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외손봉사

지난 13일에 대법원은 자녀가 어머니를 따라 성과 본관을 바꾼다면 어머니의 종친회 가입도 가능하다고 판결했다. 혹 양성평등을 외면하거나 이 문제에 관심이 없어 딸은 종친회에 가입할 수 없다고 알던 사람들도 한번 주목했으면 한다. 이제 확실히 종친회도 부계혈족의 단체가 아니게 됐다. 하지만 종친회 구성원들의 대부분인 60대 이상 남성 임원들과 회원들도 충격이 크지 않고, 2005년 호주제 폐지 때의 일부 선배들처럼 개탄하지도 않을 것 같다. 어쩌면 오히려 종친회가 의도와 다른 구태의 이미지를 벗는 계기가 되리라 전망하지 않을까 한다. 이미 2005년에 우리는 13일의 판결을 예비했다. 당시에 논란이 없지 않았으나 여성단체들의 주장을 배척하지 않고 개인의 존엄성과 양성평등을 지향하는 헌법정신에 의거하여 뒤늦게나마 기존 호적법을 가족관계등록법으로 개정하기에 동의했던 것이다. 호주에서 개인으로 작성 기준을 변경했고, 무엇보다 어머니의 성을 따를 수 있게 했으며, 필요에 따라 입양과 혼인 등 관계증명을 따로 제공받을 수도 있게 했다. 그래서 이 판결이 이슈가 되는 건, 애초의 부계 성과 본관을 어머니 쪽으로 바꾸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종친회 가입까지 시도하였으며, 지난 개정을 포함해 해당 종친회가 두루 검토한 끝에 가입을 사절하자, 종원 자격을 부여해달라며 그 지위 확인 소송을 제기한 이웃이 우리의 한 사람으로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런데 이 현실화는, 지난 역사를 살펴보면 그리 낯설지 않다. 조선 후기 이후에는 이행이 축소되었지만 부모의 유산 분배에서 자녀 구분 없는 균등이 원칙이었고, 자녀가 여러 제사를 분담하거나 특정 제사는 윤번으로 담당하기도 했다. 또 그 원칙에 따라 ‘외손봉사(外孫奉祀)’를 인정했던 것이다. 이번 판결과 외손봉사는 우선 보기에 다르다고 하겠지만 권리와 의무 승계의 양성평등이란 본질은 동일하다. 그러고 보니 종친회란 결국 세대를 이은 한 가정의 확대가 아닌가. 공동 조상의 유업을 계승하고 돈목을 도모한다는 취지도 동일하다. 21세기 현재에도 외손봉사 전통을 잇는 유명 무명 가문들이 산재한다. 여전히 부계 선조의 묘소처럼 수묘하고 제사를 봉행하며, 선대 외가의 천선사업에 부조하기도 한다. 가문의 이런 전통을 유래한 당시 사정을 가문의식의 한 정체성으로 유지하며 모계를 존중하는 정서를 지피기도 하는 것이다. 이번 판결을 외손봉사와 겹쳐 보며 환영한다. 우리 시대에도 다시 이렇게 가문의 모계도 조명하면서 아직 미진한 양성평등에 작으나마 이벤트가 되었으면 한다. 2002년부터 도산서원 상덕사의 향사에 여성이 참여할 수 있고, 이후 퇴계의 기제(忌祭)에도 여성의 참사가 가능하다. 부인의 내조 없이 남편의 공업(功業)이 없다는 견지에서 정부가 국민의 의사를 대리하여 2018년에 우당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1889-1979) 여사와 석주 이상룡의 손자 이병화의 부인 허은(1907-1997) 여사에게, 2019년에는 석주의 부인 김우락(1854-1933) 여사에게 신산했던 내조 그 자체를 구국의 공적으로 인정하여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는 사실도 이 기회에 한번 상기했으면 한다. 김승종 시인•前 연성대 교수

[문화카페] 극장은 커뮤니티의 중심

우리나라는 대도시가 아닌 인구 20만명 안팎의 중소 규모 도시에도 1천석 이상의 대규모 극장이 건립됐다. 지역의 문화 향유권을 위해 건립된 많은 수의 극장이 제 역할을 한다면 그리 걱정스러운 현상은 아니다. 앞서 1993년 서울 예술의전당이 완공됐는데, 정권 임기 말에 무리하게 극장 완공을 진행하면서 예기치 않은 여러 문제가 발생했다.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의 공사를 진행하던 중 암반층 때문에 설계대로 시공했다가는 당초 계획한 완공 시점을 도저히 맞출 수가 없었고, 결국 토월극장의 경우 한쪽 무대를 포기하고 설계를 변경해 급히 완공했다. 예술의전당은 지역 극장의 롤 모델이 돼서 양재동 예술의전당 도면을 그대로 차용해 지역마다 극장이 지어졌다. 그런데 토월극장의 어쩔 수 없었던 상황으로 시공됐던 사라진 무대 한쪽이 지역의 극장에서도 고민 없이 똑같이 시공됐다. 충분히 옆 무대의 공간을 살려 극장의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지을 수 있었음에도 큰 고민 없이 한쪽 무대가 사라진 극장을 마구 지어버렸다. 공연 전문가들은 지역의 이런 공연장을 보면서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당시 국내에서는 극장 건축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도 적었고 서양의 극장 도면을 빌려서 건축하는 수준이었기에 이런 해프닝이 벌어졌다. 지역의 극장이 각 지역의 예술과 특수성을 고려해 시공되지 못하고 지역마다 거의 같은 도면으로 같은 형식의 극장만이 계속 지어진 것도 이런 이유다. 특히 각 자자체는 극장의 규모에만 신경을 써서 인근 도시보다 더 큰 규모의 객석 수를 자랑하는 극장을 경쟁적으로 건립했다. 결국, 지어진 극장을 정상적으로 가동할 수 있는 콘텐츠가 부족했고 극장은 만성 적자 운영으로 애물단지가 돼버렸다. 지금도 지역의 극장을 탐방하면 대부분 공연이 없는 날이 많고 공연시간 이전에는 굳게 문을 걸어둔 경우가 많다. 지역 시민들에게는 이런 거대한 극장은 매우 낯선 공간이고 지역의 특색과 전혀 어울리지 않은 거대한 건축물에 불과한 경우가 허다하다. 성공적인 극장의 운영을 위해 극장은 지역 커뮤니티의 구심점이 돼야 한다. 극장은 시민이 쉽게 만나고 문화를 체험하는 커뮤니티의 중심이 돼야 한다. 극장은 단순히 공연을 보러 가는 곳이 아니고 시민의 자기 발전을 위한 체험의 장이 되어야 하고, 지역의 커뮤니티 중심이 되어야 극장의 온전한 기능을 하리라 본다. 그리고 극장은 지역 고유의 문화와 특성을 살려 운영돼야 한다. 식당에 가더라도 여러 가지를 다 파는 식당이 아니라 한 두 가지의 전문 메뉴를 운영하는 식당이 더 대중에게 믿음을 주듯 극장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느 지역의 어느 극장에 가면 어떤 콘텐츠를 꼭 만날 수 있다는 믿음을 시민에게 줘야 한다. 그래야 지역을 찾아오는 관객도 생기고 지역을 대표하는 컨텐츠도 창작될 것이다. 규모만을 자랑하는 건축물로서의 극장이 아닌, 진정으로 시민이 주인이 돼 커뮤니티의 중심이 되는 극장이 이젠 필요하다. 구태환 수원시립공연단 예술감독·국립인천대 공연예술학과 교수

[문화카페] 시스템 밖에서 꿈을 좇는 아이들

영국 프리미어리그에서 활약하는 손흥민이 득점왕을 차지한 날. 꿈만 같은 쾌거에 ‘국뽕’이 차오른 나는 온종일 관련 영상과 뉴스를 끼고 살았다. 그러다 끝내 내가 사는 춘천에 있는 손흥민체육공원을 찾기에 이르렀다. 성지순례 비슷한 느낌으로. 참고로 춘천은 손흥민의 고향. 어라? 차를 몰고 공원에 들어서면서 어리둥절했다. 내가 아는 공원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커다란 사자상이 양옆에 서 있는 대문을 통해 들어서자 이내 드넓은 주차장이 펼쳐졌다. 한데 그게 전부. 공원임에도 휴게 공간은 보이지 않았고 휴식을 즐기는 사람 역시 없었다. 심지어 주차장 외의 나머지 구역엔 ‘관계자 외 출입금지’ 팻말이 붙어 있었다. 이게 무슨 공원이야? 의문은 금세 풀렸다. 알고 보니 이름만 공원일 뿐 실제로는 축구 학교였던 것이다. 손흥민이 170억 원을 들여 설립한 손축구아카데미가 바로 여기였다. 그의 아버지가 운영하고 있으며 시내에서 제법 떨어진 한적한 시골에 위치해 있다. 주위는 온통 숲. 애초 입지 자체가 시민들이 휴식을 취하기보다는 학생들이 자연에 파묻혀 축구를 연마하기 좋은 곳. 대안 학교를 겸하고 있다기에 궁금증이 일어 검색해봤다. 커리큘럼이 특이하다. 축구 단체훈련은 오후에 두 시간만 진행되며 나머지는 선수가 자율적으로 연마하고 보완하는 구도. 일과의 상당 시간을 외국어 교육에 할애하는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해외에 진출하려면 외국어가 필수이고, 혹 축구 선수로 실패하더라도 외국어가 탁월하면 어떻게든 사회에서 자립할 수 있다는 계산. 거기에 독서, 인성 지도가 곁들여진다. 내가 10대일 때의 운동부 친구들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수업엔 들어오지 않고 그들끼리 어울렸으며 폭력, 일탈 사건도 꽤 심했다. 운동 재능은 있지만 공부 못하고 가정형편 아쉬운 이들이 태반. 이렇게 표현하면 편견을 부추기는 것 아니냐는 힐난을 들을지도 모르겠지만 사실이 그런 걸 어쩌겠나? 체육 선생님들은 아예 대놓고 그런 친구를 찾아다녔다. 운동부가 되는 순간 공부와 작별하고 그들만의 리그로. 그런 문화를 바꾸는 게 손축구아카데미의 취지란다. 자질 뛰어난 이를 선발한 다음 프로 선수로 성장하는 데 필요한 교육에 집중. 운동선수도 교양을 갖춰야 한다며 독서와 인성을 강조하고, 혹 프로 선수가 되지 못해도 사회에서 자립할 수 있는 방향을 지향한다. 나름의 철학 아래 실속만 추구하는 셈이다. 물론 커리큘럼이 이렇기에 중고등학교 졸업장은 안 나온다. 검정고시를 희망하면 지원한다고. ‘관계자 외 출입금지’ 팻말을 모른 척하고 들어가 보니 드넓은 축구장이 펼쳐졌다. 마침 훈련이 한창이었다. 여느 유소년 축구교실처럼 웃고 즐기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호통이 오가는 엄격하고 진지한 분위기에서 기합이 단단히 들어가 있었다. 그 아이들에게 축구는 ‘그깟 공놀이’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인생을 내던진 것. 도박일까? 그런 속성이 없는 건 아니나 그리 표현하고 싶진 않다. 불완전한 체제에서 벗어나 나름의 효율성을 추구하는 도전 정도로 해두자. 따지고 보면 손흥민도 한국의 시스템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성장한 케이스다. 100% 순혈 한국인이지만 한국이 낳았다고 표현하기 애매한 이유. 그래서인지 그의 경기와 행보를 보면 이런 생각마저 든다. ‘쟤는 대체 왜 한국인인 건데?’ 홍형진 작가

[문화카페] 바닷가재가 있는 정물

최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러시아산 대게와 바닷가재 가격이 내린 적이 있다. 바닷가재는 로마 시대에 요리법이 있을 정도로 고급 음식 재료였다. 특히 다양한 요리법으로 현대 미식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음식이다. 그러나 17세기 미국에서는 바닷가재는 너무 흔한 음식 재료였다. 바닷가에 끊임없이 떠밀려 내려오는 바닷가재는 빈민층이나 당시 유럽에서 이주해온 이주민들의 주식이 됐다. 그리고 별다른 요리법이 없어 맹물에 바닷가재를 쪄서 먹는 방식이 대부분이었는데, 몇 번은 몰라도 계속해서 먹는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수많은 이민자들은 고향의 친지들에게 자기들은 매일 맛없는 바닷가재만 먹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이러한 바닷가재가 미국에서 고급 음식이 된 것은 프랑스 혁명 이후 미국으로 이주해 온 프랑스 요리사들과, 20세기 할리우드 영화에서 고급 레스토랑에서 바닷가재를 먹는 모습들이 등장하면서 비로소 대중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하면서다. 바닷가재는 그림에도 등장했는데 낭만주의 미술의 선구자로 추앙받는 외제 들라크루아(Eug〈00E8〉ne Delacroix)의 정물에 바닷가재가 등장한다. <바닷가재가 있는 정물>은 들라크루아가 정물화를 많이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희소한 작품으로 손꼽힌다. 화폭 중앙에 사냥물들인 새, 토끼, 도마뱀들이 날것 상태로 쌓인 그림인데 엉뚱하게도 조리된 바닷가재도 같이 뒤섞여 있다. 이 그림에 대한 주요 해석은 당대의 시대를 역행하는 정치인들에 대한 비판의 의미가 있다고 본다. 들라크루아는 현대미술의 토대가 된 낭만주의 미술의 대표작가로 선과 규칙을 중시하는 고전주의 미술과는 달리 낭만주의는 색채와 문학적 영감을 중시하는 장르다. 들라크루아는 당대의 퇴폐시인 보들레르, 시대를 앞서간 자유의 피아노 시인 쇼팽과 친분을 유지했기 때문에 그의 생애도 열정에 가득 찼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도 있겠지만 실상은 그와는 정반대다. 귀족 집안이었지만 어린 시절 부모를 일찍 여의고 누나의 손에서 자란 들라크루아는 평생을 작업에만 몰두한 화가였다. 결혼도 하지 않고 그림을 그렸으며 작업하는 순간이 인생 최고의 행복이라고 생각한 모범생이었다. 그리고 사회의식도 발달해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을 제작했는데, 프랑스 삼색기를 든 여인이 민중들을 이끌고 혁명을 이끄는 모습은 자유를 갈망하는 인류의 모습을 표현한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낭만주의는 사실상 혁명과 변혁의 장르다. 프랑스 혁명은 실패했지만 ‘자유, 정의, 평등’이라는 민주주의의 가치를 우리에게 각인시킨 성공한 혁명이다. 낭만주의는 현실에서 찾지 못한 이상향을 과거의 신화나 이국의 유토피아에서 현실화시키고자 했다. 그리고 그러한 매개체가 바로 예술이다.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꿈을 예술에서라도 이루고자 했던 낭만주의의 이상과 한계를, 풍경화와 정물화가 뒤섞인, 날것들과 조리된 것이 뒤섞인 혼돈의 상황을 표현한 <바닷가재가 있는 정물(1827~27)>이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김진엽 수원시립미술관장

[문화카페] 지역 아트마켓

지난 12일부터 15일까지 부산 벡스코에서 ‘아트부산’ 미술작품 페어가 열렸다. 페어는 단순히 전시를 넘어, 작품을 구매할 수 있는 미술시장을 말한다. 아트부산은 최근 호황인 미술시장 분위기를 적극 반영해, 관객을 만나는 다양한 준비를 진행해왔다. 그 결과 올해로 11회를 맞으며, 자타공인 국내 3대 아트페어로 입지를 다지게 됐다. 준비 단계에서는 국내 유수의 갤러리 뿐 아니라 뉴욕, 베를린, 런던, 일본, 싱가폴 등 미주, 유럽과 아시아의 해외 갤러리가 참가했다. 참여 작가로는 국내 미술계 슈퍼스타인 박서보, 이건용, 정상화, 유영국을 시작으로 해외 초청작가인 데이비드 호크니, 알렉스 카츠, 안토니오 곰리, 아니쉬 카푸어 등 세계시장에서 주목받는 작가들의 작품까지 선보였다. 이뿐 아니라 MZ 세대의 수요를 고려한 영향인지 1990년대 생의 신진작가 작품도 고루 전시했다. 간혹 갤러리 부스마다 반복되는 작품도 있었으나, 전체적으로 다양한 작가를 발굴하고 소개하려는 노력이 돋보인 페어였다. 이런 준비는 흥행이라는 성과를 낳았다. 아트부산 주최 측은 방문객 10만2천여 명, 760억원 매출 성과를 발표했다. 이는 작년 350억원 매출규모의 두 배나 성장한 모습이다. 실제로 필자가 아트부산을 찾았을 당시, 해운대 입구에서부터 아트부산의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벡스코 진입이 어려울 뿐 아니라 입장 대기 또한 한 시간 정도 걸릴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부산시민들의 관심도 있었지만 전국에서 아트부산을 향해 달려왔다. 이유가 무엇일까? 단순히 미술시장에 관한 관심 때문일까? 필자는 대한민국 제 2도시라는 부산, 그리고 해운대라는 특수성을 이야기 해보고 싶다. 타 도시도 그렇지만 특히 수도권에서 부산을 방문할 때 당일치기로 다녀오기는 쉽지 않다. 이럴 경우 보통 1박을 계획하기도 하는데, 부산은 더 특별하다. 주변의 볼거리로 2박 이상을 머무르며 관광과 예술을 즐기는 휴양의 도시로 거듭나는 중이다. 이런 이유로 기관들도 미술애호가들의 마음을 붙들기 위한 노력을 쏟는다. 아트 부산 주변 미술관과 기관에서는 다채로운 예술 기획을 선보였다. 대표적으로 벡스코 옆 부산시립미술관은 탄탄한 기획으로 페어와는 다른 전시를 보여주었다. 롯데백화점·롯데갤러리는 올해 처음 시그니엘 부산 호텔에서 ‘롯데아트페어부산’을 개최했다. 오후7시 기관들이 문을 내리면, 해운대는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맛집 앞의 긴 줄, 해변 곳곳의 작은 파티들, 모래사장에서의 맥주타임 등 해운대의 낭만을 만끽할 수 있다. 다양한 관광자원을 갈고 닦은 지역에서 잘 준비된 예술행사를 개최함으로써 도시의 활력이 살아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였다. 부산의 상쾌한 바닷바람을 뒤로 한 채, 돌아 나오며 생각에 잠겼다. 경기도에서 이런 아트페어 행사가 가능할까? 우선 이런 대규모 규모의 행사를 열 수 있는 행사장이 있을까? 있다고 해도 예술행사를 진행하면서 도시의 매력을 느낄만한 관광자원이 있을까? 전국에서 몰려드는 인파를 감당할만한 숙박업소는 있을까? 이 모든 것이 충족됐다면, 서울에서 열리는 예술행사들과는 어떤 차별성을 가질 수 있을까? 수많은 질문을 가슴속에 품으며, 나의 자리에서 작은 일이지만 다음 전시기획을 시작한다. 이생강 협업공간 두치각 대표

[문화카페] '퇴계의 길'에서 길을 묻다

시공(時空)은 삶의 제약이자 축복, 인간은 필멸의 나그네. ‘길’은 그래서 삶이 경유하거나 삶을 인도하는 도(道)의 비유로 활용된다. 지난 4월4일부터 17일까지 13박 14일 ‘제3회 퇴계선생 귀향길 걷기’(서울 경복궁-안동 도산서원 276㎞)가 열렸다. 1546년 46세에 퇴계 이황선생은 고향 건지산 기슭에 양진암(養眞庵)을 지으며 은퇴를 결심했으나 이후 여러 사정으로 출사했고 사퇴를 반복했다. 1568년 음력 7월에 즉위 2년차 17세 선조가 소환하자 다시 상경해 경연에서 강의하며 음력 12월에 ‘무진육조소’와 ‘성학십도’를 제진하고는, 왕과 대신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이듬해 1569년 음력 3월4일 마침내 은퇴 아닌 은퇴를 결행했다. 그 길의 마지막 두 구간을 따라 걸으며 두 가지를 생각했다. 첫째, 이 길이 ‘퇴(退)’의 의미를 성찰하는 길이지만, 왕에게 제시한 ‘무진육조소’와 ‘성학십도’도 엄연히 종생토록 퇴계가 세상에 간절하게 제시한 길이고, 왕에게만 국한된 길도 아니며, 오늘 우리 모두 봉건의 고도(古道)로 외면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무진육조소’는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으로 위미(危微)한 선악시비의 구별을 단행하고 정일하게 중용을 견지하며 그 역행(力行)으로 성세(盛世) 구현을 촉구한 논설이다. ‘성학십도’는 위민 정치의 대의를 구현하기 위한 천도 실현을 인륜과 덕업으로 해명하고 그 기본으로 심성 수양을 사단칠정과 이기를 설명하면서 ‘경’(敬)으로 그 일관된 추구를 권유한 도설이다. 시비와 의리, 공익의 그 전제에 아랑곳하지 않거나 당리당략의 고의성 왜곡까지 감행하며 아전인수를 거듭하는 근년 이래 이곳의 정치. 국민 전체를 바라보고 국민을 위한 대의에 충실해야 할 정치인들과 공직자는 당연히 되새겨야 하는 자산이고, 특정 진영에 자신을 고착시키며 자타를 훼손하는 팬덤에게도 역시, 아니 더 필요한 양식이다. 자기긍정을 확보하고 상대와 신뢰하며 통합다운 통합으로 나아가려면 아무래도 어떤 고양이 필요한 상황이다. 둘째, 퇴계가 은퇴하여 전일(專一)하게 가고 싶어 했던 그 길은 어떤 길이었나. 1565년에 지은 ‘도산십이곡’의 후육곡(後六曲) 기사(其四)편에 이미 정리돼 있었다. “당시에 녀던 길을 몇 해를 버려두고, 어디 가 다니다가 이제사 돌아온고, 이제나 돌아오나니 딴 데 마음 말으리.” 즉, 일찍이 지향했으나 온전히 실천하지 못했으며 근년 들어 또 방치한 가고 싶은 그 길은 우주와 인간의 진리, 그 궁극을 탐구하는 길이었다. 다른 편들에서 보이는 강호사물과의 물아일체 대등조응도 그 한 갈래이다. 오래 이어진 제자 육성은 그 자연스러운 한 결과였다. 우리는 퇴계가 아니며 시대와 환경도 아주 다르다. 그러나 퇴계의 그 탄식에서 우리는 문득, 자신에게 분노하며 삶의 진정성을 그리워하는 내면의 강렬한 비애를 느낄 수 있다. ‘유한한 삶의 시간, 이런저런 핑계로 시시하게 소모하지 말고, 이제 하고 싶은 일을 제대로 하자…’ 그리하여, 아 혹 그럴 수 있어, 퇴계가 임종 때까지 가꾼 매화에는 미치지 못해도 그 비슷한 무엇이라도 단 한번 피울 수 있다면, 우리의 짧고 비루한 삶을 구원하는 크나큰 영광이 되리. 도산서원(원장 김병일)이 주관해 퇴계의 옛 그 길을 최대한 복원한 ‘퇴계선생 귀향길’, 혼자도 좋고 친구들과도 좋고, 다시 걸어야 하리. 김승종 시인·전 연성대 교수

[문화카페] 예술을 민중에게

독일을 대표하는 최고의 극장 폴크스뷔네(민중무대)는 통독 이전 동베를린을 대표하는 극장으로서, 동구의 연극에 늘 새바람을 일으키고 혁명처럼 문제작들을 선보였다. 폴크스뷔네가 유럽의 연극을 선도했던 이유는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극장의 명성도 있었지만 폴크스뷔네의 예술의 계급 저항정신에 바탕을 뒀던 극장 운영 방식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폴크스뷔네는 1914년 노동계급의 문화 향유권을 보장하기 위해 설립된 극장이다. 특히 동독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독일의 세계적인 연출가 프랑크 카스트로프가 예술감독으로 부임하면서 폴크스뷔네의 정신으로 다시 회생, 실험적인 작품을 여러 차례 성공시켜 극장의 문을 닫을 위기를 극복했다. 그의 선언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예술을 민중에게!”. 돈이 없어 대중이 예술을 누리지 못한다면 이는 결국 예술을 대중으로부터 고립시킨다고 생각했기에 최소 비용으로 폴크스뷔네의 작품을 민중들이 향유할 수 있도록 티켓 가격을 대폭 인하했다. 적어도 돈이 없어 보고 싶은 작품을 못 보는 상황을 없애도록 했다. 수준 높은 극장의 작품을 많은 대중이 즐길 수 있도록 했다. 폴크스뷔네는 통독 이후에도 이런 운영 방침을 지속 운영했다. 폴크스뷔네의 영광을 지켜보면서 우리나라의 상황을 돌아보게 됐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공공극장은 자립성을 강요받고 자본주의 경쟁의 구도 아래 최대한의 수익을 올려야 성과를 인정받는 극장과 공공 예술단체로 자리매김한다. 재정자립도가 떨어지는 극장들은 따가운 질책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다. 재정 자립에 대한 부분이 점차 중요해지면서 공공극장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새로운 수익을 올리는 방안에 혈안이 돼 있다. 비싼 주차요금을 비롯한 식당 등 부대 상업공간을 최대한 많이 임대해 임대소득을 올리기도 하고, 대관료를 높게 책정하거나 혹은 부대사용료 항목을 최대한 많이 만들어 대관 단체에게 부담을 주기도 한다. 물론 방만한 운영으로 부실하게 운영되는 공공단체와 극장들은 문제다. 그러나 재정자립도만을 문제 삼고 이를 향유하는 시민들의 만족도에 대한 부분을 놓치는 게 더욱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특히 시민의 알토란같은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공의 극장과 단체의 경우 시민의 문화 향유 권리를 더 고려해야 할 것이고 혹시라도 소외받는 계층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이들의 문화향유의 기회를 마련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수준 높은 작품을 저렴한 가격으로 시민에게 제공하는 것이 바로 공공의 극장과 단체가 해야 할 책무다. 이것이 바로 예술의 저변을 확대시키는 더욱 가장 올바른 방법이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폴크스뷔네의 슬로건인 “예술을 민중에게”를 가슴에 새겨본다. 구태환 수원시립공연단 예술감독

[문화카페] 학문의 언어, 대중의 언어

드라마 제목 때문에 소셜미디어가 시끌벅적하다. ‘너에게 가는 속도 493㎞’라는 제목이 문제시됐다. ㎞는 거리의 단위이기에 속도를 의미하려면 시간을 더해줘야 한다는 게 골자. 맞는 말이다. 시속 493㎞, 493㎞/h 등으로 표기해야 정확하다. 한데 이게 오류 지적을 넘어 감정싸움으로 번졌다. ‘문과가 또...’라며 비웃는 사람이 늘어가자 그를 불편해하는 분위기. 문과는 모르고 이과만 아는 내용은 아니라며. 여기까진 그러려니 했다. 한데 속도 대신 속력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보고선 고개를 갸웃했다. 일반적인 언어 관습을 무시한 주장이니까. 물리학 정의에 따르면 속도는 속력에 방향이 더해진 것이다. 우리가 속도라고 표현하는 대부분이 엄밀히 따지면 속력. 한데 이를 현실에 그대로 적용하긴 어렵다. 고속도로에서 자기 혼자 반대 방향으로 100㎞/h로 달리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물리학 정의대로면 이 또한 속도위반이다. 속력은 규정을 지켰어도 방향이 틀렸으니까. 하지만 현실에서 이걸 속도위반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냥 역주행이라고 부른다. 학문의 언어를 대중 전반에 강요하는 게 온당할까? 경제학을 전공하며 비슷한 사례를 여럿 봤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공공재다. 표준국어대사전의 공공재 항목엔 이런 예문이 있다. “에너지는 공공재라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될 때 올여름의 전기 부족도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제학 관점에서 이는 틀린 예문이다. 경제학에선 비경합성, 비배제성 둘을 충족해야 공공재로 정의하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쓴다고 해서 저 사람이 쓸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지 않고(비경합성), 누군가가 쓰는 걸 억지로 막을 수 없어야 한다(비배제성). 에너지는 둘 다 충족하지 않는다. 전기, 가스 등은 한정된 자원을 나눠 쓰는 데다 요금 체납 시 얼마든지 끊어버릴 수 있으니까. 이를 두고 적지 않은 경제학 교수가 수업 시간에 열을 올린다. 대중은 무식하고 언론은 나태하다며. 그러나 표준국어대사전은 ‘공중(公衆)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물건’으로 간단히 정의하고 있고 일상에서도 그리 활용된다. 좀 넓게 확장하자면 음악의 불협화음도 비슷하게 볼 수 있다. 갈등이 심해서 화합에 이르지 못하는 상황을 두고 ‘불협화음 심각하다’, ‘불협화음 마땅히 해소해야’처럼 표현하는 걸 종종 본다. 그러나 음악 전공자에겐 꽤 다른 온도로 읽힐지도 모른다. 불협화음 역시 음악을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이고, 장르에 따라선 그걸 얼마나 영리하고 절묘하게 활용하느냐에서 실력이 판가름 나기에. 그런 음악을 지향하는 이들에게 불협화음은 악(樂)의 일부일 뿐 악(惡)이 아니다. 사례를 들자면 끝이 없다. 모든 전공에 다 있기에 다들 할 말이 있을 테다. 한발 떨어져서 조망하면 자기 분야에서는 ‘그런 뜻 아니라고!’라며 으스대지만 남의 분야에선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쓰는 형국. 그렇다면 조금 관대하거나 겸손해지는 게 어떨까 싶다. 틀린 부분에 대한 지적은 주고받되 특정 학문의 언어를 대중 전반에 강요하지는 말자는 뜻이다. 꼭 그러고 싶다면 대중과 동떨어져 누구도 헷갈리지 않을 언어로 대체하는 게 합당하지 않을까? 홍형진 작가

[문화카페] 첼리니의 소금 그릇

벤베누토 첼리니(1500-1571)는 르네상스 시대 대표적인 조각가이자 금세공사였다. 많은 작품들이 있지만 첼리니의 이름을 지금까지 유명하게 만든 것은 소금 그릇 때문이다. 1543년에 제작된 <황금의 소금 상자>는 순금으로 조각된 소금 그릇으로 프랑스 왕에게 헌납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30㎝가 안 되는 이 금세공품은 한쪽에는 벌거벗은 바다의 신과 맞은편에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여인이 배치된 형태인데, 그 세부의 정교함과 아름다움은 누구라도 감탄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었다. 소금은 인류 문명의 발전과 함께한 음식물이다. 원시 수렵시대에서 농경시대로 접어들면서 야생 동물의 고기 대신 농사를 통해 생산된 곡물이 인간들의 주 식량원이 됐다. 그러나 야생동물들의 고기에는 풍부한 소금이 있었지만 곡물에는 소금이 없었다. 그래서 인간은 생존을 위해 소금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 됐다. 특히 내륙을 중심으로 형성된 국가들에게 소금은 국가의 안정을 위해 꼭 필요한 물품이었던 것이다. 고대 국가들의 흥망성쇠도 바로 이 소금 때문으로 소금은 최초의 국제적인 무역 상품이 됐다. 이탈리아 작은 어촌 마을인 베니스가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상업 도시가 된 것도, 17세기 세계 경제를 지배한 네덜란드의 성공도 바로 이 소금 때문이었다. 또한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는 특성 때문에 믿음과 신의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서 배신자 유다 옆에 소금 그릇이 엎어져 있는데, 이것은 바로 배신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첼리니는 미켈란젤로의 뒤를 이은 위대한 조각가로 평가받았지만 살인, 강도, 여성 편력 등 개인의 생활사는 엉망진창이었다. 특히 말년에 그러한 내용을 솔직하게 기록한 자서전을 발간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첼리니의 자서전에 감동해 독일어로 번역을 햤고 첼리니를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예술가로 칭송했다. 자유분방한 그의 삶이 마치 천재의 비사회적 전형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후대에 첼리니의 자서전을 바탕으로 한 오페라가 제작되기도 했다. 최근에 첼리니의 소금 그릇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2003년에 비엔나박물관에 전시된 소금 그릇이 도난당한 것이다. 당시 100만 유로의 현상금을 걸고 소금 그릇을 찾으려고 했지만 찾을 수가 없었는데, 2006년 비엔나 북쪽의 숲속에서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소금 그릇이 발견됐다, 이후 미술관 측이 소금 그릇을 보험에 들었는데 보험금이 대략 800억원 정도였다. 첼리니는 르네상스 전성기에 살았던 사람으로 이전 세대가 하지 못했던 더 흥미롭고 비범한 것을 만들려고 했다. 르네상스 시대 에술가들은 당시의 혼란스러운 시대상에서 예술가라는 새로운 사회적 지위를 정립해야 하는 부담감(-책을 많이 읽어 고전에 대한 상당한 지식도 가지고 있어야 했다-)과 선배들인 중세 장인들의 방랑벽과 방탕한 생활 습관을 벗어나지 못한 애매한 상황이 바로 첼리니의 생애인 것이다. 김진엽 수원시립미술관장

[문화카페] 지역에서 문화공간을 운영할 때, 가장 어려운 점

필자는 평택시 신장동에서 지역문화공간을 운영하고 있다. 신장동은 ‘송탄’이라는 옛 지명으로 더 유명하다. 이곳은 주한미군 오산공군기지(K-55)가 주둔해 있는 전형적인 기지촌이다. 미군을 찾아 전 세계에서 찾아온 다양한 국적의 다양한 인종이 모여 사는 곳이다. 이국적이고 색다른 풍경과 문화를 지역주민, 예술가들과 소통하고 싶어서 덜컥 문화예술공간을 열었다. 2020년부터 운영하며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지역에서 문화공간을 운영할 때, 가장 어려운 점’이다. 코로나19 발생 후 관객을 대면으로 만나기 어려운 점부터 공간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비용 마련, 행정 서류처리까지 하나하나가 모두 어려운 점이다. 하지만 가장 어려운 점은 지역에서 같이 일할 ‘동료’를 만나는 일이다.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이 있더라도 사람 몇 명이서 할 수가 없다. 같이 일할 기획자, 작가, 코디네이터, 활동가, 디자이너, 예술가, 프로그래머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동료를 지역에서는 만나기가 어렵다. 특히 신장동지역은 평택 본도심과 많이 떨어져 있고, 미군부대가 있다 보니 주변에 살고 있는 청년, 전문가 수가 현저히 적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모두 서울 등 다른 지역에서 모셔와야 하는데, 시간 대비 비용이 문제다. 가장 좋은 것은 지금 지역에서 만나, 장기적으로 일하는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은다. 하지만 왜 우리 지역에는 문화예술 전문가를 만나기 어려울까? 평택에는 순수예술과가 있는 대학이 없다. 당연히 예술에 종사하고자 하는 이도 적고, 능력을 펼칠 무대도 적다. 인력난을 겪어 보니, 청소년·청년과 함께 ‘문화를 만들어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성장 프로그램을 운영하게 됐으나, 관심도가 현저하게 적었다. 그렇다면 왜 우리 지역의 청년들은 문화예술에 관심이 없을까? 평택은 매우 큰 도시지만 미술관·박물관은 없고, 문화 경험을 할 공간도 매우 적다. 평범한 사람도 1년에 한 번 마음 먹고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방문하기 어렵다. 학교에서는 예술이 단순한 그림이나 음악으로 치환되고, 부모 또한 예술을 접촉해 본 경험이 별로 없다. 경험해 본 적이 없으니 문화예술이 무엇인지, 어떤 것을 경험해야 하는지도 가늠할 수가 없다. 이미 태어날 때부터 문화를 가깝게 접할 수 있는 서울과 지방의 차이가 정해진다. 아마 이런 문제는 비단 평택시만이 겪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지역이 계속 문화소외지역으로 분류되거나, 문화예술 경험의 기회가 적은 채로 있어도 되는 것일까? 필자는 자기 집 앞에서도 다양한 문화예술의 경험이 삶의 아름다움을 알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믿고 있다. 우리 지역에서도 문화예술 경험이 늘어날 수 있도록 여러 분야의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수요자인 주민의 역할이다. 수요자가 많아지고 요구가 많아져야 지방 정부가 움직일 수 있고, 공급자가 많아질 수밖에 없다. 가장 먼저 주민의 입장에서는 문화예술기회가 적은 것을 인지해야한다. 그리고 공공의 문화적 혜택이 있을 때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수요가 많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 지역문화 공급자로서는 단순한 체험 프로그램이 아닌 양질의 문화예술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제대로 실현해야 한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이 지방정부의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이다. 곧 지방선거가 시작된다. 벌써부터 선거 열기가 느껴진다. 현재 각 지역의 예비 후보자들이 등록을 하고 있는데, 이번 선거에서는 부디 지역의 문화예술에 관심이 있는 후보자들이 입후보하길 바라본다. 특정 정치인 한 사람의 관심으로 갑자기 지역의 문화예술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여러 사람들의 힘이 모여 그 지역의 문화예술이 독특한 힘을 발휘하는 날이 오기를. 그날이 오기를. 마음깊이 기다려 본다. 이생강 협업공간 한치각 공동 대표·두치각 대표

[문화카페] 일송 김동삼 선생의 지향

언제부턴지 ‘광복절(光復節)’ 명칭이 부담스러웠다. 일제 강점 35년은 우리 5천여년 유장한 민족사에서 점 하나에 불과하고, 그 전후의 자주성과 성취를 가리기도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2022 <일송김동삼(一松金東三)선생기념사업회>가 오는 13일에 백범기념관에서 발족식을 개최한다며 초청장을 배부했다. 인용된 선생의 유언,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 하느냐. 내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를 읽었다. 선생을 비롯해 당대 독립투사들의 막막한 운명, 그 통한과 비원을 공감하며 분노로 우울했다. 선생은 또 옥사하기 3년 전에 “내가 죽을 이곳은 풀밭이나 산중에서 죽은 무명의 동지들을 생각하면 ‘과분한 장소’”라고 탄식했다. 두 말씀의 깊고 도저한 함축에 감읍하며 무명 열사들께도 죄송했다. 1907년 이래 선생의 30여년 독립운동은 ‘무장투쟁’과 ‘민족통합’으로 요약된다. 특히 1919년에 남만 한족회 총무사장과 서로군정서(독판 이상룡)의 참모장을 역임하며 신흥학교를 신흥무관학교로 확대해, 이청천 신팔균 김경천 이범석 등이 독립전쟁의 무장으로 전환하는 계기도 마련했고, 그 전후에 김산 김원봉 강화린 등 뒷날 독립운동사에 큰 자취를 남기는 3천5백여 투사를 육성했다. 대소 무장투쟁을 촉진하는 한편, <대한통의부>(1922.8), <상해 국민대표회의>(1923.1), <정의부>(1924.12), <삼부통합 혁신의회>(1928.12), <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1929.5) 등을 결성하며 민족의 독립투쟁 역량을 통합하거나 통합하는 노력에 헌신했다. 무장투쟁 내부에도 갈등과 불화가 상존했다. 좌우 갈등뿐만 아니라 학통과 반상에 따라 입장이 달랐고, 만주 거주지역의 지연과 관련 세속권력도 형성돼 있었으며, 심지어는 복벽(復〈8F9F〉)과 민주가 맞서기도 했다. 단일전열로의 통합에는 살신성인 수준의 헌신과 신뢰가 요구됐는데, 선생은 그 대의명분에 누구보다도 충실했다. 특히 참의부 신민부와의 통합에서 끝내 기득권들이 충돌하자 1911년 만주 망명 이래 피땀을 바쳐 결실한 정의부에서 탈퇴까지 했으며(1928.5), 통합 동지 김좌진 장군이 피살되면서 좌우이념이 끝내 문제돼도 그래도 좌절하지 않고 <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 중앙집행위원장 활동의 일환으로 <전만한인반제국주의대동맹창립주비회>에 집행위원으로 가입하기도 했다.(1930.3) 1931년 10월5일 하얼빈에서 피체된 선생은 1937년 4월13일 경성형무소에서 60세로 순국했다. 걸출한 고승이자 『님의 침묵』의 위대한 시인인 만해 한용운은 선생의 시신을 심우장에 안치하고 영결식에서 유례없이 대성통곡해 주변을 놀라게 했다. 오늘 국내의 여러 분열과 남북의 갈등을 생각하면, 선생의 지향은 여전히 우리 민족에게 대의(大義)이고, 공동이념으로 필요하다. 광복절, 이 명칭 또한 남북이 서로 국체를 인정하거나 아니면 통일에 합의하는 그날 이후라야 변경할 수 있을 것이다. 김승종 시인·전 연성대 교수

[문화카페] 몸의 연극

연극은 더는 대중매체로 인정받지 못하고 드라마의 영역에서는 새로운 매체에 그 위치를 내주어야 하는 상황에 부닥쳐 있다. 문학에 종속돼 있던 연극은 드라마가 없는 새로운 방식의 연극으로서 발전하는데, 역사적 아방 가르드부터 시작된 연극의 재연극화가 고민되기 시작했다. 다른 어떤 매체로서는 도저히 대체 불가능한 연극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표현방식을 고안하기 시작했고 이런 경향은 최근 더욱 급속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처럼 연극을 ‘재발견’하고 연극에서만 고유하게 존재하는 독창적인 표현의 잠재력을 ‘재발견’하면서 자연스럽게 연극만이 가능하고 다른 매체로는 대체 불가능한 고유한 특질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됐다. 텍스트는 무대에서 생성된 여러 이미지의 기호처럼 기호화돼 표현되기 시작했다. 후설의 ‘현상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진 ‘지각’의 방식은 무대에서 ‘몸’의 관심을 끌어냈다. ‘몸’은 수행성을 이끌고 ‘몸’을 통한 수행성이 새로운 연극에선 중요한 사항이 됐다. 즉흥적인 에너지의 생성은 새로운 지각방식의 퍼포먼스를 창조하게 했다. 퍼포먼스는 시각적이고 청각적인 정교한 구조로서 한정된 시공간의 연극환경에 새로운 소통의 확장을 이루어 왔다.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배우는 더는 어떤 인물을 재현하거나 창조하는 연기를 하지 않는다. 다만 무대 위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현존을 제공하는 인간이다. 수행성의 의미에서 연극은 관객의 새로운 지각방식을 연구하고 나아가 공연의 물질성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공연은 결과물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닌 하나의 창작행위의 과정으로서 존재한다. 이제 연극은 재현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 무대 위에 놓여 있는 모든 대상의 현상적 물질성을 부각시키고 가시적인 무의미성을 강조한다. 이제 몸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지각의 대상인 것이다. 미디어의 결합은 공연예술에서 다양한 실험으로 이루어졌는데 매체와 매체를 결합해서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충돌과 균열을 만들어 냈다. 미디어가 만들어 내는 새로운 연극성에 대한 실험이 활발하게 이뤄지는 현대연극에서 텍스트는 그 힘을 상실하기 시작했고 드라마가 절대적인 연극성이라고 여겨왔던 믿음은 새로운 형태의 체험이 연극성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관객을 감상적인 범주의 객체로 위치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 주체로서 지적으로 사유하게 하는 예술이 오늘날 연극예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관객은 자신의 감성을 자극하는 연극에 취해 있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고 권리와 책임을 주장할 수 있는 시민이 중심이 되는 시민 중심 사회를 만들어가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 연극은 관객이 어떤 문제에 대해서 사유하거나 혹은 근본적인 문제에 성찰하는 기회를 공연이 제공해야 한다. ‘어떻게 우리의 관객을 사유하게 할 것인가?’ 그러면서 ‘어떻게 감동하게 할 것인가?’ 나아가 ‘감성의 부분과 이성의 부분을 어떻게 연결시켜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답을 사유해 본다. 구태환 수원시립공연단 예술감독

[문화카페] 예능보다 재미있는 다큐

재미의 커트라인이 점점 올라가고 있다. 예전엔 그럭저럭 웃고 즐겼던 영상과 농담에 지금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다. 시간이 흐르며 과거의 웃음 포인트가 부적절하고 구태의연해진 탓도 있지만 꼭 그 때문만은 아니다. 뭐가 됐든 예전보다 훨씬 강하고 빠르고 확실한 걸 원한다. 어설픈 재미보단 차라리 노잼이 낫다. 그러면 노잼이라고 비웃으며 재미있게 놀 수 있으니까.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인 <치어: 승리를 위하여>는 이런 트렌드에 정확히 부합하는 콘텐츠다. 다큐의 방법론을 취하고 있지만 그 어떤 예능보다 재미있다. 담긴 모든 이야기가 실화지만 소설보다 더 소설 같다. 대중이 현대 엔터테인먼트에 기대하는 요소를 두루 담아낸 수작. 에미상 3개 부문 수상에 걸맞은 완성도. 소재 선정부터 영리하다. 미국 대중문화의 꽃이라고 불리는 치어리더. 언뜻 생각하기에 이들은 주연보다 조연에 가까운 존재다. 경기장의 선수를 응원하는 게 목적이니까. 실제로 치어리더라는 표현은 경기장 밖에서 응원이나 하는 이 같은 격하 의미로 사용될 때도 종종 있다. 그러나 이 다큐를 보고 나면 그런 말은 쏙 들어간다. 자신의 모든 걸 걸고 도전하는 대학생 청춘들을 보면 어느덧 그들의 삶을 응원하게 된다. 의아해하는 이를 위해 말해두자면 여기 담긴 치어리딩은 우리가 야구장, 농구장 등지에서 보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 춤추고 흥을 돋우는 걸 넘어서 곡예 수준으로 하늘을 날아다니고 땅을 가로지른다. 남녀가 어우러져 펼치는 종합 체조로서 화려하고 아찔한 연기의 반복. 영상으로 보면 박진감과 스릴이 가득한데 이 역시 재미 요소 중 하나다. 소재 선정의 승리. 대단한 육체적 능력과 매력을 가졌지만 그들 모두는 덜 여문 채 미래를 불안해하는 보통의 20대. 도전과 좌절을 반복하며 경쟁하고 화합하는 과정을 보고 있으면 자연스레 인간의 한계와 의지를 묻게 된다. 아울러 다양한 배경, 개성, 가치관의 사람들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게 이끄는 리더십의 중요성과 덕목도 되새기게 된다. 다큐 본연의 목적을 너끈히 수행하는 가운데 예능 이상의 재미까지 담아냈다. 치어리딩 경기와 훈련은 역동적이고 화끈하게, 각자의 삶과 일상은 사려 깊게 접근한 덕분에 재미와 감동이 쉴 새 없이 교차한다. 자극적으로 편집된 짧은 영상 외엔 도통 재미를 못 느끼는 사람, 뭘 봐도 작품성과 진정성을 피곤할 정도로 따지는 사람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럼에도 마지막으로 짚어야 할 것. 여기 담긴 게 그들 삶의 전부일 리는 없다. 시즌1에서 긍정적인 이미지를 얻어 전국구 스타 반열에 오른 선수 한 명이 이후 미성년자 성착취 혐의로 구속돼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시청자는 물론 제작자, 동료, 감독까지 죄다 충격에 휩싸인 스캔들. 그동안 자신의 또 다른 자아를 완벽하게 숨기고 산 것이다. 시즌2에선 이 내용까지 다룬다. 결과적으로 이 또한 작품의 메시지 중 하나가 되고야 말았다. 다들 어느 정도는 연기하며 산다는 것. 물론 그게 추악한 범죄여선 곤란하지만. 홍형진 작가

[문화카페] 악마의 술 ‘압생트’

인상주의 미술은 전통미술과 현대미술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면서 현대미술의 서막을 열었다고 평가받는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빛과 강렬한 색채를 통해 화면을 요동치게 만들면서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화면을 만들어냈다. 처음에는 난해한 화풍 때문에 대중들이 거부감을 보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에드거 드가(1834~1917)는 인상주의 운동을 이끈 대표적인 인물이지만, 그는 추상적인 방식보다는 사실주의를 선호했다. 드가의 그림 중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1876)>이라는 그림이 유명하다. 19세기 후반 프랑스 파리의 카페에 있는 두 남녀를 그린 작품이다. 화면에서 두 인물은 각각 앞을 보고 있고 그 앞에는 술병과 잔이 놓여져 있다. 그런데 그림을 자세히 보면 어색함이 느껴진다. 마치 현재의 그림이 더 큰 그림의 일부분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잘라내기 기법으로 말없이 앞을 응시하는 두 남녀의 소외감과 고립감을 강조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처음에는 이 그림은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소재와 인상주의 화풍이 절묘하게 맞아들어간 드가의 역작으로 평가받게 됐다. 그런데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탁자 위에 놓인 술병은 당시 19세기부터 20세기 초엽까지 프랑스에서 유행했던 술인 압생트(Absinthe)라는 술이다. 압생트는 허브를 갈아 증류시킨 술로 도수가 40~80도가 넘는 독주인데 에메랄드 빛 녹색이 특징으로, 그 색깔 때문에 녹색 요정이라는 별칭이 따라다녔다. 이 별칭이 더욱 유명해진 것은 압생트 술을 마시면 헛것이 보이는 환각 체험을 하기 때문이었다, 압생트가 처음 나왔을 때는 가격이 비싸 부르주아들이 주로 마셨지만, 이후 가격이 하락하면서 1870년경에는 모든 계층이 마시는 국민 술이 됐다. 당시 파리는 산업혁명을 통해 겉으로는 풍요로운 것처럼 보였지만 그 풍요는 노동자들의 피와 땀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또한 프랑스의 개방적인 문화정책 때문에 많은 예술가들(보헤미안)이 파리로 몰려들었고, 가난한 예술가들은 고단한 삶을 잊기 위해 녹색 요정에 몸을 맡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반 고흐가 압생트를 너무 많이 마셔 정신착란에 빠졌다는 주장이 있는 것처럼, 압생트는 독성 때문에 20세기 초 금지되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이것은 중독성을 강화하기 위해서 불순물을 섞어 제조한 일부 불량 압생트 업자들 때문이었다. 19세기 말의 세기말적 불안은 당시 전 유럽을 잠식하고 있었다. 그 불안과 공포는 역으로 현대미술의 촉매제가 됐지만, 고단한 현실에 몸과 마음이 지친 예술가들은 악마의 술 압생트가 들려주는 달콤한 노래에 귀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김진엽 수원시립미술관장

[문화카페] 세련된 예술가 정책을 말하는 문화 대통령을 바란다

2011년 1월. 문 밖에 며칠째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남는 밥과 김치가 있으면 문 좀 두드려 달라는 쪽지가 붙어 있었다. 영화감독 겸 시나리오 작가인 고(故)최고은 씨는 사체로 발견됐다. 생활고로 죽음을 맞았다는 이 예술가의 이야기는 매일 뉴스에 대서특필 될 정도로 세간의 관심을 받았다. 한 부류는 이렇게 슬픈 죽음이 있냐고 애도하고 다른 한 부류는 아르바이트라도 해서 돈을 벌지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모든 예술가가 매일 전시가 있고, 공연이 있진 않아서 그것만으로 온전히 생계를 유지하기는 매우 어렵다. 작품 발표를 하기까지는 순수하게 준비를 하고 있다가, 발표를 한다. 그런데 이 작품 발표라는 것이 꼭 돈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다. 운이 좋아서 공공기관의 후원으로 장소 협찬이나 작품 제작비를 받을 수는 있지만, 예술가의 사적비용으로 사용할 수는 없다. 필요한 경비만 지원이 된다. 그렇다면 이 예술가는 작가로서의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 다른 정규직 일자리를 알아보거나, 단기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기도 한다. 아르바이트도 정해진 시간에 맞추고 장기적으로 일할 수 있어야 채용이 되는데,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업 때문에 수시로 다양한 약속과 사건이 발생해 이마저도 하기가 어렵다. 그렇다보니 예술가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술을 활용한 소위 일거리를 받아 생계를 유지한다. 이 일거리는 말이 좋아 프리랜서지, 언제 나에게 일을 줄지 모르는 희망 고문 수준에 가깝다. 이런 연유로, 한 예술가의 죽음 이후에 정부 차원에서 예술가 실태 조사에 착수했다. 그리고 그 해 말 고(故)최고은 법(예술인복지법)이 제정되고, 예술인 복지 재단이 설립됐다. 올해까지 11년 동안 시행돼 왔지만 현재까지도 예술인복지법에 대한 의문이 많다. 첫 번째 난관은 누구를 지원할 것인가?였다. 이 법은 예술가들의 사회 안전망을 구축해 최소한의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기본 입장인데, 예술가들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로 규정해야 하는지 논의가 일었다. 국가기관에서는 가장 손쉬운 신청-증명이란 방법을 택했다. 예술가가 예술 활동 인정 신청을 하면, 예술인 복지 재단이 그것을 검증하고, 증명서를 발급해주는 시스템이다. 공공기관에서 하는 사업에 응모하거나, 실행하려면 이제 예술인증명이 필수가 됐다. 현재 예술가들에게 자신의 작업을 이어 나가는 것보다, 이 예술인 증명을 받는 것이 더 큰 과제가 되어버렸다. 물론 긍정적인 부분도 존재한다. 이 예술인 증명을 통해서 고용보험도 늘려가고, 사회안전망 구축을 이루어 나가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전히 행정 시스템 안에서만 진행 중이다. 획기적인 변화 방법 이외에 어떻게 굶어 죽는 이들을 살릴 수 있을까? 3월9일은 앞으로의 5년을 결정하는 중요한 날이다. 누구를 뽑아야 할지, 난감한 부분이 많았다. 우리 삶에서 왜 예술이 중요한지, 대한민국에서 지역 불균형 없이 문화예술을 즐길 방법을 말하는 대통령 후보가 없을지. 이번 후보들의 공약집을 살펴보면 예술가와 예술 분야에 관한 정책도 별로 없을뿐더러, 예술가를 덮어놓고 불쌍한 사람으로 상정하고 단순한 복지, 묻지 마 퍼주기 정책으로 일관하기도 한다. 예술 분야만 그렇겠냐만은 좀 더 세부적인 대상에게 어떤 연유로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를 통해서 삶의 질을 상승시킬 수 있을지, 정치로 해결하는 대통령이 나와 주길 바란다. 이생강 협업공간 두치각 대표

[문화카페] 103년 전 곤궁한 희망의 봄날

31절 오후에 여주 여강(驪江) 강변을 산책하던 소설가 선배가 전화기 너머에서 말했다. 그리고 말이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도 저 하늘에 우리의 보통 이성과 다르지 않은 존재가 있어 내려다 본다면, 하이고 저런 잡스러운 명분으로 개미 같은 것들이 글쎄 또 서로. 그 전장에서 폭발과 화염, 총성과 사상(死傷)이 속출하고 있다. 21세기에 일어난 20세기의 비극. 자주 독립국가의 의향을 이웃 대국이 탐탁하지 않다고 전면 침공하다니. 민간인도 가리지 않기에 범죄에 해당하는 이 국가폭력은 갈등 자체에서가 아니라 푸틴정권의 속성에서 기인한다고 할 것이다. 독재 연장에 유리해지려 갈등을 부풀리며 과도한 애국주의를 짐짓 악용한 사태가 아닌가. 우리는 같은 시각으로 중국의 시진핑 체제가 야기한 홍콩탄압과 서남공정 동북공정 등 이해 못할 부조리 확대의 정체를 엿볼 수 있다. 오늘 한반도의 고질인 북핵의 이면도 마찬가지다. 오는 3월9일 새 정권 수립을 앞둔 이 나라의 상황은 1950년대 자유당 시절 선거풍토보다 낫지 않다. 선출에 염치 있는 호소가 아니라 권력을 획책하는 정략과 정쟁으로 그 경계가 터질 듯 아슬아슬하다. 우리가 지겨워하고 짜증을 내도 여전히 상대의 비전을 왜곡하고 무관한 억지 비난을 부착한다. 민주주의 권력의 기본은 무엇보다 상대 배려와 공공 윤리성이 아니던가. 숱한 사연과 고통으로 민주화 장정을 거쳐 온 우리가 그 윤기(倫紀) 퇴행을 탄식해야 하다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이번 대선 정국의 말미에서 우리는 모두 103년 전 곤궁한 희망의 봄날에 우리의 선조들이 생명을 걸고 절실하게 희구했던 염원을 준열히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허식의 하에서 이해상반한 양 민족 간에 영원히 화동(和同)할 수 없는 원구(怨溝)를 거익심조(去益深造)하는 금래 실적을 관하라. 용명과감(勇明果敢)으로써 구오(舊誤)를 확정(廓正)하고, 진정한 이해와 동정에 기본한 우호적 신국면을 타개함이 피차간 원화소복(遠禍召福)하는 첩경임을 명지(明知)할 것 아닌가. 잔포하고 간교한 일제에게도 이러했는데 그 간곡한 심정과 의지를 받들어야 할 의무가 있는 여야가 서로 그렇게 못 할 리가 없다. 국가의 다행 앞에서 여야의 이해란 게 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지지를 달리 해도 대선 이후를 더 걱정한다. 최근에 여당은 정치개혁 통합정부를, 야당은 헌법의 공화를 준수하며 국민통합을 이루겠다고 공언했다. 만약 새 정권이 그러지 않거나 어떤 정치세력이 협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대선 과정에서 감행한 추태까지 소급해 탄핵할 것이며, 31정신을 훼손하고 농락한 일제(日帝)와 비슷한 무리로 민주의 역사에 기록할 것이다. 김승종 시인전 연성대 교수

[문화카페] 예술의 공공성

최근 우리나라의 문화 예술이 전 세계에서 엄청난 주목을 받고 있다. 한국의 문화 예술이 이처럼 전 분야에 걸쳐 세계의 주목을 받은 적이 없었기에 이런 현상이 얼마나 지속 가능할까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문화 예술은 국가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파급효과도 상당해 국가가 정책적으로 육성하고 심혈을 기울여 관리하는 분야가 됐다. 한국 시장을 넘어 세계 시장의 중심에 선 우리의 문화 예술이 앞으로도 지속 가능하게 성장하고 지금보다 더욱더 세계 시장에서 파급력을 가져가기 위해선 소수 엘리트 중심의 예술이 아닌 예술시장 저변이 확장돼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 우리 문화 예술의 체질은 실상 날로 더 허약해지고 있다. 승자독식주의 시장에서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한 우수한 문화 예술이 명맥을 이어가지 못하고 사그라들고 있고, 더욱이 코로나19 팬데믹이 장기간 지속됨으로써 국내 시장에서 힘을 가지지 못한 예술가들의 활동은 더욱 위축돼 가고 있다. 우리나라의 문화 예술 지원 전략도 소수 엘리트에게만 집중해 지원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어서 문화 예술 현장에서 활동을 이어가는 현장 예술인들의 창작 의지도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예술의 공공성 측면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예술의 공공성이 건강하게 확장될 때 우리 예술 시장의 저변도 자연스레 확대될 수 있고 예술이 대중의 삶에 깊이 연결돼 건강한 시민 의식을 고취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의 공공성을 담당해야 할 일선 공공기관의 예술단체들은 더이상 외면받는 그들만의 예술이 아닌 시민과 함께할 수 있는 예술을 창작해야 한다. 또한, 지역의 예술가들과 협업을 이뤄내어 공공의 힘으로 현장에서 명맥을 이어가는 이들에게 힘을 실어 주는 역할도 지속적인 프로그램으로 이어나가야 할 것이다. 공공단체에 속한 일부 소수의 예술가에게만 평생을 보장하는 직장을 제공하는 형태로서 존재하는 공공의 단체가 된다면 지역과 시민에게 외면을 받을 것이다. 지역의 예술가들과 자유롭게 소통하고 교류해 지역의 예술 발전과 저변을 확대하는 데 노력을 기해야 할 것이다. 특히 예술을 교육받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얼마든지 공공의 재원으로라도 지원해 수준 높은 예술교육이 이뤄져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의 예술교육은 소수 엘리트만을 대상으로 하고, 이를 교육받기 위해서는 상당한 교육 비용이 지출된다. 일반인이 재능이 있다고 해 교육 받을 수 있는 현실이 아니다. 능력 있는 인재들이 교육의 기회조차 부여받지 못하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공공 예술단체가 그간 지역 사회에서 받았던 혜택의 환원 의미로라도 인재 양성에도 관심을 가지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 또한 예술의 저변을 확장하는 긍정의 효과가 엄청나기 때문이다. 건전한 저변이 바탕이 되지 않는다면 기초가 약한 화려한 건축물과 같기 때문에 한국의 문화 예술이 가장 독창적이면서 대중적이라고 인정받고 있는 바로 지금이 시민예술을 장려하고 예술이 시민의 삶 일부가 될 수 있도록 예술의 공공성을 고민할 시기라고 생각한다. 구태환 수원시립공연단 예술감독

[문화카페] 명예와 영광 과거 속으로

야구선수 이대호의 은퇴 투어가 논란이다. 이번 시즌이 끝나면 은퇴하는 그에게 모든 구장에서 축하받으며 작별을 고하는 이벤트를 허락하느냐를 두고 찬반이 엇갈리고 있다. 성적과 기여만 보면 만장일치로 찬성해도 이상하지 않을 듯한데 그에게 자격이 있느냐?고 묻는 목소리도 드세다. 논란이 계속되자 이승엽과 추신수는 대호가 못하면 앞으로 누가 할 수 있겠나?는 견해를 내놓았고, 이대호 본인은 은퇴 투어는 고사하고 은퇴식도 안 하겠다. 대신 모든 구장을 돌며 팬 사인회를 치르고 싶다는 의사를 타진했다. 찬반 여부를 떠나 이런 생각이 든다. 한국 사회는 업적을 기리고 유산을 후대에 전하는 데 유난히 소극적이라는. 지금까지 은퇴 투어를 가진 야구선수는 국민타자로 불릴 만큼 입지가 절대적이었던 이승엽 한 명밖에 없고, 명예의 전당은 부산시 기장군에 건립하기로 결정한 게 2014년이지만 돈 문제로 인해 아직 착공도 못했다. 축구의 경우는 2005년에 명예의 전당을 신설하며 차범근, 히딩크 등 일곱 명을 헌액자로 선정했으나 이후 업데이트는 없다. 미국은 반대다. 야구를 위시한 주요 스포츠는 물론이고 음악, 만화, 게임, 장난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명예의 전당이 존재한다. 매년 축제 같은 분위기에서 헌액자, 수상작을 선정하며 대중의 관심을 모으고 업계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과거의 영광과 추억을 현재로 적극 끌어들여 세대 간의 교점을 만드는 데 열심인 것이다. 이런 노력은 프랜차이즈를 좀 더 공고히 만들어 시장에 선순환을 야기한다. 헌액, 선정 과정은 매우 엄격하지만 소극적이거나 적대적이진 않다. 유산을 만드는 과업이라는 합의 아래 적극적으로 임하고 대중도 함께 즐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20여 년 전 어느 음악원에서 잠시 공부하던 시기의 일화가 떠오른다. 당시 기타를 가르치던 강사가 수업 시간에 아래처럼 이야기한 적이 있다. 당신은 기타를 지미 헨드릭스처럼 치는군요!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떻겠어요? 기분 째지겠지요? 그런 사람은 당장 한국 떠나서 미국으로 가야 할 겁니다. 하지만 당신은 기타를 ○○○처럼 치는군요! 같은 말을 들으면 어떨까요? 나는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을 것 같아요. 그냥 구닥다리잖아요. ○○○은 한국 록의 대부로 불리는 기타리스트로 대중에게도 인지도가 높다. 업적과 공헌이 대단한 인물임에도 수업 시간에 이런 이야기가 스스럼없이 오갔고 반박하거나 불쾌하게 여기는 학생은 없었다. 모두 농담으로 여기며 웃어넘겼다. 외국 거장들한텐 어림없지 같은 분위기가 만연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 한국 록을 듣는 사람도 있어? 하며 얕잡아보던 기류도 은근했다. 존경의 정서는 딱히 느끼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돌이켜보니 한국 사회의 압축판 같다. 과거의 영광과 공헌은 구닥다리, 퇴물로 치부되기 일쑤고 그 가치와 추억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꼰대 소리를 듣는다. 물론 극복하고 떨쳐내야 할 것도 수두룩하지만 그 와중에 기리고 계승할 만한 무언가에는 함께 가치를 부여해야 하지 않을까? 엄격한 건 얼마든지 이해하나 소극적이거나 적대적인 분위기는 아쉽다. 홍형진 작가

[문화카페] 대리석 설탕

왜 로즈 셀라비는 왜 재채기 하지 않지?(1921)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작가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작품이다. 마르셀 뒤샹이 누구인가? 전시장에 변기를 출품해 미술계를 경악시켰고 모나리자의 얼굴에 수염을 그려 넣어 미술계를 모독한 인물이다. 셀라비 역시 범상치 않은 작품으로, 새장 안을 각설탕 모양의 152개의 대리석 육면체들로 가득 채우고, 그 위에 의료용 체온계와 오징어뼈를 올려놓은 형태이다. 대중들에게 이해되는 작품을 거부한다는 뒤샹의 선언처럼 이 작품은 대중들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렇다고 무의하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묘한 작품으로 1936년 파리의 초현실주의 미술 전시회에 출품돼, 파푸아 뉴기니의 주술 장식물과 푸앙카레 연구소의 수학이론 도해 사이에 전시되기도 했다. 뒤샹은 레디메이드(Readymade)라는 개념을 전파했는데, 레디메이드는 기성품을 뜻하는 것으로 수공예라는 핸드메이드와 반대되는 것이다. 뒤샹은 레디메이드를 통해 기존의 미술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시각예술 개념을 정립하고자 했다. 예술작품과 대량생산된 일상 용품의 경계를 허물고 그 경계선상에서 새로운 예술의 유희를 추구하는 것이 바로 뒤샹의 레디메이드인 것이다. 셀라비 역시 레디메이드 작품인데 무게에 대한 암시(대리석), 약속된 달콤함(가짜 각설탕), 저지된 비상(飛上, 오징어 뼈와 새장), 대리석 조각의 차가움을 의미하는 온도계 등으로 구성돼 있다. 다른 뒤샹의 작품들처럼 이 작품도 수많은 해석과 논란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제목의 셀라비는 뒤샹을 지칭한다. 뒤샹은 여장을 자주 했는데 사진작가 만 레이가 그 모습을 촬영한 뒤 뒤샹에게 보여줬고, 뒤샹은 그 인물에게 로즈 셀라비란 이름을 붙였다. 1920년대 미국 사회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논란이 사회적 문제로 등장했고 뒤샹 역시 그러한 사회적 흐름에 동참한 것이다. 뒤샹의 예술적 의도는 여성과 남성이라는 편견, 그리고 그 편견의 경계를 넘나드는 유희를 통해 사회와 예술을 새롭게 환기 시키자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 보면 무의미하고 또 한편으로 심오한 셀라비에는 왜 설탕이 중심으로 등장한 것일까? 설탕은 사탕수수로 만들어지는데, 사탕수수가 처음 재배된 곳은 남태평양 뉴기니섬이지만 설탕을 처음으로 제조한 곳은 인도다. 인도에서 서쪽 이집트로 동쪽으로는 중국까지 전파되면서 설탕은 꿀을 제치고 대표적인 감미료가 됐다. 중세시대 이슬람제국을 통해 서유럽에 전해진 설탕은 초기에는 향신료로 분류돼 비싼 값으로 팔렸다. 특히 종교개혁으로 수도원에서 재배하는 꿀의 양이 줄어들고 서유럽의 차문화가 발전하면서 설탕 가격은 급등하기 시작했다. 콜롬버스의 신대륙 발견으로 서인도제도에서 사탕수수 재배가 시작되면서 서인도제도는 설탕의 공급지가 됐다. 그러나 설탕을 제조하는 과정에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또 사탕수수재배는 농업이지만 수확 후 설탕을 제조하는 과정은 플라스틱이나 강철을 만드는 것처럼 분업화 조직화가 필요한 공업이었다. 그래서 유럽의 제국들은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만들어 중남미에서 설탕을 만들게 했다. 설탕의 달콤함은 꿀의 몇 배이지만 그것은 순전히 노예들의 눈물,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달콤함이었다. 마르셀 뒤샹은 셀라비에 대해 말했다. 이걸 보시죠. 이것은 레디메이드 새장인데, 이게 설탕이 아닌 대리석이기 때문에 잘 들수가 없습니다. 이 부분이 내가 이걸 만들었을 때 재미있다고 생각한 요소 중 하나입니다. 이것이 설탕이 대리석으로 변한 레디메이드입니다. 일종의 신화적 효과이지요. 설탕은 달콤하다. 우리가 설탕이라는 달콤함의 관습에 취해 있으면 대리석으로 변한 설탕을 이해할 수가 없다. 뒤샹의 레디메이드는 물질을 단순히 물질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관점에서 물질을 고찰하고 또는 물질의 이면을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한 상황이 예술이고 예술에서만 인간은 동물적 상태를 벗어날 수가 있다. 그래서 뒤샹의 설탕은 달콤하지 않고 차가운 것이다. 김진엽 수원시립미술관장

[문화카페] 임인년, 호랑이 기운으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22년, 임인년(壬寅年) 검은 호랑이해가 밝았다. 임(壬)이 검다는 뜻을 가지고 있어서 특별히 흑호의 해가 됐다. 나라의 동물을 따로 정하고 있지 않지만,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이 호랑이를 영험하게 여기면서도 애정했다. 한국의 지도가 호랑이의 기상을 닮았다고 하는가 하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로 시작하는 옛 구전 동화 속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전래동화 <해와 달>에서는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라며 무서운 호랑이가 되기도 하고, <은혜 갚은 호랑이>에서는 자신을 키워준 아버지에게 은혜 갚으려고 무던히 노력하기도 한다. 옛사람들은 호랑이가 힘세고 무서운 점을 소설 속에서 권위 있는 자들로 비유했다. 그래서 유독 호랑이가 전래동화 안에서 우둔한 자기 꾀에 넘어가거나, 힘이 없는 토끼나 작은 사물에 혼이 나는 경우들을 볼 수 있다. 자신들이 어떻게 바꿀 수 없는 사회를 해학적으로 비틀어 버리는 조상들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다. 미술 속에서는 어땠을까? <맹호도(猛虎圖)>라고 하여, 백성들은 액운을 물리친다는 믿음으로 호랑이를 민화로 그리기도 했고, 궁궐에서는 신비하고 상서로운 기운을 받고자 그려지기도 했다. 많은 맹호도가 남아 있는데, 아직까지 미스테리로 남아 있는 작품이 단원 김홍도의 <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다. 작품명에서도 알 수 있듯, 소나무 아래 호랑이라는 뜻이다. 그림 속 호랑이가 정말 살아있는 것처럼 기세가 등등하다. 우리의 수묵화는 윤곽선이 뚜렷해야 하는데, 이 <송하맹호도>는 호랑이의 윤곽선 없이, 한 올 한 올 그 털을 재현해 냈다. 거기다가 형형한 눈의 모습이 한국의 호랑이의 그것이었다. 그 호랑이 기백과 잘 어울리는 소나무가 한그루 서 있다. 과하지도 덜 하지도 않은 소나무다. 매우 놀라운 수작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어떤 미스테리가 있을까? 이 그림에는 낙관이 두 개가 찍혀있다. 하나는 단원의 것인데, 다른 하나는 표암(豹菴)이라 돼있다. 이 표암은 김홍도의 스승 강세황의 호인데, 이 낙관의 필체가 강세황의 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많은 전문가는 김홍도의 친구 이인문이 그렸으리라 추측한다. <송하맹호도>에서 소나무는 누가 그렸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고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김홍도가 모두 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덕분에 섬세한 호랑이와 거칠면서도 사계절 푸르른 소나무의 기상을 볼 수 있는 작품이 탄생했다. 그 전의 김홍도 작품과는 다른 작품이 탄생했다. 모든 일이 그렇지 않을까? 김홍도 같은 천재도 누군가의 도움으로 혹은 협업으로 자신의 전형성에서 탈피해 새로운 작업 스타일을 창조했다. 오미크론이 새해 벽두부터 기승이다. 2022년도 다같이 모이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이와의 만남까지 모두 차단하자는 마음가짐은 어쩐지 쓸쓸해진다. 흑호는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더 상서롭게 여겨지기도 한다. 올해 검은 호랑이의 기운을 받아, 독자님들이 나쁜 액운은 물리치고 좋은 인연들과 만남으로 새로운 창조의 길을 여시기를 <송하맹호도>로 바라본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생강 협업공간 한치각 공동 대표두치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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