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면서] 나도 나를 모르는 생각 멈춤

고대 그리스어 ‘에페케인’이란 말은 ‘멈추다’, ‘삼가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판단 중지를 뜻하는 ‘에포케(Epoche)’가 나왔다. 에드문트 후설(1859~1938)의 현상학에서도 비슷한 뜻으로 쓰인다. 일상적 관점을 괄호 안에 넣어 생각과 의식을 멈춰 순수한 체험, 순수 의식을 얻는 걸 말한다. 너무나 당연하고 더구나 객관이라고 아는 걸 괄호 안에 넣기는 쉽지 않다. 불교에서 아상(我相) 이야기도 비슷하다. 내가 있다는 생각, 내가 만들거나 내게 주입된 관념을 버리란 말이다. 왜? 집착과 분열과 갈등이 생기지 않도록. 개인 안에서 저런 것들이 생기면 혼자 괴롭지만, 사회에서 저런 것들이 쌓이면 사회적 갈등이 일어난다. 공부와 학문에서는 정답과 오답의 구분이 제법 확실하다. 그러나 감각, 감정, 생각, 의식 등에서는 그런 구분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건 동물, 인간, 동양인, 한국인 그리고 어느 집안 사람으로서 타고난 유전적 특성들과 살면서 굳어진 상(相), 곧 나의 상 때문에 나타난 거지 그게 꼭 옳고, 그것과 다른 게 그른 건 절대 아니다. 일본의 혐한(嫌韓)이나 유럽인의 유대인 혐오가 다 그렇게 만들어졌다. 우리 사회 안에도 그런 게 얼마나 많겠는가. 다름은 상대를 존중할 때 다양성이 돼 모두에게 도움을 준다. 상대에 대한 존중이 없을 때 다름은 왕따를 낳고 혐오와 갈등을 낳는다. 심하면 살인이 나고 인종 말살 전쟁이 난다. 나도 여전히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일어나곤 한다. 저 짓은 왜 하지? 저걸 어떻게 먹지? 거긴 왜 가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지? 어느덧 그럴 때마다 아상과 에포케를 되뇐다. 공부 때문에 유럽에 나가서 지내던 딸이 객원교수를 명받아 일시 귀국해 모처럼 외식하기로 했다. 딸이 태국 레스토랑을 골랐다. 전 같으면 벌써 한마디 나왔을 텐데 에포케, 잘 참았다. 걱정과 달리 음식도 제법 맛있었다. 나 자신이 외국에서 꽤 오래 생활했는데도 낯선 음식에는 유난히 사리는 편이다. 의식 한편에 모름지기 ‘음식이란...’ 생각이 상이 돼 박혔던 탓이다. 그래 봤자 부모님이 남겨 주시고 자라면서 입에 익은 것뿐인데 말이다. 나도 나를 잘 모르는데 조금 더 들어가 보면, 두 눈으로 직접 보았다고 그것이 반드시 실재고 그게 본디 모습이라고 할 수도 없다. 시야가 다르고 시력도 다르며, 시각정보를 해석하는 뇌도 다르기 때문이다. 하물며 학교에서 배운 독서나 경험으로 얻은 지식도 마찬가지다. 진리로, 공리로 인정된 것이라면 몰라도 적어도 자기 지식이 더 낫다고 우기지는 말아야 한다. 우길 게 아니라 그냥 증명해 보여주면 된다. 무엇보다 서로 상대를 존중해 다양성의 꽃을 피우면 좋겠다. 김근홍 강남대 교수·한독교육복지연구원장

[아침을 열면서] 자연을 관찰해보자

‘차르르르’ 암컷을 부르는 수컷 귀뚜라미는 앞날개를 열심히 비벼 댄다. ‘끼룩끼룩’ 시베리아에서 출발한 기러기 제1진은 일찌감치 한반도를 찾아왔다. 콘크리트 구조물로 가득 찬 도심에도 기어이 가을은 온다. 뜨거운 여름 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은 않고, 창밖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청량감을 가득 안겨준다. 개인적으론 1년 중 서늘함이 반가운 이 시기를 가장 반긴다. 하늘은 높되 여전히 숲은 푸르다. 만추의 서글픔과는 아직 거리가 있어 안도한다. 뭇 생물들은 저마다 생명 활동을 통해 우리에게 계절의 변화를 알려준다. 가까이 존재하는 자연과 생명이지만 사실 대다수 시민들은 자연에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동네에 피어 있는 야생화나 새에 대한 지식보다 날마다 접하는 주가지수나 연예계 뉴스에 익숙하다. 자연과 멀어져 있기에 그만큼 더 쉽게 자연의 훼손과 소멸을 간과하게 된다. 우리 곁에 살아가는 생명체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면 우리 사회는 보다 지속 가능하고 자연 친화적인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다. 우선 일상 속 자연의 존재에 눈을 뜨는 것이 시작이다. 자연에 주의를 기울이고 관찰하다 보면 경외심과 기쁨이 따라온다. 우리를 둘러싼 많은 생명이 존재하며 함께 살아가는 이웃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보다 의미를 확장시키자면 시민과학(Citizen Science)에 직접 참여하는 방법도 있다. 시민과학은 대중 모두가 함께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과학을 일컫는다. 시민들이 협업하고 데이터를 수집해 과학적인 성과를 이뤄 갈 수 있다. 특히 생태학에 있어서는 일상에서 시민들의 생물 관찰 기록이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학자나 전문가가 매 순간 모든 곳에서 생물을 관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빅데이터 처리 기술과 휴대 전자기기 발달로 시민과학의 중요성과 위상은 높아지고 있다. 시민과학 앱을 사용하면 휴대전화로 쉽게 발견한 생물을 기록할 수 있다. 굳이 멀리 갈 필요는 없다. 부담 갖지 말고 주변에 눈에 잘 띄는 동식물을 중심으로 사진과 관찰 기록을 업로드하면 된다. 동네 공원 개화 달력 만들기, 유리창 충돌 조류 기록 등 특정 미션에 참여할 수도, 새로운 미션을 만들어 볼 수도 있다. 꾸준히 참여하다 보면 관찰 기록이 쌓여 가며 성취감과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관찰한 종(種)의 이름을 몰라도 된다. 시민과학에 참여하는 재야의 고수들과 전문가들이 종 이름을 알려주기도 하고, 오류를 바로잡아 주기도 한다. 시민들의 집단지성이 발휘돼 비로소 자연을 지킬 수 있는 소중한 자료로 거듭나게 된다. 꼭 멸종위기종, 희귀종을 찾는 것만이 가치 있는 일은 아니다. 우리 주변 생물 정보는 생물계절, 기후변화, 외래종 확산, 서식종의 변화 등 생태계 보전과 관리에 있어 중요한 단서가 된다. 지금까지 시민 활동에 의해 수원청개구리 울음소리 수집, 제비 도래 시기 파악, 남방큰돌고래 분포 조사 등의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내가 사는 고장에 어떠한 생물들이 깃들어 있는지 자랑해보자. 시민 한 명 한 명의 관찰이 쌓이고 쌓여 마침내 위대한 우리 동네 생태지도가 만들어진다. ‘2022년 9월 12일 수원시 영통구 XX아파트 정원에서 김XX님이 촬영한 여치 사진’은 절대적 고유성을 가지며 대체 불가한 가치를 가진 기록이다. 생명의 존재를 알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같이 살아가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야생생물과 과학은 결코 먼 곳에 있지 않다. 우리 더불어 시민과학자가 되어 보자. 우동걸 국립생태원 박사

[아침을 열면서] ‘임윤찬 신드롬’이 계속되려면

조성진과 임윤찬. 클래식 음악에 익숙하지 않더라도 문화 이슈나 트렌드에 관심이 있다면 한 번쯤 들어봤을 이름들이다. 두 사람은 영재 교육을 받은 피아니스트라는 공통점 외에도 각각 20대 초반과 10대 후반의 나이에 각 나라의 기라성 같은 연주자들이 경연하는 국제 메이저 콩쿠르에서 당당히 우승해 세계 클래식 음악계의 주목을 받았다. 지금은 클래식계의 BTS(방탄소년단)급 스타가 된 조성진(28)이 21세 때인 2015년 쇼팽 국제 피아노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했을 때만 해도 더 이상 세계 최고 수준의 피아노 콩쿠르에서 20대 초반 한국인 연주자의 우승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제2의 조성진’ 탄생에 대한 기대감과 함께 클래식 유망주를 집중 육성할 전기가 마련됐다는 시각도 존재했다. 그로부터 꼭 7년이 지난 2022년 6월, 이번엔 경기 시흥 출신 임윤찬이 조성진이 우승했을 때 나이보다 세 살 어린 18세에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1위를 거머쥐었다. 세계 메이저 피아노 콩쿠르의 하나로 꼽히는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의 역대 최연소 우승 기록이었기에 클래식계는 환호하고 흥분했다. 쇼팽 콩쿠르 우승 이후 ‘흥행 보증수표’가 된 조성진처럼 임윤찬 역시 클래식 아이돌로 초고속 성장하고 있다. 그의 공연은 독주든, 협연이든 연주의 형태와 상관없이, 티켓 가격과 관계없이 팬들을 동원하며 매진 행렬을 이어가고 있으며, 음악학원 마다 피아노 레슨에 대한 문의가 쇄도하고 있다는 보도가 뒤따른다. 조성진이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다음에 나타난 ‘조성진 신드롬’이 ‘임윤찬 신드롬’으로 고스란히 옮겨간 모습이다. 사실 문화예술산업적 관점에서 보자면, 대중화가 더뎌 산업 규모 역시 대중음악이나 영화, 방송 드라마 같은 대중예술과 비교조차 하기 어려운 순수예술 분야의 척박한 환경에서 조성진과 임윤찬 같은 차세대 클래식 스타가 배출된 것은 경이로운 사건에 가깝다. 이와 같은 배경에는 다양한 요인이 있지만, 민간 분야의 지원이 한 몫 했다고 봐야 한다. 조성진과 임윤찬은 어릴 때부터 기업이 만든 문화재단을 통해 레슨과 연주활동 등에 소요되는 경비를 지속적으로 지원 받으면서 ‘꿈’을 향한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이것은 기업의 문화예술 분야 지원을 의미하는 메세나가 톡톡히 위력을 발휘한 사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인기가 개인적 신드롬에 머물러선 안 되며, 클래식 전반의 관심과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계기가 돼야 한다. 이렇게 하려면 음악영재를 중심으로 한 지원 대상의 범위를 보다 넓히는 시도가 정책적으로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정부는 메세나 활동에 대한 기업의 세제 혜택을 확대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함으로써 기업이 보다 많은 예술영재를 육성할 기반을 마련해줘야 하고, 지방자치단체는 해당 지역에 거주하는 클래식 유망주에 대한 실태를 파악해 지원 방안을 수립해야 할 시점이다. 예술적 재능을 갖추고 있지만 형편이 어려워 중도에 포기하는 클래식 유망주들이 적지 않다는 점은 문화예술의 근간이 되는 순수예술 발전을 가로막고 국가의 문화예술 발전을 저해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수년 뒤에도 클래식 분야의 ‘000 신드롬’이 나타날 수 있을까. 김진각 성신여대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

[아침을 열면서] 폐지 수레와 손길

초록불이 반짝 켜진 횡단보도. 폐지 수레를 힘들게 끌고 건너는 할머니가 있다. 뒤에서 속삭이던 두 청춘이 후다닥 달려가 수레 뒤를 밀었다. 그 순간 할머니가 큰소리를 쳐서 주변이 다 놀란다. 그냥 두라는 것! 고맙지만 됐다고 말하면 될 것을, 지나던 사람들마저 멈추게 한 폐지 수레의 한 장면이었다. 뜻밖의 모습에 놀라 뒤를 따라봤다. 이후 할머니는 좁은 길로 들어가서도 큰소리와 함께 수레를 당당하게 밀고 갔다. 뒷모습만 봐도 머쓱함이 짚인 두 청춘은 어디론지 사라졌다. 힘든 할머니 수레 좀 밀어 드리려는 좋은 마음에 벼락 치듯 닥친 거절이 퍽이나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이 그러할진대, 당사자야 말할 수 없이 쑥스러워 다른 골목으로 피한 듯싶다. 며칠 전에 본 폐지 수레의 뒤끝이 여러 생각을 일깨운다. 남을 돕는다는 것. 그것은 이타적인 마음이 있어야 가능한 행동이다. 두 여성은 힘들어 뵈는 할머니를 잠깐이라도 돕자는 선한 동기에서 묻지도 않고 수레를 밀었을 것이다. 그런데 폐지 수레 할머니는 도움 받을 마음이 애초에 없었던 게다.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았는지 모른다. 그렇더라도 할머니는 왜 선의가 무안하도록 큰소리 거절을 했을까. 그 속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도움도 서로의 이해를 전제로 이뤄져야 편하다는 생각을 돌아보게 된다. 어떤 순간만 아니라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실천이 필요한 정책들처럼. 그 장면을 돌려보니 ‘주다’라는 말의 안팎도 다시 뵌다. 표현에 민감한 입장에서는 ‘가지도록 건네거나 베풀다’라는 뜻풀이의 ‘베풀다’도 좀 걸린다. 선물을 준다는 말은 괜찮은데 어떤 경우에는 시혜적 표현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동등한 사이에서 ‘밥 살게’ 하면 편할 것도 ‘밥 사줄게’ 하면 기분이 좀 다르게 닿는 것이다. 실제로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베푸는 듯한’ 말투나 태도는 젊은 층의 거부감을 부른다. 이와 비슷한 상황을 일찍이 집어낸 소설(김유정, ‘동백꽃’)에 무릎을 친 적이 있다. 마름 딸 점순이가 소작인 소년 ‘나’에게 감자를 주면서 “느 집엔 이거 없지?”라고 해서 호의가 더 마음 상하게 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폐지 수레와 관련해 시선과 표현을 다시 본다. 문학에서도 어려운 타자를 연민과 동정의 대상으로 쉽게 그려온 시선의 반성이 늘었다. 복지 같은 문제 제기를 떠나 일방적인 태도나 시선에 담긴 대상화의 우려 때문이다. ‘상명하달’ 같은 위계적 태도에 대한 반발이 성찰로 이어지는 것도 이런 의식과 닿아 있다. 진심의 연민도 상대의 입장에서 깊이 살피는 태도가 필요한 것이다. 이해와 배려도 대등하고 평등한 마음으로. 정수자 시조시인

[아침을 열면서] 문화융성과 컬처노믹스

백범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 마지막 편에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로 시작해서 “오직 한없이 갖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라며 문화강국을 만들고 싶어 했다. 1947년 ‘나의 소원’이란 제목으로 발표한 글이다. 21세기에 이른 지금 세계 각국은 문화융성에 방점을 찍고 산업을 개발하고 문화를 발전시키려고 노력한다. 과거처럼 군사력과 경제력만으로 세계 주류에 진입할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1990년 덴마크 코펜하겐대 페테르 두엘룬 교수가 문화(culture)와 경제(economics)를 합성한 ‘컬처노믹스(Culturenomics)’를 주창했다. 문화와 산업의 융합, 문화 예술을 산업으로 개발, 문화를 바탕으로 한 사회 질서 만들기 등 우리의 생활 전반에 걸쳐 문화를 접목하는 작업이 21세기의 성장동력이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실제로 지금 세계 각국은 컬처노믹스의 꽃을 피운다. 전자제품에서부터 일상 도구까지 문화의 서사(敍事)를 접목하지 않은 상품은 살아남지 못하는 시대가 됐다. 철강과 조선산업이 사양길에 들어서면서 쇠락하던 스페인 바스크 지방에 있는 도시 빌바오는 구겐하임미술관을 세워 도시를 다시 살렸다. 또한 카탈루냐 지방에 있는 조그마한 시골 마을 피게레스는 달리 미술관 하나로 수많은 관광객을 불러 모으고 있다. 광복 77년이 지나 오늘에 이른 우리는 광복 직후 다시 일으켜 세울 우리나라를 문화가 융성한 나라로 만들고 싶다고 외친 백범 김구 선생의 선견지명이 어느 정도 이뤄졌을까. 한없이 부끄러운 마음이 앞선다. 문화를 융성시켜 문화강국을 만들려면 먼저 인문학을 살려야 한다. 문사철(文史哲), 즉 문학·역사·철학이 바로 세워져야 문화가 융성할 수 있다. 문화는 스스로 움직이며 세포분열로 확산하는 생명력이 있다. 이 살아 움직이는 문화를 창조하고 누리는 원천(源泉)이 인문학이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2021년 국민 독서 실태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성인 한 사람이 1년에 책을 4.5권 읽는다고 한다. 이 숫자에는 중요한 의미 하나가 숨겨져 있다. 이 수치는 이보다 더 많이 읽은 분들과 아예 한 권도 안 읽는 분들을 섞어서 평균 낸 것이다. 책을 한 권도 안 읽은 사람이 몇 명인지는 알 수 없다. 왜 이런 건 밝히지 않는지 한번 새겨보고, 1년에 나는 책을 몇 권 읽는지 남들이 한껏 높여 놓은 통계를 얼마나 삭감하고 있는지 한 번 되돌아보라는 의미가 이 수치에 숨겨져 있다. 김호운 소설가·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

[아침을 열면서] 유한한 삶이 주는 성찰

우리는 일상을 살면서 종종 착각을 하곤 한다. 20대 청년 대학생들에게 ‘나의 생은 앞으로 얼마나 남아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보면 대부분 40년 혹은 60년이라고 답한다. 평균 수명에 따라 그렇게 셈했을 것이다. 최근 보건복지부 발표에 따르면 한국의 평균 수명이 2030년도에는 81.9세에 이르러 세계 최고 수준의 장수국가가 된다고 한다. 요즘은 100세 시대라고 해서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아직 80여년이 더 남아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명백한 착각이다. 역사적으로 장수를 누린 사람은 있었지만, 단 한 명도 죽지 않고 영생한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죽음이 나와는 무관한 일이고, 인생은 삼세판이 가능한 시간적 여유가 충분하다고 착각하고 시간을 허비한다. 스티브 잡스는 췌장암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는 도중, 2005년 스탠퍼드대 졸업식에서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17세 이후 33년간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면서 스스로에게 말했다. 만일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나는 오늘 하려는 것을 할까? 그리고 여러 날 동안 그 답이 ‘아니요.’라는 것으로 이어질 때, 나는 어떤 것을 바꿔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오천원짜리 지폐에 새겨져 있는 율곡은 16세 때 인생의 큰 역경을 겪는다. 스승이자 어머니인 사임당 신씨가 홀연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인생에 대해 깊은 회의에 빠진 그는 삼년상을 마친 이후, 머리를 깎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불경공부에 몰두했다. 꼬박 1년 동안 죽음이란 무엇이고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다 뜻한 바가 있어 산을 내려와 자신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오죽헌에 돌아온 후 제일 처음 한 일은 스스로를 경계하는 글인 ‘자경문’을 지은 것이다. 모두 11조목으로 이뤄져 있는데 첫 문장이 뜻을 세우는 것으로 시작한다. ‘뜻을 크게 가지고 성인을 본받되, 조금이라도 미치지 못하면 더욱 노력해야 한다.’ 첫 단추를 잘 꿰어야 나머지 단추들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다. 잘못 꿰면 단추는 어색하고 불편하다. 삶도 마찬가지다. 맹자는 말한다. “사람마다 자기에게 귀한 것이 있지만, 생각하지 않을 뿐이다(人人有貴於己者, 弗思耳).” 경제적인 부유함과 사회적인 높은 지위가 자신을 귀하게 한다는 것은 착각이다. 내면의 선한 양심을 드러내며 각자 처한 위치에서 자기답게 살았을 때, 비로소 가치롭고 귀한 존재가 될 수 있다. 유한한 삶에 대한 자각은 자신이 가장 가치롭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성찰하게 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삶으로 이끈다. 이제는 매 순간 스스로에게 절실히 물어야 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그것은 세상을 이롭게 할 수 있는 것인지. 정해지면 주저말고 뚜벅뚜벅 그 길을 걸어가야 한다. 고재석 성균관대 성균인문동양학아카데미 주임교수

[아침을 열면서] 그리운 백야

하얀 밤이라니. 백야(白夜)는 낭만적 매혹이었다. 우리와는 거리가 먼 북반구의 현상이기 때문인가. 소설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백야들은 낯섦의 유혹으로 마음을 더 당겼다. 밝은 밤이라는 백야의 환상이 빙하 이상의 동경을 품게 한 것이다. 하지만 아주 먼 곳의 매력이라 벼르던 백야 체험은 쉽지 않았다. 실제로 맞아 보니 백야는 훤한 저녁이었다. ‘위도 48.55° 이상의 지역에서 여름 동안 밤하늘이 밝아지는 현상’이라는 백야도 곳에 따라 다른 게다. 대낮처럼 태양이 떠 있어 ‘한밤의 태양’이라 불리는 지역이 아니면 대부분 밝은 저녁의 지속이다. 저녁 10시와 새벽 3시의 하늘빛이 거의 같다. 가장 어두울 새벽 3시에서 5시 사이에도 불빛 없는 뜰에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개똥벌레 불빛으로 공부했다는 옛날 선비의 형설지공(螢雪之功)도 아니고, 백야 설렘에 잠은 계속 밀려났다. 오 백야의 난간에서 책을 읽다니, 불면이 대책 없이 깊어져 여정은 힘들었지만. 무릇 여행은 낯선 것을 만나러 가는 길. 낯선 곳에서는 낯선 생각들이 낯선 감각을 깨워낸다. 백야도 먼 곳의 낯선 매혹으로 우리를 낯선 시공간에 세운다. 6월 하지부터 8월 중순까지의 신비로운 백야. 처음 맞은 사람도 그러한데, 현지인들은 밤새 마시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크랴. 8시 이후 마트의 주류 판매 금지에 끄덕이게 된다. 매년 백야를 다양한 축제로 즐기는 문화도 당연한 인생의 찬가라 할 것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오래된 전언처럼. 그런데 다른 지역에서는 백야 아닌 열대야로 고문 중이다. 갈수록 심해지는 지구별의 기후 차별 속에서 곳곳의 산불 비명도 터져 나온다. 빙하가 가속도로 녹는 환경오염에 맞물려 폭염이 점점 거세질 것이라고 한다. 앞으로도 몇 년 간은 폭염이 드셀 전망이라니, 그야말로 세계적 대책과 실천이 시급한 때다. 독하게 길어지는 열대야에 우리도 비책을 마련해야 뜨거운 여름을 웬만큼 넘길 것이다. 하여 낮일 대신 밤일을 늘려볼까. 노트북을 붙잡고 씨름하며 기나긴 열대야를 노려본다. 이 또한 지금 이 곳에서의 백야라고, 새롭게 사귀어볼 수 있을지 마음을 내어본다. 밤새 뒤척거리다 보면 조금 서늘해지는 새벽 공기의 맛. 그런데 새소리, 매미소리, 벌레소리가 또 뜨겁게 달라붙는다. 낭만적이던 매미소리마저 그악스러워지니 자연의 소리들이 열대야의 공범 같다. 모두 피해자려니 하지만. 활짝 열어놓은 창으로 소음의 열기가 들이치며 서서히 달궈진다. 아 팔팔 끓는 8월이 온 게다. 그래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 찬물 끼얹으며 열을 식혀본다. 백야 며칠 즐기다 와 열대야에 늘어지다 들러보니, 코앞에 입추가 있다. 곧 서늘한 바람 데리고 처서도 준비할 터, 다시 오늘의 자세를 가다듬는 한여름 아침이다. 정수자 시조시인

[아침을 열면서] 에센셜리즘과 화광동진

중국의 수필가 린위탕(林語堂)은 “삶의 지혜는 중요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데 있다”고 말했다. 에센셜리즘(Essentialism ; 본질주의)을 좇아 필요한 때 필요한 생각과 행동을 할 수 있는 에센셜리스트(essentialist ; 본질주의자)가 되라는 말이다. 최근에 재미있는 책 한 권을 읽었다. 『에센셜리즘(Essentialism)』(그렉 메커운, 김원호 옮김, 알에이치코리아, 2021.)이다. 요약하면 잡다하게 이 일 저 일 손대거나 관심 두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 하나에 집중하라는 것이다. 에센셜리즘이란 말의 원래 뜻은 본질주의로, 사물의 핵심 의미를 추구하는 걸 말한다. 이를 우리가 일상에서 하는 행동에 적용했다. 이 일 저 일 여러 가지 일에 관심을 쏟거나 감 놔라 배 놔라 하며 남의 일에 쓸데없이 간섭하는 행동을 살펴서 필요 없는 건 버리고 ‘지금’ 내게 꼭 필요한 일 하나를 선택해서 성취하는 데 힘을 쏟으라고 충고하는 책이다. 막 소설가로 등단해 활동하던 젊은 시절, 소설가 김동리 선생님으로부터 ‘화광동진(和光同塵)’이라 쓴 글 한 폭을 받았다. 김동리 선생님은 세배를 오거나 방문하는 사람 가운데 특별히 눈길 가는 분의 이름을 기록해 두고(대학노트에 빼곡하게 이름을 적는다) 마음 내킬 때 휘호를 준비해 건네주는 걸로 유명하다. 순서대로 주는 게 아니라 건너뛰기도 한다고 했는데, 그 기준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장부에 기록은 됐어도 언제 글을 받을지 모른 채 무작정 기다리는 것이다. 미리 써 달라고 채근해도 소용없다. 그냥 기다린다. 짧게는 몇 개월이 될 수도 있고 길게는 몇 년이 지나도 못 받는 분도 있다. ‘화광동진’은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말로 ‘빛을 감추고 먼지 같은 하찮은 일들과도 잘 어울리며 살라’는 뜻이다. 바꿔 말하면 자기 재주를 뽐내지 말고 겸손하게 세상과 잘 어울리라는 말이다. 『에센셜리즘』을 읽다가 불현듯 이 ‘화광동진’이 생각나서 옷깃을 여몄다. 내 재주만 믿고 이 일 저 일 붙잡다가 혹여 놓친 건 없는지 누군가에게 내가 잘났다고 으스댄 일은 없는지 나 혼자 다 해결할 줄 안다고 세상일을 간섭하며 나서지는 않았는지 잠시 시간을 되돌아보면서 살폈다. 이 생각 끝에 나를 더 단단히 다잡은 게 바로 ‘화광동진’이다. 노자는 ‘무위이화(無爲而化)’, 즉 무엇을 억지로 고치고 다듬지 말고 자연의 변화에 순응하며 살라고 했다. 이 역시 화광동진이다. ‘나’를 주체로 세상을 끌고 가지 말고 객체로 세상과 어울려야 나도 세상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가 함께 참 행복을 누리며 사는 ‘무위이화’다. 김호운 소설가·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

[아침을 열면서] 공부, 기쁘지 아니한가!

‘현량자고(懸梁刺股)’라는 말이 있다. 자는 시간도 아까워 끈으로 머리를 묶어 들보에 매달았다는 현량의 고사와 잠이 오면 송곳으로 넓적다리를 찔러가며 공부했다는 소진의 고사가 결합된 말이다. 공부에 빠져 공부를 위한 삶을 살았던 사례는 같은 방식은 아니더라도 여전히 수많은 학생들을 잠 못들게 하며 영향을 주고 있다. 빠르면 초등학교 입학하는 순간부터 옆 눈 가린 경주마처럼 입시의 긴 터널을 통과하기 시작한다. 대학 가면 해결될 줄 알았던 공부 열풍은 스펙 쌓기로 지속되고, 취업 후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경쟁으로 계속된다. 수단으로 전락된 공부 때문인지, 최근 배움의 전당이 흔들리고 있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에서 도쿄대가 찻잔과 같은 전문적 바보를 양산해왔다고 진단한다. 우리는 왜 공부를 하는 것일까. ‘공부(工夫)’의 ‘공(工)’은 땅을 다질 때 쓰던 돌 절굿공이를 형상하고 있다. 절굿공이로 땅을 다지듯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히는 것을 의미한다. 공부를 의미하는 ‘학습’도 논어 첫 문장에서 기인한다. ‘배우고 부단히 익혀라[學而時習]’. ‘배움[學]’은 새가 하늘을 날기 위해 부단히 힘쓰는 ‘익힘[習]’의 과정이 수반돼야 한다. 자율적인 의지를 발현해 선현들의 지혜를 학습하는 것이 우선돼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공자는 배움의 목적이 ‘자기를 위한 것[爲己之學]’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남의 시선이나 외부 기준에 부합하는 공부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공부는 자기다움을 완성하기 위한 과정이어야 한다. 퇴계는 깊은 산 무성한 숲에 홀로 피어난 난초가 남에게 향기를 자랑하기 위해 꽃 피우지 않듯이, ‘천성(天性)’ 그대로 꽃을 피우고 향내를 풍기는 자기 함양의 노력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장미꽃은 장미꽃대로, 안개꽃은 안개꽃대로 묵묵히 자기 모습을 꽃피워야 아름답다. 스티브 잡스는 말한다. “다른 사람들의 견해가 여러분 자신 내면의 목소리를 가리는 소음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의 마음과 직관을 따라가는 용기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나다움’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나 사회적 통념에 나를 맞추느라 시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울려오는 직관에 귀 기울이고, 그 모습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논어는 공부의 결과가 기쁨(不亦說乎)이라고 강조한다. 배움의 과정이 고통스럽다면, 지금 하는 공부가 남을 위한 공부인지 나를 위한 공부인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나다움을 찾아가는 공부는 결과의 좋고 나쁨과 무관하게 그 자체가 기쁨을 줄 수 있다. 나를 위한 공부는 그것이 무엇이든 자체가 목적이고 과정도 의미 있다. 즐거움은 덤이다. 고재석 성균관대 성균인문동양학아카데미 주임교수

[아침을 열면서] 마침내

‘마침내’ 이 말에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면? 마침내 <헤어질 결심>을 본 소회와 영상이 겹칠 것이다. 칸 국제영화제에서 박찬욱 감독에게 감독상을 안긴 그 영화. 영화제 동안 현지 평점도 최고라서 부풀었던 <헤어질 결심>의 황금종려상 기대는 감독상으로 서운함을 달래야 했다. 마침내는 영화에서 한국어를 잘 못하는 중국동포(탕웨이)가 쓴 말이다. 그 단어가 새삼 이색적으로 도드라지게 닿은 것은 대사도 영화의 미장센처럼 만드는 감독의 힘이겠다. 마침내가 ‘결국, 끝내, 기어코, 급기야, 필경, 드디어’ 같은 유의어보다 일상어로 덜 쓰이는 까닭일 수도 있다. 아무튼 마침내는 ‘마지막에 이르러’를 강조하는 느낌이 강하게 전해지고 잔상이 오래 남는다. ‘어떤 경과가 있은 후 마지막에 이르러’라는 말뜻이야 다른 유의어에도 비슷이 담겼지만. 다 알다시피 영화는 문학, 미술, 음악 등을 영상에 녹여 담는 종합예술이다. 대략 두 시간에 예술성은 물론 세계인을 휘어잡을 대중성까지 담보하는 장르적 융합으로 작품을 빛낸다. 한때는 세계 영화판을 쥐락펴락한 양대 산맥으로 미국영화의 대중성과 유럽영화의 작품성을 대별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 칸영화제에서 보듯, 한국영화도 세계의 주목이 집중될 만큼 비약적 발전과 위상을 갖췄다. 그런 중에 감독상과 남우주연상은 큰 성취로 지면을 즐겁게 달궜다. 봉준호 감독의 황금종려상 수상 후이지만 한국영화사에 남을 역사를 쓰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영화를 찾아보며 아쉽게 여겨진 대사도 달라졌다. 철학과 문학을 녹여 담은 명대사는 명장면과 함께 오래 회자되며 영화의 위상을 높여왔다. 그 전에는 나만의 허전함이었는지 모르지만, 곱씹을 대사로 거듭 호명되는 영화들에 한국영화는 별로 많지 않았다. 요즘은 대사의 매력을 다시 쓰며 활용하는 눈 높은 관객들의 호응과 향유를 받는 게 많아졌지만 말이다. 책 속에 잠자던 단어나 문장이 영화에 나오면 그것을 다시 즐기며 한국어의 영역을 넓히는 맛이 좋다. 〈헤어질 결심〉에서도 여러 명대사가 운위되는데 ‘마침내’ 또한 묘한 매력으로 되새김 중이다. 마침내, 기다린 영화에 ‘N차 관람’ 관객도 늘고 있다고 한다. 대중적 흡인력은 적은 편이라도 찐 관객의 여러 번 관람이 영화를 한층 풍요롭게 한다. 영화도 관객이 같이 키워가는 것, 보는 사람이 늘수록 더 새롭고 다양한 영화를 만날 기회도 많아진다. 그렇듯 마침내 한국영화를 즐겨 찾는 외국인이 확연히 늘기까지 영화계는 얼마나 많은 피눈물을 바쳤을지. 그래서 마침내보다 계속 더! 널리 세계로 나아가길 바라는 마음이다. 연일 폭염이라 마침내 더위가 물러간다는 소식이 간절하다. 마침내 뭔가를 이루는 것도 좋지만, 지금은 지독한 폭염만이라도 물러가주면 좋겠다. 정수자 시조시인

[아침을 열면서] 더닝 크루거 효과

여러 사람이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십중팔구 정치 또는 특정 정치인이 화제로 올라온다. 그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두 번 놀란다. 사람들이 언제 이렇게 모두 정치 전문가가 됐는가 놀라고, 이러다 혹시 국민 한 사람당 나라 하나씩 가지게 되는 건 아닐까. 그렇게 되면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국가가 될 수도 있다는 착각을 하다가 놀란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일까 아닐까 궁금해한 적 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때까지도 선진국이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기준이 문화의 질량인 줄 알았다. 그게 아니라 경제지표가 기준이라는 사실을 알고 처음에는 좀 의외다 싶었다. 그런데 사실 잘못 이해한 게 아니었다. 선진국을 결정하는 경제지표에는 눈에 보이진 않으나 문화가 짝으로 붙어 다닌다. 우리는 재산이 많으면 부자라고 하나 선진국이라 불리는 나라에서는 번 돈만큼 문화를 이해하는 마음을 함께 쌓아야 부자라고 하며 사회로부터 존경받는다. 돈이 많다고 해서 모두 부자가 아니라는 의미다. IMF가 발표한 GDP 순위를 보면 우리나라가 세계 10위(2021년 기준)다. 엄청난 부자 나라다. 그렇다면 문화를 이해하는 질량도 세계 10위일까? 1999년 코넬대학교 사회심리학과 교수 데이비드 더닝과 그의 제자 저스틴 크루거가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험해 ‘무능한 사람의 착오는 자신을 오해하는 데서 비롯되고 유능한 사람의 착오는 타인을 오해하는 데서 생긴다’라는 결과를 얻어냈다. 이를 ‘더닝 크루거 효과(Dunning-Kruger effect)’라고 한다. 쉽게 설명하면 빈 깡통이 소리가 더 크고,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과 같은 의미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책을 여러 권 읽은 사람보다 한 권 읽은 사람이 더 큰소리치며 잘 사는 세상을 보고 ‘더닝 크루거 효과’라고 말한다. 많이 아는 사람은 자신을 과소평가하며 앞에 나서지 않고, 조금 아는 사람은 자신을 과대평가하며 주름잡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 원미란 작가의 단편소설 『고상한 소스의 세계』를 읽어보면 우리가 어디쯤 와 있는지 대강 가늠된다. 우리는 ‘고상한 소스’를 먹으며 그게 음식의 참맛이라 믿는다. 이 고상한 소스에 길들이면 음식이 된 원재료는 까마득히 잊는다. 그래서 너도나도 고상한 소스로 자신을 감추는 일에 귀재가 되려고 한다. 양념 잘 치는 사람이 주인 행세하는 사회, 이 또한 더닝 크루거 효과가 만든 현상이다. ‘고상한 소스의 맛’을 걷어내고 음식 원재료의 맛을 찾아내는 힘이 문화에 있다. 아무리 현란한 소스로 포장하더라도 음식을 만든 엄마의 마음을 찾아낼 수 있을 때 ‘엄마의 손맛’을 제대로 안다. 이것이 문화의 힘이다. 김호운 소설가·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

[아침을 열면서] 여전히 유효한 미래사회 보편가치 효

영국의 역사학자 토인비는 한국의 효사상과 가족제도 등의 설명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한국의 효 사상은 인류를 위해서 가장 필요한 사상이라며 서양에도 효 문화를 전파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한국이 지닌 빼어난 문화중 하나로 손꼽히며 사회를 유지하는 근간으로 기능하였던 효가 어찌 된 일인지 오늘날의 젊은 세대에겐 고리타분한 전통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효의 의미는 무엇일까. 전통사회에서 효는 긍정적인 측면이 많았지만, 부정적인 측면도 적지 않았다. 효라는 도덕관념이 가부장적 상하 지배를 유지하는 규범으로 기능하기도 했고, 효의 본질인 진정성 있는 감정은 온데간데없고, 이익이나 명예를 위해 포장된 효를 행하는 경우도 많았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극단적인 방식으로 효를 실천한 사례들이 기록되어 있다. 손가락을 잘라 수혈하여 병을 치료한 사례를 최고 등급의 효로 인정해 달라는 상소가 올라오자, 세종은 단지(斷指) 등은 비록 정도에 합하지 않지만, 부모를 위하는 마음이 절실하므로, 취하는 것도 좋다고 했다. 생사의 기로에 선 부모의 병을 낳게 할 수만 있다면 신체도 아끼지 않겠다는 자식의 마음이 가상해 상소의견을 받아들인 것이다. 조선 중후기에 이르자, 이런 효의 폐단은 선명하게 부각됐다. 다산은 당시 효행 실천의 문제를 지적하며, 부모를 이용하여 명예를 얻거나, 부역을 피하기 위한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단지 등의 사례가 역사 사료에 나오지 않는 것도, 절실한 마음을 표현한 효행이기는 하지만, 훗날 세상 사람들을 잘못 이끌까 염려돼 기록하지 않은 것이라 본 것이다. 한자의 ‘효(孝)’는 ‘늙을 노(老)’와 ‘아들 자(子)’가 결합된 회의자로, 자식이 노인을 등에 업고 봉양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다만 봉양의 행위에는 진정성 있는 공경의 마음을 담고 있어야 한다. 『논어』에서는 “개와 말도 모두 먹여 길러줄 수 있는데, 공경하지 않으면 무엇으로 구별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다. 부모님을 봉양하는 행위에 공경의 마음이 담겨있지 않으면 먹이주며 기르는 동물을 대하는 것과 다를 바 없게 된다. 부모자식 사이는 천륜 관계에 있기 때문에 ‘감정’의 온도가 따뜻하다. 설령 관계가 소원해져 감정의 온도가 식었다할지라도, 조금만 자극하면 본래 마음의 따뜻함은 금세 회복할 수 있다.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공경의 감정을 행동 동력으로 삼아, 조건 없는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당연히 봉양의 방식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다. 디지털혁명이 생활문화로 스며든 이후, 해외에 있건 지방에 있건, 언제든 SNS로 부모님과 편리하게 소통할 수 있고, 온라인 배송을 통해 손쉽게 마음을 전할 수도 있다. 또한 봉양에는 물질적 봉양을 넘어 부모님 뜻을 존중하는 ‘양지’의 의미 역시 담고 있다. 부모님이 바라는 것을 아느냐고 대학생들에게 물으면, 대학 잘 가면, 학점 잘 받으면, 취직 잘하면 부모님이 기뻐할 것이라 대답하곤 한다. 『맹자』에서는 “자신을 돌아보아 참되지 않으면 부모를 기쁘게 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단언한다. 고정된 형식에 얽매이지 말고 내면에서 드러나는 따뜻한 공경의 감정을 부모님께 전하고, 자기가 처한 자리에서 사욕에 휘둘리지 않고 오직 바른 마음으로 지금 이 순간을 살아, 세상에 선한 영향을 주는 존재가 되는 것이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효의 본질이자 이상이다. 고재석 성균관대 성균인문동양학아카데미 주임교수

[아침을 열면서] 빼앗긴 그늘을 그리며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푸라타나스/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김현승, 「푸라타나스」) 이 시를 뇌던 시절, 길가나 교정에는 플라타너스가 많았다. 넓적한 잎으로 그늘을 크게 지으며 땡볕을 가려준 나무였다. 시가 깊이 닿아서인지, 버즘나무보다 플라타너스가 더 정겹게 입에 붙었다. 유독 크고 너른 잎사귀들로 제 풍치를 우람하게 만드는 플라타너스. 공해에 강하고 빨리 자라며 그늘까지 넓어서 한때는 가로수 나무로 불릴 만큼 인기도 높았다. 그런 플라타너스 풍경으로 소문난 길은 영화 출연도 했건만, 어느새 많이 사라졌다. 알레르기 유발이나 꽃나무를 선호하는 정서에서도 밀렸지 싶다. 밀려난 플라타너스들은 어디서 푸른 머리를 적시고 있을까. 그런 그리움에 돌아보니 와중에도 남아 있는 플라타너스 우듬지가 민머리처럼 휑하다. 새 가지들이 삐죽삐죽 겨우 잎을 내미는 모양새다. 큰 잎사귀와 무성했던 가지들을 거의 다 쳐냈으니 나무라 부르기에도 민망한 꼴이 된 것이다. 그동안 지나친 가지치기에 대한 지적이 있었지만 올해도 어김없이 마구 잘라낸 결과다. 가로수가 상가 간판을 가리거나 알레르기를 유발한다는 민원에 따른 조치라면, 공원의 나무들은 왜 그리 심하게 쳐냈는지. 일부러 찾던 그늘이 좋은 길. 나무들 비명이 들리는 듯해 쳐다보고 싶지도 않고 지나가기도 편치 않다. 지친 걸음을 쉬고 책을 읽곤 하던 나무 그늘 아래 벤치마저 빼앗긴 셈이다. 도대체 가지치기의 기준은 어떻게 마련하고 행하는 것인지 의아하다. 가지치기로 흉해진 가로수 모습을 공원에서도 마주치니 불편하기 짝이 없다. 공원의 나무는 과실수나 관상용 정원수와는 역할이 다르지 않은가. 앙상해진 나무들이 그럼에도 새 잎을 열심히 펼쳐내고 있다. 잘린 팔을 힘껏 내어 뻗는 모습이 딱하다. 걷는 사람들은 땡볕 가려줄 푸른 그늘 빼앗긴 나무 밑을 얼른 지나간다. 그늘에 기대어 쉬던 걸음을 재우치며 미안한 마음이 든다. 갈수록 차가 늘면서 인도가 차도에 먹히는 것도 억울한데 가로수 그늘까지 앗기다니, 이건 시민의 행복권 침해라고 분개하는 마음도 커진다. 걷고 싶은 도시, 아름다운 도시의 길에는 가로수도 큰 역할을 하건만 너무 쉽게 쳐내기를 감행하니 말이다. 그늘의 힘이 나날이 크게 닿는 철이다. 그늘막 설치도 좋은 배려지만 가로수 그늘 키우기가 더 절실하다. 알다시피 나무는 이산화탄소 흡수에 따른 공기 청소는 물론 대기 온도 낮추는 큰일을 말없이 수행한다. 내년에도 흉해진 가로수를 보지 않으려면 가지치기의 기준과 비율을 정해야 할 것이다. 올해 애써 자란 나뭇가지들이 내년 여름에는 푸른 그늘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정수자 시조시인

[아침을 열면서] 니체의 ‘아모르파티’와 노자의 ‘거피취차’

춘추시대 사상가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문을 연 노자(老子)는 우리에게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道]을 제시했다. 노자 사상을 정리한 책이 ‘도덕경’이며 그 사상의 핵심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다. 억지로 고치고 다듬어 무엇을 만들지 말고 흐르는 물처럼 자연에 동화해 살아가라는 것이다. 쉬운 듯하나 해석하기도 행동으로 옮기기도 어려운 말이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이 내놓는 노자 사상의 해석 또한 분분하다. 무위(無爲)는 유위(有爲)의 반대 개념이다. 대부분 세상 사람들은 유위에서 살아간다. 유위는 무엇을 원하고 무엇에 의지하는 것, 즉 인연에 따라 쌓은 물질에 의해 능력을 만드는 걸 일컫는다. 지식이든 재물이든 이를 쌓아가는 일이 유위에서 일어난다. 노자는 이 유위를 버리고 반대쪽에 있는 무위를 선택하라고 했다. 대다수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의 질서를 버리고 비어 있는 공간인 무위에 서라는 거다. 그래서 노자는 알기도 따르기도 어렵다. ‘도덕경’ 5천자 중에서 딱 잡히는 대목이 몇 군데 있다. 이것만 제대로 발견하면 노자의 길에 들어선다.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와 ‘거피취차(去彼取此)’가 그것이다. ‘무위이무불위’는 무위에서 뭘 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뜻이다. ‘거피취차’는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잡으라는 뜻이다. 이 두 말은 서로 일맥상통한다. 무위는 유위와 달리 앎이 없는 공간이다. 자연의 질서에 맞추어 오직 지금 내가 원하고 생각하는 대로 길을 만들며 행동하는 공간이다. ‘거피취차’를 다산 정약용은 ‘이상을 버리고 일상에 몰두하라’라고 해석했다. 머릿속에 그림 그리지 말고 지금 눈앞에 보이는 현상을 붙들라는 의미다. 이 두 명제를 달리 풀어보면 학습된 사고에서 벗어나 나의 눈으로 나를 발견하라는 의미다. 낯설지만 그게 노자가 말한 ‘길’이며 내가 가야 하는 길이다. 지금 내가 가는 길을 바꾸지 않으면 나는 그 길로만 가게 된다. 누구나 인생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쯤 하지만 돌아서면 여전히 그 길 위에 서 있다. 익숙한 길을 놓지 못해서다. 방향을 바꾸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낯선 길로 가야 인생이 바뀐다. 이게 ‘거피취차’다. ‘무위이무불위’와 ‘거피취차’는 모두 같은 길 위에서 만난다. 니체가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고 한 ‘아모르 파티(amor fati)’도 호라티우스가 지금, 이 순간을 즐기라고 한 ‘카르페 디엠(carpe diem)’도 결국 같은 길 위에 있다. 쥘 들뢰즈가 말한 ‘차이와 반복’ 역시 그렇다. 김호운 소설가·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

[아침을 열면서] 제대로 겸손하기

요즘 청년들이 일자리 구하기가 힘들어서인지,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알리는 자기 PR이 취업의 비결이라 입을 모은다. 물건도 어떻게 포장하느냐에 따라 매출이 달라지듯, 경쟁시대에 자신을 포장하여 상대방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전통 사회에서 한결 같이 지혜로운 어른으로 성장하기 위해 반드시 갖춰야하는 덕목으로 겸손을 강조한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어쩜 자기 자신을 낮추거나 자신의 좋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태도를 연상하게 하는 겸손은 현대사회에서 점차 설자리를 잃어 간다는 생각도 하게 한다. 겸손은 무엇일까? 제대로 겸손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 『주역』에서는 겸손을 ‘地中有山(지중유산)’ 이라하여, 땅 속에 거대한 산이 박혀 있는 모습을 상징한다. 땅 위에는 웅장한 산도 있고, 밋밋한 평지도 있고, 움푹 들어간 구덩이도 있다.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위대한 업적을 이룬 사람은 병풍처럼 우뚝 솟은 설악산 울산바위처럼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활짝 펴게 하고 감동을 안겨준다. 다만 대부분의 우리는 되어가는 사람이기에, 처음부터 높은 수준을 기대하기 어렵다. 만일 평지처럼 평범한 자기 모습이 작아 보여, 남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조급한 마음을 가진다면, 관심은 저절로 밖으로 항하여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장마에 내리는 장대비는 순식간에 세상을 물로 채우지만, 마르는 것은 서서 기다릴 수 있을 정도로 빠르다. 남의 시선을 위해 화려하게 포장한 모습은 금세 바닥을 드러낼 수 있다. 겸손한 자는 세상에 알려진 명성이 실제 모습보다 지나친 것을 수치스럽게 여긴다. 관심의 방향을 안으로 틀어 자신의 모습에 집중하고, 있는 그대로 모습이 드러나기를 유념한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부족 역시 직시하여 미흡한 부분을 채워나가기 위해 노력한다. 평지는 그 위에 높은 산도 없고 밋밋하여 우습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사실 그 속에 거대한 산이 박혀 있어 함부로 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자신의 부족을 고쳐나가 내면을 꽉 채운 겸손한 사람은 수준의 높고 낮음과 무관하게 모두 감동을 줄 수 있다. 겸손의 결과를 『주역』에서는 ‘君子有終(군자유종)’이라 하여 결국 자기 모습을 이루어 유종의 미를 거두고,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는 귀한 존재로 성장하므로, 형통하다고 풀이한다. 실제보다 지나쳐 보여 지는 것을 경계하고, 좋은 것은 좋은 대로 부족한 것은 부족한 대로 있는 그대로를 자연스럽게 보여 지게 하여, 자신의 부족을 채워 나가는 것이 제대로 겸손 하는 방법이다. 근본에 힘쓰면서 자기답게 살아, 작게는 자신에게 크게는 세상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비결, 매 순간 겸손을 새기면서 제대로 겸손을 실천하는 데서 출발한다. 고재석 성균관대 성균인문동양학아카데미 주임교수

[아침을 열면서] 몽니와 추앙

몽니와 추앙은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다만 묻혀 있던 단어를 누군가 되살려 쓴 뒤 활용되는 점이 닮았다. 몽니는 어느 정치인이 쓰며 존재감을 만천하에 새로 드러낸 고유어다. 추앙은 최근 TV드라마 작가가 새롭게 살려 쓴 덕에 대중의 관심을 받는 한자어다. 평소 잘 쓰지 않던 말들의 먼지를 털어낸 언어 촉에 따라 일상으로 확실하게 등판한 것이다. 몽니보다야 추앙이 당연히 좋다. 견줄 표현도 아니지만, ‘음흉하고 심술궂게 욕심 부리는 성질’이 ‘높이 받들어 우러러 봄’의 급을 따르겠는가. 아무튼 요즘 떠오른 추앙만 봐도 책 속에만 잠자다 불려나와 재활용되는 말로 레트로 같은 유행을 타고 있다. 청춘의 고단한 현실에 겹치는 의미까지 덧대며 젊은이들이 즐겨 쓰니 외연의 확장이 일어난 것이다. 그런 판을 돌아보니 언어를 오늘의 사용법에 어떻게 더 어울리게 쓸지, 날마다 쓰는 언어의 면면이 새삼 크게 닿는다. 몽니는 현실에서 안 만나고 싶은 말이다. 추앙은 현실과 좀 동떨어진 말이다. 그런 몽니와 추앙이 실은 현실에도 자주 출몰한다. 정치의 계절이면 몽니며 추앙의 어금니가 더 드러났으니 귀 씻고 눈 씻고 외면할 수 있다. 그런 정치판의 말판을 떠나 우리 일상을 봐도 닥치는 것들이 많다. 하지만 비일비재한 몽니를 치우고 추앙을 다시 보면 새삼 깨우는 게 많다. 말이란 많이 쓸수록 본뜻보다 풍부해지게 마련이지만, 요즘 만나는 추앙은 일종의 즐거운 발견이다. 혹 “날 추앙해요”라는 말을 들으면 어떨까. 당혹감이 크겠지만 그냥 뜬금없다고 헛웃음을 흘리고 말까. 아무튼 위인이나 부모(드물지만 부모를 존경한다는 사람도 있다) 추앙에는 끄덕이지만, 주변의 장삼이사(張三李四) 추앙은 거의 없으니 갸우뚱하겠다. 그런데 재고할 것은 그 말을 건넨 상대의 상태다. 이런저런 피해로 바닥에 떨어진 자존감을 찾고자 던진 말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터진 청이라면 추앙의 마음을 보내줄 수도 있지 않을까. 그 마음을 받아 다시 살아갈 힘이 솟는다면. 그렇게 보면 추앙은 어떤 대상에 바치는 순정한 마음이다. 예컨대 시나 그림이나 음악 같은 예술에 바치는 추앙도 있다. 그보다 이해와 배려를 담은 존중의 자세라면 일상 속의 다양한 추앙도 가능하겠다. 아부와는 다른 진정한 마음의 높임으로 말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 일상에는 높임말이 지나치게 넘치는데 높임의 마음은 인색하고 적은 느낌이다. 그런 판에서 몽니를 줄이고 추앙을 늘린다면 기울어진 마음의 평형도 잡고 세상 골목까지 환해질 듯하다. 커튼을 열며 오늘의 추앙을 찾아본다. 오늘의 커피를 음미하는 소소한 즐거움처럼. 추앙이 사랑의 다른 형태로 곁에 선다. 오늘의 길에서도 새삼 추앙하고 싶은 풀꽃들을 만나려니. 정수자 시조시인

[아침을 열면서]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지속’과 메멘토 모리

아침 뉴스를 보다가 문득 스페인 화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Cus, 1904~1989)의 작품「 기억의 지속 (The Persisten ce of Memory)」이 생각났다. 중등학교 교과서에 나올 정도로 유명한 달리의 대표 작품이다. 카탈루냐의 햇볕이 뜨겁게 이글거리던 날 바르셀로나에서 열차를 타고 피게레스에 있는 달리미술관을 찾아가던 기억도 함께 떠오른다. 지나간 기억을 끌고 와서 흐르는 시간을 변형하려는 사람들, 이 남의 기억을 따라 하면서 거기에 자기 푯대를 세우려는 사람들, ‘망량문영(罔兩問景)’ 고사처럼 그림자의 그림자를 좇는 걸 즐기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다, 무의식의 가상공간에서 자기 세상을 만들려는, 달리의 초현실주의 작품 「기억의 지속」을 보는 듯하다. 뉴욕 현대미술관에 있는 「기억의 지속」은 달리가 28살이던 1931년에 그린 크기가 33×24cm인 소품이다. 여명인지 일몰인지 모를 애매한 시각이 수평선에 걸린 사막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에는 모두 4개의 시계가 등장한다. 그중 하나는 테이블 위에 있는 호박(琥珀)처럼 생긴 시계다. 시계 자판에 개미들이 득시글거리기는 하나 그나마도 이 시계만 제대로 형태를 지니고 있다. 나머지 3개는 곧 흘러내릴 듯이 흐물거리며 축 늘어졌다. 그중 하나는 죽은 나뭇가지에, 하나는 테이블 모서리에, 나머지 하나는 사막에 내동댕이쳐진 살점 덩이처럼 이상하게 변형된 사람의 얼굴 위에 걸쳐져 있다. 이 그림들은 무의식의 공간에 흩어져 있는 각각의 기억들이다. 시계(인간의 삶, 또는 기억)가 녹아 늘어지든 멀쩡하든 시간은 계속 흐르며, 흐르는 이 시간 위에 영원한 건 없다. 이 작품을 관통하는 일관된 메시지는 죽음이다. 개미 떼가 오글거리는 호박처럼 생긴 시계에서 그 극명함을 본다. 호박은 보석이다. 보석 같은 삶에도 개미가 득시글거린다. 어릴 때 본 벌레와 박쥐의 사체에 달려들던 개미 떼의 기억을 달리가 여기에 옮겨놓은 것이다. 테이블에 걸쳐져 흘러내리는 시계 위에도 파리 한 마리가 앉아 있다, 샤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는 듯 외로이 서 있는 메마른 나뭇가지에 빨래처럼 걸린 시계, 이상하게 변형된 얼굴에서 녹아내리는 시계, 이 모두 흐르는 시간 위에 옮겨놓은 기억들이다. 이 변형된 얼굴에는 입이 아닌 코에 혀가 달렸다. 맛난 냄새를 맡던 코와 맛난 음식을 먹던 혀는 한통속이라는 뜻일까. 강렬한 속눈썹이 붙은 지그시 감은 눈은 무의식의 세계, 꿈꾸는 현상을 표현한다. 달리의 작품 「기억의 지속」은 자기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의 라틴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다. 잘난 사람 큰소리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 앞에 겸손하라’ 외친다. 흐르는 시간 위에 영원한 건 없다. 김호운 소설가·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

[아침을 열면서] 화 다스리는 근본적인 방법

고재석 성균관대 성균인문동양학아카데미 주임교수분노의 감정이 이는 상태를 ‘화난다’고 한다. 불처럼 뜨거운 분함이 일어나 열이 나기 때문에 ‘불 화(火)’자를 쓴 것이다. 분노가 사회에 만연해서인지,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킹 받네’라는 신조어가 유행한다고 한다. ‘열 받다’에 킹(KING)을 붙여 극도로 화난 감정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화는 없을 수 없다.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부정한 모습을 보고 화나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다만 마음에 쌓아 두거나 극단적인 표출은 개인적 화병과 사회적 범죄로 이어진다. 다스리지 않는 화(火)는 화(禍)를 불러온다. 고전 <논어>에서는 ‘분사난(忿思難)’이라 하여, 화가 나더라도 마주하게 될 곤란한 상황을 생각하며 절제해야 한다고 말한다. 잘못 표현하거나 지나치게 드러난 화는 어려움을 초래할 수 있다. 실제 사소하게 시작된 다툼에서 화를 절제하지 못해 씻을 수 없는 결과를 맛본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다만 내키는 대로 화를 내어 닥칠 곤란 때문에 화를 다스리는 것은 근본적인 처방이 아니다. 공자는 배움을 좋아한 안연이 ‘화를 옮기지 않았다(不遷怒)’고 극찬한다. 며칠 전에 났던 화를 시간을 달리하며 지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갑에게 났던 화를 대상을 달리하며 을에게 옮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화의 원인은 마주한 대상에 있지, 자기 마음에 있지 않다. 자기 마음에 남아 있는 화에서 화가 옮겨지고 있다면, 대상과 무관하게 화를 내고 있는 것이다. 마음에 남아 있는 화를 다스려야 적절하고 상식적으로 화를 낼 수 있다. 화가 나서 열이 나고,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면, 우선 화를 표출한 뒤 겪게 될 어려움을 생각하며 화를 다스리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도 화난 감정이 지속돼 다른 사람에게 옮겨지고 있다면 화난 감정에서 잠시 떨어져 화의 원인이 현재 마주한 대상에 있는지, 아니면 자신에게 남아 있는 화에 있는지 구분할 필요가 있다. 화가 내 안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화를 다스리며 현재에 집중하는 마음수양의 노력이 필요하다. 맹자는 잃어버린 닭과 개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 하는 사람은 쉽게 볼 수 있지만, 자신의 잃어버린 본심 찾을 줄 모른다고 비판한다. 거울을 닦아야 거울 기능을 할 수 있듯, 깨끗한 마음을 회복해야 화병에 걸리지 않고 극단적인 화를 내지 않을 수 있다. 처음에는 온 힘을 들여 닦아 내야만 때 한 겹을 겨우 벗겨 낼 수 있지만, 두 번 세 번 닦기를 반복하면 힘을 점차 적게 들여도 거울을 맑게 해 지금 바로 여기에 마음을 집중할 수 있다. 화내야 할 때 적절하게 화내고 다른 사람에게 화를 옮기지 않는 비결, 마음 수양에 달려있다. 고재석 성균관대 성균인문동양학아카데미 주임교수

[아침을 열면서] 초록초록 새소리가

나날이 싱그러운 오월이다. 꽃 피고 잎 피고 매일매일 새 춤을 추는 나무들에 취한다. 자연의 순리라는 본성에 따라 본연의 소임을 다하는 나무며 풀들이 미쁘다. 어디선가 미사일이 터져도 우리 주변의 자연은 묵묵히 제 일을 펼쳐 가니 그 위안이 실로 크다. 어두운 뉴스 속에서 초록 아침을 맞으며 감사를 생각한다. 커튼을 여는 순간 한층 명명해진 초록에 눈 씻는 복이 새삼 귀하게 다가온다. 아직은 연두에 가까운 어린 새잎부터 먼저 나와 짙어진 초록 잎사귀까지 다함께 불러주는 오월의 노래다. 무슨 새소리를 초록초록 내는 것만 같아 귀마저 맑아진다. 며칠 전 공원에 옮겨 심은 나무들에게 부디 잘 견디라고 눈인사를 마구 보낸다. 집 안에 섬기고 있는 벵갈고무나무 새잎에도 살랑 입술을 건넨다. 그렇게 초록으로 눈과 귀와 마음을 헹구며 어깨 펴는 아침이 더없이 오붓하다. 그러고 보니 초록에는 육친 같은 느낌이 있다. 산 아래 마을에서 나고 자라며 늘 두르고 살아온 산빛 때문일까. 시멘트 숲에 둘러싸였던 한때는 숨이 턱턱 막혔다. 방 하나라도 온전히 누리고자 독립했는데, 창을 열면 이웃의 시멘트벽이 눈앞을 가로막곤 했던 것이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 집 앞의 초록 인사는 얼마나 큰 호강인지. 그때는 그랬다고, 30년 전만 해도 다세대 주택가는 녹지가 아주 적었다. 지금은 쌈지공원이나 도로 꽃밭을 곳곳에 만들며 도시 미관도 많이 갖췄지만. 국민소득 3만 달러가 넘으면 조경이니 도시 디자인에 신경 쓴다더니 세련된 외모 뽐내는 건물 사이에도 초록이 많이 늘었다. 그럼에도 더 많은 나무, 더 푸른 숲을 기대한다. 땡볕 아래 걷지 않도록 그늘 넓은 가로수가 고루 갖춰지길 고대한다. 나무그늘 좋은 길은 걷기 편하고 맑은 공기도 그만이지만 도시 경관을 수려하게 만든다. 매연과 간판과 요란한 불빛에 지친 눈의 피로 씻어주는 데도 변함없이 일등공신이다. 초록을 희망의 상징으로 삼아온 것도 그렇듯 오래된 자연의 힘에서 연유할 것이다. 되짚어보니, 신록 예찬이 창창했던 예전의 좋은 산문들 또한 덕성 많은 초록에 대한 겸허한 감사였다. 초록의 품을 받들다 문득 드는 생각이 있다. 좋은 나무 한 그루 심어놓고 마지막 한 줌을 넣고 갈 수는 없을까. 수목장도 점점 어려워지는 판에 순진한 생각일지 모르지만, 전혀 불가능한 바람일는지 톺아보는 것이다. 더 널리 초록초록 뿜어 펼치라고 비는 마음만 나무 밑에 담아두고 싶건만. 나의 나무 하나 지상에 심은 양 기대서는 오월 아침, 초록을 흠향하듯 깊이 마셔본다. 초록의 싱싱한 향이 걷는 사람들 발소리를 들어 올린다. 정수자 시조시인

[아침을 열면서] 호라티우스의 ‘카르페 디엠’

시간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심히 오락처럼 시계를 바라본 적 있는가. 없다면 조용할 때 그렇게 시계를 한번 들여다보면 필자처럼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할지 모른다. 디지털이 아닌 초침·분침·시침이 움직이는 아날로그 시계여야 한다. 종종걸음 하는 시계의 초침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 숨이 막힐 듯한 압박을 느낀다. 겅중겅중 뛰는 분침을 보고 있으면 뭔가에 쫓기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움직임이 거의 없는 시침을 바라보면 속이 터질 듯한 답답함을 느낀다. 이것이 열심히 일하느라 미처 발견하지 못한 현재 ‘나’의 모습이다. 우리는 늘 그렇게 무엇에 쫓기듯 오늘을 살고 있다. 많은 철학자와 선지식인들이 과거와 미래를 잊고 오늘 지금 열심히 살라고 했다. 과거와 미래가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다. 미래가 없으면 희망이 없고 과거가 없으면 성찰이 없다. 과거와 미래를 버리라는 게 아니라 부질없는 미련(과거)과 욕망(미래)을 위해 오늘을 희생시키지 말라는 경고다. 오늘 현재를 충실히 살면 반드시 오고야 마는 내일이 되면 어제의 오늘은 과거가 된다. 또한 반드시 오게 되는 내일은 오늘의 미래다. 결국 과거와 미래는 ‘오늘’이 만든 결과다. 지난 일에 미련을 두고 다가올 미래를 고민하며 오늘을 소홀하게 하면 과거도 미래도 함께 희생당한다. 오늘이 없는 사람에게는 과거와 미래도 없다. 그저 바람처럼 지나가는 세월일 뿐이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1989년 톰 슐만(Tom Schulman)의 소설 『죽은 시인의 사회』를 원작으로 한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가 개봉되자 한동안 이 말이 유행했다. ‘오늘 지금을 즐겨라’는 뜻이다. 명문 웰튼 아카데미에 새로 부임한 국어 교사 존 키팅과 제자 6명이 벌이는 이야기로 틀을 깨고 자유로운 이상을 가지라는 교육소설이다. 출세를 위해 틀에 박힌 교육을 받는 제자들에게 키팅이 “카르페 디엠!”하고 외친다. ‘카르페 디엠’이란 말은 고대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Quintus Horatius Flaccus)의 시에 처음 등장한다. 『송가(頌歌, Odes)』 제1권 열한 번째 작품 「묻지마라, 아는 것이」의 마지막 구절이 ‘내일은 믿지 마라. 오늘을 즐겨라(Carpe diem)’다(호라티우스 『카르페 디엠』, 민음사, 2021, p.33). 이 말은 단순히 먹고 즐기자는 게 아니라 오늘(지금)에 충실해야 아름다운 과거도 희망찬 미래도 생긴다는 의미다. 호라티우스는 제1권 세 번째 작품 「그렇게 너를 퀴프로스의」의 마지막 구절에서 ‘인간에게는 못 할 일이 없었다 / 우리는 어리석게도 하늘을 도모하며 / 우리의 범죄로 유피테르가 / 성난 번개를 던지도록 만들었다’(호라티우스 『카르페 디엠』, 민음사, 2021, p.20)라고 했다. 유피테르(Jupiter)는 로마신화의 최고신이며 그리스 신화에서는 제우스다. 인간의 욕심이 도를 넘으면 신이 벌을 내린다. ‘미래의 창고’를 채우려는 마음이 욕심이다. 카르페 디엠은 미래의 창고를 채우려고 ‘오늘(지금)’을 소홀히 하면 미래의 창고는 텅 빈다는 지혜를 담은 시다. 김호운 소설가·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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