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포용은 난관을 해결한다

세상을 살다 보면 종류가 다를 뿐 많은 난관에 부딪힌다. 그 난관들은 나의 미숙한 실수로 인해 생기는 것일 수도 있고 타인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때론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생기기도 한다. 이럴 때 우리는 난관에 대처하는 방법과 과정에 따라 실패와 좌절을 맛보며 극복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난관을 극복하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아마도 난관을 극복하는 힘은 자존감이 생성되는 어린 시절 긍정적인 경험의 축적 여부에 따라 결정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수동적인 환경에서 성장한 경우 의존적인 성향이 강화되어 난관이 닥쳤을 때 누군가 해결해 주길 바라며 부정적인 경험이 많은 경우 문제를 회피하며 남의 탓으로 돌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긍정적인 경험이 많은 경우 능동적인 기질이 만들어지면서 문제를 마주하며 헤쳐나가려 노력한다. 이럴 때 결과가 실패로 돌아가도 크게 좌절하거나 포기하는 경우가 드물고 다음 행동의 디딤돌이 되기도 한다. 다리 그림책의 첫 장을 넘기면 산과 산 사이 강이 흐르고 산 사이를 가로지르는 다리가 놓여 있다. 왼쪽에는 곰이 다리를 건너가고 오른쪽에는 거인이 다리를 건너려 다가간다. 둘은 다리 한가운데서 마주치지만 다리는 비좁아 서로 지나칠 수 없다. 거인은 곰에게 강으로 뛰어내릴 것을 요구하고 곰도 거인에게 으르렁거리며 물러설 생각이 없다. 둘은 양보할 생각이 없고 상대가 비켜주길 바라며 으르렁대며 노려보는 사이 다리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둘은 생각 끝에 서로 꼭 껴안은 채 조금씩 서로 몸을 반대편으로 돌려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돌아선다. 마침내 둘은 다리를 건넌다. 가고자 하는 목적에 달성한 둘은 어느새 상대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둘의 주장대로 행동했다면 둘 중 하나는 불행을 겪지만, 난관을 포용으로 해결하고 원하는 결과를 얻는다. 이 얼마 되지 않는 페이지에 쓰인 짤막한 문장과 그림 안에는 난관의 대면과 대립,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는 아집과 설득, 협상과 해결방법의 모색, 사후의 처신까지 표현되어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어려운 시절을 살고 있다. 사람 간의 소통이 금지되고 행동반경마저 제약이 따르니 우울감을 호소하거나 예민해져 마치 곰의 으르렁거리는 모습이나 거인의 우격다짐 모습들이 곳곳에서 드러나는 것 같다. 앞으로도 당분간 여전히 힘들겠지만, 우리 모두 조금 다른 시각으로 곰과 거인의 현명함에 공감해보는 것은 어떨까. 손서란 복합문화공간 비플랫폼 대표

[문화카페] 2020년 잘 가시오

2020년 12월의 마지막 날, 마치 육지 끝에서 시작되는 바다를 보는 기분이다. 수심을 알 수 없는 바다를 향해 잠시 멈추어 서서 숨 고르며 세워보는 촉각, 결코 만만치 않은 경자년 흰 쥐의 해가 비대면으로 스쳐간다. 한 생을 통해 두 번 일어나서는 안 될 이 엄격한 코로나바이러스 그리고 거짓이 참을 밟고 짓누르며 억지 부리는 무서운 뉴스가 난무한 채로 한 해가 저물고 있음이다. 그녀는 말했다. 우리가 이 길을 몇 번이나 더 걸을 수 있을까. 한 열 번은 되려나 하며 쓸쓸히 웃던 그녀를 90년 봄 봉녕사 심우불교학교에서 처음 만났다. 동갑임에도 나에게 언니처럼 때론 스승처럼 한결같이 보살펴 준 친구다. 차가 절집까지 들어가지 않는 깊은 고찰에 공양주로 들어가 살면서 어쩌다 늦가을 바람처럼 마을로 내려와 그간의 이야기 봇짐을 풀어놓는다. 그러던 친구 겨우 두 해 걷더니 아침저녁 예불소리 그리워 절집 아래 수목장으로 육신을 뉘었다. 오늘 아침 잎 진 공원 길을 걸으며 나직하게 그 친구를 불러보았다. 그녀는 어김없이 시작한다. 친구야 봐라, 한 나무에 매달려 있다가 떨어진 이 낙엽들 자세히 봐봐. 똑같은 크기의 이파리 없고 이파리마다 색깔은 똑같은지 모양은 마르면서 오므리고 비틀기를 하나같이 달리하잖니. 움트고 잎 되어 제 용량만큼 살다가 이리 달리 몸 바꾸는데 뭐가 우울하다는 거야. 넌 지금 잘하고 있어 지금처럼 그냥 쭉 가는 거야. 그녀는 언제나처럼 토닥였다. 50년 전 방송통신대학이 생기고 20년 전 디지털대학이 생겨날 때 비대면 수업은 어쨌거나 낯설었다. 특수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등교하고자 아침 일찍 일어나 서둘러야 하고 선생님의 두 눈동자를 좇아 웃거나 끄덕이며 종일 선생님의 발걸음, 목소리 강약에 따라 집중하며 얼마나 많은 의사(意思)를 우리는 현장에서 주고받았는가. 2020년은 우리에게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게 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 하고 가까운 지인일수록 경계하고 의심하여 밥 한 끼도 마음 풀고 나누기가 조심스러운 일상이 되었으니 그 나머지를 말로써 어찌 다 열거할 수 있겠는가. 모든 수업은 비대면으로 더욱 발전할 것이고 특히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 의례, 문화예술에는 백문이 불여일견임에야 틀림없음에도 불편함 감수하고 더욱 면밀하게 기획하고 연구하여 진행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얼마 전 밤이 가장 길다는 동지가 지났다. 동지가 지나면 하루에 여우꼬리만큼씩 해가 길어지기 시작하므로 점차 양의 기운이 생겨난다고 하여 새해로 친다. 그렇지만, 양력 1월은 음력으로 섣달이어서 눈이 많이 내리고 강한 겨울바람과 혹독한 추위의 소한과 대한이 들어 있다. 지상의 모든 열기는 땅속으로 하강하는 시기이다. 수심을 알 수 없는 바다 깊숙이 온갖 생물이 겨울을 살아내듯 언 땅 깊이 웅크려서 뿌리 내린 기운을 다시 이파리로 밀어올리는 신축년 봄을 우리는 미리 잉태하는 것이다. 지금은 그렇다. 그러므로 2020년은 잘 가시게. 강성금 안산시행복예절관 관장

[문화카페] 길 위의 도반들

고생 고생하다가 뒤늦게 척추전방전위증 진단을 받았고 최근에 탄천 천변을 걷고 있다. 한강으로 흘러가는 해질녘 물결을 바라보며 성찰의 시간을 갖기도 한다. 진부하게도 아파서야 자신과 세상을 이전과 달리 보는 자신이 씁쓸하다. 병자가 되면 남의 시선에 쓸데없이 예민해진다지만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나와 시선이 마주쳐도 나의 모습에서 시선을 곧 거두지 않는다. 한두 번도 아니고 그런 시선들이 거듭되자 부담스럽고 불쾌해 비난의 심정에 젖는다. 그러다가 중얼거린다. 앞으로 나 같은 사람을 마주친다면 절대로 빤히 쳐다보지 않으리, 시선을 교환하였다면 즉각 시선을 스치리. 그러다가 또 중얼거린다. 아무래도 과부 사정 과부만 알고 홀아비 사정 홀아비만 알 뿐. 자신과 다른 행태를 보면 우선 당장 호기심에 자신도 모르게 쳐다보며 작은 연민과 미약한 공포를 느끼는 건 인지상정(人之常情) 아니겠나. 저들 중엔 지난날의 나도 있었고말고. 저들의 시선에 내가 불쾌해하는 건 아무래도 감정 낭비지. 뭐 그러면서 나는 한강으로 지체 없이 흘러가는 탄천의 물결에 제법 그윽한 시선을 준다. 물결이 내게서도 흐르고 마음이 서늘하게 씻기고, 삶의 여수(旅愁)가 일어나는 듯하였는데, 그러다가 나는 깨달았다. 그들의 무례하다고 할 수 있는 내게의 시선 지속은 그들의 일방 조사(照射)가 아니라 오히려 내가 그렇게 끌었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 그러니까 그들을 관찰하듯 빤히 쳐다보는 나의 시선이 그들의 그런 맞대응을 초래하였고, 그들의 그런 시선에 내가 불쾌해하자 그들도 불쾌해하지 않았나. 나는 그들의 시선이 대놓고 나를 깔보는 뻔뻔한 시선이라고 내심 분개하며 그들의 인격을 부정하였다. 고개를 숙이고 나는 내 시선과 표정을 애써 그려보았다. 상대와 시선이 마주치기 이전에는 몰라도 그 이후 나의 시선은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적의의 시선으로 쉽게 바뀔 수 있거나 함축되어 있는 열등감 어린 방어의 시선이 아니었을까. 그들이 먼저 나를 주시하였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 과정과 결과에서 내게 더 비중이 컸다고 하겠다.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절제하지 못하고 타인과의 관계나 상황에 개입시켜 갈등을 일으키고 상황이 왜곡되자 상대의 탓으로 돌리며 분개하는 사례가 우리 범상한 일상에서도 그렇게 야기되지 않나 한다. 우리 사회의 연속되는 갈등에 건강치 못한 나도 우려한다. 이제 어느 편이 아니든 어느 편이든 모두 시리고 저리고 쑤셔 절룩거리는 다리와 같은 나라와 자신과 상대를 의식하고 있지 않을까. 최근 공수처 출범과 검찰 개혁은 사실 어느 편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도 타협을 배제하고 예리하게 나뉘어 자신의 상처로 상대를 노려보고 있다. 어느덧 연말. 세모의 기운은 해질녘의 기운. 우리는 여러모로 이 위중한 시대에 국운 전개를 위하여 지난하였던 현대사의 강물을 바라보며 자신을 성찰하고 새해에는 상대를 또 다른 나라고 여겼으면 한다. 이른 바 진영의 이해를 초월하여 시시비비를 따르고 소통하며 공화의 공동운명체로의 행보가 있기를 기원한다. 우리 모두 저마다 애국자가 아닌가. 아무래도 과분하기만한 산책을 하고 돌아와 졸시 한 편을 얻었다. 요것조것 헤아리며 쓸데없이 긴 글을 쓰고 고치다/허리와 다리 저려 두 달을 앓네/따르지 못할 주제/자신마저 잊고 몰두하다/허리와 다리 쑤셔 두 달을 신음하네/영하의 해질녘 대지에 말없이 눈 내리고/자업자득 그레고르 잠자는 듣네/겨우 고걸로 징징 치대는 소리 하지 말아요/일어나 똑 바로 걷고 걸으면 좋아질 겁니다/혈액암에서 자란 머리칼을 삭발하려고 이발소로 가는 후배의 호통/그 애증에 그레고르의 가슴에도 서늘한 흰 눈 내리네(「이발」) 김승종 연성대 교수 ㆍ시인

[문화카페] 이성과 감정 사이에서-함신익 심포니 송 예술감독

어릴 적 피아노를 배울 때 초보자들의 교본인 바이엘을 치며 눈물을 펑펑 쏟은 적이 있다. 피아노를 배우기 싫어서 한 행동은 아니었다. 이런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 수 있다는 행복함에 젖은 감동이 넘쳤던 그 순간의 기억이 또렷하다. 어머니 돌아가신 후 모차르트의 진혼곡을 연주하게 됐다. 연주 끝 부분에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다. 2004년 대전시향 미국투어의 첫 연주장소인 시애틀의 베나로야 콘서트홀 무대에서 붉게 상기된 단원들의 표정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여 있음을 숨기려 애썼다. 세계최고의 음향을 가진 콘서트 홀에서 그동안 들어보지 못했던 본인들의 소리를 몸소 느낄 수 있는 가슴 벅찬 순간이었다. 이런 감동의 음악이 녹아 흘러나오는 뭉클한 순간은 삶의 귀한 페이지이다. 상상하기 어려운 각고의 노력을 거친 연주자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북받쳐 오르는 기쁨, 가누기 힘든 슬픔, 절망의 터널 중간에서 어찌할 줄 모르는 무력함, 가슴을 저미는 외로움,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그리움 등 연주자가 음악을 통해 생성된 감정을 무대에서 청중에게 전달하는 감정이입(感情移入)의 특권이다. 짧게는 5분 이내 길게는 4시간이 넘는 길이의 작품을 준비하여 무대에 올라 연주하는 음악가들이 연주하며 집중하는 것은 무엇일까. 청중과의 소통이다. 악보를 읽어가는 정도는 청중을 감동시키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연주행위는 한 폭의 캔버스를 새롭고 아름답게 채워가는 화가의 창조적인 작업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필요한 외부적 영감 외에도 개인의 감정이 고임돌임은 분명하다. 음대에서 다양한 학생들을 가르쳤고 그들의 진로도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지휘과 출신의 제자 중에서 주류무대에서 활동하는 제자들은 학생 시절부터 감정이입이라는 특별한 부분이 탁월하였다. 함께 연주한 기악, 성악, 작곡가 중 청중과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을 개성 있게 표출하는 탤런트를 보유한 음악가와의 관계는 지금도 유지되고 있으며 그들과의 연주는 놀랄 만큼 성공적이다. 반면, 이성적으로 냉철하게 연주하는 연주가들도 많다. 수업에서 또는 연주를 준비하는 과정 중 그들과 토론하는 기회가 많다. 그들이 소유한 내면의 에너지와 깊고 풍부한 지식에 놀랍다. 그러나 그들의 연주는 내게 감동을 주지는 못했다. 여러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다 보면 특유의 역사에 따라 풍기는 감정표현의 차이가 크다. 풍성하고 성공적인 운영과 콘서트 홀에 가득 찬 열광적인 청중을 가진 오케스트라들은 단원들의 표정이 진지하고 연주 내내 뿜어내는 자신만만한 자세에서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청중에게 전달하려고 하는 의지가 넘치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예술가들이 종종 착각하는 것은 자신들이 청중들로부터 무조건적인 존경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존경은 거저 받는 것이 아니라 획득하는 것이다 (You have to earn the respect). 요즘 같이 앞뒤가 두꺼운 철문으로 견고하게 봉쇄된 성 안에 고립된 듯한 갑갑한 예술계의 현실은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그럼에도, 지나온 역사를 통해 우리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 위기 후에는 반드시 기회가 찾아온다. 출발점으로 돌아가 예술의 본질에 옷깃을 여미고 초심을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이다. 작곡가의 의도를 진실되게 파악하여 철저하고 완벽한 준비를 하며 그것을 감동적으로 청중에게 바치는 소통에 충실하는 것이 연주자들의 사명이다. 청중들은 바이엘 교본의 음표를 읽어가는 음악보다 스스로 감동에 흠뻑 젖어 있는 연주자들에게 박수를 보내기 위해 콘서트 홀을 찾는 것이다. 함신익 심포니 송 예술감독

[문화 카페] 고전의 위안

나이를 먹을수록 후회되는 것은 알량한 독서량이다. 왜 그때 책을 많이 읽지 않았을까. 그랬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똑똑하고 지혜롭고 현명했을 텐데. 든 게 많은 사람을 만날 때나 복잡한 문제해결이 필요할 때, 얽히고설킨 세상사가 도무지 이해 안 될 때 이런 상실감은 더욱 커진다. 그런 자괴감이 일 때마다 내가 달려간 곳은 서점이다. 시간이 넉넉지 않으면 집 근처 중고서점이라도 찾는다. 굳이 어느 코너에 몰입하지 않더라도 이리저리 서가를 배회하다 보면 서권기요 문자향이랄까, 글자의 기운과 문자의 향기가 느껴진다. 도중에 읽고 싶은 책을 발견하면 얼마나 행복한지. 어느새 쌓인 열패감은 사라지고 지적 요구로 충만해진다. 며칠 전이 그랬다. 한 서점 배회 중 나는 이 책을 발견했다. 아니 미리 입력된 기억이 무의식적으로 그걸 보도록 했다는 표현이 맞는다. 한 달 전쯤 장안을 쥐락펴락하는 논객의 도마 위에 불려나온 책,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이다. 읽을 책을 고르는 게 체계적이지도 않고 관심 범위가 넓은 축에 속하는 나는 자주 여론에 선택과 판단을 의지한다. 말하자면 책 고를 때 시의성을 따지는 편. 그렇게 고른 책을 당시 현실의 사례와 연관해서 읽으면 기억도 오래가고 지루하지도 않아 좋다. 밀의 자유론은 그렇게 나에게 다가왔다. 부끄럽게도 고전 중의 고전이라는 자유론을 이제야 처음 읽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빠른 법이라던가. 161년 전 나온 책이라며 무시하고 밀쳐놨으면 천추의 한이 될 뻔했다. 정치와 사회, 인간에 관한 저자의 탁견은 시종일관했고 언어는 명징했다. 심지어 트렌디했다. 자유 가운데서도 가장 소중하고 또 유일하게 자유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의 자유를 박탈하거나 자유를 얻기 위한 노력을 방해하지 않는 한, 각자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는 자유이다.(자유론, 책세상) 소위 클래식이라 하는 고전(古典)을 사전은 이렇게 푼다. 예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시대를 초월하여 높게 평가되는 문학 예술작품. 한자 고(古) 는 글자대로 오래됐다는 뜻, 전(典) 은 모범 또는 본보기가 된다는 의미다. 그 대상은 바로 오늘, 우리다. 자유론이 그렇듯 고전이 가치와 위안은 이런 것이다. 올해 초 팬데믹이 들이닥쳤을 때, 전 사회가 즉각적 대응방안을 찾느라 분주했다. 예술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제 와 당시를 되돌아보면 혼란의 와중에 빛난 건 여전히 고전이었던 것 같다. 특히 클래식 음악의 쓰임이 도드라졌다. 예로부터 축적된 녹음(촬영) 저장 기술의 도움 덕에 쉽게 온라인 재생이 가능했기 때문이리라. 서랍에 고이 간직한 귀한 보석처럼, 아쉬울 때 요긴한 재산 밑천처럼, 고전의 위안이란 또한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정재왈 고양문화재단 대표이사

[문화카페] 마음으로 보는 그림과 문장

습관처럼 믿고 살아온 신념이 어느 날 의심될 때, 사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 아무리 노력해도 제자리걸음일 때,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질 때 이렇게 그냥 떠밀려 살아지는 것이 아닐까 우울해질 때가 있다. 특히 코로나 19로 인해 외부에서 행해지는 문화 활동도 제약이 따르고 외출조차 쉽지 않은 요즈음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힘들고 무기력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힘든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선다. 이럴 때 문득 집어든 한 권의 그림책에서 따뜻한 느낌의 삽화와 함께 어우러진 글이 기대하지 않은 각성과 위로를 준다. 책장을 천천히 넘기다 보면 그 속에 담긴 그림들이 이야기를 건네고 때론 한 줄의 문장이 시원한 답을 주기도 한다. 추억에 젖어 과거도 돌아보게 되고 앞으로의 희망도 품게 되며 힘들었던 마음에 잠시나마 휴식이 찾아온다. 살아간다는 건 뭘까. 브리타 테켄트럽 글ㆍ그림, 김서정 옮김의 허튼 생각은 글쓴이가 화자가 되어 질문을 던진다. 세상에 내 자리는 있을까?, 세상을 내 안에 품을 수 있을까?, 아니면 세상 밖으로 밀려날까?, 겨울이 영원히 끝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내가 하늘을 날지 못하도록 땅에 붙잡아 두는 건 대체 뭘까?, 사람들이 아름다운 것만 생각할 수 있다면 행복할까?, 왜 다이빙대 위에서는 겁에 질렸다가 뛰고 나면 완전히 용감하다는 기분이 드는 걸까? 등. 인생에 관한 은유적인 문장들이 나온다. 이러한 문장들을 읽으며 독자는 잊었던 과거의 경험을 떠올리며 스스로 답을 찾아간다. 독자의 생각과 결을 같이하며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깊은 사색에 잠기게 한다. 그 사색은 한 사람의 인생을 감싸 안아 주기도 하고 인간 내면의 불안하고 두려운 심리를 포용하며 안정감을 주기도 한다. 부드러운 색조의 그림들은 보는 이의 감정과 맞물려 편안함을 주기도 하고 문장들은 독자 스스로를 돌아보고 성찰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림책 중에는 어린이의 성장이나 인지발달에 필요한 그림책들도 많지만, 요즘에는 어른들에게 어필하는 내용의 그림책이 많아지고 있다. 인생에 대한 내용으로 공감과 힐링을 주는 그림책들이 출판사마다 적지 않게 나오고 그림책의 매력에 빠진 어른들의 수요가 많아지고 있다. 그림책이야말로 현재를 바쁘게 살아내는 어른들에게 가장 필요하고 편리한 문화 활동이다. 어디서든 가볍게 볼 수 있고 쉽게 구할 수 있으며 가격도 비싸지 않으니 팬데믹 시대에 벗 삼아 서너 권 쯤 옆에 두어도 좋지 않을까. 손서란 복합문화공간 비플랫폼 대표

[문화카페] 비대면 예절대학

코로나19가 절정에 다다른 지난 8월20일 비대면 예절대학을 개강했다. 사실 예절관에서 예절대학을 진행하려고 벼른 지 반년 넘는 시간을 보냈고 개강 직전까지 고민은 끝이 없었다. 널리고 널린 평생대학, 주부대학, 여성대학 등 지역마다 특성을 살린 대학이 참 많기도 하여 인터넷을 통해 찾아보는데도 꽤 많은 시간이 요구됐다. 특히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은 그 내용이 거의 비슷비슷해 고루한 옛 예절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이끌어내기란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정하기를 일단 처음과 끝을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통과의례를 기본으로 성(性)과 사랑 태교 이야기와 웰다잉- 인생의 행복한 마무리로 정했다. 그러고 나니 중간 부분은 슬슬 풀어지기 시작했다. 여성으로 태어났으니 가정은 물론 사회에서도 리더십을 발휘하는 소통의 기술, 맥주양주 말고 우리의 전통주인 가양주, 한국의 멋 국악나들이, 돌 백일 혼례 폐백의 통과의례 음식, 오늘날의 명절차례와 제례, 그 사이에 살짝 찻자리의 미학 잎차와 발효차 행다례, 여성이면 누구나 호감을 느끼는 옥 반지 옥 노리개의 옥(玉)의 세계- 아름다운 우리 옥 그리고 지금 사는 지역의 역사와 문화, 문화인물 단원과 정조이야기를 짜 맞추었다. 일단 제목선정을 마친 후 강사 섭외에 들어갔다. 비대면 시스템에 절반 이상은 안 해봐서 불편하다고 난감해하셨다. 그리고 드디어 제1기 예절대학 수강생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욕심내어 50명으로 정했다. 예상 외로 70명을 넘어서고 80명에 이르게 되었다. 개강하고 몇 주가 지났음에도 계속 문의가 들어왔다. 신기했다. 한 지역에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인연 따라 인연이 되어 살게 되면 우리는 낯선 길도 익숙해지고 익숙해져서 편해지고 편하다 보면 고향처럼 주저앉게 되어 선뜻 이사하거나 멀리 떠났다가도 이내 돌아오고 싶어 한다. 815 광복절을 기점으로 기승을 부리는 코로나19로 인해 이미 적응이 되어선지 기대 이상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매주 올라오는 답글을 달다 보니 어느새 비대면 속에서 따뜻한 마음이 오가고 공감하는 관계를 형성하게 됐다. 대망의 2020년 비대면 예절대학 수강생 모집 때에 이런 문구를 넣었다. 가장 매력적인 사람은 자신감 있는 사람, 자신의 부가가치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 그리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내일은 행복예절대학 수료식을 대면으로 하는 날이다. 일면식도 없는 분들의 이름 석 자를 수료증에서 한 분씩 읽어본다. 옥색 바지저고리에 행전을 치고 도포에 술띠를 매고 유건을 쓴 그 수료생에게 이름과 얼굴을 번갈아 보며 주먹악수로 이렇게 반길 것이다. 그대는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강성금 안산시행복예절관 관장

[문화카페] 변신

오늘 아침 그동안 앓던 왼쪽 다리의 통증이 격화돼 참지 못하고 한동안 신음했다. 그저 아프지만 않으면 바로 그게 건강이고 행복이 아니겠는가. 나으면 생각이 바뀔 것이지만 절실한 심정으로 오랜만에 병자의 모습을 나는 내게서 보고 있다. 후회막급이지만 이렇게 된 원인은 허리가 부실한데도 한 열흘 의자에 앉아 컴퓨터를 사용하면서 그 자세가 나도 모르게 불량하였기 때문이다. 불량한 자세가 관절 관련 병을 부른다는 사실을 다시 통감한다. 자업자득(自業自得). 그런데 우리 삶에서 어디 이뿐이랴. 일상의 대화에서도 불량한 자세는 상대를 화나게도 하며 관계를 갈등으로 몰아넣는다. 사람의 의사표현에는 본인의 의도와 관계없이 말의 메시지뿐만 아니라 관련 어조와 말투, 표정과 눈빛과 제스처도 밀접하게 관련된다. 메시지 자체는 감내 가능하여도 그것들이 불량하면 상대는 기분이 손상되고 반감이 야기되며 언성이 높아지다가 결국 서로 한바탕 증오 어린 언쟁을 벌이게 된다. 하나 마나 한 이야기인가. 하지만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면 그렇다고 하기 저어 된다. 특히 국회의 국정 관련 질문과 대답에서 장관과 국회의원들이 대화하는 양상을 보면 서로 자신의 입장과 이해에 몰두하여 상대에의 자세가 불량하다. 아무리 이해가 다르고 당리당략이 있다고 하더라도 국민 앞에서 국사를 다룬다면 국민을 의식하며 격식을 갖춰야 할 것이다. 국민은 그런 자세에 실망할 뿐만 아니라 본인들의 의도를 떠나 국민을 경시하는 듯한 방약무인(傍若無人)에 불편해한다는 사실을 새삼 알아야 한다. 그 자세가 국민을 진영으로 나누고 자기 진영의 성원을 의식한 자제하지 않은 연출이라면 국민은 더욱 불쾌할 것이다. 국민 다수는 어느 편이 아니다. 어느 편이 이기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당리당략이나 이데올로기가 시시비비를 넘어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의 관점에 따라 동어반복을 계속하며 상대의 관점을 외면하거나 배타하는 시선과 표정과 말투는 상대뿐만 아니라 국민도 상대로 하겠다는 것이다. 여와 야, 진보와 보수는 실은 그 자체가 아니라 절충과 승화를 위해 존재하지 어느 진영을 위한 세력이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도 계속된다면 일방 태도들에 결국 나라가 아플 것이다. 쑤시고 저린 통증에 나라의 기력이 고갈되어 간다면 기가 찬 국력 낭비가 아니겠는가. 상호 배려하고 존중하며 이성하기(怡聲下氣)로 국사를 조리 있게 검토하고 검증하여 유불리를 떠나 국가의 기율을 바로 세워야 할 것이다. 프란츠 카프카는 「변신」에서 벌레가 되어 가는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의 비극을 그렸다. 엉뚱한 비유일지 모르겠지만, 공정과 시비를 제치고 이해와 당리당략에 몰두하면 할수록 우리는 마침내 다른 버전, 즉 자업자득의 그레고르 잠자가 될지 모른다. 김승종 연성대 교수 시인

[문화카페] 변신

오늘 아침 그동안 앓던 왼쪽 다리의 통증이 격화돼 참지 못하고 한동안 신음했다. 그저 아프지만 않으면 바로 그게 건강이고 행복이 아니겠는가. 나으면 생각이 바뀔 것이지만 절실한 심정으로 오랜만에 병자의 모습을 나는 내게서 보고 있다. 후회막급이지만 이렇게 된 원인은 허리가 부실한데도 한 열흘 의자에 앉아 컴퓨터를 사용하면서 그 자세가 나도 모르게 불량하였기 때문이다. 불량한 자세가 관절 관련 병을 부른다는 사실을 다시 통감한다. 자업자득(自業自得). 그런데 우리 삶에서 어디 이뿐이랴. 일상의 대화에서도 불량한 자세는 상대를 화나게도 하며 관계를 갈등으로 몰아넣는다. 사람의 의사표현에는 본인의 의도와 관계없이 말의 메시지뿐만 아니라 관련 어조와 말투, 표정과 눈빛과 제스처도 밀접하게 관련된다. 메시지 자체는 감내 가능하여도 그것들이 불량하면 상대는 기분이 손상되고 반감이 야기되며 언성이 높아지다가 결국 서로 한바탕 증오 어린 언쟁을 벌이게 된다. 하나 마나 한 이야기인가. 하지만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면 그렇다고 하기 저어 된다. 특히 국회의 국정 관련 질문과 대답에서 장관과 국회의원들이 대화하는 양상을 보면 서로 자신의 입장과 이해에 몰두하여 상대에의 자세가 불량하다. 아무리 이해가 다르고 당리당략이 있다고 하더라도 국민 앞에서 국사를 다룬다면 국민을 의식하며 격식을 갖춰야 할 것이다. 국민은 그런 자세에 실망할 뿐만 아니라 본인들의 의도를 떠나 국민을 경시하는 듯한 방약무인(傍若無人)에 불편해한다는 사실을 새삼 알아야 한다. 그 자세가 국민을 진영으로 나누고 자기 진영의 성원을 의식한 자제하지 않은 연출이라면 국민은 더욱 불쾌할 것이다. 국민 다수는 어느 편이 아니다. 어느 편이 이기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당리당략이나 이데올로기가 시시비비를 넘어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의 관점에 따라 동어반복을 계속하며 상대의 관점을 외면하거나 배타하는 시선과 표정과 말투는 상대뿐만 아니라 국민도 상대로 하겠다는 것이다. 여와 야, 진보와 보수는 실은 그 자체가 아니라 절충과 승화를 위해 존재하지 어느 진영을 위한 세력이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도 계속된다면 일방 태도들에 결국 나라가 아플 것이다. 쑤시고 저린 통증에 나라의 기력이 고갈되어 간다면 기가 찬 국력 낭비가 아니겠는가. 상호 배려하고 존중하며 이성하기(怡聲下氣)로 국사를 조리 있게 검토하고 검증하여 유불리를 떠나 국가의 기율을 바로 세워야 할 것이다. 프란츠 카프카는 「변신」에서 벌레가 되어 가는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의 비극을 그렸다. 요즘 통증으로 앓아누워 의식의 과장이겠지만 나는 허구의 그를 실제로 알며 그의 심정을 지난날보다 더 이해하고 있다. 엉뚱한 비유일지 모르겠지만, 공정과 시비를 제치고 이해와 당리당략에 몰두하면 할수록 우리는 마침내 다른 버전, 즉 자업자득의 그레고르 잠자가 될지 모른다. 역사에 같은 사례가 많다. 바른 태도로 살자, 이 말을 큰소리로 외칠 수 있는 사람이 적을 듯하다. 사람의 삶에서 언제나 위대한 이 말이 오늘의 세파에서는 희롱으로 되돌려지는 위선의 말이거나, 주제넘은 가당찮은 건방으로 취급되기 쉬울 것이다.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럴수록 이 말이 갈등과 혼란의 와중에 더욱 필요하지 않겠는가. 김승종 연성대 교수ㆍ시인

[문화 카페] 헬렌 켈러와 베토벤의 ‘합창교향곡’-함신익 심포니 송 예술감독

2020년 한 해를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지만, 코로나 19로 인한 상실감과 허전함은 크다. 올해 초 입사한 신입사원들의 마스크 벗은 이미지를 상상할 수 없다. 얼굴을 가리고 체온과 QR 코드로 검증되는 불투명한 정체성, 이웃과의 접촉이 최소화되어버린 현실은 아쉬움을 넘어 막막함으로 이어진다. 연주자들의 섬세한 표정은 소리 이상의 중요한 표현의 방법이다. 그러나 마스크를 착용하고 무대에 오르는 기이한 상황은 슬프기까지 하다. 평범한 시각으로 볼 때 불가능하게 생각되는 소통의 한계를 넘어 아름다움을 공유한 두 분을 소개한다. 미국 출신의 작가 겸 사회사업가 헬렌 켈러 (1880~1968)는 1924년 뉴욕필하모닉에 한 통의 편지를 보낸다. 나는 어젯밤 라디오 전파로 흘러나오는 뉴욕필하모닉의 합창교향곡을 들으며 위대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청력을 잃은 내가 어떻게 들을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겠지만 내게는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나는 시각/청각장애인으로서 새로운 영역의 행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라디오 스피커에 나의 손을 대고 퍼져 나오는 울림을 느끼려 했습니다. 단단하게 닫힌 병뚜껑이 열리듯 진한 음악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열정에 가득한 리듬, 지속적으로 고동치는 각 성부의 울림은 나의 횡격막을 요동치게 하였습니다. 합창교향곡이 음악사와 세계사에 차지하는 위치와 비중은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이 높고 크다. 베토벤(1770-1827)은 작곡 당시 프랑스 혁명이 주창하는 자유와 평등사상에서 얻은 영감을 형제애와 박애정신으로 승화시켜 교향곡의 새로운 형태를 혁명적으로 개발한다. 청각능력이 완전히 상실한 상태에서 그의 불행을 운명으로 받아들였으며 남은 생이 길지 않음도 인지하였을 것이다. 이 작품이 인류역사상 가장 사랑받는 이유는 작곡 당시 베토벤은 처절하게 외롭고 고립된 절망의 시간의 정중앙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후세를 위해 위대한 유산을 남기는 일에 몰두한다. 쉴러의 시 환희의 송가를 이용하여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장르의 교향곡을 만들었다. 음악역사상 최초로 인간의 목소리를 교향곡에 담은 것이다. 네 명의 솔리스트와 혼성합창단이 친구들 이여, 이런 노래가 아닌 더욱 즐겁고 기쁨에 가득한 노래를 부르자!라는 시작으로 후대에 위로와 용기 그리고 사랑이 담긴 메시지를 곡의 구석구석에 스며들게 하였다. 베토벤의 합창교향곡을 연주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가 헬렌 켈러가 느꼈던 천사들의 합창, 천상의 바이브레이션, 부드러움과 달콤한 대화, 아름다운 멜로디의 위대함, 그리고 여기에서만 체험하는 어둠과 빛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은 한밤중에 수많은 별을 세는 것과 같다. 그녀가 들을 수 없었지만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손으로 타고 들어온 목관의 부드러운 파고와 금관 악기의 자연을 표현하는 숨소리, 갈대의 흔들림 같은 첼로와 콘트라베이스의 진동, 바다보다 깊은 소리의 합창과 오케스트라의 외침을 정상적인 청각을 가진 청중들은 더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헬렌 켈러의 메시지는 오늘의 우리를 향해 큰 울림을 남긴다. 믿음은 산산조각난 세상을 빛으로 나오게 하는 힘이다. 눈이 먼 것보다 더 안 좋은 것은 볼 수 있지만, 비전이 없는 사람이다. 세계 곳곳에서 고난을 극복하는 형제들에게 무한한 위로를 보낸다. 250년 전에 베토벤을 또한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통찰력을 가르쳐 준 헬렌 켈러와 같은 위대한 선배들이 우리에게 있음은 황폐한 환난의 시기에 큰 위로이자 축복이다. 함신익 심포니 송 예술감독

[문화카페] 관객 없는 극장은 가능할까

극장을 뜻하는 시어터(Theater)는 고대 그리스 야외극장의 객석에서 유래했다. 오늘날 실내극장도 그리스 야외극장에서 비롯됐다. 주로 도시, 즉 폴리스를 내려다보는 언덕에 자리 잡고 있던 고대 그리스 야외극장 형태가 로마중세르네상스바로크시대를 거치면서 실내로 들어와 자리 잡았고, 이게 오늘날 실내극장의 일반적 모습으로 굳어졌다. 수 천 년의 이 변천과정에서 변하지 않은 세 가지 요소가 있다. 객석과 무대, 무대장치가 그것. 그리스 야외극장의 세 가지 요소를 지금 극장에 대입하면 이렇다. 일단 객석은 그대로 객석인데, 실내로 들어오면서 배우들의 연기공간인 무대와 무대장치에 변화가 있었다. 무대는 오케스트라라는 이름에서 연기공간인 스테이지로, 스케네라는 고정된 무대장치 공간은 무대와 그 안의 다양한 무대 변환 시스템으로 한 몸을 이루었다. 오늘날 실황 연주자들의 반주 공간인 오케스트라 피트는 과거 연기공간이었던 오케스트라의 흔적. 르네상스 이후부터 오케스트라는 연기 공간이 아닌 음악 연주단체(오늘날의 교향악단)의 의미로 어의가 바뀐다. 이 장구한 서양 극장 역사에서 극장이 객석, 즉 테아트론(theatron)이라는 말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깊이 되새겨볼 만한 일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극장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 가운데 객석의 관객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말이다. 한마디로 관객 없는 극장은 존재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극장이 무대를 필수로 한 공연예술의 심장이라면, 그 현장에서 심장의 박동을 울리는 주인공은 관객이다. 현장과 관객, 극장이 삼위일체를 이루어야 공연은 완성된다. 코로나19라는 몹쓸 괴질이 퍼지면서 극장폐쇄가 속출했다. 다중이 모이는 곳이니 극장은 이런 때 어떤 극단적 처방도 감수해야 하는 것은 물어보나마나다. 마침 전국의 극장들이 현명하게 대처하여 극장을 중심으로 심각한 전파 사례는 발생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방역엔 성공했으나, 극장 중심으로 돌아가야 할 공연산업은 침체의 늪에 빠졌다. 전시공간을 매개로 하는 시각예술 분야도 어려운 형편은 매 한가지이다. 그 사이 극장마다 발 빠르게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를 확충하는 등 침체를 벗어나려는 노력에 몰두했다. 이때다 하고 일각에서는 새로운 세상을 만난 듯, 여기에 미래가 있는 양 호들갑이다. 놀라운 기술 발달 시대에 공연이 기술과 만나 영역을 넓혀나가는 일은 더 오랜 생존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 하지만 현장 관객 없이 공연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정재왈 고양문화재단 대표이사

[문화카페] 가격이 아닌 가치로 보는 책 문화를 위해

우리나라에 동네 책방이 생긴 것은 불과 10여 년 남짓이다. 물론 그전부터 마을에 한두 곳씩 작은 서점들이 있었지만 대부분 학습지나 인문 서적 위주의 상점 기능을 가졌다면 특정 장르를 큐레이션 해 소개하고 판매하는 동네 책방이라는 트렌드를 가지고 오픈하기 시작한 서점 공간의 역사는 길지 않다. 책 판매뿐 아닌 북 토크와 책 전시 책과 관계된 워크숍 등 부가적인 문화 활동이 곁들여지면서 그곳은 찾는 독자층은 세분화되고 깊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동네 책방은 복합 문화공간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비슷한 생각을 하는 독자들과 공유하며 교류한다. 이러한 동네 책방은 코로나 사태가 길어지면서 운영에 어려움이 생겼고 현재 큰 이슈로 대두되는 도서정가제는 동네 책방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어 새로운 책 문화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지금 큰 위기를 맞고 있다. 동네 책방의 판매 서적들은 책에 표기된 정가에 판매되고 있으니 책의 할인 폭이 커질수록 동네 책방의 경쟁력은 자연히 소멸될 수밖에 없다. 여기저기서 도서정가제에 대한 각자의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책값의 할인율이 커지면 이익을 보는 것이 누구일까 생각해 본다. 책을 사랑하는 진정한 독자는 책 가격이 저렴해지면 가격의 유혹을 차치하고 그만큼 질도 떨어질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단순 책 구매 실적에 목적을 가진 기관에서는 다를 수 있다. 출판사는 책 가격의 할인 폭이 커지면 판매를 위해 경쟁적으로 가격을 내려 결국 갈수록 좋은 책을 만드는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고 이는 창작자들인 작가에게 고스란히 전달될 것이다. 출판사에서도 좋은 작가의 책을 출간하는데 갈등이 생길 것이다. 그렇다면 독자에게도 출판사에도 창작자에게도 판매자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정책이 이슈화되는 이유는 뭔가 누구라도 혹할 금전적 이익을 주는 법제화로 국민에게 문화를 저렴하게 선심을 베푼다는 다분히 정치적 배경이 있지 않을까 뜬금없는 생각을 해본다. 동네 책방의 운영자들은 금전적 이익을 우선으로 두지는 않은 것 같다. 좀 더 양질의 책을 선보이고 독자와 공유하고 싶어 하며 작가들과 출판사들과 좀 더 멋진 창작물을 위해 직간접적으로 소통하며 운영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작은 서점 공간에서 출간된 서적 한 권을 위해 책과 관계된 전시를 하고 작가와 만남을 통해 독자들과 작가를 연결하기 위한 장을 마련해 독자에게는 내용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작가에게는 창작자로서의 보람과 자극을 줘 다음 창작물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이렇듯 동네 작은 책방들은 판매 외에 책 문화의 양질의 발전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이러한 노력이 모여 결국 우리나라 도서의 질과 독자의 질을 향상시키며 책 문화의 전반적인 변화를 가져오리라 생각한다. 도서정가제 해지로 기존의 동네 책방 몇 백 개 없어지는 것이 우리나라 경제에 얼마나 큰 타격이 있을까 싶지만 느리지만 긴 걸음으로 경제 정책이 아닌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생각하면 어떨까 한다. 손서란 복합문화공간 비플랫폼 대표

[문화카페] 성호 이익의 밥상

밥상, 이보다 정겨운 말이 또 어디 있을까. 밥, 국, 반찬 등이 펼쳐진 밥상을 보면 습관처럼 숟가락 젓가락을 찾아 집어 들게 된다. 밥은 살아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가장 선호하는 첫 번째 음식이요 없어서는 안 되는 보약이다. 그래서 공자는 사람이 태어나서 7~8세까지를 바른 생활습관과 체벌로써 이력을 세우도록 했으며 특히 밥상 앞에서 비교 시비 따지지 않는 슬기를 배우고 길들여 일생을 좌우하는 품성과 인격이 결정되도록 했다. 성호 이익(星湖 李瀷1681(숙종 7년)~1763년(영조 39년)은 조선 문화의 전성기인 18세기 전반 영조대에 활약한 재야 지식인이다. 이익의 실학사상 요지는 아름다운 문장이나 시문에만 매달리지 말고 백성들이 살아가는데 실제로 유용하고 실효성 있는 학문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호 선생은 아버지 이하진이 경신환국 때 평안도 운산으로 유배된 곳에서 태어났으나 두 살 때 아버지가 유배지에서 별세하자 어머니 권씨(權氏) 부인과 함께 안산 첨성리(지금의 일동)에 있는 고향집에 내려와 살게 됐다. 과거시험에 낙방하고 어려운 집안과 오랜 질병으로 말년에는 송곳 꽂을 땅도 없는 빈한한 처지가 돼 처참한 환경 속에서도 성호사설, 곽우록, 성호 선생문집, 이선생예설, 사칠신편, 이자수어 등 실로 방대한 저서를 남겼다. 그가 저술한 성호사설에는 곡식이란 사람을 살리는 것으로 그중 콩의 힘이 가장 크다고 해 콩을 반이나 섞어 지은 콩밥을 예찬한 시 반숙가(半菽歌)가 있다. 콩은 나의 논이나 밭이 없어도 주위 논두렁 밭두렁 한쪽에 심으면 줄줄이 많은 수확을 할 수 있는 밭에서 나는 소고기라 불리는 고단백 식품이다. 동의보감에도 콩으로 만든 요리는 질병을 예방하고 두뇌발달에 좋을 뿐 아니라 오장을 보호하고 위장관을 따뜻하게 하는 장수 식품이라고 했다. 안산은 성호의 도시이다. 그것은 이익 선생의 화포잡영(華浦雜詠:지금의 본오동, 사동, 성포동 일부가 모두 바닷물이 들어오는 갯벌이었으며 이 갯벌을 화포라고 했다)이라는 시에서 볼 수 있다. 저 넓은 갯벌에 제방을 쌓아 바닷물을 막고 소금기를 없앤다면 광활한 옥토가 되어 농토가 없어 굶어 죽는 백성을 배불리 먹일 수 있을 것이니 좋은 계책 백성에게 물어 이루라라고 읊은 것이다. 이익 선생의 간절한 이상이 200여년 후인 이제야 이뤄져 안산 시민들이 바다를 메워 아파트를 짓고 보금자리를 마련하여 풍요롭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성호 이익의 밥상은 콩을 재료로 한 밥, 국, 삼찬만의 소략하고 검소한 선비의 밥상이다. 조선 왕조가 설정한 선비는 학예일치(學藝一致)를 이룬 자라 했다. 성호 이익이 기반을 다지고 한 번도 뵌 적이 없으나 성호 선생의 책을 읽고 실학을 완성한 유배지 강진의 다산 선생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안산의 밥상이다. 강성금 안산시행복예절관 관장

[문화카페] 달

외출했다가 오랜만에 지인 같은 그 현수막을 길가에서 다시 보았다. 「실종된 송혜희 좀 찾아주세요」 실종일시 1999년 2월13일 오후 10시경 그 현수막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 모습으로 내게 인사했지만 좀 겸연쩍어 하는 듯했다. 나도 그러했고 나의 반응이 이전과 달랐다. 아직도 찾고 있군, 그 아버지 과유불급이 아닐까. 집에 돌아와 어쩐지 사연이 궁금해 인터넷에 들어가 관련 기사를 드디어 읽었다. 지난 21년 동안 전국을 뒤덮을 정도로 돌린 전단에는 17세 여고생 딸을 그리워하는 애비의 심정이 쓰여 있었다. 너를 찾지 않고는 죽을 수조차 없단다. 아빠는 널 생각하면 숨 쉬고 있는 것조차 미안하단다 근래에 읽은 그 어느 시구보다 하소연이 강렬했다. 한 번 더 읽었다. 죽음 이상을 건, 죽음도 하찮게 하는 그 무엇을 건 이런 집념과 책임감을 나는 겪은 적이 없다. 그 집념을 우선 사랑이라고 할 수 있고 그 책임감을 일단 도리라고 할 수 있겠지만, 제대로 된 이름은 아니며, 현애를 메우고 넘치는 도저한 사실성 정서가 함축돼 있다. 아 아직도 찾지 못했구나, 그 아버지 참 대단하시다가 아니었던 내가 좀 싫었고, 녹슨 대못 박힌 앙상한 가슴이 떠올랐다. 우리의 삶에는 여러 계기가 있고 그 주요한 계기는 타자와의 조우와 이별. 우리는 짧고도 긴 일생을 살면서 많은 사람과 만나고 헤어지는데, 생이별은 특별하다. 특히 혈친과의 생이별은 더욱 그러하다. 어찌 오만 생각으로 애가 끊기고 타지 않겠는가만, 할 만큼 한 아니 그 이상을 한 그 아버지는 왜 어째서 체념하지 않는 것인가. 어떤 부처는 인간의 삶에 선악 구분 없이 인연이 개재되기에 인연을 아끼면서도 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나 우리는 그러기가 어렵고, 그러기를 거부하는 의지를 곧추세우고 난경과 고통을 기꺼이 동반하며 전진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일찍이 공자는 이런 극한을 중도이폐(中道而廢)라고 했고, 카뮈는 그리스 신화 시시포스 이야기의 해당 국면에 관심을 가졌다. 가산이 풍비박산되고 아내가 저세상으로 떠났으나 딸의 심정까지 헤아리며 현수막과 전단을 만들고자 폐지를 줍는 아버지가 있다. 21년 동안 대한민국 전국을 다녀 그 길의 길이가 지구 18바퀴나 되는 나그네가 있다. 실종된 송혜희 좀 찾아주세요, 우리 모두 그 아버지의 호소를 그 나그네의 호소를 한 번 더 경청하자. 우리가 모두 경청한다면 부녀는 반드시 상봉할 것이다. 그리해 갖가지 사연이 있는 지상의 모든 생이별을 위로하고, 한 줌 오염된 이데올로기에 막혀 70년을 대면하지 못하는 남북 이산가족의 연내 상봉도 기원하자. 모든 그리운 얼굴과 그리워하는 얼굴을 기리며 졸시 「달」을 그 기원의 광장에 바친다. 뜨고 지고 뜨고 지고, 검은 밤 별 없는 밤, 뜨고 지고 뜨고 지고, 우리 살기 전에도 뜨고 지고, 우리 살은 후에도 뜨고 지고, 우리 검은 마음에도 뜨고 지고, 교교히 뜨고 지고, 고고히 뜨고 지고, 유구히 그 운회에 세상이 뜨고 지고. 김승종 연성대 교수시인

[문화카페] 이런 음악 어때요?

음악은 일상에서 위안을, 때론 희망을, 때론 기쁨을 준다. 오늘은 수많은 일상에서 삶을 더 뜨겁게 해줄 음악을 추천해 본다. 엄마를 뵙고 떠날 때, 요하네스 브람스의 교향곡 3번 중 3악장을 추천한다. 엄마를 잠시 뵌 후 작별을 아쉬워하며 사립문 앞에서 손 흔드시는 엄마를 돌아보기엔 눈물이 쏟아질 것 같고 그냥 떠나려 하니 그 모습을 다시는 뵐 수 없을 것 같다. 이런 작은 일에도 우리의 선택은 언제나 죄송하고 아쉽다. 작별 후 자동차 안에서 브람스를 들어보자. 중후한 호른과 촉촉하게 젖어드는 첼로의 조화에 우리의 눈물이 더해져 포근한 위로가 넘치는 따뜻한 6분이 될 것이다. 월요일 아침 또는 긴 휴가 후의 출근길은 언제나 버겁다. 이땐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오케스트라 모음곡 2번 나 단조 BWV 1067을 추천한다. 침착하고 안정감 있는 서곡으로 시작하여 화려하고 경쾌한 분위기의 춤곡으로 변화되어 가며 후반으로 갈수록 상큼하며 즐겁게 끝을 맺는 20분 정도 길이의 명품이다. 주역은 플루트 독주인데 새처럼 가볍고 청명한 음색이 다양한 리듬과 섞여 명랑한 라인을 타고 매끈하게 흐르며 풍성한 앤돌핀을 솟아나게 한다. 프러포즈를 앞두고 있는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 2번 중 3악장 아다지오를 추천한다. 긍정적인 대답을 확신하기 어려운 상대 앞에서는 더욱 초조하다. 라흐마니노프의 작품은 듣는 사람 모두에게 가슴까지 스며드는 감미로움을 전달할 수 있다. 프러포즈 하기 약 20초 전, 준비된 스피커를 통해 클라리넷의 서정적인 멜로디와 이어지는 현악기의 따뜻한 음색이 흐를 때 행복과 감동의 눈물을 억누를 능력을 갖춘 사람은 없다. 혹시 의도와는 다르게, 아니요, 당신과 결혼할 생각이 아직 없습니다 라는 잔인한 반응을 받게 된다면 눈물을 흘리며 절망적 슬픔을 표현하라. 마치 토스카를 향한 마리오의 불타는 사랑 고백 같은 극적인 분위기를 연출해 낼 수도 있다. 혹시 그런 진실된 눈물로 인해 굳어진 그의 마음을 녹일 수도 있지 않을까? 곡의 길이는 15분. 진실된 프러포즈에 충분한 시간이다. 입사시험 또는 입학시험 최종 면접 하루 전 저녁이라면 프란츠 폰 쥬페의 경기병 서곡을 들어보자. 8분의 짧은 서곡 안에 고난을 이겨내는 승리를 위한 각오, 그리고 영광과 번영을 향한 당당한 행진을 흥미진진한 파노라마 형태로 이끌어간다. 걱정과 염려로 그득 찬 먹구름을 넘어 푸른 창공을 뛰어오르는 슈퍼맨이 되어 있는 꿈을 꿀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코로나로 힘들고 외로운 인류와 희생자들, 대한민국의 선량한 시민들, 그리고 헌신하는 의료진을 위로할 때는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 중의 4악장을 추천한다. 28분 정도의 길이이다. 베토벤이 각색한 가사의 주요내용은 형제여, 기쁜 노래를 부르자. 이 입맞춤과 포옹을 온 세계를 위하여이다. 고통과 절망의 순간에도 인류의 화합과 사랑을 강조한 선배들의 지극한 정성이 우리에게 주는 감동은 깊고 진하며 영원하다. 함신익 심포니 송 예술감독

[문화카페] 이런 음악 어때요? - 함신익 심포니 송 예술감독

음악은 일상에서 위안을, 때론 희망을, 때론 기쁨을 준다. 오늘은 수많은 일상에서 삶을 더 뜨겁게 해줄 음악을 추천해 본다. 엄마를 뵙고 떠날 때, 요하네스 브람스의 교향곡 3번 중 3악장을 추천한다. 엄마를 잠시 뵌 후 작별을 아쉬워하며 사립문 앞에서 손 흔드시는 엄마를 돌아보기엔 눈물이 쏟아질 것 같고 그냥 떠나려 하니 그 모습을 다시는 뵐 수 없을 것 같다. 이런 작은 일에도 우리의 선택은 언제나 죄송하고 아쉽다. 작별 후 자동차 안에서 브람스를 들어보자. 중후한 호른과 촉촉하게 젖어드는 첼로의 조화에 우리의 눈물이 더해져 포근한 위로가 넘치는 따뜻한 6분이 될 것이다. 월요일 아침 또는 긴 휴가 후의 출근길은 언제나 버겁다. 이땐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오케스트라 모음곡 2번 나 단조 BWV 1067을 추천한다. 바흐의 음악은 인간의 영혼을 맑게 변화시킬 수 있다. 그의 음악은 서양음악의 정통성을 보여주는 교과서이다. 바흐의 오케스트라 모음곡 2번은 7개의 짧은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침착하고 안정감 있는 서곡으로 시작하여 화려하고 경쾌한 분위기의 춤곡으로 변화되어 가며 후반으로 갈수록 상큼하며 즐겁게 끝을 맺는 20분 정도 길이의 명품이다. 주역은 플루트 독주인데 새처럼 가볍고 청명한 음색이 다양한 리듬과 섞여 명랑한 라인을 타고 매끈하게 흐르며 풍성한 앤돌핀을 솟아나게 한다. 프러포즈를 앞두고 있는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 2번 중 3악장 아다지오를 추천한다. 나의 청혼을 받아 주시겠습니까? 일생일대의 절박한 순간이다. 네, 당신과 결혼하겠습니다 라는 대답을 획득하기 위해 배경 음악을 사용하는 것이 도움될 것이다. 더욱이, 긍정적인 대답을 확신하기 어려운 상대 앞에서는 더욱 초조하다. 라흐마니노프의 작품은 듣는 사람 모두에게 가슴까지 스며드는 감미로움을 전달할 수 있다. 프러포즈 하기 약 20초 전, 준비된 스피커를 통해 클라리넷의 서정적인 멜로디와 이어지는 현악기의 따뜻한 음색이 흐를 때 행복과 감동의 눈물을 억누를 능력을 갖춘 사람은 없다. 혹시 의도와는 다르게, 아니요, 당신과 결혼할 생각이 아직 없습니다 라는 잔인한 반응을 받게 된다면 눈물을 흘리며 절망적 슬픔을 표현하라. 마치 토스카를 향한 마리오의 불타는 사랑 고백 같은 극적인 분위기를 연출해 낼 수도 있다. 혹시 그런 진실된 눈물로 인해 굳어진 그의 마음을 녹일 수도 있지 않을까? 곡의 길이는 15분. 진실된 프러포즈에 충분한 시간이다. 입사시험 또는 입학시험 최종 면접 하루 전 저녁이라면 프란츠 폰 쥬페의 경기병 서곡을 들어보자. 쥬페는 오페라보다 짧고 가벼운 가극 장르인 오페레타 작곡가이다. 그 명성에 걸맞게 단순하면서도 귀에 쏙쏙 들어오는 친숙한 선율의 원숙한 조합을 만들어낸다. 8분의 짧은 서곡 안에 고난을 이겨내는 승리를 위한 각오, 그리고 영광과 번영을 향한 당당한 행진을 흥미진진한 파노라마 형태로 이끌어간다. 걱정과 염려로 그득 찬 먹구름을 넘어 푸른 창공을 뛰어오르는 슈퍼맨이 되어 있는 꿈을 꿀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코로나로 힘들고 외로운 인류와 희생자들, 대한민국의 선량한 시민들, 그리고 헌신하는 의료진을 위로할 때는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 중의 4악장을 추천한다. 28분 정도의 길이이다. 두 번 이상 들어야 효과가 있다. 베토벤이 각색한 가사의 주요내용은 형제여, 기쁜 노래를 부르자. 이 입맞춤과 포옹을 온 세계를 위하여이다. 고통과 절망의 순간에도 인류의 화합과 사랑을 강조한 선배들의 지극한 정성이 우리에게 주는 감동은 깊고 진하며 영원하다. 함신익 심포니 송 예술감독

[문화카페] 한예종 이전의 조건들

서울 석관동에 본부가 있는 한예종의 정식 명칭은 한국예술종합학교이다. 투박한 정식 명칭 대신 흔히 한예종으로 불린다. 인터넷에서 한예종을 검색하면 국립 특수대학교 4년제로 뜬다. 4년제 국립대학이란 말과 다르지 않은데 굳이 학교라고 할까. 그냥 대학교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그리 생각하기 쉽지만, 이 학교라는 이름에 한예종의 자부심과 지향이 담겼다. 한예종은 종합대학의 단과대에 해당하는 여섯 개 원(院)으로 구성됐다. 종합은 단과대의 종합체인 종합대학처럼 여러 원을 모았다는 의미. 그런데 대학교가 아닌 학교다. 설립 당시부터 기존 대학의 보편적인 체제와 교육 목표를 좇지 않았다는 얘기다. 한예종은 실기전문교육기관이다. 기존 대학의 예술교육이 학문적인 영역에서 예술을 탐구한다면, 한예종은 직업 예술가 양성이 목표. 이론보다 실기를 숭상한다. 중세 이후 도제식 교육으로 직업 예술가를 양성하는 서양의 컨서바토리를 참고했다. 그로부터 개교 30년을 목전에 둔 한예종의 현재는 어떤가. 피아니스트 김선욱과 임동혁, 손열음, 바이올리니스트 클라라 주미 강, 영화 기생충의 박소담 등이 이곳 출신이다. 관성적 대학예술 교육을 탈피한 학교가 예술한류의 산실로 성장한 것이다. 현재 세 곳 살림을 하는 한예종이 몇 년 안에 이전한다고 한다. 뿔뿔이 흩어진 교사를 한 데로 모은 통합 캠퍼스를 그리고 있는데, 명문 반열에 오른 이 학교를 유치하려는 지자체의 움직임도 활발하다. 나의 일터인 고양시도 유치를 강력히 희망하는 지자체 중 한 곳. 몇 해 전 학생과 교직원, 학부모 설문조사에서 서울잔류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았다고 하니 언감생심은 아닐까. 그럼에도, 한예종 이전과 관련, 관계자들에게 몇 가지 말하고 싶은 게 있다. 첫째, 통합성이다. 흩어진 학교를 한데 모아 교육 효과를 배가하려면 너른 교사와 기숙사 등 학생들을 위한 편의 시설이 잘 갖춰져야 하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각 원 간 분야(장르)의 경계를 허물고 융복합의 협력 환경을 만드는 데도 넉넉한 시설 공간은 필수다. 지자체의 이런 공간 제공은 탈(脫)서울의 이점 중 하나다. 둘째, 연결성이다. 학교 교육이 지역 내 인프라와 어떻게 연결되느냐 하는 문제다. 한예종이 실전에 강한 프로페셔널 육성을 목표로 관습을 타파해 성공했다면, 학교의 이전 문제에서도 전향적인 자세가 필요한 건 아닐까. 셋째, 확장성이다. 이미 배출한 인재들이 증명하듯, 앞으로 한예종의 무대는 세계다. 국립예술기관으로서 통일시대의 예술교육에도 대비하려면 한예종의 통합 캠퍼스가 반드시 서울이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을까 싶다. 정재왈 고양문화재단 대표이사

[문화카페] 언택트 시대 그림책이 건네는 위로

소통을 위한 활동이 제한되면서 오는 불안감으로 각자의 라이프 사이클은 틀어졌으며 살아가는 방식의 변화 요구를 거부할 수 없는 처지가 됐다. 변화하는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생존법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변화의 시기 속에 살게 된 것이다. 이런 시기에 인간의 안정된 정서를 위해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는 문화 활동은 어쩌면 가장 절실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서를 함양할 수 있는 미술관도 영화관도 공연장도 쉽게 나설 수가 없는 현실이다. 이럴 때 가장 손쉽게 접할 수 있는 분야는 책이 아닌가 한다. 그중에서 그림책은 오감을 만족시켜 심신을 안정시키며 인간의 정서를 풍부하게 하는데 최적의 선택이 아닐까 한다. 책은 고대 진흙 판에 새겨진 쐐기글자나 중국의 죽간으로부터 시작해서 이집트에서 발견된 파피루스, 오늘날 우리에게 친숙한 낱장을 묶어 함께 묶은 코덱스 형태의 책까지 종이와 활자가 발명된 이후 인간의 역사와 함께했다. 글과 그림으로 구성된 그림책은 14세기 전설이나 우화가 중심인 이솝 이야기, 18세기 풍부한 상상력의 보고로 불리는 안데르센을 거쳐 19세기 중산층의 등장과 자녀교육에 대한 관심과 함께 발전한 그림책은 훗날 게이트 그린어웨이와 랜돌프 칼데콧, 윌터 크레인 등의 그림책 기초를 다진 작가들이 탄생했다. 문자와 이미지로 구성된 그림책은 어린 독자들에게 교훈을 주는 교육적 기능을 중시한 탄생 당시의 의미를 넘어 오늘날 인생의 희로애락에 대한 내용까지 담고 있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감동과 공감을 주는 대중적인 장르로 오늘날 자리매김해 가고 있다. 이러한 그림책의 특징은 독자를 동참시킨다. 책장을 넘기며 눈으로 보며 읽어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오감을 자극받는다. 전설이나 우화를 통해 이야기 속의 해당 국가들의 문화 다양성과 정체성을 이해하며 상상 속 이야기를 통해 독자는 새로운 세계로 모험과 여행을 경험한다. 그림책 속 이야기는 독자에게 즐거움을 주기도 하고 슬픔을 주기도 한다. 괜찮다고 위로도 하며 잘했다는 격려를 주기도 한다. 할 수 있다고 용기도 주며 너의 생각이 옳다고 동감해 주기도 한다. 글 없는 그림책들은 독자의 상상력과 집중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며 독자마다 다양한 시각으로 접근하며 독자 자신만의 이야기로 만드는 매력을 가지기도 한다. 지구 반대편 사람들과 거의 실시간 정보를 공유하며 사는 디지털시대에 수동적인 정보 습득에 익숙해져 가는 현대인은 언젠가는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상실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처럼 코로나 19로 인해 물리적인 소통이 제한된 환경에서 오감을 자극하며 즐길 수 있는 그림책 몇 권쯤 곁에 놓고 본다면 생각을 확장시키기에 썩 괜찮은 극복의 시간이 되지 않을까 한다. 손서란 복합문화공간 비플랫폼 대표

[문화카페] 비대면의 세계로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더위가 물러간다는 처서(處暑)가 지나자 흰 이슬이 맺히기 시작한다는 백로절(白露節)에 들어섰다. 9월이다. 이제 한해도 4개월 정도 남았다. 거짓말처럼 아침저녁은 선들거린다. 올 상반기는 온통 코로나19로 옥죄고 장마와 태풍과 유례없는 신종 비대면 문화를 턱하니 내놓았다. 이제 어디를 가도 마스크와 발열체크 손 씻기 등 생활 속 거리두기는 서로 익숙해지고 있다. 사람에게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런데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지니 평범했던 일상이 그립고 그리울 수밖에. 서로 얼굴을 보고 표정을 읽으며 주고받는 말을 재미, 마주한 사람의 눈동자 속에 흔들리는 마음과 헤어지기 싫어 한없이 많은 시간을 함께 했던 지극히 평범한 우리네 일상이 어느 한순간 기약 없이 멈춰버린 것이다. 교육은 또 어떠한가. 우리가 받았던 교육 대부분은 대면이었고 특별한 경우라야 비대면 교육이었다. 현재 우리는 대면 수업을 할 수도 받을 수도 없는 실정에 와 있어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진행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됐다. 코로나가 오기 전 나의 일상은 예절관 문지기나 다름없었다. 각종 프로그램을 기획해 수강생을 모집하고 개강을 하게 되면 이번엔 어떤 분들이 예절관에 관심을 뒀을까 설레게 된다. 그래서 출근하면 으레 한복으로 갈아입고 입구에 서서 반갑게 인사로 맞이하고 수업이 끝날 때까지 함께하다가 마지막 한 사람까지 예절관 대문에서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무탈하게 운영하는 일, 이 모두가 얼굴을 마주하는 일상이었다. 사실 예절관은 일주일 내내 수강생으로 북적댄다. 일반 성인, 다문화 가족, 어린이 유치원생, 중고생 어디 그뿐인가 주민자치센터 통장님들, 각 단체와 동아리 그야말로 대상도 다양하고 프로그램 또한 다양하다. 어떤 날은 종일 달려 다니다가 해가 질 때도 있다. 코로나19는 발상의 전환을 요구했다. 예절관도 위기지만 시민들도 위기였다. 뭐라도 해야 했다. 정해진 시간에 강의를 마치면 그만이었던 대면수업과 달리 비대면 수업은 그렇지가 않다. 강사는 텅 빈 강당에서 카메라 앵글을 보고 수업하고 그 내용을 편집해 내보내고 수강자는 수강했다는 답글을 달면 출석으로 처리한다. 더욱 답답한 것은 질문과 답을 그때그때 주고받기가 쉽지 않고 수강자가 어디까지 이해하고 받아들였는지 가늠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리고 비대면 수업은 대면수업보다 세 곱절 이상 일이 많음을 실제로 알게 됐다. 그런데 이변이 생겼다. 상상을 못한 일이 나타났다. 그 첫 번째는 대면수업일 때는 30명 이상 수용이 어려운 강당이었는데 비대면으로 90명 이상을 싣고 출발이 가능한 일. 그 두 번째는 비대면으로라도 강좌를 개설해주셔서 너무너무 감사하다는 수강생의 답글이 줄줄이 올라온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세계가 아닐 수 없다. 처음 가보는 길, 처음 눈 맞추는 카메라앵글이지만 비대면의 세계가 길은 멀어도 마음만은 가까이 함께 할 수 있음을 가져다줬다. 강성금 안산시행복예절관 관장

[문화카페] 썩지 않는 말

며칠 전에 연구실에서 홀로 2학기 첫 주 강의를 녹음 녹화했다. 코로나19 상황이 생경하던 지난 3월처럼 힘들지는 않았으나 여름방학을 지나 재개한 그 작업은 다시 쉽지 않았다. 지난 학기 직전에는 십여 차례나 반복하며 진땀을 흘렸는데 이번에도 제작한 동영상이 마뜩찮기는 여전했다. 화면의 내 표정과 돋보기 너머 눈빛이 자연스럽지 못하였고 목소리가 둔탁했으며 억양도 투박하여 학생들의 청취를 촉진하기에 부족했다. 아닌 게 아니라 공간이 분리된 온라인수업에서는 표정의 함축과 목소리의 기운이 학생들과의 소통에서 대면수업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제 다시 생각하니 내가 그 작업에서 내내 어색하였던 것은 컴퓨터의 PPT 슬라이드를 마주한 나와, 목석처럼 나를 주목하는 카메라가 조성하는 무미건조한 분위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나는 한편으로 나의 부실한 강의가 가차없이 촬영되어 있고 학생들 이외의 인사들에게도 앞으로 두고두고 검증과 평가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의식하고 이런 자의식에 불편 긴장한 심정으로 콤플렉스 상태였던 것이다. 나는 나를 자못 책망하며 말의 즉발성과 채록의 기록성을 다시 인식하기로 했다. 녹음ㆍ녹화 온라인 강의가 자유로운 강의를 제약하는 일종의 구속일 수 있다고 저어하는 심사는 바로 글처럼 말이 기록되기 때문이다. 무한 반복을 보장하며 있던 그대로 그 정확한 재현이 가능한 그 기록성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말도 한번 채록되고 화자를 떠나면 그 수정이나 변경이 어렵다. 그런데 이제 어디, 대학의 온라인강의만 그러한 형편인가. 스마트폰의 촬영과 녹음 기능을 미욱하게도 뒤늦게야 떠올리며 이제 공사(公私)를 막론하고 우리의 모든 말도 그런 형편에 있다고 나는 드디어 각성했다. 그런데 글은 퇴고 과정을 거쳐 수정 보완되고 그러면서 완성도가 높아지지만, 말은 아무래도 그렇게 하기가 어렵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는 바야흐로 자신의 의사를 성찰하며 어디서든 이런저런 말을 어떻게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좀 고민해야 할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이제 그 누구의 말도 의외에도 저 삼불후(三不朽)의 하나가 될지 모른다. 서산대사의 시로 널리 알려진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가 문득 상기된다.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눈 내린 벌판을 홀로 걸을 때라도, 어지럽게 걷지 말아야 하리. 오늘 걸어간 이 발자국들, 뒤따라오는 사람들에게는 이정표가 되리니.) 청와대 여민관 집무실 가까운 곳에 1948년 혼란한 해방정국 시기에 김구가 쓴 친필로 게시되어 있기도 한 이 시는 그러니까 이제 일국의 대통령뿐만 아니라 난언(亂言)과 부도(不道)의 말도 넘치는 이 말 많은 쟁론의 시대에서 우리가 모두 읽어야 할 시일 것이다. 그런데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는 서산대사의 시가 아니라 조선 후기의 시인 이양연(李亮淵 : 1773-1853)의 시라고 한다. 어떤 사정 어떤 이유에서건 이 시를 서산대사의 시라고 함부로 말하여 앞으로도 후인들에게 두고두고 근치하기 어려운 오류를 지속시키게 할 이는 대체 누구인가. 김승종 연성대 교수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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