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수능 후 찾아가는 성년례

수능이 끝났다. 오늘은 실로 장대한 기도의 시간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고등학교 교정을 찾았다. 두 아이를 키웠던 그 옛날 분위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수능 후 고등학교 분위기는 생동감으로 가득했다. 어디에서나 천천히 느릿느릿 걷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고 손발 입 어느 한 부분 굳어 있는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수능 후 고등학교 교정은 희망의 2020년을 보는 듯했다. 이번 수능시험을 치른 고등학교 3학년은 앞으로 한 달 남짓만 있으면 대체로 19세 전후가 된다. 성년의 나이를 만 19세로 정한 것은 법적으로 자기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는 나이로 인정한 것이며 현행법상 만 18세가 되면 부모의 동의 없이도 혼인을 할 수 있는 것도 성인으로 인정한다는 뜻이라 생각된다. 옛 예서(禮書)에는 남자가 15세에서 20세가 되면 어른의 복색을 입히고 관을 씌우는 관례와 여자에게 어른의 복색을 입히고 비녀를 꽂아주는 겨레를 올려 어른으로서의 책임을 일깨우는 책성인지례(責成人之禮)를 올렸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생활풍습이 변화하여 상투를 틀고 관을 쓰거나 쪽을 지는 일이 거의 없어져 관례나 계례의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어른이 되는 의식이라는 근본 뜻을 살려성년례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됐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는 1973년 이후에 매해 오월의 셋째 주 월요일 하루뿐인 성년의 날을 1997년부터는 성년주간(셋째 주간)으로 일주일 동안으로 설정했으며, 성년의 나이도 20세에서 2013년부터는 19세로 정해 확대 시행하도록 했다. 그렇지만, 오월의 성년주간 고등학교 3학년은 긴장의 연속이며 빈틈없는 공부시간표로 꽉 차 감히 성년례를 꺼내기가 민망할 때이다. 성년례란 유년기와 성년기를 일정한 의식을 통해 명확히 구분 지어 줌으로써 개인의 의식변화와 함께 성년에 걸 맞는 행동의 변화까지도 자연스럽게 이끌어 내어 사회 구성원으로 바른 몫을 해내도록 권고하는 절차다. 사회에 나가면 타율보다는 아무래도 자율적으로 움직이게 마련이어서 친구도 사귀고 취향에 따라 취사선택을 하며 술자리도 자연스럽게 만나게 될 것이다. 안산시에서는 전국 최초로 수능 후, 찾아가는 전통성년례를 기획했다. 이제 곧 제도권 밖으로 나가기 직전의 12개 고등학교 4천5백여 명의 학생들에게 성년례를 올려주게 된다. 성년의식 바로 전에는 호감 이미지연출, 멋진 인사 악수예절, 자기소개와 명함 주고받기, 술(차) 마시는 예절 그리고 성년례의 참 의미를 설명하는 틈새 특강을 한다. 수능 후, 찾아가는 전통성년례는 인생을 살아가는데 누구나 거치게 되는 관혼상제 중 첫 번째로 절차상 세 번에 걸쳐 의복과 관모를 바꿔 착용하는 의식이며 초가례(初加禮)는 아동복에서 심의복으로, 재가례(再加禮)는 심의복에서 관리의 출입복으로, 삼가례(三加禮)는 선비복으로 갈아입히며 각각의 축사를 내린다. 그리고 술은 향기로우나 과음하면 실수하기 쉽고 몸에 해가 되니 항상 분수를 지켜 알맞도록 마셔야 한다는 초례(醮禮)와 축사를 내린다. 성년자는 축사 후에 삼가 명심하여 성심으로 받들겠습니다 하고 다짐한다. 또 저는 이제, 성년이 됨에 있어서 오늘을 있게 하신 조상과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자손의 도리와 사회인으로서 정당한 권리와 신성한 의무에 충실하여 성년으로서의 본분을 다할 것을 엄숙히 선서합니다. 성년선서를 한다. 성년례는 우리 민족의 고유문화유산이다. 길한 달 좋은 날에 성년이 되었음을 축하하니 이제부터는 어린 마음을 버리고 성인의 덕을 지녀야 합니다. 이 초가례 축사를 들고 학교마다 찾아갈 요량이다. 강성금 안산시행복예절관장

[문화카페] 문화가 있는 송년 모임을 권하며

연말이 다가오면 어김없이 한 해를 마무리하는 송년회나 회식을 알리는 연락이 잦아지고 있다.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 감사함과 축하를 전해야 할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한해를 되돌아보고 새로운 한해를 준비하는 것이 통과의례처럼 관행이 되었다. 모처럼 만나는 사람들이다 보니 기름진 음식과 함께 술도 마시고 유쾌한 시간을 보내고자 하는 것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이런 자리에서는 분위기를 띄우고 주도하는 사람도 있으니 간혹 우리는 풍류를 아는 사람이라고 불러주며, 기꺼이 이들의 주도하에 흥겨운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풍류(風流)와 유흥(遊興)은 다른 것이니 유흥이 오락과 놀이로서 단순하게 즐겁게 노는 것이라면, 풍류는 속된 일을 떠나 풍치(風致) 또는 운치(韻致)가 있고 멋스럽게 노는 일을 의미한다. 또한, 풍류란 자연을 가까이하는 것, 멋이 있는 것, 음악을 아는 것, 예술에 대한 조예, 여유, 자유분방함, 즐거운 것 등 많은 뜻을 내포하는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시서화(詩書畵)와 가무악(歌舞樂)에 대한 예술적 조예를 바탕으로 인문학적인 이해와 성찰까지 아우르는 것이 진정한 풍류이며 이렇게 풍류를 즐기는 사람을 풍류객이라 부른다. 즉 풍류는 유흥과는 다른 수준 높은 예술과 정신적 가치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니 옛 선비들의 풍류는 그 자체가 수양의 방편이기도 했다. 주 52시간 근무의 확대와 워라벨과 소확행을 중시하는 트랜드에 맞추어 최근의 송년 모임이나 직장인의 회식문화도 바뀌고 있다. 식사와 2차로 이어지는 획일적이며 구태의연한 회식보다는 편안하게 즐기는 방향으로 회식문화가 바뀌고 있다. 이제 식사와 2차 노래방을 고집한다면 당신은 꼰대라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최근 2030의 젊은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직장인 71%는 회식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이 회식에서 스트레스를 느끼는 가장 큰 이유는 귀가 시간이 늦어져서였다. 자리가 불편해서, 재미가 없어서, 자율적인 참여 분위기가 아니므로 등이 뒤를 이었다. 또한, 직장인 87%는 먹고 마시는 회식보다는 편안하고 재미있는 회식을 선호했다. 젊은 직장인이 불편해하지 않고 재미를 느끼는 회식은 문화 회식(23%)과 힐링 회식(21%)이 나란히 1,2위를 차지했다. 문화 회식의 경우 뮤지컬연극영화전시회 관람 등을 즐기고, 힐링 회식은 심리치료테라피마사지 등을 받으면서 평소와 달리 나를 돌보고 여유를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색 회식으로 주목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밖에도 실내외 스포츠를 즐기는 레포츠 회식(16%), 보드게임, PC방, 오락실 등 게임 회식(12%), 공방, 퍼스널 컬러 테스트 등 체험 회식(10%) 등에 관심을 보였다. 이제 획일적이며 즐겁지 않고, 생산성을 저해하는 회식보다 조직원들이 선호하고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방향으로 송년회식의 방향도 바뀌어야겠다. 조직원의 여론을 수렴하고 스스로 주체적으로 주도하며 준비하고 진행하는 방향으로 회식문화를 바꾼다면 만족도 또한 높아질 것이다. 문화예술계 종사자로서 예술적인 만족감과 카타르시스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문화회식이 더욱 확산되기를 기대한다. 예술과 함께하는 회식을 통해 예술가를 응원하고 예술적 감동을 느낄 수 있다면, 단순한 유흥(遊興)이 아닌 유흥(幽興, 그윽한 흥취)이 가득한 회식이라면 그 또한 도심 속의 풍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덕택 남산골 한옥마을 예술감독

[문화카페] 의리의 사나이 베토벤과 루돌프

작곡 또는 연주활동만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어려운 일이다. 극소수의 고명한 아티스트를 제외하고 경제적으로 독립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 현실적인 상황이다. 세계의 많은 음악가는 빈궁함을 피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베토벤 당시의 18세기나 오늘의 21세기, 그 사정은 별다름이 없다.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등 당시의 내로라 하는 작곡가들에게 지속적인 후원자들이 없었다면 오늘날 그들의 작품이 아름답게 연주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하이든은 에스터하치 후작과 평생 파트너로 작품활동을 하고 살았다. 그런 이유로 방대한 문헌이 생성되었다. 하이든의 음악은 전체적으로 행복하며 그 음악 속에 여유 있는 유머와 독자적인 재치가 넘쳐 흐른다. 특히 말년의 음악들은 오히려 밝고 명랑하다. 어떤 수사나 찬사도 어울리지 않는 천재 모차르트는 지기스문트 대주교와의 갈등과 지원의 파트너십을 유지하다 결국은 독립하여 모차르트가 원하는 음악 세계를 꾸며 나갔지만, 말년에는 재정적인 어려움을 피할 수 없었다. 예술가로서의 독립은 어려운 고행임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베토벤에게는 특별한 스폰서가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왕자인 루돌프 대공(후에 모라비아의 대주교가 됨)은 베토벤의 천부적 재질을 인정하고 15년간 피아노와 작곡을 사사하는 제자가 된다. 경제적지원은 물론 베토벤의 남다른 성격으로 인한 정치적 문제들을 감싸주고 경제적 후원을 지속적으로 하였다. 독야청청, 안하무인, 그리고 자신 외에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았던 베토벤은 유아영세로 시작하여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에도 신부에게 병자 성사를 받았다. 그의 장례도 가톨릭 식으로 하였다. 그러나 베토벤은 종교의 권위에 무조건 복종하는 자세를 거부하였다. 심지어 예수는 그저 십자가에 매달린 유대인일 뿐이라는 신성모독발언으로 비밀경찰의 사찰대상이 되는 등 사회적인 문제도 끊이지 않았다. 베토벤과 루돌프 대공과의 인간적인 관계는 긴밀하고 의리 속에서 이루어져 나갔다. 베토벤은 그를 위해 많은 곡을 헌정하였다. 베토벤의 마지막 20년은 처절한 신체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루돌프 대공의 관대함과 전폭적인 신뢰 속에서 마감할 수 있었다. 베토벤의 걸작인 피아노 협주곡 4번과 5번은 루돌프 대공을 위해 작곡되었다. 3개의 피아노 소나타, 현악 4중주, 특히 고별 피아노 소나타는 베토벤의 루돌프 대공을 향한 지극한 개인적 애정을 표현하는 대표작인 사례이다. 두 사람의 우정과 의리는 1819년 루돌프 대공이 대주교로 즉위할 때 그 절정에 이른다. 베토벤은 그의 취임식에 쓰일 장엄미사를 작곡한다. 인류역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만든 합창교향곡을 작곡하는 같은 시간에 공을 들인 이 작품은 그 깊이와 난이도가 평범함을 뛰어넘어 새로운 영역으로 확대한 작품이다. 베토벤 탄신 250주년을 맞아 그가 남긴 작품들을 새로운 접근으로 공부하며 베토벤의 천재성을 마음껏 키워준 후원자들, 특히 루돌프 대공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크다. 21세기를 보내는 각박한 현대사회에서 베토벤의 곡을 마음껏 연주하게 길을 열어주는 오늘의 루돌프 대공들 에게 사랑과 신뢰와 존경을 보낸다. 음악의 역사를 돌아보며 필자는 그나마 행복한 예술가임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민간오케스트라를 꾸려 나가면서 다양한 후원자들을 선한 파트너로 삼은 축복은 연주활동을 폭넓게 할 수 있는 극소수 예술가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으로 이어진다. 자칫 당연하게 여길 수 있는 연주활동의 밑바닥에는 보이지 않는 후원이 양분의 뿌리가 됨을 절실하게 인지한다. 그들이 없었다면 넘치는 열정의 음악을 표현할 놀이터가 없었을 것이니. 함신익 심포니 송 예술감독

[문화카페] 관장님, 미술관 운영 참 힘드시죠

국내 사립미술관의 사업평가를 맡아 가끔 지역 소재 미술관들을 방문할 기회가 있다. 지난 주말 화성시 봉담에 있는 한 미술관을 방문하였다. 작가이신 퇴임교수의 작업실 부지 일부를 미술관으로 조성한 곳으로 건축도 짜임새가 있었지만, 수준 높은 전시 또한 감동적이었다. 기획전으로 세계적 거장 루이스 부르주아의 말년 초상 사진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임종 2년 전부터 네덜란드 사진작가와 협업으로 그녀의 소소한 일상을 담은 사진 작품들인데 그녀가 예술가로 겪었을 숱한 풍상의 무게가 큰 울림을 주었다. 개관 4년밖에 되지 않고 도심도 아닌 곳에 있는 미술관에서 이런 전시를 관람하게 될 줄이야. 수원에서도 차로 20~30분 거리에 있어 접근성이 다소 떨어지지만, 주변에 수원대학교도 있고 융건릉도 있어 관객들이 아주 없는 외진 곳은 아니었다. 공립미술관이 없는 화성시의 유일한 미술관으로서 힘겹게 위상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역 뮤지엄들 중에는 이곳보다도 더 열악한 오지의 공간들이 많다. 오지이다 보니 학예사 구하기도 쉽지 않은 실정이지만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묵묵히 숙명처럼 최선을 다하는 관장님들을 만나 뵐 땐 참 감사와 존경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공립미술관에서 미처 다 감당치 못하는 영역을 자발적으로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독특한 전시콘텐츠를 생산하고 운영을 지속한다는 일은 미술관장의 예술적 안목과 경영철학, 그리고 사명감이 없인 불가능한 것이다. 지역의 사립 뮤지엄들의 여건과 상황들은 대동소이하다. 처음엔 관장의 열정과 사명감에서 출발하였지만, 그 운영은 그리 녹록지 않다. 뮤지엄은 건물과 일정의 소장품만 가지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굴러가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기획전이나 특화된 전시프로그램을 조성하는 운영비, 전시와 교육을 전담하는 전문 인력인 큐레이터들의 인건비 등 관리운영비가 만만치 않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정부는 사업비, 인건비 일부를 지원하게 된다. 부유한 개인들이 자신의 의지로 뮤지엄을 건립, 운영하는데 정부가 왜 지원해야 하는가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립 뮤지엄은 정부나 지자체의 역량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공공적 기능을 대신 수행하고 있는 비영리적 공공재이다. 이 때문에 국고나 공적 자금의 투입이 필요한 실정이다. 지역의 뮤지엄들은 문화유산의 생산자라는 본래 역할 이외에 지역 주민들의 귀중한 문화체험 공간이며 평생학습센터이다. 또한, 지역 커뮤니티 센터이며 높은 수준의 복지인 문화 복지의 허브이기도 하다. 경기도는 전국 1천124개 뮤지엄 중 가장 많은 194개 관을 가지고 있다. 수도권이 가지는 지정학적 이점 때문에 많은 문화적 인프라를 확보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수도권이라고 타지역보다 운영이 나은 것은 결코 아니다. 정부 지원금 중 비중이 가장 높은 큐레이터나 에튜케이터 등 전문 인력 인건비는 그 일부를 지원하는 데, 제대로 된 전문 인력 육성을 목표하기보다는 청년 일자리 창출에 머물고 있어 최저임금 수준을 면치 못하는 실정이다. 결국, 그들 역시 열정페이를 요구받는 셈이다. 그나마 그들의 계약은 1년 미만이다. 계약기간이 끝나면 철새처럼 다른 관의 일터를 구해 옮겨가야 한다. 근본적으로 뮤지엄 핵심인력들의 고용안정화가 담보되지 않는 상황인데 천 개가 넘는 뮤지엄 숫자만 자랑한들 무슨 경쟁력을 가질 것인가? 정부는 한 해가 멀다 하고 뮤지엄 발전방안과 정책을 내놓지만 시원한 답은 없다. 지방정부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 지역의 뮤지엄을 활성화해야 한다. 돌아오는 길에 본 미술관 뜰의 감나무엔 언제나처럼 감이 빨갛게 익어가고 있었다. 김찬동 수원시립미술관장

[문화카페] 여행과 동네책방

동네책방에서 책을 살 때엔 늘 책 그 이상의 무언가가 덤으로 따라온다. 그 무언가는 책을 사는 순간보다도 책이 집의 서가에 꽂혀 있을 때 더 진가를 발한다. 온라인서점에서 산 책들을 볼 때는 없었던, 책을 둘러싼 공간의 이야기를 하나 더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책을 살 때 나눴던 책방주인과의 대화, 책방의 풍경, 소리 등이 그 책에는 담겨 있다. 책방에 대한 선명한 기억이 함께 이어지며 그 책은 온라인서점에서 배달된 책들 사이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더 특별한 책이 되어간다. 동네책방에 대한 이러한 경험이 마치 새로운 문화체험처럼 이야기되는 이유는 지역사회에서 작은 책방을 만날 수 있게 된 것 자체가 변화이기 때문이다. 활자문화가 발달한 우리나라에서 책을 팔고 사는 책방이야 과거부터 있었겠지만, 근대적인 모습을 갖춘 최초의 서점은 1880년대 말에 세워진 회동서관이라고 할 수 있다. 출판사와 서점, 문구점을 겸했던 회동서관에서는 한용운의 님의 침묵, 이광수의 무정을 출간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불안정한 상황에 처했던 출판문화는 70년대에 들어 경제개발과 함께 조금씩 꽃을 피웠고, 80년대에 이르러 대부분 도시에는 대형서점이 중심가의 랜드마크가 되었다. 더불어 성장했던 중소서점들은 1997년에 무차별적 할인을 단행하는 온라인서점의 등장으로 점점 사라진다. 그러나 2014년 도서정가제가 실시되면서 동네책방들이 하나둘씩 다시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이때 등장한 동네책방의 모습은 참고서를 주로 팔던 과거의 작은 서점과는 다르게 개성이 넘치고 색깔이 다양해졌다. 관광산업이 발달한 제주도에서 눈길을 끄는 투어 중 하나가 제주책방여행이다. 2박3일의 일정으로 제주에 있는 작은 책방들을 여행하며 제주를 색다르게 만나는 프로그램을 담고 있다. 수려한 자연풍광과 테마 박물관들이 즐비한 제주에서 관광객들이 작은 책방을 찾으며 제주의 색과 향기를 만나고 있다는 점이 새롭다. 그러나 지역의 책방들을 찾아 그 공간을 느껴본 사람들이라면 이 여행을 통해 관광객들이 얼마나 매력적으로 제주를 만날 수 있을지에 대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렇다. 과거에는 속초를 떠올리며 바다와 설악산을 여행지로 생각했다면, 요즘은 그곳에 있는 책방들을 함께 떠올리는 식이다. 관광지를 방문하고 향토 음식을 먹으며 다니는 여행이 도시의 외면을 만나고 오는 것이라면 책방을 통해 이어가는 여행은 그 지역의 내면을 마주하고 오는 것만 같다. 그러한 느낌은 동네에 있는 작은 책방을 방문했을 때보다 더 두드러지게 다가온다. 정갈하고 자그마한 동네책방에서 책방주인이 선별한 책들을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고를 때에는 마치 정성껏 마련한 개인 서재를 탐닉하는 것만 같다. 그곳에서 그렇게 골라온 책들은 여행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현실과 여행지를 이어주는 강력한 힘을 가진 기념품이 되는 것이다. 여행을 떠나고 싶으나 여건이 허락되지 않을 때도 가까이 있는 동네책방은 대안이 되어준다. 저마다 특화된 프로그램으로 독특한 자기 색을 가진 동네책방들은 그 자체로 일상을 여행으로 변화시켜주는 하나의 문화특구이기 때문이다. 동네책방은 책방주인의 성향에 따른 책 큐레이션이 기본이다. 단순히 책의 진열이 아니라, 서점마다 독자에게 책을 건네주는 방식이 독특하고 흥미롭다. 일례를 들면, 전주의 동네책방 잘익은언어들에는 책을 포장해서 진열해 놓는 코너가 있다. 독자들은 제목도 모르고 지은이도 모르지만, 책방주인이 책 속에서 골라 겉포장에 써놓은 책 속 문장을 보고 책을 산다. 어떤 책이 들어 있을까? 궁금하고 발췌한 글을 음미하며 여행의 시간을 이어간다. 일상을 여행으로, 또 떠나온 여행을 일상에서 다시 느끼는 경험, 동네책방에 가면 알게 된다. 오승현 글로연 편집장

[문화카페] 다문화 전통혼례

안산은 다문화특구 지역으로 9월 현재 외국인주민 현황을 보면 8만7천359명이다. 내국인이 65만4천668명으로 집계됐으니, 8명 중 한 명이 외국인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8만7천여 명의 외국인 가운데에는 등록외국인이 65%로 5만7천51명이고 나머지는 고용허가 방문취업 결혼이민자 유학ㆍ연수 전문인력 난민 방문 동거 영주 등 기타가 3만여 명에 달한다. 105개국 나라에서 들어와 있는 거대도시 안산의 9월 현재 전체인구는 약 74만으로 집계된다. 요즘은 남자가 장가들고 여자가 시집가는 혼인문화의 고정관념이 깨진 지 오래다. 과거 우리 조상은 사람이 태어나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관혼상제를 1969년에 가정의례 준칙에 관한 법률로 정하고 시행령과 시행규칙을 제시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서 여러 번의 수정을 거쳐 2008년에는 허례허식을 버리고 의식절차를 간소화하여 건전하고 합리적인 가정의례보급과 정착을 위하여 건전가정의례의 정착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을 개정한 후 지금에 이어지고 있다. 혼례(昏禮)란 해질녘에 여자를 만난다는 뜻으로 女+昏=혼(婚=장가든다)이고, 여자는 女+因=인(姻=시집간다), 즉 음양이 만나는 해질녘에 장가들고 매파에 의하여 여자는 시집간다는 의미가 담긴 혼인례(婚姻禮)를 말한다. 가령 혼인의 조건에는 첫째, 반드시 이성지합(二姓之合)이어야 하고 둘째, 음양의 상합은 남자 16세, 여자 14세로 보나 부모 동의 없이 법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나이는 남자 18세, 여자 16세 이상이어야 한다. 또한, 근친의 상중(喪中)에는 혼인하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전통사회에서의 혼인은 남녀의 몸이 합침(婚姻則男女合體之義)으로써 종족보존이 목적이었다. 전통혼례 때 신랑이 신부집으로 기러기를 들고 가는 전안례(奠雁禮)를 보면 기러기는 새끼를 많이 낳고 위계질서를 잘 지키며 살다가 한쪽이 먼저 가면 다른 짝을 찾지 않음의 상징이다. 또 자손을 많이 보기 위해 함 속에는 부정을 막는다는 붉은 팥을 넣은 주머니와 줄줄이 가지마다 많이 달려나오는 콩을 넣어 자손번창을 애써 기원했다. 혼인의 하이라이트를 합궁례(合宮禮)로 간주하는 것 또한 그만큼 자손을 얻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자손을 위한 합궁이어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이성(二姓)이어야 하고 기러기를 들고 장가들게 하여 다산하도록 하며 함 속에는 콩 주머니를 넣은 것이 아니었겠는가. 딸을 시집보내는 친정어머니는 신랑을 따라 시댁으로 떠나는 딸에게 신행 음식을 싸고 싸서 보내며 지금까진 부모를 따랐지만, 혼인 후엔 지아비를 따르고 늙어서는 자식을 따라야 한다고 여자의 삼종을 귀에 쏙 박히도록 주문했을 것이다. 요즘 시대의 혼인은 어떠한가. 우선 혼인을 정할 때는 돈과 명예를 보지 말고 당사자만 보도록 한다. 그리고 필수적으로 건강진단서와 가족관계증명서, 주민등록등본, 최종학교졸업증명서, 재직증명서 등을 주고받아 양가에서 서로 충분히 검토하는 것을 원칙으로 해야 한다. 예물로는 백 년이고 천 년이고 변하지 않음을 상징하는 황금 쌍가락지로 한다면 혼인의 정신이 잘 담긴 것으로 봐도 되겠다. 안산시는 105개국의 다문화가 산다. 한 가정의 어느 한 쪽만 외국인이면 다문화 가정으로 간주한다. 한국으로 시집오거나 외국인과 혼인하면 다문화 가정이라는 뜻이다. 안산시행복예절관에서는 10년째 다문화 가정을 위한 전통혼례를 시행하고 있다. 주민등본상 부부로 되어 있으면 아이가 내년에 초등학교를 입학하거나 딸이 고3이 되었어도 형편이 어려워 혼례를 치르지 못한 두 가정을 선별하여 예절관 잔디마당에서 무료로 올려주고 있다. 매우 감동한다. 전통혼례를 올린 부부는 다들 잘 산다고 전해 온다. 살맛 나는 안산시다. 강성금 안산시행복예절관 관장

[문화카페] 그래도 축제는 계속되어야 한다

무더위가 한풀 꺾이고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본격적인 가을이 깊어간다. 예년 같으면 지자체마다 다양한 축제를 개최하고 이에 따라 많은 수도권의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축제를 즐기고 있었을 것인데, 아쉽게도 올해는 동아시아를 휩쓰는 아프리카 돼지열병으로 인해 축제가 취소되거나 축소 운영되고 있다. 일차적으로 손해를 입은 축산농가에 대한 철저한 방역과 사후처리가 필요함은 물론 피해 농가에 대한 보상과 지원도 원활하게 이루어져 도내 축산산업이 붕괴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제일 급선무라 생각하며 피해 농가에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 또한, 국가적 재난 상황에 따라 지방자치단체가 자발적으로 축제를 취소하였지만 이에 따라 지역마다 경제적으로 적지 않은 2차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축제와 함께 지역의 특산물을 홍보하고 판매할 기회가 무산되었고 관광수입 또한 줄어들어 지역 경제 활성화를 기대했던 많은 상인과 농업, 수산업 종사자들이 허탈해하고 있다. 농수산물 직거래 장터의 활성화와 온라인 쇼핑몰 등을 통한 다양한 판로개척을 통해 손실을 보전하고 농수축산물 소비를 촉진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며 행정기관에서는 홍보 및 마케팅 활동을 적극적으로 수행해 수심에 빠진 농수축산 농가를 지원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축제와 관련한 문화ㆍ관광분야 기업과 예술단체의 피해에도 관심을 둬야 할 것이다. 축제가 취소됨에 따라 축제를 기획하고 준비해온 많은 기업과 예술단체들이 국가적 재난에 축제가 취소된 것을 이해하고 수용하고 있지만, 사전에 투입된 인력과 시간, 노력이 무산된 것은 금전적 피해와 함께 장기적으로는 지역 문화관광 콘텐츠 개발 및 공연예술 생태계에 큰 위협이 될 것이다. 수년간 태풍 및 폭염으로 인한 야외 축제 및 행사의 취소, 농축산 관련 전염병이나 메르스 사태로 인한 전국 축제의 취소 등의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 축제가 취소될 때마다 축제관련 기업이나 예술단체는 고스란히 그 피해를 감당해야 했고 때론 행사 취소에 따른 적자와 기회비용의 상실을 통해 폐업하거나 예술 활동이 심각하게 위축되었다. 최근 경기ㆍ인천지역의 많은 축제들이 아프리카 돼지열병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취소 및 축소 운영되면서 축제와 관련한 기획사, 시설 및 장비업체, 문화예술단체 등이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축제가 취소됨에 따라 축제 준비에 들어간 시간과 인력 그리고 사전 연습 등에 대한 비용 인정과 기회비용 상실에 대한 보상체계가 명확하지 않음에 따라 민원과 갈등도 불거지고 있다. 문화기획 및 축제대행을 담당하는 기업과 지역 예술단체의 위축은 지역 축제는 물론이고 문화예술 생태계의 한 축이 무너질 수 있는 악순환을 불러올 수 있기에 지자체나 문화재단 등 축제 주체들은 축제 무산에 따른 사후 평가 및 대책을 세울 때 이런 2차 피해에도 관심을 갖고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시민과 관광객이 즐기고 지역의 발전을 도모하는 축제에는 많은 전문가와 예술가들의 고민과 노력, 그리고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그들이 쌓아온 네트워크와 콘텐츠는 지금까지 지역의 축제브랜드를 구축하고 축제콘텐츠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기여하였다. 따라서 축제관련 기업이나 단체를 단순한 대행업체나 하청업체라 생각하기보다는 협력자요 파트너라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축제 위기관리의 측면에서 국가적 재난이나 위기상황에 대비한 행사 취소 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보험가입, 계약서에 사전 준비와 연습에 대한 비용 인정 등을 명확히 하는 등 현장의 문화기획자 및 공연예술 단체를 보호하고 지원할 수 있는 제도적인 보완도 필요할 것이다. 이런 관심과 노력이 장기적으로 지역의 축제 및 문화생태계를 발전시키고 신뢰 관계를 조성하는데 기여할 것이다. 한덕택 남산골 한옥마을 예술감독

[문화카페] 베토벤의 웃음

베토벤은 평생 병원 문턱을 드나들며 질병들을 치료하려고 애를 썼다. 그는 청각장애는 물론 소화기능 부실, 장기간의 상습적인 음주로 인한 간 기능저하로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웠다. 유사 이래 신이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베토벤의 청각을 빼앗아 간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다. 존재하는 베토벤의 초상화에서 그가 웃는 모습은 고사하고 옅은 미소라도 짓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고뇌와 사색하는 그림을 통해 그를 직접 경험하지 못한 후세들은 그가 행복하지 않았으며 유별난 음악가로 정의를 내린다. 그러나 이런 정의는 올바르지 않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베토벤의 음악 속에 노출된 유머와 위트는 셀 수 없다. 그의 호탕한 웃음소리도 들린다. 베토벤이 하하하 소리 내며 행복한 표정을 짓는 장면은 그의 교향곡 8번 2악장에 잔뜩 깔렸다.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교향곡의 4개의 악장 중 인류의 우애와 신에 대한 무한한 존경이 가득한 피날레만 기억하고 있다면 베토벤의 다양성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같은 교향곡의 2악장은 하늘을 나는 듯한 경쾌함이 유머와 함께 그윽하고 3악장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포근하게 바치는 사랑의 고백으로 들리는 것을 경험해야 한다. 이제라도 베토벤의 데드 마스크(dead mask)보다는 그가 환하게 웃는 모습이 담긴 초상화를 지혜로운 화가들이 만들어 주길 기대한다. 베토벤이 인생을 즐기며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고 자연 속에서 행복한 미소를 띤 그런 모습으로. 지난 15년간 중국 대도시의 여러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다양한 중국의 음악인들과 청중들을 콘서트홀 안과 밖에서 대면하였다. 중국인들에 대한 필자의 좁은 견해는 그들의 감정표현은 무디고 때로는 지나치게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이들과 교감이 있는 연주를 할 수 있을지 늘 의심하며 연습에 임한다. 묵고 있는 호텔의 프런트 직원, 식당 종업원들은 정감 어린 최소한의 친절이 금기되어 있는 듯한 인상이다. 이런 연유로 그들에게 미소 띤 얼굴로 아침인사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는 나름대로 자신만만한 정의를 내린다. 그러나 이 또한 그들의 내면적 표현을 파악하지 못하는 착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지난주 상하이에서 연주를 마친 후 예원이라는 오래된 공원을 찾았다. 그동안 경험한 연주자, 호텔 직원, 식당 종업원들의 사무적인 무표정은 부정적인 표시가 아님을 인지하게 되었다. 예원에서 가족, 친구와 함께 나들이 온 중국인들은 모두가 엄청나게 밝고 환한 표정이었다. 그들이 직장에서의 감정적인 표현이 우리가 기대하는 바와 다르다고 그들의 내면을 섣불리 판단한 것은 심각한 오판이었다. 한국의 오케스트라로 화제를 바꿔본다. 숙련된 기술과 반복적인 훈련으로 다져진 연주자들의 퍼포먼스는 과연 청중들에게 어떻게 전달되고 있는지 매 연주 지휘자로서 호기심을 갖는다. 그간의 경험을 통해 얻은 교훈은 연주자들이 내면으로 자신이 연주하는 곡을 진정으로 즐기며 표현하고 있는지에 대한 청중들의 판단은 예민하고 정확하다는 것이다. 21세기는 오디오 시대를 넘어 디지털비디오의 최첨단 영역이다. 콘서트홀에 오지 않아도 유튜브 등으로 연주를 선택하여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감상할 수 있다. 청중들은 이미 많은 것을 경험한 상태에서 연주를 접한다. 2020년 시즌은 베토벤의 탄신 250주년이 된다. 1770년에 태어난 베토벤의 귀중한 악보를 판권 없이도 연주하는 엄청난 행운을 우리는 누리고 있다. 반면, 이제는 많이 듣고, 자세히 보고, 다양하게 느낄 수 있다. 연주자들은 청중에게 본인들의 감정을 풍성하게 표현하고 스스로 음악에 푹 빠져 있는 행복한 표정을 전달하는 것이 섣부른 오해를 방지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임을 기억하기를 바란다. 함신익 심포니 송 예술감독전 예일대 교수

[문화카페] 좋은 아빠, 나쁜 아빠, 이상한 아빠

최근 인터넷 세간의 주된 관심사인 한 각료 부부의 비리 의혹사건은 대한민국 아버지들로 하여금 좋은 아빠, 능력 있는 아빠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 보게 만들었다. 아직은 혐의에 불과하지만, 아이들을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한 다양한 편법의 스펙 쌓기의 방법들을 접하며 참으로 보통 부모들은 자신의 무능을 절감했을지 모른다.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에 유행처럼 도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할아버지의 경제력,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관심이 최고의 아이를 만든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위기 시대라는 말은 이제 낯선 단어가 아니다. 집에서 아버지가 설 자리를 점점 줄어든다. 밤낮없이 일해 자녀 뒷바라지를 하고, 부모를 모시고, 자신의 노후까지 대비해야 하는 삼중고를 헤아려주는 사람은 없다. 가족을 위해 희생한 대가치고는 너무 허망하다는 것이 이 시대 아버지들의 초상이다. 과거 우리 아버지들은 어떠했을까? 식민지배와 한국전쟁, 경제성장기를 거치면서 살아내는 일에 전념했다. 가정 내부의 일은 부인에게 맡기고 밖의 일에 전념하느라 자녀를 돌볼 시간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오늘의 아버지들과는 달리 가부장적 지위를 유지하며 자녀들에겐 무척 엄하고 절대적 존재였다. 정말 좋은 아버지는 어떤 존재일까? 몇 년 전 서울시 교육감에 출마했던 두 후보자의 자녀들이 자신들의 아버지에 대해 SNS에 올린 글이 선거의 당락을 결정지은 사건이 있었다. 후보자들의 외부 평판과 달리 한 후보자의 딸은 아버지에 대해 교육감 자격이 없는 형편없는 아버지임을 알리는 충격적인 양심선언을 한 적이 있다. 물론 그 후보자는 낙마하였다. 경쟁 후보자의 아들은 자신의 아버지를 존경하고 자랑스러워하는 글을 통해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물론, 이 아이들의 글이 오늘도 그들에게 여전히 유효한지는 모르겠다. 자녀의 부모에 대한 평가는 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의 아버지는 내세울 만한 사회적 지위나 재산을 가지지 못한 평범한 분이었다. 미대를 진학하겠다는 장남의 결정을 반대하셨고 예술보다는 출세에 유리한 전공을 택하라고 요구하는 분이셨다. 필자는 미대를 진학하고 일찍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하고 나서 줄곧 화실을 차려 독립하면서 매우 힘든 삶을 살았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나의 잘못된 결정으로 그리된 것이라고 나에게 냉담하셨다. 내심 서운함과 불만도 많았지만 내 결정이 그르지 않았음을 보여드리기까지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다. 아버지의 회갑 때 시골 친구 분들에게 아들이 화가임을 자랑스럽게 소개하시는 시간을 경험할 때까지 아버지가 가지셨던 나에 대한 믿음과 깊은 사랑을 깨닫지 못했었다. 필자에겐 특목고를 나온 아들이 있다. 치열한 경쟁보다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위해 전공과는 다른 진로를 모색하며 비생산적인 시기를 보내고 있지만 나는 그에게 내가 정한 기준과 원하는 것들을 강요하지 않는다. 조용히 지켜보며 필요한 일이 있을 때 조언을 할 뿐이다. 아이 엄마는 여전히 세상의 기준에 뒤처질까 고민하는 눈치지만 나와 크게 다르진 않다. 그의 인생은 스스로 건강하게 서는 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의 아버지처럼 다만 그의 결정을 믿고 조용히 기다려 줄 뿐이다. 무한경쟁의 세태를 보며 많은 부모는 조급하게 아이들의 미래를 자신이 기획하려 든다. 피상적으로는 좋은 아빠, 능력 있는 아빠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긴 시간이 흐르고 나서 우리가 아이들에게 행한 일들이 나쁜 아빠, 이상한 아빠의 역할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이들은 부모의 소유가 아니다. 우린 지금 아이들에게 어떤 아빠일까? 김찬동 수원시립미술관장

[문화카페] 독서대전과 일상독서

바람결에 가을이 입혀졌다. 가을이 오면 책과 관련된 기관에서는 독서에 관한 각종 행사를 연다. 그중 대표적인 행사가 독서대전이다. 독서대전은 크게 대한민국독서대전과 지자체 별 독서대전으로 구분된다. 대한민국독서대전은 매년 공모를 통해 독서문화 진흥에 앞장서는 지자체 한 곳을 선정, 책 읽는 도시로 선포하고 해당 지자체와 함께 펼치는 전국 단위의 대규모 독서 관련 행사다. 2014년 군포에서 처음 시작된 대한민국독서대전은 인천, 강릉, 전주, 김해를 거쳐 올해는 청주에서 8월31일부터 9월2일까지 열렸으며 2020년에는 제주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대한민국독서대전을 개최했거나 희망하는 지자체들은 독서문화 고양의 취지 아래 개별적인 독서대전을 운영해나가기도 하는데 전주독서대전, 김해독서대전 등이 그 예로 대부분 오는 시월에 개최를 앞두고 있다. 이처럼 독서대전을 전국적으로 펼쳐나가는 근본적인 이유는 단연 책과 독서가 가진 근본적인 가치를 인정하고 중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독서대전은 어떤 식으로 독서를 장려할까? 주최하는 지자체는 저마다 주제를 정하고 그 아래에서 전시, 강연, 체험, 공연, 학술, 북마켓 등의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준비한다. 이번 청주독서대전의 주제는 책을 넘어였다. 행사장 중앙에서는 책을 넘어선 새로운 독서 문화 생태계로 랩, 낭송, 음악 등의 행사가 제시되고 또 비중 있게 펼쳐졌다. 책을 넘어 독서하는 삶을 지향했던 독서대전이었지만, 책을 만드는 출판사 입장에서는 독서와 연관된 행사에 더 힘을 주는 것만 같아 책을 넘어가 아닌 책에 머물기를 바라게 된 부분도 있다. 눈과 마음이 책에 머물기에 적당한 데시벨의 연주가 흐르고 광장에는 책을 읽기에 마땅하고도 아름다운 공간을 마련한다면 독자들이 책에 좀 더 온전히 닿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말이다. 그런 아쉬움은 전체 방문객 수가 10만 명이 넘었다는 주최 측의 발표에 얼마만큼은 녹아내렸다. 행사 기간이 3일이었고, 청주시 전체 인구가 84만 명임을 감안할 때 상당히 많은 분이 책을 만날 수 있었으니 그 자체만으로도 독서대전은 제 몫을 한 듯하다. 반면, 생활 속에서 독서운동을 조용히 펼쳐가는 사람들이 있다. IBBY(국제아동청소년도서협의회)의 한국지부인 KBBY 회원들 몇몇은 일상의 공간에 그곳과 관련된 책들을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그 정보를 서로 나누곤 한다. 예를 들면, 단골 미용실에 가면서 미용실을 소재로 한 그림책의 목록과 그중 몇 권을 사서 선물로 주는 식이다. 미용실과 관련된 책이 뭐가 있을까? 아카시아 파마, 코끼리미용실, 미용실에 간 사자, 두근두근 처음 가는 미용실, 변신미용실, 머리하는 날, 마빡이면 어때, 줄무늬미용실, 머리 감는 책, 나는 뽀글머리 등 그 목록을 꿰자면 스무 권은 훌쩍 넘는다. 여성 월간지를 주로 비치하던 미용실 측에서는 자신들이 일하는 무대를 배경으로 펼쳐나간 이야기들이 새롭고 반갑기는 것이 당연할 터이다. 미용실에 온 손님들은 일상과 독서가 밀착된 순간이 책의 내용을 내면화시켜 나가는 데에 윤활유 역할을 함을 더불어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0세에서 100세까지 폭넓은 독자층을 지향하는 장르인 그림책으로서는 그 독자층을 넓혀가는 측면에서도 의미가 더해진다. 미용실을 시작으로 한 이 프로젝트는 빵집, 은행, 병원 등으로 이어나간다고 하니 그 후기들도 기다리게 된다. 단체든 개인이든 저마다 독서문화를 확산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반갑다. 2017년 국민도서실태조사에서 우리나라 성인의 40%가 일 년에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았다고는 하나, 독서대전과 일상독서를 장려하는 이러한 노력들이 조금씩 변화를 만들어 갈 것이라 기대하며 또 책을 만든다. 가을이다. 오승현글로연 편집장

[경기시론] 추석의 완성

고대로부터 추석(秋夕)은 단순한 가을 저녁으로 그치지 않았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수확한 음식을 서로 나눠 먹는, 어쩌면 저승까지 모두 기꺼운 중추(中秋)였다. 익은 벼를 어루만져온 금빛 바람으로 각박한 세상살이에 다친 마음을 다독이는 치유의 시간이었다. 이런 추석의 핵심에는 가족이 있다. 가족은 천륜일진대 가족과 모르는 사람이 물에 빠졌을 때 가족에게 손을 먼저 내미는 것이 사람 본래의 인정이라고 맹자(孟子)는 말하였다. 돌아가신 부모의 시신이 들짐승에게 뜯기는 걸 차마 보지 못하여 매장하기 시작한 것이 예(禮)의 첫 뜻이라고도 하였다. 맹자를 빌리자면 나이 든 어른에게 함부로 대하는 것이 예가 아니듯 남의 소중한 자식인 며느리나 사위에게 가혹한 것도 예가 아니다. 사랑하는 가족으로 추석은 성립한다. 희미한 자전거 등에 의지해 먼 길을 마중 나온 할아버지의 여윈 팔뚝을, 오다가다 집어먹던 고소한 동태전을, 고향집에 어린 딸을 처음 데려가던 그 순간을 영원처럼 소환함으로써 추석은 계속된다. 해마다 이 땅 위 삼천만 명에 육박하는 사람들이 추석을 확인하러 가깝고 먼 길을 간다. 귀향 DNA가 어김없이 작동하는 셈이다. 하지만 추석 풍경이 빠르게 달라지고 있다. 일인 가족이 늘어나고, 부모를 여읜 후 고향을 같이 상실한 경우도 많아졌다. 외국여행은 늘어나고 제례의 설득력은 점점 약해진다. 이스라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적 견해를 역시 빌려보자면, 추석은 농업혁명의 부차적 산물로 특정지역 호모 사피엔스가 가족공동체의 억압을 강화시키고자 고안한 문화적 관행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이렇듯 변화하는 추석 풍경은 우리에게 새로운 추석을 궁리하게 한다. 행복한 추석은 어떤 것이며, 충돌하는 여러 가치관 속에서 다수가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추석 풍경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는 이미 새로운 사회적 과제로 드러났다. 그렇다면 추석의 핵심이 가족이라면, 이번 추석부터 가족의 범위를 확대시키면 어떨까. 가족의 범위가 넓어지면 귀향길 음주운전이 있을 수 없다. 부모 자식이 걸어다니는 도로에서 누가 술 마시고 운전대를 잡겠는가. 지난 5년간 추석연휴에만 1만4천201건의 교통사고가 발생하였다는데 보행자나 운전자 모두를 한 가족으로 여긴다면 교통사고도 대폭 줄어들지 않겠는가. 추석의 의미를 되새기는 운전자라면 양보운전, 배려운전을 늘 실천할 것이다. 남의 자식을 자기 자식처럼 아끼는 운전자에게 어린이보호구역에서의 과속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돌아가신 부모의 시신이 들짐승에 뜯기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이의 처지도 잘 헤아릴 것이다. 이런 사람만이 자신의 마음에 비추어 다른 사람의 고향도 얼마나 소중한지를 헤아릴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지면 저급한 지역감정 따위는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이번 추석 역시 넉넉할 터이나 어떤 이에게는 태풍이 할퀸 자리에서 고통스럽게 주저앉은 시간일 것이다. 비록 추석이 고대 한반도 농업혁명의 부차적 산물로서 시대변화에 따라 언젠가 종결될지 모를 관행적 절기에 불과할지라도, 천륜에 근거한 가족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명절이라는 점은 현재로서는 분명하다. 떠났으되 차마 잊히지 않는 죽은 자를 기리며 남은 자와 이승의 고마운 음식을 나누는 행위가 추석의 시작이었다면, 생각과 풍습이 빠르게 변화하는 지금에 이르러서는 가족의 범위를 넓혀 어려운 이웃을 한 번 더 바라보고, 알지 못하는 타인조차 더 배려하는, 내 몫의 송편을 함께 나누는, 더불어 넉넉한 추석, 상하좌우가 안전한 추석, 즉 새로운 추석으로 완성하면 어떨까 한다. 추석을 완성한 후 혹여 남는 시간에 부동산투자 성공요령 같은 책 대신, 좋은 시집을 골라 여럿이 함께 낭독해 본다면 한가위 보름달은 아마 더 낭만적이 되거나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해지겠지. 김성훈 손해보험협회 중부지역본부장

[문화카페] 화령전과 정조대왕

수원화성행궁은 정조가 세웠으나 화령전은 순조가 세운 정조(正祖)의 영전이다.화령전은 1800년 6월28일 정조 서거 이후, 순조 원년 4월29일 완공하여 정조 어진을 봉안했다. 순조 4년에는 화령전에 응당 행해야 할 절목인 화령전응행절목(華寧殿應行節目)을 개정하여 수원 유수로 하여금 사맹삭(四孟朔)과 탄신제(誕辰祭), 납향제(臘享祭)를 정기 제향으로, 그리고 고유제, 이안제, 환안제를 부정기제향으로 올리도록 한 곳이다. 진전(眞殿)은, 임금의 어진(임금의 초상화)을 모셔놓은 전각으로 궁궐 밖에는 종묘(宗廟)가 있었으며 궁 안에는 선원전(璿源殿)과 영희전(永禧殿)이 있었다. 영희전은 조선시대 여섯 임금의 어진(태조세조원종숙종영조순조)을 봉안한 전각으로 해마다 설날, 한식, 단오, 추석, 동지, 납일에 제향을 올렸으며, 1985년 보물 제817호로 지정된 창덕궁 선원전은 숙종영조정조순조익종헌종의 어진을 봉안하고 왕이, 친히 삭망에 분향배례 하며 각 임금의 탄신일에는 다례(茶禮)를 지냈다. 이제는 조선시대 명절다례를 올리던 영희전도 없어지고 임금의 탄신다례를 올리던 선원전은 궁내에 소장된 주요 유물들을 보관하는 창고로 쓰이고 있을 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수원화성 화령전은 정조대왕이 모셔져 있다. 이 화령전은 순조 재위기간 34년 동안에 열 번의 행차와 친제가 이루어졌으며 이후 헌종 2회, 철종 3회, 고종 2회로 모두 17회의 행차와 함께 화령전에 친제(親祭)를 올린 기록이 있다. 세월이 흘러 218년이 지나도록 옛 모습 그대로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는 화령전은 1963년에 사적 제115호로 지정되었다. 순조가 세운 화령전은 일제 피압박 속에서도 6.25사변에도 원형이 크게 손실되지 않아 역사적 보존가치가 높다하여 지난 8월29일 문화재청은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2035호로 지정하였다. 올해는 정조대왕 탄신 267돌이 되는 해이다. 정조 서거 이후 순조가 재정한화령전응행절목에 제시했듯이, 순조가 선대왕의 탄신일에 선원전에 탄신다례를 올렸듯이 정조의 탄신일을 강조한 순조의 뜻을 기려 선원전 차례를 바탕으로 이번 음력 9월22일은 그냥 넘어가지 말았으면 한다. 일반적으로 해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태어난 날을 생일(生日)이라 하고 이를 높여 생신(生辰)이라 하며 죽은 사람의 생신에 지내는 차례를 생신차례(生辰茶禮)라고 한다. 그러나 임금이나 성인이 난 날은 탄신(誕辰), 귀인(貴人)이 태어남을 높이어 탄생(誕生), 탄생한 날을 탄생일, 탄생일을 줄여서 탄일(誕日)이라고 하며 임금이나 성인(聖人)이 탄생하는 것을 탄강(誕降)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27대(代)의 왕이 있었으나 국조(國祖)로서의 태조에게만 탄강이라고 하고 그 외의 임금에게는 탄신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한 나라를 세운 왕은 하늘에서 내린다는 뜻으로 탄강이라 한 것 같다. 흔히 사람이 살아있을 때는 이 세상에 태어난 날을 기념하기 위해 다양한 축하파티를 하지만 죽은 후에는 기일(忌日)을 중심으로 가족 친척들이 모여 돌아가신 분의 추모제를 지내게 되는데, 조선시대에는 임금의 탄신일, 정월 초하루(正朝), 동지를 삼명일(三名日) 또는 삼명절(三名節)이라 하여 승하하신 임금의 탄신일을 명절로 간주하였다. 이제 국보로 지정된 수원화성화령전에 조선시대 이래 끊긴 의례를 문헌을 바탕으로 재구하여 올리는 정조대왕 탄신다례로 정조의 효사상을 고착시키고 다도의 덕(德)을 실천하는 한국의 독창적 제례문화가 정착되었으면 한다. 또한, 국가보물로 지정되어 그 기쁨을 널리 알리는 축제마당으로 이어져 살아생전의 잔치를 여는 것처럼 효와 경을 실천하는 아름다운 축제잔치로 거듭나서 지역정체성 수립은 물론 세계 속에서 민족 문화의 자긍심을 지닐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 강성금 안산시행복예절관 관장

[문화카페] 비상등

한 나라의 운전문화는 그 나라의 국민 수준을 나타내는 바로미터다. 비상등은 위험을 알리기 위한 램프로서 좌우의 플래시 램프를 점등시켜 후속 차 또는 다른 방향에서 오는 차 들에게 위험을 알리는 것이 그 기능이다. 미국에서 비상등을 켜는 경우는 극히 제한적이다. 비상상황으로 정상적인 운행이 불가능할 때, 또는 기상악화로 시야 확보에 어려움이 생길 때를 제외하고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미국에서 비상등을 켜고 갓길에 차를 세워 두고 있으면 도움이 필요한지 물어오는 다른 차의 운전자들이 적지 않다. 반면 서울에서 경험한 비상등의 사용은 불법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변신한 느낌이다. 어둠이 깃든 강남의 좁은 1차선 일방통행 골목길에서 비상등을 켜고 역주행하는 무분별한 운전자들의 폭주는 미안함을 표시하기보다는 나의 불법행위는 비상등으로 정당화할 수 있다라는 신념의 신호로 사용되는 것 같다. 분주한 대로에서 한 차선을 완전히 막고 서 있는 영업용택시는 다음 승객을 태울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린다. 이런 이기적이며 무분별한 선택은 수많은 운전자들의 위험과 모험을 초래한다. 이제, 원래 목적과는 다르게 사용되는 이런 비상등은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지 않을까? 반면, 비상등을 켜고 경각심을 상기시켜 현재 우리 사회의 상황이 위험 수준은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 특히, 필자가 속해 있는 문화계도 예외는 아니다. 진정으로 우리 사회는 실력을 최우선 하고 있는가? 연주력은 충분하지만, 학벌이나 커넥션이 부족해 실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연주자가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아직도 입시철에 정상적이지 못한 방법으로 입학이 결정되는 일은 없는가? 예체능계의 입시철에 벌어지는 불결한 행태들이 아직도 횡행하지 않는가? 재능있는 학생들이 고액의 개인교습비가 없어 갈 길을 잃고 방황하거나 희망을 포기하고 있지는 않은가? 고액의 레슨비를 요구하는 선생들이 국가에 세금을 납부하지 않고 부당한 방법으로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다면 이제는 그들의 축적된 부를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돌아가도록 방향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더 나아가, 이런 고액레슨들이 혹시 불법의 관행으로 정착되어 버렸는지 비상등을 켜야 할 시기가 아닌가? 국가의 지원을 받는 예술단체들이 원칙을 무시하고 편의를 우선한다면 과연 그곳에 참된 미래가 있을까? 예술인들은 매 무대에서 연주 또는 작품으로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는 전문직업인이다. 국가에서 지급되는 봉급을 받는 연주자들이 이런 무대에서의 철저한 평가를 피하거나 두려워한다면 비상등을 켜고 세금으로 운영되는 단체들이 원래의 본분을 다하도록 권고해야 한다. 특정단체에 쓸리는 국가 예산의 지원이 건전한 예술인과 순수한 열정으로 가득한 단체를 골고루 육성하고 장려하는 본분에서 빗나가지는 않는지 꼼꼼히 살펴봐야 한다. 필자가 이끄는 오케스트라에 많은 음악인이 이력서를 보내온다. 크고 작은 음악회에서 함께 연주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선발한 음악인은 유학파 또는 서울의 유수대학 출신이 아니다. 소위, 지방대학 출신이다. 화려한 이력서에 준하는 실력을 보여주지 못하는 연주자들을 자주 경험하고 있다. 이력서로 젊은 재능을 섣불리 판단하는 기성세대들에게 비상등을 밝게 켜야 한다. 우리 미래의 주인공인 고귀한 후배들이 원칙을 지키면 값진 보상이 당연히 돌아온다는 매우 간결한 논리를 가슴에 품고 살아갈 수 있는 향기 좋은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젊은이들이 어렵게 켠 비상등을 보고 그들을 돕고 또한 그 아픔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확산되기를 바란다. 운전자와 우리 문화계의 같은 목표는 비상등을 사용할 필요가 없는 것, 바로 그것이 아닐까? 함신익 심포니 송 예술감독

[문화카페] 인류의 풀·짚 문화

전성임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다는 에덴동산 이야기와 같이 인간은 태초부터 몸을 가리거나 보호하기 위해 나뭇잎과 식물의 줄기를 이용하면서 문명은 시작되었다. 과거 자연에서 의식주를 해결하던 풀ㆍ짚 문화는 가을 들녘에 쌓인 볏짚, 밀짚, 억새 등의 풍성함 속에서나 그려지는 추억이 되었다. 1970년대 새마을 운동과 함께 들이나 산에서 풀을 거두어들이고 갈무리한 짚을 이용해서 지붕을 올리고 담을 치고, 생활도구를 만들고 가축의 사료나 퇴비는 물론 땔감으로도 이용되었던 자연친화적인 생활이 사라졌다. 벼농사가 많은 평야지대는 짚 일을 하고 산간지역은 나무와 풀을 이용하고, 늪이나 강가에서는 버들이나 골 풀로 물건을 만들어 쓰던 그 시절은 누구나 장인이었다. 만든 솜씨는 조금씩 달랐어도 자연물을 이용해서 묶고 매고 엮는 본능적인 기능만은 글로벌하게 소통된 풀ㆍ짚 문화이지만 소임을 다하면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소비생활로 인해서 역사적인 자료나 공예 적인 가치를 인식하기도 전에 태워지고 버려진 문화이다. 우리가 옛것을 쉽게 잊고 있을 때 필요성과 실용성은 물론 예술성을 인정받는 바구니 세공법(Basketry)은 문명의 시작과 함께 계속됐다. 2016년 제9회 프랑스 파리 장애인 기능올림픽 바구니 만들기 종목에서 우리나라는 금메달로 세계의 기능강국임을 인정받았어도 석연치 않은 마음은 떨칠 수가 없다. 프랑스는 전통문화를 학교교육으로 체계화하여 재료재배나 제작기능과 디자인교육이 이루어졌고 조상들이 사용해온 버들의 종류를 다양한 성질과 색상별로 개발해서 창작활동과 상품제작으로 부가가치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미국은 전통바스켓의 보존과 교육발전을 위한 대규모의 BASKET WEAVER GUILD OF OKLAHOMA 정기행사에 전 지역의 공예인들이 참여한다. 2013년 엑스포(EXPO)센터(14회)를 찾았을 때는 커다란 홀에 300여 명이 넘는 참여인원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흘 동안 숙식하면서 진행되는 대회장 한쪽에선 바스켓 전문서적과 지역별로 특색 있는 전통재료와 도구와 소품들을 전시 판매하듯이 역사는 짧아도 자연과 함께 했던 조상(인디언)의 문화적 가치를 이어가기 위해 생산과 소비를 즐기는 공동체 활동이었다. 일본은 우리보다 일찍 풀ㆍ짚 문화가 사라진 상태에서 유럽으로부터 영향받은 바스켓 트리를 섬유 미술 분야로 확장하여 40여 년 이상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빈부의 격차가 심한 필리핀도 지역생산품인 아바카와 다양한 식물소재를 응용한 국제전시 MANILA FAME을 매년 개최하고 있다. 마치 바나나 나무와 같은 열대식물인 아바카는 이미 세계 여러 나라 디자이너들에 의해 가구나 종이, 섬유, 생활용품, 인테리어용품 등으로 개발되었다. 이번 전시는 아바카 종이로 만든 현대적인 용기와 장식 벽지의 창조적인 멋에 감탄되듯이 세계인들의 관심은 환경을 의식한 자연친화적인 활동에 집중되었고 동서양의 생활문화는 하나로 소통되는 시대이다. 특별한 자원이 없는 우리도 민족의 정서를 드러낸 풀ㆍ짚 문화가 존재한다. 과거 대나무나 갈대, 칡이나 싸리, 버들로 생활용기를 만들어서 생계를 유지했고 전국에서 생산된 왕골자리나 인초자리는 국가의 최고 진상품으로 상납된 기록도 있다. 오늘날 왕골로 자리를 매고 삼이나 모시풀로 옷감이나 떡, 차 등이 개발되었어도 식물의 특성과 기능에 대한 연구가 확장되지 못한 채 겨우 명맥만 유지되고 있는 현실이다. 각 지역에서 재배되는 모시나 삼, 왕골의 폭넓은 응용과 함께 산과 들에서 자생하는 식물자원에 관심을 두고 자연에 내재된 소소함의 가치를 창출해낼 수 있는 풀ㆍ짚 문화연구가 필요하다. 전성임 경기도박물관협회장

[문화카페] 공공 뮤지엄 정책과 토건적 사유

세계적 명성을 가진 뮤지엄들은 대개 미술사적 가치가 높은 소장품들로 관람객을 유치한다. 사실 MoMA에는 피카소의 명작들을, 루브르에는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 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뮤지엄들은 관광차원을 넘어 소장품 기반의 고도화된 경영전략으로 경쟁력을 높이고 있다. 문화상품 개발은 물론 빌바오 효과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이나 아부다비의 루브르에서 보듯 다국적 기업을 모델로 한 경영활성화가 그것이다. 지난 6월 말 정부의 뮤지엄 진흥 중장기계획이 발표되었다. 뮤지엄을 국가의 중요한 SOC로 인식하고 공공성, 전문성, 지속가능성을 목표로 이를 활성화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과제와 전략이 제시되었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현재 1천124개 관인 뮤지엄 수를 늘려 현재 4만5천 명인 1관당 담당 인구를 2023년까지 3만 9천 명으로 끌어올리겠다는 계획이다. OECD국가 중 독일은 1만 2천 명, 덴마크 2만 5천 명, 영국 3만 7천 명인 점을 감안하면 영국의 수준까지 끌어올리겠다는 것이다. 전문성 강화를 위해서는 지자체가 운영하는 미술관에 전문 관장을 임명토록 하며 큐레이터 제도를 정비하며 평가인증제 등을 강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지속가능성을 위해서는 ARㆍVR 등을 활용한 미래지향적 스마트 뮤지엄 환경조성과 운영방안 등도 제시되어 있다. 이외에도 지자체 뮤지엄을 위해서는 지역의 역사ㆍ문화를 기반으로 한 콘텐츠 개발 컨설팅이나 지원정책이 포함되어 있으며,뮤지엄 정책을 관리할 위원회를 설립하고 뮤지엄 간 국내외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방안 등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이 계획은 과거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인상이다. 뮤지엄의 수를 늘려 국민의 문화향수 기회를 확장코자 하는 것은 명분상 타당하지만, 뮤지엄을 일반적인 SOC처럼 단순한 시설 확충이나 그 수의 확대라는 토건적 차원의 대상으로 다루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에게 지금 절실한 것은 뮤지엄의 양적 확대보다는 뮤지엄의 내실과 전문성 확충 등 본령과 기본에 충실한 질적 성숙이기 때문이다. 지자체의 공공 뮤지엄 정책은 대개 규모 있는 건축물 건립에 목표를 두고 이것이 완공되면 임무를 끝내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고 그 건물들이 해외 사례처럼 예술성이 높아 그 자체가 관광자원이 되지도 못한다. 이후 운영예산은 줄어들고 뮤지엄은 돈 먹는 하마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뮤지엄 경쟁력 요소 중 하나가 탁월한 소장품 유무인 점을 감안한다면, 지속적인 예산 투자가 기본이지만 초기 구입 소장품으로 끝나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전문성 역시 심각하다. 뮤지엄의 핵심인력인 학예사들의 경우, 거의 단기 계약직으로 긴 호흡의 수준 높은 전시기획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실정이다. 관장들 역시 외부공모를 통해 전문가 영입이 늘고 있지만, 여전히 선거 캠프의 인사들이 명예직으로 머물다 가거나 전문 관장이라 하더라고 짧은 계약기간 탓에 중장기 경영전략을 구현할 수 없는 원천적 한계를 가진다. 아무리 능력 있는 전문가라도 재간이 없다. 이렇듯 기반이 부실한데 뮤지엄 수를 늘리는 일이 능사일 수 없다. 양질의 콘텐츠 생산을 위한 종합적인 제도적 전환이 필요하다. 뮤지엄이 좋은 콘텐츠를 생산한다면 두메산골이라도 찾아가는 것이 요즘 관람객의 기본 성향이다. 수준 낮은 콘텐츠로라도 숫자를 늘려 관객의 접근성을 높이겠다는 발상은 무지의 소산이다. 영국이 문화정책의 슬로건으로 삼은 모두에게 최고의 예술을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의 뮤지엄 정책에 담겨 있는 뿌리 깊은 토건적 사유는 언제나 걷힐까? 본질에 충실히 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김찬동 수원시미술관사업소장

[문화카페] 호모 리덴스, 웃음의 시학

영화 배트맨에 나오는 악당은 상처를 입고 항상 웃는 얼굴을 가진 조커가 되었다. 그런데 그는 정말 웃고 있는 것인가? 아니,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우리는 늘 웃고 싶을 때 웃고 있는가? 아니, 웃고 싶지 않을 때도 웃어야 할 때가 있다. 인간의 감정은 너무나 다양한데 조커처럼 항상 웃고 있다면 오히려 괴기스러울 것 같다. 더욱이 조커는 악당이다. 항상 웃는 얼굴로 폭력과 살인을 일삼으니 섬뜩하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진정한 웃음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우리의 일상적 삶이 불안의 그늘 속에서 흔들리면서 두려움은 휘몰아치는 폭풍처럼 웃음을 사지로 몰아내고 있다. 인간에게 웃음이란 무엇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만이 웃는 동물이라고 한다. 호모 리덴스(Homo Ridens)! 인간에 대한 또 하나의 정의이다. 그렇지만 과연 인간만이 웃을 수 있을까? 물론 인간 이외의 동물들도 웃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렇다면 웃는 것이 인간에게만 고유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다른 동물들이 인간같이 웃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우리의 기분이 그렇게 느끼는 것일 뿐이다. 실제로 인간과 같이 웃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우리는 웃는 고양이를 상상할 수 있지만 웃는 고양이는 없다. 고양이는 웃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루이스 캐롤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체셔 고양이(Cheshire cat)는 웃는 고양이다. 웃는 고양이라니! 고양이야말로 웃음과 가장 어울리지 않다. 고양이다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체셔 고양이는 순간 이동하는 것처럼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져서 앨리스가 어지럼증을 호소하자 꼬리 끝에서 얼굴의 웃음까지 아주 천천히 사라졌다. 그렇지만 고양이의 웃는 얼굴은 몸이 모두 사라진 후에도 한참 남아있었다. 앨리스는 웃음 없는 고양이는 자주 봐왔지만 고양이 없는 웃음은 본 적이 없다고 하며 놀라워한다. 그러나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은 체셔 고양이처럼 몸이 먼저 사라지고 웃음이 남는 것이 아니라, 웃음이 먼저 사라지고 몸만 남는 형국이다. 아무런 감정도 없는 듯한 얼굴들이 고양이 유령처럼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다. 마치 체셔 고양이가 인간들의 웃음을 모두 거두어 간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인간만이 웃을 수 있는 웃음은 무엇인가? 최소한 이성이 함께 작용하여 발생하는 웃음을 가리킬 것이다. 인간은 이성을 통해 사람들의 말이나 행동에서 생각하면서 웃게 된다. 그러므로 웃음은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하는 것에 속한다. 그런데도 오히려 웃음이 인간을 원숭이처럼 우스꽝스럽게 보이게 한다고 부정하는 경우도 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서는 중세 수도원의 살인 사건의 원인이 웃음이었다. 더욱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는 현존하지 않지만 소실되었다고 추정되는 희극편이 살인범이다. 웃음은 어떻게 살인범이 되었는지는 중세 문화에서나 나올 법한 추리이다. 늙은 수도사 호르헤는 세상에서 웃음이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위대한 철학자가 남긴 웃음에 관한 책을 누군가 읽는다면 오히려 걷잡을 수 없이 파급될 것이다. 그래서 당시 도서관에 유일하게 남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에 치명적인 독을 발라놓아 그것을 읽기 위해 책장을 넘겼던 수사들을 모두 죽게 만들었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실제로 희극에 대해 독립적인 글을 썼을지라도 호르헤가 걱정했던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현존하는 시학에서 제시한 비극론을 통해 희극론에 대한 기본 내용을 추리해본다면, 희극의 정의와 구성 요소 및 특징 등에 중점을 두고 설명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웃음 자체를 옹호하거나 칭송하는 것을 핵심 내용으로 썼을 가능성은 적다. 그런데 호르헤는 과연 그 책을 읽었을까? 그는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그의 맹목적이고 독단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더욱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이 웃는 동물이라고 썼던 책은 시학이 아니다. 장영란 한국외대 미네르바교양대학 교수

[문화카페] 이런 콘서트 홀을 지어주세요

연주자가 되려고 피와 땀을 흘리며 준비해 온 청년음악가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문화 하드웨어가 턱없이 부족한 것이 우울한 현실이다. 지방자치단체는 전문 예술단체를 운영하고 있지만 수십 년 전 만들어진 패턴과 시스템을 모델로 적용하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원인 중 하나는 전용 콘서트홀의 부재다. 지자체 단체가 다목적 홀을 짓고 그곳에서 다양한 단체들이 연주와 공연을 하는 형태는 50년 전부터 이어온 행정적 획일화에서 비롯된 오류다. 연주단체에 맞는 전용 콘서트홀의 확보는 선진문화가 뿌리내리는데 근본이 된다. 어떤 콘서트 홀을 지어 드릴까요?라고 묻는다면 세계 유수의 콘서트 홀에서 연습과 연주를 경험한 내 생각을 정리하여 다음과 같이 답한다. 첫째도 음향, 둘째도 음향, 셋째도 음향이다. 연주자 개인의 악기는 바이올린, 첼로, 클라리넷 등이다. 그들이 모인 오케스트라의 악기는 콘서트 홀 그리고 거기서 생성되는 음향이다. 음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무대는 값비싼 보석으로 천장을 장식하고 바닥을 귀한 대리석으로 꾸며도 아무 쓸모가 없다. 좋은 음향은 우연히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투자가 있을 때 이뤄진다. 지자체의 다목적연주시설을 지켜보며 알게 된 것은 음향보다 외적인 면에 더 신경을 쓴다는 것이다. 공연장 광장의 분수대, 화려한 넓은 로비, 그리고 객석과 객석의 편안한 공간 등이 음향보다 더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 한정된 예산을 어디에 주안점을 두고 분배하는가에 따라 후대에 기록될 값진 유산 또는 그것을 헐고 다시 세우는 쓸모없는 콘서트 홀이 되는 핵심적인 잣대가 된다. 지금도 흠잡을 수 없는 유럽이나 미국의 오래된 홀을 보며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그들의 콘서트홀은 밖에서 볼 때 화려하지 않다. 로비도 크지 않고 적절한 공간만이 있을 뿐이다. 입구도 초라하다. 주차장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훌륭한 음향으로 모든 것이 용서된다. 청중이 늦은 시간에 급히 저녁식사를 하고 정장을 차려입고 교통지옥을 뚫고 콘서트홀을 찾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을 듣기 위해서다. 어떤 음향이 이상적인가? 무대의 연주자들이 본인들이 연주하는 사운드를 가감 없이 그대로 들을 수 있는 음향이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유럽이나 미국의 오케스트라들은 자체적으로 전용 콘서트홀을 갖고 있으며 그곳에서 매일 연습도 한다. 연주회와 같은 음향에서 연습하면 본인들의 사운드를 어떻게 조절해야 하는지 쉽게 적응한다. 무대에서 연주자들이 듣는 그대로 청중석 전체에 전달되는 음향이 이상적인 음향이다. 뉴욕의 카네기홀에서 연습할 때 무대 위의 오케스트라 단원 전체에게 속삭이듯 얘기해도 무대 구석구석에 정교하게 전달될 뿐 아니라 100m 후방에 있는 3층 꼭대기 청중석 맨 뒤에도 그대로 전달되는 것에 놀란 적이 많다. 연주자들은 이런 음향에서 본인의 최고의 연주력을 내는 것에 인색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2004년 6월 대전시향의 미국순회연주 첫 번째 장소인 시애틀의 베냐로야 홀의 연주를 잊지 못한다. 이 악단의 첫 해외 연주였다. 단원들은 우리가 이렇게 훌륭한 소리를 낼 수 있었던 거야? 또는 그렇다면, 지금껏 우리가 들었던 우리의 사운드는 우리의 것이 아니었던가?라는 감격과 회한이 교차하는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감동으로 붉어진 얼굴 위로 흐르는 눈물을 보았다. 베냐로야 홀은 마술이 있는 음향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 내는 소리를 그대로 전달하는 정직한 음향을 갖춘 것이 전부였다. 그런 소리를 내게 하는 음향작업이 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목표를 가지고 연주홀을 건축하는 것이 가장 우선 되어야 한다. 그 연주 홀 로비가 멋졌어 또는 이토록 환상적인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음향을 우리에게 물려준 선대들에 감사한다 우리는 이 둘 중 무엇을 택해야 하는가? 함신익 심포니 송 예술감독

[문화카페] 문화유산과 함께하는 여름휴가

지난 7월6일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에서 진행된 세계유산위원회(WHC)는 제43차 회의에서 한국의 서원을 세계유산 중 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세계유산에 등재된 한국의 서원은 모두 9곳으로 풍기군수 주세붕이 중종 38년(1543)에 백운동서원이라는 명칭으로 건립한 조선의 첫 서원인 영주 소수서원을 비롯해 안동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경주 옥산서원, 달성 도동서원, 함양 남계서원, 정읍 무성서원, 장성 필암서원, 논산 돈암서원으로 구성됐다. 이번 서원의 등재로 한국은 세계유산 14건, 인류무형문화유산 20건, 세계기록유산 16건 등 모두 50건을 소유한 문화강국의 국가이미지를 갖게 됐다. 경기도민으로서 율곡 이이를 모시는 파주의 자운서원이 함께 등재되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우리의 전통문화가 세계인들에게 알려지고 인정받았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세계유산 등재는 인류가 함께 보존하고 지켜야 하는 문화유산이라는 것을 공인받았다는 의미와 함께 문화관광 자원으로서 다양한 활용을 통해 국내외 관광객을 유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실례로 안동 하회마을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후 국내외 방문객이 급증하여 지역 경제 활성화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전통은 보존하고 계승하는 것에 못지않게 당대 가치를 갖도록 재해석하고 다양하게 활용할 때 비로소 우리 곁에서 존재감을 갖게 된다. 이런 측면에서 한국의 서원이 세계유산에 등재된 것을 계기로 강학과 제향의 공간인 서원이 시대정신을 반영한 새로운 모습으로 대중에게 인식되었으면 한다. 경기 도내에는 율곡 이이를 모시는 파주의 자운서원을 비롯해 이천의 설봉서원, 양평의 운계서원 등 유서 깊은 서원과 공립 교육 기관이었던 향교가 잘 보존되었고 지자체와 문화재청의 후원을 받아 다양한 인문학 프로그램과 전통문화체험, 선비문화 체험, 한옥음악회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호평을 받고 있다. 또한, 경기도에는 수원의 화성, 수원, 구리와 고양의 조선왕릉, 광주군의 남한산성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수원화성은 드라마 촬영지 및 관광지로 사랑받고 있으며 전통무예 시범, 달빛 기행, 수원화성문화제 등 다양한 전통문화 관련 행사를 통해 도시브랜드 가치를 새롭게 만들어가고 있다. 구리와 고양의 조선왕릉 역시 잘 조성된 자연환경을 배경으로 예전보다 많은 방문객이 찾고 있으며 다양한 문화예술관련 행사를 통해 시민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또한, 서울의 동남부에 있는 남한산성은 주말마다 많은 등산객이 남한산성을 오르고 있고 조선시대의 병자호란의 역사를 다룬 영화를 통해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이처럼 도내에 있는 유네스코 세계유산과 서원 및 향교 그리고 오래된 사찰 등은 경기도의 유구한 역사와 함께한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으로 역사적 가치와 함께 지역의 자랑이요 새로운 문화산업이나 관광산업의 좋은 소재나 테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단체관광객 위주의 관광은 이제 차별화된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소규모 자유여행객들이 주도하는 시장으로 관광 트렌드가 변하고 있으며 지역만이 가진 매력을 차분하게 즐기는 체류형 관광이 주목받고 있다. 따라서 경기도가 가진 유구한 역사와 유네스코 세계유산을 비롯한 문화유산과 명소 그리고 지역의 특산물과 향토 음식 등을 연계한 다양한 관광 상품의 개발과 마케팅이 필요하다. 이제 본격적인 여름 휴가철이 시작된다. 서울, 경기, 인천이라는 거대 시장의 관광객들이 찾기 쉬운 접근성을 바탕으로 다양한 관광 상품을 만들 때 이런 점에 주목하여 차별화된 상품을 만들었으면 하며 도민 여러분 또한 경기도의 역사문화자원을 테마로 한 여행휴가를 계획하고 가족과 함께 가족 여행을 다녀오셨으면 한다. 한덕택 남산골 한옥마을 예술감독

[문화카페] 문화 소비시대의 박물관 축제

박물관(뮤지움ㆍMUSEUM)은 고고학 자료나 역사적 유물, 미술품, 학술자료 등을 수집하고 보존 연구하여 사회교육에 기여될 목적으로 설립된 시설이다. 수집별로는 민속, 미술, 과학, 역사 등으로 구별되고 직능별로는 국립중앙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사립박물관, 사립미술관, 대학박물관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국가에 등록된 문화기반시설은 사회교육에 이바지하는 공공기관으로 인정되어 전문 인력과 교육프로그램의 일부지원체계 아래 지방자치단체와 도서관, 공공기관과 같이 사회적 역할에 참여하고 있다. 지난 5월18일은 ICOM국제 박물관협의회에서 정한 세계 박물관의 날이다. 한국박물관협회는 제13회 국제학술대회와 함께 5월16일부터 19일까지 박물관 주간에 전국 박물관ㆍ미술관의 관람료를 무료로 하거나 할인했다. 문화중심으로서의 박물관과 전통과 미래를 주제로 한 20여 개 연구단체의 학술발표와 교육적 사회적 역할에 의미를 둔 각 박물관의 소개와 문화상품 바자회, 공연, 체험교육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행사로 이루어져 박람회장 같은 축제로 진행됐다. 과거 상류층의 전유물로만 인식되었던 박물관의 컬렉션이 1851년 영국 런던에서 국제 만국박람회를 시작으로 세계인들에게 처음 알려지게 된 당시의 박람회는 유럽이나 미국과 같은 선진국들만의 축제였다. 산업시대와 IT 시대에 들어 세계 각국이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우리도 1993년 대전엑스포와 2012년 여수엑스포로 국가의 위상을 널리 알린 박람회는 건축과 산업, 과학, 미술공예와 공연, 음식문화 등을 응집해 놓은 대규모 축제의 장이 되어 주최국의 발전상과 단체의 힘을 드러내게 된다. 근래 들어 지자체의 특성을 알리는 크고 작은 문화제나 지역축제가 소비자들의 관심을 증폭시키고 있다. 한국박물관역사 100년을 훌쩍 넘기면서 박물관도 국민의 문화향유를 위한 사회적 역할에 충실하고자 다양한 변화를 시도해왔다. 지역마다 독창적인 활동은 물론 뮤지움데이를 정한 경기지역은 공립 박물관을 중심으로 박물관공동체 행사를 주관했고, 어느 박물관 운영자는 2005년 각 기관의 후원을 받아 박물관ㆍ미술관 박람회를 개최했지만, 예산이나 홍보 부족은 물론 시기적으로도 성공을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이제는 박물관ㆍ미술관의 역사와 함께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성장했다고 자부해 온 지난날의 경험을 바탕으로 박제된 박물관의 역할을 벗어날 수 있는 축제가 필요하다. 처음 박람회가 계급사회로부터 출발한 컬렉션을 우선으로 했다면 오늘날과 같이 다양한 수집과 직능별로 풍부한 요소를 갖추어 놓는 박물관의 특성과 교육의 다양성을 축제로 만들어 국가경쟁력으로 이어가야 한다. 소비가 미덕인 문화소비시대다. 문화 참여는 메슬로우의 인간욕구 5단계 기부문화와 비슷해서 생리적 욕구가 해결되어야 사회적 욕구를 경험하고, 존경의 욕구와 자아실현의 욕구를 단계적으로 갖게 된다고 했듯이 우리는 아직도 국민의 하위적 욕구가 충족되지 못한 것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먹고사는 것이 우선이었지만 산업화 이후 경제발전과 더불어 나타난 소비문화는 과거 계급적이었던 문화적 개념이 대중화되었고 대중의 삶과 연계된 문화 창조가 대세를 이루게 되면서 대부분 소비문화는 영화, 스포츠, 오락, 여행 등에 치우쳐 있다. 소박하고 검소한 개인의 생활 속에서도 지역의 크고 작은 문화행사를 스스로 선택하고 찾아다니며 자아실현의 욕구를 채울 수 있는 성숙한 문화소비시대다. 다양한 콘텐츠가 담긴 1천여 개의 박물관공동체 축제를 기대해 본다. 전성임 경기도박물관협회장

[문화카페] 오늘 우리 뮤지엄을 해체(?) 한다

한국의 박물관ㆍ미술관 제도는 근대 일본으로부터 이식되어 현재까지 그 근간을 유지하고 있다. 양자 모두 영어로는 뮤지엄(Museum)으로 표기하지만, 두 영역의 벽은 생각보다 높고 그 조직문화 역시 사뭇 다른 특성을 보인다. 이러한 실정은 법적 근거인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의 명칭에서도 보인다. 뮤지엄진흥법이라 해도 될 것을 양자를 굳이 구분하고 있다. 두 영역의 차이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대부분 소장품의 내용과 제작 시기를 기준으로 한다. 하지만, 이것은 편의상의 구분일 뿐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먼 과거에서 조망한다면 근대와 현대가 무슨 차이가 있을 수 있는가? 뮤지엄은 본질적으로 리좀(Rhizome)적 속성을 가진다. 리좀은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철학의 중심개념 중 하나인데, 뿌리나 줄기가 뚜렷한 수목과 달리 줄기와 뿌리의 구분이나 시작과 끝도 분간할 수 없는 속성의 넝쿨뿌리 식물로 서로 비논리적인 연계를 이루는 점에서 모든 박물관과 미술관의 상관성을 시사하는 바 크다. 하지만, 우리는 박물관 영역과 미술관 영역이 구분되어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암투를 벌이기도 한다. 다행히 경기도는 박물관협회가 미술관까지 포용하여 상부상조의 모범을 보이고 있다. 양자가 서로 협력하는 일의 핵심은 단순히 서로 인정하는 차원을 넘어 상호 간 공동의 전시 콘텐츠를 생산하며 각자의 영역에 머무는 사고의 틀을 융합해 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해외의 경우 이러한 상호융합적 사고는 일상화되어 있다. 박물관 유물과 현대미술이 함께 대화하고 현대미술품 전시에 박물관의 유물이 함께 전시된다. 최근 국내에서도 국립경주박물관의 신라문화를 다시 본다전(2018.12.14~2019.3.3)이나 국립중앙박물관의 영월 창령사 터 오백나한전(2019.4.29~2019.6.16)과 같이 박물관의 유물과 현대미술의 접목하는 전시를 기획하기 시작했다. 고무적인 현상이다. 전자는 신라의 정신을 현대미술로 해석하고 후자는 유물과 현대미술을 접목시켜 전혀 이질적 전시를 선보이고 있다. 수원시립미술관에서도 작년 구조의 건축전에 이어 올해에도 셩:판타스틱 시티전(7.23~11.3)을 개최할 예정이다. 이는 수원의 역사 문화적 기반인 화성과 정조의 정신을 현대미술로 재해석하려는 전시이다. 이는 잠자고 있는 박물관의 유물과 유적에 새 생명을 불어 넣는 일이기도 하다. 이러한 소통은 리좀적 사유를 가진 두 영역의 학예사들 간 공동연구를 축적한다면 사실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이뿐 아니라 뮤지엄과 5G 시대의 일상을 융합하는 새로운 전시콘텐츠의 생산은 오늘 통섭과 융ㆍ복합의 시대에 뮤지엄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110년 전 시인 마리네티는 「미래파 선언문」에서 박물관과 도서관을 파괴하라.라는 극단적 주장을 펼친 바 있다. 이는 서구 근대문화의 정수인 뮤지엄의 한계와 폐해를 해체하고 새로운 미래의 가치를 찾고자 한 외침이라 할 수 있다. 오늘 우리 시대 뮤지엄의 해체를 위한 과제는 무엇일까? 김찬동 수원시미술관사업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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