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103년 전 곤궁한 희망의 봄날

3·1절 오후에 여주 여강(驪江) 강변을 산책하던 소설가 선배가 전화기 너머에서 말했다. “그리고 말이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도 저 하늘에 우리의 보통 이성과 다르지 않은 존재가 있어 내려다 본다면, 하이고 저런 잡스러운 명분으로 개미 같은 것들이 글쎄 또 서로…”. 그 전장에서 폭발과 화염, 총성과 사상(死傷)이 속출하고 있다. 21세기에 일어난 20세기의 비극. 자주 독립국가의 의향을 이웃 대국이 탐탁하지 않다고 전면 침공하다니. 민간인도 가리지 않기에 범죄에 해당하는 이 국가폭력은 갈등 자체에서가 아니라 푸틴정권의 속성에서 기인한다고 할 것이다. 독재 연장에 유리해지려 갈등을 부풀리며 과도한 애국주의를 짐짓 악용한 사태가 아닌가. 우리는 같은 시각으로 중국의 시진핑 체제가 야기한 홍콩탄압과 서남공정 동북공정 등 이해 못할 부조리 확대의 정체를 엿볼 수 있다. 오늘 한반도의 고질인 북핵의 이면도 마찬가지다.

오는 3월9일 새 정권 수립을 앞둔 이 나라의 상황은 1950년대 자유당 시절 선거풍토보다 낫지 않다. 선출에 염치 있는 호소가 아니라 권력을 획책하는 정략과 정쟁으로 그 경계가 터질 듯 아슬아슬하다. 우리가 지겨워하고 짜증을 내도 여전히 상대의 비전을 왜곡하고 무관한 억지 비난을 부착한다. 민주주의 권력의 기본은 무엇보다 상대 배려와 공공 윤리성이 아니던가. 숱한 사연과 고통으로 민주화 장정을 거쳐 온 우리가 그 윤기(倫紀) 퇴행을 탄식해야 하다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이번 대선 정국의 말미에서 우리는 모두 103년 전 곤궁한 희망의 봄날에 우리의 선조들이 생명을 걸고 절실하게 희구했던 염원을 준열히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허식의 하에서 이해상반한 양 민족 간에 영원히 화동(和同)할 수 없는 원구(怨溝)를 거익심조(去益深造)하는 금래 실적을 관하라. 용명과감(勇明果敢)으로써 구오(舊誤)를 확정(廓正)하고, 진정한 이해와 동정에 기본한 우호적 신국면을 타개함이 피차간 원화소복(遠禍召福)하는 첩경임을 명지(明知)할 것 아닌가”. 잔포하고 간교한 일제에게도 이러했는데 그 간곡한 심정과 의지를 받들어야 할 의무가 있는 여야가 서로 그렇게 못 할 리가 없다. 국가의 다행 앞에서 여야의 이해란 게 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지지를 달리 해도 대선 이후를 더 걱정한다. 최근에 여당은 정치개혁 통합정부를, 야당은 헌법의 공화를 준수하며 국민통합을 이루겠다고 공언했다. 만약 새 정권이 그러지 않거나 어떤 정치세력이 협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대선 과정에서 감행한 추태까지 소급해 탄핵할 것이며, 3·1정신을 훼손하고 농락한 일제(日帝)와 비슷한 무리로 민주의 역사에 기록할 것이다.

김승종 시인·전 연성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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