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왜?’ 라는 질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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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런던에 있는 어느 미술대학에서 ‘Don’t ask me why 왜 라고 묻지 마’라고 쓴 낙서를 본 적이 있다. 제발 따지지 좀 말라는 뜻이다. 교수들로부터 얼마나 시달렸으면 저리 썼을까 싶었다.

 

나 또한 유학시절 ‘왜?’로 시작되는 많은 질문들을 통해 나의 작업 전반을 다시 돌아볼 수 있었다. 영국 미술대학에서 지도교수와의 개별 면담 수업(Tutorial)은 자기 경험에 근거한 작업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저 ‘작품 같은 작품’을 만들고 있는지 확인하는 질문으로 시작된다. 학생들은 작품의 완성도보다는 그 작업을 왜 하는지, 다른 기성 작가들과는 어떻게 다른지 생각해야하고 그것을 작품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이러한 수업은 방법론적 진화를 거듭해 온 서구 현대미술의 역사적 경험에 기인한다. 그들은 한 시대를 지배하던 견고한 스타일이 관점을 달리하는 한 작가에 의해 순식간에 옛것이 되는 것을 보았다. 동시대 미술을 넘어 또 다른 미술의 출현을 기대하는 이들은 익숙하고 세련된 많은 작품들보다는 보는 이의 몸을 돌려세워 새로운 시야를 열어줄 한 점의 작품을 보고자 한다.

 

요즈음은 인터넷을 비롯한 다양한 매체를 통해 많은 정보가 공유되고 쉽게 복제가 가능하기 때문에 ‘과연 이 작품이 작가의 고유한 아이디어에 근거한 것인지’를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노골적으로 남의 것을 베끼지 않았더라도 잡지나 인터넷에서 잠깐 스쳐 지나간 작품의 분위기나 아이디어가 알게 모르게 작가의 손끝으로 스며들 수 있다.

 

노련한 스승은 제자들의 작업에 끼어든 타인의 흔적을 찾아낸다. 이는 남의 땅에 집을 짓고 있는 사람에게 집터를 확인해 주는 것과 같다. 아무리 좋은 집을 지었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땅에 집을 지으면 헛수고가 되니 말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새로운 작품세계를 찾아 나선 예술가들에 의해 확장된다. 예술가가 기존의 유형을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론을 추구하는 것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나는 탐험과 같다. 이 여정은 ‘왜?’라는 수없이 많은 자문自問에 대한 ‘왜냐하면’으로 시작하는 자답自答으로 채워진다.

끝없는 사색과 실험 없이는 한 발짝도 전진할 수 없다. 진지한 예술가는 자신의 존재 위치를 예민하게 파악하면서 자기가 본 세상의 어떠함을 자신의 작품 안에 담아낸다. 그리고 이 낯선 예술적 코드는 ‘왜?’라는 질문을 던졌던 질문자들에게 되돌려져 해독(解讀)을 기다린다.

 

집단 정서가 지배하는 현대인의 삶 속에서 ‘왜?’라고 묻고 ‘왜냐하면’으로 이어지는 대화는 생뚱맞은 일이 되었다. 학연, 지연, 돈과 권력 그리고 심지어는 외모가 질문과 답을 대신하는 시대에는 정직한 예술가도 감상자도 만나기 어렵다.

 

자신의 판단을 ‘묻지 마’ 정서에 저당 잡힌 무리로부터 빠져나와야 한다. 정곡을 찌르는 질문은 우리를 옭아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을 열어 실재를 향하게 한다.

 

흥미롭고 강렬한 교감은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작품과의 만남에서 발생한다. 이 만남을 통해 단순한 정보 교환이 아닌 마음을 움직여 세상을 다시 보게 하는 소통을 경험한다.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 세상에서 유일한 ‘나’를 회복하고 유형화된 삶에서 벗어나야만 나의 언어로 너를 만나 새로움을 논할 수 있다.

 

어쩌면 ‘왜?’라는 질문의 대부분은 우문이 되기 십상이며 그 대답도 현답보다는 오답이 많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의문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진지한 태도는 ‘왜?’라는 질문으로 ‘너’와 ‘나’의 정신이 살아 있게 하는 것이다.

 

전원길 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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