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돌창고

돌로 만든 낡은 창고 하나가 시골동네에 서 있다. 별스러울 것 없는 모양새이지만 낡은 문을 열고 들어가면 조그마한 갤러리가 기다리고 있다. 맞은 편을 보니 매표소도 있고, 카페도 보인다. 남해의 시골길을 한참 달리다 만난 풍경이다. 50년된 이 창고는 남해대교로 이어지기 전 양곡과 비료를 보관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섬이라는 특성상 시멘트와 같은 건축자재가 부족했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남해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청석으로 지은 것이다. 한참의 세월이 지나다보니 창고는 낡았고, 새로운 자재로 새 창고가 지어지면서 돌창고는 창고의 기능을 다한 것이다. 이 공간을 젊은 기획자들이 나서서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돌창고는 이제 작가들을 기다리는 공간이 됐다. 인근의 낡은 양옥집 이층은 작가들이 기거하며 작품을 만들고,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차를 함께 하는 공간이 되었다. 주민들은 돌창고를 지나면서 창고가 만들어진 시절을 회상하고, 새롭게 오는 사람들을 반긴다. 만경평야를 끼고 위치한 삼례역 앞에는 1920년대에 지어진 양곡창고가 있다. 70년대에 지은 창고까지 합쳐서 십여 년 전까지 창고로 활용됐으나 전라선 복선화로 역과 선로가 옮겨지면서 창고의 기능을 다하게 된다. 지금은 삼례문화예술촌이 자리 잡고 있다. 갤러리와 디자인박물관, 목공방, 책공방과 카페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주말이면 전국에서 모인 체험객들이 창고에서 미술품을 감상하고, 목공방과 책공방에서 자신만을 위한 작품을 만들고, 진한 커피향을 느끼고 있다. 인근의 문화유산까지 어우러져 지역 전체가 문화 활동의 중심지로 탈바꿈했다. 공간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면 지역의 정체성이 된다. 개발과 재개발로 끊임없이 건물을 부수고 짓고 하면서 과거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어지는 것이 별스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학교와 직업에 따라 여러 도시를 옮겨 다니는 것이 일상다반사이니 고향에 대한 기억을 새기는 것도 의미없는 일이 될 수도 있겠다.하지만 같은 공간에 살던 사람이 기억조차 공유하지 못한다면 지나간 날들에 대한 추억은 어디서 채울 수 있을까. 도시화와 산업화가 유독 빠른 곳이 경기도다. 고향이라고 해도 너른 들과 산과 강으로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아파트 단지와 자동차 도로가 먼저 생각나겠지만, 그래도 어릴 적은 모습을 회상할 수 있는 곳이 한 곳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현재의 기록은 미래의 역사다. 흔적을 남겨놓는 것은 기억을 공유하는 것이 된다. 함께 모여 놀고, 부대끼는 일상 하나하나가 역사가 된다. 살아있는 역사의 공간은 내가 살고 있는 일상이 모여서 이루어지고, 기억을 보존하는 행위에서 시작된다.조금 낡고 오래된 공간이라도 거기에 우리 삶의 흔적을 반영할 수 있다면, 최소한의 흔적이라도 남겨두는 것이 어떨까. 우리의 할아버지가 살아온 흔적이고 아버지의 흔적이고, 이를 후손에게 전해주는 것도 우리의 몫이다. 공간을 그대로 남기는 것이 힘들다면 적어도 그 곳을 기억할 수 있는 흔적은 남겨두는 것이 어떨까. 돌창고의 외형은 그대로다. 원래 있던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있으면서 쓰임새를 다르게 해서 새로운 존재감을 만들었다. 동네 어르신은 돌창고를 지나면서 젊은 날 이 공간을 짓기 위해 뒷산에서 돌을 떼고, 지고 온 이야기를 한바탕 늘어놓는다. 낡은 건물은 허물어 버리고 새로 잘 지으라는 핀잔같은 참견은 어디로 간데없고 돌창고에 얽힌 기억을 다시 풀어놓고 간다. 돌창고 안에는 예전 어느 날 기록해 두었을 듯한 비료 몇 포대, 쌀 몇 가마가 적힌 상황판이 아직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마룻대에 적힌 상량문도 그대로 남아 있다. 공간이 남으면 기억도 남는다. 김상헌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문화카페] 백지선 감독

기다리던 1승은 이루지 못했다. 남북 단일팀을 이룬 여자 하키 또는 메달 가능성 있는 주종목에 밀려 방송중계 또는 언론의 관심도 사라졌거나 미비했다.지난 4년 동안 아무것도 없는 맨땅에서 출발하여 상상하기 어려운 체력, 전문적인 시스템, 열광적인 많은 팬들과 엄청난 인프라를 보유하고 있는 유럽과 북미주 팀들과의 겁 없는 도전을 통해 성장하고 올림픽 본선에 진출하게 된 것만으로도 이미 그들은 승리자가 되어 있었다. 이번 평창 올림픽에서 전패를 기록한 남자 아이스하키팀이다. 이 팀의 선장 백지선 감독에게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불모지인 이 땅에서 짧은 기간동안 보여준 그의 리더십을 다큐멘터리를 방송으로 보면서 뜨거운 눈물과 진실한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분야는 다르지만 내가 속한 오케스트라 분야에도 그의 리더십이 필요하고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2002년 월드컵에서 우리가 배운 히딩크 리더십은 지금도 많은 분야에서 기본원칙 또는 모범사례로 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박항서 감독이 베트남에서 보여주고 있는 신드롬에까지 영향을 끼친 것이다. 나는 최근 수년 여러 종목의 감독들의 인터뷰를 통해 지도자들의 확신과 신념의 지수를 볼 수 있었다. 어떤 대표팀의 축구 감독은 한 텔레비전과의 인터뷰를 통해 “오늘의 경기결과를 어떻게 보십니까?”라는 기자의 질문에 머뭇거리면서 “선수들이 일체감을 가지고 잘 싸워준 것 같습니다” 라고 대답한다. 마치 남의 팀의 경기를 보고 제3인칭에서 대답하고 있었다.반대로 ‘~같습니다’라는 불확실한 표현은 백지선에게는 없었다. 그에게는 1인칭만 존재한다. 객관적으로 볼 때 무모하며 불확실하고 성공가능성이 0%처럼 보이는 목표를 “열심히 하면 목표를 이룰 것 같습니다”라는 표현 대신 “금메달이 우리의 목표입니다”라는 단순한 한마디가 그가 가지고 있는 확실한 신념이었다.나의 미국 유학시절 초기에 한국의 명문대에서 아이스하키를 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와서 운동을 할 수 있을지 가능성을 보고 있던 한 학생과 가깝게 지냈는데 그 학생은 중간에 운동을 포기하면서 기본체력이 미국 선수들에게 너무 떨어져 도저히 훈련조차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을 직접 들었다.백지선 감독은 그가 동양인으로서 NHL(북미아이스하키리그)에서 선수생활을 하기까지 그만이 경험한 말할 수 없는 고초가 있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함을 알았고 이를 바탕으로 선수들을 이끌어 갈 수 있었다. 우리에게는 백지선 감독 같은 리더들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내가 속해 있는 음악계에도 이런 리더들이 필요하다. 본인들의 무사안일을 위해 사회가 요구되는 창조와 변화의 사명을 게을리한다면 그가 속해 있는 연주단체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 열정의 순수함을 잃지 않고 내 몸을 불사르는 자세로 리더의 사명을 감당할 때 그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백지선 감독을 수용하고 지원해준 아이스하키협회와 스폰서들도 대단하다. 돈키호테와 같이 풍차를 공격하기 위해 뛰어드는 무모함을 지원해준 결과가 이제 그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대한민국 여러 분야의 암초들이 하나씩 부서지고 그런 과정 속에 우리 다음 세대들이 갖고 있는 꿈들이 공상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 공동사회가 그들을 위로하고 지원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제 대한민국의 다음 세대는 무엇으로 이 지구촌에서 살아남을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정리되어야 한다. 모차르트와 베토벤, 말러와 스트라빈스키도 당대에는 앞서가는 새로운 기법을 도입하였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기득권 세력들에게 그들은 기이한 모퉁이 돌로 취급받았다. 그러나 그들의 가진 것을 귀히 여기고 가꾸어 나간 몇 명의 사람들로 인해 오늘날 우리가 거장들의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것이다. 아직도 우리는 배울 것이 너무 많다. 우리의 스승은 나이와 상관없이 꾸준하게 주위에 산재되어 있다. 배우자 그리고 변화하자. 그것이 인생을 사는 가장 큰 행운이 아니겠는가? 함신익 함신익과 심포니 송 예술감독

[문화카페] 마저절위(磨杵絶葦)와 상주사심(常住死心)

새해 연하장을 정리하다 보니 마부작침(磨斧作針)이라는 글자 아래 동백꽃을 배경으로 백구 두 마리가 놀고 있는 그림이 눈에 띈다.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는 마부작침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당나라 시선 이백이 어린 시절 공부하기 싫어서 스승 몰래 산을 내려오다가 한 할머니가 냇가에서 바위에 도끼를 갈고 있는 모습을 보고 뭐 하러 그러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들겠다고 했다. 중간에 그만두지만 않으면 언젠가 바늘이 될 수 있다고. 이백은 이 말을 듣고, 다시 산에 올라가 공부를 계속했다고 한다. 어릴 적에 이 한자성어를 듣고는 ‘왜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들까? 처음부터 도끼는 도끼로, 바늘은 바늘로 쓰임새가 다른 것인데’라는 생각이 들어 혼자 웃었던 기억이 난다. 우공이 산을 옮긴다는 ‘우공이산(愚公移山)’ 역시 산이 있어 불편하면 다른 데 가서 살면 될텐데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비유는 비유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 노력과 의지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를 살아오면서 많이 봐왔다. 마부작침과 비슷한 글귀를 얼마 전 심우장에서 만났다. 서울 성북동에 있는 심우장은 승려이자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만해 한용운이 1933년부터 1944년까지 만년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난 곳으로 한옥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북향집인데 남향으로 터를 잡으면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게 되므로 반대편 산비탈의 북향터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만해는 1919년 독립선언 발기인 33인 중의 한 분으로 ‘3·1독립선언문’의 공약 삼장을 집필했고 시집 ‘님의 침묵’으로 일반인들에게 더 많이 알려진 분이다. 만해가 사용하던 방에는 그의 글씨, 연구논문집, 옥중공판기록 등이 남아 있는데 ‘마저절위(磨杵絶葦)’라는 그의 글씨를 거기서 만났다. 절굿공이를 갈아서 갈대를 끊는다는 의미일까? 혹자는 이 사자성어를 마부작침과 위편삼절(韋編三絶)이 합쳐진 것으로 보아 ‘절굿공이를 갈아 바늘을 만들고 가죽끈이 닳고 닳아 끊어지도록 책을 본다’는 의미로 해석한다.그러나 한자 ‘위’의 모양이 다른 걸로 보아 만해가 만든 사자성어일 수도 있고, 그게 아니면 韋를 葦로 잘못 쓴 것일 수도 있겠다. 그나저나 쉬지 않고 정진한다는 뜻이니 깨달음을 얻는 과정인 심우(尋牛)와 통하는 면이 있다. 한자성어를 생각하다 보니 또 하나 떠오르는 글귀가 있다. 상주사심(常住死心). 김수영 시인의 부인 김현경 선생님 댁을 방문했을 때 시인의 서재에서 인상 깊게 봤던, 액자 속 글귀였다. 지금은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있는 김수영 문학관에 그 액자가 걸려 있는데 보는 사람마다 그 해석도 구구하다. 김수영 시인이 하이데거 전집을 탐독했고 하이데거에 심취한 적이 있으므로 나는 하이데거 식으로 해석해 본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우리는 실존적 상황에서 비본래적인 상태로 존재하고 있으므로 죽음이 면전에 있음을 의식하고, 선구적인 결단을 통해서 본래적인 ‘자신’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죽음 앞에서 비치는 삶, 그것이 존재의 참된 본질이라고…. 김수영 시인의 ‘상주사심’은 이러한 생각을 표현한 게 아닐까. 뛰어난 분들의 좌우명에는 자신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는 내용뿐 아니라 인생관, 세계관 등이 담겨 있어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다. 올해는 31 운동 99주년이 되는 해이자 김수영 50주기가 되는 해다. 한용운과 김수영. 한국현대문학사 뿐만 아니라 사상사에서도 우뚝 서 있는 두 거인과 그들의 좌우명을 떠올리며 자신의 목표를 정해 정진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한다. 박설희 시인

[문화카페] 소통의 시작

2016년 가을부터 시작된 생애 첫 집짓기 프로젝트가 거의 마무리 되어가고 있습니다. 건축 설계를 하는 전문가와 6개월 이상 회의를 했고 고민과 수정 끝에 2016년 12월 도면이 완성되었습니다. 살던 집을 허물로 새로 신축을 하는 형태이다 보니 태어나 처음 들어보는 건축 관련 전문용어에 적응하기부터 여러 가지 서류 준비와 행정절차, 은행 업무까지 초보자에겐 모든 것이 낯설고 어려웠습니다. 은행에 가서 돈을 맡길 때는 몇 분도 채 안 걸리고 쉽게 맡겼었는데, 그 반대의 경우는 수십 배 이상 절차도 까다롭고 시간도 많이 걸렸습니다. 그 어마어마한 일들을 하나하나 배워가며 2017년 12월 준공이 된 후 드디어 지난주에 새로 지은 건물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새로 지은 건물 안에 들어와 살아보니 많은 것들이 부족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비전문가인 저 같은 사람이 아무리 열심히 인터넷을 뒤지고 지인들의 자문을 듣는다 해도 현장에서 수십 년 간 집을 지어보고 내부 인테리어를 하고 아주 작은 일 하나라도 진행했던 분들의 정직하고 친절한 공사 전·후의 설명이 없이는 그 누구도 집을 지은 뒤 만족할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벽지 색, 전등의 종류 계단에 사용되는 마감재 선택 등에는 많은 시간과 시선을 빼앗겼었고 전문적으로 봤어야 하는 수압, 방음, 방수, 화장실 보일러 배관 등…. 살아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하지만 너무도 중요한 부분을 좀 더 꼼꼼하게 따져보지 못한 것이 아쉽고 후회가 됩니다. 잘하고 싶었지만 건물을 올리기 전에 어느 정도 준비를 하고 시작해야 하는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고 잘못된 원인의 반은 무지했던 제 책임도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착잡했고 결국은 현장에 계셨던 많은 전문가들이 원망스럽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 인생 제 2막을 살고 있습니다. 새집 짓기와 새 직장에서 일하기 시작한 시기가 거의 비슷하여 동시에 두 곳에 적응하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평생 발레만 하고 발레단 운영만 하던 사람이 아무런 사전 지식도 없이 집을 진 것 자체도 문제고 그동안 몸담았던 직장과는 구조 자체가 다르고 구성원들의 생각하는 방향, 깊이 자체가 다른 새로운 직장에 사전 교육, 준비과정 없이 투입된 것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20년간 운영했던 발레단을 후배에게 물려줄 때는 6개월간 인수인계 기간을 두어 전임과 후임이 함께 출근하면서 결재라인에도 들어오게 하여 전반적인 실무를 하나하나 가르쳐 주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임자에게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이건 잘 모르겠는데요? 아무도 안 가르쳐 주시네요”라고 하면 “저희도 다 그랬어요”로 답을 줍니다. 어렵고 불편하고 힘들었었다면 후임자나 후배, 힘들어하는 분들께 친절하게 미리 알려주면 안 되는걸까요? 그 작은 친절이 개인적, 국가적 손실을 줄여주고 내가 하는 새로운 일에 대한 호기심과 즐거움, 자신감으로 이어질 수 있게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새 직장이 낯설고 어려워 쩔쩔매는 동료에게 친절을 베풀고 많은 업무와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있는 주변 사람들에게 미소와 함께 보내는 따뜻한 눈길이 누군가의 하루를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활력소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삼한사온이라는 말은 옛말인가 봅니다. 추운날씨가 계속되다보니 마음도 많이 차가워지고 여유도 없어지는 것 같은 추운 겨울밤에 작은 친절과 미소가 바로 소통의 시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김인희 발레STP협동조합 이사장

[문화카페] 지역문화와 기록

지난 가을 원주의 한 도서관에서는 지역기록문화축제가 열렸다. 지역의 활동가들이 지역단위로 기록을 수집하고 전시하는 행사였다. 원주시의 구역단위로 사진과 영상기록을 수집하고, 이를 지역사회와 공유하는 행사였다. 20년, 30년 전의 모습은 우리의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제 조금씩 낯설어지는 모습이었다. 이러한 기억을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지역단위에서 추진하여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는 것이다. 공주시의 구도심 한가운데에는 공주역사영상관이 자리하고 있다. 2층의 붉은벽돌 건물은 1920년대 건립된후 한때 공주읍사무소로 이용되다가 현재는 등록문화재로 관리되고 있다. 영상관 1층에는 역사이야기, 공주이야기, 종교이야기, 교육이야기, 공주의 현재와 과거 등 5개의 주제로 영상물이 전시돼 있고 2층에는 ‘백제의 옛도읍 공주와 공주사람들 이야기’라는 주제로 특별사진전이 열린다. 공주의 과거 모습을 영상과 사진으로 볼 수 있는 곳이다. 지역공동체를 중심으로 한 사진 아카이브 사례는 200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다. 재개발 등으로 인해 사라지는 도시경관을 사진으로 남기는 작업들이 다양하게 추진되었다. 부산시는 재개발, 재건축 등으로 끊임없이 바뀌는 도시의 경관을 지속적으로 기록하는 사업을 2008년부터 추진하고 있으며, 대전시에서도 2011년부터 5년마다 도시경관을 기록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 영상뿐만 아니라 공간 그대로의 의미를 보존하는 사업도 중요하게 추진되고 있다. 경기만에코뮤지엄은 서해안 시대의 핵심지역인 경기만을 대상으로 자연생태와 삶의 모습, 과거의 기억을 함께 기억하고 보존하는 사업이다. 공간 그 자체를 기록으로 보존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록은 문화적인 정체성을 보존하고, 다양한 문화의 토대가 될 수 있으며, 창작과 창조의 기반이 된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날로 강조되고 있다. 기록의 관리와 보존에 대한 중요성은 몇 번을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다. 독일의 소도시를 가보면 시청 앞에 위치한 공간에는 어김없이 기록관이 자리하고 있다. 공공기록물 뿐만 아니라 개인의 기록도 모두 보존 관리하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개인개인의 기록이 모여서 역사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기능을 담당하는 것이다.이러한 작업이 지역의 문화요소를 정확히 보존하는 기능을 하게 된다. 독일의 경우 이러한 기록관은 연방, 주 뿐만 아니라 시, 군 단위에서도 빠짐없이 운영되고 있다. 안동에 위치한 국학진흥원은 경북북부지역에 위치한 종가들이 보유한 기록물을 수집보전하고 연구하는 기관이다. 다양한 일기류가 발굴되어 단계적으로 번역이 진행되어 민간의 생활상을 살필 수 있는 귀한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상속기록을 보여주는 분재기나 혼인기록과 같은 사적인 기록에서부터 서원의 건축이나 목판의 조성 과정을 보여주는 문서는 당시의 시대상을 밝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발굴된 7만장이 넘는 목판은 세계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하였다. 번역된 기록은 콘텐츠 창작자들이 활용할 수 있는 이야기 자원으로 발굴되어 함께 제공되고 있다. 과거의 기록자원이 현재의 문화콘텐츠 생산을 위한 귀한 자산으로 활용되는 사례인 것이다. 경기문화재단이 경기도의 문화와 역사자원을 수집하고 관리 보존하는 기록관을 설립한다고 한다. 문화자원은 현대의 문화산업의 기반이다. 잘 정리된 문화자원이 다양한 콘텐츠의 생산기반으로 작용하게 된다. 경기도의 새로운 천년을 위한 귀한 걸음이기를 기대한다. 김상헌 상명대학교 교수

[문화카페] 당신의 천국은 어디인가

멕시코 동해안 지역에 베라크루즈 주 Veracruz가 있다. 수도는 할라파 Xalapa이다. 할라파는 멕시코에서만 자라는 ‘꽃’의 이름이다. 꽃보다 예쁜 이곳에 1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오케스트라가 있다. Orquesta Sinfonica de Xalapa이다. 번역한다면 ‘할라파 주립오케스트라’.유럽의 뿌리 깊은 오케스트라 전통을 이어받은 남아메리카의 오케스트라들은 기반이 꽤 단단하다. 특히, 할라파의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멕시코 최초, 최고 오케스트라의 단원이라는 긍지가 매우 높다. 나는 10여 년 넘게 이 오케스트라와 매년 객원지휘자로 연주를 해왔다. 올해도 10월 초에 2주 동안 연주를 한다. 이곳에서 연주할 때마다 느끼는 바는 단원들이 늘 ‘흥’이 넘친다. 멕시코 사람들의 생활만족도가 높다고 들은 적이 있다. 하여튼, 끊임없는 천연 무공해 ‘흥’이 넘치는 음악가들과의 연주는 실로 값진 경험이다. 할라파에 올 때마다 묵는 호텔이 있다. 호텔 내의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특히, 아침시간에 악보를 보면서 이 마을에서 갓 재배한 신선한 커피 향을 즐기는 것이 나의 ‘흥’이 된 것이 꽤 오래되었다. 호텔 레스토랑에서 영어로 소통이 가능한 할라파 출신 40세 초반의 ‘하비에르’는 자연스럽게 나를 담당하여 친절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2년 전쯤, 하비에르와 내가 어느 정도 친숙해졌다는 느낌을 공유했을 때 그는 내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한국에서 태어나서 자랐고 미국에서 전문교육을, 세계를 다니며 연주하고 있으니 꿈을 이룬 것 같아 행복한가요?” 나는 곰곰이 생각하고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음, 어느 정도는…. 그러나 나의 갈 길은 아직 멀다” 그의 질문은 이어진다. “그러면 당신이 살았거나 방문해 본 여러 나라 중에서 앞으로 오래도록 살고 싶은 곳은 어디인가?”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끌어내는데 그가 던진 첫 번째 질문의 대답을 위해 필요했던 시간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지극히 빠른 속도로 그때까지 살아온 나의 인생을 몇 초 분량의 필름으로 축약시켜 돌려보았다.어린 시절을 보냈던 삼양동의 달동네, 유소년 시절 맘껏 뛰어놀았던 우이동 계곡, 파란만장한 군대 시절, 미국으로 건너간 배움의 시절, 가정을 이루고 첫 집을 장만하여 어린 딸을 키우며 살던 뉴저지 도시교외, 코네티컷에서 전원풍경이 있는 숲속에서의 생활, 그 밖에 스위스, 독일, 프랑스, 체코, 폴란드, 네덜란드, 러시아, 몽골, 브라질, 우루과이 등…. 셀 수 없는 삶의 다양한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일분 정도의 빠른 영상이 스친 후 나는 하비에르에게 정리된 결론을 전한다. “하비에르, 세상에 어떤 곳이 우리에게 완전한 만족을 줄 수 있겠는가? En Paradiso 즉, 이 세상보다는 천국이 우리의 낙원이 아니겠는가?”라고 제법 시적이고 예술적으로 대답하려고 애를 썼다. 하비에르는 나의 대답을 듣고 옅은 미소를 입가에 띠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오늘 이곳이 나의 가장 행복한 Paradiso라고 믿고 있다. 이곳에서 낙원을 만들 줄 모르는 사람들이 어찌 영원한 Paradiso를 꿈꾸겠는가?” 부끄러웠다. 호텔 웨이터가 나름대로 관찰한 한국 출신 중년지휘자에 대한 평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홀로 식사를 하고 악보와 씨름하며 인생을 즐기기보다는 일하기 위해 식사하고 또한 그런 것을 매년 반복하는 지휘자의 삶을 지켜본 하비에르에게 비친 나의 모습은 세계를 돌아다니며 낭만을 만끽하는 듯 부러움을 살만한 마에스트로가 아닌 왕복 달리기를 분주하게 하고 있는 안타까운 인생에 불과했다. 우리에게는 오늘보다는 내일, 지금보다는 미래를 위해 지금의 행복을 적절하게 희생하는 것을 귀히 여기는 문화가 있다. 우리의 선조들이 그렇게 하였듯 우리도 자연스럽게 그 길을 따르는 것을 어색해하지 않는다. 천국 또는 극락을 위해 오늘의 행복을 희생하는 것이 반드시 옳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우치는 2018년이 되기를 바란다. 미래의 행복은 오늘의 행복에서 시작되는 것을 깨우쳐준 하비에르를 이번에 다시 만나게 되면 함께 콰타펙이라는 커피농사가 유명한 옆동네에 가서 로스팅을 반드시 해오리라. 함신익 함신익과 심포니 송 예술감독

[문화카페] 내 생애 첫

올해 첫눈이 내렸다. 2018년에 처음 맞는 눈. ‘첫’이 갖는 아우라는 늘 설레게 한다. 첫돌, 첫 걸음, 첫 신발, 첫사랑, 첫 생리, 첫 키스, 첫 월급, 첫 인상…. ‘첫’은 어린아이와 청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처럼 생각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얼마 전, 수원의 능실종합사회복지관에서는 경기도 노인복지과에서 지원을 받아 글쓰기 수업이 진행되었는데 12강을 마무리하면서 시화전과 시낭송회가 열렸다. 그 시간에 줄곧 참여한 사람들은 정지용과 백석의 시집을 상으로 받았다. “시라는 걸 처음 써 본 데다가 내가 쓴 시를 스스로 읽는 것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이에요. 게다가 시집 선물도 처음이고요.” 70대 중반의 참여자가 밝힌 소감처럼 80년, 90년을 산다 해도 세상의 첫 경험은 얼마든지 있기 마련이다. 탈북 청소년들에게 첫 기억을 물어본 적이 있다. “엄마 등에 업혀서 압록강을 건넌 기억이 나요. 발목까지 젖어들던 강물이 어찌나 차갑던지요. 강을 다 건너서 중국 공안에 잡혔어요. 총부리에 매달려 살려달라고 외치는 엄마를 보다가 엉엉 따라 울면서 살려달라고 했던 기억이 나요. 한참을 쳐다보던 공안이 총부리를 내리면서 가라고 하더라고요.”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는 사람들의 심정은 어떤 걸까. 뼛속까지 스미는 차가운 강물과 총부리를 그의 몸은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때때로 정치인들이 말한다. 초심을 잃지 않겠다. 그러나 초심, 첫 마음은 절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가 찾았다고 생각한 초심은 또 다른 첫 생각일 뿐이다. 무척 기쁜 ‘첫’들도 있지만 무척 가슴 아프고 슬픈 ‘첫’들도 있다. 내 속 어디엔가 그러한 ‘첫’들의 무덤이 있을 것 같다. 아무튼 지금도 ‘첫’은 내 삶에서 진행 중이다. 처음 맞는 서른, 마흔, 쉰, 예순…. 이대로 간다면 첫 죽음이 다가오리라. 월든으로 유명한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세상을 떠나기 바로 직전에 여동생 소피아에게 자신의 첫 저서 강의 마지막 장을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동생의 책 읽는 소리를 듣다가 “이제야 멋진 항해가 시작되는군”하고 나직한 소리로 중얼거리다 잠시 후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에게 죽음이란 또 다른 멋진 시작이었던 것이다. 시를 처음 쓰기 시작하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이야기가 있다. ‘갓 태어난 송아지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 그래서 모든 시는 세상과 삶을 새로이 첫 대면한 순간의 기록이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기. 상투성을 걷어내고 세상의 이면을 곰곰이 들여다보기. 그 과정에서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세상에서 맨 처음으로 꿈을 꾸었던 사람”(첫 꿈, 빌리 콜린즈)을 그려보고 “당신의 잠든 얼굴 속에서 슬며시 스며 나오는 당신의 첫” (당신의 첫, 김혜순)을 상상해보기도 한다. 거북이는 걸어서 달팽이는 기어서 굼벵이는 굴렀는데 한 날 한 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새해 첫 기적’ 부분, 반칠환 밤새 내릴 것 같던 눈이 이 글을 쓰는 동안 어느새 그쳤다. 새해 첫눈을 밟으며 사람들은 자신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각각의 속도와 방식에 상관없이 ‘새해 첫 기적’은 시작되었다. 올해에도 많은 기적들이 이어졌으면 한다. 박설희 시인

[문화카페] 발레로 건강해지는 삶

지난 2~3년 사이에 발레를 전공하는 인구는 많이 줄었지만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유아발레, 영어 발레 그리고 직장인, 주부를 대상으로 하는 시민발레, 성인발레, 취미발레가 발레학원 전체 강의시간의 60%~70% 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아예 전공생은 등록을 받지 않고 비전공자들만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학원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발레가 처음 시작되었던 초기발레시대의 발레를 궁정발레라고 하는데 전문 교육기관이 없던 시대 왕족, 귀족들은 본인이 직접 발레를 배워 친인척의 결혼식이나 생일 파티 때 춤을 추고 즐겼습니다. 여흥, 사교의 도구 정도로 여겨지던 발레가 1661년 프랑스의 왕 루이14세의 왕명으로 만들어진 세계최초의 왕립발레학교가 생기면서 체계적으로 발레교육이 시작되고 전문무용수들이 공연장에서 공연을 하면서 여흥이 아닌 예술의 한 장르로 자리 잡게 됩니다. 우리나라에 발레가 처음 소개된 것은 1900년도 초 러시아 공관에서 러시아 발레리나가 처음 발레작품을 선보인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후 일본에서 발레를 배우고 온 발레 1세대에 의해 발레단이 만들어집니다. 해방 직후, 6·25 사변 직전에 만들어진 발레단의 공연을 일반 사람들은 감히 구경할 엄두도 낼 수 없는 먹고살기 힘든 시절이었습니다. 국립발레단이 창단되고 유니버설 발레단이 창단되면서 클래식 발레의 대표작들이 국내 발레 팬들에게 소개되었지만 발레는 일부 특별한 사람들만 보고 즐기는 예술이라는 고정관념을 바꾸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1995년 중반부터 창작발레 작품을 주요 레퍼토리로 공연하는 서울발레시어터와 와이즈 발레단을 비롯한 민간단체가 생겨나고 소규모이긴 하지만 젊은 안무가들을 중심으로 프로젝트 단체들이 만들어져 단체별 특색 있는 작품들을 많이 창작하면서 우리만 즐기는 발레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보고 즐기고 직접 체험할 수 있는 ‘발레’로 어떻게 하면 바꿔갈 수 있을까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과 연구를 하였습니다. 발레계의 양대산맥인 국립발레단과 유니버설발레단의 눈부신 활동과 크고 작은 민간단체들의 피나는 노력의 결실로 발레를 보고 즐기려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났고 민간단체들은 틈새시장을 파고드는 전략을 세워 대형 단체들은 공연할 수 없는 전국 도서산간지역까지 달려가 발레를 알렸고 발레공연 관람에 도움이 되는 발레역사, 발레장르, 발레마임을 열심히 소개하고 알려주었습니다. 공연프로그램과 연계하여 사전에 미리 신청하는 사람들에게는 직접 발레를 배워보고 체험하게 하였고 상주단체로 지역공연장과 계약을 맺은 발레단은 관객개발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지역주민들을 대상으로 발레교육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진행하였습니다. 직접 무대에 서본 사람은 90% 이상 발레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됩니다. 주변에서 발레를 1년 이상 배운 분들은 같은 목소리로 체중이 줄고 자세가 예뻐지고 피부도 좋아졌다고들 합니다. 아름다운 음악을 배경으로 발레를 배우는 다른 사람들과 눈을 마주 보고 웃으며 동작을 배우고 익히면서 자연스럽게 소통을 하다 보면 몸과 마음은 물론 정신까지도 건강해지는 것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제 발레가 처음 시작되었던 초기발레시대처럼 발레를 배워 직접 공연도 하고 즐기면서 기계 속에 갇혀있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연습실로 공연장으로 이동을 시켜 더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김인희 발레 stp 협동조합 이사장

[문화카페] 디지털 뮤지엄

미국 클리블랜드 미술관에는 갤러리 원이라는 색다른 전시공간이 자리잡고 있다. 미술품은 없지만 작품의 구석구석을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는 디지털 전시가 마련되어 있다. 벽면에 설치된 10여 m의 큰 화면에는 미술관의 전시물들이 사진으로 나열되어 있다.이 사진은 주제별로, 시기별로, 방문객들의 선호도 별로 수시로 다른 무리를 이루어 나타났다가 또 다른 작품의 사진을 연달아 보여준다. 미술관을 방문한 이들은 벽 앞에서 보고 싶은 작품을 자신의 스마트폰 안으로 쓸어 담는다. 스마트폰에 설치된 앱은 이 작품을 분석하여 관람객이 작품을 살펴보는데 가장 적당한 동선을 제시하고, 작품 앞에서는 증강현실 기법을 활용한 해설을 들려준다. 라스코 동굴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그림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당장이라도 그림에서 뛰어나올 듯한 생동감 있는 황소그림은 선사시대 가장 위대한 걸작 중 하나로 여겨진다. 아쉽게도 이 그림은 우리는 직접 볼 수가 없다. 지하 동굴은 관람객들에게 노출되면서 급속도로 산화가 이루어져 그림의 보존에 문제가 되어 1963년부터 관람을 중단한다. 1983년 동굴 일부를 재현한 라스코2를 개장하여 일반인들에게 공개하였다. 공간적인 제약을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진 라스코3은 라스코 동굴을 핵심적인 부분을 재현하여 컨테이너에 설치하고 순회전시 중이다. 작년 여름 광명동굴 앞에서 이루어진 라스코 전시가 그것이다. 그리고 작년 겨울 라스코 벽화를 온전히 재현한 라스코4를 개관하였다. 이 전시장은 다양한 디지털 매체를 활용하여 당시의 식생과 형성과 변성 과정을 모두 재현하여 관람객들이 라스코 동굴은 물론 선사시대 이후 생태계에 대한 다양한 지식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경주 토함산에는 세계문화유산인 석굴암이 있다. 통일신라시대 불상으로, 석굴암이 위치한 곳에서 보는 동해바다는 장관이다. 하지만 석굴암의 실물을 보기에는 제약이 따른다. 보존을 위해 큰 유리판이 설치되어 불상과 조각들을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기는 힘들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시내 쪽으로 10여 분 내려오면 경주엑스포 공원이 있다.공원 입구에는 황룡사 탑을 모델로 한 경주타워가 있다. 꼭대기로 올라가면 석굴암을 가상현실로 체험할 수 있다. 세계문화유산 석굴암을 첨단기술을 활용한 가상현실 콘텐츠로 만들어 실제 석굴암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실제공간의 제약을 기술을 통해 극복하고 석굴암의 모습 뿐만 아니라 석굴암의 건축구조 그리고 실크로드의 모습까지를 한 번에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문화유산의 활용과 보존의 노력은 최근의 일만은 아니다. 구글은 아트 프로젝트를 통해 세계 유명 박물관의 소장품을 디지털화하고, 이를 온라인에 공개하여 누구나 시공간의 제약 없이 감상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국내 기관에서 소장한 자료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는데, 경기도 박물관, 경기도 미술관, 백남준 아트센터, 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의 유물도 디지털화되어 쉽게 검색할 수 있다. 최근 경기도 박물관은 미디어 월과 영상체험존을 설치하여 대형 스크린에서 전시물을 확대하며 마음대로 들여다볼 수 있다. 인근의 백남준 아트센터에 설치된 미디어 월에서도 백남준의 작품과 사진, 자료를 대형 스크린으로 살펴볼 수 있다.공간적인 제약으로 전시가 불가능했던 작품과 자료를 디지털 기술로 관련된 정보를 직관적으로 제공하여 이해를 쉽게 하고, 확대된 그림으로 자세히 살펴볼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디지털화된 콘텐츠는 인터넷으로 연결된 공간이면 언제 어느 곳에서나 즐길 수 있어 벽 없는 가상의 박물관을 가능하게 한다. 다양한 가능성이 열려 있는 셈이다. 경기도 박물관의 새로운 시도를 계속 기대해보자. 김상헌 상명대학교 교수

[문화카페] 시각장애인 오케스트라 단원

매년 이맘때면 생각나는 연주자가 있다. 캐서린 암스트롱 (이하 캐시)을 만난 것은 1999년 예일심포니 신입단원오디션에서였다. 그녀가 자기 악기인 트럼펫을 들고 시각장애인 인도견의 도움을 받아 오디션 장소에 들어섰을 때, 나는 캐시 보다 더 긴장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녀는 차분한 모습으로 악기를 가다듬고 준비해 온 솔로곡과 몇몇 교향곡의 트럼펫 독주 부분을 연주해 나갔다. 객관적으로 평가할 때 우리 오케스트라의 일원이 되기에 필요한 기량을 충분히 갖춘 훌륭한 연주자였다. 수석감으로도 손색이 없었고 이전의 어떤 단원보다 음색, 음정, 테크닉, 그리고 음악성에서 뛰어난 수준이었다. 그녀의 첫 소리를 듣는 순간부터 나의 고민은 시작되었다. 내가 음악감독으로서 시각장애인 연주자를 단원으로 받아들이느냐의 단순한 문제를 떠나 ‘과연 내가 캐시를 받아들여 잘 해낼 수 있을까?’ 내가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일, 나뿐만 아니라 그 어떤 지휘자에게도 어려운 모험이 될 이 일을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물론 시각장애인 중에도 훌륭한 연주자들이 있다. 테너가수 안드레아 보첼리, 팝의 전설 레이 찰스와 호세 펠리치이노 등이 있다. 최근에는 일본 출신으로 세계적 피아노 콩쿨인 반 클라이번 국제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한 노부유키 츠지도 있다. 그러나 독주자 또는 독창자로 기량을 닦아 나가는 것과 오케스트라 단원이 되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생각했다. 오케스트라 연주는 지휘자의 손짓, 몸짓, 표정과 눈짓에 수많은 단원이 호흡을 맞추는 철저한 협동작업이다. 연주만을 위한 과정이 아닌 연습과정에서 적절한 소통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앞을 못 보는 연주자가 이 모든 섬세한 작업을 할 수 있을 까? 서로 상처만 받고 헤어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 별이 유난히 많던 그날 저녁 나는 하늘을 보며 ‘내가 볼 수 있는 영롱한 별들을 과연 캐시는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내게 볼 줄 아는 사람들을 지휘하는 재능을 부여해 주신 하늘이 이제는 보지 못하는 사람을 지휘하는 엄청난 능력까지 새로 주시려고 하는 것 같다. 그래! 캐시와 함께 노력해보자. 그녀가 지금까지의 역경을 넘어 예일대학부생으로 입학한 자체는 넘지 못할 벽이 없음을 증명하는 것 아닌가?’라는 결심을 하게 된다. 이런 고민 자체를 하는 내가 심히 부끄러웠다. 날이 갈수록 이런 부끄러움은 더해갔다. 예일심포니에서 캐시는 3년간 수석단원으로서 최고의 연주기량을 발휘하였다. 첫 연습 전에 이미 모든 악보를 암보하고 있었다. 캐시를 제외한 모든 단원들이 악보를 겨우 읽어 나가는 첫 연습에서 그녀는 바로 연주를 하여도 문제가 없는 수준이었다. 캐시의 성실성은 모든 단원들의 귀감이 되었다. 모든 연습시간에 가장 먼저 도착하여 연습장 분위기와 배치를 완벽하게 익히고 금관악기 그룹의 리더로서 필요한 모든 것을 완벽히 준비하는 철저한 프로정신을 발휘하였다. 캐시의 동료들은 사실 지휘자인 나를 따라서 연주하기 보다는 그녀와 하모니를 맞추는 것이 훨씬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캐시는 우리 모두를 독려하고 자극하는 존재가 되었다. 베토벤에서 스트라빈스키까지, 또는 난해한 현대음악 등 아무리 복잡한 악보라도 지휘자와의 소통에서 그 어떤 연주자보다 뛰어났다. 내가 표현하는 숨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어떤 소리를 내야 하는지 누구보다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캐시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고귀한 눈을 갖고 있었고, 우리가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섬세한 귀를 갖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녀에 대한 나의 기준은 무지함과 편견 속에서 나온 것이 증명되었음은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 행운이었다. 함신익 함신익과 심포니 송 예술감독

[문화카페] 잃어버린 골목을 찾아서

골목이 아이들을 품고 아이들은 그 품에서 자라 세상으로 나가던 시절이 있었다. 나지막한 지붕, 이웃집 부부가 싸우는 소리,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이가 울어대는 소리……. 골목에선 비밀이 별로 없었다. 아이들은 그 골목이 좁다는 것을 알아챈 순간부터 넓은 세상을 동경했고 하나씩 골목을 떠나갔다.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도로를 넓히고 아파트를 짓는 과정에서 제일 먼저 사라지기 시작한 골목들. 며칠 전, 서울문화재단이 마련한 아시아문학창작워크숍에 참여하여 서울의 골목을 걸을 기회가 있었다. 나는 베트남태국인도네시아네팔팔레스타인에서 온 작가들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면 좋을지 모르는 채로 성북동 북정마을과 만해 한용운이 거처했던 심우장, 이태준 고택인 수연산방, 법정스님의 자취와 백석의 시비(詩碑)가 있는 길상사를 둘러보았다. 골목 탐방 이후엔 아시아 각국의 골목을 소재로 한 에세이를 감상하며 상실과 자유에 관해 토론을 나누었다. 아시아 국가들은 전쟁과 내전의 상처에서 자유롭지 않다. 베트남 작가 자 응언은 발제문에서 “모든 전쟁에는 끝이 있다. 하지만 인간의 영혼과 정신과 기억의 치유는 상처를 봉합하는 것처럼 간단히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시간이 치료해줄까? 나는 왜 베트남 국민을 전쟁이 끝난 지 40년이 지나도록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사람들처럼 비관적으로 묘사해야 하는 것일까?”라며 열광 후에 이어진 탈진에 대해 “가라앉는 골목”이라는 표현을 썼다. 팔레스타인 작가 아다니아 쉬볼리는 “폐허가 된 마을에서 상상을 하며 놀았다. 문학은 구원이자 생존의 확인이었다”고 했다. 그는 아르메니아 지구 아라라트 골목 19번지에 관한 에세이에서 좁은 골목에서 갈등하며 살고 있는 사람들과 한 노교수의 죽음이 골목에 가져온 침묵에 대해 썼다. 현재까지도 카스트 제도 아래 살고 있는 발리 여성들의 삶을 소설에 담고 있는 인도네시아의 작가 루스미니는 발리 덴빠사르의 골목에 대해 ‘변화를 이끄는 골목’이라고 표현했다. 도시의 거리 예술(Urban Street Art)은 대중문화를 상징하는데 삭막해져 가는 환경에 대해 대중예술이 비판과 위기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현장을 소개했다. 태국에서 온 우팃 해마무가 묘사한 쑤쿰윗로 33길에는 다양한 삶들이 혼재해 있으며 역동적인 힘이 있다. “이들이 거주하는 골목은 활기가 넘친다. 사람의 욕구가 살아 있고 잠재해 있는 희망이 있다. 무엇인가 추구하려는 것들로 가득 차 있지만, 아무리 쳐 넣어도 가득 차지 않는다. 그곳에는 복잡함, 뒤얽힘, 무질서, 실수와 실망이 한데 엉켜 있다.” 네팔 작가 나라얀 와글레는 “골목들은 결국 우리의 옛날을 보여주는 족보”라는 성찰을 글 속에 담아내기도 하였다. 골목이라는 공통 화두를 가지고 함께 의견을 나누고 아직 가보지 못한 아시아의 골목들을 상상해보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었다. 또 이번 기회를 통해서 아시아 문학의 주요 흐름을 확인한 것도 중요한 결실이다. 골목들은 과거와 전통을 간직하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통로로 변화를 이끌기도 하며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웃 마을로 마실을 가려면 골목 하나 지날 때마다 통행 허가 절차가 까다로워 차라리 포기하고 집밖에 나가지 않았다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기막힌 삶을 들으며 그래도 어렸을 적 가난했지만 피난처가 되어주었던 이웃집, 급하면 달려가 돈과 연탄과 반찬 등을 융통할 수 있었던 골목에서의 시간을 떠올려본다. 그 시간들이 내 삶의 자양분이 되었을 것이다. 잃어버린 골목을 찾아가는 것이야말로 잃어버린 시간과 정체성을 찾아가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박설희 시인

[문화카페] 선배들의 역할

2주 전 한국발레협회에서 주최하는 심포지엄에 다녀왔습니다. 발레교육의 현 문제점과 개선해 나갈 사안들에 대해 대한민국 발레계를 이끌고 계시는 발레협회 회장님과 부회장님, 협회 이사님들과 대학 무용과 교수님, 현장에서 어린 학생들을 지도하고 계신 발레학원 원장님들, 예중·고에서 발레 수업을 지도하시는 선생님들 그리고 발레를 오랫동안 배우고 있는 대학생, 대학원생들이 함께했고 연극교육에 앞장서고 계신 한국교육연극학회 이사님까지 함께 한 의미 있는 자리였습니다. 20년 아니 그보다 훨씬 전부터 발레교육이 너무 입시, 콩쿠르 위주로 가고 있다는 수많은 지적과 염려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이날은 발레리나를 꿈꾸는 어린아이들이 얼마나 비참하게 입시와 콩쿠르 준비를 하고 있는지 현장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우리 스스로 비판하고 반성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발레를 하려면 무조건 말라야 한다고 100%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잘 먹고 쑥쑥 커 나가면서 기능적인 부분을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매일 체중을 재면서 맘껏 먹지도 못하고 고문 아닌 고문을 당하고 있고 어린 학생들이 스트레스 골절과 골다공증 증세로 고통받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을 어떻게든 바꿔야 한다고 모두 한목소리를 냈습니다. 예중·예고에서부터 키 크고 마르고 예쁜 학생들만 선호하는 외모지향적인 입시, 콩쿠르를 바꿔야 한다는 의견과 대학에서 그런 학생들만 뽑으니 대학입시부터 바꿔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습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바꿔 나가야 할지 정말 풀어나가야 할 문제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으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하나씩 바꿔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중·고에서 학생들을 선발할 때 대학 졸업 후 전문무용수가 되기를 희망하는 학생들과 지도자, 안무가, 예술 행정가, 기획자가 되길 희망하는 학생들도 외모와 기능면에서 조금 부족하더라도 입학할 수 있게 하고 학생들 선발 이후 교육과정을 두 개의 큰 트랙으로 나눠 학생들의 진로에 맞는 다양한 수업을 듣고 본인이 선택하게 될 미래의 직업에 대해 미리 배우고 경험하게 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날 한 교수님께서 영국 대학에서 유학할 때 본인이 직접 경험하고 느낀 점, 부러웠던 점에 대해 소개를 해 주셨는데 무용과에 입학한 학생들이 선택할 수 있는 과목이 우리보다 훨씬 다양했고 안무법 하나를 보더라도 ‘안무와 장소’, ‘안무와 즉흥’, ‘안무와 콜라보레이션’ 처럼 매우 세분화되어 있는 부분과 ‘안전한 실기와 공연’이라든가 ‘무용에서의 자기관리’, ‘건강한 공연자’와 같은 수업을 선택해서 들을 수 있고 전문 무용수로 활동한 뒤 무용관련 직종에서 일할 경우 필요한 ‘창의적 기획력’이나 ‘무용홍보’ ‘무용티칭 이끌기’ 수업도 눈에 들어왔습니다. 필수과목에 소개된 에세이는 각 분야의 이론과 협업과정에서 발생되는 창의적인 양상을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필수과목이라 하여 또 한 번 놀랬습니다. 질문도 하지 않고 질문에 답하지도 않는 우리 아이들이 졸업 후 사회에 나가 또 사회적응을 위해 다른 공부를 더 해야 한다면 이는 개인은 물론 사회적인 손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점점 발레를 전공하는 학생이 줄고 있고 대학 무용과도 줄어들고 있습니다. 20년 30년 전부터 이미 예고되었던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잘못된 부분을 고쳐나가고 잘하고 있는 것은 더욱 발전시켜나가면서 20년 30년 뒤 우리나라 발레계를 위해 책임감 있는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 우리 선배들의 역할이 아닐까요? 김인희 발레 STP협동조합 이사장

[문화카페] 국시 한 그릇

[문화카페] 입시철 감상

함신익 자녀 한 명을 음악 전공 시키면 당대가, 그리고 두 명을 시키면 3대가 망한다는 그냥 웃어넘기기엔 가슴이 아픈 말을 들었다. 음악은 1:1 개인교습이 필요하고 저명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우리나라 음악계가 이만큼 발전한 것은 미래를 생각하는 열정적인 스승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어린 시절부터 영향력 있는 선생의 문하에 들어갈 수 있다면 올인하는 일부 부모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연유로 레슨비는 인플레이션이 붙어 형편에 따라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되어 버린 느낌도 지울 수 없다. 음악을 전공하려면 부유한 집안의 자녀들만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일부의 푸념도 있다. 요즘 같은 입시철에 악기를 메고 분주하게 거리를 다니는 학생들을 보면서 베토벤의 불같은 열정과 낭만을 모방하고 들길을 뛰며 모차르트의 악상을 노래하던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본다. 음악을 전공하기로 비교적 늦게 결정을 한 나의 경우 모든 것이 새롭던 청소년 시절에 훌륭한 스승을 만나 레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평생의 자산이 되었다. 값으로 셀 수 없는 양분을 공급해 주신 스승님들은 출세나 진학을 위한 음악보다는 진실한 음악인의 자세를 깨우쳐 주셨다. 작고하신 나의 스승 피아니스트 김원복 선생님은 악기로 나의 감정을 표현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주셨고 90에 가까운 고령까지에도 몸소 규칙적인 연습과 도전적인 연주로 제자들을 놀라게 하셨다. 난생 처음 경험한 그 새로운 세계를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때의 가르침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의 연주생활에 측량할 수 없는 원천 에너지가 되고 있다. 나의 제자들을 같은 원리에 입각하여 가르치고 있으며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도 그런 예술가의 정신이 우선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지금도 여전히 서울의 곳곳에서는 입시를 위한 스튜디오들이 넘치며 진학을 목표로 매진하고 있다. 수련과정으로는 필요불가결한 것이겠지만 자칫 예술보다는 입시에 치중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을 우려한다. 학생들이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여 풍부한 배움을 갖는 것을 탓할 수 없다. 그러나 이제는 더 넓은 세상에서도 경쟁력 있는 예술가로 키워내야 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민간 오케스트라를 운영하며 이런 시스템에서 성장한 일부 연주자들과 함께 연습하고 무대에 서며 아쉬운 것은 아직 예술가로서 필요한 독창력의 부족함이다. 미국에서 교수로서 20년 넘게 가르쳐 온 바, 독창적인 음악의 해석을 한국의 음악도들에게서도 발견하는 것이 어렵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틀리지 않게 수비 위주의 연주로서는 청중을 감동시킬 수 없다. 수비 위주의 축구로 명성을 떨치던 이탈리아가 2018년 러시아월드컵 지역예선에서 탈락했다. 감동이 없는 연주를 하던 그런 학생들이 후에 선생이 되면 크게 변하지 않은 사이클을 반복하기 쉽다. 남을 감동시키는 연주를 위해 적극적인 공격이 필요한 시대가 왔음을 인지해야 한다.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가르침을 주는 선생님을 찾아 배움을 전수받는 것이 한국음악계의 밝은 미래를 볼 수 있게 한다고 믿는다. 짧은 시간 내에 높은 점수를 따내는 운전면허 필기시험 준비와 같은 자세로 예술을 천직으로 삼으려는 발상은 머지않아 음악도들을 방황하게 만들며 최악의 경우 음악을 포기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 다시 강남에 몰려 있는 연습실을 둘러보자. 한 명이 불어도 엄청나게 큰 소리를 내는 어떤 악기의 입시준비학생 여러 명이 작은 연습실에서 동시에 연습한다는 말을 듣고 과연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런 환경에서 개성과 낭만이 넘치는 연주를 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떨칠 수 없다. 획일화된 기현상이 어느덧 정상이 되어버렸다면 40년 전 나의 10대 시절에 비해 어떻게 진화되었는지 2017년 입시철에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함신익과 심포니 송 예술감독

[문화카페] 기형도 문학관이 부러운 이유

기형도(1960∼1989) 문학관이 며칠 전에 문을 열었다고 한다. 기형도 시인이 태어난 곳은 인천시 옹진군 연평도지만 문학관이 들어선 광명시 소하동은 그가 다섯살 때 이사온 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가족과 함께 살던 곳이다.그의 시 ‘안개’에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의 샛강은 안양천이고 “열무삼십단을 이고” 엄마가 갔던 시장도 광명에 있다. 광명시가 유족에게서 기탁 받은 130여 점의 유품 등으로 개관하게 된 문학관은 전시실과 자료실을 갖춘 지상 3층 건물이다. 문학관을 열기까지는 십여 년 전부터 꾸준히 추진해온 시민들의 힘도 컸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중략)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기형도 빈집 부분 지금 이 시간에도 기형도의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을 읽으며 시인의 꿈을 키우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습작기에 내가 읽은 그는 감각적인 이미지와 우수로 가득 찬 도회인이었다. 그러나 지금 다시 읽은 기형도는 철저히 일상에서 소재를 취하고 그것을 체화하여 이미지로 만들었다. 적어도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명확히 알았고 땅에 발을 디딘 채 80년대라는 시공간을 그려내고 있다. 우리가 기형도에게서 취해야 할 점은 시적 짜임새나 표현의 묘미, 분위기가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담을 것인가 하는 주제의식과 작품을 향한 치열성과 성실성이다. 지역 곳곳에 그곳 출신 문인들을 기리는 문학관이 많이 들어서고 있다. 문학은 인간과 세계에의 총체적 탐구다. 철학이 이성으로 인간을 탐구한다면 문학은 이성, 감성뿐 아니라 오감을 다 사용하여 인간을 탐구한다. 문학을 공부한 사람이 총을 들고 불특정 다수를 향해 총을 쏠 리가 없다.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혈안이 될 수는 없다. 문학의 기저에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이 사회를 유지하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이 문학을 포함한 예술임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논리에 따라 정책을 입안하고 세부계획을 짜는 경우가 많다. 내가 살고 있는 수원에는 문학관이 없다. 인구 120만명이 넘는 경기도청 소재지, 화성이라는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는 수원에 웬만한 시에서는 다 있는 문학관 하나 없는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우울해진다. 나혜석, 박팔양, 홍성원 등 이 지역 출신의 쟁쟁한 문인들은 꽤 있는데 그들을 기릴 공간조차 없는 것이다. 이런 형편이니 원주 토지문화관이나 서울 연희창작촌처럼 집필을 할 수 있는 전문 공간은 꿈도 못 꿀 일이다. 인문학 도시를 표방하고 있는 수원에서 과연 어느 정도로 인문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문학과 문학인들을 배려하는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지 묻고 싶다. 개별적인 문학관이 힘들다면 ‘수원문학관’을 만들어 이 지역 출신 문인들을 아울러 기리는 방법도 있다. 그 예로 목포시의 선례를 살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목포문학관’에는 극작가 김우진, 소설가 박화성, 극작가 차범석, 평론가 김현의 자료실이 각각 독립되어 있다. 그것을 보고 자란 청소년들은 자신의 고향에 대한 자긍심을 평생 지니고 살게 될 것이다. 정신적 자산으로서의 문학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회야말로 밝고 성숙한 사회임을 믿는다. 박설희 시인

[문화카페] 지하철에서

두 달쯤 전 금요일 오후, 시내에서 일을 마치고 운전을 해서 집으로 오는데 두 시간 반이나 걸렸었습니다. 중간에 짜증도 나고 졸리기도 하고…. 다시는 금요일에 차를 가지고 다니지 말자며 스스로와 약속을 했습니다. 지난주에는 나이가 지긋하신 참으로 곱게 늙으신 어르신 한 분께서 지하철에서 막 내리려다 말고 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내 바닥에 붙어있는 이물질을 집어 전철에서 내리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문이 막 열리려는 찰나여서 일반 사람들 같으면 줍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내 한몸 챙기기 급해 그냥 내리기 바빴을 텐데 다른 사람을 위해 일부러 주머니에서 곱게 접은 휴지를 꺼내 전철 바닥의 이물질을 주어 내리시는 그분의 모습을 보면서 “저런 분들이 계셔서 우리 사회가 아직은 살만한 곳 인가보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뒤에 안타깝게도 지하철 화장실에 들어서는 순간 눈살이 찌푸려지는 현실과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요즘은 개인 손수건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보니 손을 씻은 후에 종이타월이나 손 건조기를 사용하게 되는데 건조기가 작동을 안 하거나 종이타월이 없는 화장실에서는 젖은 손으로 화장지를 둘둘 말아 손을 닦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젖은 손을 바닥에 몇 번 털어낸 뒤 휴지를 잡아 끌어내다 보니 화장실 바닥에는 물도 떨어져있고 뚝뚝 끊어져 있는 휴지들이 여기저기 널려있습니다. 나만 편하면 된다는 이기적인 행동이 결국은 내가 화장실에 들어갔을 때 나를 불편하게 합니다. 21년동안 단장으로 활동했던 서울발레시어터는 연습실이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연습실은 단원뿐만 아니라 일반인 발레 수업, 학생들 수업, 장애우와 비장애 어린이들이 함께 배우는 발레교실, 일요일 빅이슈 잡지를 판매하는 홈리스 아저씨들 발레 수업까지…. 한 공간을 여러 팀, 여러 그룹이 함께 사용해야 했고 정리정돈, 청결유지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사용하는 이 공간을 나를 위해 청결히 사용하자는 여러 번의 교육을 통해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늘 깨끗하고 정리 정돈된 연습실 공간에서 만족한 생활을 했었습니다. 올해부터 저는 인생 제2막을 살고 있는데 새로운 공간, 환경에서 만나는 요즘 친구들은 정리정돈이라는 단어를 모르고 사는 것 같습니다.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된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음료수를 마신 뒤 빈병, 빈컵이 바닥에 그대로 놓여 있고 휴지가 창틀이나 바닥에 그냥 있는 것을 보는 게 아무렇지도 않은가 봅니다. 무대 위에서 예뻐 보이려고 하루에 몇 시간씩 거울 앞에서 겉모습을 다듬는 학생들이 말투와 마음씨 그리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도 함께 키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1980~1981년 휴학시절 기숙사 생활을 했었는데 교장선생님께서 불시에 기숙사로 내려오셔서 침대 정리 상태, 옷장, 서랍 하나하나를 다 열어 점검을 하셨던 생각이 납니다. 선생님 구두굽 소리만 나도 정신이 번쩍 나던 옛날이야기입니다. 그때는 귀찮고 싫기도 했었는데 살면서 여러 번 선생님 생각이 나고 발레 동작뿐 아니라 우리의 생활습관, 태도까지 신경 써주시고 챙겨주신 것이 너무 감사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육과 소통을 통해 공감대를 형성하는 과정을 배우는 것 또한 기능, 기술을 배우는 만큼 아니 그 이상 중요하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버린 것을 줍는 일은 하루아침에 쉽게 할 수 있는 행동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내가 쓴 휴지, 내가 마신 컵을 버리지 않는 것은 지금 당장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개인 손수건 사용을 늘린다면 모든 공중 화장실 바닥이 지금보다 훨씬 청결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작은 나비의 날갯짓이 엄청난 태풍을 일으킬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이 우리의 미래를 더 행복하고 건강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 확신합니다. 김인희 발레STP협동조합 이사장

[문화카페] 지역문화와 축제

가을은 축제의 계절이다. 문화체육관광부에 공식적으로 등록된 축제만 2천여 개가 넘는다. 지자체 별로 크고 작은 축제가 8개쯤 된다. 축제 평가라는 명목으로 방문하고 자문이랍시고 이런저런 훈수도 두지만, 참 재밌다 싶은 곳은 손에 꼽는다. 축제가 재미없는 이유는 뻔한 콘텐츠 때문이다.먹거리도 늘 보던 것이고, 공연도 방송국에서 진행하는 가요프로그램이 최고의 콘텐츠라 여긴다. 동네 장터에서 늘 보던 것이 난장에서 그대로 보인다. 축제장만 따라다니는 상인들도 제법 된다. 차별성 없는 콘텐츠가 흥미를 잃게 한다. 문화산업을 이야기하면서 경제적 가치를 따지는 경우도 많다. 어느 축제는 유료관객에게만 콘텐츠를 보여주려고 축제장을 가림막으로 막았다. 궁금함이 아니라 부아가 솟는다.주최 측은 역대 최고의 수익을 올렸다고 자랑하지만 지역 상인들은 반 토막 매출이라 불평한다. 무엇을 위한 축제일까. 몇 해 전 여름, 프랑스·프로방스 산길을 지나다 라벤더 축제가 한창인 곳을 들렀다. 광장에는 온갖 라벤더 제품을 파는 장터가 열렸고, 한쪽에선 라벤더 한 묶음씩을 내어줬다.마을 입구에서는 헬기가 광활한 라벤더 밭을 보려는 관광객을 끊임없이 태운다. 안내소에서 지도를 나눠주는 청년은 영어로 행사를 설명하고 인근 마을 축제 일정도 알려준다. 고향에서 봉사 중인 대학생 청년이었다. 방학이지만 고향의 장학금으로 학교에 다니고 있어 봉사 의무가 있다고 한다.이런 사람들이 모여서 동네 축제를 만들고 있다. 자연스럽게 자기 지역 특산물을 앞세워 동네잔치를 벌인다. 요즘 지역균형 발전이 화두다. 지역 간 경제 격차, 문화 격차가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다. 지역문화의 발전이라는 또 다른 숙제를 만난다. 지역문화는 한 지역의 역사적 공동경험과 문화의 동질성, 공동체 의식을 아우르는 개념이다.지역 커뮤니티가 인정하는 문화적인 정체성과 동질성인 셈이다. 프랑스 축제장에서 만난 대학생은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곳에서 생활하더라도 고향에 대한 정체성을 계속 확인하게 될 것이다. 이들이 모여서 지역문화의 바탕이 된다.탁월한 문화라는 비교는 이제 그만하자. 더 우수하고 덜 우수한 문화는 없다. 다름은 있지만 옳고 그름의 판단은 섣부르다. 문화의 우수성은 다양성에서 찾아야 한다. 다양한 문화자원을 풍부하게 잘 표현하는, 잘 모아두는 것이 좋은 문화다. 문화는 지역으로부터 형성돼야 한다. 큰길을 막고 아이들은 도로를 캔버스 삼아 분필로 그림 그린다. 여기저기 공연과 전시가 벌어진다. 박물관까지 가는 길에는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다른 한쪽에는 다양한 먹거리판이 열린다. 박물관과 마을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한 이 난장은 맨해튼에서 열리는 ‘뮤지엄 마일 페스티벌’이다. 안산 ‘상록수 문화제’의 모습이기도 하다. 매년 상록수역과 최용신 기념관을 중심으로 여는 가을 잔치다. 주민과 박물관, 안산시가 함께 만드는 마을잔치다. 올해 퍼레이드와 공연, 샘골마을 놀이터, 전시장과 같은 다양한 행사가 개최됐다.이 축제는 지역 구성원들이 함께 의논해서 준비하고 진행한다는 점에서 제대로 된 동네잔치인 셈이다. 행사의 공간인 상록수역과 최용신 기념관은 모두 교육자이자 선각자인 최용신 선생을 상징하는 곳이다. 개인을 기념하는 기념관은 동시에 샘골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지역 커뮤니티의 허브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다는 증거다. 이렇게 건강한 지역문화와 문화활동이 문화적 다양성을 이룬다.경기도에는 지역 특성상 국내외에서 이주해온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 있다. 이들의 문화를 인정하고 크고 작은 축제를 만들어 다양성을 확보하는 것이 문화적인 강자가 되는길이 아닐까. 김상헌상명대학교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문화카페] 예술가와 기술자 사이

[문화카페] 재앙의 언어, 치유의 언어

언어에 온도가 있다면 미국 대통령 트럼프와 북한 통치자 김정은이 주고받은 언어의 온도는 몇 도쯤 될까? 캘리포니아 산불보다 더 뜨거운 불의 언어요 재앙의 언어일 것이다. 트럼프와 김정은의 막말 설전이 한창일 때 작가 한강이 뉴욕타임스에 보낸 기고문을 두고 요즘 설왕설래 말이 많은 모양이다. 누군가는 그의 역사관을 들먹이며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대신해서 조목조목 잘 짚어줘 후련하다고 한다. ‘미국이 전쟁을 말할 때 한국은 몸서리친다’는 제목의 이 기고문에는 평화를 소망하는 한국인들의 마음이 담겨 있다. 작년에 있었던 일이다. 내가 평소 알고 지내던 시인의 아내가 갑자기 쓰러졌다. 뇌출혈로 쓰러진 그 아내는 며칠 동안 사경을 헤맸다. 그러자 그는 동료 시인들에게 아내의 병실에서 시를 읽어줄 수 없겠느냐고 요청을 했다. 그러면 아내가 빨리 회복될 수 있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내게는 그것이 매우 신선하고 놀라운 일로 다가왔다. 병상에 있는 환자를 위해 기도를 하는 일은 흔하지만 아내의 쾌유를 위해 시를 읽어달라니. 그러자 그 부부를 잘 아는 시인 몇이 병실을 방문해 시낭송을 했다. 그 덕분인지 몰라도 그의 아내는 목숨을 건졌고 길고 무더운 여름 내내 통원하며 재활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작년 겨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촛불집회에 지팡이를 짚고 남편과 함께 나타나서 주위 사람들의 박수를 받았다. 그것은 시의 힘을 믿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평소에 그의 아내는 시를 좋아했을 것이고 자신이 아는 시인들이 직접 찾아와 시낭송하는 것을 들으며 위안을 받고 삶의 의지를 다졌을 것이다. 이러한 예는 얼마든지 있다. 2010년 칠레의 산호세 광산에서 광부들이 지하 700m에 매몰되어, 69일 만인 10월13일 구조되었을 때 무엇보다도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들이 지하 대피소에서 파블로 네루다와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의 시를 낭송하며 희망을 잃지 않고 버텼다는 점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그런 일이 발생했다면 광부들이 과연 어떤 시를 낭송했을 것인가. 과연 시를 낭송하기는 했을 것인가. 더러 신문지 깔고 밥 먹을 때가 있는데요 어머니, 우리 어머니 꼭 밥상 펴라 말씀하시는데요 저는 신문지가 무슨 밥상이냐며 궁시렁 궁시렁하는데요 신문질 신문지로 깔면 신문지 깔고 밥 먹고요 신문질 밥상으로 펴면 밥상 차려 밥 먹는다고요 따뜻한 말은 사람을 따뜻하게 하고요 따뜻한 마음은 세상까지 따뜻하게 한다고요 어머니 또 한 말씀 가르쳐 주시는데요 -정일근, 신문지 밥상 부분 시의 힘은 곧 언어의 힘이다. ‘신문지 깔고’ 밥을 먹을지 ‘밥상 차려’ 밥을 먹을지는 그것을 어떻게 명명하느냐에 달려 있다. 사고가 언어를 지배할 때도 있지만 언어가 사고를 지배하기도 한다. ‘따뜻한 말은 사람을 따뜻하게’ 하고 ‘따뜻한 마음은 세상까지 따뜻하게 한다’지 않는가. 지금은 영화나 게임 같은 이미지가 큰 힘을 발휘하는 시대다. 그러나 일상에서 쓰는 언어는 소통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내가 하는 말 한 마디가 내 이웃을 행복하게 하고 세상을 따뜻하게 한다. 박설희 시인

[문화카페] 입시와 맞바꾼 황금연휴

대한민국 전체가 열흘 이상 되는 황금연휴를 맞아 국내외로 여행을 다녀오거나 모처럼 긴 휴식과 힐링을 제대로 한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남들이 쉴 때 쉬지 못하는 직업에 종사하시는 분들도 많이 계셨다고 하는데 집에 고3 학생을 자녀로 둔 분들, 특히 예체능계 학생들과 지도하시는 선생님들은 9월 말부터 시작된 수시 입시 준비로 긴장된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2010년 이후 대학에서 수시로 뽑는 학생의 비중이 커지면서 수시에 합격한 많은 학생이 수시 비중이 커지기 이전과는 달리 입학 전 상당히 긴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합격했다는 안도감과 성취감에 들떠 본인이 전공하려는 분야를 준비하는 기간이 아닌, 그동안 못 놀고 못 쉰 것에 대한 한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학생들의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예·체능계, 특히 무용 전공으로 대학에 가는 학생들은 빠르면 10월 중순 늦으면 12월 초 합격 여부가 결정되는데 일부 발레를 전공한 학생 중에는 10㎏ 이상 체중이 늘어 입학 후 많은 부상과 정신적 갈등을 이겨내지 못하고 전공을 바꾸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입시제도가 너무 자주 바뀌다 보니 선생님들은 물론 부모님들과 학생들은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소문에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살 수밖에 없는 게 현실입니다. 2019년부터는 수시보다 정시 비율이 높아진다는 이야기도 들리고 S대는 어떻고 Y대는 어떻고…. 6군데나 되는 학교를 뛰어다니며 시험을 보고 여기저기 예비번호를 받아 누군가 나보다 높은 점수를 받은 학생이 입학을 포기하길 기다렸다 별로 원하지 않았던 학교로 입학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짧게는 1분, 길게는 3~4분 정도의 동작을 보여주는 실기시험을 통해 전국에서 올라온 발레전공 학생들이 시험을 보게 되는데 6군데 대학에서 뽑고 싶어 하는 학생은 어느 대학에서든 그 순위가 별로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키가 크고 날씬하고 얼굴이 작고 팔다리가 긴 학생이 유리한 입시에서 선발된 학생 중 졸업생의 10~20%만이 전문 무용수가 되고 그 외 학생들은 졸업 후에 다른 직업을 찾아야 합니다. 오디션을 통해 전문 직업 무용단에 입단하지 못하는 80% 이상의 졸업생들은 졸업 후에 공연기획, 홍보, 마케팅 공부를 시작하거나 충분한 준비 없이 문화센터나 개인학원에서 아르바이트로 학생들을 지도합니다. 다양한 직업을 선택할 수 있도록 개인별 능력을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는 독창적이고 다양한 입시제도와 대학의 커리큘럼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 학교에 가야만 배울 수 있는 그 무언가가 있고 반드시 그곳에 가서 꼭 그 교수님께 배워야 할 그 무언가가 학교를 선택하는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더 이상 눈치작전이 아닌 학생들이 본인이 이루고자 하는 꿈 때문에 학교를 선택하고 입시를 준비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대기업, 중·소기업에서 스펙만을 가지고 직원을 채용하지 않는다는 뉴스를 여러 곳에서 접하는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대학에 가서 제대로 공부한다는 외국의 대학 사례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 아이들은 저렇게 힘들게 대학에 가서 공부는 언제 하지? 라고 걱정을 하는 목소리도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4학년이 되면 또 취업을 위한 입시 준비를 합니다. 정답을 찾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누구든 원하면 대학을 갈 수 있게 해주고 대학에 가서 자신의 관심분야를 더 깊이 있게 연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기 능력은 좀 부족한 이들 중에 전 세계를 뒤흔들어 놓을 안무가나 디자이너, 기획자 혹은 선생님이 계실지도 모르니까요! 하루아침에 입시제도가 바뀔 수는 없겠지만 5년, 10년, 50년, 100년을 준비하는 그런 입시제도는 만들 수 없는 걸까요? 아예 입시라는 것이 없는 그런 날이 오기를 바라는 건 너무 지나친 바람일까요? 김인희 발레STP협동조합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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