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인생이 다 시지, 뭐

시집 한 권은 ‘시의 집’으로 시인들은 자신의 시집을 가져야 진짜 시인이 된다. 시집은 시인이 찾아낸 언어의 집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던 하이데거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시인의 전존재가 스며 있는 집인 것이다. 그 언어들은 다이아몬드보다 단단하고 용광로보다 뜨겁고 때론 북극 빙하보다 더 차가운 언어들이다. 아니, 그래야 한다. 전에 어떤 시인이 자신의 시집을 내게 주면서 “냄비 받침으로나 쓰라”고 한 적이 있다. 물론 겸손히 자신을 낮춰 하는 이야기였다. 받는 나도 그것을 냄비 받침으로 쓸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자조의 의미가 담겨 있는 듯했다. 아니면 라면 냄비 정도야 거뜬히 이겨낼 수 있는 뜨거움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일까? 지인이 근무하는 사무실에서는 시집이 마우스 받침으로 쓰이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 시집 제목이 뭐냐고 물으니 『슬픔에게 무릎을 꿇다』라고 했다. 나는 시집 대신 사용할 마우스패드를 건네며 그 시집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마우스 받침으로만 쓴 것이 아닌 듯 우글쭈글 화상을 입은 표지를 넘기니 표제시가 나왔다. 어항 속 물을 물로 씻어내듯이 슬픔을 슬픔으로 문질러 닦는다 -이재무, 「슬픔에게 무릎을 꿇다」 중에서 “물을 물로 씻어내듯이”에서 아, 그렇구나 끄덕이다가 “슬픔을 슬픔으로 문질러 닦는다”에서 가슴이 턱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 시가 우리에게 주는 기쁨이 주로 깨달음과 감동과 신선함에 있다면 이 시는 어느 지점에 있는 걸까 생각하며 한때 마우스받침이었던 시집을 아껴서 읽었다. 그 사무실에 근무했던 사람들 중에 누군가는 마우스를 받치고 있는 종이뭉치가 아니라 한 권의 살아 있는 정서로서 가슴과 가슴이 맞닿는 경험을 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며칠 후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수원에 위치한 벌터 경로당 어르신들이 시집을 내는데 그 표사를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표사는 책의 뒤표지에 추천사를 쓰는 것을 말한다. 나는 그 시집 발간의 내력과 취지를 듣고는 흔쾌히 쓰겠다고 대답했다. 고무줄이 땅에 살짝 내려올 때, 얼른 뛰었지 그렇게 고무줄 넘듯이 시간을 넘어왔어 오늘 따라 과거가 고무줄처럼 늘어나네 -정순자, 「옛날」 중에서 입말의 정겨움과 삶의 진솔함이 그대로 묻어나는 어르신들의 시를 읽으며 무심코 넘어간 시집 제목을 다시 보니 『인생이 다 시지, 뭐』란다. 이 제목도 어르신들과의 대화 중에서 나온 말씀을 잡아챈 것이라 한다. 온몸으로 살아낸 시간의 흔적들, 그렇게 나이 든 시인들의 시를 읽으며 시란 무엇인가 다시 생각해본다. 인생이 시라면, 어르신 한 분 한 분은 각자 시집인 셈이다. 어떤 시집은 두껍고 어떤 시집은 슬픔으로 출렁인다. 누군가의 아내이자 엄마이고 생산자이자 소비자인, 아직은 미완성인 시집, 여전히 집필 중인 시집. 올여름 읽어야 할 시집들을 떠올리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어떤 시집으로 완성되어가고 있는가. 박설희 시인

[문화카페] 꽃보다 무엇이 중요헌디?

유럽의 무대에서 연주를 마치고 나면 어김없이 무대로 꽃다발을 들고 나와 협연자에게 전달하는 전문직원이 있다. 이런 전통은 남미 또는 클래식 신흥국가인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지나치게 융숭하며 때에 따라서는 과분한 대접’은 단순한 요식행위가 아닌 청중을 대표하여 연주자에게 감사를 표시하는 ‘의식’이라는 것을 나의 연주생활을 거치면서 깨닫게 되었다. 스위스 루체른 페스티발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끝나면 환호하는 청중들이 연주자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꽃송이를 무대로 던진다. 반면, 서울에서 이런 전통은 없다. 그리고 없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없는 것 같다. 심지어는 열정의 소프라노가 “불처럼 뜨거운 내 입술의 키스” 라는 제목의 아리아에서 상대방을 유혹하는 장면을 위해 소품으로 장미 한 송이를 무대에 들고 나가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해할 수 없는 규칙이지만 따라야 한다. 궁여지책으로 나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조화라도 들고 나가게 했다. 조화를 들고 노래하는 소프라노와 이를 지휘하는 나의 가슴은 허전함을 숨길 수 없었다.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콘서트홀인 월트디즈니홀의 연주자 대기실은 연주자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작은 정원을 갖추고 있었다. 대기실에서 피아노를 치는 순간 느꼈던 그 아름다운 음향을 아직 잊을 수 없다. 한 쪽 창문으로는 탁 트인 하늘과 구름을 또 다른 창문은 LA의 스카이라인을 접할 수 있게 해주었다. 내가 예술가로 태어난 것이 진실로 행복하였다. 중국 광쩌우의 콘서트홀은 깨끗이 정리해 놓은 침대와 여행 중 혹시라도 구겨진 연주복을 펴 줄 스팀다리미가 구비되어 있었다. 물론 중국답게 대기실 사이즈도 세계 최대였다. 상하이 심포니 홀은 에스프레소커피 머신이 있었다. 중국이나 일본은 이런 서양음악의 뿌리를 존중하고 그 전통을 나름대로 만들어가려는 의지를 볼 수 있었다. 뉴욕 카네기홀의 대기실은 백여 년의 역사를 거치며 이 대기실을 사용한 대가들의 사진이 그들의 서명과 함께 벽에 가득히 걸려 있었으며 이곳에 잠시 머무는 그 자체가 역사 앞에 나의 존재가 얼마나 왜소한지를 깨닫게 해주는 숙연한 시간이었다. 이 모든 현상의 근본은 과연 누구를 위한 연주 홀인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에서 비롯된다. 우리 연주단체들은 반나절 사용하는 연주공간을 대여하기 위해 강남의 웬만한 사무실 한 달 치 임대료를 지급한다. 이런 적지 않은 대관료를 지급하며 이런 곳에서 연주를 하려하는 것은 품위와 전통이 역사 속에 살아있고 최고의 음향을 가진 공간에서 피 땀 흘려 연습한 연주력을 우리의 청중에게 전달하기 위한 예술가정신이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이다. 특히 한정된 민간단체의 열악한 예산으로 이런 연주를 하는 것은 대단히 모험적인 시도이다. 우리나라 연주홀은 건축단계에서부터 문제가 크다. 우후죽순처럼 건설되는 방방곡곡의 연주 홀들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명쾌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연주자들이 몇 시간씩 대기하는 공간에 창문이 있는 곳은 과연 몇 군데일까? 환기가 되지 않는 곳에 성악가의 대기실을 설계한 그런 손길이 과연 무대에서의 음향을 제대로 염두에 둘 수 있을까? 나는 한국의 많은 홀에서 연주를 해 보았지만 바깥 공기를 접하며 또는 하늘을 바라보며 연주 전의 긴장을 풀 수 있는 곳은 찾기 힘들다. 연주장의 음향이 가장 중요하지만 그 못지않게 대기실을 우선으로 하는 그런 홀들을 이제부터라도 지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면 과연 한국에도 그런 홀이 있을까? 다행이도 나의 답은 ‘있다’이다. 앞으로 우수한 콘서트홀의 건설을 계획하는 단체가 있고 우리 실정에 맞는 모델을 찾으려면 경기도 기흥에 위치한 삼성인재개발원 콘서트홀의 견학을 권한다. 이 홀을 벤치마킹하면 된다. 함신익 심포니 송 예술감독

[문화카페] 직장인 발레동호회 ‘아다지오’

지난 주말, 수원 팔달구 청소년 문화센터에서 개최된 ‘디지털 시티, 발레 아다지오’ 공연을 보고 왔다. 요즘은 발레를 전공하고 업으로 사는 사람들보다 취미로 발레를 배우는 사람들이 훨씬 많아졌고 발레를 배우는 것뿐만 아니라 공연, 심지어 콩쿠르까지 나가는 모습을 많이 접할 수 있다. 4년 전에 ‘발레 아다지오’라는 곳에서 연락을 받았다. 직장인 발레동호회인데 특강을 한 번 해줄 수 있냐고 해서 기꺼이 약속을 잡았고 그때부터의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직장에서 발레를 배운다고? 너무 신기하고 궁금했다. 발레를 배울 수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연습은 물론 공연까지 준비하는 단원들을 보면서 전공자들보다 발레를 훨씬 사랑하고 즐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발레를 너무나 좋아하고 발레계를 대표하는 공연은 거의 다 본다는 발레 마니아들이 공연을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본인들이 직접 발레를 배워 매년 정기적으로 공연을 올리고 있다.해마다 눈부시게 발전하는 단원들의 기량에 놀라움을 넘어 감탄과 찬사를 보내고 있고 특히 올해는 토슈즈까지 신고 공연에 도전하는 단원들의 모습을 보면서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당당히 승리한, 인간승리 그 자체를 보았다. 이런 멋진 사람들이 일하는 회사는 꼭 세계 최고가 되어야 하고 최고가 될 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연습실 시설지원은 물론 크고 작은 여러 가지 지원을 지속적으로 해주고 있고 올해는 임직원 자녀들 중 발레를 배우고 싶어 하는 어린 학생들을 위한 ‘디지털 시티 DREAM 발레단’도 창단하여 지원을 하고 있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드림 발레단 어린이들의 축하 무대 ‘Festival’과 ‘탬버린축제’, ‘다크 서클즈 컨템포리 댄스’의 2인무와 서울발레시어터의 클래식 발레 ‘해적’ 중에서 2인무는 한 무대에서 어린 꿈나무들과 동호회 단원들의 군무와 솔로작품 그리고 프로로 활동하고 있는 현직 무용수의 공연을 올려 가족, 친지를 응원하러 왔다가 자연스럽게 발레를 접하게 하고 오늘 공연을 본 인연을 계기로 발레를 잘 몰랐던 관객들을 프로 발레단의 잠재관객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게 하려는 발레 아다지오 단원들의 ‘발레사랑’이 얼마나 큰 지 짐작할 수 있는 프로그램 구성이었다. 발레 아다지오의 눈부신 발전 뒤에는 현 회장의 희생과 배려 그리고 눈부신 리더십과 함께 눈에 보이지 않는 전임회장들의 역할이 있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동호회나 모임에서는 회장 임기를 마친 전임 회장들은 매우 소극적인 활동을 하거나 탈퇴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발레 아다지오는 전임회장들이 임기를 마친 뒤에도 단원, 회원의 역할을 더 적극적으로 해주고 있고 현 회장을 지지해주는 모든 단원과 전임 회장들의 열정이 발레 아다지오가 지속적인 발전을 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한다. 수업과 공연 연습을 지도해주신 모든 선생님들의 노고와 열정 덕분에 발레가 우리 일상 생활 속으로 스며들고 있고 발레를 배우고, 보고, 즐기는 사람들이 기대 이상으로 늘어가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제4회 발레 아다지오 정기공연’을 볼 수 있어 너무 행복했고 더 많은 발레동호회가 더 많은 직장에서 만들어지기를 희망해 본다. 김인희 발레 STP 협동조합 이사장

[문화카페] 월드컵 단상

굳이 찾아서 볼 생각도 없었다. 공중파 방송국이 일제히 같은 영상을 보여주는 것이 싫어 굳이 다른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봤지만 속보로 그리고 뉴스시간에, 경기 결과는 알게 되고 과정이 궁금해지면서 인터넷으로 영상을 찾아보게 된다. 대학의 기말고사가 끝나자마자 학생들을 인솔해서 답사 차 대만으로 왔다. 하필 그날 밤에 월드컵 경기가 있었고, 호텔에서 이리저리 채널을 돌려봤지만 이곳에서는 자국의 경기가 없는 월드컵 중계를 애당초 하지 않았고, 스포츠 채널에서도 늦은 시간 짧게 결과만을 전할 뿐이다. 한국의 포털을 찾아봤지만 동영상은 저작권자의 요청으로 국내에서만 볼 수 있다고 한다. 문자로 중계되는 경기는 누가 골을 넣었다는 것은 알려주지만 어떻게는 보여주지 못했다. 지난 대한민국-멕시코 전은 생각보다 점수 차가 나지 않았다. 아까운 결과라고 하지만, 실력이 예선에서 같은 조에 편성된 팀 중에서 가장 열세였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 아니던가. 물론 항상 예상대로 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력이 따르지 않은 결과는 스포츠가 아니지 않은가. 충분히 잘 했구나 생각했는데 다음날 살펴본 경기 기사는, 그리고 경기를 직접 지켜본 마음은 그렇지 못한가 보다. 한 선수의 실책은 급기야 국가대표 퇴출을 바라는 청원까지 등장하고, 한 경기 두 경기 지나면서 경우의 수를 따지는 기사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외국 도박 사이트의 승률을 언급하는가 하면, 잘 접하지 못한 외국의 매체를 인용하며 온갖 추측을 쏟아낸다. 이 모든 이야기의 주제는 오직 하나, 경기에 이기는 것이다. 유럽파 선수의 뒤늦은 한 골은 모든 결과에 상관없이 낙관적인 예측을 쏟아내게 했다. 지난 대회 우승국과 경기를 남겨놓고 조금씩 낙관적인 이야기가 나오더니 급기야 승리의 가능성을 이야기 한다. 우리가 진짜 보고 싶은 것은 어떻게든 이기는 경기일까? 기억하는 가장 인상적인 경기는 1982년의 멕시코에서 열린 세계청소년축구대회다. 당시의 감독은 스파르타 식 훈련으로 청소년 대표팀을 세계 4강에 올려놓는다. 과정이 혹독했더라도 결과가 좋으니 모든 것이 인정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같은 과정이 몇 번 반복되었지만 이전과 같은 성과는 얻지 못했다. 국내에서 열리는 월드컵을 앞두고 모셔온 다른 나라 출신의 감독은 기적처럼 세계 4강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또 그 과정이 반복되기를 많은 사람들이 바랐지만, 결국은 응하지 않았다. 신화는 한 번으로 충분했다. 당시 중계를 보지 못한 아쉬움을 같이 답사 온 학생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로 풀어내었더니 현지에서 만난 중국 분은 한국이 부럽다고만 한다. 아직 한 경기도 못 이겼다 하니, 한국은 매번 월드컵 본선을 나간다고, 중국은 2002년 한번뿐이었다 한다. 월드컵 본선에서 자기 나라의 경기를 볼 수 없는 것이 가장 아쉽다고 한다. 눈높이가 달라져 있는 거다. 승패에 대해서는 선수들이 가장 당사자이니, 그들보다 더 기쁘고, 더 아쉬울 사람이 있을까? 경기 자체로 즐기자고 한다. 물론 마음은 그렇지 못하다. 이기면 좋고 지면 아쉽다. 이웃나라와 비교해서 좀 더 느긋하게 봐도 될 것 같은데 쉽지 않다. 좀 더 자세히 보면서 과정 하나하나를 음미할 수 있다면 결과에 대한 아쉬움이 조금은 가시지 않을까? 뭐 그 경지가 되려면 자주 보면 될 텐데, 가까운 곳에서 열리는 경기라도 직접 가서 봐야 하지 않을까? 축구를 좋아하는 후배는 응원하는 팀의 경기를 직접 보기 위해 전국의 경기장을 찾아다닌다. 경기가 있는 날은 다른 약속을 아예 잡지도 않는다. 외국에 있을 때는 어떻게든 인터넷으로 경기를 찾아보곤 했다. 아! 그러고 보니 이 친구에게 중계를 볼 수 있는 방법을 물어봐야겠다. 이제 일단 결과는 나왔고, 승패에 기뻐하거나 노여워하지 않고 경기를 볼 수 있는 날이 왔다. 계속 마음 졸이며 경기를 봐야 하는 날이 이어지지 않아 다행이다. 김상헌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문화카페] 뉴욕·서울 그리고 월드컵

지난 5월말 뉴욕에서 한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그리고 브로드웨이 뮤지컬 ‘The School of Rock’ 을 하루사이를 두고 관람하는 기회를 가졌다. 서울로 돌아와 6월 13일 지방선거의 결과와 이어진 월드컵 조 예선을 지켜보며 모든 결과는 청중과의 ‘소통’에서 기인함을 확인한다. 클래식 음악과 뮤지컬의 목표 고객층은 다르다. 클래식음악을 듣는 행위는 뮤지컬과 비교할 때 그리 쉽지 않다. 클래식 음악의 충분한 이해를 위해 청중들은 다양한 악기의 이해와 시대적으로 변천되어온 작곡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적절한 노력이 필요하다. 청중의 지속적인 ‘공부’가 없으면 ‘지겹거나 흥미 없는 연주자들만의 행위’로 단정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현대사회의 엔터테인먼트는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시대의 그것과는 비교 할 수 없이 다양하게 변했다. 당연히, 나는 하루에 몇 번씩 클래식 음악의 청중확대를 위해 고심하고 있다. 이는 우리 후세들이 향유할 수 있는 품격있는 문화생활을 위한 심각한 문제이다.그런 가운데, 클래식 음악을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하는 고객들에게 ‘공부’를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방치하는 일방적 교훈은 설득력이 없다. 더 나아가, 우리나라의 클래식 공연계의 불황은 심각한 수준이다. 국가에서 지원해주는 예산으로 운영하는 시ㆍ도 산하의 오케스트라는 그나마 다행이다. 후원 없이 존재할 수 없는 민간오케스트라들은 이런 상황이 빛 없는 긴 터널을 지나는 느낌을 가질 때가 많다. 이런 과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뉴욕의 한 오케스트라 연주는 내게 큰 감동을 주지 못했다. 오랜 기간 동안 명성을 기본으로 깔고 있는 것을 확인하려는 관광객들로 연주장이 붐비는 느낌이었다. 연주는 대체적으로 밋밋하였고 매일 반복하듯 또 다른 프로그램을 채워간다는 모습을 두 시간 정도 체험하는 것 외에는 특별한 메시지를 받지 못했다.그나마, 이 오케스트라를 또는 내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들을 감동에 흠뻑젖은 연주로 바꿀 수 있는지 고민해 보는 유익한 시간을 가진 것은 다행이었다. 분명한 것은, 음악의 난이도와 상관없이 연주자들이 단순히 악보를 읽는 것인지 또는 감동을 전달하는 의미있는 무대가 펼쳐지는지 청중들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뮤지컬 ‘록 음악의 학교(The School of Rock)’를 관람하며 나는 솔직히 크게 두 번 눈물을 흘렸다. 비교하는데 무리가 있지만, 뮤지컬은 오케스트라 연주와는 달리 빠른 전환이 담긴 스토리와 이를 전달하는 익숙한 멜로디, 수시로 바뀌는 조명과 함께 하고 싶은 춤, 숨쉴 틈 없이 신속한 무대의 전환, 그리고 반전과 또 다른 반전이 있는 숨 막히는 전개가 있다. ‘공부’ 없이 공연장에 와도 감동의 물결에 참여하는데 어려움이 없다.일주일에 8회 이상 같은 작품을 2015년부터 공연해 온 이 팀의 공연은 하나도 놓칠 수 없는 조화와 정성이 구석구석 가득하였다. 공연 후 나는 눈물과 함께 반성 그리고 질투를 느끼며 브로드웨이를 빠져나왔다. 클래식의 품격과 깊이 그리고 내면의 감동을 간과할 수 없으며 뮤지컬 보다 더 진한 감동을 나는 매일 주고 있다고 스스로 위안하며 다음 연주를 준비한다. 6ㆍ13지방선거에서 소위 ‘보수’의 예견된 몰락을 보며 우리 클래식 음악계도 자만과 기득권에 취한 나머지 청중, 유권자와의 진솔하고 객관적인 통찰 대신 기득권에 만족하고 처절한 자기반성과 개발을 게을리 한다면 그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또 다른 일주일 후, 모두가 예상하는 것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러시아 월드컵에서 스웨덴과 멕시코에게 패배하였다. 그리고 언론과 팬들은 감독과 특정선수를 지목하여 돌을 던진다. 정치나 스포츠는 우리 수준을 나타내는 지렛대이다. 우리가 선출한 정치인은 유권자 수준의 반사경이다. 우리를 대표하는 축구선수들은 우리가 만든 시스템에서 자란 선수들이다. 기본적인 시스템을 변화 개발시키지 않고 발전을 기대한다면 큰 착오이다. 노력없이 기적을 바라는 것은 우매한 자의 몫이다. 누가 옳고 그른지 다투는 것이 덧없는 일이다. 이제라도 오케스트라 관계자, 정치인, 축구협회 지도자들은 기회가 된다면 브로드웨이 뮤지컬 ‘The School of Rock’을 조용히 찾아가 청중과 소통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도 변화의 첫 걸음이 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함신익 심포니 송 예술감독

[문화카페] 세상을 보는 방식

살아가다 보면 예기치 않은 시선과 종종 맞닥뜨린다. 예를 들면 마트에서 장을 보다가 물건의 위치를 묻느라 직원을 불러 세우면 그들의 시선은 십중팔구 손수레에 실린 상품들로 갔다가 내게로 돌아온다. 그는 순간적으로 내 소비 성향과 경제 수준을 한눈에 파악했을 것이다. 상품들이 손수레에 실려 있는 상태를 보아 어쩌면 내 성격까지 간파했을지도 모른다. 동네 미용실에 갔을 때의 일이다. 새로 주인이 바뀐 후 두 번째로 간 것인데 말없이 머리를 만지던 원장이 뜬금없이 “글 쓰는 일을 하세요?”라고 묻는다. 나는 저이가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깜짝 놀랐다. 뒤이은 설명에 따르면 머리를 쓰는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은 머리에 열이 많아 머리카락이 건조해서 푸석푸석하게 된다고 한다. 또 사람이나 사물을 바라볼 때 일반인과 달리 시선이 깊다는 것이다. 오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그이의 말에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한 분야에 오래 종사하다 보니 사람을 파악하는 방법도 남다르다 싶었다. 머리카락으로 그 사람의 직업이나 하는 일을 알아보는 것은 일종의 기술일까? 그러나 누구나 그러하지는 않을 것이다. 치밀한 관찰력이 바탕이 돼야 가능할 것이다. 우리들은 각자의 시선으로, 방식으로 세상을 본다. 명품을 좋아하는 사람은 처음 만나는 사람이 어떤 명품을 걸치고 있는지, 몇 개의 명품을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그 사람을 판단할 것이다. ‘지방시givenchy’를 ‘기븐키’로 잘못 읽는 나 같은 사람과는 상종도 안할 것이다. 자신의 실수를 뒤늦게 알고는 되려 “사람이 명품인데 무슨 명품이 필요하냐”고 큰소리치는 뻔뻔함은 더 못 참겠다고 할 것이다.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해 소설을 쓰겠다고 하는 학생들이 ‘쓰기’부터 배우는 것이 아니라 ‘보는 법’부터 배우는 것을 본 적이 있다. 1단계가 관찰하기인데, 지하철에서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람의 신발을 면밀히 살펴보고 나이·직업·취향·성격 등을 추측한 후 그 다음에는 옷을, 마지막에 얼굴을 보고 그 사람의 삶을 재구성해보라는 과제를 내준다. 사물, 인물, 사건 등을 평면적으로 보지 않고 이면을 들여다보는 습관은 이렇게 형성이 된다. 찬찬히, 꼼꼼히 들여다보기. 원근법으로 대변되는 서양미술은 서양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사고를 반영한다. 고정된 위치에서 최적의 시점을 찾아 바라보는 것은 주체의 위치와 시선이 모든 것을 장악하게 되며 주체의 관점이 강조될 수밖에 없다. 동양화의 경우에는 산점투시라고 해서 시점의 위치를 바꾸어 가면서 관찰한 여러 대상을 하나의 화면에 조화시켜 그리기도 한다. 세상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사물을 제대로 인식하려면 하나의 시점만 가지고는 부족하다는 생각에서다. 무용가들은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까? 9박10일간 신연암로드 기행을 함께 한 무용가는 사람들의 몸짓이 직업에 따라서 다르고, 체제와 사회에 따라서도 다르다고 했다. 예를 들면 작가들은 글을 쓰느라 팔꿈치가 늘 구부려져 있기 때문에 팔꿈치가 쫙 펴지지 않는다고 했다. 북한과 같은 통제 사회, 폐쇄적 사회일수록 사람들의 의식이 갇혀 있기 때문에 몸짓도 그에 따라 굳어 있고 딱딱하다고도 했다. 그 무용가, 안은미의 ‘북한춤’ 공연이 얼마 전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있었다. 북한춤이라는 춤이 별도로 있는 건 아니니 북한에서 이루어진 공연예술자료를 검토하고 평소 화면에 비치는 북한 사람들의 몸짓을 유심히 살펴서 재구성했을 것이다. 국제적 교류로 인해 서양 무용의 영향을 많이 받은 우리와는 달리 북한춤의 동작은 절도 있고 역동적으로 보였다. 공연을 보며 우리 사회의 몸짓과 춤이 타자에게서 어떤 모습으로 발견될지 궁금했다. 이왕이면 매의 눈과 따뜻한 가슴을 가진 시선이면 좋겠다.박설희 시인

[문화카페] ‘제8회 대한민국발레축제’를 다녀와서

지난주 ‘제8회 대한민국발레축제’ 개막행사에 다녀왔다. 축제의 천국이라 불릴 정도로 수많은 축제가 1년 내내 진행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대한민국’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축제는 ‘대한민국발레축제’가 유일무이한 것으로 알고 있다. 올해로 8년째 행사를 이어오고 있는 ‘대한민국발레축제’는 2011년 국립발레단과 대한민국발레축제 조직위원회가 행사의 주최가 되어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2013년 3회 행사부터는 예술의 전당과 대한민국발레축제 조직위원회가 행사의 주최가 되어 매년 공연과 교육프로그램,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국립발레단은 오페라 극장에서 안나 카레니나, 유니버설발레단은 발레 춘향을 토월극장에서 단독으로 공연할 예정이고 서울발레시어터와 정형일 Ballet Creative는 빨간구두와 The Seventh Position을 두 단체가 함께 한무대에 올렸다. 그 외 단체들은 자유소극장에서 공연했고 예산이 줄어 야외공연이 진행되지 않은 부분은 매우 아쉬웠다. 오페라 극장에서 국립발레단 공연만 올려진 부분도 ‘대한민국’이라는 타이틀이 좀 민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7년 동안은 예술감독 없이 행사가 진행되다 보니 행사의 성격이나 방향이 뚜렷하지 않았었는데 올해 처음으로 예술감독이 선출되어 앞으로 한 차원 업그레이드된 축제가 될 것으로 기대가 된다. 국립발레단과 유니버설 발레단은 물론 소규모 민간 발레단이 예술의 전당에서 발레를 보고 즐기는 관객들을 대상으로 공연할 수 있어 단체 역량 강화와 단원들의 기량향상은 물론 단원들의 공연기회 확대에 도움을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부분은 매우 긍정적인 부분으로 평가되고 있다. 심사를 통해 선정된 안무 초년생들에게 일부 작품제작비 지원과 안무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부분도 긍정적인 부분으로 볼 수 있지만 한두 번의 공연을 위해 수개월간 준비를 한 무용수들과 안무가, 의상, 세트 디자이너, 조명 디자이너, 무대 스태프들은 많은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호소한다. 영화는 현장 예술이 아니니 비교 자체가 문제이겠지만, 연극이나 뮤지컬에 비하면 무용공연은 준비 기간에 비해 공연 기간이 너무도 짧다. 열악한 고용환경에서 활동하고 있는 무용수들은 경제적 보상은 꿈도 꾸지 못하지만 예술적 보상, 인정이라도 받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조차 충족되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 속에서 민간단체의 단원들, 프리랜서 무용수, 안무가들은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일회성으로 소멸되는 공연, 행사가 아니라 축제를 통해 만들어진 다양한 공연, 프로그램이 전국은 물론 해외로까지 진출할 수 있도록 국가의 예산으로 진행되는 모든 행사, 프로그램, 축제가 든든한 발판이 되어주길 희망한다. 공연, 행사와 연계된 다양한 분야에서 일자리도 만들어주고 지속 가능한 단체, 예술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중요한 매개체 역할을 해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소규모단체를 이끌어가고 있는 단체장이나 개인 활동가가 직업 무용단으로 단체를 전환하고 발전시켜 나갈 수 있도록 많은 관심과 지속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수년간 변하지 않고 있는, 누구나 다 괜찮은 것 같은데 아무도 만족하지 못하는 ‘소액 다건’ 지원정책도 6월 둘째 주 이후엔 꼭 좀 바뀌면 좋겠다는 희망을 갖는게 큰 욕심이 아니길 바란다. 김인희 발레STP협동조합 이사장

[문화카페] 숲 속으로의 초대 ‘수원연극축제’

올해 22회째를 맞는 ‘2018수원연극축제’가 기존 수원화성 행궁광장에서 장소를 옮겨 경기상상캠퍼스(구 서울 농생명대경기도 수원시 권선구)에서 선보였다. 지난달 25~27일 열린 이번 축제는 국내 14개 팀과 해외 6팀이 참여해 총 37개 작품, 89회 공연이 무대에 올라 시민들을 가까이서 만나고 소통했다. 새로 임명된 임수택 예술감독의 지휘 아래 연극이 보다 시민들 가까이서 교감하고 대화하기 위해 거리예술로 연극의 범위를 확대하고 서울대 농생명대 부지였던 수원의 숲 속으로 시민들을 초대하였다. 이전 축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관람객이 모여들었고 도심이나 공원부지에서 열리는 타 연극제나 거리예술축제와는 차별성 있는 축제의 풍경을 연출했다. 그동안 관에서 주최하는 대다수의 축제들은 관람객들의 편의를 위한다는 목적으로 그야말로 소파에 앉아서 리모컨을 주워드는 게으름의 풍경을 연출하듯 많은 공연들과 시설들을 오직 편리만을 고려하여 배치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이는 연극과 예술을 만나려는 관람객들의 능동적인 태도를 수동적으로 돌려놓을 뿐만 아니라 가까이서 내밀하게 소통하려는 공연자와 관객의 사이를 갈라놓을 뿐이다. 수원연극축제는 국내외 최고의 공연들을 소개하는 중매자의 입장에서 이런 미묘한 부분들까지도 고려하여 시공간을 구성했다.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학 캠퍼스였던 경기상상캠퍼스는 2003년 캠퍼스가 서울로 이전하면서 긴 시간 방치되었다가 13년이 지난 2016년 복합문화공간으로 단장해 문을 열었다. 수원연극축제는 이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동시에 경기상상캠퍼스 내 다양한 작가들의 작업실과 공방을 공개해 시민들이 다채로운 경험을 할 수 있도록 경기문화재단과 협력하였다. 그 일환으로 숲 속 장터 포레 포레가 같이 운영되었고 다채로운 숲 속 전시회가 곳곳에 배치되었다. 수원연극축제가 과감하게 행궁을 버리고 숲 속으로 들어오면서 이런 많은 예술가들과 흥미로운 공간 그리고 다양한 형태로 활용될 수 있는 재료들을 얻었다. 행궁광장에서는 부각되지 않던 수원연극축제의 차별적인 노선과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미래가 상상되어지는 과감한 시도였고 성공적인 모험이었다. 덕분에 축제를 찾은 많은 시민들은 지루한 일상의 반복 속에서 평생 잊지 못할 상상으로 가득한 연극의 세계를 만났으며 숲 속에서 일렁이던 예술의 향에 취해 숲을 거닐었다. 이런 성공적 재시작을 기반으로 숲 속의 공간적 재료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수원연극축제만이 선보일 수 있는 다양한 예술적 실험들을 지원하고 숲속에서 은밀하게 나누는 밀담과도 같은 보다 많은 극형태의 공연들이 수용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거리극이나 거리예술에서의 ‘거리’는 이동이 가능한 ‘길’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거리예술은 시민들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서 말 걸기 위한 예술의 새로운 시도이고 일상의 공간이 가진 다양한 특성들과 장소성을 활용하는 하나의 예술형식이다. 그렇기에 거리예술의 거리는 모든 공적인 공간이며 공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개인의 공간이다.수원연극축제가 이 거리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차용하면서 행궁광장을 거쳐 이 곳 숲속에 성공적으로 안착을 하였다. 문화적 혜택이 적었던 서수원권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오래된 수원연극축제에 변곡점을 마련해 주었다. 이제는 앞으로의 공연콘텐츠를 고민함과 동시에 앞서 얘기한 거리에 변화를 줄 수 있는 다양한 연극들이 출몰할 수 있는 장으로서 기능할 수 있도록 여러 지원정책이나 제작프로그램에 대한 고민이 같이 가야 할 것이며 이를 위해 무엇보다 많은 예술가들이 같이 하고 같이 어울리며 같이 대화할 수 있는 축제로 성장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 결과물들을 시민들이 향유하고 그 결과물들로 인해 시민들이 서로 대화하고 함께하는 계기를 만드는 축제로 나아가길 바란다. 윤종연 안산국제거리극축제 예술감독

[문화카페] 북한산성

지난주, 갑자기 찾아온 더위를 탓하며 북한산을 올랐다. 구파발에서 일행을 만나 산아래 마을에서 냉면 한 그릇으로 더위를 가라앉히고 출발하였다. 바로 접어드는 산길은 녹음이 한창인지라 옆을 흐르는 계곡물과 함께 조금 전에 느끼던 더위를 한결 누그러지게 한다. 산길은 널찍하게 잘 정비되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곳임을 알 수 있다. 이십분 남짓 올라 대서문에 이르렀다. 북한산성의 정문 중 하나다. 북한산성은 북한산에 쌓은 산성이다. 조선 숙종 때 축성되었는데, 기록에 따르면 건축기간은 반년 정도인 걸로 미루어 이전의 중흥산성을 기반으로 더 높이 쌓은 것으로 생각된다. 북한산성에는 모두 14개의 성문이 있는데 대서문은 그중 가장 크고 편한 길로 연결되는 주된 연결 통로다. 대서문을 지나면서 경기도다. 다시 십여 분을 올라가면 계곡을 따라오던 길과 만나면서 제법 너른 공터가 나온다. 식당과 민가가 있는 남한산성과 달리 북한산성 내에는 다른 시설이 없다. 이곳은 원래 식당이 모여있어 등산객들을 맞았으나 정비사업을 통해 모든 시설을 산아래 이전하였다. 예전 북한동의 모습은 북한동역사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십여 분을 더 오르면 중성문에 이른다. 북한산성의 서쪽의 평탄한 지형을 보완하기 위하여 쌓은 중성의 출입문이다. 사실 북한산성으로 가는 다른 길은 상당한 수준의 등반이니, 조선시대에도 거의 대부분의 인원이 이 문을 통했을 것이다. 조금 더 올라가면 중흥사와 산영루가 보인다. 북한산성 안에는 제법 많은 절이 남아있다. 축성 후에 13개의 사찰이 산성을 보호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하는데 중흥사는 이들을 관장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기단과 주춧돌만 있었으나 발굴조사 후에 건물을 복원하고 있다. 산영루는 중흥사 앞에 위치한 누각인데, 산그림자가 수면에 비치는 곳이라 하여 이름 붙인 곳이다. 계곡에 제법 넓은 웅덩이가 있어 많은 시인문객들이 풍류를 즐기던 곳이기도 하다. 홍수로 사라지고 초석만 남아있던 곳인데 최근에 복원하였다. 중흥사에서 십여 분을 더 올라가면 행궁지가 나온다. 북한산 상원봉 아래 위치한 이 행궁은 산성과 같은 시기에 지어졌다. 행궁은 내전과 외전, 부속건물을 다 하면 백여 칸이 넘는 규모다. 전란에 대비해 지어졌지만 실제로 활용되지는 않았다. 숙종과 영조가 이곳을 찾은 기록은 있으며, 평소에는 서고를 마련하여 선원록과 왕실의 책을 보관하는 서고로 활용하였다고 한다. 1912년부터 15년까지는 영국 성공회의 선교사들이 여름 별장으로 사용되기도 하다가 1915년의 큰 비로 산사태가 나면서 매몰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행궁터는 유적의 발굴과 정비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산사태로 매몰된 터를 걷어내면서 남아있는 초석과 축대의 위치를 잡아가면서 정리하는 중이다. 선교사들이 이곳에 머물면서 촬영한 사진을 통해 우리는 과거 행궁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축성기록이 남아있고, 한세기 전까지 그 자리에 있던 건물의 형태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있다는 것은 원형성을 살피는 중요한 자산이다. 건물의 기초 원형도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라 복원도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 산길을 내려오면서 간간이 올라오는 등산객들 중에는 외국인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 이들이 왜 이곳을 찾는지 궁금증이 생겼다. 뭔가 좋다는 것을 느끼나 보다, 공감하는 가치가 있다고 짐작만 할 뿐이다. 낯선 이에게 가는 길 멈추고 물어보기에는 너무 지쳤다. 김상헌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문화카페] 리듬으로 한국 축구를 살리자

6월18일 스웨덴과의 게임을 시작으로 한국축구대표팀은 2018 러시아 월드컵의 16강 진출을 위한 처절한 전투에 돌입한다. 2002년 같은 4강의 기적이 쉽게 일어날 것 같지는 않지만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자체로 엄청난 성과를 획득한 것을 인정해야 한다.대한민국의 축구 현실을 살펴보면 이해가 간다. 몇 번 관람해 본 한국프로축구경기 관중의 숫자는 부끄러움을 넘어 처참하다. 운영시스템의 한계, 경기력이 청중의 기대보다 낮은 수준, 또는 여러 채널에서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유럽의 최정상팀의 경기실황으로 국내축구는 관심이 없어진 것으로 짐작은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점을 시급히 개선하지 않는다면 월드컵 본선진출도 어려운 때가 올 수도 있다. 연주를 위해 우루과이, 브라질, 멕시코, 스페인, 프랑스, 독일 등의 축구강국을 방문할 때 마침 그 지역에서 게임이 있는 행운이 있을 때는 반드시 경기장을 찾는다. 지하철역 또는 주차장에서 축구장까지의 거리를 노래와 함성과 함께 행진하는 그들은 관중이 아니라 전사였다. 그들의 경기장 내의 뜨거운 열기는 90분 동안 잠시도 식지 않는다. 반면, 한국의 한 팀이 어렵게 진출한 ACL(아시아 챔피언스리그) 홈게임을 지난달 관람했다. 눈짐작으로 1천명도 안 되는 관중 앞에서 경기를 하는 프로선수들의 모습이 남미와 유럽의 경기장과 오버랩 되며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 한국축구가 월드컵 본선에 10회 그리고 9회 연속으로 진출한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라는 표현 외에는 없다. 국가대표팀 신태용 감독과 전국의 유소년 팀 감독들에게 한국축구의 미래를 위해 선수들을 이끌어 훌륭한 선수들을 많이 배출해내는 것도 한국축구의 재도약을 위한 최우선 과제이므로 다음과 같은 제언을 해본다. 1. 우수한 두뇌를 가진 선수들을 선발하라. 체력위주로 선수를 선발하다 보면 결국은 동일한 패턴의 플레이로 상대방에게 읽히는 게임을 하게 된다. 현대축구는 두뇌축구다. 2. 동일한 패턴의 훈련과정을 피하라. 선수들의 훈련을 보면 당장 있을 게임의 승리를 위한 몸부림으로 보인다. 3. 일주일에 두 시간 이상씩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말러, 스트라빈스키 등 클래식음악을 듣게 하라. 선수들이 어린 시절부터 획일화된 훈련방법으로 스스로 개인기를 개발할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다. 혼자 생각하며 상상의 플레이를 할 수 있는 창조의 시간이 없다.아르헨티나 공격수 메시는 170이 안 되는 키와 그다지 빠르지 않은 스피드로 장신 숲을 누비며 수많은 골을 기록하고 있다. 포르투갈의 주장 호날두는 급작스런 정지와 예상할 수 없는 방향전환으로 수비수들이 상상할 수 없는 창작을 한다.영국의 대표 골잡이 해리 케인은 24살에 불과하지만 영국 프리미어 리그의 득점왕으로 등극한 지 몇 년이 되었다. 큰 움직임이 없어 보이지만 내적인 견고함과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상대선수들의 허를 찌르고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득점이 가능하게 한다.이들을 포함한 우수선수들의 지속적인 플레이를 관찰하면 그들은 구별되는 자기만의 ‘리듬’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자랄 때 다양한 리듬을 가지도록 훈련받았다면 상대방을 쉽게 제칠 수 있는 몸의 유연성을 보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현대축구는 빠른 템포의 게임을 소화할 뿐 아니라 상상할 수 없는 변칙적인 리듬을 통해 예술적 창의력을 발휘해야 승자가 될 수 있다. 이런 새로운 리듬의 터득은 음악으로 해결될 수 있다. 현대음악과 함께 발레, 무용, 그리고 움직임으로 해결될 수 있다. 스트라빈스키의 발레 ‘봄의 제전’을 듣고 이 음악에 맞는 움직임을 어설프게라도 만들 수 있는 두뇌를 가진 선수들로 구성된 유소년팀 그리고 그들이 성장하여 국가대표팀이 구성된다면 세계최강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리고 나는 이런 팀의 자원봉사로 음악담당 코치를 하고 싶다. 2018 러시아 월드컵 대표팀 파이팅! 함신익 심포니 송 지휘자·예일대 교수

[문화카페] 괴물 또는 프랑켄슈타인

작년에 A가 B를 ‘괴물’이라고 표현한 시를 문예지에 발표했을 때 나는 엉뚱하게도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이 떠올랐다. 그건 ‘괴물’이라는 단어에서 자동적으로 연상된 이미지로 그만큼 프랑켄슈타인이 괴물의 대명사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유전자 조작 식품을 ‘프랑켄 푸드’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인간이 만들어낸 요망한 괴물과 같은 식품이란 뜻이다. 그런데 사실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을 창조한 과학자의 이름이다. 괴물은 이름을 부여받지도 못한 채 창조주인 빅터 프랑켄슈타인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나 자신의 자아 같은 것은 형성되어 있지 않았소. 내게는 의지할 사람도 없었고 핏줄도 없었소. ‘내가 떠나온 길은 빈 칸’이었고 나의 죽음을 슬퍼할 사람도 없었소. 내 생김새는 소름이 끼쳤고 체구는 거대했소. 그건 무슨 뜻일까? 나는 누구일까? 나는 무엇일까? 어떻게 해서 생겨나게 되었지? 내 운명은 무엇일까? 이런 의문들이 꼬리를 물고 생겨났지만 풀 수 없었소.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 중에서 추악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창조주에게 버림받은 괴물의 말이지만 바꿔 생각해보면 영문 모른 채 이 세상에 던져진 인간이 창조주에게 항변하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메리 셸리가 이 소설을 출간한 것이 1818년이니 올해로 꼭 이백 년이 되었다. 사람의 손으로 창조한 끔찍한 괴물이 창조주를 위협한다는 내용으로 인간이 자신의 피조물을 어디까지 책임질 수 있을지에 대한 철학적인 고민이 담겨 있으며 도덕적 책임이 없는 과학 발전이나 기술 발전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다. 괴물을 중심으로 재조명되면서 생명의 탄생, 죽음, 가족, 과학, 신, 부모(창조주)로서의 의무, 계급과 젠더, 소외와 의사소통의 문제 등과 같은 묵직하면서도 다양한 주제들 때문에 여전히 현재성을 지닌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프랑켄슈타인 산업이라고 불릴 정도로 극본·드라마·팝송·동화·만화·인형 제작 등 다양한 분야로 접목이 되고 있고 특히 영화를 통해서 끝없이 재창조되고 있다. 소설 프랑켄슈타인은 고딕양식의 공포소설이지만 SF소설, 로봇 장르의 원조로 여겨지기도 한다. 영화 에이리언으로 유명한 리들리 스콧 감독은 2010년대에 프로메테우스와 에이리언: 커버넌트를 잇달아 발표했는데 두 영화 모두 소설 프랑켄슈타인에서 영감을 많이 받은 인상을 준다. 일본의 문예비평가 오노 슌타로에 따르면 원래 로봇이라는 단어는 체코 작가 카렐 차페크가 1920년에 발표한 로섬의 만능 로봇이라는 희곡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차베크가 설정한 로봇은 기계가 아니라 미국의 로섬사가 인공 단백질로 만든 인조인간이다. 올해 3월에 타계한 스티븐 호킹 박사는 지구가 멸망한다면 환경이나 인공지능 때문일 것이라고 한 적이 있다. 공상과학소설 작가 아이작 아시모프는 이처럼 ‘로봇이 인간에게 반역할 것이라는 기계 혐오에 기인한 서구의 뿌리 깊은 불안’을 프랑켄슈타인 콤플렉스라고 불렀다. 프랑켄슈타인 콤플렉스는 창조자인 인간이 로봇에 대해 가지는 혐오, 부정, 질투, 열등감 등을 포함한 복합적인 감정을 가리킨다. 다시 처음의 괴물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인간과 괴물의 경계선을 어디에 그을 것인가? 인간은 언제 괴물이 될까? 니체는 “괴물과 싸우는 자는 자신 역시 괴물이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그대가 한참 동안 심연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심연 또한 그대를 들여다보고 있다”고 했다. 인간은 자기반성이 없을 때 괴물이 된다. 그리고 괴물과 싸우다가 괴물이 되어갈 수도 있다. 끝없는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박설희 시인

[문화카페] 풍물시장을 다녀와서

발레단을 후배에게 물려주고 나면 공연 때마다 표를 팔아야 하는 일이나 공연 제작을 위한 제작비 마련과 홍보 때문에 이리저리 뛰어다니지 않아도 될 거로 생각했는데, 안무하기를 너무 좋아하는 예술가 남편을 둔 덕분에 아직도 공연 티켓 판매 관리는 물론 작품에 필요한 장신구 때문에 이런저런 신경을 쓰고 있다. 지난 주말, 시립무용단 단원들을 위해 남편이 안무한 신작 ‘카르멘’ 작품에 필요한 장신구를 구하기 위해 청계천 풍물시장을 다녀왔다. 이번에 의상을 담당하시는 디자이너가 무용 의상을 처음 디자인·제작하시는 분이라 장신구까지는 신경 쓰실 시간이 안 되신다며 안무를 한 남편이 직접 캐스팅 성격에 맞는 장신구를 구하기 위해 기꺼이 하루 시간을 내어 풍물시장에 가게 됐다. 이곳은 20여 년 전, 서울발레시어터의 대표작 중 하나인 ‘현존’ 2막에 필요한 청바지와 티셔츠 구매를 위해 남편이 즐겨찾던 곳으로 그 뒤에도 창작작품에 필요한 단원들 의상을 이곳에 와서 많이 구매하여 수선하거나 장식을 달아 무대의상으로 사용하며 자주 찾던 장소다. 몇 년 동안은 이곳에 올 일도 별로 없고 거의 잊고 살아왔는데 지난해 6월 정년퇴직을 한 친정오빠가 소일거리라도 찾아보고 싶다며 이곳 풍물시장 안에 작은 가게를 세내어 장사를 시작했다. 오빠 가게도 구경할 겸 장신구 구매도 할 겸 남편을 따라 시장 나들이를 하게 됐다. 발레단을 21년간 운영하면서 안 해본 일이 거의 없다고 하면 지나친 과장처럼 보일지 몰라도 잘 버는 것보다 잘 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철저하게 절약할 수 있는 것은 절약하고 꼭 필요한 비용은 아끼지 말고 멋지게 쓰자는 마음으로 아낄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아꼈다. 의상은 기본만 의상실에 주문을 넣어 만들고 보석이나 꽃을 달아 장식을 해야 하는 수작업은 거의 발레단 사무실이나 집에서 만들었다. 귀걸이, 머리 장식도 직접 만들어 공연 장신구로 사용하다보니 어느 시장 어디에 가면 무엇을 살 수 있는지 천을 사서 어디에 가면 원하는 대로 만들어 주는지도 훤히 알게 됐다. 뭔가를 잘 만들고 척척 조립하는 저의 손재주 역사는 초등학교 6학년 때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저에게 처음 무용을 가르쳐 주신 윤희준 선생님의 제자 사랑과 절약 정신 덕분이었다. 저의 어려운 가정형편을 잘 알고 계신 선생님께서 의상비 부담을 줄여 주시고자 부채춤, 화관무, 장구춤 의상의 화려한 스팡크 장식을 저와 함께 달아주신 게 그 시작이었다. 기본 의상 판만 저렴하게 만들어와 밤새워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가르쳐주시며 함께 꿰매주시곤 하셨는데 그 당시엔 몰랐던 선생님의 사랑이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 크고 값지게 느껴진다. 가게를 시작한 지 6개월도 안 되는데 오빠 가게 주변의 모든 상인은 너무도 친절하고 사랑과 정이 넘쳐났다. 스카프 1장이 천원이라고 해서 2장을 골라 2천 원을 내니 1천 원을 거슬러 준다. 버리려고 한 거니 그냥 가져가라고도 한다. 저렇게 다 집어주고 나면 언제 돈을 벌까 하는 걱정이 들었고 물건을 함부로 버리고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가지도 않는 요즘 우리들의 모습이 떠올라 많은 생각과 반성을 했다. 날씨도 너무 좋고 오랜만에 사람 사는 모습을 본 것 같아 모처럼 힐링도 되고 재충전도 되어 감사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지금 내가 가진 것에 대한 감사보다는 크고 작은 불평을 하며 지낸 저 자신이 부끄러웠다. 물건을 팔고 사는 시장 안의 모든 사람은 500원, 1천 원을 너무도 귀하고 값지게 잘 쓰고 있었고 돈의 가치는 얼마를 버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할 수 있었다. 몸과 마음이 지치고 힘들 때는 인심 좋고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풍물시장에 한 번 다녀오시는 건 어떨까. 김인희 발레STP협동조합 이사장

[문화카페] 양주 회암사 뒷간

얼마 전 개통된 구리포천고속도로를 달려 양주에서 내리면 바로 맞아주는 곳이 양주회암사지박물관이다. 이곳은 회암사터 앞에 자리잡고서 회암사터에서 나온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장 초입의 회암사 모형에서는 여말선초의 번창했던 회암사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회암사의 창건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려 충숙왕 15년(1328) 원나라를 통해 들어온 인도의 승려 지공이 처음 지었다고 하며, 고려 우왕 2년(1376) 지공의 제자 나옹이 “이곳에 절을 지으면 불법이 크게 번성한다”는 말을 믿고 절을 크게 짓기 시작하였다고도 한다. 조선 전기까지도 전국에서 가장 큰 절이었다고 하는데, 태조 이성계는 나옹의 제자이면서 자신의 스승인 무학대사를 이 절에 머무르게 하였고, 왕위를 물려준 뒤에는 이곳에서 수도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후 나름대로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세조 등의 왕이 재위한 조선 초기를 거치며 절은 계속 성장했고, 성종 3년(1472)에는 이 절을 더 크게 중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유학자들의 힘이 강해지고, 점점 숭유억불 정책도 강력해지면서 회암사에도 먹구름이 드리워진다. 거대한 규모의 왕실 원찰이라는 지위는 유학자 입장에서는 이념과 맞지 않는 존재였다. 여러 차례 유생들의 상소로 공격받게 된다. 결국 명종 때 불교에 관심이 많았던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 지원을 받으며 회암사에 거처하던 승려 보우는 제주도로 귀양 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맞아죽었고, 회암사 또한 16세기 후반에 원인 모를 화재로 인해 폐사가 되었다. 이런저런 수난과 전란을 겪은 결과 지금의 절터만이 남아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규모의 방대함은 조선시대 최대 규모의 사찰이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회암사터의 발굴과정에서 국내 고건축유적중 최대규모의 온돌구조가 확인되었다. 고려말 학자 목은 이색의 ‘천보산회암사수조기’(天寶山檜巖寺修造記)의 기록에 따르면 ‘서승당’(西僧堂)에 해당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지난 2005년 발굴된 석실은 그 용도가 여러 가지로 추정되었나 유구의 분석결과 뒷간의 하부구조물로 확인되었다. 그 규모는 한 번에 20여 명이 용변을 처리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초등학교의 화장실 설치 기준으로 따져보면 500여 명 이상을 수용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 화장실의 실제 모습을 가늠해볼 수 있는 전시가 회암사지박물관에서 진행되고 있다. 회암사지 뒷간터의 발굴과정과 유구의 분석과정에서 확인된 기생충과 음식물 그리고 당시의 식기 등 생활사를 되짚어 볼수 있는 결과를 소개한다. 또한 실록을 비롯한 당시의 기록을 통해 회암사를 다녀간 인물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추론하고 있다. 특히 ‘뒷간을 상상하다’에서는 길이 12.8m의 석실 위에 건축된 최대 24명의 인원이 동시에 사용 가능했을 회암사지 뒷간의 구조를 추정해 현재 남아있는 유구의 형태와 동시대의 건축양식을 토대로 뒷간의 입구부 일부를 실제 크기에 가깝게 재현하고 있다. 이외에도 뒷간을 소재로 한 애니메이션과 영상을 통해 해우소의 다양한 의미를 새겨볼 수 있다.뒷간은 절집의 일부이지만 이 전시를 통해 회암사에 대한 관심을 이끌어내어 관련 연구가 지속적으로 확충되고, 예전의 화려한 모습을 재현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김상헌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문화카페] 웰다잉 시대를 위하여

세계 최장수 할머니는 올해 117세를 맞은 일본의 미사오 오카와 부인이다. 참 부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피할 수 없는 시간이 올 것이다. ‘100세 시대’가 바로 코앞에 와있다. 다양한 유기농 음식, 기상천외한 웰빙식품, 종류를 셀 수 없는 건강보조식품과 장수를 돕는 기적의 약품들이 진열대를 채우고 있는 작금의 현실은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착각을 할 수 있도록 소비자를 설득 또는 현혹하고 있다.‘죽음’을 피하고 싶고 피할 수 없다면 늦추고 싶다는 모두의 바람이 간절하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죽는다. 이 절대원칙 속에서 우리는 그저 하루하루를 채워가는 ‘나그네’ 일 뿐이다. ‘웰빙’으로 다져진 20세기의 튼튼한 인간들이 어느덧 21세기에 접어들었고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고 있다. 나의 호흡이 끊어지는 그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나이가 들며 이런 생각을 자주 해본다. 또한, 지난 수년간 적지 않은 장례식에 참석하여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처절한 슬픔을 함께 나누며 ‘웰빙(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 못지않게 ‘웰다잉(멋지게 사라지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시점에 도달했다. 살면서 언젠가는 우리가 세상을 떠나는 것을 잊고 있기에 우리의 마지막 순간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다. 한국의 장례문화는 결혼식문화와 큰 다름없이 획일적이라고 느껴질 때가 많다. 일부 내가 방문한 장례식장은 문상객을 신속하게 맞고 빠른 시간 내에 절차를 마치는 것이 장례식의 전부인 것처럼 장례식 순서는 엉성하고 뭔가 채워지지 못하는 절차상의 아쉬움이 큰 편이다.장례식장마다 다르겠지만 대체적으로 한쪽에서는 고인의 영정 앞에서 절을 하고 분향을 하며 고인과 유족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바로 그 옆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소란하게 식사 또는 대화를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행위의 장소가 아주 근접해 있어 편하기도 하지만 불편하기도 하다. 때로는 슬픔을 누릴 여유가 없다. 언제부터 우리나라에 요즘 같은 ‘장례식장 문화’가 형성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유족들이 문상객들과 밤새워 마당에서 곡과 음주를 하던 ‘불편함’을 간소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장례식장 문화’가 형성되어 유족들도 크게 불편하지 않고 방문객들도 밤새워 유족들을 위로하지 않아도 된다.불편한 사항들을 현대사회의 형편에 맞게 간소화되고 진화된 절차로 장례식을 거행하는 것은 긍정적인 요소도 많다. 그리고 지독히도 외로운 유족들에게는 이런 약간의 소란함이 오히려 위로가 된다. 그러나 장례식장의 신성함과 슬픔을 누릴 수 있는 고요함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마치 결혼식장에서 신랑신부의 백년해로를 약속하는 거룩하고 엄숙한 의식 대신 산만하고, 요란하고, 그리고 아주 짧고 빠르게 치르는 것이 중요한 목적같이 보여진다.평범하게 살다 이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의 장례식도 충분히 품위있게 만들어 그가 세상에 남긴 아름다운 일들을 기억하고 그의 삶을 축하하고 기념하는 행사로 승격시키는 과정이 이제부터는 필요하다. 내가 참석한 일부 장례식은 고인을 너무 초라하게 보내는 것 같아 아쉬움이 컸다. 웰다잉-Well Dying- 아름다운 장례식을 계획하자. 나의 장례식은 하나의 멋진 음악회로 만들어 주기를 바란다. 바하의 브란덴브르크 협주곡의 트럼펫 솔로로 시작해 브람스의 교향곡 제4번 2악장을 통해 위로를 얻고 말러의 교향곡 2번 ‘부활’의 마지막 악장으로 꿈꾸는 내세를 보려한다.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포레, 베르디 등 많은 작곡가들의 음악 중에 떠난 자를 위로하고 기념하는 음악이 아름답다. 그들의 음악을 장례식장에 틀어놓자. 물론 한국전통음악과 불교음악도 있을 것이다. 음악이 한 인간 삶의 끝에 존재할 수 있다면 마지막 순간까지도 아름답고 멋지게 장식할 수 있는 것이다.떠나보내는 것은 슬프고 아쉽지만 이 세상을 나름대로 승리의 삶을 살다 간 우리의 챔피언, 그들을 영광스럽게 보내도록 하자. 시급히 나의 장례식 순서를 자세하게 멋진 음악으로 만드는 것부터 준비해야겠다. 참석하신 분들께 위로와 감사의 표시도 잊지 않고 마지막까지 그들에게 좋은 음악을 선물하고 싶다. 함신익 심포니 송 지휘자·예일대 교수

[문화카페] 사월, 그리고 섬의 잔혹사

목련, 벚꽃, 산수유, 조팝꽃들이 서로 다투어 급히 피어나고 한꺼번에 하르르 지고 있다. 자연도 사람들처럼 조급증이 드는 걸까.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로 종일 뿌연 대기 속에서 퇴색된 그림처럼 꽃들은 그렇게 왔다가 사라져 간다. 사월은 일년 중 아름다운 계절이지만 현대사에서 가장 잔혹한 일이 일어났던 달이기도 하다. 4ㆍ3이 일어난 지 올해로 70년. 제주도민들은 친척이나 이웃들 중에 희생자가 없는 집이 거의 없을 정도라고 한다. 그리고 4ㆍ16 세월호가 있다. 올해로 4주년. 304명의 희생자를 낸 세월호 침몰 당시 국가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느라 애썼다.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외면할 수도 있다는 산 교훈을 주었던 세월호는 사고가 어떻게 사건이 될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성격이 다르긴 하지만 4ㆍ19혁명 당시 희생된 사람들도 많다. 이렇게 내게 사월은 내내 추모의 시간이다. 봄이 오기 전에 먼저 몸이 아픈 건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도착하지 못한 아름다운 사월의 섬을 생각해본다. 섬의 사월엔 온갖 야생화들이 기지개를 켠다. 노랗거나 붉은 꽃들의 물결, 따뜻한 햇살과 푸른 바다로 아름답기 그지없는…. 섬의 달력은 일반 달력들과 다르다. 거기에는 달의 나라가 펼쳐져 있고 밀물과 썰물, 물의 고저에 따른 일년이 담겨 있다. 물로 세상을 읽는 물의 가족이다. 물이 조금밖에 들지 않는 조금 때에 아이들은 생겨나고 어느 풍랑에 한꺼번에 목숨을 잃기도 해, 생일도 함께 쇠고 제사도 함께 지내는 집들이 생겨난다. 어부들의 달력을 본 곳이 어디였나 기억을 더듬어 보니 선감도 경로당에서다. 선감도는 대부도와 인접한 섬으로 대부도처럼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포도밭을 따라 경기창작센터에 거의 다다를 즈음, 언덕받이에 ‘선감학원 위령제’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원두막과 수풀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곳은 묘지였고 놀랍게도 아이들이 수백 명 묻혀 있다고 했다. ‘선감학원’은 1942년, 일본인들이 소년들의 감화시설을 만든다는 명목 아래 굶주림과 강제노역으로 학대를 행하던 곳이다. 500여 명의 부랑아들이 ‘어린이 근로정신봉사대’로 불리며 전쟁군수물자 제작에 동원됐다. 광복 이후로도 300여 명의 소년들이 잡혀와 바다를 메워 염전을 만드는 강제노역에 동원되는 등 1982년까지 존속됐다. 지구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어린이 강제노동수용소였던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이 같은 사실이 선감학원 부원장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선감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일본인 이하라 히로미츠에 의해서 세상에 알려졌다는 점이다. 2017년이 돼서야 경기도에서 피해자 지원 사전조사를 연구용역 주고 위령제를 개최했지만 선감학원이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서 그 오랜 시간 존속됐다는 것이 가장 놀라울 뿐이다. 검거 실적을 올리려는 경찰들의 무자비한 행태로 부모가 있는 아이들까지도 마구잡이로 잡혀갔다. 굶주림과 노역과 병으로 많은 아이들이 희생됐고 탈출하다가 조류에 휩쓸려죽기도 했다. 정확히 몇 명이나 죽었는지조차 알 수가 없다. 생존자들은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에 와서도 눈물 없이는 그 당시를 회상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하니 그야말로 유례 없는 아동인권유린의 현장이다. “선감도 소년들이시여 / 어머니 기다리시는 집으로 밀물치듯 어희 돌아들 가소서 / 이 비루한 역사를 용서하소서” (홍일선, 한 역사 부분) 끝내 귀향할 수 없었던 아이들을 생각해 본다. 그 아이들의 고통과 슬픔, 두려움을. 사월의 꽃들에 대해, 아름다운 섬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으나 결국 역사의 비극 속에 채 피지도 못한 아이들에 대한 생각으로 마무리하고 말았다. 박설희 시인

[문화카페] 일본의 한 발레 콩쿠르 심사를 다녀오며

지난주 월·화·수 2박3일간 Japan Ballet Competition 심사 요청을 받아 짧은 일정으로 일본 도쿄에 다녀왔다. 유니버설발레단 단원으로 활동할 때는 거의 매년 도쿄에서 공연했었는데 94년 발레단을 떠난 뒤 34년 만에 가보는 거라 도쿄가 어떻게 변했을까 많이 궁금했다. 1985년, 첫 일본공연 갔을 때가 기억이 난다. 발레가 우리나라보다 수십 년 먼저 도입이 되어서 인지는 몰라도 이미 일본은 일반 사람들이 발레를 보고 즐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무척 부러웠다. 1981년 스위스 로잔에 Prix de Lausanne 콩쿠르를 보러 갔을 때에도 일본은 결승에 진출한 일본 학생들에게 일본 황태자가 주는 특별상이 있었고 방송국에서 준결승과 결승실황을 녹화하기 위해 현장에 많은 인원이 투입돼 있었다.지금도 일본은 매년 방송국에서 Prix de Lausanne을 실시간 Live로 방송하고 있고 일본학생들을 무대 안팎에서 집중적으로 취재해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응원받게 한다. 잘하든 못하든 출전한 모든 학생들이 배우는 과정,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때론 매우 감동적인 스토리를 전달하여 발레를 잘 모르던 사람들까지 발레를 좋아하고 즐길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기도 한다. 이렇게 오랜 기간 국제콩쿠르에 투자하고 있는 일본에는 조금 미안할 정도로 10여 년 전부터 우리의 자랑스러운 대한의 아들 딸들이 유수한 국제 콩쿠르에서 상위권 입상을 하고 있고 너무도 꿋꿋하게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널리 알려주고 있다. 도쿄에서 콩쿠르 심사를 다 마치고 수요일 오후 일본 도쿄시티 발레단 연습실을 방문했다. 연습실을 새로 옮겼다고 해서 가 보았는데, 제 눈을 의심할 정도로 작고 열악한 연습실 환경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단원은 60명이 넘는데 연습실은 좁아 발레단 클래스를 1ㆍ2ㆍ3부로 나눠 진행하고 있었고 월급도 없을뿐더러 공연 때는 의무적으로 공연티켓을 팔아야 하고 좋아하는 춤을 추기 위해 두세 가지씩 일을 하고 있다는 단원들이 그 좁은 공간에서 비 오듯 땀을 흘리며 행복한 표정으로 춤을 추고 있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 과연 우리나라에서 월급 없이 발레단에 소속되어 춤을 추라고 하면 몇 명이나 단체에 남아있을까. 지금은 일본과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의 학생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발레를 배우고 싶다고 할 정도로 우리의 발레가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지만 10년 후 20년 후의 발레계를 위해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많은 걱정과 고민을 하게 됐다. 전국에서 발레를 잘한다는 학생들은 대부분 예중, 예고에 입학을 하게 되고 국내ㆍ외 콩쿠르 또는 오디션을 통해 외국 유학을 가거나 발레단으로 입단한다. 예중ㆍ고 학생 중 일부 학생을 제외하고는 부모님의 희생적인 뒷받침과 담당지도 선생님의 열정적인 지도의 힘으로 예쁘게 잘 다듬어져 콩쿠르나 입시에서 빼어나게 아름다워 보일 수 있도록 세팅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보니 부모님과 선생님이 없이는 자기주도적인 연습을 하지 못하는 학생이 많이 있고 이런 학생들이 유학을 갈 경우 성공적인 미래를 보장받는 것이 매우 힘들어지게 된다. 이번에 도쿄에서 만났던 학생들이 체격 조건이나 기량이 조금 부족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아주 작은 일에도 감사해 하고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는 표정과 눈빛, 질문에 바로바로 대답하는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도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구보다도 자신의 생각을 잘 표현하고 창의적이어야 할 예술을 전공하는 우리나라 학생들의 창의력과 표현력은 어디 가서 어떻게 찾아주어야 하는 걸까. 10년, 20년 뒤에 우리 발레 꿈나무들이 일본으로 발레를 배우러 가는 일 만큼은 절대로 안 생겼으면 좋겠다. 김인희 발레STP협동조합 이사장

[문화카페] 귀향

봄소식은 꽃무리와 함께 남쪽에서부터 찾아온다. 한반도 남쪽 끝 통영의 풍광은 바다와 산이 어우러져 만들어낸다. 통영항은 동양의 나폴리라 불릴 만큼 아름답다. 미륵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남해의 숱한 섬이 만들어 내는 비경을 품은 한려해상국립공원의 풍광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것이다. 통영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미륵산 자락 풍광 좋은 곳에 음악당이 들어서 있다. 통영 출신의 한 음악가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이곳은 세계적인 수준의 시설을 갖춘 공연장은 물론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풍광으로도 이미 유명하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음악가의 이름을 직접 붙이지는 못했지만 독일출신 재단 대표의 주도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지명도를 높이고 있다. 쇼팽 콩쿨에서 우승한 조성진의 국내 연주가 이곳에서 열린 것이 우연이 아닐 정도로 세계적인 음악가들의 인정을 받고 있다. 지난달 개막된 통영국제음악제의 올해 주제는 귀향이다. 독일에서 영면한 고 윤이상 선생의 유해가 통영국제음악당 앞 양지 바른곳에 모셔졌다. 1957년 독일로 간 그는 동아시아 음악의 요소를 서양 음악에 접목시킨 작품으로 음악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1967년 윤이상은 동백림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는다. 그러나 체포 과정의 불법성과 혐의 사실의 날조 혹은 과장으로 국제사회에서 많은 문제 제기가 있었다. 스트라빈스키, 카라얀 등의 음악가들이 한국 정부에 탄원서를 제출하며 압박을 거듭하여, 1969년 석방 이후 서독으로 돌아가 2년 뒤 독일 국적을 취득하였다. 이후 베를린에서 활동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나가던 중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의 소식을 접하고 ‘광주여 영원히’라는 작품을 발표하였는데 그의 작품 중 가장 충격적이고 강렬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번 음악제의 개막 공연에서 연주되었다. 이후에도 민족의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다 1995년 베를린에서 영면하였다. 그리고 지난 3월, 23년 만에 귀향한 것이다. 30일에 열린 추모식과 음악제 개막행사에는 윤이상 선생의 가족은 물론 독일 대사가 참석하여 그의 위상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었다. 통영시내에는 그의 이름을 딴 기념관이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공원이 위치한 곳의 지명을 딴 이름으로만 불렸으나 작년말에 공식명칭을 바꾸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그의 예술혼과 생애를 살펴볼 수 있는 전시관과 공연장이 있다. 2010년에 처음 개장한 기념관은 이념논란으로 인해 지명을 딴 도천테마기념관으로 불렸다. 작년 시민단체의 청원에 의해 시의회에서 명칭 변경을 결의하여 7년 만에 윤이상 기념관으로 명칭이 변경된 것이다. 봄을 맞이하는 꽃으로 가득한 남도의 풍광은 이미 충분히 아름답다. 그리고 오랜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거장은 그 품격을 높여주는 듯하다. 소설가 박경리 선생도 통영 출신으로 원주에 집필실을 꾸리고 활동했지만 영면한 곳은 미륵도 양지바른 산기슭이다. 묘소 아래에는 박경리기념관이 방문객들을 맞는다. 많은 이들이 거장을 기리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고향으로 돌아온 이들이 있기에 이 봄이 더욱 빛난다. 그리고 남도를 찾을 이유가 하나씩 더 쌓여간다. 김상헌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문화카페] 쉼표

친구 광수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 놈의 콩나물대가리만 보면 어지러워” 여기서 ‘콩나물대가리’는 음표를 뜻한다. 누구나 한두 번쯤 악보를 접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악보를 보면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이 검은색의 음표다. 음표를 점차 익히다 보면 또 다른 존재를 발견한다. 쉼표다. 쉼표, 보편적으로 한 마디 안에 4박자부터 1/4 박자까지 쉬도록 되어 있다. 거장 작곡가들의 쉼표를 살펴보자. 이들에게 쉼표의 존재란 단순히 연주를 멈추는 행위를 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고전파시대의 선두주자, 유복한 생활을 즐긴 오스트리아 출신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1732~1809)은 쉼표를 유머와 위트의 표현으로 사용하였다.하이든에게 레슨도 받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작곡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는 짧지만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다. 모차르트의 쉼표는 절규와 한탄이 내포되어 있다. 모차르트는 중요한 전환점에서 절묘하게 쉼표를 사용하여 극적인 변화를 이끌어낸다.모차르트를 존경한 독일 출신의 작곡가 루트비히 판 베토벤(1770~1827)은 신과 자신 외에는 누구의 권위도 인정하지 않았다. 베토벤의 쉼표는 열정을 나타낸다. 베토벤은 크레셴도(점점 크게)를 쉼표 위에도 적용시킨다. 그는 쉼표에서도 열정의 표출이 중단되지 않고 오히려 증폭되도록 요구한다. 베토벤을 흠모한 독일 출신의 작곡가 요하네스 브람스(1833~1897)는 마치 쉼표가 신에게 보내는 신실한 메시지 또는 우주를 아우르는 휴머니스트의 외침같기도 하다. 브람스의 쉼표는 단지 쉬는 것(rest)이 아닌 침묵(silence)으로 드러난다. 한 곡의 하이라이트에서 오케스트라 전체가 중요한 부분을 반복적으로 연주하다가 갑자기 짧은 쉼표를 통해 정지된 느낌을 준다. 이때 소름 끼치도록 짧은 쉼표는 오히려 뜨거운 침묵으로 청중에게 전달된다. 위의 서술은 전적으로 나의 개인적인 음악적 해석이다. 존경하는 작곡가들의 사용한 쉼표가 어떻게 우리 주변의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지 고민해본다. 첨단 디지털시대에 우리는 원하는 많은 것을 영상으로 남길 수 있다. 이전 아날로그시대의 영상기법은 나 자신을 제외한 ‘남’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주요한 미션이었다면 오늘의 디지털시대는 셀카라는 혁명을 통해 ‘내’가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진화되었다. 대학원시절 나의 스승님은 이런 회한의 표현을 자주 하셨다. “Shinik, a life is a full of memory (신익군, 인생이란 기억을 채워가는 것에 불과하네)” 그 당시에는 교수님의 표현을 완전히 이해하기 쉽지 않았지만 이제는 절절히 동감한다. 가슴 뛰는 순간들, 귀가에 맴도는 정감어린 대화들, 사랑하는 사람들의 잊을 수 없는 촉감들을 어떻게 기억할 수 있을까? 어릴 적 아버지는 나의 작은 손을 크고 따뜻한 손으로 감싸 쥐고 산동네를 아무 말없이 걸으셨다.나는 아버지의 온기를 기억한다. 연주 후 땀 흘리며 무대에서 내려오는 나를 안타까운 눈길로 멀리서 바라보는 어머니를 나는 쉽게 찾을 수 있었지만 나는 어머니가 가슴 아파하실까봐 가깝게 갈 수 없었다. 그런 어머니를 생각하면 다시 가슴이 저려온다. 그런 어머니의 미소가 그립다. 사랑스런 첫 딸을 가슴에 안으며 스치던 놓치고 싶지 않은 부드러운 촉감! 최첨단 디지털카메라가 이런 그리움의 추억들을 표현할 수 있을까? 나는 위대한 작곡가들이 남긴 방법을 쓰기로 했다. 숨을 크게 그리고 길게 들이마시는 것이다. 그렇게 하고도 부족한 것은 그리움이라는 단어로 채워놓기로 했다.쉼표를 통해 그리움을 위로받을 수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진정 아름다운 발견이 아니겠는가?함신익 심포니 송 지휘자·예일대 교수

[문화카페] 오늘도 항복하세요

자동차를 타고 대형마트 4층 주차장에서 출구를 향해 내려가는데 “오늘도 항복하세요”라는 문구가 일층 출구 천장에 매달려 있다. 깜짝 놀랐다. 항복하라니 어디에 항복하라는 것일까. 저렇게 대놓고 항복하라고 해도 되는 것일까. 하루하루 온갖 것에 지는 내 정체를 들킨 것 같아 가슴이 철렁했다. 치열하게 살지 못하고 편함과 자그마한 욕망들에 지는 자신이 스스로 생각해도 부끄러운데……. 조금 전 이층 매장에서 일주일치의 식자재와 한 달치의 양식을 사면서 살까 말까 만지작거린 물건들, 한순간 혹했던 의상들, 때마침 저녁 무렵이라 시식 코너를 지날 때마다 입에 고이던 침들. 그래서 대형마트에 올 때마다 범속해지는 자신이 싫어서 한 달에 한 번 정도로 장보는 횟수를 줄였던 것이다. “오늘도”라는 말의 뉘앙스는 또 어떤가.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 대형마트에 새 직원이 들어왔음에 틀림이 없다. 새 마케팅 전략은 고객의 약점을 찌르고 들어가는 것이리라. “도”라는 조사에서 이것이 일회성이 아니라 늘 있어온 일이라는 것까지도 알고 있다는 점을 드러내고 있다. 조금 전 마트 계산대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다. 줄을 서서 내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여직원들끼리 주고받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오늘 세시부터 비가 예약되어 있어” “주문이 밀려 있는데 언제 다 배달하지? 비 오기 전에 배달 끝내야 할 텐데.” 기상청에서 예보한 비는 예약된 비로, 예약했다 취소하면 그만인 비로 이들의 머릿속에 입력돼 있었다. 그러고 보니 마트에는 예약돼 있는 것 투성이다. 주문받아서 배달이 예약돼 있는 고등어·시금치·소고기 등 식품과 라면·샴푸 등 공산품, 그리고 이곳을 이용하는 우리들에게는 죽음이 예약돼 있다. 대형마트에만 들어서면 빽빽한 상품들의 미로에 갇혀서 어리바리 미아가 된 느낌이 드는 이유는 뭘까. 마트에는 미끼 상품이라는 게 있다. 시중보다 훨씬 싼 가격에 나온 생필품을 보면 앞뒤 잴 것 없이 사고 보는 습성이 내게는 있다. 그러다보니 때로는 꼭 필요하지도 않은 물품을 사놓고는 후회하는 일도 종종 벌어진다. 생각해보니 나는 늘 항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상에, 자본주의의 속성에, 거짓 욕망에, 자신의 비겁함에, 희망불가의 현실에……. 오늘도 마음속에 갈등을 일으키며 꼭 필요한 것만 최소한으로 사고 ‘성공했다’며 자축하는데 “항복하세요”라니, 너무 하다 싶었다. 정말 내가 항복하고 싶은 대상은 따로 있다. 아기의 살보다 더 촉촉하고 부드러운 꽃잎에, 그 향기에 항복하고 싶다. 비를 “움직이는 비애”라고 표현한 김수영의 시 한 구절,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는 이성부의 ‘봄’에 항복하고 싶다. 아이들의 초롱초롱하고 맑은 눈망울, 거기에 담긴 소망에 항복하고 싶다. 누가 저런 문구를 무례하게 떡하니 걸어놓았을까 혼잣말하며 출구를 빠져나가려는데 아, “오늘도 행복하세요”라는 문구가 온전히 다 보인다. 천장에서 아래로 드리워진 조명 하나가 공교롭게 “행복”을 “항복”으로 보이도록 시야를 방해했던 것이다. 지레 잘못 읽은 글자에 항복한 꼴이었다. 밖에 나오니 내가 늘 항복해 마지않는 맑은 하늘이 그러니까 너는 한 수 아래라는 듯이 환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미세먼지 없는 민낯이었다. 박설희 시인

[문화카페] 새학기를 맞이하며

1년의 첫 시작이 1월1일이 아니라 3월2일인것 같이 느껴지는 것은 제가 학교에서 일을 하기 때문인 걸까요. 졸업식, 입학식 그리고 새로운 선생님과 친구들과의 만남과 함께 새로운 학기가 시작됐습니다. 고3 학생들은 불과 한두 달 사이에 부쩍 성숙해 보이고 학교에는 이미 새봄이 온 것 같습니다. 예술 중·고등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 지내다 보니 40년도 훨씬 전인 저의 학창시절이 자주 생각납니다. 요즘은 조회를 교실에서 방송매체를 이용해 하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매주 월요일 1교시에 전교생이 운동장이나 강당에 모여 교장선생님 훈화말씀을 들었습니다. 시험 성적이 좋은 학생들에게 장학증서를 수여하거나 외부 콩쿨에서 상을 받으면 친구들 선·후배들 모든 선생님들의 축하를 받으며 상장을 받았습니다.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축하하고 축하받고 했던 것 같습니다. 요즘 학생들은 너무 바쁘고 시간에 쫓기며 살기 때문에 방학식, 개학식도 방송으로 하는 학교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입시학원 유명강사도 아니고 개인지도 선생님도 아닌 바로 중학교 때 교장선생님의 훈화 말씀이 제 삶의 목표와 방향을 정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습니다. 교장선생님께서는 최고가 되라거나 세계적인 예술가가 되라고 말씀하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으셨습니다. 꿈은 크고 원대하게, 불평불만은 독처럼 퍼져나가니 늘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학교에서는 누구나 꿈을 이룰 수 있게 되길 바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혹시 “중2가 무서워서 이북(North Korea)이 못 쳐들어온다” 라는 이야기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작년에 학교에 처음 왔을 때는 학생들이 사용하는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못 나오고 학생들이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나오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제가 안에 있는 줄도 모르고 아무렇지도 않게 저속한 단어를 친구들과 주고받고 있었고 제가 나가면 너무나 민망한 상황이 될 것 같아 학생들이 나가기를 기다렸다 나온 적도 있습니다. 주변에 몇 분 선생님들께 말씀드리니 “요즘 아이들 다 그래요~”라고 하십니다. “우리 교장선생님이셨다면 이럴 때 어떻게 하셨을까”라고 제 자신에게 물으니 그날 그냥 지나친 게 후회가 됩니다. 요즘은 많은 일들을 고민하고 연구할 때 항상 교장선생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합니다. “마음이 고와야 예술이 곱다”라고 매주 말씀해주셨던 그 이야기를 이제는 제가 후배들에게 계승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고와야 예술이 곱고, 언행이 고와야 예술이 곱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무대 위에서 멋진 모습을 보이기 위해 하루도 쉬지 않고 기능과 예술성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는 후배들에게 언행과 마음도 함께 단련하고 키워주길 당부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본인이 추고 있는 춤이 어느 작품에 나오는 장면이고 그 춤을 추는 사람의 성격이 어떤지도 모르고 돌고 뛰는 것만 기계처럼 반복을 하고 있는 학생들도 많이 보았습니다. 반복적인 연습보다는 배우고 익힌 것을 계속 생각하고 곱씹으며 되새기는 연습이 되어야 합니다. 학교에 와 있는 모든 학생들이 다 최고가 되지 않더라도 모두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선생님이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학부모님들께는 선생님과 아이들을 믿고 멀리 내다보시고 기다려 주시라고 당부드리고 싶습니다. 예술가의 길은 단거리가 아니라 마라톤 경기와 같아 초반에 너무 힘을 다 빼면 완주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은퇴 후 예술과 관련되거나 관련되지 않은 제2, 제3의 삶을 선택해 살아야 할 때는 돌고 뛰는 기술이 별로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후배들이 빨리 알아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김인희 발레STP협동조합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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