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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카페] 일송 김동삼 선생의 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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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카페] 일송 김동삼 선생의 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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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지 ‘광복절(光復節)’ 명칭이 부담스러웠다. 일제 강점 35년은 우리 5천여년 유장한 민족사에서 점 하나에 불과하고, 그 전후의 자주성과 성취를 가리기도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2022 <일송김동삼(一松金東三)선생기념사업회>가 오는 13일에 백범기념관에서 발족식을 개최한다며 초청장을 배부했다. 인용된 선생의 유언,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 하느냐. 내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를 읽었다. 선생을 비롯해 당대 독립투사들의 막막한 운명, 그 통한과 비원을 공감하며 분노로 우울했다. 선생은 또 옥사하기 3년 전에 “내가 죽을 이곳은 풀밭이나 산중에서 죽은 무명의 동지들을 생각하면 ‘과분한 장소’”라고 탄식했다. 두 말씀의 깊고 도저한 함축에 감읍하며 무명 열사들께도 죄송했다.

1907년 이래 선생의 30여년 독립운동은 ‘무장투쟁’과 ‘민족통합’으로 요약된다. 특히 1919년에 남만 한족회 총무사장과 서로군정서(독판 이상룡)의 참모장을 역임하며 신흥학교를 신흥무관학교로 확대해, 이청천 신팔균 김경천 이범석 등이 독립전쟁의 무장으로 전환하는 계기도 마련했고, 그 전후에 김산 김원봉 강화린 등 뒷날 독립운동사에 큰 자취를 남기는 3천5백여 투사를 육성했다. 대소 무장투쟁을 촉진하는 한편, <대한통의부>(1922.8), <상해 국민대표회의>(1923.1), <정의부>(1924.12), <삼부통합 혁신의회>(1928.12), <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1929.5) 등을 결성하며 민족의 독립투쟁 역량을 통합하거나 통합하는 노력에 헌신했다. 무장투쟁 내부에도 갈등과 불화가 상존했다. 좌우 갈등뿐만 아니라 학통과 반상에 따라 입장이 달랐고, 만주 거주지역의 지연과 관련 세속권력도 형성돼 있었으며, 심지어는 복벽(復〈8F9F〉)과 민주가 맞서기도 했다. 단일전열로의 통합에는 살신성인 수준의 헌신과 신뢰가 요구됐는데, 선생은 그 대의명분에 누구보다도 충실했다. 특히 참의부 신민부와의 통합에서 끝내 기득권들이 충돌하자 1911년 만주 망명 이래 피땀을 바쳐 결실한 정의부에서 탈퇴까지 했으며(1928.5), 통합 동지 김좌진 장군이 피살되면서 좌우이념이 끝내 문제돼도 그래도 좌절하지 않고 <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 중앙집행위원장 활동의 일환으로 <전만한인반제국주의대동맹창립주비회>에 집행위원으로 가입하기도 했다.(1930.3)

1931년 10월5일 하얼빈에서 피체된 선생은 1937년 4월13일 경성형무소에서 60세로 순국했다. 걸출한 고승이자 『님의 침묵』의 위대한 시인인 만해 한용운은 선생의 시신을 심우장에 안치하고 영결식에서 유례없이 대성통곡해 주변을 놀라게 했다. 오늘 국내의 여러 분열과 남북의 갈등을 생각하면, 선생의 지향은 여전히 우리 민족에게 대의(大義)이고, 공동이념으로 필요하다. 광복절, 이 명칭 또한 남북이 서로 국체를 인정하거나 아니면 통일에 합의하는 그날 이후라야 변경할 수 있을 것이다.

김승종 시인·전 연성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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