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실크로드 고도 ‘부하라 아크로(성)’

우즈베크의 오래된 도시는 사마르칸트, 부하라, 히바 3곳이다. 오늘은 28㎞ 떨어진 부하라로 갈 예정이다. 부하라로 출발 전 시내 주유소에서 자동차에 디젤유를 가득 채워야 한다. 우즈베크는 액화된 메탄가스를 자동차 연료로 사용하는 나라다. 우리나라 택시들이 사용하는 액화천연가스(LNG)는 액화메탄가스보다 안정적이라고 한다. 우즈베크와 인접한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은 원유와 천연가스 매장량이 풍부한 반면 우즈베크는 경제성이 떨어지는 메탄가스만 많다. 시내를 벗어나 외곽으로 나가면 액화메탄가스 충전소는 많지만 디젤유를 파는 주유소는 대도시 주위에만 있다. 휘발유나 디젤유값이 비싸기 때문이다.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액화메탄가스 가격은 휘발유 가격의 7분의 1이라고 한다. 화물차, 트럭은 물론이고 경차(기아차 마티스)도 엔진을 개조해 차체 아래에 빨간 메탄통을 달고 있다. 가이드는 메탄가스 폭발 사고가 자주 발생하고 한번 사고가 나면 대형 사고여서 외국인 상사 주재원이나 관광객은 디젤유나 휘발유 차량을 사용한다. 부하라로 가려면 키질쿰사막의 남쪽 지역을 통과해야 한다. 도로 주변에 평야는 적어지고 사막형 지역으로 변하고 있다. 튀르크어로 키질쿰은 ‘황색 사막’이라는 뜻이다. 우즈베크의 남쪽 나라인 투르크메니스탄에는 ‘검은 사막’이라는 카라쿰사막이 서로 붙어 있다. 부하라는 사마르칸트와 함께 중앙아시아의 오래된 실크로드 거점도시이고 유서 깊은 역사적 도시다. 부하라는 13세기 초반 몽골족 침략 당시 완전히 파괴됐고 현재 성은 600년 전 티무르가 재건한 성이다. 부하라성은 벽돌로 쌓은 20여m 높이의 성이다. 최초의 성곽은 기원전 4세기 이전에 축성됐다고 한다. 나라의 위치가 좋거나 자원이 많으면 강대국의 침략 목표가 된다. 동서양 교역의 관문이고 풍요로운 곡창지대인 우즈베크는 지정학적으로 강대국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땅이다. 기원전 4세기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 침략, 페르시아(이란) 침략, 튀르크족 지배, 이슬람과 아랍군, 몽골족, 근현세에는 러시아와 소련이 지배했던 비운의 지역이다. 도시가 파괴되고 재건되기를 반복해서 부하라성은 ‘불사조의 성’으로 불린다. 19세기 중반 이후에는 러시아의 식민 지배 상태로 있었다. 1991년 소련 해체 후 세 도시가 주축이 돼 우즈베키스탄은 독립 국가가 됐다. 현재도 우즈베크는 지역별로 언어와 인종이 다르니 국민 통합이 힘들다. ‘티무르’를 정신적 국부로 숭상하는 것도 이질적 민족과 문화를 하나로 통합하기 위함이다. 부하라는 8세기 당나라 현종 때 반란을 일으킨 소그드인 ‘안록산’의 고향으로 유명하다. 수천㎞ 떨어진 당나라에 와서 당 현종과 양귀비에게 아첨을 잘해 6개 절도사 중에서 3개 절도사를 겸직한 역사적인 인물이다. 부하라도 인구의 70%가 이란계 타지크인이고 언어도 이란어 계통인 타지크어를 사용하고 있다. 우즈베크 사람은 최소한 우즈베크어, 타지크어, 러시아어를 3개 국어를 알아야 한다. 우리나라에 일하는 오는 노동자 등이 한국말을 쉽게 배우는 것은 우즈베크인에게 선천적인 언어 재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칭기즈칸의 몽골 군대는 13세기 초 북쪽에서 키질쿰사막을 종단해 부하라로 쳐들어왔다. 이슬람 왕조의 지배에 있던 부하라는 맹렬하게 저항했다. 부하라 함락 후 몽골 군대는 아무도 살려주지 않았다. 성인 남자와 여성뿐 아니라 어린아이들, 가축 등 살아 있는 것을 모두 죽였다. 공포심을 불러일으켜 다른 도시들이 금세 항복하도록 만드는 고도의 전략이다. 부하라성 내부는 칭기즈칸 군대가 폐허로 만든 모습을 그대로 남아 있다. 부하라는 도시 재건 시 폐허가 된 부하라성 내부는 방치하고 성 바깥에 신도시를 건설했다. 이슬람 첨탑은 12세기에 건설된 칼론미나렛이다. 칭기즈칸의 지시로 파괴를 면한 부하라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이 탑의 높이는 48m로 중앙아시아 미나렛 가운데 가장 높다. 칭기즈칸이 말 위에서 높은 미나렛 꼭대기를 보려다 모자가 떨어졌다고 한다. 모자를 주우면서 자기가 유일하게 머리를 숙인 곳이니 탑을 파괴하지 말고 보존하라고 지시해 현재까지 보존된 행운의 탑이라고 전한다. 미나렛의 주된 용도는 이슬람교 예배시간을 알리는 것이다. 과거 어두운 밤중에 탑 꼭대기에서 불을 밝혀 멀리 사막을 건너오는 상인들에게 등대 역할도 했다고 한다. 칼론미나렛 양옆의 건물은 마드라사(대학)로 현재도 신학을 가르치는 학교다. 옅은 회색과 하얀색의 마드라사 건물, 아름다운 첨탑과 광장이 잘 어울린다. 인간사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는 말이 있듯이 문화 유적도 운이 있어야 오래 간다. 칼론미나렛은 칭기즈칸의 떨어진 모자 때문에 800년 이상 존속하고 유네스코 세계 유적으로 관광객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티무르 제국’ 유적

사마르칸트는 13세기 칭기즈칸이 철저히 파괴해 현재의 유적은 14세기 정복자 티무르가 약탈한 재화로 만든 것이다. 사마르칸트 역사와 유적을 설명해 줄 로디나양을 문화 유적 해설자를 고용해 설명을 들었다. 한국 사람은 우즈베키스탄의 국민 영웅 티무르에 익숙하지 않다. 티무르는 사마르칸트에서 70㎞ 떨어진 시골에서 태어난 쇠락한 몽골 귀족의 아들이다. 원나라와 몽골제국이 쇠락해 가기 시작하는 1336년 태어나 중앙아시아, 이란, 중동지역, 남러시아 등을 정복한 마지막 유목민 영웅이다. 명나라를 침략하러 가다 1405년 병사했다. 우즈베크인이 자랑하는 국민 영웅이다. 사마르칸트는 정복자 티무르는 정복지에서 데려온 장인, 예술가, 건축가들을 동원해 재정적 후원으로 멋진 건축물을 많이 지었다. 티무르는 준 문맹(文盲)임에도 유명한 학자들을 불러 토론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티무르는 소련시대에는 인민을 착취하는 사람으로 폄하되다 1991년 우즈베크 독립 후 영웅으로 다시 숭배되고 있다. 레닌 동상을 허물고 티무르 동상을 많이 건립했다. 티무르 영묘는 청록색 타일로 멋있게 지었다. 청색은 우주의 중심인 하늘과 해가 뜨는 동쪽을 상징한다. 종교적 염원이 있는 색이다. 여성은 티무르 묘지 입장시 치마를 입어야 한다. 티무르 묘에는 티무르보다 1년 먼저 죽은 사랑하는 장손자, 티무르의 두 스승, 티무르 등 5명의 관이 있다. 묘지 건설은 일찍 죽은 장손자의 묘지로 시작했는데 티무르가 1405년 사망하자 합장했다고 한다. 중앙 검은색 관이 티무르 묘다. 전설에 의하면 티무르는 자기 묘를 파손하는 사람에게 큰 재앙을 내리겠다는 저주를 했다고 한다. 러시아 과학자가 1941년 티무르의 관을 열어 진짜 티무르인지를 확인했다. 티무르는 청년 시절 양을 도둑질하다 오른발을 다쳐 절름발이가 됐는데 다리뼈 확인 결과 오른발 절름발이가 맞음을 확인했다. 티무르의 저주 때문인지는 몰라도 묘지 개봉 1년 후 1942년 스탈린이 믿었던 동맹국 독일의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는 제2차 세계대전 독소전쟁이 발발했다. 레기스탄 광장 주변에 우아한 색깔의 타일로 만든 세 개의 ‘마드라사(대학)’ 건물이 화려하고 웅장하다. 마드라사는 수십개의 교실과 기숙사가 위 아래층 붙어 있는 왕립대학 건물이다. 과거 교실인 1층의 기념품 가게, 학생 기숙사였던 2층은 가게의 창고로 쓰이고 있다. 마드라사 건물 벽 오른쪽에 불교를 상징하는 만(卍)자 문양, 호랑이 등에 탄 부처 얼굴, 연꽃 모양 장식이 있다. 건축가가 종교 간 화합의 목적으로 설치했다고 한다. 8세기 이전은 사마르칸트 등 중앙아시아 지역은 모든 종교가 자유롭게 허용됐다. 조로아스터교, 불교, 마니교, 기독교, 유대교 등 세계의 종교 백화점이었다. 630년경 현장 스님이 천축으로 가던 때에는 불교 사원과 승려가 많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이슬람 사원 외 다른 종교 유적은 거의 없다. 비비하눔 모스크는 엄청난 규모로 14세기 건축 당시 최대 1만명이 예배를 봤다고 한다. 티무르의 부인인 비비하눔은 티무르보다 6세 연상의 부인으로 칭기즈칸의 손녀다. 티무르는 쇠락한 몽골의 작은 귀족 가문 출신이다. 티무르가 유목사회의 정복자로 명성을 얻은 후에도 칸(왕)은 칭기즈칸 후손을 명목상 세우고 본인은 칸에 오르지 않았다. 칭기즈칸 혈족은 ‘황금 가문’으로 칸은 칭기즈칸의 피를 받은 사람이 했다. 티무르는 아미르(영주, 제후) 신분으로 제국을 통치했다. 칭기즈칸의 손녀인 비비하눔과의 결혼은 티무르의 정통성 확보에 기여했다고 한다. 티무르는 칭기즈칸 손녀인 연상의 비비하눔을 50대 후반 늦은 나이에 부인으로 맞이하고 고귀한 집안과의 결혼을 매우 명예스럽게 생각했다고 한다. 비비하눔 모스크는 건설 과정에 건축가와 비비하눔의 애절한 로맨스 때문에 유명하다. 티무르가 원정을 가면서 비비하눔을 이슬람 사원의 공사 책임자로 임명했다. 그런데 건축가가 비비하눔을 사모해 공사를 지연시켰다. 건축가는 비비하눔에게 자기에게 키스를 해 주면 빨리 완공하겠다고 제안한다. 티무르가 귀환했을 때 키스 소문을 듣고 건축가는 사형에 처하고 비비하눔도 자살하도록 강제했다는 전설이다. 이런 전설 때문에 사원의 명칭을 비비하눔 모스크로 부르고 있다. 샤히힌다 공동묘지는 티무르의 후궁, 딸, 귀족 및 장군의 부인 묘지다. 당시 장례 풍속은 아내는 남편과 합장을 못 했다. 왕비, 후궁, 귀족 여성을 위한 묘지를 별도로 만들었는데 매우 아름다운 건축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 청색, 하늘색, 감청색 등 아름다운 타일로 만든 수십개의 묘지가 멋진 예술품이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유적으로 불리는 인도 무굴제국의 타지마할 묘는 몽골족인 티무르의 자손이 세운 왕비 묘다. 샤히힌다 묘지를 보면서 인도 타지마할 묘는 사마르칸트에 있는 몽골족 조상의 묘지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인도 무굴제국의 건국자는 티무르의 고손자다. 티무르 고손자 바브르의 자손은 북부 인도를 정복하고 인도에 무굴제국을 건설했다. 세계 역사의 아이러니 중 하나가 독재자가 사후(死後) 궁전으로 만든 묘지가 현대의 후손에게 관광자원으로 돈을 벌어주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상 많은 독재자는 죽은 다음에도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한 대규모 묘지 공사를 했다. 서안의 진시황제 묘지, 사마르칸트의 티무르 묘지, 인도의 타지마할 묘지, 스페인 프랑코 총통 묘지 등은 인류의 문화유산 또는 관광자원으로 후손을 먹여 살리고 있다. 티무르가 정복지에서 약탈한 재화로 건설한 관광유적은 티무르 사후 700년 후 우즈베크인을 먹여 살리고 있다. 우즈베크인들이 티무르를 국부(國父)라고 부르는 이유다.

[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사마르칸트 고구려 유적 ‘아프로시압 박물관’

타슈켄트 시내에는 14세기 우즈베키스탄의 국민 영웅 티무르를 기리는 박물관, 티무르 동상 등 ‘티무르’ 관련 시설이 많다. 우즈베크의 영웅 티무르도 소비에트연방 때는 인민의 착취자로 비판의 대상이었으나 1991년 우즈베크 독립 후 국민 영웅으로 존경받고 있다. 다인종·다언어 국가인 우즈베크는 통합의 상징으로 14세기 중앙아시아의 영웅 티무르를 활용하고 있다. 현지 가이드 솔레존은 타슈켄트에서 사마르칸트를 거쳐 부하라까지 1천200㎞의 고속철도를 한국 KTX가 설치했다고 했다. 현재 히바까지 고속철 연결 공사를 하는 중이란다. 기아자동차가 자동차 공장을 우즈베크에 짓고 있다며 도중에 도로변 멀리 있는 공장 부지를 가리켰다. 4세기부터 10세기까지 실크로드 무역의 대표적 상인인 소그드인 거주지를 소그디아나 지역이라 부른다. 사마르칸트, 부하라, 타슈켄트 등 시르다리야강과 아무다리야강 사이의 지역을 말한다. 당나라 시대 사마르칸트에서 중국의 둔황, 장안을 오가며 국제무역에 종사하던 사람들이다. 신라 경주에도 소그드인 흔적이 남아 있다. 신라 원성왕릉의 석상에 코가 크고 눈이 움푹 들어간 석상은 소그드인으로 추정된다. 신라 향가 ‘처용가’에 나오는 사람도 실크로드를 따라 계림(경주)에 장사하러 온 소그드일 가능성이 높다. 계림(경주)은 당나라 시대 실크로드의 맨 동쪽 도시다. 사마르칸트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페르시아(이란). 서돌궐, 당나라, 몽골 등 강대국의 각축장이었다. 역사적 이유로 페르시아(이란)에 가까운 서쪽 도시 사마르칸트와 부하라는 이란계 종족인 타지크족이 70% 이상이고 언어도 이란어 계통인 타지크어를 쓴다. 동쪽 타슈켄트 등은 투르크 계통인 우즈베크어를 사용한다. 우즈베크의 공용어는 우즈베크어, 타지크어, 러시아어 등 3개 언어다. 솔레존은 우즈베크족인데 타지크어, 우즈베크어, 러시아어, 한국어 등 4개국 언어를 구사한다. 13세기 유라시아 대륙을 통일한 몽골족 지배하에서 3개국 이상 언어를 구사하면 몽골족의 관리가 되기 쉬웠다고 한다. 몽골족을 대신해 세금 징수, 서기 등 행정업무는 문해율이 높은 소그드인, 위구르족 사람들이 많이 했다. 1천400년 전 당나라 현장 스님은 중앙아시아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부하라를 거쳐 천축(인도)으로 갔다. 현장은 실크로드 상인 소그드인의 특성에 대해 대당서역기에서 부정적인 기록을 남겼다. “그들은 거짓말을 자주하고 남을 잘 속인다. 돈을 심하게 밝히며 이익을 구하는 데에는 아비와 아들이 닮았다.” 당나라의 역사책인 당서(唐書)는 소그드인이 어떻게 아이를 상인으로 기르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아들이 태어나면 입과 손에 꿀을 바른다. 아이가 성장해 입으로는 달콤한 말을 하고 손에 들어온 돈은 꿀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도록 한다는 의미다. 그들은 무역에 능하며 이익을 좋아한다. 나이 스물이 되면 외국으로 떠난다.” 지정학적으로 요충지인 사마르칸트는 알렉산더 대왕 이래 수많은 외세의 침략을 당하고 침략 때마다 도시가 파괴되고 재건되기를 반복한 도시다. ‘불사조의 도시’라고 부른다. 특히 13세기 칭기즈칸 군대의 침략에 저항한 것 때문에 도시 전체가 철저히 파괴됐다. 여자와 어린이를 제외한 주민 약 3만명이 학살됐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 사마르칸트는 14세기 중앙아시아 맹주인 티무르가 재건한 것이다. 그런데 한반도에서 멀고 먼 사마르칸트에 ‘고구려 사신’ 벽화가 있다고 해서 우리 일행은 놀랍고 반가웠다. 고구려 사신 벽화가 발견된 아프로시압 유적은 13세기 몽골군이 파괴한 사마르칸트 옛 도심에서 발견됐다. 소련 시절인 1974년 중장비로 도로 개설 공사를 하다 700여년 지하에 묻혀 있던 건물이 아프로시압 역사박물관이다. 건물 상단 부분의 벽화는 중장비 공사로 무너져 없어지고 하단 부분의 벽화가 네 벽면에 남아 있다. 당시는 소련 시절인데 소련인 학자가 벽화 하단 오른쪽 끝에 있는 두 사람이 고구려 사신이라고 확인했다. 중앙아시아 유서 깊은 도시에 고구려 사신의 벽화가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고구려 사신 복장은 조우관(鳥羽冠·새 깃털로 장식한 모자)을 쓰고 허리에 환도를 차고 있다. 양손을 소매 안쪽에 넣은 정중한 자세인데 궁중 사극(史劇)에 나오는 모습이다. 벽화에 적혀 있는 소그드문자를 해독한 결과 제작 연도는 660년 또는 661년이다. 벽화에는 중국 사신, 인근 국가 사신 등 40여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다. 고구려 사신이 먼 이국땅 사마르칸트의 벽화에 나오는 것에 대해 두 가지 학설이 있다. 하나는 고구려는 668년 멸망 전에 수나라, 당나라와 수십년간 전쟁 중이었다. 동맹을 체결하기 위해 서쪽의 중앙아시아 소그드왕에게 도움을 요청하려 방문했던 사신의 그림이다. 다른 학설은 고구려 사신이 나오는 중국의 벽화를 모방해 그렸다는 설이다. 7세기 수나라, 당나라의 침공을 물리친 고구려 명성을 이곳에서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동방의 강대국 고구려 명성을 듣고 벽화에 고구려 사신의 그림을 그렸다는 학설이다. 어느 말이 맞든 고구려는 당시 유럽에 가까운 중앙아시아까지 알려질 정도로 강대한 국가였다. 한국의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아프로시압 박물관의 영상 기념물을 제작해 박물관 로비에서 방영하고 있고 박물관 정원에도 고구려 사신에 대한 안내 팻말이 설치돼 있다. 중앙아시아의 실크로드 중심 도시 사마르칸트에 1천400년 전 고구려 사신의 벽화를 보면서 고구려인의 웅장한 기상과 기개에 한민족으로서 가슴 뿌듯함을 느낀다. 고대의 실크로드에서 고구려와 신라의 군사, 외교,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교류했던 흔적이 아시아 대륙의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음을 목격하고 있다. 불행히도 성리학에 심취했던 조선 시대 선조들의 발자취나 교류 흔적은 대륙에 없음을 보고 있다.

[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타슈켄트의 ‘고려인 마을’

우즈베키스탄 국경에서 타슈켄트에 도착하려면 시간이 빡빡하다. 수도 타슈켄트까지 420㎞를 서쪽으로 이동해야 한다. 우즈베키스탄 국경에서 타슈켄트로 가는 곳은 유명한 중앙아시아 곡창지대다. 이 일대는 고대 유럽인들이 ‘황금의 땅’ 또는 ‘중앙아시아의 보석’이라고 불렀던 트랜스옥시아나 지방이다. 건조한 스텝 지대인 우즈베키스탄은 두 개의 큰 강이 흐른다. 톈산산맥에서서 발원하는 시르다리야강과 파미르고원에서 발원하는 아무다리야강이다. 두 강 사이가 풍요로운 곡창지대로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의 침략 당시부터 유명한 지역이다. 시르다리야강 상류인 페르가나 계곡은 한나라 시대부터 ‘한혈마(汗血馬)’ 생산지로 유명했다. 2천200년 전 한나라 사마천은 그의 저서 사기(史記)에서 “대원국은 흉노의 서남쪽 방향에 있다. 좋은 말이 많은데 말은 피와 같은 땀을 흘리고 그 말의 조상은 천마(天馬)의 새끼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즈베키스탄 인구는 3천500만명으로 중앙아시아에서 카자흐스탄과 함께 지역 패권을 다투는 국가다. 타슈켄트로 가는 중간에 우즈베키스탄 제2의 도시 안디잔이 있다. 안디잔 지역을 통과하는 도로에서 안디잔 TV 방송국 차량이 뒤따라오며 우리 차를 세운다. 차량 옆에 부착된 여행지도를 반대편 차선에서 보고 유턴해 뒤따라온 것이다. 도로 옆에 잠시 차를 세우고 유라시아 횡단 여행에 대해 즉석 인터뷰를 했다. 안디잔 TV 방송국 PD가 인터뷰 끝에 우즈베키스탄어로 시청자를 위해 “안디잔 안녕, 우즈베키스탄 안녕”이라고 인사를 해달라고 부탁한다. 차량 옆의 지도 때문에 생각지도 못한 여러 경험을 한다. 안디잔 지역의 도로 휴게실에서 잠시 쉬고 있을 때 우즈베키스탄 남성 한 명이 한국어로 “한국에서 오셨어요”라며 반갑게 인사를 한다. 30대 중반의 그는 진주에서 5년간 일했다며 자녀가 세 명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기회가 되면 한국에 일하러 가고 싶은데 비자가 안 나온다고 한다. 중앙아시아 시골에서도 선진국 한국의 위상을 피부로 느낀다. 키르기스스탄부터 히잡을 착용한 여성들 복장에서 이곳이 이슬람교 지역임을 알 수 있다. 머리만 살짝 가리는 히잡을 쓴 여성이 많다. 과거 소련에서 수십년간 여성 평등을 위해 할례 폐지, 히잡 착용 금지, 남녀 평등 등 추진해 왔는데 종교로 인해 보수적 이슬람문화로 다시 돌아가고 있다. 페르가나 지역의 도로 양옆은 목화밭이 매우 많다.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에서 목화가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1865년 미국의 남북전쟁 때문이다. 유럽 면직 산업의 원료인 목화는 당시 미국 남부지방에서 수입했다. 미국 북군이 남부군의 자금줄을 끊기 위해 남부지방 항구를 봉쇄하자 목화의 유럽 수출이 어려워졌다. 공급이 줄자 러시아는 중앙아시아 곡창지대인 페르가나 지역에 목화를 심었다. 당시 목화를 ‘하얀 황금’이라 불렀다. 현재 석유를 ‘검은 황금’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당시 목화는 돈이 되는 작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화 재배로 인한 부작용이 20세기 후반 들어 나타나고 있다. 목화는 성장기에 물을 많이 흡수하는 작물이다. 햇볕이 뜨겁고 건조하기 때문에 물을 흠뻑 줘야 한다. 강 상류에 댐과 운하를 만들어 상류의 강물을 목화 재배에 전부 사용함에 따라 하류에 있는 아랄해로 강물이 흘러가지 못한다. 현재 아랄해 해수면 면적은 1960년 대비 5%만 남았다. 환경 파괴의 대표적 사례다. 현재 환경단체, 국제기구들이 아랄해 살리기 운동을 추진하고 있다. 가끔 TV 뉴스에서 방치된 어선들이 사막화된 바다 바닥에 휑하니 남아 있는 영상을 보여준다.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국제적인 ‘아랄해 살리기’를 위해 목화 재배 농가에 재배면적을 2분의 1로 줄이고 그 대신 다른 작물을 재배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뿌띠딸리 지방의 고려인 마을. 작가 제공 다음 날 오전 고려인 집단농장이 있던 고려인 마을을 방문하러 갔다. 중앙아시아 고려인은 약 50만명이다. 1937년 17만명이 연해주에서 강제 이주한 후손 들이다. 우즈베키스탄 인구의 약 2%가 고려인이라고 한다.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은 아이가 태어나면 호적에 출신 종족을 표기하도록 하고 있어 고려인 숫자를 알 수 있다. 타슈켄트에서 한 시간 거리인 ‘뿌띠딸리’ 지역에 고려인 집단농장이 있다. 현재 고려인은 카자흐스탄,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순으로 많이 산다. 우즈베키스탄의 경제가 안 좋아 우즈베키스탄 출신 고려인의 상당수가 일자리를 찾아 카자흐스탄, 러시아로 이주했다고 한다. 오전 10시경 고려인 마을에 도착하니 거리에 사람이 거의 없다. 고려인 기념관 정문은 열쇠로 잠겨 있어 들어갈 수 없다. 동네 주민이 기념관 직원에게 전화를 걸어줬다. 10여분 후 도착한 기념관 직원은 평소 방문하는 사람이 없어 문을 잠가 놓는다고 한다. 옛소련 시절 집단농장 영웅으로 뽑힌 ‘황만금’씨 기념관이다. 방명록에 “한국에서 온 윤영선, 송익순 부부 다녀갑니다. 고려인 여러분 고생했습니다”라고 기록했다. 황만금씨는 1950년대 이곳 집단농장으로 와 옥수수 품종 개량, 비닐하우스 도입 등으로 1950, 60년대 집단농장의 ‘인민 영웅’ 칭호를 받은 사람이라고 한다. 황만금씨 덕분에 소련 정부에서 특별보조금을 줘 주민들 주택을 개량하고 도로 개설 등 복지가 좋아졌다고 한다. 마을의 단층짜리 규격화된 주택은 정부 보조금으로 지은 것 같다. ‘고려’ 칭호를 사용한 연유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이다. 올림픽 중계방송을 보고 이 지역 사람들이 남한의 발전상을 처음 알았다고 한다. 이곳 고려인의 조상은 대체로 두만강 인근 함경도 사람들이라 북한 정부에 가까웠다. 과거는 ‘조선’이라는 칭호를 썼다. 88올림픽 이후 고려극장, 고려신문, 고려인학교 등 조선을 떼어내고 중립적인 ‘고려’ 단어로 명칭을 바꿨다고 한다.

[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중앙아시아 키르기스스탄 국경 너머

톈산산맥의 3천500m 톈산고원 중간에 키르기스족이 사는 조그마한 마을이 있다. 동네를 지나가는 초등학생은 고지대의 강풍과 변덕스러운 날씨 때문에 두꺼운 겨울옷을 입고 있다. 우리는 톈산고원의 국도에서 가끔 자전거를 타고 중국 쪽으로 달려가는 유럽의 청년들을 만난다. 고원마을에서 쉬는 동안 독일에서 출발했다는 남녀 청년 자전거 여행자를 만났다. 중국 베이징까지 자전거로 갈 계획이라고 한다. 잠은 천막이나 유스호스텔 등 값싼 숙소에서 해결한다고 한다. 모험심이 많은 청년들이 부럽다. 동년배 한국 청년들은 취업 준비, 학원 수강 등에 바빠 엄두도 못 내는 유라시아 대륙을 자전거로 달리고 있다. 맹자가 말한 ‘호연지기(浩然之氣)’다. 나도 호연지기를 위해 일정에 여유가 있다면 유목민 천막을 빌려 며칠을 쉬고 싶었다. 고원지대에서 낮에는 초원에서 말을 타고 밤에는 톈산고원의 영롱한 별을 보며 가끔 말젖으로 만든 쿠미스 술을 마시는 상상을 했다. 오후 9시가 넘어 오시의 숙소에 도착했다. 오시는 인구 33만명의 키르기스스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다. 8월 초순 좋은 날씨 덕분에 15시간 장시간 운전해 톈산산맥과 톈산고원의 험한 길을 힘들게 통과했다. 키르기스스탄 오시에 있는 한국 식당 ‘대장금’에서 오후 10시 저녁을 먹었다. 오시는 중국보다 시차가 3시간 늦어 그나마 여유가 생긴 것이다. 대장금 식당 주인은 고려인 후손이다. 키르기스스탄에도 1937년 연해주에서 강제 이주한 고려인 후손 1만5천명이 산다. 저녁 메뉴는 톈산고원에서 방목한 소의 가장 좋은 부위를 주문했다. 키르기스스탄 현지인 가이드 자미르씨(38)를 만났다. 오시의 대학에서 한국어과를 졸업했다고 한다. 자미르씨에게 톈산고원 천막에서 한 달 사는 데 돈이 얼마나 들지 질문했다. 500달러만 있으면 멋진 유르트에서 한 달을 풍족하게 살 수 있다고 한다. 언젠가 여름철 좋은 계절에 톈산고원에서 ‘한 달 살기’를 해보고 싶다. 작지만 깨끗한 오시의 호텔에서 15시간에 걸친 자동차 여행의 피로를 풀고 깊은 잠에 빠진다. 키르기스스탄은 중국에서 힘들게 했던 공안의 검문이 없다. 중국처럼 폐쇄회로(CC)TV 촬영도 없다. 중국의 공안 검문, 시도 때도 없는 여권 검사, 간첩죄 불안 등에서 해방감을 느낀다. 도로 사정이 열악하고 중국보다 훨씬 못사는 국가이지만 아내는 자유가 있어 좋다고 말한다. 오시 시내는 한국에서 오래전 단종된 티코, 다마스 등 대우가 생산했던 소형차가 많다. 시내에 신호등도 거의 없고 도로에 차선 도색도 거의 안 돼 있다. 차량은 빠르게 증가하고 도로는 돈이 없어 못 늘리니 시내에 교통체증이 심하다. 오시 호텔은 유럽에 가깝기 때문에 아침식사는 서구식 스타일이다. 호텔의 야외 테라스에서 아내와 함께 모닝커피를 마시며 모처럼 여유로움을 즐긴다. 키르기스족은 840년 위구르 왕국을 멸망시킨 이후 산악지대 무명 종족으로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키르기스스탄은 1924년 소비에트연방의 일원이 됐다. 키르기스족은 1991년 소련 해체 후 역사상 처음으로 신생 독립국가 키르기스스탄으로 출범한 운좋은 종족이다. 세계 역사를 바꾼 ‘탈라스전투’가 벌어진 탈라스강이 오시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당나라 쿠차의 안서절도사로 있던 고선지 장군이 750년 석국(石國·현재 타슈켄트)을 정복, 왕을 생포해 장안으로 보냈다. 당나라에 조공을 바치지않은 것이 죄목이다. 당나라의 횡포와 민심 이반이 생긴 이 지역의 왕들이 아랍의 이슬람 세력에 지원을 요청했다. 이런 사유로 751년 아랍 군대와 당나라 군대가 탈라스강 근처에서 전투를 벌였다. 당나라 장수는 고구려 후손인 고선지 장군이다. 당나라 군대는 유목민 쿠룰룩족과 연합했는데 후방에 있던 쿠룰룩족의 배반으로 대패한다. 포로로 잡혀 아랍지역으로 끌려간 당나라군인 중에 나침반, 종지, 화약, 비단 기술자가 있었다. 중국은 나침반을 묫자리 잡는 풍수지리 또는 어린이 장난감으로 사용할 때 유럽은 항해술에 이용해 근세 대항해 시대를 개척했다. 중국이 화약을 명절날 불꽃놀이에 사용할 때 유럽은 총기류 개발에 사용했다. 중국의 원천기술을 개량한 유럽 국가는 새로운 강대국으로 탄생해 동양을 정복했다. 오전 9시 오시에서 우즈베키스탄 국경으로 향했다. 키르기스스탄 국경에 도착하니 환전상들이 매우 많다. 키르기스스탄 공무원 같은 사람이 우리 차에 찾아와 40달러를 주면 빨리 키르기스 세관을 통과하게 해주겠다고 말했다. 어쨌든 키르기스스탄 출국은 쉽게 끝났다. 자동차가 우즈베키스탄 세관을 통관하는 데 무려 3시간 이상 걸렸다. 이유인즉 황당하다. 일행 중 A씨가 사진 찍는 ‘드론’ 카메라를 한국에서 가져왔다. 중국 영내에서는 간첩죄가 무서워 사용하지 않고 가방에 보관만 했다. 그동안 국경 통과는 무탈했는데 우즈베키스탄 세관의 엑스레이 투시기에 적발됐다. 우즈베키스탄 법은 총기류, 드론, 아편은 반입금지 품목이다. 불법 반입이 적발되면 관세법상 밀수죄와 같은 형사범죄다. 우즈베키스탄 직원은 드론 적발 후 “자동차 입국은 안 된다. 키르기스스탄으로 다시 돌아가라”고 했다.” 우리는 드론을 우즈베키스탄 세관에서 압류 처분해도 좋으니 입국을 허용해 달라고 사정했다. A씨는 “드론 밀반입은 법을 몰라 실수했다. 드론을 가져오게 된 동기는 아들이 아버지가 외국 여행 간다고 특별히 사준 것이니 아들의 효성을 봐서 한번만 봐달라”고 거짓말까지 하며 통사정했다. 우리의 통사정에 우호적인 우즈베키스탄 세관 직원이 “드론을 가지고 다시 키르기스스탄으로 돌아가 버리고 오라”고 했다. A씨는 150만원짜리 한번도 안 쓴 새 드론 카메라를 들고 오시로 돌아가 근처 뒷골목에 슬그머니 놔두고 우즈베키스탄으로 다시 돌아왔다. 드론 밀반입 사건으로 세 시간 동안 A씨는 오전에 키르기스스탄 두 번 출국, 우즈베키스탄 두 번 입국의 번거로움을 감내했다. 우즈베키스탄 국경 세관은 마약 검사가 엄격하다. 마약견이 짐과 자동차를 꼼꼼히 검사한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재배되는 아편의 밀반입을 차단하려는 의도다. 아프가니스탄 마약은 톈산산맥과 파미르고원의 산길을 통해 유럽과 러시아로 운송되는데 실업자가 많은 이 지역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마약 운반책이 된다고 한다.

[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톈산산맥·톈산고원을 넘어

위구르족은 740년경 중앙아시아 강대국 돌궐국(튀르크족)을 멸망시키고 840년까지 100여년간 초원지역을 지배한 유목민 강대국이다. 키르기스스탄 종족에게 840년경 멸망 후 일부 위구르 귀족이 톈산산맥을 넘어 타클라마칸사막으로 도망 와 왕국을 세운 것이 신장지역 위구르 종족의 시작이다. 300년 전 청나라는 이곳을 정복 후 새로운 영토라는 뜻의 신장(新疆)이라 명명하고 편입됐다. 1911년 청나라 멸망 후 위구르족의 독립국가 수립 분위기가 시작된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는 민족주의운동 바람이 불었다. 1919년 우리의 3·1운동, 상하이임시정부 수립도 세계적인 민족주의운동 분위기 아래서 이뤄졌다. 1924년 위구르족 지도자들이 독립국가 수립을 논의하면서 종족 이름을‘위구르족으로 부르기로 했다. 이후부터 위구르족 명칭이 부활했다. 위구르족은 장제스와 마오쩌둥 군대가 내란 중이던 1940년대 카슈가르를 수도로 정하고 동(東)투르키스탄 국가 수립을 선포했다. 중국을 통일한 마오쩌둥 정권이 1949년 다시 군대를 보내 신장을 점령했다. 최근 1997, 2006년 카슈가르 및 쿠차 등의 대학생이 독립운동 시위를 주도했다. 오늘은 중국 출국, 키르기스스탄 입국, 파미르고원의 일부인 톈산산맥과 톈산고원를 통과해 530여㎞ 먼 산길을 이동해야 한다. 오늘의 목적지는 키르기스스탄 제2의 도시 ‘오시’다. 톈산산맥은 중앙아시아와 중국의 국경을 이루는 타클라마칸사막 북부의 산맥이다. 우리는 톈산산맥 서쪽에 있는 산길을 통해 키르기스스탄으로 향하고 있다. 대(大)파미르고원의 일부인 이쉬케르탐 고개를 넘어가고 있다. 1천400년 전 사마르칸트, 부하라를 근거지로 하는 소그드(이란계 종족) 상인들이 이 길을 통해 당나라로 장사하러 다녔다. 톈산산맥으로 가는 길은 형형색색 바위와 절벽, 가끔은 오아시스 촌락 등 도로변 자연이 아름답다. 철 성분의 많고 적음에 따라 바위 색깔이 달라진다고 한다. 중앙아시아로 통하는 ‘일대일로’ 길이라는 도로판이 있다. 국경으로 가는 중간에 일곱 번이나 중국 공안, 군인 등의 검문을 받았다. 매번 시간이 늦어진다. 카슈가르에서 110㎞ 이동 후 중국 세관이 있다. 세관 통과 후에도 군인이 지키는 국경초소까지 135㎞를 더 가야 한다. 출국심사는 간단히 하는 게 일반적인데 중국 당국의 검사는 엄격하다. 오전 8시 숙소를 출발했는데 해발 2천800m의 고지대에 있는 중국군 초소를 지나니 중국 시간으로 오후 4시다. 250㎞ 오는 데 검문, 통과 절차 등으로 거의 8시간이 걸린 셈이다. 다행히 키르기스스탄의 표준시간은 중국보다 3시간 시차가 빠르다. 키르기스스탄 영내에 들어오니 오후 1시에 맞게 3시간 시곗바늘을 뒤로 돌리니 오후 여정에 여유가 생긴다. 세관 입구에 많은 화물차가 대기하고 있다. 낮 12시부터 오후 2시까지 공무원의 점심시간이라 업무를 중단하고 있다. 황량한 3천m 고산지대에서 한 시간 이상을 기다렸다. 키르기스스탄 직원들은 동양계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무척 친절하다. 해발 3천m 국경에는 여행객 대기실도 없고 간이화장실도 없다. 도로 옆에서 환상의 비취색 하늘을 보며 기다린다. 두 시간 이상 기다린 후 키르기스스탄 국경을 통과했다. 국경 통과 후 해발 3천~ 4천m의 톈산산맥, 톈산고원을 통과한다. 신기하게도 3천m 이상 고원에 광대한 초원이 펼쳐져 있다. 여름철 초원은 연녹색 풀로 덮여 있다. 풀을 뜯는 소, 말, 양 등 가축과 유르트(중앙아시아에서는 게르를 유르트라 부름)가 목가적이다. 멀리 지평선 너머에는 톈산산맥의 만년설이 햇빛에 반사돼 찬란하다. 눈 덮인 산봉우리에는 하얀 뭉게구름과 파란 하늘의 조화가 평화로움 그 자체다. 운좋게도 바람 한 점 없이 따사한 햇볕이 참으로 좋다. 해발고도 3천500m 초원길을 오르내리며 달리고 있다. 톈산산맥과 톈산고원은 천연의 무공해 지역이다. 유르트가 곳곳에 있고 과거 고대 중국인이 천리마(千里馬)라 불렀던 말들이 유유히 풀을 뜯고 있다. 중국에서 톈산산맥을 넘어 중앙아시아로 통과하는 길은 5개가 있다. 1천400년 전 당나라 현장 스님은 아커수(우리가 3일 전 숙박한 도시)에서 출발해 톈산산맥을 넘어 서돌궐 왕에게 갔다. 당시 톈산산맥의 어려움을 생생하게 대당서역기에 기록했다. 현장은 아커수에서 겨울철 눈이 녹는 두 달을 기다렸다가 봄철에 톈산산맥으로 향했다. “산은 매우 험준해 끝이 하늘에 닿아 있다. 개벽 이래 눈과 얼음이 쌓여 덩어리를 이루고 봄여름에도 녹지 않고 엉겨 붙어 구름과 맞닿아 있다. 눈바람이 이리저리 몰아치니 비록 가죽옷을 겹쳐 입었어도 찬 기운을 막아낼 수 없다. 잠을 자거나 음식을 먹으려 해도 머무를 만한 마른 땅이 없다. 얼음 위에 자리를 깔고 누울 수밖에 없다. 7일을 걸은 뒤 산을 통과했다. 열 명 중 서너 명은 추위와 배고픔으로 죽었다. 말이나 소의 손실은 이보다 훨씬 컸다.” 톈산산맥 서쪽 중앙아시아 땅은 페르가나 지역이다. 고대 중국의 비단과 페르가나 지역의 천리마와 교역했던 ‘견마(絹馬)무역’의 산지다. 야생에서 뛰어다니며 자라는 페르가나 지역의 말은 중국말보다 체구가 크고 힘이 세 중국이 탐냈던 ‘한혈마(汗血馬)’다.

[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위구르족 성지 ‘카슈가르’

차는 타클라마칸사막의 북쪽, 실크로드 서역북로를 달리고 있다. 타클라마칸사막의 서쪽 끝에 있는 파미르고원으로 향하고 있다. 타클라마칸사막은 끝도 없고 시작도 없는 길고 지루한 곳이다. 길고 긴 사막의 모습은 수시로 바뀐다. 곳곳에 협곡도 있고 황토색 바위산도 있고 거친 모래사막도 있다. 사막의 낮 기온은 40도가 넘지만 건조해서 그늘에 있으면 견딜 만하다. 옛날 사막을 지나던 구도승, 실크로드 상인들은 뜨거운 한낮을 피해 달빛, 별빛을 받으며 늦은 오후나 야간에 이곳을 통과했을 것이다. 카슈가르에 가까이 갈수록 심해지는 공안의 검문을 무사히 마치고 어커수에 오후 늦게 도착했다. 이날은 타클라마칸사막의 서역남로와 서역북로 두 길이 만나는 위구르족 성지 카슈가르(중국명 카스)로 출발했다. 470㎞를 가야 한다. 카슈가르 도착 후 정부 기관에서 카슈가르 자동차 여행 허가를 추가로 받아야 하므로 마음이 바쁘다. 서쪽으로 갈수록 오른쪽으로 보이는 톈산산맥 높이가 낮아짐을 볼 수 있다. 초록색 초원도 조금씩 보이는 등 타클라마칸사막의 서쪽 끝자락에 왔음을 알 수 있다. 드디어 타클라마칸사막을 벗어나 파미르고원 인접 도시 카슈가르에 도착했다. 서역남로와 서역북로가 만나는 도시로 고대부터 교통의 요지다. 카슈가르는 위구르족이 1940년대 독립을 선포하고 수도로 정했던 지역이다. 위구르족의 시위가 많았던 곳이라 외지에서 오는 자동차 여행자는 여행 허가를 당국에서 받아야 한다. 토요일 오후 카슈가르에 도착 후 허가 관청을 찾아가니 담당자가 퇴근하고 없다. 내일은 일요일이라 걱정이다. 어렵게 여행 허가 담당자와 통화한 결과 일요일 오전 9시에 업무를 볼 것이라는 답변을 듣고 숙소로 갔다. 자동차 운전 허가를 못 받았으므로 토요일 오후 남는 시간에 카슈가르의 유명한 바자르, 향비묘, 위구르족 구도심 등은 갈 수 없다. 내일 아침 자동차 운전 허가를 받을 때까지 다른 곳은 못 가고 호텔에서 쉬면서 대기해야 한다. 중국의 소수민족 문제가 얼마나 심각하고 중국 여행 어렵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꼈다. 우리처럼 단일민족, 단일언어를 사용하는 국가에 산다는 것은 축복이다. 카슈가르는 실크로드의 요충지로 이곳에서 파미르고원을 넘어 아프가니스탄, 인도, 페르시아(이란)으로 갈 수 있다. 다른 하나는 톈산산맥을 넘어 중앙아시아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테헤란으로 가는 코스다. 우리는 톈산산맥을 넘어 중앙아시아로 갈 계획이다. 19세기 말 청나라 최서쪽 도시인 카슈가르에 영국과 러시아의 영사관이 생겨 두 강대국 간의 스파이 전쟁의 무대가 됐다. 근세 외교사에서 영국과 러시아의 외교전을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이라 부른다. 당시 영국은 인도를 식민지로 갖고 있었다. 러시아는‘남진 정책을 통해 태평양과 인도양으로 나가려는 욕구가 있었다. 카슈가르는 러시아의 남진 정책과 영국의 봉쇄 정책의 접점이었다. 옛 영사관은 호텔로 단장, 유명한 관광지가 됐다. 1885년 영국은 우리 남해안 거문도를 2년간 무단 점령하고 해군기지를 만든 적이 있다. 러시아의 남진 정책을 막으려 영국이 전략적 요충지인 대한해협의 거문도를 무단 점령해 만든 것이다. 당시 영국은 조선을 청나라 영토로 오해하고 청나라 실권자 이홍장에게 거문도 점령 사실을 알려줬다. 이홍장이 이 사실을 조선의 이조판서에 알려줘 조선은 뒤늦게 영국의 점령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영국의 거문도 철수는 조선의 노력이 아니라 영국과 러시아의 조약에 의해 이뤄졌다. 주변 강대국의 무력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강력한 국력을 기르는 것은 만고의 진리다. 오늘날 한반도를 둘러싼 4개 강대국의 외교 문제는 19세기 말 영국, 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 못지않다고 생각해 본다.

[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고대 신라인 발자취와 키질석굴

당나라 시대 구자국(현재 쿠차)은 고대 신라, 고구려 역사와 관련이 깊다. 신라 승려 혜초 스님이 쓴 왕오천축국전에 구자국에 대해 자세히 나와 있다. 혜초 스님은 727년 11월 쿠차에서 숙박했다. “카슈가르(당시 소륵국)에서 한 달을 걸어가면 구자국에 이른다. 안서도호부가 있고 군대가 많다. 사찰과 승려가 많다. 소승불법과 대승불법이 공존한다. 고기, 파, 부추를 먹는다. 중국 승려는 대승불교를 믿는다”고 왕오천축국전에 기록돼 있다. 혜초는 20세인 724년 중국 광저우를 출발, 상인들의 배를 타고 천축으로 갔다. 돌아올 때는 파미르고원을 넘어 서역북로를 통해 당나라로 입국했다. 쿠차, 투루판, 둔황, 장안을 거쳐 오대산으로 돌아왔다. 신라 후기 대학자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과거시험(빈공과)에 합격하고 관리를 했다. 최치원이 귀국 후 쓴 향약잡영(현재 없어짐)에 오늘날 민속놀이인 북청사자놀이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수만리를 걸어오느라 먼지를 잔뜩 뒤집어썼구나.” 서역에서 들어온 놀이극을 보고 신라에서 쓴 것이다. 북청사자놀이의 원산지가 당나라 시대 구자국이다. 아프리카에 사는 사자를 신라인들은 본 적도 없는데 사자놀이를 서역에서 가져와 민속놀이로 즐긴 것이다. 최치원은 서역에서 오현, 피리, 횡적 등의 악기가 신라와 고구려에 전해졌다고 적고 있다. 1천300년 전 실크로드의 동쪽 끝 신라와 구자국의 문화 교류를 알려주는 기록이다. 글로벌 마인드였던 당나라는 능력만 있으면 외국인도 고위직으로 출세가 가능했다. 고구려 포로의 후손인 고선지도 절도사로 출세했으니 당시의 포용정책을 짐작할 만하다. 쿠차는 안서도호부 절도사를 지낸 고구려인 후손인 고선지 장군의 활동 무대이기도 하다. 고선지 장군이 쿠차에서 8세기 중반 군대를 이끌고 험하고 험한 파미르고원과 히말라야산맥을 넘어 현재 아프가니스탄 북부 연안보, 길기트 등을 점령하고 서역 35개국이 조공을 바치도록 했다. 톈산산맥을 넘어가 ‘석국’(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을 점령했다. 이런 공로로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군사령관인 안서절도사로 승진했다. 근세 유럽의 군사전략가들이 히말라야산맥과 파미르고원을 넘어 군사작전을 펼친 고선지 장군을 높이 평가해 고선지는 근세 이후 유명해졌다. 쿠차를 출발해 외곽에 있는 2천년 전 한나라 시대 만든 봉화대에 들렀다. 이른 아침이라 관광객은 뜸하다. 봉화대는 가로 4.5m, 세로 3.5m, 높이 12m 크기로 많은 부분이 무너져 당초 크기의 3분의 1 규모라고 하는데도 매우 크다. 한나라 시대 만든 봉화대를 이후 당나라가 고쳐 사용했다고 하는데 사막의 건조한 날씨에 오랫동안 잘 보존된 것이다. 봉화대 입구의 기념관에 봉홧불 연료로 사용하던 ‘갈대 다발’ 묶음을 전시하고 있다. 설명서를 읽어 보니 봉화 연기가 잘 보이도록 야생 늑대의 똥을 섞어 불을 붙였다는 설명이 재미있다. 정말 늑대 똥 연기가 멀리서 잘 보일지 궁금하다. 쿠차에서 서쪽 사막으로 70여㎞를 가면 절벽의 계곡에 키질석굴이 있다. 상인들이 쿠차로 가기 전에 하룻밤 묵었다 가는 지역이다. 아마 혜초 스님도 이곳을 거쳐 쿠차로 갔을 것이다. 키질석굴은 서기 3세기부터 9세기까지 600년에 걸쳐 조성됐고 석굴 260여개가 절벽에 있다. 키질석굴은 간다라 지방의 그리스풍 조각 양식이 많이 남아 불상 예술사의 중요한 유적이라고 평가해 큰 기대를 갖고 갔는데 완전 실망이다. 고대 그리스의 간다라 미술 양식, 고대 인도 양식의 벽화와 불상은 서구 약탈자들이 대부분 뜯어갔다. 석굴의 벽화는 거의 안 남았고 부처상도 거의 없는 텅 빈 동굴과 다름없다. 일부 남아 있는 불상도 얼굴과 눈이 크게 파괴돼 잘 보존된 둔황석굴과는 비교할 수 없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 공군의 베를린 폭격으로 당시 ‘베를린 향토박물관’에 보관 중이던 키질석굴의 인류 유적이 한순간에 잿더미가 됐다고 한다. 키질석굴 정면에 유명한 번역승 ‘구마라집’ 동상이 있다. 구마라집 탄생 1천950주년을 기념해 1994년 설치한 동상이다. 구마라집은 쿠차에서 태어난 귀족 출신 승려로 중국 불교 역사의 중요한 인물이다. 장안에 있던 전진 왕 부견이 구마라집의 명성과 천재성을 듣고 군대를 쿠차로 보내 384년 그를 납치해 왔다. 구마라집을 강제로 결혼시켜 도망을 못 가도록 협박하기도 했다. 구마라집은 중국에서 불경 번역에 평생을 바쳤다. 반야심경, 법화경, 아미타경 등 많은 경전을 번역한 승려다. 우리에게 익숙한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색은 공이고 공은 색이다)은 구마라집이 중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실재(욕계)와 비실재(공)’의 불경의 깊은 뜻을 중국어로 번역한 유명한 문장이다. 구마라집 이전에 산스크리스트어와 중국어 두 개 언어를 아는 사람이 없어 부처가 설법한 깊은 뜻이 중국어로 번역이 잘 안됐다. 전진 왕 부견은 불교 포교자로서 우리 역사책에 나오는 인물이다. 부견은 372년 고구려 소수림왕에게 승려(순도)를 보내 불교를 소개한 왕이다. 고구려는 선진 문명인 불교의 영향을 받아 율령을 반포해 율령국가 체제로 변경한다. 소수림왕의 다음 왕인 광개토대왕은 고구려 전성기를 이끈 왕이다. 뜻밖에도 키질석굴 10호 굴에 ‘한학련’이라는 연변 출신 조선족 기념사진이 전시되고 있다. 흥미가 있어 한학련 기념전 사진을 찍고자 하니 여직원이 사진 촬영을 못 하게 한다. 한학련은 1946, 1947년 키질석굴의 조사와 발굴, 키질석굴 벽화를 모사해 석굴 보존에 크게 기여했다고 한다. 왜 이 멀리 타클라마칸사막 깊숙한 곳에 있는 키질석굴에 연변 출신 조선족이 매혹당했는지 궁금증이 생긴다. 타클라마칸사막의 깊은 곳에 고대 신라와 고구려의 흔적이 있고 근세 인물 한학련까지 얽혀 있어 우리 역사와 실크로드의 인연은 간단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타클라마칸사막의 구자국 ‘쿠차’

동해항 출발 후 한 달이 지났다. 여행은 후반부로 접어들고 있다. 자동차 주행거리가 1만4천㎞를 지났다. 사막은 매우 넓어 중간에 협곡도 있고, 호수도 있고, 타림강도 흐른다. 길이 수십㎞의 쿠차 대협곡을 지나면 해발 1천500m에 보스텅 호수가 푸른 물을 출렁이고 있다. 오늘 이동할 거리가 길므로 보스텅 호수에는 안 들르고 스쳐 지나간다. 타림강은 쿤룬산맥의 빙하 녹은 물이 사막에서 발원해 사막에서 사라진다. 눈이 많이 녹는 봄, 여름은 수량이 많고 가을 겨울은 물이 거의 없다. 타클라마칸사막의 모습은 다양하다. 사막의 일부 구간은 사하(沙河), ‘모래바다, 모래강’이 있다. 400년경 13년에 걸쳐 천축을 다녀온 후 여행기 ‘불국기’를 남긴 법현 스님은 불국기에서 타클라마칸사막의 사하와 ‘카라부란(검은 모래바람)’에 대해 생생한 기록을 남겼다. “사하에는 악귀와 열풍이 심해 이를 만나면 모두 죽고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한다. 하늘에는 날아다니는 새도 없고, 땅에는 뛰어다니는 짐승도 없다. 아무리 둘러봐도 망망해 가야 할 길을 찾으려 해도 어디로 갈지 알 수 없다. 언제 이 길을 가다가 죽었는지 모르는 죽은 사람의 마른 해골만이 길을 알려주는 표지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마르코폴로(1254~1324)는 700년 전 원나라로 가기 위해 서역남로를 통과했다. 그가 남긴 ‘동방견문록’에 “사막에는 악령의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에 홀려 길을 잃고 죽어간다”고 기록하고 있다. 무서운 재난을 피하도록 기도를 위해 실크로드 전 구간에 수많은 석굴을 만들었다. 타클라마칸사막의 남과 북의 폭은 400㎞가 넘는다. 현재 타클라마칸사막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도로가 두 개 설치돼 있다. 중국인들은 이 길을 ‘금(金)으로 만든 길’이라고 부른다. 사막 종단 도로 건설에 엄청난 돈이 들어갔다는 의미다. 인력 손실도 컸다. 반정부 독립운동 시위를 한 죄로 감옥에 갇혀 있던 위구르족 청년들이 고속도로 현장에 투입됐고 사상자가 많았다고 한다. 고속도로 주변 사막의 농경지 주변에 방풍림으로 심은 백양나무와 포플러가 자주 보인다. 농경지로 날아오는 모래를 막고 바람을 막기 위해 심은 나무들이다. 과거 타림분지와 타클라마칸사막 오아시스에는 작은 부족국가가 많이 있었다. 부족국가는 오아시스 크기에 따라 인구도 수백명, 수천명, 많아야 수만명이다. 11세기 이후 기후 변화로 300개 이상의 오아시스 촌락이 없어졌고 지금도 오아시스가 계속 사라진다고 한다. 많은 약소 부족국은 주위 강대국의 세력 다툼에 항상 희생을 강요당했다. 종주국이 바뀔 때마다 언어가 바뀌고, 종족이 바뀌고, 종교도 바뀌어야 한다. 타림분지는 동양과 서양의 중간에 위치해 기원전부터 동서양 교역로였다. 중요한 무역로를 차지하면 통행세 징수, 조공 수입 등 나라 재정에 도움이 된다.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에 고대 중국(한나라 당나라), 유목국가(흉노, 돌궐족, 티베트족, 몽골족) 등 강대국의 싸움터였다. 서구학자와 탐험가 등이 19세기 말 타림분지, 타클라마칸사막의 유적과 유물에 관심을 갖게 됐다. 서구 탐험가들은 신장지역이 발굴이 안 된 마지막 미지의 유물 보고로 생각하고 모여들었다. 19세기 유럽의 고고학자는 이집트 ‘왕가의 계곡’ 발굴, 메소포타미아 유적 발굴, 성서에 나오는 지역 발굴 등 많은 유물을 발굴했다. 더 이상 중동지역은 탐험 대상이 없어졌을 때 다음 목적지가 타림분지 지역이었다. 서구의 탐험가들에게 타클라마칸사막의 사라진 오아시스 도시에 금과 보석이 묻혀 있다는 소문이 들렸다. 보석을 찾기 위한 탐험을 많이 했으나 귀중한 보석은 찾지 못했다. 그 대신 3000~4000년 전 미이라, 고대 언어로 된 문서, 불교 유적 등을 발굴했다. 위구르족이 많이 사는 서쪽으로 갈수록 공안의 검문이 심해지고 어떤 곳은 20분 이상 지체되기도 한다. 서쪽 도시인 투루판, 쿠차, 카슈가르 등 파미르고원으로 가는 도시들은 위구르족이 70% 이상 사는 지역이다. 촘촘히 설치된 고속도로 톨게이트의 직원들은 한국에서 온 차량을 처음 보기 때문에 번호판 사진을 찍고, 상급자에게 통과 여부를 보고하고 승인을 받느라 시간이 오래 걸린다. 위구르족이 많이 사는 지역의 주유소는 군 막사처럼 철책으로 튼튼하게 보호하고 있다. 주유소는 군대나 교도소처럼 높은 쇠창살로 담을 쳐놓고 입구와 출구의 문이 별도로 설치돼 있다. 위구르족 테러범이 주유소를 점령해 방화 등 사건을 저지르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시내에 있는 주유소는 기름 넣는 데 여권까지 검사한다. 주유소 입구에서 운전자만 남고 다른 탑승객은 내려서 약 50m 떨어져 있는 출구로 걸어가야 한다. 운전자가 기름을 넣고 출구로 나오면 일행은 기다렸다가 다시 차를 탄다. 7, 8월 사막의 땡볕 아래 위구르족 여자와 아이들이 주유소 밖 담장을 따라 걸어가는 모습이 측은하다. 주유소 내부 담에 몽둥이, 삽, 방망이 등 진압용 장비가 걸려 있어 살벌한 분위기다. 주민들 불편함은 무시되고 있다. 이곳 주민들은 체념하고 잘 순종하는 것 같다. 신장지역에 사는 위구르족은 약 1천200만명이다. 과거는 신장지역의 전체 16개 민족 중 위구르족이 45%를 점유하는 다수 인종이었으나 현재는 한족이 가장 많은 종족으로 추정한다.

[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아스타나 공동묘지와 베제클리크 석굴

우리는 시간이 없어 투루판 고대 유적 ‘아스타나 공동묘지, 베제클리크 석굴’은 갈 수 없었다. 아스타나 공동묘지는 투루판 외곽에 있는 4세기부터 8세기 사이의 귀족 묘지다.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에도 아스타나 고분 유물이 있다. 20세기 초 일본의 ‘오타니 탐험대’가 약탈해 온 아스타나 고분벽화가 조선총독부를 거쳐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 남아 있다. 중국의 창조신화에 나오는 ‘복희와 여와’를 표현한 그림도 있다. 하반신은 뱀의 형상이고 상반신은 ‘복희와 여와’인 벽화다. 영국의 오렐 스타인이 1907년 투루판 아스타나 고분 근처에서 8통의 편지를 발견했다. 편지는 313년 둔황에서 발송됐고 수신지는 ‘사마르칸트’(현재 우즈베키스탄)다. 편지를 갖고 가던 사람이 분실한 편지 8통을 이곳에서 발견했다. 소그드문자로 쓴 8통의 편지는 313년 또는 314년 종이에 쓴 편지다. 종이는 후한시대 채윤이 발명했다. 이 편지는 종이가 발명된 지 300여년도 안 되는 이른 시기의 귀한 편지인 셈이다. 비가 적게 오는 건조한 지역이라 1천700년간 보존된 것이다. 편지는 지금은 사라진 소그드어로 씌어 있다. 소그드 상인의 부인(미우나이)이 둔황에서 수천㎞ 떨어진 사마르칸트에 살고 있는 친정 부모에게 보내던 편지다. 미우나이 여인의 편지는 “부모 말을 안 듣고 남편 따라 중국에 온 것을 후회한다. 남편이 빚만 남겨 놓고 도망가 딸과 함께 살기가 어렵다. 남편 친구들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딸하고 둘이 살고 있는데 친정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내용이다. 도망간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도 함께 발견됐다. “당신의 아내가 되느니 차라리 개나 돼지의 아내가 되겠다. 가난해 딸과 함께 남의 양 치는 일을 도우면서 어렵게 살고 있다. 당신 빚 때문에 3년 동안 둔황을 못 떠나고 있다. 사마르칸트에 갈 여비 은화 20닢이 필요하다”고 쓰여 있다. 이 편지는 313년경 소그드 상인이 장안, 둔황, 사마르칸트 등 실크로드에서 광범위하게 국제 중계무역을 했음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다. 화염산 아래 계곡에 유명한 베제클리크 석굴이 있다. 이곳의 중요한 벽화는 20세 초 독일과 러시아 도굴꾼이 거의 뜯어갔다. 독일이 약탈해 간 인류사적 유물은 제2차 세계대전의 폭격으로 유실됐다. 6년 전 베제클리크 석굴을 갔을 때 남아 있는 부처상 눈은 이슬람교도에 의해 모두 훼손돼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실에도 일본의 오타니 원정대가 베제클리크 석굴의 벽에서 뜯어온 불상 벽화가 있다. 석굴 벽의 벽화를 칼로 도려내 일본으로 가져간 것이 한국에 있다. 베제클리크 석굴의 귀중한 유산한 지금은 사라진 ‘마니교’ 벽화다. 마니교는 3세기 페르시아의 마니가 창설한 종교다. 마니교는 조로아스터교, 기독교, 불교의 교리를 혼합한 것으로 선의 신과 악의 신이 투쟁하는 현실에서 선의 신이 승리하도록 선하게 살자는 취지의 종교다. 우리는 다음 목적지 쿠차를 향해 출발한다. 고대 중국은 이 지역을 ‘오랑캐 호(胡)’자를 붙여 호서(胡西) 지역이라 불렀다. 기원전 2세기 한 무제 때 장건은 서역의 월지국과 동맹을 맺는 데는 실패했지만 아랍과 페르시아 등 다양한 서역 과일을 중국으로 가져왔다. 과거 우리 조상들이 사용했던 한자 호(胡)자로 시작되는 ‘호도, 호산(마늘), 호마(참깨)’ 등이 서쪽에서 왔음을 상징한다. 타클라마칸 사막은 옛날 실크로드 상인들이 ‘침묵의 바다’, ‘죽음의 바다’라며 무서워한 곳이다. 위구르어로 ‘한번 들어가면 살아 돌아오기 어려운 땅’이라 한다. 인도양에서 불어오는 비구름이 히말라야산맥과 쿤룬산맥에 막혀 비가 안 오는 지형이다. 높은 산맥에 쌓여 있는 만년설과 빙하의 눈 녹은 물이 이 지역의 생명수다. 쿠차로 가는 사막의 중간에 거대한 쿠차협곡과 타림강이 흐른다. 수십㎞의 긴 쿠차협곡은 미국의 그랜드캐니언을 연상케 한다. 차는 해발 1천500m의 험준한 길을 굽이굽이 돌아 조심스럽게 달린다. 광대한 사막의 지형과 모양도 다양하다. 옛날 실크로드 상인과 구법승들이 사막의 높은 산맥과 협곡을 넘어올 때의 고난이 상상된다. 실크로드는 쭉 뻗어 있는 ‘선(線)’의 길이 아니고 오아시스와 오아시스를 연결하는 점선의 ‘오솔길’이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오솔길은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눈이 오면 수시로 사라진다. 그래서 길을 찾기가 힘들다.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 호펜이 1877년 ‘실크’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붙였지만 실제는 비단길과는 거리가 먼 위험한 길임을 경험하고 있다. 실크로드는 상품 외에도 동서양의 문화, 종교, 전쟁, 질병이 이동했던 역사의 길이다.

[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투루판의 ‘고창고성·교하고성’

투루판에 고창고성, 교하고성, 지하수로 카레즈 등 많은 유적이 있다. 현재 투루판 인구는 70만명이 넘는다. 타클라마칸사막 중심에 거대한 현대식 도시가 만들어졌다. 옛날 오아시스 모습은 전혀 느낄 수 없다. 톈산산맥의 물을 끌어와 식수를 제공하고 주변 농지에서 포도, 옥수수 등 농작물을 재배한다. 투루판 인구의 70%가 위구르족이다. 이곳부터 서쪽은 위구르족이 한족보다 많다고 한다. 주요 건물의 상호, 도로표지판은 한자를 위에 크게 적고 아래쪽에 위구르 문자를 병기하고 있다. 투루판은 넓은 포도밭이 산재해 건포도 말리는 흙벽돌 창고를 도로 옆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투루판의 ‘씨 없는 건포도’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오후 4시 ‘고창(高昌)고성’에 도착했을 때 기온은 섭씨 44도였다. 고창고성은 6, 7세기 고창국의 수도이고 9세기 이후는 위구르 왕국의 수도였다. 고창고성 매표소 앞에 당나라 현장 법사가 죽장을 들고 서 있는 동상이 있다. 고창고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지었으며 성곽의 길이는 5㎞다. 전동카트를 타고 폐허가 된 1천400년 전 고창고성 유적을 둘러봤다. 불탑의 초창기 형태인 ‘스투파’는 외부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스투파 내부에 있던 불상은 이슬람교에서 우상숭배라는 명분으로 대부분 파괴됐다. 특히 불상의 눈이 집중적으로 훼손돼 있다. ‘눈’은 영혼의 상징이기에 눈을 파괴하면 영혼을 파괴할 수 있다는 미신 때문이다. 15세기 이후 이슬람교로 개종한 후손들이 자기 선조들이 믿었던 불교 유적을 파괴한 것을 보면서 광신적 종교의 무서움에 전율이 느껴진다. 인도에서 시작한 탑(스투파) 양식은 중국, 한국으로 오면서 우리가 절에서 흔히 보는 아담한 ‘석탑’으로 변했다. 629년 가을 현장 법사가 고창국 왕에게 설법했다는 법당 유적은 최근에 복원해 깔끔하다. 고창 왕은 하미에 도착한 현장 법사의 소식을 듣고 투루판으로 모셔 와 국빈급 대우를 했다. 왕은 현장에게 고창국에서 불법을 설법해줄 것을 부탁했다. 현장은 단식투쟁을 하며 단호히 ‘천축으로 떠나겠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타협해 한 달만 설법하고 떠나기로 했다. 대신 현장이 공부를 마치고 당나라로 귀국할 때 고창국에 들러 설법하기로 약속했다. 고창 왕은 현장이 떠날 때 동행할 승려, 인부, 말과 비단, 금은보석 등 여비도 듬뿍 주고 인접한의 왕에게 소개장을 써주는 등 현장이 천축으로 가는데 많은 편의를 제공했다. 하지만 16년 후인 645년 현장이 귀국할 때 이미 고창국은 당나라에 의해 멸망(640년)한 후였다. 현장은 투루판에 갈 일이 없어졌기 때문에 타클라마칸사막 남쪽 ‘서역남로’를 통해 귀국했다. 고창고성을 쌓은 흙벽돌은 버드나무 가지와 풀 줄기를 찰흙과 섞어 만들었다. 나무가 없는 사막 지역이니 흙이 건물의 주원료다. 고창고성 성벽이 쉽게 망가진 것은 이곳 농부들이 나뭇가지, 풀줄기가 들어간 흙벽돌을 가져다 부숴 비료로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창국은 왕 국문태가 대외관계를 오판해 640년 당나라에 의해 멸망했다. 고창왕은 실크로드 무역 이익을 독점하기 위해 유목민 강대국인 서돌궐과의 동맹을 강화하고 인근 영세 오아시스 왕국을 압박했다. 고창 왕은 수천㎞ 떨어진 당나라가 군대를 파견하지 못할 것이라고 오판한 것이다. 핍박을 받은 오아시스 소국들은 멀리 장안의 당 태종에 구원을 요청했고 당 태종은 장안에서 수천㎞ 떨어진 투루판까지 군대를 파견해 640년 고창국을 멸망시켰고 아들인 고종은 서쪽의 강대국 서돌궐을 655년 정복했다. 당 태종은 645, 647년 두 차례 고구려를 침략했으나 패배했으며 그가 죽기 전 고종에게 향후 고구려를 침략하지 말 것을 유언했다. 고종은 서쪽의 위협 세력인 서돌궐을 먼저 정복하고 서쪽을 안정시킨 후 동쪽 한반도로 군대를 보내 백제(660년)와 고구려(668년)를 멸망시킨다. 이때 서돌궐을 무너뜨린 당나라 장군은 소정방이다. 소정방은 백제 침략군 사령관으로 부여에 와서 부여의 정림사지오층석탑에 자기의 전공을 기록해 놨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지만 만일 서돌궐이 쉽게 멸망하지 않았으면 신라의 삼국통일이 다른 방향으로 갔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고창고성을 본 다음 오후 7시경 ‘교하(交河)고성’에 들렀다. 교하는 두 개의 강물이 교차한다는 의미다. 기원전 3세기 투루판에 있었던 차사왕국의 수도가 교하고성이다. 야르나이즈강 가운데 버들잎 모양의 길이 1천600m, 폭 300m의 작은 섬에 수도를 건설했다. 섬 양옆으로 강물이 흘러 성을 보호하는 해자(垓子) 역할을 한다. 약소국 차사왕국은 2천200년 전 강대국 흉노족과 한나라에 각각 왕자를 볼모로 보냈다. 두 강대국에 줄타기 외교를 하다 한나라에 의해 멸망한 작은 오아시스 왕국이다. 어쨌든 2천년 넘게 긴 세월의 풍파를 지나고도 남아 있는 역사의 흔적을 보면서 세월의 무상함을 실감한다. 당나라 시인 두보가 쓴 ‘춘망(春望)’이라는 유명한 시가 있다. “나라는 망하여도 산하는 남아 있어. 성안에 봄이 오니 수목만 무성하구나. 시국을 생각하니 꽃도 눈물을 뿌리게 하고. 이별을 한탄하니 새도 마음을 놀라게 하고. 봉홧불이 석달이나 계속되니. 집에서 오는 편지는 만금에 해당한다.” 특산물 포도를 재배하려면 많은 물이 필요하다. 1년 강수량이 20여㎜로 거의 비가 안 오는 지역인데도 투루판의 면적 70%가 포도 재배 지역이다. 투루판 농민은 지하에 수로로 연결된 ‘카레즈’를 만들어 농사를 짓는다. 수백㎞ 떨어진 톈산산맥의 물을 지하에 땅굴을 만들어 끌어온다. 해수면 이하 저지대가 투루판 면적의 80%가 넘는다. 저지대는 매우 건조해서 증발지수가 매우 높다. 수로를 지상으로 만들면 물이 투루판에 도착도 하기 전에 전부 증발한다. 지하 10m 깊이에 수로를 파 연결한 수로의 전체 길이가 5천㎞라고 한다. 기원전 7세기 이란으로부터 기술을 들여와 수천년 동안 땅속에 수로를 판 셈이다. 지금도 계속 지하수로를 보수해 포도 재배와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있어 경이로움을 느낀다. 중국인들은 ‘만리장성, 대운하, 카레즈’를 3대 토목사업이라고 자랑한다.

[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하미에서 투루판으로... 험난한 여정

우리는 ‘서역북로’ 실크로드 길을 지나고 있다. 실크로드 코스 중 가장 험난한 지역이다. 신장(新疆)은 300여년 전 청나라 건륭제가 위구르족이 살던 서쪽 땅을 점령하고 ‘새로운 영토’라는 뜻으로 청나라 영토로 편입한 지역이다. 신장의 위구르족에게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지하드 조직과 무슬림 군사 조직이 무기를 지원하면서 독립을 부추기고 있어 긴장이 맴도는 지역이다. 위구르족은 튀르크족(돌궐족) 계통의 종족으로 톈산산맥 북쪽 알타이산맥과 몽골고원에 살았던 종족이다. 전성기는 740~840년으로 중앙아시아 초원을 통일한 종족이다. 현재는 없어진 ‘마니교’를 국교로 정한 유일한 국가다. 840년 왕족의 내분과 키르기스족의 침략으로 멸망한다. 일부 위구르족 지배층이 톈산산맥을 넘어 타클라마칸사막의 투루판, 쿠차 지역으로 도망 와서 다시 ‘위구르 왕국’을 세우고 15세기경에 이슬람교를 받아들였다. 중국은 조선족을 포함해 56개 소수민족이 있다. 위구르족은 현재 약 1천200만명으로 독립 의지가 가장 강한 종족이다. 장제스와 마오쩌둥 군대가 내전을 벌이던 1940년 카슈가르를 수도로 ‘동투르키스탄’ 국가를 선포했다. 그러나 중국을 통일한 마오쩌둥 군대가 1949년 신장에 진입함에 따라 독립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20세기 말에도 독립을 지지하는 대학생 시위가 카슈가르, 쿠차 등에서 발생하고 베이징 등 대도시에 자살 테러 등이 있었다. 우리가 통과하는 신장 지역은 위구르족 테러 방지를 위한 공안의 검문검색으로 마치 전쟁터를 통과하는 것처럼 긴장감이 맴돌았다. 하미의 특산물로 ‘하미과’가 유명하다. 하미과는 참외와 수박의 중간 크기다. 우리가 먹는 멜론과는 다르다. 하미과는 황제의 진상품으로 유명해졌다. 적당한 당도, 아삭아삭하게 씹히는 과육과 향기가 독특하다. 하미과가 유명해진 것은 과거 당나라 황제의 식탁에 오른 후부터다. 임금이 어느 지역에서 보내온 것인지 묻자 환관은 엉겁결에 “하미입니다”라고 답한 다음부터 하미 주민은 이 과일을 장안으로 보내는 고생이 시작됐다고 한다. 오늘 우리는 하미에서 투루판까지 400여㎞의 타클라마칸사막을 지나야 한다. 타클라마칸사막은 위구르어로 ‘한번 들어가면 살아서 나오기 어려운 곳’, 즉 ‘죽음의 사막’이라는 뜻이다. 아프리카 사하라사막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 큰 사막이다. 면적이 33만~37만㎢로 남쪽은 쿤룬산맥, 북쪽은 톈산산맥으로 둘러싸인 ‘타림분지’ 안에 있다. 타클라마칸사막에서 가장 눈에 띄는 풍경은 도로 양옆으로 수십㎞ 이어지는 ‘풍력발전’ 단지다. 대량 설치에 따른 ‘규모의 경제’ 때문에 설치 비용이 우리의 3분의 1에 불과하다고 한다. 과거 타클라마칸사막의 악명 높은 바람을 ‘카라부란’(검은 바람)이라 했다. 사막에서 짐을 실어나르는 낙타는 상인들에게 ‘사막의 배’로 불린다. 낙타는 사람보다 모래폭풍 카라부란이 오는 것을 미리 알고 울음소리를 낸다. 상인들은 낙타 옆에 숨어 무서운 모래폭풍 카라부란으로부터 생명을 지켰다고 한다. 낙타는 20여일간 물을 안 먹고도 살 수 있는데 보통 5일에 한 번 먹는다고 한다. 옛날 타클라마칸사막의 주민들은 어린 자녀들 손목에 작은 방울을 달아줬다고 한다. 바람이 불어와 아이를 모래로 덮거나 바람에 날려가면 아이를 찾기 위해서다. 주민들을 힘들게 하던 사막의 바람이 이제는 전기를 일으켜 돈이 되는 신재생에너지가 됐다. 오후 3시경 투루판 외곽에 도착하니 소설 ‘서유기’에 나오는 ‘화염산’의 붉은 산맥이 보인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는 붉은 민둥산이다. 명나라 오승은이 16세기 쓴 소설 서유기에 나오는 화염산 지명은 우리에게 익숙한 곳이다. 위구르어로 화염산은 ‘붉은 산’이라는 뜻이라 한다. 투루판은 과거 불의 도시 ‘화주(火州)’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연간 일교차가 78도나 된다고 한다. 투루판은 6, 7세기 ‘고창왕국’이 있던 지역이다. 대당서역기를 쓴 현장 법사와 고창국 왕(국문태)의 만남(629년)으로 유명하다. 고비사막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하미에 도착한 현장 법사 소식을 고창왕이 들었다. 왕은 현장을 투루판으로 모셔 와 불법을 듣고 극진하게 대접했다. 어린 시절 읽었던 서유기 소설에 손오공이 ‘우마왕’ 요괴와 싸우기 위해 ‘파초선’을 빌려와 화염산 불을 끄는 장면이 있다. 우리는 오후 화염산 매표소에 도착했다. 7월 말 오후 늦은 시간임에도 기온이 섭씨 45도다. 투루판은 해수면 이하 저지대 분지여서 여름철 더위가 혹독한 지역이다. 화염산 매표소 근처에 가보니 높이 20m의 긴 장막으로 화염산을 가려 놨다. 돈 내고 입장권을 끊어 울타리 안에 들어가야만 산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다. 대동강물을 팔아먹은 ‘봉이 김선달’의 중국판이다.

[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실크로드의 관문... 위먼관과 양관

실크로드 관문인 당나라 시대 유적인 위먼관(玉門關)과 양관(陽關)을 보러 갔다. 위먼관은 둔황에서 90㎞ 서쪽에 있다. 당나라 시대 만리장성 서쪽 끝은 명나라가 만든 자위관(嘉峪關)보다 500여㎞ 서쪽인 이곳을 위먼관이라고 한다. 둔황을 조금만 벗어나면 메마른 허허벌판 사막의 연속이다. 위먼관으로 가는 중간에 사막에서 희귀한 자연현상인 ‘신기루’를 목격했다. 멀리 사막 앞에 파란 호숫물이 넘실대는 모습이다. 영락없이 푸른 물이 가득한 호수처럼 보인다. 필자와 아내를 비롯한 일행이 환호성을 지르며 신기루 현상을 자세히 보려고 차를 세우고 내려 사진을 찍는다. 빛이 투과되는지 사진에 나타나지 않는다. 신기루라는 단어는 인생의 허무함과 부귀영화의 덧없음을 비유할 때 ‘신기루 같은 인생’ 식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7월 하순 작열하는 사막의 위먼관으로 가는 길은 한산하다. 위먼관에 도착하니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는 ‘위먼관’ 표지석과 ‘소반반성’ 표지석이 나란히 서 있다. 매표소에서 위먼관 유적까지 불과 300여m 걷는데도 사막의 혹서에 땀이 줄줄 흐른다. 위먼관은 한나라, 당나라 시대 사용하던 최전방 국경 관문, 군대 주둔지, 사신이 묶어가는 ‘역참’ 시설이었다. 역참은 사신이나 전령 등에게 말을 빌려주고 식사와 숙박을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 우리가 ‘사주에 역마살(驛馬煞)이 끼었다’에서 역마살이라는 단어는 역참에서 유래한 것이다. 흙벽돌로 지은 위먼관 망루는 천 수백 년 세월을 잘 이겨내고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위먼관의 텅 빈 내부 공간은 지붕은 없어 하늘이 그대로 보인다. 지붕으로 사용되던 나무로 만든 서까래와 대들보가 삭아 없어졌기 때문이다. 위먼관을 감싸는 흙벽의 두께가 어림잡아 2m 이상 돼 적군이 공격해도 끄떡없을 것 같다. 한나라가 처음 만들고 당나라가 보수해 사용했으니 2천년은 됐을 것이다. 위먼관 바로 옆에 유목민들이 침입하면 둔황 사령부에 연락하는 ‘봉화대’ 유적이 들판에 남아 있다. 지금 이곳은 황량한 허허벌판이지만 당나라 시대에는 군인이나 여행객이 이용하는 오아시스와 군인 가족이 사는 작은 마을이 있었을 것이다. 위먼관을 나와 70여㎞ 북서쪽으로 이동하면 ‘아단 지질공원’ 또는 ‘마귀성’이라고 부르는 지질공원이 있다. 마귀성 가는 길 옆에 중국 우주군 군대 기지의 긴 철조망을 지나간다. 자동차로 철조망 울타리를 통과하는 데 30분 이상 소요되는 것으로 미뤄 그 면적이 얼마나 큰지 상상해 본다. 마귀성에 도착하니 오후 4시다. 바람의 풍화작용으로 형성된 기암괴석 바위 지형이다. 바람 불 때 귀신 우는 소리가 들린다고 해서 이름이 마귀성이다. 마귀성 관람에 버스로 두 시간 소요된다는 직원의 설명을 듣고 관람을 포기했다. 실크로드의 중요한 관문 중 하나인 양관을 해지기 전에 들러야 한다. 양관은 둔황에서 서쪽으로 70여㎞ 떨어진 국경 관문이다. 사막의 작은 산봉우리에 토성 형태만 남은 당나라 시대 양관의 흔적이 나타난다. 양관은 실크로드의 두 갈래 길, ‘서역남로와 서역북로’가 갈라지는 지점이다. 양관은 과거 당나라에 들어오는 상인, 여행객 등이 입국할 때 출입증을 받고 출국할 때 출입증을 확인했던 관청이다. 매표소 입구에 한무제 때 실크로드 개척자 ‘장건’ 동상이 우리를 맞이한다. 양관 건물의 정문에 설치된 현판 휘호가 ‘청뇌헌(聽雷軒)’이다. 한밤중에 멀리 사막에서 들려오는 천둥소리를 귀 기울여 듣는다는 뜻이다. 양관의 남쪽에 눈 덮인 쿤룬산맥이 멀리 아스라이 보인다. 쿤룬산맥은 중국인들이 도교의 성지로 신성시하는 곳이기도 하다. 쿤룬산맥 아랫길로 ‘서역남로’가 있다. 둔황에서 이틀을 보낸 후 아침 일찍 400여㎞ 서북쪽에 있는 하미(哈密)로 향한다. 성(省) 이름이 ‘간쑤성’에서 ‘신장위구르자치구’로 변경된다. 서쪽으로 갈수록 건조한 ‘로프사막’의 황량함이 아름다운 고독감과 비장함을 느끼게 만든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사방으로 끝없는 광활한 사막만 펼쳐져 있다. 로프사막은 타클라마칸사막과 고비사막이 만나는 중간이다. ‘서역(西域)’은 둔황 서쪽 모든 미지의 땅을 의미했다. 이제부터 서역 여행의 본격적인 시작이다. 오늘 숙박지 하미는 타클라마칸사막 북쪽의 ‘서역북로’가 지나가는 사막 도시다. 하미로 가는 400㎞의 사막길은 오아시스가 거의 없다. 어느 곳은 검은색 사막이 나타나기도 하고 자갈이 많이 깔린 사막이 나타나기도 한다. 차량 밖 기온은 43도가 넘는다. 이런 혹서의 사막길을 물도 부족한 상태로 수십일 동안 걸어서 간다고 생각하면 그 어려움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대당서역기를 저술한 현장 법사가 서기 629년 가을 하미로 가는 사막길 어려움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인적은커녕 하늘을 나는 날짐승도 없는 망망한 천지가 벌어지고 있을 뿐이다. 밤에는 귀신불이 별처럼 휘황하고 낮에는 모래바람이 모래를 휘몰아 소나기처럼 퍼부었다. 5일 동안 물 한 방울 먹지 못해 입과 배가 말라붙고 당장 숨이 끊어질 것 같아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1천400년 전 현장 법사는 하미로 갈 때 현지인 안내인을 고용해 갔다고 한다. 밤중에 안내인이 강도로 돌변해 위협했다. 현장 법사는 강도로 변한 가이드에게 좋은 말 한 필을 주고 혼자서 사막을 걸어 갔다. 도중에 식수가 떨어져 사막에서 물 없이 5일을 걸었다. 현장은 목마름을 참지 못하고 늙은 말을 죽여 간을 먹었다고 한다. 현장 법사, 혜초 스님의 신발은 가죽으로 덧댄 간단한 샌들일 것이다. 현장 법사의 서역으로 가는 그림을 보면 짐을 가뜩 실은 지게를 메고 한 손에 작대기와 염주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신장위그루 지역으로 진입하면서 고속도로에서 중국 공안(경찰)의 검문 횟수가 잦아지고 강도가 높아진다. 신장의 위구르족 테러 문제가 중국에 얼마나 큰 문제인지 피부로 느낀다. 하미까지 400여㎞의 고속도로를 통과하는 동안 여섯 번 공안의 검문을 받았다.

[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둔황석굴과 혜초 스님 ‘왕오천축국전’

둔황 막고굴(莫高窟) 천불동(千佛洞). 천불은 ‘많다’는 의미다. 부처님 모신 석굴은 남쪽 492개, 승려들이 살았던 북쪽 240여개 등 전체 석굴 수는 730여개다. ‘종교와 신(神)’은 인간만이 갖고 있는 문화다. ‘신과 종교’는 인류가 창조한 가장 위대한 발명품의 하나라는 말이 있다. 신을 발명한 인간은 신도 인간처럼 선물을 좋아하고 화려한 집에서 살기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많은 제물과 공물을 신에게 바치고 많은 돈을 들여 신이 사는 화려한 성전을 건설했다. 자기가 믿는 신이 최고의 신이라 생각하고 다른 신을 믿는 종족과 전쟁을 벌이고 이교도를 박해하기도 했다. 실크로드는 ‘종교의 길’이다. 서쪽에서 불교,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기독교 등이 동쪽 중국으로 왔다. 막고굴의 앞면은 작은 개천이 흐르고 뒤쪽은 밍사산 절벽이다. 작은 실개천이 흐르는 양옆은 포플러 나무가 무성하다. 이곳 개천의 진흙으로 불상을 만들고 물은 승려들의 식수원이다. 실크로드 여행에서 꼭 한 도시만 가라고 한다면 둔황석굴을 가야 한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둔황석굴의 시작은 서기 366년 ‘낙준’이라는 떠돌이 승려가 밍사산 옆을 지나다 관세음보살이 현신하는 것을 보고 절벽 바위에 굴을 파고 수도를 시작한 것이 시작이다. 역대 왕조가 492개의 석굴을 조성했는데 당나라 때 가장 많이 만들었다. 당나라 시대 225개, 수나라 97개, 토번(티베트) 시대에 70개가 조성됐다. 둔황석굴은 세 가지 문화적 가치가 있다. 첫째는 진흙으로 빚은 수많은 부처와 보살 소상(塑像)이 약 1천700개라고 한다. 부처 소상은 무게와 크기 때문에 약탈을 면해 온전하게 보존돼 있다. 부처, 보살 등 소조불(塑造佛)은 근처 개천의 진흙으로 만들었다. 장인들이 진흙에 볏짚, 양털, 꿀, 광물질 등을 섞어 만든 것으로 천년이 지나도 그대로다. 두 번째는 모든 석굴의 벽면과 천장을 화려한 그림으로 채색한 엄청난 벽화다. 석굴 전체 벽화 길이가 5m 폭으로 계산하면 50㎞에 달한다고 한다. 부처 소상과 벽화의 안료는 공작석(초록색 염료), 청금석(푸른색 염료) 등 서역에서 수입한 값비싼 안료로 만들었다. 세 번째는 17호 장경동 석굴에서 발견된 4만여권의 장서다. 17호굴(관리상 일련번호)은 ‘도서관 석굴’ 장경동(藏經洞·Library Cave )이라 부른다. 둔황석굴이 세계적으로 관심을 받게 된 것은 1900년 17호 장경동 발견 때문이다. 장경동 석굴은 세 사람이 주역이 있다. 청나라 말기 도교 도사인 왕원록(왕도사), 영국의 오렐 스타인, 프랑스의 폴 펠리오다. 900년 동안 숨겨져 있던 장경동 17호 석굴을 발견한 얘기는 매우 흥미롭다. 왕도사는 19세기 말 청나라 군인 출신으로 제대 후 도교 도사가 된 사람이다. 1900년 장경동 석굴 발견 당시 왕도사는 폐허 수준인 16호 석굴에서 조수 한 사람과 함께 거주하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왕도사는 조수를 크게 꾸짖는 일이 발생했다. 조수는 담배를 피우면서 화를 삭이다가 16호 석굴 벽면에 담뱃대를 툭툭 털었는데 벽에서 울림이 있는 공명 소리를 듣게 된다. 왕도사와 조수는 이상하게 생각해 벽을 허물었더니 벽 속에 작은 굴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곳에 4만여점에 달하는 각종 종교의 경전, 계약서류, 편지, 비단 그림 등이 들어 있었다. 석굴의 폐쇄된 연도는 조사한 결과 1002년이다. 900년 동안 잠자고 있던 타임캡슐이 개봉된 것이다. 인도에 있던 영국인 고고학자 겸 탐험가 스타인은 둔황에서 많은 고문서가 발견된 소문을 들었다. 그는 둔황에 와서 1907년 왕도사를 설득해 7천여점의 문서를 사 갔다. 이후 고문서 소문을 들은 프랑스 탐험가 펠리오도 1908년 둔황에 도착해 역시 7천여점의 문서를 사 갔다. 장경동 서적은 한자, 산스크리스트어, 티베트어, 소그드어, 호탄어 등 다양한 언어로 작성된 고대 문서의 타임캡슐이다. 희귀한 조로아스터교와 마니교 경전도 있고 히브리어로 된 기독교 기도문 등 다양한 종교자료가 있다. 사서(史書)에 없는 서민들의 실상, 없어진 고대 문자, 사라진 마니교 등 경전 등이 귀중한 ‘둔황학’의 배경이다. 1908년 펠리오가 가져간 서적 중에 혜초 스님(704~787)이 쓴 ‘왕오천축국전’이 포함돼 있었다. 왕오천축국전은 제목도 없고. 저자 이름도 없고, 앞뒤 표지가 없는 6천여자의 요약본 서류였다. 펠리오는 이 문서를 연구해 1909년 당나라 혜초 스님의 여행기라는 사실을 논문에 발표했다. 1915년 일본 학자 가카쿠스 준지로가 혜초의 국적이 당나라가 아닌 ‘신라’ 승려임을 밝혔다. 왕오천축국전은 혜초가 723년경부터 727년까지 4년간 인도의 오천축(동서남북과 중앙)과 중앙아시아 40여개국을 다녀온 여행기다. 중국 광저우에서 배를 타고 동인도로 갔다가 귀국은 파미르고원과 타클라마칸사막 등을 거쳐 육로로 왔다. 왕오천축국전은 간략한 자료지만 1천300년 전 중앙아시아 오아시스 국가의 풍속, 종교, 사회상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사료다. 원본은 상중하 3권으로 추정되는 데 분실됐다. 혜초는 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이란 동북부 등을 다녀온 최초의 한민족 모험가이자 세계인이다. 지금으로부터 1천300년 전 20대 신라 젊은이가 혈혈단신 인도와 유라시아 대륙의 무전(無錢)여행을 다녀온 것이다. 오늘날 세계로 향하는 우리 청년들에게 멋진 모델이다. 둔황석굴에 신라 관련 석굴 두 개가 더 있다. 61호 석굴의 벽화 ‘오대산도’에 신라 사찰 송공사와 신라인 5명의 그림이 있다. 355호 석굴은 조우관을 쓴 신라인 2명이 나온다. 경주에서 사신으로 장안에 갔던 관리들이 왕족의 부탁으로 멀리 둔황에 간 흔적이다. 신라인들이 실크로드 중심도시 둔황까지 진취적으로 왕래했던 역사적 흔적을 확인하고 있다.

[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국제 중계무역 중심지 ‘둔황’으로

유목민처럼 매일 넓은 서쪽의 광야를 횡단하고 있다. 자유로운 영혼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자동차의 주행거리 기록을 보니 9천㎞를 지나왔다. 숙소인 주취안(酒泉)에서 출발, 만리장성과 자위관을 뒤로하고 ‘둔황(敦煌)’으로 향한다. 산 정상이 하얀 눈으로 덮인 치롄산맥이 바로 가까이 보인다. 오아시스 주변의 밭은 스프링클러로 물을 뿌려 옥수수, 해바라기를 심은 곳이 많다. 도시를 조금만 벗어나면 황량한 사막과 고원이 나타난다. 둔황 가는 중간의 위먼(玉門)시에 들렀다. 오아시스 도시 위먼도 고층 아파트가 즐비하고 도심의 8차선 도로 폭은 매우 넓고 가로수는 울창하게 자라 도시계획이 매우 잘돼 있다. 도심 중앙의 공원은 커다란 인공호수를 만들어 물을 가득 저장하고 있다. 위먼은 서역의 옥이 들어오는 문이라는 의미다. 서역에서 최고의 명품 옥이 생산되는 곳은 타클라마칸사막 남쪽 도시 ‘호탄’이다. 중국인들의 옥에 대한 사랑은 역사가 깊고 대단하다. 전설에 의하면 옥은 하늘에 사는 용(龍)의 눈물이 변해서 된 것이라고 전한다. 중국에는 옥에 대한 고사(古史)가 많다. 2천400년 전 춘추전국시대 초나라의 화씨(和氏)라는 사람이 좋은 옥이 들어있는 원석을 발견해 왕에게 바친다. 화씨는 나쁜 옥을 바쳤다는 오해로 발목이 잘리는 형벌까지 받았다. 우여곡절 끝에 원석은 가공돼 최고의 옥으로 태어난다. ‘화씨지벽(和氏之璧)’이다. 화씨벽은 세월이 흘러 조나라에 오게 된다. 당시 강대국 진나라는 조나라의 화씨벽을 갖고 싶어 5개 성과 바꾸자고 강압적인 제안을 한다. 진나라의 미움을 받지 않기 위해 약소국 조나라의 재상 인상여가 화씨벽을 가져다가 진나라 소양왕에게 바친다. 옥을 받은 소양왕은 약속한 5개 성을 내줄 생각이 없다. 이때 인상여가 왕에게 옥에 매우 작은 흠(하자·瑕疵))이 있다고 말한다. 흠 자국을 알려준다며 왕에게서 옥을 돌려받은 인상여는 옥을 강제로 빼앗으면 벽에 던져 부수겠다고 재치를 발휘해 옥을 무사히 갖고 귀국한다. 사자성어 완벽귀조(完璧歸趙)의 유래다. 현재도 자주 사용하는 완벽(完璧), 하자(瑕疵), 무가지보(無價之寶) 등의 성어가 생겼다. 2천200년 전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고 화씨벽으로 옥새를 만들었다. 진시황은 재상 이사로 하여금 옥새에 ‘수명어천 기수영창(受命於天 旣壽永昌·하늘에서 명을 받았으니 그 수명이 길이 창성하리라)’ 여덟 글자를 새기게 했다. 이 옥새는 진시황의 손자가 한나라 초대 황제 유방에게 바친다. 화씨벽으로 만든 옥새는 위진남북조시대, 수나라, 당나라, 5대10국까지 약 1천200년을 사용하다 10세기 중반 분실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도 왕이 갑자기 죽거나 어린 왕이 즉위하면 왕위 승계는 ‘옥새’의 인수인계에서 시작한다. 둔황에 가까이 가면서 왼쪽에 따라오던 치롄산맥은 없어지고 밍사산(鳴砂山)의 모래 산맥이 나타난다. 우리는 오늘 하서회랑의 끝자락 400㎞를 달려와 오후 늦게 둔황에 도착했다. 먼저 내일 오전 방문할 ‘둔황 천불동(막고굴)’ 입장권을 미리 구입했다. 둔황은 실크로드 무역로에 있는 도시 중 가장 큰 국제 중계무역 도시다. 서쪽에서 온 소그드 상인, 페르시아 상인과 장안에서 온 중국 상인이 둔황에서 교역을 했다. 실크로드 3대 간선인 ‘서역북로, 서역남로, 천산북로’ 세 길이 둔황에서 만나고 둔황에서 헤어지는 교통의 요충지다. 오후 6시경 석양 무렵에 둔황 외곽 밍사산과 ‘월아천’에 도착했다. 밍사산은 바람이 불면 고운 모래가 날리면서 우는 소리가 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금빛 고운 모래가 바람이 불 때마다 움직여 능선 모양이 수시로 바뀐다고 한다. 월아천(月牙泉·웨야취안)은 모래사막 안에 있는 작은 초승달 모양의 오아시스 호수다. 월아천은 수천년간 기후변화, 가뭄 등이 많았는데 한번도 마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지금은 수량이 많을 때의 3분의 1 수준이다. 7월 하순 햇볕이 작열하는 모래사막에서 물이 솟아나는 자연 현상은 신비로움과 경이로움 그 자체다. 2천년 전 한나라 때부터 월아천에 여행객을 위한 숙소가 있었다. 현재는 도교 사원으로 사용하는 ‘월천각’이다. 아름다운 건물 월천각의 3층 난간에서 월아천을 내려다보며 사진 찍는 관광객이 무척 많다. 7월 하순 밍사산 사막의 낮 기온은 40도가 넘고 모래가 내뿜는 열기로 화상을 입기 십상이다. 관광객은 오후 5시 이후 기온이 떨어질 때 찾아온다. 석양의 모래언덕은 햇빛을 반사해 금빛으로 찬란하다. 오후에 찾아오는 관광객들은 밍사산 모래언덕 위에 올라가 해가 지는 사막의 낙조(落照)를 즐기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필자와 아내는 인파가 적은 월아천 건너편 외떨어진 지역으로 갔다. 아내는 잽싸게 양말을 벗고 월아천 호숫물에 발을 담그고 기념촬영을 하며 즐거워했다. 우리는 오후 8시 반 늦게 밍사산에서 내려왔다. 오후 9시경 둔황 시내 한국 식당을 찾아 삼겹살을 먹으러 갔다. 식당 주인은 조선족 부부인데 압록강 건너편 도시 지안(과거 고구려 수도·국내성)에서 왔다고 한다. 10년 넘게 장사하고 있는데 한국 단체 손님이 일주일에 5~6팀은 온다고 한다. 몽골에서 삼겹살 점심을 먹었는데 중국에서 처음으로 삼겹살, 소주, 김치찌개 등으로 식사를 하니 스트레스가 해소된다. 식당 주인에게 물값이 비싼지 물어봤다. 주인은 만주에 살 때보다 저렴하고 훨씬 풍족하게 물을 사용한다고 답한다. 주변 사막에서 농사 짓는 농민들도 물값 걱정은 안 한다고 한다. 시내를 다니다 보면 관개수로에는 물이 철철 넘치고 물을 저장하는 커다란 인공호수가 곳곳에 있다. 사막에서 물은 생명의 근본인데 중국 정부의 막대한 사회간접자본(SOC) 투자로 사막 도시들이 번영을 누리고 있음을 본다.

[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만리장성 최서쪽 관문 ‘자위관’

우리는 간쑤성 하서회랑 황토고원 길을 달렸다. 약 2천200년 전 한나라가 서쪽 변방에 만들었던 ‘하서(河西) 4진’의 도시를 통과했다. 우리가 지나가는 고속도로 옆에 600년 전 만든 만리장성 흔적이 나타났다 없어졌다를 반복한다. 근세 총기류의 발달로 성벽의 용도가 사라져 오랜 세월 방치했기 때문에 흔적만 남아있다. 실크로드가 통과하는 서역 오아시스의 도시들은 전쟁의 역사를 겹겹이 가졌다. 전쟁의 유산인 만리장성, 봉화대 등은 유명한 관광자원으로 후손들이 돈을 벌고 있다. 인간의 원초적 본성에 ‘전쟁과 싸움’의 유전자가 정말 있는지 20세기 초반 서구의 진화인류학자들이 오지에 살고 있는 원시 종족을 대상으로 장기간 전쟁 실태를 관찰했다. 문명의 혜택이 가장 적은 뉴기니아 오지 산악지대의 종족들, 아프리카 남부 칼라하리 사막에 살고 있는 미개한 종족의 전쟁을 조사하는 것이다. 결과는 2, 3년 간격으로 보복 전쟁이 계속 발생함을 기록하고 있다. 식량 부족, 신부 약탈, 부족원 살해 등에 의한 보복과 약육강식 본성이 전쟁 원인이다. 하서회랑을 지나는 7월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높고 푸르렀다. 250여㎞를 달려 낮 12시경 만리장성 최서쪽 관문 자위관(嘉峪關)에 도착했다. 관광객을 많이 받기 위해 입장은 2부제로 하고 있다. 주간 입장은 오전 8시부터 오후 7시30분, 야간 입장은 오후 7시30분부터 밤 12시까지 두 종류의 입장권을 팔고 있다. 자위관 입장료는 110위안(2만원)이다. 중국 문화유적 입장 절차에는 공통된 특징이 있다. 주차장이 수㎞ 멀리 외곽에 설치돼 있다. 주차장에서 전동카트, 버스 등를 타고 입구에 도착한다. 정류장에서 내려 다시 한동안 걸어가야 정문이 나온다. 정류장에서 내려 걸어가는 중간에 많은 노점상이 장사를 한다. 관광객이 너무 많아 입장권을 끊는 데 30분 이상 걸렸다. 입구에서 5분 이상 카트를 타고 이동한 다음 카트에서 내려 걸어가면 ‘천하제일웅관’ 자위관 현판이 나타난다. 청나라 이후 자위관은 오랫동안 폐허였는데 1987년 중국 정부가 관광객 유치를 위해 재건축한 모습이 오늘의 자위관이다. 성벽 위 폭은 말 다섯 마리가 동시에 다닐 수 있다. 사막에서 유목 기마병이 쳐들어오는 고비사막 서쪽을 향해 총안(銃眼)이 설치돼 있다.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산하이관(山海關)’으로 산둥반도 보하이만 바닷가에 접하고 있다. 동쪽 산하이관에서 서쪽의 자위관까지 길이는 3천700㎞, 5천㎞ 등 자료마다 달라 어느 것이 맞는지 알 수 없다. 최근 중국 자료는 모든 지선, 심지어 고구려의 요동성 등 포함 2만1천㎞라고 발표했다. 현재 남아있는 만리장성 유적은 전체의 20% 미만이고 50% 이상은 흔적도 없다. 달에서 보이는 유일한 지구의 건축물이 만리장성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고 중국 정부도 사실이 아니라고 발표했다고 한다. 한나라 시대부터 만리장성은 한(漢)족과 이(夷)민족의 경계선, 실크로드 상인들의 출입 허가 국경, 죄를 지은 사람을 변방으로 추방하는 경계선이다. 자위관 망루에 서서 멀리 사막에서 말 타고 달려오는 유목민 기마병, 안도의 한숨을 쉬는 실크로드 상인, 구법승 등을 상상해 본다. 자위관 서문 밖은 자갈이 많고 딱딱하고 메마른 사막이 서쪽으로 길게 늘어져 있다. 현재는 많은 낙타꾼이 관광객을 대상으로 돈을 벌고 있다. 우리는 만리장성의 자위관을 둘러보고 동쪽과 서쪽의 초소로 이동했다. 자위의 서쪽 끝에 있는 제1초소는 어떻게 생겼는지 의문이 있었는데 궁금증이 풀렸다. 자위관에서 7㎞ 서쪽으로 가면 만리장성의 서쪽 끝에 ‘제1돈’(제1 초소)이 있다. 1초소 옆에 협곡이 있고 협곡의 깊이는 30여m, 폭은 80m 이상으로 천연의 방어벽이다. 사막에서 말 타고 침략한 기마병들이 협곡을 건너는 장비가 없다면 건너기 어려워 보인다. 이곳 제1초소가 사실상 만리장성의 서쪽 끝이다. 자위관 동쪽에 ‘헌벽산성’이 설치된 석산이 있다. 최근에 새로 보수한 성벽이 헌벽산으로 이어지고 있다. 산 중턱 망루까지 걸어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가파른 성벽을 올라가면서 38도 무더운 날씨와 맞물려 땀으로 옷이 흠뻑 젖었다. 숙소는 자위관 근처에 있는 주취안(酒泉) 시내 호텔이다. 주취안은 한무제가 만든 하서 4진의 하나다. 술샘의 뜻, 주취안 지명의 유래는 2천200년 전 한무제가 흉노족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곽거병 장군에게 승리를 축하하는 술을 보낸 것에서 시작한다. 명장 곽거병은 황제의 하사주(下賜酒)를 받고 전투를 함께한 병사 전체와 먹기 위해 고민했다. 곽거병은 황제의 하사주를 근처 샘에 부은 다음 모든 장병에게 샘물을 나눠 마시도록 했다. 술 몇 병으로 전체 장병의 사기를 높였다는 고사에서 ‘술샘’, 주취안 지명이 유래했다. 현재도 주취안의 술은 맛이 좋기로 유명하다고 해서 저녁에 반주로 ‘酒泉’ 상표의 술을 마셨다. 향이 좋은 술은 아마 치롄산맥의 빙하 녹은 물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곽거병 못지않게 흉노족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이광’ 장군이 있다. 이광 장군의 ‘중석몰촉(中石沒鏃)’ 고사성어가 역사가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기록돼 있다. 이광은 활을 잘 쏘는 장군이다. 이광이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가 숲속에 누워 있는 호랑이를 보고 활을 쏴서 맞혔다. 가까이 가서 확인해 보니 바위에 화살이 박혀 있다. 이광은 다시 원위치로 돌아와 화살을 쏘아 보니 화살이 바위에 튕겨나간다. 바위에 화살이 꽂혔다는 중석몰촉은 정신을 집중하면 어려운 일도 이룰 수 있다는 고사성어다. 전쟁이 만들어 낸 술샘과 중석몰촉의 고사를 생각하며 오늘도 하루를 무사히 보냈다.

[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황사 발원지 ‘황토고원’·천혜 요새 ‘하서회랑’ 만나다

천수에서 오전 9시 간쑤(甘肅)성 성도 란저우(蘭州)를 향해 출발한다. 300여㎞ 이동 후 란저우에 일찍 도착했다. 란저우 가까이 접근하면서 황토고원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해발 1천~2천m인 황토고원은 40만㎢(남한의 4배)로 매우 넓다. 수천만년 동안 쌓인 황토층의 두께는 평균 50~80m다. 우리나라 봄철 황사(黃砂)의 발원지가 이곳 황토고원과 몽골의 고비사막이다. 황사는 봄철 편서풍을 타고 수천㎞ 떨어진 우리나라로 온다. 황허(黃河)강은 란저우시 중심부를 흘러간다. 황허강의 색깔은 짙은 황토색이다.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인 황허강은 길이 약 5천400㎞로 중국인들은 ‘어머니 강’이라고 부른다. 황허강변에 어머니 강을 상징하는 ‘모자상’을 설치해 놨다. 우리는 모터보트를 타고 황허강에서 동심의 뱃놀이를 즐기고 찻집에서 여유롭게 차를 마시며 황허강에서 오후 시간을 즐겼다. 란저우의 호텔에서 아침식사로 유명한 특산물 ‘란저우 우육면’을 주문했다. 중국은 넓은 영토를 가진 나라의 특성상 지역마다 지역 이름을 붙인 면이 발달했다. 다음 목적지는 570㎞ 떨어진 장예(張掖)다. 간쑤성은 동서 1천65㎞, 남북 550㎞로 매우 큰 성이다. 간쑤성 중간에 900㎞에 이르는 ‘하서회랑(河西回廊) 또는 하서주랑(河西柱廊)’이라고 부르는 천연의 통로가 있다. 하서회랑의 왼쪽은 치롄(祁連)산맥이 병풍처럼 길게 늘어서 있고 오른쪽은 황토고원이 길게 벽을 형성하고 있다. 하서회랑 길은 실크로드 상인, 구법승, 군인, 외교사절 등이 당나라 장안(長安)에 들어가려면 꼭 지나가야 하는 통로다. 하서회랑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길이다. 이 길목을 차지하기 위해 한나라와 흉노족의 전쟁, 당나라와 티베트, 돌궐족 등과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하서회랑의 폭은 넓은 곳은 100여㎞, 좁은 곳은 10여㎞다. 중국은 만리장성의 서쪽 끝 관문인 자위관(가욕관)을 하서회랑의 폭이 가장 좁은 곳에 설치해 유목민의 침략에 대비했다. 하서회랑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황토고원의 풍경과 색상이 계속 바뀐다. 란저우에서 장예로 가는 중간에 고구려 포로의 후손으로 당나라에서 가장 출세한 안서절도사를 지낸 고선지 장군이 태어난 우웨이(武威)를 지나간다. 고구려가 당나라에 의해 668년 멸망 후 약 20만명이 포로로 잡혀와 변방 여섯 곳에 분산됐다. 고구려 포로의 후손들이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당나라 군대에 입대해 공을 세워 장교나 장군이 되는 것이다. 고선지의 아버지는 당나라 군대의 하급 군인이다. 고선지는 아버지의 군 주둔지인 우웨이에서 태어났다. 고선지는 20세에 벌써 유격대장으로 승진하고 당나라 현종 시대인 30대에 안서절도사로 승진한다. 고선지는 안서부절도사 시절 1만명의 적은 병력으로 749년 빙하로 뒤덮인 5천m 파미르고원을 넘어 토번(티베트) 군대 기지를 급습해 점령하고 서역 35개 국가가 조공을 바치도록 했다. 이러한 공로로 30대에 군사령관인 안서절도사로 승진했다. 고선지라는 인물이 각광받게 된 것은 유럽의 군사학자들이 기원전 3세기 로마제국과 전쟁을 위해 알프스산을 넘어간 카르타고의 영웅 한니발,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격한 프랑스의 나폴레옹보다 험난한 산악 군사작전을 펼쳤다고 평가함에 기인한다. 755년 안록산의 난이 발생하자 토벌군 부사령관으로 참전 중 누명을 쓰고 756년 30대 젊은 나이에 처형된 풍운아다. 차창 밖에서 황토고원의 다양하고 기이한 색상의 지형을 자주 만난다. 장예 근처에 오랜 세월 바람과 시간이 만든 칠채산 지질공원이 있다. 오후 늦게 도착해 칠채산 지질공원의 전망대로 버스를 타고 이동한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붉은색의 황량함은 외계인 영화에 나올 법한 이색적인 경관이다. 중국의 국가 공원은 5급, 4급, 3급으로 나뉘어 있고 5등급 국가 공원이 입장료가 가장 비싸다. 칠채산은 4등급으로 입장료가 90위안(약 1만7천원)이다. 비싼 입장료임에도 모든 관광지가 중국인 관광객으로 인산인해다. 하서회랑의 주요 도시는 기원전 2세기 한무제가 개척한 ‘하서4진’이 기원이다. ‘무위, 장액, 주천, 돈황’은 한나라 무제가 만든 하서4진이다. 칠채산을 보고 장예 숙소에 도착하니 늦은 시각이다. 다음 날은 장예에서 200여㎞ 이동해 만리장성 인접한 주취안(酒泉)에서 묵을 계획이다. 오후 일찍 도착해 만리장성의 최서쪽 관문인 자위관을 관람할 계획이다. 자위관으로 가는 고속도로 옆 황야에 무너져가는 만리장성 성벽, 초소가 있던 잔해를 자주 만난다. 명나라가 원나라를 몰아내고 14세기 만든 토성이 600년 세월의 무게를 견뎌내고 있다. 명나라는 몽골족 등 유목민의 침략을 방비하기 위해 1372년부터 성벽을 새로이 만들었다. 도로 왼쪽은 6천~7천m에 달하는 치롄산맥의 눈 덮인 산봉우리가 멀리서 보인다. 치롄산맥의 빙하 녹은 물이 이 지역의 생명수다. 중국은 치롄산맥의 계곡마다 많은 댐을 설치해 물을 모으고 오아시스 도시의 생활용수, 농업용수 등으로 공급하고 있다. 주취안으로 가는 휴게소에서 랴오닝(遼寧)성이 고향인 조선족 가족 여행객을 만났다. 한국말을 잘하는 교포를 만나니 반갑다. 랴오닝성 선양(瀋陽)에서 출발해 3개월 일정의 자동차 여행 중이라고 한다. 소득 상승에 따른 중국 중산층의 여행문화를 보는 것 같다. 향후 중국의 국민소득이 증가하면 자동차 여행객으로 가득 찬 도로를 미리 보는 것 같다.

[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문명·교류의 길 따라... 서안에서 ‘비단길’ 출발

중국 역사상 13개 왕조의 수도였던 서안(西安)에서 이틀 동안 달콤한 휴식을 취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서안까지 7천500㎞를 달려왔다. 이번 여행 거리의 약 3분의 1을 이동한 셈이다. 7월 서안의 여름 햇살은 무척 뜨겁다. 우리는 서안성에서 아침 일찍 고대 실크로드 상인들이 다녔던 ‘천산남로’ 길로 출발한다. 실크로드(비단길)는 비단처럼 아름답거나 편안한 길이 아니다. 1877년 독일 지리학자 리히트 호펜이 고대 중국과 로마의 가장 대표적인 교역품이 비단인 점에 착안해 ‘실크로드(Silk Road)’라는 아름다운 명칭을 붙였다. 도로라기보다는 오아시스, 사막, 산맥을 통과하는 ‘오솔길 흔적’이라는 표현이 맞다.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눈이 오면 길은 없어진다. 실크로드 개척자는 기원전 2세기 한나라의 장건이고 실크로드 전성기는 당나라 시대다. 실크로드는 당나라와 동로마제국 사이의 무역, 종교, 철학, 문화의 소통 길이다. 동서 교역에서 소그드 상인(사마르칸트 등 상인)들이 서기 5세기부터 10세기까지 500여년간 활약했다. 실크로드는 ‘육상 실크로드’, ‘해상 실크로드’ 크게 두 길이 있다. 육상 실크로드는 세 길이 있다. ‘서역남로, 천산남로, 천산북로’다. 우리는 서안에서 출발해 하서주랑과 둔황을 지나 타클라마칸 사막의 북쪽 길 천산남로를 통과할 것이다. 오전 9시 호텔을 출발, 서안성 서문에 있는 실크로드 기념 조형물에서 출정식을 한다. 실크로드 조형물은 쌍봉낙타를 타고 서역으로 떠나는 승려, 소그드 상인, 출정하는 군인 등을 실물의 2배 크기로 1992년 설치한 것이다. 오늘 저녁 숙박지는 산시(陝西)성 서쪽의 ‘천수(天水·현 중국어 표기 톈수이)’다. 서안 외곽의 고속도로 톨게이트 이름이 진시황의 궁전 이름인 ‘아방궁’이어서 눈길을 끈다. 관중평야를 지나며 크고 작은 도시, 평야의 무성한 옥수수, 밀, 유채밭, 농촌 마을이 보인다. 작은 도시에도 30, 40층 고층 아파트가 많다. 제대로 분양이 되는지 궁금하다. 현재 중국은 미분양 아파트 수가 1억여채로 중국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 서안을 조금 벗어나면 강태공의 낚시터로 유명한 ‘위수(渭水·웨이수이)’강을 옆으로 지나서 간다. 3천년 전 주나라 문왕이 사냥을 나갔는데 그날은 짐승을 한 마리도 못 잡고 우연히 위수에서 낚시하는 강태공을 만났다. 문왕이 “낚시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을 걸었다. “물고기를 낚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월을 낚고 있습니다”라고 강태공이 대답했다. 그때 강태공 나이 72세다. 처음 만난 문왕과 강태공은 긴 대화 끝에 의기투합해 재상으로 등용된다. 강태공의 전략으로 주나라는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통일중국을 이뤘다. 학창 시절부터 꿈꿨던 실크로드 종단을 결혼 40주년 기념으로 하고 있으니 감개무량하다. 실크(비단)라는 이름 때문에 ‘무역의 길’이 강조되지만 불교, 조로아스터교, 기독교, 마니교 등 ‘종교의 길’, 전쟁하러 출발하는 ‘전쟁의 길’, 페스트 등 질병이 오갔던 ‘재난의 길’이다. 당나라 장안에서 출발한 상품의 최종 목적지는 이스탄불, 페르시아, 이집트 등 지중해 연안 국가들이다. 반대로 서쪽에서 온 상품은 당나라, 신라, 일본 등이 목적지다. 실크로드 상인들은 중간에 재난과 위험을 피하고 장사가 잘돼 돈을 벌게 해달라며 실크로드 중간 곳곳에 사찰과 석굴을 건축해 신에게 기도하고 많은 공물을 바쳤다. 신라의 계림(경주)에서 출발, 서해 당진항에서 중국 산둥반도를 거쳐 당나라 수도 장안으로 가는 길도 실크로드 지선(支線)의 하나다. 신라시대 청해진(현재 완도)에서 당나라와 신라, 일본까지 국제무역을 했던 해상왕 장보고도 실크로드 무역상의 한 사람이다. 실크로드의 개척자는 2천200년 전 한나라 시대의 장건이다. 기원전 2세기 한무제는 흉노족의 계속되는 침략과 공물 요구 때문에 전쟁을 준비한다. 한무제는 흉노족의 침략으로 서쪽으로 쫓겨간 월지족이 흉노족에 원한이 많다는 정보를 접한다. 기원전 139년 서쪽의 월지족과 군사동맹을 체결, 흉노족을 양쪽에서 협공하라는 한무제의 명령을 받고 장건이 서역으로 출발했다. 장건은 서역으로 가는 길에 흉노족에 붙잡혀 10년 동안 포로생활을 한다. 장건은 흉노족의 내분을 틈타 탈출해 오늘날 우즈베키스탄 근처에 살던 월지족 왕을 만난다. 그런데 월지족 왕이 흉노족과의 전쟁을 원하지 않아 장건은 13년 만에 빈손으로 귀국했다. 장건은 월지족과 동맹은 못 했지만 복숭아, 수박, 포도, 무화과 등 서역 과일을 한나라에 가져오고 한혈마(汗血馬)고 불리는 천마(天馬)가 대원국(현재 우즈베키스탄의 페르가나)에 있다는 정보를 가져왔다. 흉노족은 한나라의 공격과 종족의 내분으로 멸망한다. 서쪽의 흉노족을 굴복시킨 한무제는 동쪽으로 군대를 보내 고조선의 후예인 평양의 위만조선을 기원전 108년 멸망시키고 낙랑군 등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한다. 낙랑군은 서기 313년 고구려에 의해 멸망했다. 고구려의 낙랑군 함락과 관련해 어린 시절 동화책에서 읽었던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로맨스는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낙랑군에는 적이 침입하면 스스로 소리가 나는 북(자명고)이 있어 고구려는 평양성 함락이 어렵다. 호동왕자가 낙랑공주에게 자명고 파괴를 부탁하고 호동왕자와의 사랑을 위해 고국을 배신한 낙랑공주가 자명고를 찢어 낙랑군이 함락됐다는 얘기다. 한반도의 고대 역사는 실크로드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음을 생각한다. 오후 천수에 도착해 중국 4대 석굴의 하나인 ‘맥적산 천불동 석굴’을 관람할 계획이다. 천수에 도착했을 때 비가 심하게 내린다. 맥적산 석굴은 산 중턱에 설치된 계단을 타고 걸어서 올라가야 하는데 비 때문에 계단이 미끄러워 폐쇄됐다. 맥적산 석굴은 유목민 왕조인 북위가 5세기에 조성을 시작한 오래된 석굴이다. 바위벽에 촘촘히 있는 석굴은 계단을 통해 올라가야 한다. 문화혁명(1966~1976년) 시대에 석굴로 올라가는 나무 계단이 망가져 홍위병 침입이 어려워 보존이 잘됐다고 한다.

[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당나라 수도 장안과 명나라 서안

■ 당나라 장안(長安)과 명나라 서안(西安) 명나라 시대 ‘평요고성’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산시성(陝西) 성도 서안(西安·현 중국어 표기는 시안)으로 향한다. 오늘은 500여㎞를 남쪽으로 이동해야 한다. 관중평야에 옥수수밭이 끝없이 이어진다. 옥수수는 식용유, 사료, 바이오연료, 가공식품 등 다양한 수요가 있는 작물이다. 중국 사람은 ‘책상다리’ 빼고는 모든 것을 튀겨 먹는다는 유머가 있다. 엄청난 식용유 생산 원료와 돼지, 오리 등 사료로 필요한 것이 옥수수다. 얼마 전까지도 ‘장안의 명물, 장안의 화제’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한자 ‘안(安)’자는 ‘평화’의 의미로 장안(長安)은 ‘장구한 평화’의 의미다. 500여㎞를 달려 오후 늦게 천년 고도(古都) 장안에 도착했다. 내륙도시 장안의 7월 하순 날씨는 습도가 매우 높고 무덥다. 서안(西安)’ 명칭은 1370년 명나라가 몽골족 원나라를 쫓아내고 서안성을 만들 때 ‘서경(西京)’(서쪽 수도)과 ‘장안(長安)’의 앞뒤 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서안은 중국 13개 왕조가 수도로 삼은 역사가 겹겹이 쌓인 도시다. 당나라 시대 장안성은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으로 구분해 지었는데 당나라의 내성(內城)이 현재의 서안성이라고 한다. 명나라가 지은 현재의 서안성 면적은 당나라 시대 장안 면적의 10분의 1 규모다. 서안에 남아 있는 당나라 시대 건축물은 현장법사를 위해 세운 ‘대안탑, 소안탑’이 대표적이다. 명나라 시대 건축물은 ‘서안성과 종루’ 등이다. 서안성 성곽 길이는 12㎞다. 서안성의 폭은 자동차 4대가 동시에 다닐 정도로 넓다. 성 위에 자전거를 빌려주는 가게가 많고 기념품 노점상, 간식 가게도 많다. 성벽 위 12㎞는 자전거 타기에 좋은 코스다. ■ 진시황제 병마용 서안 동쪽에 있는 진시황 병마용을 보기 위해 오전 8시 출발한다. 숙소에서 한 시간 반이 걸렸다. 여름방학이라 전국 각지에서 온 학생과 학부모 등 가족 여행객이 미리 도착해 줄을 서 있다. 1974년 농부가 발견한 후 벌써 50년이 지났다. 세계 유명 관광지 모두가 ‘과잉 관광(Over Tourism)’으로 고통을 받는데 이곳이 최악의 인구 과잉 관광지다. 1인당 입장료가 180위안(3만5천원)으로 과거보다 많이 올랐다. 중국인 4인 가족의 경우 약 14만원으로 비쌈에도 관광 인파가 몰린다. 인산인해로 입장하는 데 두 시간 이상 걸렸다. 병마용 근처에 진시황 무덤이 있다. 진시황의 무덤은 높이 88m의 거대한 토산이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의하면 지하에 수은이 흐르는 강이 있고 침입자를 막기 위한 살상용 장치가 있다. 수많은 처첩, 시녀가 순장됐다. 미래 과학기술이 발전할 때까지 개봉하지 말라는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지시로 진시황의 무덤은 발굴을 안 하고 있다. 진나라는 진시황 사후 10년도 안 돼 망한다. 역사가 사마천은 진나라 단명(短命)에 “성공에 취하면 망하고, 사람을 얻으면 흥한다”고 사기에 기술했다. 중국을 뜻하는 영어 China는 진나라 ‘Chin’(진)에서 유래됐으니 진나라 이름은 영원히 지속되고 있다. 점심은 명나라 시대 유적인 종루 옆 만두전문점 ‘동아반점’에서 만두 코스로 했다. 12종류의 만두가 코스로 나오는데 우리는 양이 적어 조금밖에 먹지 못했다. ■ 현장법사의 대안탑, 자은사 당나라의 현장법사 유적이 있는 대안탑과 자은사에 들렀다. 현장 스님은 당 태종 때 승려로 17년간 인도를 다녀온 후 ‘대당서역기’를 쓰고 귀국 후 많은 불경을 번역한 위대한 승려다. 천축(인도) 출발 당시 임금은 당 태종인데 서쪽의 돌궐족과 당나라가 전쟁 중이라 외국으로 출국을 금지하고 있었다. 현장은 26세인 629년 장안을 몰래 출발해 인도로 향한다. 현장은 대단한 기억력과 메모광이다. 머물거나 도착한 곳에 대한 정보를 메모하고 기억했다가 대당서역기에 상세하게 적어 놨다. 현장은 645년 천축에서 불상, 불경, 사리 및 중국에 없는 귀한 물품 520상자를 가지고 귀국했다. 당 태종은 대단한 안목의 왕이다. 현장에게 17년 동안 여행기를 기억이 있을 때 완성토록 명령했다. 현장이 기술하고 제자 ‘변기’가 받아 써서 3년 만에 완성된 책이 ‘대당서역기’다. 1천400년 전 135개 오아시스 국가의 기록을 남겨 과거 중앙아시아, 타클라마칸 사막, 파미르 고원의 생활상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현장의 유물을 보관하기 위해 당 태종의 아들인 고종이 649년 ‘대안탑’을 건립하고 죽은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해 ‘자은사’를 건립했다. 1천400여년 오랜 세월을 이겨내고 우뚝 서 있는 대안탑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다. 초등학생 시절 감동을 줬던 소설 ‘서유기’(명나라 오승은 소설)에서 현장법사는 ‘삼장법사’로 나온다. ‘삼장’은 세 가지 불법 ‘경장, 율장, 논장’ 3장에 능통하다는 불교계 최고 찬사다. ■ 회족거리 먹자골목 저녁식사하러 재래시장인 회족(回族) 거리로 갔다. 양고기 꼬치구이를 굽는 매캐한 연기와 관광 인파가 생동감이 넘친다. 이곳의 특산물인 생소한 ‘뼝뼝면’을 시켰다. 매콤하지만 비벼 먹는 맛이 괜찮다. 뼝뼝면 값은 30위안(5천800원)으로 매우 저렴하다. 양꼬치 굽는 향기에 이끌려 샤슬릭 식당에 들렀다. 작은 양꼬치 10개에 30위안이다. 맥주 안주로 최고인데 이슬람교를 믿는 회족 식당은 술을 안 판다고 한다. 회족은 당나라, 원나라, 명나라 시대에 중국에 온 아랍 상인, 페르시아 상인들의 후손이다.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에 장사하러 와 눌러앉은 상인의 후손이다. 중국에 약 1천만명이 살고 있으며 서안에 약 6만명이 거주한다고 한다. 하루 종일 서안 시내를 돌아다녔다. 유럽인, 미국인, 일본인 등이 거의 없다는 점이 특이하다. 중국과 미국의 무역전쟁, 중국의 간첩법 시행 등 여러 원인에 기인한다는 생각이 든다.

[시베리아·실크로드, 지구 반바퀴] 명나라 고성 ‘평요고성’으로

■ 중국 변방 ‘다퉁’의 ‘K-푸드’ 한국 식당 현공사를 다녀와서 다퉁(大同) 시내 숙소에 늦게 도착했다. 다퉁의 한국 식당을 검색해 보니 ‘수얼가’(서울식당)라는 식당이 나온다. 중국의 변방에 한국 식당이 있음에 감사하면서 수얼가 식당에서 김치찌개를 시켰다. 김치찌개라기보다는 설탕 국물에 가깝다. 배가 고파 웬만하면 먹을 텐데 저녁식사는 포기했다. 식당의 젊은 여자 주인에게 “한국 음식 조리법을 어디서 배웠느냐. 한국 음식을 과거 먹어본 적이 있냐”고 물어봤다. “한국 음식 조리법은 인터넷에서 배웠다. 한국 음식을 먹어보거나 한국에 가본 적이 없다”고 대답한다. 10년 전인 2014년 한류가 유행할 때 무턱대고 한국 식당을 개업했는데 현재까지 10년 동안 장사가 잘된다고 한다. ‘K-푸드’로 먹고사는 사람이 내몽골 변방에 있다니 한류의 힘이 대단하다. 길거리 노점상에서 양고기 꼬치구이로 저녁을 대신했다. 유목지대와 가까워 많은 노점상이 양고기 샤슬릭 구이를 팔고 있다. 샤슬릭 요리에 들어가는 향신료 양념이 타는 매캐한 냄새와 연기가 거리에 자욱하다. 일요일 아침 일찍 산시(山西)성 다퉁을 떠나 약 400㎞ 남쪽 ‘평요’로 향한다. 화북평야의 넓은 들판에 옥수수밭이 끝이 없다. 화북평야에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가 있다. 과거 ‘오고타이 칸’(제2대 몽골 황제)이 금나라를 정복했다. 오고타이 황제는 농사짓는 농부를 쫓아내고 화북지방에 초지(草地)를 조성해 양, 말, 소 등을 키우도록 부하에게 지시했다. 당시 재상이던 야율초재가 농토를 보전해 세금을 징수하는 것이 초지를 만들어 양과 소를 키우는 것보다 나라 재정에 도움이 된다고 황제를 설득해 초지 조성을 철회했다는 일화가 있다. 왕에게 간언을 잘하는 신하와 간언을 잘 듣는 왕이 만나면 성공의 역사를 만든다. 평요로 가는 고속도로 양옆은 넓은 폭의 가로수숲이 계속 조성돼 있다.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만리장성의 흔적을 찾으려 했으나 찾을 수가 없다. 현재 남아 있는 만리장성은 20% 미만이고 50% 이상은 완전히 사라졌다고 한다. 만리장성은 중국 춘추전국시대 북방 유목민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조나라, 연나라, 진나라가 축성했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고 확장 연결한 것이 최초의 만리장성이다. 현재 관광객이 보는 베이징 근처 바다링(八達嶺), 하서회랑의 자위관(嘉峪關)은 명나라가 세운 것이다. 중국의 고속도로 휴게소는 시설에 따라 등급을 붙여 4등급, 5등급 휴게소라는 표시를 도로변에 붙여 놨다. 우리는 시설이 좋은 5등급 휴게소 간판을 보고 들어간다. 우선 5등급 휴게실은 시설이 크고 식사 메뉴도 다양하다. 특히 화장실이 청결하고 사용료를 안 받는다. 자본주의 시장 논리를 통해 휴게소를 청결하게 만들려는 인센티브 정책이다. 윤영선 심산기념사업회장前 관세청장 ■ 타이항산맥 우타이산과 혜초 스님 험준한 타이항산맥을 종단해 남쪽으로 달린다. 고속도로 왼쪽에 중국 4대 대승불교 성지의 하나인 우타이(五臺)산이 나타난다. 우타이산은 문수보살이 현신하는 산이다. 문수보살은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로 반야경을 편찬한 보살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세조 임금이 피부병을 고치러 전국을 순회하던 중 강원도 오대산 상원암 가는 계곡에서 동자로 현신한 문수보살을 만나 피부병을 고쳤다는 설화도 있다. 천축을 다녀온 신라의 구법승 혜초 스님(704~787년)은 우타이산 건원보리사에서 입적했다. 혜초 스님의 인도 여행기 ‘왕오천축국전’이 둔황석굴에서 발견됐다. 책 제목 ‘왕(往)오(五)천축국’은 ‘동·서·남·북·중앙’ 5개 천축(天竺) 지역을 다녀왔다는 뜻이다. 혜초는 16세에 신라 계림에서 당나라에 유학 와 스승의 권유로 20세인 723년 중국 광저우에서 해로(海路)로 인도로 갔다. 혜초는 4년간의 천축 여행을 마치고 파미르고원을 넘어 서역북로, 둔황, 시안(西安)을 거쳐 우타이산 건원보리암으로 다시 돌아왔다. 필자는 혜초 스님이 1300년 전 중국으로 귀환했던 길을 역순으로 여행할 계획이다. ■ 명나라 시대 축성한 ‘평요고성’ 오후 늦게 평요(平遙)고성에 도착했다. 평요고성은 1370년 명나라 때 축성한 성으로 현재 중국에서 가장 잘 보존된 성이라고 한다. 성곽의 길이는 6㎞, 성 위는 마차 두 대가 다닐 정도의 넓이다. 구운 벽돌을 쌓아 만든 성이다. 성곽에 올라가는 요금은 100위안(1만9천원)으로 매우 비싸다. 성곽 입장료가 비싸니 성곽 위에 올라가는 관광객은 많지 않다. 변방에 위치한 관계로 중국 문화혁명 때 홍위병에게 파손이 안 돼 명, 청 시대의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한 도시라고 한다. 오랜 세월의 풍상을 견뎌낸 고건물, 상가, 관청, 민가 건물 등이 고풍스럽다. 우리는 청나라 시대의 여관인 평요객잔에서 묵는다. 청나라 전통가옥의 구조와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여관 바로 옆에 공자를 모시는 문묘와 대성전 건물이 있다. 공자에게 제사를 지내던 대성전 건물은 저녁식사, 전통문화 공연 등 상업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평요고성 안에 3천700채의 상가와 민가가 있는데, 모두 명, 청 시대에 만들어진 고(古)건물이다. 긴 세월 동안 전란과 화재를 피하고 잘 보존한 점에 경외감이 든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시내 중심에 현(縣) 청사가 있고 청사에서 현감과 형방, 포졸 등이 죄인을 취조하는 공연을 한다. 현청사 안은 현감 근무실, 군대 연병장, 감옥, 식당 등 과거 시설을 잘 보존하고 있다. 현청사 입장료는 40위안(약 8천원)으로 비싸다. 중국은 관광업무를 담당하는 중앙부처 이름을 종전 ‘여가국’에서 ‘관광여가국’으로 변경했다. 중국의 관광지 입장료가 비싼 이유는 과거 ‘외국인은 비싸게, 내국인은 낮게’ 이중적 차등 요금제를 적용했는데 현재는 내국인 입장료를 외국인 요금으로 인상해 통일했다고 한다. 재정 수입 확대를 위한 자본주의 경제의 단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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