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재판의 특징 중 하나는 유무죄 판단 후 유죄로 인정되면 형을 정하는 단계, 즉 양형(量刑)이 모든 사건에서 필요하다는 것이다. 양형의 단계에서 법관은 법정형의 범위 내에서 사안별로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형의 종류(주로 징역형과 벌금형 중에서 선택하게 된다)를 선택하고 형량을 정해 선고하게 된다. 법관에게 상당히 폭넓은 양형 재량이 주어져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그 중에서 최적의 형을 선택해야 하는 법관의 부담은 결코 가볍지 않다. 형사재판의 주된 임무가 유·무죄를 잘 가려내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실제 재판에서 보면 피고인이 범행을 부인하는 사건은 얼마 없고, 대부분은 범행을 인정하면서 자신이 어떠한 형을 선고받을지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형편이므로, 양형판단이 형사재판에서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시민들이 갖는 양형편차에 대한 불안을 해소하고, 판사들의 양형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수학공식같이 정해진 양형기준법을 만드려는 시도도 있다. 실제로 외국에선 양형을 하는데 참조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제정해 둔 경우가 있고, 우리나라도 이와 유사한 내용의 입법을 준비 중이라고 한다. 그러나 다양한 양형인자를 모두 포섭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같은 가이드라인을 획일적으로 따르게 할 경우 시민들의 인권보장에 장해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가이드라인을 만들더라도 이를 따를지, 또는 얼마나 따를지를 결정할 권한과 책임은 최종적으로 판사 개개인의 결단에 맡길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한다.
판사 개인적으로는 중형을 선고하는 경우 부담감을 느끼는 게 사실이다. 저지른 죄가 무거워 중형을 선고할 수 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피고인은 물론 딸린 식솔들까지 어려운 처지에 빠뜨릴 것이 뻔하므로 마음이 편치 않다. 피고인이 범행을 부인하는 사건에선 오판의 위험까지 감수해야 하는만큼 판사들이 종종 밤잠을 못 이루고 고민하기도 한다. 흔히 피고인들이 구속되면 장문의 반성문을 여러 장 제출하면서 반성하고 있으니 선처해 줄 것을 호소한다. 범죄를 저지르고도 잘못이 없다고 버티는 피고인들보다는 확실히 나아보이지만, 말로 하는 반성으로 피해자를 달래기에는 아무래도 부족하다. 그래서 형사 판사들이 가장 반기는 서류는 합의서일 것이다. 수십장, 수백장의 반성문이 한장의 합의서의 효력에 비길바 못된다. 법원에 제출하는 반성문이나 의견서에선 단순히 반성하는 마음을 표시한다는 것 보다는 양형에 유리하게 반영될 수 있는 정보를 법관에게 제공해 준다는 마음으로 작성하는 게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성보기 수원지법 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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