 영화의 역사에서 신상옥 감독은 가장 특별한 이력을 지닌 인물로 알려져 있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남한에서 최고의 감독 및 제작자로 활동하다가 납북된 뒤 1980년대에는 북한 영화를 만들기도 한 데다 1950, 60년대 최고의 여배우였던 최은희와의 염문과 결혼, 이혼과 재회, 그리고 동반 탈북이라는 드라마틱한 삶의 여정을 경험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영화’ 같은 생애를 보낸 신상옥 감독이 인생 말년에 남긴 마지막 영화라는 사실만으로도 ‘겨울 이야기’는 대중의 관심과 언론의 조명을 받기에 충분하다. 사연 많은 거장 감독의 손을 거친 어느 한 작품이 후대에 완성돼 일반에 공개되는 경우가 흔한 일은 아니기에 그렇다. 더욱이 지금은 ‘거장(巨匠)’으로 불릴 만한 영화감독이 나오기 쉬운 시대가 아니다. 디지털 영상 매체의 기술적 발달로 인해 누구라도 영상물 제작이 가능해졌고 다양한 콘텐츠가 온라인 공간을 채우고 있으며, 이에 따라 영화의 소재와 기법 또한 보다 자극적이면서 감각적인 경향을 띠게 됐다. 게다가 코로나19의 영향하에 OTT 드라마가 약진하고 영화의 배급 방식, 상영 체계, 관람문화 등을 둘러싼 전반적인 변화가 일면서, 그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 의문이 제기됨은 물론 영화의 종언이 점쳐지기까지 한다. 이러한 면에서 ‘겨울 이야기’가 설을 앞둔 18일에 개봉된다는 소식은 반가움을 넘어 기대감을 자아내게 한다. 과거 영화계에서도 ‘명절 특수’나 ‘구정 대목’이라는 말이 유행했을 만큼 추석과 더불어 설 연휴에는 시내 영화관이 흔히 인파로 북적였는데, 진지한 문제의식과 과감한 실험정신을 통해 서사, 주제, 형식적 차원에서 폭넓은 스펙트럼을 선보여온 신상옥 감독의 영화 역시 스크린을 장식하곤 했다. 그렇다면 이미 17년 전 세상을 떠난 거장의 유작 속에는 84분이라는 러닝타임 동안 과연 어떠한 이야기가 어떻게 연출돼 있을까. 이번 겨울에도 어김없이 찾아온 강추위를 녹여줄 가슴 따뜻해지는 영화 한 편이 벌써 기다려진다. 올 설 연휴에는 오랜만에 극장가를 찾아 한 편의 영화가 선사하는 진한 감동을 느껴봐야겠다.

[문화카페] 한 잔의 차를 올립니다

거미줄에 걸린 안개가 보석처럼 빛났다. 거미는 안마당을 비워 놓은 채 벗을 기다리듯 느긋하다. 안개 잦은 겨울 아침, 거미줄과 안개와 햇빛이 빚은 환상적인 풍경이다. 새집이 있다. 벌집이 있다. 아프리카흰개미 집이 있다. 인간의 감각을 초월할 정도로 구조적이고 정밀하다. 새집과 벌집이 그러하듯 흰개미집은 인간이 만든 최고의 건축시스템보다 더 효율적이라 했다. 인간은 자연을 모델로 진화를 거듭했다. 인간이 보기에 그대로인 것 같지만 지구 생태계 생성 이전부터 새집과 벌집, 개미집이 존재하지는 않았다. 원시시대 움막에서 마천루로 진화한 인간 진화의 속도와 다를 뿐, 그들도 진화한다. 코끼리, 코뿔소, 사자, 호랑이는 집을 짓지 않는다. 영역을 지배한다. 미물은 낮추며 산다. 바이러스는 인간을 시험에 들게 한다. 모든 존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우주의 아름다운 별, 지구란 행성에 왔다. 인간은 새처럼 집을 짓고 호랑이처럼 영역을 지배한다. 옛날 옛적부터 동굴에 흔적을 남길 줄 알았고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을 지었다. 21세기 파라오를 꿈꾸는 빈살만은 새로운 미래를 의미하는 네옴시티를 시작했다. 온 우주에 비해 바이러스 크기에 불과한 인간은 교(敎)와 행(行)이 새의 양 날개처럼 등가를 이루며 문명을 창조했다. 광의적으로 우주에 기거하는 모든 것은 창조다. 예술이다. 그 사이에 인간의 예술이 경기를 일으킬 경천동지할 사건이 발생했다. 인공지능(AI)이다. AI는 순식간에 엄청난 그림을 쏟아낸다. AI가 그린 그림을 보는 순간 말을 잃었다. 낯설고 익숙한 모든 유형의 꼴이 망라됐다. AI는 인간의 창조물이다. 생물학적 자식이 아니라서 호모사피엔스의 종말이라 우려하지만 메타 호모사피엔스의 기원으로 긍정할 일이다. 당연히 AI 가 그린 그림도 예술이다. 예술은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라서 그렇고, 진화의 속성은 실수로 던진 패라도 윷판처럼 백도가 되지 않기에 그렇다. 이달 1일 공개된 AI가 만든 챗봇 ‘Chat GPT’를 두고 뉴욕타임스는 “경외심마저 든다”고 했다. 이미 인류사의 상수가 된 AI는 인간의 수를 한참 넘어섰다. “AI 시대는 빅데이터가 생명이다.” 이어령 선생의 통찰은 현상이 됐다. 그럼에도 인간이기를 축복하는 예술과 종교와 철학의 경계를 초월한 인류 문명사의 위대한 창조, 파르테논이 있다. 피에타가 있다. 모나리자가 있다. 미켈란젤로가 시작부터 피에타를 조각하거나 다빈치가 모나리자를 그린 것은 아니다. 생명을 다해 돌을 다듬고 그림 하던 어느 순간, 돌 속에 있는 지저스와 마리아를 보았다. 내 속에 있던 어미(母)의 자비가 차가운 돌 속에 있던 지저스의 생명이 됐다. 삶은 죽음에 의해 생명을 얻는다. 죽음은 삶에 의해 정체를 가진다. 나도 없고 너도 없는 양망(兩亡)의 세계, 피에타가 됐다. 모나리자가 됐다. 부활의 참이다. 윤회의 참이다. 정으로 돌을 조각한다. 칼로 나무를 조각한다. 지저스가 되고, 붓다가 된다. 그런데 단 한 가지 정으로, 칼로 조각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인간이다. 인간이 기도하고 수행하는 이유다. 내 속에 있는 지저스와 붓다를 조각하기 위해서다. 모든 인간에게 내재한 경이로운 세계, 이것이 지저스와 붓다의 존재 이유다. “최고의 작품은 내 안에 있다.” 죽음을 앞둔 미켈란젤로의 말도 같은 의미다. 모든 것에는 모든 것이 있기 때문이다. 2022년이 저문다. 영원으로 간다. 인간을 성찰한다. 예술을 성찰한다. 한잔의 차를 올린다.

[문화카페] ‘소전서림’ 흰 벽돌에 둘러싸인 책의 숲

누구나 한 번쯤 꿈꿔 봤을 상상 속의 서재가 있을 것이다. 드넓은 책장에는 순서에 맞춰 빽빽하게 꽂혀 있는 책들이 둘러싸고 그 시선의 끝은 적당한 따뜻함이 느껴지는 조도의 조명이 있으며 알맞은 사이즈의 책상과 부드러운 의자가 있는 서재. 그런데 이런 모든 것들이 갖춰져 있을 뿐만 아니라 몇 가지 특별함이 더해진 장소가 있다. 화이트톤의 감각적인 공간 구성과 더불어 흰 벽돌 문양이 4m가 훌쩍 넘는 천장을 감싸고 있고, 고급 인테리어 잡지에서나 만날 법한 가구가 즐비하다. 이와 더불어 미술관을 방불케 하는 프랜시스 베이컨, 윌리엄 켄트리지 작품과 같은 유명 회화 작품이 곳곳에 걸린 예술과 인문학 관련 책들만으로 정돈된 서재와 도서관의 융합, 바로 2020년에 개관한 청담동에 위치한 소전서림이다. ‘7. 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타자의 생과 다른 세계에 이르는 길이라 그 공간은 익숙함에서 벗어난 공간이어야 한다.’ 소전서림의 공간개념에 대한 철학의 7가지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이다. 일상과 환상을 수차례 넘나들 것 같은 예술의 형태로 우리 일상의 한 공간으로 자리 잡은 이 공간은 어느 땐 프라이빗 서재같이 느껴지다가 어느 틈에는 예술도서관으로, 그리고 만남과 교류의 예술살롱으로 변모한다. ‘흰 벽돌에 둘러싸인 책의 숲’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공간의 뼈대를 이루는 내부와 더불어 건물의 외부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공수해온 흰색 특수 벽돌로 마감했고 스위스 건축가 다비데 마쿨로에 의해 정사각 큐브가 쌓아 올려진 형태로 지어졌다. 특히 소전서림은 약 4만권의 책 중에서 문학예술 관련 책만 3만권에 이를 만큼 예술도서관으로서의 의미가 크다. 그러한 이유로 필자에게 이곳은 도서관의 기능으로서 단순히 지식을 확장하는 곳보다는 미지의 보물을 찾을 수 있는 곳으로 인식된다. 한편 소전서림은 몇 가지 역설적인 부분에서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먼저 실제로는 개인적인 공간인 서재와 도서관은 공존할 수 없다는 점이 그렇다. 또 서울에서 가장 번화한 청담동에서 도심 속의 고요한 휴식처를 제공하기 위해 설계부터 일상과 유리된 공간을 지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반대로 소통의 장을 구현하려 한다는 점도 그렇다. 편안함을 추구하지만 실제 소전서림의 분위기는 공간을 이용하는 이들로 하여금 굉장히 조심스럽고 차분하게 만든다. 이곳의 입구인 나선형 계단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예술의 곁에 다가가 예술을 실행하는 주체가 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익숙함을 벗어난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각자의 보물찾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소전서림의 책의 숲과 같은 도서관의 대공간뿐만 아니라 ‘예술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라는 뜻의 ‘예담’에서는 테마 전시, 강연, 공연과 낭독회 등의 이벤트가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또 예술에 대한 논의와 원데이클래스가 열리는 ‘하오재’가 있으며 중정의 작은 야외공간 놀이터에서는 잠시 맑은 공기와 함께 쉴 수도 있다. 이 처럼 소전서림의 모든 공간이 의미 있고 특별해 보인다. 예술적 공간이 주는 영감으로 누군가는 오늘도 그곳에서 작품을 탄생시키고 있을지도. 박성연 호원대 공연미디어학부 교수

[문화카페] 영화에 관한 본질적 질문이 시사하는 것

지지난주 토요일인 11월 26일, 동국대학교 서울캠퍼스에서 색다른 학술대회가 개최됐다. 한국영화학회의 창립 50주년을 맞이하여 기획된 이 행사에서는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국내외 총 24인의 발표자가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통해 각자의 견해를 소개했으며 이에 대한 질의응답이 뒤따르기도 했다. 한국에 있는 영상(학) 관련 학회 중에서도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한국영화학회 창립 5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영화의 정체성을 둘러싼 ‘대토론회’가 펼쳐진 것이다. 영화학을 전공하는 연구자들이 모인 뜻깊은 자리에서 영화에 대한 가장 단순하고 원초적인 물음이 화두를 장식하게 된 데에는, 관련 기술의 발달과 산업 환경의 변화로 대변되는 최근의 동향이 그 배경으로 자리한다. 단적으로, 오랫동안 필름(film)을 매개로 해왔던 영화의 제작과 유통은 2000년대 이후 디지털화됐고, 2020년부터는 코로나19 팬데믹을 계기로 OTT(Over The Top) 서비스가 급속히 확산됨에 따라 영화관(cinema)이라는 전통적 상영 공간이 상당 부분 온라인으로 대체됐다. 더불어, 영화/텔레비전 제작물/비디오용 영상물 등으로 구분됐던 매체별 영상 콘텐츠 간의 경계 역시 차츰 허물어져가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영화에 관한 본질적 질문, 즉 영화의 개념과 범위를 둘러싼 일차원적 의문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됐음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도 하겠다. ‘필름’과 ‘시네마’, 혹은 ‘무비(movie)’로 일컬어져온 영화가 자신의 이름에 부합하지 않을 정도로 급격하고 거대하게 의미 변화와 범주 확장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학계에서는 (타 매체와 구별되는) 영화(고유)의 특성을 중시하거나 그것을 해체시키는 작업을 통해 영화를 둘러싼 근본적 질문을 향한 답변을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명쾌한 해법이 제시되거나 의견의 일치가 이루어지는 경우는 찾아보기 쉽지 않으며, 오히려 논의가 거듭될수록 영화의 정체성을 구명하는 데 혼돈이 가중되는 양상이 전개되기까지 한다. 기실 130여년에 이르는 세계 영화사에서 테크놀로지의 발전은 늘 있어왔다. 예컨대, 19세기 말 탄생 과정에서 영화는 1분 남짓의 흑백-무성 필름으로 촬영된 영상물의 형태로 여러 편의 프로그램에 포함되거나 단편으로 구성되어 극장 및 야외 공연장에서 영사기를 통해, 또는 별도의 실내 공간에서 1인용 기계 장치 등을 통해 대중들 사이로 파고든 바 있었다. 이후 영화는 장편화, 유성화, 컬러화를 거쳐 디지털화됐고, 텔레비전, 비디오, 인터넷 매체 등과 경쟁 관계에 놓이기도 했다. 주목되는 바는, 그 과정에서 영화를 둘러싼 재고찰과 재규정을 위한 사람들의 노력이 동반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의 흐름은 여느 때보다 영화에 대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현 시점으로도 이어진다. 혼란의 당사자 및 노력의 주체는 누구인가? 바로 사람(人間)이다. ‘인간’의 세계를 “반영하여 그린다”는 점에서 ‘영화(映畫)’라는 명칭에 수용된 본질적 성격 역시 궁극적으로는 사람에게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에 관한 본질적 질문이 시사하는 것은, 결국 인간 스스로가 이에 대한 명확한 답안을 내놓으리라는 상당히 중요한 사실 그 자체라 할 만하다. 함충범 한국영상대 영화영상과 교수

[문화카페] 인생 3막의 가능성

나이 60세에 뮤지컬 작곡가로 데뷔한 여성이 있다. 그런데 그 데뷔작으로 뮤지컬 분야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토니상 작곡상을 받았다. 놀랍도록 성공적인 인생 재도전이다. 더 놀라운 것은 그녀가 1980년대의 팝 아이콘이었던 ‘신디 로퍼’라는 것이다. 1985년 ‘She's So Unusual’로 그래미상 5개 부문을 휩쓸었고 앨범 한 개에 담긴 4곡이 빌보드 싱글 톱에 오른 싱어송 라이터인 신디 로퍼가 30년 만에 뮤지컬 작곡가로 길을 바꿔 단숨에 토니상 6개를 휩쓰는 흥행작을 탄생시킨 것이다. 뮤지컬 ‘킹키부츠’! 열일곱살에 무작정 가출해 음악으로 세계를 뒤흔들었던 그녀의 역경 속의 성공 스토리와 닮은 뮤지컬이다. 망해 가는 신발 공장을 물려받은 아들이 아버지의 가업을 성공시킬 방법을 찾다가 우연히 만난 드랙퀸(여장 남성)의 타고난 디자인 감각을 빌려 남성의 몸무게를 지탱하는 단단한 강철굽의 킹키부츠를 개발해 내는 이야기인데 주인공들의 성장 스토리다운 성공과 희망 메시지가 극 전체를 감싸고 있다. 거기에 작사와 작곡을 맡은 신디 로퍼의 경쾌하고 에너지 넘치는 음악이 자칫 교훈적일 수 있는 이야기를 재미나게 완성시켜 준다. 실패를 극복하는 젊은 패기가 가득한 뮤지컬 ‘킹키부츠’는 그래서 최근 삶이 고단한 우리나라 관객들을 열광시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3년 전, 한국의 대표적인 원로 연극배우인 박정자 선생님의 연극 인생을 회고하는 1인극 ‘노래처럼 말해 줘’를 연출하면서 물리적인 나이가 사람의 실질적인 에너지와 감각, 건강 상태를 규정할 수 없음을 실감한 경험이 있다. 당시 78세의 여배우는 여전히 젊게 설렜고 여전히 열정적이었고 여전히 강렬했고 여전히 아름다웠고 여전히 힘이 넘쳤다. 매일 긴밀하게 함께 연습할 때마다 속으로 저 강력한 에너지의 원천은 무엇일까 궁금했는데 결론은 정신력과 자기 확신의 산물이라는 거였다. 함께 작업하는 기간 동안 박정자 배우는 단 한 번도 스스로에게 나이와 시간이라는 잣대를 들이대지 않았고 배우로서 실존적이고 초월적인 자아로 일상마저도 충실했다. 새로운 존재론이었다. 최근에 창작을 기반으로 한 문화예술계 및 대중문화 관련 직업의 특성인 무정년, 무은퇴가 주목 받고 있다. 70대에 글로벌 무대에서 전문성을 인정받는 원로들의 행렬이 본격화하고 있다. 한국 사회는 앞으로 15년 후에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인구의 30%를 넘어서는 초고령사회에 이르고 그 가속도는 세계 최고 수준이란다. 평균수명이 100세에 이를 것이라는 예측은 이미 현실이 됐다. 이제 60세를 넘기면서 새로운 직업과 새로운 재능에 도전해 객관적인 결실을 얻는 인생 3모작의 전문가들이 계속 나타날 것이다. 앙코르 커리어! 미국의 은퇴설계 지원 비영리단체 시빅 벤처스의 창시자 마크 프리드먼 대표는 100세 시대에는 사람들이 50세를 기점으로 인생 2막을 준비해 75세까지 25년은 더 일하게 될 것이고 퇴직자들은 일로부터의 해방(Freedom form work)’이 아닌 ‘일할 자유(Freedom to work)’를 원한다면서 앙코르 커리어라는 용어를 만들어 냈다. 최근에 문화계에서 증명되는 인생 2모작, 인생 3모작의 주인공들은 우리 사회 전반의 노년들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에 대한 희망적인 단서일 것이다. 그리고 한국 사회도 어느새 중장년층의 은퇴 후 남은 반평생의 잉여 시간이 사회적 부담과 책임이 되고 있는 현실에 직면했다. 선진국처럼 앙코르 커리어에 대한 노년의 사회적 제도와 정책이 본격화돼야 하는 시점이다. 이유리 서울예술단 단장 겸 예술감독·서울예술대 예술경영전공 교수

[문화카페] 경지하다… 지경하다 <1>

춤이 절로 나왔다. 그림을 보는 순간 크게 웃었다. 태어난 지 22개월 된 아이가 세상에 와서 처음한 황칠이었다. 당장에 밑 칠해 두었던 하얀 캔버스를 벽에 세워 두었다. 두발로 직립하고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 아이는 왔다 갔다 하면서 찌르고 긋고 두드렸다. 열흘 남짓 되었을까 상상 밖의 그림이 완성되었다. 감동이었다. 의식과 도식이 흉내 낼 수 없는 본성과 본능의 향연, 무아의 경지였다. 아이가 의식의 통제를 받으며 선을 긋거나 현대미술의 흐름을 읽고 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이의 마음이 궁금했지만 헤아릴 길 없다. 10년 전의 일이다. 손녀의 황칠은 경지(境地)와 지경(地境)에 대한 절절한 화두가 되었다. “벽에 똥칠하기 전에 죽어야지!” 노망을 예비하는 노년의 시린 독백이지만, 생에 대한 강한 의지의 역설이다. 무아의 경지 황칠과 지경의 표정 똥칠은 닮았다. 둘 다 의식의 통제밖에 있다. 아이의 황칠은 인문의 시작이며 창의적 본성의 싹이다. “그냥”하는 예쁜 짓이다. 어른의 “그냥”은 멀쩡한 의식이 허하지 않지만, 아이는 단박에 해치운다. 똥칠은 슬픈 해프닝이다. 우주를 방황하는 혜성이다. 인간은 황칠에서 그림으로 진화하여 꽃이 되었다가 의식의 경계에서 추방되어 똥칠로 생을 마감한다. 본래로 돌아간다. 황칠과 똥칠, 여기가 화양연화의 실경이다. 35년 전, 정신병원에서 정신이 마실 나간 많은 사람을 만났다. 무쏘의 불처럼 의지가 의식에 앞섰던 살 불 살 조의 시절, 인간의 정신을 보겠다고 덤벼들었다. 융과 프로이트의 의식과 무의식의 텍스트가 미덥지 않았던 터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나?” 지경을 위로하는 비감한 말이다. 다빈치의 후예들이 있다. 칸딘스키다. 피카소다. 죽었거나 살았거나 그들의 붓질도 결국은 경지를 탐하는 여정이다. “나는 라파엘로처럼 그리기 위해 4년이 걸렸지만, 어린아이처럼 그리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피카소의 고백이다. 황칠처럼 마음 가는 대로 칠한 것 같지만, 잭슨폴록도 바스키야도 산발한 의식의 패치워크다. 치밀하게 의식을 제어한다는 말이다. 변기를 예술로 둔갑시킨 뒤샹은 서명 하나로 의식을 개념으로 만들었다. 회화의 외연을 캔버스 밖으로 확장한 혁명적 사건, 회화의 파앤드어웨이다. 하지만, 뒤샹의 서명도 의식의 변주다. 서명은 문명사회에서 성문화된 자의식의 아바타이다. 경지와 지경을 가늠하는 일은 제정신으로는 불가하다. 양자역학으로도 증명할 수 없다. 피카소의 고백도 “아이처럼” 황칠하고 싶은 희망 사항이듯 경지와 지경은 스스로 자기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다. 자유가 스스로 자유라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자유라 말하는 순간 자유에 구속되기 때문이다. 이는 “진리는 길 없는 경지다”는 크리슈나무르티의 말과 어순만 다를 뿐 같은 맥락이다. 분명한 것은 습(習)에 물든 어른은 황칠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정신줄을 놓아야 한다. 용맹정진, 기적처럼 그 경계를 넘어서면 그 순간, 벽에 똥칠하게 된다. 일장춘몽이다. 그 얄궂은 위치가 경지와 지경이다. 경지와 지경은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밖에 있다. 돌아갈 수 없다. 건너뛸 수 없다. 둘 다, 제정신이 완벽하게 디가우징된 불가역적 세계다. 어찌하오리까? 무애(無㝵)다. 원효의 화쟁(和諍)터로 간다. 의식과 무의식, 경지와 지경, 황칠과 똥칠, 모든 정체들의 화해가 화쟁의 참모습이다. 씨 뿌리는 일, 쌀 씻는 일, 설거지하는 일상이 무애다. 그냥 하는 막춤이 무애의 춤이다. 이를 넘어설 재간은 없다. 순간을 경배하는 일, 여기가 화양연화의 진경이다. 생의 모든 순간이다. 춤이 절로 한다. 김아타 사진작가

[문화카페] Art is Just Around the Corner

일상에서 우리는 예술의 숨결을 흔히 느낄 수 있다. 빌딩 앞에 설치된 거대한 미술품이나 아트가 가미된 간판, 정거장에서 홍보되는 디자인된 광고물, 담벼락을 수놓은 그래피티(graffiti) 등 동시대에 와서 길모퉁이를 돌면 어느 곳에나 쉽게 다양한 형태의 예술을 만날 수 있게 됐다. 즉, 행인을 잠시 다른 차원의 시공간으로 끌어들이는 예술은 우리의 일상 곳곳에 편재해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행인에서 관객으로 변화해 어떤 작품 일부가 돼보는 경험도 가능하다. 이는 길을 가다 의도치 않게 어떤 작품 속 일부가 돼버린 행인마저 관객이 될 수 있다는 ‘동시대 문화예술의 관객성’과도 궤를 같이한다. 문화예술은 이처럼 동시대에 와서 이전보다 확장된 개념으로 이해되는 경향을 보이는데 새롭게 재해석된 동시대 문화예술은 더 이상 작품의 창작자, 즉 예술가 중심이 아닌 작품을 보고 즐기는 관객 중심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주변의 현상을 예술의 일상성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보고 환영해야 할 것이다. 한편 세계의 도심이자 그 자체가 예술로 여겨지는 뉴욕 맨해튼은 이러한 예술의 일상성이 두드러지는 대표적인 도시다. 이 도시를 거니는 것만으로 하나의 예술적 행위를 하는 중이라는 기분이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니 말이다. 필자가 코로나 팬데믹 직전 뉴욕을 방문했을 때 길가에서 사람들의 유쾌한 비명을 들었고, 그 소리를 따라간 길목에서 놀라운 광경을 본 경험이 있다. 으레 차가 다녀야 할 도로가 통제되고 한가운데 설치된 거대한 시소 놀이터가 그것이었다. 맨해튼의 중심가인 37가와 38가 사이 브로드웨이에 누구나 이용 가능한 12개의 대형 시소 예술품이 설치돼 있었다. ‘충동’ 혹은 ‘자극’이라는 뜻을 지닌 ‘Impulse’가 바로 이 작품의 제목으로 단순한 시소가 아닌 5~8m의 다양한 길이로 제작돼 발광다이오드(LED) 조명으로 빛을 내는 시소로 이용자들의 튕기는 탄성에 의해 내장된 스피커에서 무작위적 사운드 시퀀스를 방출하는 예술작품이었다. 목적 없이 길을 걷던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고, 휴대폰을 들어 카메라를 켜게 하며 자연스럽게 예술작품의 행위자가 되게 하는 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보는 이도, 시소를 타는 이도 모두 흥분된 기분으로 낯선 사람들과 마주 본 상태로 시소 예술을 즐겼다. 나이도 인종도 알 수 없는 처음 본 상대방의 운동성을 믿고 의지하며 함께 즐기는 찰나에 아마도 어떤 이들은 놀이터에서 시소를 타던 각자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을 것이다. 필자는 당시 도시 한복판에서 사람들의 함박웃음을 본 것만으로도 그 순간 형언할 수 없는 해방감을 느꼈다. 이렇게 불특정 다수와 함께 의도치 않게 즐거움을 나누는 경험은 과연 예술이 아니라면 가능할까. 그렇다. 동시대에 와서 예술은 우리 일상 곳곳에 깃들어 있고 우리는 다양한 시공간에서 예술을 접하는 경험을 한다. Art is just around the corner. 예술이 우리가 예상치 못한 사이에 항상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박성연 호원대 공연미디어학부 교수

[문화카페] 필름이 지니는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

10월27일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시청각 유산의 날’이다. 1980년 10월 27일 세르비아 벨그라드에서 개최된 제21차 총회에서 ‘시청각 기록의 보호와 보존에 대한 권고문’을 채택한 일을 기념하기 위해 2005년부터 유네스코 회원국을 중심으로 세계 각지에서 관련 행사가 펼쳐져 왔다. 한국의 경우 2019년과 2020년에 오프라인 행사가, 2021년에는 온라인 행사가 있었다. 올해에는 한국영상자료원과 새공공영상유산정책포럼의 공동 기획 하에 10월 27일 오후 2시부터 5시 30분까지 서울 상암동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KOFA 제2관에서 2년 만에 오프라인 행사가 열렸다. 테마는 ‘필름 아카이빙을 말하다’였다. 이번 행사는 다양한 시청각 유산(Audiovisual Heritage) 중에서도 영상 매체, 특히 영화에 초점이 맞춰졌다. 1부에서는 이네스 토하리아 테란(Ines Toharia Teran) 감독의 <필름, 우리 기억의 살아있는 기록(Film, the Living Record of our Memory)>(2021)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상영됐고, 2부에서는 한국영상자료원 성연태 대리와 기록문화보관소 박주원 실장의 전문가 대담이 마련됐다. 대담의 진행은 필자가 맡았다. 이를 통해 필름 아카이빙의 개념과 필요성, 국내외 필름 보존 및 보관, 영상 복원 및 디지털화 작업의 공정과 업무의 특수성 등에 관한 개괄적이고도 구체적인 논의와 설명이 이뤄졌다. 알려진 바대로, 19세기 말 영화가 등장하고 정착하게 된 데에는 필름의 개발과 상용화라는 기술적, 산업적 배경이 자리해 있었다. 이후에도 무려 100여 년간 영화는 촬영, 현상, 배급, 영사 등의 전 과정에서 ‘필름’이라는 물리적 기반을 토대로 삼았다. 영화(Film)의 역사가 곧 필름(film)의 역사였던 것이다. 그렇다 보니, 적어도 20세기만큼은 영화 필름에 지나간 세월의 흔적(歷史)이 생생하게 담겨졌다. 인류 역사의 바탕에 인간의 기록 행위가 전제돼 있음을 떠올리건대, 동시기 가장 대중적이면서도 예술적인 영상 매체로서의 지위를 누렸던 영화 필름이 지니는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는 상당히 크다고 하겠다. 필름은 외부 환경에 따라 쉽게 변질되고 손상되는 물질적 속성을 띠기도 한다. 때문에, 소중한 문화유산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적정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며 그것을 철저히 관리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불행히도 국내에서는 오랫동안 필름에 대한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공교롭게도 10월 27일은 한국 ‘영화의 날’이기도 하다. 1919년 10월 27일 단성사에서 한국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연쇄극 <의리적 구토>가 개봉된 일을 1960년대부터 기념해 온 것인데, 이 작품의 필름 자료는 소실된 상태다. 이외에도 무수히 많은 영화 필름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반전은 의외로 필름 시대의 종말을 고하던 때에 일기 시작했다. 2000년대 이후 한국영화에 대한 필름 발굴, 복원, 데이터화 작업이 본격적으로 행해져 과거의 명작들이 소생하게 된 것이다. 또한 필름 아카이빙도 보다 체계화됐고, 관련 전문가들이 양성되기도 했다. 물론, 여전히 과제는 남아 있다. 젊고 유능한 인력의 확충과 더불어 국가 기관, 민간 업체, 개인별로 흩어져 있는 방대한 자료를 아우를 만한 통합적 관리 시스템의 구축이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화 매체의 근본적 변화가 추동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공공의 재산인 필름이 지니는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인식하고 환기시키려는 사회적 차원의 노력이 절실히 요구된다. 함충범 한국영상대 영화영상과 교수

[문화카페] 자발적인 축제 기획

매년 8월 마지막 주에 미국의 네바다 사막은 신기루처럼 한 도시가 탄생했다가 일주일 만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 도시의 시민들은 자유로운 상상력과 자유로운 사고로 대형 조형 예술 작품을 통해 소통하고 서로의 손재주와 아이디어가 만들어낸 다양한 물물 교환으로 생활한다. 단 일주일만 존재하는 예술가들의 블랙 록 시티(Black Rock City) 모습이다. 블랙 록 시티는 네바다 주의 사막 도시의 지명이면서 일주일만 존재했다 사라지는 축제를 위한 가상의 도시명이기도 하다. 일주일의 삶이 끝나면 블랙 록 시티의 시민들은 거대한 인간 조형물을 불태우며 스스로 공을 들인 예술 창작물과 스스로 건설한 집과 관계들을 스스로 파괴한다. 그리고 일상으로 돌아간다. 1986년에 시작되어 36년의 역사를 유지하는 세계적인 축제인 버닝맨 페스티벌(Burning Man Festival) 축제 얘기다. 이 축제는 축제의 본질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술 축제로 여겨진다. 한국의 10월, 축제의 계절이다. 전국 곳곳이 다양한 지역 축제로 다채롭다. 형형색색 변해가는 자연은 사람들을 모으고 사람들은 그 자연에 신명나는 집단 문화를 프로그래밍 한다. 10월에 사람들은 호모 루덴스(Homo Ludens)로서의 본성에 충실해진다. 모든 인간은 노는 존재이며 그 원동력은 자유로운 상상력과 비일상성을 향한 인간의 원초성이라는 이 호모 루덴스 개념을 주창한 요한 호이징가 (Johan Huizinga)는 그 유희적 본능이 문화적으로 표현된 것이 축제라고 했다. 최근에 한국의 축제 현장은 대표적인 호모 루덴스를 잃었다. 한국의 전통을 대중과 밀착시키고 세계화 시킨 한국축제감독위원회 회장인 주재연 축제 감독의 돌연사는 한국의 축제 분야 뿐 아니라 전통예술 분야에도 적지 않은 충격을 줬다. 특히, 코로나 19 사태를 겪으면서 집단성과 현장성을 기반으로 한 축제가 가야하는 새로운 길에 대한 모색을 누구보다 치열하게 행동했던 전문가였기에 포스트 코로나에서의 한국 축제 분야는 나침반이 흔들린 것과도 같았다. 그런데 한 소셜 미디어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주재연 감독에 대한 추억 다지기와 기리기는 최근 들어 온라인 축제의 방향성에 대해 유난히 고심했던 주재연 감독의 죽음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온라인 축제와도 같았다. 누군가 주재연 감독과 함께 한 추억의 사진을 업로드했고 또 다른 누군가 또 다른 추억의 사진을 업로드하며 자연스럽게 주재연 감독과의 동반 사진이 릴레이로 줄을 이었다. 제각각의 추억들 속에서 주재연이란 인물의 인간미와 역사와 업적이 연작 드라마처럼 되살아났는데 지켜보면서 자발적인 크리슈머들에 의한 자연스런 온라인 축제로구나 감탄했다. 버닝맨 페스티벌처럼 흔적도 없이 스스로를 강렬하게 불태우고 떠난 주재연 감독은 그렇게 소셜 미디어 속에서 그를 추억하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환생한 것이다. 신명과 놀이에서는 지구상에 따를 자가 없는 우리 민족 기질이 낳은 또 하나의 감동적인 온라인 축제 콘텐츠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이런 자발적인 집단 기획은 사실 우리 일상 속에서 곳곳에서 매일 일어나고 있다. 선행 미담을 낳는 업소에 줄줄이 ‘돈쭐내는’ 문화와 신조어의 탄생에서부터 돌아보면 우리는 스스로가 기획하는 축제 속에 살고 있다. 이 가을에 스스로 잊고 지냈던 호모 루덴스로서의 본성을 되찾아 보자. 이유리 서울예술단 단장 겸 예술감독·서울예술대학교 예술경영전공 교수

[문화카페] 너 자신을 혁명하라

함석헌 선생께서 즐겨 쓴 말이다. 스승 다석(多夕) 선생의 한시 ‘生命(생명)’의 요강이다. 들숨과 날숨처럼 공명한다. 두 종류의 혁명이 있다. 외적 혁명과 내적 혁명이다. 하늘에서 내린 명(命)을 새롭게(革) 하는 것이 혁명의 참 의미이지만, 외적 혁명은 나라를 바로 세우는 명분으로 체제 전복이 목적이기에 폭력적이다. 내적 혁명은 나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작가로 평생을 혁명하고 파격했다. 언감생심, 닭 모가지도 비틀지 못하는 내가 어찌 세상을 혁명 하나, 대신 나를 혁명하고 파격했다. 하지만, 혁명하고 파격 하는 일은 모든 것을 담보해야 한다. 창조가 존재 이유인 작가들에게 혁명이란 어떤 의미일까? 의식의 진화를 박제하지 않는 일이다. 동물과 다른 인간의 위대함은 창조에 있다. 모든 인간의 정체성은 다르며 독창성은 현대미술의 전부다. 내적 혁명의 주체인 창조적 의식의 진화를 방해하는 가장 큰 벽은 ‘쩐의 전장’, 시장이다. 시장은 작가들의 생명을 연장하는 빵을 제공하지만, 의식의 진화를 박제하는 유리 상자가 되기도 한다. 쩐에 경도되면 시장이 원하는 꼴만 생산하게 된다. 쩐을 초월하면 예술 행위를 계속할 자유의지를 보장받지 못한다. 작품은 세상과 소통하고, 유통해야 목숨을 보전할 수 있다는 말이다. 삭막한 비유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그래서 이미 잘 알려진 작품을 계속하지 않고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도하는 것을 자살 행위라 말한다. 새 작업이 유통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다. 30년 40년, 죽을 때까지 같은 작업을 반복하는 결정적인 이유다. 혹자는 이를 두고 무한 반복의 미학이라 미사여구 하지만, 현대미술에서 금기시하는 자기복제의 무한 반복이다. 장인정신으로 전통을 고수하는 무형문화재와 대척점에 있어야 할 현대미술은 창의성이 생명이다. 대단한 화두라도 5년, 10년을 몰입하면 대부분 해체(Deconstruction)된다. 여기서 해체는 새로움의 다른 말이며 이미 해체(Destruction)된 작업의 창의성은 소멸된다. 흘러간 물이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듯이 현대미술은 죽은 의식으로 실존을 장식하는 영역은 아니다. 장인정신으로 철갑을 두른 노회한 작가들이 시장을 잠식했다. 피 끓는 젊은 작가들의 파격적인 창의성은 고사됐다. 시장통은 장식의 도가니가 되고 세계의 호구가 됐다. 몸과 마음의 관계를 뜻하는 심신 상관성의 어원처럼 몸과 마음은 매우 민감한 상호작용으로 연결된다. 몸이 없는 정신은 뜬구름이고 정신이 부재한 몸은 마루타가 되듯이 몸과 마음이 유기적으로 상호작용을 하는 현상이 실존이다. 작가들은 자의식이 매우 강한 부류의 사람들로서 자존감을 생명의 근간으로 삼는다. 이를 부정할 아티스트는 없다. 하여 예술 행위를 자신의 철학과 의식의 배설로 인식한다. 가혹한 말이지만, 평생을 같은 작업을 반복하는 것은 자신의 똥을 먹는 것과 같다. 세상은 시장에 함몰돼 모른 체하더라도 내 배설이 장식인지 창조인지 자신은 안다. 씨와 DNA는 스스로 에너지를 공급하지 못한다. 햇빛과 온습도 등, 환경의 영향으로 발아하고 생장한다. 모든 존재는 스스로 완성되지 못한다는 의미다. 이것이 자연법이다. 우주를 통째로 씹어 먹어도 성에 차지 않을 젊음의 자유 의지가 활화산처럼 폭발하게 해야 한다. 그 파편이 세상을 장식하게 해야 한다. 김아타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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