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ㆍ7 재보선 이튿날 새 서울시장이 서울시의회에 인사하고 협조를 요청하자 시의회 의장이 원칙 있는 시정에는 협조하겠으나 정무 관련 선당후사 입장을 양해하라는 취지로 대답했다. 先黨後私, 즉, 의회활동에서 소속한 당의 당론을 우선하며 새 시장의 어떤 시정 요청은 사사(私事)로 간주하며 제동하겠다는 뜻이다. 그 이튿날 시의회는 새 시장의 과거 시정을 실패로 규정하고, 의장은 시 공무원에게 이메일을 보내 차후 임기 1년3개월을 굳이 강조했다. 우리 민족은 지난 100여년 역사에서 좌우와 노선의 갈등을 지겹게 겪었고, 아직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이념은 이상을 지향하지만, 편향성과 독선이 착종돼 있다. 그 충돌이 야기한 희생과 비극을 상기하면 막대한 질량에 통렬한 회한도 무색하다. 일제에 맞서자며 만장 파란을 무릅쓰고 상해에 임시정부를 세우자말자 지사들은 분열했고, 만주의 호랑이 일송(一松) 김동삼의 독립운동은 좌우통합에 그 귀중한 성력의 과반 이상이 소모됐다. 하나가 돼도 투쟁이 어렵지 않느냐는 일송의 호소에, 좌우는 때로 단합을 표방했으나 결국 도로에 가까운 분열이 연속됐고, 청산리의 영웅 김좌진 장군은 남은 포부가 일제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에 희생됐다. 식민지배가 정착돼가는 국내에서도 우국지사들은 분열해 백안시했으며, 해방 공간에서 갈등이 심각하게 악화되면서 마침내 처참한 골육상쟁이 벌어졌다. 남북은 책략을 거듭하며 분단을 고착했다. 90년대에 세계의 시세와 달리 남은 여전히 그 아류 진영으로 나뉘어 서로 질시했고, 북은 오히려 체제를 강화하고 이후 이데올로기의 적대성 고양을 지속하면서 핵개발에까지 이르렀다. 지난 4ㆍ7 재보선에서도 그러했지만 언제부턴가 정쟁이라 하기엔 고약하고 혼탁한 대립 양상에 거듭 낙심했다. 이념도 권력 쟁취의 명분으로 변질됐고, 지적 취향의 신념화에 콤플렉스마저 개입된 일종의 게임콘텐츠로 전락하지 않았나 의심도 든다. 새삼스럽지만 우리는 우리의 공화를 저해하는 아류 이데올로기를 청산해야 한다. 강성 지지층의 절제나 여야의 절충이 어렵다면 그 악순환을 제지하고자 중도세력의 확산과 진영 견제가 요청된다. 지난 100여년 폐단의 잔영과 관성에서 벗어나 실사구시(實事求是)의 길에 국운을 올려놓으려면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런데 지난 보선에서 발현된 2030 MZ세대의 표심 경향에서 다행히 탈이데올로기의 모습을 보았다. 이 세대의 표심에는, 리얼리티가 취약한 관념에 교착돼 자파의 이해를 따지는 피아 구분 성향이 없다. 여야가 벌이는 행태를 관찰하며 시비와 효용을 따져 주권을 행사하는 신상필벌(信賞必罰)의 표심. 우리의 미래를 개척하는 이 세대가 표출한 민주의식과 권력생성 태세를 지지하며, 부디 흔들리지 말고 이 땅에 관행으로 정착시키기를 기원한다. 정치인다운 정치인을 선별해 그들이 선국후당(先國後黨)에 종사하게 해야 할 것이다. 김승종 연성대 교수시인
몇 주 전, 충분한 시간은 아니었지만, 자네의 고민을 나누어 준 것에 감사하네. 자네가 넘을 수 없는 현실의 험난한 벽이 내 근처에 가깝게 스며들고 있음을 실감하는 시간이었네. 경쟁을 뚫고 명문음대에 진학하기까지 자네가 쏟아낸 땀은 어떤 분야보다 진했던 것을 알고 있네. 한 두 평의 좁은 연습실이 자네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공간이었지. 혹독한 연습으로 손가락에 피가 맺히고 터지는 맹렬함을 키워온 자네의 기량이 자랑스럽네. 대학졸업 후, 유학생활은 자네의 젊은 에너지를 맘껏 발산한 시간이었지. 낯선 이국 땅에서 연습실 확보를 위해 잠을 설치며 새벽을 기다려 확보한 연습실에서 다음 날 새벽 2시까지 수위에게 쫓겨나온 날들이 1년에 360일은 넘었지. 고향의 부모님을 생각하며 향수에 젖어 있던 시간도 이제는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지만, 당시에는 넓은 바다에 홀로 남겨진 느낌이었겠지? 퇴임을 앞둔 아버지가 어렵게 마련한 시골의 작은 아파트를 팔고 퇴직연금도 해지하여 유학자금을 보내주신 가족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컸기에 그 흔한 햄버거 하나도 마음 놓고 먹을 수 없었겠지. 그때의 눈물은 그리움과 서러움이 만들어낸 한 편의 시가 되어 이제 가슴에 담아 두었겠지. A군, 한국에서의 16년 학업생활 그리고 7년여의 유학생활 거의 25여 년의 청춘을 악기에 매달려 온 것은 음악 없이 살아가는 것이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 가장 큰 요인이며 이런 수련과정을 거치면 스승과 선배들이 누리는 윤택한 보상이 따라온다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었겠지? 유학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는 왜 이리 더딘지 혹시 하늘에 멈춰 있는 것은 아닌가 창밖을 내다보며 비행기 안에서 뛰고 싶던 심정이었지. 금의환향, 꿈에 그리던 고향에 도착하였지만 안정된 생계를 보장하며 자네를 환영하는 단체는 없고 그나마 유일한 생활의 보루인 프리랜서 활동도 우환 코로나로 꽉 막혀버려 신세 진 분들께 면목이 없어 최근에는 연락도 제대로 못 하고 있겠지. A군, 자네가 남기고 간 고민의 숙제를 떠올리며 기성세대가 본연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고민하고 있네. 무능함, 미안함, 부끄러움, 동정 등 뒤섞인 한탄의 진동이 조석으로 나를 흔들고 있네. 30여 년 전, 전문연주자의 길에 뛰어든 나와 현재 자네가 마주하는 현실의 차이는 크지 않네. 30여 년간의 학생생활을 통해 착실하게 준비된 나에게 (주관적인 판단이지만) 이 사회는 적절한 기회를 제공하지 않았지. 솔직히, 환갑이 넘은 오늘도 연주자로서 나를 알리기 위한 프로모션을 하루도 게을리한 적이 없네. 예술가, 특히 연주자로 살아가는 길은 평생을 험하고 거친 광야를 지나는 수도자와 같은 것일세. 세상이 내 편이 아니라고 생각할 때 나를 강하게 채찍질한 것은 열정이었네. 열정은 남이 거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샘에서 만들어져 분출되는 것이네. 열정은 긴 숨으로 참고 견디는 인내가 있어야 오래도록 꽃 피울 수 있네. 덧붙이면, 노력은 진정한 나의 실력을 발굴해 내는 열정의 핵심적인 부분일세. 이 고난의 흐름을 새로운 자기발전의 시간으로 만드는 지혜를 기대하고 싶네. 그때 새벽공기를 헤치고 연습실에 들어서며 뜨겁고 떨리는 가슴으로 악기를 보듬던 감격의 추억을 다시 꺼내 주기 바라네. 지금 겪는 고통의 시간이 견고한 창조의 시간으로 변환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네. 예술의 진가를 깊고 넓게 발굴하여 이전보다 더 존경받는 연주자가 되기를 바라면서 이만 줄이네. 함신익 심포니 송 예술감독
내가 맡은 재단의 극장 규모는 대단할 정도다. 일산 아람누리에는 대극장과 콘서트홀, 소극장인 새라새극장이 있다. 덕양구에 있는 어울림누리에는 대극장과 소극장 별모래극장이 있다. 양 누리에 하나씩 있는 야외극장을 포함하면 객석 수가 엄청나다. 총 7천 석 정도다. 한 기관이 운영하는 객석 규모로 치면 전국 제일이 아닐까 싶다. 숫자와 규모를 자랑하려는 게 아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숫자보다 중요한 것은 그 공간을 채우는 콘텐츠다. 콘텐츠의 질도 중요하지만, 공간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그 못지않게 양도 무시하지 못한다. 다양한 콘텐츠로 공연장을 채우는 방법은 대개 두 가지다. 하나는 활발한 기획으로 양질의 작품을 골라 연간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방식이다. 우수한 작품을 초청하거나 제작하는 경우가 여기에 속한다. 이런 프로그램 구성을 일정한 방향성을 갖고 연간 단위로 상설, 정례화하는 것을 시즌제라고 말한다. 다른 하나는 대관이다. 자체 기획 외에 외부의 기획사나 제작사 등에 공간을 빌려주는 것이다. 모든 공연장이 두 방식을 다 택하는 것은 아니다. 대관만 하는 공연장도 있는데 공공극장보다 주로 민간에 많다. 따라서 어느 공연장이 자기만의 색깔을 갖고 관객에게 어필하는 승부처는 바로 기획이다. 요새 웬만한 공연장에서는 기획 프로그램의 충실도가 공연장 브랜드에 직결된다는 생각에 시즌제를 택하고 있다. 관객들에게 시즌 개막 전 프로그램을 미리 확정하여 알려주고, 다양한 할인 패키지 상품을 내놓는 일은 시즌제의 큰 장점이다. 한국 공연장 시즌제의 종가는 어디일까? 눈에 띈 성과로 종가임을 입증한 곳은 LG아트센터이다. 2000년 문을 열면서 시즌제를 선보인 LG아트센터는 이를 통해 개관 초기 명실상부한 최고 공연장의 이미지를 굳혔다. 이후 여러 극장이 앞서거니 뒤를 따랐고, 우리 재단도 지난해부터 아트시그널!고양이라는 이름의 시즌제를 내세웠다. 개막 직후 터진 코로나19로 그 진가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해 아쉬웠지만, 곧 4월 시즌을 활짝 열면서 고양발 아트시그널을 발신한다. 나는 공연장을 미디어로 본다. 공연장은 공급자와 수용자를 연결하는 매개체이며, 그 공연장의 프로그램은 중요한 메시지다. 기획자의 정성이 담긴 프로그램 하나하나가 그 공연장의 품격과 성격을 담은 메시지라는 이야기다. 시즌제는 개별 메시지의 묶음이다. 시즌제의 평판과 역사가 쌓여 공연장은 견고한 미디어이자 브랜드가 된다. 코로나19 상황이 지속되면서 모든 공연장이 생존 방식을 놓고 고민이 깊다. 이런 때 의기소침하지 않고 오히려 공격적으로 공연장의 브랜드 가치를 높여가는 곳이 있다. 2018년 인천 송도에 문을 연 아트센터인천의 활약이 돋보인다. 최근 시즌 프로그램을 보면, 정통 클래식 콘서트홀의 특성을 살려 오로지 프로그램의 질로서 정체성을 다지는 노력이 잘 드러난다. 바다에 연한 아름다운 입지는 음악당의 또 다른 매력 중 하나다. 이렇듯 가보고 싶은 요소가 많은 공연장은 그만큼 성공 가능성도 크다. 정재왈 고양문화재단 대표이사
새로 나온 신간 그림책을 접할 때면 마치 새 신을 사러 가는 어린 아이의 마음처럼 마음이 설렌다. 책 표지의 질감과 이미지, 내지의 인쇄 냄새까지 음미하듯 책장을 넘기며 만나게 되는 몇 장의 그림과 글이 마음을 울릴 때면 더욱 그러하다. 크림색의 표지에 등을 진 채 서 있는 중년의 남자와 여자, 각자의 방향에서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포옹하고 있는 표지의 이미지는 나이 든 중년이면 설명 없이도 공감이 되는 공허가 느껴진다. 인생은 지금의 글을 쓴 다비드 칼리는 기발한 상상력과 유머러스하면서도 재치 넘치는 글로 독자의 사랑을 받는 작가다. 글쓴이의 글에 걸맞게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적당히 단순하게 내용을 잘 풀어낸 그림 작가의 어울림은 독자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이 책은 은퇴 후 시간이 많이 남은 부부가 주인공이다. 그동안 바쁜 직장일로 해보고 싶었던 것을 하지 못했던 남자의 다양한 시도와 함께하자는 것마다 생활 속 일거리를 핑계로 자꾸 다음으로 미루는 아내의 이야기이다. 『왜 자꾸 내일이래? 인생은 오늘이야, 다 놔두고 가자. 어디로? 몰라, 그냥 숨이 찰 때까지 달려서 강물에 뛰어들자. 그리고 소리 칠 거야. 당신을 사랑한다고. 대체 왜? 일일이 이유가 필요해? 그러다 시간이 다 가버린다고. 내 인생은 이미 여기 있는 걸. 인생은 쌓인 설거지가아니야. 지금도 흘러가고 있잖아. 가자! 인생은 지금이라니까.』 (중략) 나의 지금은 무엇일까? 늘 조금 있다가 라든지 다음이나 내일로 미루는 생활처럼 익숙해져 버린 습성들로 어쩌면 인생의 정해진 시간을 더욱 단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제 죽은 사람이 그토록 원했던 내일이 오늘이고 나중이 바로 지금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 살아지길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 누구나 각자의 처한 상황이 다르니 누구에게는 실행하는 지금이 소중할 수도 있지만 어떤 이에게는 실행을 미루고 준비하는 지금의 시간이 중요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을 인식하는 바로 그 순간이야말로 내가 살아있는 존재의 시간이 아닐까 한다. 지금의 나의 선택은 자긍하는 과거가 될 수도 회한의 과거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나저러나 모두 나의 선택이고 겉보기엔 별반 차이도 없을 듯 보이나 그 지금이 모여 나의 역사가 될 것이다. 같은 공이지만 탱탱볼과 바람 빠진 공의 차이라고 하면 좀 과한 비약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는 이가 빠지고 허리가 굽어도 겉만 번지르르한 바람 빠진 공보다는 저렴하지만 탱탱볼 같은 노년을 맞고 싶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용기를 내보아야겠다. 한 권의 그림책으로 노년까지 생각하니 그림책의 힘은 실로 놀랍다. 손서란 복합문화공간 비플랫폼 대표
시간을 정해 놓고 책을 읽기로 했다. 시대별로 분류한 대표시집을 읽기도 하고 차에 관한 신간과 고전은 물론 동양신화나 역사서도 의견 모아 선별해 읽었다. 한 사람이 소리 내어 서너 쪽 또는 한 소절을 읽으면 다음 사람이 이어서 읽는 방식으로 서로 돌아가며 읽는다. 한 단원이 끝날 때마다 차를 한 잔씩 마시며 느낌을 이야기한다. 처음에는 초등학생처럼 소리 내어 읽기가 어색하고 쑥스러워 서로 안 읽으려고 했다. 그래서 가끔 호흡조절도 한다. 이를테면 사자소학을 읽고 쓴다거나 읽고 쓰는 다신전(茶神傳)을 다 쓰고 나면 표지를 붙여 한 권의 책으로 묶는다. 그날은 나이를 어디에 두었는지 애들보다 더 좋아라한다. 이 옹기종기 책 읽는 모임은 처음에는 열명이 넘었으나 십 년 세월 가다 보니 이제 오롯이 다섯만 남아 매주 월요일 저녁 신앙처럼 모인다. 옹기종기 모임에서 올해 첫 번째 선택한 책은 5049 리더라면 정조처럼으로 정했다. 절반쯤 읽은 후 저자를 초대해 작가와의 대화를 가졌다. 이 책을 쓴 한신대학교 김준혁 교수는 3년 전 장용영을 펴낼 때 무예통지의 서문에 있는 즐풍목우(櫛風沐雨)-바람으로 머리 빗고 빗물로 목욕하라-는 대목을 책 표지에 올렸다. 정조가 만든 조선 최강의 군대 장용영 군사들의 훈련을 강하게 시키라는 지시가 이 두 문장에 압축돼 장용영 하면 즐풍목우를 떠오르게 한다. 이번 리더라면 정조처럼 표지에는 정조대왕의 숨겨진 리더십코드 5049가 눈에 띈다. 조선 정조의 생애와 국가지도자로서의 리더십을 49가지로 정리한 김 교수의 책을 굳이 다 읽지 않아도 5049, 이 네 숫자만으로도 그 의미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정조는 조선 역사상 특별한 신궁(神弓)으로 50발을 쏘면 49발을 명중시키고 마지막 한 발은 허공으로 날려 보냈는데 정조는 이런 자신의 행동에 대해 가득 차면 오만해지기 쉬우므로 스스로 겸손해지는 활쏘기를 보여주었다. 정조는 덕(德)있고 올바른 신하들과 연대하기 위해 활쏘기를 했는데 활쏘기를 하다 보면 조급해하는 사람, 버럭 화를 내는 사람, 조용히 잘 인내하는 사람, 남을 배려하는 사람 등 타고난 본성을 감출 수 없어서 활쏘기를 통해 자연스럽게 그 사람의 성정이나 심성을 확인할 수 있어 참된 신하를 확인했다고 한다. 활쏘기 하나만으로도 사람이 갖춰야 할 가장 기본적인 겸손과 상대방을 배려하는 따스함을 보여주는 리더의 덕목에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얼마나 깊은 감동을 주는가. 차 한 잔을 우려내는 시간은 약 5~6분이 소요된다. 그 5~6분은 기거동작과 물 따르는 소리, 호흡 간의 바람 등으로 차를 우리는 사람의 심성이 그대로 전달된다. 그러므로 책읽기 전에는 차를 먼저 우리도록 한다. 연습을 실전처럼 실전을 연습처럼 그리해 자신도 그리 썩 자연스럽지 못하면서 상대방의 작은 실수까지 보도록 한다. 정조의 5049를 생각하게 한다. 강성금 안산시행복예절관 관장
특히 정부와 국회의 일 처리에서 추진 과정이 공정하지 않거나 절차가 생략되면 그 결과가 아름답지 않다. 어떠한 명분에도 공공의 의혹이 발생할 수밖에 없고, 공동체 전체의 이익이나 균형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공화의 원칙을 깼다는 의미까지 가중된다. 혜택을 누리는 쪽은 내심 부끄럽고 그렇지 않은 쪽은 억하심정을 가질 것이다. 이러한 정서는 결국 국가의 분열을 조장하며 통합을 방해하는 저변이 된다. 민주주의 이념은 대체로 공정하지 않은 과정을 문제시한 서민들의 오랜 원념(怨念)에서 비롯되었으며, 근대로 나아가는 에너지가 되었다. 영국의 의회가 1689년에 권리장전을 분출시킨 동기도 그렇고, 1894년 동학 봉기의 요인도 그러하였다. 새삼스럽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집권 명분이었던 반칙과 특권 배제에도 공정한 과정이 선명하게 강조되어 있었고, 지난 촛불사태 때도 문제 되었다. 기회는 평등하게, 과정은 공정하게, 결과는 정의롭게. 이 슬로건에서 기회와 결과도 역사의 연속에서 또 하나의 과정들이기에 공정은 그 요체이다. 그런데 의외에도 그렇게 현재 정부가 들어선 이래 조국사태, 월성원전 사건, 공수처법안, 검찰총장징계사건, 불법출국금지사건에 이어 최근의 검사장인사와 가덕도 신공항특별법이 모두 그 과정이 문제 되어 우리는 복잡하고 격렬한 갈등을 겪고 있다. 특히 가덕도 신공항특별법은 공정한 과정을 거쳐 결정한 정책을 공정하지 않은 과정으로 번복한 사안이다. 더 치열한 정쟁과 감투 의지가 증폭되고 있고 4.7보선도 다가오는 이 즈음, 이럴수록 우리 사회에 더욱 필요한 가치는 바로 공정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사실 어느 쪽을 지지하든 않든 여야가 시시한 정략을 배제하고 사안마다 공정한 과정을 투명하게 이행하기를, 특히 관련 편향성 폭력성 비방을 현출하지 말기를 바란다. 자파 위로에 일단 쓸모가 있겠으나 그것들은 사실과 진실을 왜곡하여 우리 사회 전체에 해악을 끼치는 협잡에 불과하고 결국 우리 모두를 불행하게 한다. 지난 시절 여러 풍파를 거친 이 시대의 정치인이라면 여야 막론하고 마땅히 바로 처신하며 우선 당장의 훼예에 좌고우면하지 말고 공정을 구현해야 응분의 역사의식이 있다고 할 것이다. 18세기 전반에 사환한 용와(慵窩) 류승현(1680-1746)은 공정을 견지한 인물이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그의 훈도를 받은 아우 류관현(1692-1764)과 재종질 류정원(1702-1761)의 사행을 목민의 모범 사례로 제시하였다. 류관현은 3회, 류정원은 12회. 일찍이 류승현을 알아본 제산(霽山) 김성탁(1684-1747)은 아들 김낙행(1708-1776)이 그가 혹 재상이 될 수 있겠느냐고 묻자, 될 수 있다고 하고, 그 이유로 그는 공평하다고 하였다. 공정은 시대를 초월하여 공인의 주요 덕목일 뿐만 아니라 탕평이 요구될 만큼 당쟁이 고착되었던 분열과 편향의 시기가 그 배경이었기에 김성탁의 언급은 오늘에도 그 내포와 외연이 깊고 넓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류승현의 지취와 내면을 엿볼 수 있는 시 「종죽(種竹)」을 이 기회에 음미해보자. 북쪽 울타리엔 붉은 복사꽃(北籬桃花紅)/남쪽 울타리엔 하얀 오얏꽃(南籬李花白)/꽃들 사이에 대나무 심자(中間種此君)/복사꽃 오얏꽃이 무색해지네(桃李失顔色). 김승종 연성대 교수시인
1970년대와 80년대 시절, 김포공항은 유학파들의 출국과 귀국을 위해 모인 환송환영인파로 늘 시끌벅적했다. 유학과정에서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공부를 했는지의 여부는 일단 제쳐 두고 훈장을 가슴에 달은 전승장군의 금의환향 같은 기개가 하늘을 향한다. 이어서, 휘황찬란하게 귀국연주회를 선전하는 것을 봤다. 유학을 다녀오면 무조건 성공한다는 환상에서 살던 시절이다. 진정한 실력의 향상과 독특한 학문의 획득을 위한 원천적 목표보다는 어떻게 해서라도 학위를 따서 귀국 비행기를 타는 것을 목표로 했던 시절의 얘기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런 과정을 거쳐 대학교수 등의 자리를 확보하고 지금까지 그것을 유지하는 것을 보고 있다. 유학을 다녀온 연주자들의 수가 손으로 셀 정도로 희귀한 시대의 해프닝이지만 아직도 그런 전통이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 지난주, 연주를 위해 들른 서울의 주요 콘서트홀에는 귀국연주회라는 이름의 연주를 알리는 전단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외국여행이 외딴 시골을 방문하는 것보다 용이한 글로벌 시대에 살고 있으며 미국의 일부 음대들의 운영이 한국에서 온 유학생의 등록금에 의존하고 있는 현실에서 더 이상 유학=특권이라는 공식이 성립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귀국연주회=교수자리 확보를 위한 시발점이라는 희귀한 현상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학을 다녀온 귀국연주회를 위한 기획사의 콘서트홀 확보와 홍보는 뜨겁다. 유학은 지식과 전문성을 추가로 얻기 위한 과정이다. 연주자들에게는 연주가 생활화돼야 한다. 귀국연주회 이후 새로운 연주를 위해 애쓰는 음악가들이 있는 반면, 우여곡절 끝에 귀국연주회를 마치고 이어지는 연주회를 찾아볼 수 없는 음악가도 있다. 원하는 교수자리를 얻은 후 학생들이 본받을 만한 연주를 지속적으로 해 자기개발을 끊임없이 하는 것이 음악가의 본분임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연주와는 거리가 먼 활동을 하는 연주자들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연주회는 반드시 화려한 드레스를 맞춰 입고 꽤 비싼 미용실에서 머리를 꾸민 후 지역에서 가장 알려진 콘서트홀에서 화려하게 축하받으며 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귀국연주회를 준비하는 젊은 연주자들에게 권면하고 싶다. 연주자들은 자기 개발을 위해 잠시도 열정의 숨을 멈출 수 없음이 진실이라면 진정한 연주는 동네마을회관에서, 아주 외딴 시골 교회에서, 산속 깊은 사찰에서, 작은 초등학교 교실에서 소박하게 그리고 감동적으로 이뤄 질 수 있다. 숫자에 연연하지 않고 연주에 꼭 오고 싶은 청중을 정성껏 모시고 꾸준히 그리고 자주 연주하는 것이 연주자의 사명이다. 이제부터 귀국연주회라는 용어에서 귀국을 빼자. 연주의 궁극적인 목표는 연주자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연주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함신익 심포니 송 예술감독
소위 아파트공화국이란 말이 허튼소리가 아닐 정도로 우리의 삶은 아파트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전국 주택에서 아파트 비율은 2019년 기준 62.3%로, 단독주택 21.6%의 3배 가까이 된다. 요새 천정부지로 치솟은 아파트 값 급등 요인으로 많은 전문가가 공급부족을 꼽는 걸 보면, 아파트 수요는 여전하다는 이야기다. 이런 추세를 감안하면 전국 주택 중 아파트 비율이 70%를 넘는 일은 시간문제일 것 같다. 촌놈인 나는 1970년대 중반 첫 서울 구경에서 아파트를 역시 처음 봤다. 먼지 풀풀 날리는 비포장도로와 아스팔트를 예닐곱 시간 달려 용산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했는데, 차창 너머로 그 인근 한강변에 나란히 서 있는 아파트를 신기하게 바라본 기억이 생생하다. 세련된 도회지 가정의 내실 모습이 아파트 창을 통해 살짝살짝 드러났다. 기와집 몇 채뿐, 대부분이 낡고 허름한 초가집이었던 우리 시골동네 풍경과 비교하면 이것은 별천지의 주거공간이었다. 저런 곳에서 살고 싶다며 그때 품었던 막연한 동경의 대상이었던 그 아파트가 이젠 전 국민 대다수가 먹고 자고, 쉬는 일반적인 주거형태가 됐다. 아직도 선호도가 식지 않는 걸 보면, 아파트는 그간 크나큰 발전을 이끈 한국 주거문화의 상징임이 틀림없다. 한국 아파트 역사의 연원을 따져보면, 그 기점은 1930년대라고 한다. 지금도 주민들이 사는 서울 충정로아파트로 일제 강점기 유산이긴 하지만 그 역사성은 무시할 수 없다. 20세기 세계 건축혁명을 이끈 시멘트가 건축자재로 보편화하면서 일찍이 서울에도 고층의 주거공간이 등장한 것이다. 시멘트의 가치를 높이 사, 이를 건축에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실제 혁신적인 공동주택에 적용한 이가 현대건축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이다. 제2차 대전 후 주택난 해소를 위해 그가 프랑스 마르세유에 선보인 집합주택 유니테 다비타시옹(Unite dHabitation)은 논란 여부를 떠나 오늘날 혁신적 아파트 개념의 선구로 꼽는다. 명칭에 차이가 있을 뿐, 세계 어느 나라든 공동주택의 대명사로 통하는 아파트는 1990년대 초 제1기 신도시가 들어서면서 일반적이고 보편적이며 대중적인 한국의 주거공간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일산을 품고 있는 고양시도 그 신도시 5곳 중 한 곳. 당시 서울 생활권의 베드타운 역할을 하던 고양시는 이제 인구 100만명을 훌쩍 넘긴 특례시로서 자급도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몇 년 내 제3기 창릉신도시도 모습을 드러낸다. 이걸 보면, 아파트는 오늘날 고양시를 키운 동력이자 삶이고 문화인 셈이다. 한국 아파트 발전의 이정표라고 할 수 있다. 하여 이참에 고양시에 제안하고 싶은 바가 있는데, 자급도시의 미래 자산으로 아파트역사문화박물관을 세우면 어떨까 하는 것이다. 한국 아파트의 역사부터 신도시의 형성, 그로 인한 도시와 농촌의 변화상, 사는 사람들의 삶과 문화의 양상, 미래의 도시와 주거문화 등을 전시하고 연구하며 설계하는 심장 말이다. 예의 박물관이 들어선다면 한국의 대표적 주거공간인 아파트를 통해 현재와 과거, 미래를 잇는 독특한 형태의 첫 박물관으로 길이 남아 고양의 미래유산이 되지 않을까. 정재왈 고양문화재단 대표이사
그림책 전쟁은 일러스트레이터 안드레 레트리아가 글이 없는 그림책으로 기획하였지만 기자이자 시인, 극작가인 아버지와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3년 동안 수정하며 함께 만들어낸 작품이다. 시종일관 흙빛이 감도는 배경과 검은 색의 붓 선들, 스멀스멀 소리도 없이 좁혀 들어오는 검은 그림자와 거미 떼, 어두운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떼. 책장을 넘길수록 독자는 불길하고 우울한 감정에 휩싸인다. 전쟁은 빠르게 퍼지는 질병처럼 일상을 갈기갈기 찢어 버린다라고 서술된 텍스트는 보는 이에게 다가올 공포에 준비할 시간도 주지 않고 바로 직격탄을 날린다. 아무도 없는 황량하고 폐허가 되어버린 건물, 구석진 방 어둠 속 유일하게 불이 켜져 있다. 흐트러짐 없이 각이 잡힌 군복을 입은 병사는 깊은 수심에 잠겨 있다.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위기의 조국일까? 아니면 인간 탐욕의 시작일까? 하지만 독자의 고민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전쟁은 어떤 이야기도 용납하지 않는다 는 글과 함께 책들을 산처럼 높이 쌓아 놓고 불을 지르는 이미지에서 정의와 앎에 대한 침묵이 강요되며 절망을 경험한다. 많은 물건 중에 책을 태우는 장면은 단순한 책이 아닌 지성과 깨우침이란 것을 알기에 총칼보다 무서운 보이지 않는 힘이 책에 있음을 다시 느끼게 된다. 전쟁은 끔찍한 결과를 예상하지만,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종교와 이념, 일상처럼 굳어진 관습과 잘못된 전통 때문에 사람들은 생명을 죽음과 맞바꾼다. 이 책에는 엄청난 폭등이나 저항, 극적인 파괴나 참혹한 장면은 없다. 하지만 시종일관 무겁게 내리누르는 보이지 않는 무게감으로 책을 보는 내내 전쟁의 공포와 아울러 평화와 공존의 소중함을 함께 느낀다. 다소 무겁지만, 반드시 알아야 할 인간이 저지르는 최악의 행위를 작가는 담담하게 그러나 깊이 사색하며 감성적으로 서술해 누구에게나 권하고 싶은 좋은 그림책이다. 전쟁은 무기를 들고 상대를 공격하는 물리적 전쟁도 있지만, 요즘처럼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와 경제 위기와 같은 현실적인 삶과의 전쟁도 있을 것이다. 공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지치지 않는 극복과 유연한 대처가 어려운 상황과의 전쟁에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손서란 복합문화공간 비플랫폼 대표
작년 이맘때 생전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대 유행병이 시작됐다. 처음엔 눈을 떴다가 감을 때까지 연신 신문 방송에 귀를 세우고 정보를 살피며 관망했다. 에이 이러다가 나아지겠지. 여느 해처럼 온 산이 초록으로 물밀듯이 들이닥치다가 어김없이 봄다운 봄 으스대기도 전에 스르르 여름으로 밀려나겠지. 설 명절 지나 겨울방학 예절학당은 그 해 첫 수업으로 또 시작되고 다시금 설레는 마음으로 일 년 동안 부쩍 키가 자란 아이들을 나는 곧 보게 될 거야. 겨울방학 예절학당은 겨울 냄새가 나야 하므로 개강 첫날에는 먼저 두툼한 오버를 벗고 한복을 입게 한다. 남자아이는(8세~12세) 바지저고리 위에 금박전복을 입혀 복건을 씌우고 여자아이는 다홍치마에 노랑 저고리를 입힌다. 아이들은 물론 치렁한 옷고름을 만지작이며 낯설어한다. 걷거나 앉을 때는 더욱 불편해한다. 설날 곱게 세배하여 세뱃돈 받는 상상으로 절 배우게 하고 오래오래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라는 뜻의 길고 흰 가래떡을 떡국으로 만들어 먹는 우리의 전통 음식과 유래를 이야기한다. 나흘간의 학당 고정 프로그램인 사자소학은 매일 한 시간씩 소리 내어 따라 읽고 쓰게 한다. 학당의 맥락으로 보면 바른 마음가짐 바른 몸가짐(九思九容)은 물론 부모님께 효도하는 효행편과 친구 사귀기(朋友) 또는 형제간의 우애(兄友弟恭) 등은 인성 예절의 기본이긴 하나 현실적으로 매우 곤란한 경우에 빠지기도 한다. 우선 양친이 안 계신 한 부모 아이도 있고 형제자매가 없어 우애와 질서를 설명하기 어려운 때도 있다. 그래서 나만 잘하는 것보다 더불어 잘하는 것을 놀이에서 배우도록 한다. 하루는 윷놀이 또 하루는 사방치기 그리고 팽이치기 구슬치기 복조리 만들기 할 때는 그야말로 장날 같다. 우리의 전래놀이는 애들만이 아니라 어른도 좋아한다. 소리 지르며 땀 흘리며 손뼉치며 깔깔댄다. 시간이 언제 간지도 모른다. 입교 때 옷에다 이름표를 달아줄 때는 머쓱해서 이리저리 몸을 비틀었는데 수업을 마칠 때는 가지런히 옷을 정리하여 걸어두고 공손하게 인사한다.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친구, 오빠, 동생이 된다. 실로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지만 아이들의 맑음을 바라보는 쪽은 더욱 감동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밥상 앞에서는맛있게 잘 먹겠습니다 그리고 다 먹은 후에는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를 말로써 표현하게 하고 다례체험 시간에는 차를 마시기 전에 반드시 잘 마시겠습니다 감사의 마음을 나타내도록 한다. 학당의 마지막 날은 부모님께 큰절을 올리는데 아쉬움으로 가득하다. 고운 습관 길들이기로 학당의 목적사업이 달성되는 순간이다. 올핸 30% 입교할 수 있는 대면수업과 비대면 수업으로 준비하고 있다. 곱고 예쁜 아이들과의 올 첫 프로그램에 다소 설렌다. 강성금 안산시 행복예절관 관장
우리는 삶에서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가 불가능하고, 나와 남의 사과(謝過)를 보고 듣기는 참 어렵다. 잘못의 지속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만들며, 갈등과 원념(怨念)이 발생한다. 인간은 사회질서를 유지하려고 자기기속(自己羈束)의 취지에서도 법을 제정했나 보다. 근년 들어 우리 사회에서 법치의 비중이 늘어나고, 정치의 사법화란 시사용어가 그 현상을 대변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의 민주 공화체제를 지탱하는 기초인 법치가 공격받거나 사법의 정치화도 운위되면서 우리를 무척 불편하게 한다. 사과가 드문 부조리는 이해와 체면에 우리가 민감하고, 나는 그래도 다른 사람보다는 낫다고 자위하거나, 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자기기만으로 죄책을 희석하기 때문일 것이다. 공자는 잘못하고도 고치지 않는 것이 잘못이다(過而不改 是謂過矣)라고 잘못을 규정하며, 잘못이 있다면 즉시 바로잡기를 조금도 꺼리지 말아야 한다(過則勿憚改)고 당부했다. 인간의 한계를 양해하고 나아가 도덕의지를 신뢰하며 잘못 시정은 물론 삶의 진정성까지 회복하라는 위대한 통찰에서 우러나온 따뜻한 권장이 아닐 수 없다. 지난 11일 문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에서 정인이 사건 재발방지대책 질문에 답변하였는데 정쟁이라 하기 어려운 심상찮은 논란이 일어났다. 청와대 대변인은 현재 입양 확정 전 양부모 동의하에 관례로 활용하고 있는 사전위탁보호 제도 등을 보완하자는 취지라고 해명했지만, 대통령의 해당 대책은 대체로 입양 이후를 조건으로 하였기에 논란이 계속 될 수밖에 없었다. 국정 관련 최고 공인의 발언에 그런 물의가 빚어지면 즉각 사과하고 바로 잡는 조치가 뒤따랐어야 마땅하였다. 사과가 없었기에 아무리 취지를 강조해도 구차한 변명으로 들리며 불신을 증폭시켰다고 하겠다. 지난 22일 한 유명한 여권 인사가 작년에 제기했던 검찰의 계좌 사찰 주장을 사과했다. 그 발언은 수차 반복됐고 채널 A 기자사건에도 의혹을 가중했으며, 여당의 수석대변인이 기정사실화해 검찰을 비난하여 파문이 컸다. 이러한 사정을 감안해 이 기회에 사법과 무관한 작년의 다른 잘못들도 거론하며 사과한다면, 사과 관련여러 의문과 불만을 불식하는 진정성이 부각되며 우리의 소통과 통합에 작은 계기로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공당을 대표하여 발언한 그 당직자도 국민에게 마땅히 사과하여야 적폐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사과 발언에서 대립하는 상대방을 악마화했고, 공직자인 검사들의 말을 전적으로 불신했다는 회오(悔悟)도 두루 주목했으면 한다. 사과에는 관조의 정서가 필요하다. 임란 시기 구국 영웅 서애 유성룡 선생의 성찰 시 「차회암선생운(次晦庵先生韻)」 기삼(其三)을 읽고 싶다. 달이 뜨자 뭇 움직임 그치고/ 밤바람 쐰 샘은 찬 기운 어린 우물/ 내 마음 마침 아무 일 없어/ 청명한 이 야경 못내 사랑하고/ 거문고 타니 도 닦는 뜻 깊어지는데/ 벗 그리니 산하가 멀리 막혀있구나/ 오래 전부터 부끄러워하였던 공명/ 구차히 얻기는 내 바람이 아니라네(月出群動息/ 風泉落寒井/ 吾心適無事/ 愛此淸夜景/ 彈琴道意長/ 憶友山河永/ 功名久已慙/ 苟得非吾幸) 김승종 연성대 교수시인
한 게임에 승리하기 위한 축구팀들의 철저하고 과학적인 팀훈련은 이를 참관하는 이들도 땀을 흘리게 한다. 오케스트라의 훈련도 마찬가지다. 지휘자는 축구팀의 감독과 동일한 임무를 수행한다. 훈련과정에서 순간순간 찾아오는 다양한 문제점들을 최단시간 내에 긍정적인 방법으로 고쳐 나가는 것이 축구감독 그리고 지휘자들이 해야 할 일이다. Conductor는 지휘자라는 뜻 외에도 버스나 기차의 안내원 또는 여행가이드를 의미한다.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역할은 여러 가지로 세분되지만 주어진 조건에서 최상의 연주를 만들어 내는 것이 최우선 임무이다. 수많은 음악가와 함께 콘서트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맡게 되는 안내원 역할은 쉽지 않다. 극심한 긴장이 흐르고 진지한 분위기의 연속인 오케스트라 가이드의 일상생활을 일반인들은 상상하기에도 부담스러운 일이다. 지휘자의 자격요건 중 우수한 리허설 테크닉(rehearsal technique) 은 필수요건이다. 필자의 20여 년 지휘교수 활동에서 제자들에게 핵심적으로 강조한 부분이 연습을 어떻게 시킬 것인가?였다. 지휘과 입학을 위한 오디션, 지휘콩쿠르, 전문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영입을 위한 오디션 등에서도 효과적인 연습을 우선으로 심사한다. 예술에 대한 본질은 21세기 산업혁명시대에도 변하지 않는다. 현대인들은 직면한 문제를 빠르게 해결하는 것에 습관화 되어 있고 이전보다 한 템포 빠른 새로운 문명을 찾아 나선다. 그럼에도, 바흐, 모차르트 그리고 베토벤의 본질은 살아있다. 그들의 음악은 로봇이 아닌 인간들의 숨결로 감싸주어야 비로소 완성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숨결은 끊임없는 인간들의 연습이다. 블라드미르 호로비츠(1904~1989)는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꼽힌다. 신의 경지에 도달한 범접하기 어려운 음악가에게도 처절한 연습이 생활의 큰 부분이었다. 과연 호로비츠는 어떻게 문제를 해결했을까? 그의 대답은 짧고 단순하였다. 천천히 그러나 충분한 감성으로 연습하세요.였다. 효과적인 연습방법에 확신이 부족한 음악도들에게 호로비츠의 연습방법을 추천한다. 조급한 속성적 해결보다는 차곡차곡 인내심을 갖고 한 음, 한 마디를 완성해 나가는 것이 온전한 음악의 접근에 가까워질 수 있음을 기억하자. 오케스트라 연습을 하다 보면 음정과 리듬, 템포와 컬러, 스타일과 밸런스 등이 서로 어긋날 때 가 많다. 이럴 때는 느린 템포와 작은 소리로 그러나 충분한 음악적 감성을 갖고 해결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이런 과정에서 본인의 소리는 물론 다른 악기의 소리를 이전보다 더 명확하게 들을 수 있게 된다. 이웃과 타인의 소리에 나의 소리를 합쳐가다 보면 자연스레 이상적인 화음을 만들어 갈 수 있다. 스키장에서 리프트를 타고 산을 천천히 오르다 보면 멀리 보이는 산의 정상과 맑은 하늘은 물론 계곡의 섬세한 라인이 새롭게 눈에 들어온다. 스키를 타며 빠르게 하강할 때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전경이다. 시속 120km 이상으로 달리고 싶은 욕망의 동해고속도로에서 빠져나와 국도로 같은 구간을 천천히 달려보자. 빠르게 달릴 때 마주할 수 없었던 기묘한 산과 바다가 눈앞에 펼쳐진다. 우리는 각자의 인생을 이끌어가는 지휘자이다. 2021년 신축년 흰 소띠의 해에는 Vivace(아주 빠르게)의 생활패턴에서 벗어나 Adagio(느린 속도로)로 그러나 충분한 감성을 갖고 세상을 바라보며 여유를 갖는 가이드가 되는 것은 어떨까? 함신익 심포니송 예술감독, 전 예일대 음대 교수
한강을 끼고 출퇴근하는 즐거움 중 하나는 계절마다 자연의 변화를 체감하는 일이다. 영하 10도 이상 한파가 지속된 요즘, 어느 지점 불문하고 강 한가운데까지 한강이 꽁꽁 얼어붙은 건 처음 봤다. 이른 아침 행주대교를 건널 때, 동쪽에서 떠오른 태양의 높이가 계절마다 그렇게 차이 나는 줄 몰랐다. 아득하게 저만치 있던 겨울의 태양은 여름이면 벌써 중천에 가 있다. 변화는 자연의 속성만은 아니다. 주변 건축물 등 사람이 지어낸 풍경도 변화를 거듭한다. 다만 자연에 비해 그 변화가 더디나 보니 못 느낄 뿐. 아무튼 이런 연유로 나는 건축물을 생명체로 여긴다. 좀 과장하여 시멘트 덩어리인 아파트 단지를 우리는 아파트 숲이라 부른다. 무생물에도 생명의 온기를 불어넣고 싶은 우리 마음을 담은 표현이다. 르 코르뷔지에는 집은 인간이 살기 위한 기계라고 했지만, 건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은 건축(디자인)의 몫이다. 얼마 전 문득, 여의도를 지나면서 풍경 변화를 실감케 하는 생경한 건축물 하나를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운석처럼 없던 게 뚝 떨어져 거기에 서 있는 듯했다. 건물도 생명체란 걸 그때 더욱 실감했다. 한 때 여의도의 랜드마크였던 LG트윈타워 옆에 그보다 두 배 이상 높이로 솟아 있는 빌딩, 파크원(Parc1)이었다. 하늘 높이 걸려 있던 크레인을 보면서 뭔가 짓고 있다 생각했는데, 그 웅장한 몸뚱어리가 실체를 드러낸 것이다. 하늘에 닿는 집을 마천루(摩天樓)라고 한다. 한국의 맨해튼이라는 별명답게 여의도는 이 마천루가 즐비한 곳. 그중에서 이 건물이 유독 나의 눈에 띈 건 새것 때문이 아니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시원한 빗줄기 같은, 날렵한 수직 철골 기둥들이 금세 눈에 들어왔다. 수평축 중심의 주변 빌딩과 확연히 대비돼 한껏 긴장감을 높였다. 그다음 눈에 띈 건 색(色)이었다. 모서리 수직 철골 기둥들이 뿜어내는 붉은색은 강렬했다. 여의도엔 전혀 없던 색일뿐더러, 외벽에 이처럼 대담하게 붉은색을 앞세운 현대 건축물을 국내에서 본 적이 없다. 대개 낯선 것은 어색한 법이다. 처음 이 건물을 보았을 때, 나 또한 너무 생경하고 이질적이어서 솔직히 반감이 컸다. 파격이 지나친 건 아닐까?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오가며 보면 볼수록 매력 있는, 시쳇말로 볼매가 될 줄을 몰랐다. 나중 저명한 건축학자인 이화여대 임석재 교수에게 소감을 털어놓았다. 대가의 품격이란 그런 겁니다. 파격을 보편적으로 설득하는 힘 말이지요. 임 교수의 평이었다. 파크원은 세계 건축계의 거장 리처드 로저스(88)가 설계했다. 로저스는 2007년 건축계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 수상자. 세계 첫 노출 구조의 건축물로 꼽히는 파리 복합문화센터 퐁피두센터는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가끔 유명세는 그 작품 가치에 대한 역설적 반증이 된다. 호불호가 분명한 파크원의 붉은색도 아직 그런 세평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하지만 느슨한 회색 도시에 생기와 변화를 던진 파격적인 감각은 대가의 품격으로 손색이 없다. 이처럼 건물이 생명을 얻으면 도시도 산다. 정재왈 고양문화재단 대표이사
세상을 살다 보면 종류가 다를 뿐 많은 난관에 부딪힌다. 그 난관들은 나의 미숙한 실수로 인해 생기는 것일 수도 있고 타인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때론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생기기도 한다. 이럴 때 우리는 난관에 대처하는 방법과 과정에 따라 실패와 좌절을 맛보며 극복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난관을 극복하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아마도 난관을 극복하는 힘은 자존감이 생성되는 어린 시절 긍정적인 경험의 축적 여부에 따라 결정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수동적인 환경에서 성장한 경우 의존적인 성향이 강화되어 난관이 닥쳤을 때 누군가 해결해 주길 바라며 부정적인 경험이 많은 경우 문제를 회피하며 남의 탓으로 돌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긍정적인 경험이 많은 경우 능동적인 기질이 만들어지면서 문제를 마주하며 헤쳐나가려 노력한다. 이럴 때 결과가 실패로 돌아가도 크게 좌절하거나 포기하는 경우가 드물고 다음 행동의 디딤돌이 되기도 한다. 다리 그림책의 첫 장을 넘기면 산과 산 사이 강이 흐르고 산 사이를 가로지르는 다리가 놓여 있다. 왼쪽에는 곰이 다리를 건너가고 오른쪽에는 거인이 다리를 건너려 다가간다. 둘은 다리 한가운데서 마주치지만 다리는 비좁아 서로 지나칠 수 없다. 거인은 곰에게 강으로 뛰어내릴 것을 요구하고 곰도 거인에게 으르렁거리며 물러설 생각이 없다. 둘은 양보할 생각이 없고 상대가 비켜주길 바라며 으르렁대며 노려보는 사이 다리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둘은 생각 끝에 서로 꼭 껴안은 채 조금씩 서로 몸을 반대편으로 돌려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돌아선다. 마침내 둘은 다리를 건넌다. 가고자 하는 목적에 달성한 둘은 어느새 상대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둘의 주장대로 행동했다면 둘 중 하나는 불행을 겪지만, 난관을 포용으로 해결하고 원하는 결과를 얻는다. 이 얼마 되지 않는 페이지에 쓰인 짤막한 문장과 그림 안에는 난관의 대면과 대립,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는 아집과 설득, 협상과 해결방법의 모색, 사후의 처신까지 표현되어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어려운 시절을 살고 있다. 사람 간의 소통이 금지되고 행동반경마저 제약이 따르니 우울감을 호소하거나 예민해져 마치 곰의 으르렁거리는 모습이나 거인의 우격다짐 모습들이 곳곳에서 드러나는 것 같다. 앞으로도 당분간 여전히 힘들겠지만, 우리 모두 조금 다른 시각으로 곰과 거인의 현명함에 공감해보는 것은 어떨까. 손서란 복합문화공간 비플랫폼 대표
2020년 12월의 마지막 날, 마치 육지 끝에서 시작되는 바다를 보는 기분이다. 수심을 알 수 없는 바다를 향해 잠시 멈추어 서서 숨 고르며 세워보는 촉각, 결코 만만치 않은 경자년 흰 쥐의 해가 비대면으로 스쳐간다. 한 생을 통해 두 번 일어나서는 안 될 이 엄격한 코로나바이러스 그리고 거짓이 참을 밟고 짓누르며 억지 부리는 무서운 뉴스가 난무한 채로 한 해가 저물고 있음이다. 그녀는 말했다. 우리가 이 길을 몇 번이나 더 걸을 수 있을까. 한 열 번은 되려나 하며 쓸쓸히 웃던 그녀를 90년 봄 봉녕사 심우불교학교에서 처음 만났다. 동갑임에도 나에게 언니처럼 때론 스승처럼 한결같이 보살펴 준 친구다. 차가 절집까지 들어가지 않는 깊은 고찰에 공양주로 들어가 살면서 어쩌다 늦가을 바람처럼 마을로 내려와 그간의 이야기 봇짐을 풀어놓는다. 그러던 친구 겨우 두 해 걷더니 아침저녁 예불소리 그리워 절집 아래 수목장으로 육신을 뉘었다. 오늘 아침 잎 진 공원 길을 걸으며 나직하게 그 친구를 불러보았다. 그녀는 어김없이 시작한다. 친구야 봐라, 한 나무에 매달려 있다가 떨어진 이 낙엽들 자세히 봐봐. 똑같은 크기의 이파리 없고 이파리마다 색깔은 똑같은지 모양은 마르면서 오므리고 비틀기를 하나같이 달리하잖니. 움트고 잎 되어 제 용량만큼 살다가 이리 달리 몸 바꾸는데 뭐가 우울하다는 거야. 넌 지금 잘하고 있어 지금처럼 그냥 쭉 가는 거야. 그녀는 언제나처럼 토닥였다. 50년 전 방송통신대학이 생기고 20년 전 디지털대학이 생겨날 때 비대면 수업은 어쨌거나 낯설었다. 특수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등교하고자 아침 일찍 일어나 서둘러야 하고 선생님의 두 눈동자를 좇아 웃거나 끄덕이며 종일 선생님의 발걸음, 목소리 강약에 따라 집중하며 얼마나 많은 의사(意思)를 우리는 현장에서 주고받았는가. 2020년은 우리에게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게 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 하고 가까운 지인일수록 경계하고 의심하여 밥 한 끼도 마음 풀고 나누기가 조심스러운 일상이 되었으니 그 나머지를 말로써 어찌 다 열거할 수 있겠는가. 모든 수업은 비대면으로 더욱 발전할 것이고 특히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 의례, 문화예술에는 백문이 불여일견임에야 틀림없음에도 불편함 감수하고 더욱 면밀하게 기획하고 연구하여 진행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얼마 전 밤이 가장 길다는 동지가 지났다. 동지가 지나면 하루에 여우꼬리만큼씩 해가 길어지기 시작하므로 점차 양의 기운이 생겨난다고 하여 새해로 친다. 그렇지만, 양력 1월은 음력으로 섣달이어서 눈이 많이 내리고 강한 겨울바람과 혹독한 추위의 소한과 대한이 들어 있다. 지상의 모든 열기는 땅속으로 하강하는 시기이다. 수심을 알 수 없는 바다 깊숙이 온갖 생물이 겨울을 살아내듯 언 땅 깊이 웅크려서 뿌리 내린 기운을 다시 이파리로 밀어올리는 신축년 봄을 우리는 미리 잉태하는 것이다. 지금은 그렇다. 그러므로 2020년은 잘 가시게. 강성금 안산시행복예절관 관장
고생 고생하다가 뒤늦게 척추전방전위증 진단을 받았고 최근에 탄천 천변을 걷고 있다. 한강으로 흘러가는 해질녘 물결을 바라보며 성찰의 시간을 갖기도 한다. 진부하게도 아파서야 자신과 세상을 이전과 달리 보는 자신이 씁쓸하다. 병자가 되면 남의 시선에 쓸데없이 예민해진다지만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나와 시선이 마주쳐도 나의 모습에서 시선을 곧 거두지 않는다. 한두 번도 아니고 그런 시선들이 거듭되자 부담스럽고 불쾌해 비난의 심정에 젖는다. 그러다가 중얼거린다. 앞으로 나 같은 사람을 마주친다면 절대로 빤히 쳐다보지 않으리, 시선을 교환하였다면 즉각 시선을 스치리. 그러다가 또 중얼거린다. 아무래도 과부 사정 과부만 알고 홀아비 사정 홀아비만 알 뿐. 자신과 다른 행태를 보면 우선 당장 호기심에 자신도 모르게 쳐다보며 작은 연민과 미약한 공포를 느끼는 건 인지상정(人之常情) 아니겠나. 저들 중엔 지난날의 나도 있었고말고. 저들의 시선에 내가 불쾌해하는 건 아무래도 감정 낭비지. 뭐 그러면서 나는 한강으로 지체 없이 흘러가는 탄천의 물결에 제법 그윽한 시선을 준다. 물결이 내게서도 흐르고 마음이 서늘하게 씻기고, 삶의 여수(旅愁)가 일어나는 듯하였는데, 그러다가 나는 깨달았다. 그들의 무례하다고 할 수 있는 내게의 시선 지속은 그들의 일방 조사(照射)가 아니라 오히려 내가 그렇게 끌었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 그러니까 그들을 관찰하듯 빤히 쳐다보는 나의 시선이 그들의 그런 맞대응을 초래하였고, 그들의 그런 시선에 내가 불쾌해하자 그들도 불쾌해하지 않았나. 나는 그들의 시선이 대놓고 나를 깔보는 뻔뻔한 시선이라고 내심 분개하며 그들의 인격을 부정하였다. 고개를 숙이고 나는 내 시선과 표정을 애써 그려보았다. 상대와 시선이 마주치기 이전에는 몰라도 그 이후 나의 시선은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적의의 시선으로 쉽게 바뀔 수 있거나 함축되어 있는 열등감 어린 방어의 시선이 아니었을까. 그들이 먼저 나를 주시하였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 과정과 결과에서 내게 더 비중이 컸다고 하겠다.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절제하지 못하고 타인과의 관계나 상황에 개입시켜 갈등을 일으키고 상황이 왜곡되자 상대의 탓으로 돌리며 분개하는 사례가 우리 범상한 일상에서도 그렇게 야기되지 않나 한다. 우리 사회의 연속되는 갈등에 건강치 못한 나도 우려한다. 이제 어느 편이 아니든 어느 편이든 모두 시리고 저리고 쑤셔 절룩거리는 다리와 같은 나라와 자신과 상대를 의식하고 있지 않을까. 최근 공수처 출범과 검찰 개혁은 사실 어느 편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도 타협을 배제하고 예리하게 나뉘어 자신의 상처로 상대를 노려보고 있다. 어느덧 연말. 세모의 기운은 해질녘의 기운. 우리는 여러모로 이 위중한 시대에 국운 전개를 위하여 지난하였던 현대사의 강물을 바라보며 자신을 성찰하고 새해에는 상대를 또 다른 나라고 여겼으면 한다. 이른 바 진영의 이해를 초월하여 시시비비를 따르고 소통하며 공화의 공동운명체로의 행보가 있기를 기원한다. 우리 모두 저마다 애국자가 아닌가. 아무래도 과분하기만한 산책을 하고 돌아와 졸시 한 편을 얻었다. 요것조것 헤아리며 쓸데없이 긴 글을 쓰고 고치다/허리와 다리 저려 두 달을 앓네/따르지 못할 주제/자신마저 잊고 몰두하다/허리와 다리 쑤셔 두 달을 신음하네/영하의 해질녘 대지에 말없이 눈 내리고/자업자득 그레고르 잠자는 듣네/겨우 고걸로 징징 치대는 소리 하지 말아요/일어나 똑 바로 걷고 걸으면 좋아질 겁니다/혈액암에서 자란 머리칼을 삭발하려고 이발소로 가는 후배의 호통/그 애증에 그레고르의 가슴에도 서늘한 흰 눈 내리네(「이발」) 김승종 연성대 교수 ㆍ시인
어릴 적 피아노를 배울 때 초보자들의 교본인 바이엘을 치며 눈물을 펑펑 쏟은 적이 있다. 피아노를 배우기 싫어서 한 행동은 아니었다. 이런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 수 있다는 행복함에 젖은 감동이 넘쳤던 그 순간의 기억이 또렷하다. 어머니 돌아가신 후 모차르트의 진혼곡을 연주하게 됐다. 연주 끝 부분에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다. 2004년 대전시향 미국투어의 첫 연주장소인 시애틀의 베나로야 콘서트홀 무대에서 붉게 상기된 단원들의 표정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여 있음을 숨기려 애썼다. 세계최고의 음향을 가진 콘서트 홀에서 그동안 들어보지 못했던 본인들의 소리를 몸소 느낄 수 있는 가슴 벅찬 순간이었다. 이런 감동의 음악이 녹아 흘러나오는 뭉클한 순간은 삶의 귀한 페이지이다. 상상하기 어려운 각고의 노력을 거친 연주자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북받쳐 오르는 기쁨, 가누기 힘든 슬픔, 절망의 터널 중간에서 어찌할 줄 모르는 무력함, 가슴을 저미는 외로움,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그리움 등 연주자가 음악을 통해 생성된 감정을 무대에서 청중에게 전달하는 감정이입(感情移入)의 특권이다. 짧게는 5분 이내 길게는 4시간이 넘는 길이의 작품을 준비하여 무대에 올라 연주하는 음악가들이 연주하며 집중하는 것은 무엇일까. 청중과의 소통이다. 악보를 읽어가는 정도는 청중을 감동시키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연주행위는 한 폭의 캔버스를 새롭고 아름답게 채워가는 화가의 창조적인 작업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필요한 외부적 영감 외에도 개인의 감정이 고임돌임은 분명하다. 음대에서 다양한 학생들을 가르쳤고 그들의 진로도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지휘과 출신의 제자 중에서 주류무대에서 활동하는 제자들은 학생 시절부터 감정이입이라는 특별한 부분이 탁월하였다. 함께 연주한 기악, 성악, 작곡가 중 청중과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을 개성 있게 표출하는 탤런트를 보유한 음악가와의 관계는 지금도 유지되고 있으며 그들과의 연주는 놀랄 만큼 성공적이다. 반면, 이성적으로 냉철하게 연주하는 연주가들도 많다. 수업에서 또는 연주를 준비하는 과정 중 그들과 토론하는 기회가 많다. 그들이 소유한 내면의 에너지와 깊고 풍부한 지식에 놀랍다. 그러나 그들의 연주는 내게 감동을 주지는 못했다. 여러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다 보면 특유의 역사에 따라 풍기는 감정표현의 차이가 크다. 풍성하고 성공적인 운영과 콘서트 홀에 가득 찬 열광적인 청중을 가진 오케스트라들은 단원들의 표정이 진지하고 연주 내내 뿜어내는 자신만만한 자세에서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청중에게 전달하려고 하는 의지가 넘치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예술가들이 종종 착각하는 것은 자신들이 청중들로부터 무조건적인 존경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존경은 거저 받는 것이 아니라 획득하는 것이다 (You have to earn the respect). 요즘 같이 앞뒤가 두꺼운 철문으로 견고하게 봉쇄된 성 안에 고립된 듯한 갑갑한 예술계의 현실은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그럼에도, 지나온 역사를 통해 우리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 위기 후에는 반드시 기회가 찾아온다. 출발점으로 돌아가 예술의 본질에 옷깃을 여미고 초심을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이다. 작곡가의 의도를 진실되게 파악하여 철저하고 완벽한 준비를 하며 그것을 감동적으로 청중에게 바치는 소통에 충실하는 것이 연주자들의 사명이다. 청중들은 바이엘 교본의 음표를 읽어가는 음악보다 스스로 감동에 흠뻑 젖어 있는 연주자들에게 박수를 보내기 위해 콘서트 홀을 찾는 것이다. 함신익 심포니 송 예술감독
나이를 먹을수록 후회되는 것은 알량한 독서량이다. 왜 그때 책을 많이 읽지 않았을까. 그랬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똑똑하고 지혜롭고 현명했을 텐데. 든 게 많은 사람을 만날 때나 복잡한 문제해결이 필요할 때, 얽히고설킨 세상사가 도무지 이해 안 될 때 이런 상실감은 더욱 커진다. 그런 자괴감이 일 때마다 내가 달려간 곳은 서점이다. 시간이 넉넉지 않으면 집 근처 중고서점이라도 찾는다. 굳이 어느 코너에 몰입하지 않더라도 이리저리 서가를 배회하다 보면 서권기요 문자향이랄까, 글자의 기운과 문자의 향기가 느껴진다. 도중에 읽고 싶은 책을 발견하면 얼마나 행복한지. 어느새 쌓인 열패감은 사라지고 지적 요구로 충만해진다. 며칠 전이 그랬다. 한 서점 배회 중 나는 이 책을 발견했다. 아니 미리 입력된 기억이 무의식적으로 그걸 보도록 했다는 표현이 맞는다. 한 달 전쯤 장안을 쥐락펴락하는 논객의 도마 위에 불려나온 책,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이다. 읽을 책을 고르는 게 체계적이지도 않고 관심 범위가 넓은 축에 속하는 나는 자주 여론에 선택과 판단을 의지한다. 말하자면 책 고를 때 시의성을 따지는 편. 그렇게 고른 책을 당시 현실의 사례와 연관해서 읽으면 기억도 오래가고 지루하지도 않아 좋다. 밀의 자유론은 그렇게 나에게 다가왔다. 부끄럽게도 고전 중의 고전이라는 자유론을 이제야 처음 읽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빠른 법이라던가. 161년 전 나온 책이라며 무시하고 밀쳐놨으면 천추의 한이 될 뻔했다. 정치와 사회, 인간에 관한 저자의 탁견은 시종일관했고 언어는 명징했다. 심지어 트렌디했다. 자유 가운데서도 가장 소중하고 또 유일하게 자유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의 자유를 박탈하거나 자유를 얻기 위한 노력을 방해하지 않는 한, 각자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는 자유이다.(자유론, 책세상) 소위 클래식이라 하는 고전(古典)을 사전은 이렇게 푼다. 예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시대를 초월하여 높게 평가되는 문학 예술작품. 한자 고(古) 는 글자대로 오래됐다는 뜻, 전(典) 은 모범 또는 본보기가 된다는 의미다. 그 대상은 바로 오늘, 우리다. 자유론이 그렇듯 고전이 가치와 위안은 이런 것이다. 올해 초 팬데믹이 들이닥쳤을 때, 전 사회가 즉각적 대응방안을 찾느라 분주했다. 예술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제 와 당시를 되돌아보면 혼란의 와중에 빛난 건 여전히 고전이었던 것 같다. 특히 클래식 음악의 쓰임이 도드라졌다. 예로부터 축적된 녹음(촬영) 저장 기술의 도움 덕에 쉽게 온라인 재생이 가능했기 때문이리라. 서랍에 고이 간직한 귀한 보석처럼, 아쉬울 때 요긴한 재산 밑천처럼, 고전의 위안이란 또한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정재왈 고양문화재단 대표이사
습관처럼 믿고 살아온 신념이 어느 날 의심될 때, 사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 아무리 노력해도 제자리걸음일 때,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질 때 이렇게 그냥 떠밀려 살아지는 것이 아닐까 우울해질 때가 있다. 특히 코로나 19로 인해 외부에서 행해지는 문화 활동도 제약이 따르고 외출조차 쉽지 않은 요즈음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힘들고 무기력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힘든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선다. 이럴 때 문득 집어든 한 권의 그림책에서 따뜻한 느낌의 삽화와 함께 어우러진 글이 기대하지 않은 각성과 위로를 준다. 책장을 천천히 넘기다 보면 그 속에 담긴 그림들이 이야기를 건네고 때론 한 줄의 문장이 시원한 답을 주기도 한다. 추억에 젖어 과거도 돌아보게 되고 앞으로의 희망도 품게 되며 힘들었던 마음에 잠시나마 휴식이 찾아온다. 살아간다는 건 뭘까. 브리타 테켄트럽 글ㆍ그림, 김서정 옮김의 허튼 생각은 글쓴이가 화자가 되어 질문을 던진다. 세상에 내 자리는 있을까?, 세상을 내 안에 품을 수 있을까?, 아니면 세상 밖으로 밀려날까?, 겨울이 영원히 끝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내가 하늘을 날지 못하도록 땅에 붙잡아 두는 건 대체 뭘까?, 사람들이 아름다운 것만 생각할 수 있다면 행복할까?, 왜 다이빙대 위에서는 겁에 질렸다가 뛰고 나면 완전히 용감하다는 기분이 드는 걸까? 등. 인생에 관한 은유적인 문장들이 나온다. 이러한 문장들을 읽으며 독자는 잊었던 과거의 경험을 떠올리며 스스로 답을 찾아간다. 독자의 생각과 결을 같이하며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깊은 사색에 잠기게 한다. 그 사색은 한 사람의 인생을 감싸 안아 주기도 하고 인간 내면의 불안하고 두려운 심리를 포용하며 안정감을 주기도 한다. 부드러운 색조의 그림들은 보는 이의 감정과 맞물려 편안함을 주기도 하고 문장들은 독자 스스로를 돌아보고 성찰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림책 중에는 어린이의 성장이나 인지발달에 필요한 그림책들도 많지만, 요즘에는 어른들에게 어필하는 내용의 그림책이 많아지고 있다. 인생에 대한 내용으로 공감과 힐링을 주는 그림책들이 출판사마다 적지 않게 나오고 그림책의 매력에 빠진 어른들의 수요가 많아지고 있다. 그림책이야말로 현재를 바쁘게 살아내는 어른들에게 가장 필요하고 편리한 문화 활동이다. 어디서든 가볍게 볼 수 있고 쉽게 구할 수 있으며 가격도 비싸지 않으니 팬데믹 시대에 벗 삼아 서너 권 쯤 옆에 두어도 좋지 않을까. 손서란 복합문화공간 비플랫폼 대표
코로나19가 절정에 다다른 지난 8월20일 비대면 예절대학을 개강했다. 사실 예절관에서 예절대학을 진행하려고 벼른 지 반년 넘는 시간을 보냈고 개강 직전까지 고민은 끝이 없었다. 널리고 널린 평생대학, 주부대학, 여성대학 등 지역마다 특성을 살린 대학이 참 많기도 하여 인터넷을 통해 찾아보는데도 꽤 많은 시간이 요구됐다. 특히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은 그 내용이 거의 비슷비슷해 고루한 옛 예절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이끌어내기란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정하기를 일단 처음과 끝을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통과의례를 기본으로 성(性)과 사랑 태교 이야기와 웰다잉- 인생의 행복한 마무리로 정했다. 그러고 나니 중간 부분은 슬슬 풀어지기 시작했다. 여성으로 태어났으니 가정은 물론 사회에서도 리더십을 발휘하는 소통의 기술, 맥주양주 말고 우리의 전통주인 가양주, 한국의 멋 국악나들이, 돌 백일 혼례 폐백의 통과의례 음식, 오늘날의 명절차례와 제례, 그 사이에 살짝 찻자리의 미학 잎차와 발효차 행다례, 여성이면 누구나 호감을 느끼는 옥 반지 옥 노리개의 옥(玉)의 세계- 아름다운 우리 옥 그리고 지금 사는 지역의 역사와 문화, 문화인물 단원과 정조이야기를 짜 맞추었다. 일단 제목선정을 마친 후 강사 섭외에 들어갔다. 비대면 시스템에 절반 이상은 안 해봐서 불편하다고 난감해하셨다. 그리고 드디어 제1기 예절대학 수강생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욕심내어 50명으로 정했다. 예상 외로 70명을 넘어서고 80명에 이르게 되었다. 개강하고 몇 주가 지났음에도 계속 문의가 들어왔다. 신기했다. 한 지역에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인연 따라 인연이 되어 살게 되면 우리는 낯선 길도 익숙해지고 익숙해져서 편해지고 편하다 보면 고향처럼 주저앉게 되어 선뜻 이사하거나 멀리 떠났다가도 이내 돌아오고 싶어 한다. 815 광복절을 기점으로 기승을 부리는 코로나19로 인해 이미 적응이 되어선지 기대 이상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매주 올라오는 답글을 달다 보니 어느새 비대면 속에서 따뜻한 마음이 오가고 공감하는 관계를 형성하게 됐다. 대망의 2020년 비대면 예절대학 수강생 모집 때에 이런 문구를 넣었다. 가장 매력적인 사람은 자신감 있는 사람, 자신의 부가가치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 그리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내일은 행복예절대학 수료식을 대면으로 하는 날이다. 일면식도 없는 분들의 이름 석 자를 수료증에서 한 분씩 읽어본다. 옥색 바지저고리에 행전을 치고 도포에 술띠를 매고 유건을 쓴 그 수료생에게 이름과 얼굴을 번갈아 보며 주먹악수로 이렇게 반길 것이다. 그대는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강성금 안산시행복예절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