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운 증후군 내 아기 책임져라”

전라남도 순천시에 사는 조모씨(38)는 지난달 둘째 아이를 출산후 절망감에 빠져 있었다. 전혀 예상못한 상황에 다운 증후군 남아가 태어난 것이다. 조씨는 담당 의사의 오진을 주장하며 거세게 항의해 1인 시위를 하게 됐고, 담당 의사는 “조씨가 업무를 방해했다”고 고소했다. 담당 의사는 “인간적 차원에서 도의적 책임을 지고 위로금을 전하려고 했지만, 조씨가 거액을 원해 결렬됐다”고 말했다. 이 사안의 쟁점은 두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담당 의사에 대한 책임의 소재이고 둘째는 의사의 오진의 범위이다. 출생한 다운 증후군 남아에 대한 책임 소재는 어디에 있을까. 과거 우리는 한 생명의 생과 사를 좌지우지하는 것을 하늘에 맡겼고 하늘의 뜻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과학의 발달과 함께 의학의 발달로 개발된 의학기구를 앞세워 오진을 줄이려고 노력했지만 기형아 출생비율은 감소하지 않았다. 이 다음에 이 아이가 성장해 책임 소재를 물었을 때 누구에게 그 책임이 돌아갈까. 조씨 부부 아니면, 의사, 아니면 생명을 갖고 태어나게 한 하느님(?). 이번 사건에 책임 소재는 부모가 결정할 게 아니고 이 아이가 판단해야 하지 않을까? 따라서 담당 의사에게 물을 수 있는 건 아이 출생에 대한 책임여부 보다는 주의업무를 소홀히 해 부모를 실망하게 한 오진일 것이다. 산전검사의 가장 큰 목적 중 하나는 태아 기형의 진단이다. 태아 기형은 크게 선천적 심장 질환이나 뇌수종과 같은 구조적 기형과 다운증후군 이나 에드워드증후군 같은 염색체 이상으로 인한 기형으로 나눌 수 있다. 최근 산전 초음파기술 발달로 구조적인 기형은 90%가 진단되지만, 출생아 700~1천명당 한명 꼴로 발생하고 있는 염색체 이상인 다운 증후군은 초음파 검사의 발달에도 초음파로 진단할 수 있는 건 40%에 불과하며, 산전 초음파 검사만으로 진단하는데는 어려움이 있어 왔다. 따라서 구조적인 큰 기형이 아니면 태아 기형은 발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의사의 오진에 대한 범위는 어느 정도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어야 하고 담당 의사가 환자를 위해 노력할 뿐이지, 아이 출생에 대한 책임을 질 수는 없다. 앞으로 이러한 분쟁은 끊임 없이 일어 나겠지만 동서고금을 통해 해결의 실마리는 아직까지 보이지 않으므로 의학을 연구하는 한 사람으로써 한계를 느낀다. 최 원 주 최원주산부인과 원장 경기도의사회 섭외이사

중개사 전·월세 신고의무 철회돼야

지난 5월28일 민병두 열린우리당 국회의원의 대표 발의(열린우리당 국회의원 42명)로 주택임대차보호법 및 소득세법 일부 개정 법률(안)이 현재 법제사법위원회에 회부·검토되고 있다. 특히 주택임대차보호법 일부 개정 법률(안)은 공인중개사에게 전·월세 신고의무를 부과하는 내용을 담아 회원들 모두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임대인(중개업자를 통한 경우에는 중개업자를 포함)은 전·월세 임대차계약 성립일로부터 1개월 이내 시·군·구청장에게 신고하고 시·군·구청장은 신고사항을 관할 세무관서에 통보하며 임대차계약을 거짓으로 신고하거나 신고하지 않은 임대인은 300만원 이하의 과태료에 처하게 된다. 세입자 월세와 보증금대출 원리금상환액 40% 소득공제, 임대인 월 임대소득 연간 각각 300만원까지 특별공제 등도 포함됐다. 이에 따라 임대인, 또는 임차인은 소득을 공제받는다고는 하나, 임대인의 경우 주택임대사업자로 신고하지 않은 경우도 소득세를 추징당하고 연간 300만원은 공제해주겠다는 취지이나 임대인은 부과된 소득세만큼 임차인에게 그 부담을 전가, 임차료 상승이라는 역효과가 초래될 수 있고 개인간 직거래로 계약된 임대차계약은 신고되지 않거나 불성실신고 가능성이 높으며 자칫 서민들마저 범법자로 만드는 결과로 이어진다. 공인중개사가 아무런 보상도 없이 책임과 의무, 행정규제만 따르는 실거래가신고제와 중개대상물 확인·설명서 등으로 이중고를 앓고 있는 상태에서 전·월세 신고의무까지 부담된다면 결국 부동산중개업을 영위하기 어렵고 주택의 임대차중개를 회피할 수밖에 없다. 업계는 이번 발의안에 대해 “부동산중개인은 거래를 알선 중개하는만큼 계약의 당사자가 아니고 중개행위를 한 부동산중개업자에게 임대차계약을 신고하도록 의무를 부과하는 건 과잉 규제로 부당하다”는 반응이다. 현재 임차인들이 확정일자를 거의 받고 있는만큼 행정 간소화를 위해서도 임차인 신고로 하면 될 것이다.

먹고 사는 문제

사람들은 먹기 위해 사는 것인지, 살기 위해 먹는 것인지 가끔 혼돈스러울 때가 많다. 세상에는 워낙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가기 때문에 저마다 생각이 다르기는 하지만, 어차피 이 둘 중 하나에 속할 것이다. 이 둘의 차이가 어떻든지 간에 먹는 건 우리가 살아가는데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다. 세상이 변하면서 음식들이 참 많이도 달라졌다. 음식이 입에 맞고 마음에 들면 우리는 맛깔스럽다는 표현을 하게 되는데, 요즘 맛깔스러움은 주로 시각적으로 보기 좋고 예쁜 맛을 의미하는 것처럼 말이 변해 가고 있다. 그래서 갈수록 음식의 맛을 아는 사람들은 드물어지고 단지 보기 좋고 자극적인 음식을 선호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우리는 눈을 통해 세상을 보게 되는데, 눈은 뇌에 딸린 감각기관이다. 의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해부학을 하게 되는데, 뇌를 해부하면 눈이 뇌에 붙어 딸려 나온다. 그래서 눈은 뇌가 밖을 감각하는 통로가 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는 서구의 문명을 중심으로 했다. 그런데 서구의 과학문명은 빛을 통해 보는 시각을 이 세상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세상을 모두 시각 중심으로 바꿔 놓았다. 예쁘게 보이려고 성형수술을 해야만 하고 텔레비전과 컴퓨터와 같은 시각매체를 통해야만 살아갈 수 있다. 길이와 시간의 기준 조차도 빛과 보는 시각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도무지 보지 않고 살아가질 못하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눈을 지배하고 있는 뇌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몸에는 뇌가 완전히 지배할 수 없는 구역이 따로 있는데, 바로 소화기다. 소화기는 장신경총이라는 뇌와 흡사한 신경계를 이루고 자율적으로 조절되고 있다. 그런데 이 소화기는 눈을 기준으로 살아가는 기관이 아니어서 눈이 좋다고 생각하고 받아들여진 음식을 먹고 토하거나 설사를 하기도 한다. 눈으로 보아서는 멀쩡한 음식이었지만 소화기인 장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도 부적절하거나 더러운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세상을 그저 눈으로 보고 평가하고 보이는 것에 따라 마치 미쳐 날뛰듯이 움직인다. 하지만 우리 몸에는 엄연히 소화기와 같이 세상을 차근차근 더듬으면서 직접 느껴가며 살아가는 기관들도 있다. 소화기가 느끼는 세상은 맛을 보는 세상이다. 아마도 뇌의 학습에 의해 맛을 인식하는 방식을 변형시키지만 않았다면 인스턴트 음식이나 패스트푸드와 같은 음식들을 맛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을 오로지 머리를 써서 보는 데만 집중하지 말고 하루에 한번쯤이라도 우리 몸속의 소화기가 하는 것처럼 세상을 느끼며 살아보자.

로스쿨 제도의 과제

지난 3일 법학전문대학원 설치·운영에 관한 법률이 국회를 통과했다. 많게는 100억원이 넘는 투자를 했던 대학들은 어쨌든 한 숨을 돌릴 수 있게 됐고, 이제부터 로스쿨 유치를 위한 경쟁에 본격적으로 임할 태세다. 그러나 소위 로스쿨법의 통과로 해결된 문제보다는 해결해야 할, 더 많은 문제들이 남겨진 상태다. 현재 로스쿨법은 인가받을 로스쿨의 수, 전체 학생의 정원, 로스쿨 졸업과 변호사 자격시험, 변호사의 수, 판·검사의 임용방법 등에 대해선 전혀 정해지지 않았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이 법안이 국회에 상정됐던 기간은 22개월이지만 기간만 오래 됐을뿐, 법안의 검토와 심의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은 채 로스쿨의 개원을 오는 2009년 3월로 못 박아 놓고 이에 맞추기 위해 졸속으로 입법된 데다 사립학교법 재개정과 연계되는 바람에 해당 법사위의 심의도 제대로 거치지 않고 국회의장이 직권으로 본회의에 상정, 일괄 처리됐기 때문이다. 로스쿨 법은 기존의 법조인보다 더 뛰어난 법조인을 양성하기 위해 도입됐다. 교육인적자원부는 로스쿨 제도 도입으로 말미암아 각 분야에 전공을 다양하게 갖추는 예비 법조인을 선발, 법률교육을 받게 함으로써 다양한 법률전문가를 양성할 수 있다고 취지를 밝혔다. 그러나 이는 로스쿨 제도 도입의 형식을 갖추고 학생의 숫자를 늘리면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로스쿨 제도를 통해 가르칠 내용과 그 질적인 수준이 핵심이 될 수밖에 없다. 기존 사법연수원 역시 다른 여러 나라의 법조계가 부러워할 정도의 높은 수준의 교육내용과 시설 등을 갖췄지만 이를 바꾸는 마당에 더 나은 환경을 로스쿨 제도가 갖춰야 할 것인바, 어떤 기준으로 로스쿨 인가를 해 줄 것인지, 변호사 자격시험의 수준은 어느 정도로 할 것인지, 궁극적으로 로스쿨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법조 일원화 방법 등의 문제에 대해 깊이 있는 검토와 신중한 결정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만약 이러한 문제들을 정치적 관점에서만 해결하려 한다면 우리나라 법학교육의 미래는 암담해질 뿐이다. 정부는 로스쿨 인가와 정원의 문제를 신중하되, 최대한 신속하게 결정한 후 인가받은 대학들이 내실 있는 교육프로그램을 준비할 수 있도록 현명한 대책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국민은 유류세 인하를 원한다

드디어 나왔다. 그런데, 역시 예상했던대로다. 지난 11일 재정경제부가 2007년 하반기 경제운용방향을 발표하면서 서민과 자영업자들의 유류비 부담을 줄이겠다고 발표한 대책을 보는 국민들의 반응은 싸늘하다. 최근 일부 언론이 ‘민란’이라고 까지 표현할만큼 거센 국민들의 유류세 인하 요구에 대해 대책을 발표한 정부 관계자들은 이해하기 힘들지 모르지만 말이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정부도 이 정도 수준의 대책으로는 국민들의 마음을 가라 앉히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욱 답답하고 화가 난다. 국민들은 이구동성으로 휘발유 가격의 57%를 차지하는 세금이 너무 많으니 줄여야 한다고 얘기하는데, 정부는 “세금은 그냥 두고 다른 걸 좀 바꿔보겠다”만 얘기하고 있다. 이번 조치로 인해 자영업자의 유류비가 1년에 15만원 정도 줄어들 것이라고 하는데, 이미 자영업자의 절반 이상이 면세자이기 때문에 효과가 의문시된다는 보도가 바로 뒤를 이어 나오고 있을 정도다. 정확한 유가정보 제공과 유통질서를 확립하겠다는 발표 내용 역시 당연히 정부가 했어야 하는 일로 새삼 대책이라고 할 수 없다. 하긴 경제부처의 수장이 “기름 값이 비싸야 유류소비를 줄일 수 있다”는 얘길 거침없이 해대는 판국에 일말의 기대를 갖고 정부 발표를 기다려온 게 잘못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휘발유 값에 지금과 같이 엄청난 세금이 붙게 된 건 지난 1998년 외환위기 당시 금융 및 기업구조 조정 재원 마련과 국제수지 방어 등을 이유로 교통세를 대폭 인상하면서 부터라는 건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정부의 잘못으로 초래된 경제위기를 국민들의 주머니를 통해 극복하겠다는 어처구니 없는 정책이었음에도, 국민들은 별다른 불평 없이 담담하게 따랐었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국민들의 주머니를 털어가는 일을 그대로 참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잘못 생각해도 한참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정부가 거둬들인 총 세입은 당초 예산보다 2조7천억원 이상이 더 걷혔다고 한다. 국제유가 핑계를 대는 국내 정유회사들의 영업이익 역시 매년 연중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고 한다. 대체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정부가 조금이라도 국민들의 고통을 생각한다면 유류세 인하 요구에 대해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대책을 제시해 주길 촉구한다.

인천항의 주인은 누구인가

영화의 주인은 영화감독도 아니고, 주연배우도 아니다. 관람료를 내고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는 관객들이야말로 진정한 영화의 주인이다. 영화의 숨은 주인인 관객들이 올해 눈길을 끄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한국 영화의 관객 점유율을 6년만에 최저로 끌어내린 것이다. 올 상반기 한국 영화의 관객 점유율은 47.3%. 극장을 찾은 관객들의 절반 이상이 한국 영화 대신 외국 영화를 찾은 셈이다. 한때 70%를 넘나들던 한국 영화 점유율이 이처럼 낮아진 이유는 여러가지다. 하지만 갖가지 분석과 관계 없이 이런 결과가 나온 가장 큰 이유는 한국 영화가 관객들, 즉 주인들로부터 선택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주인인 관객들이 한국 영화에 무관심했다는 뜻도 된다. 영화는 물론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주인 역할을 해야 할 사람이나 기관 등이 있게 마련이다. 주인이 어느 정도의 관심을 보이느냐에 따라 결과는 180도 달라진다. 인천항에도 당연히 주인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제 출범한지 2년이 갓 지난 인천항만공사를 인천항의 주인이라고 말한다. 필자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펄쩍 뛴다. 인천항만공사는 일을 대신하는 머슴일뿐, 절대 주인이 될 수 없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인천항의 진짜 주인은 누구일까? 필자는 인천항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하역사와 선사, 이곳에서 일하는 항운노조원들, 인천항을 이용하는 화주들과 인천항을 보듬어 안고 살아가는 시민들이 진짜 인천항의 주인이라고 말한다. 이들이야 말로 인천항을 이끌어 나갈 자격이 있는 진정한 주인들이다. 하지만 인천항의 주인들은 너무 목소리를 아끼는 경향이 있다. 광양항과 부산항, 평택항 등 인천항의 경쟁 항만들은 다르다. 이들은 기회만 오면 자기들 항만을 더 키우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느라 바쁘다. 정부를 상대로 잘 봐달라는 부탁은 물론이고 때로는 회유와 협박도 한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인천항의 주인들은 너무 얌전하기만 하다. 지난 2년 동안 인천항만공사를 이끌면서 가장 아쉬웠던 점이다. 주인들로부터 사랑받지 못하는 화초는 곧 시든다. 인천항 역시 주인들로부터 외면받는다면 쇠락의 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다. 인천신항이나 국제여객터미널 건설 등도 인천항의 주인들이 한 목소리를 내줘야만 이뤄질 수 있는 과제들이다. 인천항만공사도 어느덧 출범 3년차를 맞았다. 3년차에는 인천항의 주인들이 인천항 발전을 위한 확실한 버팀목이 돼주길 바란다. 그래야만 인천항의 일꾼인 인천항만공사가 더욱 더 열심히 뛸 수 있다.

교육경쟁력의 요체

무엇보다도 인재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시대인만큼 교육경쟁력은 국가경쟁력의 주요 요소이다. 그렇다면 교육경쟁력의 요체는 무엇일까?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이 2007년 교육경쟁력 세계 2위라고 발표한 덴마크의 교육장관은 자국 교육경쟁력의 요체를 초·중등 과정의 우수한 공교육과 철저한 직업교육, 그리고 대학의 자율성 등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요소들이 교육경쟁력을 가늠하는 절대적 기준이 될 수는 없겠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문제를 둘러싸고 갑론을박하는 것으로 미뤄 그것들이 교육경쟁력의 주요 요소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교육 당사자들 서로가 이러한 경쟁력을 약화시킨다고 야단이다. 정부는 대학이 공교육을 망치며 사교육을 부추긴다 하고, 대학은 정부가 입시제도를 통제하며 우수 인재 양성을 가로막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속을 뒤집어보면 한쪽에서는 대입에서의 내신 반영률을 높임으로써 학생의 학교교육에 대한 참여도를 높이려 하고, 다른 쪽에서는 (주로 우수 대학 몇몇에 해당되는 얘기겠지만) 우수 학생만을 받아 우수 인재로 키우겠다는 속셈이 있다. 다들 땅에 손 짚고 헤엄치겠다는 얘기다. 왜 서로를 믿지 못하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경제적 부담을 감수하면서도 사교육에 의존하는 이유는 그들이 고교별 시험문제 출제 성향과 기출 문제 분석을 통해 학생들의 내신 성적 향상을 지원하고, 다양한 교수학습방법 개발과 수준별 교육으로 학생들의 학습동기를 높이며, 시의적절한 학습정보 및 교육상담 등을 통해 진로 문제를 해결해주기 때문이다. 이런 부분에서 경쟁력이 떨어지면 학부모나 학생은 해당 교사나 학원을 떠나야 한다. 실력이 향상될 수밖에 없다. 상대적으로 학교에서 이만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 대학 역시 잠재적 용들을 받아 훌륭한 인재로 키우려는 노력을 기울이는가. 학교나 대학은 늘 열악한 재정과 자율의 부재를 탓한다. 정말 재정과 자율성만 확보되면 해결될까? 어느 정도 확보되면 그런 말이 나오지 않을까. 중요한 건 교육 주체의 열정과 의지이다. 중등교육에서는 제도적 장치를 통한 공교육 살리기에 의존하기보다 자기주도적으로 공교육을 살리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고, 대학은 우수 학생 선발에만 관심을 둘 게 아니라 보통 인재들도 진짜 용으로 길러내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교육경쟁력의 요체는 교육을 기업경영과 다르다고 선만 그을 게 아니라 인재양성을 위해 필요한 건 다 받아들이고 소화해내는 교육 주체들의 열린 마음과 열정과 의지가 중요하다.

개천에서 용쓰는 시대에 바란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는 제리코가 그린 ‘메두사호의 뗏목’이 있다. 거대한 모래톱에 걸려 좌초한 대군함 메두사호에서 인육을 먹으며 살아 남은 사람들의 절망과 비탄이 그림 가득히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그 곳에는 절망만 그려져 있지 않았다. 아득한 수평선 너머 구조선이 점처럼 떠오르면서 그를 향해 힘껏 희망을 외치는 사람들의 몸짓은 절망보다 더 강렬했다. 절망의 또 다른 이름이 희망이라고 했는가? 최근 서민들 사이에서 ‘개천에서 용 난다’던 속담은 ‘개천에서 용쓴다’로 바뀌고 있다. 이제 더 이상 교육이 사회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장치는 아니다. 오히려 계층을 고착화 하는 기제가 교육인 우울한 현실이 각종 통계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대학등록금 1천만원 시대에 서민의 등골을 휘게 하는 사교육비는 1인당 64만원에 이른다. 공교육은 학급당 학생수 40명을 넘나들지만, 경기도는 초호화판 영어마을을 짓고 불과 3년 사이에 240억여원의 운영적자를 냈다. 경기도가 학교를 지을 때 내야 하는 법정부담금인 학교용지매입비는 제대로 지급하지도 않은 채 전시성과 선심성 업적을 위해 영어마을에 2천억원을 쏟아 부은 것은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북유럽의 핀란드는 학부모 사교육비 부담이 거의 없고 대학 등록금은 90% 정도를 정부가 지원하며, 학생간의 심한 경쟁과 점수를 유발하는 체제가 없어도 학업성취도와 교육만족도가 세계에서 가장 높다고 한다. 이 같은 교육복지 모델을 한국사회에서 만들고 국민 모두가 고통스러워 하는 교육비 부담과 살인적인 입시경쟁을 벗어날 수는 없을까. 정치인 그들만의 게임인 대선에서 교육의 희망은 찾을 수 있을까? 사립학교의 투명성과 공공성을 위한 최소한의 장치인 사립학교법마저 정치인들의 야합에 의해 족벌과 세습을 묵인하고 개방형 이사제를 무력화시키는 것으로 개악되었다. 비정규직을 보호한다던 법안은 대량 해고의 칼날이 되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거리로 내몰고 있다. 희망을 갖게 하고 희망을 품은 사람들을 철저히 배신하는 시대. ‘모든 시내가 바다를 배우는 까닭은 바다가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다를 배우기 위해, 가장 낮은 곳의 바다로 가서 절망의 끝자락을 딛고 일어서야겠다.

북핵 위기의 진정과 북한 번영의 길

2·13 합의에 따라 북한 핵이 해결돼가는 과정이, 비록 BDA(방코델타아시아)은행 북한돈 송금문제로 지연되긴 했지만, 그 문제가 해결됨으로써 속도가 붙고 있다. 지난 3일에는 양제츠 중국 외교부장관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만나 2·13 합의 이행에 대한 약속을 다시 받아냈고, 미국도 이에 화답해 중유 5만t중 일부를 핵 시설 봉인이나 불능화, 또는 폐기 이전에라도 줄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동안의 과정을 보면 북한으로서는 핵위기 조성으로 장사(?)를 잘했다는 느낌이다. 지난 94년 1차 핵위기 조성으로 경수로와 중유 5만t을 얻어냈고 지난 2002년 핵위기 조성으로 다시금 비슷한 성과를 얻어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웃을 칼로 위협해 돈을 빼앗는다고 자신이 잘 살게 되지는 못한다. 그러한 방법은 지속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속이 가능하려면 ‘위협하는 장사’가 아닌 ‘봉사하는 장사’를 해야 한다. 봉사는 나에게도 이득이 된다. “우유를 먹는 사람보다 우유를 배달하는 사람이 더 건강하다”는 서양 속담처럼 남에게 봉사하면 내가 잘 살게 된다. 친절하고 맛있게 하는 음식점이 그렇지 못한 음식점보다 돈을 더 잘 번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다. 봉사하는 장사가 시장경제이다. 대한민국은 수출입국 모델로 성장했다. 지난 1961년부터 1964년까지 한때 수입대체산업화로 자폐적 경제의 길을 걸으려고 한 적이 있었으나 외환위기를 겪자 구매력이 있는 선진국을 향한 수출로 방향을 틀었다. 시장경제 원리에 입각해 큰 시장정책으로 세계에 봉사함으로써 성공한 것이다. 구매력이 있는 선진국 소비자들에 대한 봉사는 우리에게 굴종을 안겨준 게 아니라 번영을 가져다 줬다. 수출입국은 대한민국 모델로 불려지게 됐다. 중국이, 러시아가, 그리고 베트남이 대한민국 번영모델을 채택했고 그제서야 그들은 비로소 번영의 길을 걸을 수 있었음은 그동안의 역사가 잘 보여주고 있다. 북한은 그동안 의약품과 식량, 비료 등 막대한 원조를 받아왔지만 경제발전으로 수렴시키지 못했다. 그것은 수용자가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북한도 세계적으로 유용성이 입증된 대한민국 모델을 선택하는 게 옳다. 이를 위해 사적소유권 도입과 개방, 개혁까지 하게 되면, 햇볕정책도 더 이상 겉돌지 않게 될 것이고 외부의 도움에 힘입어 북한 스스로가 10년 내 3천달러 소득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이번 핵 위기 진정을 계기로 북한이 민족 번영의 길에 합류할 수 있길 기대한다.

노인의 자살

우리나라는 지난 1960년대 이후 급격한 산업화로 인해 인구의 도시집중과 핵가족화가 가속화되면서 부양의식의 변화는 전통사회에서 가정의 실권자였던 노인의 가부장적 지위를 약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소외계층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가정의 변화는 사회변화의 주요인을 제공하면서 윤리나 도덕뿐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사회 전반의 기본질서를 바꾸고 있다. 우리나라 노인들이 겪는 4가지 고민은 소외, 고독, 질병, 역할상실 등이라고 한다. 통계에 의하면 도시 노인들의 53%가 홀로 혹은 노부부가 단독세대로 살고 있고, 시골은 62% 이상이 노인세대를 이루고 생활한다고 한다. 우리 속담에 ‘이웃 4촌’이라는 말이 있듯이, 아무리 가까운 부모와 자식 간이라 하지만 멀리 살면 자연히 마음이 멀어질 수밖에 없다. 몸과 마음이 쇠약해진 노인들에게는 가족과 떨어져 사는 것도 힘겨운 일인데, 자식들이 무관심으로 대한다고 느낀다면 노인들에게는 절망이 아닐 수 없다. 경찰청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노인들이 매일 14명이 자살해 노인 자살률이 OECD 가입 국가 중에서 1위라고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동방예의지국’이요, ‘효도’의 나라라고 세계가 칭송하던 국가인데 세계 최고(?)의 노인 자살국이 됐다니 그저 씁쓸하기만 할 뿐이다. 오직 ‘잘 살아보자’는 일념으로 좌우를 살피지 못하고 돈을 좇아 살아온 결과가 결국 도덕과 윤리를 저버린 불효자식들이 범람하는 나라를 만들었단 말인가? 생명을 가진 존재는 금수(禽獸)를 막론하고 오래 살기를 원하는 게 자연법칙인데 오죽 했으면 스스로 생을 포기하겠는가? 필자는 자살하는 노인들을 향해 ‘사랑의 실패자’라고 감히 말한다. 자살 충동을 느끼는 대부분의 노인들은 가난하고 배고파서가 아니라 자식들의 무관심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식과 나의 ‘사랑의 고리’가 끊어졌다고 느끼면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하기 때문에 죽는 것이다. 차라리 자식이 없는 노인은 자살할 이유가 없다. 노인들의 메마른 가슴에도 사랑을 받고 싶고, 사랑하는 대상을 가슴에 두고 싶은 것인데, 나의 분신이라고 생각하고 평생을 사랑했던 자식의 마음이 나를 떠났다고 느낄 때, 이 세상에 살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자식에게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순간부터, 이 노인에게는 세상은 암흑이요, 절망이며, 살고 있는 게 저주스러울 뿐이다. 이런 절망의 노인들이 대한민국에서 매일 14명씩 나온다고 생각해보라. 이 세상에 사랑보다 흔한 말이 없다고 한다. 사랑이라는 말은 길거리에 넘쳐나고, 안방극장을 도배질하지만, 정작 이 나라를 잘 살게 만든 노인들이 사랑 때문에, 사랑의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세상의 자식들이여. 자식된 자는 어떤 이유에서건 부모를 ‘사랑의 실패자’로 만들 권리도 자격도 없다!

부동산 부부공동명의 절세 가능

지난해 부동산가격 폭등으로 부동산 양도소득세의 부담으로 인해 매매계약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부동산 양도소득세는 법이 정한 양도 자산을 1년 동안 합산, 양도소득세를 계산하므로 양도 자산이 많아지는 경우 세율이 높은 누진세율을 적용받게 된다. 그러므로 절세 방법을 알고 있으면 도움이 된다. 올해는 양도소득금액이 많고 내년에는 양도할 계획이 없다면 양도시기를 연말로 미뤄 12월에 계약하고 잔금은 내년으로 미루면 양도소득세율도 낮은 세율을 적용받는데다 기본공제도 받게 된다. 양도 자산의 가액이 커질수록 연기의 이익이 커진다. 매년 5월31일은 전국 모든 토지들에 대해 개별공시지가가 새로 고시된다. 매년 1월1일은 개정세법이 발효돼 새로운 방법에 따라 세액이 계산된다. 그러므로 토지 매매계약의 잔금 납부일자를 5월30일까지 완료하는 게 효과가 있고, 건물의 경우 12월31일 이내로 당기는 게 유리하다. 부동산을 가족 간 공동명의로 취득해 보유·임대했다 양도할 경우 보유세 및 양도소득세 등도 절세할 수 있다. 1세대1주택 양도하는 경우도 과세될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동거가족(배우자나 자녀 등) 소유 주택 때문에 비과세혜택을 못받는 경우가 있으며, 지분(공동명의) 소유한 주택도 주택수에 포함된다. 상가주택일 경우 주택이 상가보다 클 경우 1주택으로 본다. 무허가 주택은 양도하기 전 멸실하면 주택에서 제외된다. 서울·과천·분당·평촌·산본·일산·중동은 2년 거주 3년 보유를 충족해야 비과세된다. 위장전입은 힘들다. 지난 1월1일부터는 토지·건물의 양도소득세는 전부 실거래가로 산출돼 늘 매매계약서는 잘 보관해야 한다. 보유기간 중 필요경기 지출 영수증도 잘 보관해 차액에서 공제받을 수 있다. 양도소득세는 양도차액이 있을 경우에만 대상이기 때문에 미리 겁먹을 필요가 없다. 꼼꼼이 챙기면 절세할 수 있는 합법적인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세율은 1세대1주택은 9~36%, 2주택은 50%, 3주택 이상은 60%, 비사업용토지 60% 등이다.

알파맘(Alpha Mom)과 베타맘(Beta Mom)

최근 어느 일간지를 보니 요즘 미국에선 알파맘(Alpha Mom)과 베타맘(Beta Mom) 사이에 눈에 띄지 않는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알파맘은 부모가 주도권을 쥐고 ‘치맛바람 휘날리며’ 아이들을 다그치는 방식이고, 베타맘은 그와 정반대로 ‘흐르는 강물처럼’ 아이들을 자유롭게 키우는 스타일이다. 알파맘을 ‘알아서 키워주는’ 통제형 부모라고 한다면 베타맘은 ‘알아서 커라’는 방임형 부모라고 할 수 있겠다. 교육을 뜻하는 영어 단어에는 Pedagogy와 Education 등 두가지가 있는데 그 의미는 사뭇 다르다. Pedagogy는 ‘아이를 이끌어준다’는 뜻으로, 기성 세대(부모나 교사)가 주도권을 쥐고 미성숙 세대(자녀나 학생)를 이끌고 가는 적극적인 역할을 말한다. 이에 반해 Education은 ‘아이 내부에 있는 것을 밖으로 꺼내 키워준다’는 뜻으로, 자녀의 타고난 본성과 잠재능력이 최대한 실현되도록 도와주는 소극적인 역할을 시사한다. Pedagogy가 교사 중심, 교과 중심의 전통적인 방식이라면, 루소 이래로 교육의 또 다른 한 축을 맡고 있는 Education은 아이의 흥미와 필요를 존중하는 새로운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런 두 개의 세계, 아니 두 가지 상반된 역할 모델 중 어느 것이 옳고 바람직한가? 그런데 이 물음은 별 의미가 없다. 두 개념이 모두 교육이고, 따라서 교육 현장에선 두가지 모델이 모두 필요하기 때문이다. 미성숙한 세대를 올바른 길로 이끌자면 알파맘도 필요하고, 아이들의 개성과 흥미를 생각하자면 베타맘도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러니, 자녀의 특성에 따라 역할 모델을 다르게 선택하는 방법 밖에 없다. 물론 같은 아이라도 상황에 따라 두 가지 모델을 가려 사용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교육의 주체이자 대상인 인간은 복잡 미묘한 존재이고, 그래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개인에게든 사회나 국가에게든 교육은 참으로 어려운 과제임에 틀림없다. 홍 성 훈 여주대학 보육학과 교수

교육은 제2의 구국운동이다

세계는 무한경쟁시대로 진입한 지 이미 오래다. 미국이나 유럽은 물론 중국, 일본, 소련 등도 교육입국의 기치를 들고 자국 교육의 경쟁력 제고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방법이나 속도는 다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최대한의 자율성 보장을 통한 무한한 창의력과 독창성의 창출이라는 일관된 주제는 공통인 것 같다. 교육에 관한한 대한민국은 두번째 가라면 서러운 나라이다. 문맹률 거의 0%, 대학 진학률이 세계 최고인 나라가 아닌가. 지금 대한민국의 놀라운 발전은 뭐니뭐니 해도 교육 덕분이다. 자원도 없고 국토도 적으며 인구도 남한과 북한 합쳐 7천만명도 안되지 않은가. 오늘날 대한민국의 놀라운 성장을 교육 이외에 무엇으로 설명하겠는가. 그러면 태평성대인가. 걱정은 지금부터다. 21세기 세계 최강의 나라들이 엄청난 경쟁을 필사적으로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일본, 유렵 등 전통적인 선진국을 차치하고라도 중국, 인도, 러시아 등의 분발도 결코 간단해 보이지 않으니 어찌 안심하고 있을 수 있겠는가. 대통령께서 대학 총장들을 모아 놓고 일장 훈시를 하셨다고 한다. 대통령께서 하시는 말씀 가운데 이해되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지금이 어느 시기인가. 어느 선진국 대통령이 총장들 앞에서 유치원생 다루듯 지시하는지 알고 싶다. 교육계의 어른들이라고 할 수 있는 총장들이 이런 대접을 받고 있다는 게 걱정스러운 교육계의 현주소를 말해 주고 있다. 서글픈 교육의 현실을 보고 있는 일선 교육자들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다. 대학은 대학에게 돌려줘라, 교육은 교육자에게 맡겨라, 어느 세계 유명 대학이 교육부 간섭을 받는다는 말인가. 미국의 이른바 하버드·예일 등 아이비리그 대학들과 저명한 유럽 대학들, 동경대, 심지어 중국의 베이징·칭화대 등도 자율적 판단이 우선시 되고 있는 실정이 아닌가. 대통령이나 교육부의 의도와 목적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현장에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마치 무식해 용감한 것처럼 국민들에게 보여서는 안된다. 우리 모두 명심하자. 간섭과 통제로는 21세기 무한경쟁시대에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출산기피와 산부인과의 붕괴

출산기피와 산부인과의 붕괴는 최근 한국에서 일어나는 사회현상으로 이를 방치하면 미래의 국가 발전을 저해하고 사회의 혼란을 야기시킨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종족 보존의 본능을 가지고 있으므로 임신과 출산은 모든 부부들이 겪어야 하는 자연현상임에도 불구 출산 책임을 진 여성의 사회 진출이 많아지고 경제에 대한 책임의식도 높아져 출산기피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이는 선진국으로 갈수록 심화되고 있으며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또한 산부인과는 출산기피 현상으로 분만 자체가 줄어 분만실 등을 유지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정부의 일방적인 공공의료 확대 정책으로 의사들의 희생만 강요할 뿐 의료 분쟁에 대한 면책 및 수가 현실화 같은 구조적인 문제는 해결하지 못해 병원 경영악화는 심해지고 산부인과 폐업이 증가해 붕괴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의료잡지 메디게이트의 보고에 의하면 지난 한해동안 산부인과 의원 80곳이 사라졌으며, 일부 산부인과는 전문 과목 표시도 못하고 재개원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국 48개 시·군·구에서 새로 산부인과를 개원한 곳이 없었으며, 산부인과가 있지만 분만을 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실제 과천시, 완주군, 칠곡군 등 8곳에는 산부인과가 지역내 1~4곳까지 있지만 분만을 하지 않는다. 2004년 기준으로 산부인과를 표방하는 의원급 의료기관 1천873곳 중 49.1%인 919곳은 분만 실적이 한 건도 없었다. 이는 산부인과의 절반 가량이 분만을 하지 않는다는 방증이며 특히 분만 실적이 1년에 10건도 안되는 경우까지 포함하면 분만 하지 않는 비율은 55.7%까지 올라간다. 또한 산부인과 전공의(레지던트)의 수료 중도 포기율이 무려 16%가 넘는데 이는 과도한 업무량을 소화해야 하는 수련과정의 노력에도 불구 산부인과 특성상 의료사고 위험이 크다는 것과 의료사고 이후의 모든 책임 및 비용이 산부인과 의사에게 전가되는 불합리한 의료법 때문에 산부인과 전공을 기피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대한산부인과의사회는 실제로 일본과 같이 산부인과 의사 부족현상으로 지역의 경계선을 넘는 원정 출산이 국내에서도 나타나고 있으며, 산부인과를 둘러싼 문제들이 개선되지 않는 한 향후 10년 내에 산부인과 전문의 부족으로 큰 혼란이 야기되고 이는 출산과 연결된 모든 산업의 손실로 이어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출산은 미래의 국가 발전을 위해 반드시 지속되어야 하는 부분이다. 정부는 출산기피의 문제점과 산부인과 붕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해결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을 펼쳐야 할 것이다.

시청사 기습점거농성을 보면서

고양시가 청사를 기습 점거하는 농성자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이들은 막무가내로 시청사에 난입해 시장 면담을 요구하는가 하면 요구조건을 내세우며 난리를 피우고 있다. 지난 27일 오후 2시쯤 덕이도시개발지구 내 세입자들이 시장실 앞 복도를 기습점거 하는 사단이 일어났다. 특히 이들 농성자들은 집회신고도 하지 않은 채 시청사를 점거, 민원인들의 불편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왜냐하면 뒤늦게 시청 본관 앞문과 옆문 등을 일제히 봉쇄해 민원인들이 출입구를 찾지 못해 우왕좌왕 했기 때문이다. 민원인이 이들에게 불편을 호소라도 할라치면 집단적으로 욕을 먹는 사태도 가끔 발생, 시민들의 가슴을 철렁하게 하기도 한다. 이들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떼로 몰려들어 봉변을 당할까봐 피하는 웃지못할 촌극도 발생한다. 감히 경찰과 공무원들도 이들에게 말하기를 꺼려한다. 어찌보면 이들을 보호 하는것 같이 주위에서 맴돌며 시간만 죽이는 일도 허다하게 일어난다고 하면 기우일까. 이로인해 시청사를 찾는 민원인들이 겪는 불편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고양시민들은 말한다 공권력이 살아야 한다고. 선량한 시민들이 피해를 입어서는 안된다고 입에 핏대를 세우며 얘기한다. 불법적인 농성과 기습 점거는 경찰이 나서서 강력하게 해산을 종용하거나 해산시켜야 한다는 것이 선량한 시민들의 지배적인 생각이다. 기습점거한 시청사에 뒤늦게 공권력을 동원하고도 물리적인 충돌을 염려해 자진해산 하기를 바라는 경찰, 이를 멀거니 지켜보는 시공무원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선량한 시민들은 누구를 믿고 시청에 민원을 보러 와야 하는 지 정중히 묻고 싶다. 공권력의 상징인 경찰은 물리적인 충돌이 두려워 시민들에게 불편을 감수할 것을 요구해서는 안된다. 경찰을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이 들 수 있도록 좀더 적극적인 대처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래야 ‘시민과 함께, 시민을 위한 아름다운 고양’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사는 세상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모습은 성인용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이런 세상에서 요즘 아이들이 어른들의 잣대에 맞게 살려고 노력하면서 성인 천국에서 찌들어 가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안쓰럽기 그지없다. 아이들이 사는 세상을 잠깐 들여다보자. 길을 걸을 때 우리 아이들 키처럼 무릎을 구부려 낮추어 보라. 그러면 옆에 서 있는 건물들이 마치 달려들 것 같은 큰 공룡처럼 무섭게 느껴진다. 쌩쌩 지나가는 차가 내는 경적소리와 엔진 소리는 작고 앙증맞은 우리 애들 귀에는 호랑이처럼 으르렁 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야생 동물은 보고 듣는 것이 여느 때와 다르면 우선 도망갈 준비를 하거나 아예 냅다 뛰고 본다. 그래야지 잡아먹히질 않기 때문이다. 요즘 세상은 보고 듣는 것이 너무 많다. 이렇게 보고 듣는 것이 많아질수록 웬지 모를 두려움이 생겨나서 야생 동물처럼 나도 모르게 도망가고 싶게 된다. 컴퓨터와 텔레비전과 같은 시청각 매체는 뇌의 자극을 통해 일시적으로 몸의 지각을 잃어버리게 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 자극이 끝나고 나면 몸이 느끼는 불안과 공포가 더욱 증폭되어 나를 괴롭힌다. 지금 우리 아이들은 과다한 시청각 매체에 의해 정서적으로 불안해지고 이것으로 말미암은 사회적 일탈에 내몰리고 있는 것 같다. 예전에는 아이들의 놀이라는 게 고작 딱지치기, 고무줄놀이, 구슬치기, 팽이놀이 등이다. 대개 이런 놀이들은 직접 만지고 움직이면서 놀 수 있고, 어른들과 상관없이 아이들만의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사는 환경이 늘 보아왔던 익숙한 들풀과 집이고 늘 들어왔던 바람소리, 새소리, 물소리와 같이 일상의 밋밋한 맛을 주는, 어찌 보면 다정한 것들이다. 예전과 같이 몸으로 부대끼며 살 때는 고달프긴 해도 훈훈한 느낌이 있었지만 보고 듣는 게 많은 요즘은 자꾸만 불안해 진다. 왜 그럴까? 그것은 아마도 우리 몸으로 느끼는 촉각은 몸에 접촉되는 즉시 사라지는 과거형이고 보고 듣는 시청각은 아직은 내 몸에 다가오지 않는 미래형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나온 과거는 좋건 싫건 이미 경험한 것이라 쉽게 잊어버리기도 하며 교훈으로 떠올릴 수도 있지만 다가올 미래는 미지의 세상이라서 예측하며 불안하게 그려나가기만 하므로 어른처럼 이성적이지 않으면 참으로 견디기 힘들다. 철학자 화이트헤드가 ‘이성은 새로움을 강조하는 기관’이라고 말했듯이 새로움에 불안하지 않고 적응하려면 이성의 발달이 반드시 선행해야 한다. 하지만 이성의 발달이 미숙한 우리 아이들은 컴퓨터, 텔레비전, 게임기를 보고 들으면서 불안한 세상을 조심조심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쩐의 전쟁

‘쩐의 전쟁’ 모 방송국에서 사채와 관련된 사람들의 삶을 소재로 한 드라마 제목이다. 주인공의 부모님이 사채를 쓰다가 결국 빚을 감당하지 못해 자살을 하고 그 남은 빚을 주인공이 갚아가며 사채세계의 냉정한 현실에 눈을 뜨고 오히려 자신이 사채업에 뛰어들어 금전적으로 성공하고자 하는 상황을 그린 내용이다. 최근 이 드라마 덕분인지 몰라도 일반 국민들의 사채에 관한 관심이 높아진 듯하다. 그동안 사채를 얻어 쓰던 서민들은 높은 이율에, 위법한 추심행위에 몸과 마음이 고달팠으리라 생각되어 사채에 관한 법률적 상식을 소개하고자 한다. 사채업의 법적명칭은 대부업이고, 그러한 대부업은 ‘대부업의 등록 및 금융이용자보호에 관한 법률’(이하 대부업법)의 규제를 받는다. 동 법률에서 대부업에 관한 여러 가지를 규정하고 있지만 가장 눈여겨 보아 두어야 할 부분은 불법적 채권추심 행위를 금지한 규정과 이자율을 제한한 규정이다. 즉 대부업 등록여부를 떠나 채권추심을 위하여 폭행이나 협박을 금하는 것은 물론이고 위력이나 위계를 사용해서는 안 되고 정당한 이유 없이 관계인을 방문하여 공포심과 불안감을 유발하여 사생활이나 업무의 평온을 해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또 동법에서 정한 법정 최고이자율(현행 연 66%)을 초과할 수 없도록 규정하였는바, 이를 위반할 경우 5년 내지 3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해질 수 있다. 또한 오는 30일부터는 무등록 대부업자나 개인의 사채를 이용할 경우 연 30%를 초과하는 이자 약정은 무효로 규정한 이자제한법이 적용되어 이를 초과하는 이자를 줬을 때는 초과하는 금액부분은 원금을 상환한 것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되는데 이는 제도금융권이나 대부업법에 의해 등록된 대부업자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최근 정부에서 서민을 위한 은행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이 것이 대선을 앞 둔 생색내기 정책이 아니길 바라며 우리나라에도 무늬만 서민은행이 아닌 방글라데시의 그라민뱅크처럼 서민들의 자립과 회생을 도울 수 있는 실제적 발판이 마련되길 기대해 본다.

“자유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얼마 전 발표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서울 시내 초등학생의 38%가 ‘6·25는 조선시대에 일어난 전쟁’으로 알고 있다고 한다. 기막힌 일이다. 57주년을 맞이한 6·25는 이제 젊은 세대들에게는 잊혀진 기억이 됐다. 남의 나라 역사와 언어를 가르치데만 혈안이 됐던 우리는 우리의 소중한 역사를 후손들에게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는 잘못을 범했다. 해마다 6월이 되면 ‘호국보훈의 달’이라는 구호만 요란했지, 정작 이들의 소중한 뜻과 정신을 기리는 일은 소홀히 하다 보니 1년에 단 하루 뿐인 현충일이 그저 ‘노는 날’이 돼버린 지 오래다. 그래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현충일에 조기를 게양하지 않는 집이 소수에 불과했는데 지금은 아파트 단지 안에서도 조기를 게양한 집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가 됐다. 미국 수도 워싱턴 시내 한복판에 있는 국립공원에는 한국참전기념비가 건립돼 있다. 그 기념비에는 ‘자유는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니다(Freedom is not free)’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그렇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자유는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다. 이 땅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피를 흘렸던 참전용사들이 있었고, 잔혹한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였던 애국지사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목숨 바쳐 희생한 이들을 위한 보답은 무엇이었는가. 아직도 한국전 당시 전사한 13만여명의 호국용사들은 시신도 찾지 못한 상태다. 미국은 유해확인센터(CILHI)까지 설치해 가면서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당시 숨진 미군의 유해를 끈질기게 찾고 있다는데 우리의 경우는 어떠한가. 한국전쟁을 비롯 베트남전까지 합쳐 전사자 유해가 엄청난데도 한국은 그간 이들 희생자의 유해 확인과 송환 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방안을 마련하지 않고 소극적인 자세로 임하고 있다. 나라가 목숨 바쳐 충성한 이들에게 보상은 커녕 시신조차 수습해 주지 않는다면 과연 누가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칠 수 있겠는가. 더욱이 국가유공자나 보훈가족들에 대한 처우는 부실하기 짝이 없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독립유공자 후손 5천여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표본조사에 따르면 60%가 직업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국에 몸 바쳐 희생당한 애국선열의 후손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가난의 대물림으로 생계와의 전쟁에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순국선열들의 희생의 대가로 우리가 자유와 번영을 누리고 있다면, 이제는 이들의 희생에 보답해야 한다. 6월을 보내며, 과연 우리들 각자는 무엇으로 이들의 희생에 보답해야 할 지 다시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장정은 경기도의회 부의장

얻어맞는 교권 짓눌리는 학생인권

최근 학생의 머리를 묶도록 지도하던 교사가 학생한테 얻어맞았다는 언론보도가 있었다. 교사이기도 했던 박재동 화백은 일탈학생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며 그들과 소통했다고 한다. 박재동 화백과 비슷한 가치관을 가진 모 교사는 최근 모든 수업시간에 종일 자는 학생을 깨우려다 귀에 담지 못할 욕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학생을 지도하던 교사는 학부모로부터 뺨을 맞고 돈을 요구받기도 했다. 담배를 피우는 학생을 지도하다가 학생에게 얻어맞은 교사는 학부모 협박으로 우울증에 걸린 뒤 끝내 학교를 옮겼다. 교권수호를 외치던 교육부나 교육청은 어디로 갔나? 교권이 침해되어도 대부분의 학교는 ‘쉬쉬하며’ 은폐하고 침묵하기에 바쁘고 교사에게는 ‘확대되면 좋을 것이 없다’며 학부모의 요구를 받아들일 것을 강요한다. 합리적인 상담이나 갈등해결은 실종되고 폭력적 행동이 늘어나도 이를 제재할 수단이나 보호 장치가 없는 학교 현장에서, 선생님들은 오늘도 추락하는 교권 앞에 절망한다. 교문 앞에서 멈추는 것은 학생 인권이라고 큰 차이가 있을까. 일부에서는 학교장의 말 한마디가 두발단속의 기준이고 등교시간이 된다. 학생의 건강권을 위해 도교육청과 교원노조가 어렵게 맺은 0교시폐지라는 단체협약도 무시되기 일쑤다. 좁은 교실에 40명 이상이 하루 15시간을 앉은 채 정규수업에 강제 자율학습까지 하고 휴무 토요일과 일요일에도 등교한다. 이것이 ‘1명의 천재가 2만명을 먹여 살린다’거나 ‘글로벌 인재’를 목표로 교육한다는 대한민국 학교의 우울한 현장이다. 마냥 학습시간을 늘리기만 하는 것이 효율적인지, 사고력을 키울 수 있는 교육환경이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마저도 봉쇄당한 현실에서 아이들은 입을 다물고 만다. 지난해 일본의 교원노조를 방문했을 때 교사들이 하는 가장 많은 질문은 “학생들의 탈학교 어떻게 해야 하는가”였다. 일본은 교권을 지키면서 아이들의 탈학교와 등교거부에 대한 대책이 사회적 관심사가 되었다. 학교의 주인인 학생과 교사가 배려 받거나 존중받지 못한 채 갈등의 현장에 방치되는 일이 계속된다면 이는 우리 모두의 불행이다. 타율 대신에 합리적이고 민주적이며 자율적인 의사결정을 보장하는 학교, 폭력과 불신 대신 배려와 신뢰로 소통하여 교권과 학생권이 지켜질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와 구체적인 법적 장치가 적극 모색되어야 한다. /유정희 전교조 경기지부장

불행한 개구리들의 기준

엄마 개구리가 제일 큰 줄만 알고 있던 아기 개구리들이 연못 밖으로 놀러 나갔다가 황소를 본다. 개구리들은 엄마개구리에게 그 얘기를 하고, 엄마개구리는 자존심이 상해서 배를 한껏 부풀려 크기를 비교하게 한다. 그래도 그보다 더 크다고 하니 엄마개구리는 계속해서 배를 부풀리다가 배가 터져 죽고 만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개구리 이야기다. 자기들보다 더 큰 동물들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는 우물 안 개구리들의 모습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물 밖을 경험하고 보다 큰 생각을 할 필요가 있다고들 한다. 그런데 우물 밖 세상에 대한 경험과 인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기준이다. 아기 개구리들은 우물 밖 세상인 황소의 존재를 경험했음에도 불행한 결말을 맞았다. 삶의 기준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큰 것’이 최고라는 삶의 기준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엄마가 작아보였고, 엄마 개구리는 자식들에게 자존심을 내세우다 그만 자신의 생명을 잃어버린 것이다. 소가 큰 몸집을 자랑한다고 개구리들과 무슨 상관이 있었을까? 가치로 내세우는 기준이 잘못되었던 것이다. 우리도 우리의 삶에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가치기준을 적용하며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기준은 키도 커야 하고, 몸매도 날씬해야 하고, 집도 커야 하고, 자동차도 커야 한다. 동양인이면서 서양인의 얼굴형을 선호하며 성형수술을 한다. 이웃집 애가 미술학원을 다니니 우리애도 다녀야 하고, 해외 어학연수를 가니 그것도 가야 할 것 같다. 경제적 상황, 개인의 능력, 취미, 체질 등은 아랑곳없다. 서로 내 것을 찾고 키우는 일도 벅찬데 따라갈 것만 많다. 우리 자신을 남의 기준에 짜 맞추려 하다 보니 삶이 행복할 리가 없다. 교육제도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기준은 늘 소위 경제 선진국의 제도다. 우리 실정에 대한 고려보다 우리의 상황을 그들의 제도에 맞추려 하는 것이다. 개개인의 개성과 능력은 평준화에 희생되어야 하고, 개개인의 취미와 적성은 성적에 양보해야 한다. 그러니 개인도 기관도 특성이 없다. 그러다보니 교육은 개인의 자존감을 살리기보다 열등감만 키우고 있다. 세계화시대에 세계의 기준을 따라가야 한다고? 그것이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것이라면? 내 것을 세계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라도 우리 자신의 자존감과 행복을 키워주는 기준이 무엇이어야 하고, 어디에서 나와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이광용 수원여대 산학협력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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