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소통·창조의 무대 ‘아시아 송 페스티벌’을 준비하며

우리나라는 근대 이후 서양문화를 적극 수용하였다. 그 이후, 더 우월하고 발전된 형태로 보이는 서양문화를 중심으로 융합하던 시대적 패러다임에 갇혀있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는 각국의 문화적 다양성과 그 차이를 인정하고 상호문화를 존중하는 다문화주의로 빠르게 변모하고 있다.또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문화의 상대성에 주목하고 다른 문화를 융합하여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다양한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다문화주의는 인류학적, 사회학적으로 다양성을 내포하며, 문화는 물론이고 정치, 경제, 사회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나타나고 있다. 다문화 현상은 과거 인류의 역사 속에서도 상존했다. 하지만 과거의 다문화주의는 지배적인 문화의 억압으로 인하여 개인과 소수집단의 가치실현이 왜곡되었지만, 현대에 나타나고 있는 다문화주의는 한 문화에 기반 하지 않고 여러 문화의 다원성과 상대성을 원칙으로 역동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얻어진 산물이라는 점에서 그 차이가 있다. 우리의 국악도 문화적 다원성과 상대성을 원칙으로 아시아음악 속에 넣고 보아야 더 정확히 보인다. 우리 음악이 글로벌 문화로 꽃피우기 위해서는 우선 문화적 동질성이 있고, 다양한 음악문화를 지니고 있는 아시아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한국음악과 아시아 음악이 융합하여 역동적인 상호작용을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오리엔탈리즘에 저자로 잘 알려진 에드워드 사이드(Said Edward)는 어떤 문화도 단일하거나 순수하지 않으며, 모든 문화는 상호간의 영향을 통해 혼합되고 변화한다고 하였다. 문화의 발전은 이처럼 서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신뢰를 쌓아갈 때 가능할 것이며, 비로소 불통이 해소되고 인간사이의 복잡한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교육부 발표에 따르면 2017년 현재 우리나라는 다문화학생 10만명 시대에 들어섰다. 10년 만에 10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특히 경기도는 다문화학생이 2만3천723명으로 전체의 약 24%를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다른 지역보다 월등히 높다. 문화는 사람이 모여 상호간 소통을 통해 혼합된 생성물인 만큼 경기도는 다른 어느 지역보다 문화 창조에 필요한 풍부한 문화자원의 보고라 할 수 있다. 다문화에 대한 사회적 인식 개선도 중요하지만 문화를 통한 공감과 소통으로 다문화가정의 부부간 갈등을 해소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예컨대 한국인 남성 배우자가 부인의 고향인 베트남 노래 한 곡정도 부를 수 있다면 어떨까. 노래를 함께 부르며 공감할 수 있고 서로를 이해하는 마음이 깊어질 수 있다.서양음악이 대부분인 한국문화 중심에서 벗어나 아시아문화를 이해하고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함께 소통할 수 있는 문화예술 프로그램 개발이 필요하다. 또한 그들이 익숙하고 듣고 싶은 음악을 우리식으로 새롭게 요리해서 더 맛있는 음악을 들려준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한국의 불고기가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아 ‘불고기 버거’로 미국에 역 수출 한 것처럼 우리 한국음악의 바탕이 그들의 문화와 어우러지고, 한류의 파도를 타고 대한민국을 넘어서 아시아 전체가 향유하는 음악이 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다가오는 5월27일 경기도문화의전당에서 열리는 경기도립국악단 기획공연 ‘아시아 송 페스티벌’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다문화사회의 상대적 소외를 극복하고 소통과 창조적 문화발전을 위해 기획한 음악회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베트남, 캄보디아, 말레이시아, 몽골, 북한 등 각국의 정상급 가수들이 한자리에 모여 우리의 국악관현악 반주에 맞추어 공연을 펼친다. 아시아 국가들의 대중가요에는 그 나라의 문화가 자연스레 녹아 있다. 각 국 언어로 전달되는 메시지로부터 아시아 음악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소통의 자리가 될 것이다. 다문화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어떠한 장벽이 없이 함께 즐길 수 있을 때 우리가 나눌 수 있는 문화의 폭도 더 넓어질 수 있을 것이며, 진정한 소통과 창조적 문화발전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최상화 경기도립국악단 예술단장

[문화카페] 자연의 미술 - 야투(野投)

1982년 여름 나는 자연 속에서 작업하는 작가들과 만났다. 지난 36년간 지속적인 활동을 통해 국내외 자연미술운동을 이끌고 있는 야투 그룹의 멤버들이다. 나는 이들과 함께 자연과 인간이 함께하는 새로운 형식의 미술을 실험해왔다. 자연은 인간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불가분의 관계에 있지만 일반적으로 자연과 인간은 서로 인격적인 소통은 할 수 없다. 인간은 자연을 관리하는 유일한 존재이고 자연은 때로 아무런 이해관계나 선악의 판단 없이 인간의 생명을 위협한다. 사람들은 흔히 자연과의 교감을 이야기 하지만 존재의 성격이 다른 두 세계가 소통한다는 것은 다분히 관념적 발상이다. 자연으로부터 예술 작업의 모티브를 얻거나 표현을 위한 아이디어를 얻는 것은 인간 중심의 접근방식이다. 야투는 자연과 인간 사이에 접선 가능한 지점을 만들어 나감으로써 미술을 통한 자연과 인간의 실질적인 만남을 주선한다. 이러한 접점의 발생은 자연의 생명력이 작업의 중심이 되는 자연의 미술일 때 가능하다. 나는 자연 속에서 나의 생각을 실현하기 보다는 자연의 다양한 양상에 반응하는 작업을 선호한다. 나를 에워싸고 있는 불확실한 지식과 욕망을 내려놓고 원초적 몸 감각이 작동하여 자연과 조응해야만 자연미술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자연에 다가가서 만지고 연결하고 붙이는 등의 최소 행위로 이루어지는 야투는 자연을 재료 혹은 작품 설치 장소로 사용하지 않고 자연과의 관계 맺음을 통해 살아서 작용하는 자연을 드러낸다. 야투작업은 시각적인 결과물을 중시하기보다는 자연과 교감하는 과정을 즐긴다. 일반적으로 예술가들이 자기 작품세계 구축에 매진한다면 야투작가들은 자기를 비워내는 수행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미술을 드러내기 보다는 자연과 하나 되기를 시도한다. 이러한 야투작가들의 행위는 사진이나 영상으로 기록됨으로써 기존 미술 안으로 들어온다. 자연미술가들은 왜 자연과의 만남을 시도하는가? 이는 자연으로부터 독립되어있으나 자연을 떠나서는 한순간도 존재할 수 없는 인간 존재의 부조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함일 것이다. 자연과의 일체감을 추구하는 야투는 모순적 상황에 처해있는 인간이 자연과 만나기 위해 찾아낸 ‘소통 코드’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야투가 현실 도피적 자연탐닉에 머무는 것을 경계한다. 자연에 반응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 세계를 더욱 풍부하게 인식하면서 자기 숨결이 살아있는 작업으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야투는 자연과 인간 사이에 항시 존재하던 교감의 방식에 붙여진 이름이며, 기존 미술의 맥락에서 이탈하여 자연과 대화하는 독특한 체험이다. 비록 나와 자연 사이에 잠시 존재하다 사라지지만 자연의 미술-야투는 마음속에서 더욱 생생해진다. 나는 야투가 인간의 의식을 해방시켜 창의적 상상력을 자극하길 바라며, 환경오염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자연과의 조화로운 공존의 방식을 제안하는 미술이 되기 바란다. 전원길 서양화가

[문화카페] 수강생 N할머니

‘나는 우리 남편 건강 때문에/먼 산은 못 가고 가까운/팔달산으로 자주 운동을 간다/맑은 공기 마시면서 걷는다/낙엽들이 쌓여 있다/나는 나이도 잊은 채/어린 동심으로 내려간다/은행잎도 주워 머리에 꽂고/단풍잎도 머리에 꽂고/낙엽들을 밟으며 걸어간다/바스락 바스락 바스락/소리를 낸다/너희들 아프지? 내가 밟아서/미안하다’ 산책길 앞의 시는 내가 가르치는 글쓰기반의 N이라는 할머니 수강생이 쓴 글이다. 입만 열었다 하면 가방끈이 짧으니 잘 봐 달라고 애교(?)를 떠는 분. 그녀는 글도 나오는 대로 적는다. 그런데 나는 그녀의 치장하지 않은 이런 글이 오히려 마음에 든다. 게다가 맞춤법이며 띄어쓰기조차 제대로 안 된 그녀의 글에서 왠지 진실함을 발견한다. 그래서 부끄러워하는 그녀에게, 그리고 다른 수강생들에게도 이렇게 이른다. “정직하게 쓴 글보다 더 잘 쓴 글은 없습니다. 맞춤법이나 띄어쓰기 좀 안 되면 어떻습니까. 그런 것은 편집자들이 다 알아서 잡아줍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그냥 쓰기만 하세요.” 나는 글과 요리는 같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요리를 잘 하는 사람은 되도록 양념을 적게 쓴다는 것을 안 뒤부터다. 양념을 적게 써야만 재료의 본래 맛을 제대로 낼 수가 있다고 한다. 곧 소박함을 추구하는 요리법이다. 절간의 음식이 담백한 것은 이 요리법을 구사하기 때문으로 안다. 이에 반해 시중의 음식은 대개 맵고 짜고 달다. 그래야만 손님들의 구미에 맞는단다. 글도 음식과 다를 바가 없다. 느낀 그대로를 적으면 좋은 글인데 자꾸 꾸미려고 든다. 그러다 보니 본래의 맛이 없어진다. 아니 맛뿐이 아니라 무엇을 썼는지 주제까지 흐려 놓는다. 소위 유식해 보이려는 글일수록 이런 종류의 글이 많다. 시(詩)란 것도 그렇다. 왜 그리 비틀고 쥐어짜고 그것도 모자라서 고무줄 늘이듯 해야 하는가. 꼭 그래야만 좋은 시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법정 스님의 글은 누구나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담고 있는 뜻은 깊고도 그윽하다. 이해인 수녀의 시는 초등학생이 읽어도 좋을 만큼 쉬운 언어로 세상을 노래한다. 그러나 읽을수록 그 맛이 우러난다. 천상병의 시는 더더욱 쉽고 간결하다. 어떤 것은 한글을 갓 깨우친 아이가 쓴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시를 읽고 오히려 마음이 즐거워진다. 글만 그런 건 아니다. 우리는 꾸미지 않은 자연 그대로인 것에서 오히려 친근함을 느낀다. 그 대표적인 것이 산이 아닌가 싶다. 만약 산을 인공적으로 깎아 세웠다고 해 보자. 누가 그토록 산을 오르려고 하겠는가. 산의 그 꾸미지 않은 모습을 보러 우리는 오늘도 등산화를 찾는 것이리라. ‘내가 나무이고/내가 꽃이고/내가 향기인데/끝내 나는 내가 누군지 모르고/헛것을 따라다니다/그만 헛것이 되어 떠돌아다닌다/나 없는 내가 되어 떠돌아다닌다.’ 김형영 시인의 헛것을 따라다니다란 시의 끝부분이다. 꼭 요즘의 우리들을 꼬집는 것 같다. 그렇다! 되도록이면 있는 대로 살자. 글도 그렇고, 집도 그렇고, 얼굴도 그렇다. 그냥 생긴 대로 살자. 신이 준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다 있는 것이다. 윤수천 동화작가

[문화카페] AI시대 선도를 위한 문화발전 전략

이번 대선에서 핵심 경제이슈의 하나가 바로 4차 산업혁명이다. 많은 산업이 점차로 중국에 잠식당하고 있는 시기에 기술적인 선두를 확보하고 일자리를 늘리기 위한 새로운 먹거리로서 인공지능, 즉 로봇산업을 기대하는 것이다. 로봇은 일의 정밀성이나 지속성 그리고 효율성에서 사람들을 압도한다.더구나 지난번의 세기적인 바둑대국을 벌린 알파고와 같이 스스로 배워서 문제를 해결하는 로봇들은 문제를 알아서 해결해 주는 새로운 로봇시대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기대는 다른 한편으로 걱정스러운 면이 있다. 인공지능산업이 발달하면 할수록 일자리가 줄어들 것이라는 예언들이 나오고 있다. 로봇산업이 산업혁명 이후의 인류의 역사에서 나타나는 신기술처럼 새로운 산업들을 만들어내고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는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엄청난 데이터들을 저장하고 읽어내어서 문제 해결의 방안을 신속하게 찾아내는 능력이 탁월하기 때문에 사람이 그동안 해결하지 못하던 일들을 처리하는데 그 수요가 급속히 늘어갈 것이고 사람들의 생활도 더욱 편해질 것이다.그런데 이 시점에서 걱정하고 우리가 준비하여야 할 일은 4차 산업 발전이라는 경제적인 과제만이 아니다. 인간사회에서는 이제 일자리도 쪼개어서 여러 사람들이 일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가고자 하는데 로봇의 발전은 그 효과를 상쇄할 것이라고 우려되는 것이다. 이런 일은 현재에도 수없이 일어나고 있고 아마도 새로운 로봇산업이 발전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아니다. 더욱 가속될 따름이다. 인공지능로봇이 인간의 일자리를 줄이는 것을 어떻게 대처할 수가 있을까? 바로 교육과 문화 영역의 체질개선이다. 새로운 산업체계에 대비하기 위해서 이미 융합적이고 창의적인 사고의 육성이 화두가 되고는 있지만 가시적인 효과가 나타나기는 아직도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문제는 우리사회의 분화과정에서 만들어진 교육과 문화의 격벽현상 때문이다. 문화와 교육은 동전의 표리 같은 존재이지만, 정부의 조직에 있어서 별도로 운영되고 이에 따라서 사회적으로 두 분야가 활동하는데 적극적인 정책성 연관성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사람은 과거의 것이든 현재의 것이든 간에 문화에서 배우고 문화를 가지고 살아가고 문화를 후손에게 물려준다. 그런데, 배움이 체제적으로 구성된 방식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효율성이 없다. 신라의 화랑제도같이 사회 속에서 사람들의 문화를 보고 느끼고 융합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고 하는 기회가 많아지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문화는 교육의 자원이자 생산의 방편이기도 하고 소비의 대상이고 미래사회의 확장성이 가장 큰 영역이다. 로봇시대에 문화야 말로 인간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는 인간의 건드릴 수 없는 고유한 영역일 것이다. 다양한 로봇의 생산을 주도할 수 있는 창의성을 기르는 방안은 바로 문화체험을 통한 ‘스스로 깨달음 교육’일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전개될 로봇시대의 새로운 문화를 우리가 선도하게 만드는 것이 미래전략의 핵심이다. 그리고 문화는 로봇시대의 인간의 늘어난 잉여시간을 보내는 수단으로서도 대단히 중요하고 앞으로 획기적인 문화향유모드의 선도를 구상하여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바로 앞에 닥친 일자리의 해결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인 것이다. 인간 사회의 이 밀레니움 미션의 해결책은 바로 교육과 문화, 우리 사회에서 두 거대 분야의 통합적인 운영체제의 개발이며, 현실적으로 창의성의 개발이나 일자리 창출을 위한 전제라고 할 수 있다. 배기동 한양대 교수·국립박물관문화재단 이사장

[문화카페] 스스로 빛나기

한꺼번에 팝콘처럼 피어난 아파트 단지 안의 벚꽃을 보면서 저 많은 꽃을 피워내느라 힘들었을 나무의 노고를 생각하게 된다. 꽃 한 송이를 피우는 데 무척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고 하니 이 즈음의 나무들은 나무발전소인 셈이다. ‘봄은 땅에서 오고 가을은 공중에서 온다’고 했는데 나무들은 봄을 가지 끝까지 끌어올리느라 야생화들보다 개화에 시간이 더 많이 걸린 것이다. 젊은이들에게 ‘봄’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꽃을 물어봤더니 대부분 벚꽃이라고 대답했단다. 그 이유는 벚꽃이 화려해 눈에 잘 띄는 데다가 지구 온난화로 벚꽃 개화 시기가 일주일가량 앞당겨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개나리와 진달래가 봄의 전령인 것처럼 여겨지던 시절이 벌써 아득하다. 법정스님 수필을 읽다 보니 화초를 애지중지 보살피다가 거기에 얽매이게 되자 꽃에 대한 사랑도 결국 집착임을 깨닫게 된 스님이 난초 화분을 다른 사람에게 주거나 장미 등 기르던 화초를 다른 데로 옮기는 이야기들이 있다. 그 빈 뜰에 시간이 흐르자 야생화들이 피어난다. 달맞이꽃은 해질녘에 핀다. 저녁 예불을 마치고 뜰에 나가면 수런수런 여기저기서 꽃들이 문을 연다. 투명한 빛깔을 보고 있으면 그 얼까지도 환히 들여다보이는 것 같다. 박꽃처럼 저녁에 피는 꽃이라 그런지 애처로운 생각이 든다. 혼자서 피게 할 수 없어 여름내 나는 어둠이 내리는 뜰에서 한참씩을 서성거렸다. 그 애들이 없었더라면 여름의 내 뜰은 자못 삭막했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마른 바람이 불어오자 꽃들은 앙상한 줄기에다 씨를 남긴 채 자취를 감추어갔다. 오늘 아침 마지막 꽃대를 거두어주었다. -빈 뜰 중에서 꽃들이 수런거리며 문을 여는 시간, 애처로운 마음에 “혼자서 피게 할 수 없어” 꽃 옆에서 여름내 서성거리는 스님. 이게 자비심일 게다. 함께 겪는 것. 비 오는 데 가장 고마운 사람은 우산을 내미는 사람이 아니라 같이 비를 맞아주는 사람이라지 않는가. 타자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될 때 우리는 돈이나 효율성의 잣대를 들이대지 않을 것이다. 법정 스님의 글을 읽으면서 늘 번잡스럽기만 한 내 마음의 뜰을 떠올려 본다. 마음에도 여백이 있어야겠다. 더 움켜쥐려고만 하지 말고 햇빛 한 줌, 바람 한 줌 그리고 몇 송이의 달맞이꽃, 나팔꽃, 메꽃 등이 피어 있는 빈 뜰을 두어야겠다. 뒤로 물러 서 있기 땅에 몸을 대고 남에게 그림자 드리우지 않기 남들의 그림자 속에서 빛나기 -라이너 쿤체 은엉겅퀴 최근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시다. 제 키를 높여 햇빛을 독차지하려는 무한경쟁 사회에서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스스로 빛나는 생존 전략. 라이너 쿤체는 “시란 조용한 인식을 매개하는 ‘맹인의 지팡이’ 같은 것”이라고 했다. 평소 깨닫지 못하는 존재의 비밀을 드러내주는 이런 시를 만날 때 내 정신도 함께 고양된다. “나의 의문을 풀어주는 데는 열 권의 철학책보다 창가에 핀 한 송이 나팔꽃이 낫다”는 휘트먼의 말을 생각하며 이 봄, 한 송이 꽃과 깊게 눈을 마주쳐 본다. 박설희 시인

[문화카페] 시민의 정부와 문화민주주의 구현

염태영 수원시장은 신년 초에 올해를 ‘수원시민의 정부’ 원년이 되는 해로 선포하고 “시민에 의한, 시민을 위한, 시민이 싱크탱크가 되는 수원시를 만들겠다”고 천명하였다.이것은 염시장이 2010년 민선5기 수원시장으로 취임하면서 이미 ‘도시의 주인이 시민’임을 선언한 것에 그 궤를 같이 하는 의미도 있지만, 촛불집회에서 표출된 민심이 ’국가권력의 시대에서 시민주권의 시대’로, ‘중앙집권의 시대에서 지방분권의 시대’로 패러다임이 전환되어가고 있음을 지켜보며 크게 고무된 것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시민의 정부’의 핵심가치는 ‘시민참여행정’이라고 할 수 있다. 염시장은 “참여를 통해 시민주권이 시정의 곳곳에서 모세혈관처럼 흐르고, 협동의 자세로 공동체의 과제 해결에 힘을 모으고, 포용의 정신으로 서로의 권리를 존중하고, 차이를 인정하는 것을 지향하는” 도시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현재 국민들의 관심은 헌재의 탄핵 선고에 이어진 박근혜 전 대통령 구속, 세월호 인양 및 대선 정국에 쏠려있다. 대선이 끝나면 신임 대통령 취임과 내각 인선으로 국민들의 관심이 쏠릴 것이고, 바로 내년 지자체 선거 준비를 위한 정국으로 빠져 들어갈 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시민들은 장기적인 경제침체로 경기하락과 고물가와 일자리 부족 등으로 삼중고를 겪고 있다. 염시장은 ‘시민의 정부’를 구축하기 위하여 수원 시민의 정부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자치기본조례 제정, 인권영향평가제도 시행, 민주시민교육 강화, 주민자치회 활성화, 아파트 민주주의 정착, 공직 개방형 공모제 추진 등을 시행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는데 이러한 염시장의 ‘시민의 정부’ 원년 선언이 자칫하면 대선 정국과 경제난에 허덕이고 있는 시민들에겐 현재의 시국과 동떨어진 공허하고 생뚱맞은 정치적 수사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따라서 수원시는 ‘시민의 정부’ 원년 선언이 시민들에게 답답한 현 시국의 탈출구이자 반가운 소식으로 다가갈 수 있도록 전방위적이고 구체적인 체감형 정책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시민의 정부를 성공적으로 구축하기 위해서 여러 영역에서 치밀하고 구체적인 계획이 수립되어야 한다. 그간에 이루어진 수원시의 시정계획을 평가해본다면 그런대로 후한 점수를 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허약한 부분은 문화부문이다. 이미 우리에게는 ‘문화기본법’과 ‘지역문화진흥법’이 마련되어 있으나 그 실천은 허약하다. ‘문화기본법’은 문화가 민주국가의 발전과 국민 개개인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영역 중의 하나임을 천명하고 문화의 가치가 교육, 환경, 인권, 복지, 정치, 경제, 여가 등 우리 사회 영역 전반에 확산될 수 있도록’ 지방자치단체가 그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법이고, ‘지역문화진흥법’은 지역주민의 삶의 질 향상과 생활문화가 활성화될 수 있도록 지방자치단체가 지역문화진흥 정책을 추진해야한다는 지방자치단체의 책무를 명문화한 법이다. 그러므로 수원시는 시민이 문화의 단순 향유자가 아닌 문화주체자·문화생산자가 되는 문화도시 수원을 어떻게 만들어 나갈 것인가, 역사문화도시를 어떻게 구현해 나갈 것인가, 생활문화생태계를 어떻게 구축해 나갈 것인가, 어떻게 생활문화시설을 설치하고 운영하고 활성화할 것인가에 대해 필요한 예산 및 재원을 확보하고 배분할 것인가에 대한 비전과 목표, 그리고 로드맵을 시민들에게 제시해야한다. ‘시민의 정부’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이 모든 것의 기획단계에서부터 수행과정까지 시민들이 참여해야 함은 당연하다. 그래야 ‘시민의 정부’이다. 따라서 수원시의 문화진흥에 관한 중요 시책을 심의·지원하고 문화진흥사업을 수행해나가기 위하여 시민들과 전문가로 구성된 범시민 ‘수원시문화진흥위원회’를 우선적으로 설립하여 운영할 것을 제안한다. 김승국 경기도문화재위원

[문화카페] 전통음악 무형문화재 제도의 순기능과 역기능

소중한 것일수록 더 오래, 안전하게 보존하고자 하는 인류의 노력은 오래전부터 계속되어 왔다. 그동안 전통예술은 보존과 전승 차원에서 더 많이 다뤄졌으며, 산업적 콘텐츠로서의 체계적인 노력은 부족했다. 보존과 콘텐츠개발은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으로써 시차를 달리 할 수 없는 것이다. 원형보존과 동시에 그것을 재가공하여 다양한 콘텐츠로의 생산적 피드백을 끊임없이 진행해야 한다. 한국의 문화재 제도는 세계적으로 유래가 드문 전통문화유산 보존정책이다. 현행 ‘문화재보호법’은 1962년에 제정되어 수차례 개정을 거쳐 왔다. 문화재보호법은 무형뿐만 아니라 동산, 사적, 천연기념물, 명승 등을 모두 아우르는 종합법률이기 때문에 무형유산의 보호와 창조적 계승을 위한 맞춤형 법안이 필요하다는 요구가 지속적으로 있어왔다.세칭 인간문화재 제도는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 후 근대 교육체계에 편입되지 못한 전통문화를 소극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졌다. 문화재보호법 제정 당시인 1960년대 사회와 현실을 반영한 법으로서 그 의미가 크지만 55년이 지난 지금 급변하는 세계정세와 국내환경을 모두 수용하기는 너무 벅찬 부분이다. 지난 2015년 3월 제정된 ‘무형문화재 보전 및 진흥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으나 여전히 제도적으로 미흡한 측면이 많다. 전통음악 무형문화유산의 보전과 진흥을 통해 전통문화를 산업적 콘텐츠로 창조적 계승이 가능하도록 법을 개정해야 한다.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도 끊임없이 재창조하며 정체성 및 지속성을 제공하여 인류의 문화적 다양성과 인류의 창조성에 대한 존중을 증진시킨다. 우리나라 무형문화재법도 무형문화유산의 국제적 흐름을 반영해야 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첫째, 확대된 무형문화유산 지정범위에 알맞은 다양한 무형의 유산들을 발굴하고 지정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정부는 무형문화재법에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보호협약 수준으로 범위를 확대하여 반영했다. 기존의 기·예능 위주 범위에서 생활습관, 풍속, 민속자료 등의 개념을 포함시킨 것이다. 아직 법 적용 초기 단계이므로 그 성과를 논하기는 이르지만, 지속적인 특별한 관심이 필요한 부분이다.둘째, 무형문화유산은 형태가 없이 세대 간 전승환경과 시대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특성을 갖고 있으므로 원형만을 유지하는 데서 탈피하여야 한다. 상존하는 변화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 곧 무형문화재의 창조적 발전의 첫 걸음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셋째, 보유자와 보유단체가 없는 문화재를 발굴하여 지정하는데 더욱 힘써야 한다. 사람중심에서 종목중심으로 이동해야 한다. 넷째, 전수·이수교육 및 이수증 발급에 대한 공정하고 객관적인 절차로써 공신력을 확보해야 한다. 이를 위하여 문화재청은 보유자와 보유단체에 위임된 전수교육 이수증 심사 및 발급권한을 회수하였다. 이후 보유자(보유단체)가 자체적으로 발급할 때 보다 이수통과가 어려워졌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앞으로 더욱 체계적인 교육과정과 엄정한 심사를 통해 부여한 이수증이 사회 속에서 좀 더 공신력을 갖게 되므로 문화재청의 지속적인 철저한 관리가 요구된다. 다섯째, 도제식 교육체계의 문제점을 개선하고 전승활성화를 위해 학교교육과 연계한 체계적인 시스템 마련이 필요하다. 여섯째, 지식재산권에 관한 소극적 보호에 그치지 않고 활용을 통해 창조적으로 발전시켜 하나의 콘텐츠에서 다양한 지적재산권과 부가가치가 창출될 수 있도록 추진하여야 할 것이다. 급변하는 환경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이제까지의 보존성과를 바탕으로 발전적으로 계승하기 위한 적절한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 최상화 경기도립국악단 예술단장·중앙대 교수

[문화카페] ‘벽’

대학시절 이야기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근사한 세상이 있을 것 같아 누군가 알 듯 모를 듯한 소리를 하면 귀가 솔깃하던 때였다. 동기생 하나가 고등학교 때 미술 선생님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해주었는데 그것은 ‘벽’에 관한 것이었다.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한동안 친구의 말을 마음에 담고 있었는데 바로 그 미술 선생님이 내가 다니던 대학에 출강하였다. 어느 날 저녁 그분과 술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다. 술이 좀 오를 무렵 나는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를 하면서 그 ‘벽’이 선생님께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선생님은 대답 대신 나를 때리려 했고 함께 있던 사람들은 놀라서 말렸다. 얼마 전 나는 그 ‘벽’이란 말을 다시 떠올렸다. ‘마음의 벽’ ‘현실의 벽’ ‘마의 벽’처럼 벽이라는 글자 앞에 무슨 말을 붙이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다양해지지만 주로 단절과 한계 상황을 표현한다. 요즈음 내가 생각하는 ‘벽’은 예술가의 딜레마에 관한 것이다. 진지한 예술가는 자신을 가두고 있는 견고한 벽을 느끼고 그 벽 너머 새로운 세계를 보고자 한다. 이들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예술가들이 무엇에 반응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작품 세계를 펼쳐나가는지 보면서 마침내 ‘나는 어디로 가야하는지’ 고민하게 된다.이리 가도 앞서는 이가 있고 저리 가도 결국 남의 발자국을 따라가게 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마주하게 되는 ‘막막함’ 그것이 바로 ‘벽’이다. 어쩌면 작가로서 필연적으로 마주해야 할 그 벽을 느꼈다면 이는 축하받을 일이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갈 수 있는 마지막 지점이라면 그것은 절망이다. 이 문제의 벽은 사실 자신이 만드는 것이다. ‘벽에 부딪치다’라는 표현은 벽 너머 세계를 감지한 자만의 한계인식이다. 예술가들의 딜레마는 신세계로 들어가는 문의 열쇠가 문 안에 있다는 데 있다. 벽 너머 새로운 세계를 직접 경험해야만 취할 수 있는 이 열쇠는 논리적으로는 획득 불가이다. 이 모순 상황의 극복은 외부로부터의 힘이 있어야 한다. 그 힘을 우리는 ‘영감’이라 부른다. 영감의 빛을 따라 골몰하던 모든 고민의 벽을 무화 시킨 천재들의 이야기는 때로 통쾌하다. 하지만 예술가들의 경계 이탈은 묘수이자 악수이다. 생존영역을 벗어나는 수 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영감으로 충만한 시인들을 위험한 광인으로 여겨 도시에서 추방하려고 했지 않은가? 하지만 예술가는 너무나도 생생하게 작용하는 영감을 따라 이상한 세계로 뛰어든다. 최초의 영감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자라고 정직한 반응을 통해 힘을 얻는다. 난공불락의 벽이 허물어지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다면 전위에 선 예술가들의 상상력은 더욱 살아 움직일 것이며 어느 순간 그들은 영감의 빛을 맞이할 것이다. 반면에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이쯤에서 장마당을 펼치자’라는 꾀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크다면 우리를 가두고 있는 벽은 점점 높아질 것이다. 지금 우리는 알 수 없다. 누군가의 작품이 제대로 된 예술인지 아니면 허세로운 예술 놀음에 불과한지 말이다. 하지만 더 이상 갈 곳 없는 한계의 벽에 도전하는 예술가들의 행동거지를 눈여겨 보아야 한다. 그들 중에 지금까지 전혀 작동하지 않던 감각을 깨워 우리 사는 세상을 새롭게 보게 하는 예술가가 있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은 새로운 행성을 찾아 우주를 항해 중인 우주인과 같다. 지구에 아무리 급한 이변이 발생해도 그들의 항로는 수정될 수 없다. 귀환 명령을 내리지 말지니 이들과 우리는 미래의 땅에서 만날 것이다. 그 땅은 넓어 끝을 볼 수 없을 것이며 사람들은 더 이상 옛 땅을 그리워하지 않을 것이다. 전원길 서양화가

[문화카페] 이발소 詩, 이발소 그림

어릴 적 머리를 깎으러 이발소에 가면 대형 거울 위에 걸린 시와 그림을 볼 수 있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리니…’ 그 시가 저 유명한 러시아의 대시인 푸시킨의 시라는 것을 안 것은 훨씬 뒤였다. 그러자 궁금증이 고개를 쳐들었다. 이발소 주인은 저렇게 유명한 시를 과연 제대로 알고서 걸었던 걸까, 하는 게 그것이었다. 그리고 왜 그 많은 시 가운데서 하필이면 푸시킨의 시였을까, 하는 것도 의문이었다. 어릴 적 만났던 그 읍내 이발소 주인은 학교라곤 초등학교만 간신히 나왔다고 들었는데, 학력과는 어울리지 않게 베레모에다 금테 안경을 쓰고 있는데다가 세상물정을 훤하게 꿰뚫고 있었을 뿐 아니라 말솜씨까지 탁월해서 동네에서는 알아주는 인물이었다. 그 이발소에는 푸시킨의 시만 걸려 있는 건 아니었다. 시와 함께 그림도 한 점 나란히 걸려 있었다. 초가집 너른 마당에는 어미닭이 병아리들을 데리고 한가롭게 노닐고 울타리 쪽에서는 개가 졸고 있는 풍경화였다. 계절은 마침 가을이어서 초가지붕에는 큼지막한 박이 몇 덩이 얹혀 있고 마당에는 고추를 널은 멍석도 깔려 있었다. 그리고 그림 오른쪽 구석에는 그린이의 이름까지 적혀 있던 기억이 난다. 문화니 예술이니 하는 어휘조차 듣기 어려웠던 가난한 시절에 만났던 그 시와 그림이 이 나이까지 잊히지 않는 이유는 어디 있는 걸까. 그리고 눈이 부시다 못해 감기기까지 하는 이 환한 세상에서 저 케케묵은 이발소 시와 그림이 그리워지는 건 또 어떤 이유에서일까. 아, 이제야 알 것 같다. 슬프고, 절망적이며, 우울하고, 서러운 현재를 결코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며, 서러워하지도 말라는 단순하면서도 반복적인 표현 속에는 놀라우리만치 강한 ‘힘’이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다.그리고 저 농가의 그림 역시 평화와 풍요를 기원하는 가난한 서민들의 바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걸핏하면 외세의 침략을 받아 피난길에 올라야 했던 뼈아픈 역사의 골짜기에서 벗어나 평화로운 마을에서 풍요를 일구며 살고 싶은 인간 본연의 욕망에서 그런 그림이 걸린 건 아니었을까. 오늘날 우리는 넘쳐나는 물질문명과 함께 홍수처럼 밀려드는 문화예술 속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다양한 제작물과, 거기에 가세한 세계 각국들의 문화예술이 봇물 터지듯이 밀려들어 오고 있다. 더욱이 고도로 발달된 네트워크를 통한 네티즌들의 직접적인 문화예술 활동의 참여까지 더해져 복잡다단하기 그지없는 작금의 현실은 오히려 지난날의 단순함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여기에 현대예술이란 거인의 뒤에 숨겨진 오만과 불확실한 표현은 예술의 기본정신을 의심하게 하기도 한다. 문학에서는 황순원의 소나기, 그림에서는 이중섭의 저 천진난만한 그림들이 세월을 뛰어넘어 우리들에게 삶의 위안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이유를 알아야 할 것 같다. 그들 작품은 간결한 문장과 선만으로도 얼마든지 고도의 미학을 보여줄 수 있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그런 것이 바로 문학의 본질이요, 예술의 본향이 아닌가 싶다. “구름 사이로 잠깐 햇살이 비추듯 인생의 고통을 잊게 해주는 순간은 창작의 순간”이라고 한 염세주의자 쇼펜하우어의 말은 두고두고 음미해 볼 만하다. 윤수천 동화작가

[문화카페] 아직도 익숙하지 않은 도로 교통문화

나는 초보운전은 아니다. 운전면허가 34년이나 되었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도로에 나서면 당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경우는 두 가지 이유이다. 내가 길을 잘 모르거나 또는 운전자끼리 서로 다른 규칙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배려가 없거나 운전의 원칙이 서로 상충되기 때문이다.그래서 싸움도 벌어진다. 언젠가 학교에서 집으로 오는 길에 다른 차와 시비가 붙었다. 자동차로 투우사처럼 내차 앞으로 달려들어서 크게 당황한 적이 있었다. 내가 무엇을 잘못한 것인지는 아직도 모르지만 운전자끼리의 사소한 사인(sign)의 차이가 평생 잊히지 않는 사건이 되어 버린 셈이다. 미국에서 운전을 처음 배운 나에게는 한국에서 운전을 시작할 때 운전의 관습이 달라서 크게 고전한 적이 있었다. 일주일에 24시간 이상을 운전대 뒤편에 앉아 있는 나는 길에 나서면 아직도 도로교통문화에 대해서 때때로 ‘왜 우리는 길에서 이렇게 신경을 곤두서게 만드나?’라는 생각이 든다. 도로 교통문화의 기본적인 문화 원리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이다. 그러한 배려문화에서 자동차의 속도를 입히면 우리가 운전할 때 지켜야 하는 두 가지의 원리가 탄생하게 된다. 하나는 ‘도로에서는 남처럼 행동하라’. 전투기는 속도가 빠르지만 편대비행을 해도 사고가 나지 않는 것은 같은 속도로 가는 것이다. 속도위반? 속도위반딱지가 목숨보다 앞설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과속으로 달리는 차와 무한정같이 다니라는 뜻은 아니다.다른 차보다도 빨리 가야 하거나 또는 다른 차와 밸런스를 못 맞추는 경우는 바로 두 번째 원칙을 참조하면 된다. 두 번째의 원칙은 ‘다른 차의 주행을 방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자동차의 사고는 두 차의 속도가 달라서 생기는 일인데 빨리 가야 할 차는 일찍 보내 주어야 하는 것이다. 기러기 떼의 운행원리와 같은 이 두 가지 원리는 결국 선진교통규칙의 바탕이 되는 문화적인 원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원리를 지키고 싶어도 안 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 우리의 교통체계이다. 도로는 직진이 최우선이 되어야 하지만 분명직진차선인데 가다가 보면 좌회전해야만 할 때가 있다. 도로의 선형이 장기판의 ‘차(車)’의 운행원리보다도 못한 셈이다. 갑자기 나타나는 좌회전 표시에 초보는 당황하게 마련이고 도로에서 심한 구박을 받게 되어 하루를 잡치게 된다.그리고 고속도로 상에 보이는 차종별 운행차로이다. 이것은 자동차의 속성 중에서 등속도유지의 원리가 결여된 규칙이다. 빨리 가는 차 그리고 빨리 갈 수 있는 차들은 같이 다니게 하는 것이 안전에 최우선적인 원리일 텐데 속도가 다른 차들이 뒤섞여 다니니 계속해서 차선을 바꾸어야 하는 경우가 생기게 되고 차선을 많이 바꾸게 되면 그만큼 사고의 위험도 증가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좌측통행인지 우측통행인지를 분간할 수 없게 다니고 있다. 추월을 할 때는 좌측차선으로 이동하여 지나가야 맞지만, 좌측차선에서 추월하게 되는 경우가 엄청 흔하다. 시내에서는 주정차된 차들 때문에 하위 차선 운행이 불가할 때가 있지만 고속도로상에서도 일차선에서 이태백이 걸음걸이로 가는 차들을 보면 그 털 난 심장을 알 수가 없다. 이런 차들 때문에 우측차선에서 추월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사실 도로 주행의 원리를 크게 왜곡하는 방식이어서 사고위험도를 크게 높이게 된다. 자동차가 천만대를 넘어선 최선진국이지만 내 눈에는 도로 윤리가 아직도 멀었다. 왜 운전시험에는 도로문화와 윤리과목이 없는지? 가장 단순하여야 할 교통체계에서 신호등이 왜 그렇게 다양한지… 속설에 한국에서 운전하게 되면 머리가 좋아진단다. 천년을 맞이한 경기도부터 시작하면 안 되나? 배기동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아태지역 국제박물관협회장

[문화카페] 위험한 독서

요즘 전 세계적으로 가짜뉴스가 범람하고 있다. 가짜뉴스를 만든 사람에게 동기를 물어봤더니 단기간에 돈을 벌고 싶었다고 한다. 제휴광고 태그 등을 통해 돈을 벌 수 있다는 것. 그의 영업 전략은 ‘증오를 부추기는 기사는 쉽게 확산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에 비판적인 일본인들은 한국에 대한 안 좋은 뉴스들을 믿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고 이들을 대상으로 한국에 대한 증오를 부추기는 가짜뉴스를 만들어서 퍼뜨리는 식이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대다수 언론을 불신하고 SNS를 통해 퍼지는 가짜뉴스를 진짜로 믿고 분노와 증오로 무장한 채 주말집회에 나가는 분들이 많은 걸로 알고 있다.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는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하는 증오전략이 먹힌 것이다. 돈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천박한 생각도 문제지만 그들이 노리는 대로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한 가짜뉴스는 독버섯처럼 번져나갈 것이다. 이런 사태를 지켜보며 “타락한 정보가 있는 게 아니라 정보 자체가 타락한 것”이라고 한 들뢰즈의 경고나 “정보란 명령이라는 의미”라고 한 하이데거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지금처럼 정보가 넘쳐나는 사회의 위험성을 그들은 미리 알았던 것일까. 블로그나 카페, 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한 정보에서 다른 정보로 계속 미끄러지는 정보수집이 아닌, 정보에서 사색과 통찰로 이어지는 독서가 필요하다. 십년쯤 전, 지방에 사는 선배 소설가의 집을 방문한 후배 소설가가 호들갑스럽게 다녀온 소감을 말했다. “그 형 책상에는 삼국지만 있어요.” 그 책을 얼마나 읽었던지 너덜너덜 해졌더란다. 그 소설가는 한 작품을 매우 깊게, 반복적으로 읽으면서 자신의 소설의 틀을 잡았던 것이다. 최근에 읽은 책 중에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은 읽는다는 것의 위대함을 일깨워 주었다. 다소 자극적으로 보이는 제목은 독일 시인 파울 첼란의 시구에서 따 온 것이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하늘에서 허공에서 눈의 가위로 그 손가락을 잘라라 너의 입맞춤으로 이렇게 접혀진 것이 숨을 삼키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사사키 아타루는 불합리하고 부당한 세상을 변화시켜달라고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것보다, 그 두 손으로 책을 읽고 또 읽고, 고쳐 읽고 다시 고쳐 쓰는 행위 자체가 더 가치 있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많은 책을 읽지 말고 한 권을 읽어도 되풀이해서 읽으라고 한다. 그래야 통한다고. 지식과 정보가 범람하는 이 시대에 역설적으로 소수의 책을 반복해서 제대로 읽으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이 책은 성서를 제대로 읽음으로써 종교개혁을 일으킨 루터의 예를 들어 하나의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전 생애를 거는 일이며 목숨을 거는 일이며 혁명적인 일이라는 것을 설득력 있게 전개해 나간다. “읽어버린 이상 고쳐 읽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고쳐 읽은 이상 고쳐 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읽은 것은 굽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쓰기 시작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그것만이 ‘혁명의 본체’입니다.” 그에 의하면 혁명의 본질은 ‘폭력이나 주권 탈취가 아니라 텍스트를 다시 쓰는 것’이다. 우리가 혁명에 대해 가지고 있는 편견 중 하나는 혁명과 폭력이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인데 사사키 아타루는 그것을 부정한다. 좋은 시집 한 권, 철학책 한 권이 개인의 삶과 한 시대를 바꾼 예는 무수히 많다. 무엇을 읽을 것인가. 이것은 단지 책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회를 읽는 일, 삶을 읽는 일에도 적용될 것이다. 텍스트는 무궁무진하다. 박설희 시인

[문화카페] 21세기 문화의 성장 동력

20세기는 19세기 산업혁명의 산물인 과학문명을 기반으로 문명화가 빠르게 진행되었고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경제시장이 급격히 팽창하였다. 20세기 후반인 1970~80년대에 들어서서는 토지와 노동, 그리고 자본이 성장 동력이 되어 자동차, 조선, 철강 산업 등 중화학공업이 주력산업이 되는 산업경제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어 1990년대는 지식과 정보가 성장 동력이 되어 가전, 반도체, 정보통신 등 IT 산업이 주력산업으로 등장하게 되는 지식경제 시대로 접어들었다. 21세기에 접어들어 세계적인 금융위기로 인한 장기적인 불황 속에서 IT 산업이 성장 동력으로서의 한계에 봉착함에 따라 새로운 성장 동력 확보가 절실해졌다. 그러한 가운데 인간의 상상력과 창의력, 그리고 문화가 IT 산업과 융합된 문화산업이 고부가 가치를 창출할 수 있으며 경쟁력을 갖게 된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되었다. 이로써 IT산업과 인간의 상상력과 창의력과 문화가 융합된 ‘콘텐츠 산업’이 미래 한국 경제를 이끌 새로운 경제 추진 동력이자 성장 잠재력이 무한한 미래 핵심 산업으로 부각되었다. 21세기는 문화의 다양성과 보편성이 존중되는 시대이며, 개개인의 상상력이 콘텐츠가 되는 시대이다. 이로써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이 문화콘텐츠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스토리텔링이란 스토리(story)가 다양한 매체(telling)와 개인의 상상력과 결합되어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며 표현되는 문화콘텐츠를 말한다. 따라서 문화콘텐츠는 ‘원소스 멀티유즈(One Source Multi Use)’라는 특징을 갖는다. 제대로 된 소스(source)를 기반으로, 다양한 매체를 통하여 다양한 콘텐츠가 생성되고, 활용되어 고부가가치를 올린다. 문학, 설화, 민담, 역사, 전통문화 등 소스가 다양한 매체를 통하여 이 시대에 맞는 다양한 장르로 각색하는 능력이 중시되게 되었다.주지하고 있듯이 문화콘텐츠의 범위는 출판과 만화, 방송, 영화, 애니메이션, 게임, 캐릭터 상품, 공연, 음반, 전시, 축제, 여행, 테마파크, 디지털콘텐츠, 에듀테인먼트, 인터넷콘텐츠, 모바일 등 거의 무한대로 방대하다. 문화콘텐츠가 고부가가치를 창출한 사례 중 좋은 예로 애니메이션 영화 ‘겨울왕국’을 들 수 있다.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던 애니메이션 영화 ‘겨울왕국’은 2013년 미국 월트 디즈니 픽처스와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3D 컴퓨터 애니메이션 뮤지컬 판타지 코미디이다. ‘겨울왕국’은 단순히 애니메이션 전문 작가들이 달려들어서 만들어진 작품이 아니라, ‘눈의 여왕’이라는 안데르센의 동화(source)를 바탕으로 세계 정상급의 연출가, 애니메이션 작가, 성우, 음향 및 영상 전문가, 그래픽 디자이너, 작곡가, 연주가, 성악가들이 함께 모여 만든 융복합 문화콘텐츠이다. ‘겨울왕국’은 디즈니 르네상스 시대 이래 최고의 뮤지컬 애니메이션 영화라는 찬사를 받았으며 ‘제71회 골든 글로브상’과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BAFTA)’에서 애니메이션상을 받은 바 있다. 특히 겨울왕국의 주제곡 ‘Let It Go’는 너무도 잘 알려져 있다. ‘Let It Go’는 ‘제86회 아카데미상’에서 장편 애니메이션상과 주제가상을 받았다. 이러한 성공 사례는 무수히 많다. ‘해리포터’라는 소설은 영화, 게임, 캐릭터 상품으로 재창조되어 2조 6천억원의 고부가 가치를 창출하였으며 만화 올드보이·타짜는 영화로, 만화 신과 함께·데스노트는 뮤지컬로 재창조되어 고부가가치를 창출하였다. 21세기는 상상력과 창의성이 성장 동력이 되고 서비스, 예술, 콘텐츠 산업이 주력산업이 되는 창조경제의 시대이다. 즉, 문화가 국력이 되는 시대, 문화의 세기가 도래한 것이다. 김승국 수원문화재단 대표이사

[문화카페] 다가올 미래 경기 새천년, 아시아 음악과 만나야

지난 2009년 제주도에서 한·아세안 11개국 정상들과 많은 관객 앞에서 ‘아시아 전통오케스트라’(한·아세안 전통오케스트라) 창단공연을 가졌다. 80명의 전통오케스트라와 100명의 합창단 그리고 각 나라의 전통의상을 입은 가수들이 무대에 올랐다. 무대는 11개국의 다양한 사람들과 원색의 전통의상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꽃밭처럼 화사하게 단장되어 있었다. 아시아의 전통이 빚은 무대모습이었다. 예술감독을 맡은 나로서는 흥분과 기대에 찬 순간이었다. 막이 열리자 각 나라 연주자들이 차려입은 울긋불긋한 원색의 전통의상들에 관객들이 또 한 번 놀랐고, 연이어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한국의 민요 ‘쾌지나칭칭’을 시작으로 11개 나라의 민요를 바탕으로 각 나라 작곡가가 작곡한 음악들이 연주되기 시작했다. 한국음악을 연주할 때는 한복을 입은 한국의 지휘자가 지휘봉을 잡고, 다른 10개국의 음악도 각각 자국의 지휘자가 지휘를 맡았다. 음악의 앙상블은 더 없이 좋았다. 연주되는 악기마다 무대 옆의 보조 영상을 통해 악기를 하나하나 자세히 보여주었다. 아시아의 악기를 영상으로 확인하면서 귀로 음악을 들으니 두 배의 즐거움이 있었다. 이렇게 11개국 11곡의 음악이 끝나고 피날레를 장식한 곡은 한국의 ‘사랑해요 아시아’였다. 한국과 아시아 10개국의 언어로 “안녕하세요”, “사랑해요”, “고맙습니다”라는 가사를 담은 노래로 아시아 전체를 아우르는 합창곡이었다. 아시아 국가들의 대부분이 우리나라처럼 식민통치를 경험했고, 또 비슷한 시기에 식민통치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전통음악 전승에 있어서 식민통치로부터 받은 영향과 결과는 많이 달랐다. 우리나라는 일제 강점기에 전통음악이 거의 끊어졌지만 아세안 국가들은 달랐다.대체로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하에 있었던 아시아 국가들의 전통예술은 끊기지 않았고, 전형이 고스란히 전승되었음을 악기와 음악을 통해 확인 할 수 있었다. 우리는 끊긴 전통음악을 다시 잇기 위해 인간문화재를 인정하는 무형문화재 제도를 두고 있다. 하지만 전통을 잘 전승해 온 아시아 국가들은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연주하고 있는 악기 모양과 민요를 들으면서 각 나라의 전통이 자연스럽게 이어져 현재에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다른 도시에 비해 경기도는 이주노동자와 다문화가정이 많다. 다양한 언어와 문화가 어우러져 다문화사회의 전형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다양성은 때로 서로 다름의 ‘차이’를 ‘차별’로 인식하여 비뚤어진 사회적 편견을 형성하기도 한다. 따라서 다문화 가족들이 향유할 수 있는 문화,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을 창작해 이들과 어우러지고 소통하는 계기를 많이 만들 필요가 있다. 그동안 경기도립국악단의 활동은 우리나라 전통예술의 전승과 창작국악의 현주소에 중심을 두었다. 이제 다가올 미래 경기 새천년은 전통과 어우러진 ‘아시아 음악’에도 무게를 두어야 한다. 전 세계의 눈이 과거 유럽문화의 꽃 ‘클래식’, 미국문화 ‘팝’에 열광했던 시대를 지나 아시아의 역사와 문화에 쏠리고 있다. 아시아의 숨겨진 소리를 발견하는 과정에서 한국 전통음악의 지평을 확대할 수 있을 것이다.이제는 아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 다양한 문화콘텐츠를 생산해야 한다. 이러한 문화를 향유하고 선도하며 우리나라의 미래를 열어갈 청소년들이 주요 관객층이 될 것이다. 앞으로 경기도립국악단은 경기도민과 더불어 청소년층이 아시아의 음악과 문화를 이해하고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장을 만드는 일에 앞장서 나갈 것이다. 최상화 경기도립국악단 예술감독

[문화카페] ‘왜?’ 라는 질문으로

오래전 런던에 있는 어느 미술대학에서 ‘Don’t ask me why 왜 라고 묻지 마’라고 쓴 낙서를 본 적이 있다. 제발 따지지 좀 말라는 뜻이다. 교수들로부터 얼마나 시달렸으면 저리 썼을까 싶었다. 나 또한 유학시절 ‘왜?’로 시작되는 많은 질문들을 통해 나의 작업 전반을 다시 돌아볼 수 있었다. 영국 미술대학에서 지도교수와의 개별 면담 수업(Tutorial)은 자기 경험에 근거한 작업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저 ‘작품 같은 작품’을 만들고 있는지 확인하는 질문으로 시작된다. 학생들은 작품의 완성도보다는 그 작업을 왜 하는지, 다른 기성 작가들과는 어떻게 다른지 생각해야하고 그것을 작품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이러한 수업은 방법론적 진화를 거듭해 온 서구 현대미술의 역사적 경험에 기인한다. 그들은 한 시대를 지배하던 견고한 스타일이 관점을 달리하는 한 작가에 의해 순식간에 옛것이 되는 것을 보았다. 동시대 미술을 넘어 또 다른 미술의 출현을 기대하는 이들은 익숙하고 세련된 많은 작품들보다는 보는 이의 몸을 돌려세워 새로운 시야를 열어줄 한 점의 작품을 보고자 한다. 요즈음은 인터넷을 비롯한 다양한 매체를 통해 많은 정보가 공유되고 쉽게 복제가 가능하기 때문에 ‘과연 이 작품이 작가의 고유한 아이디어에 근거한 것인지’를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노골적으로 남의 것을 베끼지 않았더라도 잡지나 인터넷에서 잠깐 스쳐 지나간 작품의 분위기나 아이디어가 알게 모르게 작가의 손끝으로 스며들 수 있다. 노련한 스승은 제자들의 작업에 끼어든 타인의 흔적을 찾아낸다. 이는 남의 땅에 집을 짓고 있는 사람에게 집터를 확인해 주는 것과 같다. 아무리 좋은 집을 지었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땅에 집을 지으면 헛수고가 되니 말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새로운 작품세계를 찾아 나선 예술가들에 의해 확장된다. 예술가가 기존의 유형을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론을 추구하는 것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나는 탐험과 같다. 이 여정은 ‘왜?’라는 수없이 많은 자문自問에 대한 ‘왜냐하면’으로 시작하는 자답自答으로 채워진다. 끝없는 사색과 실험 없이는 한 발짝도 전진할 수 없다. 진지한 예술가는 자신의 존재 위치를 예민하게 파악하면서 자기가 본 세상의 어떠함을 자신의 작품 안에 담아낸다. 그리고 이 낯선 예술적 코드는 ‘왜?’라는 질문을 던졌던 질문자들에게 되돌려져 해독(解讀)을 기다린다. 집단 정서가 지배하는 현대인의 삶 속에서 ‘왜?’라고 묻고 ‘왜냐하면’으로 이어지는 대화는 생뚱맞은 일이 되었다. 학연, 지연, 돈과 권력 그리고 심지어는 외모가 질문과 답을 대신하는 시대에는 정직한 예술가도 감상자도 만나기 어렵다. 자신의 판단을 ‘묻지 마’ 정서에 저당 잡힌 무리로부터 빠져나와야 한다. 정곡을 찌르는 질문은 우리를 옭아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을 열어 실재를 향하게 한다. 흥미롭고 강렬한 교감은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작품과의 만남에서 발생한다. 이 만남을 통해 단순한 정보 교환이 아닌 마음을 움직여 세상을 다시 보게 하는 소통을 경험한다.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 세상에서 유일한 ‘나’를 회복하고 유형화된 삶에서 벗어나야만 나의 언어로 너를 만나 새로움을 논할 수 있다. 어쩌면 ‘왜?’라는 질문의 대부분은 우문이 되기 십상이며 그 대답도 현답보다는 오답이 많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의문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진지한 태도는 ‘왜?’라는 질문으로 ‘너’와 ‘나’의 정신이 살아 있게 하는 것이다. 전원길 서양화가

[문화카페] 문학작품 낭독회

퍽 오랜 전 그림책 작가 몇 분과 함께 지방의 도서관을 돌면서 우리 그림책을 읽어 준 적이 있었다. 전봇대 아저씨의 작가 채인선, 똥떡으로 유명한 이춘희 작가 등과 함께였다.그때 내가 느낀 것은 동화도 시 못지않게 읽어 줄 만하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작가가 자신의 책을 읽어주는 것이야말로 몇 배의 감흥을 독자들에게 전달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이후 나는 또 한 차례 동화 낭독을 할 기회를 가진 바 있었다. 2007년 여름, 아르코예술정보관에서 주최한 동화작가 육성 낭독회 자리였다. 이때 나는 조성자, 노경실, 김향이 등 한국을 대표하는 3명의 여류 동화작가와 함께 그 낭독회에 참석했고 행복한 지게, 나쁜 엄마, 야옹 망망 꼬끼오 버스 등 몇 편의 동화를 육성으로 낭독하였는데, 그때도 청중의 반응이 의외로 좋아서 몹시 기쁜 마음으로 돌아왔던 기억이 새롭다. 작품 낭독회, 하면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시를 낭독하는 모임만을 생각하는데, 외국에서는 소설 같은 산문도 좋은 낭독회로 인기를 끌고 있다. 1999년 초여름, 이청준 작가는 오스트리아의 한 출판사 초청을 받아 작품 낭독회에 참석한 바 있었는데, 100석 가까운 청중석이 꽉 찰 정도로 대성황을 이루어 작가 자신이 놀랐다고 했다. 게다가 차리고 나온 모습을 보니 귀한 자리에나 초대받았을 때 입는 고급 의상에 멋진 장신구까지 갖춘 데에 놀랐다고 했다. 그날 이청준 작가는 새삼 그들의 문화에 대한 투자와 누림의 모습에 감동을 받았노라고. 그런가 하면 10여 전, 우리나라가 주빈국이었던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참가한 바 있는 은희경 작가는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그곳의 낭독 문화였다고 했다. 도서관, 교회, 책방, 카페 등 규모가 크든 작든 가리지 않고 작가와 독자들이 격식 없이 모여 앉아 읽고 귀 기울이는 풍경이 너무도 행복해 보이더라고.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시낭독회 말고는 문학작품 낭독회가 그리 성황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어쩌다가 간혹 작가 탄생 몇 주년 기념회, 또는 작가 초청 독자와의 대화 같은 모임에서나 작품을 낭독하는 예가 있긴 있다. 그러나 그건 가뭄에 콩 나듯 하는 경우일 뿐이며 그 반응도 그리 큰 편이 못되지 싶다. 문학작품을 눈으로만 감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귀로 듣는 감상법도 그에 못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거의 사라지다시피한 아이들의 국어책 읽는 소리가 하나의 좋은 예가 될 듯싶다. 5,60년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는 동네마다 아이들의 국어책 읽는 소리가 낭랑하였다. 그 소리는 아이들의 귀뿐 아니라 어른들의 귀까지도 즐겁게 해 준 아침의 독서 운동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책은 눈으로만 읽는 게 아니라 귀로도 읽는다는 것을 보여준 저 독서 교육. 아니, 아침을 여는 힘찬 팡파르! 우리 사회에도 문학작품 낭독회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큰 공간의 낭독회보다는 작은 공간에서 작가와 독자가 무릎을 맞대고 앉아 읽고 듣는 자리는 얼마나 보기 좋을까. “저 소설가 은희경인데요.” 일산의 한 책방을 찾아가 자기소개를 한 뒤, 그곳 주인과 손을 잡고 매월 셋째 주 목요일마다 낭독회를 시작하기로 했다는 은희경 님. 그 후의 소식이 몹시 궁금하다. 모르면 몰라도 그 책방은 책의 향기로 그득하지 않을까 싶다. 윤수천 동화작가

[문화카페] 정유년 설에 생각하는 AI시대의 문화경제

세상 사람들이 실종된 겨울이라고 하니 화가 난 동(冬)장군이 모처럼 대한(大寒)이라는 시절에 맞추어 설맞이 행사를 하고 있다. 이 추위가 풀리면서 곧 음력 정유년이 시작된다. 바로 닭띠 해이다. 그런데 어릴 적에 이즈음이 되면 아무리 추워도 설맞이 준비로 온 동네가 들뜬 분위기를 느낄 수가 있는데 요즈음에는 설이 실종되어가는 지 그저 조용하다. 물론 세상이 바뀌어 과거의 명절보다도 젊은 세대의 입맛에 맞는 신조 명절이 나타나서 백화점의 문간을 복잡하게 만들기도 한다. 발렌타인데이나 빼빼로데이 등등 과거에 듣도 보지도 못한 서양식 또는 어설픈 신한류명절이 나타나고 있기는 하다.그런데 문화융성이라고 하면 가졌던 문화를 우선 잘 가꾸고 더 발전시키는 토대 위에서 새로운 문화가 쌓여서 더욱 두텁게 형성하여 가는 것이 바람직한 것 아닌가? 뿌리가 죽어가고 또 뿌리가 없는 문화가 얼마나 자랄 것인가? 얼마 전 구석기유적을 조사하기 위해서 여행을 갔던 베트남의 설 준비를 보면서 어릴 적의 흥분된 그 시간의 추억들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수도 하노이의 거리의 곳곳에 노란 작은 과일이 촘촘히 달린 만다린 나무를 작은 오토바이 뒤에 싣고 집으로 가고 그리고 가게나 큰 집의 대청이나 마당에 큼직한 홍매화분으로 장식하는 그 사람들의 마음을 보며 훈훈하고 흐믓한 느낌이 들었다. 이 모두 집안의 행복을 새해에 기원하는 하나의 의식적인 행위이다.그리고 그 명절에 부자나 가난한 자 누구나 같이 즐기고 생각이 같음을 그리고 같은 시간 속에 있음을 스스로 확인하는 보여주는 의식인 셈이다.베트남의 시골로 여행을 가면서도 곳곳에 만다린 나무와 홍매를 파는 가게가 줄을 잇고 있었고 오토바이 뒷자리에 실린 만다린 나무를 수도 없이 보았다. 가족의 행복을 기도하는 마음이 거리를 아름답게 만들고 있었고 나에게는 어릴 적에 설 대목에 어머니가 시장 다녀와서 풀어놓던 그 설빔의 추억이 떠오르는 시간들이었다. 그러고 보면 옛날 우리 조상들이 일 년 내내 매월 두 개의 크고 작은 축제를 두는 것이 정말 현명하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축제마다 각기 계절에 맞는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두어 사람들을 자극하고 움직이게 만들었던 것이다. 사회적인 유대강화나 경제적인 행위가 바로 그 문화의 체제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만든 그 현명함이 그 속에 있다. 그 세시풍속에서 나오는 일 년 축제의 시작이 바로 설이다. 요즈음은 세태 때문인지 그저 조용하다. 세상이 바뀌었다. 속도가 빠르기도 하고 정확한 점에서 기계적이기도 하고 또한 앞으로는 사람과의 교류가 기계를 통해서 그리고 개인 스스로의 사소한 욕구도 기계가 알아서 해 주는 인공지능, AI, 세상으로 빠르게 변하고 있다. 과거의 문명이 물리적 공간의 개인화였지만 현대에는 사고나 경제행위조차도 개인화가 뚜렷해지고 있다.과거에는 ‘혼’이라는 말이 ‘섞이다’라는 뜻 뜻의 접두어로 사용되던 시절에서 이제는 ‘홀로’라는 의미로 바뀌었다. 혼밥, 혼여, 혼술 ...등의 행위가 점차로 대세를 이룬다. 어쩌면 정반대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는 인간의 관계는 이제는 차가운 디지털 기계 속에서 찾는 시대가 되어가는 셈이다.이러한 행동들이 지금은 병처럼 보이지 않지만 관계를 단절해가는 인간사회가 미래를 장담할 수가 없다. 필요이상의 사회적인 관계가 메말라가는 세상에서는 경제가 돌아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AI시대에 깊어 가면 갈수록 사회적 관계의 증진, 바로 이것이 오늘날 문화융성의 화두가 되어야 하고 또한 경제행위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 과거 미국 북서인디언 사회에서도 사회를 돌아가기 위해서 개인의 경계를 허물고 필요 이상의 소비를 촉진하는 축제가 열린다.바로 현대미국사회에서는 범죄로 생각되기도 하였던 ‘포틀래치’라는 부자의 재산 사회적 나누기 또는 소비하기 축제이다. 우리 조상들이 만든 현명한 세시풍속들의 심오한 원리를 토대로 새로운 소비를 창출하는 세시문화를 현대적으로 확장하여 가는 것이 바로 경제가 융성해지는 길이다.이번 설에는 그저 내 마음의 고향인 연천 전곡유적지의 겨울여행축제에서 얼음지치며 떠드는 아이들 소리로 명절날 허전함을 달래기나 하여야겠다.배기동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아태지역 국제박물관협회장

[문화카페] 밥 딜런과 블랙리스트

작년에 문화계를 달군 가장 뜨거운 이슈 중 하나는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일 것이다. 가수 밥 딜런만을 기억하기에 백과사전을 찾아보니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시인, 화가’로 돼 있다. 밥 딜런의 노랫말은 미국의 고등학교와 대학의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고 몇 해째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내리기도 하였다. 본명이 로버트 앨런 지머맨으로, 밥 딜런이라는 이름은 자신이 사랑하고 동경했던 영국의 시인 ‘딜런 토머스’의 이름을 딴 것이다. 2014년 국내에서 개봉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터스텔라에서 인용된 ‘순순히 어두운 밤을 받아들이지 마세요’(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가 바로 딜런 토머스의 시다. 이 시는 딜런 토머스가 죽어가는 아버지를 위해 지었다고 하는데 ‘빛이 꺼져감에 분노하고 또 분노하세요’라는 구절에서 마지막까지 죽음과 치열히 맞서 싸우라고 응원하는 아들의 마음이 잘 전해진다. 딜런 토마스는 1930년대를 대표하는 영국 시인으로 낭송의 달인이었으며 소리와 운율을 중시한 음유시적 전통을 지켰다. 밥 딜런은 그러한 딜런 토머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이다. 사람이 하늘을 얼마나 올려다봐야 진정한 하늘을 볼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귀를 기울여야 타인의 비명을 들을 수 있을까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희생되어야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걸 알게 될까 친구여, 그건 바람만이 알고 있어 - 밥 딜런, ‘바람만이 아는 대답’ 부분 스웨덴 학술원의 사라 다니우스 사무총장은 수상 발표 직후 한 인터뷰에서, “밥 딜런은 귀를 위한 시를 쓴다”고 표현하였다. “이천오백 년 전 호메로스와 사포의 시를 지금까지 우리가 읽고 즐긴다면 밥 딜런 또한 읽을 수 있고 읽지 않으면 안 된다”고 수상 배경을 밝혔다. 노래하는 음유 시인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문학의 경계를 허물고 대중문학의 새 지평을 연 것으로 평가된다. 밥 딜런은 ‘무엇’으로 규정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밥 딜런의 자서전이나 평전을 읽어보면 그는 추종자에 의해 교주가 될 마음이 없었으며 무엇에도 속박당하기 싫어했다. 그에게는 자유와 평화가 소중했다.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만약 밥 딜런이 우리나라에 살고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1941년생인 그는 1960년대와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저항 예술가로 찍혀 옥고를 치루었을 것이고 그의 노래는 금지곡이 됐을 것이다. 2010년대에는 일각에서 그를 종북좌파라고 지칭했을 것이며 노벨문학상은커녕 블랙리스트에 올라 공연이 취소되고 이유를 모르는 핍박에 시달려야 했을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로 세계3대문학상 중 하나인 맨부커상을 받아 많은 문학인들의 희망이 된 한강 소설가도 80년 광주를 소재로 한 소년이 온다로 인해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랐고 노벨문학상 후보인 고은 시인도 마찬가지다. 집권자의 입맛에 맞지 않은 문학작품을 썼거나 영화 또는 연극 등을 제작했다고 우리나라의 대표 문화예술인들이 불온한 국민으로 분류돼 각종 불이익을 받았다고 한다.블랙리스트에서 당신 이름을 봤다고 이 땅의 진정한 문화예술인으로 거듭난 걸 축하한다고 하는 사람, 나는 왜 그 명단에서 빠졌느냐고 항의하고 불쾌해 하는 사람 등 작금의 사태는 코미디에 가깝다. 참된 예술은 현실에 안주하고 순응하지 않는다. 이번 기회에 예술이란 무엇인가, 문학이란 무엇인가 곰곰 생각해본다. 박설희 시인

[문화카페] 모든 사람들이 함께 평화롭게 사는 세상

내가 제일 좋아하는 팝송은 존 레논(John Lenon)이 부른 불후의 명곡 ‘이매진(Imagine)’이다. 담담하고 잔잔하게 전개되는 선율도 좋지만 한 편의 시 같은 노랫말이 더욱 좋다. 늦은 밤 혼자 서재에 앉아 존 레논의 노래 ‘이매진’을 듣고 있노라면, 몽상의 세계 속으로 빠져든다.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 (모든 사람들이 함께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상상해 보세요)’. 존 레논이 노래하는 ‘모든 사람이 함께 평화롭게 사는 세상’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할까? 우리나라 장애인 인구는 전체 인구의 4.83%인 249만406명에 달한다고 한다. 1가구를 5인 가족으로 계산하면 20가구 중 1가구에 장애인 가족이 있는 셈이다. 존 레논의 노래처럼 장애인들과 ‘함께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구축하는 것은 우리의 당면과제가 된 셈이다. 하지만 장애인들에게 특별한 대우를 해주는 것보다 우리들과 아무 거리낌 없이 어울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쉬운 접근 방법은 문화예술이다. 나의 뇌리에 가장 인상 깊게 자리 잡고 있는 장애인 무용수들이 있다. 불의의 사고로 팔을 잃은 중국의 여성 무용수 ‘마리’와 한쪽 다리가 없는 남성 무용수 ‘샤오웨이’이다. ‘마리’는 중국 명문 예술학교의 촉망받던 프리마돈나였으나 한 쪽 팔을 잃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춤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지 않고, 생전 춤이라는 걸 접해 본 적이 없던 남자 ‘짜이 샤오웨이’에게 함께 춤을 추자고 제안하여 듀엣으로 활동하게 되어, 각고의 노력 끝에 2007년 중국 CCTV 무용 경연대회에서 7천여 명의 비장애인 경쟁자들을 제치고 당당히 금상을 수상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몇 년 전에 30여 명의 시각장애자 유청소년들로 구성된 ‘한빛브라스앙상블’라는 브라스 밴드의 흥겨운 공연을 본 적이 있다. 그들 중 일부는 한 눈에 보기에도 시각장애뿐만 아니라 복합적인 장애가 있어보였지만 연주 실력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훌륭했다.그들은 앞이 보이지 않기에, 더 풍부한 상상력과 더 훌륭한 음감을 가질 수 있어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악보는 물론 자신이 다루는 악기조차 볼 수 없기에 일반인이 생각하는 이상의 힘겨운 연습을 하였을 것이라 짐작이 갔다. 그들의 연주는 장애를 극복한 드라마이자 감동 그 자체였다. 최근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차별 없이 음악을 통해 서로의 문화적 가치를 공유하고, 대중예술 분야로 진출한 ‘조금 다른 밴드’가 있다. 유명가수 이상우가 총감독으로 직접 참여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하는 ‘조금 다른 밴드’는 올 4월 공개오디션을 통해 최홍엽(기타·리더, 만 26세), 김민우(베이스, 만 19세, 자폐성 장애 3급), 함성재(건반, 만 18세, 자폐성 장애 2급), 황산하(건반, 만 17세, 자폐성 장애 2급), 권오현(드럼, 만 25세), 홍서연(보컬·작곡, 만 23세) 등 총 6명의 실력 있는 밴드 멤버들이 구성되어 지난 5개월간 피아노와 기타를 기반으로 록, 팝, 포크 등의 장르를 주로 연주하며 풋풋함과 순수한 매력을 발산하는 밴드로 활동하고 있다. 이것이 ‘모든 사람들이 함께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구현하는 첫걸음이 아닌가 한다. 이제 우리도 선진국 반열에 들어선 만큼 장애인들에게 문화향유의 기회를 더욱 확대해 주고, 그들의 숨겨진 예술적 재능을 발굴하고 개발하고 진흥하는 방향으로 정책적 배려를 해주어야 한다. 이러한 시도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때 장애인들에게 재활과 건강 지킴은 물론 자신에게 잠재되어 있는 예술적 소질을 개발하고, 사회의 건강한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과 자신감을 불러 일으켜 줄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존 레논’의 ‘이매진(Imagine)’을 들으며 ‘한빛브라스앙상블’과 ‘조금 다른 밴드’의 감동적 연주 장면이 오버랩 되는 밤이다. 김승국 수원문화재단 대표이사

[문화카페] 경기 천년 음악, 독일·스웨덴서 꽃피다

동양의 문화는 오랜 역사를 통해 서양에 소개되었다. 동서양의 문화가 상호작용하면서 교류하는 가운데 각각의 고유한 문화를 꽃피웠다. 이솝우화의 작가 이솝은 고대 그리스 동부 사모스 섬에서 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그가 인도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막스 뮐러는 이솝우화가 인도에서 소아시아의 그리스를 거쳐 그리스인들에게 알려졌다고 주장한다. 이야기의 대부분이 인도를 비롯한 동양의 전설이나 우화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부처의 전생 이야기를 다룬 인도의 본생경이 이솝우화의 주요 뼈대를 이룬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있다. 한편으로 중국문화가 세계에 전파된 경위를 보면 칭기즈 칸을 떠올리게 된다. 칭기즈 칸이 몽고 왕조를 창건(1206년)하고 세계를 무력으로 제패한 후 세계 전역으로 중국문화가 확산되었다. 14세기 이후 서구에서는 오리엔탈리즘이 학문의 한 분야로 정착하게 된다.19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오리엔탈리즘은 상상할 수 있는 한, 유럽인들에게 최대의 학문적 보고가 되었다. 중국에 대한 관심은 공연예술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도 예외일리는 없었다. 프랑스 신고전주의 대가인 볼테르는 원대 작가 기군상의 조씨 고아를 개작한 중국 고아를 상연해 유럽 극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경기도립국악단은 지난 2016년 12월 9일과 11일에 독일 베를린필하모닉과 스웨덴 뮤직칼리스카에서 극장개관이래 처음으로 국악관현악 연주를 선보였다. 서구에 일본과 중국의 전통 음악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만, 한국 음악은 K-POP을 중심으로 소개되어 한국전통음악의 존재가치를 잘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매우 유의미한 공연이었다. 이번 경기도립국악단의 공연은 서구의 관객들이 쉽게 만날 수 없는 한국의 장단과 리듬을 소개하여 크게 주목을 받았다. 대한민국 교민을 위한 ‘국악잔치’와 같은 소규모 연주회가 아닌 음악에 관심이 많은 그 나라 주요인사와 음악 전문가들에게 한국 음악의 진수를 소개하는 음악회라서 더욱 뜻깊은 공연이었다. 독일에서는 토마스 슈테판(Thomas Steffen)차관, 구키에레즈 보테로 (Maria Lorena Gutierrez Botero) 콜롬비아 대사 등 독일주재 각국대사 및 외교사절단과 독일연방정부 인사와 독일문화계 인사 등이 객석을 가득 메웠다. 독일 베를린은 예술도시답게 우리음악과 문화에 관심 있는 관객들이 많았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관람하러 온 외국인이 입장하는 진풍경도 볼 수 있었다. 스웨덴 뮤직칼리스카에서는 한국입양아 출신의 국회의원 제시카 폴피야드, 스웨덴 외무부와 경제혁신청 등 정부기관의 공무원, 한국문화시리즈 회원과 한국교민 뿐만 아니라 다수의 현지인 등이 참석하였다. 한국말을 잘 알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구음과 다소 서툰 발음으로 경기민요 ‘뱃노래’를 따라 불렀다. 연주회가 무르익어갈 무렵 어느새 그들은 판소리의 장단과 소리에 맞춰 몸을 자연스럽게 움직이며 온몸으로 흥을 느끼고 있었다.경기도립국악단은 내성적인 성향인 스웨덴사람들에게서 ‘브라보’, ‘신난다’, ‘앙코르’를 이끌어냈다. 주 스웨덴왕국 대한민국대사관 관계자는 “스웨덴 사람들이 내성적인 성향이라 이렇게 폭발적인 반응이 보일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다”면서, “이렇듯 깊이 있고 박진감 넘치며 웅장한 한국음악을 스웨덴 관객들에게 지속적으로 선보일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경기도립국악단은 2018년 경기 새천년을 준비하는 다양한 음악회를 기획 중이다. 경기음악은 ‘경기역사 천년, 경기국악 천년’의 경기도민의 문화적 자부심이다. 향후 경기도의 소리, 음색, 리듬, 장단이 세계인의 심금을 울리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 분야에 걸쳐 국제적으로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길 소망한다. 최상화 경기도립국악단 예술감독

[문화카페] 보물찾기

지난 가을 나는 미국 동부 코네티컷 주의 한 숲 속에서 삼 주를 지냈다. 오래된 단풍나무와 참나무가 자라는 넓은 숲 속은 다람쥐와 흰 꼬리 사슴들이 뛰고 새들이 한가로이 호수 위를 비행하는 곳이었다. 나무들 사이로 지평선이 보이고 태양은 낮은 언덕을 넘을 때까지 긴 그림자를 남기는 그곳에서의 일들을 적어 보려고 한다. 매월 6인 정도의 미술작가, 문학가, 음악가들을 선정해 작업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아이파크재단(I-Park Foundation)은 운영자 랄프씨가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를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하여 2001년 커네티컷주 이스트 해담에 설립한 레지던시 공간이다. 자연 현장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요소와 현상에 대한 생생한 반응을 담아내는 작업을 격려하는 이 단체의 프로그램 운영 방침은 나에게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고 연 700여 명이 지원한다는 레지던시 프로그램에서 2016년 초대작가로 선정되었다. 3주 연속 한 장소에서 지내며 온전히 작업에만 집중할 수 있는 쉽지 않은 기회였다. 특히 단풍이 아름다운 이곳에서 나뭇잎이라는 단일 주제를 다룸으로써 다양한 방법으로 낙엽과 만나는 시도를 해 볼 수 있었다. 나는 숙소에서 10여 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업실을 오가는 길 위에서 작업했다. 매일 땅만 쳐다보며 작업하는 나를 보고 이곳에서 일하는 한 분이 ‘보물찾기’를 하냐고 물었다. 맞다! 나와 눈을 맞춘 하나의 낙엽(a leaf)이 시각적 개념적 관계 맺음의 방식을 통해 특별한 잎새(the leaf)가 되는 순간 그것은 보물이 된다. 하나의 낙엽과 나의 만남을 기념하는 일종의 증표는 그곳 그 시간에 즉흥적인 영감에 의해 간결하게 이루어지고 곧 사라지지만 사진으로 기록되어 오랫동안 기억된다. 나는 이곳에서 100여 장의 사진 작업과 이를 바탕으로 작업한 같은 분량의 드로잉을 남겼다. 3주의 시간은 너무도 빨리 흘렀다. 그동안 좋았던 날씨와는 달리 막상 손님들을 맞이하는 날인 오픈 스튜디오 당일은 춥고, 바람 불고, 눈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근처에 사는 작가들, 애호가 그리고 공간 후원자들이 많이 찾아 작가들과 진지한 만남을 가졌다. 나는 낙엽 한 장과의 만남을 통해 ‘빛을 느끼고’, ‘그 색과 모양을 보며’, ‘그것이 거기에 있음’을 다양한 방식으로 보여주었다. 하나의 나뭇잎을 통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의미 있게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음을 이야기 하고 싶었다. 사진작업을 편집한 5분간의 영상 자료가 상영되고 불이 켜지는 순간 박수를 보내는 그들의 표정을 통해 내가 깊은 공감의 공간 속에 있음을 느꼈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아이파크에서 함께 작업했던 작가들, 전나무 숲에서 영감을 얻어 시를 쓴 한국계 미국인 유지니아 김, 실리콘 캐스팅으로 입체 회화를 실험하는 쇼니, 동물 가면을 만들어 퍼포먼스 하는 제라, 무덤덤한 기계적 장치가 인상적인 비디오 작가 앤드류, 여행 가방에 집 구조를 만들어 호수에 띄운 로버트 그리고 나뭇잎 스테인드글라스를 만들어 작업했던 앨리스의 작업을 떠올리면서 나의 작업을 돌아보았다. 잠시 일상을 떠나 몰입했던 이국의 풍광(자연) 속에서 나는 아름다운 단풍으로 물든 늦가을의 정취에 취하기보다는 내 발에 차이고 밟히는 어디서든 볼 수 있는 낙엽에 주목하는 동안 작고 소소한 것들에 반응하는 몸 감각이 나의 상상력과 더불어 일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언제나 먼저 나서려는 획일적인 지적 반응을 차단하고 변화무쌍한 가운데 일관된 순환의 묘를 살려내는 자연의 흐름에 동조하는 나의 보물찾기가 계속되기를 바래본다. 전원길 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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