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면서] 죽음과 소녀, 두려움과 화해하는 법

매년 수많은 무대에서 셀 수 없이 많은 현악 사중주가 연주되지만 프란츠 슈베르트의 현악 사중주 14번 ‘죽음과 소녀’만큼 연주자가 무대 위에서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불태우는 작품은 흔치 않다. 깊은 병마와 절망의 끝에 서 있던 스물일곱의 슈베르트가 완성한 이 거작은 인간이 마주할 수 있는 가장 두려운 대상인 ‘죽음’ 앞에서의 고뇌를 압축해 놓은 듯한 작품이다. 이 작품의 제목은 슈베르트가 1817년 작곡한 가곡 ‘죽음과 소녀’에서 가져온 것이다. 독일 시인 마티아스 클라우디우스의 시를 바탕으로 한 이 노래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소녀와 그녀를 조용히 달래는 죽음의 대화를 담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죽음이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고요한 안식처럼 그려진다는 사실이다. 죽음과 소녀가 시대를 넘어 걸작으로 남아 있는 이유는 단순히 아름다운 선율 때문만은 아니다. 이 작품은 죽음과 시련 앞에서 흔들리고 저항하며 끝내 그것을 받아들이기까지의 인간 내면을 놀라울 만큼 생생하게 담아냈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동안 여러 번 이 작품을 연주했음에도 첫 음을 시작하는 순간은 늘 새롭다. 마치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거대한 에너지와 마주하는 느낌이다. 1악장의 처절한 저항, 2악장의 성찰, 3악장을 스치는 한 줄기 빛을 지나 음악은 마지막 4악장에서 운명을 껴안는 수용의 춤으로 나아간다. 필자는 자주 음악과 인생이 닮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죽음과 소녀가 그려내는 저항과 성찰, 수용의 여정은 우리가 삶에서 겪는 성장의 과정과 놀랍도록 닮았다. 살아가며 예기치 못한 시련과 상실, 실패를 마주했을 때 우리는 먼저 세상과 치열하게 싸운다. 분노하고 저항하며 버텨내는 이 시간은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삶이 뿜어내는 가장 뜨거운 에너지의 순간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러한 치열한 저항의 시간이 없다면 우리는 다음 단계로 나아갈 문을 열 수 없을지도 모른다. 무대 위에서 네 대의 악기가 서로의 숨결을 맞추듯 우리 또한 서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비로소 더 깊은 이해에 이르게 된다. 치열한 저항과 깊은 성찰을 지나온 뒤에야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수용은 평온함의 경지다. 그래서 수용은 단순한 체념이 아니라 삶을 더 넓은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는 또 다른 힘이다. 이렇듯 무대 위에서 치열하게 악기와 씨름하고 호흡하며 고민하는 시간들이 있기에 나에게 음악은 단순한 소리의 나열이 아니라 값어치 있는 삶 그 자체다. 삶이 그러하듯 음악 역시 우리를 끊임없이 성장시키고 변화시키는 여정이다. 그 안에는 인간과 삶에 대한 깊고도 아름다운 진실이 담겨 있다. 얼마 전 이 곡을 연주하던 그 무대에서 네 대의 현악기가 만들어낸 치열한 서사 속에서 필자는 다시 한번 느꼈다. 사람마다 마음 깊이 사랑하고 몰입할 수 있는 자신만의 예술과 테마가 하나쯤은 필요하다는 것을. 그것은 음악일 수도, 미술이나 문학일 수도, 혹은 묵묵히 가꾸는 작은 정원일 수도 있다. 그렇게 온 마음을 기울일 수 있는 대상이 있을 때 우리는 시련을 견디는 힘을 배우고 삶의 깊고 아름다운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결국 우리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죽음과 소녀’의 여정을 살아간다. 두려움과 마주하고, 고뇌하고, 성찰하며, 삶을 더 깊이 이해해 간다. 예술은 그 여정을 더욱 풍요롭고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소중한 동반자라고 믿는다.

[아침을 열면서] 후회하지 말라는 말의 함정

후회란 지워야 할 묵은 감정일 뿐일까. 우리는 종종 “후회하지 말라”는 말을 금과옥조처럼 받아들인다. 이미 지나간 일이라면 돌아보지 않는 것이 건강한 태도이며 그래야만 다음 단계로 전진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질문이 남는다. 과연 우리는 후회 없이도 진정한 반성에 이를 수 있는가. 후회라는 감정에는 두 가지 결이 있다. 선택 그 자체에 대한 후회와 그 선택의 과정에서 드러난 ‘태도’에 대한 후회다. 전자는 미련이 돼 현재를 흔들기도 하지만 후자를 지워 버리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를 성찰할 결정적인 기회를 잃게 된다. 필자에게도 뼈아픈 기억이 있다. 과거 아버지와 같은 직종에서 프로젝트를 수행하던 시절 아버지는 젊은 스태프들의 허드렛일까지 마다하지 않으며 묵묵히 현장을 지켰다. 아마 대표라는 이름으로 첫발을 내디딘 딸에게 버팀목이 돼주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당시의 나는 그 노고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정작 나는 누구보다 아버지에게 박했다. ‘일’이라는 명분 아래 모진 말을 서슴지 않았다. 정제되지 않은 감정을 업무의 엄격함으로 포장했고 더 나은 결과를 위한 필연적 과정이라 합리화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필요한 조언이 아니라 내가 감당하지 못한 감정의 부당한 전가였다. 밤샘 작업을 마친 딸을 위해 소리 없이 아침식사를 차려주시던 어머니의 뒷모습도 기억한다. 감사하다는 말이 겸연쩍어 퉁명스럽게 대하며 진심을 삼켰던 순간들. 당시엔 일상의 일부로 흘려보냈던 장면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선명한 자국을 남긴다. 이 기억들이 끝내 켜켜이 쌓인 후회로 남을 것임을 이제는 확신한다. 개인적인 후회는 사회적 질문으로 확장된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업무’라는 미명하에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는가. 관계의 이름만 바뀔 뿐 세대와 직책을 가로질러 비슷한 방식의 가해와 방관이 반복된다. 효율이 우선시되는 현장에서 ‘필요한 말’과 ‘감정이 실린 말’의 경계는 자주 무너진다. 날 선 말들은 때로 왜곡돼 개인이나 집단을 소외시키는 도구로 쓰이기도 한다. 잘못된 것을 단호하게 바로잡는 것과 상대에게 생채기를 내는 것은 결코 같을 수 없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이 둘을 동일 선상에 두며 자신의 태도를 정당화한다. 말하는 이는 이를 ‘업무적 판단’이라 믿지만 받아들이는 이에겐 거부할 수 없는 ‘위력’으로 남는다. 결과가 모든 과정을 면죄해 주는 문화 속에서 상처는 기록되지 않은 채 재생산된다. 이러한 구조적 문제는 개인의 성향을 넘어선다. 권한과 책임이 불균형한 조직, 결과 중심의 평가 방식 속에서 무례함은 종종 ‘열정’이나 ‘최선의 방법’으로 둔갑한다. 필자 역시 프로젝트를 향한 예민함이 최선의 태도라 믿으며 가장 가까운 이에게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줬던 건 아닐까. 그래서 우리에게는 후회가 필요하다. 후회는 무심코 통과해온 잘못된 구조와 태도를 멈춰 세우는 첫 번째 신호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불편하다는 이유로 후회를 멀리하지만 후회를 밀어내는 순간 반성의 동력도 함께 소멸한다. 후회는 과거에 침잠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때의 나를 객관적으로 응시하게 하는 계기다. 그 고통스러운 직면이 있어야만 우리는 비로소 말할 수 있다. 미안했다고, 이제는 단호함과 모짐을 혼동하지 않겠노라고 말이다. 후회는 줄여야 할 감정이 아니라 더 늦기 전에 마주해야 할 용기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후회를 피하는 기술이 아닌 후회할 일을 줄여 나가는 정직한 선택이다. 오늘 하루, 아직 전하지 못한 진심이 있다면 꺼내 보길 권한다. 우리는 정말 후회 없이도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가. 후회해야 할 타이밍을 지나치고 있는 건 아닌지 물어야 할 때다.

[아침을 열면서] 전력망 확충, 상생으로 풀자

최근 중동지역의 긴장 고조는 우리에게 분명한 경고를 보내고 있다.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은 대한민국에서 전력 수급의 안정은 더 이상 산업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안보의 문제다. 특히 반도체와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등 전력 의존도가 높은 산업이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지금 안정적인 전력망 구축은 미룰 수 없는 과제다. 국회 논의에서도 2028년까지 약 73조원 규모의 전력망 투자와 재원 마련의 필요성에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그러나 정작 현장에서는 또 다른 벽에 부딪히고 있다. 송전탑과 송전선로 설치를 둘러싼 주민 반발과 입지 갈등으로 주요 사업이 지연되고 있기 때문이다. 동해안~신가평 송전선로 같은 핵심 사업조차 속도를 내지 못하는 현실은 전력망 확충이 단순한 기술이나 예산의 문제가 아님을 보여준다. 문제의 핵심은 분명하다. 전력망은 국가 전체를 위한 공공 인프라이지만 그 부담은 특정 지역과 주민에게 집중된다. 송전탑이 들어서는 마을과 토지 소유주는 재산권 제약과 생활환경 변화, 심리적 부담까지 감수해야 한다. 반면 보상은 일회성에 그치거나 체감도가 낮다. “왜 우리 지역, 내 토지만 감당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충분한 답을 주지 못한다면 갈등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이제는 접근 방식을 바꿔야 한다. ‘희생에 대한 보상’에서 ‘이익의 공유’로 정책의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갈등을 억누르는 방식이 아니라 참여를 통해 이해를 함께 만드는 구조가 필요하다. 그 대안으로 ‘전력사업 기여참여 특례 제도’를 제안한다. 현재 제도는 345kV급 이상 송전선로에 대해서만 일정한 특례를 적용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 이하 송전선로가 지나는 선하지 부지와 송전탑 설치로 재산권에 영향을 받는 토지 역시 동일한 부담을 지고 있다. 이들 토지주에게도 전력사업 참여 시 ‘계통 접속 우선권’ 등 특례를 부여해야 한다. 해당 토지주나 인근 주민이 태양광 및 에너지저장장치(ESS) 등 분산형 전원 사업에 참여할 경우 인허가 절차를 완화하고 전력 계통 접속을 우선적으로 허용하는 것이다. 토지주를 단순한 보상 대상이 아닌 에너지 생산의 주체로 인정할 때 갈등은 줄어들고 수용성은 높아질 수 있다. ‘주민 참여형 수익 공유 모델’도 함께 검토해야 한다. 전력망 사업에 지역주민이 일정 지분으로 참여하거나 수익의 일부를 지역에 환원하는 방식이다. 해외에서도 이러한 방식이 갈등을 줄이고 사업 추진력을 높이는 데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갈등으로 인한 지연과 사회적 비용을 고려하면 선제적 인센티브는 오히려 효율적인 선택이다. 사업이 늦어질수록 전력 수급의 불안은 커지고 산업 경쟁력은 약화된다. 그로 인한 손실은 결국 더 큰 비용으로 되돌아온다. 전력망은 국가 경제의 혈관이다. 그러나 그 혈관이 지나가는 자리에는 사람들의 삶이 있다. 그 삶을 배제한 채 추진하는 정책은 지속될 수 없다. 전력망 갈등은 단순한 민원이 아니라 정책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방향을 바꿔야 한다. 희생이 아니라 참여로, 배제가 아니라 공유로 풀어야 한다. 토지주와 지역주민을 주체로 세울 때 해법은 보인다. 이재명 정부의 에너지 정책도 그 지점에 답이 있다. 전력망 확충을 ‘희생’이 아닌 ‘상생’으로 풀어내는 것, 그것이 지금 필요한 선택이다.

[아침을 열면서] ‘리더의 춤’ 포디움 위 비상하는 순간

24일 예술의전당 교향악축제 폐막 연주회의 대미를 장식한 작품 로마의 소나무. 이 작품은 이탈리아 작곡가 오토리노 레스피기가 1924년 작곡한 교향시(톤 포엠)로 로마의 여러 장소에 서 있는 소나무를 통해 시간·공간·역사의 이미지를 음악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아이들이 뛰노는 밝고 경쾌한 장면의 보르게세 별장의 소나무, 고대 기독교의 신비와 죽음을 묘사한 어둡고 장중한 카타콤베의 소나무, 그리고 서정적이고 몽환적인 밤의 자니콜로 언덕의 소나무에 이어 네 번째 아피아 가도의 소나무 장면은 점층적으로 쌓이는 음향과 강력한 금관으로 멀리서 점점 다가오는 로마 군대의 행진을 묘사하는 클라이맥스다. 어제 연주의 이 장면은 내가 지금까지 경험한 어떤 연주의 절정보다도 규모가 컸다. 아니, ‘크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청중석에서 음악을 듣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거대한 영화 속 한 장면이 눈앞으로 밀려오는 듯한-무언가가 나를 향해 덮쳐 오는 듯한 시각적 인상마저 느껴졌다. 아피아 가도를 행진하는 고대 군대의 발소리가 거대한 해일처럼 객석을 덮치던 순간 지휘자는 마치 중력을 거부하듯 포디움 위에서 훌쩍 뛰어올랐다. 두 발이 허공에 머문 그 찰나, 100여명의 단원과 2천여명의 청중은 동시에 어떤 흐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것은 더 이상 ‘지휘’가 아니라 ‘비상(飛上)’-완전한 몰입이었다. 그 역동적인 뒷모습을 보며 나는 수십년 전 뉴욕의 겨울, 카네기홀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젊은 시절 나는 ‘뉴욕 스트링 세미나’에 참여해 전설적인 음악가 알렉산더 슈나이더를 만났다. 크리스마스이브 자정, 카네기홀 무대에서 연주하기 위해 각지에서 모인 젊은 음악가들은 숙식을 함께하며 종일 오케스트라 연습에 몰두했다. 오전부터 이어지는 강행군에 때로는 지쳐가던 우리와는 달리 여든을 바라보던 슈나이더는 전혀 달랐다. 굵은 테의 도수 높은 안경 너머 번뜩이던 그의 시선은 단 한순간도 우리를 놓아 주지 않았다. 활이 무심히 오르내릴까봐 스스로의 팔을 치며 끊임없이 “힘있게, 더 힘있게”를 외치던 그의 에너지. 우리는 그 기세에 빨려 들어가듯 연습에 임했고 이틀, 사흘째가 지나도 그는 전혀 지치지 않았다. 그리고 카네기홀의 자정, 그는 마치 소년처럼 포디움을 휘저으며 ‘춤’을 췄다. 그 장면은 지금도 내 안에 또렷이 살아있다. 슈나이더의 압도적인 몰입은 우리 모두를 음악 안으로 끌어당겼다. 악기는 어느새 신체의 일부가 됐고 활은 살아 있는 호흡이 됐다. 자정의 카네기홀을 가득 채운 그 전율-연주자와 관객이 혼연일체가 된 그 순간 리더의 ‘춤’이 오케스트라 전체를 단숨에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오늘날 우리는 효율과 데이터, 그리고 인공지능(AI)이 만들어내는 매끈한 결과물에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기계는 결코 포디움 위에서 발을 떼지 못한다. 계산을 넘어선 열정, 완전히 빠져드는 몰입, 그리고 타인의 영혼을 흔드는 ‘리더의 춤’은 오직 인간만이 지닐 수 있는 영역이 아닐까. 어제 본 지휘자의 도약은 나에게 묻는 듯하다. “당신에게 지금 그런 에너지가 흐르고 있는가. 당신은 당신의 삶이라는 무대 위에서 두 발이 땅을 떠날 만큼 정말 치열하게 춤추고 있는가.”

[아침을 열면서] 건강정보 홍수 시대

외래를 보다 보면 환자들이 유튜브에서 봤다며 특정 운동이나 치료법에 대해 묻곤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영상은 그 운동법이 디스크에 좋다고 하고 또 다른 영상에서는 절대 하면 안 된다고 한다. 같은 질환인데도 설명이 제각각이면 환자 입장에서는 헷갈릴 수밖에 없다. 예전에는 정보를 몰라 치료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많았다. 요즘은 조금 다르다. ‘이것저것 찾아보다가’ 또는 ‘불확실한 의학 정보’ 때문에 오히려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늘었다. 나름대로는 관심을 갖고 찾아본 건데 그 방향이 틀어진 경우다. 예전에는 구글이나 네이버 같은 검색엔진만으로 정보를 찾아봤다면 유튜브를 거쳐 이제 챗GPT나 제미나이 같은 인공지능(AI) 검색이 일상이 돼 가고 있다. 바야흐로 정보의 홍수 시대를 맞이했다. 건강정보가 많아진 건 분명 좋은 일이다. 검색 몇 번이면 웬만한 내용은 다 나온다. 문제는 그 정보들이 같은 기준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점이다. 어떤 건 전문가의 설명이고, 어떤 건 개인적 경험이고, 어떤 건 조회 수를 올리기 위한 자극적인 내용이다. 그런데 화면에서는 다 비슷하게 보인다. 출처나 맥락은 잘 드러나지 않고 결론만 빠르게 소비된다. 짧은 영상일수록 더 단순하게 말한다. ‘이걸 하면 좋아진다’, ‘이건 무조건 피해야 한다’ 식으로 단 몇 초의 동영상에 책임지지 못할 의학정보가 넘쳐난다. 하지만 실제 의료는 그렇게 단정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보자. 허리 통증이 있으면 누구나 추간판탈출증을 걱정하지만 실제 추간판탈출증이 그 통증의 원인인 경우는 10% 미만일 뿐이다. 원인이 다르면 치료 방법도 달라지므로 누군가에게 맞는 방법이 다른 사람에게는 오히려 해가 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정보일수록 더 확신에 차 보인다는 점이다. 단정적으로 말할수록 이해하기 쉽고 그래서 더 많이, 더 빨리 퍼진다. 하지만 의료는 그렇게 잘라 말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하나의 증상에 대해서도 진단을 위해 감별해야 할 질환이 많고 진단에 필요한 검사도 다양한데 그 부분이 빠진 채 자극적인 정보만 전달된다. 이런 흐름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환경의 변화에 가깝다. 건강정보를 접하는 방식 자체가 바뀌었다. 예전에는 필요할 때 찾아보는 수준이었다면 지금은 가만히 있어도 정보가 계속 들어온다. 어떤 정보에 한번 관심을 가지면 AI 알고리즘에 의해 비슷한 내용이 반복해 추천된다. 보다 보면 그게 일반적인 기준처럼 느껴진다. 다양한 정보를 고르게 접하기보다 비슷한 내용만 반복해 보게 되는 구조이다 보니 다른 설명은 자연스럽게 뒤로 밀린다. 정보의 선택지가 늘어난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한쪽으로 쏠리기 쉬운 환경이다. 그 사이에서 정확한 판단은 더 어려워진다. 건강정보를 아예 보지 말라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너무 쉽게 단정하는 말은 한번쯤 걸러 볼 필요가 있다. 특히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된다고 하는 내용은 조심해야 한다. ‘진짜 정보’가 아니라 ‘말하고자 하는 결론만 남은 이야기’일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정보는 계속 많아질 것이다. 그걸 다 따라가려 하기보다 내 상태에 맞는 선택을 하는 게 더 중요하다. 이를 위해 스스로 확신하기보다 전문의의 진찰과 설명을 통해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남의 경험이 아니라 지금의 나에게 맞는 판단. 결국 그 기준을 세우는 일이 더 중요해진 시기다.

[아침을 열면서] 타인의 성적표를 덮다

모임에서 돌아오는 길, 차창에 비친 얼굴이 유독 생경하고 초라해 보일 때가 있다. 방금까지 마주했던 이들의 눈부신 성취가 잔상처럼 남아서다. 누군가는 시대의 흐름을 정확히 읽어 부를 쌓고, 누군가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승전보를 전한다. 그들의 단단한 확신 앞에서 나의 고민은 안일한 게으름 같았고 내가 붙들고 있는 가치들은 대책 없는 낭만처럼 읽혔다. 세상은 늘 우리를 수직의 계단 위에 세운다. 연봉과 직함, 평수라는 자로 점수를 매기고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치열함과 야망이 부족하다는 진단을 내린다. 나 역시 그 익숙한 잣대 앞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타인의 ‘하이라이트 장면’과 나의 볼품없는 ‘비하인드 스토리’를 비교하며 내가 가진 것들을 애써 부정하기도 했다. 남들이 숫자를 늘리며 기민하게 앞서갈 때 나는 왜 이토록 제자리걸음일까 자책했다. 어쩌면 나는 사람의 마음이나 사물의 안쪽을 기웃거리느라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대단한 철학이라기보다 어쩌면 빠르게 달리지 못하는 기질적인 서툶에 가까웠다. 보이지 않는 뿌리를 내리는 일은 늘 더디고 그 깊이를 가늠하는 것조차 내게는 매번 벅찬 숙제였다. 이럴 때면 평소 아껴 읽던 허수경 시인의 문장을 떠올려 본다. “영원히 역에 서 있을 것만 같은 나날이었으나 언제나 기차는 왔고 나는 역을 떠났다”던 그 서늘하고도 단단한 고백 말이다. 기차는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아도 결국 플랫폼에 몸을 들이밀고 서툴게 서성이던 이들을 태워 다음 역으로 데려다준다. 세상이 내미는 성적표는 분명 선명한 숫자로 기록되지만 내가 보낸 이 지루하고 고요한 기다림의 시간들도 결국 나를 어딘가로 실어다줄 ‘나만의 기차’를 부르는 필연적인 과정이라 믿고 싶어졌다. 물론 혼란은 여전히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나만의 심지를 굳힌다는 것은 세상의 소음이 완전히 사라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 소음 속에서도 서툴게나마 내 발걸음을 옮기는 일임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완벽한 확신은 없지만 ‘모르는 채로도 한 걸음을 떼는 용기’가 내게는 가장 절실한 생존 전략이다. 타인의 속도가 눈을 어지럽힐 때 잠시 숨을 고르고 신발 밑창에 닿는 지면의 감촉을 느껴본다. 혼란을 인정한다는 것은 거창한 포기가 아니라 내 삶의 운전대를 다시금 내 손으로 쥐어보는 조용한 결단이다. 모임의 소란스러운 성공담 뒤에 찾아온 이 적막을 이제 더 이상 초라함이라 부르지 않기로 했다. 그것은 세상의 소음이 멎은 뒤에야 비로소 들려오는, 가장 정직한 내 안의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점수판은 잠시 덮어 두고 시인의 언어처럼 담담하게 그러나 믿음으로 그 시간을 받아들이고 나답게 출발하려 한다. 오늘 밤, 스스로에게 묻는다. “오늘 나는 얼마나 나답게 흔들렸는가. 그리고 내 마음의 온도는 여전히 누군가에게 다정한가.” 세상의 채점표 대신 나만의 투박한 문장으로 삶을 채워 가는 일. 그 서툰 시작이 비로소 나의 진짜 연대기가 될 것이다.

[아침을 열면서] 자영업자의 한숨, 사람 쓰기 겁난다

골목상권의 공기가 예전 같지 않다. 불은 켜져 있지만 마음은 점점 어두워진다. 요즘 자영업자들은 같은 말을 반복한다. “장사가 힘든 게 아니라 사람 쓰기가 무섭다.” 이 짧은 한마디에는 단순한 어려움을 넘어 오랫동안 버텨온 이들이 처음 마주한 깊은 두려움이 담겨 있다. 한때 직원 채용은 희망이었다. 손님이 늘고 가게가 자리를 잡아간다는 신호였기 때문이다. 사람을 구하는 일은 곧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사람을 뽑는 순간부터 걱정이 앞서고 일하는 시간보다 그 이후가 더 크게 다가온다. 무단결근, 근로 태만, 갑작스러운 퇴사. 그것만으로도 버거운데 더욱 힘든 것은 그 다음이다. 규정대로 조치를 취해도 분쟁으로 이어지고 자영업자들은 행정기관을 오가며 시간과 비용을 감당해야 한다. 정작 장사에 집중해야 할 시간에 생업은 흔들리고 의지마저 꺾인다. 작은 가게를 지키는 이들에게 이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사람들은 말한다. “법대로 하면 된다”고. 그러나 현장의 자영업자들에게 법은 여전히 멀고 복잡하다. 하루를 버티기 힘든데 절차를 이해하고 대응하는 일은 또 다른 부담이다. 결국 많은 이들이 “차라리 혼자 하겠다”, “가족끼리 버티겠다”고 말한다. 이는 포기가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의 선택이다. 그러나 그 선택이 쌓일수록 일자리는 줄고 골목은 조용해진다. 자영업자의 한숨은 지역경제의 침체로 이어진다. 이 같은 문제는 더 이상 개인의 어려움에 머물지 않는다. 지난달 19일 이재명 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지방경제 침체가 가속화되면 수도권과 지방의 불균형이 확대되고 경제 전체의 효율성과 안정성도 떨어진다”며 ‘지방 문제’가 곧 ‘대한민국 전체의 문제’임을 분명히 했다. 지역경제의 뿌리가 흔들리면 국가경제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 뿌리는 어디인가. 바로 골목의 자영업자들이다. 지역 상권이 살아야 지방이 살고 지방이 살아야 국가가 균형을 찾는다. 그러나 지금 자영업자들은 장사의 어려움을 넘어 ‘고용의 두려움’ 앞에서 멈춰 서 있다. 사람을 쓰는 순간 시작되는 불안이다. 그동안 정부와 지자체는 창업·운전·설비 자금 등 다양한 지원 정책을 펴고 있다. 그럼에도 지금 현장에서는 더 절실한 사안이 따로 있다. 이미 가게를 운영하며 버티고 있는 자영업자들이 ‘사람 걱정 없이’ 장사할 수 있는 환경이다. 이 기본이 무너지면 어떤 지원도 체감되기 어렵다. 제도의 균형을 다시 세워야 한다. 근로자의 권리는 보호돼야 한다. 동시에 성실하게 가게를 운영하는 자영업자 역시 보호받아야 한다. ‘근로계약 위반’이나 ‘무단 결근’에 대해서는 신속하고 명확한 판단이 이뤄져야 하고 법률 지원 역시 실제 해결로 이어져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후 대응이 아니라 사전 예방이다. 자영업자들이 안심하고 사람을 뽑을 수 있도록 ‘근로자 안심 채용 보험’ 같은 구조적 제도나 장치가 필요하다. 고용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사회가 함께 나눌 때 비로소 자영업자는 다시 사람을 믿고 채용할 수 있다. 자영업자들이 바라는 것은 단순하다. 마음 놓고 사람을 쓰고 함께 일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정이다. 그 기반이 있어야 가게와 일자리가 유지되고 골목의 온기도 되살아난다. 지방경제를 살리는 길은 멀지 않다. 자영업자가 살아야 골목과 지역이 살아나고 그 힘은 국가경제로 이어진다. 이제는 응답해야 할 때다.

[아침을 열면서] 완벽한 음표보다 영혼 담긴 울림을

오늘날 음악계는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한 영재의 시대를 지나고 있다. 세계 유수의 콩쿠르에서 들려오는 젊은 연주자들의 승전보는 이제 일상이 됐고 그들의 기술적 완성도는 완벽에 가깝다. 그러나 교육 현장에서 수많은 제자를 마주하며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안타까운 갈증을 느끼는 것은 왜일까. 모든 음을 정확하게 짚어내는 완벽한 연주들 사이에서 정작 그 연주자만이 낼 수 있는 단 하나의 목소리를 찾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러셀 셔먼은 ‘피아노 이야기’에서 음악적 기술을 단순한 물리적 훈련이 아닌 정신적 탐구로 봤다. 건반을 누르는 동작 하나에서도 중력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중력과 함께 춤춰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기술은 악기를 길들이는 수단이 아닌 악기라는 매개체를 통해 영혼의 울림을 전달하는 통로여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교육은 종종 이 순서를 뒤바꾼다. 더 빠르고 자극적인 기술에 집중하느라 정작 예술가적 영혼을 돌볼 여력이 없다. 손가락의 속도가 마음의 속도를 앞지를 때 음악은 생명력을 잃고 화려한 소음으로 전락하고 만다. 셔먼은 진정한 음악적 권위는 소리를 지르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소리 사이의 침묵을 지배하는 힘에서 나온다고 했다. 기교라는 외피보다 그 안에 담긴 연주자의 인격과 고뇌가 더 큰 울림을 준다는 예술의 영원한 진리다. 과장되지 않은 진실함, 음악의 본질이 가진 정공법이 여전히 세계적인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진정한 예술가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기술 너머의 세 가지 눈이 필요하다. 첫째, 악보 이면을 읽는 눈이다. 작곡가가 악보 안에 심어 놓은 의도를 포착하고 그 시대의 공기와 내면 서사를 자신의 음악적 언어로 일깨우는 과정이 생략된 연주는 기계적 재현에 머물 뿐이다. 악보상의 셈여림 기호는 단순한 음량이 아니라 정서적 기상도의 변화이며 음표 하나하나에 담긴 망설임조차 해석으로 끌어안는 집요함이 필요하다. 둘째, 자신을 객관화하는 귀다. 남의 연주를 흉내 내는 유혹에서 벗어나 지금 내가 내는 소리가 나의 내면과 일치하는지 끊임없이 질문하는 성찰이 요구된다. 셔먼은 자신의 연주를 듣는 것은 거울 앞에 서는 것보다 훨씬 고통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그 고통을 통과해 자신을 속이지 않는 소리를 찾아낼 때 비로소 타인의 마음을 두드릴 수 있는 진실함이 태어난다. 셋째, 음악 밖의 세상을 바라보는 상상력이다. 훌륭한 연주자는 악기만 알아서는 안 된다. 문학적 상상력이 결여된 선율은 건조한 물리적 진동에 머물 뿐이다. 시와 회화, 철학적 사유가 음악과 만날 때 소리는 비로소 입체적인 생명력을 얻는다. 예술가는 가르쳐서 만들어지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 줘야 하는 존재다. 교육자의 역할은 근육을 훈련시키는 조련사가 아니라 예술적 정체성을 찾을 수 있도록 인내하며 길을 터 주는 조력자여야 한다. 씨앗이 꽃을 피우기 위해 어둠 속의 시간이 필요하듯 예술가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기술적 단련만큼이나 깊은 침묵과 사색의 시간이 절실하다. 무한 경쟁의 시대. 일등 영재를 골라내는 효율성에만 급급하기보다 한 명의 성숙한 예술가가 탄생할 수 있는 깊고 넉넉한 토양이 돼 주길 소망한다. 완벽한 연주보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담긴 인간적 고뇌와 숭고한 아름다움이다. 결국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가장 빠르고 강한 소리가 아니라 가장 진실하고 고귀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선율임을 믿는다.

[아침을 열면서] 병원에는 또 다른 시간이 흐른다

“왜 이렇게 오래 기다려야 하나요.” 병원에서 자주 듣는 말 중 하나다. 몸이 불편한 상태에서 기다리는 시간은 유난히 길게 느껴진다. 예약시간을 지정받아 신청했는데도 진료실 문은 쉽게 열리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사람에게 병원은 ‘기다리는 곳’이라는 인상이 남는다. 환자의 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이해되는 이야기다. 아픈 몸으로 병원을 찾았는데 대기시간이 길다면 답답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병원 안에서 흐르는 시간은 환자가 느끼는 시간과 조금 다른 방식으로 움직인다. 진료실에서 환자를 만나는 시간은 몇 분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몇 분의 진료가 이뤄지기까지는 생각보다 많은 과정이 이어진다. 환자가 진료실에 들어오기 전 간호사는 상태를 확인하고 검사실에서는 채취된 검체가 분석되며 영상의학과에서는 촬영된 영상을 전문의가 판독하고 그 결과가 진료에 반영된다. 병원의 시간은 한 사람의 진료 시간으로만 이뤄지지 않는다. 의료진과 직원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시간을 보태며 하나의 진료가 완성된다. 의사와 간호사뿐 아니라 의료 기사, 행정 직원, 시설 담당자 등 많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병원의 하루를 움직인다. 큰 병원일수록 그 흐름은 더 복잡해진다. 하루에도 수천명의 환자가 오가고 수많은 검사와 수술이 동시에 진행된다. 응급실은 밤낮없이 돌아가고 수술실에서는 예정된 수술이 이어진다. 때로는 응급수술이 들어와 순서가 바뀌기도 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의료 장비가 점검되고 의료 기록이 관리된다. 거기에 한 치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는 곳이 병원이다. 그래서 병원의 시간은 늘 분주하다. 누군가는 밤새워 응급실을 지키고 누군가는 새벽부터 수술 준비를 한다. 환자가 병원 문을 열고 들어오기 훨씬 전부터 병원의 하루는 이미 시작된 셈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환자의 기다림이 가볍다는 뜻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자의 시간 역시 중요하므로 변명만 늘어놓는다고 느낄 수도 있다. 의료가 환자 중심이어야 한다는 원칙은 언제나 중요하다. 병원 역시 그 기다림을 줄이기 위해 계속해서 방법을 찾고 있다. 진료 절차를 개선하고 시스템을 정비하며 환자가 조금이라도 편하게 진료받을 수 있도록 노력한다. 최근에는 병원들도 빅데이터를 활용한 인공지능(AI) 서비스를 통해 환자 방문이 집중되는 시간대를 찾아 고객 응대 서비스를 강화하는 전략을 펼치기도 한다. 다만 병원의 시간을 조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면 좋겠다. 병원은 늘 시간과 싸우는 곳이다. 응급 상황에서는 몇 분의 차이가 생명을 좌우하기도 한다. 그래서 병원의 시간은 빠르면서도 신중하다. 서둘러야 할 때는 누구보다 빨라야 하고 멈춰 확인해야 할 때는 누구보다 조심스러워야 한다. 우리가 병원에서 마주하는 몇 분의 진료는 어쩌면 그 긴 시간의 마지막 한 장면일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어지는 수많은 시간이 모여 비로소 한 사람의 치료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병원 진료를 마치고 문을 나서면서 한 번쯤 떠올려 보면 좋겠다. 우리가 느끼는 기다림의 시간 뒤에는 누군가의 치료를 위해 흘러가고 있는 또 다른 시간이 있다는 것을.

[아침을 열면서] 일상을 지탱하는 문화의 영토

우리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실천의 뒷전으로 밀려나는 것들을 자주 목격한다. 따라서 다소 뻔하지만 중요한 이야기를 꺼내고자 한다. 사람이 머무는 공간도 그중 하나다. 공간은 삶을 조용히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서포터다. 특히 삶이 흔들릴 때 우리는 그 존재를 비로소 절실히 깨닫게 된다. 눈앞의 세계는 좀처럼 평온을 허락하지 않는다. 지구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포성과 급격한 격변은 개인을 끝없는 불안 속으로 밀어넣는다. 거대한 시대의 흐름과 변화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은 이제 많은 이들에게 일상이 됐다. 마음은 쉽게 내면으로 침잠하고 타인과의 연결은 느슨해진다. 그러나 인간은 고립된 채로는 치유될 수 없다. 두려움이 깊어질수록 가장 강력한 저항은 일상의 연대에서 비롯된다. 그 중심에는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물리적 공간이 있다. 공간은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을 지탱하고 타인과 연결하며 문화가 싹트는 토양이다. 돌아보면 어린 시절의 기억은 사건보다 공간의 색채와 온도로 남는다. 놀이터의 모래 질감, 슈퍼 평상의 안온함, 시골길의 풀 냄새 같은 감각들이 한 인간의 세계를 형성한다. 문화란 거창한 예술만을 뜻하지 않는다. 특정 공간이 주는 기억과 경험은 삶의 결을 만들고 정체성의 뿌리를 이루는 과정 자체다. 공간의 미학은 결국 우리의 기억이 머무는 집과도 같다. 내가 애정을 느끼는 풍경은 담벼락 사이로 작은 집들이 어깨를 맞댄 오래된 골목이다. 그곳에는 급격한 변화가 침범하지 못한 시간의 결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동네일수록 편히 머물 공간은 부족하다. 낡은 골목은 ‘낙후’라는 이름 아래 재개발을 기다리는 대기소가 되고 공간이 사라지면 그곳에 깃든 문화적 기억도 함께 지워진다. 주민들은 다시 고립된 섬처럼 남겨진다. 보존의 가치를 말하면서도 개발의 논리 앞에서 이를 가장 먼저 포기해 온 우리의 선택이 만들어 낸 풍경이다. 지역 곳곳에는 함께 책을 읽고 취미를 나누며 각자의 삶을 가꾸는 커뮤니티가 살아 움직인다. 이들에게 문화는 삶을 견디게 하는 힘이다. 그러나 이들이 모일 공유 공간은 여전히 부족하다. 갈 곳 없는 시민들이 카페를 전전하는 현실은 우리의 문화적 빈곤을 드러낸다. 진정한 지역 개발은 숨은 공간을 발굴해 사람들이 머물고 사색하며 취미를 나눌 수 있는 ‘문화적 정거장’을 만드는 일이어야 한다. 동네의 작은 평상, 놀이터와 작업실 같은 소박한 장소들이 마을 곳곳에 자리할 때 문화는 일상의 숨구멍이 된다. 거대한 랜드마크보다 중요한 것은 집 근처에서 슬리퍼를 신고 나설 수 있는 작고 단단한 공간이다. 공간이 주민들에게 어떤 색채와 온도로 기억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철학이 부재한 곳에서는 지속가능한 문화도 형성될 수 없다. 공간이 환대의 기운을 품을 때 사람들의 마음도 결을 달리한다. 타인을 경계하던 눈빛은 인사로 바뀌고 좁아졌던 생각의 지평은 타자의 삶을 향해 넓어진다. 두려움을 이겨낼 힘은 우리 발밑의 단단한 공간에서 시작된다. 이제는 삶의 존엄과 문화를 함께 짓는 공간의 미학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그 중요성을 말해 왔지만 충분히 성실하게 다루지 못했다. 당위적인 표어에 머물렀던 공간의 가치를 삶의 최전선으로 끌어올릴 때 사색의 틈과 연대의 장이 마련될 것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거친 파도를 견뎌 낼 마음의 근육을 회복하게 된다. 우리 곁에 누구나 머물 수 있는 따뜻한 쉼터가 채워지기를 소망한다.

[아침을 열면서] 영혼을 정화하는 클래식의 힘

오늘날 우리를 둘러싼 세상은 과잉의 시대다. 손가락 하나로 전 세계의 정보를 훑고 인공지능(AI)은 단 몇 초 만에 수만 가지의 데이터를 조합해 화려한 결과물을 내놓는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토록 화려한 ‘더하기’의 세상 속에서 필자는 당신에게 시대를 초월한 고결한 보물상자 하나를 열어 보라고 말하고 싶다. 이 상자 안에 담긴 것은 시대를 초월해 그 무엇보다 숭고한 가치를 지닌 존재, 바로 클래식 음악이다. 누군가는 일상이 이토록 분주하고 복잡한데 왜 굳이 이 방대한 음악의 유산을 논해야 하느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하지만 클래식을 보물상자라 부르는 이유는 필자가 단지 음악가여서가 아니다. 그 보물상자 안에는 진정한 의미의 ‘영혼을 정화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이 가치는 미술관에서 느끼는 감동과 비교해 보면 더욱 흥미롭다. 사람들은 세계 전역의 유명 미술관을 찾아가 비싼 입장료를 내고 긴 줄을 서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미술이 캔버스 위에 완성된 영원한 미학이라면 음악은 작곡가의 값진 가치가 연주자의 독창적인 해석으로 재창출되는 ‘생동하는 예술’이다. 그럼에도 왜 우리는 우리의 감각을 깨우는 이 역동적인 울림 앞에서는 그만큼의 걸음을 내주지 않는 것일까. 이는 음악가들과 우리 사회가 함께 풀어야 할 숙제이기도 하다. 최근 음악계는 기교를 우선시하며 더 화려하고 압도적인 기술에 몰두하곤 한다. 소리는 더 커지고 빨라졌지만 정작 이면에 담긴 작곡가의 철학이나 내면의 울림은 기술적 과시 뒤로 숨어 버린다. 기교가 앞선 ‘요란한’ 연주가 더 큰 박수를 받는다고 착각하는 사이 우리는 정작 클래식의 정수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더 깊숙이 본질로 들어갈 필요가 있다. 작곡가의 의도를 엄격히 해석하고 정제된 소리를 ‘음악의 정석’에 맞게 표현해낼 때 클래식은 비로소 인간 내면을 어루만지는 본연의 힘을 발휘한다. 결국 클래식의 참된 매력은 작곡가의 깊은 내면의 세계 위에 연주자의 독창적인 해석이 더해지는 과정에 있다. 그렇게 정성껏 준비된 보물상자를 여는 진짜 주인공은 바로 귀를 기울이는 ‘당신’이다. 그 깊은 소리에 온전히 몰입할 때 음악은 비로소 세상에 하나뿐인 나만의 보석이 돼 우리의 내면을 소중하게 채워줄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점이 있다. 클래식의 숭고함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우리 사회가 예술을 대하는 태도는 여전히 그 깊이에 미치지 못할 때가 있다는 사실이다. 어느 분야든 훌륭한 인재는 많지만 음악을 빚어내는 작업은 인간의 ‘혼(魂)’과 가장 깊이 맞닿아 있다. 우리가 음악가를 단순히 기술자가 아닌 ‘아티스트(Artist)’라 부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의사의 정교한 수술이나 첨단 기술의 공학적 설계의 가치는 인정받으면서도 예술에 대해서만큼은 ‘재능’이라는 말로 그 노고가 쉽게 축소되곤 한다. 하지만 예술은 단순히 타고난 재주가 아니다. 그것은 재주를 뛰어넘어 오랜 시간 쌓아온 깊은 사유와 ‘치열한 자기 연마’가 응축된 독보적인 전문 영역이다. 분명히 말하고 싶다. AI가 모든 것을 대체하는 시대일수록 인간의 깊은 내면을 터치하고 영혼을 위로하는 클래식 음악의 가치는 더욱 절대적이다. 이제는 우리 사회도 박물관을 짓고 미술관을 세우고 빅테크 분야에 천문학적인 자본을 쏟는 것만큼이나 클래식 음악계를 향한 지속적인 투자와 깊은 애정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일지 모른다. 일부 유명 연주자에게만 의존하는 단발적인 흥행 사업을 넘어 예술가의 혼이 깃든 이 보물상자가 더 많은 이들의 영혼에 깊이 맞닿아 진정한 치유의 울림이 될 수 있도록 안정적인 창작 환경을 조성하고 그들의 전문성을 사회적으로 예우하는 품격 있는 토양을 가꿔야 한다. 클래식 음악이 품은 그 정신적인 풍요는 우리 삶 전체의 풍요로 이어진다. 시대를 초월한 이 고귀한 유산을 가꾸는 일은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할 미래다.

[아침을 열면서] 함께 웃는 축제, 살아나는 지역경제

봄이 오면 지역마다 축제 준비로 분주해진다. 겨우내 잠잠하던 거리에는 현수막이 걸리고 광장에는 무대가 세워지며 지방정부는 방문객을 맞이할 채비에 한창이다. 지역경제 활성화 기대 속에서 축제는 계절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처럼 자리 잡았다. 그러나 그 축제가 과연 누구를 웃게 하고 있는가. 많은 지역축제가 외래 방문객 유치와 단기적인 경제 효과를 목표로 기획된다. 지역경제를 살리기 위한 노력은 필요하다. 하지만 방문객 수와 매출이라는 숫자에만 집중하다 보면 정작 지역민이 체감할 수 있는 의미와 공동체 가치는 뒤로 밀려나기 십상이다. 축제는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나누고 이웃과 소통하며 일상의 피로를 내려놓는 ‘지역민의 자리’에서 출발했다. 그런데 최근의 축제들은 외부 관람객을 위한 ‘보여 주기식’ 행사로 변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지역의 정체성을 지키지 못한 축제는 오래가지 못한다. 비슷한 프로그램과 유사한 무대가 반복되면 사람들은 한 번 방문하고 떠날 뿐이다. 반대로 지역민이 주체가 돼 자신들의 삶과 이야기를 담아낸 축제는 방문객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긴다. 지역경제를 움직이는 힘은 화려한 이벤트가 아니라 지역만의 스토리와 공동체의 온기에서 나온다. 함께 웃는 축제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고 그 기억은 다시 지역을 찾게 만드는 힘이 된다. 지방정부의 역할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축제의 성과를 단순히 방문객 수나 매출액으로만 평가하는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역민의 참여도와 만족도, 지역 문화의 보존과 전승, 공동체 회복이라는 가치를 함께 반영하는 정책적 전환이 시급하다. 행정은 무대를 주도하는 주최자가 아니라 지역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드러나도록 돕는 조력자가 돼야 한다. 중앙정부 또한 지역이 획일적인 행사 경쟁에 매몰되지 않도록 중장기적인 지역 브랜드 정책을 마련하고 지역 고유의 콘텐츠가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강화해야 한다. 축제 정책의 방향을 재설계할 시점이다. 단발성 예산과 성과 위주의 평가 체계를 넘어 지역민이 실제로 참여하고 치유받을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지역민이 배제된 채 외부 방문객만을 위한 축제는 일시적 소비를 남길 뿐 지속가능한 경제를 만들지 못한다. 지방정부는 축제를 ‘관광상품’이 아니라 ‘지역 공동체 회복 프로젝트’로 바라봐야 한다. 주민 참여형 프로그램과 지역 스토리 기반 콘텐츠를 정책의 중심에 둬야 한다. 방문객의 시선도 주목해야 한다. 사람들은 단순히 볼거리와 즐길거리를 소비하기 위해 지역을 찾지 않는다. 그 지역에서만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의 표정, 음식의 맛, 공간의 분위기, 그리고 공동체의 온기를 경험하고 싶어 한다. 지역민이 먼저 즐기고 힐링하는 축제는 방문객에게도 가장 진정성 있는 기억으로 남는다.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힘은 대형 무대나 유명 가수가 아니라 지역의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삶의 이야기다. 지역 상권과 주민의 준비 또한 중요하다. 축제의 주인공은 외부 손님이 아니라 그곳에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상인들은 가게마다 소소한 스토리를 담아내고 주민은 인사를 나누며 공동체의 자부심을 회복해야 한다. 골목의 간판, 시장의 풍경 하나에도 지역의 기억이 담길 때 축제는 단순한 행사를 넘어 지역 브랜드로 이어진다. 주민이 웃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공간이 될 때 축제는 비로소 살아 움직인다. 봄은 늘 새로운 시작을 알린다. 아이들의 웃음과 어르신의 추억이 어우러지고 이웃이 서로의 안부를 묻는 자리에서 축제는 공동체의 힘을 회복한다. 숫자로 남는 성과보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는 따뜻한 장면 하나가 지역의 미래를 바꾼다. 지역민이 먼저 행복해질 때 방문객은 그 온기를 느끼고 다시 찾는다. 지역축제가 공동체의 소통과 문화 향유, 힐링의 장으로 자리 잡을 때 지역의 이야기는 브랜드가 되고 지역경제는 비로소 지속가능한 봄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아침을 열면서] 아프고 나서야 알게 되는 능력들

뇌졸중 및 척수손상 같은 중증 질환으로 입원하거나 수술을 받고 힘든 고비를 잘 넘기면 재활의학과로 의뢰돼 재활치료의 도움을 받는다. 이 환자들에게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당연히 여겼던 움직임들이 하나의 큰 치료 목표가 된다. 혼자 일어나는 법, 몇 걸음 걷는 법, 숟가락을 쥐는 법. 우리가 평소 의식하지 않던 일상생활의 동작들이 치료의 중심이 되는 곳이 바로 재활의학과다. 전에는 몰랐다고들 한다. 두 발로 서서 화장실을 가고, 버스를 타기 위해 뛰고, 계단을 오르내리던 일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인지. 우리는 그런 움직임을 ‘능력’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저 누구나 하는, 당연한 일상이라고 여기며 살아간다. 하지만 재활치료실에 들어오는 순간 그 당연함은 사라진다. 한 걸음을 떼기 위해 온 몸의 힘을 모으는 분, 침대에서 일어나 앉는 데 5분을 쓰는 분, 숟가락을 쥐는 법을 다시 배우는 분들을 흔히 만난다. 어제까지는 아무 생각 없이 하던 동작들이 오늘은 간절한 치료 목표가 된다. 걷는 일도, 앉았다 일어나는 일도 특별한 재능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그저 살아오는 동안 몸에 익혀온 움직임 속에서 무의식중에 일상을 누리고 있었을 뿐이다. 다만 잃고 나서야 그 평범한 동작들이 우리 삶을 지탱하는 능력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재활의학은 잃어버린 기능을 되찾게 도와주는 의학의 한 분야이지만 동시에 잊고 지내던 몸의 가치를 다시 알게 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환자들은 조금씩 나아지며 말한다. “이 정도만 돼도 살 것 같아요.” 예전 같으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동작이 삶의 기쁨이 된다. 발끝에 힘이 들어가고, 손가락이 다시 움직이고, 혼자 의자에서 일어설 수 있게 되는 순간 치료실에는 작은 환호가 흐른다. 회복은 거창한 기적이 아니라 사소해 보이던 동작 하나를 되찾는 일이다. 우리는 건강할 때 몸을 거의 의식하지 않고 산다. 숨 쉬는 일도, 고개를 돌리는 일도, 가방을 드는 일도 아무런 설명이 필요 없다. 그러나 몸이 아프고 나면 그 모든 움직임에는 노력이 붙고, 시간이 붙고, 용기가 필요해진다. 그때야 비로소 깨닫는다. 일상은 저절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몸이 조용히 해내고 있던 수많은 능력 위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을. 어쩌면 건강이란 특별히 뛰어난 상태가 아니라 아무 생각 없이 움직일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계단을 오르며 숨이 차도 멈추지 않아도 되는 몸, 팔을 뻗으면 원하는 물건을 잡을 수 있는 손. 그것이 우리가 매일 누리고 있는 능력이다. 필자는 한 달 전 갑작스러운 내과질환으로 기름진 음식을 절제하라는 전문의의 엄명을 받고 인생에서 한번도 해보지 않은 식단 조절을 해봤다. 평소 아무 고민 없이 먹던 짜장면, 닭갈비, 제육볶음이 얼마나 먹고 싶던지. 오늘 아침, 별다른 생각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걸었다면 이미 우리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아프고 나서야 알게 되는 소중한 능력들을 아프기 전에 한번쯤 떠올려 보는 하루였으면 한다. 그리고 그 능력을 오래 지키기 위해 오늘 하루 단 30분만이라도 몸을 가꾸고 사용해 줬으면 한다. 거창한 운동이 아니어도 좋다. 몸을 쓰는 작은 습관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능력을 가장 오래 지켜주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아침을 열면서] 예술이 벽을 통과할 수 있도록

요즘 필자는 감사하게도 예술가들, 창작자와 기획자들을 지근거리에서 바라보고 대화를 나누며 관찰할 경험이 잦아졌다. 그 시간은 자연스럽게 하나의 질문으로 모인다. 예술가는 어떻게 벽을 통과하는가. 우리는 모두 변화의 벽 앞에 선다. 그러나 어떤 이는 그 벽을 그저 바라보고 어떤 이들은 끝내 그 벽을 지난다. 특히 예술인이 그러하다. 여러 차례의 대화를 통해 필자는 그 차이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생각하게 됐다. 같은 시대를 살며 누구나 불안과 한계를 마주하지만 어떻게 많은 예술인은 끝내 멈추지 않고 그 벽을 통과하는가. 창작을 향한 열망이나 상상의 힘 때문이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그들과 오래 이야기할수록 상상력은 번뜩이는 재능이라기보다 태도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막힌 지점에서 돌아서지 않는 집요함, 다른 길을 끝까지 묻는 질문, 아이디어를 현실로 끌어오기 위한 진지한 성찰, 그리고 실패를 견디는 인내. 그 모든 것이 상상력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인상 깊었던 것은 기술을 대하는 예술인의 방식이다. 우리는 테크놀로지를 위협과 구원의 이분법으로 나누지만 예술가들은 먼저 판단하지 않는다. 그 대신 다룬다. 인공지능(AI)과 미디어, 데이터와 가상공간은 찬반의 대상이 아니라 도구이자 협업자다. 그래서 그들의 상상력은 공중에 뜨지 않는다. 철저한 공부와 탐구를 통해 벽을 그저 바라보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성질을 분석해 그 위에 새로운 문을 만든다. 그리고 스스로 만든 그 문을 열어 벽을 통과한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문을 열 수 없는 순간들이 있다. 바로 그 지점에서 필자는 다시금 ‘팔걸이 원칙’을 떠올린다. 창작과 권력, 예술과 제도 사이에 유지돼야 할 건전한 긴장과 거리의 원칙이다. 그 거리가 있어야 상상은 숨 쉬고 아직 이름 붙지 않은 가능성은 성급한 판단으로 닫혀 버리지 않는다. 위험은 행정과 정치가 스스로를 과신하는 순간이다. 현장에서 길러진 예술인의 감각과 그들의 삶의 영역까지 이미 알고 있다고 착각할 때다. 알고 있다는 착각과 평가의 권위가 앞설수록 제도는 ‘곁’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앞’을 가로막는 벽이 된다. 조급한 기준과 체점은 예술가들이 벽을 넘기도 전에 멈추게 하고 사회의 상상력은 그만큼 좁아진다. 굳이 체점이 필요하다면 그 주체는 제도가 아니라 현장이어야 한다. 현장에서 창작을 이어온 예술인들이 경험으로 정책과 구조를 바라보고 그 감각으로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누가 누구를 판단하는가. 그 질문은 그래서 여전히 유효하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예술인들의 언어와 형식 앞에서 우리는 미리 판단할 자격을 가지고 있는가. 다수의 취향과 권위가 먼저 도착하는 순간 벽을 만드는 쪽은 예술가가 아니라 정책이 된다. 먼저 도착해야 할 것은 판단이 아니라 존중이다. 아직 미완이고 실패를 품은 그 시간을 감내하고 기다려 주는 일, 그 과정을 신뢰하는 일. 그것이 이 사회의 한계를 넓히는 가장 조용하지만 결정적인 힘일 것이다. 기술을 협업으로 활용할지 혹은 자신의 예술 안으로 들이지 않을지 방식은 각기 다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것이 하나의 선택이며 그 선택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하고 그 존중의 태도와 철학은 제도와 정책을 만드는 이들에게 주어진 과제다. 예술인들도 기다리고 있다. 예술을 통제의 대상이 아니라 동시대의 자유이자 미래의 언어로 바라볼 수 있는 행정과 정치인을. 지금까지도 존경의 이름으로 남아 있는 그 정신을 이어갈 사람을.

[아침을 열면서] 문 앞에 선 소상공인

정부는 소상공인을 ‘경제의 뿌리’라 부른다. 골목상권이 살아야 지역이 살아나고 소상공인이 버텨야 국가 경제도 지속될 수 있다는 인식 때문이다. 이런 공감대 속에서 정부는 매년 다양한 정책자금을 마련해 창업과 경영 안정을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정책이 집행되는 과정에서 소상공인이 실제로 마주하는 현장과 제도 사이에는 여전히 깊은 간극이 존재한다. 정책자금을 신청하는 소상공인 중 상당수는 오랜 시간 준비해 온 아이템을 시장에 내놓으려는 사람들이다. 혹은 이미 가게 문을 열었지만 매출이 충분히 오르지 않아 잠시 숨을 고를 자금이 필요한 이들이다. 생계의 불안과 가족의 만류,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감수하며 하루하루 버텨내는 사람들이다. 소상공인들은 소상공인시장공단의 대출확인서를 손에 쥐고도 신용보증기관 창구 앞에 서는 순간 다시 멈춰 선다. 그 앞을 가로막는 것은 ‘전년도 매출’이라는 하나의 기준이다. 정책은 통과했지만 신용의 문턱에서 다시 좌절을 마주하는 구조다. 막 사업을 시작했거나 업력이 짧은 소상공인에게 전년도 매출이 낮은 것은 실패가 아니라 출발의 증거다. 그럼에도 이 기준은 심사의 핵심 잣대로 작동한다. 결국 정책자금은 지금 가장 절실한 시점의 소상공인에게는 닿지 못하고 일정 규모의 매출이 있는 사업자에게만 의미를 갖는다. 정책의 취지와 현장의 현실이 어긋나는 지점이다. 이 과정에서 소상공인이 가장 크게 느끼는 감정은 좌절이다. “매출이 적어서 안된다”는 말은 단순한 기준 설명이 아니라 “지금은 기회를 줄 수 없다”는 선언처럼 들린다. 하지만 정책자금의 본래 목적은 실패를 가려내는 데 있지 않다. 실패를 막아내고 가능성을 가진 이들이 시장에 안착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있다. 기준이 명확하더라도 그 기준이 정책의 목적을 담아내지 못한다면 재검토는 불가피하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정책자금을 관장하는 지역 일선 기관에서 느끼는 태도의 문제다. 제도보다 더 큰 상처를 남기는 것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다. 금융기관에서 떠밀려 이곳까지 왔다는 아이러니한 훈수, 마치 준비가 덜 된 개인의 책임처럼 느껴지는 말투와 시선은 소상공인의 자존감을 무너뜨린다. 자금을 요청하러 간 자리에서 존중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순간, 소상공인은 제도뿐만 아니라 국가에 대한 신뢰마저 잃게 된다. 소상공인의 애환은 숫자로 환산되지 않는다. 임대료와 인건비, 재료비를 계산하며 하루를 시작하고 매출이 없던 날의 한숨을 삼키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정책자금은 단순한 ‘돈’이 아니라 다시 도전해도 괜찮다는 사회의 신호이자 국가의 응답이어야 한다. 이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정책자금이 현장에서 왜곡되지 않도록 집행 과정 전반에 대한 책임 있는 관리와 감독에 나서야 한다. 고객 접점 기관의 주관적이고 획일적인 심사가 소상공인을 두 번 울리는 구조는 반드시 개선돼야 한다. 정책자금은 심사의 잣대를 들이대는 제도가 아니라 사업의 특성과 가능성을 함께 살피며 길을 열어주는 제도여야 한다. 창구는 배제의 문턱이 아니라 상담과 안내의 공간이 돼야 하며 일선 기관은 관리자가 아닌 동반자로서 소상공인에게 희망과 용기를 건네야 한다. 정책의 취지가 현장에서 흔들리지 않으려면 제도, 그리고 집행하는 태도가 함께 바뀌어야 한다. 소상공인 정책자금은 단순한 지원금이 아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사회의 약속이며 국가가 미래를 향해 조심스럽게 내미는 손이다. 한 사람의 삶을 지키고, 한 지역의 온기를 살리며, 국민의 일상을 받쳐 주는 이 정책이 차가운 심사가 아니라 가능성을 품는 제도로 작동하길 기대한다.

[아침을 열면서] 시간을 통과해 빛나는 ‘로빈 후드’

영화 ‘로빈 후드의 모험’을 떠올리면 많은 이들에게 이야기보다 먼저 음악이 스친다. 어디선가 익숙하지만 한번 들으면 잊히지 않는 그 선율. 활 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지듯 시작해 금관악기가 영웅의 등장을 알리는 웅장한 소리. 이 메인 테마는 오랫동안 영화의 상징으로 기억돼 왔다. 그러나 이 선율은 영화보다 먼저 유럽 정통 클래식의 언어로 이미 완성돼 있었다. 이 선율의 주인공은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드다. 오늘날 사람들은 그를 주로 ‘영화음악 작곡가’로 기억하지만 사실 그는 영화계로 투신하기 전 이미 정통 클래식 작곡가로서 독창적인 언어를 완성한 인물이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천재로 주목받았다. 열한 살에 작곡한 발레 음악을 구스타프 말러가 지휘했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그를 “이 시대에 보기 드문 작곡가”라고 극찬했다. 20대에 발표한 오페라 ‘죽음의 도시’는 그를 유럽 음악계의 중심에 올려놓았다. 이 시기 작품들은 신동을 넘어 치밀한 오케스트라 운용 능력과 확고한 예술적 신념이 이미 무르익었음을 보여준다. 필자는 2024년 발매한 ‘베토벤 소나타 전곡과 소품집’ 첫 음반에 코른골드의 ‘헛소동(Much Ado About Nothing) Op. 11’을 수록했다. 이 작품을 깊이 들여다보며 확인한 것은 분명했다. 할리우드로 건너가기 전 이미 그의 극적 선율과 풍부한 표현력은 완성돼 있었다는 사실. 이 음악적 토대가 훗날 영화음악에서 그가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든든한 기반이 됐다. 1930년대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유대인 코른골드에게 운명적 전환점을 준 작품은 바로 ‘로빈 후드의 모험’이었다. 이 영화로 그는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했지만 그는 오페라나 교향곡을 쓰듯 영화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악보로 바라봤고 등장인물마다 고유의 주제를 부여한 뒤 서사에 따라 변주했다. 이후 ‘씨 호크’ 등에서 펼쳐진 그의 음악 언어는 할리우드 영화음악 역사에 새 지평을 열었다. 그는 유럽의 전통을 할리우드 스크린이라는 새로운 문맥 속에서 재편성하며 자신만의 발자취를 남겼다. 그의 삶이 주는 감동은 격동의 시간 속에서도 자신의 본질을 놓치지 않고 축적된 시간을 성실히 잇고자 했다는 데 있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이어진다. 최근 화제가 된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 OST ‘골든’ 뒤에도 10년 가까이 인내한 한 음악가의 시간이 숨어 있다. 긴 연습생 생활의 도전, 그 과정에서 겪은 수많은 좌절과 치열한 음악적 훈련이 지금의 자리를 만드는 자양분이 된 것이다. 남들에게는 실패처럼 또는 ‘낭비된 시간처럼’ 보였던 무수한 시간이 켜켜이 쌓여 결국 축적된 시간을 견뎌낸 단단한 창작자를 탄생시켰다. 우리는 흔히 지금의 위치로 자신을 재단한다. 앞서 있는지, 뒤처졌는지 숫자로 가늠하며 조급해한다. 그러나 코른골드의 삶이 보여주듯 진짜 중요한 것은 ‘그 시간을 어떻게 살아내느냐’다. 어느 지점에 서 있든,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든 상관없다. 치열하게 몰입해 오늘을 살아낸 시간은 언젠가 의미 있는 흐름으로 쌓인다. 그 축적된 시간이 우리를 가장 강하게 빛나게 할 힘이다.

[아침을 열면서] 중요한 것은 ‘회복 계획’

새해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건강 계획을 세운다. 체중 감량 목표를 잡고 주당 운동 횟수를 정하며 건강검진 일정도 체크한다. 목표로 하는 계획만 보면 올해는 유난히 몸을 잘 돌볼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런데 그 계획표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늘 빠져 있는 것이 있다. ‘회복’에 대한 계획이다. 진료실에서 만나는 분 중에는 새해를 계기로 운동을 다시 시작했다가 통증 때문에 멈추는 경우가 꽤 많다. 이때 중요한 것은 운동을 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몸에 가해진 변화가 얼마나 갑작스러웠는지다. 오래 쉬다가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하면 몸은 그 변화를 바로 따라오지 못한다. 하루이틀 뒤 근육이 뻐근해지고 관절 주변이 욱신거리는 건 몸이 보내는 자연스러운 신호다. 우리는 몸을 늘 ‘사용’의 대상으로만 생각한다. 더 움직이고 더 태우고 더 단련하면 건강해질 거라 믿는다. 하지만 몸은 버튼을 누르면 즉시 반응하는 기계가 아니다. 사용한 뒤에는 반드시 회복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 동안 근육과 관절, 신경은 천천히 적응하고 정리된다. 이 과정을 건너뛰면 통증은 쌓이고 계획은 중단된다. 새해에 유독 다치거나 통증을 호소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운동량을 갑자기 늘리거나 오랫동안 하지 않던 동작을 한꺼번에 반복하면 몸은 경고를 보낸다. 허리가 뻐근해지고 무릎이 욱신거리며 어깨가 굳는다. 그 신호를 ‘참고 넘길 일’로 여기면 몸은 더 큰 소리로 신호를 보낼 수밖에 없다. 재활의학 전문의들은 우스갯소리로 환자들에게 “운동을 너무 안 하면 성인병이나 대사증후군으로 내과에 가고 너무 많이 하면 재활의학과에 오면 된다”고 말하곤 한다. 필자 역시 새해 초엔 거창하게 운동 계획을 잡아 1년짜리 헬스 이용권을 끊어보기도 하고 그것도 비싼 곳으로 가면 아까워 더 열심히 다니지 않을까 생각할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달력의 첫 장을 못 넘기고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어떻게 하면 안 갈까 궁리하고, 그러다 또 한 번 가면 그동안 못했던 것의 보상작용으로 근육과 관절에 무리를 줘 또다시 운동을 쉬게 된 뼈아픈 경험이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건강계획표에 회복을 넣지 않는다. 운동은 숫자로 남고 체중은 눈에 보이지만 회복은 기록되지 않기 때문이다. 쉬는 시간은 계획이 아니라 공백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 공백이야말로 몸이 제 자리를 찾는 시간이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시간이 있어야 계획이 오래 간다. 새해가 되면 건강계획표를 빼곡히 채우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이번에는 한 칸쯤은 비워 두면 어떨까. 특별한 목표를 적지 않아도 된다. 그 대신 스스로에게 한 가지를 약속해 보면 좋겠다. 몸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하지 않겠다는 것, 쉬는 시간을 게으름으로 여기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 약속은 다른 계획을 오래 지킬 수 있는 힘이 된다. 새해의 건강은 무언가를 더 많이 하는 데서 오지 않는다. 덜 무리하고 조금 느리게 가는 데서 시작된다. 운동 계획을 세웠다면 그 옆에 회복의 시간도 함께 적어 보자. 어쩌면 올해 가장 중요한 건강 계획은 계획표 속 그 빈칸 하나일지도 모른다.

[아침을 열면서] 잘못된 성과주의

새해가 시작되면 우리는 늘 더 나아지기를 다짐한다. 더 효율적으로 일하겠다고, 더 빠르게 성과를 내겠다고 말한다. 또는 더 많이 숙고하고 실수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매년 반복되는 결심 속에서 스스로를 채찍질하지만 그것이 조직과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돌아볼 여유가 많지 않다. 한 해를 여는 이 시점에서 필자는 묻는다. 선함과 무능함의 사이, 그리고 목표만을 위해 과정이 생략되는 잔인함이 그것이다. 우리가 선함이라는 이유로 미뤄온 결정과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감내한 혹독함은 과연 정당했는가. 이 질문은 단순히 윤리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조직과 구성원의 삶, 신뢰와 연대의 문제와 직결된다. 조직에는 두 가지 태도가 공존한다. 하나는 선한 태도처럼 보이지만 냉철하지 못한 회피형 태도다. 갈등과 상처를 피하려고, 혹은 혹시 모를 불이익이 두려워 판단을 미루는 내면이다. 이런 마음은 선함처럼 보이지만 결국 행동의 공백으로 이어진다. 고민은 깊어지고 결정하지 않은 시간만 쌓인다. 다른 하나는 결과만 중시하는 태도다. 목표만 이루면 과정 속 부조리와 부당함은 눈감아도 된다고 믿는다. 설명 없는 지시와 무리한 요구도 목표 달성을 위한 불가피한 절차로 포장된다. 그러나 이는 결국 더 큰 비용과 후유증으로 되돌아온다. 결정하지 않는 선함은 판단의 공백을 만들고 결과만 중시하는 사고는 그 공백을 폭력적인 논리로 채운다. 설명은 사라지고 책임은 아래로 흐르며 체계는 사람을 보호하지 못한다. 요즘 규칙과 절차는 형식으로만 남고 목표와 성과가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된다. 체계를 지탱하는 것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대한 신뢰다. 과정을 신뢰하지 않는 구조 속에서는 작은 부정이나 왜곡도 쉽게 개인의 문제로 치부되며 그 책임은 전가된다. 괴롭힘과 부당한 지시는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구조의 문제다. 질문은 방해가 되고 문제 제기는 불충으로 오해받는다. ‘목표를 위해서라면’이라는 말 아래 정도를 벗어난 지시가 정당화되고 책임은 가장 약한 개인에게 전가된다. 과정은 본래 숭고하다. 시간과 존중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체계에서 과정은 편법을 덮는 형식으로 변질됐다. 겉으로는 절차가 지켜지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설명과 논의가 사라지고 책임 소재도 흐려진다. 이러한 체계는 잘못된 성과주의에서 시작된다. 숫자와 속도에만 집착하는 리더십은 사람을 수단으로 만들고 단기적 성과만을 좇는다. 성과는 남을지 몰라도 조직 내 신뢰는 빠르게 무너지고 그 회복은 훨씬 어렵다. 더 고통스러운 건 이 구조를 비판하면서도 어느새 그 안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다. 부당함이 지시되고 그것이 ‘어쩔 수 없음’이라는 이유로 수행되며 누군가는 고립과 괴롭힘 속에 놓여 있다면 그 체계는 결코 건강하다고 말할 수 없다. 과정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 체계가 가장 위험해지는 순간은 부당함이 발생할 때가 아니라 아무도 그것을 불편해하지 않을 때다. 그래서 필자는 온전한 과정을 지향한다. 과정의 숙고 끝에는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결정을 내리며 끝을 흐리지 않으려 한다. 성과는 중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나와 조직, 함께하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무엇이 정당하고 존중받아야 하는지 성찰한다. 어려운 숙제이지만 그렇게 다시 성장하고 싶다. 우리는 어떤 성과를 이루려 하는가. 그리고 그 과정은 어떻게 채워갈 것인가.

[아침을 열면서] 흔들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을사년(乙巳年) 끝자락에서 한 해를 돌아보니 이 시간은 유난히 많은 감정을 남긴다. 개인의 삶을 넘어 사회 전체가 여러 차례 크게 흔들렸고 그 흔들림은 국민의 마음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다. 국내적으로는 국가 운영의 근간을 위협하는 혼란이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불안과 분노, 허탈함을 느꼈다. 익숙하다고 믿었던 일상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 한 해를 보내며 다시 배워야 했다. 그러나 혼란의 한가운데에서도 시간은 멈추지 않았다. 누군가는 여전히 이른 아침 일터로 향했고 누군가는 가게의 불을 켜며 하루를 시작했고 누군가는 가족의 하루를 조용히 지켜냈다. 사회가 크게 흔들릴수록 삶은 오히려 더 묵묵히 제자리를 지켰다. 2025년은 바로 그런 시간이었다. 상처는 분명했고 마음은 지쳤지만 삶은 끝내 멈추지 않았다. 말 없이 이어진 하루들이 서로를 떠받치며 이 시간을 견뎌냈다. 국제사회 역시 격동의 흐름 속에 있었다. 전쟁과 갈등, 경제 불확실성이 이어지면서 세계는 쉽게 안정을 찾지 못했다. 한국을 바라보는 국제사회의 시선 또한 한때 흔들렸지만 그 와중에 세계 각국의 정상들이 한국을 찾았고 한국은 다시 국제무대의 중심에서 조명받는 장면을 연출했다. 위기는 국가의 취약함을 드러내지만 동시에 그 나라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려 하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2025년은 한국 사회의 불안과 저력을 동시에 드러낸 기사회생(起死回生), 사필귀정(事必歸正)의 한 해로 기억될 것 같다. 경제 상황은 녹록지 않다. 국내 증시는 점차 회복 기미를 보이지만 체감경기는 많은 이들에게 여전히 차갑다. 자영업자와 소상공인, 서민의 일상은 긴장의 연속이고 미래에 대한 걱정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숫자와 지표가 전하는 신호와 달리 삶의 현장은 조심스럽다. 지금 필요한 것은 섣부른 낙관도, 끝없는 비관도 아니다. 현실을 중시하며 서로를 소진시키지 않도록 상대를 생각하고 배려하는 태도다. 사회가 조금 더 숨을 고를 수 있도록 사람의 속도를 존중하는 선택이 필요하다. 연말은 늘 평가의 시간이지만 동시에 정리의 시간이기도 하다.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고 한 해가 실패로 남는 것은 아니다. 버텨낸 하루, 포기하지 않은 선택, 무너지지 않기 위해 애쓴 마음들 역시 분명한 의미를 가진다. 한 해 동안 많은 것을 잃었지만 동시에 많은 것을 지켜냈다.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함께 시간을 건너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의미 있는 성과다. 2025년 한 해를 보내며 다시 내일을 생각한다. 2026년 새해가 모든 것을 단번에 바꾸지는 않겠지만 새로운 걸음을 옮길 수 있는 공간은 분명히 남아 있다. 희망은 거창한 약속에서 오기보다 다시 ‘일어서겠다’는 조용한 마음에서 시작된다. 서로의 상처를 조금씩 이해하고 스스로를 다독일 수 있을 때 시간은 서서히 속도를 늦추며 다가온다. ‘흔들렸지만 멈추지 않았던’ 하루들이 쌓여 새로운 시간을 조금씩 밀어 올린다. 내일은 멀리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건너온 이 자리에서 시작된다. 시작은 이미 흐르고 있다.

[아침을 열면서] 연말을 채우는 합창교향곡

한 해가 저물 무렵이면 어김없이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 이른바 ‘합창교향곡’이 공연장과 방송을 채운다. 왜 우리는 매년 연말이 되면 이 곡을 찾는가. 단순한 관습 이상의 이유가 이 음악에는 분명히 있다.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은 그의 나이 37세 무렵부터 구상돼 수십년에 걸쳐 다듬어진 끝에 1824년 53세에 완성됐다. 이미 청력을 거의 잃은 상태였지만 이 곡은 그의 고난과 열정을 담아 탄생했다. 이미 여덟 개의 교향곡을 작곡한 후에도 베토벤은 더 깊은 메시지를 전하고자 인간의 목소리를 교향곡 속에 담아 합창과 독창이 어우러진 ‘환희여, 아름다운 신의 불꽃이여’로 9번 교향곡을 완성했다. 이 작품은 인간의 목소리를 사용한 최초의 교향곡으로 음악사적 혁신을 넘어 환희와 인류애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고통과 갈등을 지나서야 느낄 수 있는 연대와 기쁨, 그것이 마지막 악장의 이 합창이 전하는 메시지다. 4악장의 장엄한 종결부를 특히 가사에 귀 기울여 들어 보기를 권한다. 나는 오래전 말버러 뮤직 페스티벌에 여러 번 참여한 경험이 있다. 이 페스티벌은 미국의 버몬트 말버러에서 매년 여름 열리는 실내악 중심의 음악 축제다. 약 8주간 세계 각지에서 모인 음악가들이 함께 생활하며 연습하고 멀리서 찾아오는 관객을 위한 음악회, 다양한 찾아가는 음악회로 진행한다. 그곳에서는 매년 페스티벌의 마지막 날에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교향곡을 연주하는 것이 오랜 전통이다. 예술감독이자 피아니스트인 루돌프 서킨, 전설적인 인물 알렉산더 슈나이더의 지휘, 그리고 필자가 존경하는 영원한 스승이자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악장 펠릭스 갈리미어와 함께했던 말버러 페스티벌의 여름, 그 베토벤의 ‘코랄 판타지’는 늘 단순한 무대가 아니라 나에게는 삶의 의미를 깊이 음미하게 하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4악장에 인용된 ‘환희여, 아름다운 신의 불꽃이여’는 시인 프리드리히 실러의 시 ‘환희에 부쳐(An die Freude)’의 한 구절이다. 청력을 거의 잃은 상태에서도 베토벤은 인간의 목소리를 통해 ‘환희’의 메시지를 음악으로 구현했다. 이는 불멸의 작곡가 베토벤의 극한의 예술적 도전이자 고통과 투쟁을 넘어 기쁨에 도달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려 하는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한 해가 끝나갈 무렵 마음 한 편이 복잡하다. 성취를 돌아보는 동시에 놓친 기회와 아쉬움을 떠올리기도 한다. 우리는 여러 감정을 안고 12월을 맞이한다. 그런 시기에 베토벤은 묻는다. 지금의 음보다 더 즐거운 노래를 부르자고. 고독을 넘어, 갈등을 넘어 환희를 노래하고 함께 합창하며 다시 서로의 목소리를 듣자고. 특히 ‘합창’이라는 형식은 오늘의 우리에게 더욱 절실하다. 독창이 아닌 서로 다른 목소리가 함께 만들어내는 음악. 각자의 음색과 높낮이는 다르지만 하나의 조화를 향해 나아갈 줄 아는 품격. 한 해의 끝자락, 이 코랄 판타지를 감상하며 조화와 환희로 함께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갖기 바란다. 올해도 어김없이 9번 교향곡이 울려 퍼진다. 그 선율 앞에서 우리는 잠시 숨을 고르고 무엇이 내게 환희인지 생각하며 그 가치를 다시 음미하기 바란다. 혼자가 아닌 ‘합창’과 ‘함께’로 새해를 맞이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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