퍽 오랜 전 그림책 작가 몇 분과 함께 지방의 도서관을 돌면서 우리 그림책을 읽어 준 적이 있었다. <전봇대 아저씨>의 작가 채인선, <똥떡>으로 유명한 이춘희 작가 등과 함께였다.
그때 내가 느낀 것은 동화도 시 못지않게 읽어 줄 만하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작가가 자신의 책을 읽어주는 것이야말로 몇 배의 감흥을 독자들에게 전달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이후 나는 또 한 차례 동화 낭독을 할 기회를 가진 바 있었다. 2007년 여름, 아르코예술정보관에서 주최한 동화작가 육성 낭독회 자리였다. 이때 나는 조성자, 노경실, 김향이 등 한국을 대표하는 3명의 여류 동화작가와 함께 그 낭독회에 참석했고 <행복한 지게>, <나쁜 엄마>, <야옹 망망 꼬끼오 버스> 등 몇 편의 동화를 육성으로 낭독하였는데, 그때도 청중의 반응이 의외로 좋아서 몹시 기쁜 마음으로 돌아왔던 기억이 새롭다.
작품 낭독회, 하면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시를 낭독하는 모임만을 생각하는데, 외국에서는 소설 같은 산문도 좋은 낭독회로 인기를 끌고 있다. 1999년 초여름, 이청준 작가는 오스트리아의 한 출판사 초청을 받아 작품 낭독회에 참석한 바 있었는데, 100석 가까운 청중석이 꽉 찰 정도로 대성황을 이루어 작가 자신이 놀랐다고 했다. 게다가 차리고 나온 모습을 보니 귀한 자리에나 초대받았을 때 입는 고급 의상에 멋진 장신구까지 갖춘 데에 놀랐다고 했다. 그날 이청준 작가는 새삼 그들의 문화에 대한 투자와 누림의 모습에 감동을 받았노라고.
그런가 하면 10여 전, 우리나라가 주빈국이었던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참가한 바 있는 은희경 작가는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그곳의 낭독 문화였다고 했다. 도서관, 교회, 책방, 카페 등 규모가 크든 작든 가리지 않고 작가와 독자들이 격식 없이 모여 앉아 읽고 귀 기울이는 풍경이 너무도 행복해 보이더라고.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시낭독회 말고는 문학작품 낭독회가 그리 성황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어쩌다가 간혹 작가 탄생 몇 주년 기념회, 또는 작가 초청 독자와의 대화 같은 모임에서나 작품을 낭독하는 예가 있긴 있다. 그러나 그건 가뭄에 콩 나듯 하는 경우일 뿐이며 그 반응도 그리 큰 편이 못되지 싶다.
문학작품을 눈으로만 감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귀로 듣는 감상법도 그에 못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거의 사라지다시피한 아이들의 국어책 읽는 소리가 하나의 좋은 예가 될 듯싶다. 5,60년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는 동네마다 아이들의 국어책 읽는 소리가 낭랑하였다.
그 소리는 아이들의 귀뿐 아니라 어른들의 귀까지도 즐겁게 해 준 아침의 독서 운동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책은 눈으로만 읽는 게 아니라 귀로도 읽는다는 것을 보여준 저 독서 교육. 아니, 아침을 여는 힘찬 팡파르!
우리 사회에도 문학작품 낭독회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큰 공간의 낭독회보다는 작은 공간에서 작가와 독자가 무릎을 맞대고 앉아 읽고 듣는 자리는 얼마나 보기 좋을까.
“저 소설가 은희경인데요.”
일산의 한 책방을 찾아가 자기소개를 한 뒤, 그곳 주인과 손을 잡고 매월 셋째 주 목요일마다 낭독회를 시작하기로 했다는 은희경 님. 그 후의 소식이 몹시 궁금하다. 모르면 몰라도 그 책방은 책의 향기로 그득하지 않을까 싶다.
윤수천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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