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발밑을 비추어 본다

뜨거웠던 여름날이 엊그제였는데 어느새 한파를 코앞에 두고 겨울이 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으면 한 해가 가고 새해가 찾아올 것이다. 누가 그랬던가. 흐르는 물보다 빠른 것이 시간이요, 쏜살같이 빠른 것이 세월이라고. 어렸을 때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는데 이제는 세월 흘러가는 것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마냥 아찔하다. 옛날 옛적에 어떤 노인이 죽어서 염라대왕 앞에 당도했다. 염라대왕을 본 노인이 덜덜 떨며 말했다. “대왕님, 제가 이렇게 속절없이 죽을 줄은 몰랐습니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 저승에 올 줄은 몰랐습니다.” 염라대왕이 말했다. “내가 그대에게 3명의 천사를 보여주고 세 번의 가르침을 주었는데 그대는 왜 알지 못했는가?” 노인이 당황하며 물었다. “대왕님, 언제 3명의 천사를 보내고 언제 세 번의 가르침을 주셨습니까?” 염라대왕이 말했다. “첫 번째 천사는 나이든 사람이다. 나이가 들어 허리가 굽고 이가 빠지고 머리가 하얗게 된 사람을 만났을 때, ‘젊음은 영원하지 않구나. 나도 언젠가 저렇게 늙겠구나’라고 왜 생각하지 않았는가?” 염라대왕이 또 말했다. “두 번째 천사는 병든 사람이다. 병이 들어 아프고 괴롭고 힘들어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건강은 영원하지 않구나. 나도 언젠가 저렇게 아플 수 있겠구나’라고 왜 생각하지 않았는가?” 염라대왕이 다시 말했다. “세 번째 천사는 죽은 사람이다. 나이에 상관없이 죽음이 갑자기 찾아와 육체는 무너지고 정신은 꺼져 버린다. 송장을 만났을 때, ‘생명은 영원하지 않구나.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죽고야 말겠구나’라고 왜 생각하지 않았는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노인을 향해 염라대왕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나는 그동안 그대 삶에 평생에 걸쳐 3명의 천사와 세 번의 가르침을 주었는데 그대는 왜 평생을 허송세월했는가.” 우리는 죽는다. 언젠가는 죽는다. 법구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언젠가는 죽어야 할 존재임을 깨닫지 못하는 이가 있다. 이것을 깨달으면 온갖 싸움이 사라질 것을.”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사람의 목숨은 길어야 100년이다. 역사에 출현했던 수많은 국가와 영웅들도 세월 속에 먼지가 돼 흩어진다. 우리는 한 치 앞도 미래를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우리는 언젠가 결국은 죽는다는 것이다. 옛날 옛적에 큰스님이 계셨다. 신도가 찾아와 큰스님께 자신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 점을 봐 달라고 했다. 큰스님이 말했다. “나는 그대가 미래에 어떻게 될지 알고 있다.” 신도는 흥분해 말했다. “스님, 말씀해 주세요. 제 미래는 어떻게 됩니까?” 큰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죽는다. 그대는 반드시 죽는다.” 당황해서 멍하니 정신 나간 신도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미래에 반드시 죽는다. 10년 후가 될지, 100년 후가 될지, 천 년 안에는 반드시 죽는다. 그것이 그대의 미래다.” 우리는 한 치 앞도 미래를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넉넉히 오래 살아도 천 년 안에는 죽는다. 이것은 결코 피할 수 없는 진실이다.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이 진실 앞에서 여름이 지나고 겨울이 오고 또 겨울이 지나 봄이 올 것이다. 내 앞에 언젠가 죽음이 왔을 때 나는 내 삶을 과연 어떻게 후회 없이 받아들일까. 지금 이 순간이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다. 조고각하(照顧脚下), 자기 발밑을 비추어 보라. 광우스님 화계사

[삶과 종교] 연결의 감각

한국 사회가 파편화되고 있다. 공동체가 개인화로 흩어지고, 개인은 더 미세한 존재로 분해돼 극소단위로 분화됐다는 의미의 ‘나노사회(Nano Society)’라고 칭한다. 나노사회의 특징은 조각조각 흩어지는 모래알, 끼리끼리 관계 맺는 해시태그, 내 편의 목소리만 믿게 되는 반향실이기에 모르는 타인과 연결하는 감각이 둔화되고 있다. 간디는 종교의 진수를 묻는 질문에 “친구하고 친하게 지내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원수라고 여겨지는 사람과 친구가 되는 것이 종교의 진수입니다. 종교에서 다른 것들은 장사에 불과합니다”라고 답했다. 즉, 종교의 핵심이 원수와 ‘친구 되기’라는 것이다. 나노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만의 울타리를 설정하면서 다른 이들을 의심하고 경계한다. 이러한 모습을 철학자이자 작가인 한병철은 “자기와 이질적인 것은 거부하는 시대”라고 면역학적으로 정의하면서 연결이 아닌 분리와 단절, 파편화된 사회를 지적한다. 누가복음 10장에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이웃의 개념을 드러낸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빼앗기고 얻어맞아 초주검이 된 ‘어떤 사람’이 등장한다. 이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치는 제사장과 레위인과는 달리 유대인들이 멸시하고 혐오하던 사마리아인은 응급처치를 한 후 여관에 돈을 내며 다친 사람을 맡긴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는 진정한 이웃이란 나와 비슷한 동질성이 있거나, 가까이 사는 이들이 아닌 “사랑과 자비를 베푼 사람”임을 명확히 선포한다. 대학에서 ‘문화콘텐츠와 성서’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소개하면서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눅 6:32)라는 화두를 던지며 통찰을 요청했다. 노소정 학생이 제출한 글을 소개하고자 한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모습’은 현대사회에서 비일비재하다. 10·29 핼러윈 참사로 소중한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을 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기들 울타리에 국한된 관점으로 다양한 희생양을 찾아 비난의 화살을 쏘아 댔다. 뿐만아니라 내 아이만 챙기는 부모들, 내 이익만 챙기도록 보채는 사회, 우리 공동체만 잘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현대 풍조는 일상생활에서 흔히 나타난다. 평론가 신형철의 책 ‘인생의 역사’에 “때로 너의 죽음은 기어코 나의 죽음이 된다”는 글이 있다. 한 사람을 죽이는 행위는 그 사람의 주변, 나아가 그 주변으로 무한히 뻗어가는 분인(dividual)들의 연결을 파괴하는 짓이다. 왜 사람을 죽이면 안되는가? 누구도 단 한 사람만 죽일 수는 없다. 살인은 언제나 연쇄살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념들은 나에게 비로소 ‘죽음을 세는 법’을 알도록 했다. 죽음을 셀 줄 아는 것. 그것이야말로 애도의 출발이라는 것도.’ 참사의 순간, 연결의 감각이 살아있었던 이들은 경찰서에 신고했고, 숨이 멎어 가는 사람들에게 심폐소생술(CPR)을 실시했으며, 어떻게든 도움의 손길을 펼치려 노력했다. 이 연결의 감각은 착한 사마리아인, 진정한 이웃으로서 살아가는 사랑과 자비의 언행이다. 우리는 더 넓은 연결의 감각이 필요하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연결만이 아니라 이 순간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 숭고한 연결의 감각이 필요하다. 양승준 세종대 대양휴머니티칼리지 초빙교수·교목

[삶과 종교]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

십계명 중 제8계명인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라는 계명은 단지 ‘거짓말하지 마라’라는 상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말하고 진실하게 살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우리는 왜 진실해야 하는가? 진실이 왜곡된 세상에, 그리고 거짓으로 얼룩진 사회 속에 신뢰라는 희망이 자리할 수 없기에 진실해야 한다. 사이비종교를 예로 들어보자. 겉으로는 종교로 위장하고 있으나 속으로는 비종교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집단을 말한다. 타 종교 교리를 이것저것 모방한 교리, 교주의 신격화, 반사회적이고 비윤리적인 모습, 시한부 종말론까지 뭔가 허술한 면이 있지만 희한하게 그 집단에 빠지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러한 집단은 급기야 교주를 포함한 특정 소수의 인원만을 위해 움직이고 활동하는 성향을 보이고, 종교적 맹신을 이용해 사람을 세뇌시켜 가정을 파괴하거나 강력범죄를 유발하고 주도하기까지 한다. 기성 종교인 가톨릭교회도 마찬가지다. 신부들의 미성년자 성범죄 논란과 바티칸 은행의 부패 및 비리로 가톨릭교회는 큰 곤욕을 치른 바 있다. 오랜 기간 만연돼 온 가톨릭계의 공공연한 범죄에 대해 처벌보다는 오히려 사건을 은폐하려 했던 사건으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교회에 대한 종교적 권위와 도덕성을 문제 삼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톨릭교회를 대표해 범죄로 인한 피해자들과 전 세계를 향해 용서를 청했다. 또 더 이상 이러한 범죄와 피해가 발생하지 않기를 희망하며 교회의 형벌제도를 개정했다. 신앙이 전제된 종교 역시 위선과 거짓으로 일관한다면 그 종교에 대한 신뢰는 존재할 수 없다. 신뢰가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 공자는 논어에서 ‘경제와 국방보다 더 중요한 것이 믿음’이라고 역설했다. 여기서 나온 유명한 말이 바로 ‘민무신불립(民無信不立), 백성들의 신뢰가 없다면 국가의 존립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믿음이 전제돼 있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음식점에서 사람이 해주는 밥을 마음 놓고 먹을 수 있는 이유는 음식에 독이 들어있지 않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가 대한민국에서 살 수 있는 이유도 안전한 나라라는 ‘믿음’이 전제돼 있다. 믿음이 없다면 우리의 안위도, 우리의 미래도 불투명한 것이다. 한 나라의 원수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에 대한 신뢰가 바탕이 돼야 국민이 이 나라에서 안전하고 편안하게 살아갈 원동력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현재 대한민국 대통령의 비속어 논란, 영부인의 허위 경력과 논문 표절 논란, 정부의 무책임한 태도 논란 등은 대한민국을 혼란의 도가니로 만들고 있다. 진실을 밝히는 검찰 출신 대통령이기에 논란에 대한 적극적인 해명과 반박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 상식일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논란을 회피하고 묵인하는 태도를 보이는 듯하다. 혹시 ‘거짓말인가?’라는 합리적인 의심만 들 뿐이다. 대통령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믿고 싶지 않다. 그러나 대통령에 대한 신뢰가 국민의 복지와 나라의 안위와 연결된 것이라면 대통령은 현재 자신의 태도에 대해 진심으로 반성하고 신뢰를 회복하는 일, 혼란을 바로잡는 일에 힘써야 하지 않을까. 후보 시절 공약한 공정과 상식이 있는 나라를 우리는 조금이라도 기대할 수 없는 것인가. 김의태 수원가톨릭대 교회법 교수

[삶과 종교] 시작과 끝이 한결 같기를

미불유초선극유종(靡不有初鮮克有終). “시작이 있지 않은 사람은 없으나 능히 끝을 맺는 사람은 드물다”라는 뜻으로 ‘시경(詩經)’에 나오는 구절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시근종태인지상정(始勤終怠人之常情), “처음에는 근면하다가도 종국에 가선 게을러지는 것이 사람의 속성이다”라는 말도 나온다. 둘 다 처음의 모습을 끝까지 유지하기 힘들다는 의미다. 어느새 11월이다. 아직 12월 한 달이 남았다며 스스로 위로할지도 모르겠지만, 매년 이 맘 때면 연초에 세웠던 계획을 돌아보며 한숨 쉬는 사람이 많다. 올해는 살을 빼야지, 금연해야지, 어학공부를 해야지, 가족과 시간을 많이 보내야지 하는 새해 첫날의 굳은 결심이 어느새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남은 것이라곤 ‘또’ 아무것도 한 것 없이 시간만 덧없이 흘려보냈구나라는 자책뿐. 물론 처음을 유지하는 일이 쉬웠다면 시종일관이니 시종불투니 시종여일이니 하는, 처음과 끝을 한결같이 하라고 경계하는 수많은 사자성어들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내 나태해지고, 흐지부지해 버리는 것, ‘내일부터 열심히 하지’라고 미뤄 버리는 것은 글머리에서 소개한 대로 사람의 보편적인 속성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을 것인가. 나는 평생 작심삼일만 하다 끝나고 말 것이다. 속성을 극복해야 비로소 업그레이드되는 법이다. 자,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내 마음부터 단속해야 한다. 일찍이 공자는 “붙잡으면 간직할 수 있으나 놓치면 없어지고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들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사람은 ‘구방심(求放心)’, 놓쳐버린 마음을 붙잡도록 힘써야 한다는 것이 맹자의 당부다. 뻔한 주문인듯 하지만 이 길밖에 없다. 나를 타성에 젖게 하는 것, 편안함만 좇고 나태해지게 만드는 것, 방종하게 하는 것, 모두 내 마음이 원인이다. 그러니 마음이 흐트러지는 순간을 늘 주시하고 있다가, 잘못된 싹이 움트는 순간 이를 신속하게 뽑아내야 한다. 특히 조심할 것은 스스로 속이지 않는 일이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자신에게 변명을 하고, 자기합리화를 한다. 나중에 해도 돼, 이 정도면 괜찮아, 지금은 바쁘니까 하고 핑계를 댄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사실 나를 속인 것이다. 내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감추려고 자기변명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를 고치지 않는다면, 나는 점점 나의 목표를 낮추게 된다. 미루고 회피하게 된다. 처음 시작할 때 꿈꿨던 내 모습은 영원히 만날 수 없게 된다. 설령 마음의 중심을 잡고 유지하는 데 성공하더라도 주의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사람은 끝으로 갈수록 긴장의 끈을 놓게 된다. ‘행백리자반구십(行百里者半九十)’. 백리를 가는 사람은 구십리를 절반으로 여겨야 한다는 말처럼, 마치는 그 순간까지 마음을 다잡는 일을 멈춰서는 안 된다. 물론 말처럼 쉽지는 않다. 그래도 바로 지금, 올해 남은 50여일 동안 조금이라도 내 마음을 다잡고, 스스로 속이지 않기 위해 노력해 나간다면 매일매일 작은 차이를 더해갈 수 있을 것이다. 아직 늦지 않았다. 김준태 성균관대 유학동양학과 초빙교수

[삶과 종교] 피로한 당신께 명상을 권합니다

우리는 평소에 하루 세 번 양치질을 하고, 두 번 이상 세수를 하고, 한 번 이상 샤워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마음을 하루에 몇 번이나 닦고 있을까. 바쁜 현대인의 스트레스는 건강을 괴롭히는 가장 큰 골칫덩어리 중 하나다. 스트레스가 원인이 돼 진행되는 대표적인 질병은 무엇이 있을까. 탈모, 불임, 비만, 고혈압, 당뇨병, 심장병, 위궤양 등 그 종류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이 모든 질병이 꼭 스트레스 때문에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스트레스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은 의학계의 정설이다. 몸과 마음은 둘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 몸이 건강하면 마음이 안정되듯이 마음이 고요하면 몸도 편안해진다. 현대인은 남에게 보여주는 것에 많은 투자를 한다. 우리는 몸뚱이에 더 많은 집착을 한다. 정작 이 몸뚱이를 움직이는 것은 마음인데 평생 동안 자기 마음자리에 관심 한 번 주지 않고 살아가는 분들이 의외로 많다. 스트레스를 흔히 ‘소리 없는 살인자’라 표현한다. 스트레스(stress)는 라틴어 ‘스티릭투스(strictus), 스트링제레(stringere)’에서 유래된 단어다. 무언가를 ‘팽팽하게 잡아당긴다’는 의미다. 14세기에 이르러 ‘스트레스(stress)’라는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했고, 당시에는 ‘고뇌, 억압, 곤란, 역경’ 등을 가리키는 단어였다. 스트레스란 단어가 오늘날 의학용어로 쓰인 것은 캐나다 몬트리올대 내분비 학자 한스 휴고 브루노 셀리에 박사에 의해서다. 그는 쥐를 대상으로 스트레스에 대한 신체적·생리적 반응을 연구했다. 그 결과 1946년 ‘스트레스는 질병을 일으키는 중요한 인자’라고 발표했다. 이후 스트레스라는 말은 우리의 심리적 압박감을 설명하는 가장 적절한 의미로서 일상 용어가 됐다. 스트레스도 긍정적인 면이 있긴 하다. 인류 진화에 영향을 준 최고의 생존 능력이었다. 노출된 위험에서 자신의 몸을 지켜주는 강력한 생존 신호였던 것이다. 그러나 적절한 스트레스는 인생의 양념이 될 수 있지만 과도한 스트레스는 심신을 피폐하게 만든다. 마치 매운맛의 음식이 미각에 활력을 주지만 반복된 매운 음식은 위장을 망치듯이 말이다. 스트레스의 특징은 ‘긴장’ 상태다. 긴장은 인류 진화에서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능력이었다. 한때는 생존에 도움이 됐던 긴장 상태가 이제는 인류 건강을 위협하는 악영향이 돼버렸다. 스트레스의 압박으로 생겨난 과도하고 지속적인 긴장은 몸과 마음의 건강을 무너뜨리는 독이 된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자체적으로 긴장을 녹여낼 수 있는 기술이 있다. 긴장의 소멸이란 스트레스의 해소를 뜻한다. 이 기술은 딱히 어렵지 않다. 아니, 오히려 너무 쉬워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의심을 일으킬 정도다. 이 기술은 마음을 다스리는 기술이다. 흔히 ‘명상’이라고 부른다. 간단한 명상법을 소개하겠다. 자세를 편안하게 앉되 허리를 반듯하게 편다. 의자 위에 앉아도 되고, 침대 위에 앉아도 된다. 방바닥 위에서 책상다리를 해도 된다. 어떤 자세로 앉든 가장 중요한 것은 허리를 곧게 펴는 것이다. 손은 편안하게 두고, 입술은 닫고, 눈은 살짝 감는다. 어깨는 완전히 힘을 뺀다. 목과 허리는 반듯하되 온 몸의 힘이 쭉 빠지고 이완돼야 한다. 자세를 잡았으면 이제부터 편안하게 숨을 들이마시고 편안하게 숨을 내쉰다. 그저 편안하게 숨을 들이쉬고, 그저 편안하게 숨을 내쉰다. 절대 억지로 힘을 주거나 잘하려고 애쓰지 말라. 최대한 힘을 빼고 그저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숨을 들이쉬고 숨을 내쉰다. 숨을 들이쉬고 숨을 내쉬는 것, 이것이 명상의 핵심이다. 그냥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편안하게 ‘쉬어 가는 것’이다. 이론과 실제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단 5분이라도 좋으니 지금 앉아서 한 번 도전해 보기 바란다. 광우스님 화계사

[삶과 종교] 인생은 베팅이 아닌 배려입니다

현진건이 1921년 발표한 단편소설 ‘술 권하는 사회’에서 서열과 권위주의에 지친 주인공은 이렇게 한탄한다. “이런 사회에서 무슨 일을 한단 말이요. 하려는 놈이 어리석은 놈이야. 적이 정신이 바루 박힌 놈은 피를 토하고 죽을 수밖에 없지. 나도 전자에는 무엇을 좀 해보겠다고 애도 써보았어. 그것이 모다 수포야 내가 어리석은 놈이었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서열과 권위주의에 좌절하는 ‘술 권하는 사회’는 크게 변하지 않았고, 한 가지 ‘빚 권하는 사회’가 추가됐다. ‘빚투’, ‘영끌’이란 신조어의 등장과 2030세대의 주식, 코인, 부동산 열풍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특히 개인 미디어의 발달로 일확천금을 손에 쥔 이들의 ‘성공 신화’가 전단지처럼 뿌려져 많은 이들을 현혹했다. 가만히 있으면 벼락거지가 될 것 같은 불안감에 어쩌다 투자로 이득을 보게 돼 ‘초심자의 행운’에 취해 도박과 같은 욕망의 덫에 걸려 한순간에 삶의 위기에 처한 이들도 비일비재하다. ‘성공 신화’에서 말하는 ‘성공’은 물질적 차원에 국한되고 있으며,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계관의 일부를 넘어 전부가 돼 가고 있다. 예를 들어 안전한 거주와 아름다운 가족이 목적인 ‘집’은 얼마가 오르고 떨어지는가의 투자가치로 수단화되고 있다. 젊은이들의 삶의 목표는 건물주가 되거나 신속히 100억을 모아 영앤리치가 돼 경제적 자유를 이루는 것이 됐다. 곳곳에서 돈을 사랑하고 숭배하는 배금주의, 돈을 신앙하는 돈교가 성행하면서 무엇이 진정 소중한 것인지 가치관이 흔들리고 있는 때다. 누가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은 형제와 유산을 나누게 해달라는 사람에게 탐심을 물리치라고 하시며,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비유로 하신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한 부자가 밭에 소출이 풍성해 곡식을 쌓아 둘 곳이 없어 걱정하면서, “내 곳간을 헐어 더 크게 짓고, 모든 곡식과 물건을 쌓아 두겠다”고 결심하고는 자기 영혼에게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말한다. 이때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가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고 하신다. 부자는 여러 해 쓸 것들, ‘물질’에만 관심했고, 하나님은 오늘 밤 네 ‘영혼’, 즉 내면에 관심하신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그리스 아테네 시민들에게 “너 자신을 알라”고 외치면서 외적인 것이 아닌, 영혼과 내면에 관심하라고 역설했다. 이에 대해 철학자 푸코는 ‘자기 배려’, ‘자기 돌봄’을 말한다. 푸코는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권력과 지식, 물질에 얽매인 이들로 생각하면서, 외부적 요인들에 몰입해 자신의 가치를 파악한다고 지적한다. 그 결과 자기 소외와 체념, 좌절과 열등감에 휩싸이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자기 배려’인데, 주도적으로 자신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것이다. 밖으로만 향해 있던 시선을 자기 내면으로 돌리기 위한 방법들은 자기 몰입과 자기 통제, 지속적인 의식의 점검, 경청, 독서, 글쓰기, 명상, 산책, 친구와 대화하기 등을 구체적으로 제시할 수 있다. 성장 신화를 좇아 빚 권하는 사회에서 우리의 인생은 베팅이 아닌 배려가 필요하다. 여러 해 쓸 ‘물질’보다 오늘 내 ‘영혼’에 더 관심해야 한다. 이것을 머리가 아닌 몸으로 실천할 때 자기 혁신과 가치 있는 삶의 결실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양승준 세종대 대양휴머니티칼리지 초빙교수·교목

[삶과 종교] 한국인 최초 교황청 장관

지난 8월27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국인 유흥식 주교를 추기경으로 서임했다. 그는 전 세계 성직자들을 돕는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이 됐고,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는 투표권을 지닌 추기경이 됐다. 놀랍게도 200년 전 잔혹한 탄압 속에서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던 나라에서 전 세계 가톨릭 성직자들을 교육하고 관리하는 책임 추기경을 배출했다. 역사적인 순간이다. 로마 유학 시절 추기경을 처음 뵙게 됐다. 한국 식당에서 소속 신부들을 격려하며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 추기경의 얼굴을 기억한다. 그리고 추기경은 과거 7년간 이탈리아 가톨릭 단체에 몸담고 함께 부대끼며 사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그래서 특유의 친화력과 유창한 이탈리아어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추기경이 되기 전부터 자주 로마를 방문했고, 거침없이 고위 성직자들과의 만남을 주선했다. 그뿐 아니라 소속 신부들을 바티칸 외교관 혹은 교황청 직원으로 양성하기도 했다. 이런 추기경의 적극적인 태도 때문인지 몰라도 프란치스코 교황은 추기경을 눈여겨보고 있었을 것이다. “유흥식 추기경은 많은 덕을 지녔고 좋은 자질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그분을 임명한 근본적인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바로 신부들과 무척 가까운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교는 참으로 신부들과 가까운 사람이어야 합니다. 모두가 그분에 대해 신부들과 정말 가까운 주교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제가 그분을 교황청 장관으로 부르게 된 것입니다.”(KBS 다큐인사이드) 추기경(cardinal)이란 용어는 라틴어 ‘카르도(cardo)’에서 유래한다. 카르도는 문틀과 문짝을 연결하는 경첩을 의미한다. 교황과 전 세계를 연결하고 소통하게 하는 중간 역할자가 바로 추기경이다. 이러한 의미 때문에 교황은 한국인 주교를 추기경으로 임명해 소통의 역할을 담당하길 기대하고 있다. 바로 추기경의 독특한 이력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는 교황청 사회복지평의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북한에 인도적 활동을 계속해 나갔다. 네 차례 북한을 방문해 기아 극복을 위한 대안을 제시했고, 교황의 방북을 성사시키기 위한 노력도 현재 진행형이다. 교황은 북한의 초청을 받는다면 기꺼이 방북하겠다며 “방문의 목적은 언제나 형제애”라고 밝혔다. “북한에서 저를 초대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는 모든 민족의 형제입니다. 문화의 열쇠, 정치 상황의 열쇠, 종교의 열쇠로서 저는 모두의 형제입니다. 형제애의 씨를 뿌리고, 이웃과 가까워지는 씨, 미소의 씨를 뿌리고 손을 내밀어 주는 마음의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KBS 다큐인사이드) 사실 북한과 남한의 오랜 휴전은 사회주의 국가들과 민주주의 국가들의 오랜 대치 상황이기도 하다. 국제적으로도 중요한 이 분열의 장소에 프란치스코 교황을 초대한다는 것은 마치 자신을 평화의 도구로 써 달라는 메시지 같다. “주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 교황의 뜻처럼 한국인 유흥식 추기경도 기꺼이 평화의 도구가 돼주길 기도해 본다. 김의태 수원가톨릭대 교회법 교수

[삶과 종교] 내로남불을 극복하려면

1760년 11월, 영조는 탕평책을 시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 붕당 간의 갈등을 안타까워하며 “만약 좋아하면서도 나쁜 점을 살필 수 있고 미워하면서도 아름다운 면을 알 수 있다면(好而知其惡, 惡而知其美), 어찌 파당을 지어 자신들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배척하는 습속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영조의 이 말은 ‘대학’ 전(傳) 8장을 인용한 것인데, 여기에 보면 “사람은 친하고 사랑하는 데에서 편벽되며, 천하게 여기고 미워하는 데에서 편벽된다(人之其所親愛而辟焉 之其所賤惡而辟焉)”라는 대목도 나온다. 내가 어떤 사람을 사랑하거나 좋아하면 그 사람에게 관대해진다. 그 사람이 하는 일은 다 좋아 보일 뿐 아니라 단점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심지어 잘못을 저질러도 예뻐 보인다. 좋아하는 감정이 눈을 멀게 하고 마음을 치우치게 만듦으로써 올바른 판단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상대방을 싫어하고 미워하는 경우도 결과는 다르지 않다. 상대방을 못마땅해하는 감정이 마음을 뒤덮으면서 하나부터 열까지 그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장점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별것 아닌 일도 트집을 잡고 비난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집단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흔히 자기가 속해 있거나 지지하는 집단에 관대하다. 내부에 문제가 있어도 눈감고, 잘못이나 실책이 나와도 부득이한 일이었다며 옹호한다. 호위무사를 자처하며 맹목적인 지지를 보내는 사람도 있다. 반면 상대편에 대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엄격하다. 장점을 무시하고 좋은 일을 해도 외면한다. 어떻게든 잘못을 끄집어내어 비난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면 살펴주기는커녕 비아냥거린다. 같은 일을 해도 이쪽이 무조건 옳고 저쪽은 무조건 틀렸다는 도식을 내세우니, 자연히 양쪽의 갈등은 격화될 수밖에 없다. 상대방에게 깊은 원한을 품기도 한다. 어떻게 해야 이 같은 상황을 해소할 수 있을까. 사람인 이상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이 없을 수는 없다. 나와 잘 맞는 집단이 있고 나와 맞지 않는 집단이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를 완벽히 극복하고 객관적인 마음으로 모두를 대할 수 있는 사람은 ‘대학’을 지은 증자의 말처럼 세상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아마도 성인(聖人) 정도는 돼야 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 같은 보통 사람은 “좋아하면서도 나쁜 점을 살필 수 있고, 미워하면서도 아름다운 면을 아는” 수준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고쳐야 할 점을 발견하고 미워하는 사람에게서 본받아야 할 점을 찾고자 노력하다 보면, 조금씩 치우친 마음을 바로잡아 갈 수 있을 것이다. 또 이것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진정으로 위하는 길이기도 하다. 싫어하는 사람과도 서로를 존중하며 합의점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서로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듯한 극심한 대립이 벌어지는 요즘, 우리가 기억해야 할 대목이기도 하다. 김준태 성균관대 유학동양학과 초빙교수

[삶과 종교] 인생이란 참고 버티는 것

한 청년이 있었다. 젊은 시절부터 자꾸 일이 꼬이더니 몇 번의 실패를 맛봤다. 마음의 상처를 입고 건강도 크게 잃었다. 자포자기 외톨이가 돼 슬픔 속에 묻혀 버렸다. 도무지 견디기 힘들었던 마음의 상처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달았다. 몰래 준비한 다량의 수면제를 먹고 세상과 작별 인사를 선택한 것이다. 다행히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다. 의사가 말하기를 요새는 수면제 성분이 옛날과 달라 웬만큼 먹어도 죽기 힘들다고 했다. 그러니 이제는 다른 마음 품지 말라고 했다. 청년은 헛웃음이 나왔다. 옆에서 울고 있는 어머니를 보며 죄책감에 가슴이 찢어지는 느낌이었다. 어느 날 꿈을 꿨다. 꿈속에서 아주 건강하고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자신이 보였다. 참 행복한 모습이었다. 부스스 꿈에서 깨고 멍한 상태로 화장실에 갔다. 순간 자신의 초라한 몰골이 거울에 비쳤다. 그때 내면에서 큰 울림이 들려 왔다고 한다. ‘아! 이대로는 안 된다. 더 이상 이대로는 안 된다.’ 청년은 삶의 의지를 가다듬으며 새로운 결심을 했다. 일단 밖으로 나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체력이 바닥나고 건강이 크게 무너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운동은 걷기였다. 걷는 시간을 천천히 늘리면서 조금씩 체력을 되찾았다. 점점 운동량을 늘려 나갔다. 꾸준한 운동 덕분인지 눈에 띄게 건강이 좋아졌다. 청년은 일자리를 구했다. 불러주는 대로 여러 잡다한 일을 도맡았다. 너무나 힘들고 지쳤다. 때로는 감당하기 힘든 모욕도 당했다. 그때마다 청년은 생각했다. “이미 한 번 죽었다가 살아난 몸인데 이것도 못 참겠냐.” 청년은 마음을 독하게 먹고 묵묵히 일을 하며 견뎠다. 그러다 보니 주변에서 성실함을 인정받았다. 그렇게 쌓인 인맥 덕분에 탄탄한 직장도 얻고 좋은 인연을 만나 안정된 가정을 꾸리게 됐다. 청년은 지난 몇 년의 힘들었던 시절이 꿈결같이 느껴졌다. ‘그때 만약 내가 세상을 떠났다면 지금 이 행복을 느낄 수 있었을까?’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물론 지금도 역경이 닥칠 때가 있다. 어떤 때는 너무 답답해 다 때려치우고 엎어 버리고 싶은 감정도 솟구친다. 그때마다 이렇게 마음을 다스렸다. ‘난 이미 한 번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다. 그 힘든 시절도 이겼는데 지금 이 고통도 결국 지나갈 것이다.’ 인생은 결코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만의 숙제가 있다. 그 숙제를 풀어가는 것은 결국 자신의 몫이다. 누구에게도 쉬운 인생은 없다. 쉽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 사람들도 자신만의 숙제가 있다. 쉽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자신만의 고민이 있다. 원래 산다는 것은 아픈 거다. 인생을 온몸으로 부딪치며 사는데 아프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으랴. 아프니까 인생이다. 누가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이런 꼴 보면서까지 살아야 합니까?” 나는 대답했다. “살아야죠. 당연히 살아야죠. 참으면서 꿋꿋이 살아가는 것, 그것이 인생입니다.” 살자. 살다 보면 힘들 때도 있고 버티다 보면 좋은 날도 찾아오는 것. 그것이 바로 인생 아니겠는가. 광우스님 화계사

[삶과 종교] ‘호모 마스쿠스’ 시대의 공공성

대학에서는 코시국에 2년6개월 동안 비대면 수업, 혹은 대면·비대면 혼합의 하이브리드 수업을 하고 새학기에 전면 대면 수업으로 전환해 마스크를 착용하고 수업을 하고 있다. 마스크는 얼굴의 절반 이상을 가리게 돼 언어뿐만 아니라 눈빛과 표정으로 할 수 있는 소통이 제한되고 단절된다. 그래서일까. 작년 대학생들 설문조사 결과 시간과 돈, 효율과 안전의 측면을 고려해 비대면 수업이 좋다는 답변이 69%에 달했다고 한다. 갑작스러운 대면 수업 통보에 통학의 피로도와 대인관계의 두려움, 그리고 사적인 것에 익숙한 상황에서 공적인 것들을 마주해야 하는 낯섦에 힘들어하는 분위기다. ‘공적인(public)’이란 말은 ‘pubes(음모, 성숙)’라는 라틴어와 관련이 있다. ‘pubes’는 ‘puberty(사춘기)’의 어원이기도 한데, 공적인 삶은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돼가면서 자신을 돌보고, 타인을 돌볼 준비가 된 사람이다. 반면 ‘사적인(private)’이라는 단어가 ‘privare’라는 라틴어에서 왔으며, 거기서 ‘박탈당한(deprived)’이란 단어가 파생했다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현대인이 그토록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사생활이 고대에서는 뭔가를 박탈당한 형태로 여겼다는 것이다. 현대인은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과 만나고 익숙하고 편안한 장소에 가는 것을 선호한다. 똑같은 사람들, 편한 사람들만 계속 만나면서 동일한 경험과 태도와 생각을 주고받는 사생활의 영위처럼 사람을 멍청하게 만드는 일이 어디 있을까. 고대에는 완전히 사적인 사람을 그리스어로 ‘idiotes’-idiot(‘바보’의 어원)라고 하면서 어리석은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으로 여겼다고 하는데 호모 마스쿠스 시대에 사적인 것에만 몰두하는 어리석은 이들이 늘어가고 있다. 민주주의를 뜻하는 데모크라시(Democracy)는, 데모스(Demos·다수, 시민)와 크라티아(Kratia·지배, 통치)로 이뤄진 단어다. 고대 그리스의 시민들은 광장에 모여 공적인 일에 참여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와 사안을 대화와 타협을 통해 결정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을 시민의 역할과 명예로 여겼다. 이는 현대적 의미의 민주 정치와 같은 맥락이다. 코로나 이후 호모 마스쿠스에게 주어진 과제 중 하나는 공공성이다. 이를 위해 다양한 사람들, 낯선 사람들이 참여의 능력을 발휘해 서로 얼굴을 마주하며, 자유롭게 섞여 소통과 협업, 그리고 통합과 협치를 이뤄감이 필요하다. 삶과 종교에서도 공적인 것에 참여함으로써 성숙한 인간의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적극적인 참여로 대화와 소통, 결정과 실행이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타자를 인정하면서 다양한 잠재성이 아름답게 꽃피우고 열매로 영그는 것을 축하하며, 참다운 삶과 종교로 거듭나야 한다. 양승준 세종대 대양휴머니티칼리지 초빙교수·교목

[삶과 종교] 우 to the 영 to the 우

지난달 종영된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큰 화제를 몰고 왔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지닌 주인공 ‘우영우’가 변호사가 돼 여러 사건을 맡아 사회적인 문제들과 편견들을 그녀만의 방식으로 풀어가는 시청률 높았던 드라마다. 가장 특이한 점은 주인공 ‘우영우’다. IQ 164의 높은 지능을 가졌지만, 사회적 공감력이 다소 떨어지는 장애를 지녔다. 흥미롭게도 우리 대부분보다 우월한 동시에 우리 대부분보다 열등한 존재다. 즉, 이 드라마는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구별될 수는 있지만,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에 우열을 가리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느끼게 한다. 마치 세상에 큰 메시지를 던지는 듯한 아름다운 드라마다. 물론 드라마와 현실은 같을 수 없다. 사회 곳곳에 존재하는 차별은 여전히 많기 때문이다. 특별히 프란치스코 교황은 장애인들을 다른 사회구성원과 분리해 생각하는 것이 참으로 위험한 일이라고 경고한다. 그리고 이러한 차별이 마치 생존본능(?)을 지닌 것처럼 이야기한다. “차별은 선입견, 무관심, 그리고 개개인이 지닌 귀중한 가치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문화를 먹고 삽니다. 특히 사회적 장벽과 각 개인의 한계가 상호작용한 결과에 따라 장애를 일종의 질병처럼 생각하는 경향은 장애인의 삶과 비장애인의 삶을 갈라 놓고 장애인에게 낙인을 찍는 현실을 지속시킵니다.” 여전히 세상은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고, 사회가 규정해 놓은 정상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면 소외되기 쉬운 구조다. 여기서 사회 속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에 보이지 않는 장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시각장애인 모두가 전혀 보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여기는 편견, 청각장애인들 모두가 수어만을 사용할 거라는 착각, 그리고 장애인들은 모두 돌봄 시설에 있을 것 같은 생각 때문에 장애인들이 진정한 인격체로서 정상적인 사회구성원이 되기란 참으로 어려운 현실이다. 바로 장애인은 나와 다르고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라 여기는 높은 장벽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불편한 진실 중 하나로 2017년 보건복지부에서 실시한 장애인 실태조사에서 장애인들 중 88.1%가 후천적 장애를 갖게 됐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다시 말해 태어날 때부터 장애인이었던 사람보다 살다 보니 사고를 당하거나 질병 때문에 어느 날 장애인이 된 경우가 훨씬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50대 이상의 장애인이 76.9%라는 점에서 나이가 들수록 질병으로 인해 장애인이 될 가능성 또한 크다. 즉, 장애는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며 나이를 먹는 우리 모두의 일일 수 있다. 화제가 됐던 ‘우영우’ 인사법! ‘우 to the 영 to the 우!’라고 외치는 대사는 이 드라마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메시지라 여긴다. 장애인인 ‘우영우’와 비장애인 친구 ‘동그라미’가 어떠한 사회적 장벽도 없이, 남의 시선에 굴하지 않고 그들만의 고유한 연결고리로 대화한다. 그 연결고리는 서로 다르지만, 각 개인은 고유하고 소중하기에 서로를 필요로 하고 의지하는 사이가 된다. 동시에 친구의 아픔이 나의 아픔인 것처럼 고민해주는 사이가 된다. 우리 현실에서도 이렇게 아름다운 연결고리를 꿈꿀 수는 없는 것일까? 우 to the 영 to the 우! 김의태 수원가톨릭대 교회법 교수

[삶과 종교] 눈으로 보았다고 해서 진실인가?

‘여씨춘추(呂氏春秋)’라는 책에 나오는 일화다. 공자가 제자들과 천하를 떠돌다가 돈과 식량이 떨어져 고생한 적이 있다. 일주일이 넘도록 쌀 한 톨 입에 넣지 못했다고 한다. 다행히 제자 안회가 쌀을 구해와 밥을 지었는데, 식사를 기다리던 공자가 문득 부엌을 내다보니 안회가 솥을 열고 밥을 집어먹고 있었다. ‘다들 굶주리고 있는데 자기 배 먼저 채우려 들다니!’ 공자는 괘씸했지만 모른 척했다. 그리고 안회가 밥상을 차려오자 “조금 전 낮잠을 자다가 꿈에서 아버님을 뵈었다. 먼저 아버님께 제사를 올린 뒤에 식사하고 싶구나”라고 말했다. 그러자 안회는 놀라며 “안 됩니다. 아까 뜸이 잘 들었나 보려고 솥을 열었을 때 천장에 있던 그을음이 떨어졌습니다. 밥을 버리는 것이 상서롭지 못해 제가 걷어내어 먹었으니 제사에 쓸 수가 없습니다”라고 했다. 공자가 안회를 오해한 것이다. 공자는 탄식하며 말했다. “내가 그동안 눈으로 본 것은 믿어 왔지만 완전히 믿을 게 못 되는구나. 그동안 마음으로 생각한 것을 의지해 왔지만 완전하게 의지할 수는 없구나. 너희들은 직접 보고 들었다 해도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라.”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일화가 주는 교훈만큼은 공자가 평소 강조해 왔던 내용에 부합한다. 논어 ‘자한’편에 따르면 공자는 평생 네 가지를 절대로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제멋대로 억측하지 않았다는 ‘무의(毋意)’, 반드시 이래야 한다고 하지 않았다는 ‘무필(毋必)’,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지 않았다는 ‘무고(毋固)’,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내세우지 않았다는 ‘무아(毋我)’. 요컨대 자기 판단이나 생각만 옳다고 여기지 않고 편견에서 벗어나 항상 사안의 참 모습을 보고자 노력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는 어떤가. 내 생각이나 믿음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면, 잘못된 나의 인지를 바로잡기는커녕 확증편향으로써 부조화를 제거하려 드는 경우가 있다. 반대되는 증거가 쏟아져 나오더라도 부정하거나 외면한다. 이러한 태도는 스스로에 대한 거짓말로 이어지고, 그 거짓말을 진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게 만든다. 내 멋대로 억측하고 반드시 이럴 거라며 단언하게 만든다. 이 지경에 이르면 잘못 행동하면서도 잘못됐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무릇 같은 상황이라도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법이다. 하물며 내가 인식한 대로만 억측하고, 내가 생각한 대로만 단언한다면 어떻게 될까? 내 정신의 편향은 갈수록 심해져 진실과는 점점 더 멀어지고 말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도 불가능해진다. 따라서 우리는 제멋대로 억측하지 않은 공자의 자세를 본받아야 한다. 내가 본 것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 내 생각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것을 항상 전제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다. 공자 같은 성현도 자기가 본 것을 믿고 안회를 오해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공자의 가르침을 기억한다면 적어도 잘못된 길로 빠지진 않을 것이다. 김준태 성균관대 유학동양학과 초빙교수

[삶과 종교] 사랑과 용납이 순환되는 나라

어느 설교가는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세대를 빗대어 ‘칠면조의 세대’라고 논평했다. 칠면조들은 함께하던 무리 중에 한 마리가 등에 상처를 입게 되면 같이 지내던 다른 칠면조들이 모두 달려들어 상처 입은 칠면조를 쪼아 그 상처에서 피가 나고 쓰러질 때까지 공격하는 습성이 있다는 것이다. 칠면조들이 상처 입고 어려움 당한 칠면조를 더욱 공격해 쓰러뜨리는 모습이 마치 오늘의 이 세대의 ‘약육강식’ 모습과 동일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포스트모더니즘시대는 한 개인의 자기 느낌과 자아의 주관적인 경험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정신 사조를 가지기 때문에 공감하고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점점 잃어가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이런 사조가 굳어지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마음의 공간을 잃게 된다. 우리는 매일 아침 전쟁의 이야기를 원하지 않아도 듣고 보고 있다. 강한 나라가 작은 나라를 향해 힘의 논리로 전쟁을 일으키고 많은 사상자를 만들어 내는 모습이 마치 칠면조들이 상처 입은 약한 칠면조를 공격해 물어뜯는 짐승들과 다를 것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사람은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통해 인간애를 배우게 된다. 용납해주고 사랑해주는 모습 속에서 우리는 인간된 자신의 존재를 바르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예수님 앞에 발가벗겨진 한 여인이 사나운 남자들에 의해 매를 맞고 피를 흘리며 끌려왔다. 그녀는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혀 당시 유대교의 법으로 돌로 쳐 죽임을 당하게 된 여인이었다. 당시의 종교법으로는 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돌로 쳐 죽여야 했다. 그런데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가르친 예수님이 그녀를 돌로 쳐 죽이라고 하면 말과 행동이 다르다는 이유를 예수님까지 거짓 선생으로 몰아서 돌로 치려는 아주 나쁜 계략을 예수님은 아셨다. 피가 흐르는 돌을 들고 광분해 있는 그들에게 이성적인 정신을 차릴 시간을 예수님은 기다리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너희들 중에 죄가 없는 사람이 이 여인을 돌로 치라.” 그리고 그분은 침묵하며 광분한 사람들을 기다리셨다. 그러자 돌을 들고 흥분해 있던 사람들은 한 사람씩 돌을 내려놓고 그 자리를 떠났다. 광분을 용납하고 기다리심의 시간을 예수님이 그들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피를 흘리며 두려움에 떨며 고통하는 그 여인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여인아,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예수님의 이 가르침은 돌을 들고 정죄하던 자들도 용납하시고 죄를 지은 여인도 용납하시는 판결이었다. 멋지게 사람을 용납해주는 사회를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고 싶다. 사랑해주고 이해해주고 용납하는 문화와 풍토가 내 조국 대한민국에 아름다운 강이 되어 흘러가기를 기도하며 기대해 본다. 조상훈 만방샘 목장교회 목사

[삶과 종교] 비, 헹, 분, 섞!

2015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회칙 「찬미 받으소서」을 반포하며 전 세계의 생태적 회개를 촉구하였다. “우리 후손들, 지금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어떤 세상을 물려주고 싶습니까?” 기후 위기는 단지 한 종교지도자의 주장이 아닌 세계 각국의 과학자들이 분석한 「1.5도 특별 보고서」에서도 그 심각성이 드러난다. 지구 평균 기온이 산업화 이전 대비 1.5도 이상 상승하게 되면, 지구는 원래 기후로 되돌아갈 수 있는 탄력을 잃어버려 결국 지구의 모든 생태계가 파국에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세계적인 분석 기관인 ‘기후 행동 추적’(Climate Action Tracker)은 우리나라를 세계 4대 ‘기후 악당 국가’로 지적하였다. 즉 우리나라가 기후 변화에 무감각하고 나태한 국가라는 의미다. 교황은 기후 위기에 대한 원인 중 하나로 “버리는 문화(「찬미받으소서」 22항)”을 지적한다.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를 부추기는 자본주의 문화는 인간의 삶을 편리하고 유용하게 만들지만, 감당할 수 없는 쓰레기를 양산하고, 급기야 물건을 쉽게 쓰레기로 버리는 문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교황은 이러한 문화로 인해 물질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인간의 인권과 의식, 그리고 감성까지도 쉽게 버려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럼 우리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성경에 지혜를 청한다면, 바로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라’라는 말씀이지 않을까 싶다. 우리의 삶과 죽음은 자연 생태계의 순환 과정임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식물은 초식 동물에게, 초식 동물은 육식 동물의 먹이로, 육식 동물의 배설물은 다시 새로운 식물을 자라게 하는 양분으로 순환하는 것처럼 말이다. 유학 시절, 독일에서 믿을 수 없는 재활용 제도를 만나게 되었다. 일회용 제품을 줄이기 위해 용기에 보증금을 매겨 반납하는 일명 판트(Pfand)라는 보증금 환급 제도였다. 비닐뿐만 아니라 페트병과 캔, 유리로 만들어진 용기도 마트에 비치된 수거 기계에 넣으면 하나당 최대 50센트(대략 700원)를 돌려받는다. 독일은 이러한 자원 순환적 생산 방식을 채택하여 2019년 페트병의 재활용률이 거의 100%에 이른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자원순환’ 시스템을 채택하고 있다. 일명 폐기물 발생을 최대한 줄이고, 사용한 폐기물에 대해서는 재사용 또는 재생 이용하며, 불가피하게 남은 폐기물은 최소화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아직 미흡한 점들이 많다. 많은 이들이 쓰레기처리에 대해 아직도 ‘분리배출’이 아닌 ‘분리수거’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고, 재활용 가능한 배출물을 수집·선별하는 정부 혹은 지자체 지원 선별장이 부족하며, 아직도 투명 페트병과 다른 플라스틱과 혼합 배출하여 고품질 재활용품 생산이 제한적이다. 이러한 점들을 보완하고 개선한다면 분명 작지만 소중한 노력이 모여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것이라 믿는다. 이러한 선순환을 위한 캠페인, 일명 “비, 헹, 분, 석”을 몸소 실천해보는 것은 어떨까? 바로 “비우고, 헹구고, 분리하고, 섞지 않는 분리배출!” 김의태 수원가톨릭대 교수

[삶과 종교] 허공에 대한 명상

허공, 즉 하늘에 대해서 명상을 해보자. 우리에게 시간이 있다면 하늘을 바라보며 때로는 눈을 뜨고 때로는 눈을 감은 채로 명상을 해보자. 이렇게 눈을 감아도 하늘에 대한 명상이 가능함은 우리의 내면에도 하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늘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포함돼 있다. 하늘은 항상 현존하면서도 동시에 부재(不在)이다. 하늘은 어느 곳에나 존재하지만,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하늘은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존재한다. 하늘은 모든 것을 담고 있지만 동시에 그 무엇도 담고 있지 않다. 하늘은 죄인이든 성인이든 선이든 악이든 아름다움이든 추함이든 모든 것들을 받아들인다. 가왕이라 불리는 조용필의 노래인 ‘허공’ 가사에서도 “사랑했던 마음도 미워했던 마음도 허공 속에 묻어야만 될~”이라 했다. 하늘에는 아무런 차별이 없어서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도 없다. 검은 구름이 몰려오면 하늘은 그것을 위해 자리를 양보한다. 흰 구름이 몰려와도 마찬가지다. 하늘에는 어떠한 차별도, 어떠한 선택도 없다. 그저 받아들이기만 한다. 이것을 일러 역시 가수 김국환의 노래 제목처럼 타타타(tathata·如如)라고 부른다. 하늘은 이렇게 타타타의 상태로 존재한다. 그래서 타타타 상태의 하늘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다. 남자와 여자, 동물, 새, 나무, 돌, 별과 태양, 모든 것에게 무조건적이다. 누구나 가까이할 수 있다. 하늘은 모든 것을 보호해 주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돌보지 않는다. 구름은 오가지만 하늘은 늘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하늘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됐지만 아직도 이슬처럼 신선하다. 하늘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 우리는 사실 항상 내면의 하늘과 외부의 하늘 사이 문턱에 서 있다. 외부의 하늘이 무한하다면 내면의 하늘도 무한하다. 만일 우리가 외부의 하늘로 향한다면 그것은 기도가 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내면의 하늘로 향한다면 그것은 명상이 된다. 하지만 양자는 궁극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두 하늘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양자를 나누는 경계선은 항상 우리 자신이었다. 우리가 하늘처럼 ‘나’라는 에고와 ‘입장’이 사라진다면 그러한 경계선도 사라질 것이다. 그때는 안이 밖이고, 밖이 안이다. 우리의 존재 전체를 받아들이는 하늘은 그 존재를 감싸면서도 동시에 손끝 하나 대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하늘, 즉 반야라는 큰 지혜의 작용 방식이다. 최성규 철학박사·한국미술연구협회 이사장

[삶과 종교] 참 행복을 맛보며 살아가는 나라를 위하여

인권(人權)은 인간이 이 땅에 태어나면서 가져야 할 기본적인 보장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도 국민의 권리가 헌법의 기본권으로 존재한다. 각 사람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행복하기 위해서 어려움과 고통과 피곤함을 이겨내 간다. 자녀들의 행복을 위해 부모들은 땀을 흘리며 일을 하고 자녀들은 미래의 행복을 준비하기 위해 오늘의 삶을 최선을 다해 준비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라는 행복은 무엇인가? 행복(幸福)이란 단어의 사전적 정의는 ‘흐뭇하도록 만족해 부족이나 불만이 없음. 또는 그러한 상태’라고 한다. 사전적인 의미만 놓고 본다면 ‘행복’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무엇인가에 만족한다는 뜻이 된다. 원래 우리말에는 행복이라는 단어가 없었고 이 개념 자체가 서구에서 수입된 것이다. ‘행복’이라는 말은 19세기에 일본의 학자들이 서구의 개념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만들어낸 신조어로서 그 후 우리나라에 수입된 것이다. ‘행복’은 일본에서 번역된 언어로 만들어낼 때 가장 고심했던 단어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영어의 ‘happiness’라는 단어는 어원상 ‘하나님이 허락한 좋은 시간’으로 기독교적인 하나님의 개념에서 출발된 단어였던 것이다. 동아시아의 사고에는 없는 개념이었으므로 일본의 번역자들은 물질적 풍요와 관련이 있는 두 글자인 ‘다행 행’과 ‘복 복’자를 붙여서 행복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 결과, 행복은 다분히 샤머니즘적인 개념으로 이해가 된 단어가 됐다. 그래서 기독교 안에서조차 이 행복의 개념이 성경 속에서 나오지 않고 세상 사람들의 행복처럼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로 많은 사람들은 헛된 행복을 잡으려고 3가지 가짜 행복에 속아 살아가고 있다. 첫째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가져야 행복할 것이라는 잘못된 착각이다. 둘째는 더 많은 것을 소유해야 남들에게 인정받게 되고 그것이 행복이라는 착각이다. 그리고 셋째는 내가 가지고 있는 무엇인가가 이 땅에서 나를 보호해 줄 것이라는 착각이다. 우리는 착각된 행복을 잡으려 할수록 더욱 참 행복에서 멀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참 행복은 내 안으로 무엇을 끌어 모으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서 무엇인가가 밖으로 흘러 나가는 것으로 행복이라고 가르친다. 서로 나누고 베풀고 섬기는 삶 속에서 우리는 사람을 얻게 되고 그 사람들과 함께 보람을 경험하는 것이 참 행복이라고 가르친다. 경쟁하는 사회 속에서도 우리가 타인의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Post Modernism이라는 후기 현대 사회다. 모든 것들이 원칙이 없어져 가는 각 개인주의가 흘러 넘쳐가고 있다. 우리들이 날마다 접하는 새로운 소식들은 희망보다 절망적인 내용들로 가득하다. 전쟁의 고통과 경제의 압박감과 무서운 경쟁의 치열함 속에서 살아남는 것조차 힘들어 보인다. 그러나 그때가 바로 행복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의 때가 아닐까? 치열한 삶의 경쟁 속에 지쳐있는 내 옆에 있는 그 한 사람에게 따스한 손을 내밀어 줄 때 그 때가 바로 우리가 기대하는 행복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행복은 거창하게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격려하고 인정해 주는 것이다. 조상훈 만방샘 목장교회 목사

[삶과 종교] 우이령 길 개방을 바라며

북한산 국립공원에 자리한 우이령 길은 1968년 1월 김신조를 비롯한 무장간첩들이 우이령을 거쳐 청와대 습격을 시도한 이후 민간인의 출입이 금지됐다. 북한산내 우이령길은 양주시 장흥면 교현리와 서울 강북구 우이동을 최단 거리(6.8km)로 잇는 옛길로 오래전부터 우리 조상들이 자유롭게 오가던 곳이다. 그러나 1968년 이후 41년간 인적이 사실상 끊겼다. 이로 인해 서울과 경기를 잇는 주요 도로가 폐쇄되어 시민과 도민들의 불편이 가중되면서 지역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한 것이 사실이다. 또한 우이령 인근에 자리한 천년고찰 오봉산 석굴암은 출입 할 때마다 군부대의 허가를 받아야 했기에, 일상적인 신행 활동이 불가능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으로 2009년 7월부터 생태 탐방로 형식으로 부분 개방하여 사전예약제를 시행해 이전보다 출입하는데 어려움이 줄어들었지만 불편함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특히 차량이 교차하기 어려운 비좁은 비포장도로로 인해, 우이령을 이용하는 탐방의 민원은 여전하다. 부처님오신날이나 정기법회가 있는 날 연세가 지긋한 어르신들이나 몸이 불편한 분들이 탄 차량이 우이령 길을 운행할 때면,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탐방객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주민들도 1968년 이전에는 우이령을 이용해 서울 강북구를 오갔지만, 그 후로는 몇 십리를 돌아가야 했기에 시간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타격을 크게 입었다. 이러한 이유로 석굴암 신도들은 물론 경기도 양주시민과 서울 강북구민들도 우이령의 전면 개방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특히 윤석열 대통령 취임 이후 새 정부 출범을 계기로 청와대와 북악산이 전면 개방되는 상황에서 우이령만 여전히 부분적으로 출입을 통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여론이 거세지고 있다. 서울 강북구민들이 진행하고 있는 ‘우이령길 상시개방 범구민 서명운동’에는 6월 30일까지 4만 9487명이 참여했다. 석굴암과 양주시민들이 추진하는 서명에도 적지 않은 인원이 동참해 우이령길 전면(상시) 개방은 더이상 늦출 수 없는 현안이 되었다. 양주시는 11개 읍면동의 리통장 275명을 대상으로 서명부를 받고 있으며, 석굴암 역시 신도와 탐방객들에게 서명을 받고 있다. 윤석열대통령 후보당시 불필요한 규제완하 공약과 경기 도지사도 공약 한 바 있다. 유격장 이전과 우령길 북한산 내 유격장 이전을 특히 석굴암은 제25교구본사인 봉선사와 함께 각처와 요청하는 청원서와 서명을 대통령에게 제출할 계획이다. 국방 개혁의 일환으로 군부대 통폐합을 실시했지만, 우이령 인근에 유격장이 여전히 운영되고 있어 훈련이 노출되는 취약점을 보이고 있다. 우이령길 전면개방과 유격장 이전이 이뤄지면 시민이나 탐방객의 숫자는 더욱 늘어나고, 주민 생활의 편의도 증가할 것은 분명하다. 이를 계기로 서울 강북구와 양주시는 물론 경기도 북부 일대의 지역 경제도 한층 활성화될 것으로 기대된다. 북한산 내 21곳의 둘레길 가운데 완전히 개방하지 않은 유일한 곳이 바로 우이령길이다. 1968년 이후 국가안보를 위해 55년간 정신적, 물질적, 경제적 피해를 감수해온 우이령 길 인근의 주민은 물론 국민 모두를 위해서도 정부는 이제 전면 개방의 결단을 내려야 한다. 우이령길 전면 개방으로 국민들이 언제나 자유롭게 찾아봐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만끽하여 코로나 19와 경기침체로 인한 고통을 치유받는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염원한다. 자연환경의 소중함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자연과 함께 소중한 것이 사람의 삶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특히 새로 출범한 정부에서 주민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 우이령길 전면 개방의 용단을 내기를 기대한다. 오봉도일 스님 25교구 봉선사 부주지·양주 석굴암 주지

[삶과 종교] 이 전쟁을 멈춰 주세요

2022년 2월 교황 프란치스코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사건을 개탄하며 “이 무장 공격을 멈춰야 합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호소합니다. 이 학살을 멈춰 주세요!”라고 외쳤다.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이 전쟁은 안타깝게도 두 나라뿐만 아니라 국제사회를 넘어 우리나라에까지 그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먼저 우크라이나 곡물 수출이 봉쇄되었고, 특히 최빈국에 사는 수백만 명의 식량이 부족해지는 현상으로 이어졌다. 하물며 이러한 식량 불안정 사태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무기가 되어 버렸다. 세계 5대 수출국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밀 공급 감소는 유럽과 미국의 원자재 시장에서도 가격을 유례없는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이는 전 세계 물가에도 영향을 주어 대한민국의 물가 상승으로도 이어졌다. 이 전쟁은 결코 전쟁 중인 두 나라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의 문제가 되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대립은 1991년 소련의 붕괴 이후부터다. 러시아는 자국으로부터 분리된 국가들과의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냈고 이 중 우크라이나는 독립과 주권 보장 정책이 가장 많았고 유럽연합(EU)과 러시아 간의 중립 외교를 택하였으나, 2014년 우크라이나의 친러 성향의 대통령과 지지자들을 축출한 사건 이후 두 나라의 관계는 매우 적대적이었다. 마침 러시아 서쪽에 위치한 나라들이 하나둘씩 유럽연합과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에 참여하였고 우크라이나 역시 그러한 움직임을 보였다. 러시아는 잠재적으로 적대적인 국가들이 러시아를 둘러싸고 있다고 판단, 2021년부터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국경에 군사력을 증강했고, 2022년 결국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였다. 어떤 이들은 더 강력한 전쟁 무기를 보유하지 못한 우크라이나의 약한 군사력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강력한 무기로 인해 적의 도발을 억제할 수 있고, 그러한 견제로 인해 어느 정도 국제사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제와 긴장의 끈이 끊어지면 돌이킬 수 없는 전쟁 상황에 빠지기 쉽다. 무기의 목적이 오로지 방위력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교황은 과거 일본 방문 때도 핵무기의 사용과 보유를 전적으로 반대하며 진정으로 정의롭고 안전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전쟁 무기를 내려놓아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였다. 그리고 교황은 미사일로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북한의 행보와 북한 핵무기에 대한 우려로, 북한 방문 실현을 타진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해서도 교황은 “슬프게도 일부 강력한 통치자가 민족주의적 이익이라는 시대착오적인 생각에 사로잡혀있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주식인 밀을 전쟁 무기처럼 사용하지 마십시오!”라고 호소한다. 어떤 전쟁도 정의로울 수 없고 정당화될 수 없다. 국가 정치 지도자들이 말하는 정당한 명분이란 절대 정의로울 수 없으며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그리고 비참하게도 전쟁의 대가를 치르는 이들은 국가 정치 지도자들이 아니라 전쟁터에서의 군인들, 폭격을 당해 희생된 이들, 아이들, 여성들, 약하고 소외된 이들이다. 김의태 수원가톨릭대학교 교회법 교수

[삶과 종교] 명상으로 보는 성(性)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원인 인도 카주라호의 외벽에는 온갖 성애의 장면들로 장식되어 있다. 그러나 내부에는 성애의 조각은 물론 신성을 상징하는 그 어떤 대상조차 구성되어 있지 않다. 이는 바깥쪽에 표현된 욕망의 모습과 달리 안쪽은 내면의 신성을 찾고 확인하는 장소이며 명상을 위한 공간임을 말하고 있다. 프로이드의 관점에 의하면 표면에서는 모든 감각적인 것들이 성적인 상태에 있다고 하겠으나 명상이나 내면 수련의 체계에서는 이와 달리 자신의 중심에는 평화와 고요 그리고 초의식이 자리 잡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이 사원은 성을 완전히 이해하고 또한 상대에 대한 존경과 이해가 바탕 된 사랑의 한 표현이었을 때 우리는 수평 이동이 아니라 수직 상승을 이루고 자신과 상대의 신성을 대면할 수 있음을 카주라호의 외부 장식이 보여주고자 하는 메시지이다.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나와 타자를 향한 근본에너지의 흐름은 끊임없이 우리의 삶을 파괴하게 될 것이다. 성은 자연이 마련해준 문이다. 따라서 동물도 이를 가진다. 새도 이를 가지고, 식물도 이를 가지며 인간도 역시 이를 가진다. 그러나 인간은 이 자연 에너지에서 진화를 이루었고 신성을 알고 있다. 그래서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극단적인 기준으로 제시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성의 가치를 생물학적 욕구의 자연적 차원에만 머물러 있다면 인간은 동물 이상이 아니며 동물을 넘어설 수 없다. 언급하였듯이 동물에게도 그 문은 열려있기 때문이다. 이 자연의 에너지를 살펴서 새로운 문을 발견할 때에 비로소 인간다움이라는 격이 나타날 것이다. 그때까지는 우리의 중심이 동물의 중심과 다르지 않을 것이며 겉보기에만 인간이다. 우리 안의 동물이 기회가 생기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여기에 대한 깊은 성찰이 부재한 채로 이루어지는 사회적 장치들이 얼마나 소용없는 것이었는지는 이미 충분히 보아왔다. 전자발찌로 그를 구속하고 통제할 수는 있어도 문제에서 해방시켜 주지는 못한다. 또한 정치적으로도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정치가 특정 입장에 전도되어 이를 이용한다면 결과는 더욱 나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한 화가가 양치기 소년의 순수한 눈 속에서 신성을 발견하고 그 초상화를 그렸고, 이후 그는 인간의 모습을 한 악마를 그리기 위해서 모델을 찾아 다시 그 모습을 그렸으나 결국 동일인이었음을 알게 된 우화를 우리는 알고 있다. 석탄과 다이아몬드는 동일한 화학적 구조로 구성되어 있듯이 사람 마다의 삶에는 신과 악마라는 두 가지 측면이 있으며 두 개의 초상화를 그릴 수가 있다. 그러나 인간은 신성의 반영으로 삶을 지고한 낙처(樂處)로 만들 수 있으며, 그 삶을 향기롭고 조화 있는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선, 위빠사나, 명상, 기도 등으로 불리는 내면의 성찰을 통해서. 최성규 철학박사·한국미술연구협회 이사장

[삶과 종교] 홍익인간·티쿤올람 대한민국에 접목되길

전 세계의 국가 수를 UN의 회원국으로 보면 195개국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아직 승인되지 않은 미승인 국가까지 다 합치면 208개의 나라들이 주권, 영토, 국민을 가진 나라로 분류되고 있다. 우리나라 외교부의 자료에 따르면 228개의 나라가 지구촌 안에 존재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대륙과 인종적인 분류로 나라들을 살펴보면 그 나라들이 가지고 있는 비슷한 역사와 풍습을 가진 나라들을 보게 된다. 대한민국은 어느 나라와 비슷한 사상과 풍습과 국민성을 가지고 있을까? 에 대해 생각해 보면 필자는 이스라엘 이라는 나라를 제일 먼저 선택하고 싶다. 현대에 들어와 전쟁을 통해 나라를 건국한 년도가 똑 같고 주변의 강대국들에게 둘러싸인 지리적 상황과 역사도 비슷함이 많이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단군의 건국이념을 따라 나라의 출발이 ‘弘益人間(홍익인간)’으로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는 국가의 이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서로 다툼이 아니라 함께 어울려 이 땅에서의 국가의 존재 목적과 사람에 대한 바른 태도와 존중을 가르치신 귀한 뜻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 홍익인간과 같은 아주 중요한 사상이 있는데 그 것은 ‘티쿤올람(Tikkun Olam)’사상이다. ‘티쿤’은 ‘세상’을 말하고, ‘올람’은 ‘고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유대인들의 이해방식대로 말하자면 “한 개인이 하나님께 창조가 되어 그가 살아가야 하는 세상으로 들어가서 그 개인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세상을 사람들이 살기에 더 좋은 곳으로 만들어감으로 하나님의 인간 창조 목적을 완성해 가야 한다”는 뜻이 된다. 이 정신으로 유대인들은 1900년간 나라가 없이 흩어진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았지만 그들은 이 언약의 정신을 더욱 굳세게 지켜왔고 이스라엘 민족끼리는 서로 돕고 그리고 인류를 향해서는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기업들을 많이 세우게 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작은 나라일지라도 위대한 영향력을 전 세계에 끼치고 있는 것이다. 오늘 자신이 살고 있는 그 자리에서 자신이 맡은 일을 해 나갈 때 스스로 상대방과 세상을 이롭게 하는 삶의 태도가 지금 우리나라 대한민국에 절실히 필요한 태도가 아니겠는가! 새 정부가 열렸고, 지역을 이끌 수장도 임기 출발을 앞두고 있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의 건국이념도 모르는 듯 사람들을 갈라치기 하는 정치 지도자들의 낮은 수준의 언사를 볼 때면 대단히 큰 실망감과 불신감이 생겨나는 마음을 지울 수가 없다. 현실적 사실을 인정하고 자신들이 그 자리에 있는 이유와 목적을 분명히 알고 국민들을 돕고 섬기는 협력을 통하여 이 나라는 더 좋은 미래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대한민국은 이제 전 세계의 지도자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더 강력한 리더 국가가 될 것이다. ‘티쿤올람’을 가르치는 성경은 사람을 섬기며 낮아지는 겸손을 가진 자들을 하나님께서 높이신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나라가 유대인들과 같이 이 위대한 역설의 ‘홍익인간’ 사상과 ‘티쿤올람’ 사상을 정치와 경제와 사회 속에서 실천한다면 우리나라의 미래는 참으로 아름다울 것이다. 서로를 존중하고 자신의 의견을 겸손히 나누어 대화할 수 있다면 전 세계에 한류열풍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문화가 세상에 사람들이 살만한 아름다운 대안을 제시하는 나라가 되지 않겠는가? 전 세계를 향해 뻗어나가는 강력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 모든 지도자들은 자신의 이기적인 이익을 위함이 아닌 서로 나누며 서로 인정하고 함께 나아가는 그런 마음으로 나아가길 두 손 모아 기대해 본다. 조상훈 만방샘 목장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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