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15일이 되면 신문과 방송에서는 일본 정치인들의 헛소리와 뻔뻔한 군국주의 망령 부활에 대해 분노하며 기획기사와 방송 등을 쏟아낸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해방 이후 우리 안에 있는 그대로 남아있고 다시 부활하고 있는 일제 강점기의 흔적들에 대해 단호히 결별할 의지와 실천이 있었는가를 되짚어 보고 싶다.
“누가 감히 용서를 말할 수 있겠는가. 내일을 이야기하는 것은 증오가 아니라, 기억을 기초로 하는 정의다.” 프랑스에서 나치 협력자 처벌을 요구하며 썼던 알베르 카뮈의 사설은 한국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나치 협력자 1만명을 처단하고 나치에 협력한 언론 900여곳 중 694곳을 폐간하고, “언론인은 도덕의 상징”이라며 과감히 나치협력자들을 처단했던 드골대통령. 그로 인해 프랑스는 치욕적인 나치점령의 아픔을 딛고 진정한 민주주의의 자유와 정의를 위한 토대를 닦은 뒤 나라를 다시 세울 수 있었다.
최근 정치인들 중 일부가 5·16 군사정변을 구국의 혁명이라고 하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5·18사태라고 부르는 것을 보며 역사교사로서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학생을 가르치는 역사교과서에 5·16은 군사정변으로, 5·18은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정의돼 있는데도 구시대 정권의 입맛대로 불렀던 명칭을 그대로 쓰는 안이함은 역사의 정의와 준엄함 등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학교라는 명칭을 초등학교로 고치는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국민학교가 일제강점기 ‘황국신민학교’의 줄임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방치하고, 황국신민의 서사를 닮은 국민교육헌장을 줄줄이 외우게 했다. 유신시절 대통령은 일제강점기에 관동군 중위도 지냈었다. 우리의 독립을 위해 싸우던 독립군에 맞서 총을 겨누던 관동군의 중위가 대통령이 가능했던 것은 5·16군사정변이 있었기 때문이다. 4·19혁명을 의거로 낮추고 5·16군사정변을 혁명이라고 유신시절은 가르쳤다. 광주에 불순분자가 내란을 선동한다며 모든 언론들이 침묵하고 사실을 왜곡시킬 때 80년 5·18은 진압자의 명칭으로 광주사태였다. 그러나 민주화를 위해 죽은 자들의 넋과 광주를 잊지 말자는 산자들의 기억과 국민들의 정의로 5·18은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불려진다.
역사는 반복되는 게 아니라 한걸음, 한걸음 나아간다고 믿는다. 다시 맞는 광복절에 우리 민족의 진정한 해방과 정의를 위해 우리 주변의 일제강점기 잔재를 극복하고 분단의 아픔이 가져다 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실천이 하나씩 매듭을 풀기를 기원해본다.
유 정 희 전교조 경기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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