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축제를 바라보는 관점과 축제인간(homo festivus)세계’

인류 문화의 꽃, 축제는 인간과 인류 사회에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어 “축제가 없는 민족은 살아서도 산 목숨이 아니고 죽어서도 고이 잠들 수 없다”고 했는가! 지구촌 어느 곳, 어느 민족이나 축제를 통해 고유의 민족문화를 보존하고 공동체 의식을 함양하면서 삶의 기쁨과 슬픔을 누려 왔다. 축제는 다양한 세계관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먼저 종교적 제의 세계관으로서의 축제는 정화의식(淨化儀式)과 성화의식(聖化儀式)에 의한 자아 승화의 표현이다. 축제의 원형은 고대사회부터 지역공동체를 유지하는 역할을 해왔다. 민속신앙이 체화된 감천문화마을의 동제, 일본의 도쿄 간다묘진 신사에 열리는 간다마쓰리, 가톨릭 신앙에서 비롯된 유럽과 남미지역에서 사순절 시작 전에 개최되는 축제로서 대표적으로 독일의 쾰른 카니발 등이 있다. 둘째, 집단행위의 혁명적 세계관으로서의 축제는 신성하고 비일상적인 리미널리티(liminality·문지방)와 코뮤니타스(communitas) 공간에서 이뤄지는 인간의 자유, 평등, 동료애, 동질성을 이루는 카오스적인 난장트기다. 종교적 색채를 벗어던지고 다양한 가면과 변장을 하고 참여하는 베네치아 카니발과 니스 카니발, 안동 하회별신굿탈놀이를 형성구조로 하는 안동 국제탈춤페스티벌을 예로 들 수 있다. 셋째, 공동체적 맥락의 집단 유희적 세계관으로서의 축제는 유희 인간(homo ludens)으로서 인간의 유희적 본성을 집단적 문화로 표현한 것이다. 세계적 축제인 브라질 리우 카니발과 영국 노팅힐 카니발, 토마토 전쟁 축제로 유명한 스페인 라 토마티나, 보령 머드광장의 보령머드축제 등에서 극대화된 유희적 몰입의 모습이 발견된다. 마지막으로 혼돈에 대한 자연질서 세계관으로서의 축제는 인간이 혼돈(chaos)에 대한 자연질서(cosmos)의 승리를 기념하는 특별한 기간에 이뤄지는 집단의식이다. 동서양의 신년 해돋이 축제, 제주 들불축제 같은 대보름 축제, 추수감사절에 열리는 프랑스 프로방스의 생텔루아 축제 등이 그 예다. 가을은 바야흐로 축제의 계절로서 우리나라 방방곡곡에서도 많은 지역축제가 열리고 있다. 전통적인 가을축제는 가을 추수에 감사하며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밤새도록 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는 모습이 원형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축제의 다양한 세계관만으로는 전부 설명할 수 없는 각양각색의 지역축제들이 개최되고 있다. 2023년 경기관광축제로 선정돼 10월에 열린 축제를 살펴보자. 정조 관련 문화콘텐츠 중심의 수원 화성문화제와 화성 정조 효문화축제, 인물과 민속문화를 소재로 한 안산 김홍도축제와 안성 바우덕이축제, 농경문화의 이천 쌀문화축제와 여주 오곡나루축제, 호수와 거리예술의 고양 호수예술축제, 포구문화를 담은 시흥 월곶포구축제 등이 있다. 유럽과 남미의 유명한 카니발과 예술축제, 일본의 마쓰리 등과 같이 수십, 수백 년 동안 지속돼 온 축제가 부럽다. 우리나라의 지역축제도 100년 이상 지속돼 지역주민과 방문객들에게 사랑 받는 축제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이를 위해 축제를 기획하고 연출하는 사람과 지역주민들은 축제의 본질적 특성과 가치를 이해하고 축제에 대한 관념을 깊숙이 들여다보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지역문화 창조와 혁신이 이뤄지는 축제인간(homo festivus)세계를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문화카페] 우리 인형극, 비주류 예술 만세

케이팝이나 K-드라마 외에 점차 다른 우리 예술도 많은 세계인들에게 관심을 받고 있지만 정작 국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경우가 많다. 바로 인형극도 그런 장르가 아닌가 싶다. 지난 9월 프랑스 샤를르빌에서 국제인형극축제가 열렸고, 이 축제에 ‘코리아 포커스’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인형극 작품 4편이 공식 초청받아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쳤다. 샤를르빌 축제는 전 세계 인형극 분야에서 가장 권위 있고 규모가 큰 축제다. 공식 초청 공연뿐 아니라 다수의 한국 인형극팀들이 프린지 공연에도 참여해 현지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온 많은 관객들이 우리 인형극의 우수성을 경험한 것이다. 연극 예술은 인간의 모습을 특징적으로 모방하고 강조함으로써 우리의 삶을 더 돋보이게 만든다. 그런데 인형극은 그런 모방하는 인간을 다시 인형으로 모방하기 때문에 더 ‘연극적’이라고 말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연극 예술의 지평을 한층 더 넓혀 주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따지고 보면 인형극은 역사가 아주 오래된 전통예술일 뿐만 아니라 영상, 오브제, 설치예술, 애니메이션, 그리고 요즘 아주 핫한 인공지능(AI)과도 잘 결합될 수 있는 매우 현대적인 예술이다. 원초적이고 아주 첨단적인 예술이 될 수 있는 장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인형극 하면 과거 ‘모여라 꿈동산’이나 ‘텔레토비’ 같은 어린이용 인형극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인형극은 어린이만이 아닌 남녀노소 모든 관객이 즐길 수 있는 공연예술 장르이고, 무엇보다도 다양하게 활용될 수 있는 예술이다. 영국 국립극장이 공연해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워호스(War Horse)’ 공연도 그렇고 작년 영국 올리비에상을 석권한 ‘라이프오브파이(Life of Pi)’ 공연은 인형극은 아니지만 인형의 활용이 극의 핵심인 작품이다. 그래서 라이프오브파이에서는 배우가 아닌 호랑이 인형을 조종하는 인형 조정자(Puppeteer)들이 조연배우상을 받기도 했다. 또 요즘 인형극은 어린이·청소년 공연축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많은 도시에서 열리고 있는 거리예술축제에서도 없어서는 안 될 장르가 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인형 예술 자체가 처한 상황은 열악하기 짝이 없다. 유럽의 많은 도시들에는 인형극 전용극장이 있어 상시로 관객을 만날 수 있는 반면 우리 수도권에는 그런 전용극장이 없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그리고 창의적인 디자인과 정교한 조종기술이 필요한 인형 예술을 위한 전문 교육기관도 부재한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형극인들이 힘을 합해 2025년 4년에 한 번 열리는 유니마(UNIMA) 세계 총회를 유치한 것은 기적에 가깝다. 세계 인형극인과 인형극 단체들의 네트워크 조직인 유니마는 90여개국이 가입한 가장 오래된 공연예술 국제조직으로, 우리가 인형극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는 캐나다 퀘벡을 꺾고 압도적 표차로 승리해 총회와 축제를 유치한 것이다. 앞서 언급한 샤를르빌에서의 ‘코리아포커스’까지, 한마디로 비주류 예술의 반란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중앙정부나 수도권 자치단체가 응답할 차례가 아닌가 한다. 유니마 총회 및 축제 개최를 계기로 ‘인형극 전문창작센터’나 전문교육기관 설립 등 그야말로 물 들어 왔을 때 노를 힘껏 저을 수 있는 지원정책이 시급하다. 그동안 소외됐던 예술 장르가 우리의 미래 예술을 선도할지 누가 알겠는가!

[문화카페] 대중예술인의 소득 불균형

대중예술 산업과 순수예술 산업을 아우르는 문화예술산업은 흡사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대중음악이나 영화, 드라마, 공연 등 다양한 종류의 문화예술 상품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자본이 쉴 새 없이 투입되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다. ‘흥행 열차’에 오르기 위해 자본 못지않게 중요한 인적자원, 좀 더 구체적으로는 유명 배우나 톱가수에게 문화예술계의 시선이 온통 쏠린다. 그 이유는 명료하다. 전석매진이나 높은 시청률 등 흥행에 성공하면 두 말할 나위 없겠지만 그것이 아니더라도 시쳇말로 ‘쪽박’을 피할 수 있는 확실한 안전장치라는 판단이 깔려 있다. 실제로 ‘스타’로 불리는 대중예술인이 등장하는 문화예술 작품의 흥행 가능성이 그렇지 않은 경우에 비해 높다는 연구 결과도 있음을 고려할 때 문화예술산업의 스타 선호는 어쩌면 당연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짚어야 할 내용이 있다. 1990년대 중반부터 불기 시작한 한류와 이에 따른 대중예술 각 장르의 발전으로 문화예술산업 규모가 급격히 커지면서 스타에 대한 의존도가 갈수록 심화하고 있고, 이로 인해 대중예술 노동시장의 소득 편차가 확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대중예술인 소득의 ‘승자독식’ 현상이 우려할 만한 수준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이는 데이터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국세청이 최근 국회에 제출한 ‘2017~2021 업종별 연예인 수입 금액 현황’에 따르면 2021년 기준으로 대중가수 상위 1%인 77명의 1인당 연평균 소득은 46억1천774만원으로 나타났다. 소득을 신고한 전체 가수 1인당 평균 소득 6천679만원의 69배에 이르는 금액이다. 톱가수의 수입이 ‘보통가수’와는 비교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높다는 증거다. 배우의 소득 격차는 가수보다 훨씬 두드러졌다. 배우 소득 상위 1%(160명)의 1인당 연평균 소득은 22억6천590만원으로 배우 전체 평균 2천407만원의 94배에 달했다. 특히 이 같은 배우 전체의 연평균 소득은 2021년 당시 최저임금으로 환산한 연봉이 2천186만9천760원이었음을 고려하면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열악한 수준이다. 소득 상위 1%의 대중예술인은 ‘스타’로 분류하는 데 크게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상위 1% 소득 중에서 ‘슈퍼스타’ 수입이 포함돼 있음을 감안한다면 또 다른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문화예술 시장에서 0.1%라고 하는 슈퍼스타가 벌어들이는 소득은 ‘스타’의 그것을 훌쩍 뛰어넘는다. 다시 말해 상위 1% 스타의 전체 소득 중 슈퍼스타의 소득이 상당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이는 결국 슈퍼스타와 일반 대중예술인의 소득 격차가 제시된 수치 이상으로 벌어져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이쯤 되면 미국의 경제학자 로젠이 제시한 ‘슈퍼스타 이론’을 소환할 명분이 생긴다. 소수 몇 명에게 엄청난 소득이 몰리고, 반대로 나머지 대다수는 아주 낮은 소득이 돌아가는 대중예술산업의 엄혹한 현실은 이대로 좋은가. 대중예술인의 소득 불균형 문제를 살펴야 하지 않을까.

[문화카페] 기본과 변화

IMF 시대, 1997년 필자가 미술대학에서 졸업전을 마치고 교수님들을 모시는 식사 자리에서 은사께서 하셨던 말씀이 생각난다. ‘이제는 전통적인 아날로그의 시대에서 컴퓨터로 대변되는 디지털의 시대가 열렸고 너희들은 그러한 변화에 적극적으로 편승하라.’ 그 당시에는 우리들을 위한 정성의 말씀으로는 생각됐어도 가슴 깊이 생각하지 않고 다만 ‘위기는 곧 기회’ 정도의 말 풀이로 생각하며 조금은 가볍게 넘겼던 기억이 남는다. 이제는 문자의 시대를 넘어 이미지의 시대로, 그 이미지의 시대는 동영상의 시대로 변화하며 유저(User)로 일컬어지는 사람들의 변화에 대한 적응 능력치를 시험하고 그에 뒤처지면 큰일나고 시대의 모든 정보를 놓치는 것처럼 모든 사회시스템과 의식의 흐름들이 따라가는 것 같다. 특히 보다 세부적인 교육 영역으로 들어오면 디지털 환경이 얼마나 크고 다양하게 기존의 개념들을 뒤바꿔 놓았는지 살펴볼 수 있다. 일차적이지만 연필은 마우스가, 포스터컬러는 프로그램 도구창이, 소통은 이메일을 넘어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플랫폼, 화상미팅 등으로 빠르게 대치돼 변화했다. 무엇보다 전례 없는 코로나 팬데믹의 광풍 속에서 사람들은 모두 자기만의 공간으로 은폐, 엄폐했고 자신의 자유 선택 의지와 상관없이 물리적 단절을 시행하고 그것을 보완하기 위한 커뮤니케이션과 의미 전달을 위해 디지털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게 돼 디지털 환경의 적응과 적용은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고 포스트 팬데믹 시대가 열린 현 시점에서도 우리는 물리적인 단절을 디지털 환경과 디지털 수단을 통한 변화로 해결할 수 있다고 여기며 살게 됐다. 며칠 전 수업내용의 전달을 위해 교안을 제작하고 있을 때 팬데믹 시대의 교육 수혜자인 중학생 아들이 나의 교안이 시대에 뒤떨어진 ‘글’ 중심의 재미없는 것임을 지적하고 과감히 ‘동영상’ 중심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놀리듯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물리적인 공간에서, 물리적인 사람들인 가족, 이웃들과 살아간다. 디자인의 기본적인 존재 의미도 유니버설 디자인의 거목인 빅터파파넥의 ‘인간을 위한 디자인’이라는 타이틀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인간을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변화라는 흐름의 시대에 호흡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기본적인 것을 지키며 사람다움과 아날로그다움을 확인하고 돌아봐야 하는 것이 먼저 아닐까.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필자인 유홍준 선생의 말씀 중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정보를 모으고 판단할 수 있는 본인만의 노하우가 필요하며 그중 하나가 ‘신문 읽기’와 ‘스크랩’이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본다. 비록 오래 걸리고, 비효율적이며 전혀 디지털적인 흐름으로 보이지 않는 신문 읽기와 물리적 스크랩 활동을 통해 우리는 어쩌면 이 시대, 방대한 디지털 정보의 나열 속에서 나만의 의식으로 조망할 수 있는 정보를 펼쳐보고 나만의 정보 찾기와 정보 정렬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동영상의 속도감과 임팩트는 강하고 매력적으로 보이겠지만 내가 기억해야 할 정보의 습득은 보다 느리고 덜 자극적인 수단인 글(문자)들로 담아지는 것은 아닐까. 학생들과 실기수업을 진행하며 새로움에 대해 논하고 실험적인 시각방법론을 찾는 것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지만 자칫 우리는 기본적인 것들을 변화라는 이름 속에서 소홀히 다루며 더 큰 영감의 뿌리를 놓치고 있을지 모른다. 이러한 생각이 비단 필자가 학생들과의 수업에서 느끼는 것뿐만 아니라 지역, 사회, 나아가 국가의 주요 순간들에서 ‘변화가 기본과 원칙을 덮음’으로 나타날 수 있는 오류와 손실이 될 수 있음으로 해석하면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은 나만의 느낌일까. 사은회에 이어진 자리에서 은사님의 마무리 말씀이 귓가에 되살려진다. ‘변화에 반응하더라도 자기 자신은 유지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기본이며 그것은 어떠한 변화나 위기가 오더라도 자신을 지키는 가장 중요한 힘이야’라는 말씀은 비단 90년대 말의 나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2023년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더욱 중요한 말씀으로 다가온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앞으로 전개될 다양한 미래의 키워드들 속에서 ‘나다움과 기본’에 대해 아날로그적으로 생각해 볼 기회이자 위기일지 모른다.

[문화카페] 다중의 자아로 자본주의 시대 ‘살아내기’

지난여름의 유별났던 무더위 탓인지 올가을의 창공과 햇살과 바람은 어느 해보다 섬세하게 오감을 자극한다. 그 뜨거웠던 8월에 만난 ‘소시민의 칠거지악’. 이 연극은 제3회 소극장 공유 페스티벌 ‘연극·생각을 잇다’에 참여한 극단 ‘테아터라움 철학하는 몸’의 작품이다. ‘소시민의 칠거지악’은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와 작곡가 쿠르트 바일이 공동 작업한 발레극이다. 임형진 연출은 ‘게으름, 자만, 분노, 식탐, 호색, 탐욕, 시기심’이라는 일곱 가지 죄악을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와 연결해 포스트드라마적 연극으로 각색했다. 사실 브레히트는 문학을 넘어 영화나 라디오의 텍스트를 쓴 전방위적 예술가였다. 서사뿐 아니라 형식의 독창적 변주를 보여준 ‘소시민의 칠거지악’에서도 시대를 초월한 브레히트 미학을 접할 수 있었다. 연극이 시작되기 전 캄캄한 무대 위 밝은 원통의 설치물부터 낯설다. ‘저게 뭘까’라는 의구심이 드는 순간 두 명의 안나, 아니 ‘한 명의 분열된 두 자아(안나 1과 안나 2)’가 등장한다. 그녀들은 마치 다른 두 사람인 듯 스스로 타자화하며 위로하고 다투고 울부짖는다. 극은 무대 벽면에 걸린 일곱 개의 칠판에 칠거지악의 도시명이 하나씩 적히며 진행된다. 그리고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와 독특한 사운드가 무채색의 평면적인 무대를 일곱 개의 도시로 풍성하게 전경화한다. 안나 2는 도시를 이동하며 점차 돈을 우상화하고, 안나의 어머니는 원통 위에 그녀가 번 돈을 쌓아간다. 그러나 결말에 이르러 원통의 빛은 사라지고 돈더미만 허공에 남으면서 브레히트의 작품답게 자본주의 시대 돈의 유사전능성을 성찰하게 한다. 다시 분열된 두 자아인 안나 1과 안나 2를 호명해보자. 문경희 배우가 연기하는 ‘인물 안나 1’은 이성적·현실적인 자아이며, 오다애 배우가 연기하는 ‘인물 안나 2’는 자본주의 구조에 침잠되면서 순수성을 상실해가는 자아다. 하얀 셔츠와 검은 바지를 동일하게 착용한 단발머리의 두 배우는 때로는 분열된 자아들로 충돌하고 때로는 서로 다독인다. 한 명의 안나로부터 분열된 자아들, 그야말로 무대의 사건과 배우의 연기가 낯설게 느껴지는 브레히트 서사극의 현대식 작법이다. 욕망과 도덕의 이중적 잣대 아래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내려는 안나의 두 자아, 즉 안나 1과 안나 2는 현대인의 다중 자아와 다를 바 없다. 우리 모두에게도 개인의 본능에 충실한 자아가 있는가 하면 사회적 신분에 적응하려는 자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두 자아가 사회에 속한 개인으로서의 ‘나’라는 정체성을 만들어간다. 얼핏 극 중의 안나 1과 안나 2가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두 자아는 안나라는 한 인물의 생을 이끌어가는 역동적 자아들이다. 그래서 안나 1도, 안나 2도 모두 소중하다. 안나의 자아들을 마주한 후 나의 자아들을 들여다본다. 과연 나의 다중 자아는 조화롭게 소통하고 있는가? 나의 자아들은 소시민의 칠거지악으로 묘사된 ‘게으름, 자만, 분노, 식탐, 호색, 탐욕, 시기심’을 어떻게 다스리고 있는가? 쉽지만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면의 욕망과 사회적 규범을 끌어안은 우리의 자아들은 오늘도 분투하고 있다. 자본주의 시대를 잘 ‘살아내기’ 위해.

[문화카페] 관광위기와 회복탄력성

인류는 빈번히 발생하는 바이러스와 기후 변화에 따른 자연재해로 인해 여행이 어려워지면서 행복한 삶도 잠시 멈추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특히 우리와 지리·경제적으로 가까운 나라에서 발생하고 유행한 2002년 사스, 2009년 신종플루, 2012년 메르스, 2019년 코로나19 같은 바이러스는 우리나라 경제와 관광산업 생태계에 심각한 타격을 주면서 관광 위기의 주요 요인이 됐다. 인류 최악의 전염병인 흑사병과 스페인독감 이후 가장 강력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대유행한 지난 3년 동안 과학 방역과 전 세계가 상호 협력한 결과 코로나 엔데믹 시대를 맞았고 세계 여행 인구는 코로나 이전의 상태로 빠르게 회복하고 있다. 이러한 여행시장의 빠른 회복은 인간의 기본 욕구인 의식주와 더불어 우리 마음속에 문화적으로 체화된 강력한 관광욕구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큰 위기를 극복하는 순간 절망이 희망과 행복으로 바뀌는 마음의 근력, 즉 회복탄력성(resilience)이 잘 작동되는 것을 과거 많은 관광 위기를 극복한 이후의 모습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앞으로도 자연재해 위기, 사회경제적 위기, 기술과 물리적 환경 위기, 정치적 갈등 위기 등 다양한 관광위기는 인류 앞에 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우리나라는 지난 2016년 7월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 배치 발표로 중국과 정치적 갈등을 빚으며 전면 금지됐던 중국인 단체여행이 6년5개월 만에 재개됐고, 일본의 후쿠시마 오염수 해양 방류로 시작된 중국의 강력 대응조치와 중국인들의 반일 감정은 일본제품 불매운동과 일본여행 취소로 이어지며 여행 목적지 또한 일본에서 우리나라로 일부 변경될 것이 예상돼 코로나19 이전의 관광산업 회복이 예상보다 빨라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비 오는 수요일, 전통과 현대를 마주하는 ‘한국양금축제’를 보기 위해 명동으로 가는 길에 만난 광화문광장과 경복궁을 구경하는 한복 입은 유럽과 미국인 관광객, 한국관광공사 서울센터 ‘하이커 그라운드’에서 케이팝과 미디어아트를 관람하는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 관광객, 서울 명동거리에 히잡을 쓴 이슬람 동남아 관광객 등 많은 외국인 관광객을 마주할 수 있었다. 케이팝, K-드라마, K-푸드 등 세계적인 K-콘텐츠 열풍과 함께 한국 방문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고 코로나 블루와 관광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관광소비가 반등하는 수요 분출 효과, 즉 펜트업 효과(pent-up effect)가 나타나면서 서울 북촌과 서촌, 제주 우도, 인천 동화마을, 전주 한옥마을, 양양 양리단길 같은 우리나라 전통문화를 보존한 관광지는 오버투어리즘(over-tourism)을 걱정할 정도로 관광회복탄력성(tourism resilience)을 보이고 있다. 지금은 글로벌 관광 시대다. 코로나19 같은 다양한 변이 바이러스와 기후변화로 인한 자연재해 위기관리 경험을 거울삼아 미래에 다가올 다양한 관광위기 피해를 최소화하고 새로운 관광 트렌드 변화에 대응하면서 수준 높은 관광 서비스 공급체계를 회복할 수 있는 관광회복탄력성을 갖추는 지혜가 필요한 때다.

[문화카페] 열정과 편안함을 담는 극장

얼마 전 한 공연축제 현장에서 현재 왕성하게 활동 중인 연출가를 만나 짧게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많은 예술가가 그렇듯 그 연출가 또한 뭔가 다른, 새로운 작업 방식에 대한 갈증이 있어 보였다. 작품뿐 아니라 작품을 담는 극장에 대해서도 그 운영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데 이르렀을 때는 나도 크게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예술가와 관객이 만나고 소통하는 공간으로서의 극장, 그 과정과 방식들을 시도해보는 공연장을 생각할 때 개인적으로 요즘 너무 일반화된 극장 운영에 좀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던 참이었다. 그동안 우리 공연계와 공연장은 수적으로나 질적으로 상당히 발전해 왔고 많은 공연장 종사자들은 척박한 환경에서도 나름대로 각기 지역의 공연예술의 허브 역할을 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연장이 오티티(OTT)를 비롯한 온라인 매체들과 불가피하게 경쟁해야 하는 시대에는 무언가 과거나 현재와는 다른 태도와 방식을 취해야 하지 않을까. 자주 가는 공연장이 있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그 극장 관계자는 공연이 끝난 지 15분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관객들에게 로비 밖으로의 퇴장을 권유하고 있었다. 아마 코로나 기간 빠른 해산의 관행이 남아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 시간은 관객들이 관극 후 활동(?)을 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극장 로비는 단순히 공연장에 들어가고 나오는 통로가 아니며 공연의 감동을 다른 관객과 서로 나누고, 스스로 정리하는 공간이기도 하고, 또 그럴 시간이 충분히 필요한 곳이다. 관객에게 이런 공간과 시간을 충분히 제공하지 못하는 것은 공연 또는 극장의 예술적, 사회적 기능을 반감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나는 공연장의 로비는 시민들에게 상시로 개방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단순 개방에서 끝나지 말고 아예 더 적극적인 ‘시민공간’이 됐으면 좋겠다. 음료뿐 아니라 가벼운 알코올 종류도 마실 수 있는 공간이면 더 좋겠고 일부는 공연 중 객석에도 가지고 들어갔으면 좋겠다. 극장 로비와 객석은 작품에 따라 바깥세상과 때로는 단절을, 때로는 새로운 연결을 준비하는 공간이 돼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현재는 단절과 ‘엄숙주의’만 있는 것 같다. 안전이나 관리에 어려움이 있겠고, 음료나 알코올을 객석에 가지고 들어가면 관람 중에는 쥐 죽은 듯해야 하는 소위 ‘시체 관극’을 해야 하는 어떤 공연들에서는 난리가 나겠지만 일부 공연, 일부 회차라도 그런 편안한 환경을 만들자는 것이다. 릴렉스드 퍼포먼스(relaxed performance)라는 개념의 공연이 있다. 소리나 빛에 민감한 관객을 위해 강하거나 급격한 변화가 있는 조명과 음향을 사용하지 않고 또 객석 출입도 공연 중에 비교적 자유로운 공연이다. 장기 공연하는 작품에서 이런 타이틀로 몇 회차를 변형해 진행하기도 하는데 이는 (장애인) 접근성을 높이자는 개념을 확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공연내용뿐 아니라 공연장 운영에도 이런 느슨함과 편안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러면 초심 관객도 주눅 들지 않고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예술가들도 좀 더 열정적으로 자유롭게 그들의 파트너인 관객과 함께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문화카페] ‘피프티피프티’ 사태의 함의와 표준전속계약서

언제부턴가 케이팝은 글로벌 문화 현상으로 분류되는 흐름이 있다. 세계 최대 규모의 대중음악 시장인 미국에서도 케이팝은 변방의 음악이 아니다. 미국 내 음반·음원 판매량, 라디오방송 횟수 등을 기준으로 팝의 인기를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빌보드 메인 싱글차트 ‘빌보드 핫 100’에 가장 많은 1위 곡을 올린 아티스트가 놀랍게도 BTS(방탄소년단)였다. 케이팝이 팝의 본고장에서 통할 정도의 성과를 낼 수 있었던 데는 여러 요인이 자리하지만 보이그룹과 걸그룹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만의 독특한 아이돌 육성 시스템이 작동한 결과로 파악하는 게 옳을 것이다. 대형 연예기획사는 미래의 절대적 수익원이 될 연습생에게 막대한 자본을 쏟아붓고, 스타를 꿈꾸는 연습생들은 혹독한 교육을 견뎌낸다. 그 기간은 평균 3년3개월 정도 될 만큼 긴 편이다. 거대한 팬덤을 형성하며 대중적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케이팝 아이돌 대부분이 이러한 통과의례를 거쳤다. ‘대형 연예기획사 연습생 입문→앨범 출시 및 대중음악 시장 데뷔→기획사와의 정식 계약 체결 및 활동 본격화’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은 성공한 케이팝 아이돌에서 공통으로 발견된다. 최근 사회적 이슈가 될 만큼 화제가 되는 4인조 걸그룹 피프티피프티는 이런 공식에서 살짝 비켜 나 있다. 그것은 중소기획사 소속 신인으로 데뷔 4개월 만에 첫 싱글 앨범 타이틀 곡 ‘큐피드’가 ‘빌보드 핫 100’에 진입했고 이후 23주 연속(8월 말 현재) 차트 상위권에 올라 있는 전례 없는 기록 때문이다. 이 같은 ‘중소돌의 기적’은 여세를 몰아 폭발적인 활동을 할 것으로 기대됐으나 빌보드 진입 석 달 만인 지난 6월 소속사를 상대로 돌연 전속계약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내면서 활동을 중단했다. 소속사가 정산자료 제공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고 멤버들에 대한 건강 관리 의무를 위반했다는 게 주된 이유였으나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다. 피프티피프티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법원의 결정으로 전속계약 해지가 불발된 피프티피프티는 항고와 본안 소송을 진행한다는 입장이어서 법적 분쟁은 계속될 전망이다. 피프티피프티 사태는 케이팝 아이돌과 소속사 간의 법적 분쟁 이상의 함의를 지닌다. 그것의 핵심은 14년 전에 만들어진 표준전속계약서의 손질이다. 가수와 연기자 등 대중예술인들이 연예활동을 할 때 기획사와 체결하는 표준전속계약서는 대중예술 산업의 급격한 성장으로 변화하고 있는 대중예술인과 기획사 간 관계를 반영하는 데 한계를 드러낸다. 최장 7년의 계약 기간을 비롯해 연예 활동 범위, 수익 분배, 매니지먼트 권한 등의 항목을 담고 있는 표준전속계약서는 과거 연예인이 회사로부터 불합리한 대우를 받지 않게 보호하려는 취지로 만들어져 지금의 엔터테인먼트 환경과는 맞지 않는다. 대중예술인과 소속사 모두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피프티피프티 사태의 이면에 표준전속계약서의 허술한 내용이 빌미를 제공한 측면이 있다고 한다면 그 해결은 과감해야 하고 빠를수록 좋다.

[문화카페] 극적 서사가 있는 삶

60세에 노르웨이어를 독학해 헨리크 입센 전집을 15년 동안 완역한 공로로 한국 문화계 최초로 노르웨이 왕실로부터 훈장을 받은 75세의 한 교수 이야기. 언뜻 예술작품 속 주인공 이야기 같지만 바로 얼마 전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다. 드라마 그 자체였던 극적 서사가 있는 삶의 여정, 그 속에서 오늘 이 시간에도 다른 작업에 매진 중인 한양대 연극영화과 명예교수 김미혜의 이야기다. 필자는 스승과 제자의 연으로 지난 8월3일 수훈식이 열렸던 성북구의 노르웨이 대사관저에 다녀왔다. 입구에 들어서자 입센의 초상화 옆에 김미혜 교수가 번역한 책들이 한쪽에 자리하고 다른 한쪽에는 훈장과 휘장이 진열돼 있었다. 이날 이 자리에서 안네 카리 한센 오빈 주한 노르웨이 대사는 노르웨이 하랄 5세 국왕이 수여하는 왕실 공로 훈장과 휘장을 김 교수에게 전달했다. 수상 소감은 평소 김 교수의 모습처럼 빛나는 눈빛에 목소리에는 단단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내 번역 과정의 고된 시간이 떠올랐는지 잠깐 울컥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소감문의 마지막 문장을 얘기할 때 그는 교수이면서 연극인답게 한 제자의 축하 말을 인용했다. “김미혜 교수님, 그동안의 노고에 답한 노르웨이는 문화강국입니다.” 그 순간 필자도 모르게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한 편의 예술작품에서 클라이맥스에 이르는 문장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연극영화과 교수이자 연극학자로서 지금껏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작품의 수많은 캐릭터를 창조하거나 분석해 왔다. 그러는 동안 수년의 세월이 흘렀다. 김 교수의 집필과 번역 작업은 퇴직한 이후에도 장르를 불문하고 계속해 이어졌고 스스로 생성한 고된 시간 속에서 마침내 극적인 서사가 탄생했다. 헨리크 입센의 1879년 발표된 대표작 ‘인형의 집’의 작중인물 노라는 마지막 장면에서 그를 옥죄는 집을 박차고 나가면서 전 세계적으로 그 시대의 센세이션을 일으켰다면 이번에는 김 교수 본인이 2023년 8월 그의 인생이라는 작품의 주인공으로 등장해 화제가 된 것이다. 김 교수는 노르웨이어로 쓰여진 입센의 전작 총 23편을 1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번역했다. 일찍이 유럽에서 유학했기 때문에 독일어를 구사할 수 있지만 이번 번역을 위해 직접 노르웨이어를 독학했다. 그것도 60세의 나이에. 이것이 바로 본 글의 서두에 제시한 바 있는 그의 서사다. 15년 동안 그저 한국 연극계의 발전을 위해 작품을 번역하고 또 번역한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그 깊이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이러한 끊임없이 애끓는 노력과 마음들이 모여 하나의 값진 결과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결국 김 교수의 능력은 본인의 삶을 예술로 승화시켰다는 점에 있다. 수십년 동안 켜켜이 쌓아 올려진 그의 노력이 진정성으로 변환돼 세상에 다시 없을 극적 서사를 지닌 한편의 예술작품으로 제작되었기에.

[문화카페] ‘아르테논한다’

“여주에 연고가 있습니까?” 모든 대화의 말머리를 연고가 잡는다. 아! 대한민국은 작은 나라다. 하지만 자존감은 우주를 덮는다. 모든 대한국인이 그렇다. 그 대단한 자존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작가로 세상과 마주했다. 한순간도 한국인으로서 자존을 잃지 않았다. 그런데 이 땅으로 돌아오면 철학이 어떠하든 지연과 학연, 패거리문화에 연고가 우선한다. 블랙홀을 더듬고 AI가 춤추는 시대, 비루하고 원시적이다. 40년 전, 내가 예술길에 들 무렵부터 넘어야 할 산이 있었다. 무겁고, 깊고, 스케일 큰 사람들이다. 리처드 쇠라다. 마크 로스코다. 안젤름 키퍼다. 그들과 다른 정체를 조적하기 위해 나를 죽이고, 나를 살렸다. 그 유일한 정체를 안장 하기 위해 아르테논한다. ‘아르테논Art+Parthenon’이라 이름했다. 정치와 종교와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미학과 신학과 철학이 어울린 사유의 공간이다. 오랜 시간 꿈꿨다. 작가로 치열하게 살았다. ‘자연하다-ON NATURE’는 2010년부터 13년째 진행 중인 프로젝트다. 예술사에 없던 일로 흥미를 넘어선 대단한 프로젝트다. 자찬이지만 돌려 말할 일이 아니다. 내가 우주에 온 이유를 어림할 수 있게 했다. 내 한계를 초월해 나를 인도한다. 그렇게 세계를 순례했다. 잘생긴 미술관을 닮고 싶지만 개인의 힘으로 역부족이다. 치장하기를 포기했다. 오직 세상에서 유일한 정체를 채우고 있다. 갈 길은 남았지만 의지는 여전하다. ‘아르테논’은 의지가 만드는 공간이다. 여럿이 충고했지만 창조적 인간의 욕망을 다 채울 성공의 정체는 없다. 성공의 조건이 없기에 실패할 이유가 없다. 말똥구리는 여룡(驪龍)의 여의주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했다. 나를 미물의 위치로 내렸다. 여여하다. 한 사람의 생이 마감했다. “어르신 땅이 아름답습니다.” 2018년 9월, 가을볕이 따뜻한 날이었다. 경매에 나온 땅을 찾아 전국을 헤맬 무렵이었다. 외길이라 차를 되돌릴 수 없어 고갯마루까지 올랐다. 고개 너머에 그림 같은 복숭아밭에 노인이 있었다. “요 밑에 나온 땅이 있다.” 마치 공작이 알을 품고 있듯이 따뜻하고 평화로운 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르테논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이 글을 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내 존재 이유를 깨닫게 해준 나의 작품에 대한 예의다. 인간을 살게 한 땅에 대한 예의다. 덕평마을, 이름처럼 평화로운 복숭아밭은 그대로 무릉도원이다. 하루 종일 볕이 달게 내리는 2만여평의 땅에서 노인은 40년을 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수백 그루의 복숭아나무를 살폈다. 그렇게 땅을 살게 했다. 땅은 해마다 단맛 나는 과실을 냈다. 땅도 사람도 잘살았다. 두 달 전, 백수를 넘긴 노인은 내세(來世)에 들었다. ‘자연하다’가 혁명적으로 진화했다. 삶과 죽음이 마스크 한 겹 사이에 있던 팬데믹 세상, 들숨 날숨 사이가 화양연화임을 절감했다. 백척간두에 섰던 사유가 꽃이 됐다. 캔버스에 내재한 세계를 깨웠다. 화엄이 됐다. 인간은 찰나의 순간을 형성하는 스펙트럼도 재현하지 못한다. 2년 동안 자연에 노출됐던 캔버스에는 상상을 초월한 세계가 있다. 보이지 않지만 실재한다. 그 내밀한 세계와 대화를 시작했다. 유튜브 ‘ATTAKIM’으로 전시를 시작했다. 나의 모든 작품을 2주에 한 편씩 다큐멘터리와 함께 공개한다. 나의 예술, 나의 철학, 나의 사상, 나의 의지, 나의 혁명은 계속된다. 기대해도 좋다. 모두 질문에 대한 답이다. 내가 우주에 온 이유다. 이유 없는 존재는 없다. 모든 존재는 이유다. 마지막 칼럼이다. 글로 나를 조각했다. 감사하다.

[문화카페] K콘텐츠의 미래

K콘텐츠가 대세다. 이번 잼버리 사태도 결국 K콘텐츠가 구원투수였다. 잼버리 정신과 성격에는 맞지 않았지만 세계 청소년들을 만족시킬 최고의 대체재였다. 얼마 전 서울예술단의 창작 뮤지컬 ‘신과 함께’를 대만의 영화관에서 상영하는 공연 온라인 상영회 기획으로 대만 타이베이를 다녀왔다. 상영회와 함께 공연의 주요 장면을 배우들이 시연하는 쇼케이스와 한국의 뮤지컬 시장에 대한 특강 및 보컬 마스트 클래스도 겸하는 행사라 대만의 많은 공연 전문가와 지망생을 만날 기회였다. 그리고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그곳에서 만난 한국말을 곧잘 하는 대만인들이었다. 영화관에서도, 공연장에서도, 강연장에서도 한국말로 소통하는 관객들과 대화할 수 있었는데 그들의 공통점은 K콘텐츠를 강사 삼아 독학으로 한국어를 배웠다는 것이다. 그리고 K드라마, K뮤지컬을 애호하는 열정도 공통점이었다. 좋아하는 대상에 몰입하면서 좋아하는 대상의 언어를 익힌 것이다. 한국을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다는 대만인이 한국의 창작 뮤지컬을 여러 편 봤다는 것이다. 코로나 이후 활성화된 공연의 온라인 상영문화가 또 다른 관객층을 낳고 있었다. 한국 창작 뮤지컬이 K콘텐츠의 차세대 대안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본 경험이었다. 최근 중국과 대만 공연 관계자들에게 한국 뮤지컬에 대해 특강을 할 기회가 많아지고 있다. 그들은 한국 뮤지컬 시장을 이미 아시아의 중심 시장이며 뮤지컬 비즈니스를 전수 받아야 할 시장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특강에 임하는 그들의 열정에서 확인하게 된다. 뮤지컬 시장은 세계적으로 극장 클러스터를 기반으로 대도시에 집중해 있는 특이한 시장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전 세계적으로 미국의 브로드웨이, 영국의 웨스트엔드를 비롯해 유럽의 군소 시장, 그리고 한국의 2배 규모의 일본 시장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최근 10년간 우리나라는 K콘텐츠라고 할 수 있는 창작 뮤지컬로 아시아에서 중국, 대만, 그리고 일본으로까지 콘텐츠를 수출하는 시장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그래서 이미 한국이 일본을 앞서는 아시아의 대표적인 뮤지컬 시장으로 규정하는 전문가들도 많다. 1990년대 중반, 삼성영상사업단이 국내 최초의 뮤지컬 비즈니스 시스템을 시도하고 영미권의 뮤지컬 전문 스태프를 초빙해 국내 제작에 직접 투입하며 한국 뮤지컬 종사자들에게 현장 학습의 기회를 제공한 이래 20년 만에 최근 한국 뮤지컬 종사자들은 중국과 대만 등 아시아 국가들에 뮤지컬의 전문성을 전수하기 위한 출장이 잦다. 이제 한국적 뮤지컬 제작 노하우와 콘텐츠 수출에 바쁘게 된 것이다. K콘텐츠의 열풍이 언제까지일까? 한국 뮤지컬 시장의 미래가 그 생명력의 단서가 되리라 본다.

[문화카페] 일본에서 경험한 K-POP의 또 다른 영향력

필자는 현재 일본 나고야(名古屋)에 체류 중이다. 학교 측의 제작 지원을 받아 네 명의 학생들과 함께 30분 분량의 다큐멘터리 영상물을 만들기 위해 현지에서 촬영을 진행하고 있다. 이번 출장을 통해 카메라에 담으려는 바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청춘’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 일본 청년들의 삶과 고민, 가치관과 미래상, 그리고 한국에 대한 생각 등에 관한 것들이다. 다루려는 주제가 추상적일 뿐 아니라 내용의 범주도 방대한 편이어서, 여러 대도시를 돌아다니며 많은 젊은이들과 직접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지금은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지난 주 금요일 출국 당시만 하더라도 막막한 감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첫 번째 행선지인 도쿄(東京)에서 만난 일본인 지인의 말을 듣고 희망이 생겼다. 그는 SM엔터테인먼트 소속의 4인조 여성 아이돌 그룹인 에스파(aespa)의 콘서트가 8월 5일 토요일 오후 6시와 다음날 4시에 도쿄돔에서 있을 예정이니, 일정이 겹치는 토요일에 같이 가보자고 제안했다. 듣고 보니 한국과 한국문화에 흥미를 지닌 일본 젊은이들을 인터뷰할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우리 일행은 도쿄 시내의 대표적 명소들을 차례로 방문할 계획을 변경한 뒤 도쿄돔으로 향했다. 도착 시간은 2시 반쯤이었는데, 도쿄돔 주변은 이미 콘서트를 보려고 몰려든 이들의 수많은 행렬로 인산인해를 이룬 상황이었다. 그리고 사람들 다수가 그룹 전체나 멤버 개인의 모습이 그려진 에스파의 ‘굿즈’를 착용 또는 소지하고 있었는데, 이를 통해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에스파의 히트곡인 듯한 음악 소리도 곳곳에서 들려왔고, 흥겹게 리듬을 타는 일부 관람객의 몸짓도 시야에 들어왔다. 이제껏 미디어를 통해 간접적으로 접해온 K-POP 가수들의 외국 콘서트 행사장의 전형적인 분위기가 물씬 느껴졌다. 하지만 취재를 위해 좀 더 유심히 살펴보니, 다소 예상을 뒤엎는 광경들이 펼쳐져 있기도 했다. 우선, 콘서트장을 홀로 찾은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은 주로 무선 이어폰을 귀에 꼽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면서 4시에 개시될 관내 입장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또한, 걸그룹의 콘서트임에도 여성 팬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30대 이상의 연령층으로 보이는 관람객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이를 통해, 디지털 매체 및 통신 기기의 발달로 인해 대중문화 분야에서 역시 성별과 세대의 경계를 넘나들며 누구라도 팬덤을 형성하는 일이 가능케 됐음을 알 수 있었다. 아울러 이러한 현상은, “시공간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를 초월한 채 사람들 개개인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것” 정도로 합의를 이뤄놓은 청춘에 대한 제작진의 개념 설정에 어느 정도 부합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도쿄돔에 모인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우리 일행은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 및 한국문화를 둘러싼 관심사나 이해도를 묻는 질문에 대한 사람들의 답변이 제작진의 추측을 빗나가버렸기 때문이다. 인터뷰에 응한 일본인들 가운데 한국이나 한국문화에 정통한 경우가 거의 없었으며 오히려 상당수는 별다른 지식과 정보를 갖추고 있지도 않았던 것이다. 결국 다큐멘터리를 장식해줄 멋진(?) 인터뷰 장면은 찍지 못한 채 촬영이 마무리되고 말았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무엇이 문제였고 어디서 어긋났는지를 차분히 되새겨봤다. 그리고 K-POP을 좋아하는 외국인이라면 한국과 한국문화에도 각별한 관심과 이해를 지니고 있으리라는, 나아가 그런 상태이기를 바라는 당위적 기대가 결정적 요인이 됐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 명칭에서부터 드러나듯, K-POP은 이미 한국 대중가요를 벗어난 그 너머의 영역에 자리한다. K-POP 그룹 중 하나인 에스파의 경우만 하더라도, 멤버들 자체가 한․중․일 다국적으로 구성돼 있고 노래 가사는 상당부분 영어로 이뤄져 있다. 활동 지역 또한 매우 넓은데, 8월 13일부터는 미국, 남미, 유럽 등을 도는 ‘월드 투어’ 일정이 잡혀 있기도 하다. 끊임없이 세상은 바뀌고 환경이 달라짐에 따라 인간의 사고도 변화를 요구받는다. 원하든 그렇지 않든 인간이라면 누구나 숙명처럼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야 한다. K-POP을 비롯한 대중문화에 대한 인식의 지평이 ‘내셔널’한 것에서 ‘글로벌’한 것으로 확장될 필요가 있는 근본적 이유라 할 만하다. 이와 같은 깨달음 덕분에 이번 다큐멘터리 제작 콘셉트와 인터뷰 내용도 보다 소통 가능한 것으로 재설정하게 됐다. 이곳에서 경험한 K-POP의 또 다른 영향력 덕분일까, 오사카(大阪)와 교토(京都) 일정을 거쳐 어느덧 촬영 막바지에 다다른 현재까지 일본 스케줄은 다행히 순항 중에 있다.

[문화카페] 예술이 되는 일상, 일상이 되는 예술

우리가 흔히 예술을 해석하는 방법을 문학론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크게 네 종류로 나뉘어 설명할 수 있다. 먼저 창작자의 생애부터 시작해 창작자의 관념까지 창작자에 관한 모든 것을 작품과 연결하는 표현론적 관점, 작품 속의 세계와 실제 현실 세계의 관련성에 초점을 맞춰 작품을 해석하는 반영론적 관점, 예술작품 그 자체에서 주요한 가치를 찾는 절대주의적 관점, 그리고 작품을 향유하는 독자나 관객 혹은 관람자가 중심이 돼 그들의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품의 의미를 다시금 해석하는 효용론적 관점이다. 이러한 관점들은 본래 문학예술을 분석하는 방법론이지만 사실상 어떤 예술 장르에 대입해도 상응하는 내용이기에 필자는 다른 장르의 예술을 해석하는 방법으로 이를 활용하는 연구를 전개해 오고 있다. 그렇다면 동시대의 일상화된 예술은 이들 중 어떤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을까. 앞의 단락에서 마지막으로 설명한 관점인 효용론적 관점은 여러 측면에 있어 동시대의 일상화된 예술과 궤를 같이한다. 효용론적 관점은 예술을 향유하고 받아들이는 이들의 이전 경험과 생각 그리고 그것들과 예술작품의 연결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새로운 의미들로 확장된다. 또 동시대에 이르러 일상에서 예술을 향유하는 쉽고 다양한 방법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예술은 이러한 효용론적 관점으로 끊임없이 일상화, 대중화되고 있다. 예술이란 거창한 행위이고 예술가는 특별하고 위대하다는 아주 오랜 예술에 대한 편견들이 점차 허물어졌고 예술과 결합된 테크놀로지의 비약적 발전으로 인해 예술을 체험하는 기회도 다방면으로 열리게 됐다. 특히 디지털 산업으로 인한 여러 예술 플랫폼의 발전은 많은 방구석 아티스트를 양산했고, 예술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멀고 어렵게만 느껴지던 것에서 친밀하고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으로 크게 변화했으며 ‘예술적’이라는 수식어를 가져다 붙이는 일상의 행위들이 잦아지고 자연스러워졌다. 그러한 의미에서 ‘예술을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같은 생각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필자에게 있어 예술이란 행위는 창작자 관점에서의 위대한 창조적 행위보다도 어떤 작품을 단순히 즐기는 것, 그리고 독자 관점으로 해석해 재창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일상에서 이러한 예술을 실천하는 방법은 어렵지 않고 다양하다고 본다. 예를 들어 독서를 하는 것, 관극을 하는 것, 미술관에 가는 것, 그리고 내 방에 누워 음악을 감상하는 것들을 예술 행위의 일부라고 보는 것이다. 관객이나 독자, 혹은 감상자에게로 초점이 맞춰지는 효용론적 관점은 이들과 예술작품의 관계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그 작품에 대한 해석을 이들에게 맡긴다. 우리는 패션이라는 이름의 예술을 입고, 요리라는 이름의 예술을 먹으며, 건축이라는 이름의 예술에서 생활한다. 그 과정에서 개개인에게 내밀하게 생겨나는 어떠한 표상들이 예술작품의 의미를 지속적으로 재탄생시키는 것이다. 예술의 창작자나 예술 자체가 중심이던 과거의 예술에서 이제는 그 예술을 향유하는 사람들의 가장 사적인 일상의 경험들과 관련된 관념의 파편들이 예술화됐다. 최근 들어 이러한 효용론적 관점이 다른 관점들에 비해 조금씩 우위를 차지하게 되면서부터 동시대의 예술은 일상과 점차적으로 가까워지고 결국 닮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술로 인해 우리는 세상을 일관되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의 세상을 만날 수 있다. 예술이 일상이 된 세상에서는 거의 모든 이들이 독창성을 띤 예술가로 변모할 수 있으며 그럴수록 더 많은 일상이 예술이 될 수 있게 된다. 예술이 되는 일상, 일상이 되는 예술은 어느 쪽이 먼저이냐에 상관없이 그저 무던한 삶을 단번에 환상으로 이동시키고 우리는 그 가치 속에서 오늘도 꿈을 꾸는 것이다.

[문화카페] 순수성을 회복할 위대한 가치

소설 ‘구토’는 사르트르의 실존이다. 문의 손잡이가 세균 덩어리로 묘사된다. ‘구토’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진화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지구촌을 공황 상태로 만들었다. 눈에 보이는 인간은 바이러스처럼 인식됐다. 인간 세상은 황망했다. 멀미는 고통스럽다. 뱃멀미는 배가 움직이는 방향과 반대로 움직이려는 몸의 반작용에서 시작된다. 평형 기능의 상실 때문이다. 멀미에 장사 없다. 위대한 사상가도, 빨래판 같은 식스팩을 자랑하는 헬스보이도 익지 않는 센 파도를 만나면 오장육부를 뒤튼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토해야 한다. 품위는 뒷전이다. 바다에 숙성되지 않는 존재감은 파김치가 된다. 구토의 존재감은 비릿하고 역겹다. 하지만 구토는 롤링하고 피칭하는 파도에 대응하는 정직한 몸의 철학이다. 순수의 시대다. 그러다 차츰 몸이 배의 움직임에 적응하기 시작한다. 내 몸이 배와 파도의 철학에 귀의한다. 멀미는 어느 날 봄눈 녹듯 사라진다. 시작은 뱃멀미와 같다. 순수했던 몸은 파도에 정직하게 반응했다. 그것이 멀미다. 구토다. 그러다 파도에 길들어 간다. 배와 함께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모든 종류의 파도에 익숙해진다. 몸이 배의 기울기에 익숙해지면서 멀미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반작용에 정직하게 반응하던 내 몸은 시나브로 타성에 젖어 멀미는 전설이 된다. 이제 나의 몸, 나의 철학이 좌로, 우로, 얼마나 기울었는지 알지 못한다. 설령 회생 불가능할 정도로 편향됐음을 알더라도 애써 외면한다. 구토의 시대, 순수의 계절은 죽었다. 배의 중심을 잡아주는 장치가 자이로스코프다. 배가 기울어도 자이로는 기울지 않는다. 팽이처럼 회전을 계속하려는 관성 때문이다. 팽이는 돌지 않으면 쓰러진다. 같은 원리다. 세상이 기울어도 자이로는 돌아야 한다. 역설적으로 자이로는 멀미다. 자이로는 멀미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멀미를 버린 자이로는 자이로의 존재 이유를 버린 것과 같다. 그래도 지구는 돌듯이 돌아야 한다. 자이로의 평정심 때문이다. 사회의 자이로는 정치와 경제와 지켜야 할 룰이다. 셋 중 하나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혼돈에 빠진다. 사회의 근간은 인간이다. 인간이 부와 권력에 경도되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주는 자이로는 인문이다. 예술이다. 새의 한쪽 날개와 같다. 부와 권력에 함몰돼 평정심을 상실한 인간은 한쪽 날개가 꺾인 새처럼 추락한다. 부를 더 채우려고 평형수를 버린 배는 침몰했다. 들숨조차 고통스럽다. 토사물보다 더럽고 비역질보다 더 역겨운 것이 남았다. 인문과 예술로 위장한 패거리들이다. 물들었기 때문이다. 한 그물에 쌓여 있기 때문이다. 프레임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무리 지어 있기 때문이다. 무리를 벗어나면 내 밥줄이 위태롭기 때문이다. 끼리끼리 눈감아 주던 카르텔로부터 추방되기 때문이다. 손잡이만 봐도, 1도만 기울어도 구토하던 내 젊은 날의 초상, 나의 초심, 나의 순수, 나의 정의, 나의 자유, 나의 이상, 나의 의지, 자이로는 죽었다. 엿 바꿔 먹었다. 버림받은 자이로는 좀비가 됐다. 박물관 창고에 우글거린다. 당신의 자이로를 살려라! 엿 바꿔 먹었던 내 구토의 순수성을 회복해라! 인문과 예술은 인간을 동물과 다르게 하는 마지막 보루다. 위대한 가치다. 천년을 산 대나무로 죽비를 만들어 나를 쳐라!  빨, 주, 노, 초, 파, 남, 보, 밤을 새우며 이상을 탐구하던 내 아름다운 시절로 가라! 구토해라! 부디.

[문화카페] 경계 허물기

동시대 연극은 다양한 양상으로 확장해 가고 있지만 특히 무대와 관객과의 경계를 무너뜨려 본질에 천착하려는 시도가 많다. 연극의 본질을 깨달음으로써 삶의 상실을 회복하는 관객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공연예술의 경계 허물기는 예술로서의 진정한 소통을 위한 시작점이라 볼 수 있다. 같은 맥락으로 공연예술은 작품, 관객과 배우가 만나고 느끼는 것인데 이를 통해 관객이 삶에서 겪었던 상실이 회복되는 ‘치유’를 목적으로 한다. 이 과정 간에 예술작품, 이를 연기하는 배우, 그리고 관객 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그 틈에서 우리는 세상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다. 그렇기에 동시대의 영리한 예술가들은 이러한 경계 허물기에 의미를 두고 작품을 창조한다. 현대 공연예술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인 ‘융합’도 어떤 방향으로든 예술에서 경계 허물기의 일환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필자가 생각하는 현대 공연예술의 진정한 단계적 경계 허물기는 ‘제4의 벽’이 무너진 것으로 시작해 최근 적극적으로 시도되고 있는 ‘배리어프리’다. 제4의 벽은 무대와 객석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보이지 않는 벽을 말하는 것으로 전통연극의 무대에 주로 존재했다. 전통연극에서는 제4의 벽으로 인해 관객들은 무대와 일정 거리가 나눠진 상태로 존재했고, 공연에 어떤 개입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현대 연극의 수행적 공연에서는 견고했던 제4의 벽이 허물어지고 관객도 공연의 공동 주체자가 될 수 있게 됐다. 물론 이는 프로덕션마다의 양식에 관한 것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현대 공연예술의 경향에서 1차적 경계 허물기는 제거된 제4의 벽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다. 동시대 공연예술에서의 2차적 경계 허물기는 배리어프리다. 배리어프리는 물리적인 장벽을 제거한다는 건축학에서 1974년 파생된 용어로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에 ‘장벽이 없다’는 뜻을 지닌다. ‘장애물’을 뜻하는 배리어와 ‘자유롭게 하자’는 의미의 프리가 합쳐져 만들어졌으며 최근 들어 한국의 문화예술계에서 이를 지지하고 지향하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다. 이러한 배리어프리는 예술의 본질을 추구함에 있어 작품과 이를 연기하는 배우, 그리고 관객 사이의 경계 허물기보다 한 차원 높은 개념의 것이다. 관객 간에 어떠한 경계도 없이 다 함께 삶의 상실을 회복하는 시간을 갖는다는 측면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삶의 본질에 대해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는 ‘공감과 통합’의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장애인이 비장애인에게 배려와 도움의 대상일 때는 많지만 삶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치유 받는 공감과 소통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지는 때는 극히 드물기 때문에 이러한 배리어프리는 공연예술의 고유한 가치이기도 하다. 공연예술계는 현재 곳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장애인들을 위해 장벽을 허문 극장 만들기에 한창이다. 그런데 다른 예술 분야에 비하면 공연예술에서의 배리어프리는 실천하는 데 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우선 연극이 주로 공연되는 소극장은 이름처럼 객석의 공간도 굉장히 협소해 이동 지원이 제공된다고 하더라도 이동이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또 공연의 음성 해설이나 공연 도중 자막 사용, 그리고 수어 통역 같은 작품의 의미를 전달하는 부분은 프로덕션의 예산을 높이는 난관을 비롯해 그러한 서비스가 필요하지 않은 관객들의 몰입도를 깨는 등의 문제점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리어프리를 향해 예술계는 이동 중이다. 필자 역시 이러한 움직임에서 깊은 안도감과 더불어 설레는 기대감을 느낀다. 예술의 기본원칙인 소통이라는 개념에서 봤을 때 지금껏 함께하지 못했던 관객들과 극장이라는 공간에서 드디어 함께라고 생각하니 설레지 않을 수 없다. 또 이러한 문화 예술적 움직임과 그로 인한 변화는 결국 사회에 인식적으로나 제도적으로 선순환을 가져올 것이라는 깊은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경계를 없애기 위해 이러한 시도를 주도하는 것은 예술이기에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다. 예술에는 어떤 것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강력한 무언가가 있다. 삶 속의 아름다움을 예술로써 공유하고, 그것을 향유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각자 내면에서의 해방감을 제공하며, 볼 수 있는 것도 보지 않을 수 있고,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수 있는 힘. 그것이 바로 경계성을 잃었기에 더욱 빛나는 예술이다.

[문화카페] 한국영화의 현주소와 ‘천만 관객’의 의미

지난 1일, 영화계에 ‘희소식’이 전해졌다. 5월31일 개봉한 ‘범죄도시 3’(이상용 감독)가 32일 만에 누적 관객 수 1천만을 돌파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 영화는 작년에 개봉해 1천269만여명의 관객을 동원한 2편에 이어 연달아 ‘천만 관객’을 달성한 작품으로 등극했고, ‘범죄도시’ 시리즈는 2017년에 개봉해 688만여명을 동원한 1편까지 합쳐 총 3천만명 이상의 흥행 기록을 목전에 두게 됐다. 이로써 ‘범죄도시 3’은 강우석 감독의 ‘실미도’(2003) 이후 한국영화로는 역대 스물 한 번째로 ‘천만 영화’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으며, 전편과 더불어 김용화 감독의 ‘신과 함께’(2017, 2018) 연작을 잇는 역대 두 번째 ‘쌍 천만’ 시리즈라는 타이틀을 얻기도 했다. 100년 이상의 한국영화 역사에서 고작 20편 정도, 외화까지 합치더라도 총 30편만이 그 경계를 넘어섰다는 사실을 상기하건대, 관객 동원 수 ‘천만’이라는 숫자가 희소가치를 지닌 흥행 성공의 공인된 지표로 인식돼 왔음은 매우 당연한 일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그것이 영화 투자의 양극화를 초래하고 산업 구조를 왜곡시켜 다양한 작품의 출현을 가로막는다는 이유로 ‘천만 관객’이라는 프레임에 대한 비판적 견해가 표출되기도 했다. ‘범죄도시 3’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한 유명 평론가의 별점 논란을 통해 작품성 문제가 제기된 바 있었고, 2천352개라는 엄청난 수의 상영관이 확보됨으로써 ‘스크린 독점’의 모양새도 반복적으로 취해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죄도시 3’의 ‘천만 영화’ 클럽 가입에 대한 사회적 반응이 비판적이기보다는 대체로 우호적인 듯하다. 그 배경에는 극심한 불황에 시달리고 있는 영화 산업의 위태로운 현실이 자리한다고 볼 수 있다. 영화진흥위원회의 통계에 따르면, 1월부터 5월까지 국내 상영관의 한국영화 총 관객은 1천163만 여명, 총 수입은 1천183여억원에 불과했다. 이는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인 2019년 같은 기간의 각각 24.8%와 29.9%에 해당하는 수준이며, 사회적 거리두기가 일정 부분 유지돼 있던 지난해에 비해서도 낮은 수치였다. 특히 한국영화 점유율에 있어서는 2019년 54.3%, 2022년 44.5%였던 것이 26.5%로 급감함으로써 큰 차이를 보였다. 이에, 영화인들은 고사 위기에 처한 한국영화의 회생 방안을 강구하고 있으며 관련 기관들 또한 대책 마련을 위해 고심 중이다. 그 와중에 ‘범죄도시 3’가 관객 동원 수 ‘천만’을 찍은 것인데, 이를 계기로 침체에 빠져 있던 영화계에 분위기 쇄신에 필요한 제작 동기가 부여됐다는 점이 주목된다. 다부작 시리즈로 기획된 상태에서 관객 수 180만 여명을 손익 분기점으로 둔 135억 원가량의 제작비가 투입된, 아울러 유사한 패턴의 내러티브 위에서 ‘마동석 표’ 액션과 코믹을 흥행 코드로 내세운 상업적 장르 영화의 성공 사례가 일차적으로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범죄도시 3’를 통해, 비록 뛰어난 작품성과 막대한 자본력이 동반돼 있지 않더라도 나름의 기획 전략을 바탕으로 독특한 영화적 장치를 마련한다면 대중의 관심과 호응을 충분히 끌어낼 수 있음이 재차 확인되었다. 2023년 절반이 지난 한국영화의 현주소 하에서 ‘천만’이라는 상징적인 숫자가 지니는 기본적 의미는 어찌 보면 지극히 상식의 영역에 위치한 것일는지 모른다. 여전히 명과 암이 공존하고는 있으나, 어느 때보다도 ‘천만 관객’이 선사하는 자극과 각성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기에 그렇다.

[문화카페] 창조해라

유월, 칡넝쿨의 기세는 대단하다. 두 부류의 칡넝쿨이 있다. 땅으로 기어 세를 확장한다. 눈에 익은 풍경이다. 하늘로 오르는 것들이 있다. 고개를 들기조차 버거운 여린 새순이 수직으로 하늘로 오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서로 다른 뿌리에서 나온 것들이 약속이나 한 듯 모월 모시에 모종의 장소에서 둘, 셋, 넷이 돼 서로를 꼬아 위로 오른다. 새순이 하늘로 오르는 것은 고개를 들지 못하는 갓난아이가 대들보 위에 오르는 것과 같다. 인간은 불가능한 일을 칡넝쿨은 해낸다. 땅의 칡넝쿨과 하늘의 칡넝쿨이 세상을 보는 관점(viewpoint)은 다르다. 평생 1층 높이의 관념에 갇힌 존재는 고개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너머에 있는 세상을 볼 수 있는 위치까지 가는 물리적 행이 수행이다. 예술 행위도 거기로 가기 위한 행이다. 그것을 보기 위해서는 거기에 가야 한다. 거기가 높은 곳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미물, 미시세계도 엄존한다. 낮은 곳을 배척하지 말아야 할 이유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 지렁이를 왜곡한 패배주의적 방어기제다. 지렁이를 실존의 시작으로 마주하면 관점은 달라진다. “지렁이는 지렁이가 지나간 길을 가지 않는다.” 같은 길을 가면 먼저 지나간 지렁이의 똥을 먹기 때문이다. 다른 지렁이가 지나간 길을 가면 남의 똥을 먹는다. 자기가 지나온 길을 가면 자기 똥을 먹는다. 이나저나 똥을 먹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지난해 10월, “너 자신을 혁명하라”에서의 배설론이 자신의 정체성을 모해 은닉한 예술에 있어서의 정신적 현상이라면 지렁이의 실존 비유는 몸의 철학, 생리적 배설이기에 시작부터 오염된 모해 위작이다. 냄새는 더 고약하다. 몸과 정신이 쩐에 오염된 예술은 결국, 남의 똥(작품)을 내 똥이라 한다. 내 똥을 내 똥이 아니라 억지한다. 지경이다. 하여간 식물의 생장에 질 좋은 거름이 되는 지렁이 분변토(똥)는 지렁이가 식물이나 인간을 위해 낸 것은 아니다. 제 살기 위한 지렁이의 본능적 행위의 선순환이다. 지렁이는 내 똥, 네 똥 하지 않는다. 정직한 자연법이다. 하늘로 오르던 칡넝쿨은 기어코 대단한 높이의 나뭇가지를 붙잡았다. 아랫 동네에서는 볼 수 없는 세상을 본다. 우주에서 직송한 신선한 태양을 먹는다. 땅의 칡넝쿨이 상상하지 못하는 뷰 포인트다. 이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 비슷한 유형의 MBTI를 가진 타자와 콜라보를 했다. 발 아래 넝쿨들은 감당 못 할 운명의 예초기에 난도질 당할 줄도 모른 채 난마처럼 얽혀 있다. 지렁이가 이미 난 길을 가지 않고 새 터널을 뚫는 것은 신선한 흙을 먹기 위해서다. 칡넝쿨 새순이 나 아닌 존재와 통섭해 하늘로 오른 것은 태양 에너지를 취하기 위해서다. 지렁이, 인간, 안드로메다, 혜성, 자연과 우주의 빈틈없는 구조는 살기 위한 본능적, 물리적 존재 방식이다. 그러나 세상에 영원한 삶은 없다. 살기 위한 본능적, 창조적 욕구가 허(虛)하거나 구조가 부실할 때 존재는 죽은 별, 유성이 된다. 인간의 예술 행위도 살기 위한 본능적 존재 방식이다. 예나 지금이나 작가로 목숨을 부지하기에 녹록지 않은 세상, 처절하게 작가로 살았다면 처절하게 본능적 행위의 유산이다. 창조는 자연이다. 나를 던져야 한다. 스스로 임상실험의 모르모트가 돼야 한다. 그래야 생명이 된 지렁이의 실존처럼, 창조적 행위가 우주처럼 빛난다. 창조는 우주다. 본능적 창조를 소외할 때,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다. 이미 죽은 별이다. 순간도 수많은 존재가 생하고, 몰한다. 모든 존재는 유성이 된다. 우주하는 절대 법이 집행을 유예할 뿐이다. 죽음보다 삶의 가치가 더 크면 죽어서도 산다. 모든 나를 채운다. 창조해라.

[문화카페] 독자 참여

오늘날 예술에서의 관객 참여가 여러 방면으로 두드러지고 있다. 불과 20년 전인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작품에 대한 관객 참여는 실험적인 예술로 다뤄졌지만 동시대 예술에서의 관객 참여는 거의 필수적인 요소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대 공연예술 무대에서 관객의 참여는 많은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관객 참여가 비단 공연예술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문학예술에서도 작품에 대한 독자의 참여와 그 의미에 관한 논의가 이미 오래전부터 일었기 때문이다. 바로 1960년대 문예학을 중심으로 독일에서 전개된 수용미학(aesthetics of reception)의 발전은 공연예술에서 관객성의 능동적 변화를 배태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수용이란 창작 작품을 독자가 받아들이는 행위를 뜻하는 것으로, 수용미학에 따르면 독자가 작품의 생산자 역할을 담당하며 작가로부터 작성된 텍스트는 독자가 존재할 때에야 비로소 예술작품으로 거듭난다. 즉, 진정한 예술작품이란 생산자(작가)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독자에 의해 완성된다는 뜻이다. 특히 수용미학을 주장한 문학 학자 볼프강 이저의 이론은 텍스트가 역사의 흐름 속에서 변화하는 것이라면 그 변화와 함께 ‘텍스트가 독자에게 무엇을 해주는가’ 하는 문학적 문제 제기로부터 시작된다. 이러한 새로운 인식을 토대로 이저는 독서 과정에 있는 독자를 텍스트의 해석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작품의 공동 저자로 봤다. 즉, 텍스트가 문학 작품으로 여겨지는 데 있어 진정한 의미는 바로 독자에 의한 적극적인 참여 과정인 ‘독서 과정’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공연예술에서의 관객 참여는 말 그대로 관객이 작품에 참여하는 공연 양식을 말한다면 수용미학적 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문학예술에서의 독자 참여는 이러한 ‘독서 과정’에 의한 문학 작품의 완성을 의미한다. 또 이저는 텍스트가 그 자체로 허구성과 불확정성을 지니고 있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독서 과정’은 작품의 모든 텍스트에 존재하는 ‘틈(gap)’, ‘부정성(negation)’, 그리고 ‘불확정성(indeterminacy)’을 독자의 경험과 의미를 바탕으로 한 상상력으로 채운다는 것이다. 이러한 빈 공간을 채우는 일이 바로 독자의 개인적인 경험이나 지식에 의한 의식과 텍스트 간의 상호작용으로 이뤄지며 상호작용이 발생하는 그 순간 비로소 텍스트에 대한 독자의 미적 반응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문학 작품이 결국 독자로부터 완성된다고 여기는 수용미학은 1960년대에 논의된 이론임에도 동시대까지 영향을 미칠 만큼 해석 자체가 굉장히 현대적이다. 필자에게마저 오랜 시간 동안 생산자 혹은 작가의 예술로 여겨지던 것이 그것을 읽고 향유하는 사람, 즉 독자에게로 관점이 옮겨진 것은 문학예술에 있어 굉장한 변화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공연예술의 관객성에 이어 문학에서의 독자의 반응과 참여의 중요성은 동시대 예술이 추구하는 예술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문화카페] 창립 50년, 영화진흥위원회의 존재성

베니스영화제, 베를린영화제와 더불어 세계 3대 영화제로 일컬어지는 칸국제영화제가 76회째를 맞아 16일에 시작돼 27일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2019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최고 영예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바 있었고 작년에는 ‘헤어질 결심’의 박찬욱이 감독상을, ‘브로커’에 출연한 송강호가 남우주연상을 차지하기도 했으나, 올해의 경우 한국영화는 경쟁 부문 후보작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그 대신, 영화제 기간 중 반가운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다.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의 박기용 위원장이 18일(현지 시간) 프랑스 문예공로훈장을 받게 된 것이다. 한국영화인 가운데 같은 훈장을 수훈한 이들은 임권택(2009), 전도연(2009), 윤정희(2011), 봉준호(2016) 등 모두 감독 및 배우였다. 박기용 위원장 역시 감독 출신이긴 하지만 이번 수훈은 한국과 프랑스 사이의 영화 교류에 기여한 영진위의 수장 자격으로 이루어진 바가 크다. 수훈식이 있던 날에도 영진위는 지난해 5월부터 이어져온 한국-프랑스 간 영화 분야 협력 사업의 일환으로 프랑스 국립영화영상센터(CNC)와 양국 영화 아카데미 추진에 관한 협약을 체결했다. 이와 같이 영진위는 공공기관으로서 자신의 이름에 걸맞게 한국영화의 진흥과 상생을 위해 힘쓰고 있다. 마침 2023년은 영진위 창립 5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전신은 1973년 4월3일 출범한 영화진흥공사(이하 영진공)였다. 영진공의 설립에는 1972년 말 구축된 박정희 정권의 ‘유신 체제’가 근본적 요인이 됐다고 할 만하다. 그 여파로 이듬해 2월16일에 있었던 4차 영화법 개정을 통해 영진공의 설립과 운영에 대한 제반 사항이 법문화됐기 때문이다. 이렇듯 영진위의 모체인 영진공은 권위주의 정부 시절 “국산영화의 진흥과 영화산업의 육성·지원을 위한 사업을 하게 하기 위하여”(4차 개정 영화법 4장14조) 국가 주도 하에 세워진 문화 기구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배경 하에, 영진공에서는 영화 산업의 발전 계획을 수립하는 동시에 영화 제작비 융자, 영화인의 복리 증진 및 해외 교류, 한국영화 수출 시장의 개척과 외국영화 수입의 알선 등 다채로운 사업을 펼쳐갔다. 특히, 임권택 감독의 ‘증언’(1974)과 이만희 감독의 ‘들국화는 피었는데’(1974) 등 여러 편의 장편 극영화를 직접 제작하기도 했다. 또한, 제5공화국 시기 문화공보부가 추진한 영화진흥 5개년 계획에 따라 1984년에는 그 산하에 한국영화아카데미가 설립돼 이곳에서 우수한 영화 인력이 양성되기도 했다. 물론 세월의 흐름 속에 영진공의 입지와 성격도 많이 달라졌다. 출범 당시 서울 내자동에 위치했던 사옥은 1976년 남산의 구 KBS-TV 건물로, 1995년에는 홍릉 부지로 위치를 바꿨고, 2013년에는 다시 부산 센텀시티로 자리를 옮겼다. 한편, 1980년대 이후 자유화, 개방화 물결의 영향으로 준 정부 기관인 영진공의 조직 개편이나 기능 축소, 민영화 등에 대한 업계의 요구가 분출되기도 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타고 1995년 기존의 영화법이 영화진흥법으로 대체됐는데, 1999년에는 영화진흥법이 개정됨으로써 5월28일부로 26년간 지속되던 영진공 체제가 영진위로 전환돼 현재에 이른다. 이후로 정확히 24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한국영화는 산업의 체계화 및 자본의 거대화, 인력의 확충 및 기술의 진보 등을 통해 경제적 이윤과 예술적 성취를 실현함으로써 나름의 기반을 마련하고 국제적 명성을 획득하게 됐다. 그리고 영진위는 다각적인 면에서 자신의 역할을 담당해 왔다. 디지털 중심의 미디어 환경 변화로 영화의 존립 자체가 갈수록 위태로워지고 있는 현 시점에서는 어떠한가? 영진위 홈페이지만을 들여다보더라도 영화 산업과 예술의 발전을 위해 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음이 감지된다. 우선, 각종 영화들에 대한 기획·제작·개봉 지원 사업을 비롯해 독립영화전용관과 예술영화전용관의 운영 지원 사업, 지역 영화인과 영화문화 활성화를 위한 지원 사업 및 한국영화의 해외 진출에 필요한 육성 지원 사업 등을 두루 펼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정책 연구를 하고 산업 통계를 내며 제작 환경 및 그 현황을 검토하는 동시에 통합 전산망을 활용해 박스 오피스를 집계함으로써 관련 정보와 자료를 충분히 제공하고 있다. 이로써, 어느덧 창립 50주년을 맞이한 영진위의 존재성이 세월의 흔적과는 별개로 여전히 유지되고 있음이 확인된다. 아울러 그 존재성은, 이번 프랑스 문예공로훈장 수훈 사례에서처럼 국제영화제나 외국의 영화 기관 등을 매개로 한 한국영화의 해외 교류 과정 중에 재차 부각되곤 한다. 문제는 한국 영화인과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의 적극적 참여와 꾸준한 관심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향후 영진위에서도 다양한 방면으로의 변화를 모색하겠지만, 성공 여부는 결국 ‘영화 진흥’의 대상인 제작 주체와 일반 관객의 반응에 따라 결정될 수밖에 없기에 그렇다. 영화 만들기를 꿈꾸거나 영화 감상에 흥미를 느끼거나 혹은 한국영화의 선전을 기원하는 독자라면 한번쯤 영화진흥위원회 누리집을 방문해 볼 것을 권하고 싶다.

[문화카페] 셸 위 댄스

“78수는 꼼수였다.” 2019년 11월, 국수 이세돌이 은퇴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다. 천상의 맛을 내는 기적의 사과가 있다. 주인공은 숲에 사과나무를 심었다. 10여년간 사과는 열리지 않았다. 초읽기에 몰린 그는 죽기 위해 산에 올랐다가 튼실한 도토리를 보고 깨달았다. 관리하지 않고 야생과 싸우게 했다. 몇 년 후 나무는 사과를 냈다. 기적의 사과다. 이세돌의 은퇴 인터뷰가 있기 3년 전인 2016년 3월, 인간과 인공지능(AI) 바둑기사 알파고와의 세기의 대국이 있었다. 다섯 판을 싸워 네 판을 지고 한 판을 인간이 이겼다. 나는 AI가 네 판을 이긴 이유보다 한 판을 진 이유가 궁금했다. 인간의 모든 기보를 딥러닝한 AI를 상대했기 때문이다. 꼼수였다. 듣보잡 꼼수에 AI가 버퍼링을 했다. 블랙홀과 빅뱅의 양수겸장, ‘AI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이다. 인간의 전장보다 더 치열하게 전개된다. 미래에 대한 우려도 비등한다. AI의 대부로 알려진 제프리 힌턴은 “AI가 두렵다”고 했다. 긍정과 부정의 성찰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사고하고 행동해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AI 전국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AI를 이긴 이세돌의 꼼수와 생사를 도치시킨 기적의 사과를 가져온 이유다. 이세돌의 꼼수는 변수의 변종이다. 2023년, AI 바둑기사의 아킬레스는 선명해졌다. 번번이 인간의 꼼수에 버퍼링한다. 꼼수는 인간의 최종 병기다. 그것을 인간 세상에서 ‘신의 한 수’라 불렀다. 인류사의 중대한 변곡점에는 변수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변수는 변증해 상수가 된다. 상수의 어미인 변수는 다름이다. 다름은 예술이 되고 일상이 돼 문화가 되고 문명이 되듯이 인류사의 기념비적 변수 AI는 거대한 문명으로 간다. 천상의 맛은 야생에서 나왔다. 야생이 사과나무에 잠자고 있던 본성을 깨웠다. 그 맛이 인간의 본성에 잠자고 있던 미감을 깨웠다. 초읽기가 인간의 본성에 있던 ‘신의 한 수’를 깨웠다. AI도, 꼼수도, 천상의 맛도, 자연과 인간의 본성에 있던 것들이다. 이는 빅뱅 이전에도 무언가 있어 우주가 창조된 것과 같은 이치다. AI는 빼어난 인간의 자식이다. 버퍼링을 당했던 꼼수도 단박에 상수로 만들고, 같은 수에 두 번 당하지 않는다. 인간은 상수에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계속 꼼수를 생산한다. 2인 삼각 경기가 시작됐다. 합이 맞지 않으면 둘 다 쓰러진다. 인간도, AI도 알고 있다. 인간 본성에 잠자고 있는 포스트 AI를 깨울 때다. 그럼에도 AI의 썰(說)을 받아쓰기만 할 때 창조는 고사되고, AI의 노리개로 전락할 것이다. “문명이 모든 것을 가져갔다.” 2007년 10월, 뉴욕에서 만났던 마지막 남은 인디언 영적 리더의 통곡처럼 보호구역에서 이방인들이 제공한 먹거리에 취해 영혼을 상실한 인디언들의 아류, 아Q가 될 것이다. 1827년 무렵 셔터를 누르는 순간 사건을 재현하는 사진술이 발명됐을 때 “회화는 죽었다”고 했다. 회화는 죽지 않았다. 오히려 사진으로 회화의 정체는 더 돈독해졌다. 1970년, 컬러TV 가 시판되기 시작할 무렵 “영화는 죽었다”고 했다. 영화의 미장센은 더 스펙터클해졌다. 지금, 상상을 초월한 디지털 해상력은 수억광년 우주를 장엄하게 재현한다. 불과 1년 전, 시빗거리였던 AI 그림은 해일처럼 볼거리를 생산하며 현대미술의 메카 뉴욕에서 ‘AI 아트(ART)’로 자리했다. 다름으로 차이는 분명해졌다. 그 다름의 총합이 AI다. 역설적으로 AI의 넘사벽은 불완전한, 그러나 창조적 존재, 인간이다. ‘AI 천하지대본’의 시대, 인간의 존재 이유는 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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