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영업 전략은 ‘증오를 부추기는 기사는 쉽게 확산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에 비판적인 일본인들은 한국에 대한 안 좋은 뉴스들을 믿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고 이들을 대상으로 한국에 대한 증오를 부추기는 가짜뉴스를 만들어서 퍼뜨리는 식이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대다수 언론을 불신하고 SNS를 통해 퍼지는 가짜뉴스를 진짜로 믿고 분노와 증오로 무장한 채 주말집회에 나가는 분들이 많은 걸로 알고 있다.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는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하는 증오전략이 먹힌 것이다. 돈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천박한 생각도 문제지만 그들이 노리는 대로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한 가짜뉴스는 독버섯처럼 번져나갈 것이다.
이런 사태를 지켜보며 “타락한 정보가 있는 게 아니라 정보 자체가 타락한 것”이라고 한 들뢰즈의 경고나 “정보란 명령이라는 의미”라고 한 하이데거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지금처럼 정보가 넘쳐나는 사회의 위험성을 그들은 미리 알았던 것일까.
블로그나 카페, 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한 정보에서 다른 정보로 계속 미끄러지는 정보수집이 아닌, 정보에서 사색과 통찰로 이어지는 독서가 필요하다.
십년쯤 전, 지방에 사는 선배 소설가의 집을 방문한 후배 소설가가 호들갑스럽게 다녀온 소감을 말했다.
“그 형 책상에는 삼국지만 있어요.”
그 책을 얼마나 읽었던지 너덜너덜 해졌더란다. 그 소설가는 한 작품을 매우 깊게, 반복적으로 읽으면서 자신의 소설의 틀을 잡았던 것이다.
최근에 읽은 책 중에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은 읽는다는 것의 위대함을 일깨워 주었다. 다소 자극적으로 보이는 제목은 독일 시인 파울 첼란의 시구에서 따 온 것이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하늘에서 허공에서 눈의 가위로 그 손가락을 잘라라 너의 입맞춤으로 이렇게 접혀진 것이 숨을 삼키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사사키 아타루는 불합리하고 부당한 세상을 변화시켜달라고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것보다, 그 두 손으로 책을 읽고 또 읽고, 고쳐 읽고 다시 고쳐 쓰는 행위 자체가 더 가치 있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많은 책을 읽지 말고 한 권을 읽어도 되풀이해서 읽으라고 한다. 그래야 통한다고. 지식과 정보가 범람하는 이 시대에 역설적으로 소수의 책을 반복해서 제대로 읽으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이 책은 성서를 제대로 읽음으로써 종교개혁을 일으킨 루터의 예를 들어 하나의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전 생애를 거는 일이며 목숨을 거는 일이며 혁명적인 일이라는 것을 설득력 있게 전개해 나간다.
“읽어버린 이상 고쳐 읽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고쳐 읽은 이상 고쳐 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읽은 것은 굽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쓰기 시작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그것만이 ‘혁명의 본체’입니다.”
그에 의하면 혁명의 본질은 ‘폭력이나 주권 탈취가 아니라 텍스트를 다시 쓰는 것’이다. 우리가 혁명에 대해 가지고 있는 편견 중 하나는 혁명과 폭력이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인데 사사키 아타루는 그것을 부정한다.
좋은 시집 한 권, 철학책 한 권이 개인의 삶과 한 시대를 바꾼 예는 무수히 많다. 무엇을 읽을 것인가. 이것은 단지 책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회를 읽는 일, 삶을 읽는 일에도 적용될 것이다. 텍스트는 무궁무진하다.
박설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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