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기부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내 기분은 참으로 난감했었다. 기부할 재능이 나에게 있던가? 즉각적으로 떠오른 물음 때문이었다. 기부라는 단어와 재능이라는 단어가 나에게는 그리 만만치 않은 크기였던 것이다. 좋은 일이라는 확신은 들었지만 여전히 막연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겠다는 생각과 함께. 올 봄쯤이었을 것이다. 작은 행사를 진행하기 위해 공연장소를 찾을 때였다. 지인으로부터 헌책방 한곳을 소개 받았다. 책방 안에 작은 공연이 가능한 간이무대가 있었고 옹기종기모여 앉아 커피를 마실수 있는 공간도 있었다. 무엇보다 주민들과 책읽기와 공연이 이루어지며 주민들의 소중한 일상 문화공간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멋진 삶이다. 나는 주인장하고 방문한 목적을 얘기하면서 공간을 빌려주십사 재능기부 한다고 생각하시라 고 말을 건네고 나서 아주 혼쭐이 났다. 이유는 이랬다. 요즘 여기저기서 원고요청이 많이 들어오고 있는데 결론은 재능기부란 명목으로 거저 써달라는 얘기였단다. 글 써서 겨우 먹고사는 글쟁이한테 거저 써 달라면 어떻게 살라는 거냐며 재능기부 말만 들어도 화가 난다는 거였다. 순간 재능기부는 좋은 것이라는 막연한 당위만 가지고 상대방을 압박하고 있는 민망한 상황이 되어버렸고, 죄송하단 말로 수습했다. 그때 주인장의 솔직 당당한 말은 가슴 한 켠을 시원하게 훑고 지나갔었다. 부러웠다. 즐거움이 이웃으로 전이되는 삶 지난 주는 많은 행사가 집중된 주말이었다. 증평문화의집 운영자로부터 온 초청전화가 고마워서기도 했지만, 행선지 중간에 위치한 이유도 있어 증평에서 열리는 축제에 갔었다. 그곳에서 야생초(야생화가 아닌 야생초였다. 이유는 모르겠다) 전시장을 안내해줬다. 국화전시는 본 적이 있으나 야생초 전시는 처음이라 관심을 갖고 한 바퀴 둘러보았다. 몇 가지는 우리집 마당에서도 볼 수 있는 것들이었는데 쑥부쟁이, 줄무늬 둥글레, 바위취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다. 이름은 생소했으나 모양은 많이 본 것이었는데, 그런데 달랐다. 그 품위와 아름다움이 우리 집 마당의 것과 많이 달라 보인 것이다. 겅중하게 키가 큰 쑥부쟁이는 줄기 아래가 말라 버스럭거리는 이파리를 달고 있었는데도 모딜리아니의 푸른 눈을 한 긴목의 여인 같다고 할까. 어쨋든 우아하기까지 하다고 할 수 있는 묘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전체적인 조화에서 오는 아름다움이라고 나름 결론을 지었다. 화분의 모양과 재질, 크기 그리고 심기어진 꽃들의 크기와 개수, 함께 코디된 부재 야생초까지 전체적인 조화가 주는 품위였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꽃에 어울리는 화분을 찾아 청주까지 다니셨다고 한다. 이 날 난 야생초가 들판 野에서 자라는 꽃이라기보다 야함을 숨겨 피워내는 꽃이라고 머릿 속에 입력 했다. 촌스런 도시녀의 야생화 감상은 새로운 아름다움을 느껴보는 훌륭한 기회였다. 우리를 반갑게 맞아준 야생초 동아리 회장님은 화분하나를 주시겠다고 하신다. 작은 감국을 점지했다. 우아한 아름다움이 깃든 흔치않은 꽃 같아서이지만 우선 크기가 작아 가지고 가기가 수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회장님이 내년에 하나 더 키워서 주신단다. 지금은 유일한 화분이니 몇 개 더 만든 후에 나눠주겠다고. 이렇게 씨앗이 있거나 작은 뿌리를 얻어서 키워 여기저기 나눠주신다고 한다. 기르는 방법도 가르쳐주면서. 그리고 한 마디 던지신다. 꽃 보시 하는 거지 뭐! 그것이 진정한 재능기부 아닐까 꽃 보시! 참 예쁜 말이다. 이렇게 아름답고 귀하게 가꿔 남에게 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 같았다. 꽃을 잘 기르는 것도 그렇지만 그 꽃의 아름다움을 최대로 살려내는 심미안은 그야말로 재능이 아닐 수 없었다. 재능기부는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고 어떻게 살고 있느냐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책방을 주민들과 즐겁게 책 읽고, 노래하고 시를 낭송하는 공간으로 삼고 사는 삶. 꽃을 아름답게 가꾸는 즐거움이 옆집으로 전이되는 삶. 이미 재능기부를 하고 있는 삶이 아닐까. 민병은 (사)한국문화의집협회 상임이사
마을만들기는 오늘날 전국적으로 시대의 큰 흐름이 되었다. 그런데 왜 마을을 가꾼다고 하지 않고 만든다고 하는 것일까? 사전적 의미로 만들다는 노력을 기우려 사람이나 사물을 어떤 지위나 상태로 되게 하다.는 뜻이다. 반면에 가꾸다는 물리적이고 시각적인 의미로 성장의 관점에 가깝다. 그러니 마을만들기는 삶의 터전을 공유한 이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는 마을공동체를 그들이 원하는 어떠한 상태로 만들어낸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하 정확한 표기를 위해 그림파일로 대체합니다.>
며칠 전, 한 고등학생이 자신이 살던 아파트에서 투신자살했다는 기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이 놈의 세상은 왜 이 모양이지? 가슴이 시리고 코 끝이 찡했지요. 중학교 때부터 따돌림을 당한 아이였는데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따돌림 당한 걸 알던 친구 녀석들이 그 소문을 퍼트린 모양이었습니다. 그 후 다시 또 따돌림과 폭행을 당했다고 합니다. 죽은 아이의 부모가 폭행에 가담한 학생에게 왜 그랬느냐고 물어봤답니다. 기분 나쁜 일이 있어서 그냥 때렸어요. 부모는 기가 막혀서 그 학생 앞에서 눈물조차 흘리지 못했다고 합니다. 너무 어이없고 속상한 일입니다. 아이들의 폭행과 자살을 막기 위해 정부에서 열심히 뛰고 있지만 결국 역부족이거나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이겠지요. 요즘 어느 학교 앞엘 가나 학교 폭력을 근절하겠다는 의지의 플래카드를 쉽게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의지만 있는 게 아닐까요? 어느 어둔 골목에서 혹은 학교 건물 으슥한 곳, 때론 동네 PC방에서 학교나 정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누군가를 괴롭히고 또 누군가는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학교폭력과 아이들의 자살이 사라지지 않는 건 정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흘러가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이지 않을까요? 아이들의 죽음은 어른들의 잘못 아무리 변명을 하려고 해도 아이들의 죽음은 어른들의 잘못입니다. 아이들을 사랑하지 못한, 생명이 소중한 걸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고통을 견디면 성숙하게 된다는 걸 알려주지 못한 어른들의 잘못입니다. 문제를 아이들에게서 찾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아이들의 문제는 늘 어른들에게 있으니까요. 그래서 글쟁이다운 발상을 해봤습니다. 아이들의 손에 시집을 안겨주고 소설책을 건네주세요. 졸음이나 유도하는, 생명은 소중하다는 틀에 박힌 교육이나 강연을 할 게 아니라 아이들에게 책을 읽을 시간을 주세요.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대학에 가는 것만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 그 나이에 사랑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는 걸 가르쳐주세요. 그리고 그렇게 행동하세요. 아이들은 부모의 등을 보고 자라니까요. 아버지가 세상을 사랑하면 아이도 세상을 사랑하게 되고 어머니가 자신을 사랑하면 아이도 자신을 사랑하게 될 겁니다. 어른이 남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면 아이들도 또래 아이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들이 바르면 아이들은 또래에게 함부로 하지 않을 겁니다. 어느 날 여섯 살 밖에 먹지 않은 아들 녀석과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뉴스를 보게 되었습니다. 어떤 학생이 아파트에서 투신자살을 했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뉴스를 보고 아들 녀석이 자살이 뭐냐고 묻더군요. 자기 자신을 죽이는 끔찍한 일이라는 설명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뉴스가 만연해 있는 세상이니 아이들의 눈을 가릴 수는 없을 겁니다.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쉽게 자살해버리는 세상에 대해 설명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아이들의 죽음이 부모에게 어떤 고통인지도 설명할 수 없었지요. 하지만 모른 척 넘어갈 수는 없었습니다. 더 이상 누구도 볼 수 없게 되는 것이라고 대답해주었지요. 그러자 아들 녀석이 슬프겠다고 대꾸하더군요. 마음과 실천으로 모범 보이자 그래요, 자살은 슬픈 일입니다. 이제라도 어른들이 그 슬픔을 막아야 하지 않을까요. 제도로서가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고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마음과 실천으로 아이들에게 그 등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훗날 아이들이 청년이 되어 보게 될 하늘이 얼마나 파란지, 비를 몰고 오는 적란운이 얼마나 신비로운지, 햇살이 채워진 시골길이 얼마나 경이로운지, 가슴을 저리며 찾아오는 사랑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배울 수 있게 당신의 등을 보여주세요. 아이들의 손에 교과서가 아닌 책을 들려주고 아이들의 손을 잡고 가까운 곳에서부터 여행을 떠나주세요. 그럼 우리의 아이들이 세상과 단절하는 끔직한 거리와는 멀어지지 않을까요. 전민식 소설가
민주정치의 지향점은 사회구성원 모두가 행복해 마지않는 선진정치 실현이다. 국민을 위한 민주주의 정치 실현을 위해 많은 사람이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 우리 사회는 변화되어야 할 부분들이 많다. 가끔 정치인들의 비리가 언론의 도마에 오를 때면, 먼저 생각나는 것이 조선조 성종이다. 당시 성종의 외숙이 수입 목재를 사들여 정자를 지었다는 소문을 듣고 이 사실을 직접 확인한 성종은 외숙의 구명에 관련된 청탁을 피하고자 자신이 거처하는 궁을 잠시 옮기고 나서, 처벌을 한 후에 환궁했다. 정치적 비리에 이처럼 강력한 대처를 했으면서도, 권력에 기생하는 언로(言路)에 경각심을 주고자, 모든 관아에 붓 40자루와 먹 20개를 하사해 임금의 과실을 써 올리라고 명령했다. 이른바 임금으로서의 권력을 행사하기보다는, 국민은 누구나 평등하게 존엄한 존재라는 것과 깨끗한 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임금의 소신 있는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권력이란 직제상(職制上)의 지위에 주어지는 것이므로 권력은 남용 여부에 따라 비난의 화살을 받게 되기도 하고 민심의 옹호를 받게 마련이다. 이처럼 정치가에 대한 평가는 권위 사용 여부에 따라 세인의 평가를 두고두고 받는 것이다. 서양의 정치학 중에도 잡은 권력을 다 쓰면 실패한 집권자가 되고, 잡은 권력의 반만을 쓰면, 역사에 길이 훌륭한 지도자로 남는다는 훌륭한 논리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읽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본격적으로 시작된 대권레이스 동서고금(東西古今)에서 이토록 권력의 남용을 경계한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특권계층에 얽매이기보다는 모든 국민들, 백성들을 어루고 달래 모두가 잘 살아보자는 아주 기본적 복지국가와 정권을 실현해 보고자 했던 것일 게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권력을 남용한 특권층이 언론매체에 가끔 보도되는 것도 사실이다. 사회는 권력을 가진 자보다 약자가 존중되고 보호받는 세상이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한 정화 노력은 꾸준히 하고 있지만, 여전히 그 일소는, 다가가면 저만큼 물러서는 사막의 신기루처럼 멀기만 하다. 그러기에 국민은 나눔복지실현과 더불어 모든 국민이 잘 사는 행복한 사회구현을 실현하겠다는 말에 희망을 품고 대선 때만 되면 그 주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이제 대선주자들의 레이스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매스컴에 대선주자들이 국민을 위한 자신의 견해를 공식적으로 발표하면서 국민에게 자신의 지지를 호소하고 미래비전과 역사관을 밝히는 등 선거대비활동이 눈에 띄게 나온다. 이번 주자들이 발표한 비전들대로 정치가 실현된다면 우리나라는 선진정치에 한걸음 성큼 다가설 것이라고 본다. 문제는 내놓은 정책과 약속을 지켜 내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대선뿐만 아니라 수많은 선거를 치루면서 표를 얻기 위한 선거공약을 수도없이 많이 보고 들었다. 철저한 검증 통해 투표권 행사해야 그때마다 각 후보들은 서로 앞다투어 실현가능한 방안들을 내놓았고, 심지어 구체적인 예산까지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이 내놓은 정책이나 약속은 장밋빛 꿈에서 길거리에 버려지는 선거공보물이나 명함처럼 구겨진 꿈으로 외면되기 일수였다. 이런 일탈의 굴레를 두번다시 짊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후보나 국민이나 모두 달라져야 한다. 후보들은 국민들을 위해 내놓은 공약 실현을 위한 정책비전들을 철저한 검증과 분석을 통해 제시해야 하며, 그 비전들은 국민과의 소통과 신뢰 속에서 맺어진 약속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국민들 역시 한순간의 달콤함이나 지역, 학연, 당색 등에 얽매어 소중한 주권을 특정후보에게 무조건 내주기보다는 철저한 검증과 비교비판을 통해 참주권을 행사해야 한다. 얼마 있으면 풍요로운 한가위다. 오는 12월 대선은 보름달처럼 국민이 행복한 선진정치 실현을 앞당기는 또하나의 이정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윤화섭 경기도의회 의장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초부리, 난생처음 면 소재지로 이사 왔다. 대문을 나서면 녹음이 눈 안으로 가득 차는 곳. 하루를 일찍 열고 일찍 닫아서 사람들 모두 자연을 닮았다. 이곳에서는 아무도 시간에 쫓겨 뛰거나 서두르지 않는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서 서울에서 자란 사람. 서울에서 아이 낳고 여태 살았다. 그러니까 자동차와 빌딩과 소리가 만들어내는 인공의 미에 이미 길든 사람. 멀리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오는 길, 도시의 휘황한 불빛이 눈에 들어오면 그때부터 마음이 놓이던 사람이었다. 소음과 소음 속에서 내면의 소리도 어느새 소란으로 바뀌면서, 흘러가는 물소리가 심장의 속도를 따라가고 있다고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해 종일 창문 열어 집안을 거풍하는 일은 도시에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 먼지는 으레 새까만 것이라 일평생 우기고 살았다. 그런데 웬일일까, 이곳의 먼지는 무척 순하다. 독한 먼지가 없으니 독한 말도 독한 인연도 없겠다. 사람과 사람 사이 야채처럼 순해서 해 종일 문 열어 눈인사로 서로 가까워져도 좋겠다. 고요한 나라에 들어와서 새소리 물소리 바람 소리 사무치는 지금, 할아버지 한 분 빗자루 손에 들고 마을 구석구석을 정리정돈 하신다. 허리 반으로 굽혀서 깨끗하게 비질하신다. 처음에는 마을에서 담뱃값이라도 거둬 드리는 줄 알았는데, 아니란다. 평생 농사꾼이 이제는 근력이 떨어져서 논 대신 땅이라도 쓸어야 마음이 놓이시는 모양이다. 어디서 왔느냐고 낯선 이방인에게 순하게 건네오시는 그 천연의 눈길에 왜 갑자기 마음이 텅 비어서 충만해지는 걸까. 텅 비어서 꽉 찬 느낌. 속이 빈 대나무에 바람이 통과할 때 들리는 소리 같은 것. 바람이 가는 길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나무와 나무 사이 그 틈새로 바람이 지나갈 때 자명하게 들리는 자연의 말. 이 땅에서 오래 살았던 사람들처럼 뿌리는 땅에 박고, 하늘을 우러러 지금 한창 열매를 익히는 중이겠다. 옆집 아주머니 한 분이 농사지은 것이라며 호박 두 개를 건네주신다. 농약 치지 않아서 조금 못생겼지만, 그래도 맛은 일품이라는데. 나박나박 반달로 정성껏 썰어서 새우젓 넣고 자작자작 지졌다. 호박나물에 밥 한 그릇 뚝딱 해치우고 마음은 이미 어둠이 걸어 잠근 초부리의 밤을 서성인다. 마을 사람들 모두 잠들었을까. 이제 막 이사 와서 짐 풀어놓고 낮이고 밤이고 마을을 뒤지고 다니는 나는, 대추나무 그늘에 의자 놓고 느긋하게 몸을 앉힌다. 어디선가 빛이 보이고 유성, 내 이마 위에서 별똥별 떨어졌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재빠르게 두 손 합장하고 무슨 소원을 빌었던가. 모든 것이 제자리에 놓여서 편안한 지금. 나는 이런 것을 자연이라 부른다. 스스로 그러하여 그곳에 있는 것들. 바람이 땅을 통과하면서 내는 숨결. 그 살아있음의 기운으로 대추나무는 대추를 익히고 감나무는 감을 익히는 것이리라. 그렇게 또 사람은 사람의 시간을 편안하게 통과하면 되겠다. 열매는 씨앗 속에 다음 생을 키우고, 사람은 또 사람 속에서 내일의 꿈을 꾸는 이 시간. 귀가 먹먹한 소음 속에서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던 바람소리, 새소리, 물소리, 나뭇잎 뒤집히는 소리 이곳에서는 환하게 보인다, 들린다. 조용히 마음이 가라앉아서 정을 이룰 때 집 앞 개울에서는 쉬지 않고 물 흘러간다. 사람의 발걸음 닿지 못하는 곳까지. 사람의 숨소리 들리지 않는 시간까지. 그리하여 자연은 쉬지 않고 사람의 세상에 피를 돌리는 중이겠다.
6년 전 쯤 아래 지역으로 출장 갔을 때 일이다. 급히 내려오느라 미처 챙기지 못한 물건을 사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젊은 주부로 보이는 분이 지나가 길래 얼른 물었다. 여기 슈퍼가 어디 있어요? 네? 목소리가 작았나 싶어 좀 더 큰 소리로 물었다. 네, 슈퍼요. 물건 파는 곳인데. 그러자 그 분은 아! 마트요! 라며 손을 들어 가는 길을 가르쳐주었다. 슈퍼를 모르다니. 어이없었다. 그런데 마트라는 말을 처음 듣는다는 생각에 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대형 유통판매점은 OO마트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얼마 전만해도 규모와는 상관없이 OO슈퍼 혹은 OO슈퍼마켓이라는 간판을 한 가게가 동네마다 하나 이상은 있었다. 소소한 필요는 그곳에서 해결할 수 있는 작지만 큰 가게였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허름한 쌀집에 담배라고 쓰인 파란색 양철 표지판이 밖을 향해 붙어있던 슈퍼가 있었다. 과자와 빵, 라면, 아이스크림과 같은 인스턴트식품이 추가되면서 슈퍼마켓이라는 이름을 붙였던 것 같다. 동네에 대형 상점(슈퍼마켓)이 생기자 판매 상품을 늘리면서 슈퍼가 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여전히 나에게는 슈퍼라고 말하고 구멍가게로 기억되는 콤콤한 냄새가 묻어있는 곳이다. 점점 사라져가는 동네 사랑방, 슈퍼 구멍가게는 동네를 연결하는 여러 개의 골목이 모이는 꼭짓점과 같은 곳에 자리했었고 물건만 파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의 대소사가 모이는 정보의 집결지이기도 했다. 슈퍼 옆 그늘 좋은 나무 아래가 여름 휴식처라 치면, 구멍가게 안은 겨울 사랑방이었다. 이곳을 지나가는 젊은이들은 목례라도 하지 않으면 뒤통수가 근질거려 얼른 벗어나고 싶었던 이곳. 동네에서 일어나는 대소사는 느티나무 아래에서 그리고 슈퍼에서 깊숙한 동네까지 시시콜콜 전달되곤 했다. 작지만 주민들 나름의 훌륭한 해결방안을 고민하고 실천을 논의했던 라운드테이블인 셈이었다. 요즘 언어로 고쳐 말하면 지역주민들이 소통하는 공간이고 동네 이슈를 의제화하는 공동체 모임이 이루어지는 회의 공간이며 동네 낮선 사람이 어슬렁거리면 경계경보를 발신해주던 곳이었다. 조금 더 오버(?)하면 동네를 지켜주는 훌륭한 사회안전망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평안한 일상안전 위한 공동체 필요 요즘 들어 사회 안전이 필요하다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러저러한 사건들은 사람들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사람으로 사람답게 살려면 혼자여서는 불가하다. 삶의 환경이 각박해질수록 공동체에 대한 욕구는 깊어진다. 마트의 위력에 사라진 동네슈퍼나, 느티나무가 심어진 땅의 소유자에 의해 나무그늘도 사유화되어버리는, 사적재산보장이 최우선 되는 지금 사회에서 돈이 아니라 내 일상을 지켜줄 또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 주머니에 몇 천원이라도 있어야 잠시 엉덩이 붙여 쉴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되지 않는가. 동네의 평안한 일상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해답을 작은 모임의 공동체에서 찾고 싶다. 방식은 모두 다르게 나타나겠지만 동네에서 우리의 일상을 즐겁게 보내기 위한 우리만의 전략을 진지하게 고민할 때이다. 민병은 ㈔한국문화의집협회 상임이사아침을 열면서
연일 빠름, 빠름, 빠름을 외치는 광고가 제 세상을 만났다. 현대인에게 솔깃한 광고가 아닐 수 없다. 시류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광고에서 빠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현대인들의 성향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현대인들은 불편한 것, 느린 것을 참지 못하는 조급증을 앓고 있다. 내비게이션의 등장도 이러한 세태가 반영된 제품이다. 그러나 내비게이션이 목적지를 빨리 찾아갈 수 있게 도와주지만 낯선 지역의 풍광과 마주할 감동의 순간, 그로인한 추억을 간직하는 즐거움을 앗아가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러한 현대인들에게 불편하고 힘든 상황을 견디고 이겨내는 인내(忍耐)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며, 감동적이고 희망적인 것인가를 전하는 빌 포터의 이야기가 있다. 빌 포터는 선천적 뇌성마비임에도 왓킨스 사의 판매왕이 되었다. 영업사원으로 신체적 장애와 어눌한 음성은 환영받을 일이 아니라는 것이 일반적 생각일 것이다. 빌 포터는 판매를 위하여 방문하는 집마다 구걸하는 걸인 취급을 받기 일쑤였다. 조급증 앓고 있는 현대인들 그러나 빌 포터는 사람들의 모욕과 거절에 좌절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더 좋은 제품으로 찾아오라는 뜻이다. 결국 사람들은 빌 포터의 이러한 노력과 근면함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빌 포터가 장애를 극복하고 왓킨스 사의 판매왕이 된 힘의 원천은 인내요 열정이었던 것이다. 빌 포터는 빨리 무엇인가를 이룩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더디지만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신념 하나뿐이었다. 빌 포터는 온갖 역경 속에서도 인내하고 또 인내하고 끝까지 인내하라란 자기 주문(呪文)을 되뇌었다고 한다. 빌을 채용한 왓킨스 사는 신체적으로 건강한 영업사원들도 꺼리는 영업지역을 그에게 배정했다. 그럼에도 빌은 어떠한 악 조건에도 불구하고 쓸 수 있는 왼손 하나만으로 샘플이 들어있는 가방을 들고 15㎞를 돌아다니며 가가호호를 방문했다. 그는 영업지역에 속한 집들은 단 한 집도 빠트리지 않고 3개월을 주기로 하여 지속적으로 문을 두드렸다. 처음에는 구걸하는 장애인일 것이라는 선입견과 편견을 가지고 빌을 외면하던 사람들도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근면함에 감동했다. 그러니 판매 실적도 꾸준히 향상됐으며 24년만에 왓킨스 사의 서부지역 판매왕으로 선정된 것이다. 정상인들이 뇌성마비의 빌에게 판매왕의 자리를 내준 것은 무엇이었겠는가? 신체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소임을 성실히 수행하려한 빌과 같은 인내심이 부족했던 탓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빌 포터가 더욱 위대한 것은 그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전하였다는 점이다. 도어 투 도어의 저자 셸리 브레디(Shelly Brady)는 고교시절 빌 포터의 판매물품 배송을 돕는 아르바이트생이었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빌과 함께 일을 한 셸리 브레디는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빌이 할 수 있다면 나도 못할 이유가 없다!라고 자신을 독려했다고 한다. 빌 포터야 말로 절망적 상황을 인내로 극복하고 희망을 전파한 사람이다. 인내의 미학이 필요한 때 영국의 사회비평가 존 러스킨(John Ruskin, 1819~1900)은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 사이의 궁극적인 차이는 인내다라고 했다. 세상만사가 빨리 그리고 쉽게 풀리지 않는다고 좌절하지 말라. 내가 할 수 있다면 여러분도 못할 이유가 없다! 빌 포터는 이렇게 빠름에 중독된 우리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리라. 김용국 (사)동아시아전통문화연구원장
예나 지금이나 세상 모든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건강하고, 행복하게, 오래오래 사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간이 추구하는 건강, 행복, 장수는 사실상 각각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 세 가지 중 하나 혹은 두 가지만 가지고는 인간이 바라는 것을 성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건강 혹은 행복이 없는 장수는 의미가 없다. 마찬가지로 건강이나 장수 없이 행복은 있을 수 없으며, 행복이나 장수 없는 건강 또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삼국유사 고조선 조에 단군은 1천500년 간 나라를 다스린 후 1천908세에 죽어 산신(山神)이 되었다고 했고, 중국 한서(漢書)에 나오는 전설적 인물 동방삭(東方朔, BC.154~BC.93)은 삼천갑자(三千甲子, 3천년 혹은 18만년)를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동양의 고대 의학자들은 100세를 사람의 자연수명의 기준으로 삼아 수종정침(壽終正寢)과 조쇠요수(早衰夭壽)로 구분하기도 했다. 사람이 언제부터 늙는가의 문제는 생물학적으로 명확한 기준이 정해져 있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35~40세가 되면 체내의 신진대사와 각 기관의 기능이 점차 감퇴된다고 하며, 50~60세를 넘으면 노화의 진도가 더욱 빨라진다고 한다. 과학자들은 보통 포유동물의 최고수명을 그 성숙기의 810배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 보통사람의 성숙기를 1415세로 보고 추산하면, 사람의 정상적인 수명은 112150세가 된다. 세포분열횟수에 근거해 인류의 수명을 추산해도 사람의 수명은 적어도 110년 이상이라는 것이다. 최근에는 다른 동물들의 경우를 관찰, 비교한 결과 성장기간의 6배인 120세가 가장 일반적이라고 알려져 있다. 1998년 유엔 인구기금(UNFPA)은 매년 7월 11일을 세계 인구의 날로 정했고, 이듬해인 1999년에는 6월 16일을 세계인구 60억의 날로 정했다. 19세기 초 10억에 불과했던 세계 인구가 200년 만인 1999년에 60억이 되었으니 얼마나 급격히 증가했는가를 알 수 있다. 2050년의 세계 인구는 89억으로 전망한다. 그 중 80~90세의 인구는 2억 5천300만 명, 90~100세 노인 수 5천700만, 100세 이상은 220만에 달하게 된다고 한다. 노령화 지수란 15세 미만 유소년층 인구에 대한 65세 이상 노년층 인구의 비율로서 인구의 노령화 정도를 나타내는 지표이다. 노령화 지수가 높아진다는 것은 장래에 생산 연령에 유입되는 인구에 비해 부양해야 할 노년 인구가 상대적으로 많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의 노령화 지수는 1970년 7.2%에서 1995년 24.5%, 2000년 32.9%로 급격히 증가하였으며, 2020년까지는 77.9%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1960년대에 6.0명이던 우리나라의 출산율은 2001년에는 1.3명까지 급격하게 떨어져 저출산율을 심각한 사회문제로 보는 영국(1.64명)이나 일본(1.33명)보다도 낮은 수준이다. 65세 이상 노령인구는 2000년을 기점으로 총인구의 7%를 상회하여 본격적인 고령화사회(Aging Society)에 돌입하였고, 2022년에는 14%를 넘어 고령사회(Aged Society)에 진입할 것으로 전망된다. 또한 2011년 현재 유엔이 발표한 한국의 인구밀도는 1㎢ 당 493명으로 세계 219개국 중 20위이다. 우리나라의 100세 이상 인구는 2010년 11월을 기준으로 1천836명이라고 한다. 2005년 961명이었던 것이 불과 5년 만에 2배 가까이 증가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와 더불어 사회 여러 영역에서 노인문제가 표면화하고 있는데 이제 인구고령화에 대한 종합적 분석과 함께 그에 따른 문제점들에 대한 철저한 대비가 필요한 때이다. 건강과 행복과 장수는 결국 포기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박옥걸 아주대 명예교수
딸이 시집을 간지 어느덧 10여개월이 지났다. 무남독녀로 키운 딸인지라 늘 걱정이 되었는데, 오는 11월이면 아이가 태어날 예정이란다. 아빠 외손녀래, 예쁜 이름 지어주세요라는 딸의 전화가 참 반갑고도 행복하기만 했다. 날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외손주가 건강하게 태어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기쁨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하겠는가. 1년 전쯤으로 기억된다. 딸에게 물었다. 딸은 결혼하면 몇 명의 아이를 낳을 건가? 지금 생각으로는 자식 세 명을 키울 생각인데 아빠.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엄마는 얘야 욕심도 많다. 아이 키우기가 얼마나 힘든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느냐고 한 수 거들었다. 형제가 없이 혼자서 지낸 딸 아이가 자신의 자식들은 서로 의지하면서 외롭지 않게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얘기한 것 같고, 엄마의 생각은 아이들 보육문제와 교육문제에 대한 걱정이었으리라. OECD 국가 중 출산율 최하위 누구도 모르는 일이지만 과연 내 딸은 자신이 생각했던 세 명의 자식을 낳아 키울 수 있을까. 동네마다 골목마다에 아이울음 소리가 넘쳐나는, 아이 키우기 걱정 없는 세상은 과연 가능할까. 아마도 보육문제와 경쟁교육의 수렁에 빠져있는 오늘의 교육문제가 주요한 원인이 되어 출산을 꺼려할 것으로 가늠된다. 통계청 출산동향 조사에 따르면 2005년도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1.18명으로 OECD 국가 중 최하위에 해당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출산휴가, 출산수당, 육아정책, 양육지원금 등 여러 가지 정책을 쏟아 놓고 있지만 결과는 시원찮다. 앞으로도 이러한 성적표는 오랫동안 지속될 것 같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우리나라의 복지정책의 기조는 정치적 수사 의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무상보육이 표류하고 있는 이유이다. 무상급식 논쟁이 한창일 때, 복지망국론, 복지포플리즘으로 보편적복지를 그렇게 비난하던 정부와 여당은 자신들의 복지철학과 맞지 않는 무상보육을 주도해 0~2세까지 무상보육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는 무상보육에 따른 보육예산 일부만을 지방정부에 지원하겠다는 것이 지난 1일 정부가 제시한 영유아보육 재원대책이다. 일관성 있는 복지정책 이뤄져야 이는 현 정부가 선별적 복지에서 갑자기 보편적 복지를 받아들인 정책 기조상의 모순과 복지재정 운영의 실패를 스스로 인정한 것에 다름 아니다. 이에 전국시도지사협의회와 전국시장군수구청장협의회는 공동성명서를 발표하고, 정부의 영유아보육 재원대책을 수용할 수 없다고 정면으로 반박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난맥상이 어떻게 수습될 것인가 지켜볼 일이다. 이쯤 되면 우리나라는 노인인구가 유소년인구보다 많아진다는 인구역전현상이 전문가들의 예상처럼 2017년에는 현실이 되고도 남을 일이다. 이제는 국민들에게 물어보는 지혜로움이 정부에게 있었으면 좋겠다. 향후 10년간 한국사회를 지배할 키워드는? 복지, 사회통합, 양극화, 저출산ㆍ고령화, 통일, 교육, 환경, 실업, 다문화, 생태, 민주주의 등의 항목 중에서 세 가지를 골라보라고 복수응답을 요청하는 조사를 실시한다면 그 결과는 어떨까. 아마도 소득 양극화로 인한 사회갈등을 극복하기 위한 사회통합의 목표를 복지 정책을 통해 달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다수일 것으로 생각된다. 복지라는 것은 공짜나 낭비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투자다. 사람에 대한 투자가 가장 값진 투자인 까닭이다. 미래의 신세대들이 아이를 낳아 부담없이 보육서비스를 누릴 수 있게 하는 전략을 새롭게 디자인하는 정부가 탄생하길 소망해본다. 이청연 인천광역시 자원봉사센터 회장
1948년 런던올림픽은 태극기를 앞세우고 처음으로 대한민국을 영문으로 표기한 국가명으로 최초로 출전한 올림픽대회이다. 매일 밤잠을 설치며 열광하고 있는 2012 런던올림픽은 그 때의 영광을 이어가고 있다. 64년만에 다시 맞은 런던올림픽은 1948년의 의미를 되새겨 보아야 오늘의 감동이 더 의미있으리라 본다. 한국은 그 당시 올림픽에 참가할 수 없었다. 정부수립도 되기 전에 국가올림픽위원회가 IOC로부터 승인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국민과 체육계인사들의 열정과 부단한 설득작업, 눈물겨운 노력으로 올림픽 참가는 1947년 6월에 확정되었다. 남은 문제는 경비였다. 해방이후 정부수립 조차도 되지 못한 상황에다 춥고 배고팠던 시절인지라 올림픽 참가비를 마련하기 위해 한국 복권의 효시가 된 올림픽 후원권을 발매했다고 한다. 국민의 성원은 너무나 뜨거웠다. 그러니 선수촌 입촌식, 입장식 때 입었던 참가선수단의 단복은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겨울용 두터운 천으로 만들어져 선수들이 땀이 범벅이 되어 고생이 많았다. 아이러니 하게도 2012 런던올림픽 한국선수단의 단복은 타임지가 선정한 베스트 선수단복으로 뽑혔으며 두달여 동안 국민의 응원메세지를 단복 안감에 깨알처럼 새겨 국민들의 응원을 가슴에 품은 것 또한 1948년 국민의 눈물같은 모금과 이어지는 것 같아 아련하다. 64년 만에 다시 맞은 런던의 감동 지금은 11시간이면 도착하는 거리를 그 당시는 교통이 원활치 못한 때라 서울역을 기차로 출발하여 부산에서 배로 갈아타고 일본을 거쳐 홍콩에서 비행기를 타는 등 여러 경로를 거쳐야 하는 관계로 서울역을 출발한 지 20여일 여정 끝에 런던에 도착했다. 온갖 불편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우리 선수단은 육상, 역도, 레슬링, 축구, 농구, 사이클, 복싱 등 7종목에 출전하여 복싱과 역도에서 동메달을 획득하고 이로서 처음 공식 국제무대에 출전한 한국선수단은 총 32위를 차지하는 기적을 이루었으며 역사적인 기록을 남겼다. 그 후 64년의 긴 세월이 흘렀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역경과 고난을 극복한 1948년의 영광은 광복으로 되찾은 나라를 세계만방에 알리고 경제적, 정치적인 약소국인 대한민국을 재건하려는 국민들과 선수들의 굳건한 의지와 열정의 결과가 아니였을까. 2012년 런던올림픽은 어느 대회보다 감동적이고 역대 최다의 금메달을 거두는 성적을 앞두고 있다. 누구도 예상치 않았던 64년 올림픽사상 메달을 선물한 축구, 36년 만에 4강에 오른 여자배구, 한국사상 처음 결승진출로 도전성공한 리듬체조 손연재선수 등 많은 선수 저마다 품고 있는 드라마 같은 스토리가 우리에게 짙은 감동을 주고 있다. 대한민국의 놀라운 힘 전 세계에 떨쳐 이번 올림픽대회 유도 금메달 김재범 선수가 한 우승 소감이 떠오른다. 죽기 살기로 했다. 그 때는 졌다. 죽기로 했다. 이겼다. 그게 답이다. 또한 송대남 선수는 도전하였더니 기회가 오더라, 그래서 꿈을 이루었다고 했다. 한국 체조 사상 첫 금메달을 안겨준 양학선 선수, 세상에 없는 기술로 우승하고 다시 다음 올림픽을 위한 신기술을 준비하는 도전하는 청년, 어려운 환경에서 우뚝 선 용감한 청년이다. 이제 런던 올림픽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한가지 더 바람이 있다면 복싱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어 그 영광이 재현되었으면 한다. 이젠 1948년, 2012년 런던 올림픽이 진정 우리에게 주는 것은 무엇일까 그 의미를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김정행 용인대 총장
센티멘털 해 지고 싶다. 이 찌는 폭염 속에 웬 센티멘털이냐고. 그래서 이상한 거다. 625전쟁으로 온통 나라가 치열한 절망으로 암울하던 시절 대중가요 남쪽나라 십자성이 유행했던 것 처럼, 현실의 척박함, 혹은 곤혹을 이기기 위해 전혀 엉뚱한 생각이 떠오르는 건지도 모른다. 더웁다. 찌는 더위, 혹서, 타오르는 여름, 어느 말로도 설명이 안될 만큼 더웁다. 연일 갱신되는 최고 기온 수치가 더위를 더 더웁게 하고 있다. 이 더위를 다들 어떻게 견디고 있을까. 경제불황으로 인한 내핍과 절약 정신으로 에어컨 가동도 가급적 절제하는 상황에서 이 찜통 더위를 어떻게 이기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나는 여름을 이기는 나만의 비법을 활용한다. 책에 파묻혀 지내는 거다. 어느 해 인가는 추리소설을 수북히 쌓아놓고 읽으며 여름을 잊었다. 범인과 벌이는 극적인 스릴과 서스펜스에 빠져들며, 오싹한 순간을 거듭거듭 맞으며 더위를 이기는 것이다. 그런데 웬 센티멘털이냐고? 찜통더위 이기는 나만의 비법 이유가 있다. 이번 여름에는 세계적인 에니메이션 영화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을 쌓아놓고 보고있기 때문이다. 드라마나 영화 등 영상물의 등급은 스토리가 탄탄한가, 대사에 문학성이 있는가, 영상의 미학이 우수한가, 전체적 내용에 철학적 메시지가 있는가를 따져 결정된다고 한다. 그런데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에는 그것들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다. 화면의 아름다움과 상상력은 보는이를 무아지경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내용의 순정함과 기발난 상상력은 이미 오래 전에 잊었다고 생각하는 감각과 감성을 일깨운다. 그래 나도 저만한 시절에 저런 설레임과 아픔이 있었지 애틋한 몽상에 젖게 한다. 이미 잊었다고 생각하는 감정들과 다시 만난다는 것은 사실 굉장한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내용 속의 주인공들이 다소 유치하지만 설레는 감정을 주고 받을 때 나는 덩달아 감정이입이 되어 몇십년 전의 한 장면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때였나? 중소도시에서 학교를 다닌 나는 점심시간이면 집으로 가서 밥을 먹곤 했다. 측백나무가 담장 대신 서있는 세무소 뒷골목은 학교와 집 사이 지름길이었다. 그 길로 점심을 먹으러 다니곤 했는데 언젠가 부터 어떤 남학생이 나보다 앞서서 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남학생은 그 시절 유행하는 대중가요 외나무 다리를 휘파람으로 불며 다녔는데 이상하게도 골목이 끝나는 지점에서 꼭 한번 멈춰서서 나를 바라보다 가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의식하고 나서부터는 어쩐지 그 골목으로 접어드는 것이 쑥스럽기도 하고 설레기도 했다. 그 일은 고등학교를 마칠때 까지 계속됐지만 한번도 말을 건넨다던지 했던 일은 없었다. 어째서였을까. 아마도 지금 애들 같으면 곧바로 연애로 이어졌을 것이다. 좋은 작품과 함께 추억여행 떠나보자 이 더운 여름 미야자키 하야오의 만화영화를 보며 웬일로 나는 그때의 그 일이 아련이 떠올라 사뭇 애틋하기까지 하다. 어째서 골목 끝에 멈춰서서 한번 돌아보고 가버렸는지 이제 그 이유를 들어보고 싶기도 하다. 그렇게 미완성으로 끝난 감정유희여서 그런지 이따금 그 일이 불쑥 떠오르곤 한다. 아무런 진전도 없었던 그 일이 소중하기까지 하다. 진전이 있었다면 지금처럼 그 시절을 순결하고 소중하게 생각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센티멘털을 꿈꾸는, 소중한 기억을 들춰내게 한 이여름을 언젠가는 또 기억할 것이다. 신효섭 시인
민족이란, 지구상에 살고 있는 인류를 골격, 두형, 체격, 피부색 등 신체적, 인종적 특징 별로 분류하고, 언어와 문자, 신앙과 종교, 풍속, 역사 등 문화적 유사성까지 고려하여 분류해 놓은 것이다. 지금까지 세계의 민족은 아시아계 민족(북몽골, 중앙몽골, 남몽골, 터키), 유럽계 민족(튜턴, 슬라브, 라틴, 함, 셈, 힌두), 아프리카계 민족(수단니그로, 반투니그로, 피그미, 부시먼, 호텐토트), 아메리카계 민족(인디언, 에스키모), 말레이계 민족(말레이, 니그리토) 등 크게 5개 계통으로 구분하고 있다. 한민족은 아시아계 민족 중 북몽골, 그 가운데도 신 시베리아족의 알타이족에 속한다고 한다. 이들은 알타이족의 이동 과정에서 일찍부터 갈라져 나와 만주의 서남부, 요녕지방에 정착하여 농경과 청동기문화를 발달시켰으며 그 가운데 한 갈래가 한반도로 이주하였다. 이들은 선주민인 구 시베리아족을 정복, 동화시켜 오늘날의 한민족이 되었는데 처음에는 목축 위주의 유목생활을 하였으나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차츰 농경 위주의 사회로 전환하였다. 주(周)나라 초기부터 중국 문헌에 나타나는 숙신(肅愼)조선(朝鮮)한(韓)예(濊)맥(貊)동이(東夷) 등은 바로 한민족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한민족은 초기 단계에 여러 읍락국가(邑落國家)를 형성하다가 읍락국가 연맹체로 발전하는데 고조선이 바로 그 연맹의 맹주국(盟主國)이었다. 고조선의 등장으로 우리 사회는 정치적사회적 공동체를 이루면서 하나의 민족 단위로 발전하였고, 공통어인 한국어도 형성되었다. 이와 더불어 한민족은 근 5천 년 전에 출현한 단군, 단군왕검을 민족의 시조로 모시게 되었다. 얼굴, 피부색 다르더라도 이처럼 한민족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과 더불어 현재까지 전하는 단군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3세기 후반 고려시대 일연(一然)이 지은 삼국유사 고조선 조의 내용이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단군신화의 내용에 대해 지금까지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분명한 것은 이것이 한민족의 시조인 단군에 관한 모든 것을 말해주는 기록이라는 사실이다. 단군신화는 우리 민족이 최초의 국가를 창건하던 역사적 경험을 신화의 형식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한편 단군신화는 신화 형성기의 역사적 정보 외에 그것이 민족의 정체감을 확립하여 주는 상징적 근거의 기능도 하고 있다. 한민족이 하나의 통일공동체라는 의식은 삼국유사에서 최초로 정리되었고, 이것이 지금까지도 그대로 계승되어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과거 우리 역사를 되돌아볼 때 배달민족, 백의민족을 앞세워 강력한 단일민족의식을 요구한 시대가 있었다. 우리 모두는 단군할아버지의 자손이므로 그 분의 자손임을 잊지 않고, 일체가 되어 나라와 민족을 위기에서 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고려후기 몽골족 원나라의 침략에 맞서 싸우고, 100년 전 일제의 식민 야욕에 저항하기 위한 정신적 바탕이 바로 여기에 근원을 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 민족성은 본래 배타적, 폐쇄적인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한민족의 특성은 개방성, 다양성을 바탕으로 한 통합성과 독창성에 있었다. 조선시대와 달리 고려시대에는 건국 초부터 거란을 제외한 모든 민족 출신 귀화인들을 받아들임으로써 다양하면서도 독창적인 문화와 정신을 꽃피울 수 있었다. 종교에 있어서 도교와 불교, 유교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자유로웠고, 청자와 금속활자 등 세계적인 수준의 문화를 창출할 수 있었다. 정신문화 공유하는 것, 진정한 민족 세상에 비슷한 사람은 있어도 똑같은 사람은 없다. 아무리 부모자식, 형제지간이라 해도 똑같은 얼굴, 똑같은 피부, 똑같은 눈동자를 가질 수는 없다. 그러나 같은 정신과 문화와 이상을 가진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넓게, 그리고 멀리 보아 그것이 진정한 민족일 것이다. 수많은 나라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는 오늘, 우리 시대의 단일민족은 다시 고려시대로 돌아가 거기에 기반을 둔 것이어야 할 것이다. 박옥걸 아주대 명예교수
각급 학교가 속속 여름방학으로 들어갔다. 한 학기 학교생활을 마무리하고 맞이하는 아이들의 방학생활이 즐겁고 보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 어른들이 기억하는 여름방학은 어떤 것이었을까. 방학생활을 자유롭게 보냈던 동시대의 한 사람으로 필자의 학창시절과 별반 다름이 없었을 것 같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외가를 방문하여 방학 내내 외사촌 형제들과 놀았었다. 그러다가 방학과제물을 해결하지 못해서 쩔쩔매던 개학 날이 기억난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주로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며 캠핑도 가고 해수욕장에도 놀러 갔던 기억들이 새롭기만 하다. 여름 밤 모닥불 피워놓고 기타 치며 노래 부르던 그 아름다운 추억들을 요즘 아이들도 간직할 수 있겠는가. 방학이라고 해야 고등학생들은 1주일 남짓 자신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을 뿐 그 나머지는 보충수업 등으로 채워진다. 따지고 보면 아이들에겐 자유롭게 사색할 여유도, 창조적인 방황도 허용되지 않는 방학이다. 대학입시를 걱정하는 대부분의 학부모에게는 보람 있는 여름방학은 사치스러운 구호에 불과할 뿐이다. 창조적 방황 허용되지 않은 방학 그렇지만, 이번 방학 기간에는 부족한 공부를 보충하는 일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아이들 스스로 평소 관심이 있었던 분야에 대해서 자기주도 학습을 할 수 있도록 최대한 도움을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런 의미에서 한창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아이들 스스로 시간계획을 잘 짜서 방학생활을 하도록 배려하는 것은 교육상 커다란 의미가 있다고 여겨진다. 아이들 스스로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은 학부모와 교사들의 생각대로 따라만 했던 그들이기에 실패할 가능성이 더 크다는 이유이다. 어찌 보면 우리 아이들이 친구들과 여럿이 함께했던 일들이 별로 없고, 부모의 간섭대로만 살아왔기 때문에 실패의 경험도 없었을 것이다. 아이들에게 실패의 경험 느껴보게 이번 방학에는 우리 아이들에게 실패를 경험할 수 있도록 어른들의 역발상이 어떨까 싶다. 마음의 문을 열고 아이들 눈높이를 맞추어 조금만 소통하면 아이들은 새로운 경험을 위한 방학을 보람 있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여전한 문제는 아이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도와주는 어른들의 생각이 어느 만큼일까이다. 각종 문화체험, 역사체험, 산업체험, 농촌체험 등에 대한 체험학습장 정보를 얻는 것은 아이들에겐 일도 아닐 것이다. 다만, 아이들 스스로 체험학습을 흥미롭게 여길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친구들과 함께 계획하고 실천하는 일들에 익숙하지 않은 아이들, 더구나 힘든 일들을 꺼리려는 아이들에게 그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 주며 보람 있는 방학생활로 안내해 주는 것은 어른들의 몫이다. 가령 아이들이 여행을 가고 싶어 한다면, 그 계획 속에 자원봉사도 하나의 테마로 삼을 수 있도록 설득하고 도움을 주는 일이다. 여행 일정 중에 농촌 일손 돕기, 노인정이나 마을회관에서 어르신들의 말동무가 되어주는 일들이 참으로 보람된 일들이었다고 기억되게 말이다. 공부 스트레스와 긴장감을 견디다 못해 빗나가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그래도 우리 사회와 우리나라의 미래를 위하여 공부를 열심히 해준 아이들이 고맙지 아니한가. 그러기에 이번 방학에는 아이들에게 공부만 요구할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하고 싶어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우리 어른들이 기회를 제공하고 기다려 주는 넉넉함이 필요한 게 아닌가. 이청연 인천광역시 자원봉사센터 회장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 올해 8월에는 런던에서 올림픽이 개최된다. 우리나라는 작은 국가지만, 스포츠계, 특히 올림픽에서 세계 톱 10위권에 있는 스포츠 강국이다. 우리나라 올림픽 역사상, 유도는 1964년 제18회 도쿄올림픽대회에서부터 올림픽 종목으로 시작돼, 1968년 멕시코올림픽대회에서 제외된 이후, 2008 베이징올림픽대회까지 금메달 9개(은:15개, 동:16개)를 획득해 올림픽대회에서 국위를 선양했다. 우리나라 유도의 역사적 사건은 2가지로 소개될 수 있다. 첫째는 한국은 1984년 LA 올림픽과 1988년 Seoul 올림픽대회에서 첫 금메달이면서 2개씩을 획득해, 84 LA대회에서는 일본 다음으로 2위였으나, 88 서울올림픽에서는 180여 회원국 중 종합 1위 국가가 돼 유도 경기력 독무대였던 일본을 눌렀다. 둘째는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게임에서 한국과 일본의 남자 경기에서 한국이 각각 승리한 것이다. 오늘날 유도가 세계적인 무도 스포츠가 된 배경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교육적인 면을 중시해 학교스포츠로 채택된 것과 세계 평화를 추구하는 올림픽 스포츠로 된 것에 기인된다. 특히 수련을 통해 육성되는 유도의 정신을 빼놓을 수 없다. 유도의 정신은 첫째, 항상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스포츠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매우 기초적이면서 귀중히 여기는 덕목이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삶에서 전심전력(全心全力)으로 최선을 다한다. 수련 통해 육성되는 유도정신 둘째, 공명정대하기이다. 유도는 대회기간 중, 가장 공명정대하게 모범적으로 수행한 선수에게 페어플레이상을 줘 그의 활동업적을 치하한다. 부정하게 이기는 것보다 최선을 다하되 정당하게 경기에 임하는 것, 실력에 의하여 판정을 선택하는 것이 나은 것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정정당당하게 행하는 삶을 영위해야 한다. 셋째, 규칙을 잘 지키기이다. 스포츠경기에는 규칙이 있다. 인사(예)를 하는 시작에서부터 승부 결정짓는 방법과 퇴장하는 데 까지 모두 룰이 있다. 관중도 관람하는데 지켜야 할 에티켓이 있다. 모든 삶에는 지켜 행하여야 할 것이 있다. 세상에 그 어떤 클럽, 조직, 단체가 유지되고 잘 발전하려면 구성원 모두는 규칙을 잘 지켜야 한다. 국가도 마찬가지이다. 국민이 법을 잘 지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따라서 스포츠 정신에 의하여 살고, 삶을 누리게 되면 사회가 안정되고 더욱 발전하는 환경과 삶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넷째, 상대를 존중하기이다. 유도는 스포츠를 분류할 때, 대인경기(對人競技)인데, 반드시 상대가 필요한 것이다. 상대가 있으므로 나의 존재 의미가 있을 뿐만 아니라 상대 덕분으로 나의 발전을 위한 연습, 진보가 있게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상대가 있어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생활체육 활성화해 삶에 적용하자 따라서 상대에게 고마운 마음, 존중하는 의미와 표시로 인사를 하게 된다. 유도에서는 예로 시작해 예로 끝난다(禮始禮終)할 정도로 예를 중요시 여긴다. 그런데 이러한 유도정신이 그져 육성되는 것이 아니라 유도수련을 통하여 육성됨을 거듭 강조하는 바이다. 이와 같은 유도정신은 무도 스포츠뿐 만아니라 일상생활에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유도정신을 행동철학(行動哲學), 삶의 방식이라고도 한다. 유도를 생활체육, 학교체육으로 활성화해 그 유도정신으로 우리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해 보는 게 어떨까. 아울러 다가오는 2012 런던올림픽에서도 유도가 국위을 선양하고 국격을 더 높이는 선봉장역할을 다 해주길 기대한다. 김정행 용인대 총장
비는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내린다 프랑스의 낭만파 소설가 마르탱 파주는 자전적 에세이 비에서 그렇게 썼다. 그의 글은 표현의 절묘함이 가히 마술적이다. 철학과 역사, 예술을 달콤하게 버무려내는 작가라는 평가가 그에게 붙은 수식어이다. 내리는 비가 옷을 적시다가, 옷 속을 헤짚고 살갗을 적시다가, 드디어 마음까지 적시는 과정이 사랑의 진도와 비슷하다는 것인지, 사랑이 메마른 감성을 촉촉하게 적셔주는 것이 비의 정서와 비슷하다는 것인지, 그 마술적 표현의 속내를 다 알 수는 없지만 대체로 그 의미는 헤아릴만 하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한가지 소망을 갖는다. 비가 세례를 하듯 세상의 허물을 씻어 내렸으면. 이를테면 세상의 척박함, 세상의 혼탁과 욕망, 세상의 비논리, 세상의 두려움, 세상의 무질서, 세상의 허망함. 비가 내린다. 장마가 시작됐다. 천둥이 울리고 번개도 친다. 온 세상이 눅눅하고, 기분마저 젖어서 하염없이 가라앉고 있다. 창 밖으로 보이는 소나무는 잎새에 빗방울이 눈물처럼 맺혔다가 후두둑 후두둑 떨어져 내린다. 장마는 여러 날 동안 계속 내린다고 해서 임우(임-(雨 아래 林자)雨)라는 표현이 있다. 장우(長雨)라고도 한다. 좀더 낭만적인 표현으로는 매실이 익어가는 무렵에 내리는 비 라는 뜻에서 매우(梅雨)라고도 부른다. 매우 라는 표현은 일본(바이우), 중국(메이우)에서도 쓰이고 있다. 예전 선비들은 이 매우가 내리는 하늘을 매천(梅天)이라고 했다. 그들의 문학적 내공의 그 깊이가 놀라울 따름이다. 일본어로 장마는 바이우 말고 쯔유(つゆ)라고도 한다. 재미있는 것은 쯔유는 간장이라는 뜻으로도 읽힌다는 점이다. 초가집이 많았던 시절, 낡은 지붕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지지랑물이라고 했다. 가을 걷이가 끝난 후 대개는 새 짚으로 지붕을 이어 올리는데 농사를 못한 집은 새 이엉을 얹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오래 된 지붕은 썩어서 비만 내리면 썩은 물이 추녀로 떨어지는데 그 빗물이 영락없는 간장색깔이었다. 요즘도 남쪽지방에서는 간장을 지랑이라고 한다. 일본의 쯔유라는 표현도 역시 짚으로 이은 오래된 지붕이 썩어서 빗물에 흘러내리는 것이 간장 같다고 해서 그렇게 부르는 것은 아닐지 어림해 본다. 순 우리말로는 장마를 오란비라고도 했다. 오래 내리는 비 라는 뜻으로 조선 중기까지 썼다고 한다. 지금은 쓰지 않는 말이나 그 어감이 친근하고 소박해서 되살려 써도 좋을 법 하다. 어렸을 적 할머니는 그러셨다. 옷은 가슥 덕분에 입고, 밥은 하눌님 덕분에 먹는 거여. 옷은 마누라가 지어주면 입을 수 있지만 밥은 하늘에서 비가 내려야 농사를 지어서 먹을 수 있게 된다는 얘기였다. 가슥은 여인네를 뜻하는 경상도 지방 사투리 가시내의 원형인 것 같다. 해가 떨어지고 나면 산책을 나서는데 유난히 개구리 합창이 요란한 곳을 지나게 된다. 가물어서 올챙이가 부화를 못해 개구리도 사라졌다는데 용케도 살아남은 개구리들이 승리의 합창을 소리 높여 부르는 것 같다. 산자락 아래 괸 물이 올챙이를 부화시켰고, 다행이 개구리로 성장을 한 모양이다. 가뭄을 이기고 생명을 이은 개구리들이 새삼 신기하고 기특하기까지 하다. 장마가 시작됐으니 이제 능소화가 필 것이다. 능소화, 우중충한 장마 속에 등불을 켜듯 환한 주황빛으로 피는 꽃. 신은 참 골고루 다양하게 세상을 빚은 것 같다. 비가 내리는 흐리고 우울한 날 선물과도 같은 꽃을 피우게 했으니 말이다. 가뭄 끝에 반가운 비라지만 홍수로 피해를 입는 일은 없으면 좋겠다. 능소화로 선물로 주신 하느님께 부탁을 하고 싶다. 신효섭 시인
학생들에게 꿈을 갖지 못하게 하는 한국식 교육, 이제 닫힌 문을 열어야 한다. 학생들의 학업성취도는 세계 최상위 수준이지만 공부에 대한 흥미도는 최하위다. 가장 많이 공부하고 가장 적게 잠자는 청소년들의 행복지수는 세계 최하위다. 학생들의 자율성과 창의성, 다양성을 중시한다면서 여전히 수월성을 가로로, 반 강제성을 세로로 하는 틀 속에 학생들을 가둔 채 일방적으로 끌고 가는 시대착오적인 우리 교육의 닫힌 문을 이제 열어야 한다. 서울시의원 46명이 경쟁교육이 학생자살 원인으로 규정하고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일제고사) 폐지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제출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씁쓸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다. 교육과학기술부가 오죽 제 할 일을 못 하고 있으면, 시도의회 의원들이 일제고사 폐지 촉구 결의안을 내면서 닫힌 문을 열어야 한다고 결의문을 내고 있는가. 그뿐인가. 지난 18일 대안학교 희망의 우리 학교 학생들은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을 직무유기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이들은 학생들의 죽음은 죽음의 입시 경쟁 탓이라며 강제 야간 자율학습과 강제 보충수업, 입시경쟁교육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경기도교육감은 국가수준학업성취도 평가는 교육과정 파행 경쟁, 점수 올리기 경쟁, 예산 더 받기 경쟁 등 교육적 부작용을 낳고 있어 대폭 개선돼야 한다. 자기주도 학습능력의사소통능력창의력의 시대에 암기 위주 문제풀이 훈련을 강요하는 일제식 고사는 타당하지 않다. 자율적인 교육의 시대에 교육청학교교사학생학부모의 재량권이 전혀 없는 일제식 시험은 적합하지 않다 고 쓴소리를 쏟아냈다. 입시경쟁 내모는 일제고사 그럼에도 성취도평가에 대한 평가를 통해 개선방안을 내놓기는 커녕 지난 26일 일제고사를 강행했다. 닫힌 문! 여기서 교육과학기술부의 존재근거를 다시금 생각하게 되는 오늘이다. 학교는 아이들이 행복한 어른이 되도록 가르치는 곳이 아닐까. 학교의 위기는, 학생들이 그 시기에 배워야 할 기본보다 대학에 입학하기 위한 점수따기 경쟁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찾아온 것일지 모른다. 학부모를 비롯한 사회 전반의 요구가 바로 학교의 교육적 책임을 대학입시경쟁에 두기 때문일지 모른다. 대학입시교육, 학교에 부과된 이러한 교육적 책임은 아이 한 명, 한 명의 꿈을 재단하고 변질시키고 있다. 가정에서부터 비롯된 학부모의 과잉욕구는 학교가 왜곡된 학력신장에 더 매달리게 하는 채찍이 되었다. 행복한 꿈 키워주는 교육 절실 대학진학이라는 같은 목표를 두고 마라톤을 하듯 골인 지점을 향해 달린다. 지쳐 떨어진다면 대열에서 낙오될 것이고, 실패자라는 낙인이 찍힐 것이다. 부모는 자신의 꿈을 대신 실현해주는 존재인 양 아이를 조종한다. 아이는 공부만 강요하는 학교와 부모 때문에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겨를이 없다. 학교와 교사는 아이의 학업성취도를 높여 대학에 합격시키고 학교의 대학진학률이 높아진 것에 만족한다. 너무나 많은 규율과 학칙이 아이들을 옭아매고, 1시간 단위조차 학교와 부모의 지시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현실, 이 속에서 아이는 공부 로봇 이 되어 움직일 뿐이다. 우리 아이들은 꿈을 잃고 헤매고 있다. 어떤 분야를 배우는 것이 즐거운지, 잘하는 분야는 무엇인지, 원하는 꿈을 이루려면 어떤 분야를 더 공부해야 하는지 탐색할 겨를이 없다. 오로지 대학진학만이 아이들의 꿈이 되어 버렸다. 21세기를 살아가야 할 아이들을 20세기 교육패러다임에 가두어 공부만 하게 만든 결과, 아이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정신적정서적 미숙아가 되어 버리고 있다. 꿈을 꿀 기회조차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연 아이들이 학교에서 자신의 꿈을 발견하고 키울 수 있을까. 일제고사로 굳게 닫힌 문을 두드리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청연 인천광역시 자원봉사센터 회장
하루가 멀다 하고 언론에 보도되고 있듯이 최근의 우리 사회는 연일 폭력과의 전쟁이다. 성폭력, 학교 폭력, 주취 폭력, 가정 폭력 등 어떠한 이유에서라도 정당화될 수 없는 폭력이라는 사회적 병리현상은 우리 인간에게 내재된 본성과 치부를 보는 듯하여 매우 씁쓸하다. 근래 우리 사회가 경제성장이 우선시되고 비교우위의 차등화가 강화되면서 사회 전반에서 최적자 생존을 위한 무한 경쟁은 더욱 극심해져 이제는 그 정도를 넘어 사람들을 불행하게 하고 사회적으로 막대한 손실과 낭비를 초래해 국가 경쟁력의 동력원마저도 저하하는 상황에 처해있어 심히 우려된다. 우리의 경우, 부존자원이 없는 나라에서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룩하도록 한 동력원이 교육이었으며 그 교육열로 나라를 이끌어 온 견인차라는 평가는 아직 모든 한국인들에게 보증 수표처럼 통하며 세계적으로도 인정받고 있다. 한강의 기적으로 까지 불리는 경제성장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성역처럼 인식돼 있어 그것을 가능케 한 경쟁 교육까지도 성역 대접을 받아 오고 있다. 그러나, 교육 현장에서의 학력 지상주의는 개인과 학교 간 경쟁을 심화시켰고 전인교육을 위한 교육프로그램 부재로 인성교육의 사각지대를 만들어 온 교육정책은 결과적으로 오늘날 학교폭력을 더욱 확대시킬 수밖에 없는 원인 제공과 그 배경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학교 폭력의 원인으로는 가정적, 학교 교육적, 사회적 요인 등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일차적으로는 개인이나 집단의 힘을 숭배하고 그 힘을 행사해 존재감을 부각시키려는 청소년기의 특성에서 나온 것으로서 한편으로는 지나친 통제와 입시 위주의 교육적 산물임에 틀림이 없다. 개인이나 조직이나 이처럼 경쟁이 심화하면 남을 믿지 않는 사회가 되고 사람들 사이의 유대관계는 당연히 무너질 것이며 사람들은 적대적 관계로 서로 경쟁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압박감 아래 주위 사람들은 모두가 경쟁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경쟁위주 교육정책 학교폭력 확대 따라서 상대를 배려하고 함께 기쁨과 고통을 나누기보다는 시기와 질투의 대상으로 변하고 심한 경우 남이 잘되는 것을 못 보고 오히려 고통을 받게 함으로써 자신의 만족과 피폐한 심성을 보상받으려는 폭력행위가 팽배해질 뿐이다. 그러한 행위가 청소년들의 교육현장인 학교에서 이뤄지고 있다. 21세기 무한경쟁의 글로벌시대에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인성은 꿈과 창의력과도 무관하지 않다. 내 감정을 조절해 다른 사람의 고통을 공감하고 나와 다른 생각과 처지를 받아들이려는 예의와 배려, 존중과 공경심은 남의 입장에서 보고 생각할 수 있는 도덕적 행위 규칙으로서 공자와 맹자가 설파한 인, 의, 예, 지, 신의 덕목을 통해 인간 본성을 회복하려는 교육적 본질로서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경쟁위주 교육정책 학교폭력 확대 중국의 고사에 민가 가까이에 있는 우산의 나무를 전부 땔감으로 베어서 사용하니 나무가 하나도 남지 않았고, 그 산에 풀을 키웠더니 양치기가 풀을 다 베어 먹여 버려 결국은 민둥산이 되고 말았다는 우산지목은 환경 여건에 따라 산의 모습도 바뀌니 사람도 마찬가지로 환경이 중요하다는 인성 교육의 교훈이다. 뱃속의 태교로부터 가정교육, 학교교육, 사회교육, 그리고 이제는 평생교육의 시대이다. 교육에서의 환경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학교폭력이 만연해 사회적 이슈가 되는 지금이야말로 미래의 국가 인재가 될 청소년들의 인성 교육을 위한 학교교육 프로그램 개발과 실효적인 실천 방안에 대해 모두가 고심할 때이다. 최근 예체능 교육을 강화하려는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어 다행이지만 학생을 위한 정책으로 조속히 정착되기를 기대한다. 김정행 용인대 총장
느림의 미학 이라는 아날로그적이고 인문학적인 표현이 마음에 들었다. 전남 완도군의 작은 섬 청산도를 소개하는 홍보글이 그랬다. 청산 도는 느리게 사는 섬이라는 것이다. 빠르게, 좀더 빠르게, 음악적 용어를 빌리자면 알레그로! 비바체!! 하고 삶을 재촉하는 세상에서 느린 것을 미덕으로, 더구나 미학으로 까지 내세우는 섬이라니, 가보고 싶었다. 쫓기듯 사는 일상에서 벗어나 느리게, 일탈한 삶을 음미해 보자. 그래서 떠난 여행이었다. 완도에서 배를 타고 45분, 물 위를 미끄러지듯 달리는 내내, 멀리, 가까이 섬들이 나타났다. 삶이 지겨워지고 사람들과의 부대낌이 버거울 때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서 일주일만이라도 살아봤으면 했는데, 그런 섬, 작고 한가로운 섬들이 바다 한가운데 점점이 떠있었다. 어떤 것은 모양새가 둥글고 아름답다고 해서 진주 섬이라는 우아한 이름이 있는가 하면 어떤 것은 그야말로 이름도 없는 무인도가 마침표처럼 떠있었다. 청산 도는 9개의 무인도와 5개의 유인도가 어우러진 섬이라고 했다. 청산도라는 이름은 바다가 푸르고, 하늘이 푸르고, 사람들 마음이 푸르다고 해서 지어진 것이라고 했다. 마음이 푸르다는 것은 무슨 뜻 일까. 속내가 시커멓다, 허옇다는 표현으로 사람의 마음을 표현한 것에 비추어 보면 푸르다는 것은 아마도 순박하고 때가 묻지 않았다는 뜻쯤 되는 것이 아닐까. 느리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청산 도 곳곳에는 달팽이 모양 관광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슬로시티 청산도 라는 다소 세련미를 낸 표지판도 있었다. 그런데 무엇이 느리다는 것일까. 청산도에서 느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육지에 뻬곡한 아파트, 빌딩이 없고, 대형마트가 없고, 정신없이 달리는 자동차며 전철이 없고, 학원이 없고, 이른바 문화시설이 없다는 것이 느리다는 것일까. 빨강 파랑 슬레이트로 지붕을 얹은 집들이 길섶에 핀 야생화처럼 납작 엎드려 있는 청산도, 영화 서편제에 등장한 유명한 돌담길이 느릿하게 언덕등성이를 기어올라가고 있었다. 그 길 위로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언덕 위에서는 치맛자락처럼 넓게 펼쳐진 바다가 내려다 보였다. 김 양식을 위한 모판이 바둑판 모양으로 떠있고, 멀리 조업중인 배들도 보였다. 한가로워 보였다. 놀랍게도 길가 밭 한 귀퉁이에 이엉으로 감싸놓은 무덤 초분이 보였다. 청산도에서는 누군가가 세상을 떠나면 배를 타고 나간 피붙이가 돌아올 때까지 매장을 하지 않고 이엉을 얹어 둔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바다에서 돌아온 이가 애끓는 마지막 인사를 하고, 아쉬워 매장을 미루다 육탈이 되면 그제야 매장을 한다는 것이다. 청산도의 초분은 섬 사람들의 애환이 서린 아름답고 서럽고 한스러운 풍습이었다. 그것은 확실히 청산도가 말하는 느림의 미덕 같았다. 작가 박경리 선생은 생전에 빠른 세상을 경계했다. 자동차가 등장하고, 세탁기며, 전기 밥솥 따위 빠른 문명적 이기가 발달되며, 거침없는 삶의 질주 속에 사람들은 성찰하고 반성할 시간을 놓치고 있다고 했다. 인간적 품위가 사라지고, 생존의 진정한 의미며, 가치관을 잃어버리는 세상이 되고 있다고 개탄했다. 세상이 어지럽다. 총선이 끝나고 나자 독버섯처럼 불거지는 문제들이 빠르게 변하는 세상을 실감하게 한다. 무엇을 위해 우리는 사는 것이고, 무엇이 우리 삶의 가치가 돼야 하는 것일까.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는 것일까. 일제 강점기와 625를 겪으며 삶의 나락 끝까지 갔던 우리는 빠른 경제성장으로 가난과 궁핍을 벗어났지만 우리의 품격도 빠르게 상승하여 격조있고 우아한 인성을 갖게 되었는가. 느리지만 순박하고 아름다운 감성을 품고 있는 세상이 그립다. 신효섭 시인
인류가 지구상에 살기 시작한 이래 세상 모든 것들은 엄청난 변화와 발전을 계속해왔다. 하지만 인간으로서의 삶과 존재 그 자체의 변화는 실제로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인간을 포함하여 생명을 가진 세상의 모든 것들은 똑같이 생명체로 태어나 먹고, 자라고, 병들고, 죽는다는 의미에서 거의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공자나 소크라테스가 살던 시대, 석가모니나 예수가 살던 세상과는 물론 불을 사용하면서 자신의 생각과 세상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시작했던 수만, 수십만 년 전의 그 때와도 크게 다를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수만년 전 지금의 우리와 유사한 모습을 한 현생 인류가 출현하면서부터 이미 당시의 사람들도 현재의 우리나 마찬가지로 기뻐하고, 화를 내고, 사랑을 하고, 즐거워했을 것이다. 그 때도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부자와 가난한 자가 있었을 것이고, 말 잘 듣는 착한 아이와 말 안 듣는 말썽꾸러기도 있었을 것이다. 뛰어난 능력이 있어 사람들을 부리고 다스리는 이도, 지식이나 생각이 깊어 학자나 예술가가 되는 이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오늘 우리들이 알거나 기억할 수 있는 석가모니나 공자, 소크라테스, 예수, 마호메트와 같은 성인들은 모두가 불과 2천수백년 전, 혹은 그 이후의 세상에 살았던 인물들이다. 그러므로 이미 그 시대는 지금의 이 시대와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골치 아픈 문제들이 산적해있던 시대였다. 무도하고 욕심 많은 권력자들,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한 지식인들, 무지몽매한 대중과 말 안 듣고 버릇없는 젊은이들. 아니 어쩌면 그 정도가 지금보다도 더욱 심각한 상태였을지도 모른다. 그런 속에서 온갖 역경과 고난과 싸워가며, 혹은 목숨까지 던져가며 그 해법인 진리를 찾아 제시하고 전한 것이 바로 성인들이었다. 현대사회로 진입한 지난 한 세기, 낡고 헌 옷을 벗어던지고 근대화, 세계화에 열광하면서 달려온 오늘 우리는 과연 행복한가.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체제를 받아들이면서 과연 우리는 행복해졌는가. 우리가 사는 세상에 만연되어 있는 잘못된 것들이 바로잡히고, 잘못된 가치판단과 풍조들이 사라졌는가. 이에 대한 답은 어쩐지 긍정적일 수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이런 세상에 대하여 어떤 이들은 성인들을 부정하고 공격하는 것으로부터 문제의 해법을 찾으려고 하는 것을 보게 된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우리 안에서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외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그 발상부터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진리는 새로 발견되거나 만들어지거나 형성되는 것이 아니고 다시 깨달아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없이 새로운 발견이나 방법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거짓이고 기만일 뿐이다. 오히려 우리는 지금이라도 우리 자신에 맞는 옷을 다시 찾아 입어야 한다. 공자와 그 제자들이 오랜 세월 동안 갈고 다듬어온 그 깨달음은 지금 우리 사회에 만연해있는 여러 문제들을 해결해줄 수 있는 대안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공자를, 공자와 그 제자들이 찾아낸 깨달음을 우리나라가 아닌 중국의 것이라면서 배격하려 하기도 한다. 하지만 석가나 소크라테스나 예수가 어떤 특정한 국가나 민족의 것이 아니듯이 공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중국인들만의 공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공자의 사상과 가르침은 우리나라에서 더욱 빛을 보았고, 발전하였다. 이것을 사대주의로 몰아붙이는 어리석은 관행도 사라져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 남에 대한 배려나 염치와 부끄러움을 모르고 유아독존의 독선과 아집, 경쟁에서의 승리만을 최고의 선으로 아는 이 잘못된 병폐들을 치유하는 길은 다시 공자와 그 제자들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 박옥걸 아주대학교 명예교수
사랑家꿈은 인천광역시자원봉사센터에서 펼치는 사랑의 집 고치기의 다른 이름이다. 독거노인, 소년소녀가장, 기초생활수급자 등을 대상으로 2009년부터 시작을 했는데, 올해 말까지 당초 목표했던 2천84가구에 대한 사랑家꿈 사업이 마무리될 예정이다. 인천의 각 기업에서 인천광역시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지정기탁한 기부금으로 집 수리에 필요한 재료를 구입하고 집수리 자원봉사자들의 재능기부와 노력봉사로 주거환경을 개선하는 일이다. 주로 도배와 장판을 교체하고 낡은 전기시설과 고장난 가전제품을 고쳐주는 일인데 한 가구당 몇 십만원에서 많게는 몇 백만원의 예산이 필요하기 때문에 실제비용만을 따져봐도 상당한 예산이 소요된다. 주거환경을 개선한다는 말이 오히려 사치스러울 정도로 개인적으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형편에다가 끼니를 걱정하며 살아가는 소외된 이웃들에게 삶의 용기와 희망을 나누어 주는 일이 바로 인천광역시와 기업들의 사회공헌 활동 그리고 자원봉사자들이 함께 만들어내는 사랑家꿈 이다. 인천지역 사회의 기부문화와 자원봉사의 아름다운 동행에 의한 사랑家꿈 이다. 인천 소외 이웃 집 고쳐주는 사업 2003년에 미국 자선복지교육 관련 연합단체 인디펜던트 섹터(Independent Sector)가 조사한 미국시민들의 봉사 현황 자료를 살펴보면 미국 성인의 44%가 1주일에 3.6시간 봉사하고 있다. 또한 미국 가정의 89%가 기부금을 내고 있었다. 미국 사회의 건강성을 확인해볼 수 있는 자료인데, 우리 주변에서도 자신들의 능력으로 부를 일구었지만 부를 과시하는 게 아니라 자원봉사활동을 통해 사회에 환원하며 평범하지만 가치 있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다. 노량진 수산시장의 류양선 젓갈가게 할머니 이야기를 다시 새겨볼 필요가 있다. 노란 옷 아가씨, 책 할머니, 36년간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젓갈장사를 해온 할머니에게 붙여진 별명이다. 노란 옷을 입고 장사를 하고, 노란 옷을 입고 기부를 한다. 산간 오지 아이들에게 책을 보내는 게 알려지면서 책 할머니가 됐다. 얼마나 기부를 했냐고 묻는 기자에게 말한다. 그걸 세고 있나, 주고 나서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거지. 봉사 통해 진정한 삶의 기쁨 느껴 하지만 매스컴을 통해 공개된 할머니의 기부 내역은 화려하다. 150여 명 이상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했고, 10만권 가까운 책을 산간오지 학교와 양로원 등에 기증했다. 어림잡아 수십억 원에 달하는 임야 등을 대학발전용지로 모 대학에 기부를 했다. 가난한 농사꾼의 딸로 태어난 죄 아닌 죄로 중학교에 진학을 못했던 것이 한이 되었다. 배우지 못한 게 한이 됐던 할머니는 젓갈장사를 하면서 돈이 모이는 족족 공부하고 싶지만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돕기 시작한 이유이다. 죽는 날까지 책을 가까이 하라며 책을 기증하고 장학금을 전달하며 20년 이상 기부를 한 것이다. 이제 기부는 그만하고 노후준비를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기자가 물으니 자다가도 죽는 게 사람이야, 쌓아둬서 뭐해. 100만 원을 남기고 죽어도 버리는 돈 아니냐?고 대답한다. 중학교에 입학할 학비가 없었던 소년은 할머니의 도움으로 학업을 마치고 초등학생 자녀를 둔 작은 기업의 사장이 되었다. 할머니의 보살핌으로 간호대를 졸업한 어느 여학생은 병원에 취직하였다. 다시 그들도 류양선 할머니를 닮아가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이익과 사회의 이익을 일치시키는 삶의 모습을 끊임없이 성찰하며 실천하고 있을 것이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 있는 사람, 없는 사람, 권세가이든 아니든 모두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며 자원봉사를 통해 기쁨과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삶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삶이 아닌가. 이청연 인천광역시 자원봉사센터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