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면서] 지구, 우리들의 집-두개의 사진 전시회

사진전시회 두개를 보았다. 마이클 케냐의 ‘철학하는 나무’와 얀 아르튀스 베르트랑의 ‘하늘에서 본 지구’를 한 주 간격으로 잇달아 보았다.

 

꽃샘추위가 매콤한 이른 봄나들이로는 넘치는 호사를 한 것이다.

 

전시회를 본 소감을 거칠게 털어놓자면, 베르트랑의 사진은 상처입고 망가져 가는 지구를 찍은 것인데도 너무 아름답다는 것이다.

 

렌즈로 잡아낸 지구의 표정이 작가의 고발 의도와는 달리 너무 아름다워서 애틋하고 안타깝기 그지없다.

 

사람이라는 이기적 동물 70억이 살기 위해 흠집을 내고 망가뜨린 흔적이 울다 지쳐 잠든 어린아기의 얼굴만큼이나 애련하다.

 

말리 통북투에서 목축업을 하던 유목민들이 가뭄 때문에 기르던 가축을 몰살시키고 만든 초라한 채소밭들은 상황의 참담함과는 상관없이 카펫을 펼쳐놓은 듯 보인다. 먼지가 풀풀 날릴 것 같은 모래흙 밭에 퍼질르고 주저앉아 일을 하는 농부의 모습만이 참으로 막연하고 민망스러울 뿐이다.

 

도미니카 공화국의 산토도밍고 야외쓰레기장은 쓰레기 처리시설이 없이 온갖 오물들이 방치된 곳이다. 악취는 물론 유독가스가 발생되어 도시를 오염시키는 질병의 근원지임에도 케냐의 사진에서는 추상화가 따로 없다.

 

수천명의 목숨을 앗아간 살인병기들이 버려져 있는 곳, 알 자라 사막에 있는 이라크 탱크 묘지는 화염을 내 뿜으며 달리던 무기의 위엄(?)은 간곳없이 누추한 몰골로 전쟁의 추억을 반추하고 있다.

상처입었음에도 아름다운 지구

 

마구잡이로 벌목한 산림 지역이며 홍수로 망가진 도심지역, 지구온도 상승으로 무너져 내리는 빙하, 석유 잔유물 매립장 등, 인간 삶의 오만과 무관심의 현장을 고발하면서도 케냐는 한편으로 지구 곳곳에 숨겨져 있는 비경을 들춰내어 “이 아름다운 곳을 지켜야 한다. 지구는 우리의 집이니까” 소리치고 부르짖는다.

 

프랑스의 뉴벨칼레도니의 맹그로브 습지는 고염도 때문에 맨땅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맨땅이 영락없는 하트모양이다. 망가지고 부서지면서도 지구가 여전히 조건없는 사랑을 보여주는 것 같다.

 

반면, 마이클 케냐의 사진은 묵언 수행을 하는 수도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미니멀한 시각으로 표착해 낸 절제된 흑백의 풍경이 보는 이의 감정을 가라앉힌다.

더 망가지기 전에 지켜야

 

겨울 설산, 침묵조차 침묵할 것 같은 고요를 배경으로 검은 나무 하나가 서 있다. 바람도 느껴지지 않는다. 나무는 모든 희망과 욕망을 내려놓고 고뇌도 던져 버리고 그야말로 철학을 하는 것 같다.

 

빙벽을 병풍처럼 두르고 홀로 선 소나무, 바다 한가운데 누가 꽂아놓은 것 같은 작은 바위섬, 그 꼭대기에는 새가 내려앉듯 나무들이 내려앉아 있다.

 

가지 위에 빈 까치집을 얹은 쓸쓸한 나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까치집은 겨우살이 처럼도 보인다. 겨우살이…. 겨우살이는 이제는 없는 막내동생을 그리워하게 한다.

 

조경일을 하던 동생이 어느 날 느닷없이 커다란 푸대 가득히 겨우살이를 따다 주었다. 14미터 높이의 나무꼭대기에 올라가 채취한 귀한 것이니 잘 다려먹으라고 당부를 하고 갔다. 그리고, 아주 갔다. 그 겨우살이를 나는 지금껏 다려먹지 못하고 있다. 아니 다려먹을 수가 없다. 너무 아픈 기억이니까.

 

마음이 쉽사리 팔랑대는 나는 두 전시회를 보고 나자 사진이 찍고 싶어진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다.

 

거장들이 보여준 위용에 이미 압도되어 있으므로 나는 다만 그들이 부르짖고 속삭이는 의미만 되새길 것이다.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예언자들은 올 연말 인류는 지구가 멸망하는 재앙을 입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정말 그럴까? 아름다운 지구, 상처받은 지구, 침묵하는 지구가 드디어, 드디어 견디다 못해 용트림을 하게 된다면….

 

신효섭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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