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변신

오늘 아침 그동안 앓던 왼쪽 다리의 통증이 격화돼 참지 못하고 한동안 신음했다. 그저 아프지만 않으면 바로 그게 건강이고 행복이 아니겠는가. 나으면 생각이 바뀔 것이지만 절실한 심정으로 오랜만에 병자의 모습을 나는 내게서 보고 있다. 후회막급이지만 이렇게 된 원인은 허리가 부실한데도 한 열흘 의자에 앉아 컴퓨터를 사용하면서 그 자세가 나도 모르게 불량하였기 때문이다. 불량한 자세가 관절 관련 병을 부른다는 사실을 다시 통감한다. 자업자득(自業自得). 그런데 우리 삶에서 어디 이뿐이랴. 일상의 대화에서도 불량한 자세는 상대를 화나게도 하며 관계를 갈등으로 몰아넣는다. 사람의 의사표현에는 본인의 의도와 관계없이 말의 메시지뿐만 아니라 관련 어조와 말투, 표정과 눈빛과 제스처도 밀접하게 관련된다. 메시지 자체는 감내 가능하여도 그것들이 불량하면 상대는 기분이 손상되고 반감이 야기되며 언성이 높아지다가 결국 서로 한바탕 증오 어린 언쟁을 벌이게 된다. 하나 마나 한 이야기인가. 하지만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면 그렇다고 하기 저어 된다. 특히 국회의 국정 관련 질문과 대답에서 장관과 국회의원들이 대화하는 양상을 보면 서로 자신의 입장과 이해에 몰두하여 상대에의 자세가 불량하다. 아무리 이해가 다르고 당리당략이 있다고 하더라도 국민 앞에서 국사를 다룬다면 국민을 의식하며 격식을 갖춰야 할 것이다. 국민은 그런 자세에 실망할 뿐만 아니라 본인들의 의도를 떠나 국민을 경시하는 듯한 방약무인(傍若無人)에 불편해한다는 사실을 새삼 알아야 한다. 그 자세가 국민을 진영으로 나누고 자기 진영의 성원을 의식한 자제하지 않은 연출이라면 국민은 더욱 불쾌할 것이다. 국민 다수는 어느 편이 아니다. 어느 편이 이기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당리당략이나 이데올로기가 시시비비를 넘어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의 관점에 따라 동어반복을 계속하며 상대의 관점을 외면하거나 배타하는 시선과 표정과 말투는 상대뿐만 아니라 국민도 상대로 하겠다는 것이다. 여와 야, 진보와 보수는 실은 그 자체가 아니라 절충과 승화를 위해 존재하지 어느 진영을 위한 세력이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도 계속된다면 일방 태도들에 결국 나라가 아플 것이다. 쑤시고 저린 통증에 나라의 기력이 고갈되어 간다면 기가 찬 국력 낭비가 아니겠는가. 상호 배려하고 존중하며 이성하기(怡聲下氣)로 국사를 조리 있게 검토하고 검증하여 유불리를 떠나 국가의 기율을 바로 세워야 할 것이다. 프란츠 카프카는 「변신」에서 벌레가 되어 가는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의 비극을 그렸다. 엉뚱한 비유일지 모르겠지만, 공정과 시비를 제치고 이해와 당리당략에 몰두하면 할수록 우리는 마침내 다른 버전, 즉 자업자득의 그레고르 잠자가 될지 모른다. 김승종 연성대 교수 시인

[문화카페] 변신

오늘 아침 그동안 앓던 왼쪽 다리의 통증이 격화돼 참지 못하고 한동안 신음했다. 그저 아프지만 않으면 바로 그게 건강이고 행복이 아니겠는가. 나으면 생각이 바뀔 것이지만 절실한 심정으로 오랜만에 병자의 모습을 나는 내게서 보고 있다. 후회막급이지만 이렇게 된 원인은 허리가 부실한데도 한 열흘 의자에 앉아 컴퓨터를 사용하면서 그 자세가 나도 모르게 불량하였기 때문이다. 불량한 자세가 관절 관련 병을 부른다는 사실을 다시 통감한다. 자업자득(自業自得). 그런데 우리 삶에서 어디 이뿐이랴. 일상의 대화에서도 불량한 자세는 상대를 화나게도 하며 관계를 갈등으로 몰아넣는다. 사람의 의사표현에는 본인의 의도와 관계없이 말의 메시지뿐만 아니라 관련 어조와 말투, 표정과 눈빛과 제스처도 밀접하게 관련된다. 메시지 자체는 감내 가능하여도 그것들이 불량하면 상대는 기분이 손상되고 반감이 야기되며 언성이 높아지다가 결국 서로 한바탕 증오 어린 언쟁을 벌이게 된다. 하나 마나 한 이야기인가. 하지만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면 그렇다고 하기 저어 된다. 특히 국회의 국정 관련 질문과 대답에서 장관과 국회의원들이 대화하는 양상을 보면 서로 자신의 입장과 이해에 몰두하여 상대에의 자세가 불량하다. 아무리 이해가 다르고 당리당략이 있다고 하더라도 국민 앞에서 국사를 다룬다면 국민을 의식하며 격식을 갖춰야 할 것이다. 국민은 그런 자세에 실망할 뿐만 아니라 본인들의 의도를 떠나 국민을 경시하는 듯한 방약무인(傍若無人)에 불편해한다는 사실을 새삼 알아야 한다. 그 자세가 국민을 진영으로 나누고 자기 진영의 성원을 의식한 자제하지 않은 연출이라면 국민은 더욱 불쾌할 것이다. 국민 다수는 어느 편이 아니다. 어느 편이 이기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당리당략이나 이데올로기가 시시비비를 넘어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의 관점에 따라 동어반복을 계속하며 상대의 관점을 외면하거나 배타하는 시선과 표정과 말투는 상대뿐만 아니라 국민도 상대로 하겠다는 것이다. 여와 야, 진보와 보수는 실은 그 자체가 아니라 절충과 승화를 위해 존재하지 어느 진영을 위한 세력이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도 계속된다면 일방 태도들에 결국 나라가 아플 것이다. 쑤시고 저린 통증에 나라의 기력이 고갈되어 간다면 기가 찬 국력 낭비가 아니겠는가. 상호 배려하고 존중하며 이성하기(怡聲下氣)로 국사를 조리 있게 검토하고 검증하여 유불리를 떠나 국가의 기율을 바로 세워야 할 것이다. 프란츠 카프카는 「변신」에서 벌레가 되어 가는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의 비극을 그렸다. 요즘 통증으로 앓아누워 의식의 과장이겠지만 나는 허구의 그를 실제로 알며 그의 심정을 지난날보다 더 이해하고 있다. 엉뚱한 비유일지 모르겠지만, 공정과 시비를 제치고 이해와 당리당략에 몰두하면 할수록 우리는 마침내 다른 버전, 즉 자업자득의 그레고르 잠자가 될지 모른다. 역사에 같은 사례가 많다. 바른 태도로 살자, 이 말을 큰소리로 외칠 수 있는 사람이 적을 듯하다. 사람의 삶에서 언제나 위대한 이 말이 오늘의 세파에서는 희롱으로 되돌려지는 위선의 말이거나, 주제넘은 가당찮은 건방으로 취급되기 쉬울 것이다.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럴수록 이 말이 갈등과 혼란의 와중에 더욱 필요하지 않겠는가. 김승종 연성대 교수ㆍ시인

[문화 카페] 헬렌 켈러와 베토벤의 ‘합창교향곡’-함신익 심포니 송 예술감독

2020년 한 해를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지만, 코로나 19로 인한 상실감과 허전함은 크다. 올해 초 입사한 신입사원들의 마스크 벗은 이미지를 상상할 수 없다. 얼굴을 가리고 체온과 QR 코드로 검증되는 불투명한 정체성, 이웃과의 접촉이 최소화되어버린 현실은 아쉬움을 넘어 막막함으로 이어진다. 연주자들의 섬세한 표정은 소리 이상의 중요한 표현의 방법이다. 그러나 마스크를 착용하고 무대에 오르는 기이한 상황은 슬프기까지 하다. 평범한 시각으로 볼 때 불가능하게 생각되는 소통의 한계를 넘어 아름다움을 공유한 두 분을 소개한다. 미국 출신의 작가 겸 사회사업가 헬렌 켈러 (1880~1968)는 1924년 뉴욕필하모닉에 한 통의 편지를 보낸다. 나는 어젯밤 라디오 전파로 흘러나오는 뉴욕필하모닉의 합창교향곡을 들으며 위대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청력을 잃은 내가 어떻게 들을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겠지만 내게는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나는 시각/청각장애인으로서 새로운 영역의 행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라디오 스피커에 나의 손을 대고 퍼져 나오는 울림을 느끼려 했습니다. 단단하게 닫힌 병뚜껑이 열리듯 진한 음악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열정에 가득한 리듬, 지속적으로 고동치는 각 성부의 울림은 나의 횡격막을 요동치게 하였습니다. 합창교향곡이 음악사와 세계사에 차지하는 위치와 비중은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이 높고 크다. 베토벤(1770-1827)은 작곡 당시 프랑스 혁명이 주창하는 자유와 평등사상에서 얻은 영감을 형제애와 박애정신으로 승화시켜 교향곡의 새로운 형태를 혁명적으로 개발한다. 청각능력이 완전히 상실한 상태에서 그의 불행을 운명으로 받아들였으며 남은 생이 길지 않음도 인지하였을 것이다. 이 작품이 인류역사상 가장 사랑받는 이유는 작곡 당시 베토벤은 처절하게 외롭고 고립된 절망의 시간의 정중앙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후세를 위해 위대한 유산을 남기는 일에 몰두한다. 쉴러의 시 환희의 송가를 이용하여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장르의 교향곡을 만들었다. 음악역사상 최초로 인간의 목소리를 교향곡에 담은 것이다. 네 명의 솔리스트와 혼성합창단이 친구들 이여, 이런 노래가 아닌 더욱 즐겁고 기쁨에 가득한 노래를 부르자!라는 시작으로 후대에 위로와 용기 그리고 사랑이 담긴 메시지를 곡의 구석구석에 스며들게 하였다. 베토벤의 합창교향곡을 연주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가 헬렌 켈러가 느꼈던 천사들의 합창, 천상의 바이브레이션, 부드러움과 달콤한 대화, 아름다운 멜로디의 위대함, 그리고 여기에서만 체험하는 어둠과 빛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은 한밤중에 수많은 별을 세는 것과 같다. 그녀가 들을 수 없었지만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손으로 타고 들어온 목관의 부드러운 파고와 금관 악기의 자연을 표현하는 숨소리, 갈대의 흔들림 같은 첼로와 콘트라베이스의 진동, 바다보다 깊은 소리의 합창과 오케스트라의 외침을 정상적인 청각을 가진 청중들은 더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헬렌 켈러의 메시지는 오늘의 우리를 향해 큰 울림을 남긴다. 믿음은 산산조각난 세상을 빛으로 나오게 하는 힘이다. 눈이 먼 것보다 더 안 좋은 것은 볼 수 있지만, 비전이 없는 사람이다. 세계 곳곳에서 고난을 극복하는 형제들에게 무한한 위로를 보낸다. 250년 전에 베토벤을 또한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통찰력을 가르쳐 준 헬렌 켈러와 같은 위대한 선배들이 우리에게 있음은 황폐한 환난의 시기에 큰 위로이자 축복이다. 함신익 심포니 송 예술감독

[문화카페] 관객 없는 극장은 가능할까

극장을 뜻하는 시어터(Theater)는 고대 그리스 야외극장의 객석에서 유래했다. 오늘날 실내극장도 그리스 야외극장에서 비롯됐다. 주로 도시, 즉 폴리스를 내려다보는 언덕에 자리 잡고 있던 고대 그리스 야외극장 형태가 로마중세르네상스바로크시대를 거치면서 실내로 들어와 자리 잡았고, 이게 오늘날 실내극장의 일반적 모습으로 굳어졌다. 수 천 년의 이 변천과정에서 변하지 않은 세 가지 요소가 있다. 객석과 무대, 무대장치가 그것. 그리스 야외극장의 세 가지 요소를 지금 극장에 대입하면 이렇다. 일단 객석은 그대로 객석인데, 실내로 들어오면서 배우들의 연기공간인 무대와 무대장치에 변화가 있었다. 무대는 오케스트라라는 이름에서 연기공간인 스테이지로, 스케네라는 고정된 무대장치 공간은 무대와 그 안의 다양한 무대 변환 시스템으로 한 몸을 이루었다. 오늘날 실황 연주자들의 반주 공간인 오케스트라 피트는 과거 연기공간이었던 오케스트라의 흔적. 르네상스 이후부터 오케스트라는 연기 공간이 아닌 음악 연주단체(오늘날의 교향악단)의 의미로 어의가 바뀐다. 이 장구한 서양 극장 역사에서 극장이 객석, 즉 테아트론(theatron)이라는 말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깊이 되새겨볼 만한 일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극장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 가운데 객석의 관객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말이다. 한마디로 관객 없는 극장은 존재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극장이 무대를 필수로 한 공연예술의 심장이라면, 그 현장에서 심장의 박동을 울리는 주인공은 관객이다. 현장과 관객, 극장이 삼위일체를 이루어야 공연은 완성된다. 코로나19라는 몹쓸 괴질이 퍼지면서 극장폐쇄가 속출했다. 다중이 모이는 곳이니 극장은 이런 때 어떤 극단적 처방도 감수해야 하는 것은 물어보나마나다. 마침 전국의 극장들이 현명하게 대처하여 극장을 중심으로 심각한 전파 사례는 발생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방역엔 성공했으나, 극장 중심으로 돌아가야 할 공연산업은 침체의 늪에 빠졌다. 전시공간을 매개로 하는 시각예술 분야도 어려운 형편은 매 한가지이다. 그 사이 극장마다 발 빠르게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를 확충하는 등 침체를 벗어나려는 노력에 몰두했다. 이때다 하고 일각에서는 새로운 세상을 만난 듯, 여기에 미래가 있는 양 호들갑이다. 놀라운 기술 발달 시대에 공연이 기술과 만나 영역을 넓혀나가는 일은 더 오랜 생존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 하지만 현장 관객 없이 공연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정재왈 고양문화재단 대표이사

[문화카페] 가격이 아닌 가치로 보는 책 문화를 위해

우리나라에 동네 책방이 생긴 것은 불과 10여 년 남짓이다. 물론 그전부터 마을에 한두 곳씩 작은 서점들이 있었지만 대부분 학습지나 인문 서적 위주의 상점 기능을 가졌다면 특정 장르를 큐레이션 해 소개하고 판매하는 동네 책방이라는 트렌드를 가지고 오픈하기 시작한 서점 공간의 역사는 길지 않다. 책 판매뿐 아닌 북 토크와 책 전시 책과 관계된 워크숍 등 부가적인 문화 활동이 곁들여지면서 그곳은 찾는 독자층은 세분화되고 깊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동네 책방은 복합 문화공간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비슷한 생각을 하는 독자들과 공유하며 교류한다. 이러한 동네 책방은 코로나 사태가 길어지면서 운영에 어려움이 생겼고 현재 큰 이슈로 대두되는 도서정가제는 동네 책방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어 새로운 책 문화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지금 큰 위기를 맞고 있다. 동네 책방의 판매 서적들은 책에 표기된 정가에 판매되고 있으니 책의 할인 폭이 커질수록 동네 책방의 경쟁력은 자연히 소멸될 수밖에 없다. 여기저기서 도서정가제에 대한 각자의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책값의 할인율이 커지면 이익을 보는 것이 누구일까 생각해 본다. 책을 사랑하는 진정한 독자는 책 가격이 저렴해지면 가격의 유혹을 차치하고 그만큼 질도 떨어질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단순 책 구매 실적에 목적을 가진 기관에서는 다를 수 있다. 출판사는 책 가격의 할인 폭이 커지면 판매를 위해 경쟁적으로 가격을 내려 결국 갈수록 좋은 책을 만드는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고 이는 창작자들인 작가에게 고스란히 전달될 것이다. 출판사에서도 좋은 작가의 책을 출간하는데 갈등이 생길 것이다. 그렇다면 독자에게도 출판사에도 창작자에게도 판매자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정책이 이슈화되는 이유는 뭔가 누구라도 혹할 금전적 이익을 주는 법제화로 국민에게 문화를 저렴하게 선심을 베푼다는 다분히 정치적 배경이 있지 않을까 뜬금없는 생각을 해본다. 동네 책방의 운영자들은 금전적 이익을 우선으로 두지는 않은 것 같다. 좀 더 양질의 책을 선보이고 독자와 공유하고 싶어 하며 작가들과 출판사들과 좀 더 멋진 창작물을 위해 직간접적으로 소통하며 운영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작은 서점 공간에서 출간된 서적 한 권을 위해 책과 관계된 전시를 하고 작가와 만남을 통해 독자들과 작가를 연결하기 위한 장을 마련해 독자에게는 내용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작가에게는 창작자로서의 보람과 자극을 줘 다음 창작물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이렇듯 동네 작은 책방들은 판매 외에 책 문화의 양질의 발전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이러한 노력이 모여 결국 우리나라 도서의 질과 독자의 질을 향상시키며 책 문화의 전반적인 변화를 가져오리라 생각한다. 도서정가제 해지로 기존의 동네 책방 몇 백 개 없어지는 것이 우리나라 경제에 얼마나 큰 타격이 있을까 싶지만 느리지만 긴 걸음으로 경제 정책이 아닌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생각하면 어떨까 한다. 손서란 복합문화공간 비플랫폼 대표

[문화카페] 성호 이익의 밥상

밥상, 이보다 정겨운 말이 또 어디 있을까. 밥, 국, 반찬 등이 펼쳐진 밥상을 보면 습관처럼 숟가락 젓가락을 찾아 집어 들게 된다. 밥은 살아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가장 선호하는 첫 번째 음식이요 없어서는 안 되는 보약이다. 그래서 공자는 사람이 태어나서 7~8세까지를 바른 생활습관과 체벌로써 이력을 세우도록 했으며 특히 밥상 앞에서 비교 시비 따지지 않는 슬기를 배우고 길들여 일생을 좌우하는 품성과 인격이 결정되도록 했다. 성호 이익(星湖 李瀷1681(숙종 7년)~1763년(영조 39년)은 조선 문화의 전성기인 18세기 전반 영조대에 활약한 재야 지식인이다. 이익의 실학사상 요지는 아름다운 문장이나 시문에만 매달리지 말고 백성들이 살아가는데 실제로 유용하고 실효성 있는 학문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호 선생은 아버지 이하진이 경신환국 때 평안도 운산으로 유배된 곳에서 태어났으나 두 살 때 아버지가 유배지에서 별세하자 어머니 권씨(權氏) 부인과 함께 안산 첨성리(지금의 일동)에 있는 고향집에 내려와 살게 됐다. 과거시험에 낙방하고 어려운 집안과 오랜 질병으로 말년에는 송곳 꽂을 땅도 없는 빈한한 처지가 돼 처참한 환경 속에서도 성호사설, 곽우록, 성호 선생문집, 이선생예설, 사칠신편, 이자수어 등 실로 방대한 저서를 남겼다. 그가 저술한 성호사설에는 곡식이란 사람을 살리는 것으로 그중 콩의 힘이 가장 크다고 해 콩을 반이나 섞어 지은 콩밥을 예찬한 시 반숙가(半菽歌)가 있다. 콩은 나의 논이나 밭이 없어도 주위 논두렁 밭두렁 한쪽에 심으면 줄줄이 많은 수확을 할 수 있는 밭에서 나는 소고기라 불리는 고단백 식품이다. 동의보감에도 콩으로 만든 요리는 질병을 예방하고 두뇌발달에 좋을 뿐 아니라 오장을 보호하고 위장관을 따뜻하게 하는 장수 식품이라고 했다. 안산은 성호의 도시이다. 그것은 이익 선생의 화포잡영(華浦雜詠:지금의 본오동, 사동, 성포동 일부가 모두 바닷물이 들어오는 갯벌이었으며 이 갯벌을 화포라고 했다)이라는 시에서 볼 수 있다. 저 넓은 갯벌에 제방을 쌓아 바닷물을 막고 소금기를 없앤다면 광활한 옥토가 되어 농토가 없어 굶어 죽는 백성을 배불리 먹일 수 있을 것이니 좋은 계책 백성에게 물어 이루라라고 읊은 것이다. 이익 선생의 간절한 이상이 200여년 후인 이제야 이뤄져 안산 시민들이 바다를 메워 아파트를 짓고 보금자리를 마련하여 풍요롭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성호 이익의 밥상은 콩을 재료로 한 밥, 국, 삼찬만의 소략하고 검소한 선비의 밥상이다. 조선 왕조가 설정한 선비는 학예일치(學藝一致)를 이룬 자라 했다. 성호 이익이 기반을 다지고 한 번도 뵌 적이 없으나 성호 선생의 책을 읽고 실학을 완성한 유배지 강진의 다산 선생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안산의 밥상이다. 강성금 안산시행복예절관 관장

[문화카페] 달

외출했다가 오랜만에 지인 같은 그 현수막을 길가에서 다시 보았다. 「실종된 송혜희 좀 찾아주세요」 실종일시 1999년 2월13일 오후 10시경 그 현수막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 모습으로 내게 인사했지만 좀 겸연쩍어 하는 듯했다. 나도 그러했고 나의 반응이 이전과 달랐다. 아직도 찾고 있군, 그 아버지 과유불급이 아닐까. 집에 돌아와 어쩐지 사연이 궁금해 인터넷에 들어가 관련 기사를 드디어 읽었다. 지난 21년 동안 전국을 뒤덮을 정도로 돌린 전단에는 17세 여고생 딸을 그리워하는 애비의 심정이 쓰여 있었다. 너를 찾지 않고는 죽을 수조차 없단다. 아빠는 널 생각하면 숨 쉬고 있는 것조차 미안하단다 근래에 읽은 그 어느 시구보다 하소연이 강렬했다. 한 번 더 읽었다. 죽음 이상을 건, 죽음도 하찮게 하는 그 무엇을 건 이런 집념과 책임감을 나는 겪은 적이 없다. 그 집념을 우선 사랑이라고 할 수 있고 그 책임감을 일단 도리라고 할 수 있겠지만, 제대로 된 이름은 아니며, 현애를 메우고 넘치는 도저한 사실성 정서가 함축돼 있다. 아 아직도 찾지 못했구나, 그 아버지 참 대단하시다가 아니었던 내가 좀 싫었고, 녹슨 대못 박힌 앙상한 가슴이 떠올랐다. 우리의 삶에는 여러 계기가 있고 그 주요한 계기는 타자와의 조우와 이별. 우리는 짧고도 긴 일생을 살면서 많은 사람과 만나고 헤어지는데, 생이별은 특별하다. 특히 혈친과의 생이별은 더욱 그러하다. 어찌 오만 생각으로 애가 끊기고 타지 않겠는가만, 할 만큼 한 아니 그 이상을 한 그 아버지는 왜 어째서 체념하지 않는 것인가. 어떤 부처는 인간의 삶에 선악 구분 없이 인연이 개재되기에 인연을 아끼면서도 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나 우리는 그러기가 어렵고, 그러기를 거부하는 의지를 곧추세우고 난경과 고통을 기꺼이 동반하며 전진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일찍이 공자는 이런 극한을 중도이폐(中道而廢)라고 했고, 카뮈는 그리스 신화 시시포스 이야기의 해당 국면에 관심을 가졌다. 가산이 풍비박산되고 아내가 저세상으로 떠났으나 딸의 심정까지 헤아리며 현수막과 전단을 만들고자 폐지를 줍는 아버지가 있다. 21년 동안 대한민국 전국을 다녀 그 길의 길이가 지구 18바퀴나 되는 나그네가 있다. 실종된 송혜희 좀 찾아주세요, 우리 모두 그 아버지의 호소를 그 나그네의 호소를 한 번 더 경청하자. 우리가 모두 경청한다면 부녀는 반드시 상봉할 것이다. 그리해 갖가지 사연이 있는 지상의 모든 생이별을 위로하고, 한 줌 오염된 이데올로기에 막혀 70년을 대면하지 못하는 남북 이산가족의 연내 상봉도 기원하자. 모든 그리운 얼굴과 그리워하는 얼굴을 기리며 졸시 「달」을 그 기원의 광장에 바친다. 뜨고 지고 뜨고 지고, 검은 밤 별 없는 밤, 뜨고 지고 뜨고 지고, 우리 살기 전에도 뜨고 지고, 우리 살은 후에도 뜨고 지고, 우리 검은 마음에도 뜨고 지고, 교교히 뜨고 지고, 고고히 뜨고 지고, 유구히 그 운회에 세상이 뜨고 지고. 김승종 연성대 교수시인

[문화카페] 이런 음악 어때요?

음악은 일상에서 위안을, 때론 희망을, 때론 기쁨을 준다. 오늘은 수많은 일상에서 삶을 더 뜨겁게 해줄 음악을 추천해 본다. 엄마를 뵙고 떠날 때, 요하네스 브람스의 교향곡 3번 중 3악장을 추천한다. 엄마를 잠시 뵌 후 작별을 아쉬워하며 사립문 앞에서 손 흔드시는 엄마를 돌아보기엔 눈물이 쏟아질 것 같고 그냥 떠나려 하니 그 모습을 다시는 뵐 수 없을 것 같다. 이런 작은 일에도 우리의 선택은 언제나 죄송하고 아쉽다. 작별 후 자동차 안에서 브람스를 들어보자. 중후한 호른과 촉촉하게 젖어드는 첼로의 조화에 우리의 눈물이 더해져 포근한 위로가 넘치는 따뜻한 6분이 될 것이다. 월요일 아침 또는 긴 휴가 후의 출근길은 언제나 버겁다. 이땐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오케스트라 모음곡 2번 나 단조 BWV 1067을 추천한다. 침착하고 안정감 있는 서곡으로 시작하여 화려하고 경쾌한 분위기의 춤곡으로 변화되어 가며 후반으로 갈수록 상큼하며 즐겁게 끝을 맺는 20분 정도 길이의 명품이다. 주역은 플루트 독주인데 새처럼 가볍고 청명한 음색이 다양한 리듬과 섞여 명랑한 라인을 타고 매끈하게 흐르며 풍성한 앤돌핀을 솟아나게 한다. 프러포즈를 앞두고 있는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 2번 중 3악장 아다지오를 추천한다. 긍정적인 대답을 확신하기 어려운 상대 앞에서는 더욱 초조하다. 라흐마니노프의 작품은 듣는 사람 모두에게 가슴까지 스며드는 감미로움을 전달할 수 있다. 프러포즈 하기 약 20초 전, 준비된 스피커를 통해 클라리넷의 서정적인 멜로디와 이어지는 현악기의 따뜻한 음색이 흐를 때 행복과 감동의 눈물을 억누를 능력을 갖춘 사람은 없다. 혹시 의도와는 다르게, 아니요, 당신과 결혼할 생각이 아직 없습니다 라는 잔인한 반응을 받게 된다면 눈물을 흘리며 절망적 슬픔을 표현하라. 마치 토스카를 향한 마리오의 불타는 사랑 고백 같은 극적인 분위기를 연출해 낼 수도 있다. 혹시 그런 진실된 눈물로 인해 굳어진 그의 마음을 녹일 수도 있지 않을까? 곡의 길이는 15분. 진실된 프러포즈에 충분한 시간이다. 입사시험 또는 입학시험 최종 면접 하루 전 저녁이라면 프란츠 폰 쥬페의 경기병 서곡을 들어보자. 8분의 짧은 서곡 안에 고난을 이겨내는 승리를 위한 각오, 그리고 영광과 번영을 향한 당당한 행진을 흥미진진한 파노라마 형태로 이끌어간다. 걱정과 염려로 그득 찬 먹구름을 넘어 푸른 창공을 뛰어오르는 슈퍼맨이 되어 있는 꿈을 꿀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코로나로 힘들고 외로운 인류와 희생자들, 대한민국의 선량한 시민들, 그리고 헌신하는 의료진을 위로할 때는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 중의 4악장을 추천한다. 28분 정도의 길이이다. 베토벤이 각색한 가사의 주요내용은 형제여, 기쁜 노래를 부르자. 이 입맞춤과 포옹을 온 세계를 위하여이다. 고통과 절망의 순간에도 인류의 화합과 사랑을 강조한 선배들의 지극한 정성이 우리에게 주는 감동은 깊고 진하며 영원하다. 함신익 심포니 송 예술감독

[문화카페] 이런 음악 어때요? - 함신익 심포니 송 예술감독

음악은 일상에서 위안을, 때론 희망을, 때론 기쁨을 준다. 오늘은 수많은 일상에서 삶을 더 뜨겁게 해줄 음악을 추천해 본다. 엄마를 뵙고 떠날 때, 요하네스 브람스의 교향곡 3번 중 3악장을 추천한다. 엄마를 잠시 뵌 후 작별을 아쉬워하며 사립문 앞에서 손 흔드시는 엄마를 돌아보기엔 눈물이 쏟아질 것 같고 그냥 떠나려 하니 그 모습을 다시는 뵐 수 없을 것 같다. 이런 작은 일에도 우리의 선택은 언제나 죄송하고 아쉽다. 작별 후 자동차 안에서 브람스를 들어보자. 중후한 호른과 촉촉하게 젖어드는 첼로의 조화에 우리의 눈물이 더해져 포근한 위로가 넘치는 따뜻한 6분이 될 것이다. 월요일 아침 또는 긴 휴가 후의 출근길은 언제나 버겁다. 이땐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오케스트라 모음곡 2번 나 단조 BWV 1067을 추천한다. 바흐의 음악은 인간의 영혼을 맑게 변화시킬 수 있다. 그의 음악은 서양음악의 정통성을 보여주는 교과서이다. 바흐의 오케스트라 모음곡 2번은 7개의 짧은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침착하고 안정감 있는 서곡으로 시작하여 화려하고 경쾌한 분위기의 춤곡으로 변화되어 가며 후반으로 갈수록 상큼하며 즐겁게 끝을 맺는 20분 정도 길이의 명품이다. 주역은 플루트 독주인데 새처럼 가볍고 청명한 음색이 다양한 리듬과 섞여 명랑한 라인을 타고 매끈하게 흐르며 풍성한 앤돌핀을 솟아나게 한다. 프러포즈를 앞두고 있는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 2번 중 3악장 아다지오를 추천한다. 나의 청혼을 받아 주시겠습니까? 일생일대의 절박한 순간이다. 네, 당신과 결혼하겠습니다 라는 대답을 획득하기 위해 배경 음악을 사용하는 것이 도움될 것이다. 더욱이, 긍정적인 대답을 확신하기 어려운 상대 앞에서는 더욱 초조하다. 라흐마니노프의 작품은 듣는 사람 모두에게 가슴까지 스며드는 감미로움을 전달할 수 있다. 프러포즈 하기 약 20초 전, 준비된 스피커를 통해 클라리넷의 서정적인 멜로디와 이어지는 현악기의 따뜻한 음색이 흐를 때 행복과 감동의 눈물을 억누를 능력을 갖춘 사람은 없다. 혹시 의도와는 다르게, 아니요, 당신과 결혼할 생각이 아직 없습니다 라는 잔인한 반응을 받게 된다면 눈물을 흘리며 절망적 슬픔을 표현하라. 마치 토스카를 향한 마리오의 불타는 사랑 고백 같은 극적인 분위기를 연출해 낼 수도 있다. 혹시 그런 진실된 눈물로 인해 굳어진 그의 마음을 녹일 수도 있지 않을까? 곡의 길이는 15분. 진실된 프러포즈에 충분한 시간이다. 입사시험 또는 입학시험 최종 면접 하루 전 저녁이라면 프란츠 폰 쥬페의 경기병 서곡을 들어보자. 쥬페는 오페라보다 짧고 가벼운 가극 장르인 오페레타 작곡가이다. 그 명성에 걸맞게 단순하면서도 귀에 쏙쏙 들어오는 친숙한 선율의 원숙한 조합을 만들어낸다. 8분의 짧은 서곡 안에 고난을 이겨내는 승리를 위한 각오, 그리고 영광과 번영을 향한 당당한 행진을 흥미진진한 파노라마 형태로 이끌어간다. 걱정과 염려로 그득 찬 먹구름을 넘어 푸른 창공을 뛰어오르는 슈퍼맨이 되어 있는 꿈을 꿀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코로나로 힘들고 외로운 인류와 희생자들, 대한민국의 선량한 시민들, 그리고 헌신하는 의료진을 위로할 때는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 중의 4악장을 추천한다. 28분 정도의 길이이다. 두 번 이상 들어야 효과가 있다. 베토벤이 각색한 가사의 주요내용은 형제여, 기쁜 노래를 부르자. 이 입맞춤과 포옹을 온 세계를 위하여이다. 고통과 절망의 순간에도 인류의 화합과 사랑을 강조한 선배들의 지극한 정성이 우리에게 주는 감동은 깊고 진하며 영원하다. 함신익 심포니 송 예술감독

[문화카페] 한예종 이전의 조건들

서울 석관동에 본부가 있는 한예종의 정식 명칭은 한국예술종합학교이다. 투박한 정식 명칭 대신 흔히 한예종으로 불린다. 인터넷에서 한예종을 검색하면 국립 특수대학교 4년제로 뜬다. 4년제 국립대학이란 말과 다르지 않은데 굳이 학교라고 할까. 그냥 대학교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그리 생각하기 쉽지만, 이 학교라는 이름에 한예종의 자부심과 지향이 담겼다. 한예종은 종합대학의 단과대에 해당하는 여섯 개 원(院)으로 구성됐다. 종합은 단과대의 종합체인 종합대학처럼 여러 원을 모았다는 의미. 그런데 대학교가 아닌 학교다. 설립 당시부터 기존 대학의 보편적인 체제와 교육 목표를 좇지 않았다는 얘기다. 한예종은 실기전문교육기관이다. 기존 대학의 예술교육이 학문적인 영역에서 예술을 탐구한다면, 한예종은 직업 예술가 양성이 목표. 이론보다 실기를 숭상한다. 중세 이후 도제식 교육으로 직업 예술가를 양성하는 서양의 컨서바토리를 참고했다. 그로부터 개교 30년을 목전에 둔 한예종의 현재는 어떤가. 피아니스트 김선욱과 임동혁, 손열음, 바이올리니스트 클라라 주미 강, 영화 기생충의 박소담 등이 이곳 출신이다. 관성적 대학예술 교육을 탈피한 학교가 예술한류의 산실로 성장한 것이다. 현재 세 곳 살림을 하는 한예종이 몇 년 안에 이전한다고 한다. 뿔뿔이 흩어진 교사를 한 데로 모은 통합 캠퍼스를 그리고 있는데, 명문 반열에 오른 이 학교를 유치하려는 지자체의 움직임도 활발하다. 나의 일터인 고양시도 유치를 강력히 희망하는 지자체 중 한 곳. 몇 해 전 학생과 교직원, 학부모 설문조사에서 서울잔류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았다고 하니 언감생심은 아닐까. 그럼에도, 한예종 이전과 관련, 관계자들에게 몇 가지 말하고 싶은 게 있다. 첫째, 통합성이다. 흩어진 학교를 한데 모아 교육 효과를 배가하려면 너른 교사와 기숙사 등 학생들을 위한 편의 시설이 잘 갖춰져야 하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각 원 간 분야(장르)의 경계를 허물고 융복합의 협력 환경을 만드는 데도 넉넉한 시설 공간은 필수다. 지자체의 이런 공간 제공은 탈(脫)서울의 이점 중 하나다. 둘째, 연결성이다. 학교 교육이 지역 내 인프라와 어떻게 연결되느냐 하는 문제다. 한예종이 실전에 강한 프로페셔널 육성을 목표로 관습을 타파해 성공했다면, 학교의 이전 문제에서도 전향적인 자세가 필요한 건 아닐까. 셋째, 확장성이다. 이미 배출한 인재들이 증명하듯, 앞으로 한예종의 무대는 세계다. 국립예술기관으로서 통일시대의 예술교육에도 대비하려면 한예종의 통합 캠퍼스가 반드시 서울이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을까 싶다. 정재왈 고양문화재단 대표이사

[문화카페] 언택트 시대 그림책이 건네는 위로

소통을 위한 활동이 제한되면서 오는 불안감으로 각자의 라이프 사이클은 틀어졌으며 살아가는 방식의 변화 요구를 거부할 수 없는 처지가 됐다. 변화하는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생존법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변화의 시기 속에 살게 된 것이다. 이런 시기에 인간의 안정된 정서를 위해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는 문화 활동은 어쩌면 가장 절실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서를 함양할 수 있는 미술관도 영화관도 공연장도 쉽게 나설 수가 없는 현실이다. 이럴 때 가장 손쉽게 접할 수 있는 분야는 책이 아닌가 한다. 그중에서 그림책은 오감을 만족시켜 심신을 안정시키며 인간의 정서를 풍부하게 하는데 최적의 선택이 아닐까 한다. 책은 고대 진흙 판에 새겨진 쐐기글자나 중국의 죽간으로부터 시작해서 이집트에서 발견된 파피루스, 오늘날 우리에게 친숙한 낱장을 묶어 함께 묶은 코덱스 형태의 책까지 종이와 활자가 발명된 이후 인간의 역사와 함께했다. 글과 그림으로 구성된 그림책은 14세기 전설이나 우화가 중심인 이솝 이야기, 18세기 풍부한 상상력의 보고로 불리는 안데르센을 거쳐 19세기 중산층의 등장과 자녀교육에 대한 관심과 함께 발전한 그림책은 훗날 게이트 그린어웨이와 랜돌프 칼데콧, 윌터 크레인 등의 그림책 기초를 다진 작가들이 탄생했다. 문자와 이미지로 구성된 그림책은 어린 독자들에게 교훈을 주는 교육적 기능을 중시한 탄생 당시의 의미를 넘어 오늘날 인생의 희로애락에 대한 내용까지 담고 있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감동과 공감을 주는 대중적인 장르로 오늘날 자리매김해 가고 있다. 이러한 그림책의 특징은 독자를 동참시킨다. 책장을 넘기며 눈으로 보며 읽어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오감을 자극받는다. 전설이나 우화를 통해 이야기 속의 해당 국가들의 문화 다양성과 정체성을 이해하며 상상 속 이야기를 통해 독자는 새로운 세계로 모험과 여행을 경험한다. 그림책 속 이야기는 독자에게 즐거움을 주기도 하고 슬픔을 주기도 한다. 괜찮다고 위로도 하며 잘했다는 격려를 주기도 한다. 할 수 있다고 용기도 주며 너의 생각이 옳다고 동감해 주기도 한다. 글 없는 그림책들은 독자의 상상력과 집중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며 독자마다 다양한 시각으로 접근하며 독자 자신만의 이야기로 만드는 매력을 가지기도 한다. 지구 반대편 사람들과 거의 실시간 정보를 공유하며 사는 디지털시대에 수동적인 정보 습득에 익숙해져 가는 현대인은 언젠가는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상실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처럼 코로나 19로 인해 물리적인 소통이 제한된 환경에서 오감을 자극하며 즐길 수 있는 그림책 몇 권쯤 곁에 놓고 본다면 생각을 확장시키기에 썩 괜찮은 극복의 시간이 되지 않을까 한다. 손서란 복합문화공간 비플랫폼 대표

[문화카페] 비대면의 세계로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더위가 물러간다는 처서(處暑)가 지나자 흰 이슬이 맺히기 시작한다는 백로절(白露節)에 들어섰다. 9월이다. 이제 한해도 4개월 정도 남았다. 거짓말처럼 아침저녁은 선들거린다. 올 상반기는 온통 코로나19로 옥죄고 장마와 태풍과 유례없는 신종 비대면 문화를 턱하니 내놓았다. 이제 어디를 가도 마스크와 발열체크 손 씻기 등 생활 속 거리두기는 서로 익숙해지고 있다. 사람에게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런데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지니 평범했던 일상이 그립고 그리울 수밖에. 서로 얼굴을 보고 표정을 읽으며 주고받는 말을 재미, 마주한 사람의 눈동자 속에 흔들리는 마음과 헤어지기 싫어 한없이 많은 시간을 함께 했던 지극히 평범한 우리네 일상이 어느 한순간 기약 없이 멈춰버린 것이다. 교육은 또 어떠한가. 우리가 받았던 교육 대부분은 대면이었고 특별한 경우라야 비대면 교육이었다. 현재 우리는 대면 수업을 할 수도 받을 수도 없는 실정에 와 있어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진행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됐다. 코로나가 오기 전 나의 일상은 예절관 문지기나 다름없었다. 각종 프로그램을 기획해 수강생을 모집하고 개강을 하게 되면 이번엔 어떤 분들이 예절관에 관심을 뒀을까 설레게 된다. 그래서 출근하면 으레 한복으로 갈아입고 입구에 서서 반갑게 인사로 맞이하고 수업이 끝날 때까지 함께하다가 마지막 한 사람까지 예절관 대문에서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무탈하게 운영하는 일, 이 모두가 얼굴을 마주하는 일상이었다. 사실 예절관은 일주일 내내 수강생으로 북적댄다. 일반 성인, 다문화 가족, 어린이 유치원생, 중고생 어디 그뿐인가 주민자치센터 통장님들, 각 단체와 동아리 그야말로 대상도 다양하고 프로그램 또한 다양하다. 어떤 날은 종일 달려 다니다가 해가 질 때도 있다. 코로나19는 발상의 전환을 요구했다. 예절관도 위기지만 시민들도 위기였다. 뭐라도 해야 했다. 정해진 시간에 강의를 마치면 그만이었던 대면수업과 달리 비대면 수업은 그렇지가 않다. 강사는 텅 빈 강당에서 카메라 앵글을 보고 수업하고 그 내용을 편집해 내보내고 수강자는 수강했다는 답글을 달면 출석으로 처리한다. 더욱 답답한 것은 질문과 답을 그때그때 주고받기가 쉽지 않고 수강자가 어디까지 이해하고 받아들였는지 가늠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리고 비대면 수업은 대면수업보다 세 곱절 이상 일이 많음을 실제로 알게 됐다. 그런데 이변이 생겼다. 상상을 못한 일이 나타났다. 그 첫 번째는 대면수업일 때는 30명 이상 수용이 어려운 강당이었는데 비대면으로 90명 이상을 싣고 출발이 가능한 일. 그 두 번째는 비대면으로라도 강좌를 개설해주셔서 너무너무 감사하다는 수강생의 답글이 줄줄이 올라온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세계가 아닐 수 없다. 처음 가보는 길, 처음 눈 맞추는 카메라앵글이지만 비대면의 세계가 길은 멀어도 마음만은 가까이 함께 할 수 있음을 가져다줬다. 강성금 안산시행복예절관 관장

[문화카페] 썩지 않는 말

며칠 전에 연구실에서 홀로 2학기 첫 주 강의를 녹음 녹화했다. 코로나19 상황이 생경하던 지난 3월처럼 힘들지는 않았으나 여름방학을 지나 재개한 그 작업은 다시 쉽지 않았다. 지난 학기 직전에는 십여 차례나 반복하며 진땀을 흘렸는데 이번에도 제작한 동영상이 마뜩찮기는 여전했다. 화면의 내 표정과 돋보기 너머 눈빛이 자연스럽지 못하였고 목소리가 둔탁했으며 억양도 투박하여 학생들의 청취를 촉진하기에 부족했다. 아닌 게 아니라 공간이 분리된 온라인수업에서는 표정의 함축과 목소리의 기운이 학생들과의 소통에서 대면수업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제 다시 생각하니 내가 그 작업에서 내내 어색하였던 것은 컴퓨터의 PPT 슬라이드를 마주한 나와, 목석처럼 나를 주목하는 카메라가 조성하는 무미건조한 분위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나는 한편으로 나의 부실한 강의가 가차없이 촬영되어 있고 학생들 이외의 인사들에게도 앞으로 두고두고 검증과 평가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의식하고 이런 자의식에 불편 긴장한 심정으로 콤플렉스 상태였던 것이다. 나는 나를 자못 책망하며 말의 즉발성과 채록의 기록성을 다시 인식하기로 했다. 녹음ㆍ녹화 온라인 강의가 자유로운 강의를 제약하는 일종의 구속일 수 있다고 저어하는 심사는 바로 글처럼 말이 기록되기 때문이다. 무한 반복을 보장하며 있던 그대로 그 정확한 재현이 가능한 그 기록성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말도 한번 채록되고 화자를 떠나면 그 수정이나 변경이 어렵다. 그런데 이제 어디, 대학의 온라인강의만 그러한 형편인가. 스마트폰의 촬영과 녹음 기능을 미욱하게도 뒤늦게야 떠올리며 이제 공사(公私)를 막론하고 우리의 모든 말도 그런 형편에 있다고 나는 드디어 각성했다. 그런데 글은 퇴고 과정을 거쳐 수정 보완되고 그러면서 완성도가 높아지지만, 말은 아무래도 그렇게 하기가 어렵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는 바야흐로 자신의 의사를 성찰하며 어디서든 이런저런 말을 어떻게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좀 고민해야 할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이제 그 누구의 말도 의외에도 저 삼불후(三不朽)의 하나가 될지 모른다. 서산대사의 시로 널리 알려진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가 문득 상기된다.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눈 내린 벌판을 홀로 걸을 때라도, 어지럽게 걷지 말아야 하리. 오늘 걸어간 이 발자국들, 뒤따라오는 사람들에게는 이정표가 되리니.) 청와대 여민관 집무실 가까운 곳에 1948년 혼란한 해방정국 시기에 김구가 쓴 친필로 게시되어 있기도 한 이 시는 그러니까 이제 일국의 대통령뿐만 아니라 난언(亂言)과 부도(不道)의 말도 넘치는 이 말 많은 쟁론의 시대에서 우리가 모두 읽어야 할 시일 것이다. 그런데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는 서산대사의 시가 아니라 조선 후기의 시인 이양연(李亮淵 : 1773-1853)의 시라고 한다. 어떤 사정 어떤 이유에서건 이 시를 서산대사의 시라고 함부로 말하여 앞으로도 후인들에게 두고두고 근치하기 어려운 오류를 지속시키게 할 이는 대체 누구인가. 김승종 연성대 교수ㆍ시인

[문화카페] 음악, 연주가, 그리고 본질적 행복

음악은 무엇인가. 음악은 소리를 만들어 내는 작업이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소리를 만들어 내는 예술이다. 이를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연주자이다. ■ 음악은 진실 음악은 영혼의 안식처이다. 음악은 인간의 공허를 채워주는 최고의 창조물이다. 음악은 가장 정직한 친구이며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음악은 우리의 영원한 동반자이며 가장 위대한 사랑이다. 음악을 통해 인간에게 숨겨진 감성과 감각이 드러나며 행복한 생활을 영위하게 해준다. 음악은 부족한 감정을 강화 또는 완화해 주기도 한다. 완전하지 못한 인간들의 부끄러운 요소들을 채워주는 따뜻한 위로가 된다. 인간들은 그들이 만들어낸 언어로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실패한다. 그러나 음악은 풍성하게 그리고 성공적으로 감정을 표현하게 해준다. 음악은 분명히 강한 치유의 능력이 있다. 음악을 통해 절망과 외로움에 찌들어 오늘을 생의 마지막 날로 생각하는 영혼들을 충분히 위로한다. 음악이 없는 삶은 가치가 없다. 음악은 단순한 오락이나 흥미의 도구가 되기도 하지만 진정한 음악의 본질은 세상에서 가장 험하고 높은 산보다 위대한 것에 오르게 한다. ■ 연주가의 본질 연주가로 미친 듯 또는 정상이 아닌 듯(crazy) 살아가지만 그것이 어리석음 또는 바보 같은 행동 (foolish)은 아니다. 내가 음악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음악이 나를 선택한 것이 진실에 가까운 표현이다. 연주를 통해 상상할 수 없는 많은 것을 표현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며 살아왔다. 음악을 전혀 모르는 촌로에게 베토벤의 열정을 전하며 새로운 감동의 세계를 열어 주었으며 어머니를 잃고 연주 홀 구석에 비통하게 자리 잡은 소년의 가슴을 보듬어주는 브람스 음악으로 날개를 띄울 수 있었다. 우연히 연습실을 스쳐 지나가던 우체부에게 들려준 하이든의 낯선 멜로디는 그가 받은 최고의 보너스가 되었다. 이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음악의 본질이다. ■ 연주자의 험한 길 음악을 쫓아 험한 길을 걷는많은 연주자가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연주가는 새롭고 신선한 주제로 매일 아침을 맞을 수 있다. 꽃보다 진한 음악의 향기를 느끼며 열정의 끈을 놓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연주가는 저절로 생성되는 것은 아니다. 연주가는 엄청난 양의 노력을 깃들여야 한다. 몸 안의 정신적, 영적, 그리고 물리적인 성분이 음악의 섬세한 세포로 가득 차 있어야 진정한 연주자가 될 수 있다. 물론 어려운 선택이 되겠지만, 음악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는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끝없이 떠오르는 영감과 샘솟는 에너지를 음악에 실어야 한다. 그래서 늘 도전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연주가의 길을 걷는 후배들이 어려운 이 길을 어떻게 헤쳐나갈 수 있는지 물어온다. 대답은 간단하다. 그러나 실천은 어렵다. 세상의 무엇보다 더 음악을 사랑하는가? 함신익심포니 송 예술감독

[문화카페] 그림책을 ‘문화예술’의 한 장르로 독립시켜야

그림책은 그림을 그리는 그림작가와 글을 쓰는 글작가가 협업을 하기도 하고, 한 작가가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써서 완성하기도 한다. 이처럼 그림책은 글과 그림이 서로의 영역에서 역할을 다해 하나의 책으로 완성되는 장르로써 미술과 문학의 어우러짐이 기반된다. 오늘날 그림책은 어린이뿐만 아니라 청소년, 성인, 노인에 이르는 전 세대에서 사랑을 받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그림책을 전문으로 내세운 그림책카페, 그림책서점, 그림책도서관 등이 지역 곳곳에서 생겨나고 그림책지도사, 그림책 큐레이터 등의 직업이 생성되었으며, 원주그림책도시를 비롯해 순천, 군포, 광주, 제주 등이 그림책을 포인트로 한 문화도시로 나아가고자 박차를 가하는 관 주도의 움직임도 두드러진다. 2000년대 중반 이후로 한국 그림책은 세계 출판계가 주목하는 볼로냐어린이도서전, BIB 등에서 꾸준한 수상 실적을 쌓아오며 두각을 나타내다, 최근에 이르러 백희나 작가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기념 상을 받는 등 세계무대에서 여느 인기 한류 문화에 뒤지지 않는 성과를 내고 있다. 한국 그림책의 질적, 양적 성장세는 나날이 두드러지고 있는데 그림책의 미래를 위해 제도적으로 뒷받침되는 부분은 미미한 실정이다. 우리나라 문화예술진흥법은 문화예술이란 문학, 미술(응용미술을 포함한다), 음악, 무용, 연극, 영화, 연예(演藝), 국악, 사진, 건축, 어문(語文), 출판 및 만화를 말한다고 제2조에서 정의한다. 제도 속에서 그림책은 문학의 하위 분야에 속하고 있는데, 이는 그림책의 주요 요소인 그림을 문학의 범주로 분류하는 것과 다름없으며 그림책 진흥을 위한 사업 역시 문학의 언저리에서 맴돌게 제한한다. 그렇다면 그림책이 보여주는 민족문화 창달의 지점은 어떠한가. 해외에 우리 문화를 널리 알리는 것을 민족문화의 창달의 한 축이라고 본다면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도서저작권 수출 실적 조사 결과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 2016년부터 2018년까지 3년 동안 수출된 전체 4천683건 중 46.7%에 이르는 2천186건이 아동 분야이다. 그림책이 별도로 구분되어 있지 않아 정확한 수치를 알 수 없다는 것도 안타깝지만, 업계 추이를 볼 때 그 중 그림책 수가 압도적임은 분명하다. 반면 문화예술로 정확하게 구분된 문학은 666건으로 14.2%, 만화는 596건으로 12.7%를 차지하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 그림책 산업은 작가와 출판사의 뼈를 깎는 자생적 노력으로 성장해왔으며 마침내 세계무대에서 주목받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창작이나 출판의 환경이 경제적으로 몹시 불안정하다는 것을 숨기기 어려울 정도다. 이러한 때에 그림책을 또 하나의 문화예술 장르로 독립, 추가하여 문화체육관광부가 관련 사업과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면 문화예술진흥의 목적에 진정으로 맞닿는 결과가 우리의 그림책을 통해 보다 더 분명하고 빠르게 도출될 것이라 확신한다. 오승현 글로연 편집장

[문화카페] 행복예절관

예절관(禮節館)은 예의범절 즉 모든 예의와 절차를 가르치는 곳이다. 일반적으로 예절관이란 명칭 앞에는 지역의 이름, 이를테면 평택예절관, 안양예절관 또는 용인예절관이라고 쓰고 있다. 그런데 안산만은 행복예절관이라고 칭한다. 행복 즉 Happiness라는 말은 지칭이 아닌 추상명사여서 내가 행복예절관을 처음 들었을 때 한참이나 거리감이 좁혀지지 않았다. 그러한 행복예절관의 대문을 아침저녁으로 드나들어도 행복은 내게 착 안기는 맛이 없었다. 왠지 행복은 남의 동네 이야기 같기만 하고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 뒤에 숨어서 잘 나오지 않았다. 스스로 인색하고 욕심이 높아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하물며 어쩌다 예절에 관심이 있는 분이 아니라면 예절이란 단어에 흥미가 당기지 않는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가끔 요즘 같은 시대에 관혼상제를 배워서 어디다 쓰느냐고 그것도 공부까지 해가며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느냐며 묻는다. 또 어느 여성분께 이번 학기에 예절관 프로그램을 새롭게 단장했으니 신청해보시라고 권유했다가 제가 예절이 없어 보여요?라는 난감한 답을 들은 적도 있다. 그렇다면, 예절은 왜 하는가. 예절에서는 마음속의 생각(意思)을 실제(實際)라고 한다. 이러한 실제인 생각을 막히지 않고 상대방과 잘 통하게 하는 것을 소통이라고 하는데 의사를 소통하는 데에는 격식(格式)이 있다. 이 격식에는 어휘와 어법으로 하는 언어 예절과 행동으로 나타내는 행동 예절이 있는데 이 언동(言動)의 일치를 가리켜 참 예절이라고 한다. 그러나 언동의 일치가 그리 쉬운 일인가. 주자(朱子)의 소학(小學)에 예가 아니면 보지 말며(非禮勿視)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非禮勿聽)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며(非禮勿言) 예가 아니면 동하지 말라(非禮勿動)했던 것은 그 오래전에도 말이 안 되는 소리가 있었기에 이런 내용을 어린아이들에게 가르친 것이 아니었을까. 우리가 잘 아는 이솝의 우화에, 늑대는 부리가 긴 두루미에게 국물을 접시에 담아 대접하고 두루미는 늑대에게 목이 긴 병에 담아 대접한 것은 서로 상대방의 입장을 배려하지 못하고 자기 처지에서만 상대를 대접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절을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늑대와 두루미는 물론 망설이다 때를 놓쳐버리는 벙어리가 돼서는 안 되기 때문일 것이다. 예절의 본질은 결국 마음속의 생각을 격식이라는 과정을 통해 사람이 사람으로서 사람다워지려고 끊임없는 자기관리(修己)와 원만한 대인관계(治人)를 형성하고자 부단히 공들이고 또 공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거리를 보라, 얼마나 자유로운가. 공공장소나 직장에서 편하게 풀어놓고 격식에 맞지 않는 옷을 입으며 제멋대로 자세를 취해도 누구 하나 지적하지 않고 지적하면 오히려 공격당하는 세상이 돼버렸다. 우리는 모두 자기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그 누구도 남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음속의 생각을 말과 행동으로 표현하는 격식을 법도대로 배우고 익히도록 하는 곳이 요구된다. 바로 해피니스예절관의 몫이기도 하다. 강성금 안산시행복예절관 관장

[문화카페] 입추를 앞둔 단상

절기는 바야흐로 가을의 시작인 입추를 앞두고 있는데 아직 긴 장마가 끝나지 않아 폭우로 인한 피해가 늘어가고 있고 늦더위도 예상되어 걱정이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상이변은 폭우와 폭염이라는 불청객의 방문으로 지구촌을 힘들게 하고 있으니, 코로나19로 힘든 시절과 겹쳐 안타까운 마음에 그저 하늘만 올려보며 장마가 물러가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전통 농경사회에서 입추 무렵은 벼가 한창 익어가는 때여서 맑은 날씨가 계속되어야 했다. 하지만 입추가 지나서도 비가 닷새 이상 계속되면 가을 풍작을 기대하기 어려우니 조정이나 각 고을에서는 비를 멎게 해달라는 기청제(祈晴祭)를 올렸다 한다. 음식의 가짓수를 줄인다고 비가 멈추지는 않겠지만 백성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고 하늘을 공경하는 경천애민(敬天愛民)의 실천인 동시에 지도층의 절제와 사회적 책무를 당부하는 의미도 있었다고 생각된다. 우리 전통의 품앗이와 두레의 정신을 떠올리며 올 여름 휴가는 수해지역을 찾아 자원봉사를 하거나 지역 농산물을 구매하는 등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 정신을 발휘했으면 한다. 코로나19로 인한 감염자 확산이 줄어들며 박물관, 공연장을 비롯한 공공시설들이 다시 재개관을 시작했다. 코로나 감염 확산을 위해 부득이한 조치였지만 예술관련 시설의 운영중지와 행사의 취소로 인해 많은 예술가들이 무대를 잃고 상실감에 젖었고 생계도 지장을 받고 있는 현실에서 재개관은 반가운 소식이다. 힘이 들수록 예술을 통해 심미적인 만족과 심신의 안정을 취하고 카타르시스를 통해 새로운 삶의 의지를 갖게 하는 것이 예술의 사회적 기능이기에 예술관련 공공시설의 휴관은 신중하면서도 제한적으로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공연장을 비롯한 예술관련 시설은 일반 시민들이 이용하는 공간인 동시에 예술인들이 창작을 하고 관객과 소통하는 삶의 공간이기에 철저한 생활 방역과 건강수칙을 지켜 다시 공연장이나 박물관, 미술관 등이 문을 닫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코로나19로 인해 기존의 일상과는 다른 비대면 문화가 새롭게 주목받으며 다양한 시도들이 진행되고 있다. 학교 교육에 있어 원격교육 및 온라인 교육의 질적 향상을 위한 기술적 대안과 함께 다양한 발전방안들이 나오고 있어 교육 현장에 새로운 패러다임이 만들어질 것 같다. 여름이 지나고 9월과 10월에 예정된 많은 지역 축제들 또한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새로운 축제 프로그램 개발은 물론이고 생활방역과 축제의 조화로운 운영을 위해 고민하고 있다. 비대면의 시대를 살아가며 우리는 새로운 도전을 맞이하게 됐고 포스트 코로나시대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인류의 긴 역사가 환경에 대한 적응과 새로운 도전을 통해 문명을 개척하며 새로운 시대를 열어갔기에 이 위기 또한 훗날 한 시대를 구분하는 분기점이 되리라는 낙관적인 생각을 하며 오늘도 발열체크를 하고 QR코드를 찍으며 일상을 시작한다. 이 또한 훗날의 추억이 되리라. 한덕택남산골 한옥마을 상임예술위원

[문화카페] 불확실성 vs 확실성

심리학자 마리아 코니코바 (Maria Konnikova)는 불확실성과 함께 사는 현대인들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주의를 기울이고 세심하게 대응하라. 확신을 갖는 것은 좋지만 더 질문하라. 안 좋은 일이 닥쳤을 때 우울해하거나 감정적으로 대처하기보다 상황을 관찰하고 최선의 선택이 무엇인지 판단하라. 불확실성(Uncertainty)은 어떤 사물이나 일에 관해 의심되거나 확신이 부족한 상태를 말한다. 지속되는 코로나19로 인해 세계는 불확실성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불확실성에 대한 일반적인 대응은 두려움에 빠르게 젖어들어 평소의 익숙한 생활패턴 보다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패턴으로 변화한다. 이에 따른 불편함 정도는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감수해야 하고 큰 문제로 삼지 않는다. 어느덧 우리 주위에 반년 이상 머무는 전염병은 잠시 피었다 사라지는 annual flower(1년생 꽃)가 아닌 perennial(매년 다시 피어나는 다년생 꽃)이 되어가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배적인 의견이다. 백신과 치료약이 가까운 시일 내에 개발되어도 지구촌 전체에 보급되려면 예상보다 긴 시간이 필요하다. 불확실한 심적 상태에서는 필수적인 움직임 외에는 여타활동을 기피한다. 공연이 취소되는 고통도 뒤따른다. 지구 곳곳의 예술단체들이 내년시즌의 계획과 그 성공을 예견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그럼에도 인류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피하거나 지나치게 움츠리는 것도 바른 선택이라고 볼 수 없다. 오히려 지나온 수개월의 암울한 터널을 지나며 숨 막히는 이 사회의 불확실성을 낮추고 확실성을 높이고자 무슨 노력을 기울였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확실성(Certainty)은 어떤 사물이나 일을 의심 없이 신뢰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며 기회는 순식간에 지나가고 경험은 유동적이며 판단은 어렵다.(힙포크라테스 격언) 예술은 인류역사상 가장 확실하고 고귀한 유산이다. 인간들이 힘써 추구하는 기회의 획득과 재물의 축적은 삶의 편의를 제공하는 중요한 요소일 수 있지만 잠시 후 사라질 들판의 풀과 아침의 안개와도 같다. 예술활동을 이끌어가는 클래식 공연계는 확실한 가치와 사명감으로 담대하게 대처해야 한다. 이전보다 더욱 활발하고 확실하게 이 어두운 사회를 이끌어가야 한다. 지친 국민을 무엇으로 위로할 수 있을까? 이들을 치유할 수 있는 음악적 힐링에 눈을 돌려야 한다. 죽음이 눈앞에서 바람처럼 스쳐가는 처절한 전쟁터 한구석에서 연주되는 하모니카 소리가 적과 아군의 마음을 잠시나마 포근하게 한다. 폭격으로 폐허가 된 바르샤바 교외의 한 주택에서 흘러나오는 피아노 소리는 점령군을 감동시킨다. 온 종일 입안에 단내가 날 정도의 훈련 후 달빛 스며드는 초소에서 읊조리는 어머니를 그리는 노래는 천사들의 칸타타였다. 음악이 평화와 위로를 가져오는 가장 확실성 있는 무기이다. 예술은 확실성의 요람이며 무덤이다. 바야흐로 황폐한 생활에 예술을 통해 활력을 전해줄 시간이 도래했다. 연주자와 연주단체들은 지속적인 탐구와 노력으로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장르의 연주형태를 혁신적으로 개발하여 청중과의 지속적인 만남을 이어가는 것에 노력을 기울어야 한다. 전염병으로 인한 예술계의 후퇴는 있을 수 없다. 예술은 청중과의 직접적인 만남으로 인해 화려하게 꽃필 수 있다. 같은 장소에서 숨 쉬며 느끼는 공존의식이 예술이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무기력에 빠져 있는 국민을 위해 선봉에서 아름다운 노력을 기울이는 예술가들을 사랑하자. 그리고 그들이 아름다운 역사를 만들 수 있도록 아끼고 보살피자. 함신익 심포니 송 예술감독

[문화카페] 츠다야의 성공신화, 라이프스타일 기획

일본 규슈 다케오(武雄)시는 도서관과 카페와 서점이 동거하는 독특한 구조의 시립도서관으로 유명하다. 인구 5만의 소도시 도서관은 개관 1개월 만에 이용객 10만을 돌파하는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다. 이는 2006년 새로 부임한 도쿄대 출신의 젊은 시장 히와타시 게이스케(渡啓祐)의 행정개혁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다. 국내에서도 많은 공립도서관이 이를 벤치마킹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실제 다케오시립도서관 성공은 츠다야(屋)서점에 그 운영을 위탁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츠타야는 일본 최대 CDDVD 판매. 대여 업체이자 최고의 라이프스타일 기업으로 츠다야 서점의 민간 운영방식이 공공도서관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다. 도서관 내에는 스타벅스가 입점해 있고 서점과 휴식공간이 공존한다. 고객들은 느긋하게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밤늦게까지 책을 볼 수 있고 도서관 안에서 담소를 나눌 수도 있다. 책의 진열도 1920년대 도입된 십진분류 방식과 달리 20여 개의 주제별 분류체계를 도입하여 편의성을 강화하였다. 요리책 코너에는 식기를 나란히 진열하고, 여행 책자 옆에는 관련 영화 DVD가 함께 자리한다. 일반서점과 달리 베스트셀러 코너를 없앤 대신 소파와 탁자를 곳곳에 배치했다. 또한 각 장르에 정통한 직원들이 고객의 기분에 맞게 음악과 책도 추천해준다. 이런 이유로 츠타야 서점은 일본인들에게 가보고 싶은 곳 머물고 싶은 곳으로 손꼽힌다. 국내에서도 교보문고 등 서점들이 이를 벤치마킹하고 있지만 츠다야의 외형을 부분적으로 도입하고 있을 뿐이다. 1983년 작은 서점에서 출발한 츠다야는 일본 전국에 1천400여 개의 매장을 가지고, 연간매출액 2조 원 이상에 달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런 성공신화를 일궈낸 주인공은 CCC(Culture Convenience Club)의 마스다 무네아키(增田宗昭) 대표이다. 그는 자신을 기획자라 소개하며 미래사회는 디자인과 같은 지적자본이 중심이 될 것이라 주장한다. 그는 생활문화인 라이프 스타일을 기획한다. 그는 자신의 경영철학으로 고객가치와 라이프스타일 제안 두 가지를 꼽고 있다. 그가 가장 중시하는 것은 고객가치이다. 매장(賣場)을 매장(買場)으로 인식하고 판매자 중심이 아닌 구매자 중심의 편안함을 우선시한다는 것이다. 또한, 라이프스타일의 제안은 가속도로 변모하는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를 읽고 선제적으로 이를 제시하는 것이다. 이 제안을 그는 기획, 디자인이라 하고 이 기획과 디자인의 역량은 미래사회를 선도할 지적자본이라 한다. 그는 고객들에게 편안한 휴먼스케일의 공간을 제공하는 일을 라이프디자인의 핵심으로 삼는다. 기업의 운영방식 역시 휴먼스케일의 조직을 추구한다. 대기업처럼 상사와 부하직원 간의 직렬형, 관료형 조직이 아니라 소수의 인원으로 구성하여 직원들 모두를 동료관계인 병렬형 조직으로 운영한다. 또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창의적 역량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조직문화를 조성한다. 고객과 사회에 대해서도 병렬형, 크라우드형으로 인식하고 있는 데 이러한 사고가 창의적인 라이프스타일 디자인으로서의 지적자본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힘이다. 기업과 마찬가지로 공공기관의 성패 역시 얼마나 풍부한 지적자본을 생산하고 제시할 수 있는가로 결정될 것이다. 김찬동 수원시립미술관장

[문화카페] 깨어 있는 독자의 조직된 힘

또 터졌다. 도서도매상 인터파크송인의 부도 소식을 듣고 나온 출판인들의 첫 번째 일성이었다. 벌써 세 번째다. IMF외환위기 때, 2017년, 그리고 2020년. 2017년의 부도에서 피해 출판사들의 채권 탕감, 공적 자금 투입, 인터파크의 인수로 정상화됐으나 2000년 중 주문량이 가장 많았던 5월 지불을 앞두고 급작스레 또다시 기업회생 신청을 했다. 송인서적이 부도를 내고 회생을 거듭하는 사이 그들이 만든 태풍으로 인해 주저앉아야 했던 중소출판사는 한둘이 아니며, 특히 이번에는 선입금을 하고 책을 받았던 동네책방에까지 그 피해가 미치고 있어 안타까움이 더한다. 연거푸 당한 이러한 사태 앞에서 도서유통구조의 공공화라든가 제3의 대안 마련을 위한 정책적 지원이 시급한 실정이다. 격랑처럼 몰아치는 도서유통의 불안함 속에서도 출판계에 촛불과도 같은 희망을 보여주는 이들이 있다. 바로 독자들이다. 적극적인 독자들의 책을 향한 자발적인 지지와 연대는 그 어떤 정책보다도 출판계에 따뜻한 응원을 보내준다. 3ㆍ1운동 100주년이기도 했던 2019년에는 그와 관련된 책들이 다수 출간되었는데 그 중 우리나라 100년의 근현대사를 개인의 인생으로 풀어낸 김지연 작가의 『백년아이』라는 그림책이 눈에 띄었다. 이 책이 나오자 독서모임 선향에서는 『백년아이』 연보에 맞춰 대한민국 근현대사 100년의 역사와 관련된 책, 그림책, 영화, 음악 등을 모아 『백년아이』를 펴낸 다림출판사에 건넸다. 다림출판사는 그 자료를 대형 포스터로 만들어 전국의 작은 도서관과 동네책방에 무료로 배포하며 또 다른 책 읽기의 바람을 몰고 왔다. 인스타그램에서는 그림책 나눔을 하는 독자들이 있다. 가슴을 울렸던 그림책, 좋아하는 출판사의 그림책, 혹은 권하고 싶은 그림책을 골라 직접 구입을 하고 정성껏 포장을 해서 이벤트를 통해 꾸준히 나눈다. 정말 공짜냐고 의아해하는 분들도 있지만, 책을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마음을 백번 이해하고 공감할 것이다. 마치 맛있게 먹은 음식을 권하듯 자신이 그림책을 통해 받은 위로를 타인과 함께 나누려 그림책을 전하는 이런 이벤트를 진행하는 분들 역시 점점 많아지고 있다. 많이 가져서가 아니라, 내가 좋았던 것을 누군가와 나눔하고 싶은 마음이 책에 닿고 있다는 것이 출판계에는 큰 응원이자 희망이다. 그 뿐만 아니다. 독자들이 직접 매거진을 만들어 책에 대해 탐구하고 토론하며 그들의 시각에서 맛깔 나게 요리하기도 한다. 슬로건도 확실하게 독자기반 그림책 매거진으로 표방하는 라키비움J의 이야기다. 2018년에 창간호가 출간된 라키비움J는 올해에 3호를 발간했는데, 발행부수도 창간호 800부에서 3호는 2천200부로 늘었으며, 출간 후 한 달 내에 거의 매진 기록을 세우고 있다. 기자단 모두 독자들이다. 그림책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주고받던 독자들이 모여 그들의 이야기를 담고, 또 다른 독자들은 매번 색다르게 펼쳐지는 라키비움J를 열렬히 기대하고 반기며, 진정한 독자들만의 그림책 마당을 펼쳐나간다. 그들의 활동이 활발해질수록 긍정적인 영향을 받는 곳은 출판계이다. 라키비움J 3호 심층 코너에 소개된 그림책 『인어를 믿나요?』는 잡지가 출간되자마자 전 온라인서점에서 매진되었으니 말이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가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면, 출판계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독자의 조직된 힘이리라. 그들이 있기에 태풍 속에서도 버텨내는 힘을 얻는다. 오승현 글로연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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