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팬데믹 시대의 연극

고도로 발전하는 과학기술의 힘과 코로나19 팬데믹의 영향으로 인간 고립이 가속화 하고 있다. 인간이 인간을 대면하는 것은 귀찮고 불편한 일을 넘어서 매우 위험한 일이 돼버렸다. 팬데믹 초기 우리 사회는 비대면의 업무와 일상생활에 준비되지 않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교육, 업무, 쇼핑 등에서 비대면의 새로운 플랫폼에 금세 적응했다. 심지어 대학 입학의 실기고사마저도 비대면 영상 시험으로 대체될 정도로 모든 것이 비대면의 상황에 빠르게 적응했다. 학생들도 비대면 수업을 대면 수업보다 더 선호한다는 조사 결과도 나왔다. 직장에서도 굳이 일터에 나가서 모여 업무 하는 것보다 재택근무를 통해서도 충분한 업무 성과를 낼 수 있음을 알게 됐다. 비대면에 적응해 가면서 새로운 산업이 부흥하기도 했다. 심지어 공연도 영상 플랫폼으로 제작돼 온라인으로 배포되고 있다. 영상으로 전달되는 공연을 하나의 새로운 장르로 받아들여지는 상황에 이르게 됐다. 이런 현실에서 이제는 단순히 이야기를 듣기 위해 관객이 극장에 오지 않는다. 너무도 많은 서사가 손안의 스마트폰에서 감상할 수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고 그 많은 이야기는 인간의 여가를 채워주는 도구로 전락했다. 앞으로는 이러한 추세가 더욱 가속화 되리라 여겨진다. 굳이 불편하게 극장에 가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원하는 공연과 이야기를 맘껏 누릴 수 있는 시대에 직면한 것이다. 연극은 이러한 현실을 마주해 점차 그 존재의 필요성마저 의심받고 있다. 인간이 인간과 마주하는 일 자체가 원시적으로 보이는 현실에서 연극은 아직도 인간이 인간을 대면해야만 성립되는 원시적인 예술이다. 아무리 연극을 영상으로 잘 담아 전달하더라도 연극의 본질은 현장성이고 의미 생산과 교류를 직접 해야 이뤄져야 성립되는 예술임에는 분명하다. 연극의 본질에는 인간의 만남이 전제된다. 비대면을 넘어서 대면의 전제 속에서 성립되기 때문이다. 이런 연극의 고유한 특성은 극단적으로 고립이 가속화 돼가는 인간에게 연극은 인간 대면의 기회를 만들어 준다. 연극은 고독과 고립에 처한 인간을 구원해야 할 사명이 있다. 그것이 연극 존재 이유다. 연극만이 할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연극이 고독의 시대에서 인간을 구원할 유일한 이유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연극은 어떤 연극이어야 할 것인가? 그리고 연극이 살아남아 인간 고립의 구원자로서 역할 할 수 있도록 존재하기 위해 어떤 모습으로 변화해야 할까? 연극 존재 이유를 고민하고 연극만이 할 수 있는 것을 찾고 동시대의 문제를 들여다보고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물음을 고민해야만 할 것이다. 나아가 연극 원형을 탐구하고 또한 새로운 방식으로 연극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연극만이 가능한 모든 것을 고민하고 연극의 원형을 탐구하며 연극의 영역을 확장해야만 연극이 동시대에 연극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라 생각한다. 팬데믹의 터널을 어느새 나오면 우리는 더욱더 고립돼 있을 텐데 그 터널의 끝에서 연극이 할 수 있는 일과 사명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때를 지금부터 고민하고 준비해야 할 것이다. 구태환 수원시립공연단 예술감독

[문화카페] “어느 바보가 구글링을 한국어로 해?”

한때 모 증권사에서 편집위원으로 일했다. 사내 리서치센터에서 발간하는 보고서를 감수하고 개선하는 일이었다. 타인과의 협업인 만큼 순조로울 때도 덜컹거릴 때도 있었는데, 그중 가장 피곤한 때가 외래어 표기를 놓고 실랑이를 벌일 때였다. 내가 속한 편집팀이 국립국어원의 지침, 언론ㆍ출판계의 표준안을 권고하면 다른 직원들이 이에 반발하는 구도다. 독일의 자동차 메이커 Volkswagen을 예로 들어보자. 독일어 기준으로 표기하면 폴크스바겐, 영어 기준으로 표기하면 폭스바겐이다. 독일 회사다 보니 엣헴 하는 사람들은 폴크스바겐을 권고하나 대다수는 폭스바겐을 훨씬 친숙하게 여긴다. 실제 국내법인 역시 폭스바겐코리아로 등록돼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언론은 나름 절충안을 취하고 있다. 독일 본사를 지칭할 때는 폴크스바겐으로, 국내 법인을 지칭할 때는 폭스바겐으로 쓴다. 한 기사에 둘 다 등장하는 건 이 때문이다. 폴크스바겐그룹 산하 폭스바겐코리아의 폴크스바겐 부문 같은 식.가끔은 자기들도 헷갈리는지 폴크스바겐과 폭스바겐을 마구잡이로 오가거나 반대로 쓸 때도 있다. 피곤하고 소모적인 일이다. 우리 일상 곳곳이 이렇다. 작곡가 Mozart의 표준 표기는 모차르트지만 적지 않은 사람이 모짜르트로 표기한다. 심지어 모찰트, 모짤트로 쓰는 사람도 제법 된다. 소설가 도스토옙스키 역시 도스토예프스키, 도스또옙스끼 등이 두루 쓰인다. 사례를 들자면 끝이 없다. 문제는 이런 탓에 수많은 정보가 사라진다는 점이다. 구글 등 포털에서 검색할 때를 생각해보자. 모차르트로 검색하면 그렇게 작성된 글만 뜨고, 모짤트로 검색해도 역시 그렇게 작성된 글만 뜬다. 만약 정말 중요하고 특별한 정보를 담은 글이 모짤트로 쓰였다면? 대다수 사람은 그런 글이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다. 요긴한 글 하나가 사라지는 셈이다. 그렇다고 매번 모차르트, 모짤트 등을 일일이 입력해서 한꺼번에 검색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는 정보의 축적과 교류를 저해하는 요인이 된다. 또 한국어의 경쟁력 약화로도 이어진다. 5천200만명도 채 안 되는 우리나라에서만 쓰는 언어인데 그 안에서도 이런 식으로 정보가 줄줄 새니까 말이다. 실제로 교육 수준이 높은 엘리트층은 어지간한 검색은 영어로 한다. 애초 정보의 양과 질 모두 영어가 압도적인 와중에 기껏 존재하는 한국어 정보마저 활용하기 애매하다. 어느 바보가 구글링을 한국어로 해?라고 말하는 이도 꽤 된다. 그럴 때면 한국어로 글을 쓰는 한국인 작가인 나는 기분이 묘해진다. 반박하고 싶어도 그럴 명분이나 근거가 없다. 한글의 간결함과 우수함을 예찬하는 홍보물을 봐도 국뽕에 차오르는 대신 지금 저럴 때가 아니지 않나? 하며 갸웃거린다. 독자적인 문자를 가졌다는 건 뿌듯한 일이나 달리 보면 고립되는 측면도 다분하다. 한마디로 양날의 검. 나는 문자보다 정보가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류다. 뚜렷한 타개책이 있을까? 솔직히 모르겠다. 영어 실력을 키우는 것, 실시간 영한 번역 기술이 더 발전하는 것 정도가 현실적으로 보인다. 홍형진 작가

[문화카페] 그리스 미술과 올리브

고대 그리스는 서구 문명의 발상지이자 현대문명의 뿌리로 알려져 있다. 학문과 예술이 정립됐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범주와 추론이라는 모델을 통해 과학의 기초를 확립했다. 특히 미술은 기록이나 장식의 수공예적 영역에서 미의식을 통해 예술로 영역으로 상승했고, 기술을 넘어서는 경지에 예술이 올라섬으로써 사회에서 예술은 주요한 분야로 인정됐다. 고대 그리스 미술은 건축, 조각, 회화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뤘지만, 회화는 대부분 유실됐고 도자기에 묘사된 그림들로 겨우 그 흔적을 알아볼 수 있다. 그렇지만 당시 도자기들이 대부분 저가의 실용품이었기 때문에 도자기 그림들의 수준은 우리가 기록으로 알 수 있는 회화의 수준과 비교하면 상당히 낮은 편이다. 고대 그리스 미술의 소재는 주로 신화의 세계가 중심인데, 신화의 영웅담을 조화, 비례, 균제의 방법을 통해 묘사함으로써 이상적(理想的)인 미의 기준을 확립했다. 미술사학자 빈켈만(J. J. Winckelmann)은 이러한 그리스의 이상미를 고귀한 단순함과 고요한 위대함으로 정의했다. 그리스 미술에는 신화의 영웅담 외에도 올리브와 포도가 자주 등장한다. 국토의 80%가 산지인 척박한 그리스 땅에는 올리브와 포도만이 자랄 수 있었고, 빵과 더불어 그리스인들의 주식이 됐다. 올리브는 90%가 기름으로 쓰이고 10% 정도가 요리에 활용되며, 올리브 잎을 차로 우려내 마시기도 한다. 그리스 대다수 음식에는 많은 양의 올리브기름이 들어가는데, 그리스인들은 1년에 30㎏ 정도를 소비한다고 한다. 그리스 음식이 건강식으로 알려진 것은 바로 이 올리브유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의 운동 경기에서 우승한 사람에게 고순도의 올리브기름을 담은 암포라를 부상으로 줬는데, 올림픽 참가자들은 대부분 나체로 경기에 참여했기 때문에 올리브유를 발라 부상을 방지하기도 했다. 그리스인들의 올리브 사랑과 자부심은 신화에도 등장한다. 그리스 수도 아테네는 아티카 지역에 위치하는데,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지혜의 여신인 아테나와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이 다툼을 벌였다. 아테네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포세이돈은 물을 선물했지만 짠 바닷물은 아테네인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아테네 여신이 선물한 올리브 나무는 아테네인들에게서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래서 도시의 이름도 아테네로 명명됐다. 아테네는 지혜의 여신이자 평화의 여신이다. 그래서 올리브는 평화의 상징으로 UN기에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올리브는 반 고흐의 그림에도 등장한다. 고흐는 정신병원에 입원해서도 계속 그림을 그렸는데, 이 시기에 올리브 나무를 소재로 14점의 작품을 남겼다. 고흐 특유의 소용돌이 치는 화면에 펼쳐진 나무들은 무슨 의미일까? 인정받지 못한 불우한 화가는 평화의 상징인 올리브 나무로부터 안식을 얻었을까? 정신병원에서 나온 고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영원한 안식의 세계로 날아갔다. 김진엽 수원시립미술관장

[문화카페] 당신의 마을엔 문화예술 향유 공간이 있나요?

지역기반의 예술프로젝트를 진행하기에 앞서 선행하는 필수요소는 지역주민들과의 인터뷰나 설문이다. 사전조사를 통해 마을의 특성과 구성원들의 경험을 파악해야 수행하고자 하는 프로젝트의 성격과 맥을 짚을 수 있다. 내가 건네는 질문은 단순하다. 미술관을 방문한 적이 있는가? 혹은 공연장에서 공연을 본 적이 있는가? 따위의 질문에서 시작해서 방문의 횟수나 최근의 경험을 묻는다. 만약, 대답이 NO라면 설문은 종료된다. 성급한 일반화일 수도 있고 내가 만난 주민의 표본에 오차가 있을 수도 있지만 지난 나의 경험을 비춰보면 태어나서 문화예술관련 경험이 전무한 사례도 왕왕 접하곤 한다. 혹자들은 굳이 미술관에 안 가도 된다. 나는 먹고살기 힘들어서 예술 따위 관심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질문해보고 싶다. 예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원래부터 예술을 좋아했을까?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에서 속단하자면 경험해보지 못해서, 기회가 없어서라고 생각한다. 진행하던 예술프로젝트가 끝나면 생강씨 덕에 인생이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곤 한다. 나이와 성별, 국적을 불문하고 듣는 이야기라면, 필자의 대답에 조금이라도 수긍이 갈까. 처음에는 미술예술이 어렵고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 당연하다. 나는 내가 제일 재미있다고 느끼는 문화예술을 그들의 옆에서 소개하고 즐기는 방법을 함께 연구해나가면 개인에게 또 다른 우주가 열리는 것을 현장에서 경험했다.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문화예술 공간이 있고, 사람이 있으면 삶의 변화가 일어난다. 당신의 집 주변에는 이런 문화예술 공간이 있는가? 도서관이 있을 수도 있고 미술관이 있을 수도 있다. 또 운이 좋은 경우에는 수원의 상상캠퍼스처럼 청년과 함께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는 곳도 있다. 성남시는 구도심 정중앙에 예술가 레지던시를 운영 중이라 바로 집 앞에서 문화를 경험할 수 있다. 이런 문화예술 공간을 운영하기에는 자본투여가 필수다. 그렇다보니 보통의 문화예술 공간이 공적자금으로 운영되는 공공기관이다. 장점으로는 편리한 시설과 대규모 프로그램을 꼽을 수 있다. 하지만 여러 사람이 사용하는 공간이다 보니, 사용자 입장에서 손쉽게 이용하기에는 여러 가지 규약과 까다로운 절차가 존재하기도 한다. 우리의 집 앞에서, 내 눈앞에서 손쉽게 다가갈 수 있는 어떤 문이 필요하다. 그 문은 누가 만들 수 있을까? 다양한 예술의 종사자들, 관심 있는 사람들이 만들어 나간다. 공공기관이 해야 할 역할과 책임도 분명 존재한다. 그것뿐 아니라 공공기관이 친근하게 다가가기 어렵거나 하지 못하는 생활 밀착형 프로그램을 운영할 민간의 문화예술 공간도 분명 존재해야할 이유가 있다. 서울시는 현재 서울문화재단을 운영하며, 각 구별로 문화재단이 존재한다. 문화재단이 능사는 아니겠지만 각 구별로 자신들의 동네 특색에 맞춘 문화행사를 운영하는 것을 보면서 부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나와 내 주변을 이해하는 문화예술 프로그램 속에서 새로운 나를 찾는 경험을 경기도의 각 도시에서도 느끼고 싶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마을에 관한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이생강 협업공간 한치각 공동 대표문화예술 기획자

[문화카페] 호계서원

2019년에 유네스코가 한국의 아홉 서원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하고 보존과 활용에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있다고 선언했다. 서원 발생과 존립 근거는 존현양사(尊賢養士), 시대를 초월해 존중해야 할 이념이다. 1541년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 창설된 이래 전국에 들어선 서원들은 훼손된 유학의 가치 복원에 기여했다. 그런데 18세기 이래 많은 서원들이 통속화되면서 당쟁과 민폐의 소굴이 됐고, 1871년에 대원군 정부는 47개 서원만 남겼다. 지난해 경상북도와 안동시는 양사의 기풍까지 현대화한다는 비전으로 명맥만 잇던 호계서원(虎溪書院: 주향 퇴계 이황, 배향 서애 류성룡, 학봉 김성일)을 도산면 국학진흥원 근처 산록에 중건하고 고유했다(대산 이상정 추가 배향). 천민자본주의가 득세하고 조잡한 정치와 인격들이 세상을 조롱하듯 어지럽히는 이 시대에 유학의 기개와 절제를 어느 정도 회복해야 한다는 의사를 비원처럼 품고 있던 사람들은 크게 고무됐다. 게다가 호계서원은 독립운동 유공 서원이기도 하다. 1907년에 만원 김병식, 동산(東山) 류인식, 석주(石洲) 이상룡, 일송(一松) 김동삼 등 안동의 혁신유림이 교육구국의 일환으로 협동학교(協同學校)를 세우며 호계서원의 재산 대부분을 재원으로 활용했다. 이후 피폐해진 호계서원은 시대의 요구에 과감하게 헌신한 나머지 영광스러운 남루였고, 협동학교의 기맥은 만주의 신흥무관학교로 계승된다. 천만 뜻밖에도 며칠 전에 퇴계 이황 선생의 위패가 철수됐다고 한다. 참담한 심정으로 실색하지 않을 수 없는데, 공사 구분이 결여된 공인될 수 없는 처사다. 서원의 위패는 문중의 위패가 아니다. 적어도 시민들에게 여부를 묻는 절차를 거친 서원운영위의 의결이 있어야 한다. 또 위패 철수 이유들도 하나를 제외하고는 무미해 차라리 잘못 들은 것으로 하겠다. 그 하나는 네 분의 위패를 동쪽에서 서쪽으로 일렬 배치해서 사제(師弟)의 위상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 했다는 주장이다. 일렬 배치에도 서열이 있고(동쪽 즉, 왼쪽부터 상위) 퇴계의 독자 위상을 양보해 지난 병호시비(서애와 학봉의 동서 위차)를 중창과 더불어 희석시키겠다는 깊은 선의와 겸양의 의의가 내포돼 있다. 그런데 일부 인사들이 퇴계가 제자와 후대 제자와 같은 반열에 놓였지 않았느냐고 굳이 문제제기했다면 운영위는 그 주장을 종내에는 수용했어야 했다. 이제라도 옛 방식대로 조정해 200여년 만의 화합 기회와 미래지향 대사를 그르치지 말기를 기원한다. 퇴계 선생에게 그런 사유로 위패를 철수하겠다고 고유했다면 고개를 돌렸을 것이고, 위패 배치 위 두 방안을 묻는다면 겸퇴의 선생은 다 괜찮다며 미소 지을 것으로 추정한다. 또 수습 과정에서 시민들의 여론에 따라 관련 선현들을 추가 배향해 존현 기능을 확대할 수도 있다. 만약 달보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우선해 호계서원을 오히려 이전보다도 못한 상태로 방치하고, 또 의도와 무관하지만 결국 퇴계 선생까지 병호시비 확대에 연루시키는 사태를 지속시킨다면, 당사자들은 선현들과 선열들에게 무책임하며 긴 광음을 회귀해 도래한 유학과 서원 관련 시대의 요구를 외면한다는 비판에 직면할 것이다. 김승종 연성대 교수시인

[문화카페] 베짱이의 시대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는 유명한 우화다. 전 세계인이 모두 아는 이야기일 것이다. 우리 교육에서 이 우화를 통해 가르치고자 했던 것은 개미와 같이 열심히 삶을 살아가라는 교훈이다. 그러나 우리는 창의적 발상을 하고 자신의 삶을 유희하듯 살아가는 이들이 시대를 이끄는 모습을 마주하고 있다. 과거 어린 학생들의 꿈은 대개 안정적인 일자리가 보장되는 선생님, 회사원, 공무원, 혹은 사업가 정도였는데 이런 꿈의 유행은 이후 연예인, 스포츠 선수로 바뀌었고 지금은 유튜버로 바뀌었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개미는 열심히 일하지만 자신의 삶을 유희하지 못하고 일만 하면서 넉넉하지 못하게 살아간다. 반면 베짱이는 저작권료를 받으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유희하듯 일하며 많은 이들에게 동경과 부러움을 받으면서 살아간다. 이렇듯 우리가 직면한 세계는 과거의 절대적인 가치가 더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고, 창의적인 융합과 복합의 발상이 새로운 세계의 가치로 부상하고 있다. 기업의 경쟁력도 마찬가지다. 과거 세계를 이끌었던 굴지의 기업들은 이제 스마트한 기술력에 무장된 새로운 산업군을 이끄는 IT 기업들에게 경쟁력을 잃고 있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다. 이렇듯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세계에서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새로운 인재가 이 시대에 필요하다. 특히 새로운 세상의 가치는 무엇보다도 창의적인 발상과 문화적 가치를 기반한 융합과 복합의 가치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시대의 변화에 교육의 가치도 변화하고 있고 대학의 교육도 융합과 복합을 기반한 새로운 인재교육 패러다임을 빠르게 구축하고 있다. 새로이 도래한 베짱이의 시대에 걸맞은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부지런함의 가치만을 설파해서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융합과 복합의 시대에 실로 능력 있는 베짱이를 배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문화와 예술의 가치를 기반한 융합형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 체계일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열중하면서 자신의 삶을 진정으로 유희하고 다양한 분야에 호기심을 가지고 자신의 역량을 키워나가는 베짱이들을 양성하는 것이 곧 국가의 경쟁력이 됐다. 그렇다면 이런 베짱이를 위한 교육의 기반이 갖춰져 있는지를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전통적인 개미의 덕목만을 강요해서는 베짱이의 삶을 동경하는 많은 학생에게 우리의 공교육은 외면받을 게 분명하다. 문화와 예술을 기반한 창의적 발상을 할 수 있는 인재교육에 우리는 더욱 투자하고 예술교육 현장에서도 경직된 도제식 엘리트 교육을 벗어나야 미래가 있다고 본다. 베짱이의 시대를 인정하고 다양한 학문과 예술이 자연스레 융합과 복합이 이뤄지는 교육환경이 더욱 절실한 지금이다. 구태환 수원시립공연단 예술감독인천대 공연예술학과 교수

[문화카페] 바뀌는 시대, 새로운 고전

세대에 따라 오페라를 바라보는 온도가 제법 다르다. 40대 중반 이상은 종합예술의 정점이라며 예술적, 역사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짙지만 그 아래는 꽤 시큰둥하다. 클래식을 제법 듣는 이들조차 오페라 이야기는 그다지 하지 않는다. 사실 나도 어느 정도는 그렇다. 왜 그럴까? 공부를 적게 해서? 귀가 덜 열려서? 제대로 접한 경험이 적어서? 오랜 오페라 애호가들은 이렇게 말하고 싶을지 모르나 내 생각은 다르다. 서사, 그러니까 이야기에 마음이 가지 않는다는 게 진실에 가깝다. 오페라가 종합예술의 맹주로 행세한 건 음악, 서사, 연출 등이 당대 최고 수준으로 어우러졌기 때문인데 그 한 축인 서사가 힘을 잃었단 뜻이다. 주로 무대에 오르는 오페라의 대부분은 18~19세기 작품이다. 이들을 2021년 현재 시점에서 바라보면 썩 와닿지 않을 뿐 아니라 여성혐오, 인종차별 같은 요소도 수두룩하다. 얼마 전까지는 옛날 이야기니까 그러려니 했지만 근래 분위기는 다르다. 젊은 세대, 특히 PC(정치적 올바름) 같은 가치를 중시하는 이들에게는 비웃음의 대상일 뿐이다. 예술 취향을 넘어 삶에 대한 시선 자체가 바뀐 것이다. 이런 이들에게 오페라의 미학을 설파하기란 쉽지 않다. 오히려 고루한 아재로 낙인찍히기 십상. 이는 연출가들의 머리를 뻐적지근하게 만든다. 평생 해당 분야에 종사한 이들이 이런 변화를 모를 리 없다. 해서 이야기 전반을 재해석하고 숨은 의미를 찾아내 부각한다. 주요 배경이나 설정을 바꿔서 관점을 비틀 때도 있다. 당연히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대본과 음악이 그대로인 상태에서 작품에 새로운 관점을 부여해야 하니까. 연출가의 실력을 가늠하는 지점. 한데 이런 시점에서 난 은근 신기한 흐름을 느낀다. 오랜 고전을 두고선 이런 관점이 점차 확산하고 있는 반면 한국에서 창작되는 작품에선 미온적이라는 것이다. 내용을 보면 고전의 변주, 위인전 등이 주류고 현재에 걸맞은 새 이야기는 드물다. 근래의 시선이 어느 정도 녹아 있는 경우에도 오늘과 호흡한다,의미 있는 질문을 던진다고 느낄 정도는 아니다. 옛날이야기 수준에 머물러 있는 일부는 퇴보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이는 오페라를 비롯해 발레, 뮤지컬 등에서 공히 관찰되는 부분이다. 영화, 드라마 같은 영상 장르의 분위기와는 정반대다. 이쪽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근래의 트렌드에 충실한 경향이 있다. 무엇이 논점인지, 어떤 코드가 먹히는지를 파악한 다음 대중의 인기를 끌고 미디어와 SNS에서 주목받기 좋은 쪽으로 빚는다. 심할 땐 현재와 호흡하는 건지 현재에 영합하는 건지 헷갈릴 정도다. 유용한 전략임은 인정하나 옳은 방향인지는 모르겠다. 모든 예술은 시대와 호흡한다. 당대의 예술 취향은 물론 시대상과 생각까지 담은 작품이 살아남는다. 거기에 소신, 철학, 영향력까지 인정받아야 시간이 흘러 고전의 지위를 얻는다. 어떻게 해야 옛 고전을 넘어 새 고전을 만들어갈 수 있을까? 가볍게 사는 게 장땡인 시대에 혼자 거창한 질문을 던지는 걸까? 정부 지원을 받기 좋은 쪽, 트렌디하게 먹히는 쪽. 예술 생태계가 이렇게 양분되는 느낌이어서 끼적여봤다. 홍형진 작가

[문화카페] 한국에 필요한 리더십은 외교력

일본의 한국에 대한 태도가 돌변했다. 양국현안 문제에 마이페이스이다. 이번 정부 들어 그 기조가 뚜렷해졌다. 일본의 태도 변화는 한국의 성장에 대한 초조함일 수도, 한국의 과거사 처리에 대한 반발일 수도 있다. 시민단체는 한일관계에 상관없이 늘 행동해 왔고, 친일한파가 있다 한들 존재가 미미하여 양국 관계에 영향을 주는 일도 거의 없다. 정부와 방송은 다르다. 한국 정부와 방송은 일본의 부당함을 들어 국민에게 대일감정을 드러내라는 듯 대응하며 일본은 극복할 수 있으며, 이길 수 있으니 더이상 와신상담하거나 발톱을 숨겨야 할 필요가 없다는 대일 메시지이다. 정부는 정통성을 외면하듯 이전 정부가 응하여 맺은 협약이나 합의에 제동을 걸고 분리해야 한다는 과거 문제를 미래 협력의 선결 조건으로 내세운다. 일부 언론은 한일 간 대립이 있을 때마다 일관되게 속죄해야 할 대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일본의 주장은 조명해볼 필요가 없다는 논조를 보이며, 국민의 사고와 정부의 역할을 마비시킨다. 역사문제가 아니어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의 방송 수준이 국민으로부터 외면받은 지 오래인데 한중일 문제 역시 감정적이며 선정적이다. 사인들은 욕하고 비난할지라도 공인과도 같은 방송은 절제된 외교적 수사가 필요한데 사사로운 단체의 대변인 수준이다. 정치편향을 시대적 사명인 양하고 있다는 방송이 대외문제라고 예외는 없었다. 감정에 불을 지피면 이성적 판단은 마비되어 애써 쌓은 화해 협력 무드는 한순간에 사라진다. 용인되던 언행은 비난의 대상이 되며, 자기 성찰은 매국 행위가 된다. 그간 역사 등의 문제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한일관계는 일정한 선을 유지해 왔는데 지금은 다르다. 양국 모두 양보 없이 치달으며 새로운 응어리를 쌓고 있다. 주변국과의 긍정적인 관계 정립 없이 한국만이 성장 발전하기는 쉽지 않다. 응어리를 풀고 서로 긍정적인 관계로 바꿔나가야 한다. 한국 지도자의 리더십에 외교력이 빠져 있다. 한국 정치판의 비방전처럼, 나는 잘하려고 하는데 상대가 응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정부는 국민 뒤에 숨지 말고 당당히 한일관계의 미래를 조명하며 국익적 행동에 나서야 한다. 언론방송 또한 상호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객관적인 정보를 제공하며 상생의 미래상을 그려내야 한다. 모세종인하대 한국일본언어문화학과 교수

[문화카페] 이집트 미술과 빵

이집트 벽화는 주로 피라미드 안에서 발견되는데 영생을 강조하는 이집트의 세계관 때문에 대부분은 재생과 부활을 주제로 하고 있다. 기법적으로는 기능성에 바탕을 둔 정확성 때문에 상반신의 정면, 옆면의 얼굴, 정면의 눈 등 정면성이라는 관념적인 예술관이 형성됐다. 피라미드 벽화에는 이외에도 당시의 생활상이나 다양한 사회상의 모습도 묘사돼 있다. 다른 지역의 분묘들과 달리 특징적인 것은 빵에 대한 그림들이 많다는 것이다. 원뿔 모양의 케이크를 제조하는 모습의 레크미르의 벽화, 엠머빌 빵 제조법이 있는 람세스 3세 벽화 등 그 외에도 빵굼터, 화덕, 밀을 가는 도구들도 발굴됐다. 심지어 멘투호테프 2세의 무덤에는 4천년 된 빵 화석이 발견되기도 했다. 고대의 기록에 따르면 주변국들은 이집트인들을 빵을 먹는 사람들이라고 불렀다는데, 이 말에는 칭찬과 경멸의 이중적인 의미가 있지만, 이집트인들의 빵에 대한 자부심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최근에 이집트 정부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상된 밀 가격 때문에 빵 가격 인상을 추진하고 있다. 정부 지원으로 담배 한 개비 가격으로 빵을 스무 개나 살 수 있는 현재의 빵 가격을 유지하기는 불가능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러나 이전에도 빵 가격 인상을 시도했다가 폭동이 일어나는 등 사회적 혼란이 있었고, 국민의 불만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 등을 보면 과연 인상할 수 있을까 싶다. 이집트는 현재 최대 밀 수입국이지만 과거 이집트는 최대 밀 생산국이었다. 기원전 7천년쯤 서남아시아에서 시작된 밀의 재배가 이집트에도 전해졌고, 비옥한 나일강 삼각주에서는 밀과 보리가 풍부하게 생산됐다. 당시의 빵은 밀가루를 그대로 구운 납작한 모양의 맛없는 빵이었는데, 이집트에서 오늘날 우리가 먹는 발효빵이라는 혁신적인 발명품이 만들어졌다. 발효는 밀가루 반죽이 부패하는 과정이다. 다른 민족들이 음식의 부패를 막는 방법을 연구했다면, 이집트인들은 미라를 통해 부패를 연구한 사람들이었다. 이후 맷돌과 오븐의 발명을 통해 이집트는 빵에 대해서는 혁신의 나라가 됐다. 고대 이집트 빵은 부러움과 시기의 대상이었고 로마를 통해 전 세계로 확산하면서 고대문화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사랑의 블랙홀이란 영화가 있는데, 자기중심적이고 시니컬한 TV 기상 통보관 필 코너스(빌 머래이 분)가 취재차 시골에 갔다가 눈보라에 갇혀 하룻밤 머물게 된다. 그런데 그 하루가 끝나지 않고 계속 반복되는 것이다. 코너스는 분통을 터뜨리다가 점차 그 생활을 즐기면서 쾌락을 추구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 영원한 삶은 결국 절망이었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죽어도 눈을 뜨면 또 하루다. 결국, 나중에는 체념을 통해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진정한 사랑에 눈을 뜨게 되자 멈추진 시간이 다시 흐르게 된다. 피라미드의 주인은 권력자들이다. 그들은 죽음 후에도 영원한 권력을 누리길 원했고 그래서 영생을 꿈꿨다. 영원한 시간의 주인은 신이다. 어리석은 인간들이 영생을 꿈꾸지만, 그 삶은 지옥일 수 있다. 인간은 영생을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우리에게 이집트 벽화는 영원한 삶의 기록이 아니라 그저 아름다운 예술품으로만 다가올 뿐이다. 김진엽 수원시립미술관장

[문화카페] 지역 예술공간 운영하는 아무개의 첫 인사

2010년 즈음 경기도 문화예술의 주요한 흐름으로 대안예술공간의 등장과 약진을 뽑을 수 있다. 당시 모두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었는데, 그 지역의 대안예술공간을 방문하는 것이 하나의 이벤트로 느껴졌었다. 안산을 방문하면 커뮤니티 스페이스 리트머스를 들렀다가 원곡동에서 베트남 쌀국수를 먹고 돌아왔다. 수원에 가면 대안공간 눈을 방문하고 전통과 동시대가 만나는 접점에서 벽화골목을 감상했다. 뜨거운 매 여름, 안양 석수동의 보충대리공간 스톤앤워터에서 석수아트프로젝트(SAP)가 열렸다. 전 세계의 작가들이 오래된 석수시장의 빈 점포에 스며들어, 낯설지만 신기한 예술적 사건들을 펼쳤다. 그 후 10년 동안 가운데 가슴이 뻥 뚫린 도나스 같은 경기도를 뱅뱅 돌아, 평택시 신장동 미군기지 앞에 서 있다. 2020년 평택 출신의 빈울 작가와 함께 협업공간_한치각이라는 문화공간을 열게 됐다. 오산미군기지가 주둔해 있는 신장동은 그들을 찾아 온 전 세계 다양한 인종들이 함께 모여 살며 독특한 지역색을 만들어내는 곳이다. 다양한 문화와 사람이 만나 지금은 경기도의 이태원이라는 별명으로 이국적인 정취를 뽐내고 있지만 역사 속 신장동은 기지촌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오산미군기지 일대가 고향인 두 문인이 박석수와 이규황이다. 작품 속에서 그들은 미군에게 소박맞는 누이가 됐다가, 징병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는 군인이 됐다가, 가족을 위해 궂은일 마다 않던 젊은 아버지이자 대한민국의 청년이 하루아침에 주검으로 발견되기도 한다. 그들의 작품 안에는 자신들이 겪었던 기지촌의 삶이 오롯이 담겨있다. 그들의 이야기는 자신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며, 대한민국의 근대 모습이기도 하다. 신장동의 기억을 담고 있는 장소와 사람이 도시 개발붐과 연로하신 나이로 빠르게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시대의 증언자들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시간의 제약이 코로나19 펜데믹이라는 전염병 상황에서도 협업공간_한치각의 운영을 결정하게 된 이유였다. 그렇게 2020년 경기문화재단의 후원으로 마침내 문을 열게 됐다. 한치각은 건축의 기본재료인 각목의 순 우리말이다. 신장동의 이야기를 담는 기본을 마련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붙인 이름이다. 이 작업은 누구 한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들이 목소리를 보태야 하고 여러 분들이 기록하고 남기는 협업 과정이 필요하기에 협업공간이라는 이름을 더했다. 현재는 예술가와 지역 문화 컨텐츠 발굴, 기록 프로젝트, 전시, 문화예술 프로그램, 축제를 운영하고 있다. 혼자 걸어왔다고 생각했는데, 선배들이 갔던 그 길의 시작점 어딘가에 와 있는 것 같다. 협업공간_한치각도 10년이 지나,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돌아볼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 이생강협업공간 한치각 공동대표문화예술기획자

[문화카페] 경문왕 복두장이의 후예

대선 정국이 혼탁한 가운데 비방과 야유가 국민의 이목에 낚싯바늘처럼 드리워지는 형국이다. 배척과 힐난은 당당하고, 수용과 자성의 태도는 미미하다. 대권이 시정(市井)의 무슨 이권인가. 국민 다수가 불쾌, 아니 분노하고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런데 세상사 모두 단순치 않아 문제다. 그 부박한 현황에 개탄하다가 우리 언론의 지난 모습과 대조하면 어느덧 씁쓸하나마 누그러질지도 모르겠다. 왕조시대에 언로가 보장된 때가 있었다고 해도 언론은 왕권에 예속된 채 그 유지에 그쳤고, 일제 식민시대에는 어떤 비판도 총독부의 통치전략 검열을 거쳐 폐기를 모면한 순치의 여적이었다. 해방 이후에는 정권들이 권력을 유지하려다 독재화하면서 무엇보다 언론을 억압하고 침해했다. 심각한 갈등은 민주화 장정을 촉진했으며 최근의 재판정에까지 이어졌다. 돌이켜보면 우리 언론은 간고의 여정 끝에 겨우 1987년 이후라야 정권의 견제와 자기검열에서 벗어났다고 하겠다. 그런데 2019년에 중국의 반체제 작가 옌렌커(閻連科)가 방한해 광우병 시위를 언급하며 정부와 권력을 자유롭게 비판하는 한국의 언론을 몹시 부러워했어도 우리는 별 감응이 없었던 듯하다. 이미 언론의 각종 의혹 제기를 당연시했고, 혹 허위 조작 사례가 있어도 대수가 아니며 언론들의 상호 검증과 국민의 시시비비 판별을 믿어왔기 때문이다. 지난 8월31일에 여당은 언론중재법 개정안 본회 단독 상정을 중단하고, 야당과 숙의 기간을 갖기로 야당과 합의했다. 국가의 파탄을 제어한 다행한 조치였다. 이번 여야의 합의에 고무돼 국민 다수가 소통과 절제로 기존 정치문화를 혁신하라고 제언할 것 같다. 상대를 제압하려는 패도 추구에 국민은 분노할 뿐만 아니라 지겹기도 하다. 내년 대선이 배척과 힐난의 관행대로 치러진다면 여야와 진영의 골이 더욱 깊어지고, 국가의 회복하기 어려운 큰 상처가 될 것이다. 이번 합의처럼 상대를 인정하고 절충하는 정치문화를 조성하며 대선을 치르면 통합지향 정권을 출현시킬 가능성이 있다. 어느 쪽이 권력을 담당하더라도 상대를 아무래도 배려하는 노선에서 일탈하기가 저어될 것이다. 새 언론중재법 개정안 마련이 그 시작이 되기를 축원한다. 여야는 여야를 넘어서서 민주 공화체제에서 언론이 무엇인지 새삼 살폈으면 하며, 우리 민중이 저 먼 신라시대부터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삶과 생리의 자연스러운 기본 발현으로 갈망하고 공명해왔다는 지향도 참조하기 바란다. 신라 경문왕의 복두장이(일종의 이발사) 이야기. 경문왕의 귀가 자라 당나귀 귀가 됐다. 그만이 알았고 평생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죽기 직전의 와중에도 그는 자타 억압에 괴로워하다가 마침내 서라벌 입구 도림사의 대나무 숲에 들어가 우리 임금 귀는 당나귀 귀, 우리 임금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쳤고, 그러고 나서야 편안하게 임종을 맞을 수 있었다 .(삼국유사 권2) 김승종 연성대 교수시인

[문화카페] 꽃자리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 여러분, 어디서 많이 본 문구지요? 저는 아주 오래전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에서 처음 봤습니다. 문구의 의미가 강렬해서 당장 머릿속에 새겨 넣었지요. 화장실 깨끗이 써달라는 부탁이지만, 인생사 여러 경우에 두루 쓸 만한 경구로 여겨 그리하였습니다. 인생사에서 자리 참 중요하지요. 평생 서로 자리 차지하기 게임하다 죽는 게 아닐까 생각도 듭니다. 특히 사회생활에서 겪는 수직적 자리다툼은 스스로 벗어나지 않는 한 평생 겪는 스트레스이지요. 계층의 사다리에서 밀려나면 어쩌나 하는 불안, 그 못지않게 올라가고 싶은 욕망. 이런 것이 마구 뒤섞여 편안한 마음인 날이 없습니다. 이런 상태가 때로는 긴장도 되고 자극도 돼, 삶이 다 그러려니 하면서 긍정 모드로 되돌아오곤 합니다. 어쩌다 보니 새 직장을 구해 자주 옮겨야 하는 트랙에 몸을 맡긴 지 오래됐습니다. 임기가 차면 다른 일자리를 찾아 나서야 하는 불편과 불안이 말이 아니지만, 그럴 때마다 위안이 되는 말들이 있습니다. 앞의 경구도 그 중 하나입니다. 어쨌든 최선을 다해 아름다운 흔적을 남겨야 한다는 각오를 새롭게 해주는 말입니다. 지금 있는 지위에서 밀려나면 어찌하나 하는 불안이 밀려올 때는 성경 마태오 복음의 한 구절을 불러옵니다. 이처럼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 품삯을 두고 다투는 일꾼들을 본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입니다. 누구나 늘 첫째가 되길 강요하는 사회, 꼴찌면 낙오자 취급을 받는 능력우선주의 사회에 울리는 경종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요.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에는 사회적 이동성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1940년대 세습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던 미국 하버드대학 입학을 능력주의 방식으로 바꾸는 코넌트 총장의 시도를 소개하고 있지요. 지금은 그 능력주의가 또 다른 계층을 형성했다는 비판에 직면했지만, 높은 사회적 이동성을 확보하는 일은 공정한 사회의 기본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이동성을 강조하다 보면 지금 여기를 소홀하기 쉽습니다. 머문 자리가 아름답기 위해서는 당장 지금 여기가 중요한데 말이지요. 매사 균형을 찾기가 참 어렵습니다. 우선은 편한 마음으로 분수를 지키며 사는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럴 때 저는 지난해 작고한 공연계의 어른이 평소에 자주 들려주던 시 한 편을 떠올리고는 합니다. 그가 인생의 좌우명이라며 소개한 구상 시인의 시 우음(偶吟)2장입니다. 팬데믹으로 울적한 요즘, 서로 위로하는 기분으로 이 시를 읽으며 문화카페를 떠납니다 . 1. 나는 내가 지은 감옥 속에 갇혀 있다 너는 네가 만든 쇠사슬에 매여 있다 그는 그가 엮은 동아줄에 엮여 있다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의 굴레에서 벗어났을 때 그제사 세상이 바로 보이고 삶의 보람과 기쁨을 맛본다 2.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정재왈 고양문화재단 대표이사

[문화카페] 100명과 소통하기

숨 쉬는 것조차 버거운 8월이다. 그런 8월은 언제나 입추와 말복이 이어져 들어오고 칠석도 따라온다. 오뉴월은 약력으로 육칠월이 되니 7월의 끝자락이 아마도 더위의 절정이 되고 8월에 들어서면 염천 더위가 꼬리를 슬슬 내릴 때라고 미리 짐작해도 된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살랑대면 입 달린 사람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세월 이기는 장사 없다고 두런두런 건너온 여름을 이야기하게 된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한다. 거리두기로 한 치 앞을 가늠하기 어려운 코로나 시국에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 오직 연구대상은 소통이란 단어다. 둘러보면 정류장이나 공공장소 심지어 음식점에도 마스크가 답이다 문구는 여전하다. 일 년 반만의 마스크 발전은 실로 눈부시다. 숨쉬기 편한 마스크, 비말 차단 마스크, 보건용 마스크, 항균 마스크, 덴탈 마스크. 한복마스크, 투명마스크, 식약처인증 국가대표마스크, 급식요리 마스크 등 사람의 입을 가리는 마스크는 다양하게 반응했다. 시민을 대상으로 사라져가는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를 교육하는 행복예절관도 마스크만큼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추진해야 한다. 없던 길을 만들어서 함께 걷기를 유도하고 잘 따라오는지 못 오는지를 매일 매주 점검하며 호흡을 같이하는 긴장의 연속이다. 유치원, 초중고,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주중과 주말 또는 수능 후의 프로그램까지 헤아리다 보면 기획하고 진행하기가 만만치 않다. 다행히 주말에 아이와 부모가 함께하는 가족단위 체험 프로그램은 인기가 높아 신청이 밀리고 소외계층 지역아동센터는 비대면이지만 반응이 뜨겁다. 특히 초등학생 1학년부터 5학년까지의 여름방학 예절학당은 모집공고 나가기가 무섭게 마감된다. 이런 현상은 코로나19로 인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고 열 명 단위 체험학습은 큰 비중을 차지한다. 사실 코로나19 이전에는 사자소학 효행 편에 치중했지만, 이번엔 자신의 뜻을 세우고 학습하는 독서법을 강조했다. 김홍도 풍속화 그림 그리기, 민화 가방 만들기, 비석 치기, 손 재기차기 등이 현실적으로 그리 호감 품목은 아닌데도 아이들은 물론 따라오신 학부모님도 그 만족도를 돌아갈 때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다. 이제 성인 대상 100명 소통하기다. 코로나19로 삶의 패턴이 달라지고 그 역할이 한계에 달해 정말 어디다 코를 대고 숨을 쉬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토로한다. 그리하여 개발한 프로그램은 언제 어디서나 일주일 내내 반복해서 들을 수 있으나 혹 내키지 않아도 상관없는 다양한 내용의 열두 꼭지 영상물이다. 다산 정약용의 자녀교육, 초록으로 치유하는 반려 식물, 천의 얼굴 관상학, 걷기 좋은 여행길, 마음 치유 차 명상, 태교 신기 등은 바로 제3기 행복예절대학 비대면 가을강좌다. 나는 매일 수강생들의 수강 뒷글을 읽지만, 일면식도 없는 그들의 숨소리를 듣는다. 9월의 첫째 목요일 오전 한 꼭지가 올라가면 다음 주 목요일까지 나는 100명과 인사하고 소통한다. 코로나가 내게 준 선물이다. 고맙다. 강성금 안산시행복예절관 관장

[문화카페] 언어와 권력

여당이 언론중재법을 단독으로 개정하려 하고 있다. 허위 조작 보도와 가짜뉴스를 징벌하는 손해배상을 강화하고, 고의ㆍ중과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명책임을 언론사에 부과하며, 인터넷기사 열람차단청구권 등을 도입한 개정안을 지난달 27일에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위를 열어 일방 통과시켰다. 야당과 언론단체는 허위 조작 보도의 기준이 애매해 권력과 정부에 반드시 필요한 비판 보도까지 징벌 손해를 남발할 수 있다며 반발하고 있다. 새삼스럽지만 언론은 표현의 자유와도 밀접하게 연계되고, 인권과 자유, 학문과 사상의 기초다. 나아가 무력을 대신해 권력 형성과 변동에서 주요 수단이다. 민주 공화체제를 지탱하는 본질인 언론, 그 관련법 개정은 어느 한 쪽의 관점을 초월해야 하기에 여당은 반드시 국정의 파트너인 야당과 협의해 처리해야 한다. 또 여야는 정식으로 토론해 특히 쟁론을 야기하며 시간의 경과가 요구되고 번복이 발생할 수도 있는 허위 조작 보도와 가짜뉴스를 판정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국민에게 제시하고 여론을 수렴해야 할 것이다. 한편 기사도 언어이기에 작성과 독해에서 의견뿐 아니라 사실도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근년 이래 정치 공방에서 객관 해석이나 심지어 재판 결과가 출현해도 여전히 당리당략이 개입된 해석을 견지하는 사례들이 있다. 여당의 이번 개정안은 그 고질을 해소할 규범이기보다는 오히려 분쟁을 확대할 수 있어 계속 일방 강행한다면 오해가 더 발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개정의 진정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라도 거쳐야 할 과정을 거쳐야 한다. 말썽 많은 이른바 검찰개혁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 우리 역사에도 해석의 여지를 당쟁에서 악용한 사례가 많다. 1689년 기사환국 당시 인현왕후가 폐출 돼 민간 사가에 방치됐다. 잡인들이 담 너머서 엿보며 기웃거려도 폐비를 두호하는 어떠한 언론도 역률로 처리하겠다는 숙종의 단호한 기세에 노론 포함 누구도 나서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주리(主理) 성리학자이기도 한 갈암(葛庵) 이현일이 전일의 왕비를 별궁에 거처케 하여 보호해야 한다는 취지로 상소하면서 爲設防衛, 謹其糾禁(경비를 세워 잡인 접근 금지와 보호를 정중히 해야 합니다)이라고 했다. 1694년 갑술환국 이후 노론은 그 구절을 왕비를 모해한 불온한 의도의 말이라고 해석하며 갈암을 명의죄인으로 규정했다. 그 구절은 전후에 한 광무제와 송 인종이 폐출한 황후를 대우한 고사와 양식과 땔감도 지원해야 한다는 건의도 병렬돼 있어 문맥으로도 예우의 의도가 분명하였다. 하지만 노론은 그 해석을 당론으로 확정하고, 망국 직전인 1908년까지 갈암을 국가의 죄적(罪籍)에 유폐했다. 정적 남인의 대두를 대대로 견제하고 성리학의 다른 해석을 집요하게 부정하는 장치였다. 대선 정국 초입부터 그 비슷한 비열한 정략의 해석들이 국민의 이목을 어지럽히고 있다. 김승종 연성대 교수시인

[문화카페] 한국인 DNA에 예술성 없다?

최근 바이올리니스트 S씨의 리사이틀에 참석했다. 정성껏 준비한 멋진 프로그램의 감동적인 연주를 감상하며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유대계 바이올리니스트 핀커스 주커만(73)이다. 그는 한국인 DNA에 예술성 없다라는 충격적 발언으로 논란이 된 인물이다. 한 개인의 음악적 표현은 복합적인 문화적 습성에 따른 전통에서 시작된다. 이를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예술에 대한 예의다. 주커만의 동양계 연주자들에겐 노래 DNA가 없다 발언은 다양성의 무시에서 생겼다. 동양인들은 지나친 표현을 절제하는 문화 속에서 성장해 왔다. 그것은 다른 민족이 가질 수 없는 매력적인 소통방법 중 하나다. 피부색에 따라 음악의 우월성을 비교하는 것은 삐뚤어진 시각을 가진 자들의 의견에 불과하다. 이번 사건의 중심지인 미국에선 형식적으로는 인종, 성별, 연령을 차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은연 중 가지고 있는 인종차별적 의견을 발설할 때는 이어지는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 꽤 오래전부터 미국 음악시장 주류는 유대계 출신이 리드하고 있다. 근래 들어선 뉴욕과 미국 동부 음대 학생들은 동양계가 주류를 이룬다. 세계콩쿠르에서 아시아 출신 연주자들이 대거 상위 입상을 하고 있다. 유대계 연주자들은 이전에 비해 눈에 띄지 않는다. 커다란 변화다. 한국의 연주자 양성을 위한 조기교육의 훈련방법은 때로는 혹독하다. 반복적인 훈련으로 기술적 수준은 오르겠지만 음악의 깊은 느낌을 전달하는 부분에서 미흡할 수 있다. 이는 노래가 실리는 예술성을 기본기가 성숙된 후 자연스럽게 따라오도록 하는 훈련방법일 수도 있다. 미국에서도 이런 방식의 훈련을 시키는 유대계 선생들을 많이 봤다. 미국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지휘과 지원생들의 출신국과 예술성을 조합해 보면 각양각색이다. 일정 공식을 산출할 수 없다. 유대계 학생을 차별한 적이 결코 없다는 전제로 돌아보면 유대계 지원자가 최종 합격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동양계 학생들이 우월한 예술성을 발휘한 경우가 많다. 악기를 다루는 유대계 학생들도 기술적으로만 우수한 것에 만족해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유대인들도 우리와 같이 나라를 잃고 박해를 받으며 생존을 위해 버텨온 처절한 표현이 그들의 음악속에 있다. 그들은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애환이 실린 방법으로 다르게 노래할 뿐이다. 주커만이 공개적으로 발설한 동양계 음악인에 대한 선입견을 통렬하게 뉘우치고 오류를 전향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교육계에서의 활동과 수입은 포기하고 혹독한 연습을 통해 전성기 기량을 가진 연주자의 길로 매진하는 것이 현명하다. 무대에서 악기만으로 모든 것을 표현하는 연주자와 달리 교육자는 인성, 사랑, 끝없는 인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끝으로, S씨와 같은 한국 음악가의 연주에 참석해 편견을 깨트리는 행운을 갖기를 바란다. 함신익 지휘자ㆍ심포니 송 예술감독

[문화카페] 어느 화가의 노익장

노익장(老益壯)은 나이가 많음에도 젊은이 이상으로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는 노인을 일컫는 말이다. 중국의 후한서(後漢書), 마원전(馬援傳)에 전하는 이야기다. 나이 60이 넘은 대장군 마원이 반란군 진압을 위해 출전을 자원하자 광무제는 전쟁에 나가기엔 나이가 너무 많다며 만류한다. 이에 뜻을 굽힐 마원이 아니다. 그는 비록 예순이 넘었지만 아직도 갑옷을 입고 말을 탈 수 있으니 늙었다고 할 수 없다며 출정을 강행한다. 노장의 단단한 결기가 느껴진다. 노익장은 평소 마원의 좌우명이었다. 대장부가 뜻을 품으면 궁할수록 더욱 굳세고, 늙을수록 더욱 기백이 넘쳐야 한다(丈夫爲志, 窮當益堅, 老當益壯). 마원은 이런 평소의 다짐을 난국을 맞이했을 때 유감없이 발휘하는 용기로 실천했던 것이다. 한 때 자주 쓰이던 노익장이라는 용어가 이제는 사어(死語)가 되다시피 세상이 많이 변했다. 요새 마원처럼 나이 60을 내세우며 노익장을 과시했다간 바보 취급받기 십상이다. 기대수명이 한참 높아지다 보니 여든 살은 돼야 노익장 소리를 들을까. 불과 얼마 전까지 만해도 생애 꼭 치러야 할 통과의례였던 61세 회갑연(回甲宴)은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물론 세태가 변했다고 노익장의 가치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나이가 들수록, 아니 들어서 더욱 빛을 보는 노익장의 이야기는 시대와 세대를 떠나 여전히 깊은 울림을 준다. 최근 내게 감동을 준 노익장 한 명을 꼽는다면, 세계 첫 우주 관광의 꿈을 이룬 영국 버진그룹의 창업자 리처드 브랜슨이다. 심한 난독증 때문에 문서를 보지 못하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거대 다국적 기업을 일궜다. 그런데 올해 그의 나이 겨우 71살. 노익장이라고 부르기엔 아직도 어린 나이일지 모르겠지만, 우주를 향한 만인의 꿈을 현실화시킨 그 도전은 구국을 위해 전장에 나간 마원의 노익장 못지않다. 노익장은 전장과 우주, 정치, 남성의 세계에만 통하는 건 아니다. 창의성이 생명인 예술의 세계야말로 노익장의 보물창고다. 영국 화가 로즈 와일리 이야기도 그 목록에 들어갈 만하다. 1934년에 태어났으니 올해 나이 87세다. 76세에 영국에서 가장 뜨거운 신예작가(가디언)가 됐고, 여든이 넘은 나이에 세계 미술계의 슈퍼스타로 떠올랐으니 이보다 감동적인 노익장 스토리가 어디 있을까. 그런데 그 노익장이 더욱 와 닿는 이유는 한없이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그림의 세계 때문이다. 와일리는 전혀 때 묻지 않은 아이 같은 감성을 감미로운 색과 형태, 생물, 일상의 이야기, 위트 있는 기법으로 자유분방하게 표현하는 작가다. 그림 즉 회화의 장점을 맘껏 발산하면서 대중적인 방식으로 소통한다. 아흔을 앞둔 이 화가의 노익장이 고양 일산의 아람누리미술관에서 펼쳐지고 있다. 코로나19에 지친 마음을 위로받기에 충분한 시간이 될 터다. 정재왈 고양문화재단 대표이사

[문화카페] 올여름 당신의 휴가계획은

손서란 해가 바뀌어도 상황이 좋아지지 않는 코로나19로 인해 감내해야 하는 생활 속 거리두기와 마스크 착용으로 인한 답답함으로 사람들은 점점 지쳐가고 있다. 더욱이 요즘처럼 축축하고 더운 날이면 시원한 바다 풍경이나 깊은 숲 속 청량한 공기가 무척 그리워진다. 이명애 작가의 신간 휴가는 훌훌 털어버리고 떠나고 싶은 요즘 사람들의 욕구를 잘 드러내 옴짝달싹 못하는 요즘의 시기와 계절에 썩 잘 어울리는 그림책이다. 표지를 넘기면 만나게 되는 주인공은 두툼한 겉옷을 입은 채 깊은 한숨을 내쉰다. 내뿜는 한숨과 잔뜩 움츠린 주인공의 낯빛은 온기 하나 없는 푸른빛이다. 계절이 바뀐 줄도 모르고 입은 두터운 겉옷 차림의 주인공은 기차역 휴게실에 앉아 음료를 들이켜고서야 겉옷을 벗고 잠시의 휴식을 취한다. 잠깐의 휴식 속에서 만난 고양이를 따라 바다에 도착해 피서객으로 북적이는 백사장도 거닐고 바닷가 갯바위 위에 앉아 사람들 속에 있지만, 주인공의 낯빛은 여전히 푸른색이다. 열기로 가득한 바닷가 사람들 사이를 거닐어도 왠지 함께 동화되지 못하고 소외된다. 휴게실에서 만났던 고양이를 따라 바닷가 숲 속으로 발길을 옮기며 수풀 사이도 거닐고 시원한 물줄기가 떨어지는 폭포도 만나며 흐르는 물에 세수하자 조금씩 낯빛은 푸른빛이 없어지며 미소가 지어진다. 그제야 주인공은 물속에 뛰어들며 몸을 담그며 온전한 휴식의 시간을 갖는다. 온몸을 감싸는 시원한 물, 가만히 앉아 바라보는 광활한 하늘에 붉게 물든 노을은 주인공에게 긴장을 털어버리고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 충전의 시간이 된다. 많은 사람이 겪는 일상의 벗어날 수 없는 긴장과 초조는 사람들이 사색할 수 있는 시간뿐 아니라 정신적 여유를 앗아가 살아 있음을 잊게 한다. 한쪽은 일이 많아 힘들어 죽겠다고 하고 다른 한쪽은 일이 없어 심심해 죽겠다고 하니 일에 치어 에너지가 소모됐거나 일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현실에서 오는 무력감과 무기력은 어쩌면 같은 결인지도 모르겠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감성이 고갈될 때, 감정의 조직들이 너무 촘촘해 여유가 없거나 너무 느슨해져 좋은 기운들이 모두 빠져나갈 때 한 번쯤 낯선 곳으로 훌쩍 떠나 전혀 다른 시간을 가져보면 자신도 모르게 새로운 기운이 차오를 것이다. 작가는 이 책을 읽고, 나는 방전되었을 때 어떤 방식으로 충전되는지, 자신의 루틴을 돌아볼 수 있었으면 한다. 저마다 휴가의 시기가 다양한 것처럼 각기 다른 휴식의 방식이 존재하겠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 자신을 충분히 충전할 시간이, 파란 그림자가 노랗게 변하는 시간이 주어지면 좋겠다고 했다. 휴가는 바쁘게 살아가는 인생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한 번 돌아보며 새로운 생기를 얻는 것은 어떨까. 손서란 복합문화공간 비플랫폼 대표

[문화카페] 수원과 화령전

수원 화성행궁은 정조가 세웠으나 화령전은 순조가 세운 정조(正祖)의 영전(影殿)이다.화령전은 1800년 6월28일 정조 서거 이후, 순조 원년 4월29일 완공해 정조 어진을 봉안했다. 순조 4년에는 화령전에 응당 행해야 할 절목인 화령전응행절목(華寧殿應行節目)을 개정해 수원 유수로 하여금 사맹삭과 탄신제, 납향제를 정기제향으로, 그리고 고유제, 이안제, 환안제를 부정기 제향으로 올리도록 한 곳이다. 화령전은 1963년에 사적 115호 지정됐는데 2019년 8월29일 문화재청에서 운한각복도각이안청을 보물 2035호로 지정했다. 그 이유는 당대의 궁궐건축기술이 적용돼 그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어 역사적, 예술적, 학술적 의미에서 가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화성행궁에 가서 봉수당 지나 낙남헌을 가면 화령전이 보인다. 직접 보면 왜 보물이 됐는지 금방 확인할 수 있다. 행궁은 일제 피압박 피해로 그 모습을 모두 잃었다가 2003년 복원을해 원형에 가깝게 완성했으나 그때의 건축물은 아니다. 그러나 화령전은 220년 전 그대로의 모습이 잘 유지돼 있다. 조선시대 궁 안에는 선원전과 영희전이 있었다. 영희전은 조선시대 여섯 임금의 어진(태조, 세조, 원종, 숙종, 영조, 순조)을 봉안한 전각으로 해마다 설날, 한식, 단오, 추석, 동지, 납일에 제향을 올렸으며, 선원전은 숙종, 영조, 정조, 순조, 익종, 헌종의 어진을 봉안하고 왕이 친히 삭망에 분향배례하며 각 임금의 탄신일에는 다례(茶禮)를 지냈다. 그러나 이제 명절다례를 올리던 영희전도 없어지고 임금의 탄신일에 다례를 올리던 선원전은 궁내의 유물들을 보관하는 창고로 쓰이고 있을 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수원화성 화령전은 정조어진이 모셔져 있다. 거기에다가 화령전은 순조 재위 34년 기간에 열 번의 행차와 친제가 있었다. 수원은 정조의 도시요 효의 도시라고 수원사람들은 입을 모은다. 도시 자체가 증명하고 있는 사대문과 성곽이 있을 뿐만 아니라 거대한 능행차, 혜경궁의 진찬연, 무예24기, 과거별시 등은 실로 엄청난 역사의 도시가 되고 해마다 수원화성문화제는 정조대왕을 기리는 잔칫날이 된다. 수원은 정조임금님을 보유한 도시. 임금님이 모셔진 화령전.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져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으로 부각될 음식, 복식, 의례, 무예, 음악, 궁중무용, 과거시험 재연 이 모든 국보적 종합예술을 어느 마을 어느 도시에서 볼 수 있겠는가. 실로 무서운 도시요 미래가치를 가장 보장받을 도시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우리는 아침에 집 나설 때 부모님께 잘 다녀오겠다고 인사한다. 수원화성문화제를 시작하면서 먼저 화령전에 고하는 의식은 왜 안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고유제가 어디 예산이 있어서 하고 없어서 안 해야 될 일인가. 보물이 된 화령전에 잔치가 끝나도 차 한잔 물 한 모금 올리지 않는 것은 효의 도시라 할 수 없다. 화령전을 패스한 축제는 축제라 할 수 없다. 강성금 안산시행복예절관 관장

[문화카페] 적폐

우리 인간은 역대로 재난을 겪으며 삶의 한계를 인식하곤 하였다. 하지만 미물은 경악만 하지 않았다. 자타의 불행에 공포와 연민에 시달리며 그 개선을 거듭하였다. 비극 관람에서만 카타르시스가 있지 않았다. 재난은 종교와 과학의 형성에 일조하였고, 정치와 권력의 전개에서 주요 모티프가 되었다. 어쩔 수 없을 수도 있다고 여겼던 천재(天災)는 과학과 기술로 오늘날 기대 이상의 제어가 가능한데, 노력하고 각성하면 예방할 수 있을 수 있다고 여겼던 인재(人災)는 형태를 달리하며 별 개선 없이 반복되고 있다. 이 역시 우리가 매번 성찰해온 아이러니이며 그 환골탈태 시도에도 자신이 없는 듯하다. 최근 광주(光州)에서 야기된 건물 붕괴는 우리를 다시 비애로 사무치게 하였다. 처참하게 돌진하듯 무너져 내리는 시멘트, 순식간에 사라지는 버스, 자욱한 먼지에 묻힌 비명. 대체 언제까지 우리는 이런 무도한 참사를 겪어야 하나. 또 불법하도급 등 원인과 안전관리 강화방안이 언급되었다. 하지만 이 인재의 저변에 도사린 원흉은 그것들이 아니다. 부당이득 도점(盜占)과 강점(强占)이란 사실을 우리는 안다. 부정한 돈의 개재가 의심스런 가운데, 마땅히 들여야 하는 기초비용까지 줄이고 감행한 이욕의 연쇄가 야기한 인재. 그래서 사고 사건이라고 하기 어렵고, 굴착기 기사 구속? 그는 한 희생양에 불과하다. 2014세월호 참사가 그 선사(船社)와 우리 사회의 가슴에 천민자본주의의 주홍글씨 A를 각인하였으나 그러고도 같은 성격의 인재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2016구의역스크린도어참사, 2018태안화력발전소참사, 2020이천물류창고건설현장폭발참사, 지난 4월 평택항컨테이너참사 등등. 중복되지만 근본문제를 분명히 하자. 참사들의 발생에 여러 요인이 있지만, 무엇보다 부당이득을 챙기는 인간의 무리한 욕심이 그 복마전의 주인이다. 중대재해처벌법이 내년 1월 27일부터 시행되더라도 이런 사건은 계속 일어날 것이다. 그렇더라도 그럴수록 우리는 삶을 사랑하고 책임지는 도리로 그 예방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정부와 국회는 지금이라도 그런 비리를 우리 사회의 기본 적폐라고 문제시하고, 내년 대선에 매이지 말고 다각도로 그 청산에 나서기 바란다. 이 청산에 여야와 진보 보수가 따로 없고, 아무리 빨리 해결하여도 빠르지 않으며, 아무리 늦어도 늦지 않지 않은가. 중대재해처벌법도 살펴 보완하고, 관련된 각종 악착 기생(寄生) 비리를 모조리 근절하는 후속대책을 강구해 시행하기 바란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법제만으로는 과도하고 부당한 이욕에서 야기되는 인재를 모두 예방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리하여 우리는 고개를 흔들고 자신을 성찰하며 절제의 미덕으로 자신을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고 만다. 우리는 자신의 욕망을 경청하면서도 경계하여야 한다. 실패하기 쉽고 새삼스러우며, 위선과 자기기만이 될 수도 있는 이 토로가 지겹기도 하고 각성을 일으키기도 한다. 우리는 결국 자신에게 도전하는 용기가 계속 필요할 것이다. 알베르 카뮈는 『시시포스의 신화』에서 그 좌절과 도전의 반복을 아예 인간 삶의 실존적 부조리라고 지칭하며 용기를 북돋는다. 김승종 연성대 교수 시인

[문화카페] 매킨토시와 음악

1980년 대 유학을 떠난 후 처음 접하는 것들에 대한 문화적 충격은 컸다. 익숙하지 않은 영문타자기에서 더 익숙하지 않는 영어로 씨름하던 과제물들을 1984년에 등장한 매킨토시 컴퓨터 앞에서 쉽게 해결하는 신기함은 놀라웠다. 키보드, 마우스, 플로피디스크 등 새로운 도구들은 신기했다. 컴퓨터를 사용하려는 학생들은 대학내의 컴퓨터 랩을 긴 줄로 메웠고 학기말 기간에는 제한된 시간만 허용되는 컴퓨터를 확보하기 위해 밤 잠을 설쳤다. 워드프로세서의 기능으로 시작하여 개인용 노트북으로 발전하고 1994년에는 인터넷의 사용이 일반시장으로 들어왔다. 불편으로 인식하지 못하던 기존생활의 패턴에 더 이상 순응하지 않고 편리한 것을 찾아내는 급격한 변화의 세계에 살고 있음을 실감한다. 인터넷이라는 신기술이 인간세계를 어디로 데려갈지 상상 살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현대사회에 사는 누구도 이제는 기초적인 컴퓨터 기술을 습득하지 않으면 불편한 시대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런 기본적 요소들을 남에게 의존하여 살아가던 사람들은 그만큼 새로운 시대의 행렬에서 뒤 처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모 당의 대표가 정치지원자들에게 기본적인 시험을 보게 하겠다는 발상은 새롭다. 보좌관이 간추려온 자료들을 읽는 정도 또는 분석하여 올린 통계들을 앵무새처럼 낭독하는 형태의 올드방식으로는 시대에 둔화된 활동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이에 상관없이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신기술을 습득하는 현대생활을 기피하는 사람들이 정치를 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인터넷이라는 촘촘한 그물은 온 세계를 하나의 줄로 엮어 놓았으며 피할 수 없는 한 울타리 안에서 살게 하고 있다. 지난 40여년 간의 지구의 변화는 천지창조 이후 가장 급격한 변화라고 말 할 수 있다. 거의 비슷한 시기의 40여년을 서방세계에서 지내온 유학생활과 전문연주자 로서의 활동을 돌아보면 학생시절 처음 접한 것은 매킨토시 만이 아니었다. 현대음악이었다. 새로운 양식과 구조, 상상을 초월한 언어와 기법, 익숙하지 않은 화성과 별난 리듬 등의 창조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개성과 창조성을 중시하는 음악을 말한다. 이런 음악들과 친근하게 되기 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리지만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이미 음악산업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음악은 과학기술과 상호관계에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모차르트나 베토벤 같이 귀에 익숙한 작곡가들의 음악만을 고집하는 청중들이 있고 그들은 현대음악의 연주에 왜 우리가 이런 음악에 입장권을 내고 시간을 투자해야 하나? 라고 화를 내기도 한다. 음악감상자의 실제경험은 연주행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중의 하나임은 틀림이 없다. 사실, 현대음악은 난해하다. 그 이유는 작곡단계에서부터 감상자의 현상학적 경험에 대한 친절한 고려를 제외시킨다는 면에서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21세기 작곡가들이 18세기 작곡가들의 작품을 모방하듯 친절하게 써내려 간다면 아직 인터넷을 사용하지 않고 깊은 산속 동굴안에서 과학기술과 차단된 상태로 지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제 그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유연성의 도입으로 절충이 필요하다. 작곡가들은 청중에게 어필하기 위해 작품의 독창적 가치를 낮출 필요는 없지만 매킨토시의 발전의 흐름과 같이 처음에는 사용하기 난해하지만 익힐수록 편하고 줄 서서 찾게 되는 객관적 동질감의 요소들이 노출되어 1회용 연주가 아닌 지속적연주를 요청하는 아름다운 작품을 많이 접하고 싶다. 함신익 지휘자ㆍ심포니 송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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