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오디세이] 말을 안아주자

우리는 지금 말의 시대를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많은 매체와 인터넷 등을 통해 하루에도 수많은 말과 소식을 전하며 살아간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 공통의 관심사로 이야기를 나누며 친분을 쌓던 시대를 지나 함께하지 않더라도 스마트폰이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각자의 말과 소식을 전하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지금 이 세상의 말에는 과거와 달라진 것이 있다. 바로 소통이 사라진 말을 하고 있다. 소통(疏通)이란 ‘뜻을 나누고 서로 통하는 것’이다. 즉, 사람과 사람이 함께 마주해 각자의 이야기를 나누며 점차 각자가 아닌 서로의 이야기로 합쳐지고 그 속에서 어떤 주제에 대한 공통된 의견이 나오는 것이 말의 소통이다. 하지만 보다 편리하고 빠르게 말을 나누는 이 시대에는 소통이 사라지고 자신만의 말을 하고 그 말만을 내세우는 모습이 강해지고 있다. 점차 우리의 말 속에서 입과 귀만이 남아 하고 싶은 말과 듣고 싶은 말만을 골라 그것과 다르면 편을 가르거나 그 말조차 부정하는 모습이 돼 가고 있다. 말은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위대한 업적 가운데 하나다. 인간은 말을 통해 언어와 문화, 그리고 역사를 만들 수 있게 됐다. 단순히 한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을 넘어 존재 가치를 사유하고 삶 속에서 수많은 인연과 관계를 쌓아 그 속에서 자신을 만들어가는 한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가장 높은 문명과 과학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현대인은 오히려 점차 말에서 멀어지고 있다. 말을 통해 소통하며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말로써 사람들과 다투고, 편을 가르고, 분열을 일으키고 있다. 말이 이렇게 변질된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생각하는 사회성이 변화된 것인지도 모른다. 나만의 편이어야 나의 사회의 일원이라고 여기고, 나와 다르면 반대편이거나 적이라고까지 생각하는 극단적 구분이 사회가 아닌 고립된 섬을 만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말을 통해 오늘을 살아야 한다. 지금 이 순간도 누군가에게 목소리나 문자로 된 말을 전하고 있을 것이며 말로 된 소식과 이야기를 찾아보고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삶에 말을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이제 말을 안아주자. ‘말을 잘하는 사람에게는 귀를 열고,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에게는 마음을 연다’는 가르침과 같이 내 말을 넘어 상대의 말을 듣고 내 마음에 안아줘 그 말이 나의 말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지 생각해보자. 다툼도 화도 말로 인해 일어난다. 하지만 자비도 사랑도 말로 전해진다. 수없이 쏟아내는 나만의 말이 아닌 상대의 말을 안아주며 화합과 자비를 함께 나누는 말을 우리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불교에는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표현이 있다. 본래 수행에 있어 다른 이의 가르침과 말을 따라하거나 내세워서는 결코 깨달음을 이룰 수 없다는 가르침이지만 이제 자신의 말만을 내세워 사람과 사회를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전하고 싶다. 우리는 모두 행복하기 위해 오늘 그 자리에서 살아간다.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란다면 그것을 결코 다툼과 화로 이루려고 해서는 안 된다. 화는 결국 불행과 잿더미만을 남길 것이다. 자비와 사랑의 말로 오늘 사람과 사회에서 살아가자. 이 속에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삶, 오디세이] 모두의 영화가 아니어도 좋다

마이클 잭슨이 세상을 떠난 지 16년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살아 있다. 유튜브 조회수로, 커버 댄스로, 그리고 이제는 스크린 위에서. 그를 모르는 Z세대 팬의 모창에서부터 ‘전국노래자랑’에 출연한 어르신이 따라 하는 댄스까지 마이클 잭슨은 국경, 인종, 세대를 넘어선 단 한 명의 팝의 제왕으로 우뚝 서 있다. 앙투안 푸쿠아 감독의 영화 ‘마이클’은 그의 일대기를 다룬 전기 영화다. 영화는 개봉 전부터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유족의 반발, 마이클 잭슨을 고통으로 몰아넣은 아동 관련 의혹에 대한 침묵, 마이클 잭슨을 연기하는 그의 조카, 특정인의 통편집 등 우여곡절 끝에 영화가 공개됐다. 이 영화를 둘러싼 물음은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 전기 영화는 한 인간을 얼마나 진실되게 그릴 수 있는가. 답은 회의적이어서 영화라는 매체가 가지는 구조적 한계를 ‘마이클’이 끌어안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영화는 소송을 두려워하고 제작사는 수익을 계산한다. 그 사이에서 인물의 속 깊은 내막은 지워지거나 희석된다. 제작에 마이클 잭슨 유산 관리재단이 관여했다는 사실 때문에 팬들은 미리 이 영화의 진위를 의심해 왔다. 그렇다면 ‘마이클’은 실패한 영화인가. 그렇지는 않다. ‘마이클’은 그를 그리워하는 팬덤을 위한 선물 같은 작품이다. 소년에서 전설로 성장하는 서사, 아버지의 통제를 벗어나 위대한 아티스트로 거듭나는 과정, 무대 위에서 폭발하는 에너지, 시대를 가로지르는 음악.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이 영화는 말한다. 어둠보다는 빛을, 고통보다는 신화를 선택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 극장문화의 지형을 읽을 수 있다. 현재 극장의 가장 충실한 관객은 40~60대다. OTT의 범람 속에서도 이들은 여전히 극장을 찾는다. 자신이 청춘을 보낸 시대의 음악, 열광했던 스타의 이야기가 큰 화면에 펼쳐질 때 그들은 기꺼이 지갑을 연다. 마이클 잭슨의 황금기인 1980~90년대를 온몸으로 경험한 세대가 바로 지금의 중장년 관객이다. 최근 몇 년간 극장가를 달군 작품을 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보헤미안 랩소디’와 ‘엘비스’는 록 음악의 황금기를 경험한 세대에게 그 시절을 돌려줬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속편이 20년 만에 제작되고 ‘미션 임파서블’이나 ‘쥬라기 공원’처럼 수십년 된 프랜차이즈의 속편이 줄을 잇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향수(鄕愁)는 콘텐츠가 된다. 중장년 관객의 기억 속에 각인된 브랜드는 가장 안전한 흥행 공식이다. ‘마이클’은 그 공식의 정점에 놓인 기획이다. 하지만 이 현상을 냉소적으로 볼 일은 아니다. 전기 영화는 오래된 형식이고 인물의 이상화는 이 장르의 본질적 속성이다. 중요한 것은 관객의 태도다. ‘마이클’을 보면서 스크린 위의 그가 마이클 자체가 아니라 그에 대한 하나의 해석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 해석이 누구의 이익을 위해 구성됐는지를 따져 묻는 것이 영화를 보는 성숙한 일일 것이다. 곧 제작될 속편에서는 마이클 잭슨을 오래도록 괴롭힌 사건과 그의 내면에 대한 다각적인 묘사를 기대하며 신화가 아닌 인간 마이클과 비로소 마주할 수 있기를 바란다.

[삶, 오디세이] “그것만은 기억해도 돼”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친한 가족의 초대로 뮤지컬 한 편을 보게 됐다. 한국과 미국에서 큰 호응을 얻었던 이 뮤지컬(2025년 토니상에서 최우수 뮤지컬상 등을 포함해 6관왕)은 인간을 돕는 헬퍼 로봇들의 사랑 이야기다. 로봇들의 사랑 이야기라는 소재를 들었을 때만 해도 필자는 사실 작품에 대해 큰 기대와 호감을 갖지 못했다. 그러나 공연이 끝난 뒤 이 공연은 오래도록 필자의 마음에 깊은 여운과 생각할 거리를 남겼다. 이 작품은 단순히 로봇 이야기가 아니었다. 로봇이라는 소재를 통해 우리, 바로 인간의 존재와 삶(외로움, 기대, 실망, 만남, 동행, 삶의 여러 기억, 깨달음, 상실, 죽음) 그리고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만드는 이야기였다. 필자는 이 작품을 만든 작가의 의도와 동기가 궁금했다. 작가는 왜 이러한 작품을 쓰게 됐을까. 이 작품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작가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생은 유한하고 우리는 결국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된다. 그럼에도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언젠가 맞이할 상실까지도 끌어안는 일이다. 결국 인간의 가치는 이러한 현실을 알면서도 끝내 사랑하려는 노력에 있다. 그래서인지 이 뮤지컬의 여러 OST 가운데 다음의 OST 가사가 필자에게 깊은 울림을 줬다. “그것만은 기억해도 돼/화분은 햇볕에 너무 오래 두지 마/밤에 외출할 땐/노란 비옷 꼭 안 입어도 돼/그건 기억해도 돼/그건 잊지 않아도 돼/그것만은 기억해도 돼/종이컵 전화길 사용하는 법/오래된 레코드/지직거리는 따뜻한 소리/그건 기억해도 돼/그건 잊지 않았음 해/다 잊기엔 너무 아까운/눈부시게 예쁜 기억들.”(‘그것만은 기억해도 돼’ OST 중). ‘다 잊기엔 너무 아까운 눈부시게 예쁜 기억들’은 결코 거창하거나 화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노란 비옷, 종이컵 전화기, 오래된 레코드의 지직거리는 소리처럼 사소하고 평범한 일상들이었다. 이 지극히 평범한 일상들이 사랑하는 사람과 공유되는 순간, 그것들은 더 이상 ‘나만의 기억’이 아니라 ‘우리의 추억’으로 변화된다. 바로 그 추억들이 유한한 삶 속에서도 우리가 서로를 사랑할 이유가 돼 준다. 작가는 삶의 끝에서 “너와 함께했기에 꽤 괜찮은 삶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이 사랑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말속에는 사랑에 대한 작가의 깊은 신념과 가치가 담겨 있다. 사랑은 상대의 능력이나 조건 및 배경, 이로 인한 물질적인 안정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사랑은 상대의 존재와 그 존재와 함께 평범한 일상을 나눴던 시간들, 곧 추억이 쌓여 사랑이 된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상대가 너무 초라하고 가진 것이 없을지라도 ‘그 사람’이기 때문에 함께한 평범한 일상의 추억들은 한 번뿐인 자신의 인생을 기꺼이 내걸 만큼의 사랑 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는 것이다. 필자는 스스로에게,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어떤 것을 공유하고 있는가.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무엇을 기억하며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삶, 오디세이] 토요일의 여유

2004년, 주5일제가 시작되던 때를 떠올려 보면 우리 사회는 기대보다 걱정이 더 컸다. 하루를 더 쉰다는 것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질서와 균형이 흔들리는 일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특별히 보릿고개의 가난이 몸에 배어 있는 우리 민족의 의식은 ‘덜 일 하면 나라가 망하는 것 아닌가’, ‘부지런함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이 흐름이 끊어지는 것 아닌가’ 하는 사회적인 걱정이 있었다. 일요일을 제외하고 공휴일에도 출근할 만큼 매일 숨가쁘게 달려오던 삶에 하루의 쉼이 더해진다는 것은 아주 낯설고 위험한 실험이었다. 교회도 다르지 않았다.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의 여유가 생기면 교인들이 교회에 오지 않고 산과 들로 흩어져 교회가 큰 위기를 맞을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어떤 교회는 토요예배를 신설했고 어떤 이들은 주일 성수의 의미를 더 강하게 붙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때 한국교회는 믿음보다 두려움이 더 컸던 것 같다. 그로부터 20여년이 흘렀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토요일의 휴무는 그때의 걱정이 기우였음이 분명하다. 사람들은 토요일에는 조금 늦게 일어나 느린 걸음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한 주간 동안 쌓였던 피로를 풀고 밀린 집안일을 하며 가정은 더 단단해졌다. 운동을 하고 책을 읽고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삶의 숨을 고른다. 쉼이 사람을 무너뜨리지 않고 오히려 사람을 다시 세운다는 사실을 우리는 몸으로 배웠다. 교회 역시 그 흐름 속에 있다. 토요일에도 바삐 출근해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하고 지쳐 있는 시간이 아니라 쉼을 통해 다시 충전되고 회복되는 시간이 됐다. 토요일 오후는 여유롭게 교회에 나와 봉사하고 교제하며 주일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보내고 있다. 그 여유는 주일 예배를 더 깊고 또렷하게 만들었고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수원특례시는 120만 인구가 살아가는 도시다. 정조대왕의 효심이 깃든 도시이자 삼성전자와 SK라는 세계적 기업이 뿌리 내린 곳이다. 그리고 주말이면 화성행궁 일대는 전국에서 모여든 젊은이들로 유명해졌다. 역사와 현재가 겹쳐 흐르는 자리에서 사람들은 걷고, 보고, 만난다. 토요일 오후의 수원은 살아 있다. 따뜻한 봄볕 아래 수원 삼성 블루윙즈 유니폼을 입은 사람과 KT 야구팀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짝을 이뤄 경기장으로 향한다. 그들의 걸음에는 분주함이 아니라 기대와 설렘과 힘이 있다. 이제 토요일은 단순히 쉼의 날이 아니라 삶을 다시 정돈하고 자기를 찾는 날이다. 빠르게 달려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르게 살아가기 위해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됐다. 토요일의 쉼은 나를 가다듬어 다음 걸음을 위한 준비하는 시간이 됐다. 늘 일이 지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고 가족과 함께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위해 집중하는 날이 됐다. 사회학자들의 불안한 미래 예측에 대해 현명한 국민이 잘 대처한 이유라고 생각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뛰어난 민족성이 있어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5월1일 산업통상부가 발표한 ‘3월 수출입 동향’에 따르면 중동 사태에도 불구하고 지난달 수출이 전년과 비교해 48.3% 증가하며 인공지능(AI) 특수로 반도체 슈퍼사이클 호황이 지속된 것에 힘입어 사상 처음으로 월 800억달러를 넘는 861억3천만달러(129조5천395억원)를 기록했다고 한다. 수출 증가세는 10개월째 이어지고 있으며 무역수지 역시 14개월 연속 흑자를 달성했다. 열심히 일하고 잘 쉬고 준비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토요일이 있어 참 좋다.

[삶, 오디세이] 그곳에서 한 걸음

어느덧 봄을 지나 햇살이 화사로운 5월이다. 5월은 설레고 푸르른 이미지이며 여러 휴일과 기념일이 있어 다소 들뜨게 만드는 시기이기도 하다. 특히 불교에서는 5월에 부처님 오신 날이 있다 보니 어느 때보다 분주하면서도 감사함을 느끼며 보낸다. 부처님 오신 날은 정확하게는 깨달음을 얻기 전의 태자 고마타 싯다르타가 태어난 날이다. 그래서 깨달음을 얻은 성도재일이 부처님 오신 날이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지만 한 인간으로 태어나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늙고(老) 병들고(病) 죽는다는(死) 괴로움을 인간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극복할 수 있는가라는 삶의 근본 문제에 대해 한 명의 인간으로서 고민하고 사유한 것이기에 이날을 부처님 오신 날로 여기는 것이다. 불교 설화에 따르면 태자 싯다르타는 산통을 느낀 마야부인이 근심을 없앤다는 무우수(無憂樹)를 잡고 있을 때 옆구리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옆구리에서 태어난 이유는 태자의 신분이 크샤트리아였기에 인도의 최고신 브라흐만의 상반신에서 태어난 신분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렇게 태어난 태자는 동남서북 사방으로 각각 일곱 걸음씩 걸으며 탄생게인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을 읊었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탄생게는 이것만이 아니라 그 뒤 ‘삼계개고아당안지(三界皆苦我當安之)’라는 내용이 이어진다. 즉, ‘하늘 위 하늘 아래 내가 (깨달을 법이) 가장 존귀하다. 삼계가 모두 괴로움이니 내가(태자) 마땅히 안락하게 하리라’는 중생제도의 선언이다. 이 탄생게를 두고 앞부분을 태어난 자신으로 해석하면 ‘자신만이 오직 존귀한 존재’라는 의미가 돼 신의 존재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에서 신적 이미지를 갖게 된다. 이는 태어난 자신이 아닌 장차 부처로서 얻을 깨달음의 법만이 가장 존귀하고 그 법을 통해 자신이 부처가 돼 모두를 안락으로 이끌겠다는 의미다. 그리고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은 이유는 바로 불교에서 모든 생명 있는 존재가 영원토록 겪어야 하는 육도윤회의 여섯 가지 굴레에서 벗어난 한 걸음을 의미한다. 법을 깨달아 부처가 되면 해탈과 열반을 얻는다. 열반은 모든 업의 힘이 식어 더 이상 윤회시킬 에너지가 없어진 상태이며 해탈은 바로 그 윤회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한다. 이 탄생게와 일곱 걸음은 바로 부처님이 우리에게 전하는 전법의 선언이며 우리의 삶을 자신의 걸음으로 나아가라는 가르침이다. 우리 모두는 존귀한 존재다. 그러나 그 태어남이 존귀한 것이 아니라 지금 이렇게 인연들과 함께 살아가며 자신의 역할을 하고 있는 이 삶의 모습이 존귀한 것이다. 그리고 이 삶은 다른 누군가가 결정하고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 결정하고 행동해 만든 것이며 지금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불교에서는 모든 중생이 불성을 지니고 있고 또한 깨달아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한다. 5월의 문턱에서 지금 나 자신은 자신답게 살아가며 어떤 방향을 향해 일곱 번째 걸음을 내딛고 있는지 다시금 사유하는 시간으로 맞이하자. 지금 나의 행(行)이 나의 삶(生)을 만드는 나침반이 돼 줄 것이다.

[삶, 오디세이] 현실 일깨우는 영화 ‘힌드의 목소리’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가 지난해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올라 수상을 기다리던 팬들에게 강력한 경쟁작으로 등장해 긴장감을 던져준 영화가 있었다. ‘영화제와 정치’라는 이슈를 던지며 밤새 시네필을 토론하게 만든 그 영화, ‘힌드의 목소리’가 드디어 개봉했다. 이 영화는 베니스영화제 첫 상영 직후 팔레스타인 해방을 외치는 구호와 함께 22분의 기립박수를 받으며 영화제 사상 최장 기록을 세웠다. 황금사자상 결정 과정에서 심사위원단 사이에 거센 논쟁이 불거졌고 한 심사위원은 시상식을 앞두고 자국으로 조기 귀국하는 이례적인 일까지 벌어졌다. 영화는 최종 심사위원대상을 받으며 영화제를 마무리했고 올 초에는 그 어느 해보다 쟁쟁한 경쟁작 라인업 속에서도 아카데미 국제영화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영화는 2024년 1월29일, 이스라엘-하마스전쟁이 한창이던 가자지구에서 총격을 받은 차 안에 갇혀 구조를 요청한 여섯 살 팔레스타인 소녀 힌드 라잡을 구하기 위해 적신월사(이슬람권 인도주의 구호단체) 자원봉사자들이 사투를 벌이는 긴박한 상황을 그린다. 관객을 깜짝 놀라게 하는 것은 소녀 힌드의 실제 통화 녹음과 기록을 그대로 영화 안에 가져왔다는 사실이다. 튀니지 출신으로 자국 역사상 처음 아카데미에 노미네이트되며 현대 튀니지 영화계를 대표하게 된 카우타르 벤 하니야 감독은 힌드의 실제 목소리와 구조팀 배우들의 연기를 교차시키고 휴대폰의 실제 영상을 화면에 삽입하는 방식으로 전쟁의 생생함을 폭탄도 화염도 없이 강렬하게 환기시킨다. 그렇게 이 영화는 최고의 전쟁영화이자 반전 정치영화가 됐다. 89분이라는 길지 않은 러닝타임 동안 영화는 관객을 놓아주지 않는다. 힌드의 비극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고 가자지구의 참상은 지금도 진행 중이라는 점이 관람을 더욱 무겁게 만들지만 그 참상을 실체화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깊이 감정적으로 개입해 보게 만드는 힘이 남다르다. 힌드 라잡은 캐릭터가 아니라 인물 그 자체이고 그 목소리는 참상의 증거이므로 대체 불가능하다. 배우의 목소리로 힌드를 연기하는 대신 원본을 그대로 가져옴으로써 재현의 거리감을 지우고 그 인물을 애도하게 만드는, 새로운 형식의 영화적 해원(解冤)이다. 실제와 연기라는 이질적인 두 층위가 충돌하는 순간 관객은 ‘지금 실제로 일어난 일을 듣고 있는 것인가’ 하는 불편한 인식에 사로잡힌다. 영화는 그 혼란 자체를 추동력으로 삼아 관객을 ‘감상’의 자리에서 ‘목격’의 자리로 끌어당긴다. 힌드의 목소리는 이제 스크린 위에 남아 전쟁을 기록하고 증언하는 시대의 아이콘이 됐다. 민간인 희생이 국제 관계 구도 안에서 끝내 해결되지 못하는 현실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그 애처로운 목소리는 극장을 나선 뒤에도 오래도록 들린다. 이 영화를 보는 일은,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울리고 있을 다급한 아이의 전화를 받는 일이다.

[삶, 오디세이] 무덤에서부터 시작되는 부활

한 방송에서 마다가스카르의 바오밥(바오바브) 나무를 소개하는 장면을 봤다. 바오밥 나무는 수명이 길어 수천년을 살 수 있고 생김새는 나무를 거꾸로 박아 놓은 것처럼 생겼다. 보통 큰 바오밥 나무의 경우 1천년 이상 자라면 속이 비어 큰 공간이 생기는데 그 공간에 10만ℓ의 물을 저장할 수 있다고 한다. 건기가 다가오면 바오밥 나무는 저장된 물을 조금씩 사용하며 나무 스스로가 나뭇잎을 떨궈 수분 발산을 막을 수 있다고 한다. 이처럼 바오밥 나무는 건기와 우기를 스스로 조절하는 놀라운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인상 깊었던 것은 우기를 맞은 바오밥 나무 꽃의 개화 장면이었다. 수천년을 살아가는 바오밥 나무가 꽃을 피우는 데 걸리는 시간은 1분 남짓이었다.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 무렵 마치 바나나 껍질이 벗겨지듯 꽃잎이 열리고 폭죽처럼 꽃술이 드러나는 장면은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이었다. 누구도 이 순간을 알리지 않았지만 이 순간을 기가 막히게 알아차린 이들이 있다. 바로 쥐여우원숭이와 나방이다. 이들은 꽃이 개화하자마자 꽃이 준비한 꿀을 맛보는데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이들이 꽃이 언제 피는지 나무에 항상 관심을 갖고 자주 바라봤기 때문일 테다. 이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떠올리게 한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사건이었지만 그 순간은 결코 요란하지 않았다. 성경의 말씀처럼 “그분은 모든 백성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미리 증인으로 선택하신 이들에게 나타나셨다.”(사도 10, 41) 그 증인들은 바로 무덤을 찾았던 이들이다. 마리아 막달레나, 그리고 그의 말을 듣고 무덤으로 달려간 베드로와 요한이었다.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빈 무덤은 절망의 끝이 아니라 희망의 시작이었다. 부활은 모든 이에게 드러나는 사건이 아니라 기다리던 이에게 허락되는 은총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서 부활을 기다리고 있는가. 혹시 화려한 전례와 장엄한 성가 안에서만 예수 그리스도를 찾고 있지는 않은가. 부활 인사와 오가는 선물 안에서 부활하신 그분을 찾고 있지는 않은가. 물론 그것들 역시 소중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한 자리는 오히려 그 반대편에 가까웠다. 눈물과 절망, 상처가 고스란히 묻힌 어두운 무덤이었다. 우리에게도 각자의 ‘무덤’이 있다. 상처받았던 기억, 배신의 아픔, 미움과 분노로 얼룩진 시간, 이별과 상실로 눈물 지었던 자리들이다. 우리는 그곳을 외면하고 싶어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은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 부활은 결코 화려함 속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모두가 잠든 이른 새벽, 간절히 기다리던 이들의 마음 안에서 조용히 피어났다. 그러니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 우리는 서둘러 무덤을 향해야 한다. 한때 눈물로 가득했던 우리의 ‘무덤’을 향해,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베드로와 요한처럼 그곳으로 달려가야 한다. 그곳, 바로 우리의 눈물 자리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상처와 아픔, 뒤엉킨 감정들을 텅 빈 무덤처럼 비워 주신 채 기다리고 계신다.

[삶, 오디세이] 지나간 오늘, 남겨진 부활

우리는 늘 시간을 나눠 말하지만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삶은 깊게 서로 연결돼 있다. 그래서 과거는 지나갔지만 사라지지 않고 현재는 흘러가지만 붙잡히며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지만 이미 우리를 끌어당긴다. 크리스천 심리학자 댄 알렌더는 말한다. “사람은 과거 때문에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그 과거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간다.” 1885년 4월5일. 그날은 일요일이었고 부활절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이 절기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며 죽음을 넘어 생명이 열렸다는 선언이다. 그날 오후 3시, 헨리 아펜젤러와 호러스 언더우드 선교사가 제물포항에 동시에 발을 내디딤으로써 조선 땅에 복음이 시작됐다. 그 복음의 씨앗이 이 땅에 심어진 지 141년이 지난 2026년 4월5일 역시 일요일이고 부활절이었다. 같은 날짜 같은 시간 수원특례시기독교총연합회에 속한 교회들이 오후 3시에 한자리에 모여 부활절 연합예배를 드렸다. 시간은 흐르면서 그 복음은 열매가 돼 수원 땅에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부활의 주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시간을 맞을 수 있었다. 부활절은 매년 날짜가 바뀐다. 기준은 분명하다. 춘분 이후 첫 보름달이 지난 뒤 맞는 첫 번째 일요일이다. 이 기준은 니케아 공의회에서 정해졌다. 달과 태양의 질서 위에 부활의 신앙을 새겨 넣은 결정이었다. 그래서 부활절은 단순한 기념일이 아니라 시간 속에 새겨진 고백이다. 올해 수원의 교회들은 이 특별한 날짜의 의미를 기억하며 살랑살랑 봄바람에 풍겨오는 꽃향기를 맡으며 함께 걸었다. 수원중앙침례교회에서 화성행궁까지 ‘Let’s go! 수원 새빛, 함께 걸어요!’를 주제로 부활절 퍼레이드가 이어졌고 행궁 광장에서는 시민들과 함께하는 축제가 열렸다. 봄 햇살 아래 길 위에서 많은 시민이 손을 흔들었고 우리는 작은 선물을 나누고 서로를 향해 미소를 건네며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돼 줬다. 그날의 걸음은 단순한 행진이 아니라 시간을 잇는 순례의 여정이었다. 수원은 참 좋은 도시다. 정조대왕의 숨결이 남아 있는 역사와 세계적인 기업 삼성전자와 SK가 뿌리를 둔 도시다. 특히 화성행궁은 과거와 현재가 충돌하지 않고 어우러지는 공간이다. 궁궐 담장 안에는 전통이 흐르고 담장 밖 골목에는 짙은 커피 향이 스며 있다. 그리고 광장은 그 두 시간이 만나는 자리였다. 행사 중 만난 몇몇 외국인 청년은 멀찍이 서서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가가 말을 건네자 그들은 기꺼이 앞자리에 앉아 끝까지 함께 축제를 즐겼다. 언어는 달랐지만 기쁨은 통했다. 어쩌면 그것이 부활의 힘일지도 모른다. 경계를 넘어 사람을 잇는 힘. 그날은 지나간다. 그 누구도 시간을 멈춰 세울 수는 없다. 그러나 지나간 것은 시간이었지 의미는 아니다. 과거는 끝난 것이 아니라 현재를 비추는 빛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빛 속에서 다시 오늘을 살아간다. 부활은 한번의 사건이 아니라 계속해서 오늘을 새롭게 만드는 현재의 일이다.

[삶, 오디세이] 불러주며 함께 살아간다

봄이 되면 산과 들에 다양한 꽃과 새싹이 피어나며 봄을 알려준다. 그래서 봄에는 그저 길만 걸어도 봄의 전령이 전하는 아름다움에 왠지 설레고 즐겁기만 하다. 그리고 봄을 더욱 즐기기 위해 우리의 밥상에도 여러 봄나물과 싱그러운 음식이 올라온다. 봄나물이라는 말만 들어도 입맛이 돋고 식사의 기대감이 커지는 이유도 이처럼 봄에만 즐길 수 있는 제철 음식이 있기 때문이다. 봄나물은 그 이름도 참으로 재밌다. 쓴맛을 낸다고 해서 씀바귀, 냉한 기운을 가져와서 냉이, 어디서든 쑥쑥 자라서 쑥처럼 특별한 의미도 없고 대충 붙인 이름인 듯하지만 이보다 정확하게 그 특징을 전해주는 것도 없다. 그런데 만약 씀바귀, 냉이, 쑥 같은 이름조차 없었다면 이 나물들은 그저 잡초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렇게 나물로 불리며 밥상에 올라오는 식재료이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길가의 잡초로 여겨져 버려지는 경우도 실제로 많다. 필자는 봄이 되면 깨끗이 씻은 민들레 잎을 넣고 끓인 민들레된장국을 좋아한다. 그래서 봄에 손님이 찾아오면 별미로 만들어 드리기도 하는데 예전에 한 외국인 손님이 민들레된장국을 보고 화들짝 놀라며 먹을 게 없어 잡초를 먹느냐고 물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필자 역시 놀라며 우리나라에서는 봄에 이런 신선한 나물과 새싹도 먹는다고 하니 자기는 태어나 처음 경험하고 민들레를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너무 놀랐다고 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그 상큼하고 시원한 맛에 반해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우며 자기 나라에 돌아가면 민들레가 먹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가족에게 알려주겠다고 했다. 민들레도 그렇지만 아마 냉이, 쑥, 고사리, 미나리도 그들에게는 그저 잡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것들은 나물이며 맛있는 봄의 한 끼를 전해주는 식재료다. 이처럼 한낱 잡초도 다듬고 이름을 붙여 불러주면 나물이 된다. 처음부터 나물이었던 것은 없고 지금도 나물로 불리는 곳에서만 그 역할을 한다. 너무 작고 그 존재조차 알 수 없는 것이라도 함께하는 이들이 그것을 바라보고 불러주면 하나의 역할을 하는 존재로 거듭나게 된다. 불교에서 우리의 삶을 나타낼 때 태어남(生)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태어난 이후의 행위(行)이다. 태어날 때부터 어떤 이름이나 역할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가며 많은 인연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고 그것을 해나갈 때 비로소 참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고 한다. 고정된 하나의 존재가 아니라 변화하고 행동하는 존재로서 우리는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의 존재로서의 자신은 본인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이 그 행위와 역할의 자신을 알아봐 주고 불러줄 때 증명되는 것이다. 누구에게는 잡초일지라도 우리에게 나물이듯 자신이 어떻게 불리고 인연을 어떻게 부르고 있는지 다시 한번 살펴보자. 우리는 서로를 불러주며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삶, 오디세이] BTS, 국민 아이돌이라는 덫

BTS가 4년 만에 완전체로 돌아왔다. 케이팝 최고 그룹이 서울의 심장부이자 민주주의의 상징인 광화문 광장에 섰다. 경복궁을 배경으로 무대를 만들고 ‘아리랑’이라는 타이틀 앨범을 들고 왔으며 한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의상을 입은 일곱 청년의 퍼포먼스는 한국인 모두를 하나로 뭉치게 하며 그 자체로 뭉클한 감동을 전했다. 22일 이후 기록이 쏟아지고 있다. 앨범 발매 하루 만에 400만장 판매, 각종 글로벌 음원 차트 석권, 공연 중계 ‘BTS 컴백 라이브: 아리랑’의 넷플릭스 영화 부문 1위 및 77개국 차트 점령. 이후 이어질 세계 투어에서 들려올 기록들에 대한 기대감도 차오른다. 드디어 우리가 그토록 바랐던 강력한 지식재산권(IP)이 끊임없이 이익을 창출해낼 것이다. 군 복무를 성실히 마치고 돌아온 청년들이 몹시 반가웠고 기대됐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재미는 없었다. ‘국민 아이돌’이라는 왕관의 무게가 하도 버거워 공연은 모범청년 이미지의 감옥 안에서 치러진 관제행사처럼 느껴졌다. 경찰 특공대가 투입되고, 언론은 취재 제한에 묶이고, 시민은 검색대를 통과해야 광화문을 지날 수 있었다. “광화문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질문이 무성했지만 공공 공간의 사유화와 시민 기본권 문제는 이 지면에서 차치하기로 하자. BTS의 성장을 지켜보며 케이팝의 위력을 만방에 떨친 그들의 활약에 기뻐하고 멤버 하나하나의 음악적 성취를 사랑해 온 팬으로서 이제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BTS가 ‘국민 아이돌’이라는 덫에서 벗어났으면 한다. 지금 그들은 어디에 서 있는지 고민할 때다. BTS가 글로벌 시장에 진출하며 오랫동안 쌓아 올린 모범청년의 이미지는 아이와 부모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음악으로서의 정체성을 만들어 냈다. 병역을 성실히 이행하고, 유엔에서 연설하고, 대통령 특사로 세계를 누비는 사생활은 신뢰를 줬다. 하지만 이러한 성실한 행보는 때로는 지루하다. 비틀스는 청소년 우상에서 반문화의 아이콘으로 변모했다. 프레디 머큐리와 데이비드 보위는 젠더의 경계에 서서 스스로를 해체했다. 켄드릭 라마는 불편한 진실을 정면으로 노래한다. 이들의 틀을 깨는 변신에는 논란도 있었고 실패도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음악을 깊이 있게 만들었다. BTS의 음악은 분명 진화해 왔다. 그러나 그들을 둘러싼 서사는 여전히 ‘성실하고 선한 청년들’의 프레임에 갇혀 있다. 그 프레임이 아티스트를 보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한계에 가두는 것일 수 있다. 광화문 공연은 화려했지만 안전했다. 예측 가능한 무대는 진부하다. 국가가 허락한 공간에서, 국가가 원하는 방식으로, 안전하고 성실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공연. 이는 팝콘서트라기보다 세련된 국가 홍보에 가까웠다. BTS의 귀환을 진심으로 환영한다. 창작자로서 그들의 재능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제 진짜 불편한 질문을 던질 때다. 제복을 벗은 자리에서 모범청년의 훈장도 내려놓기 바란다. 불편하고 날카롭고 예측 불가능한 음악, 스스로 선택한 무대 위에서 던지는 도발적인 퍼포먼스, 반전과 평화와 저항을 노래했던 팝아티스트들의 유산을 이어가기, 그것이 지금 BTS가 걸어갈 다음 스텝이면 좋겠다.

[삶, 오디세이] 고통을 함께 짊어진다는 건

가톨릭교회는 매년 사순 시기를 보낸다. 사순 시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다리는 40일간의 시기다.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정화와 회개,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시간을 의미한다. 그래서 교회는 이 시기에 기도와 단식, 자선을 통해 마음을 정화하며 부활의 신비를 준비하도록 초대한다. 이 시기 신자들이 특별히 많이 바치는 기도가 ‘십자가의 길’이다. 이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형 선고를 받으신 뒤 골고타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과정을 14개의 장면으로 나눠 묵상하는 기도다. 그러나 십자가의 길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되새기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이르는 길을 함께 걸으며 우리 삶의 십자가와 구원의 신비를 바라보게 하는 기도다. 필자가 신학생 때의 일이다. 사순 시기를 맞아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던 중 제5처에서 깊이 머물게 됐다. 제5처는 키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져 드리는 장면이다. 그런데 그날의 묵상에서 필자는 조금 다른 장면을 보게 됐다. 시몬이 예수님을 돕는 것이 아니라 거의 초주검이 된 예수님이 오히려 시몬의 십자가를 같이 져 주기 위해 그의 곁으로 비틀거리며 다가오시는 모습이었다. 예수님은 시몬만이 아니라 필자에게도 다가오셨다. 필자가 삶의 십자가로 인해 지쳐 그동안 걸어온 성소의 길을 멈추려 하고, 십자가의 무게에 짓눌려 넘어져 낙담하고 있을 때 한 인물, 가시관을 쓰고 온 몸은 피투성이로 얼룩진 예수 그리스도가 필자의 십자가를 같이 져 주기 위해 다가오고 계심을 묵상하게 됐다. ‘내 십자가는 왜 이렇게 나를 힘들게 하냐’며, ‘내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며 원망하고 소리치고 있는데 한 인물, 가시관을 쓰고 온 몸은 피투성이로 얼룩진 예수 그리스도가 어느새 필자 곁으로 다가와 지그시 바라보시며 미소 지어 주셨다. 그분의 미소는 ‘바오로야, 내가 있지 않으냐. 내가 도와주겠다. 바오로 너 혼자서는 힘들겠지만 나와 함께하면 할 수 있다’는 안심과 확신을 주는 미소였다. 그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힘이 솟아올랐다. 필자를 위해 이렇게까지 다가오신 분이 계신데 필자의 십자가만큼은 끝까지 짊어지고 걸어가봐야겠다는 새로운 결심이 생겼다. 십자가의 길에서 만난 예수 그리스도는 고통 중에 삶의 큰 어려움에 있는 이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넘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희망이 돼 주시는 분이다. 그분은 멀리서 말로만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고통 한가운데로 직접 걸어 들어오시는 분이다. 그리고 조용히 우리 곁에 서서 함께 십자가를 짊어지신다. 우리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시어 함께 그 고통을 나누려는 진솔한 태도, 표정, 미소로써 말이다. 우리가 절망에 빠졌을 때, 고통이라는 늪에서 허덕이고 있을 때 겸허히 우리 곁을 지키며 십자가의 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려 보기 바란다. 희망이 없다고 느낄 때, 삶의 어둠과 고통이 우리를 짓누를 때마다 우리 곁을 지키는 누군가가 있다면 바로 그가, 고통의 한복판에서 나에게 다가와 희망이 돼 주시는 십자가의 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임을 깨닫기 바란다.

[삶, 오디세이] 감사하면 보입니다

요즘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교회가 하나 있다. 교회가 성장하면서 예배 인원이 늘어났고 자연스럽게 주차 공간의 필요도 커졌다. 교인들의 편리한 교회 생활을 위해 교회 가까이에 있는 공터를 주차장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매입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땅 주인은 팔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뜻밖의 연락이 왔다. 땅 주인이 먼저 교회에 전화를 한 것이다. 교회가 주일마다 그 땅을 주차장으로 무료로 사용해도 좋다는 말이었다. 단, 조건이 하나 있었다. 1년 52주 가운데 51주는 사용할 수 있지만 1주는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교회는 그 제안을 감사하게 받아들였다. 1년, 2년, 3년 시간이 지나도록 교회는 한 주일을 제외하고 그 주차장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자 교인들 사이에서 작은 불평이 생기기 시작했다. “왜 한 주일은 사용할 수 없는가”, “특별히 사용하는 것도 아닌데 1년 내내 쓰게 해주면 좋지 않을까”. 그래서 교회는 조심스럽게 땅 주인에게 물었다. “왜 한 주일은 사용할 수 없는 건가요.” 그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그래야 이 땅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삶에는 값을 치르지 않고 선물로 누리는 것이 너무나 많다. 사람은 하루에 약 2만번 숨을 쉰다고 한다. 숨을 쉬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숨을 쉬면서도 값을 치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감사하지도 않는다. 너무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얼마 전 필자는 24년간 살던 일반 주택에서 아파트로 이사했다. 그 집에서의 시간은 참 좋았다. 13년 전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 줄기를 따라 아랫마을 하동사람과 윗마을 구례사람들이 어우러져 장을 펼치던 화개장터에서 매실나무 한 그루를 사다 심었다. 봄이 오면 새순이 돋고 열매가 맺히는 모습을 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대문 밖에 심은 벚나무는 해마다 온 동네를 환하게 물들이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밝게 해줬다. 대문 안 작은 정원에 심어 둔 라일락 꽃이 피면 그 향기가 얼마나 그윽한지 모른다. 그런데 아파트로 이사 와 보니 또 다른 감사가 있다. 집이 따뜻해서 좋고 조용해서 좋다. 창문 밖으로 들어오는 환한 햇살도 좋다. 아침마다 승강기에서 만나는 이웃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는 일도 참 반갑다. 환경이 달라졌을 뿐인데 감사의 이유는 여전히 많다. 필자는 매일 하루를 마무리하며 감사일기를 쓴다.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돌아보며 좋은 만남과 가슴 벅찼던 순간을 글로 기록한다. 그렇게 하루를 정리하고 나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행복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게 된다. 몇 년 동안 감사일기를 쓰다 보니 삶이 풍성해졌다. 마음이 정리되고 시선이 섬세해졌다.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하고,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선물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다.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평범한 하루도 기적이 된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 자체는 이미 기적의 연속이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 숨을 쉬는 것, 사람을 만나고 하루를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선물이고 기적이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잊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가끔은 우리 삶에도 ‘한 주일’이 필요하다. 잠시 멈춰 이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 돌아보는 시간 말이다. 그때 우리는 깨닫게 된다. 감사하면 보인다. 그리고 우리의 평범한 하루가 이미 기적이었다는 것을.

[삶, 오디세이] 그렇게 다시 봄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라는 영화가 있다. 영화에서는 계절의 흐름과 더불어 등장인물이 겪는 윤회의 괴로움과 삶의 반복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시간을 다소 특별하게 바라본다. 현대적 시간의 개념처럼 일정 간격을 두고 흐르는 것이 아닌 어떤 현상이나 일이 발생하게 된 원인과 그에 따라 생겨나는 모습에 의해 시간이 흘러간다고 본다. 그래서 과거-현재-미래를 삼세(三世)라고 하여 이어져 있지만 다른 것으로 여긴다. 과거는 현재의 모습을 이룬 토대이고 현재는 미래를 이룰 토대다. 그리고 각각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이어져 있다. 하지만 과거의 과거도 존재하고 그것이 끝없이 과거로 이어져 있기도 하다. 그래서 다른 종교와 달리 불교에는 ‘시작’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시작이 있으면 끝도 존재해야 하기에 불교에서는 ‘무시이래(無始以來)’라고 하여 끝없는 시작(원인)으로 세상이 지금도 이어져 가고 있다고 본다. 그렇기에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제목과 같이 그 봄 뒤에는 다시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항상 찾아오는 듯한 시간과 계절이지만 매 순간이 다르다. 다른 원인에 의해 그 당시의 지금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올해의 이 봄은 작년의 그 봄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리고 이 봄은 올해가 마지막인 봄이기도 하다. 길고 길었던 맹추위가 어느덧 가시고 서서히 봄의 기운이 우리를 감싼다. 세상이 우리에게 봄과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봄은 생명의 계절이다. 산하대지에 온갖 생명이 피어날 때 우리도 함께 피어날 때다. 생명은 태어남에 의한 것이지만 생명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스스로 움직여야 한다. 봄날 한 송이의 꽃이 피기 위해서는 땅을 뚫고 나와 서서히 줄기를 일으켜 꽃망울을 터뜨려야 한다. 그 작은 한 송이의 꽃도 자신의 힘으로 이 모든 것들을 이뤄낸 것이다. 이처럼 작은 움직임이라도 스스로 행한다면 그것은 자신을 일으켜 세워 삶의 꽃을 피우는 원인이 돼줄 것이다. 불교에서 시작을 설하지 않는 이유도 이와 같다. 초월적 존재에 의해 시작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수행)에 의해 어떤 원인을 일으킨다면 그것이 지금의 나를 조금씩 변화시킬 것이고 그 변화는 자신이 바라는 내일의 지금으로 서서히 다가올 것이기에 다름 아닌 자신이 바로 삼세의 원인이며 삼세의 주인공으로 본 것이다. 그렇게 다시 봄이 찾아왔다. 매년 이 시기면 항상 봄이지만 봄을 그렇게만 여긴다면 영원히 진짜 봄은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화창한 햇살이 비치고 대지의 모든 생명이 환하게 반기는 이 봄날에 자신의 봄을 스스로 열어 어느 해보다 따뜻하고 아름다운 시절을 만끽하자.

[삶, 오디세이] ‘왕과 사는 남자’ 흥행 이유

2024년 ‘범죄도시4’ 이후 멈춰 섰던 극장가 천만 관객에 대한 기대감으로 오랜만에 영화계가 들떠 있다. 장항준 감독의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이하 ‘왕사남’)가 개봉 20일 만에 관객 600만명을 돌파하며 흥행 돌풍을 이어가기 때문이다. 이는 천만 사극의 대명사인 ‘왕의 남자’(2005년)보다 빠르고 ‘광해, 왕이 된 남자’(2012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속도다. 2024년 ‘파묘’와 ‘범죄도시4’가 만들어 낸 ‘쌍천만 영화’ 이후 침체됐던 한국 영화계에 왕사남은 단순한 흥행작 이상의 의미다. 이 작품이 과연 극장가의 구원자가 될까. 이제 한국 영화계에는 ‘왕’과 ‘남자’가 제목에 결합하면 흥행한다는 공식이 자리 잡은 듯하다. 이 세 작품은 사극의 전형적인 문법이던 비정한 권력 암투나 남성 중심의 힘 대결에서 과감히 탈피한다. 그 대신 역사의 행간에 숨겨진 천민과 소외된 이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실제 기록 위에 전복적 상상력을 만개시킴으로써 사극의 지평을 새롭게 확장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천민은 절대권력자인 왕과 특별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휴머니티와 공감을 자극한다. 주인공은 유머를 담당하고 이와 대비되는 왕의 고독이 부각돼 감동 스토리가 형성된다. 유머 코드와 감동 코드는 진부하게 들려도 관객몰이에 여전히 힘을 발휘하는 강력한 흥행 코드다. 베테랑 유해진과 신예 박지훈의 연기 앙상블은 그런 면에서 왕사남의 가장 큰 강점이다. 특히 왕사남은 2005년 신드롬을 형성했던 왕의 남자와 평행이론을 형성한 것처럼 기시감을 자극한다. 절대 권력자인 왕과 그 곁을 지키는 소박한 남자라는 파격적 설정, 왕의 남자 속 연산군과 공길이 예술로 교감했다면 왕사남은 유배된 단종과 그의 마지막을 지킨 마을촌장이 음식으로 교감하며 깊은 정서적 관계를 만들어 간다. 화려하고 세련된 K-푸드가 아니라 소박하고 정갈한 밥이 만들어 내는 정서적 위안, 이것이 진정한 K-푸드의 힘이어서 남녀노소 모두가 공감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동한다. 영화는 단종의 비극적인 죽음이라는 역사적 사실 위에 현대적 가치관을 덧입혔다. 모든 것을 가진 고귀한 혈통의 임금도 고꾸라질 수 있다는 냉혈한 사회, 임금과 마을촌장의 관계가 보스와 부하의 갑을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고 어려움을 나누는 진정한 동료 관계로 구축되는 점, 단종과 엄흥도가 보여주는 혈연을 넘어선 유사 부자 서사 등 출세주의, 갑을 관계, 가족주의 등 기존 관념을 뒤흔드는 점에서 영화는 현대성을 투영한다. 영화 외적인 요소, Z세대를 사로잡은 바이럴도 흥행에 불을 지폈다. 왕사남 속 인물의 묘역을 방문해 리뷰를 남기는 온라인 성지순례 바이럴이 개봉 초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중심으로 확산하며 하나의 트렌드를 형성했다. 21세기에는 스크린 외부로 확장된 팬덤의 활약, 즉 영화를 체험하는 팬의 놀이문화가 영화 흥행의 필수요소가 됐다. 영월 관광과 단종 묘역 방문을 축제의 장으로 탈바꿈시킨 Z세대의 참여형 문화는 콘텐츠 소비가 체험과 연대로 진화했음을 증명한다.

[삶, 오디세이] 이 삶도 통역되나요

주변의 추천으로 한 드라마를 봤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두 사람이 ‘통역’을 매개로 관계를 맺고 오해와 이해를 거쳐 사랑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단순한 로맨스를 넘어 여주인공의 과거 트라우마와 내면의 또 다른 인격을 통해 인간의 상처와 기억을 깊이 있게 다룬다. 필자에게 특히 인상 깊었던 장면이 있다. 여주인공이 어린 시절 불안이 시작됐던 방을 떠나 걸어 나오는 장면이다. 그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대로 두고 가도 될까?” 그 순간 화면은 흑백으로 바뀌고 여주인공은 자신의 과거를 더듬듯 천천히 걸어간다. 또 다른 인격이 만들어낸 기억들, 그래서 스스로 온전히 기억할 수 없는 시간과 장소를 지나간다. 화려했던 색채는 사라지고 오직 그의 시선과 발걸음만이 남는다. 그 장면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자신의 또 다른 인격이 만든 삶을 지금의 내가 처음으로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그 시간은 분명 ‘나’의 삶이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에게는 낯선 타인의 삶처럼 느껴지는 시간. 그것을 내 삶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은 얼마나 큰 충격일까. 그 충격은 생기를 잃은 잿빛처럼 흑백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내면의 상태였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장면이 깊은 여운으로 남은 이유는 여주인공이 그 시간을 부정하거나 외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과거를 미화하지도 않고 의미를 억지로 덧붙이지도 않는다. 다만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받아들인다. 그 시간 역시 자신의 일부임을 인정하지만 그 기억이 지금의 자신을 규정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이 모습은 신앙의 여정과도 닮아 있다. 신앙은 과거를 지워 버리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진실하게 바라보는 용기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빛은 과거를 없애지 않는다. 다만 그 의미를 새롭게 비춰 상처가 더 이상 현재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이끈다. 어쩌면 우리 모두 마음속에 각자의 ‘방’을 하나씩 가지고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어떤 이에게는 어린 시절의 상처가 남아 있는 공간일 것이고 또 다른 이에게는 말하지 못한 후회와 불안이 머무는 자리일 것이다. 겉으로는 아무 일 없는 듯 살아가지만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색을 잃은 흑백의 기억들이 남아 있다. 그 방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안에 영원히 갇혀 있을 필요도 없다. 여주인공이 그러했듯 우리 역시 과거의 기억과 상처를 억지로 없애려 하지 말고 그 자리에 두되 그곳에서 걸어 나올 수 있다. 그것은 외면이 아니라 선택이며 부정이 아니라 통합이다. 그 시간 또한 나의 일부였음을 인정하며 더 성숙한 삶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흑백 같던 시간이 다시 색을 되찾는 순간은 거창한 변화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과거를 직면하겠다는 작은 결심, 내면의 방 밖으로 한 걸음 내딛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한 걸음이 오늘의 우리를 조금 더 자유롭게 만들 것이라 믿는다.

[삶, 오디세이] 일상의 틈 여는 ‘영화’

하루를 다 살아내고 나면 우리는 불을 끄고 화면을 켠다. 영화관의 어둠이든, 집 안의 작은 스크린이든 그 앞에 앉는 순간만큼은 잠시 가쁜 호흡을 멈출 수 있다. 바쁘게 밀려오던 일정과 생각들이 한 걸음 물러서고 우리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에 앉는다. 영화는 그렇게 일상의 틈을 연다. 영화의 가장 큰 유익은 삶을 대신 살아준다는 데 있다. 스크린 속 인물의 선택과 실패, 후회와 용서를 지켜보며 우리는 울고 웃는다. 아직 겪지 않아도 될 아픔을 미리 통과하고 언젠가 마주할 감정을 예행연습하듯 건너간다. 영화는 현실에서 도망치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을 더 진지하게 바라보게 만든다. 필자는 두 주 전에 24년간 살았던 단독주택에서 새로운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이삿짐센터가 사다리차를 이용해 전문적인 기술로 아파트 4층으로 짐은 옮겨줬지만 집 안 곳곳에는 정리되지 않은 채 쌓여 있는 이삿짐 상자들을 정리하는 것은 오롯이 아내와 필자의 몫이었다. 일주일간 정리해도 버릴 것과 남길 물건을 쉽게 결정하지 못한 채 몸도 마음도 지쳐 있던 월요일 오후, 아내와 함께 짐 정리를 잠시 멈추고 영화 한 편을 보자고 의기투합해 요즘 박스오피스에서 조용히 역주행하고 있는 ‘신의 악단’이라는 영화를 봤다. ‘신의 악단’은 북한 보위부 소속 장교가 외화벌이를 위해 가짠 찬양단을 조직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휴먼 드라마다. 김형협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박시후, 정진운, 태항호, 서동원 등 개성파 배우들이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해 헝가리와 몽골 등 해외 로케이션을 통해 북한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구현하며 음악과 유머, 감동을 더해 ‘가짜’ 찬양단이 ‘진짜’ 하모니를 만들어 가는 과정을 그렸다. 처음 그들의 이야기는 음악보다 계산에 익숙했고 믿음보다는 형식이었다. 음악은 있었지만 감동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가짜로 진짜 찬양을 반복하면서 점점 더 진짜로 변화했다. C. 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라는 책에서 “우리가 연기하듯 선택한 행동이 결국 우리 자신을 만든다”라며 겉으로 착한 척하는 행동조차 계속 반복되면 실제 인격을 빚어 간다고 말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이런 감동이 있었다. ‘진짜와 가짜를 가르는 기준은 출발선이 아니라 방향’이라는 사실이다. 영화 속 찬양단의 변화는 갑작스러운 기적이 아니라 조금 늦더라도 방향이 맞으면 결국 진짜가 된다는 것이다. 진짜 찬양단이 돼 눈 덮인 산을 오르는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어쩌면 이삿짐 상자들 사이에 숨어 있는 나의 삶과도 닮아 있었다. 아직 다 정리되지 않은 이삿짐처럼 아직 완전하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는 일상 말이다. 빠르게 일상의 시간이 지나가지만 우리는 무엇이 힘든지도 모른 채 다음 일정으로 밀려간다. 새로운 아파트에서는 조금은 속도를 늦추고 방향을 바르게 정하는 삶이 됐으면 좋겠다.

[삶, 오디세이] 오늘도 이어진다

‘연기를 보는 이는 법을 볼 것이며, 법을 보려는 이는 연기를 볼 것이다.’ 불교의 오래된 경전인 중아함경에서 부처님이 자신이 깨달은 법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말하는 ‘연기(緣起)’는 ‘인연생기(因緣生起)’의 줄임말로 인연이 생겨나고 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궁극적인 ‘법(法)’이란 어떤 작용이 일어나는 것은 인연에 의한 것이고 그 인연은 자신과 더불어 생겨나고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즉, 어떤 일이 일어난 것에는 그 원인과 더불어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게 된 작용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법이며 가르침이다. 점차 가족이라는 개념이 옅어지고 있는 요즘이다. 나 혼자 사는 것이나 싱글라이프가 젊은 시절에 멋지게 자신의 버킷리스트를 채우며 살아가는 성공한 모습이라 여겨지고 있다. 결혼을 했어도 성격 및 취향이 조금만 다르면 큰 고민없이 이혼이나 돌아온 싱글로 살아가면 된다고 가볍게도 생각한다. 이 두 가지 유행은 심지어 방송과 미디어를 통해 우리의 안방에서도 전혀 불편함 없이 흘러나오고 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모두가 혼자 살거나 돌싱이 되는 걸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다. 사는 게 힘들어 결혼을 포기하거나 결혼생활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멈추는 것이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처럼 일생의 중요한 결정이 유행과 같이 여겨지고 우리 주변에 아무렇지 않게 일어난다면 이는 분명 사회 문제가 되는 것이고, 지금 분명 사회 문제이기도 하다. 가족의 개념이 옅어진다는 것은 사회가 붕괴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가 붕괴되면 가장 중요한 자신이 머물 곳이 사라진다. 가족은 자신의 보금자리이기도 하지만 사회의 중추이기도 하다. 작은 단위의 가족 한 집이 모여 마을이 되고 그 마을이 사회와 나라와 세상을 이루는 것이다. 또 가족에 대해 가벼이 여기면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바라볼 수 없다. 단순히 내가 공부를 잘해서, 능력이 좋아서 이뤄지는 삶은 어디에도 없다. 가족의 보살핌과 주변의 배려와 믿음이 있었기에 지금의 그런 모습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자신이 이렇게 존재할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지금까지 그 가족이 존재하고 있기에 자신이 태어나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오늘의 생활이 어렵고 지금의 자신이 부족하더라도 그 뒤에는 언제나 가족이 자신을 받쳐주고 있다. 어제가 지나야 오늘이 오고 오늘이 지나가야 내일이 온다는 지극히 당연한 말 속에도 이어짐이라는 이치가 담겨 있다. 이처럼 ‘나’ 역시 홀로 존재할 수도 살아갈 수도 없다. 내 속에는 또 다른 나인 가족이 항상 함께 한다. 가족은 바로 나의 이어짐이다. 한 해의 시작을 온 가족과 함께 맞이할 수 있는 설날이 이제 곧 다가온다. 먼저 떠나가신 분도, 지금 함께 있는 분도, 이제 막 세상에 나온 분도, 모든 분들이 가족으로 자신과 함께 오늘을 이어 가고 있다. 이 오늘에 감사하듯 가족의 인연에 자신이 있음을 감사히 느끼는 2월의 하루가 되자.

[삶, 오디세이] 글로벌 라이프스타일이 된 K-시대극

영상산업이 총체적 위기를 겪고 있는 요즘도 한국 콘텐츠의 기세는 꺾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K’라는 기호는 이제 한국인의 국적성을 넘어 전 세계인이 공유하고 즐기는 하나의 문화적 감각 장치이자 보편적 언어로 진화했다. 과거 한국에서 제작해 해외로 수출하던 일방향 단계를 지나 현재는 타 문화와 융합하고 상호작용하는 이른바 한류 4.0 단계에 진입한 것이다. 드라마와 음악에서 시작된 한류 열풍은 여행, 푸드, 패션, 리빙 등 한국인이 즐기는 삶의 방식 전반에 대한 총체적 관심으로 전이됐으며 세계인은 이를 하나의 세련된 라이프스타일 양식으로 수용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K-시대극’은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기호 K의 의미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 지난해 방영된 드라마 ‘폭군의 셰프’나 현재 방영 중인 ‘은애하는 도적님아’는 이 현상을 잘 보여준다. 현대의 셰프가 조선시대로 타임슬립해 절대 미각의 폭군을 만난다는 폭군의 셰프는 넷플릭스 비영어권 TV 부문 1위를 차지하며 글로벌 신드롬을 일으켰다. 도적이 된 여인과 그녀를 쫓는 조선의 대군이 서로 영혼이 바뀌는 사건 속에서 피어나는 로맨스를 그리는 은애하는 도적님아는 넷플릭스 공개 3일 만에 ‘대한민국 톱10 시리즈’ 부문 1위에 올랐다. 두 작품은 북미 최대 영화정보 사이트 IMDB와 초대형 소셜 뉴스 웹사이트 레딧(Reddit) 게시판에 팬들의 폭발적 시청 소감과 별점 평가를 끌어내며 글로벌 화제를 낳고 있다. 만화적 상상력이 개연성의 문턱을 넘어 ‘로맨스 판타지’라는 장르적 외피를 입을 때 그 허구성은 오히려 신선한 유희가 된다. 두 작품은 각각 K-푸드와 한복의 탐미적인 미학을 현대적 감각으로 투영하며 시청자의 오감을 매료시킨다. 이렇듯 보편적인 장르 문법 위에 한국 고유의 미감을 영리하게 덧칠한 전략은 로컬을 넘어 글로벌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공교롭게도 두 작품 모두 연산군을 상기시키는 궁을 배경으로 하며 대체 역사물로서 공식 역사를 뒤집는 재미, 그리고 한계를 넘어서는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단순한 역사 드라마를 넘어 한식, 한옥, 한복, 한약을 조선 역사라는 패키지로 엮어낸 이 드라마들은 한국의 이미지를 현대적이고 매력적으로 융합한 문화 콘텐츠가 됐다. 과거 문화적 거리는 해외시장 진출에 큰 장애물이었으나 이제 한국의 로컬 특수성은 오히려 대체 불가능한 독보적인 매력 자산이 됐다. 보편적인 장르적 틀 안에서 한국만의 독특한 색채를 전달하는 방식은 글로벌 시청자에게 문화적 교육 효과까지 창출하고 있다. 결국 한류 4.0의 진정한 완성은 한국적 특수성이 세계의 공통 가치와 만나 지속적인 상호작용을 끌어내는 데 달려 있다. 이처럼 역사적 상상력과 K-미학이 결합한 로맨스 판타지는 일시적으로 즐기는 엔터테인먼트 콘텐츠를 넘어 세계가 한국이라는 고유한 브랜드를 경험하고 열광하게 만드는 세련된 창구가 돼가고 있다. 로컬의 특수성을 보편 장르 문법으로 번역해내는 이러한 시도는 앞으로 한류의 글로벌 문화 영토를 확장하는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다.

[삶, 오디세이] 기다림과 용서

2026년 새해가 시작됐다. 많은 이들은 새해를 맞아 새로운 계획과 희망찬 다짐을 한다. 하지만 필자는 올해 그동안 쉽게 꺼내 들지 못했던 한 가지 난제를 마주하고자 한다. 사랑이 누군가와 관계를 시작하게 한다면 용서는 그 관계를 다시 살리는 것이 아닐까. 어느 책에서 용서란 나 자신을 지배하는 그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라 했다. 이 말은 용서를 도덕적 의무나 종교적 요구 이전에 자유를 향한 결단으로 바라보게 한다. 지금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나를 나답지 못하게 만들고 쉽게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과거의 한 사건일 수도 있고 잊히지 않는 기억이나 특정한 사람일 수도 있다. 특히 그 대상은 나 자신보다 타인인 경우가 더 많다. 그래서 용서는 늘 어렵다. 누군가를 용서하는 일도, 누군가에게 용서를 구하고 받는 일도 자존심을 건드리고 마음을 소모하게 한다. 때로는 차라리 외면하고 싶은 삶의 어둠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용서가 없다면 우리는 끝내 자유로워질 수 없다. 분노와 원한을 붙잡은 채 살아간다면 그 어둠은 점점 우리의 삶 전체를 물들이게 된다. 그렇게 본다면 용서는 상대를 위한 행위라기보다 결국 나 자신을 위한 선택임을 알게 된다. 하지만 마음이 준비되지 않았는데 억지로 용서해야 할까. 진심이 없는 용서에 의미가 있을까.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직 분노와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면 말로만 내뱉는 용서는 오히려 용서의 의미를 가볍게 만들 뿐이다. 용서가 되지 않을 때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 내 마음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 그 대신 충분히 시간을 갖자. 마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이성을 되찾을 때까지, 그 대상에 더 이상 과도하게 반응하지 않게 될 때까지 기다려보자.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감정의 바람이 자연스럽게 빠져나갈 때까지 말이다. 힘은 억지로 빼는 것이 아니라 빠지는 것처럼 용서 역시 그렇지 않을까. 억지로 놓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힘이 빠질 때까지 기다리는 용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 기다림의 시간 안에서 본인은 이 한 가지를 기억할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완전히 선하고 의로울 때만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 말이다. 우리 안에 단 1%의 선함, 1%의 용서에 대한 가능성만 있어도 그 가능성을 통해 자비를 일으키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다. 사도 바오로가 전하듯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부족함과 실패 속에서도 끝까지 책임지는 분이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10, 27)는 말씀처럼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용서도 은총 안에서는 가능해질 수 있다. 용서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자유를 향한 길 위에서 언젠가는 반드시 마주해야 할 선택이기도 하다. 그 선택 앞에서 조급해하지 말고 스스로 단죄하지 말며 우리 안의 작은 가능성을 믿고 기다릴 수 있기를 바란다. 그 기다림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자유로워질 것이다. 2026년 새해에는 필자를 비롯해 모두가 자신을 지배하는 그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삶 오디세이] 태도는 관계에서 결정된다

사람을 대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의 능력이나 성과를 중요하게 생각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태도로 쉽게 평가한다. 태도가 중요하다. ‘친절하다. 무례하다. 냉소적이다. 밝다, 어둡다. 적극적이다. 소극적이다’라는 말은 모두 태도에서 상대방이 느끼는 감정이다. 그런데 태도가 개인의 의지나 성품이나 교육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심리학은 오래전부터 ‘태도는 혼자 만들어지지 않고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고 했다. 애착 이론의 창시자 존 볼비는 인간이 세상을 대하는 기본 태도는 어린 시절 맺은 ‘안전한 관계’에서 결정된다고 봤다. 신뢰할 수 있는 대상이 있을 때 사람은 탐색하고, 도전하고, 기다릴 수 있다. 그러나 관계가 불안정하면 태도는 조심스러움이 아니라 방어가 된다. 이 이론은 교실, 가정, 직장 어디에서나 반복 확인된다. 안전한 관계 안에 있는 사람은 말투가 낮고 선택이 느리다. 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늘 평가받고 비교당하는 환경에서는 태도가 예민해지고 날이 선다. 그것은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환경을 대하는 태도의 결과다. 신약성경 중에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 빌립보서의 말씀이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으로 여러분 모두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께서 내 증인이십니다.”(빌 1:8) 연애편지 마지막 문장으로 적으면 당장이라도 결혼 승낙을 받아낼 수 있을 정도의 애절한 표현이다.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왜 이토록 부드러웠던 것일까. 우리 중에 바울을 만나 본 사람은 없지만 바울이 쓴 성경을 읽어 보면 대체로 바울은 근엄하고 엄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유독 빌립보서에서 발견하는 바울의 모습은 아주 상냥하고 부드러운 모습이다. 왜 그럴까. 이유는 간단하다.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을 그런 사람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한 사람의 목회자의 스타일은 그 교회가 만들어간다. 같은 목사님을 두고도 어떤 사람은 ‘인자한 목사님’이라고 하는 반면 어떤 교인은 ‘엄격한 목사님’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목사님이 이중적인 태도로 교인을 대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두 사람의 평가가 다른 것은 목사님과 맺은 관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빌립보교회는 바울에게 기쁨을 주는 교회였고 고린도교회는 바울에게 근심을 주는 교회였다. 그래서 고린도교서에서 발견하는 바울은 아주 엄격하고 단호한 모습이다. 태도는 관계에서 결정된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사람의 태도를 너무 쉽게 판단하지 말고 “왜 저렇게 행동할까”보다 “저 사람은 지금 누구에게도 안전하지 않은 건 아닐까” 이 질문을 먼저 해 보자. 신뢰 없는 조직에서 태도는 계산이 되고 의미 없는 일상에서 태도는 무기력이 된다. 태도는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태도를 바꾸고 싶다면 훈계보다 관계를, 지적보다 신뢰를 먼저 맺어야 한다. 사람은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 속에서만 가장 인간다운 태도를 보일 수 있다. 그래서 새해 목표는 ‘웃으면서 말하기, 먼저 인사하기, 악수할 때 눈을 맞추기’로 좋은 관계로 사람을 만나려 한다.

오피니언 연재

지난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