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스스로 빛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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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꺼번에 팝콘처럼 피어난 아파트 단지 안의 벚꽃을 보면서 저 많은 꽃을 피워내느라 힘들었을 나무의 노고를 생각하게 된다.

꽃 한 송이를 피우는 데 무척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고 하니 이 즈음의 나무들은 나무발전소인 셈이다. ‘봄은 땅에서 오고 가을은 공중에서 온다’고 했는데 나무들은 봄을 가지 끝까지 끌어올리느라 야생화들보다 개화에 시간이 더 많이 걸린 것이다.

 

젊은이들에게 ‘봄’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꽃을 물어봤더니 대부분 벚꽃이라고 대답했단다. 그 이유는 벚꽃이 화려해 눈에 잘 띄는 데다가 지구 온난화로 벚꽃 개화 시기가 일주일가량 앞당겨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개나리와 진달래가 봄의 전령인 것처럼 여겨지던 시절이 벌써 아득하다.

 

법정스님 수필을 읽다 보니 화초를 애지중지 보살피다가 거기에 얽매이게 되자 꽃에 대한 사랑도 결국 집착임을 깨닫게 된 스님이 난초 화분을 다른 사람에게 주거나 장미 등 기르던 화초를 다른 데로 옮기는 이야기들이 있다. 그 빈 뜰에 시간이 흐르자 야생화들이 피어난다.

달맞이꽃은 해질녘에 핀다. 저녁 예불을 마치고 뜰에 나가면 수런수런 여기저기서 꽃들이 문을 연다. 투명한 빛깔을 보고 있으면 그 얼까지도 환히 들여다보이는 것 같다. 박꽃처럼 저녁에 피는 꽃이라 그런지 애처로운 생각이 든다. 혼자서 피게 할 수 없어 여름내 나는 어둠이 내리는 뜰에서 한참씩을 서성거렸다. 그 애들이 없었더라면 여름의 내 뜰은 자못 삭막했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마른 바람이 불어오자 꽃들은 앙상한 줄기에다 씨를 남긴 채 자취를 감추어갔다. 오늘 아침 마지막 꽃대를 거두어주었다.

-<빈 뜰> 중에서

꽃들이 수런거리며 문을 여는 시간, 애처로운 마음에 “혼자서 피게 할 수 없어” 꽃 옆에서 여름내 서성거리는 스님. 이게 자비심일 게다. 함께 겪는 것. 비 오는 데 가장 고마운 사람은 우산을 내미는 사람이 아니라 같이 비를 맞아주는 사람이라지 않는가. 타자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될 때 우리는 돈이나 효율성의 잣대를 들이대지 않을 것이다.

 

법정 스님의 글을 읽으면서 늘 번잡스럽기만 한 내 마음의 뜰을 떠올려 본다. 마음에도 여백이 있어야겠다. 더 움켜쥐려고만 하지 말고 햇빛 한 줌, 바람 한 줌 그리고 몇 송이의 달맞이꽃, 나팔꽃, 메꽃 등이 피어 있는 빈 뜰을 두어야겠다.

뒤로 물러 서 있기

땅에 몸을 대고

남에게

그림자 드리우지 않기

남들의 그림자 속에서

빛나기

-라이너 쿤체 <은엉겅퀴>

최근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시다. 제 키를 높여 햇빛을 독차지하려는 무한경쟁 사회에서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스스로 빛나는 생존 전략. 라이너 쿤체는 “시란 조용한 인식을 매개하는 ‘맹인의 지팡이’ 같은 것”이라고 했다. 평소 깨닫지 못하는 존재의 비밀을 드러내주는 이런 시를 만날 때 내 정신도 함께 고양된다.

 

“나의 의문을 풀어주는 데는 열 권의 철학책보다 창가에 핀 한 송이 나팔꽃이 낫다”는 휘트먼의 말을 생각하며 이 봄, 한 송이 꽃과 깊게 눈을 마주쳐 본다.

 

박설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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