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 워’와 영화비평

얼마 전 MBC 시사프로그램 ‘100분 토론’에서 ‘디 워, 과연 한국영화의 희망인가’라는 주제로 출연한 패널들이 심형래 감독의 ‘디 워’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는 모습을 시청하게 됐다. 이날 패널 중에서도 ‘디 워’를 비평하는 입장에 선 진중권 교수의 거침없는 말들이 단연 화두가 됐고, 이 프로그램을 시청한 필자의 주위 사람들로부터도 역시 진중권 교수의 어록에 대해 한마디씩 언급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이 토론에서 ‘디 워’에 대한 비판론측과 옹호론측 주장들이 모두 전혀 틀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좀 더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입장은 비판론측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심형래 감독이 오랫동안 영화에 대한 열정을 갖고, 나름대로 충무로의 냉정한 시각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컴퓨터 그래픽 면에서 발전된 영화를 제작했다는 점은 인정받아야 하고, 관객들이 그러한 심형래 감독의 영화를 인정하고 보려고 한다는 점 역시 그 영화에 대한 긍정적 평가의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가 외적인 요소, 즉 어느 정도의 애국주의와 심형래 감독의 인간 승리적인 영화제작 배경 등이 영화흥행에 상당 부분 기여했다는 점은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인 것 같다. 또한 최근 한국영화가 부진한 가운데 이 영화가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 헐리우드에 대규모 상영이 예정됐다는 점, 그리고 영화 제작비용과 관련된 손익분기점이 거론되면서 한국영화 살리기라는 명분에 밀려 제대로 된 영화 비평은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상황이 돼 버린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다. 현 시점에서 ‘디 워’에 대한 비판에 대해 한국영화 부흥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로 취급함으로써 마녀사냥식 매도가 이뤄지고 있는 것은 반드시 문제로 지적돼야 할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영화라고 해도 냉정한 평가가 뒤따라야만 더 나은 영화로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고, 한국 영화를 진정으로 생각한다면 거침없는 쓴 소리도 필요하다. 심형래 감독은 오히려 이처럼 냉정한 비평이 자신에게 좋은 보약이 될 수 있음을 인식하고 깊이 되새겨야 할 것이다. 정 재 훈 변호사·소산종합법률사무소

공생의 문화

우리는 혼자서 모든 것을 다하고 살아갈 수는 없다. 그래서 서로 어울려 화목하게 사는 것이 행복의 중요한 요건이 된다. 요즘은 독불장군처럼 혼자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 많다. 혼자서도 먹고 살기가 가능하도록 편리한 환경이 갖춰졌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자기 구미에 맞는 사람들끼리 무리지어 살려고 하며 때로는 배타적인 집단을 형성하기도 하고, 아예 외부와 단절하고 혼자 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러한 생활의 양상과는 달리 실제 우리 몸에는 정말 엄청나게 많은 세균들이 우글거리면서 같이 살고 있다. 로버트 버크만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세포가 어림잡아 100조개나 되는데 나를 구성하는 순수한 인간세포는 고작 10조개에 해당하고 나머지 90조개나 되는 세포는 모두 기생하는 세균들의 것이라고 한다. 결국 내 몸의 90%가 내 것이 아닌 다양한 세균의 것으로, 마치 다양한 종이 어울려 사는 지구와 같은 행성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한다. 사람들은 나만 깨끗하고 나 자신만이 행복하면 그만이라고 하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과연 나라고 하는 것이 어디까지일까? 나와 같이 사는 세균들이 만약 내 몸에서 사라지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차츰 생명을 유지하는데 어려움에 빠지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야할 방법은 비교적 명확하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세균들과 함께 잘 어울려 공생하는 것뿐이다. 이 공생은 서로에게 보탬이 되는 상향적인 어울림으로 이어져야 한다. 현대인들은 너무 지나치게 씻어댄다. 마치 내 몸을 둘러싸고 있는 나쁜 모든 것들을 박멸이라도 할 것처럼. 그런데 지나치게 많이 씻으면 우리의 피부는 나쁜 세균들에게 잡아먹히기 쉽게 면역력이 저하되고 피부가 약해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우리의 피부에도 수많은 세균들이 주로 모공을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이 세균들은 우리 몸에 좋은 역할을 하는 착한 균과 내 몸으로 침투하려고 하는 나쁜 균 등이 어울려 살고 있다. 건강한 사람은 좋은 세균이 나쁜 세균을 잘 다스리고 있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 요즘 미국은 이라크를 악의 축으로 삼아 전쟁으로 내몰고 있다. 마치 감기를 일으키는 바이러스를 치료하기 위해 세균을 치료하는 항생제를 처방하는 것과 참 많이 닮았다. 이제는 너무 배타적이지 말고 서로 어울리면서 서로의 장점을 찾아주는 보살핌이 필요하다. 극단적인 방법은 결국 무너지게 된다. 음과 양이 어울려 조화를 부리듯, 우리네 인생도 내 것과 네 것이 어울리면서 행복해질 것이다. 조 용 주 두리한의원 원장

청산하지 못한 역사

8월15일이 되면 신문과 방송에서는 일본 정치인들의 헛소리와 뻔뻔한 군국주의 망령 부활에 대해 분노하며 기획기사와 방송 등을 쏟아낸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해방 이후 우리 안에 있는 그대로 남아있고 다시 부활하고 있는 일제 강점기의 흔적들에 대해 단호히 결별할 의지와 실천이 있었는가를 되짚어 보고 싶다. “누가 감히 용서를 말할 수 있겠는가. 내일을 이야기하는 것은 증오가 아니라, 기억을 기초로 하는 정의다.” 프랑스에서 나치 협력자 처벌을 요구하며 썼던 알베르 카뮈의 사설은 한국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나치 협력자 1만명을 처단하고 나치에 협력한 언론 900여곳 중 694곳을 폐간하고, “언론인은 도덕의 상징”이라며 과감히 나치협력자들을 처단했던 드골대통령. 그로 인해 프랑스는 치욕적인 나치점령의 아픔을 딛고 진정한 민주주의의 자유와 정의를 위한 토대를 닦은 뒤 나라를 다시 세울 수 있었다. 최근 정치인들 중 일부가 5·16 군사정변을 구국의 혁명이라고 하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5·18사태라고 부르는 것을 보며 역사교사로서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학생을 가르치는 역사교과서에 5·16은 군사정변으로, 5·18은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정의돼 있는데도 구시대 정권의 입맛대로 불렀던 명칭을 그대로 쓰는 안이함은 역사의 정의와 준엄함 등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학교라는 명칭을 초등학교로 고치는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국민학교가 일제강점기 ‘황국신민학교’의 줄임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방치하고, 황국신민의 서사를 닮은 국민교육헌장을 줄줄이 외우게 했다. 유신시절 대통령은 일제강점기에 관동군 중위도 지냈었다. 우리의 독립을 위해 싸우던 독립군에 맞서 총을 겨누던 관동군의 중위가 대통령이 가능했던 것은 5·16군사정변이 있었기 때문이다. 4·19혁명을 의거로 낮추고 5·16군사정변을 혁명이라고 유신시절은 가르쳤다. 광주에 불순분자가 내란을 선동한다며 모든 언론들이 침묵하고 사실을 왜곡시킬 때 80년 5·18은 진압자의 명칭으로 광주사태였다. 그러나 민주화를 위해 죽은 자들의 넋과 광주를 잊지 말자는 산자들의 기억과 국민들의 정의로 5·18은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불려진다. 역사는 반복되는 게 아니라 한걸음, 한걸음 나아간다고 믿는다. 다시 맞는 광복절에 우리 민족의 진정한 해방과 정의를 위해 우리 주변의 일제강점기 잔재를 극복하고 분단의 아픔이 가져다 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실천이 하나씩 매듭을 풀기를 기원해본다. 유 정 희 전교조 경기지부장

민들레와 개민들레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민들레 보고도/민들레라 부르고/개민들레 보고도/민들레라 불렀지// 민들레도 모르고/개민들레도 모르는 나에게/민들레는/얼마나 웃었을까/개민들레는/또 얼마나 비웃었을까/저 산은 얼마나 욕을 했을까.” 김수열의 ‘얼간이’라는 시이다. 우리 것(민들레)과 서양 것(개민들레)을 구별하기는커녕 외래종을 마치 토종으로 아는 우리들을 외국인(개민들레)이나 어른들(산)은 얼마나 비웃었을까. 하지만 그 비웃음 자체가 비웃음거리가 되어버린 게 오늘날의 글로벌 시대이다. 개민들레는 서양금혼초에 우리가 붙인 비하성(卑下性) 이름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타가수분으로 번식하는 토종 민들레와는 달리 스스로 번식하는 능력이 대단하다. 그래서 토종 민들레는 점점 우리 들판에서 밀려나고 있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가 비웃는 것들에게 우리 것의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 손님이 주인을 몰아내고 안방을 차지하는 격이다. 굳이 내것 네것을 구분할 필요가 없는 글로벌시대라고는 하지만 외국 것이 우리 것을 대체하는 속도는 언어나 식습관, 의상 등 문화와 사고방식에서도 마찬가지로 빠르다. 그런데 진정한 글로벌시대는 어느 하나의 중심적 지배보다 다양한 것들의 공존을 지향해야 한다. 중심 문화에 의해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던 변방의 문화에 관심을 갖고 그것을 변방의 자리에서 중심의 자리로 가져다 놓고, 가치가 없다고 여겨왔던 것에서 가치를 발견하는 열린 마음과 창의적 사고 등이 더욱 중요해진 시대인 것이다. 이 시대는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 ‘개미와 베짱이’에서처럼 베짱이의 노래가 한가하게 노는 일로 치부되는 시대가 아니다. 오늘날 이 이야기는 겨울에 베짱이가 굶어죽는 게 아니라 당당하게 여름 내내 연습한 노래실력으로 음악회를 열어 개미들로부터 돈을 받고 겨울을 편안하게 보내는 것으로 바뀐다. 일도 아니라고 생각되던 것들이 고부가가치 일로 바뀔 수 있는 시대가 됐다. 다시 말해 남들이 비웃더라도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고, 그것을 일거리로 만드는 창의적 사고가 중요해진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러니 우리 것 남의 것도 제대로 알지 못해 우리 자신에게서도 타인에게서도 얼간이라고 비웃음 당하거나 우리 것이 아니라고 무조건 배척할 일이 아니다. 자기 것을 제대로 알고 그것을 잘 살려나가며 글로벌화시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문화에는 그것을 방해하는 국제적 기준도 따로 없으니 제대로 된 우리 것이 바로 세계의 기준이 되는 게 아니겠는가. 이 광 용 수원여대 산학협력단장

나옹 스님의 가르침

“욕심도 벗어 놓고 미움도 벗어 놓고 물처럼 바람처럼 살다가 가라하네.” 필자가 일하는 책상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시구다. 고려 말기 선승인 나옹 선사가 쓰신 ‘청산은 나를 보고’의 일부분이다. 이 구절을 적어 책상 옆에 모셔 놓기 시작한 것도 벌써 20년 가까이 된다. 생활의 일부인 것처럼 하루에도 몇번씩 들여다보고 입으로 되뇌며 삶의 교훈으로 삼고 있는 시다. 하지만 그 깊은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솔직히 자신이 없다. 사람이 욕심 없이, 미움 없이 산다는 게 가능한 것일까. 깊은 산 속에서 홀로 수도하는 게 아니라면 과연 세간에 살면서 욕심을 버리고 누구도 미워하지 않으면서 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때가 많다. 욕심이 반드시 재물을 탐하거나 권력이나 명예를 좇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철저한 건강관리나 가족에 대한 극진한 사랑, 학문적인 탐구 등도 욕심의 한 종류나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애당초 사람이 욕심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미움도 마찬가지다. 부모 자식 사이에도 때때로 미워지는 게 세상 사는 이치다. 뺨을 맞고 반대쪽 뺨을 또 내주면서도 미운 감정이 들지 않는다면 대단한 성인(聖人)이거나 이미 죽은 사람 둘 중 하나가 분명하다. 세상을 살면서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면 이미 그는 사람의 범주를 벗어났다는 뜻이다. 사람이 욕심이나 미움 없이 살 수 없다는 건 분명하다. 매일 매일 세상을 살다보면 셀 수도 없을만큼 많은 순간마다 욕심과 미움의 감정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도 나옹 스님은 욕심을 버리고, 미움을 버리라고 우리들에게 가르친다. 아마도 욕심과 미움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노력하라는 뜻일 것이다. 모두가 가슴 속에 품은 욕심과 미움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지금보다 훨씬 더 여유로워 질 게 분명하다. 선승의 가르침을 온전히 깨달을 수 있는 지혜는 없더라도, 그의 가르침을 조금이라도 실천하기 위해 애쓰는 삶이 되고 싶다. 서 정 호 인천항만공사 사장

남북정상회담과 북한 非核 개방

8월8일 2차 정상회담을 8월28~30일 평양에서 개최하기로 남한과 북한이 동시에 발표했다. 지난 7월 핵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 국면으로 들어가면서 비핵화의 원칙 하에 경제협력의 길을 열 방안이 논의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사실 북한으로서는 번영을 향한 여러번의 개방개혁 기회를 놓쳤다. 92년 사회주의 붕괴 후 남북기본합의서에 따른 개방과 개혁의 가능성을 93년 1차 핵위기 조성으로 무산시켰다. 당시 83년 이후 진행되던 중국의 특구 중심 발전이 이미 어느 정도 성과를 보이던 시기였는데도 북한은 오히려 긴장을 조성한 것이다. 94년 제네바 회담으로 핵 위기를 마무리 지은 후 김영삼·김일성 정상회담이 추진됐으나 이마저도 김일성 사망으로 무산됐다. 김정일 집권 후 소강상태를 보이다 2000년 김대중·김정일 회담이 이뤄졌으나 북한은 특구 사업에 힘을 집중하지 못했다. 오히려 2002년 2차 핵위기를 다시금 조성했다. 이제 2007년 7월 영변원자로 가동중단으로 이제 다시 해빙분위기가 조성됐다. 이러한 몇번의 개방개혁 기회의 상실은 북한이 탈냉전시대에 맞지 않게 수구반미냉전적 자세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핵 위협과 같은 수구냉전적 자세의 반복으로는 내부의 결속을 다지는데는 성공할 수 있을지 모르나, 번영을 기약하기는 힘들다. 이제라도 6·25 남침의 전과를 민족 앞에 참회하고 인류를 비참한 상태로 몰고갔던 사회주의를 빠져나와 개방개혁하는 심기일전의 모습을 보여야만 한다. 누구나 알고 있다시피 대한민국은 수출입국의 길을 택함으로써 부강 번영하게 됐고 세계라는 거대 시장에서 세계의 소비자들에게 봉사, 외화를 벌어들임으로써 덩달아 우리 자신의 생활을 개선시킬 수 있었다. 대한민국 성장 모델을 여러 나라들이 밟아옴으로써 부강 번영해지고 있다. 중국도 인도도 베트남도 러시아도 스스로의 힘으로 1국주의의 틀을 깨부수고 수출입국형 성장모델을 선택, 세계무역기구(WTO)의 자유무역체제속으로 자발적으로 들어옴으로써 가능했다. 따라서 북한이 살 길도 분명하다. 그것은 비핵 개방의 바탕 위에서 3천달러로 가는 것이다. ‘우리 민족끼리’라는 자폐적(自閉的) 구호를 버리고 큰 세상 큰 시장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이번 정상회담이 그 전기가 돼야 한다. 혹여라도 이번 정상회담이 대선을 앞둔 미묘한 시기에 좌파정권의 연장을 위한 좌파대연합 분위기 조성용이라면 북한으로서는 또 한번의 기회를 놓치는 것이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박 종 운 경기도경제단체연합회 사무총장

노인문제

요즘 시정의 화제가 노인문제라고 한다. 노후 건강문제부터 경로연금문제, 국민연금문제, 최근에 등장한 노인장기요양보험문제 등 성인들이 3명만 모이면 자연스럽게 노후 문제가 화제란다.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경제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국가들도 노인문제 해결을 위해 골몰하고 있다. 일본은 벌써 노인 인구 과다로 생산인구의 감소를 초래함으로써 국가 재정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세계 최저의 출산율과 가장 빠르게 진행되는 인구 고령화 현상, 즉 저출산·고령화문제로 국가의 경제·사회·문화의 중·장기계획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고령화속도로 보면 우리나라는 지난 2000년 고령화사회(노인 인구 7%)를 기점으로 올해 9.3%를 웃돌고 있고 오는 2018년에는 고령사회인 14%에 진입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노인이 20%를 넘는 초 고령사회는 오는 2026년이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오는 2050년에는 노인인구가 37.3%를 상회, 세계 최고의 노인의 나라가 될 것으로 전문가들은 전망하고 있으니, 어느 나라도 경험해보지 못한 고령화 속도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는 2020년부터는 인구도 감소하기 시작한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선 가정보호 후 사회보장’에 중점을 두는 게 정부의 방침이었기에 국가 수급권자(생활보호대상자)의 요양시설 입소 정도를 해결하는 것으로 노인복지라고 만족했었다. ‘선 성장 후 분배’라는 경제정책과 함께 노인복지정책은 국가 정책의 우선 순위에서 밀려있었던 게 사실이었다. 미풍양속이나 자녀들의 효도에만 의존하고 있었다. 노인문제가 우리 앞에 성큼 다가선 것은 평균 수명 연장으로 노인 인구가 급속히 증가한데도 원인이 있겠지만, 산업화로 인한 가족구조와 부양의식 변화 등도 노인문제의 발생 요인이 된 것 같다. 노인이 되면 개인적으로 소외, 빈곤, 질병, 그리고 역할 상실 등 4고(四苦)를 앓고 산다고 한다.현재 우리 노인들은 가정에서도 존경받지 못하고 사회에서도 역할을 상실함으로써 신체·정신적으로도 기능이 약화된 상태에서 심리적 고통까지 안고 산다. 이제 노인 문제는 사회 문제로 접근을 필요로 하고 있으며, 다각적인 각도에서 국민들이 살펴야 될 것 같다. 김 각 현 경기도노인복지 시설연합회장

로맨티스트와 휴머니스트

“전체 인류에게 돌아가고 싶다. 돌아가 그들 품에 안기고 싶다!” 러시아의 대문호인 톨스토이가 80대에 무단 가출하면서 남긴 말이다. 톨스토이는 그렇게 가출해 모스크바 근교 어느 간이역에서 쓸쓸한 최후를 마쳤다. 그런데 상당한 재산에다 세계적인 명성까지 얻은 그가 무엇이 부족하고 아쉬워 어느날 갑자기 팔십 노구를 이끌고 집을 나서야 했을까? 그 답은 바로 지고(至高)한 휴머니즘 뿐이라고 필자는 믿는다. 그는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상당한 재산을 자신의 집에서 일하던 하인들에게 나눠준 걸로도 유명하다. 물론 그러한 그의 재산처리 때문에 야기된 가족들, 특히 부인과의 마찰이 가출의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지만, 따지고 보면 그런 마찰의 원인 역시 그의 휴머니즘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휴머니즘과 로맨티시즘(낭만주의)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진정한 낭만주의는 당연히 휴머니즘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고 필자는 믿는다. 인간은 모두 자연의 일부분인만큼,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을 볼 때, 그만큼 아름다운 이 세상의 모습을 기대하는 건 당연하지 않겠는가! 신동엽의 서사시 ‘금강’을 보자. “오, 아름다운 노을/ 저 노을을 볼 때 우리는 이 세상/ 어떻게 미워할 수 있단 말인가// 오, 아름다운 하늘/ 저 하늘을 볼 때 어떻게 이 세상/ 서러워 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시인은 아름다운 하늘과 노을을 보며 이 세상에 대한, 인간에 대한 애정과 사랑을 부르짖고 있다. 사람은 산천의 아들인데, 그럴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필자 자신도 해마다 새봄에 피어나는 아름다운 꽃들을 보며 내 삶의 모습과 이 세상의 모습을 돌아보며 자괴감에 젖은 게 한두해가 아니지 않는가! 로맨티스트는 휴머니스트가 될 수 밖에 없다고 본다. 자연에 대한 예찬은 곧 바로 인간의 삶에 대한 애착으로 연결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독자 여러분은 로맨티스트인가, 아니면 휴머니스트인가, 아니면 로맨티스트이면서 휴머니스트인가? 아니면 그도 저도 아닌가! 아름다운 하늘과, 그 하늘 한켠을 수놓은 아름다운 저녁 노을을 보며 무슨 생각들을 하며 하루하루 살아가고 계시는가? 홍 성 훈 여주대학 보육학과 교수

또 다시 8·15를 맞으며

대한민국은 위대한 나라임에 틀림이 없다. 그토록 많은 침략과 내란 속에서도 반만년의 역사를 줄기차게 이어 내려오고 있으며, 또한 21세기에 이르러 국운이 융성하고 도약할 기미가 보이기에 더욱 더 우리에게 크나큰 자긍심을 갖게 한다. 지금 역사적으로 중요한 이 시점에서 우리의 장·단점을 잘 살펴보고 장점은 장점대로, 단점은 단점대로 잘 발전·승화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본다. 배달의 민족이나 단일민족·한민족 등의 자부심이 우리의 저력이요, 중국과 일본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우리의 정체성(Identity)을 유지할 수 있었던 힘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21세기 글로벌시대에 우리의 가장 큰 장점이 세계화의 발목을 잡을 수 있는 약점으로 작용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독자들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한다. 미국 유학시절 한국에서 자장면집을 경영하다 미국으로 이민 온 중국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당시만 해도 외국에서 한국식 자장면을 먹기가 어려운 시절이어서 맛있게 한그릇을 해치우고 난 후 주인과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 사람이 이야기한 내용을 간추려보면 한국 사람처럼 외국인에 대한 배려가 없는 국민은 없다는 것이었다. 세계 어느 나라에 가도 차이나타운이 번성하고 있는데 한국만 철저히 탄압(?)하고 학대(?)해 중국인들이 발을 못 붙인다는 취지의 이야기였다. 우리의 자부심을 지켜나가는 건 중요하다. 그러나 이제는 외국의 문물을 수용하고 외국인들에 대한 배려나 관심의 폭을 넓혀야 한다. 예를 들면, 자동차 수십만대를 내다 팔면서 외국차를 사면 매국노처럼 여겨서는 안된다. 진정 시장경제 논리에 의해 철저히 경쟁하고 살아남아야 현대도, 그리고 기아도 국민기업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게 아닌가. 외국 연수 노동자들에게도 따뜻한 인류애를 베풀어야 한다. 불과 얼마 전 우리의 모습이 아니었던가. 해외여행 중에도 우리의 모습이 그들에게 어떻게 보여 질 것인지를 생각하자. 19세기말의 쇄국은 우리 민족에게 치명상을 입혔고 국제질서 속에서 거의 흔적을 감추게 될 지도 모르는 위기에까지 이르렀었다. 작금의 21세기 또 다른 형태의 어리석은 쇄국은 바로 단일민족이나 한민족의 탈을 쓰고 우리가 남에게 배타적이고 독선적으로 변해가는 지도 모르는 채로 변해 가도록 만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길을 잘못 가면 또 다시 지난 100년의 암흑의 역사를 되풀이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8·15를 맞이하자고 한다면 너무 지나친 것인가를 필자 자신과 여러분에게 묻고 싶다. 홍 문 종 경민대학장·철학박사

공인중개사협회 통합만이 업권 수호

한국공인중개사협회는 지난 1986년 3월5일 부동산중개제도를 선진화시켜 국가발전에 이바지함은 물론 국민들의 재산권을 보호하고 공인중개사들의 지위와 권익을 증진시켜야 할 시대적 요청에 따르고 더 나가 이 나라 중개제도의 영원한 발전을 도모한다는 사명감과 회원들의 권익 옹호를 위해 설립됐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 들어 복수단체가 허용됨에 따라 7년 전 대한공인중개사협회 창립으로 이원화돼 오늘에 이르렀다. 양 협회는 지난달 27일 대의원 총회를 통해 통합을 의결했다. 서로가 마음을 비우고 역사적인 제2의 탄생을 만들어 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전문자격사로서 공인중개사가 사회적 전문성을 보장받고 있는지, 그리고 중개제도의 영원한 발전을 위해 과연 어떠한 노력과 그 결과는 무엇인지 집행부는 고심해야 할 것이다. 회원들이 다양한 스펙트럼을 수요하지 못해 복수로 갈라지는 상황이 된지 7년이 된 시점에 이제 통합이라는 회원들의 요구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전국에는 8만2천 중개업자들이 시장을 점유하고 있으며 중개업의 미래에 대한 비전은 변화하는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고 소비자들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켜 탄력적으로 적응해 나갈 때 실현될 수 있고, 무한경쟁을 통한 환경변화는 각 사업자 단체들에도 영향을 미쳐 공인중개사들이 정당한 권익을 대변할 단체의 설립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요청이다. 이에 따라 공인중개사 제도 및 전문자격사로서의 차별화된 모습으로 국민들 속에 거듭 태어나 국민재산권 보호와 거래질서 확립은 물론 국가경제 발전에 일익을 담당하고 회원들이 권익 창출을 위한 사업을 효율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이제는 단일 협회를 통해 공인중개사들의 위상과 복지 증진에 힘써야 할 것이다. 우리가 그토록 통합에 목말라 하는 건 제대로 된 힘 있는 단체를 만들어 대정부 협상력을 높이고 최소한의 권리를 찾아 보자는데 있다.

심폐소생술교육 왜 필요한가?

여름이 무르익어 가는 요즈음 우리는 사고 사망사건을 심심치 않게 접하게 된다. 40대 남성이 마라톤 주행중 사망하거나 물놀이를 하다 숨지는 등, 대부분의 돌연사들은 심폐정지에 의한 심장마비로 일어난다. 심장마비란 갑자기 심박동이 소실됨으로써, 심장의 혈액 방출량이 전무해지거나, 또는 부족할 때를 말하며 이때 심폐소생술을 실시, 생명을 구할 수 있다. 심폐소생술이란 흉골 하반부를 압박과 이완시킴으로써 흉곽 내 압력 변화효과와 심장의 직접 압박효과 등으로 인공적으로 혈액 순환을 만들어 우리 몸의 중요한 장기에 산소를 공급해주고 다시 폐와 심장 등으로 혈액이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 발표에 따르면 응급환자 가운데 숨진 10명 중 4명은 응급처치만 제대로 받았다면 살 수 있었다는 분석이 나왔다고 한다. 현재 소방서 119응급센터팀이 시민 및 학생 등을 대상으로 심폐소생술(CPR)을 교육하고 있으나, 응급 의학자들은 응급처치상식이 없는 일반인들이 환자들을 돌보다가는 피해만 커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심폐소생술도 잘못 시행되면 오히려 심한 장애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경기도 의사회는 심폐소생술 캠페인과 아울러 대학병원 응급의학과 전문의 도움을 받아 이론 및 실습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심폐소생술의 중요성과 기초지식 등에 대한 교육을 통해 이론적인 지식을 갖추도록 했으며 심폐소생술 실행방법과 심폐소생술의 중요성을 알리고 실습교육은 우선 이론교육을 마치고 실제 실습용 마네킹을 통해 직접 심폐소생술을 익히는 기본적인 방법을 배우고 난 후 교육받은 내용들을 실행해 의식확인, 구조요청, 기도유지, 호흡확인, 구조호흡, 흉부 압박, 최종회생 확인 등까지의 순서를 정확하게 가르치고 있다. 선진국에선 생명과 직결된 심폐소생술 등 응급처치법에 대해 중·고교 정규 수업시간 중 매년 15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현재 경기도의사회가 실시하고 있는 심폐소생술 교육 대상은 성인으로 국한됐지만 중·고교생의 자원봉사 일부에 심폐소생술교육을 할당해 무분별한 교육보다는 전문가 도움을 받아 전문인을 양성하듯 정확하게 교육해 온 국민들이 재난에 대비하도록 하는 게 경기도의사회의 중요한 역할 이라고 생각한다. 최 원 주 최원주산부인과 원장 경기도의사회 섭외이사

이동전화 요금 인하해야

며칠 전 정부와 이동통신사들이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이동통신전화 요금이 비싸지 않다는 근거 자료로 활용해온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나라별 휴대전화 요금 통계치가 우리나라의 경우 한 회사의 청소년요금제를 근거로 삼았다는 게 밝혀졌다. OECD 자료가 일반 이용자들이 적용받는 요금제보다 싼 18세 이하 청소년들이 이용할 수 있는 요금제를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이 자료를 근거로 우리나라 이동전화 요금이 다른 나라들 보다 싸다고 강변해온 정부와 업계의 주장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통신정책을 담당하는 정보통신부와 업계 관계자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OECD 통계가 국제비교 자료로 적절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뻔히 적절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들 입맛에 맞는 자료니까 이걸 토대로 국민들의 요금 인하 주장을 윽박질러 왔다는 것이다. 국민들을 위해 존재하는 정부 부처가 어떻게 이처럼 뻔뻔한 일을 저지를 수가 있을까. 너무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이제껏 속아온 걸 생각하면 속이 부글부글 끓지만, 이런 정부를 상대로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을 지경이다. SK텔레콤 등 이동통신 3사의 지난해 영업이익 3조6천700억원 중 6천290억원 정도가 초과이윤이라는 것이 시민단체와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그동안 정부의 지원 아래 독과점 구조를 유지하면서 비싼 요금으로 막대한 이익을 챙겨왔으니, 이제 요금을 좀 내려 국민들의 부담을 줄여달라는 게 바로 요금인하 요구의 핵심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휴대폰 요금에 대해서는 정부가 유효경쟁정책이란 이름 아래 시장원리와는 맞지 않는 방식으로 요금규제를 하고 있다. 그런데 정부가 이동통신사업이 초기 투자비가 많이 드는 장치산업이라는 이유로 통신사업자들에게 요금을 인가해줄 때 소비자인 국민들보다는 사업자들의 이윤 보장에 치우친 결정을 해왔고, 이것이 비싼 휴대폰 요금의 원인이 됐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동통신사들은 국민들의 요금인하 요구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하다 선거철만 되면 정치권의 압력에 못이겨 생색내기 수준의 요금인하만 해왔다. 물론 OECD 통계자료를 내세우며 우리나라의 휴대폰 요금이 결코 비싸지 않다는 얘기를 빼놓지 않고 했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정부와 업계가 무슨 핑계를 대고 국민들의 요금인하 요구를 묵살할 지 궁금하다. 침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국민들이 지금 이들을 혼내기 위해 목소리를 가다듬고 있다는 것을 유독 정부와 업계만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과연 언제까지 이들이 국민들의 요구를 모른 척 하면서 버틸 수 있을지 두눈 크게 뜨고 지켜봐야겠다. / 장정은 경기도의회 의원

아프간 사건과 댓글

최근 아프가니스탄에 의료봉사를 떠났던 한국인 23명이 탈레반 무장세력에 의해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벌써 이 가운데 남자 두 명은 숨진 상태이다. 정부는 이러한 초유의 납치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 모든 방법들을 가동하고 있는 것 같다. 피랍자 가족들은 마음을 졸이며 눈물로 밤을 지새우고 있다. 이러한 사태는 미리 예견된 게 아니냐는 의견들도 있지만 사실 봉사활동을 위해 체류 중이었기 때문에 이런 상황까지 발생하리라곤 쉽게 생각지 못한 게 사실이다. 그런데 국내에서 피랍자들을 비난하는 누리꾼들의 댓글이 피랍자들의 명예를 훼손하고 가족들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고 있다. 물론 이번 봉사단을 기획하고 이끌었던 봉사단체와 당사자들이 준비과정과 현지에서의 안전문제 등에 대해 미숙한 모습들이 있었고, 이로 인해 국민들에게 큰 염려를 끼치게 한 점은 지적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과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피부 색깔과 언어 등도 다른, 그리고 일면식도 전혀 없는 전쟁을 치른 지역에서 간단한 치료조차 받지 못해 죽어가는 아이들과 부녀자들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자신의 비용을 들여 의료봉사를 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갔다. 우리는 마더테레사 수녀를 기억한다. 그녀는 캘커타의 빈민굴 극빈자들을 돕는 일부터 시작해 전쟁이 발생한 곳에도 달려가 다친 사람들과 고아들을 돌보는 일에 평생을 헌신했던 성자이다. 우리는 그녀의 삶을 높이 평가하고 존경해 마지않는다. 그녀 역시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자신의 안전을 우선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피랍자들을 비난하는 댓글들의 형사적인 책임을 논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봉사단의 헌신적이고 숭고한 희생정신이 그들의 미숙함과 실수 때문에 묻혀져서는 안 되고, 죽어가고 있던 아프가니스탄 아이들과 사람들에 대한 그들의 용기와 사랑, 박애의 정신만큼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비난을 받을 대상은 자신의 형제들을 돕기 위해 봉사 중이던 봉사자들을 납치한 탈레반 정권일 뿐이다. 우리는 봉사단이 보여준 행동의 가치를 폄하해서는 안 된다. 지금 우리가 해야할 일은 우리 문화의 고질적인 병폐 중 하나인 인터넷상의 익명성을 이용해 원색적인 비난성 댓글을 올리는 모습에서 탈피, 성숙한 인터넷 문화를 이뤄 나가야 함과 동시에 오히려 같은 민족이자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이러한 희생정신을 몸소 실천한 봉사자들을 자랑스러워 하고 그들의 무사 귀환을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할 때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정 재 훈 변호사·소산종합법률사무소

소리와 빛

우리의 삶에서 보고 듣는 것이 사라진다면 얼마나 단조로워질까? 눈과 귀는 몸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벗어나 세상 밖을 알기 위해 소리를 감각하는 기관과 빛을 감각하는 기관 등으로 각각 진화돼 왔다. 일반적으로 소리를 잘 들으려면 눈을 지그시 감는 게 나은데 눈을 뜨면 보고 듣는 게 뒤섞여 혼돈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지금은 보는 게 듣는 것 보다 훨씬 많은 세상이고 보는 것을 기준삼아 살지만, 옛날의 동양에서는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듣는 것을 세상의 근본으로 삼았다. ‘서경’을 보면, 예전 임금이 나라를 다스릴 때는 황종이라는 종과 같은 악기를 통해 각 제후 나라들의 소리를 맞추고 이 소리를 기준으로 세상의 기틀을 세웠다. 그 방법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우선 황종에다 기장과 같은 곡식을 채워 그 채워진 알곡을 기준으로 부피와 무게를 정했고, 기장이 채워지는 황종의 길이를 기준으로 길이를 규정했다. 실생활에 가장 기본이 되는 도량형을 황종과 같은 악기의 소리를 기준으로 정했으므로 황종은 만사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천자문’에서 ‘율려조양’이라고 한 구절도 바로 소리의 기준이 되는 율려로 천지음양의 기운을 고르게 한다는 의미인데 황종이 바로 이 12율려의 으뜸이다. 이처럼 동양은 들리는 소리를 기준으로 다스려진 문명인데 반해 우리가 사는 지금의 현대 서구문명은 보이는 빛을 기준으로 만들어졌다. 다만 빛과 소리의 차이일뿐인데, 옛날과 지금의 세상 모습은 이처럼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 우리가 살고 있는 빛의 문명은 화려하게 보이지만 소리의 옛 문명은 신비롭기 그지없다. 유명한 진화생물학자인 스티븐 제이굴드는 “과학이 변화하는 건 절대 진리에 가깝게 다가가기 때문이 아니라, 문화적 맥락이 변모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즉 과학이 절대 진리를 나타내는 게 아니고 과학도 세상의 모습에 따라 변하면서 그 때에 따라 담아내는 문화의 모습을 표현한 것뿐이라고 잘라 말한 것이다. 서구의 문물은 보고 분석해야 하는 것이지만 동양의 문물은 가만히 듣고 음미해야 한다. 참 다르게 느껴진다. 소리는 고요하고 한가할수록 알아듣기가 쉽다. 그래서 동양의 학문은 늘 빈 공간과 한가로운 여가가 필요하고 달처럼 어스름한 세상을 느낄 수 있을 때 이해하기 쉽다. 눈에 보이는 세상처럼 분명하게 구분되고 디지털처럼 애매모호함이 없는 세상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다는 아닌데 다들 보이는 것만 요구한다. 살면서 가끔은 눈을 감고 조용히 세상을 들여다 보고 밤하늘의 별과 달 등을 느껴보자. 조 용 주 두리한의원 원장

비정규직의 눈물

최근 경찰에 끌려 강제로 해산되며 “내 직장인데 왜 끌어 내냐”고 울부짖는 이랜드 비정규직 노동자를 보며 한 제자가 떠올랐다. 몇달 전 대형 할인매장에서 계산을 하려는데 계산대 직원이 유심히 쳐다보며 인사를 반갑게 했다. “선생님, 저 기억나세요?” 기억을 더듬어 보니 아이들과 잘 어울리며 궂은 일도 먼저 나서 하던 제자였다. 아이는 학창시절 꿈도 있고 긍정적인 사고로 주변을 즐겁게 했다. 가끔 학교에서는 입시위주의 생활에 지쳐 힘들어 하기도 했지만 환한 얼굴로 계산대에서 웃는 모습이 직업을 가진 보람으로 보여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당시 필자는 그 제자가 한달에 80만원을 받으며 하루 종일 꼬박 서서 일하고 기계부품처럼 취급받으며 스스로를 “찍순이”라고 부르는 현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이랜드 비정규직의 아픔이 신문에 실리고 난 뒤에서야 제자의 웃음 뒤에 힘들고 고단했을 삶이 떠올라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졌다. 비정규직이 850만명을 넘어서고 있어서인지 제자들이 곳곳에서 인사를 하는 곳은 유통할인매장과 24시 편의점 계산대, 식당 보조원 등이었다. 이 땅의 젊은 청춘들이 취직하는 곳이 거의 비정규직이 됐다는 서글프고 우울한 현실이 이제야 곳곳에서 보인다. 학교에서는 “포기란 배추 썰 때나 하는 말”이라고 하며 꿈을 갖고 현실에 도전하라고 가르친다. 학생들은 희망 직업란에 거의 다 의사, 변호사, 아니면 사업가 등으로 적는다. 그러나 학생들이 졸업하고 갖는 직업들은 정규직 노동자이거나 비정규직 노동자 등이다. 독일에서는 학교 교육과정에 노사교섭이나 노동조합에 대해 가르치도록 교과서와 시간 등이 배정돼 있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가장 실질적인 자본과 노동, 노사관계, 노사교섭, 노동쟁의, 비정규직 등을 현실과 가깝게 가르치지 않는다. “자신이 번 건 스스로 번 게 아니라 사회의 덕분”이라며 재산을 사회로 환원한 카네기의 정신을 우리 기업들은 모른 척 한다. 노동자들이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일하며 평생직장으로 여기며 일하는데서 오는 기업의 생산성 향상은 계산할 줄 모르고 당장 눈앞의 계산만 하는 기업들. 비정규직을 보호한다며 해고의 칼날이 돼버린 법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고 기업의 횡포를 구경하고 보호까지 해주는 정부의 무능력. 무한경쟁과 비인간적인 효율 등을 최우선에 두고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없는 사회풍토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눈물 나게 한다. 간디는 영국의 침략에 맞서 전 인도인의 영국제품 불매운동과 불복종운동 등을 펼쳤다. 나의 제자가, 나의 아들과 딸들이 또 다시 똑같은 눈물을 흘리지 않도록 지금 실천해야겠다.

획일화 vs 평준화

감각전이(Sensation Transfer)라는 말이 있다. 사람들이 슈퍼마켓이나 백화점 등에서 물건을 고를 때 자신도 모르게 제품의 포장에서 받은 느낌이나 인상 등을 제품 자체로 전이시키는 것을 말한다. 즉 제품의 포장이 품위가 있고 멋있으면 사람들은 그 제품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포장과 제품을 동일시하는 행위다. 이러한 현상은 사람에게도 그대로 적용돼 왔다. 옷차림을 보고 사람을 신뢰하기도 하고 신뢰하지 않기도 한다. 예쁘고 아름다운 여자를 보면 성격이나 마음도 좋을 것이라 생각하고, 키가 크고 건장한 남자를 보면 능력 있고 믿음직스럽다고 생각한다. 학교나 나라 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여서 삼류 대학 졸업자는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한계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학습수준이 높은 학생이 나름의 뜻을 가지고 실업계 고교에 지원했어도 그 실력을 인정받지 못하며, 해외의 경제 선진국 학위 소지자는 국내 학위 소지자보다 더 인정을 받는다. 우리는 실제 생활 속에서 이러한 감각전이가 맞는 경우도 경험하지만 맞지 않는 경우도 경험한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실제 경험에서 생겨난다. 하지만 선입견에 기인하는 경우도 많다. 사람들은 이러한 선입견을 깨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가치관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인쇄 및 영상매체들이 반대 방향으로 나아간다. 예를 들면 어린이 동화에서 예쁜 공주는 다 착하고 공주를 구하는 왕자는 다 잘 생기고 용감하다. 드라마에서도 주인공은 항상 예쁘고 잘 생긴 사람이다. 언론은 잊어버릴만 하면 사법고시나 국회의원 배출 인원수로 명문교 등급을 매긴다. 학력이 떨어지는 학생의 학습능력을 얼마나 높여주었는지, 사회에 필요한 각 계층의 인재들을 얼마나 어떻게 배출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런 지경이니 아이들의 관심이나 학교교육의 방향이 어디에 무게를 두게 될지는 뻔하다. 학력차별주의 철폐를 주장하고 능력중심사회를 강조하면서 획일화를 진행시키는 셈이다. 이제 우리는 평준화는 획일화라는 도식적 생각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오히려 잘 생긴 외모와 고급 인재 배출 인원 등만으로 개인의 능력이나 학교의 등급 등을 매기는 일이 획일화된 평준화가 아닐까. 평준화를 획일화라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된 감각전이의 한 현상이 아닐까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다양한 개성과 능력 등으로 개개인이 존중받는 사회, 다양한 인재를 양성하고 문화의 저변을 탄탄히 다지는 것으로 교육성과를 인정받는 사회, 가치 영역이 특정 영역에 집중되지 않고 다양하게 펼쳐진 열린 사회를 위한 평준화, 다양화 등을 고려할 때다.

딸 낳으면 크루즈 탄다

“딸 낳으면 비행기 타고 아들 낳으면 기차 탄다”는 세간의 농담이 있다.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분들이 많아지는 시대다. 필자 역시 딸만 둘을 가진 터라 이런 말을 들을 때면 언제나 딸 덕분에 비행기 한번 타볼까 생각하며 웃음짓고는 한다. 하지만 인천항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보면 선뜻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하나 있다. 바로 호강을 대표하는듯한 ‘비행기 탄다’는 대목이다. 비행기를 타고 여행하는 게 아직까지 호사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여행문화가 발달한 선진국일수록 항공여행보다는 선박을 이용한 크루즈 여행이 훨씬 더 고급스러운 휴가에 속한다. 아마 알래스카나 지중해 인근에서 이같은 농담이 생겼다면, “딸 낳으면 크루즈 탄다”고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직 크루즈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인천항에는 중국 도시 10곳으로 향하는 카페리 항로가 운영되고 있다. 휴가철이나 수학여행 시즌이면 많은 여행객들과 어린 학생들이 카페리를 이용해 중국 여행을 다녀온다. 인천항을 이용하시는 여러 손님들에게 감사의 마음과 함께 송구스러운 마음을 감출 길이 없다. 아직까지 호젓한 여행을 누릴 정도로 인천항 국제여객터미널 시설이 만족스럽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시설을 개선하고 고객 서비스 향상을 위해 노력하지만 기존 시설이 워낙 좁고 낙후된 터라 여행객들은 물론 필자 스스로도 만족할 수준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이를 해결할 방법은 사실 간단하다. 국제공항 수준의 시설을 갖춘 국제여객터미널을 새로 건립하면 된다. “선박 여행을 하는데 공항 수준 시설이 왜 필요하냐”고 반문하거나 배를 타고 여행하는 사람들의 수준을 공항 이용객에 비해 낮게 보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인천항 국제여객터미널 이용객들이 인천국제공항 여행객들에 비해 질 낮은 서비스를 받아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오히려 극장과 쇼핑센터, 호텔 등이 포함된 복합청사로 지어질 새 국제여객터미널은 인천의 명물이 돼 크루즈를 포함한 새로운 여행문화를 만들어내는 문화공간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지금부터 시작해도 새로운 여객터미널이 건립되려면 5~6년 정도는 걸린다. 착공이 늦어지면 자칫 오는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손님들을 낡은 터미널에서 맞아야 하는 낭패를 볼 수도 있다. 인천항만공사가 공사를 서두르는 것도 이때문이다. 인천항 국제여객터미널이 새롭게 건립되는 그때가 되면 “딸 덕분에 인천항에서 크루즈 탄다”는 유행어가 생겨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노인장기 요양보험 문제

우리나라 고령화 속도는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이 빨리 진행되고 있다. 고령화 사회의 다양한 문제 중 후기 고령 노인의 수발보호문제는 노후생활의 최대 불안 요인으로 어느 나라든 매우 중요한 정책 과제다. 치매나 중풍 등 거동 불편 노인들의 공적수발 서비스 제공을 위해 노인장기요양보험법을 제정, 현재 준비 중인데 몇가지 문제점들을 지적한다. 이 제도는 후기 고령 노인들이 늘면서 장기 요양보호 노인들의 문제를 사회보험방식으로 재원을 조달해 해결하려는 발상이다. 독일과 일본 등이 이 방식으로 노인 수발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과거 가족의 부양기능에 의존했던 수발부분이 핵가족화와 여성의 사회 진출 증가 등으로 약화됨에 따라 이제는 가정만의 문제를 넘어 국가와 사회가 연대해 책임을 공유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수발기간이 길고 경제적 부담도 커진 현실에서 바람직한 방식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시행에 앞서 몇가지 조심스럽게 검토돼야 할 것들이 있다. 첫째, 시설과 인적 인프라 구축문제다. 시설은 턱없이 부족한 상태다. 입소시설들이 유·무료를 합쳐 900여곳을 넘지 못하고 재가시설들도 고작 4천여명이 이용할 정도인데, 시행 첫해에 16만2천명을 모신다고 하니 혼란이 야기될 것이고 이 제도를 뒷받침할 인적 구성이 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혼란도 예상된다. 둘째는 재정확보다. 재원은 국민들이 내는 수발보험료, 국가의 부담, 이용자 부담 등으로 이뤄진다. 수발보험료는 지금 내고 있는 건강보험료의 10~15% 정도의 추가 부담이 발생할 것으로 보이고 가입자들은 20세 이상인데 수급자는 65세 이상이기 때문에 건강보험료와 달리 가입자와 수급자가 일치하지 않아 국민적 불만이 초래되며 이용자들이 많아질 경우 보험료와 본인 부담금은 점점 증가할 텐데(현재 일본의 개인보험 상황이 비슷한 사례) 해결방안이 궁금하다. 셋째는 대상 노인들에 대한 서비스 질 저하 우려다. 현행 제도는 노인의 건강평가 판정에만 의존해 수발급여가 책정되게 해 수발지정기관(시설)들은 호봉승급이 되는 정규직이 설 자리가 없게 됐고 계약직만으로 운영돼 종사자들의 처우가 열악해지며 노인들에 대한 서비스 질은 저하될 수밖에 없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등급판정, 수발급여 평가, 신청인 조사 등 모든 권한들을 위임해 재정상황에 따라 등급판정에 영향받을까 우려된다. 세 가지 사항들만 열거했지만, 이 제도의 실시야 말로 우리나라 50년의 노인복지 역사상 가장 엄청난 변화를 요구하는 사항인만큼 더욱 신중을 기해 준비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정부는 혁명하듯 너무 서두르는 게 아닌가 우려된다.

불매운동과 대선후보 검증

우리가 익히 아는 것으로 불매운동이 있다. 대개는 제품의 품질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 이뤄진다. 예컨대 서민들의 술인 소주시장에서 모 소주 제품에는 자기 회사의 대주주 명단이 그림표로 친절하게 그려져있다. 이것은 그 회사의 기존 경영진이 몰락하면서 일본 자본이 새로이 그 회사를 인수했다는 그럴듯한 소문이 퍼졌고, 그래서 사람들이 음식점이나 술집 등지에 가면 꼭 다른 술을 특정해 주문하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불매운동가의 개인체험은 재미있다. 미국의 어떤 사람은 “중국 제품을 쓰지 않기로 결심했으나 그후 중국제품을 쓰지 않고 살자니 도저히 살 수 없었다”고 고백했고 책을 냈다. 도대체 생활의 편의를 위한 구매행위라는 본질은 간데 없고, 제품의 하자와는 별개인 이런 불매운동 불매체험이 성공할 수 있을까? 소비자의 선택 및 사용과 관련된 제품 하자가 아닌 다른 목적의 불매운동이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여태껏 들어보지 못했다. 소비자는 정치적으로는 유권자이다. 정치의 세계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후보 검증이라는 이름으로 일어난다. 우선 후보 검증은 재미있다. 호기심천국이나 소설책, 영화 등은 저리 가라 할 정도이다. 몰래 사생활을 훔쳐보는 관음증(觀淫症) 정도가 아니라 인민재판 식으로 발가벗기니 죄책감도 없다. 넋이 나간다. 나와는 전혀 상관 없는 일이니 즐기기만 하면 된다. 그러다 보니 자기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할 때가 있다. 이때 속에서 “정신차려 이 친구야!”라는 불호령이 내린다. 그렇다. 호기심천국이 내 구매행위(투표행위)와 어떤 관련이 있는가? 형이나 처남 재산이면 어떻고 후보 재산이면 어떤가? 그게 달라지면 그 사람이 일을 잘하고 못하고가 달라지는가? 대부분의 불매운동이 그랬듯, 또 가깝게는 지난 2002년 대선의 거짓되고 조작된 검증으로 인해 선택이 바뀐 경험이 그랬듯, 대개는 본질과는 상관없는 일들이다. 잘못했으면 법에 따라 처벌하면 되고, 시효가 지난 일들은 그야말로 과거사일 뿐이기 때문이다. 소주의 품질이 중요하고 편의를 누릴 수 있는 제품이면 (싫어하는?) 중국산이라도 거부할 수 없듯, 대선에서도 중요한 것은 그들이 시행하겠다고 하는 정책과 나의 손익간의 관계이다. 우리 국민들은 그간 정부의 잘못된 정책 하에서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어왔는가? 또 다시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후보 검증이라는 이름으로 호기심 천국을 유발해 관심을 돌리려는 사람들의 속셈을 꿰뚫어 보아야 한다. 불매운동에 혼을 빼앗기기보다는 소비자로서 계산기를 두드리듯, 유권자로서도 계산기를 제대로 두드릴 일이다. 박 종 운 경기도경제단체연합회 사무총장

나이듦의 미학(美學)

몇해 전 어느 일간 신문에서 읽은 시 한편이 문득 생각난다. “신발 문수가 더 이상 늘어나지 않는 날부터 / 하나둘씩 내 곁을 떠난 친구여/ 하나 둘씩 내 곁을 떠난 꿈이여.” 제목이 뭔지 누가 썼는지는 기억나지 않고, 시구가 정확한지 모르지만, 여하튼 나이듦의 미학(美學)을 정말 잘 그려낸 시임에 틀림없다. 나이가 든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첫번째 의미는 아마도 상실이 아닌가 싶다. 여러분은 생명처럼 소중히 했던 친구나 연인, 또는 가족 등을 어느 날 갑자기, 더 이상 이 지상에서 만날 수 없게 되는 생사(生死)의 아이러니, 그 황당함의 극치 앞에 가슴 저미어 본 적이 있는가? 전쟁통에 어린 나이로 부모와 헤어진 후 반세기 동안 몽매에도 그리던, 북에 계신 부모님이 더 이상 살아계시지 않는다는 청천벽력 같은 통보를 받은 백발의 실향민의 아픈 가슴도 바로 상실감일 터이다. 그런데 나이듦의 의미에는 상실 밖에 없을까? 나이가 든다는 건 엄연히 자연의 섭리인데, 자연의 섭리에는 상실 밖에 없을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떠나 보내는 것도 있지만 새로이 얻게 되는 것도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얻는 건 무엇이고 잃는 건 무엇일까? 지난달 천자춘추 란을 통해 ‘두개의 세계’에 대해 말한 바 있지만,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는데 삶의 한 부분이 된 모든 건 떠나 보낼 수 밖에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자신의 자유의지로 선택해 삶의 한 부분으로 창조한 건 모두 떠나 보낼 수 없는 것들이다. 지금도 시간은 우리 곁을 계속 떠나고 있다. 우리의 선택이나 자유의지와는 관계 없이…. 그래서 봄이 가고 다시 여름이 왔다. 더운 여름 피서지에서, 영원히 떠나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그 자리에 머무르고 있는 산과 강, 바다 등지를 바라보며 우리가 미련 없이 떠나보내야 할 건 무엇인지, 떠나보내지 말아야 할 건 무엇인지 곰곰히 생각해 봐야 할 때가 왔다. 가야 할 것은 가야 하고, 남아야 할 것은 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홍 성 훈 여주대학 보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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