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면서] 봄 날이 지고 있다

짧디 짧은 봄. 봄이 지고 있다. 새싹이 돋아나고 꽃이 피고, 아마도 천지만물을 창조한 신이 있다면, 그 신은 자신이 만든 그러한 정경을 흘깃 보고 지나치나 보다. 그래서 봄을 그냥 봄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나이 얘기는 하고 싶지 않은 테마 중 하나지만 나이 든다는 것이 그런 것 같다. 세월이 빠르다는 것, 흐르는 시간이 아쉽다는 것. 그래서 쓸쓸하고 공허하다는 것. 팔순을 여러 해 전에 넘긴 노 화백 한 분은 그 심경의 수위가 나보다 한 수 더 높으셨던가 보다. 마나님이 친구분들과 꽃놀이를 떠나고 난 4월 어느 날 문득 자신도 꽃구경을 하고 싶더란다. 그날 아침부터 비가 제법 줄기차게 내리고 있었는데, 꽃을 보러 가고 싶다는 마음이 못견디게 사무쳐서 우산 한 자루를 들고 경기도 ○○에서 거의 두 시간 남짓 걸리는 윤중제까지 차를 바꿔 타며 달려 가셨단다. 아마도 아직은 벚꽃이 조금은 남아 있을 것이고, 빗속에 지는 꽃잎을 바라보는 것도 운치가 있으리라는 지극히 예술적인 감상을 가슴에 담은 채로. 그것이 얼마나 허망한 바람이었던지, 겨우 여의도에 다다라 윤중제에 가보니 빗 결에 흩날리는 꽃잎은 커녕 바람까지 보태 비바람만 세차게 우산을 휘젖더란다. 빨리 지나가서 더 안타까운 봄 가슴으로 그 비바람이 다 쏟아져 들어오는 것 같았다고 했다. 갑자기 롤러스케이트라도 탄 듯 시간이 가차없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고, 벚꽃, 그것 하나 못 본 것이 새삼 가슴을 에이더란다. 내년 벚꽃을 볼 수 있을지 기약도 없는데 올 봄 벚꽃을 놓치고 말다니, 황혼 녘 마지막 열차에 정든 이를 떠나 보내기라도 한 것처럼 쓸쓸하고 서글프더라고 했다. 노 화백은 말끝에 나직한 한숨까지 내쉬어서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지 가슴이 아렸었다. 그랬다. 노 화백의 넋두리에 가까운 심경 고백 앞에 나는 지는 봄의 아쉬움, 나이를 먹을수록 세월이 빨라진다는 감상 따위를 차마 털어 놓을 수가 없었다. 노 화백은 마나님이 안 계신 동안, 문득 혼자 있다는 적막감 때문에 입맛도 사라지고, 잠도 오지 않고, 봄은 정말 잔인한 계절이라고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봄은 잔인한 계절이라는 싯귀가 인생 말년에 뒤늦게 이해가 되더라고 했다. 봄의 서글픔, 창작의 에너지로 그러고 보니 소위 시인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시를 언제 썼던지 기억조차 아물하다. 언론인으로 평생 삭막한 얘기만 쓰다 보니 감정이 매말라져서 시를 쓸 수 없게 된 것이다. 물론 이 말은 핑계에 불과 할지 모른다. 시를 써야지. 내 경우, 시는 불행의 감정들, 이를테면 버려진 것 처럼 외롭다던지, 서글프다던지, 쓸쓸하다던지, 하여튼 행복과는 먼 감정 속에서 잉태됐었다. 그런데 오랜 시간 동안 나는 행복도 불행도 느끼지 못하는 감정치가 되어 살아온 것 같다. 다행이랄까. 이 봄, 새삼 세월이 나를 몰고 달린다는 쫓기는 초조함이 나를 불행하게 하고 있다. 지는 꽃잎이, 피는 꽃송이가 그리고 푸르러 가는 나뭇잎들이 초침처럼 빠르게 시간을 재촉하고 있다. 아쉽다. 아련한 슬픔 같은 것이 가슴에 괴기 시작한다. 시를 써야지. 노화백이 전화를 했다. 평생 보고 이번 봄에 못 본 벚꽃을 화면 가득 그리고 있노라고. 떠나는 봄을 유예시키는 편법을 쓰고 있노라고. 신효섭 시인

[아침을 열면서] 논문 표절과 연구윤리

그동안 대학이나 학계 안에 국한되었던 논문 표절과 학위 문제가 최근 세상 밖으로 터져 나오면서 갑자기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다. 논문의 표절이나 연구윤리 문제가 이처럼 커다란 사회적 이슈가 된 배경은 그것이 본래의 영역인 대학이나 학계를 벗어나 정치나 경제 논리와 뒤엉키면서 복잡한 양상으로 변질됐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동안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황우석 박사의 사례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1999년 복제 암송아지 진이를 탄생시키면서 동물복제 연구의 세계적인 인물로 주목받기 시작한 황우석 박사가 5년 뒤인 2004년 2월 미국 사이언스(Science)지 인터넷 속보에서 세계 최초로 사람의 난자를 이용해 체세포를 복제하고, 이로부터 배아 줄기세포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보도하면서 난치병 세포치료의 길을 열었다는 평가와 함께 인간복제의 윤리적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 후 이를 둘러싼 논쟁은 2년 가까이 학계와 대학은 물론 국내외 언론, 정부 기관으로까지 확산되면서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그런 가운데 황우석 교수는 2006년 1월 기자회견을 갖고 논문 조작, 연구원의 난자제공 및 금전제공에 대해 모두 사과하였으나 줄기세포를 바꿔치기 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그 해 5월 검찰은 황 박사 등 6명에 대해 환자맞춤형 줄기세포 실용화 가능성을 과장해 농협과 SK로부터 20억 원의 연구비를 받아내고 정부지원 연구비 등을 빼돌린 혐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 업무상 횡령)와 난자 불법매매 혐의(생명윤리법 위반)로 불구속 기소하였고, 3년 후인 2009년 10월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의 선고가 내려졌다. 다만 서울대학교 총장을 상대로 한 황 박사 측의 파면처분취소 청구소송에 대하여 서울 고법은 2011년 11월 파면은 비례원칙을 위반했거나 재량권을 벗어났다며 1심을 깨고 원고승소 판결을 내렸다. 표절,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행위 위의 황우석 교수의 경우와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논문 표절, 학위취소 문제는 완전히 동일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줄기세포 바꿔치기를 통한 논문의 의도적 조작과 논문 베끼기, 생명윤리법 위반과 가짜 논문으로 취득한 학위를 정치적 목적에 이용한 파렴치한 행위는 결국 인간의 양심인 연구윤리의 문제로 귀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의 학문 분야는 과거와 달리 다양하고 복잡한 모습으로 분화하였지만 분명한 것은 모든 학문연구의 결과는 논문이며, 논문은 자신의 연구과정과 결과 일체를 자신의 책임 하에 세상에 공표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논문 속에는 새로운 원리나 주장은 물론 선행 연구에 대한 견해와 비판이 분명하게 드러나야만 한다. 이를 위해 연구자는 국내외 관련 연구들을 빠짐없이 찾아 읽고, 분석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타인의 연구에 대한 언급이나 인용은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반드시 그 전거를 밝혀야 한다. 만일의 경우 타인의 논문을 인용한 사실을 밝히지 않고 위장, 은폐한다면 그것은 남의 물건을 훔치는 절도행위나 마찬가지이므로 당연히 형사적 처벌을 받아야 한다. 대학, 연구윤리 교과목 강화해야 우리 학계의 컴퓨터를 이용한 논문 작성의 역사는 20여 년에 불과하다. 1980년대 이전에는 원고지에 직접 펜으로 글자를 써야했기 때문에 표절과 같은 사례는 드물었다. 하지만 요즘은 누구나 쉽게 원하는 자료와 논문을 가져다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주저없이 남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속이는 행위도 늘어나고 있다. 연구윤리의 강조와 제고를 위한 방안의 하나로 대학과 대학원의 연구윤리 관련 교과목을 개편, 확대하여 철저한 교육과 훈련이 이루어지기를 강력히 제안한다. 차제에 남의 논문이나 연구를 의도적으로 조작하거나 불법, 편법으로 날조한 행위는 절대로 용인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일깨워주어야 할 것이다. 박옥걸 아주대 명예교수

[아침을 열면서] 어른의 아버지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면 내 마음은 뛰논다. 나 어려서 그러했고 어른이 된 지금도 그러하니, 나 늙어서도 그러 하리다.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바라건대, 내 생애의 하루하루를 그렇게 경건한 마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이 시(詩)는 18세기 영국의 계관시인 윌리암 워즈워드의 무지개 라는 시이다. 풋풋한 추억이 있는 나의 어린 시절과 우리들 청소년기를 떠오르게 하는 참 좋은 시다.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 라는 글귀는 어린이는 어른의 거울이라는 또 다른 명언을 떠올리게 한다. 어린이는 문명과 언어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몸과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리라. 모든 관습과 편견에서 자유로운 어린이의 상상력은 어른에게는 부족한 것이며 배울만한 것이기 때문이리라. 자연 그 자체인 어린이들로부터 이미 세상에 물들어버린 어른들이 깨닫고 배우라는 뜻이리라. 어린이들은 모두가 예술가이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예술성을 잃지 않고 성장하느냐에 있다 라고 피카소는 말했다. 그러나 우리의 교육이 어디 그런가? 우리 어린이들의 타고난 예술성과 창의성을 결국은 잃어버리게 하는 경쟁교육이 아니던가. 우리 어린이들은 행복한가? 매년 방정환 재단은 초등학생을 포함한 청소년 5천여명을 대상으로 행복지수를 조사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어린이, 청소년의 삶의 만족도는 3년 연속(2009-2011) OECD 국가 중 꼴찌다. 2010년 조사에 따르면 삶에 만족한다는 대답은 겨우 50%를 넘어섰고, 이는 OECD 22개국 중 가장 낮은 수치였다. 학습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아이들 많은 전문가들은 학습 스트레스를 주요 원인으로 꼽는다. 과도한 학습시간과 입시 경쟁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아이로부터 행복할 자유를 빼앗는다는 것이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아이를 양육하는 부모들 역시 행복하지 않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공부 열심히 해라. 왜요? 좋은 대학 가야지. 좋은 대학 가면 뭐가 좋은데요? 좋은 직장 얻어서 돈 많이 벌어야지. 돈 많이 벌면 좋은가요? 그럼 물론이지. 돈이 최고란다. 공부=돈 이 되어 가는 세상은 어른들이 만들어가는 지도 모른다. 공부하는 이유가 배움에서 오는 순수한 즐거움, 잠재력의 발견 자아 실현 등이 아니라 사회적 성공을 위한 발판이어야 한다는 것을 과연 아이들이 공감할 수 있을까? 행복의 의미를 잘 모르는 어른들이 앞장서서 교육의 본질을 왜곡시키고, 결국 학교의 의미를 퇴색시켜버린 건 아닐까? 행복한 꿈 키워나갈 학교 만들자 학생, 부모, 교사 모두가 학교의 위기를 말하지만, 그 위기를 어디서부터 타계해야 할지 선뜻 답을 제시할 수 있는 쪽은 없다. 학생-부모-교사(학교)로 이루어진 트라이앵글. 한 쪽만을 탓하다간 해결점을 찾기는 커녕 제자리걸음만 할 지도 모른다. 가장 이상적인 그림은 학교(교사)가 공교육의 주체가 되고, 가정(부모)은 공교육을 떠받치는 든든한 토대가 되는 것이다. 올바른 토양 속에 아이가 학교와 부모를 신뢰하고 더불어 자신의 꿈을 키워 나간다면, 학교의 위기는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행복한 꿈을 키워 나갈 수 있는 학교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목표다. 어린이에게는 마음껏 놀고 공부할 수 있는 시설과 환경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어린이는 일이 몸과 마음에 짐이 되지 않아야 한다. 어린이 날을 맞이하며 다시금 어린이 헌장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는 것은 어린이 교육에 대한 어른들의 성찰이 필요한 이유이다. 어린이가 행복해야 어른도 행복하다. 어린이가 행복해야 우리 모두의 미래도 행복하다. 그러기에 어린이 날은 하루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일년 365일 모두여야 하지 어디 하루만으로 되겠는가? 이청연 인천광역시 자원봉사센터 회장

[아침을열면서] 행복감이 낮은 이유는?

언젠가 공무로 중국에 간 일이 있다. 일반적으로 외국에 나가면 국내에 많이 알려진 관광지나 도시를 방문하기 마련이었지만 그 땐 몇몇 중국 시골, 농촌마을을 둘러볼 기회를 갖게 되었다. 마을 대부분은 우리나라 60년대 모습과 흡사해서인지 정겨웠다. 특히 마을마다 몰려다니는 초등학생(중국에선 소학교)들을 볼 때마다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라 추억에 잠기기도 했다. 학교를 오가며 삼삼오오 장난치면서 깔깔거리는 모습, 옷은 다소 남루하지만 해맑은 표정들, 외국인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힐끔힐끔 쳐다보면서도 도망가듯이 달려가는 모습, 사탕을 주면 냉큼 받기보다는 먼저 어색해하며 경계하는 모습, 그래도 재차 권하며 건네주면 수줍게 받고 고맙다는 인사는커녕 냅다 줄행랑치는 모습, 그렇지만 저 멀리 가서는 친구들에게 보여주며 자랑하는 모습. 이 모든 게 그리운 나의 어린 시절 모습들이기도 하다.그러면서 나는 지금 진정 행복한가?에 대해 자문해 보았다.작년에 한 글로벌 리서치에서 24개국 국민을 상대로 모든 걸 고려할 때 당신은 행복하다고 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으로 조사한 적이 있었다. 그 결과, 꼴찌는 헝가리이고 그 다음은 한국이었다 한다. 행복하다고 한 한국인은 7%이고 경제위기로 참담한 상황에 놓여 있는 헝가리는 6%이었다니 내용으론 꼴찌나 다름없다. 반면 가장 행복한 국민이 많은 나라는 51%로 인도네시아이었다 한다. 남과 더불어 나눌 때 행복하다한국의 작년 구매력 평가기준 1인당 소득은 3만2천달러로 5천달러에도 못 미치는 인도네시아에 비해 7배나 풍요롭게 잘 산다. 반면 인도네시아는 한국보다 7배나 더 높게 행복감을 느끼고 살고 있다 하니 예상 밖의 결과가 아닐 수 없다.반세기 전 한국의 소득수준은 아프리카 짐바브웨, 가나의 절반이었지만 지금은 32배이다. 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세계 25위이다. 하지만 우리는 잘살게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왜 행복해지지 않다고 느끼고 있을까? 우리는 잘 살아 보겠다는 목표를 향해 앞만 보고 뛰기만 했다. 저마다 행복하기 위한 수단이 부, 명예라 생각하고 평생 노력하여 마침내 그 부와 명예를 얻게 되었지만 결국 자신이 행복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오로지 부자가 되려는 열망과 경쟁만 성행하는 사회는 행복지수가 높을 수가 없다. 사회가 안정되고 그 구성원이 행복하려면 성취감과 행복을 느낄 일들을 가정, 사회, 국가가 다 함께 어우러져 만들어 가야 한다. 행복의 조건으로 중요하다고 여겨 온 물질들을 많이 가졌지만 우리는 그 도구를 취하는 데만 급급하여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여야 행복한지를 배우지도 보지도 못하고 자라왔기에 행복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사회지도층, 나눔의 모범 보여야행복은 많은 것을 혼자 가지는 소유의 욕구를 해결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눌 때 행복한 것이다. 독점에서 비롯되는 심리적 불안이나 오만보다는 공유함의 행복과 나눔의 축복에서 오는 여유로움을 느끼지 못했기에 우리는 행복감을 기대만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이제부터라도 정치인, 경제인, 각종 사회지도자들은 더불어 가는 삶, 나누는 삶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공동체의 삶에 동참하며, 공공의 이익과 선을 공유하게 해야 한다. 특히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보여주고자 맹목적이거나 한 때 인기에 영합하여 소탐대실(小貪大失)하는 정책들을 철저히 지양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행복을 공유해야 하는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당연히 누구의 행복을 빼앗아 어느 특정인에게 나누어 주는 것은 결코 행복감을 높여 주는 방법은 아닐 것이다.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해야 새로운 행복을 만들어 내고 잃어버린 행복을 찾아주는지에 심혈을 기울어야 할 것이다.그 당시 중국의 시골마을, 사람들의 그 정겨운 모습을 회상하면서, 행복한 사회를 만들고 후손들이 전통을 배우고 익히며 계승할 수 있도록 도모해주는 것이 지금 기성세대의 의무라 생각해 본다.김정행 용인대 총장

[아침을 열면서] 매화 향으로 세상 씻기

매화등컬, 그것도 아주 오래 묵어 수피(樹皮)가 거칠어진 매화등컬 같았다. 팔순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며, 지인 몇이 조촐하게 저녁이나 먹자는 전화를 받고 나간 자리에서 본, 그의 모습이었다. 사람이 그렇게 갑자기 시들어 버릴 수도 있는 것인지. 그는 약간 희미해져 있었다.이상하기도 하지. 불과 얼마 전 모임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그는 진회색 공단 넥타이에 같은 색의 베레모를 쓰고 자주색 재킷을 걸친 멋진 노신사였는데. 아들에게 사업을 물리고 난 다음 좋아하는 음악을 실컷 즐기겠다더니 영 풀기 없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인사를 나누며 내가 늙은 매화등컬 같다고 했더니, 그가 일순 눈을 반짝인다.최근에 들은 인사말 중 그중 맘에 든다는 것이다. 식사를 하며 나눈 대화는 매화가 주제가 됐다. 매화에 관한한 그는 어느 식물학자보다 뛰어나다. 매화의 종류며 생육조건, 군락지 개화 시기 등을 훤하게 꿰고 있다. 이맘 때 쯤이면 섬진강변 매화는 만개 시기를 지나 꽃잎을 흩날리고 있을거라고 했다. 구례 화엄사, 장성 백양사, 강릉 오죽헌, 순천 선암사가 손꼽히는 매화 군락지라고 했다. 수령 350년에서 600년된 매화도 있다는 것이다. 맑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매화그는 또 매화를 치는 솜씨도 뛰어났는데, 어느 해에는 자신의 생일에 초대된 손님들에게 매화 그림 한폭씩을 선물로 주기도 했다. 매화를 그리는데는 대략 다섯가지 요령이 있다고 한다. 첫째는 늙은 가지가 오랜 풍상을 겪은듯 그려야 하고, 둘째는 줄기가 가는 것과 굵은 것이 뒤틀려 괴이한 모습이 돼야 하며, 셋째는 가지가 말쑥하닌 빼어난 모습으로 그려야 하고, 넷째는 가지 끝 부분이 강건하며 필체가 명확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섯째는 꽃 모양이 기이하고 아리따운 모습이 돼야 한다고 했다.그는 자신을 늙은 매화등컬 같다고 한 내 치사가 더없이 반가운 이유는 매화는 늙어 비틀어진 고목이 더 고졸하고 품격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구십까지 풍류를 즐기며 한량으로 사셨던 우리 할아버지는 사랑채 앞 매화가 꽃망울을 벙글기 시작하면 아예 방문을 열어놓고 계셨다. 그것도 달밤에 즐기는 매화 암향(暗香)의 운치가 그만이라며 한밤중에도 사랑마루에 나와 앉아 계시곤 했다. 한겨울 모진 추위를 겪고 난 꽃이 봄을 연다고 겨우 보름 남짓 세상에 얼굴을 내미는데, 그 꽃을 혼자서 시들게 하면 너무 삭막한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혼탁한 세상, 매화 향으로 씻고 싶다매화는 이름이 여럿이여, 일찍 핀다고 해서 조매(早梅) 겨울에도 핀다고 해서 동매(冬梅), 눈 속에서 핀다고 설중매(雪中梅), 봄기운에 꽃망울을 연다고 해서 춘매(春梅), 봄기운을 알린다고 일지춘(一枝春) 혹은 청객(淸客), 맑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가졌다고 해서 빙기옥골(氷肌玉骨)이라고 하지.꽃이 질 때 쯤이면 할아버지는 꽃잎을 거두어서 차로 드셨다. 그리고 당신 얼굴에 거뭇거뭇하게 핀 검버섯을 고목에 핀 매화라고 농을 하기도 하셨다.모임이 끝날 무렵 백운산 자락을 감도는 섬진강 나루터로 지는 매화를 보러 가자고 했다. 매화꽃 피는 곳마다 휘파람 새가 따라다닌 다는데, 나도 휘파람새처럼 매화꽃을 따라나서고 싶다.매화 향으로 선거 광풍이 휩쓸고 간 혼탁한 세상을 씻고 싶다.신효섭 시인

[아침을 열면서] 선거의 역사와 선거권

선거는 선거권을 가진 사람들이 대통령, 국회의원 등 국가 공직에 임할 사람이나 어떤 단체, 조직 등의 대표자를 투표로 뽑는 행위를 말한다. 하지만 중국의 역대 왕조나 고려, 조선시대에는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인재를 뽑는 과거(科擧)를 선거(選擧)라고 했다. 그래서 고려사 선거지(選擧志)는 고려시대 과거제도의 내력이나 규정, 급제자 등 관련 기록들을 한데 모은 것이었다. 당시의 선거는 선발(選拔많은 가운데서 골라 뽑음)이나 선출(選出여럿 가운데서 골라냄)에 가까운 용어였으므로 신분제도가 엄격했던 전근대사회의 선거와 지금의 선거는 서로 상이한 면이 있다.한편 서양의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일부 시민권을 가진 성인 남자들에게만 참정권이 허용되었는데 이들이 모인 민회(民會)에서 국가의 최고 통치자를 뽑거나 전쟁과 같은 중대사를 결정할 때 거수, 환호, 박수와 같은 절차를 거치거나 혹은 비밀투표 형식을 취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는 초기 고대국가성립 과정에서 촌장들이 모여 왕을 추대하거나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한 기록들이 전하나 그 예가 드물 뿐만 아니라 상세하지 못해 실상을 알 길이 없다. 다만 화랑제도와 관련하여 집단의 구성원인 낭도들이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하여 화랑을 추대했던 사례에서 오늘날의 선거와 유사한 모습이 발견되기도 한다. 선거권 행사해야 진정한 민주주의역사적으로 볼 때 정치참여 형식으로서의 선거는 사회경제적 변화에 따른 시민계급의 등장과 성장으로 이루어졌다. 19세기 근대사회 진입 이후 등장한 새로운 계층에게 선거권이 부여됨으로써 의회주의 정치와 대의 민주주의시대로의 전환이 시작되었다. 이제 그들에게 있어서 선거권은 사회적 권리이며 동시에 공적 의무가 된 것이다.대의제 민주주의가 확고한 정치제도로 정착하면서 의회를 구성하는 대표의 선출행위인 선거권의 중요성은 한층 높아졌으며, 양적질적인 성장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는 또한 선거권 행사의 공정성 유지를 위한 노력으로 이어지면서 제한선거로부터 보통선거로, 불평등선거에서 평등선거로, 간접선거로부터 직접선거로, 공개선거로부터 비밀선거로 발전되는 등 선거제도의 변화와 정착도 이루어지게 되었다.그러나 선거권의 권리적 측면에서의 성장에 비해 의무적 측면에서의 과제는 아직까지도 뚜렷한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선거권의 행사가 아무리 공정하고 완벽한 보장 속에서 이루어진다 해도 선거권자가 선거권을 행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대의제 민주주의라 할 수 없다. 선거권의 권리가 엄정하게 보호되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선거권자인 국민에게는 주어진 선거권을 반드시 이행하여야 할 의무 또한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오늘날 싱가폴, 멕시코, 벨기에, 이집트, 오스트레일리아, 그리스, 스웨덴 등 국가에서 의무투표제를 시행하거나 선거권 불이행에 대한 제재 방안으로 벌금, 구류, 각종 불이익의 부과 등 강경한 조치를 취하고 심지어 선거권 박탈이라는 극단적 수단을 동원하는 국가들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 또한 바람직한 것일 수는 없다. 선거권의 의무 이행을 독려하기 위한 방안으로 학교 교육, 사회 교육, 언론, 홍보 등을 통한 적극적이면서도 꾸준한 의지와 실천이 필요하다. 투표로 잘못된 선거문화 바꾸자우리 국민은 1948년 5월 10일 초대 국회의원 선거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60여 년 동안 수많은 선거를 경험하였고, 바로 며칠 후에는 제 19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비뚤어진 선거문화가 도처에 널려져 있다. 그 가운데에도 가장 심각한 것은 선거권의 포기, 선거 의무 불이행 풍토라 할 수 있다. 선거권의 행사야말로 잘못된 선거문화를 바꾸는 첫걸음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모두가 투표소로 달려가 정당한 권리와 의무를 행사하여야 할 것이다.박옥걸 아주대학교 명예교수

[아침을 열면서] 핀란드 학교의 비밀

지난 3월 21일과 22일 이틀 동안 핀란드에서 온 에르끼 야호를 만났다. 에르끼 야호는 세계 최고 수준으로 인정받는 핀란드 공교육의 설계자다. 1973년부터 1991년까지 교사를 믿고 학교를 신뢰하는 핀란드식 교육개혁 모델을 다듬어 낸 전직 국가교육청장이었다. 경쟁과 차별이 아닌 협력과 지원의 교육을 성공시킨 에르끼 야호의 강연을 경청할 수 있었고, 에르끼 야호와 함께 한 원탁회의에서는 질의 응답을 통해서 핀란드 교육개혁 성공 배경과 한국교육에 대한 이야기도 나눌 수 있었다. 성공적인 교육모델로 세계인들이 주목하는 핀란드 교육정책은 수 십년간 바뀌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정권이 바뀌어도 교육영역은 침범하거나 간섭하지 않는다는 사회적 합의가 지켜지고 있는 것이다. 그 누구도 교육현장을 함부로 건드리지 않으니 높은 자존감을 지닌 선생님들의 열정어린 가르침을 함부로 평가하지 않으며 시장바닥에 내놓은 물건처럼 값을 매기지도 않는다. 학생들의 평가는 그것이 서열이나 경쟁의 수단이 아니라 자신의 위치를 알고 진로선택의 도구라는 것을 학생들도 알고 있는 까닭에 그야말로 하고 싶은 공부를 즐기며 할 수 있으니, 핀란드 아이들의 주관적인 행복지수 또한 높다. 국제 학업성취도 평가에서 핀란드는 총 3회의 시험에서 연속 1위를 했을 뿐만 아니라 학업에 대한 자신감, 공부에 대한 의욕이나 흥미도 또한 높은 점수를 받았다. 핀란드 교육정책 함부로 손 안돼그런데 그 비법이라는 것이 우리나라의 학교 교육과는 정반대였다.핀란드의 아이들은 오후 3시면 학교에서의 모든 일과가 끝났고, 따로 과외를 받지도 않는다. 핀란드의 교육철학은 아이들은 놀 권리가 있다. 그 권리를 최대한 충족시켜야 공부도 열심히 하게 된다 는 것이기 때문이다. 학교는 학생을 선택할 수 없으며, 학교 선택권은 오직 학생들에게만 주어졌다. 학교활동의 구성과 교육은 철저하게 학생들이 중심이었다. 핀란드 아이들은 평일 학습시간 평균이 4시간 22분이다. 우리 아이들의 일상을 상상해본다. 이른 시각, 0교시 수업을 위해 떠지지도 않는 눈으로 밥도 대충 먹거나 굶고 등교를 한다. 교실로 들어서면서부터 밤 늦은 시간까지 50분 단위로 짜여진 시간표에 따라 공부를 한다. 쉬는 시간에는 틈틈이 학원 숙제를 한다. 정규 수업이 끝나면 자율학습을 위해 학교에 남거나 학원 셔틀버스에 몸을 싣는다. 집에 돌아왔을 때는 거의 자정이 가까운 시간, 그래도 다시 공부를 위해 책상 앞에 앉는다. 지난 2007년 수학과학 성취도 비교연구(TIMSS) 평가 결과 능동창의적 학습 수준을 측정하는 자신감과 흥미도 지수에서 한국은 49개국 가운데 43위라는 최하위 성적을 얻었다. 아이들 놀권리 만들때 공부도 잘해단편적인 지식을 주입하고 기계적으로 답을 찾는 연습만 수도 없이 반복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전인적인 발달보다는 대학입시를 위한 지식 축적이 학교의 목적이 되어 버린 지금, 학교란 무엇인가? 누구를 위한 성적인가? 누구를 위한 대학인가? 교육은 국가의 근간이므로 정권이 바뀐다고 해서 이리저리 뿌리째 뽑아서 심을 수 있는 나무가 아니다. 교육을 걱정하는, 국가의 장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분야별로 함께 모여서 범 국가적인 교육대책을 마련하는 일을 서둘러야 한다. 마치 한 그루의 좋은 나무를 국가라는 정원에 심어서 자라는 동안 옮겨 심지 않고 줄기만 가다듬으며 우람한 나무로 키우는 작업을 하자는 것이다. 오늘의 핀란드 교육도 교육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지난한 과정과 좌절이 있었다는 사실을 타산지석으로 삼으면서 말이다.이청연 인천광역시자원봉사센터 회장

[아침을 열면서] 누가 교육을 살릴 것인가?

교육은 국가의 백년대계이며 국가의 미래를 밝게 열어 줄 가장 확실한 투자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하더라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21세기 새 시대를 시작하면서 세계 각국은 교육개혁에 박차를 가하였으며 이에 알맞은 정책을 최우선적으로 수립하고 펴나가고 있다.반면 우리의 교육 현실은 퇴보를 거듭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문제를 안고 있는 여러 요인 중 하나는 교육개혁과 교육정책의 일관성이 없다는 것이다. 당연히 교육 정책은 국가의 미래와 피교육자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해서 수립되어야 한다.하지만 우리 교육은 정권이 바뀌고 같은 정권아래서도 교육 수장이 교체되고 또 다른 정당의 교육감이 선출되면 흔들린다. 결국 교육은 휘청거리고 학교 붕괴니 교육대란이니 하는 형용사가 난무하여 학생들은 물론이고 학부모들은 혼돈스럽고 불안해 한다.이에 더해 우리의 교육현장에 대한 자조적인 표현 가운데 학생은 있지만 제자가 없다, 교사는 있지만 스승은 없다, 그리고 부모는 있지만 학부모는 없다라는 4부재(四不在)의 안타까운 현실에 놓여있다.오래 전 영화제목으로 더 알려진 두사부일체(頭師父一體)라는 말은 원래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를 비유해서 표현된 것인데 임금, 스승, 부모의 은혜가 같다. 즉 스승과 부모를 같은 위치에 두고 존경한다는 의미로서 교육현장에 대한 옛 어른들의 가르침이다.그런데 우리사회의 교육현장에서는 과연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가?학생체벌에 대한 논란과 더불어 학생이나 부모가 담임을 경찰에 신고하는가 하면 직접 구타하는 교권침해 사건들을 언론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청소년은 가정에서는 부모님의 사랑을, 학교에서는 선생님의 사랑을 먹고 살아야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다. 어버이 같은 자상하고 고마우신 선생님이 학교에 존재하지 못하면 상대적으로 학생은 있으나 제자가 없을 것이다. 퇴보하고 있는 교육 현실아울러 학생들의 부모는 있으나, 가정에는 어떠한 교육의 프로그램으로 교육하는 학부모는 거의 없다. 지나친 일류 지상주의로 사교육비는 급증하여 공교육의 불신으로 이어졌다.결국 제자부재, 스승부재, 학부모의 부재, 이에 일관된 교육정책의 부재가 더해져 부모가 동요하고 학생들이 흔들리고, 교사의 사기가 저하되어 교실 붕괴, 학교붕괴, 공교육의 붕괴로 이어지고 있다.누가 교육을 살릴 것인가? 첫 번째, 국가이다. 누가 교육의 수장이 되건 교육정책이 지속적이어야 한다. 그래서 안정적인 교육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 조령모개(朝令暮改)식 인사와 정책은 반드시 지양되어야 한다.두 번째, 스승이다. 선생의 의무는 학생의 아픔이 무엇인지 진로에 대한 고민이 무엇인지, 부모의 마음으로 듣고 상담해주는 것이다. 선생은 존재의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교권이 확립되어야한다. 정부스승부모 모두의 노력 필요세 번째, 학부모이다. 자녀의 교육을 학교나 학원에 일임하는 무관심의 교육이 아니라 가족간의 대화, 자녀에 대한 배려 깊은 관심에서 시작하는 가정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 가정에서의 교육의 기회를 다양하게 실천함으로 교육의 극대화는 물론 가정의 붕괴를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가정의 붕괴는 학교의 붕괴를 가져오고 더 나아가 사회의 붕괴로 이어 질 수 있는 만큼 건전하고 건강한 가정에서 자라도록 따뜻한 가정을 만드는 것은 부모의 책임이자 의무이다. 더불어 학교에서 선생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정책이 수립되고 지속되어야 하며 학교의 역할과 활동에 대하여 부모의 신뢰가 함께 하는 등, 정부, 스승, 부모, 학생을 비롯하여 국민 모두가 공동체의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합심하여야 한다. 지금이 21세기 무한경쟁시대에 교육을 통해 국가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일 것이다.김정행 용인대 총장

[아침을 열면서] 지구, 우리들의 집-두개의 사진 전시회

사진전시회 두개를 보았다. 마이클 케냐의 철학하는 나무와 얀 아르튀스 베르트랑의 하늘에서 본 지구를 한 주 간격으로 잇달아 보았다. 꽃샘추위가 매콤한 이른 봄나들이로는 넘치는 호사를 한 것이다. 전시회를 본 소감을 거칠게 털어놓자면, 베르트랑의 사진은 상처입고 망가져 가는 지구를 찍은 것인데도 너무 아름답다는 것이다. 렌즈로 잡아낸 지구의 표정이 작가의 고발 의도와는 달리 너무 아름다워서 애틋하고 안타깝기 그지없다. 사람이라는 이기적 동물 70억이 살기 위해 흠집을 내고 망가뜨린 흔적이 울다 지쳐 잠든 어린아기의 얼굴만큼이나 애련하다. 말리 통북투에서 목축업을 하던 유목민들이 가뭄 때문에 기르던 가축을 몰살시키고 만든 초라한 채소밭들은 상황의 참담함과는 상관없이 카펫을 펼쳐놓은 듯 보인다. 먼지가 풀풀 날릴 것 같은 모래흙 밭에 퍼질르고 주저앉아 일을 하는 농부의 모습만이 참으로 막연하고 민망스러울 뿐이다.도미니카 공화국의 산토도밍고 야외쓰레기장은 쓰레기 처리시설이 없이 온갖 오물들이 방치된 곳이다. 악취는 물론 유독가스가 발생되어 도시를 오염시키는 질병의 근원지임에도 케냐의 사진에서는 추상화가 따로 없다.수천명의 목숨을 앗아간 살인병기들이 버려져 있는 곳, 알 자라 사막에 있는 이라크 탱크 묘지는 화염을 내 뿜으며 달리던 무기의 위엄(?)은 간곳없이 누추한 몰골로 전쟁의 추억을 반추하고 있다. 상처입었음에도 아름다운 지구마구잡이로 벌목한 산림 지역이며 홍수로 망가진 도심지역, 지구온도 상승으로 무너져 내리는 빙하, 석유 잔유물 매립장 등, 인간 삶의 오만과 무관심의 현장을 고발하면서도 케냐는 한편으로 지구 곳곳에 숨겨져 있는 비경을 들춰내어 이 아름다운 곳을 지켜야 한다. 지구는 우리의 집이니까 소리치고 부르짖는다. 프랑스의 뉴벨칼레도니의 맹그로브 습지는 고염도 때문에 맨땅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맨땅이 영락없는 하트모양이다. 망가지고 부서지면서도 지구가 여전히 조건없는 사랑을 보여주는 것 같다. 반면, 마이클 케냐의 사진은 묵언 수행을 하는 수도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미니멀한 시각으로 표착해 낸 절제된 흑백의 풍경이 보는 이의 감정을 가라앉힌다. 더 망가지기 전에 지켜야겨울 설산, 침묵조차 침묵할 것 같은 고요를 배경으로 검은 나무 하나가 서 있다. 바람도 느껴지지 않는다. 나무는 모든 희망과 욕망을 내려놓고 고뇌도 던져 버리고 그야말로 철학을 하는 것 같다. 빙벽을 병풍처럼 두르고 홀로 선 소나무, 바다 한가운데 누가 꽂아놓은 것 같은 작은 바위섬, 그 꼭대기에는 새가 내려앉듯 나무들이 내려앉아 있다. 가지 위에 빈 까치집을 얹은 쓸쓸한 나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까치집은 겨우살이 처럼도 보인다. 겨우살이. 겨우살이는 이제는 없는 막내동생을 그리워하게 한다. 조경일을 하던 동생이 어느 날 느닷없이 커다란 푸대 가득히 겨우살이를 따다 주었다. 14미터 높이의 나무꼭대기에 올라가 채취한 귀한 것이니 잘 다려먹으라고 당부를 하고 갔다. 그리고, 아주 갔다. 그 겨우살이를 나는 지금껏 다려먹지 못하고 있다. 아니 다려먹을 수가 없다. 너무 아픈 기억이니까. 마음이 쉽사리 팔랑대는 나는 두 전시회를 보고 나자 사진이 찍고 싶어진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다.거장들이 보여준 위용에 이미 압도되어 있으므로 나는 다만 그들이 부르짖고 속삭이는 의미만 되새길 것이다.이미 수천 년 전부터 예언자들은 올 연말 인류는 지구가 멸망하는 재앙을 입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정말 그럴까? 아름다운 지구, 상처받은 지구, 침묵하는 지구가 드디어, 드디어 견디다 못해 용트림을 하게 된다면.신효섭 시인

[아침을 열면서] 무너져가는 가족제도

지난 2월 말 경기도 남양주시에서 40대 가장이 자신의 노부모와 아들을 살해하고 도주해 자살을 시도했다가 하루 만에 모텔에서 체포된 사건이 있었다. 또한 며칠 전에는 강원도 고성에서 경매로 낙찰 받은 토지를 가족들이 팔지 못하게 한다고 어머니를 목 졸라 죽이고 팔순의 외할머니까지 흉기로 살해한 손모씨가 체포되어 조사를 받고 있다. 두 사건 모두 아직 상세한 사연이 밝혀지지 않았으나 참으로 끔찍하고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효를 최고의 덕목으로 삼았던 과거 우리 사회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물론 고려나 조선시대에도 이런 일이 없었던 건 아니다. 지금부터 800여년 전인 고려 인종 때 충주 인근 지방에서 아들이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 이에 관에서는 즉각 범인을 잡아 처형한 후 그 집터를 파 웅덩이로 만들었고, 당해 지역 지방관은 파직됐으며 국왕도 얼마 동안 근신하는 자세로 술과 음식을 감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처럼 조부모, 부모 등 직계 존속에 가한 패륜(悖倫) 범죄에 대한 엄중한 처벌은 유교 성리학 사회였던 조선시대 이전부터 이어져온 우리의 전통이었다.하지만 현대사회로 오면서 인륜에 반하는 범죄는 갈수록 증가하고 있으며, 그 수법 또한 흉포화하고 있다. 최근 경찰 통계에 따르면 친족 대상 범죄는 연간 3만 건에 이르고, 이중 강력범죄가 점차 증가하는 추세인데 특히 존속살인 건수는 2008년 44건, 2009년 58건, 2010년 66건으로 급증하고 있다. 늘어만 가는 패륜 범죄그런데 존속살인범의 경우 대부분이 정신과 질환을 앓고 있는 초범자들로 20세 이하의 청소년도 상당수에 달하고 있다. 이들은 성장기에 부모의 학대 등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은데 쌓였던 분노가 폭발하면서 끔찍한 범죄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이들 또한 불행한 피해자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도래한 장수시대 안에서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떠밀리듯 살아가야 하는 노인들의 사정 또한 딱하기는 마찬가지다. 늙고 힘이 없다고 자식들로부터 사회로부터 학대나 폭행을 당하고 버림 받는 노인들이 얼마나 되며, 그 실상은 어떠한지, 이를 해결해줄 묘책은 없는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노력해야 한다.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 만해도 우리에게는 세계인들이 모두 부러워하던 가족제도가 있었다. 영국의 문명사학자인 토인비는 물론 하버드대의 다니엘 벨 교수, 사무엘 헌팅턴 교수, 영국의 와그너 교수 등 사회학, 가족학 분야의 당대 최고 석학들이 한국 가족제도에 대하여 극찬을 하였다. 그들은 한국의 가족제도가 미래 인류를 살릴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제도라는 데에 입을 모았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이 왜 그런 찬사를 아끼지 않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우쭐해져서 물색없이 들뜨기만 했던 것이 다였다. 어떻게 그것을 지켜가야 할지, 어떻게 발전시켜가야 하는지에 대한 숙고나 성찰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전통 가족제도 지켜나가야조부모와 부모, 자녀 삼대가 함께 모여 사는 대가족제도는 밖에서 보는 사람들의 시각과 달리 그 안에 묻혀 오랜 세월을 살아온 우리에게는 물론 고통스럽고 힘든 여러 가지 문제점들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지난 반세기 동안 오로지 경제발전, 잘 먹고 잘 사는 일에만 전념하면서 절대로 버려서는 안 될 소중한 것들은 주저없이 내던져버리고, 정작 가져와서는 안 되는 것들만 받아들이는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다.세계인들이 부러워하던 자랑스러운 우리의 가족제도는 어디로 갔나. 우리 가정이, 우리 사회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하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은 이를 한탄하거나 서로 책임을 떠넘기기에 급급하기 보다는 그 정확한 원인과 올바른 해법을 찾는 일에 지혜와 열정을 모아야 할 때다.박옥걸 아주대학교 명예교수

교직생활의 추억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의 일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충청남도 예산 고향으로 내려가 부모님 농사일을 도와드려야 했다. 요즘처럼 청년실업 문제가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던 시절이었지만,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난 필자가 부모님과 함께 농촌생활을 하며 발령을 기다리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1년 이상을 기다려 발령을 받은 곳은 경기도 연천의 어느 시골학교였다. 300여 명의 아이들과 8명의 교직원으로 구성된 6학급의 소규모 학교에서 나의 새내기 교사생활은 시작되었다.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한 교직생활이었지만, 아이들을 만나는 교실 안은 날마다 새로움으로 가득했다. 아이들 교육을 위해 서로 협력하고 배려하는 선생님들의 모습이 참 아름답기도 했다. 인정 많은 학부모 그리고 동네 사람들을 만나면 가족처럼 반가웠던 기억들이 새롭다. 시험점수 때문에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며, 미워하는 아이들도 없었다. 방학이 되면 가까운 임진강에 가서 물놀이도 하고, 산과 들로 나가 곤충채집도 하며 아이들은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나누는 기쁨이 대단했다. 가을 운동회가 되면 온 동네 사람들이 일손을 놓고 학교로 모여든다. 동네잔치였다. 내 아이가 아닌 우리 아이들로 키우는 아름다운 마을 공동체로 기억된다. 3년 4개월 만에 인천으로 발령을 받았을 때, 버스 정류장까지 배웅 나와 아쉬운 석별의 정을 나누었던 기억들은 두고두고 잊을 수가 없는 추억이 되었다. 여전히 그때의 제자들을 만나면 참으로 자랑스럽기만 하다. 사실 여기서 1970년대 후반기에 필자가 근무했던 시골학교의 교실모습과 지금의 교실풍경을 비교하는 것이 별 의미는 없다. 그렇지만 살아남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를 전수하는 오늘의 경쟁교육은 분명 옳지 않다. 평화사랑 넘쳤던 옛 시골 학교교육본질에 대한 성찰을 다시금 해보는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우리 아이들과 교사들이 살아가야 할 오늘의 교실현실에 그들은 어떻게 잘 적응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된다. 더구나 가해학생 몇 명을 가려내어 처벌하고 추방하면 학교폭력은 사라질 것이란 착각을 하고 있는 정부의 학교폭력 근절 종합대책이 시행됨에 따라, 폭력을 몰아내기 위한 수단이 폭력일 수 없다. 폭력을 이기는 힘은 끝내 평화와 사랑의 힘이다 라고 가르치고 있는 교사들의 심적 갈등이 얼마나 심할까. 썩은 상자는 내버려둔 채 눈에 보이는 썩은 사과 몇 개를 골라내는 데 초점을 맞추라는 정부대책 그것은 교육 본류가 아니기에 더욱 그러하다. 경쟁교육 풍토 개선해야교사가 아이들을 만나 사랑하는 일은 한 아이의 인격 성장을 다른 어느 이익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일이다. 그러기에 지금은 교사가 아이들의 삶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고 교육활동을 할 수 있도록 온 국민이 나서서 진정으로 도와주어야 할 때다. 교사와 아이들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 인연이요, 신의 섭리다. 나는 우연히 이 학교의 교사가 되었고, 아이들도 내가 교사로 근무하고 있는 이 학교에 우연히 오게 되었다라고 생각하는 곳에는 신뢰와 사랑, 존경이 싹틀 수 없다. 지난 2011년7월 노르웨이에서는 최악의 극우 테러 참사가 발생했다. 노르웨이의 옌스 스톨텐베르크 총리는 그 참사에 대한 대응책을 묻는 대중들에게 우리의 대응은 더 많은 민주주의와 더 많은 개방성 그리고 더 많은 인간애라고 말했다. 응징과 처벌이라는 단순 대응은 절대로 정답이 아니라는 신념이, 역설적이게도 오늘날 지구 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나라 노르웨이가 유지되는 근본이 되고 있음을 살펴야 하는 오늘이다. 우리의 답도 마찬가지이다. 학교 사회가 진정 평화와 사랑이 넘치는 배움의 공간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학교폭력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경쟁에서 이기는 방법이 아니라, 모두의 인권이 존중되는 교육, 개인사회세계와의 조화로운 관계를 맺으며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이청연 인천시 자원봉사센터 회장

우리의 삶에 정년은 없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스스로 자신의 나이에 정년을 기정사실로 두고 체념하듯이 살아가고 있는 듯하다. 어느 날 비서가 인터넷에서 많은 사람이 관심 있게 보고 있는 글이 있다고 하며 보여준 글이 있다. 후회라는 제목으로 쓴 일기문 형식이었다.「나는 젊었을 때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 결과 나는 실력을 인정받았고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 덕에 65세 때 당당한 은퇴를 할 수 있었죠. 그런 내가 30년 후인 95살 생일 때 얼마나 후회의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내 65년 생애는 자랑스럽고 떳떳했지만 이후 30년의 삶은 부끄럽고 후회되고 비통한 삶이었습니다. 나는 퇴직 후 이제 다 살았다. 남은 인생은 그냥 덤이다 라는 생각으로 그저 고통 없이 죽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덧없고 희망이 없는 삶. 이런 삶을 무려 30년이나 살았습니다. 30년 시간은 내 나이 95로 보면, 3분의 1에 해당하는 기나긴 시간입니다.만일 내가 퇴직할 때 앞으로 30년을 더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난 정말 그렇게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나이가 많다고 한계를 규정한 삶그 때 나 스스로가 늙었다고 생각했던 것이 큰 잘못이었습니다. 나는 지금 95살이지만 정신이 또렷합니다. 앞으로 10년, 20년을 더 살지도 모릅니다.이제 나는 하고 싶었던 어학공부를 시작하려 합니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10년 후 맞이하게 될 105번째 생일날! 95살 때 왜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는지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고 또 읽으면서 가슴속 깊이 전율을 느꼈다. 내 나이 어느덧 칠순에 다달아 오고 있다는 생각으로 나 스스로 나이 정년을 정하고 살아온 나 자신이 부끄러움을 느꼈다.비로소 나이를 빙자하면서 하고 싶은 일들을 포기하고 체념하고 살고 있는 부분이 없었던가 하고 반성해 본다.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우를 범하고 살아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후회는 앞에서 행한 잘못이나 실수를 생각하며 뉘우치는 것으로 같은 후회를 반복하지 않게 과거의 모습에서 환골탈태하는 모습이 바람직할 것이다. 우리가 보다 행복하고 즐겁게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요건은 후회보다는 반성을 거친 성찰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정년은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후회하지 않기 위해, 같은 후회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적어도 후회를 적게, 작게 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할까 ? 애플의 창업자, 고 스티브 잡스가 스탠포드 졸업식에서 한 연설 중 일부를 떠올려 본다.현재의 성과에 만족하지 말고 계속 갈망하라, 바보처럼 우직하고 무모하게 행동하라. 저는 저 자신을 위해 항상 그러기를 바래왔습니다. 그리고 오늘 졸업하고 새로운 도전을 하려는 여러분도 자신을 위해 그러기를 바랍니다.졸업은 끝이 아니고 또 다른 새로운 시작이듯이 사회가 만든 정년은 졸업이 아니라 또 다르게 그리고 새롭게 시작하라는 신호가 아닐지.임진년을 맞이한 지 어느새 두 달이 지나고 있다. 한 해가 더 가기 전에 그리고 내 나이 70, 80, 90번째 생일을 맞이하기 전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한 가지씩 달성해 나아가는 자세를 습관화 해야겠다.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갈망하며 우직하게 밀고 나가는 자세로 가족과 사회, 그리고 후진들을 위하여 ,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하여 시간을 창조해 나아가야겠다.김정행 용인대 총장

[아침을 열면서] 세상에서 제일 작은 사무실

작은 사무실을 꾸몄다. 말이 사무실이지 실은 한 평도 채 안 되는 아주 작은 공간이다. 이 공간을 트렁크 사무실이라고 명명했다. 작고 은밀한 느낌이 꼭 오래되고 낡은 트렁크를 연상케 했기 때문이다. 내가 아직 어린 시절, 미국으로 유학을 간 오빠는 자리가 잡히고 나자 낡고 큼직한 트렁크 하나를 국제우편으로 보냈다. 트렁크 안에는 입던 옷가지를 비롯해서 책, 그리고 신기한(!) 서양물건들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이를테면 당시로는 우리 형편에 듣도 보도 못했던 토마토 케첩이며 샴푸 그리고 느끼한 버터, 마요네즈, 초콜릿 따위, 미국생활의 상징성 아이콘을 맛뵈기로 한가득 채워 보낸 것이다. 그때 그 큼직한 트렁크가 내게는 영락없이 다락같이 보였다. 혼자 들어앉아 상상의 날개를 펼치기도 하고, 애들 몰래 쟁여놓은 곳감이며 다식 따위를 들킬까봐 맘졸이며 꺼내먹는 그런 은밀한 곳 말이다.잠깐 여기서 토마토 케첩에 얽힌 삽화 한 토막을 소개하고 지나가자. 순도 높은 시골 토종 우리 어머니는 트렁크 속에 담겨 온 토마토 케첩이 당최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궁리 끝에 아마도 서양 도마도주스 원액일 거라는 재치 넘치는 판단을 하게 됐다. 마침 미국에서 뭔가가 왔다는 소식을 접한 참견쟁이 동네 여인네들, 반장마누라를 위시해, 하루종일 뭔가 얻어걸릴 것을 기대하며 동네를 뱅뱅 돈다고 해서 뺑뺑이 엄니라는 별호가 붙은 이까지 빠지지 않고 죄다 몰려왔다. 혼자만의 공간을 만들어보니어쨌든 호기심과 기대감, 부러움과 시샘까지 넘실대는 표정으로 트렁크의 내용물을 응시하는 이 여성부대에 엄마는 약간 우쭐해 보이는 품새로 서양도마도주스 원료를 큼직한 사발에 찔끔 따라서 물은 넉넉히(!) 부은 후 사카린을 타서 대접하기에 이르렀다. 나도 한 모금 마셔보고 곧바로 부엌 개수대로 직행했지만, 그 정체불명의 이상하고도 야릇한 맛이라니! 그래도 순박한 시골 우리 동네 아줌니들은 서양 것은 아무튼 이상하구먼 하는 촌평과 함께 먼디서 온 귀한 것 잘 대접 받았다고 치하하며 돌아갔다. 각설하고, 사무실에는 내 보물 1호 노트북, 애플의 맥북에어가 책상 위에 모셔져 있다. 딸이 월급을 축내가며 전문가용이라고 사준 노트북이니 어찌 보물 1호로 추앙하지 않을 손가. 그리고 책상 앞에는 사무실 분위기로는 생뚱맞은 3면경이 펼쳐져 있다. 안방과 욕실 사이, 곁다리로 딸린 옷 방을 용도 변경해 사무실로 쓰기로 했다는 얘기다. 옷방에 마련된 화장대의 용도에 전전긍긍하던차 어느 날, 머릿속에서 전구가 반짝 켜졌다. 사무실! 집을 옮긴 후 사무실로 쓸 공간이 마땅치 않아 대충 식탁 위에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곤 했는데 장소가 장소인지라 집중이 되지 않는 한계를 절감하고 있었다. 일상의 소소한 행복 발견그런 상황에서 화장대 공간을 집중력 높이기에 안성마춤인 사무실로 낙점하게 된 것이다. 실은 이 글이 사무실에서 쓰는 제1호 작품이 되는 셈이다. 아! 사무실이 좋은 점 또 하나, 글 쓰는 외에 혼자 울 수도 있겠네. 사람이니까, 이따금 세상과 부딪히니까, 아무도 모르게 울고 싶을 때도 있을 것 아닌가. 마침 신문에서 울고 싶을 만큼 감동을 주는 사진 전시회 기사가 실렸다. 사라질 위기에 있던 솔섬을 사진으로 세상에 알려 그 섬을 살려낸 사진작가 마이클 케냐가 철학하는 나무라는 다소 난해한 제목으로 사진전을 열고 있다며 설산의 한 풍경을 소개하고 있다.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아이러니 한 시선, 그는 눈 덮인 겨울 산에 설치된 쉰 개의 검은 울타리를 깊은 고요를 연주하는 침묵의 음표로 그려내고 있었다. 글을 마치고 나면 그의 사진전을 보러 갈 것이다. 그리고 고요와 적막, 외로움을 연주하는 무채색의 노래를 들으며 울어 볼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도 초대할 수 없는 작은 트렁크 사무실에서 나는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행복하다. 행복은 큰 것이 아니고 작은 것이기 때문에.신효섭 시인

어른이 있는 사회는 밝다

집 가까이 있는 동네 목욕탕을 자주 이용하고 있다. 이른 새벽에 다니다 보니 어린 아이나 젊은 층보다는 나이 지긋한 노인들과 중 장년층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런 곳에 가면 으레 마주치는 몰상식한 이들 때문에 마음이 상하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들어오자마자 몸을 씻지 않은 채 바로 욕조 탕 속으로 뛰어들거나 지저분한 수건을 물이 넘치는 욕조 언저리에 던져놓는 이들도 있다. 어떤 이는 칫솔을 입에 물고 샤워기 물을 튼 채 서서 한없이 이를 닦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한 마디 해주고 싶지만 새벽부터 무슨 봉변이나 당하지 않을까 두려워 참다 보니 점차 신경이 무뎌지게 되었다.하지만, 며칠 전에 겪었던 황당한 일은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새벽 시간이지만 가끔은 집에 못 들어가고 함께 외박을 한 대학생이나 젊은 회사원들이 어울려 오는 경우도 있다. 그날도 젊은이 서너 명이 들어와 한참을 시끌벅적하더니 그 중 한 명이 내가 혼자 앉아있는 건식사우나 방에 들어왔다.그런데 맞은편에 앉아있던 그가 갑자기 바닥에 가래침을 내뱉었다. 순간 깜짝 놀란 나는 비명을 지르며 소리쳤다. 아니, 거기다 침을 뱉으면 어떻게 하나. 여러 사람이 쓰는 밀폐된 방이잖아. 당장 물 떠와서 닦아내게! 내 질책 소리에도 그는 아무 말 없이 끝까지 고개만 숙이고 앉아 있었다. 반항하는 것도 반성하는 것도 아닌, 마치 선생님께 야단맞는 학생처럼. 존경할 어른이 사라진 요즘 사회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 걸까.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함께 살아가면서 모르거나 잘못된 것을 보면 가르쳐주고 바로잡아주면 된다. 그런데 잘못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고치지 않는 경우라면 그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기본적인 훈련이 안 된 사람들과 함께 사는 세상, 염치고 체면이고 모두 던져버리고 모두가 자기 편한 대로만 살아가려고 한다면 그런 세상은 지옥이나 연옥과 무엇이 다르겠는가.요즘 우리 주변에는 어른이 없다. 언제부턴가 잘못을 지적하고 바로잡아줄 어른들이 사라져버렸다. 세상살이에서 모르는 것을 가르쳐주고 깨우치게 해주는 모범으로서의 어른의 존재를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효율과 능력만을 따지는 사회에서 인성이나 품성 같은 것들은 잊힌 지 오래다. 이미 우리 가정의 부모들은 물론 학교의 선생님들조차 스승으로서의 역할에서 거리가 멀어지고 말았다.그 원인이나 책임이 어디에 있든 간에 우리는 이미 걸어야 할 바른길에서 너무 멀리 벗어나고 말았다. 오늘의 노인들은 자신들이 젊었을 때 스스로 만들었던 덫에 치어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는 딱한 존재가 되어 뒷방으로 물러났다. 노인들 사회 참여 기회 주어져야그래서 어른이 없는, 어른을 부정하는 세상 속에서 자라 성장한 오늘의 지도층이라는 정치인, 고위 공직자는 물론 학교사회의 교육자, 어린 학생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온 국민이 모두 반인륜, 반도덕의 오물통 속에 거꾸로 빠져 허우적거리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우리의 처지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하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은 이를 한탄하거나 서로 책임을 전가하기에 급급하기보다는 그 정확한 원인과 올바른 해법을 찾는 일에 지혜를 모아야 할 때이다. 의학 발달로 노인 인구가 급증하고 있다. 평균 수명 1백세 시대에 이미 진입했다고도 한다.노인들 스스로 존엄성을 찾을 수 있도록 예우하고 재교육과 정책적 지원 등을 통해 보호함은 물론 가정과 사회, 학교 교육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단순 노동이 아니라 자발적 활동을 통해 보람을 찾을 수 있도록 관심을 기울이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다시 어른이 있는 세상에서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가정과 사회와 국가에 참 어른이 있고, 그 어른을 공경하고 따르는 사회 그 속에 우리의 밝은 미래가 있다.박옥걸 아주대학교 명예교수

[아침을 열면서]쌍둥이 자매

오늘은 쌍둥이 엄마와 나눈 자매 이야기를 옮기는 것으로 아침을 열겠다. 올해 고등학교 3학년이 되는 다솔이와 다은이는 쌍둥이 자매다. 이들이 자원봉사활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중학교 1학년 때다. 초등학교 졸업을 앞둔 어느 날, 우연히 청소년수련관의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 이들은 처음에는 궁금함을 해소한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는데, 많은 또래와 함께하는 활동이 보람이 있었고 흥미롭기만 했단다. 쌍둥이 엄마는 우리 쌍둥이가 친구들과 더불어 생활하는 지혜를 터득하고, 봉사활동으로 사랑과 나눔의 소중함을 알게 된 기회였다고 말한다.중학교 2학년이 되어서는 봉사활동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다. 주말에는 어김없이 독거노인 댁에 도시락을 배달했다. 어느 추운 겨울날의 일이다. 문을 두드리며 40분간을 기다려도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돌아오다가, 혹시나 해서 다시 확인하러 갔다가 다행스럽게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언어장애뿐만 아니라 하반신 마비로 거동이 아주 불편하신 할머니께서 문을 열어주는 데 40분이나 걸린 것이다. 그날 쌍둥이 딸들이 집에 돌아와서는 펑펑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자식들이 도대체 뭘 하기에, 불쌍한 할머니가 혼자서 살아 가셔야하지?라고 하면서 할머니를 끝까지 돌봐 드려야 한다고 다짐을 하는 딸들이 대견스럽고 감사했단다.이후 쌍둥이 엄마는 바르게 성장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은 어른의 스승이다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고, 이가 자원봉사 활동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 달에 정기적으로 세 번은 아이들과 함께 참여하는 가족봉사단 활동을 하였는데, 주로 노인요양원을 방문하여 청소도 하고 어르신들의 말동무도 되어주고 종이 접기 등 어르신들과 함께할 수 있는 재능 나눔도 하며, 봄 가을에는 어르신들을 모시고 야외 나들이도 하는 일들을 벌써 5년째 하고 있다. 주말이 되면 요양원에 홀로 계시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극성을 떠는 쌍둥이 자매들의 행동이 예쁘기만 하다는 것이다.대학입시 준비 때문에 초조해하고 있는 다른 학부모들과는 쌍둥이 엄마의 생각은 좀 다르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는 쌍둥이 자매들이 올해에도 자원봉사활동을 계속하는 것이 입시준비에 지장이 없겠냐고 묻는 필자에게 쌍둥이 엄마는 자신들이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인데요. 그리고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고 대답한다. 남들에게는 한가한 얘기로 들릴지는 몰라도, 자원봉사 활동을 하면서 우리 딸 아이들은 바르게 자라왔고 공부도 더 열심히 하고 있다는 말을 보태주었다.쌍둥이 엄마의 생각이 남다른 것이 또 하나 있다. 학생봉사활동 시간을 억지로 채우기 위한 자원봉사활동은 교육적인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방학기간만을 이용한 지속성이 결여된 봉사활동은 지극히 형식적이고 진정한 봉사활동이라고 말하기가 곤란하다는 것이다. 최근 학교폭력을 둘러싼 논의를 살펴보면 문제의 핵심은 뜻밖에 단순하다. 학교폭력 발생에는 다양한 원인이 작용하지만, 입시공부 외엔 아무것도 허락되지 않고 친구를 밟고서라도 경쟁에서 이기도록 강요받는 비인간적 교육풍토가 큰 원인이라는 데는 거의 모두가 동의한다.학교폭력의 해법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다. 우리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더 자유롭고 주체적인 인간으로 살 수 있도록 하려는 최소한의 배려에서 찾아야 한다. 인권감수성을 키워주는 일 즉, 학생인권존중을 전제로 하지 않는 학교폭력 대책은 존재할 수 없다고 본다. 경쟁중심의 가치를 협동 중심의 가치로, 물질중심의 가치를 인간중심의 가치로 변화시키는 생애교육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함은 물론이다. 자원봉사활동을 통하여 사랑과 나눔 그리고 배려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인간은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임을 체험하며 늘 행복해 하는 쌍둥이 자매와 그들의 훌륭한 멘토 쌍둥이 엄마에게 박수를 보낸다. /인천자원봉사센터 회장

대학의 사회적인 책임

최근 들어 우리나라에서 기업의 사회적인 책임에 대해 여러 가지 측면에서 논의되고 있다. 기업의 본업은 이윤창출과 이윤극대화에 있지만 최근 복지사회에서의 욕구가 고조되는 가운데 기업은 이익창출에만 집착하지 말고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책임을 자각하고 그것을 실천해야 한다는 의미이며 또한 이윤창출과정에서 비윤리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더 나아가 사회의 불균형을 바로잡는데 적극적으로 기여하여야 한다는 가운데 나온 것이라 이해된다. 기업과 달리 대학 등 교육기관은 아직 사회적인 책임이 크게 부각되고 있지는 않지만, 시대의 변화만큼이나 대학도 사회적인 책임에 대해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그 의무를 다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대학은 공공성과 사회성을 유지하면서 교수, 연구, 봉사의 세 가지 기능을 해야 한다는 전제 아래 다양한 교육활동을 해오고 있다진리탐구, 학문과 자유 추구에 매몰되어 폐쇄적인 대학도 이제는 사회의 변화에 참여, 주도하는 위치에 이르고 있다. 개인과 사회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사회발전에 공헌하는 기능을 수행해야 하는 등 사회발전의 책무를 다해 줄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인적자원 키울 사회적 의무 즉 오늘날 대학은 그동안의 전통적인 교육체제, 형식성에서 탈피하고 대학 고유의 활동과 목적을 추구하면서 사회 체제 내에서 그 역할을 다해야 한다.우리는 수십 년의 근대화과정을 거치면서 경제성장과 민주화라는 결실을 거두었지만,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갈등 양상, 극단적 분열과 대립, 급변하는 세계정세 속에서의 불확실성의 가중, 빈부의 양극화 심화, 등 우리 사회의 수많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와 국민 모두 다각적인 진단과 처방, 지속적인 노력과 인내가 요구된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는 이러한 예측불허의 도전들을 감당해낼 수 있는 글로벌 인적자원을 길러내는 일이다. 급변하는 세계 속에 우리 사회의 미래는 교육에 달려 있는 만큼 오늘날 대학의 책임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크다.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능력 있는 대학, 경쟁력이 있는 대학이 되는 것만이 그 책임을 다한다고 단언하고 싶다. 능력 있는 대학이, 그리고 능력 있는 기업이 능력 있는 국가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능력 있는 대학이 되기 위해서는 구조조정이 잘 된 기업만이 시대의 변화에 살아남듯이 투명한 경영과 공정한 경쟁에 의한 구조조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비윤리적이고 사회적인 불평등을 조성하고 미래에 균등한 기회를 주지 않은 기업은 자본주의 4.0시대에 생존할 수 없다. 창조 통한 질적 발전으로 거듭나야 대학은 교육 이전에 스스로 윤리적으로 경영하고 누구에게나 미래로 갈 수 있는 균등한 기회를 제공하고 사회 약자에게 배려하는 자세를 실천하는 것이 대학이 추구해야 할 중요한 사회적인 책임이 아닐까 한다.지금 21세기는 지식기반사회로 특징지어지고 있다. 이러한 21세기에 있어 국가경쟁력은 지식에 기반을 둔 창의적인 기술을 얼마나 빠르게, 얼마나 다양하게 개발하고 발전시켜 나가느냐에 달렸다. 대학은 더 이상 기존 지식을 전달하는 기관이 아니라 미래를 창조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길러내는 육성기관으로 바뀌어야 한다. 학생들은 어떤 직업을 선택하든 평생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고 지속적으로 학습할 수 있는 잠재적인 능력을 키워주어야 한다.결론적으로 대학은 기존 모방의 양적 팽창에서 창조를 통한 질적인 발전으로 거듭나야만 대학의 사회적인 책임을 다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김정행 용인대학교 총장

[경기일보-칼럼]“올해도 행복하세요”

여느해 처럼 올 해 연초에도 연하장이 책상 위에 수북하다. 건강과 가족의 화평, 행복을 기원한다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또 있다. 하시는 일의 성취를 바란다는 고마운 말씀이다. 이런 내용들이 이메일이며 전화메시지에 까지 담겨 있으니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행복, 행복은 과연 무엇일까. 어떤 사람은 돈만 많으면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죽자사자 공부를 할 필요도 없다고 한다. 무슨 짓을 해서든 돈만 많으면, 자기 사업을 할 경우 공부 잘 한 하수인을 부릴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골머리 아프게 공부를 하냐는 것이다. 오래 전 일이다. 옆집에 트럭으로 물건을 떼어 장사를 하는 이웃이 있었는데 제법 쏠쏠하게 벌이가 되었던 모양이다. 그는 내가 대학에 가기 위해 골머리를 싸매는 것을 보고 자기는 자식 대학에 보낼 생각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사람마다 다른 행복의 기준 대학을 나와봐야 기껏 월급쟁이 노릇이나 하는데 뭣 때문에 그 고생을 하냐는 것이다. 자기 자식도 일찌감치 운전을 가르치고 장사눈을 뜨게 해서 역시 차떼기 장사를 시키겠다고 했다. 그것이 나쁘고 잘못된 생각은 물론 아니다. 그는 자신의 일에 만족하고 사는 행복한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사람마다 행복의 기준과 잣대가 다르기 때문에 그의 행복이 약간 초라해(?) 보일 뿐인 것이다.어떤 사람은 돈 보다는 명예나 권력을 행복의 가치 기준으로 여긴다. 이른바 사자 직업을 갖고 남들에게 대우를 받는 것에서 만족을 느끼는 사람도 많다.그래서 어떤 부모는 자기 자식의 적성이나 취향은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의사나 판검변호사가 되기를 바란다. 돈도 많이 벌고 남들로부터 대우도 받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치가가 되고 싶어 안달을 하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은가. 국회의원이 되고 장관이 되면 사돈의 팔촌까지 갑자기 어깨에 힘이 들어가 목에 힘을 주고다닌다. 남 위에서 군림하고 권력을 조자룡이 헌칼 쓰듯 휘두르는 것에서 만족을 느끼고 행복을 느끼는 부류이다.올해는 인생역전을 꿈꾸는 많은 이들이 권좌에 오르기 위해 몸부림치는 선거의 해다. 국회의원을 뽑고 대통령을 뽑는 큰일이 치러지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남앞에 나서고 남 위에 오르고 싶어하는 이들이 표를 얻기 위해 공약으로 부르짖는 구호에 빠지지 않는 것이 있다. 정치를 잘해서 경제를 안정시키고 국민을 행복하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행복은 무엇일까. 종류에 상관 없이 일자리를 만들어 돈만 벌게 하면 국민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요즘같이 학교폭력이 사회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이때 학교 문제만 해결해주면 국민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사실 행복은 여러가지 이유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좋은 공연을 보았을때, 좋은 책을 읽었을때, 뜻이 맞는 사람과 의미있는 대화로 공감을 얻었을 때, 심지어 맘에 드는 옷이나 치장거리를 샀을 때도 우리는 행복을 맛볼 수 있다. 허황된 욕심 버릴때 행복이 온다 예전 선비들은 행복을 청복(淸福)과 탁복(濁福)으로 구분했다. 탁복은 세속적인 재물이나 권력 욕망을 채웠을 때 얻게 되는 것이고, 청복은 자연에서 얻는 아름다운 감동, 근검한 삶에서 맛보는 만족을 의미한다. 행복의 기대치가 높아지면 그것은 이상(理想)이 되고 만다 . 그리고 대개 이상은 이루기 어려워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 이상은 손뻗어 닫기 어려운 곳에 있는 꿈이기 때문이다.세월이 어렵다. 그러나 이런 시절에도 행복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이 있다. 허황한 욕심은 버리는 것이다. 이룰 수 있는 소박한 꿈을 꾸고 그것을 이룰 때 행복도 얻고 삶의 격조도 높일 수 있는 것 아닌가.신효섭 시인

발해는 우리들 안에 있다

926년 1월15일, 거란의 공격으로 발해의 수도 상경성(上京城)이 함락되었다. 그로부터 1천86년이 흘러 바로 며칠 뒤면 그 날이다. 비운의 마지막 왕 대인선과 왕족, 귀족, 관료 등 수많은 발해인들은 포로로 끌려가 뿔뿔이 흩어졌고, 200여년간 해동성국(海東盛國)의 명성을 떨치던 발해는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그들이 기록한 자료는 남아 전하는 것이 거의 없다. 최근의 지표조사나 발굴 등 작업을 통해 드러나는 유물, 유적들이 다소 있을 뿐 지금까지 알려진 발해 관련 내용은 요사(遼史), 거란국사(契丹國史) 등 중국 측 사서에 전하는 불과 얼마 안 되는 분량의 내용이 전부이다. 발해에 대한 여러 의문들 이러한 연유로 발해 왕조의 건국과 멸망 등에 관한 의문들이 끊임없이 제기되어왔다.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大祚榮) 등 그 주체 세력의 정체는 무엇인가. 과연 발해는 고구려계 지배세력과 거란, 여진, 말갈 등 피지배 토착세력의 이중구조로 존재하였는가. 발해와 신라의 관계는 경쟁관계였는가, 적대관계였는가. 백두산의 화산폭발은 발해 멸망에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가. 나아가 발해 멸망 이후 요동(遼東) 만주일대, 송화강 하류, 흑룡강 동북 지역에 펼쳐져 있던 광활한 땅과 그 역사는 이제 더 이상 우리와 아무런 연고가 없는 것인가 등등. 수많은 질문에 대하여 답변해줄 준비와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오늘이다.다행히 우리의 역사기록인 고려사에는 고려로 이주해온 발해유민에 관한 풍부한 사례들이 수록되어 전하고 있다. 발해 멸망 직전인 925년 9월에 100호가 이주해온 것을 시작으로 12월에 1천호, 934년에 대광현이 인솔한 수만 명이 몰려왔다. 그 이후 979년에 다시 수만 명, 1029년부터 1040년 무렵까지 수십 명에서 수백 명씩 집단적으로 이주해왔으며, 1116년과 1117년 2차에 걸쳐 1백 명 가까운 발해인들이 고려로 이주해왔다. 우리 안의 5%는 발해인 당시 고려 총 인구 210만명의 5%에 달하는 10만명 이상이 발해에서 이주해온 유민이었다. 이는 고려시대 400여년간 이주해온 중국계, 거란여진 등 북방계, 몽골계, 동남아계, 일본계, 기타 서역(西域) 등 수많은 귀화인들 가운데 가장 큰 규모였다. 고려로 이주해온 초기 발해 유민들은 대부분 서북 지역에 배치되었다. 발해가 멸망한 후 거란의 압박이 차츰 심해지자 고려는 거란에 대한 대비책으로 발해 유민들의 거란에 대한 강한 적개심과 거란군과의 전투 경험을 이용하였고, 이것은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1019년 고려와 거란의 전쟁이 끝나면서 더 이상 효용가치를 잃게 된 이들 발해 유민들은 대부분 남쪽으로 내려가 중남부지방의 벽지 촌락마을에 살게 되었다. 발해 왕족인 대씨가 상주군 관내 영순현에 정착하여 살던 중 13세기 몽고와의 항쟁에서 그 후손들이 공을 세움으로써 비로소 영순 태씨로 그 존재를 확고히 한 것이다.그 밖의 발해 유민들은 세월이 지나는 동안 자연스럽게 동화되면서 고려인이 되었을 것이다. 피부색이 서로 다른 귀화인의 경우라 해도 보통 5대가 지나면 귀화한 국가의 인종으로 완전히 동화된다고 하는데 발해인의 경우 유전인자는 물론 언어와 문화까지 처음부터 고려와 크게 차이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천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발해는 우리들 가운데 있게 되었을 것이다. 당시 총 인구의 5%라면 현재의 남북한 인구 8천만 중 4백만이고, 적어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안의 5%는 발해인인 셈이다.지난 1994년 발표되어 엄청난 감동과 충격을 안겨주었던 서태지의 발해를 꿈꾸며는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진정 나에겐 단 한 가지 내가 소망하는 게 있어로 시작해 나에겐 갈 수도 볼 수도 없는가 저 하늘로 자유롭게 저 새들과 함께 날고 싶어로 끝나는 그 넓고 푸근한 바다, 발해는 우리들 모두의 가슴 속에 살아 있는 것이다.박옥걸 아주대학교 명예교수

임진년 나의 설계

공직에서 은퇴한 고향 선배님은 인천광역시 구치소장이었다. 평상시 자주 만나지 못해서 친한 관계는 아니었지만, 얼마 전 내가 일하고 있는 자원봉사센터를 일부러 방문해주셨다. 사회복지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요즘에는 대학 강의를 나가신다고 하셨다. 미리미리 서둘러 은퇴설계를 하고 실천을 잘하여 걱정 없는 노후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선배님의 나이가 60대 초반이니까 한창 일 할 나이인데, 만약 노후를 미리미리 준비하지 않았다면 어떤 모습이었을까 싶다. 제2의 인생기인 노년기를 평생 현역으로 행복하게 살아가려면 노년기 인생을 재설계할 필요가 있다, 이제부터는 지역사회를 위해서 무엇인가 도움이 되고 싶다는 의지를 강하게 갖고 있는 선배님이 자랑스럽고 한편은 부러웠다.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2010년 기준 우리나라의 65세 이상 인구는 5천357천명으로 총인구의 11.0%를 차지하였다. 우리나라는 2000년에는 65세 이상 노인이 7.7%로 고령화 사회(aging society)에 진입 하였으며, 2016년에는 노령화 지수가 100.7로 노년인구가 유년인구를 추월 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2018년에는 14.3%로 고령사회(aged society)에 이를 것으로 전망하고 있으며, 2026년에는 20% 이상인 초 고령사회(super―aged society)에 이를 것으로 예측하고 있는데, UN은 전체인구 가운데 65세 이상의 비율이 7%이상이면 고령화 사회, 14%를 넘으면 고령사회, 20%이상이 되면 초 고령사회라고 정의하고 있다.흔히 노년기에 찾아오는 4가지 고통을 은퇴에 따른 빈곤의 고통(貧苦), 신체적 노화에서 비롯되는 질병의 고통(病苦), 타인으로부터 얻고자 하는 온정과 평안을 얻을 수 없음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고독으로 인한 고통(孤獨苦), 남아도는 시간을 무료하게 보내야 하는 무위로 인한 고통(無爲苦)의 4가지로 표현한다. 노인은 건강하고 문화적인 생활을 영위하고자 하는 욕구 등 여러 가지 욕구를 가지고 있으나 노인이라는 이유로 사회적으로 소외되거나 기타의 여건으로 충족되지 못하는 상태에서 주어지는 여가시간의 증대는 노인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만일 지금 이 상태로 준비 없이 고령사회를 맞는다면 그것은 재앙이 될 것이다. 장수는 축복이지만 준비되지 않은 사회에서 장수는 큰 재앙이 될 수도 있다는 걱정을 해야 하는 오늘이다. 우리는 일본을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 일본은 고령화가 장기침체를 촉발시켰지만 그 의미를 모르고 대비를 소홀히 했다가 낭패를 보고 있다. 부양비 문제 등 고령화로 인하여 파생되는 문제가 보다 심각해지는 것은 지금 당장의 노인이 아니라, 고령사회의 문제는 지금의 젊은세대들이 자신의 미래를 고민하고 대비해야 할 과제다. 언제까지 고령사회에 대하여 걱정만 할 것인가? 역사적으로 노인의 경륜과 지혜는 세상사와 인생사의 토대가 되어 왔다. 그래서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는 노인을 활용할 줄 알면 즐거움이 가득하므로 노인을 존경하고 사랑하라 하였고, 다산 정약용 역시 훌륭한 목민관이 되려면 노인의 지혜를 구하라고 권면하였다. 사실 자원봉사 현장에서는 70대 노인들의 자원봉사활동이 결코 위축되지 않는다. 게다가 많은 은퇴예정자들이 퇴직 이후 자원봉사 활동에 참여하기 위하여 역량개발에 수년간의 시간과 비용을 투자하기도 한다. 이제는 노인세대와 젊은세대가 함께 고령사회의 미래를 준비해 나가야 할 것이다. 풍부한 경험과 지혜를 지닌 어르신들이 제2의 인생을 자원봉사로부터 시작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 적극적으로 어르신 자원봉사단을 만들어가고 지원하는 자원봉사 운동을 시작하는 것이 임진년 나의 설계이기도 하다.

청소년 여러분에게

2011년 한 해가 일주일도 남지 않은 지금 유럽의 재정위기로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경제의 전망이 그리 밝지 않다. 이에 더해 지난 17일 북한 김정일위원장의 급작스러운 사망으로 지정학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 불확실성이 한층 지속되리라는 것이 중론이다.내년도 경제전망에 대해 산업계에 몸담고 있는 분들의 근심걱정이 더 많겠지만 졸업을 앞둔 청소년들은 더욱 힘겹게 느껴 질 것이다. 내가 20대 때에도 지금의 젊은 세대와 마찬가지로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었고 어떻게 해야 할 지에 대한 고민의 깊이는 비슷하였으리라 본다. 현대를 살아가는 청소년 여러분께 40년 이상의 교육자로서, 선배로서 한 해를 정리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즈음에 몇 가지를 전하고 싶다.첫째, 할 수 있다는 신념과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는 긍정적인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인생 여정에는 성공과 기쁨이 있는 만큼 좌절과 슬픔도 있을 것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어려운 시련에 봉착하였을 때 가장 필요한 정신 자세는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마음인 만큼 자기 스스로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꾸준히 훈련해야 한다.둘째, 새로운 지식을 익혀 가면서 끊임없이 창출하는 모험정신을 길러 나가야 한다.지금 우리는 일생생활뿐만 아니라 사회구조와 시스템이 변화하는 급변의 시대에 살고 있다. 아무도 이 시대의 변화의 조류를 거역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오늘날 지식이 끊임없이 생성하고 소멸되어가고 있다. 우리는 부단한 배움과 모험정신으로 새로운 지식을 창출함으로서 이 거대한 변화에 과감하게 도전해 나가야 한다.셋째, 끊임없는 자기개발과 철저한 자기관리로 변화에 이끌리지 말고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 가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실수하고 실패한 후 다시 솟아오르는 능력과 의지가 있어야 한다. 꿈을 이루기 위해, 실패가 발목을 잡도록 하면 안 된다. 무슨 일이 벌어지든 앞으로 움직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생각이 중요하다. 항상 자신과 싸워서 이겨야 한다. 자신과 타협을 해서는 안 된다. 가장 경계해야 할 적도 자기 자신이지만 가장 위대한 친구도 버팀목도 자기 자신인 만큼 자기와의 싸움을 통해 지혜를 얻고 인격과 실력을 양성하여 어려움을 극복하여야 한다.넷째,폭넓은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은 물론 평생 배우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지금은 지식정보의 시대이며 그 정보지식의 라이프사이클이 너무나 짧으며 그 변화 속도 또한 점점 가속화되어 가고 있다. 이런 환경 속에서 필요한 창조적인 자세란 머리를 쓰며 사는 것이고 새로운 것을 생각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에 에너지를 공급하기 위한 다양한 공부가 항상 뒤따라야 한다.다섯째, 창조적인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목표 지향적이어야 한다.취업 공부, 학위 취득, 외국어 공부, 다양한 독서, 등 지적노동자가 하는 모든 일은 미래를 위한 창조적인 활동이다.목표가 있으면 비록 그 과정이 힘들더라도 한 단계 한 단계의 성취는 힘과 용기를 줄 것이며 그 한 단계의 성공이 남이 볼 때 하잖은 것에 불과하더라도 즐긴다면 또 다른 창조적인 성공을 위해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다.마지막으로, 창조적인 삶과 더불어 국가와 사회가 여러분을 일으켜 세워주기를 바라기 보다는 이제는 여러분이 당당히 서서 국가와 사회에 이바지 하고 봉사하는 그리고 남을 배려하는 삶을 실천해 나아가야 한다.지난 역사를 돌이켜 볼 필요도 없이 최근 발생한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 등에서 일어난 시민혁명은 결국 지도자가 국가와 사회의 구성원, 국민을 위한 봉사정신이 결여되고 국민을 배려하지 않은 데에서 그 원인으로 볼 수 있다. 회사기업도 ,단체도, 심지어 한 가정도 마찬가지이다.물은 항상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이 근본이다. 여러분의 사랑, 남을 배려하는 마음 또한 낮은 곳으로 향해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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