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나라 사랑하는 마음 새기는 6월

‘호국의 달’인 6월이 되면 마음이 아프다. 1950년 6월25일, 북한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군인과 민간인이 숨지거나 다쳤기 때문이다. 꽃다운 나이의 젊은이들이 속절없이 세상을 떠났고, 그 가족들은 피눈물을 흘린 민족의 대비극이었다. 나의 은사인 초안 큰스님도 한국전쟁에 참전해 입은 부상 후유증으로 평생 돌아가실 때까지 병고에 시달렸다. 상이용사이면서도 위의(威儀)를 잃지 않고 여여한 모습을 보여주셨지만 육체적 고통을 피하기는 힘들었다. 그래도 “나라를 지키다 다친 것이니, 후회는 하지 않는다”면서 “다시는 이 땅에 전쟁같은 비참한 일이 있어선 안된다”고 힘주어 강조하시던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다. 나라를 지키는 과정에서 목숨을 잃고 부상당한 분들의 뜻을 기리는 것은 우리들의 당연한 도리다. 그분들이 없었다면 어찌 우리가 지금의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겠는가? 한국전쟁 당시 초개와 같이 육신을 던진 용사(勇士)들과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나선 지사(志士)들의 숭고한 정신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앞서 밝힌 대로 나의 스승 초안 큰스님은 한국전쟁 참전용사다. 북한 강원도 평강군 남면 천마리에서 태어나 출가했지만,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38선을 넘어 혈혈단신 남쪽으로 넘어왔다. 세간(世間)에 초연해야 하는 스님의 신분이었지만 “나라 없는 종교는 있을 수 없다”는 소신으로 국군에 입대해 병역을 마쳤다. 그런데 전역 직후인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또 다시 자진 입대했고, 전투를 치르면서 부상을 입어 평생 불편한 몸으로 지내야 했다. 초안 큰스님의 이러한 뜻은 동암 대종사에게 받은 영향이 컸다. 동암 대종사는 초안 큰스님의 스승으로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명 가운데 한분이었던 백용성(白龍城) 조사의 제자다. 동암 대종사는 출가도량인 남양주 봉선사 운허대종사를 비롯해 여러 스님들과 함께 나라를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45년 해방 후 상해임시정부가 환국 할 때 김구 주석을 비롯한 요인들을 환영하기 위해 구성된 ‘임시정부 환국봉영회’의 대표(회장)를 맡기도 했다. 1945년 12월12일 서울 대각사에서 임시정부 환영행사가 열렸는데, 김구 주석을 비롯한 요인들과 동암 대종사가 함께 촬영한 빛바랜 사진이 지금도 전한다. 초안 큰스님께 들은 일화가 떠오른다. 동암 대종사가 양양 낙산사 주지로 있던 1960년대 중반, 정부에서 독립유공자로 포상하겠다는 연락이 왔지만 정중하게 사양했다는 것이다. 동암 대종사는 “나라를 위해 당연히 할 일이었고, 어떤 대가를 바라고 한 것이 아니다. 출가자로 포상을 받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했다. 여전히 남북이 대치돼 있고, 주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처한 상황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한 동암 대종사와 두 번이나 군대에 가서 부상당한 은사스님 같은 분들의 나라 사랑 정신을 떠 올릴 때면 숙연해진다. 한국전쟁으로 사실상 폐사(廢寺) 위기에 처한 오봉산 석굴암도 이러한 동암 대종사와 은사스님의 마음이 깃든 도량이다. 후대(後代)에 문화유산으로 물려줄 수 있는 도량으로 장엄하는 것이 선대(先代)의 뜻을 잘 받드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라를 위해 싸우다 희생된 호국영령과 무고하게 희생된 민간인 영가들의 극락왕생을 발원하며 하루 속히 남북통일이 되기를 부처님 전에 기도한다. 오봉도일 스님 25교구 봉선사 부주지·양주 석굴암 주지

[삶과 종교] 기적?! 진짜야?

기적이란 일반적으로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 또는 자연법칙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초자연적 현상을 말한다. 그러나 가톨릭은 기적을 단지 초자연적 현상으로만 여기지 않는다. 성경에 등장하는 기적들도 각각의 메시지를 지니며,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하는 일명 성변화(聖變化)는 단지 기적이 아닌 가톨릭 신앙의 핵심이다. 또한 가톨릭 성인(聖人)을 통해 발생하는 기적들도 면밀한 심사를 거친다. 즉 오늘날에도 기적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뜻이다. 기적, 진짜일까? 사실 가톨릭 신앙과 관련된 초자연적 현상들은 끊임없이 일어났고 과학적 검증을 시도한 사례들도 많았다. 대표적으로 빵과 포도주가 실제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하는 기적들이다. 750년 이탈리아 동쪽 란치아노에서 한 신부가 미사(빵과 포도주의 변화가 이루어지는 가톨릭 예식)를 거행하던 중 축성된 빵 안에 예수님의 몸이 있는지 의심하였고 실제로 빵이 살로, 포도주가 피로 변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1천200년이 지나 1970년 해부학, 조직학, 화학 임상 현미경 관찰 교수인 에도아르도 리놀리(Edoardo Linoli) 박사는 다음과 같은 세부 보고서를 제출했다. 1. ‘살’은 심장의 횡문근 조직으로 이뤄진 실제 살이다. 2. ‘피’는 실제 피다. 크로마토그래피 분석은 절대적이고 논란의 여지가 없는 확실성으로 그 사실을 증명한다. 3. 면역학 연구는 살과 피가 확실히 인간과 같은 것임을 나타내고, 면역 혈액학 실험은, 살과 피가 모두 토리노 수의(Sindone: ‘예수님의 수의’라 칭하는 천)의 남자와 같은 혈액형이며 중동 사람의 특징인 AB 혈액형에 속한다는 것을 완전한 객관성과 확실성을 근거로 단언할 수 있다. 4. 이 혈액에 포함된 단백질은 정상적으로 선혈의 혈청 단백질 체계와 동일한 백분율로 분해된다. 5. 어떠한 조직학 분야에서도 미라를 만들려는 목적으로 고대에서 사용된 방부제나 소금의 침투 흔적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후 세계보건기구에서는 검증을 위한 수많은 실험이 이뤄졌고 리놀리 교수가 수행한 것과 같은 결론을 내리며 그 살 조각에 대해 ‘생명체의 고유한 모든 임상적 반응에 빠르게 대응하므로 살아 있는 구조’라고 선언했다. 기적은 분명 우리를 놀랍게 하며 믿음으로 인도한다. 그러나 그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해 과학적 검증과 식별, 면밀한 조사는 필요하다. 실제로 치유의 기적이 현재 진행형인 프랑스 루르드에서는 7천여 건의 기적 치유 사례가 보고됐지만, 현재 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기적은 총 67건뿐이다. 그 이유는 기적이 주는 영향력 때문이다. 기적으로 인해 신이 아닌 그 현상 자체만을 맹신하기도 하며, 그 현상이 종교적 목적이 아닌 개인의 이익이나 다른 목적으로 이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충분한 검증은 신께 대한 온전한 믿음을 성장시키고, 사람들이 세상 속에서 더욱 충실한 삶을 살도록 이끈다. 기적은 결코 인간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한 여과 없는 맹신은 위험한 종교심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김의태 수원가톨릭대학교 교회법 교수

[삶과 종교] 밝음의 법칙

붓다가 거듭 되풀이해 강조한 법칙이 하나 있다. 그 법칙은 어둠은 어둠을 물리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동일하게 적용되는 경우가 증오로는 증오를 없앨 수 없다는 가르침이다. 증오는 오직 사랑만으로 물리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법칙이다. 다시 말해 오직 빛으로만 어둠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보면, 사랑이 우리 존재의 빛이며 증오는 존재의 어둠이다. 만약 어떠한 이유가 됐던 내 안에 어둠이 가득하다면 나의 주변은 증오로 덮힐 것이고, 내 안에 빛이 가득하다면 마찬가지로 내 주변은 그 빛으로 환히 비추게 될 것이다. 그래서 붓다는 수행자들에게 전 존재를 걸고서라도 사랑을 뿜어내고 빛을 발산해야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초기 경전에는 그의 제자들이 그 가르침을 실천한 사례가 무수히 등장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붓다가 강조한 영원의 법칙 가운데 하나다. 여기에 의하면 사랑만이 증오를 쫓아내며 빛만이 어둠을 이긴다는 것이다. 붓다의 교설에서, 어둠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부정적 상태일 뿐이라서 그 자체적으로는 긍정적 실존이 없다. 따라서 어둠 역시도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어둠을 물리칠 수 있단 말인가? 어둠을 상대하려면 빛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빛이 들어오면 어둠은 저절로 물러가고, 반대로 빛이 물러나면 어둠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화석화된 도덕적 관념으로 “어둠과 싸워라. 미움과 분노와 성욕과도 싸워라. 이것과 싸워라. 저것과 싸워라”고 가르치지만, 증오도 어둠이고, 성욕도 어둠이고, 시기심도 어둠이고, 탐욕과 분노도 어둠이다. 그래서 빛을 끌어들이라고 강조한다. 빛을 끌어들이는 방법은 명상을 통해 고요히 하고 사념을 비우고, 의식적이 되고, 경계하고, 자각하고, 깨어 있음이 빛을 끌어들이는 방법이라고 설한다. 성성하게 자각하고 원인과 결과에 대한 상관관계를 살피면서 깨어 있는 그 순간에는 미움이나 부정적인 관념들은 스며들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각성 상태에서는 이미 타자를 미워한다는 상태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붓다는 이를 말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적으로 체험을 하도록 정진하라고 한다. 그래야 존재적 차원에서 나와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되고 타자를 미워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무의식적 상태에서는 행위의 결과를 전가시키고 자신을 합리화 시키면서 누군가를 미워할 수 있겠지만, 누구라도 의식적이 되다면 증오는 사라진다. 그 둘은 공존할 수 없다. 빛과 어둠이 서로 공존할 수 없듯이. 어둠이란 빛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체득하는 것을 붓다는 지혜라고 했다. 스스로 경험하지 못한 것을 반복하지 말고, 외부에서 빌려오는 정보 즉, 지식은 피할 때 내 안에서 피어나오는 스스로의 빛인 지혜를 키울 수 있다는 것이다. 최성규 철학박사·한국미술연구협회 이사장

[삶과 종교] 가정에서 시작되는 질서가 있는 나라를 기대한다

지난 대선에서는 유독 대선 주자들의 부인 이야기가 많이 회자됐다. 그 과정을 지켜본 많은 국민은 질서 있는 가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인식하게 됐다. 가정은 모든 사회활동의 시작이며 끝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세계 어느 나라든지 자손들에게 남기고 싶은 좋은 이야기들이 구전을 통해 전해온다. 옛날에 한 어부가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갔다. 남편은 작은 배를 타고 어업을 하는데 갑자기 날씨가 험해지고 태풍이 몰아쳐 방향을 잃어버리고 배가 표류하게 됐다. 육지 근해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았지만 사방은 칠흑 같은 어둠과 사나운 풍랑으로 갇혀 있었다. 남편인 어부는 바다에서 방향을 잃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두려움에 빠져있었다. 어부의 아내는 바다의 풍랑의 매서움을 보면서 노심초사 남편을 기다렸다. 남편을 걱정하며 아내가 밖으로 나간 사이에 홀로 집에 남겨진 어린 아이가 울다가 등불을 넘어뜨려 화재가 발생했다. 모든 것을 잃어 버렸다고 생각한 아내는 서럽게 울었다. 바다에 나간 남편은 돌아오지 않고 집은 불에 타 버린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남편이 새벽녘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어부는 살아서 돌아온 것에 감격하며 말했다. “어젯밤 풍랑 속에서 방향을 잡지 못해 죽게 됐을 때 갑자기 불빛을 보았다. 그 불빛이 육지 쪽 이라는 것을 알고 겨우 방향을 잡아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방향성은 곧 정체성이다. 나라의 정책이 방향성을 잃는 다는 것은 곧 그들의 정체성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아내의 남편을 향한 간절함이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되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이 간절함을 가지고 기도하고 자손들을 걱정하며 애태우는 집단은 바로 연로한 어르신들이다. 오늘날의 가정 속에 물질적인 우상이 많이 자리를 잡고 있다. 가족을 계획살해하고 보험금을 타는 소식부터 가족이라는 존재가 모두의 이기적인 집단으로 변질돼 가고 있다. 경제적으로 가난한 가정은 가정이 아니라 무거운 장애물로 생각하는 사회의 모습들 속에서 우리는 미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가족이란 어려움을 당할 때도 함께 서로 사랑하며 인내하며 그 상황을 이겨나가는 승리감을 누려봐야 한다. 부모님의 존재가 물질적 이유로 평가되지 않고 사랑과 헌신으로 바라보는 사회가 돼야 할 것이다. 노인들의 복지와 그리고 생애의 후반을 가장 존귀하고 소중하게 여겨지는 사회가 될 때 그 사회는 진정한 안정감과 질서와 중심이 있는 사회가 될 것이다. 구약성경에는 십계명이 있다. 그 십계명은 오늘날까지 이스라엘의 유대교와 기독교의 모든 교회들이 절대적으로 중요시 여기는 계명이다. 그 계명에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하고 그 분만을 믿으며 동시에 육신의 부모를 향해서도 분명한 명령이 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한 사회가 중심이 있고 안정된 나라가 되기 위해서 분명히 이 계명이 존중받고 지켜지는 사회가 돼야 한다. 그때에 젊은이들에게도 삶의 질서와 그리고 미래의 시대까지 바라보며 자신들의 삶을 단거리가 아닌 장기적인 차원으로 바라 볼 수 있다. 아이들에게 할아버지 할머니의 소중함을 가르치며 돌아보는 어른공경의 정신이 다시 한 번 새로운 대통령과 새 일꾼들을 비롯해 이 나라 지도자들에게 기대해 보고 싶다. 조상훈 만방샘 목장교회 목사

[삶과 종교] 함께 걷는 여정, 시노달리타스(synodalitas)

코로나 국면에서 천주교가 중앙집권적 시스템을 갖추었기에 예방과 방역에 있어 체계적으로 대응했다는 평가가 많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중앙집권체제를 갖춘 천주교에 대해 환멸을 느끼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과거 성직자들의 주도하에 교회를 보호하고 교회 조직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흐름은 고착된 배타적 성직자 중심주의를 양산하게 되었다. 5년마다 새로 부임하는 신부님의 스타일에 따라 기존 성당 공동체의 관행이 무시되기도 하였다. 급기야 신부님과 맞지 않으면 성당을 떠나거나 등지는 신자들도 많았다. 매년 실시하는 설문에서도 ‘성직 중심적 교회 운영’이라는 문제는 항상 등장하지만, 그렇다고 운영체제를 쉽게 바꾸지 못하는 것도 현실이다. 큰 고민이다. 성직자 중심주의로 인해 성당 구성원들 간에도 ‘위계적이며 일방적이고 수직적인 소통’이 익숙하다. 신부님에게 질문하고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무례한 처사라 여긴다. 수평적이고 쌍방향적인 대화와 문화를 요구하는 현대사회의 흐름과 역행하고 있다는 위기감 때문인지 몰라도 프란치스코 교황은 거듭 교회 쇄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바로 교황에서부터 평신도들에 이르기까지 신 앞에 모두 동등한 존재들이며 교회는 그저 신앙을 위해 모두가 함께 걸어가는 여정, 바로 교황은 시노달리타스(synodalitas)의 실현을 강조한다. 이는 교회의 봉사자인 성직자가 신자들보다 높을 수 없고, 오히려 그들을 섬기고,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상호 경청을 통해 서로가 서로에게 배우고, 신자든 비신자든 모두 함께 걸어가는 개방된 여정을 희망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교황은 최근 ‘복음을 선포하여라(praedicate evangelium)’라는 교황령을 발표하며 ‘교황청 구조 개혁’에 박차를 가한다. 눈에 띄는 변화로 ‘반드시 추기경과 대주교가 성(Congregation)과 평의회(Council)의 장관과 의장을 맡는다’는 원칙에서 벗어나, 모든 성과 평의회의 구분을 없애고 모두 부서(Dicastery)로 통합하여 ‘신자라면 누구나 한 부서의 장을 맡을 수 있다’는 규정을 내놓는다. 성직자들의 철옹성과도 같았던 교황청의 책임자들이 이제 성직자들이 아닌 남녀 평신도들도 가능해진 것이다. 엄청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교황청의 권력 분산, 즉 탈중앙집권화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교회 개혁 의제 가운데서 핵심 중의 핵심이다. 물론 개혁이란 많은 시련과 고통이 따르는 법이다. 교황은 재임한 때부터 많은 찬사와 지지를 받았지만, 반대로 변화를 거부하는 세력들의 반대에 부딪혀 왔다. 한국천주교회 역시 교황의 개혁 의지와 다르게 눈에 띄는 변화를 찾아보기 어렵고, 커다란 논란도 야기되지 않고 있지만, 교황의 개혁 의지는 계속되고 있고, 조금씩 신자들의 입에서 ‘시노드’라는 말이 자주 사용되고 있다. 분명 교회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세상을 위해 그리고 신앙을 위해 교회가 해야 할 본분일 것이다. 김의태 수원가톨릭대학교 교회법 교수

[삶과 종교] ‘부처님 오신 날’을 맞으며

며칠 뒤인 5월8일, 부처님 오신 날이다. 부처는 네팔 눔비니 동산에서 고타마싯타르타 왕자로 태어났다. 음력 4월8일인 날이 불교인에게는 가장 큰 명절이다. 부처님 오신 날을 말할 때는 ‘4월 초파일’이라고도 한다. 한동안 석가탄신일(釋迦誕辰日)이라 불렸는데, 이것은 1975년 정부에서 대통령령에 의해 공휴일로 지정할 당시의 명칭에서 비롯된 것이다. ‘석가가 태어나신 날’이란 의미인데, 석가는 인도의 샤카라는 종족의 이름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불교계에서 한글로 된 명칭 변경을 요구해 왔으며, 그 결과 2017년 10월10일 국무회의에서 공휴일 규정의 석가탄신일 명칭을 부처님 오신 날로 공식적으로 바꿨다. 그리하여 2018년부터는 부처님 오신 날이 공식 명칭이 됐다. 예로부터 관등(觀燈) 또는 연등(燃燈)놀이라 불린 부처님 오신 날은 다양한 민속행사가 펼쳐져 민족의 고유한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숭유억불의 조선시대에도 사찰이나 거리에 등불을 환하게 밝혔는데, 연등은 물론 각양각색의 등을 만들고, 등대(燈臺)를 세워 깃발과 등으로 장식해 부처님 탄생을 축하했다. 또한 한 해 농사를 시작하는 시기이기에 풍년이 들기를 국가와 백성들이 염원하며 기원하기도 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경문왕 6년(866) 정월 15일과 진성여왕 4년(890) 정월 보름에 서라벌(경주) 황룡사에서 연등(燃燈)을 봤다는 기록이 전해질 만큼 등불을 밝힌 전통은 오래됐다. 법흥왕 14년(527)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로 불교가 공인 됐으니, 부처님 오신 날을 축하하는 역사는 1천600년이나 됐다. 고려시대는 연등회(燃燈會), 조선시대는 호기(呼旗)놀이, 관등(觀燈)놀이로도 불리며 선조들과 함께했다. 우리나라 부처님 오신 날이 지금은 세계인의 축제로 주목받을 만큼 성장했다. 연등회 제등행렬이 열릴 때면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의 참여가 눈에 띄게 증가해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축제가 됐다.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연등회(燃燈會)는 2020년 12월16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돼 세계인이 와서 함께 연등회 문화축제 제등 행렬을 전국에서 해마다 봉행한다. 지난 주말 서울, 수원, 부산, 광주 등 전국 각지에서는 불교인과 시민이 형형색색의 연등과 장엄물을 앞세우고 시내를 행진하며 부처님 오신 날을 함께 기뻐했다. 이즈음 등불을 밝히는 이유는 번뇌와 무명(無明)으로 고통받는 중생에게 지혜를 전달해 희망과 용기를 주기 위해서다. 올해 부처님 오신 날인 5월8일은 어버이날이기도 하다. 불교에서는 누구나 부처님이 될 수 있는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다고 하니 어머니와 아버지도 부처님으로 공경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코로나19 확산세가 진정되면서 야외에서는 마스크를 벗는 등 일상으로 돌아가는 시점에 맞이한 부처님 오신 날, 가족과 함께 가까운 사찰을 찾아 그동안 지친 신심(身心)을 쉬는 시간으로 삼았으면 한다. 경기도에도 봉선사와 용주사, 가까이는 조계사, 봉은사 등을 비롯한 좋은 사찰이 많으니, 불교인들은 신앙생활의 하나로, 다른 종교인들은 민족의 고유한 풍습을 체험하는 기회로 여기고 방문하면 좋겠다. 사계절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녹음(綠陰)을 자랑하는 5월의 초입에서 만나는 부처님 오신 날과 어버이날에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마음에 치유와 힐링을 통해 새로운 희망의 꿈을 이뤄가길 기대한다. 오봉도일 스님 25교구 봉선사 부주지·양주 석굴암 주지

[삶과 종교] 본래면목

선사(禪師) 약산을 3년 동안 주방장 소임으로 시봉했던 한 승려가 있었다. 약산은 당대의 대선지식인 석두희천의 법을 이은 선사다. 한번은 약산이 그에게 물었다. “이곳에 머무른 지 얼마나 되었는고?” 그 승려가 답했다. “3년입니다.” 이에 약산이 “나는 전혀 그대의 얼굴을 모르겠군.” 그 승려는 약산의 질문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그 절을 유감없이 떠났다. 선의 세계에서 언어는 완전히 다른 뉘앙스로 사용된다. 여기에서도 약산의 질문은, 단지 ‘여기’라는 공간에 접한 적이 있는지 또는 ‘여기’에 존재하는 법을 배웠는지를 묻는 것이었다. 스승이 무언가를 질문할 때의 언어는 범상한 것이 아니므로 주의 깊게 들어서 어디를 강조하는지를 간파해야 한다. 스승은 자비의 마음으로 한 번 더 기회를 제공해 다시 “나는 그대의 얼굴을 전혀 모른다”고 했다. 즉 “그대 자신의 본래면목을 발견했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본래면목은 영원 전부터 갖고 있던 얼굴이며 영원토록 가질 얼굴이다. 그러나 그 승려는 스승의 사랑과 질문의 의미도 알지 못했으므로 오히려 유감스러웠다. “나는 3년 동안 그 분을 위해 음식을 마련했는데, 내 얼굴을 본 적이 없다”고 말씀하시니 어찌 된 것인가. 그는 모욕적으로 생각하고 그 절을 떠났다. 그는 스승을 만났지만, 중심을 놓쳐버렸다. 3년은 중심으로 들어가기에 충분한 시간이라고 생각해 스승은 그동안 제자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승려는 3년 동안 스승과 함께 있었고, 그곳에서 요리를 했고, 스승의 법문을 들었다. 이제 스승이 질문할 때가 이르렀다. “이곳에 머무른 지 얼마나 되었는고?” 그는 ‘얼마나’라는 말은 이해했지만 이곳, 즉 ‘여기’라는 말은 놓쳤다. 스승은 ‘얼마나’에 강조를 둔 것이 아니라 ‘여기’에 강조를 두었다. 스승은 제자에게 애정어린 자비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가능한 많은 기회를 주었다. “나는 그대의 얼굴을 전혀 모른다네.” 이 말은 3년 동안 여기 있었다고 말하지만, 어디에 그대의 얼굴이 있는가? 스승은 계속 그대의 본래면목을 말하고 있다. 거울에 비치는 얼굴이 아니라 하나의 불꽃이 하나의 불꽃으로 온전히 전해지듯 스승의 가슴에 비치는 얼굴을, 스승은 몇 년 동안 여기에 있었는지에 대해 관심이 없다. 햇수를 세서 무엇을 할 것인가? 분명 스승의 그 질문은 이 순간을 묻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선사들은 삶의 매 순간 깨어 있음을 강조해 경책하는 것이다. 최성규 철학박사·한국미술연구협회 이사장

[삶과 종교] 위기를 기회로 잡는 대한민국을 기대하며

필자는 오래 전 원하던 대학에 입학을 못해 힘들어 했던 경험이 있다. 그때 아버지는 어깨를 토닥이며 “인생을 살다 보면 중요한 기회는 적어도 세 번은 온다”고 말씀하셨다. 이탈리아를 방문하게 됐을 때 지인의 권유로 토리노박물관을 간 적이 있다. 그 곳에서 참 많은 보물들을 만났지만 ‘기회의 신 카이로스’ 라는 조각상에 제일 깊은 영감을 얻었다. 제우스신의 아들 카이로스는 앞머리가 무성하다. 그런데 뒷머리는 머리카락이 없다. 그리고 어깨와 발뒤꿈치에는 크기가 다른 날개가 달려있었다. 손에는 저울이 들려있다. 설명을 들으니 “내 앞머리가 무성한 이유는 누구든지 쉽게 나를 붙잡을 수 있게 함이고 뒷머리가 대머리인 이유는 내가 지나가면 붙잡을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며, 어깨와 발뒤꿈치에 날개가 달린 이유는 최대한 빨리 사라지기 위함이고 저울은 분별하기 위함이며 칼같이 빨리 결단하게 하기 위함이다”라는 것이다. 한번 지나가면 다시는 잡을 수 없는 것 그것을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기회’라고 보았다. 그러나 인생에는 기회만 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위험한 고난도 온다. 그러므로 위기(危機)라는 말은 위험(危險)과 기회(機會)의 합성어가 된다. 위험과 기회는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로 시작된 소상인들의 도산과 사회망의 붕괴, 그리고 정치판을 휩쓸고 지나간 대선 후유증과 국제정세로 요동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들은 위험한 상황이지만 기회의 시간이기도 하다. 구약성경 속에 다윗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빠른 출세를 했고 왕의 사위가 됐다. 그러나 장인이었던 사울 왕이 다윗 자신을 죽이기 위해 병사들을 모아 쫓아다니자 원수의 땅 블레셋의 나라까지 치욕스러운 망명을 하게 됐다. 하지만 그 나라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다윗은 머리에 재를 뿌리고 침을 흘리며 목숨을 부지하고 아둘람 골짜기로 몸을 피한다.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다윗은 동굴속에서 진정한 기회를 배운다. 진정한 성공은 돈과 명예와 권력이 아니라 자신이 지금 누구와 함께 하고 있느냐에 결정된다는 것이다. 다윗에게 다가온 기회는 결국 다윗 자신이 믿는 절대자 하나님이 함께 하심에 있었다. 며칠 후면 작은 여당의 대통령과 거대 야당국회의 힘겨루기 속에서 우리는 희망의 기회를 찾을 수 없다. 우리나라의 기회는 지도자들이 한 사람의 국민을 소중히 여기는 애민(愛民) 정신이 살아날 때 얻게 될 것이다. 국민들을 기회의 주체로 존중하고 바라보며 여·야가 진심으로 협치하는 곳에서 대한민국은 다시 한 번 세계 속에 우뚝 도약할 기회를 잡게 될 것이다. 조상훈 만방샘 목장교회 목사

[삶과 종교] 맨유 출신 신부님과 함께 축구를

2017년 당시 과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뛰던 프로축구선수가 아일랜드 신부가 된 일이 가톨릭 내에서 큰 화제가 됐다. 그는 현재 한국을 대표하는 축구선수인 손흥민 선수가 뛰고 있는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EPL)에 출전한 일명 잘나가는 프로축구선수였다. 그의 동료들은 축구를 좋아하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데이비드 베컴, 폴 스콜스, 라이언 긱스 등이다. 그의 이름은 ‘필립 멀린’이었다. 사실 로마 유학 시절 그와 함께 같은 기숙사에서 함께 생활하며 영광스럽게 축구도 함께 즐길 수 있었다. 물론 박지성, 손흥민 선수가 뛴 프리미어 선수의 실력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가 선보인 노룩 패스, 골대 구석을 찌르는 송곳 슈팅은 정말 일품이었다. 2013년쯤 로마에 있는 50여 개 기숙사 풋살 대항전이 있었다. 당시 그와 함께 출전하며 스페인, 독일을 비롯한 여러 기숙사들과 맞붙어 당당히 동메달을 땄던 기쁨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 친구는 1990년대 당시 대략 연봉 9억원을 받는 잘나가는 선수였다. 물론 잦은 부상으로 축구선수 생활을 빨리 접어야 했지만 그래도 큰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런데 어떤 계기인지 그는 아일랜드 신학교에 입학했고, 신학 수업을 듣기 위해 로마까지 유학을 오게 됐다. 과거 많은 돈을 벌었던 그는 세상의 부귀영화를 모두 포기하고 사제수업을 듣기 위한 여정을 시작했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일 수 있다. 그와 함께 지내며 소중했던 에피소드 하나가 있다. 로마 유학 시절 그는 기숙사에서 마련해준 당시 2만~3만원 정도 되는 깡통(?) 핸드폰을 들고 다녔다. 언젠가 그 핸드폰을 잃어버렸을 때 그 친구는 너무나 당황했고, 허둥지둥 로마 시내를 돌아다니며 그 폰을 찾아 헤매었다. 집시뿐만 아니라 도둑까지 득실거리는 로마 시내에 잃어버린 물건을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다. 그때 나는 느꼈다. 수많은 돈을 벌던 과거의 ‘필립 멀린’이 아니라 자기 곁에 있는 싸구려 물건도 너무나 소중하게 여기는 ‘필립 멀린’을 만날 수 있었다. 그의 마음에는 어느새 세상의 것보다 오히려 더 가치 있는 것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다시 재속 사제(교구 신부)의 길보다 수도 사제(수도 신부)의 길을 선택한다. 자기 명의로 된 통장 하나를 만들 수 없는 수도회의 삶을 택한다. 몇 년이 지나고 기사를 통해 그의 사제 서품 소식을 들었고, 수도회 대주교는 서품식 강론에서 “멀린 신부는 축구선수로 활약하는 동안 골을 넣으려면 얼마나 열심히 뛰어야 하는지 알았을 것”이라며 “이제 그대의 골(목표)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했다. 또 “그대가 믿는 것을 가르치고 가르친 것을 실천하십시오”라고 격려했다. 최고의 리그에서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살았던 그에게 밀알 같은 신앙의 씨앗이 자라나 그 신앙을 증거하는 사람이 됐다. 개인적으로 하느님의 신비는 참으로 오묘하다고 느낀다. 분명 세상의 부귀영화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 있음을 우리가 눈치채게 하는 듯하다. 김의태 수원가톨릭대학교 교회법 교수

[삶과 종교] ‘봄 같은 정책’ 새정부에 바란다

겨우내 기다린 봄이 왔다. 남녘부터 들려오는 꽃소식이 북상을 거듭하더니 어느새 산천을 녹색으로 물들이면서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고지대에 자리한 산사(山寺)는 마을보다는 조금 늦게 꽃 손님이 온다. 그런데 지난달 19일, 입춘(立春)이 지난 지 한 달이 훨씬 넘었는데 석굴암에는 폭설이 쏟아졌다. 봄을 시샘하는 듯 천지를 덮은 눈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았다. 아마 새벽부터 비질을 하지 않았으면 족히 20㎝는 쌓였을 것이다. 도반에게 전화로 눈 소식을 전하니 “서울 근교에서 제일 경치 좋은 절이 오봉산 석굴암인데, 이 봄에 백설(白雪)로 장엄하니 축하 할 일”이라고 부러워했다. 그러나 정작 나의 마음이 편안한 것은 아니었다. 갑자기 쏟아진 눈을 감당하지 못한 소나무들 가지가 휘어지고 딱딱 부러지는 소리 때문이다. 그래도 손길이 닿는 사찰 안에 있는 눈 덮인 소나무들에 빗자루로 눈을 털어주어서 부러지거나 상처를 입지는 않았지만 사람 손길이 닿지 않는 산 중턱의 자리한 나무들은 피해가 컸다. 다선루(茶禪樓) 앞마당에 자리한 수백 년 된 소나무는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기다란 장대로 눈을 털어 위기를 모면했다. 그렇지만 미처 손이 닿지 않은 오봉산 자락의 나무들은 폭설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부처님은 유정(有情)인 사람이나 짐승은 물론 무정(無情)인 나무와 돌도 똑같이 존중해야 한다고 했는데, 눈을 이겨내지 못하고 가지가 꺾이는 모습을 보니 매우 안타깝지 않을 수 없었다. 무심하게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정한 눈’에 마음이 아려왔다. 겨우내 강추위와 매운 바람을 버텨낸 나무들이 봄을 맞아 대지에서 물을 흠뻑 빨아들여 기운을 회복해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자랄 텐데 상처투성이가 됐으니 참담한 생각까지 들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사랑과 관심을 받으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 그러면 난관을 극복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무관심으로 일관한다면 바르게 성장하기 힘들다. 어찌 사람만 그러하겠는가. 강아지나 고양이 등 반려동물은 물론이고, 유정 무정의 모든 존재에게 필요한 것은 관심이다. 관심은 곧 사랑이다. 따뜻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보살피고 보듬는다면 아무리 힘든 일이나 역경도 이겨낼 수 있다. 눈이 녹아 자연으로 돌아간 지난 4월3일은 음력 3월 삼짇날이다. 예로부터 한 해의 풍년을 기원했으며, 요즘 세상에는 풍속이 거의 사라졌지만 사찰에서는 산신(山神)에게 제(祭)를 지내며 모든 이의 평화와 안녕을 기원한다. 우리 절에서는 다선루 전각 앞에 500여년 된 소나무에 세말 정도의 막걸리를 부어 나무의 무병(無病)을 기원하듯이 우리가 사는 세상도 다르지 않다. 타인에 대한 관심과 사랑 배려가 세상을 맑고 향기롭게 하는 기초가 된다. 지난달 9일 5년간 국정을 책임질 대통령이 새로 당선됐다. 산사에서 사는 산승(山僧)으로 거는 기대는 국민의 목소리와 생활에 관심을 갖는 대통령이 되길 바란다는 점이다. 특히 소외된 이들의 현실을 잘 살피고 따뜻하게 보살피는 손길과 정책을 펼친다면 대한민국 발전과 더 좋은 나라가 될 것이다. 오봉도일 스님 25교구 봉선사 부주지·양주 석굴암 주지

[삶과 종교] 긍정의 힘으로 발전하는 사회

사회학자인 커밍 워크(Cumming Walk)는 세상을 선도하는 상위 그룹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그들이 성공한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흥미를 가지고 연구하게 됐다. 그는 의외의 흥미로운 결과를 얻었다. 최상의 그룹들 안에 있는 사람들의 삶의 특징은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결단만 하면 되는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아주 쉬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대하는 삶의 습관이었다. 다른 어떤 이유보다 자신의 삶에 대해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이 작은 습관이 그들의 삶을 윤택하게 한다는 것을 연구 결과로 도출해낸 것이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라는 말이 있다. 비단 한 개인의 인생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와 우리들의 나라 안에도 긍적적이고 적극적인 분위기가 더욱 힘 있게 일어나길 기대한다. 지난 기간 동안 많은 성과를 거두기 위해 열심히 일하신 분들께는 고마운 마음을 드린다. 그럼에도 또한 아쉬운 부분은 내 편, 네 편이 심각하게 진영 논리로 갈라져 있는 현재의 모습이다. 이번 대선에도 보았듯이 여전히 지방의 색깔은 나아지지 않고 낡은 이념 논리로 이 나라가 이렇게까지 분열된 것은 국가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세계적으로 가장 안타까운 사건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다. 러시아가 호언장담 했던 3일 만의 우크라이나 점령 시나리오는 이미 허언이 된 지 오래다. 오히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오히려 치욕적인 결과를 얻을 수도 있는 상황이 지금의 현 상황이 됐다. 힘의 논리 속에서 절대적으로 유리해 보였던 러시아의 군대가 우크라이나 안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두 개의 복병을 만났다. 첫 째는 전쟁이 나면 러시아 군대에 겁을 먹고 빠르게 손을 들고 항복할 줄 알았던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정부와 국민이 러시아 예상과는 정반대로 결사항전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의 나라를 지키겠다고 개인의 삶을 드리는 민족적 나라 사랑의 적극적인 모습들이 각종 미디어 매체를 통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러자 주변 국가들부터 우크라이나를 응원하며 사회기업과 유럽의 중립국까지도 우크라이나 정부와 국민에게 지원과 응원을 보내게 된 것이다. 두 번째 러시아가 예상하지 못한 것은 우크라이나의 땅의 지형적 특징이다. 나폴레옹 군대와 강력했던 나치도 항복시킨 가장 무서운 무기가 돼버린 라스푸티차 자연현상이다. 보통 3월 말 해빙기를 맞게 되는데 올해는 다른 해 보다 일찍 시작되어 러시아의 강력한 탱크부대와 보병과 보급선을 단절 시켜서 전쟁의 판세가 바뀌게 된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계획과 힘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상황을 하늘이 도왔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찾아오셔서 죄인 된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의미 있는 선물은 복음(Gospel)이다. 복음이라는 단어는 희망의 뜻이다. 죄안에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 의로운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는 희망의 꿈이 되는 것이다. 전 국민이 치열하게 진영논리로 대통령선거를 치렀다. 이제 5년간의 통치자가 결정됐다. 힘 있고 저력 있는 우리 대한민국이 다시 한 번 더 우리는 할 수 있다는 꿈과 희망을 가지고 세계의 리더 국가로서 역할을 해 내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분위기를 기대한다. 대립적인 자세를 버리고 대통령의 임기 기간인 앞으로의 5년의 시간 속에서 합리적인 견제와 하나 된 대한민국을 다시 복원하고 젊은이들이 꿈을 꾸며 어른들은 다음 세대를 응원해 주는 밝은 대한민국의 새 날을 위해 기도한다. 조상훈 만방샘 목장교회 목사

[삶과 종교] 인간은 왜 존엄해야 하는가?

성경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사람들을 만들자(공동번역 창세 1,26)!고 전한다. 인간이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에, 인간 모두가 존엄한 존재라는 것이다. 황송한 일이다. 천주교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 평등하고 우리 모두의 지위가 격상된다고 믿는다. 사실 과거 존엄하다라는 표현은 왕이나 일부 귀족, 뛰어난 몇몇 사람들에게 부여된 표현이었다. 조선 시대만 하더라도 양반과 평민, 노비라는 계급이 존재했고 누구는 천민이라는 표현까지 들어야 했던 때가 있었다. 모든 인간이 존엄할 수 없었던 시대였다. 서양의 스토아주의 사상가들은 인간이 존엄한 이유를 동물과 구분되는 특징인 도덕성, 이성 능력, 자율능력에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논리 때문에 동물의 존엄성이 인정되지 않았고, 같은 인간이라도 도덕성, 이성 능력, 자율능력에 따라 인간 존엄성이 차별화되기도 하였다. 이는 민족과 종교 간의 우위 싸움으로 번져 많은 전쟁과 수많은 인명피해로 번지게 되었다. 바로 인간 사이에서도 등급, 계급이 있다는 생각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이러한 논리는 우리 일상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어릴 적부터 학교에서 1등을 해야 하는 문화에 적응해야 한다. 수능에는 등급이 매겨지고, 같은 직장에서도 정규직과 계약직 사이에 보이지 않는 등급이 매겨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연봉의 많고 적음에 따라 사람의 능력이 평가되고, 자동차의 배기량에 따라 사람의 지위가 구별된다. 누군가 1등을 하면 꼴등도 생기기 마련인데도 누군가의 우위에 있어야 내가 존엄하다고 느끼는 세상 같다. 나만 생각하는 존엄이 인권을 짓밟고 오히려 특권을 향해 가고 있는 듯하다. 앞서 언급한 하느님 닮은 인간을 곡해하면 인간이 신이다라고 여길 수 있다. 그리고 신을 오해해 인간이 세상 만물을 통제할 수 있고, 급기야 자연을 경시하고 세상을 파괴할 수 있다고 착각할 수 있다. 사실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은 하느님을 닮은 사람이지 하느님이 아니다. 그리고 어떤 신이 당신이 만든 세상 만물을 파괴하고 경시하라는 권한을 인간에게 내리겠는가? 신이 만든 인간이라면, 그리고 신이 만든 세상 만물이라면, 서로가 조화롭게 살아가길 바라시지, 인간이 세상 만물보다 우위에 있기를 바라지 않으실 것이다. 정말 무섭게도 종교적으로 성경과 경전, 그리고 세상의 이치를 제멋대로 해석해 종교를 사유화하고 한 종교 집단이 다른 집단에 우위를 점하려 한다. 세상을 이롭게 해야 할 종교가 종교지도자들의 욕망을 실현하는 도구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인간은 존엄해야 한다. 우리 모두 고귀하고 존귀하다는 당연한 가치가 참으로 실현하기 어려운 세상이기 때문에 그렇다. 역사적 사건들이 말해주듯 인간 사이 설정된 등급과 계급으로 인해 언제든지 인간은 그 존엄성을 상실하기 쉽다. 그래서 인간 스스로 그 비극을 막기 위해서라도 인간은 더 존엄해야 한다. 그리고 나만의 존엄을 위해 누군가는 당연히 희생될 수 있다는 인식을 전환하기 위해서라도 더욱더 인간이 존엄해야 할 것이다. 김의태 수원가톨릭대학교 교회법 교수

[삶과 종교] 성공 그리고 실패에 대해서

지난 1월 세계 4대 생불로 추앙받아온 틱낫한 스님이 입적하셨다. 스님은 위파사나 수행과 함께 한국의 간화선의 세계화에 앞장선 고승이었다. 이러한 위파사나나 선 수행의 관점에서 보면 어떤 내적 또는 외적 동기를 따르는 시작에서 결코 결과에 대해서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성공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고 시작하라는 메시지를 전제로 하고 있다. 왜냐하면, 성공은 과정에 따르는 자연스러운 부산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열심히 매진한다면 성공은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것이지 성공이 목표가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열자가 성공이나 실패에 대한 생각으로 흔들리지 말고 조용히 고요하게 일하라고 했던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성공을 지나치게 의식하게 되면 실패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떠올리게 된다. 이 두 가지는 동시에 찾아온다. 성공과 실패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한 가지다. 내가 성공에 집착해 생각한다면 내면 깊은 곳에서는 같은 비중만큼 실패에 대한 공포가 자리 잡게 된다. 우리는 하고자 하는 일이 성공할지 실패할지 미리 예단할 수 없으며 나의 바람과 달리 당연히 실패할 수도 있다. 그러한 실패의 가능성이 우리를 떨게 하는 것이다. 즉 성공이라는 야망이 나를 미래로 이끄는 힘이 되는 동시에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러한 공포가 나를 떨게 만든다. 위파사나나 많은 선사의 가르침이 주는 핵심은 그냥 할 뿐, 지나치게 앞을 내다보지 말라고 이른다. 왜냐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보상받게 돼 있다는 것이다. 나의 모든 행업에 있어서 보상받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인도철학에서 말하는 카르마, 즉 업(業)이다. 카르마에 의하면 어떤 것도 보상받지 않거나 처벌받지 않는 것은 없다. 그래서 성공은 저절로 찾아오게 마련인 것이고 같은 원리로 내가 범한 잘못에 대한 처벌 또한 그림자처럼 저절로 따라오게 돼 있다. 그래서 결과에 대해서는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으며 의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길을 걸어가면서 자신의 그림자가 뒤따라오는지 확인하려고 계속 뒤돌아본다면 아마도 정신이상자로 여겨질 것이다. 그림자는 따라서 온다. 이는 필연적이다. 따라서 올바른 노력과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에 대한 전체성을 가지고 올바른 방향으로 정진해나간다면 보상은 한치의 틀림도 없이 나를 따라올 것이다. 그래서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설해진 팔정도에서도 정업(正業)과 정정진(正精進)이 전제돼 있는 것이다. 최성규 철학박사한국미술연구협회 이사장

[삶과 종교] 독립운동의 달을 맞이하여

3월은 독립운동의 달이다. 일제가 강탈한 나라를 되찾고자 떨치고 일어난 31운동 103주년을 맞이하며, 독립투쟁에 나섰던 지사들의 애국정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볼 때이다. 비록 10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선열들의 나라 사랑 정신은 우리 민족의 자양분이 되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분들의 치열한 투쟁과 헌신으로 우리는 해방을 맞이하고, 한국전쟁과 산업화의 격동기를 지혜롭게 이겨낼 수 있었다. 지구촌에서 가장 가난했던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손꼽는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는 초석을 선열들이 놓았다는 사실을 마음 깊이 새기게 된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 시작된 독립만세 운동은 순식간에 들불처럼 번져 한반도 전역에서 애국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서울 주변에 자리한 경기도에서도 수원 북문을 시작으로 개성, 시흥, 양평, 안성, 용인, 포천, 양주 등 전국의 21개 지역에서 225차례의 만세운동 시위가 일어났다. 남녀노소, 누구든지 한마음으로 나라의 주권을 회복하고자 흔연히 나선 31운동에는 시민과 함께 불교계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스님들은 국권을 강제로 빼앗긴 식민지 현실을 타개하는 것이 고통받는 나라와 중생을 구하는 일로 여겼던 것이다. 그렇기에 자발적으로 태극기를 만들고 산문(山門)을 나와 거리에서 대한 독립만세를 목청껏 외쳤다. 해인사, 통도사, 범어사, 법주사 등 전국 주요사찰의 스님들은 마을주민과 협심하여 31운동에 동조하는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총칼로 무장한 일본 경찰의 무자비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의연히 맞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경기도를 대표하는 대찰(大刹)로 현 남양주시 진접읍에 있는 봉선사도 이러한 흐름에 부응해 독립투쟁에 앞장섰다. 31운동 소식을 전해 들은 봉선사 스님들은 주민들에게 광릉천 강가에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자는 통문(通文)을 돌리며 거사를 준비했다. 봉선사에서 비밀리에 조직한 조선독립단(朝鮮獨立團) 임시사무소에 지월스님(이순재), 운암스님(김성숙), 강완수, 현일성, 김석로 등 애국지사들이 같이했다. 이 가운데 운암스님은 중국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국무위원을 지낸 애국지사이다. 1919년 3월 31일 봉선사 스님들과 주민 등 600여 명이 광릉천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해, 이에 놀란 일본 무장경찰이 출동해 시위대를 강제 해산하고 주동자 8명을 체포했다. 1919년 10월 29일 봉선사에서는 200여 명의 스님을 비롯해 2천여명이 모여 이태왕(李太王) 전하의 제사를 지냈다. 뒤늦게 정보를 입수한 일제는 양주경찰서에서 7명, 경기도경에서 10명의 무장 병력을 출동시켰다. 이태왕은 고종황제이며, 제사를 지냈다는 사실은 민족의식이 투철했던 봉선사스님들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이 밖에도 봉선사에서는 운허스님과 동암스님 등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분들이 여럿이 있다. 운허스님은 31운동 직후 독립군 정기관지 한족신보(韓族新報)와 독립투쟁단체 광한단(光韓團)을 조직해 일제에 항거했으며, 1962년에는 문화훈장을 수훈했다. 봉선사에서 월초(月初)스님의 손상자로 출가한 동암스님은 31운동 민족대표인 백용성스님의 법맥(法脈)을 잇고, 독립자금을 상해임시정부 등에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해방 직후에는 상해 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환국봉영회(還國奉迎會)회장을 맡기도 했다. 1945년 12월 12일 서울 대각사에서 열린 임시정부 환영 행사에서 김구, 이시영, 조소앙 등 임시정부 요인들과 동암스님이 함께 촬영한 사진이 몇 년 전 공개됐다. 세속의 인연을 멀리해야 하는 것이 출가수행자이지만, 위기에 처한 나라를 외면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임진왜란 당시 승군을 조직해 나라를 구한 서산대사와 사명대사를 비롯한 수많은 스님, 그리고 일제강점기 식민지를 극복하고자 분연히 나선 스님들의 애국혼(愛國魂)을 잊지 말아야 한다. 봉선사 주지 초격 스님은 선대 스님들과 지사(志士)들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중생의 자비(慈悲)로 대하는 부처님 가르침과 같은 것이라면서 애국애족의 숭고한 정신을 받들어 후대에 전하겠다고 다짐했다. 과거 없는 현재는 없고, 현재 없는 미래는 없다. 선대의 호국 정신을 잊지 않고 계승하여 후대에 전하는 것은 지금 우리들의 사명이며 의무이다. 3월을 맞이하여 불교계뿐 아니라 우리 민족 구성원 그분들을 기억하는 시간을 갖기를 바라며 후손들은 대한민국이 더 발전하여 자손만대에 이어가길 기원한다. 오봉도일 스님 25교구 봉선사 부주지양주 석굴암 주지

[삶과 종교] 도피성의 정신이 있는 나라를 꿈꾸며

20대 대통령선거를 얼마 남기지 않고 있다. 각 정당의 진영들은 모든 사활을 걸고 선거운동에 총력을 쏟고 있다. 수많은 공약을 발표하고 전국을 돌며 민심의 한 표라도 더 받기 위해 싸우고 있다. 각 진영의 공방 속에 오가는 모든 흉한 이슈들이 거침없이 국민에게 전달되고 있다. 저래서야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이 나라의 품격이나 지도자를 향한 존경의 태도는 이미 물 건너간 것 같다. 대통령 후보자가 태어나면서부터 대통령이 되겠다고 인생의 초점을 정치에 맞춰 살아온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살아오면서 정직한 일만 하고 거짓되지 않은 일에는 근처도 가지 않은 사람이 과연 이 땅에 있겠는가?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지금 국민은 그런 무결점의 사람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런 실수와 오점이 있을지라도 그 부분을 어떻게 반성하고 어떤 대안을 가지고 국민의 정서에 맞게 지도자의 넓은 포용의 모습을 보이는가를 기대하는 것이 아닐까? 인생의 실수도 자신의 삶의 한 부분임을 인정하고 오히려 그렇기에 낮은 겸손의 자세로 묵묵히 자신의 정책을 내 놓으면 된다. 우리나라 국민은 그 정도의 포용력을 갖춘 수준을 가지고 있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의 직업을 돌아보면 땅콩을 재배하던 농부, 연예인이었던 대통령, 여러 추문에 휩싸여 있던 사업가도 미국은 자신들의 대통령으로 받아들였다. 우리나라 국민도 미국보다 더 높은 포용력이 있기에 과거에 매이지 않고 내일을 노래하는 지도자를 원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성경 속에는 도피성(逃避城)이라는 제도가 있다. B.C1400년대에 그들은 인간의 실수를 인정하고 법은 공정하게 집행하되 고의성이 없는 실수의 살인죄에 대한 용납의 공간을 만들어 두었던 것이다. 사람이 인생을 살다 보면 실수할 수 있다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에 대한 이해를 법에도 적용해 두었던 것이다. 요단강을 기준으로 동편에 3개의 성읍에 도피성을 두었고 강 서편에 3개의 성읍에 도피성을 누구든지 고의적 살인이 아닌 실수로 인한 범죄함에 최소한이라도 인권을 보호하는 제도였다. 20번째 대통령 후보들의 모습에서 우리나라의 미래를 보게 되고 상상해 보게 된다. 소통이 되는 대통령, 민족을 분열시켜 좌, 우를 나누어 놓지 않는 대통령, 미래를 꿈꾸어 볼 수 있도록 희망을 주는 대통령을 기대하고 기도하는 것이 이번에도 사치스러운 상상이 되지 않기를 꼼꼼히 후보들과 공약들을 살펴보게 된다. 아름다운 이 나라 대한민국에 이 도피성의 정신이 싹 틔워 지고 국민 모두에게 최소한의 서로 용납하는 마음이 자라가기를 기도하게 된다. 조상훈 만방샘 목장교회 목사

[삶과 종교] 정치, 공동선을 찾는 사랑

제20대 대선이 20여일 앞으로 다가왔다. 과거 천주교 신부가 정치 이야기를 꺼내면 많은 비판과 뭇매가 뒤따랐지만, 사실 교회의 수장이신 프란치스코 교황은 정치 이야기를 참 많이 꺼낸다. 오히려 교황은 정치가 고귀하고 숭고한 것이라며 정치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호소한다. 오늘날 많은 이들은 일부 정치인들의 실수, 부패, 무능 때문에 흔히 정치를 불쾌한 표현으로 여긴다. 그리고 정치를 불신하게 하고 경제로 대체하려 하거나, 하나의 이념이나 다른 이념으로 왜곡하려는 시도들이 존재한다. 암울하지만 정치 없이 우리 세상이 돌아갈 수 있는가? 올바른 정치 없이 보편적 형제애와 사회 평화를 향한 효과적 발전 과정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라고 교황은 반문한다. (〈모든 형제들〉 176항) 교황은 이미 정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적극적인 참여를 강조했다.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하나의 의무입니다. 왜냐하면 정치란 공동선(common Good)을 찾기 위한 사랑의 최고 표현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일각에서는 종교가 왜 정치에 개입하려 하느냐?라며 정교분리(政敎分離) 원칙에 반하는 일이라 비판하지만, 교황은 오로지 이웃사랑이라는 계명을 바탕으로 정치를 이해하고 있다. 이는 그의 행보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가난한 자의 벗, 거리의 교황이라 불리는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 이름부터가 파격적이었다. 가난과 청빈의 삶을 살며, 평생을 병든 자와 가난한 자를 위해 헌신한 성 프란치스코를 교황의 이름으로 채택한다. 또한 교황궁이 아닌 게스트룸에 거주하고 있으며, 방탄 안 되는 소형차를 이용하며 민중과 성직자 사이의 담을 허물었다. 불법 이민자 수용소에서 이민자들의 발을 닦고 입을 맞추며, 이민자들에 대한 국제적 무관심을 비판했고, 규제받지 않는 자본주의에 대해 새로운 독재라며 질타했다. 언제나 세상의 불평등과 억압에 목소리를 높였고, 자국민들도 건들기 어려운 마피아를 파문하기도 했다. 청소부와 노숙자를 교황청에 초대해 함께 식사를 나누고 난민들의 섬을 먼저 찾아가 고통받은 이들을 위로했다. 내부 부패의 사슬을 먼저 끊자는 의지로 부패한 정치인뿐만 아니라 마피아와 결탁한 바티칸 은행을 개혁했고, 사제의 성추문에 대해 통곡하며 교회의 형벌 제도를 더욱더 엄격하게 개정했다. 분명 다른 색깔의 정치 참여다. 비리와 음모가 가득한 사회 속 비호감 정치인들의 모습에서도 누군가 뿌린 선의 씨앗 때문에 숨겨진 희망이 자라나고, 나보다는 다른 이들이 맺게 될 열매들을 기대하는 일은 참으로 숭고한 일이다. 이는 모든 사람과 모든 세대와 모든 지역에 숨겨진 선의 보고(寶庫)에 대한 확신과 희망에서 비롯된다. 정치 지도자들이 단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나를 지지하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나에게 투표했는가?에 매몰되기보다 나는 국민들에게 더 잘 봉사할 수 있도록 그들을 사랑하는가?, 나는 최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도록 겸손하게 모든 이들의 다양한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가?라고 물어보아야 할 때이다. 김의태 수원가톨릭대학교 교회법 교수

[삶과 종교] 정월대보름

어느새 설과 입춘이 지났다. 여전히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지만, 얼마 있지 않으면 봄이 찾아올 것이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는 것은 순리다. 세월은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秦始皇)도 막지 못했다. 그러니 지난 시간을 한탄하기보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 중요하다. 이맘때가 되면 절집 역시 분주하다. 설날에 조상님께 차례를 올린 뒤에는 며칠간 운 맞이 정초기도를 한다. 사흘 또는 일주일 정도 하는데, 한 해 동안 건강하게 아무런 장애 없이 뜻한바 소원성취하기를 염원하는 소중한 시간이다. 불교에서는 1년에 두 번 석 달간 바깥출입을 금하고 참선에 집중하는 안거(安居) 수행의 전통이 있는데, 요즘은 동안거가 막바지에 이르는 시기이다. 음력 4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는 하안거, 음력 11월 15일부터 1월 15일까지를 동안거라고 한다. 안거를 회향하기 전 7일간 잠을 자지 않고 수행하는 용맹정진을 한다. 동안거 해제일인 음력 1월 15일은 설날이 지나고 첫 보름달이 뜨는 정월(正月)대보름이다. 예로부터 옛 어른들은 중요한 세시풍속으로 여겨졌는데, 음력 14일과 당일에는 여러 풍습이 행해졌다. 오곡밥을 먹고, 아침 일찍 껍질이 단단한 호두와 땅콩 과실을 깨무는 부럼과 귀밝이 술을 마시는 전통을 이어왔다. 지역마다 볏가릿대 세우기, 지신밟기, 쥐불놀이, 사자놀이, 차전놀이 등 다양한 민속행사를 해왔다. 우리 사회가 빠르게 현대화되면서 지금은 대부분 사라지고 명맥만 유지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도 산사(山寺)에서는 몇 가지 풍습이 남아 있다. 쌀, 보리, 조, 수수, 팥 등 다섯 가지 이상 곡물을 넣어 지은 오곡밥을 스님들과 먹는 것이 대표적이다. 세상일에 초연하여 사는 것이 스님들이지만, 그래도 명절이 되면 조금은 마음이 설렌다. 오곡밥을 지어 먹고 법당 위에 뜬 보름달을 바라보며 무탈한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한다. 석 달 동안의 안거를 마치는 날도 이즈음이기에 마음가짐 또한 더욱 새롭다. 새해가 되어 설과 입춘을 지나 정월대보름이 되었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여전히 어둠 속에 있는 것 같다. 한 달도 남지 않은 대통령 선거로 후보와 지지자들 간의 치열한 경쟁이 선을 넘어서는 일까지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코로나19 오미크론 변이가 확산 일로에 있어, 방역 모범국으로 불리던 우리나라도 확진자가 3만여 명을 넘어섰다. 이달 말이나 다음 달에는 20만 명까지 이를 수 있다고 우려하는 상황이다. 방역조치의 장기화로 벼랑 끝에 몰린 영세상인들의 절박한 호소가 들려올 때면 마음이 무겁다. 설, 입춘, 정월대보름으로 이어지는 요즘, 그동안의 어려움과 나쁜 기운을 물리치기를 바라는 염원은 더욱 커지고 있다. 사찰에서도 국민, 아니 인류가 겪고 있는 난관을 물리치기 위해 열심히 기도하면서 힘을 보태고 있다. 중국 당나라의 황벽선사(黃蘗禪師, ?~850)는 不時一番寒徹骨(불시일번한철골) 爭得梅花撲鼻香(쟁득매화박비향)이라고 했다. 추위가 한 번 뼈에 사무치지 않았다면, 어찌 코를 찌르는 매화 향기를 얻을 수 있으리오라는 뜻이다. 비록 1천200여 년 전의 말씀이지만 우리가 겪는 고통을 잘 이겨내자는 희망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인류와 국가는 물론 개인과 가정에 닥친 어려움이 있다면, 이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는 지혜가 필요하다. 정월대보름을 앞두고 겨울은 반드시 지나가고 봄은 기필코 온다는 사실을 알기에 지금의 고난에 너무 절망하지 말고 봄을 맞이하여 희망의 꽃을 마음에 피었으면 한다. 오봉도일 스님 25교구 봉선사 부주지양주 석굴암 주지

[삶과 종교] 이런 지도자를 이 땅에 허락해 주소서

역사를 공부하면서 강대국으로 이 세상의 흐름을 지배했던 나라들을 볼 때면 부러운 것이 있었다. 그것은 그 나라에 그 시대에 맞는 좋은 지도자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강력한 지도력을 갖춘 탁월한 인물이 왕으로 등장한 나라는 전쟁을 통해 영토를 넓히고 자국의 문화를 전파하게 되는데 그 인물들이 만들어지기까지 그 나라의 국민의 전반적인 수준은 다른 나라와 달랐음을 보게 된다. 우리나라는 제20대 대통령을 선출하고자 오는 3월9일 본 선거를 하게 된다. 요즘 우리나라의 모든 관심은 이제 대통령선거에 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5년 동안 대한민국을 대표해서 이 나라를 이끌어 가기도 하고 섬기기도 해야 하는 인물을 선출해야 하는 과정이니 많은 검증과 그리고 준비된 실력을 확인해야 하는 것은 너무도 중요할 수밖에 없다. 성경 속에는 수많은 왕이 등장한다. 이스라엘 땅의 작은 나라에서 근동 지중해 일대를 호령하던 다윗이라는 왕과 그의 아들 솔로몬왕은 역사 속에서도 유명하며 큰 지혜를 남기는 왕이었다. 오늘날에도 이스라엘 국기에 다윗의 육각별이 새겨져 있음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다윗 왕이 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한다. 나는 다윗 왕과 아들이던 솔로몬 왕을 비교해 보았다. 솔로몬이 더 큰 나라를 건설했고 더 많은 업적을 남겼음에도 성경에서는 왜 다윗 왕을 솔로몬 왕보다 더 중요한 왕으로 이 시대에 소개하고 있는 것일까? 그 결론을 나는 이렇게 정의하고 싶다. 다윗 왕은 백성을 향한 애절한 긍휼의 눈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백성을 향해 진정한 민족적인 아비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천하의 지혜를 가지고 군사와 경제와 외교에서 최고의 실력을 갖췄던 솔로몬 왕보다 가난하고 무식하고 배고픔을 참지 못했던 백성과도 함께 울고 함께 웃던 다윗 왕은 그들에겐 어떤 왕보다도 더 좋은 왕이 될 수 있었다고 정의하게 된다. 왕은 그 나라의 모든 백성에게 아비의 마음이 있어야 참 좋은 왕이 된다. 왕 그 자신을 좋아하던 좋아하지 않던 그 땅의 왕이 된 자는 국민의 모든 소리에 귀를 열고 들어야 하고 대화해야 하고 민초의 아픔을 공감해야 한다. 우리나라에 벌써 20번째 대통령을 선출해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이 땅의 모든 종교들은 그 종교의 세계관의 방식으로 새로 세워질 대통령을 위해 기도하고 있을 것이다. 또한 각 개인의 국민도 자신의 판단에 따라 이 나라의 새 대통령을 기원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과거를 돌아보아야 한다. 지금의 감정이나 느낌이나 단기적인 충동이 아니라 그동안의 19번의 대통령들을 돌아보며 이 시대에 필요한 우리나라의 대표는 어떠한 사람이 돼야 하는지를 돌아보고 미래를 향해 한 표의 결단을 투표로 내어놓아야 한다. 한 개인의 마음으로 나는 이렇게 기도하고 싶다. 주님, 이러한 대통령을 이번 20번째 지도자로 허락해 주소서. 국민들이 답답한 마음으로 국사에 반대해 광화문 광장으로 나와 당신을 비난할 때라도 여야를 막론하고 그 국민들과 함께 안고 울어 줄 수 있는 대통령을 말입니다. 지역적으로 이익 목적으로 국론이 분열할 때 약하고 작은 지역을 용감하게 편들어 줄 수 있는 참 용기를 가진 지도자를 말입니다. 큰 위대한 업적이 만들어지면 저 맨 밑에 있는 가장 고생한 분들에게 제일 큰 박수와 감사를 돌려주는 그런 대통령 말입니다. 역사가 솔로몬 왕보다 왜 다윗 왕을 왜 더 중요하게 기록하고 있는지를 아는 지도자가 선출될 뿐만이 아니라 그런 지도자를 구별할 줄 아는 우리 모두의 대한민국이 되기를 갈망하는 이유다. 주님, 이런 지도자를 허락해 주소서. 조상훈 만방샘 목장교회 목사

[삶과 종교] 거리두기 ≠ 멀리하기

팬데믹 상황에서 천주교가 정부의 방역지침을 적극적으로 준수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얻고 있지만, 사실 천주교 안에서는 적지 않은 타격을 받고 있다. 무엇보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일상화되면서 성당을 찾는 신자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 대면 문화에 뿌리를 둔 종교 생활이 비대면 생활로 치환되면서 대부분 무엇을 해야 할지, 또 어떻게 해야 할지, 급기야 왜 종교 생활을 해야 하는지까지 자문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실질적으로 종교에 대한 무관심과 감염병 위험에 노출된 신자들의 신앙 감각은 변하고 있다. 사실 사회적 거리두기가 기존의 인격적 관계를 포기하라는 메시지가 아님에도 어쩌면 종교가 자연스럽게 사회적 멀리하기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 목회데이터의 종교(인) 및 종교인 과세 관련 인식 조사에 따르면 코로나19 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종교가 다양한 봉사 활동의 주체, 사회적 약자 보호, 시민들의 심리적 불안감 해소의 역할을 담당해주길 요구하고 있다. 평소 자비와 사랑을 가르치는 종교가 위기 속에서는 숨거나 머뭇거리는 모습처럼 여겨진 듯하다. 역설적으로 코로나19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나선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접하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교황은 우리만의 교회에서 세상과 함께하는 교회를 해법으로 내놓으신다. 바로 야전 병원과 같은 교회(전투가 끝난 뒤에 상처투성인 이들을 돌보고 치료해야 하는 병원의 역할) 말이다. 바로 팬데믹으로 극명하게 드러난 무관심, 버림과 대립의 문화에 맞서 싸우기 위해 돌봄의 문화(a culture of care)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한국 천주교회는 코로나19 위기 속에서 사회적 거리두기에 적극적이었지만 그 이상의 연대와 나눔은 다소 소극적이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런 와중에도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묵묵히 돕고 있는 교회 구성원들이 곳곳에 존재했다. 팬데믹 상황에서도 교회 구성원들이 운영하는 무료 급식소 성남 안나의 집과 인천 민들레 국수집을 찾는 자원봉사자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민주화의 성지인 명동성당 내 무료 급식소 명동밥집에서는 아직도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다. 비신자를 포함한 수백 명의 봉사자뿐만 아니라 1천200명의 후원자가 성금과 물품을 지원해줬다. 또한 교황의 의지대로 백신 수급이 어려운 나라를 도와주는 백신 나눔 운동도 병행하고 있다. 부족하지만 손 놓고 있었던 건 아니다. 대한민국은 이제 일상으로의 회복을 조심스럽게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2년 가까이 시행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마치 사회적 멀리하기로 여긴 우리들의 민낯을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무기력한 체념에 빠진 우리 민낯을 인정했으면 한다. 나아가 종교가 일상 회복에 힘을 불어넣고 동시에 인격적 관계 회복에도 큰 노력을 기울여주길 희망해 본다. 김의태 수원가톨릭대학교 교회법 교수

[삶과 종교] 검은 호랑이 해 설날

임인(壬寅). 2022년 새해가 밝았다. 올해는 나쁜 기운을 물리치고 복(福)을 가져다주는 검은 호랑이 해라고 한다. 코로나19가 수그러들지도 않고 모든 어려움 속에 국민이 고통 받는 상황에서 검은호랑이의 기운으로 난관을 극복하는 한 해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얼마 안 있으면 설날이다. 일제가 양력을 앞세워 구정(舊正)이라 폄하해, 우리 민족이 전통적으로 계승해온 설날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었다. 하지만 1985년 음력 1월1일을 민속의 날로 지정해 국가 공휴일이 되고, 1989년부터는 설날이라는 이름을 되찾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새해를 맞아 첫 번째 명절인 설날에 즈음해 건강과 발복(發福)을 기원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산업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설날 풍습도 많이 바뀌었다. 물론 지금도 가족이 모여 세배를 드리고 덕담을 나누지만, 예전만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예로부터 설에는 차례와 성묘를 지내고 친지뿐 아니라 동네 어른들을 찾아 인사를 드리고, 음식을 나눠 먹는 아름다운 고유의 풍속이 있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마음만은 넉넉했던 행복한 시절이었다. 대부분 가정에서는 설날을 맞아 조상의 공덕을 기리고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차례를 지낸다. 가장 좋은 음식을 차려 차(茶)나 술을 올리고 선조를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다. 비록 코로나19로 가족들이 함께 모여 설날을 보내는 것이 어렵게 됐지만, 방역수칙을 준수한 가운데 정성껏 차례를 지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설날 즈음에 산사(山寺) 마다 거행하는 설날합동차례에 가족과 함께 참여해 조상을 추념(追念)하는 시간을 갖는 것도 방법이다. 조상을 기리는 것은 효도(孝道)를 실천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전통을 소홀히 여기는 세태(世態)가 됐지만, 어버이를 공경하는 효도는 인류의 기본 덕목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보릿고개를 겪는 어려운 시절에도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부모의 은혜를 그리워하며 자손으로서 당연히 3년간 시묘(侍墓)살이를 하는 시절이 있었다. 어렸을 때 큰 숙부님이 세상을 떠나신 후 49재와 100재를 절에 가서 지낸 뒤에 탈상(脫喪)을 하거나, 아니면 대청마루에 상청을 차려놓고 3년간 끼니마다 상식(上食)을 올리는 것을 봤다. 어린 마음에 돌아가신 분이 드시지도 못하는 음식을 왜 올리나라고 의아하게 여겼던 기억이 떠오른다. 세월이 흐른 뒤에야 그 뜻을 알았다. 부모님과 선조의 은혜는 태산과 같고 바다와 같다는 말씀이 있다. 불가(佛家)에서는 양 어깨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업고 우주의 중심이라는 수미산(須彌山)을 한 없이 돌고 돌아도 그 은혜를 갚을 수 없다고 한다. 그만큼 부모님의 은혜가 지중하며 효도가 중요하다는 가르침이다. 이번 설날은 뿌리 없는 나무가 없듯이 부모님 없이 지금의 우리가 없다는 사실을 마음에 깊이 새기는 시간이 됐으면 한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진리는 바뀌지 않은 거와 같이 우리 부모님 은혜에 보답하는 자손이 됐으면 한다. 그리하여 임인년 검은호랑이 해가 모든 벽사(辟邪))를 물리치고 희망의 등불을 밝힐 수 있기를 염원하며, 새해에도 더욱 건강하고 복 많이 받으시기를 기원한다. 오봉도일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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