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어느 화가의 노익장

노익장(老益壯)은 나이가 많음에도 젊은이 이상으로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는 노인을 일컫는 말이다. 중국의 후한서(後漢書), 마원전(馬援傳)에 전하는 이야기다. 나이 60이 넘은 대장군 마원이 반란군 진압을 위해 출전을 자원하자 광무제는 전쟁에 나가기엔 나이가 너무 많다며 만류한다. 이에 뜻을 굽힐 마원이 아니다. 그는 비록 예순이 넘었지만 아직도 갑옷을 입고 말을 탈 수 있으니 늙었다고 할 수 없다며 출정을 강행한다. 노장의 단단한 결기가 느껴진다. 노익장은 평소 마원의 좌우명이었다. 대장부가 뜻을 품으면 궁할수록 더욱 굳세고, 늙을수록 더욱 기백이 넘쳐야 한다(丈夫爲志, 窮當益堅, 老當益壯). 마원은 이런 평소의 다짐을 난국을 맞이했을 때 유감없이 발휘하는 용기로 실천했던 것이다. 한 때 자주 쓰이던 노익장이라는 용어가 이제는 사어(死語)가 되다시피 세상이 많이 변했다. 요새 마원처럼 나이 60을 내세우며 노익장을 과시했다간 바보 취급받기 십상이다. 기대수명이 한참 높아지다 보니 여든 살은 돼야 노익장 소리를 들을까. 불과 얼마 전까지 만해도 생애 꼭 치러야 할 통과의례였던 61세 회갑연(回甲宴)은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물론 세태가 변했다고 노익장의 가치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나이가 들수록, 아니 들어서 더욱 빛을 보는 노익장의 이야기는 시대와 세대를 떠나 여전히 깊은 울림을 준다. 최근 내게 감동을 준 노익장 한 명을 꼽는다면, 세계 첫 우주 관광의 꿈을 이룬 영국 버진그룹의 창업자 리처드 브랜슨이다. 심한 난독증 때문에 문서를 보지 못하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거대 다국적 기업을 일궜다. 그런데 올해 그의 나이 겨우 71살. 노익장이라고 부르기엔 아직도 어린 나이일지 모르겠지만, 우주를 향한 만인의 꿈을 현실화시킨 그 도전은 구국을 위해 전장에 나간 마원의 노익장 못지않다. 노익장은 전장과 우주, 정치, 남성의 세계에만 통하는 건 아니다. 창의성이 생명인 예술의 세계야말로 노익장의 보물창고다. 영국 화가 로즈 와일리 이야기도 그 목록에 들어갈 만하다. 1934년에 태어났으니 올해 나이 87세다. 76세에 영국에서 가장 뜨거운 신예작가(가디언)가 됐고, 여든이 넘은 나이에 세계 미술계의 슈퍼스타로 떠올랐으니 이보다 감동적인 노익장 스토리가 어디 있을까. 그런데 그 노익장이 더욱 와 닿는 이유는 한없이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그림의 세계 때문이다. 와일리는 전혀 때 묻지 않은 아이 같은 감성을 감미로운 색과 형태, 생물, 일상의 이야기, 위트 있는 기법으로 자유분방하게 표현하는 작가다. 그림 즉 회화의 장점을 맘껏 발산하면서 대중적인 방식으로 소통한다. 아흔을 앞둔 이 화가의 노익장이 고양 일산의 아람누리미술관에서 펼쳐지고 있다. 코로나19에 지친 마음을 위로받기에 충분한 시간이 될 터다. 정재왈 고양문화재단 대표이사

[문화카페] 올여름 당신의 휴가계획은

손서란 해가 바뀌어도 상황이 좋아지지 않는 코로나19로 인해 감내해야 하는 생활 속 거리두기와 마스크 착용으로 인한 답답함으로 사람들은 점점 지쳐가고 있다. 더욱이 요즘처럼 축축하고 더운 날이면 시원한 바다 풍경이나 깊은 숲 속 청량한 공기가 무척 그리워진다. 이명애 작가의 신간 휴가는 훌훌 털어버리고 떠나고 싶은 요즘 사람들의 욕구를 잘 드러내 옴짝달싹 못하는 요즘의 시기와 계절에 썩 잘 어울리는 그림책이다. 표지를 넘기면 만나게 되는 주인공은 두툼한 겉옷을 입은 채 깊은 한숨을 내쉰다. 내뿜는 한숨과 잔뜩 움츠린 주인공의 낯빛은 온기 하나 없는 푸른빛이다. 계절이 바뀐 줄도 모르고 입은 두터운 겉옷 차림의 주인공은 기차역 휴게실에 앉아 음료를 들이켜고서야 겉옷을 벗고 잠시의 휴식을 취한다. 잠깐의 휴식 속에서 만난 고양이를 따라 바다에 도착해 피서객으로 북적이는 백사장도 거닐고 바닷가 갯바위 위에 앉아 사람들 속에 있지만, 주인공의 낯빛은 여전히 푸른색이다. 열기로 가득한 바닷가 사람들 사이를 거닐어도 왠지 함께 동화되지 못하고 소외된다. 휴게실에서 만났던 고양이를 따라 바닷가 숲 속으로 발길을 옮기며 수풀 사이도 거닐고 시원한 물줄기가 떨어지는 폭포도 만나며 흐르는 물에 세수하자 조금씩 낯빛은 푸른빛이 없어지며 미소가 지어진다. 그제야 주인공은 물속에 뛰어들며 몸을 담그며 온전한 휴식의 시간을 갖는다. 온몸을 감싸는 시원한 물, 가만히 앉아 바라보는 광활한 하늘에 붉게 물든 노을은 주인공에게 긴장을 털어버리고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 충전의 시간이 된다. 많은 사람이 겪는 일상의 벗어날 수 없는 긴장과 초조는 사람들이 사색할 수 있는 시간뿐 아니라 정신적 여유를 앗아가 살아 있음을 잊게 한다. 한쪽은 일이 많아 힘들어 죽겠다고 하고 다른 한쪽은 일이 없어 심심해 죽겠다고 하니 일에 치어 에너지가 소모됐거나 일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현실에서 오는 무력감과 무기력은 어쩌면 같은 결인지도 모르겠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감성이 고갈될 때, 감정의 조직들이 너무 촘촘해 여유가 없거나 너무 느슨해져 좋은 기운들이 모두 빠져나갈 때 한 번쯤 낯선 곳으로 훌쩍 떠나 전혀 다른 시간을 가져보면 자신도 모르게 새로운 기운이 차오를 것이다. 작가는 이 책을 읽고, 나는 방전되었을 때 어떤 방식으로 충전되는지, 자신의 루틴을 돌아볼 수 있었으면 한다. 저마다 휴가의 시기가 다양한 것처럼 각기 다른 휴식의 방식이 존재하겠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 자신을 충분히 충전할 시간이, 파란 그림자가 노랗게 변하는 시간이 주어지면 좋겠다고 했다. 휴가는 바쁘게 살아가는 인생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한 번 돌아보며 새로운 생기를 얻는 것은 어떨까. 손서란 복합문화공간 비플랫폼 대표

[문화카페] 수원과 화령전

수원 화성행궁은 정조가 세웠으나 화령전은 순조가 세운 정조(正祖)의 영전(影殿)이다.화령전은 1800년 6월28일 정조 서거 이후, 순조 원년 4월29일 완공해 정조 어진을 봉안했다. 순조 4년에는 화령전에 응당 행해야 할 절목인 화령전응행절목(華寧殿應行節目)을 개정해 수원 유수로 하여금 사맹삭과 탄신제, 납향제를 정기제향으로, 그리고 고유제, 이안제, 환안제를 부정기 제향으로 올리도록 한 곳이다. 화령전은 1963년에 사적 115호 지정됐는데 2019년 8월29일 문화재청에서 운한각복도각이안청을 보물 2035호로 지정했다. 그 이유는 당대의 궁궐건축기술이 적용돼 그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어 역사적, 예술적, 학술적 의미에서 가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화성행궁에 가서 봉수당 지나 낙남헌을 가면 화령전이 보인다. 직접 보면 왜 보물이 됐는지 금방 확인할 수 있다. 행궁은 일제 피압박 피해로 그 모습을 모두 잃었다가 2003년 복원을해 원형에 가깝게 완성했으나 그때의 건축물은 아니다. 그러나 화령전은 220년 전 그대로의 모습이 잘 유지돼 있다. 조선시대 궁 안에는 선원전과 영희전이 있었다. 영희전은 조선시대 여섯 임금의 어진(태조, 세조, 원종, 숙종, 영조, 순조)을 봉안한 전각으로 해마다 설날, 한식, 단오, 추석, 동지, 납일에 제향을 올렸으며, 선원전은 숙종, 영조, 정조, 순조, 익종, 헌종의 어진을 봉안하고 왕이 친히 삭망에 분향배례하며 각 임금의 탄신일에는 다례(茶禮)를 지냈다. 그러나 이제 명절다례를 올리던 영희전도 없어지고 임금의 탄신일에 다례를 올리던 선원전은 궁내의 유물들을 보관하는 창고로 쓰이고 있을 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수원화성 화령전은 정조어진이 모셔져 있다. 거기에다가 화령전은 순조 재위 34년 기간에 열 번의 행차와 친제가 있었다. 수원은 정조의 도시요 효의 도시라고 수원사람들은 입을 모은다. 도시 자체가 증명하고 있는 사대문과 성곽이 있을 뿐만 아니라 거대한 능행차, 혜경궁의 진찬연, 무예24기, 과거별시 등은 실로 엄청난 역사의 도시가 되고 해마다 수원화성문화제는 정조대왕을 기리는 잔칫날이 된다. 수원은 정조임금님을 보유한 도시. 임금님이 모셔진 화령전.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져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으로 부각될 음식, 복식, 의례, 무예, 음악, 궁중무용, 과거시험 재연 이 모든 국보적 종합예술을 어느 마을 어느 도시에서 볼 수 있겠는가. 실로 무서운 도시요 미래가치를 가장 보장받을 도시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우리는 아침에 집 나설 때 부모님께 잘 다녀오겠다고 인사한다. 수원화성문화제를 시작하면서 먼저 화령전에 고하는 의식은 왜 안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고유제가 어디 예산이 있어서 하고 없어서 안 해야 될 일인가. 보물이 된 화령전에 잔치가 끝나도 차 한잔 물 한 모금 올리지 않는 것은 효의 도시라 할 수 없다. 화령전을 패스한 축제는 축제라 할 수 없다. 강성금 안산시행복예절관 관장

[문화카페] 적폐

우리 인간은 역대로 재난을 겪으며 삶의 한계를 인식하곤 하였다. 하지만 미물은 경악만 하지 않았다. 자타의 불행에 공포와 연민에 시달리며 그 개선을 거듭하였다. 비극 관람에서만 카타르시스가 있지 않았다. 재난은 종교와 과학의 형성에 일조하였고, 정치와 권력의 전개에서 주요 모티프가 되었다. 어쩔 수 없을 수도 있다고 여겼던 천재(天災)는 과학과 기술로 오늘날 기대 이상의 제어가 가능한데, 노력하고 각성하면 예방할 수 있을 수 있다고 여겼던 인재(人災)는 형태를 달리하며 별 개선 없이 반복되고 있다. 이 역시 우리가 매번 성찰해온 아이러니이며 그 환골탈태 시도에도 자신이 없는 듯하다. 최근 광주(光州)에서 야기된 건물 붕괴는 우리를 다시 비애로 사무치게 하였다. 처참하게 돌진하듯 무너져 내리는 시멘트, 순식간에 사라지는 버스, 자욱한 먼지에 묻힌 비명. 대체 언제까지 우리는 이런 무도한 참사를 겪어야 하나. 또 불법하도급 등 원인과 안전관리 강화방안이 언급되었다. 하지만 이 인재의 저변에 도사린 원흉은 그것들이 아니다. 부당이득 도점(盜占)과 강점(强占)이란 사실을 우리는 안다. 부정한 돈의 개재가 의심스런 가운데, 마땅히 들여야 하는 기초비용까지 줄이고 감행한 이욕의 연쇄가 야기한 인재. 그래서 사고 사건이라고 하기 어렵고, 굴착기 기사 구속? 그는 한 희생양에 불과하다. 2014세월호 참사가 그 선사(船社)와 우리 사회의 가슴에 천민자본주의의 주홍글씨 A를 각인하였으나 그러고도 같은 성격의 인재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2016구의역스크린도어참사, 2018태안화력발전소참사, 2020이천물류창고건설현장폭발참사, 지난 4월 평택항컨테이너참사 등등. 중복되지만 근본문제를 분명히 하자. 참사들의 발생에 여러 요인이 있지만, 무엇보다 부당이득을 챙기는 인간의 무리한 욕심이 그 복마전의 주인이다. 중대재해처벌법이 내년 1월 27일부터 시행되더라도 이런 사건은 계속 일어날 것이다. 그렇더라도 그럴수록 우리는 삶을 사랑하고 책임지는 도리로 그 예방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정부와 국회는 지금이라도 그런 비리를 우리 사회의 기본 적폐라고 문제시하고, 내년 대선에 매이지 말고 다각도로 그 청산에 나서기 바란다. 이 청산에 여야와 진보 보수가 따로 없고, 아무리 빨리 해결하여도 빠르지 않으며, 아무리 늦어도 늦지 않지 않은가. 중대재해처벌법도 살펴 보완하고, 관련된 각종 악착 기생(寄生) 비리를 모조리 근절하는 후속대책을 강구해 시행하기 바란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법제만으로는 과도하고 부당한 이욕에서 야기되는 인재를 모두 예방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리하여 우리는 고개를 흔들고 자신을 성찰하며 절제의 미덕으로 자신을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고 만다. 우리는 자신의 욕망을 경청하면서도 경계하여야 한다. 실패하기 쉽고 새삼스러우며, 위선과 자기기만이 될 수도 있는 이 토로가 지겹기도 하고 각성을 일으키기도 한다. 우리는 결국 자신에게 도전하는 용기가 계속 필요할 것이다. 알베르 카뮈는 『시시포스의 신화』에서 그 좌절과 도전의 반복을 아예 인간 삶의 실존적 부조리라고 지칭하며 용기를 북돋는다. 김승종 연성대 교수 시인

[문화카페] 매킨토시와 음악

1980년 대 유학을 떠난 후 처음 접하는 것들에 대한 문화적 충격은 컸다. 익숙하지 않은 영문타자기에서 더 익숙하지 않는 영어로 씨름하던 과제물들을 1984년에 등장한 매킨토시 컴퓨터 앞에서 쉽게 해결하는 신기함은 놀라웠다. 키보드, 마우스, 플로피디스크 등 새로운 도구들은 신기했다. 컴퓨터를 사용하려는 학생들은 대학내의 컴퓨터 랩을 긴 줄로 메웠고 학기말 기간에는 제한된 시간만 허용되는 컴퓨터를 확보하기 위해 밤 잠을 설쳤다. 워드프로세서의 기능으로 시작하여 개인용 노트북으로 발전하고 1994년에는 인터넷의 사용이 일반시장으로 들어왔다. 불편으로 인식하지 못하던 기존생활의 패턴에 더 이상 순응하지 않고 편리한 것을 찾아내는 급격한 변화의 세계에 살고 있음을 실감한다. 인터넷이라는 신기술이 인간세계를 어디로 데려갈지 상상 살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현대사회에 사는 누구도 이제는 기초적인 컴퓨터 기술을 습득하지 않으면 불편한 시대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런 기본적 요소들을 남에게 의존하여 살아가던 사람들은 그만큼 새로운 시대의 행렬에서 뒤 처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모 당의 대표가 정치지원자들에게 기본적인 시험을 보게 하겠다는 발상은 새롭다. 보좌관이 간추려온 자료들을 읽는 정도 또는 분석하여 올린 통계들을 앵무새처럼 낭독하는 형태의 올드방식으로는 시대에 둔화된 활동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이에 상관없이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신기술을 습득하는 현대생활을 기피하는 사람들이 정치를 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인터넷이라는 촘촘한 그물은 온 세계를 하나의 줄로 엮어 놓았으며 피할 수 없는 한 울타리 안에서 살게 하고 있다. 지난 40여년 간의 지구의 변화는 천지창조 이후 가장 급격한 변화라고 말 할 수 있다. 거의 비슷한 시기의 40여년을 서방세계에서 지내온 유학생활과 전문연주자 로서의 활동을 돌아보면 학생시절 처음 접한 것은 매킨토시 만이 아니었다. 현대음악이었다. 새로운 양식과 구조, 상상을 초월한 언어와 기법, 익숙하지 않은 화성과 별난 리듬 등의 창조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개성과 창조성을 중시하는 음악을 말한다. 이런 음악들과 친근하게 되기 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리지만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이미 음악산업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음악은 과학기술과 상호관계에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모차르트나 베토벤 같이 귀에 익숙한 작곡가들의 음악만을 고집하는 청중들이 있고 그들은 현대음악의 연주에 왜 우리가 이런 음악에 입장권을 내고 시간을 투자해야 하나? 라고 화를 내기도 한다. 음악감상자의 실제경험은 연주행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중의 하나임은 틀림이 없다. 사실, 현대음악은 난해하다. 그 이유는 작곡단계에서부터 감상자의 현상학적 경험에 대한 친절한 고려를 제외시킨다는 면에서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21세기 작곡가들이 18세기 작곡가들의 작품을 모방하듯 친절하게 써내려 간다면 아직 인터넷을 사용하지 않고 깊은 산속 동굴안에서 과학기술과 차단된 상태로 지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제 그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유연성의 도입으로 절충이 필요하다. 작곡가들은 청중에게 어필하기 위해 작품의 독창적 가치를 낮출 필요는 없지만 매킨토시의 발전의 흐름과 같이 처음에는 사용하기 난해하지만 익힐수록 편하고 줄 서서 찾게 되는 객관적 동질감의 요소들이 노출되어 1회용 연주가 아닌 지속적연주를 요청하는 아름다운 작품을 많이 접하고 싶다. 함신익 지휘자ㆍ심포니 송 예술감독

[문화카페] 이왕이면 추임새를

판소리는 매우 독특한 우리의 전통 극음악이다. 주로 소리꾼 한 사람이 부각되다보니 1인극으로 알기 쉽지만 북 반주인 고수의 역할이 커 2인극으로 보는 게 맞다. 판소리에서 고수가 첫째로 중요하며, 명창은 그 다음이라는 뜻으로 일고수이명창(一鼓手二名唱)이라고 한다. 반주자의 비중을 고려한 말이다. 문외한이 극장에서 판소리를 좀 더 재미있게 보려면 미리 구성 요소를 알고 가는 게 좋다. 사설은 판소리 노랫말이다. 연기자인 소리꾼은 이를 주로 소리(노래)로 표현하는데, 극 진행 중 상황 설명이나 장면 전환 등 노래보다 말로 표현하는 게 좋을 때가 있다. 이런 부분을 아니리라고 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서양 오페라와 비교하면 판소리 노래는 아리아, 아니리는 레치타티보에 해당한다. 우리 판소리에는 이 외에 흥미 있는 요소가 몇 가지 더 있다. 너름새라고도 하는 발림은 소리꾼과 고수가 사설과 소리의 가락에 따라 감정을 담아 표현하는 몸짓을 말한다. 부채는 소리꾼이 발림을 하면서 유용하게 쓰는 소도구다. 고수도 북채를 들어 다양한 발림을 구사한다. 추임새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극 형식의 하나로서 판소리의 차별적인 특성을 집약한 자연스런 장치가 추임새다. 소리 도중에 관객들이 얼씨구, 좋다, 잘 한다, 그렇지 등의 감탄사로 소리꾼의 흥을 돋우는 것을 일컫는다. 별난 규칙이 있는 것은 아니다. 관객 각자의 감흥에 따라 반응하면 그만이다. 악장과 악장 사이 박수를 치지 않는 것을 에티켓으로 여기는 클래식 연주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판소리가 오랜 동안 사랑을 받는 이유는 관객의 참여가 맘껏 열려있는 이런 개방성 덕택이다. 지난주 말 고양어울림누리 어울림극장에서 이자람의 판소리 노인과 바다가 공연됐다. 판소리는 신재효가 체계화한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흥보가 적벽가 다섯마당이 바탕이다. 이 원형의 전승은 주로 인간문화재 등 명창들이 맡고 있다. 이자람은 중요무형문화재 5호 판소리 춘향가와 적벽가 이수자지만, 정작 창작 판소리 화제작을 꾸준히 내고 있다. 발표하는 작품마다 호평을 받아 그에게는 판소리의 고루한 이미지를 깨고 있다는 찬사 일색이다. 노벨상 작가 헤밍웨이 소설 원작의 노인과 바다는 이씨가 3년 전 첫선을 보였다. 오랜만에 현장 대면으로 치러진 이 공연에서 역시 주목을 끈 것은 관객들의 신명이었다. 이미 준비된 판소리 마니아인양 시시때때로 터지는 관객들의 추임새는 무대와 객석의 담을 헐어버려 하나로 만들었다. 얼쑤!, 좋다, 잘 한다. 추임새 소리가 격하게 극장에 일렁였다. 소리꾼과 고수의 노래와 연기, 반주도 덩달아 고조됐다. 판소리의 추임새를 일상의 다른 말로 표현하면 칭찬이다. 호응과 공감이라 해도 좋다. 그것이 반드시 곁들어져야 판소리가 온전한 공연으로 완성되듯이, 칭찬과 공감으로 완전해지는 우리의 일상은 불가능한 것일까. 판소리 한 편을 보면서 문득 꿈같은 현실을 그려봤다. 우선 공감 결핍은 아닌지 나부터 반성하고 칭찬 모드로 리셋하자고 다짐하면서. 그래, 이왕이면 추임새다. 정재왈 고양문화재단 대표이사

[문화카페] 오늘 당신의 워라밸은 안녕하십니까?

오늘도 변함없이 길을 걷거나 차를 타거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 손에는 여지없이 휴대전화가 들려 있다. 손에 쥔 휴대전화 안에는 무엇을 보든 소비를 자극하는 이미지와 문구들이 넘쳐난다. IT를 기반으로 한 최첨단 산업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소비자의 관심을 겨냥해서 만들어진 알고리즘으로 한 두 가지 검색만으로 비슷한 정보들이 떠오르고 나도 모르는 사이 데이터에 의해 나의 취향이 결정된다. 화려하거나 단순하거나 소비를 강요하는 넘치는 이미지들은 어떤 것이 옳은지 판단하기도 전에 인간으로 하여금 공감하지 않으면 뒤처질 것 같은 끝없는 불안과 두려움을 조장한다. 많이 소유한 사람들은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 소비자를 끊임없이 자극해 돈을 벌어들이고 노동자들에게 과도한 업무를 요구하며 그들의 권리를 억압하고 있다. 하긴 앞으로 노동자들의 업무조차 로봇으로 대체돼 인간의 노동조차 불필요한 세상이 올지도 모르겠다. 다비드 칼리가 쓰고 클라우디아 팔마루치가 그린 책 누가 진짜 나일까?에서 주인공 자비에는 공장에서 부품의 수량을 계산하는 사람이다. 늘어나는 주문으로 그는 주말도 없이 일해야 하는 일상으로 자신의 사소한 삶조차 돌아보지 못한다. 물고기는 굶어 죽고 가족에게 안부 전화조차 할 수 없으며 친구를 만날 시간조차 없다. 고단한 삶이 싫어 일을 그만두려고 하는 순간조차 주인공은 그가 그만두면 난감해할 고용주와 생활 형편이 어려워질 가족을 생각한다. 이미 그는 그 자신이 아니고 사회의 한 부속품으로의 삶에 익숙해져 있어 그 자신은 어디에도 없다. 자비에가 일을 그만두려고 하자 그의 고용인은 선심이라도 쓰듯이 복제인간을 만들어 그에게 새로운 삶을 권유한다. 복제인간은 그의 업무를 대신하고 그는 자신의 삶을 살지만 자비에는 어쩌면 거꾸로 내가 복제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생각이 들며 모든 걸 두고 어린 시절 그가 좋아했던 바다로 도망치듯 떠난다. 사람이 일하는 것과 삶의 가치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데 필요한 노동의 가치는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기업의 이윤 추구만을 위한 과도한 노동으로 인해 인간적 가치를 상실하고 무력감에 빠지게 되는 주인공에게서 인간다운 삶의 가치를 찾고자 만들어진 복제 인간을 통해서 현대 사회의 인간 소외를 읽을 수 있다. 그래도 다행스럽게 자비에는 모든 걸 버리고 어릴 적 좋아하던 바닷가에서 짭짤하거나 달콤한 크레이프를 구우면 살아가길 결심하는 선택을 한다. 결국 행복한 삶의 가치를 찾고 선택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스스로 삶의 중심이 되어 깨어 있다면 오늘도 내일도 변함없이 나는 나일 것이다. 일과 삶의 균형을 찾는 나의 삶의 워라밸은 결국 내가 찾아야 하는 것이지만 오늘도 많은 일하는 자들의 뒤에는 그를 바라보는 많은 기대가 그들을 노동의 현장으로 떠민다. 손서란 복합문화공간 비플랫폼 대표

[문화카페] 곡우에 딴 차

차를 따는 시기는 곡우(穀雨) 전후가 좋다고 한다. 곡우는 24절기의 여섯째 되는 날로 청명과 입하 사이 약력 4월20일이나 21일께, 봄비가 내려서 온갖 곡식을 기름지게 한다는 시기다. 이때는 한낮의 햇살이 짧아 힘세고 건강한 땅의 기운이 이파리로 밀고 나오기에 곡우 전후로 차 따는 시기를 정하고 이러한 차는 향이 아름답고 약효가 뛰어나다고 한다. 청명은 4월5일께이고 입하는 5월5일께이니 청명과 입하사이의 한 달은 곡우가 되는 기간이다. 우리나라는 이 한 달을 사이에 두고 그해 차 농사를 70% 이상 수확하는 제다원이 제주도를 비롯 해남 강진 보성 지리산 쌍계 화개 등 따뜻한 남도 일원에 분포돼 있다. 기후변화에 따라 그 채취 시기가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제다 실습은 입하가 지나야만 환영받는다. 입하 지나 훌쩍 지리산 화개동을 갔다. 섬진강에서 화개동으로 들어서자 길섶에 예쁘고 향기나는 제다원 이름들이 줄을 서서 반긴다. 일면식이 없음에도 문을 열고 들어서면 일단 차를 내어 대접하는 풍토가 자리 잡힌 듯 미안하고 송구할 정도로 차 인심이 넉넉하다. 하동의 오월은 온통 차의 잔치라고 할 수 있다. 차와 함께하는 아름다운 찻자리대회가 열리고 차 겨루기대회 등 하동 야생차문화축제는 전국에서 차인들이 관심을 두고 모이는 달이다. 그러나 수준 높게 준비한 올해 아름다운 찻자리는 썰렁했다. 코로나19로 관객이 없어 둘러보는 내내 안타까웠고 주최 측의 손을 놓고 돌아서는 발걸음은 오랫동안 무거웠다. 이러한 시름을 달래준 것은 녹차로 만든 발효차로 쌍계의 녹찻잎으로 홍차를 만들고 황차 흑차 백차 청차를 만들어 특허를 낸 홍차 명장님의 차 강의였다. 밤늦도록 시음하며 감동을 연발하니 명장님 피곤도 잊고 내내 열강하셨다. 우리나라는 대체로 이파리가 작은 소엽종으로 구수하고 감칠맛 나는 녹차를 만들지만 차인구가 점차 늘어나고 다양한 기호에 발맞춰 발효차는 물론 가루차까지 만들어내고 있다. 화개동 어디에서나 선 채로 그 자리에서 한번 빙 둘러보면 차나무에 햇볕이 들지 않도록 채광막의 차밭이 상당히 눈에 띈다. 알아보니 예쁜 색깔의 녹차가루를 만들기 위함이고 이 가루차는 스타벅스에 들어간다고 한다. 가끔 차를 소개할 때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이 차는 야생차로 손으로 덖은 수제품이라고 하며 재배차나 기계로 만든차에 비해 그 가격이 높음을 매우 강조한다는 점이다. 내가 보기에는 야생차나 재배차는 모두 밭이나 산에서 자라기 때문에 구분을 짓는 일은 옳지 않다고 본다. 왜냐하면 야생이나 재배 모두는 비닐하우스에서 자라지 않고 밖에서 자라기 때문이다. 또 수제차를 기계로 만든 차에 비해 월등하다고 하는데 그것 또한 옳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차를 만드는 일은 차를 우리는 일보다 더 중요하고 절실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차는 누가 어떤 마음으로 어떤 환경에서 어떤 방법으로 비벼냈는지 그 과정을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좋은 차는 좋은 사람과 같다고 했다. 도시는 물론 시골 구석구석까지 커피 소비 세계일등 한국이 돼버린 지금 몸도 마음도 편안에 들게 하는 건강한 우리의 곡우차가 결코 커피에 밀리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다. 강성금 안산시행복예절관 관장

[문화카페] 이 시대의 정명을 위하여

청년들이 좋아하는 TV 교양프로그램의 삼국지 조조 편에서, 이 시대는 유학(儒學)의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 거세된 상태라는 취지의 언급이 있었다. 유학이 인격과 권력의 도덕화를 지향하지만, 신분사회의 산물이며 개인의 개성과 자유에 별 관심이 없고 남성중심의 시각에서 성차(性差)를 차별로 이끌기 쉬우며 솔선수범을 부각하지만, 권위와 서열을 중시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또 유학을 역성혁명의 명분으로 내건 조선의 500년 왕정이 실제 그러지 못했으며 후기에는 기득집단의 교조주의로 고착돼 근대를 지향하는 다른 학문과 사상을 억압했다. 두 외척가문의 세도정치를 야기하고 민중의 정당한 봉기를 민란으로 규정하는 틀이었다가, 결국 나라를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했다는 사실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 오류와 귀결이 유학의 그 가치 때문이었는가? 아니다. 그 가치를 정치와 일상에서 제대로 실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명분으로 삼고 실제로는 그 역행(逆行)과 악용(惡用)을 일삼은 위선(僞善) 세력 때문이었다. 역설이 아니면서도 역설인 이 문제가 진실이며 유학의 한계라면 한계요, 죄라면 죄다. 1910년 망국에 직면하자 막심한 피해자였는데도 오히려 역사와 민중에게 자결로 사죄한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 : 1842-1910)와 매천(梅泉) 황현(黃玹 : 1855-1910) 등의 염치에서도 우리는 유학의 진짜 실천을 보며 감동에 젖는다. 공자는 유학 가치의 실현에서 위선을 우려하며 정명(正名)을 강조했다. 정명은 명분과 실제의 일치를 거듭 강조한다. 사람은 각자 자신의 위치와 직능에 그 이름대로 충실해야 삶에 진정성이 있고, 국가와 가정의 안정과 발전도 기약할 수 있다는 논리며, 그 일치를 이루는 소양은 역시 인의예지신이었다. 오늘 우리 사회에 비리와 범죄가 연속 발생하고 있다. 제어하고 징벌하는 제도와 법이 없어서인가. 악당을 능가하는 계략으로 악당을 제압해도 악당이다. 그리하여 유학의 오랜 주장, 유학의 그 가치들이 제도와 법과 융합해 질서를 형성해야 보다 나은 인본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신념을 수용할 필요가 있다. 이 시대의 화두인 공정도 인의 없이는 불가능하다. 통합과 복지 확대도 그렇다. 왕조시대에 유학 선비들은 힘이 없었지만, 이 시대의 시민들은 권력의 폭력에도 더 이상 속수무책이 아니다. 자신의 개성과 욕망을 분출하며 운명을 결정하는 시대, 과학과 기술과 경제와 매니지먼트가 세상을 유력하게 이끄는 시대, 4차산업과 AI가 대두되는 시대일수록, 사회와 관련된 개인의 수신(修身)을 강조하면서 시공을 초월하는 보편 휴머니티를 우리 청년들이 추구하게 하려면, 유학의 인의예지신을 그 텍스트로 제공하는 배려가 가장 적합하고 효율성도 높지 않겠는가. 다만 유학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비판되면서 인의예지신 구현도 그 조건과 의의가 조정돼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도 마르크시즘도 예외가 아니었으며 페미니즘과 국제사회를 또 동요시키는 시오니즘도 마찬가지다. 오늘의 삶에 관류하는 다른 가치들과 어울리면서 일상에서 그 실천이 가능한 행동양식(樣式)들이 무엇인지, 이 시대의 유학자들과 관련 기관들이 앞으로 더 활발하게 제안을 지속하기를 기대한다. 김승종 연성대 교수ㆍ시인

[문화카페] 어머니

베토벤의 아버지는 술주정뱅이였고 아들에게 돈벌이를 시키려고 11세때부터 생계형 연주를 시켰다. 베토벤의 어머니 마리아 막달레나 케베리히는 이런 남편으로부터 아들을 지키기 위해 희생과 헌신으로 감싸주었다. 베토벤이 인류역사에 가장 훌륭한 음악가가 된 것은 어머니의 사랑 때문이었다. 22살의 모차르트는 소년 시절 천재로 인정받고 대성공을 거둔 파리에서의 화려한 복귀를 꿈꾸며 어머니 안나 마리아와 함께 파리로 향한다. 어머니는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고 아들의 성공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그러나 파리에서 성인이 된 모차르트를 환영하는 곳은 없었다. 빛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 파리의 남루한 호텔방에서 아들은 허기에 지친 어머니를 하늘에 보낸다. 어머니는 위로의 손길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최후의 피난처이다. 내게도 그런 어머니가 있었다. 어머니의 손길을 구체적으로 떠 올리고자 창가를 자주 바라보지만, 그 많은 사랑의 순간들을 기억해 내기는 쉽지 않다. 사랑받음이 일상생활에 스며들어 특별한 것이 아닌 보편화 되었기 때문이다. 막내인 나의 손을 잡고 시장을 가던 어머니의 따뜻한 손을 기억한다. 동네시장에서 콩나물 한 움큼 사서 여섯 식구가 국 끓여 먹던 시절이다. 미아리고개 넘어 삼양동 달동네에서 피아노교습소를 찾아 1시간 이상 걸어다니며 피아노를 배울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골짜기에서 우수하다고 소문난 선생님을 찾아 헤매던 어머니 덕분이었다. 첫 레슨시간에 어머니손을 잡고 산동네 길을 내려오던 1960년대의 삼양동은 익숙했던 옆집이 무허가 건물로 철거되어 하루 만에 없어지던 시절이다. 새 학년이 되면 작성하는 가족신상란에 부모님의 학력을 적는 칸이 있었다. 어머님의 학력이 국졸 (초등학교 졸업) 또는 국퇴 (초등학교 중퇴) 인지 누구에게도 물어보지 않았지만 그래도 국졸이라고 쓰는 편이 조금 나아 보여 그렇게 쓰곤 했다. 어머니가 중학교도 나오지 않은 것이 부끄러웠다. 나의 어머니는 50세에 중풍으로 쓰러진 후 기적적으로 몇 개월 후에 일어났지만, 반신불수로 평생을 살아야 했다. 한쪽 몸이 점점 기울어지는 상태로 88세까지 사시면서 하루도 재활을 게을리하신 적이 없다. 불구의 몸을 철저한 관리와 운동으로 극복하시고 모든 생활을 정상적으로 하신 위대한 챔피언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어머니가 쓰러지시던 그해, 나는 군대에 입대하였다. 겉으로는 많이 울었지만 우환이 있는 집안을 떠나는 것이 조금은 다행스러웠다. 제대 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또 다른 피신이었다. 가족들이 유학에 반대는 하지 않았지만 적극적인 찬성을 하는 사람은 오직 어머니뿐이었다. 유학비용을 염려한 가족들의 판단을 뛰어넘는 무학력 어머님의 선택은 위대하였다 가라우, 우리 신익이래 뭐든 할 수 있지 안카써? 피난민들이 모여 사는 판자촌 개척교회 목회자의 아내로 빈궁함 속에 여섯 식구의 끼니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큰 숙제인 달동네의 가난과 헐벗음에서 훌쩍 떠나고 싶었던 적도 많았을 것이다. 나를 품에 안아 주시던 어머님을 내가 성인이 된 후 꼭 껴안고 하룻밤도 지내지 못한 불효자이다. 어머니가 위급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귀국하여 어머니의 손을 잡았으나 그 손은 차가웠다. 오늘도 어머니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길을 기억한다. 그리고 나를 향한 그 사랑의 눈길을 잊지 못한다. 어머니는 내 음악의 본질이다. 어머니의 사랑과 그리움이 내 음악을 존재하게 한다. 그리고 그런 사랑은 어디서도 다시 찾을 수 없다. 함신익 심포니송 예술감독

[문화카페] 인생극장의 배우들

#배우1 : 필자인 나는 배우다. 정확히 말하면 배우 호소인이다. 일간지 연극담당 기자일 때 연극 출연을 꼭 하고 싶었다. 이 뜻을 기특하게 여긴 저명한 연출가가 기회를 줘서 배우가 됐다. 대학로 어느 대극장 무대서 데뷔했다. 쟁쟁한 출연진 틈에 끼어 기자 역을 열연했다. 분장을 하고 배우의 세계로 들어가는 순간, 눈물이 핑 돌 정도로 감정이 복받쳤다. 이후 순정한 연극 사랑이 짙어졌다. #배우2 : 변호사 선배도 배우다. 첫 출연이 아직까지 마지막인 나와 달리 꽤 이름 있는 연극과 영화에 수차례 출연한 베테랑이다. 주연급도 있지만 대부분 단역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어느 광역시 연극에 아역 출연이 계기가 돼 연기의 매력에 빠졌다고 한다. 섭외가 뜸한 요즘도 언젠가 불러줄 날을 고대하고 있는 준비된 프로다. 그 뜸한 이유를 묻고 놀리면 몸값이 오른 탓이라고 응수한다. #배우3 : 다음은 진짜 배우 이야기다. 아무리 단역이라도 배우1과 2의 연기가 가짜일 리 없다. 여기서 진짜라 함은 참을 뜻한다. 참 배우, 배우다운 배우. 어느 작품이든 역할과 직분에 빈틈이 없는 배우를 나는 참 배우라고 부른다. 올해 여든이 된 배우 박정자는 참 배우다. 지난주 막 오른 팔순 기념 공연 해롤드와 모드는 그 증거물이다. 극 중 19세 청년과 교감하는 박정자는 사뿐사뿐 무대 위를 종횡무진하는 진짜 배우다. 한자로 배우(俳優)의 배자는 사람이 아니다는 의미. 사람이 아니면 신이어야 한다. 연기의 신이 있다면, 연극에서 훌륭한 연기를 펼치는 배우는 신이 아닐까? 배역에 따라 모습을 바꾸는 페르소나(persona, 가면을 쓴 인격)는 인간의 범위를 훌쩍 뛰어넘는다. #배우4 : 배우 윤여정. TV 브라운관의 주인공이었던 그가 영화 미나리로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5천년 한민족 역사의 첫 오스카상의 주인공. 칸느베니스베를린 등 명성 있는 유럽 대안 영화제가 있다 해도, 할리우드 아카데미 영화상은 주류 영화의 정상이다. 여기서 다른 부문이 아닌, 연기상을 탄 것은 가문의 영광 이상의 의미가 있다. 세계의 배우로 인정받았다는 것은 국격의 차원을 높인 쾌거로 나는 본다. #배우5? : 다섯 번째 이 자리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바로 당신, 여러분이다. 우리의 일상은 배우의 삶이나 다름없다. 나를 감추고 상황에 따라 연기해야 하는 배우의 그것. 연기법으로 메소드 연기라는 게 있다. 의사면 의사, 기자면 기자 등 어떤 배역의 정형성에 몰입해 최대한 사실감(리얼리티)을 끌어내는 연기법. 우리의 삶은 그 자체가 메소드 연기의 현장이다. 리얼해야 덜 까이는 냉혹한 현장. 셰익스피어는 세상은 무대요, 인생은 연극이라고 했으니, 따지고 보면 배우로 살다가는 게 우리의 일생이다. 주연이냐 조연이냐는 그 사람의 몫. 보통 사람들은 조연보다 주연으로 살고 싶지만, 그 또한 허망한 일이다. 조연도 됐다가 주연도 되는 게 인생이다. 오스카상 조연상이 주연상과 다를 게 뭐람! 그때그때 주어진 자신의 역할에 올인하면 인생극장의 명배우가 될 수 있다. 윤여정의 오스카상이 우리에게 준 선물 같은 교훈이다. 정재왈 고양문화재단 대표이사

[문화카페] ‘걷다 보면’ 보이는 세상

추위로 인해 빨랐던 걸음들은 계절의 변화와 함께 다소 여유 있는 발걸음으로 바뀌고 두터운 외투도 벗어 버리는 봄이다. 코로나19가 길어지며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별반 달라지지 않는 일상으로 인해 코로나 블루라는 신조어가 생길 만큼 어쩌다 마주치는 사람들의 모습은 마스크에 가려 좋은지 싫은지 상대의 감정을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여럿이 함께할 수 있는 일이 금지되고 마주앉아 차 한 잔 나누기도 조심스러워 사람 간의 사이는 멀어져 소통하기 더욱 어려워져간다. 혼자만의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상념이 고개를 들고 눈 마주치며 이야기하고 들어주는 공감의 시간이 줄어드니 사람 간에서 느낄 수 있는 온기와 위로는 얻기 어려워 정서는 더욱 메말라가는 듯하다. 이럴 때 훌훌 털고 일어나 걸어보자. 걷다 보면 늘 다니던 골목길 언저리 전에는 아무 생각 없이 스쳐 지났던 구멍가게 알바생의 잰 손놀림도 보이고 그 옆집 세탁소 아저씨의 뒷모습도 보인다. 골목 중간쯤 보호자를 따라 산책 나온 강아지의 볼일 보는 모습도 보이고 문 닫은 김밥집 주인의 조는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발길이 가는 데로 천천히 길을 걷다 보면 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하고 잊고 있었던 과거의 일들도 떠오른다. 늘 걸었던 길을 천천히 살피며 걷거나 또는 아무 생각 없이 발길 닿는 데로 걷다 보면 의외의 장소를 알게 돼 놀라기도 한다. 어떤 곳에서는 과거 기억들과 교차하며 부끄러움에 괜히 얼굴이 후끈 달아오르기도 하고 다시 돌아가고 싶은 그리운 마음에 괜히 뒤돌아 두리번거리기도 한다. 이러한 발견과 기억의 연상은 새로운 사유의 시간이 된다. 걷다 보면 발견하게 되는 장소의 여러 가지 상황들을 파악하는 것은 새로운 기록의 파편이 되며 잊고 지냈던 정서에 자극되기도 한다. 이러한 새로운 사유들을 두루 살피게 되는 것은 어쩌면 나 자신을 알아차리게 되는 일이기도하다. 사르락 사르락 바람이 불어. 길을 따라 걸어 볼까?로 시작되는 이윤희 작가의 걷다 보면 그림책은 걷다가 발견되는 길거리 바닥의 이미지들이다. 사슴의 모양을 닮은 바닥의 보도블록, 차량 유도를 위해 세워놓은 고깔은 놀이로 변환되고 칠에 벗겨진 건널목 표시는 쥐처럼 보이 기도하고 새끼오리처럼 보이기도 하며 비에 젖은 도로는 흡사 거대한 거인처럼 보이기도 한다. 시간에 쫓기지 않는 느릿한 걷기를 통해 보이고 발견되는 것들은 의외의 기쁨을 주며 실리를 따지지 않아 어쩌면 순수로 가는 길인지도 모를 일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중요하지 않다는 판단으로 보지 못했던 아름다움들이 얼마나 많은지. 천천히 걷다 보면 알게 되는 새로운 발견과 성찰의 시간은 스스로 생각의 깊이가 깊어지고 조금 더 성장한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시간들이다. 걷기를 통해 얻게 되는 소확행이다. 손서란 복합문화공간 비플랫폼 대표

[문화카페] 사월은 잔인한 달

그럼에도, 사월은 또 왔다. 반듯하게 쭈욱 뻗은 길가로 노오란 개나리 자지러지고 벚꽃 잠시 눈부시게 휘날리더니 비 온 뒤 이제 철쭉 진달래, 튤립, 할미꽃 그야말로 만화방창이다. 오래된 집들이 꽃 속으로 묻혀 들어가 얼얼한 겨울도 화사한 봄도 꽃 잔치에 잠시 주춤거린다. 비가 내린 다음 날은 어김없이 풀들이 수북하게 올라오고 질경이, 민들레, 제비꽃들과 함께 피고지고 지고피는 사월은 잔인하게 무쌍하다. 사월 들어서면서 거의 매일 한 시간 정도 따뜻한 하오의 햇살을 등지고 쭈그려 앉아 풀을 뽑는다. 하얗고 가느다란 실뿌리가 보드라운 흙 속에서 쑥 길게 뽑혀 나온다. 비 온 다음날은 유독 촉촉한 흙을 털어내며 미안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한 풀들을 한쪽으로 모으며 읊조린다. 그래 봄이어서 너희 세상구경 좀 하겠다고 안간힘 쓰며 비틀고 나오는데 머리채 돌리며 뿌리까지 뽑아 내던져 미안하구나. 그렇지만 너희들 도리 없이 뽑혀 나와 봄볕에 말라가면서도 내내 씨앗을 봄바람에 흩날리고 있잖니. 사월의 안산은 큰 행사가 많지 않은 것 같다. 내 일터가 단원고와 걸어서 10여분 거리여서 그런지 조금은 조용하고 조심스럽다. 나만 그러나 하고 주위를 살펴보면 누구랄 것 없이 해마다 이때 쯤은 비슷한 분위기임을 감지하게 된다. 그래서 사월엔 노오란 저고리와 화려한 옷을 입기가 괜스레 민구하다. 416 기억식에서 이제는 어엿한 사회인으로 성장한 한 여성이 7년의 세월이 지났으나 친구 이름 하나하나 떨리는 목소리로 부르면 차마 그 모습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며 눈시울을 적신다. 일 년이 지났어도 지칠 줄 모르는 코로나는 우리네 일상을 계속하여 힘들게 하고 우리는 새로운 방법으로 살아내는 지혜를 터득하고 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세수하고 학교 가는 아이들의 일상이 지금은 수시로 조율되고 있으니 학교교육의 추억은 더욱 멀어만 간다. 심지어 올해 입학한 유치원생은 학원운행 버스에 오르면 곧바로 벨트를 매는 전년도 원생들과 현저히 다르다고 사회적응 첫 단추도 익히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까워한다. 사월의 라일락은 향기를 바람에 날리어 곤혹스럽게 하고 꽃피고 난 뒤 무성하게 잎 키우는 목련 그리고 키 큰 살구나무 아래에 심을 꽃씨가 왔다. 방풍, 백도라지, 당귀, 금잔디, 백일홍, 허브 분꽃, 양귀비, 천일홍, 더덕 등 약재에 가까운 씨앗을 동생은 넉넉히 주고 갔다. 시골에서 자란 덕을 야무지게 실천하는 바람에 올여름은 행복예절관이 색다른 꽃들로 한껏 건강해질 태세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어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사월만 되면 어김없이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1948년 노벨문학상)의 황무지를 떠올린다. 제주 43사건, 419혁명, 416 세월호 참사 등은 엘리엇의 황무지와 수많은 생명을 잃은 사월과 겹쳐 생각을 아니 할 수 없다. 죽은 땅에서 수많은 생명이 단단한 뿌리로 내려 밀고 올라와 온 누리에 향기로 꽃 피울 때 사월은 진정 가장 잔인한 달이 되지 않을까. 꽃씨가 자리 잡을 곳을 골라 약간의 흙을 파고 거기 사월의 꽃씨를 후북하게 심어야겠다. 그 위로 봄비는 토닥이며 내릴 것이다. 강성금 안산시행복예절관 관장

[문화카페] 선국후당

4ㆍ7 재보선 이튿날 새 서울시장이 서울시의회에 인사하고 협조를 요청하자 시의회 의장이 원칙 있는 시정에는 협조하겠으나 정무 관련 선당후사 입장을 양해하라는 취지로 대답했다. 先黨後私, 즉, 의회활동에서 소속한 당의 당론을 우선하며 새 시장의 어떤 시정 요청은 사사(私事)로 간주하며 제동하겠다는 뜻이다. 그 이튿날 시의회는 새 시장의 과거 시정을 실패로 규정하고, 의장은 시 공무원에게 이메일을 보내 차후 임기 1년3개월을 굳이 강조했다. 우리 민족은 지난 100여년 역사에서 좌우와 노선의 갈등을 지겹게 겪었고, 아직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이념은 이상을 지향하지만, 편향성과 독선이 착종돼 있다. 그 충돌이 야기한 희생과 비극을 상기하면 막대한 질량에 통렬한 회한도 무색하다. 일제에 맞서자며 만장 파란을 무릅쓰고 상해에 임시정부를 세우자말자 지사들은 분열했고, 만주의 호랑이 일송(一松) 김동삼의 독립운동은 좌우통합에 그 귀중한 성력의 과반 이상이 소모됐다. 하나가 돼도 투쟁이 어렵지 않느냐는 일송의 호소에, 좌우는 때로 단합을 표방했으나 결국 도로에 가까운 분열이 연속됐고, 청산리의 영웅 김좌진 장군은 남은 포부가 일제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에 희생됐다. 식민지배가 정착돼가는 국내에서도 우국지사들은 분열해 백안시했으며, 해방 공간에서 갈등이 심각하게 악화되면서 마침내 처참한 골육상쟁이 벌어졌다. 남북은 책략을 거듭하며 분단을 고착했다. 90년대에 세계의 시세와 달리 남은 여전히 그 아류 진영으로 나뉘어 서로 질시했고, 북은 오히려 체제를 강화하고 이후 이데올로기의 적대성 고양을 지속하면서 핵개발에까지 이르렀다. 지난 4ㆍ7 재보선에서도 그러했지만 언제부턴가 정쟁이라 하기엔 고약하고 혼탁한 대립 양상에 거듭 낙심했다. 이념도 권력 쟁취의 명분으로 변질됐고, 지적 취향의 신념화에 콤플렉스마저 개입된 일종의 게임콘텐츠로 전락하지 않았나 의심도 든다. 새삼스럽지만 우리는 우리의 공화를 저해하는 아류 이데올로기를 청산해야 한다. 강성 지지층의 절제나 여야의 절충이 어렵다면 그 악순환을 제지하고자 중도세력의 확산과 진영 견제가 요청된다. 지난 100여년 폐단의 잔영과 관성에서 벗어나 실사구시(實事求是)의 길에 국운을 올려놓으려면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런데 지난 보선에서 발현된 2030 MZ세대의 표심 경향에서 다행히 탈이데올로기의 모습을 보았다. 이 세대의 표심에는, 리얼리티가 취약한 관념에 교착돼 자파의 이해를 따지는 피아 구분 성향이 없다. 여야가 벌이는 행태를 관찰하며 시비와 효용을 따져 주권을 행사하는 신상필벌(信賞必罰)의 표심. 우리의 미래를 개척하는 이 세대가 표출한 민주의식과 권력생성 태세를 지지하며, 부디 흔들리지 말고 이 땅에 관행으로 정착시키기를 기원한다. 정치인다운 정치인을 선별해 그들이 선국후당(先國後黨)에 종사하게 해야 할 것이다. 김승종 연성대 교수시인

[문화카페] A군에게

몇 주 전, 충분한 시간은 아니었지만, 자네의 고민을 나누어 준 것에 감사하네. 자네가 넘을 수 없는 현실의 험난한 벽이 내 근처에 가깝게 스며들고 있음을 실감하는 시간이었네. 경쟁을 뚫고 명문음대에 진학하기까지 자네가 쏟아낸 땀은 어떤 분야보다 진했던 것을 알고 있네. 한 두 평의 좁은 연습실이 자네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공간이었지. 혹독한 연습으로 손가락에 피가 맺히고 터지는 맹렬함을 키워온 자네의 기량이 자랑스럽네. 대학졸업 후, 유학생활은 자네의 젊은 에너지를 맘껏 발산한 시간이었지. 낯선 이국 땅에서 연습실 확보를 위해 잠을 설치며 새벽을 기다려 확보한 연습실에서 다음 날 새벽 2시까지 수위에게 쫓겨나온 날들이 1년에 360일은 넘었지. 고향의 부모님을 생각하며 향수에 젖어 있던 시간도 이제는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지만, 당시에는 넓은 바다에 홀로 남겨진 느낌이었겠지? 퇴임을 앞둔 아버지가 어렵게 마련한 시골의 작은 아파트를 팔고 퇴직연금도 해지하여 유학자금을 보내주신 가족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컸기에 그 흔한 햄버거 하나도 마음 놓고 먹을 수 없었겠지. 그때의 눈물은 그리움과 서러움이 만들어낸 한 편의 시가 되어 이제 가슴에 담아 두었겠지. A군, 한국에서의 16년 학업생활 그리고 7년여의 유학생활 거의 25여 년의 청춘을 악기에 매달려 온 것은 음악 없이 살아가는 것이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 가장 큰 요인이며 이런 수련과정을 거치면 스승과 선배들이 누리는 윤택한 보상이 따라온다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었겠지? 유학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는 왜 이리 더딘지 혹시 하늘에 멈춰 있는 것은 아닌가 창밖을 내다보며 비행기 안에서 뛰고 싶던 심정이었지. 금의환향, 꿈에 그리던 고향에 도착하였지만 안정된 생계를 보장하며 자네를 환영하는 단체는 없고 그나마 유일한 생활의 보루인 프리랜서 활동도 우환 코로나로 꽉 막혀버려 신세 진 분들께 면목이 없어 최근에는 연락도 제대로 못 하고 있겠지. A군, 자네가 남기고 간 고민의 숙제를 떠올리며 기성세대가 본연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고민하고 있네. 무능함, 미안함, 부끄러움, 동정 등 뒤섞인 한탄의 진동이 조석으로 나를 흔들고 있네. 30여 년 전, 전문연주자의 길에 뛰어든 나와 현재 자네가 마주하는 현실의 차이는 크지 않네. 30여 년간의 학생생활을 통해 착실하게 준비된 나에게 (주관적인 판단이지만) 이 사회는 적절한 기회를 제공하지 않았지. 솔직히, 환갑이 넘은 오늘도 연주자로서 나를 알리기 위한 프로모션을 하루도 게을리한 적이 없네. 예술가, 특히 연주자로 살아가는 길은 평생을 험하고 거친 광야를 지나는 수도자와 같은 것일세. 세상이 내 편이 아니라고 생각할 때 나를 강하게 채찍질한 것은 열정이었네. 열정은 남이 거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샘에서 만들어져 분출되는 것이네. 열정은 긴 숨으로 참고 견디는 인내가 있어야 오래도록 꽃 피울 수 있네. 덧붙이면, 노력은 진정한 나의 실력을 발굴해 내는 열정의 핵심적인 부분일세. 이 고난의 흐름을 새로운 자기발전의 시간으로 만드는 지혜를 기대하고 싶네. 그때 새벽공기를 헤치고 연습실에 들어서며 뜨겁고 떨리는 가슴으로 악기를 보듬던 감격의 추억을 다시 꺼내 주기 바라네. 지금 겪는 고통의 시간이 견고한 창조의 시간으로 변환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네. 예술의 진가를 깊고 넓게 발굴하여 이전보다 더 존경받는 연주자가 되기를 바라면서 이만 줄이네. 함신익 심포니 송 예술감독

[문화카페] 그 극장에 가고 싶다

내가 맡은 재단의 극장 규모는 대단할 정도다. 일산 아람누리에는 대극장과 콘서트홀, 소극장인 새라새극장이 있다. 덕양구에 있는 어울림누리에는 대극장과 소극장 별모래극장이 있다. 양 누리에 하나씩 있는 야외극장을 포함하면 객석 수가 엄청나다. 총 7천 석 정도다. 한 기관이 운영하는 객석 규모로 치면 전국 제일이 아닐까 싶다. 숫자와 규모를 자랑하려는 게 아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숫자보다 중요한 것은 그 공간을 채우는 콘텐츠다. 콘텐츠의 질도 중요하지만, 공간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그 못지않게 양도 무시하지 못한다. 다양한 콘텐츠로 공연장을 채우는 방법은 대개 두 가지다. 하나는 활발한 기획으로 양질의 작품을 골라 연간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방식이다. 우수한 작품을 초청하거나 제작하는 경우가 여기에 속한다. 이런 프로그램 구성을 일정한 방향성을 갖고 연간 단위로 상설, 정례화하는 것을 시즌제라고 말한다. 다른 하나는 대관이다. 자체 기획 외에 외부의 기획사나 제작사 등에 공간을 빌려주는 것이다. 모든 공연장이 두 방식을 다 택하는 것은 아니다. 대관만 하는 공연장도 있는데 공공극장보다 주로 민간에 많다. 따라서 어느 공연장이 자기만의 색깔을 갖고 관객에게 어필하는 승부처는 바로 기획이다. 요새 웬만한 공연장에서는 기획 프로그램의 충실도가 공연장 브랜드에 직결된다는 생각에 시즌제를 택하고 있다. 관객들에게 시즌 개막 전 프로그램을 미리 확정하여 알려주고, 다양한 할인 패키지 상품을 내놓는 일은 시즌제의 큰 장점이다. 한국 공연장 시즌제의 종가는 어디일까? 눈에 띈 성과로 종가임을 입증한 곳은 LG아트센터이다. 2000년 문을 열면서 시즌제를 선보인 LG아트센터는 이를 통해 개관 초기 명실상부한 최고 공연장의 이미지를 굳혔다. 이후 여러 극장이 앞서거니 뒤를 따랐고, 우리 재단도 지난해부터 아트시그널!고양이라는 이름의 시즌제를 내세웠다. 개막 직후 터진 코로나19로 그 진가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해 아쉬웠지만, 곧 4월 시즌을 활짝 열면서 고양발 아트시그널을 발신한다. 나는 공연장을 미디어로 본다. 공연장은 공급자와 수용자를 연결하는 매개체이며, 그 공연장의 프로그램은 중요한 메시지다. 기획자의 정성이 담긴 프로그램 하나하나가 그 공연장의 품격과 성격을 담은 메시지라는 이야기다. 시즌제는 개별 메시지의 묶음이다. 시즌제의 평판과 역사가 쌓여 공연장은 견고한 미디어이자 브랜드가 된다. 코로나19 상황이 지속되면서 모든 공연장이 생존 방식을 놓고 고민이 깊다. 이런 때 의기소침하지 않고 오히려 공격적으로 공연장의 브랜드 가치를 높여가는 곳이 있다. 2018년 인천 송도에 문을 연 아트센터인천의 활약이 돋보인다. 최근 시즌 프로그램을 보면, 정통 클래식 콘서트홀의 특성을 살려 오로지 프로그램의 질로서 정체성을 다지는 노력이 잘 드러난다. 바다에 연한 아름다운 입지는 음악당의 또 다른 매력 중 하나다. 이렇듯 가보고 싶은 요소가 많은 공연장은 그만큼 성공 가능성도 크다. 정재왈 고양문화재단 대표이사

[문화카페] ‘지금’은 스스로 선택하는 나의 역사

새로 나온 신간 그림책을 접할 때면 마치 새 신을 사러 가는 어린 아이의 마음처럼 마음이 설렌다. 책 표지의 질감과 이미지, 내지의 인쇄 냄새까지 음미하듯 책장을 넘기며 만나게 되는 몇 장의 그림과 글이 마음을 울릴 때면 더욱 그러하다. 크림색의 표지에 등을 진 채 서 있는 중년의 남자와 여자, 각자의 방향에서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포옹하고 있는 표지의 이미지는 나이 든 중년이면 설명 없이도 공감이 되는 공허가 느껴진다. 인생은 지금의 글을 쓴 다비드 칼리는 기발한 상상력과 유머러스하면서도 재치 넘치는 글로 독자의 사랑을 받는 작가다. 글쓴이의 글에 걸맞게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적당히 단순하게 내용을 잘 풀어낸 그림 작가의 어울림은 독자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이 책은 은퇴 후 시간이 많이 남은 부부가 주인공이다. 그동안 바쁜 직장일로 해보고 싶었던 것을 하지 못했던 남자의 다양한 시도와 함께하자는 것마다 생활 속 일거리를 핑계로 자꾸 다음으로 미루는 아내의 이야기이다. 『왜 자꾸 내일이래? 인생은 오늘이야, 다 놔두고 가자. 어디로? 몰라, 그냥 숨이 찰 때까지 달려서 강물에 뛰어들자. 그리고 소리 칠 거야. 당신을 사랑한다고. 대체 왜? 일일이 이유가 필요해? 그러다 시간이 다 가버린다고. 내 인생은 이미 여기 있는 걸. 인생은 쌓인 설거지가아니야. 지금도 흘러가고 있잖아. 가자! 인생은 지금이라니까.』 (중략) 나의 지금은 무엇일까? 늘 조금 있다가 라든지 다음이나 내일로 미루는 생활처럼 익숙해져 버린 습성들로 어쩌면 인생의 정해진 시간을 더욱 단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제 죽은 사람이 그토록 원했던 내일이 오늘이고 나중이 바로 지금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 살아지길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 누구나 각자의 처한 상황이 다르니 누구에게는 실행하는 지금이 소중할 수도 있지만 어떤 이에게는 실행을 미루고 준비하는 지금의 시간이 중요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을 인식하는 바로 그 순간이야말로 내가 살아있는 존재의 시간이 아닐까 한다. 지금의 나의 선택은 자긍하는 과거가 될 수도 회한의 과거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나저러나 모두 나의 선택이고 겉보기엔 별반 차이도 없을 듯 보이나 그 지금이 모여 나의 역사가 될 것이다. 같은 공이지만 탱탱볼과 바람 빠진 공의 차이라고 하면 좀 과한 비약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는 이가 빠지고 허리가 굽어도 겉만 번지르르한 바람 빠진 공보다는 저렴하지만 탱탱볼 같은 노년을 맞고 싶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용기를 내보아야겠다. 한 권의 그림책으로 노년까지 생각하니 그림책의 힘은 실로 놀랍다. 손서란 복합문화공간 비플랫폼 대표

[문화카페] ‘5049’ 정조의 리더십

시간을 정해 놓고 책을 읽기로 했다. 시대별로 분류한 대표시집을 읽기도 하고 차에 관한 신간과 고전은 물론 동양신화나 역사서도 의견 모아 선별해 읽었다. 한 사람이 소리 내어 서너 쪽 또는 한 소절을 읽으면 다음 사람이 이어서 읽는 방식으로 서로 돌아가며 읽는다. 한 단원이 끝날 때마다 차를 한 잔씩 마시며 느낌을 이야기한다. 처음에는 초등학생처럼 소리 내어 읽기가 어색하고 쑥스러워 서로 안 읽으려고 했다. 그래서 가끔 호흡조절도 한다. 이를테면 사자소학을 읽고 쓴다거나 읽고 쓰는 다신전(茶神傳)을 다 쓰고 나면 표지를 붙여 한 권의 책으로 묶는다. 그날은 나이를 어디에 두었는지 애들보다 더 좋아라한다. 이 옹기종기 책 읽는 모임은 처음에는 열명이 넘었으나 십 년 세월 가다 보니 이제 오롯이 다섯만 남아 매주 월요일 저녁 신앙처럼 모인다. 옹기종기 모임에서 올해 첫 번째 선택한 책은 5049 리더라면 정조처럼으로 정했다. 절반쯤 읽은 후 저자를 초대해 작가와의 대화를 가졌다. 이 책을 쓴 한신대학교 김준혁 교수는 3년 전 장용영을 펴낼 때 무예통지의 서문에 있는 즐풍목우(櫛風沐雨)-바람으로 머리 빗고 빗물로 목욕하라-는 대목을 책 표지에 올렸다. 정조가 만든 조선 최강의 군대 장용영 군사들의 훈련을 강하게 시키라는 지시가 이 두 문장에 압축돼 장용영 하면 즐풍목우를 떠오르게 한다. 이번 리더라면 정조처럼 표지에는 정조대왕의 숨겨진 리더십코드 5049가 눈에 띈다. 조선 정조의 생애와 국가지도자로서의 리더십을 49가지로 정리한 김 교수의 책을 굳이 다 읽지 않아도 5049, 이 네 숫자만으로도 그 의미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정조는 조선 역사상 특별한 신궁(神弓)으로 50발을 쏘면 49발을 명중시키고 마지막 한 발은 허공으로 날려 보냈는데 정조는 이런 자신의 행동에 대해 가득 차면 오만해지기 쉬우므로 스스로 겸손해지는 활쏘기를 보여주었다. 정조는 덕(德)있고 올바른 신하들과 연대하기 위해 활쏘기를 했는데 활쏘기를 하다 보면 조급해하는 사람, 버럭 화를 내는 사람, 조용히 잘 인내하는 사람, 남을 배려하는 사람 등 타고난 본성을 감출 수 없어서 활쏘기를 통해 자연스럽게 그 사람의 성정이나 심성을 확인할 수 있어 참된 신하를 확인했다고 한다. 활쏘기 하나만으로도 사람이 갖춰야 할 가장 기본적인 겸손과 상대방을 배려하는 따스함을 보여주는 리더의 덕목에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얼마나 깊은 감동을 주는가. 차 한 잔을 우려내는 시간은 약 5~6분이 소요된다. 그 5~6분은 기거동작과 물 따르는 소리, 호흡 간의 바람 등으로 차를 우리는 사람의 심성이 그대로 전달된다. 그러므로 책읽기 전에는 차를 먼저 우리도록 한다. 연습을 실전처럼 실전을 연습처럼 그리해 자신도 그리 썩 자연스럽지 못하면서 상대방의 작은 실수까지 보도록 한다. 정조의 5049를 생각하게 한다. 강성금 안산시행복예절관 관장

[문화카페] 아이러니

특히 정부와 국회의 일 처리에서 추진 과정이 공정하지 않거나 절차가 생략되면 그 결과가 아름답지 않다. 어떠한 명분에도 공공의 의혹이 발생할 수밖에 없고, 공동체 전체의 이익이나 균형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공화의 원칙을 깼다는 의미까지 가중된다. 혜택을 누리는 쪽은 내심 부끄럽고 그렇지 않은 쪽은 억하심정을 가질 것이다. 이러한 정서는 결국 국가의 분열을 조장하며 통합을 방해하는 저변이 된다. 민주주의 이념은 대체로 공정하지 않은 과정을 문제시한 서민들의 오랜 원념(怨念)에서 비롯되었으며, 근대로 나아가는 에너지가 되었다. 영국의 의회가 1689년에 권리장전을 분출시킨 동기도 그렇고, 1894년 동학 봉기의 요인도 그러하였다. 새삼스럽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집권 명분이었던 반칙과 특권 배제에도 공정한 과정이 선명하게 강조되어 있었고, 지난 촛불사태 때도 문제 되었다. 기회는 평등하게, 과정은 공정하게, 결과는 정의롭게. 이 슬로건에서 기회와 결과도 역사의 연속에서 또 하나의 과정들이기에 공정은 그 요체이다. 그런데 의외에도 그렇게 현재 정부가 들어선 이래 조국사태, 월성원전 사건, 공수처법안, 검찰총장징계사건, 불법출국금지사건에 이어 최근의 검사장인사와 가덕도 신공항특별법이 모두 그 과정이 문제 되어 우리는 복잡하고 격렬한 갈등을 겪고 있다. 특히 가덕도 신공항특별법은 공정한 과정을 거쳐 결정한 정책을 공정하지 않은 과정으로 번복한 사안이다. 더 치열한 정쟁과 감투 의지가 증폭되고 있고 4.7보선도 다가오는 이 즈음, 이럴수록 우리 사회에 더욱 필요한 가치는 바로 공정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사실 어느 쪽을 지지하든 않든 여야가 시시한 정략을 배제하고 사안마다 공정한 과정을 투명하게 이행하기를, 특히 관련 편향성 폭력성 비방을 현출하지 말기를 바란다. 자파 위로에 일단 쓸모가 있겠으나 그것들은 사실과 진실을 왜곡하여 우리 사회 전체에 해악을 끼치는 협잡에 불과하고 결국 우리 모두를 불행하게 한다. 지난 시절 여러 풍파를 거친 이 시대의 정치인이라면 여야 막론하고 마땅히 바로 처신하며 우선 당장의 훼예에 좌고우면하지 말고 공정을 구현해야 응분의 역사의식이 있다고 할 것이다. 18세기 전반에 사환한 용와(慵窩) 류승현(1680-1746)은 공정을 견지한 인물이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그의 훈도를 받은 아우 류관현(1692-1764)과 재종질 류정원(1702-1761)의 사행을 목민의 모범 사례로 제시하였다. 류관현은 3회, 류정원은 12회. 일찍이 류승현을 알아본 제산(霽山) 김성탁(1684-1747)은 아들 김낙행(1708-1776)이 그가 혹 재상이 될 수 있겠느냐고 묻자, 될 수 있다고 하고, 그 이유로 그는 공평하다고 하였다. 공정은 시대를 초월하여 공인의 주요 덕목일 뿐만 아니라 탕평이 요구될 만큼 당쟁이 고착되었던 분열과 편향의 시기가 그 배경이었기에 김성탁의 언급은 오늘에도 그 내포와 외연이 깊고 넓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류승현의 지취와 내면을 엿볼 수 있는 시 「종죽(種竹)」을 이 기회에 음미해보자. 북쪽 울타리엔 붉은 복사꽃(北籬桃花紅)/남쪽 울타리엔 하얀 오얏꽃(南籬李花白)/꽃들 사이에 대나무 심자(中間種此君)/복사꽃 오얏꽃이 무색해지네(桃李失顔色). 김승종 연성대 교수시인

[문화카페] 귀국연주회

1970년대와 80년대 시절, 김포공항은 유학파들의 출국과 귀국을 위해 모인 환송환영인파로 늘 시끌벅적했다. 유학과정에서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공부를 했는지의 여부는 일단 제쳐 두고 훈장을 가슴에 달은 전승장군의 금의환향 같은 기개가 하늘을 향한다. 이어서, 휘황찬란하게 귀국연주회를 선전하는 것을 봤다. 유학을 다녀오면 무조건 성공한다는 환상에서 살던 시절이다. 진정한 실력의 향상과 독특한 학문의 획득을 위한 원천적 목표보다는 어떻게 해서라도 학위를 따서 귀국 비행기를 타는 것을 목표로 했던 시절의 얘기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런 과정을 거쳐 대학교수 등의 자리를 확보하고 지금까지 그것을 유지하는 것을 보고 있다. 유학을 다녀온 연주자들의 수가 손으로 셀 정도로 희귀한 시대의 해프닝이지만 아직도 그런 전통이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 지난주, 연주를 위해 들른 서울의 주요 콘서트홀에는 귀국연주회라는 이름의 연주를 알리는 전단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외국여행이 외딴 시골을 방문하는 것보다 용이한 글로벌 시대에 살고 있으며 미국의 일부 음대들의 운영이 한국에서 온 유학생의 등록금에 의존하고 있는 현실에서 더 이상 유학=특권이라는 공식이 성립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귀국연주회=교수자리 확보를 위한 시발점이라는 희귀한 현상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학을 다녀온 귀국연주회를 위한 기획사의 콘서트홀 확보와 홍보는 뜨겁다. 유학은 지식과 전문성을 추가로 얻기 위한 과정이다. 연주자들에게는 연주가 생활화돼야 한다. 귀국연주회 이후 새로운 연주를 위해 애쓰는 음악가들이 있는 반면, 우여곡절 끝에 귀국연주회를 마치고 이어지는 연주회를 찾아볼 수 없는 음악가도 있다. 원하는 교수자리를 얻은 후 학생들이 본받을 만한 연주를 지속적으로 해 자기개발을 끊임없이 하는 것이 음악가의 본분임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연주와는 거리가 먼 활동을 하는 연주자들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연주회는 반드시 화려한 드레스를 맞춰 입고 꽤 비싼 미용실에서 머리를 꾸민 후 지역에서 가장 알려진 콘서트홀에서 화려하게 축하받으며 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귀국연주회를 준비하는 젊은 연주자들에게 권면하고 싶다. 연주자들은 자기 개발을 위해 잠시도 열정의 숨을 멈출 수 없음이 진실이라면 진정한 연주는 동네마을회관에서, 아주 외딴 시골 교회에서, 산속 깊은 사찰에서, 작은 초등학교 교실에서 소박하게 그리고 감동적으로 이뤄 질 수 있다. 숫자에 연연하지 않고 연주에 꼭 오고 싶은 청중을 정성껏 모시고 꾸준히 그리고 자주 연주하는 것이 연주자의 사명이다. 이제부터 귀국연주회라는 용어에서 귀국을 빼자. 연주의 궁극적인 목표는 연주자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연주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함신익 심포니 송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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