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면서] 내가 본 괴물은 괴물일까 안괴물일까

마을 사제가 기도를 하는 중이었는데, 밖에서 아이들이 놀며 떠드는 통에 도무지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아이들을 아내고 싶은 마음에 이렇게 외쳤다. 얘들아, 저 아래 강에 가면 무시무시한 괴물이 있단다. 어서 빨리 가 보거라 콧구멍에서 불을 내뿜는 괴물을 볼 수 있을 게다 순식간에 마을 전체에 괴물이 출현 했다는 소식이 퍼졌고, 너도 나도 강가로 모여들었다. 사제도 이 광경을 보고 대열에 끼어들었다. 헐레벌떡 강가로 달려가던 중에 사제는 생각했다. 내가 지어낸 얘기이긴 하지만, 누가 또 알아! - 우리가 만들어낸 신을 우리 스스로 굳게 믿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신의 존재를 남들이 굳게 믿도록 만드는 것이다. - 인도에서 태어난 앤서니 드 멜로 사제의 반짝이는 생각들을 모아놓은 책『바다로 간 소금인형』에 있는 괴물이 나타났다의 내용이다. 이 책은 내 침대 머리맡에 놓여있는 일종의 안정제다. 하루가 불편했던 날이었거나, 내일이 불안한 날에 마음을 정돈하기 위해 이 책을 펴들곤 한다. 특정 종교적 관점을 넘어선 활동을 하는 사제를 보여주듯이 책의 내용은 시대와 지역에 상관없이 인간살이에 일어날 수 있는 사소한 일화를 통해 스스로를 다시 한번 성찰하게 한다. 괴물은 관심을 보이는 만큼 괴물스러워지고 우리의 귀중한 일상은 하나 둘 괴물들 사이로 사라진다. 세간에 오르내리는 큰 이슈사이로 빠져나가는 것들을 들여다보자. 화면 밖에서 바라보아야 괴물인지 안괴물인지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괴물을 보러 같이 뛰어가던 사제는 점차 괴물의 존재를 믿기 시작한다. 코에서는 불을 뿜는데 그 열기가 너무 뜨거워 귀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입은 귀까지 찢어져 있어 뭐든 집어삼킬 수 있을 만큼 크다는 식의... 괴물은 점차 괴물답게 발전하고 있어, 사제는 자기가 얘기한 그 괴물 말고 다른 진짜 괴물이 나타났다는 생각에 이르고 만다. 아마 좀 더 긴 글로 이루어진 책이었다면 이렇게 발전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치 일본 애니매이션 센과 치히로에 등장하는 가오나시 요물처럼 거짓된 것을 먹으면서 자꾸 커져 오히려 그 자체가 두려움이 되어버려 스스로 만든 괴물에 눌려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는 역현상이 일어나는 앤서니 드 멜로 사제라면 한발 더 나갔을 것이다. 괴물이 오길 한동안 기다렸으나 괴물이 나타나지 않자 모두 마을로 다시 돌아왔는데 어떤 집은 밥이 다 타버렸고, 어떤 집은 도둑에게 털렸고, 어떤 집은 아이를 잃어버렸다는 괴물은 관심을 보이는 만큼 괴물스러워지고 우리의 귀중한 일상은 하나 둘 괴물들 사이로 사라진다. 세간에 오르내리는 큰 이슈사이로 빠져나가는 것들을 찬찬히 들여다보자. 사건이 되어버린 괴물 뒤로 정말 중요한 일들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화면 밖에서 바라보아야 괴물인지 안괴물인지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민병은 (사)한국문화의집협회 상임이사

[아침을 열면서] 복(伏) 중에 가을을 생각하며…

어느덧 초복도 중복도 지났다. 이제 입추도 지나고 나면 완연히 계절의 변화를 실감하겠다. 그런데 달력을 보니 말복이 수상하다. 초복은 하지가 지나고 세 번째 맞는 경일(庚日)에 오는 것이라 지난 13일이었고, 중복은 그 다음의 경일이라 지난 23일에 지났으니 말복은 8월2일에 맞이하는 것인데 그날 말복이 아니란다. 가만 달력을 살피니 가을로 들어선다는 입추가 8월 하고도 7일이다. 말복은 입추를 지난 첫 번째 오는 경일(庚日)이니 다음달 12일이다. 어이쿠! 삼복(三伏)의 더위를 이겨내기 힘들다해 삼복 기간에는 입술에 묻은 밥알도 무겁다 했는데 예년과 달리 삼복의 기간이 열흘이나 더 긴 셈이다. 삼복 복은 복(福)이 아니다. 제 주인 앞에서 벌렁 드러누워 있는 개처럼 낮게 엎드리라는 의미의 복(伏)이다. 오죽 무덥고 무기력하기에 입술에 묻은 밥알도 무겁게 느꼈겠는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기간에 경일(庚日)을 복날로 삼은 까닭은 천간(天干) 중 경(庚)이 오행(五行)으로 금(金)의 성질을 갖고 있어 계절로 가을을 상징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니 삼복이 모두 경일로 정해진 것은 가을을 고대하며 더위를 이겨보라는 속뜻이 담긴 것이었다. 더위를 이기기 위한 방편인 복달임으로 갖가지 보양식을 먹지만 오늘날에도 특히나 보신탕을 제일로 치고 있다. 200년 전 조선 후기의 문인인 유만공(柳晩恭)은 복날의 풍경을 집집마다 죄 없는, 뛰는 개만 삶아 먹는다.했다. 조상들께서는 왜 개를 복달임의 음식으로 택한 것일까? 여기에도 오행의 원리가 작동하였다. 개는 금(金:쇠)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한국세시풍속사전에 소개된 홍석모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도 개를 삶아 파를 넣고 푹 끊인 것이 개장(狗醬)이다. 닭이나 죽순을 넣으면 더욱 좋다. 또 개장국에 고춧가루를 타고 밥을 말아먹으면서 땀을 흘리면 기가 허한 것을 보강할 수 있다. 생각건대 사기(史記) 진덕공 2년(기원전 676)에 비로소 삼복 제사를 지냈는데, 성안 대문에서 개를 잡아 해충의 피해를 막은 것으로 보아 개를 잡는 것이 복날의 옛 행사요, 지금 풍속에도 개장이 삼복 중의 가장 좋은 음식이 된 것이다.라고 했다. 그렇다 하여 복날의 음식이 개장국과 삼계탕만은 아니었다. 궁중에서는 고위관리들에게 쇠고기와 얼음을 하사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또한 계곡을 찾아 수박과 참외 등 시절과일을 먹으며 물놀이를 하는 것으로 더위를 피하고 지친 심신에 활기를 되찾고자 하기도 했다. 그런데 삼복의 더위가 벼를 자라게 한다. 초복에는 한 살, 중복에는 두 살, 말복에는 세 살이 된다. 돌을 맞은 아이에게 돌상을 차려 무탈하게 잘 자라주기를 기원하였듯 벼도 한 살이 되면 떡과 음식을 장만하여 제사를 지낸다. 이를 복제(伏祭)라 했다. 전하는 속담 가운데 삼복에 비가 오면 보은 처자 울겠다.는 말이 있다. 대추의 명산지인 보은 지방에서 대추 수확으로 혼수를 마련한 데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그런데 벼농사에서 삼복에 내리는 비는 복(福)비였다. 대개가 복날에 비가 오면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 이열치열(以熱治熱)요 이냉치냉(以冷治冷)이다. 무더운 가운데 곡식이 자라나고 따가운 볕으로 알곡이 익어간다. 냉혹한 추위에 병충이 사라진다. 이와 같다. 장마가 닥치고 무더위가 기승을 부려야 여름이다. 덥다고만 할 일이 아니다. 유만공의 추석(秋夕)이란 시에 무가무멸사가배(無加無滅似嘉俳)란 글귀가 있다. 풍성한 들녘을 보며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 같기만 해라 이렇게 넉넉한 가을을 기다린다. 김용국 (사)동아시아전통문화연구원장

[아침을 열면서] 7시 축구 아저씨

저는 요즘 연희동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연희문학창작촌에 입주를 하면서 그리 되었지요. 그래도 집에 아주 가지 않을 수는 없어서 일주일에 한 두 차례 집을 오가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집까지 걸어가고 있는데 한 무리의 어린 초등학생들이 제 앞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 중 몇몇은 낯이 익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자 녀석들 중 한 아이가 저를 알은 체 하더군요. 어, 7시 축구 아저씨다라고요. 그러자 그 말 뜻을 모르는 다른 초등학생들이 그 아이에게 물어보더군요. 응, 저 아저씨 7시만 되면 아들이랑 광장에 공차러 나오거든, 그래서 우리가 그렇게 부르는 거야, 그런데 아저씨 요즘에는 왜 매일 안 나오세요? 저는 어느 순간 아파트 아이들에게 7시 축구 아저씨가 되어 있었습니다. 창작촌에 입주를 하기 전에는 거의 매일 저녁 7시 무렵에 아파트 광장에 나가 일곱 살 난 아들과 공을 찼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아들과 주고 받는 정도의 공차기 였습니다. 그러다 아파트 광장에 나와 있는 아이들과 경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어른 한 명에 아이들 다섯일 때도 있고 열 일 때도 있는데 저는 혼자 차고 아이들은 한 팀이 되어 저와 경기를 하곤 했습니다. 광장이라 그리 큰 공간은 아니지만 아이들과 어울려 한바탕 공을 차고나면 몸이 땀으로 흠씬 젖고 맙니다. 그러고 나면 몹시 기분이 좋더군요. 경기가 끝나면 아이들과 어울려 아이스크림 하나씩 물고 앉아 이름도 묻고 제 아들 이름도 가르쳐주면서 조금씩 친해졌습니다. 그런데 축구를 차는 아이들이 남자 아이들만 합류를 하는 게 아닙니다. 여자 아이들도 같이 어울려 차는데 언제부턴가 아이들은 제가 나오기를 기다리더군요. 제가 나타나면 아이들이 우 몰려와서 공을 차자고 합니다. 그러면 저 혼자 대 아이들 여럿이 공을 찹니다. 아들 녀석도 아이들 팀이죠. 어쨌든 저는 즐거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스크림을 사러 가는 길에 한 여자 아이가 자신도 같이 가겠다고 하더군요. 아들을 포함한 다른 아이들은 광장에서 공을 계속해서 차고 있고요. 아무튼 슈퍼까지 왕복 5분 남짓한 거리지만 말없이 가려니 어색해서 여자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늦게 들어가면 아빠나 엄마가 안 혼내? 엄마랑 아빠랑 아홉시 넘어야 와요. 그럼, 넌 저녁 먹었어? 대충요. 그 순간 아이의 현실이 안타깝다는 생각도 했지만 한편으로 제 자신이나 제 아들이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도 느꼈습니다. 넉넉하게 돈을 벌지 못하지만 그래도 아들과 매일 그렇게 놀 수 있다는 게 복이었던 거죠. 사실 그 시간에 광장에 나가보면 엄마들은 더러 있지만 아빠들 모습은 본 적이 없습니다. 아이들과 친해지면서 이름도 알게 되었고 어떤 아이는 아빠가 없다는 것도 알았고 또 어떤 아이는 조부모랑만 살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사실들을 하나 둘 알게 되면서 축구를 하면서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습니다. 먹고 사는 일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훗날 아이에게 부모와의 추억이 없다면 후회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맞벌이하는 게 당연한 시대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 조금 덜 벌면 안될까 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아들 녀석과 동갑내기인 한 아이는 토요일에도 어린이집을 간다고 하더군요. 광장에서 만나 축구를 하면서 알게 된 아이였습니다. 엄마 아빠가 토요일 일요일에도 일을 한다더군요. 그나마 저라도 만나 아이들이 즐겁다면 하는 바람으로 요즘도 공을 찹니다. 오로지 아들 그리고 광장의 아이들과 공을 차기 위해 집으로 가고는 합니다. 아무리 못 차도 일주일에 두 번은 차려고 집에 들어가지요. 힘들겠지만 그 아저씨가 제가 아니라 아이들의 아빠이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전민식 소설가

[아침을 열면서] 여행자 나무

한 권의 시집이 있다. 심해의 상징인 듯 푸른 바탕의 표지는 간결해서 알 수 없는 깊이를 예감한다. 겉 뚜껑을 열자 역시 푸른 속지가 보인다. 그 오른쪽 상단에 시인의 친필 사인이 있다. 또박또박 눌러 쓴 시인의 서체를 보면서 한동안 시집 속의 글자들과 대면하지 못했다. 단숨에 읽기엔 저, 환상과 신화의 세계가 너무 아득해서 몇 번의 숨을 고르는 사이 해가 세 번 중천에 떴다 졌다. 세계의 문학 시장에서 시는 이미 사장 된 지 오래다. 손가락 하나면 정보가 쏟아지는 세상에서 무엇 때문에 본질에 심각한 시에 시간과 돈을 투자하고 싶을까. 그러나 목매달아 죽어도 좋을 나무처럼 진정으로 시를 쓰는 시인의 시 쓰기는 치열하고도 준엄하다. 차라리 수도사의 수행처럼 날마다 쓰고 지우는, 아니 살고 죽는 사람의 삶과, 시가 한 줄에서 비명처럼 선연하다. 돈 한 푼 되지 않는 시 쓰기에 시인은 왜 이름을 걸고 무릎을 꺾어서 고행의 사막 길을 마다치 않는 것일까. 시집여행자 나무는 총 51편의 시들로 묶여 있다. 맨 앞장 시인의 자서에는 무연히 몽유에 드는 밤들이 잦다. 손짓, 발짓, 괴성으로 곁의 한밤들을 구겨놓기 일쑤지만 깨어나 아무 일 없는 것을! 오랫동안 어지러웠던 물음들이 지극히 단순해졌다로 시작한다. 문득 성경 설화 전도서에 나오는 모든 것들은 지나간다. 기쁨도, 슬픔도 가 뇌리를 치고 지나가는 것은 무엇일까. 시집 속에 펼쳐진 시인의 시들은 개인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일상의 신화를 시로 승화한다. 여행자 나무에 수록된 시인의 시 쓰기는 지극히 신화적이면서도 환상적이다. 그 환상은 종종 구름으로 치환되기도 하는데, 구름은 소리와 침묵과 삶과 죽음을 그물처럼 엮어서 슬프도록 아름답다. 특이한 것은 보통 신화적인 시 쓰기란 바깥으로 이야기가 풀어지게 마련이지만, 시인의 시 쓰기는 침묵처럼 안으로, 안으로 끌어들이는 지독한 사색의 자리에 놓여 있다. 개인적인 신화를 환상의 세계로 이끌어 가는 힘. 시인의 몸속으로 발화하는 환상의 세계는 몽유의 세계로 화자를 이끌다가 다시 현실로 되돌리곤 한다. 결국, 시인의 시 쓰기란 치열하게 삶을 살아내는 일. 시인은 시란 내게 있어서 스스로 생을 점화시킨 불꽃 그 자체였다. 그것을 위하여 헌신하겠다는 열정이 없었다면 그다지 치열하게 열병을 앓아야 할 까닭이 있었을까?라고 자기 시 쓰기에 대해 이미 정의를 내렸다. 생의 비애조차도 서슴없이 드러내는 육감적인 시 쓰기. 시인은 침묵하고 끝끝내 가담하지 않았던 상처의 내면을 말한다. 살을 입은 인간의 가난과 소외와 오욕칠정까지도 긍정한다. 그리하여 죽음을 바라보는 자세 또한 담담하다. 이런 시 쓰기! 어떤 예술 장르에서도 이루지 못한 인간의 본질에 관한 지독한 탐구가 시 쓰기라 생각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필자의 기우일까. 시력 사십년의 김명인 시인이 열 번째 시집 여행자 나무를 상재했다. 펼쳐든 여정이라면 누구라도/ 접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여행이란/ 하루에도 몇 번씩 어제가 포개놓은 그늘에 서게 하는 걸까?/ 아직 행려의 계절 끝나지 않았다/ 어디로도 실어 보내지 못한 신생의 그리움 품고 나무의/ 늙은 가지에 앉아/ 몸통뿐인 새가 울고 있다-여행자 나무부분 타들어가는 침묵과 불판 위에 엎질러 버리는 정열로 김명인 시인의 시는 매일 싱싱하다. 그러나 선생의 시는 어쩌면 아직 단 한 줄도 시작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늙지 않는 짐승! 여행자 나무의 오랜 건강! 과 건필! 을 기원한다. 손현숙 시인

[아침을 열면서] 변신하는 프로크루스테스 침대

오래전 충동구매로 구입한 헌책이 있었다. 프랑스 고교철학이라는 머릿 말을 달고 네 권의 책이 쪼로록 서있었을 때, 이미 그 책들은 내 손에 들려있었다. 인간학, 철학, 형이상학, 인간과 세계, 지식과 이성, 실천과 목적 이라는 제목의 네 권의 책은 언젠가 완독하겠다고 밀어둔 책들 사이에 들어가 버렸다. 나의 충동구매는 순전히 그 유명한 바칼로레아 시험 때문이었다. 지난 6월, 한 주간 동안 프랑스의 수능으로 일컬어지는 바칼로레아가 치러졌다고 한다. 올해는 3주간 치러진 철학축제 마지막 날에 시험이 치러졌다고 한다. 사회전체가 철학적 화두에 응답하는 철학축제가 열린 것이다. 프랑스 사회가 얼마나 심각하면 그러하냐고 묻기 이전에 사회 문제를 철학적 사유의 독려로 해결해 보고자 하는 과감한 자신감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충북문화재단 방문을 위해 청주에 갔을 때 알게 된 예술대학생들의 폐과 투쟁을 접하고 온 이후 풀리지 않는 착잡함이 더 그렇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이유는 이렇다. 학교 평가 기준에 취업률과 충원률(자퇴생에 의해 생기는) 이 대학 평가 기준에 반영되다보니 이 두 개의 지표에 불리한 기초학문 학과들은 통폐합되거나 취업이 잘되는 학과를 신설하거나 증원하게 되는 것이다. 그 동네에서 한명의 예술가를 만나고 왔다. 현재 이 작가는 동네 상인회와 함께 동네 공동의 활동을 만들어내기 위해 말 걸기를 시작했다. 동네 폐지할머니를 한명이라도 줄이기 위해 6ㆍ25전쟁 이후 살기위해 동네 어르신들이 길렀던 콩나물 농사를 다시 해보자는 생각도 복안으로 가지고 있다. 이를 위해 문화예술적 활동들을 펼쳐가고자 생각하고 있다. 예술이 갖는 활력과 역동성을 믿기 때문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기초학문을 위한 대학의 학과가 점차 사라지는 지금 지역문화활성화를 위해 내놓은 정책은 이렇다. 창조적 인간이 향후 살길이며 특이성과 정체성을 갖는 문화인적자원으로서의 역량강화가 필요하다고. 지역자원의 창조적 활용을 위해 창조지표와 지수개발을 해야 할 것이며 지역문화자원을 활용해 지역브랜드 부가가치 창조를 외친다. 그리고 이를 위해 민관의 연계체제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활동을 위해 필요한 학문은 무엇이고 또 누가 할 것인가? 오랫동안 현장에서 묵묵히 지역사회 공동체를 위해 문화활동을 펼쳐온 문화시설 종사자들은 창조적 활동이 무엇인지 설명하지 못할 수 있다. 누군들 쉽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동네 주민들과 함께 마을에 필요한 이슈들을 문화적으로 하나씩 해결하는 방식을 알고 있고 그렇게 해왔다. 예술가들과 주민들과 함께 동네의 이야기를 나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기획이고 창조적 활동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런 활동들은 오래 된 낡은 정책에 의해 생겨난 것이므로 새로운 가시적 시설을 만들어 신현장을 만들고자 한다. 중앙의 정책은 지역의 현장에서 수렴된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뽀대나는 틀을 만들어 놓고 공약과 실적에 맞춰 현장을 늘렸다 잘랐다 할 수 없는 일이다. 지역현장에서는 그게 그것이므로 단지 갈아 타기 식으로 늘이거나 줄여서 받아들일 뿐이다. 무엇이 새로운 것인가? 정해진 목적 달성을 위한 활동은 그 자리에서 반복된 운동일 뿐이다. 상황과 현장의 요구를 받아들여 특이성을 내재한 변화하는 정체성이 지금 우리에겐 필요하다. 자동차를 로봇으로 바꿔내는 창조적 상상력을 아주 조금만 빌려보자. 민병은 (사)한국문화의집협회 상임이사

[아침을 열면서] “투르크(Truk)의 용사들을 기리며…”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오늘의 대한민국이 이룩될 수 있도록 희생하신 호국영령들의 은혜를 되새기게 된다.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 자국의 병사들을 파병한 참전국과 용사들의 희생 또한 더 없이 고귀한 가치라 생각한다. 터키는 미국과 영국에 이어 많은 병사들을 한국전쟁에 파병했다. 1950년 7월25일 파병을 결정하고 10월17일 한국에 도착해 1966년 7월10일 귀국하기까지 전사자와 부상자를 합하여 무려 3천64명에 이르는 터키의 젊은이들이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하여 피를 흘렸다. 터키군은 군우리, 와원, 신림리, 의정부, 연천, 퇴계원, 금화, 철원, 단장의 능선으로 불린 양구, 판문점 동ㆍ북방, 안양시 수리산, 용인시 김량장동 전투에 참여한 후 휴전 이후에는 의정부 후방의 경계를 담당했다. 터키군은 어느 나라의 병사들보다도 용맹했다. 가장 혁혁한 전공(戰功)은 단연 용인시 김량장동 전투에서의 백병전이었다. 151고지 전투에서 터키의 용사들은 12명의 사망자를 내면서 1천900여명의 중공군을 사망에 이르게 했다. 가히 1당 100의 맹위를 떨친 전공이 아닐 수 없다. 터키는 오랜 세월 우리의 혈맹이었다. 역사적으로 터키를 구성하고 있는 주요민족인 투르크족은 돌궐민족을 말한다. 돌궐은 고구려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군사적 협력과 교류를 하였다고 607년 수나라는 기록하고 있다. 또한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에 있는 아프라시압벽화에는 731년 돌궐제국의 왕 빌게 카간의 장례식에 조우관(鳥羽冠)을 쓴 고구려 사신이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근거들을 통해 돌궐과 우리 민족은 오늘날의 투르크 민족과 오랜 세월 혈맹관계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터키정부의 한국전 파병결정이 지연되자 터키의 고등학생들은 데모를 벌였다고 전한다. 형제의 나라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하였는데 왜 군대를 파견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현재 터키의 교육과정에서 한국은 다양한 분야에서 전체적으로 빈번하게 소개되고 있다. 터키군의 여단장이었던 야지즈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병사들에게 한국을 조국처럼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라! 한국은 우리의 혈족이다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터키인들의 한국사랑은 이렇듯 각별한 것이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터키용사의나는야 한국전쟁용사란 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난 한국 전쟁 용사요/평안한 세상 위해 싸웠네//군대에 자원해서 한국에 갔네/일대 삼으로 싸웠지, 다섯 명도 해치우고/세계평화 위해 그야말로 애썼네./그곳에서 친구들은 순직했네/ 터키 정부의 훈장은 없지만 노여워 않네/ 조상님께 어울리는 곧고 곧은 내 성품만이 남겨졌네.-시인은 할릿 허자올루이며 번역은 터키 카이세리에 있는 에르지예스대학의 하티제 교수가 하였고 필자가 교정을 도왔다.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던 시인의 말과 같이 터키의 병사들은 절제와 용맹, 충성심, 과감성을 생명처럼 여기는 가지(Gazi)정신을 중요한 윤리 덕목으로 지키고 있다. 김량장동 전투에서의 혁혁한 전공은 한국을 형제의 나라로 인식하고, 한국을 자신의 나라처럼 수호하고자 한 가지정신에서 발현된 것이라 생각한다. 터키와 터키군인들이 보여준 한국사랑은 비단 전투를 통해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니었다. 터키의 군인들은 전쟁고아를 데려다가아일라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돌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모여드는 전쟁고아들이 늘어나자 수원에안(앙)카라 학원을 세웠다. 학원을 운영하는 경비는 군인들의 월급 가운데 자투리 돈들을 모아서 충당했다고 한다. 1988년 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터키인들은 들떠 있었다. 형제의 나라에서 올림픽이 열리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작 한국인들은 터키를 잘 몰랐다. 섭섭함을 감출 수 없었던 터키인들은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한국, 더 이상 짝사랑은 그만두자다행스럽게도 2002년 월드컵을 통해 두 나라의 우애가 회복됐다. 6월을 맞아 한국전쟁에서 희생된 호국영령과 참전국의 전사상자, 그리고 투르크의 용사들의 희생과 한국사랑의 정신을 기리고자 한다. 김용국 문학박사 동아시아전통문화연구원 원장

[아침을 열면서] 슬픈 사과

얼마 전 좀 슬픈 기사 하나를 읽은 일이 있습니다. 훈육의 차원에서 한 고등학생에게 매를 들었던 선생님이 다른 아이들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아이에게 사과를 했다는 기사였습니다. 물론 매를 맞은 아이의 부모가 지인들과 함께 학교에 나타나 난동을 부리며 선생님에게 사과를 요구해서 생긴 일이었습니다. 사실 선생님의 권위가 바닥 난 게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 아이만 귀한 줄 아는 이런 어른들이 많다는 건 분명 슬픈 일입니다. 하루는 아내가 속상한 일을 겪었다며 이야기를 나눈 일이 있었습니다. 일곱 살 짜리 아이에게 정식으로 사과를 한 일이 생겼던 겁니다. 아이들끼리 어울려 놀다 노래를 우습게 하던 아이를 보고 웃었는데 아이가 울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미소 지으며 놀린 게 아니라고 사과를 했음에도 아이의 부모가 정색을 하고 나서서 아이에게 정식으로 사과하라는 말을 했다는 겁니다. 어쩌겠습니까? 사과를 했겠죠. 물론 어른이 잘못을 했다면 상대가 누구라도 분명 사과를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상황이나 아이의 격에 어울리는 사과가 아니었음에도 그런 걸 요구했던 것이죠. 안타깝지만 사과를 요구했던 아이 엄마는 주변의 아이들이나 엄마들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아이만 귀했던 것이었습니다. 진심으로 사과를 한다는 일, 분명 필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사과를 한다는 건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는 훌륭한 일임에도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사과가 강압적인 사과이며 격에 어울리지 않는 사과라면 그 사과는 공염불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아주 오래 전, 어머니가 한 공장에서 인부들의 밥을 해주시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인부들 중에 유독 밥을 두고 까탈스럽게 굴던 인부가 있었지요. 어머니가 해준 밥과 찬이 입에 맞지 않는다며 식당 앞에 자리를 펴고 앉아 직접 요리를 해 먹는 식으로 시위를 하기도 했고 어쩌다 밥을 먹게 되면 밥이 질다거나 간이 싱겁다고 투덜거리는 등 하루도 그냥 맘 편하게 넘어간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아마 7년 가까이 어머니는 그 인부 때문에 속앓이를 하시며 지내셨지요. 그러던 어느 날 그 인부가 교통사고를 크게 당해 부인과 함께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병원이 먼 곳에 있어 제가 어머니를 모시고 병문안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날 그 인부가 어머니 손을 잡고 그 동안 자신이 괴롭혀서 죄송했다며 눈물을 흘리더군요. 이런 게 진짜 사과인 겁니다. 사과를 하거나 받기 전후의 과정을 잘 헤아려야겠지만 그래도 사과는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으면 그 사과는 슬프기만 할 뿐입니다. 살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저지르는 실수들이 많습니다. 사과하자니 애매하고 안하자니 그 역시 껄끄러운 일들, 있을 겁니다. 그런 일들 먼저 나서서 사과하세요, 진심으로. 그러면 그걸 주변의 모든 아이들이, 어른들이 보고 배웁니다. 일의 잘잘못을 바로 잡아주려던 법원이 선생님에게 무릎 꿇게 만들었던 그 부모에게 좋은 제안을 했더군요. 선생님을 찾아가 무릎을 꿇고 사과를 한 후에 죄에 대해 선고를 하겠다고요. 법원의 제안을 받아 사과를 하겠지만 그 부모가 진심으로 선생님에게 사과를 할 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런 지경까지 온 건 슬픈 일이지만 그래도 그릇됨을 바로 잡으려는 노력이 이 사회에 아직 건전하게 존재한다는 건 기쁜 일입니다. 혹시 누군가에게 잘못하신 일이 있나요? 그럼 먼저 진심으로 사과해 보세요. 그래야 살 맛 나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요? 전민식 소설가

[아침을 열면서] 경기국제보트쇼, 해양레저산업 가능성을 확인하다!

올해로 6회째를 맞이한 2013 경기국제보트쇼와 2013 코리아매치컵 세계요트대회 및 경기화성해양페스티벌이 분리 개최에 따른 우려를 말끔히 씻어내고 성료했다. 화성시 전곡항 일대에서 동시에 개최됐던 지난 5번의 대회와는 달리, 올해에는 국제보트쇼는 고양의 킨텍스에서, 세계요트대회는 전곡항에서 개최됐다. 보트쇼를 킨텍스에서 개최하게 된 것은 경기국제보트쇼를 아시아를 대표 하는 비즈니스 중심의 전문 산업전시회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5년 전 처음 보트쇼와 요트대회를 개최할 때에는 해양레저 산업의 중요성을 대중에게 알리고 해양레저의 저변을 확대하고자 전시회와 요트대회, 체험행사 등을 결합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회를 거듭하면서 보트쇼 참가업체 수와 전시면적이 크게 늘어나면서 최적의 비즈니스 여건을 갖춘 킨텍스로 옮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전곡항에서 개최된 세계요트대회 및 해양페스티벌은 많은 숙제를 남기긴 하였지만 중요한 보트쇼가 떨어져 나갔음에도 여전히 성공적이었다. 이번 보트쇼에는 305개사가 1천232개 부스에 2만8천500㎡의 전시면적으로 참가해 지난해보다 참가업체 수는 1.6배, 전시면적은 2.4배 이상 증가하는 성장세를 보였다. 해외바이어도 29개국에서 141개사가 참가해 성황을 이뤘다. 또한, 우리나라의 요트제조업체인 (주)마스터마린이 독일의 드레트만 요트사(Drettmann Yacht)에 100ft급 메가요트 1척을 600만달러에 공급하기로 계약하는 등 1억3천158만달러 상당의 상담 및 계약을 이끌어내는 성과를 거뒀다. 관람객도 유료로 전환한 2011년 이후 최대인 3만3천여명이 방문해 지난해 대비 2배 가까이 증가했다. 이러한 외형적인 성과보다 더 의미 있는 것은, 해양레저산업이 대한민국의 새로운 성장 동력 산업으로 발전할 수 있는 잠재력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데 있다. 그러나 아직 경기국제보트쇼가 세계적인 보트쇼로 성장하려면 풀어야 할 과제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첫째, 경기국제보트쇼가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추려면 전시 참가업체와 바이어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어야 한다. 둘째, 해양레저 활동의 대중화를 통해 요트와 보트의 소비시장이 확대될 수 있도록 마리나 시설의 개발, 레저 선박의 유지보수 및 보관, 교육, 차터사업 등 해양레저활동을 지원하는 각종 사업과 제도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 셋째, 취약한 디자인, 판매, 서비스 분야를 강화하기 위해 국가와 지자체가 적극적인 지원에 나서야 한다. 해양레저산업은 제조업과 관광, 스포츠 등 서비스업의 융합을 통해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미래 신성장동력 산업으로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블루오션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조선분야에서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그동안 대형조선 산업에 버금가는 규모의 해양레저 시장의 진출에는 한 발 뒤처져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경기도가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천혜의 환경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해양산업의 발전을 위한 도전을 하는 것이다. 경기도가 시작한 경기국제보트쇼 및 세계요트대회가 전곡해양산업단지 건설, 그리고 전곡, 제부, 흘곳, 방어머리 등 경기만 일대의 마리나 건설 프로젝트들과 함께 우리나라 해양레저 산업 발전의 토대가 되어 대한민국의 새로운 먹거리산업을 육성하고 우리의 젊은이에게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는 기반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김희겸 경기도 경제부지사

[아침을 열면서] 아들에게!

6월이다. 산천의 초록은 무르익어서 해 아래 사람들은 서로가 눈부시다. 이맘때쯤이면 달력의 첫 장을 넘길 때 결심했던 모든 것들이 희미해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다시 일 년의 반을 채울 빛나는 계획을 세워보는 것은 어떨까. 어쨌거나 유월은 세상이 살아서 절정을 이루는 때,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몇몇 문청들이 모여서 시 토론을 하는 수업에서 자기소개를 하는 편지글이었다. 빛나는 청춘! 가능성 100%의 청춘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것일까. 이상하게 설레고 두렵고 한편으로는 젊음에 질투가 나기도 하면서, 그들의 생각이 궁금했다. 그러나 내 생각과는 다르게 그들은 모두 캄캄한 암흑 속을 헤매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일까. 자기소개의 글들은 모두 자기의 스펙으로 도배를 해서 진정한 자기를 드러낼 줄 몰랐다. 모두 회사에 입사를 목적으로 하는 기계적인 자기소개 글들이었다. 어쩌면 그렇게 판에 박아 한 틀에 두 얼굴처럼 모두 한결같았다. 배경이 온전한 자기가 될 수 있는 걸까. 고민스러웠다. 속에서 채워진 생각들이 밖으로 배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쓸어 담은 생각들로 자기를 채우면서 살아가는 오늘의 청춘. 나는 왠지 저들을 보면서 무척 혼란스러웠다. 저들의 이마 위에서 분초 단위 간격으로 짓누르는 취업의 고민과 무작정으로 달려드는 내일의 불확신을 어떻게 해결하고 새로운 답을 낼 수 있을까. 넓은 세상에 대해, 바다 저 건너 둥근 수평선 밖의 경이에 대해, 해가 지고 해가 뜨는 세상의 신비에 대해, 무엇보다 자기를 긍정하는 방법에 대해, 나는 무어라 저들을 위로 할 수 있을까.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만이 이 세상이 아니라고, 그런 것들이 세상을 사는 이유가 된다면 삶은 참으로 가볍고도 어이없는 현실이라고, 어떻게 저들에게 당차게 웅변할 수 있을까. 잘 먹고 잘 입는 것이 꿈의 끝이 아니라는 것을, 바다 저 건너 자기만의 파도를 타고 넘으면 새로운 땅이 열린다는 것을, 어떻게 저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 답을 여기 세상의 청춘들에 들려주는 김명인 시인의 아들에게라는 시로 대신할까 한다. 풍랑에 부풀린 바다로부터/ 항구가 비좁은 듯 배들이 든다/ 또 폭풍주의보가 내린 게지, 이런 날은/ 낡은 배들 포구 안에서 숨죽이고 젊은 선단들만/ 황천(荒天) 무릅쓰고 조업중이다// 청맹이 아니라면/ 파도에게 저당 잡히는 두려운 바다임을 아는 까닭에/너의 배 지금 어느 풍파 갈기에 걸쳤을까// 한 번의 좌초 영원한 난파라 해도/ 힘껏 그물을 던져 온몸으로 사로잡아야 하는 세월이니/ 네 파도는 또박또박 네가 타넘는 것/ 나는 평평탄탄(平平坦坦)만을 네게 권하지 못한다// 섬은 여기 있어라 저기 있어라/ 모든 외로움도 결국 네가 견디는 것/ 몸이 있어 바람과 맞서고 항구의 선술로/ 입안 달게 헹구리니// 아들아, 울안에 들어 바람 비끼는 너였다가/ 마침내 너 아닌 것으로 돌아서서/ 네 뒤 아득한 배후로 멀어질 것이니/더 많은 멀미와 수고를 바쳐/ 너는 너이기 위해 네 몫의 풍파와 마주 설 것! - 김명인 아들에게 전문. 온전한 자기로 돌아오는 일은 자기의 격랑과 싸워 이겨서, 자기와 온전히 마주 섰을 때 가능한 일이 될 것이라 시인은 일갈한다. 아들아, 딸아, 그리하여 청춘아! 생명을 받아 단 한 번뿐인 지금, 너는 너를 온전히 사랑하고 있는 것이냐? 손현숙 시인

[아침을 열면서] 기억, 인간의 조건

사람들은 걱정 없는 완벽한 사회를 꿈꾼다. 딸아이 덕분에 읽은 책 기억전달자 (로이스 로우리, 2007)는 이런 고통과 슬픔과 걱정이 없는, 인간을 둘러싼 환경이 인위적으로 조절된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가장 살기 좋은 하나의 계절만 존재하고, 인간이 소비해야할 곡물과 생산될 곡물의 양이 완전히 맞춰져 있다. 폭우와 폭설 혹은 과다한 일조량은 있을 수 없다. 아이가 태어나면 나이에 맞춰 허용되는 것들만을 행해야한다. 머리에 리본을 달고 다녀야할 나이, 자켓을 입어야할 나이, 자전거를 탈 수 있는 나이가 정해져 있다. 그리고 12살이면 해야 할 임무(직업)가 정해진다. 심지어 아이를 낳아야할 임산부의 역할까지도 임무로 배정된다. 그리고 완전한 공동체사회를 위해 기능이 쇠약해진 인간은 임무해제를 받게 된다. 즉 의도된 죽임이 행해진다. 이런 완전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한사람에게만 부여되는 중요한 임무가 있다. 기억보유이자 전달을 하는 역할이다. 기억을 보유한자가 기억보유자로 임명된 12살짜리 아이에게 기억을 전달해준다. 완전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과거의 기억을 보존하고자 하는 것이다. 변화없는 세상에 약간의 변화는 대단한 충격을 유발한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 과거의 기억을 찾아 부작용 없는 현명한 해결책을 찾기 위함이다. 기억보유자 즉 전달자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일어나는 모든 희노애락을 느끼고 있으므로 일반인들과 격리되어 생활하게 된다. 완전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는 전인격적 존재인 셈이다. 다른 이야기를 하나 더 해보자.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담당하는 인간이 만들어졌다. 그들은 새로운 행성 개발을 위해 투입된다. 필요한 지식과 감정이 이식되어 있어 인간 못지않은 능력을 갖는다. 그들은 주어진 임무에 맞게 제작된다. 리들리 스콧 감독이 만든 영화 블레이드 러너(1982)에 등장하는 판매되는 인간 리플리컨트다. 이들의 약점은 생존기간, 즉 유통기간이 4년으로 정해져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4명의 리플리컨트는 생명연장을 위해서 지구로 잠입한다. 육안으로 식별하기 어려운 리플리컨트를 색출하기 위해 주인공이 활약하게 되는데 그의 방법은 200개정도의 기억과 감정에 대한 질문으로 홍채반응을 살펴 이식된 것임을 알아채는 것이다. 기억전달자는 청소년들을 위한 성장 소설이라고 한다. 청소년기를 보내면서 겪게 될 여러 가지 일들을 은유로 나타내는 책이라고 하지만, 유독 나의 기억에 남는 것은 완전한 사회를 유지하려는 불완전한 인간이 기대는 불완전한 사회를 살다간 인간의 기억에 있었다. SF의 전형이라고 불리게 된 블레이드 러너 또한 인간의 공유된 감성,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블레이드러너는 한 여성 리플리컨트를 데리고 탈출한다. 그러나 그 또한 리플리컨트일지 모른다는 암시를 남기고. 기억전달자는 임무해제 결정을 받은 아기를 데리고 조절된 완벽한 사회를 탈출한다. 불안정성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발생하는 당연한 현상이다. 인간사 사실들이 모여 한켠에 역사라는 이름으로 강조되는 것은 기억되지 않는 역사의 반복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기억에 대한 상처를 헤집어 발생하는 불안정성과 무질서 뒤에 숨겨진 통치의 테크닉일 것이다. 덧칠해지는 변질된 기억의 사실 속에 놓여있는 핵심은 기억의 공유자들로 인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민병은 ㈔한국문화의집협회 상임이사

[아침을 열면서] 가정의 달! 노인이 없다?

5월은 가정의 달이라 한다. 그 어느 달보다 가정의 소중함을 생각하게 하는 각종 기념일이 많기 때문이다. 잘 아는 바와 같이 어린이날, 어버이날, 성년의날, 부부의날이 모두 5월에 있다. 가정의 달, 노인이날이 없다! 어린이날은 어린이들이 티 없이 맑고 바르게, 슬기롭고, 씩씩하게 자라도록 제반 환경을 조성하고 어린이들에게는 꿈과 희망을 키워주고자 제정한 날이다. 그러나 그 시작이었던 1923년 5월 1일은 어린이들에게 민족정신을 일깨우고자 하는 운동의 일환이기도하였다. 어버이날은 1956년 어머니날로 시작해 1973년 어버이날로 개칭됐다. 효사상을 고취하는 한편 전통적인 가족제도를 계승 발전시키며 건강한 가정과 장한 어버이를 발굴하여 널리 모범이 되도록 함에 목적을 두고 있다. 성년의날은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첫째 관문인 관례(冠禮)에 해당하는 것으로 1973년 제정되었다. 성인으로서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책임질 자부심과 사명감을 부여하기 위한 것이었다. 부부의날은 건전한 가족문화의 정착과 가족해체를 예방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2007년 제정되었다. 가정이 건강해야 고령화와 청소년 문제 등을 해결할 수 있다는 취지로 제정되었다. 가정의 달인 5월, 둘(2)이 하나(1)가 된다.는 의미를 담아 21일을 기념일로 하고 있다. 부부의날은 1995년 어린이날 우리 엄마아빠가 함께 사는 게 소원이에요라는 한 어린이의 TV 인터뷰가 도화선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가정의 달에 노인이 없다. 가정을 이루고 있는 구성원들은 나이로 어린이, 성년, 노인으로, 역할로는 어버이와 부부로 나눠 볼 수 있을 것이다. 엄연히 기념일로서 노인의날이 제정되었음에도 왜 가정의 달에는 포함되지 못한 것일까? 내게는 어머니와의 소중한 추억이 있다. 30년 전 어린이날 어머니께서 바람을 쐬러가자 하셨다. 돌아보니 쉰의 나이가 되도록 어린이날에 대한 추억은 그 해가 가장 소중한 날로 기억된다. 1983년 어린이날 어머니께서 내게 선물하신 것은 소주 2병과 통닭 한 마리였다. 지금도 그 때 그날을 회상하면 웃음이 난다. 어머니는 어린시절의 내게 한 번도 어린이날을 기념해주지 못하신 미안함이 있다고 하셨다. 그리하여 성년이었던 내가 어린이날 어머니가 주신 소주로 낮술을 거나하게 마시는 추억을 챙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자식을 두고 보니 부모님보다 자식이 더 애틋하다. 한 밤 중 부모님이 편찮다 하실 때 물수건을 갈아드리며 자리를 지키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어린 자식이 아프다고 하니 한 밤중에 먹을 갈고 의미도 모르는 반야심경을 썼던 기억이 있다. 부모님의 애틋한 사랑으로 성장하였으면서도 나는 참 못된 자식이다. 왜 자식임을 잊고 아비인 것만을 기억하는 것일까? 어느덧 어머니는 망백(望百)을 지나 백수(白壽)를 앞두고 계시다. 오늘일은 잊으시고 옛일만을 기억하신다. 기쁠 땐 어김없이 눈물을 보이신다. 가정의 달, 유일하게 어린이날만이 공휴일이다. 공휴일이냐 아니냐가 가정 내 구성원의 중요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공휴일인 어린이날은 중요한 날이고 어버이날, 성년의날, 부부의날이 중요하지 않은 날은 아닌 것이다. 마찬가지로 노인의날이 가정의 달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하여 노인이 가정 내에서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는 물론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기념일이 휴일이든 아니든 대상을 더욱 또렷이 생각하고 돌아보는 의미로 지정이 된 것이라면 오늘날 노인의 날도 5월, 가정의 달에 포함을 시키는 것은 어떠할까? 가족의 중요한 구성원의 하나가 노인임을 상기시키는 의미에서 말이다. 김용국 문학박사 ㈔동아시아전통 문화연구원장

[아침을 열면서] 집의 편견

제가 사는 아파트는 국민임대아파트입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국민임대아파트란 일정 소득 이하의 서민들만 들어가 살 수 있는 아파트를 말합니다. 가장 큰 평수라고 해봐야 24평입니다. 매달 일정액의 임대료를 내야한다는 건 있지만 보증금도 싸고 주변 여건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그곳에 저와 아내 그리고 아들 녀석과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임대아파트는 열등한 사람들이나 사는 그런 집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더군요. 지난 봄 그런 일을 겪었습니다. 한 벼룩시장이 열린 자리였습니다. 그 시장 마당에 추레한 몰골의 한 노파가 등짐을 지고 나타났습니다. 우리도 그곳에 갔습니다. 아이가 자라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않는 오래된 장난감이나 작아져버린 아이 옷, 발이 커서 더 이상 신을 수 없는 신발 등을 들고 나갔지요. 돗자리를 깔고 물건을 진열했습니다. 물론 멀지 않은 곳에 노파도 등짐에서 꺼낸 물건들을 보기 좋게 진열했습니다. 노파의 물건은 정갈했습니다. 군대에서 입는 보온 상의(깔깔이), 낡고 바란 버선 몇 켤레, 돋보기, 역시 색이 바란 꽃무늬 나막신 그리고 산에서 캐왔을 쑥과 나물, 가늘게 자른 후 말린 무 등을 늘어놓았지요. 벼룩시장에서 그런 것도 팔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참 사람들이 오가며 시장판에서처럼 흥정이 오가고 그랬습니다. 저도 아이를 도와 물건 흥정도 도와주고 있는데 귀 아픈 소리가 들리더군요. 저, 할머니. 요 앞에 임대아파트 산대. 그깟, 나물. 아무튼 임대 사는 것들 다 그래요. 두 아주머니가 노파를 일별한 후 종종걸음을 치며 그런 이야기를 나누더군요. 그 두 여자 뒤에 아이들이 졸졸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내막은 간단했습니다. 아이들이 진열해 놓은 쑥이며 나물들을 할머니가 잠깐 자리 비운 사이에 엉망으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일부는 사람들 발에 밟히고 일부는 아이들이 장난 삼아 던지고 그랬던 겁니다. 마침 할머니가 돌아왔고 아이들에게 야단을 쳤던 모양입니다. 그러자 아이 엄마들이 나서서 미안하다고 말하고는 지폐 몇 장을 휙 던지듯 주고 자리를 피하는 중이었던 겁니다. 미안하다고나 하지 말걸. 할머니는 창피했던지 바로 짐을 싸 자리를 뜨더군요. 두 엄마의 말은, 임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심하게 장난을 쳐도 참고 견뎌야한다는 이상한 말이었습니다. 저런 편견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건지 알다가도 모르겠더군요.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조금은 놀랐습니다. 그런데 그런 편견은 임대아파트에 사는 엄마들도 가지고 있더군요. 한번은 우리 아이와 같은 어린이집을 다녔던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의 주소가 다른 곳으로 되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유는 아이를 임대아파트 아이들과 같은 초등학교에 보낼 수 없기 때문이랍니다. 수준이나 뭐 그런 게 쫌, 그렇잖아요. 뭐가 쫌 그런지 저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임대아파트에 사는 엄마들마저 스스로를 그렇게 자신을 낮추고 있었던 겁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편견입니까. 그런 뉴스도 보았습니다. 임대아파트와 민영아파트 사이에 없던 담을 세운 동네가 있다는 말을요. 임대아파트 주민들이 민영아파트 앞길로 오가며 온갖 나쁜 짓을 저지른다는 게 그 명분이었습니다. 이런 어른들에게서 아이들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싶습니다. 아파트의 생김새나 평수에 따라 인간의 질이 다르다고 가르칠 건가요. 그런 어이없는 편견은 굳이 가르치지 않아도 아이들은 금방 배웁니다. 임대아파트 것들!. 편견은 공정하지 못하면서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은 물론 모르는 세계에 대해 모두 아는 것처럼 잣대를 들이대는 것도 편견일 겁니다. 임대아파트는 지질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전 민 식 소설가

[아침을 열면서] “北, 대화의 장으로 나와야”

최근 남북관계의 경색국면이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국면에서도 불안전하게나마 남북관계를 이어가는 유일한 통로가 개성공단이다. 개성공단은 남북간 평화협력의 상징 사업이라는 의미와 미래를 지향하는 협력 모델이다. 그러나 최근 북한의 정전협정 파기선언과 함께 북한의 개성공단 잠정중단 조치 사태까지 이르고 있는데, 참으로 우려되는 상황이다. 우리 측도 북한 측에 대화 창구는 열어 놓고 있지만, 별 실효가 없어 보인다. 이제 개성공단은 남북간 긴장 고조의 우여곡절 끝에 결국 공장 가동이 멈췄고 잔류근무자들은 전원 철수했다. 이처럼 극한대립으로 치닫는 남북관계가 세계열강들의 부단한 움직임과 더불어 한 치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상황인데, 이런 시점에서 한반도의 위기상황에 대한 해법은 단절을 넘어 대화가 유일하다는 생각이 든다. 대화란 서로 대등한 위치와 관계에 있을 때에 가능한 것인데, 한반도에 있어 남과 북은 그 우열을 가리기 난해한 복합성이 있기에 우리는 보다 현실적인 접근을 해봐야 한다. 가령 개성공단의 경우, 남북교착상태에만 빠지면 우리에게 매우 부담이 되곤 하는데, 이는 한번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이다. 최근 남한 내에 개성공단과 같은 기업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이 많이 나오고 있다. 남북교착시에 개성공단에 문제가 생기는 이유는, 북한에 남한공단을 만들었기 때문인데, 즉 북한이 공단의 통로를 차단하게 되면 우리측에 심대한 타격을 주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측도 파주나 인천 등에 위와 같은 기업체를 만들어 남북간 물적, 인적자원의 교류를 원활하게 해야 한다는 주장은 중요한 대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우리나라 제조업을 비롯한 기반산업의 발전뿐만 아니라 유사시 양측의 통로가 되어 서로를 알고 이해하고 인정하는 신뢰의 프로세스가 구축되는 역할을 하며, 궁극적으로는 평화통일을 앞당기는 동력이 될 것이다. 지난 5월 경기도의회의장인 필자가 건의한 개성공단 조기정상화 촉구 건의문이 전국시ㆍ도의회의장협의회에서 채택되었다. 평화통일을 위해서는 남북간 교류협력은 대단히 중요한데, 개성공단 잠정중단 조치는 같은 일이 있으면 남북간 교류협력의 폭이 그만큼 줄어들므로 하루 빨리 정상화 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 개성공단은 2000년 6.15 남북공동성명을 바탕으로 탄생한 남북 화해와 협력의 상징이자 남북 공동발전을 도모하는 경제 협력사업 이므로 남북 당국은 부정적 대응을 자제하고 즉각 대화에 나서 남북한 대화채널을 복원하고 상호 신뢰를 쌓아 개성공단을 조기 정상화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개성공단에서 민족공동번영을 위해 노력한 남북한 노동자의 땀방울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이자 개성공단을 국제적 경제특구로 발전시키기 위한 필수적인 조치이기에 남북한 당국은 민족 공동번영을 위한 경제협력사업이 흔들림 없이 추진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지금 세계는 미국과 유럽이 중심이 되어 움직이던 이전과는 달리 새로운 변화의 물결이 일고 있으며 한반도도 예외 없이 새로운 변화를 요구 받고 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주변국들은 새로운 리더십 교체를 통하여 미래질서를 형성해 가고 있는데, 오로지 북한만 과거의 이데올로기 대립의 틀에 사로 잡혀 핵과 미사일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이는 북한이 국제적인 변화를 받아들여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윤 화 섭 경기도의회의장

[아침을 열면서] ‘나는 사랑입니다’ 유기동물들을 위하여

사람들은 모두 행복을 꿈꾼다. 그러나 꿈꾼다고 행복이 오는 것은 아니다. 행복은 어쩜 아픈 것들과 철저하게 마주 섰을 때 어둠의 틈 사이를 기어이 비집고 오는 한 줄 햇살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지난 일 년을 아픈 영혼들과 뒹굴었다. 나는 사랑입니다, 저들은 모두 버려진 영혼들이었다. 거리에서 혹은 쓰레기통에서 심지어 우아한 레스토랑에서도 저들은 버젓이 버려졌다. 어떤 손은 마치 최후의 궁리를 마친 것처럼 산 채로 뼈마디를 똑똑 분질러서, 상자 속에 착착 접어서, 쓰레기통 위에 달랑 올려놓기도 했다. 기억 속에서 오래도록 나를 따라다녔던 강아지 한 마리 시추. 녀석은 비싼 미용을 마치고 리본까지 달고 버려졌다. 버려졌다는 자명한 사실을 인정 못 하고 홀로 분노하면서 날카롭게 발톱을 세웠던 녀석. 과하게 부려졌던 사랑과 느닷없이 거두어진 사랑 속에서 녀석의 운명은 결국 우울증이었다. 그리고 또 한 녀석, 치와와는 잠들어서도 네 다리를 맹렬하게 움직여서 도망 다니곤 했는데, 사람의 학대를 피해 꿈속에서도 숨이 찼던 녀석의 삶은 진정 생중사였겠다. 또 하나의 기억. 노인정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사랑을 듬뿍 받던 복남이. 느닷없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보신탕용 몽둥이찜질에도 저들의 품을 파고들기도 했는데. 사람들의 반려동물로 살아야만 했던 개와 고양이. 그러나 어느 날 버려져서 갈 곳 없는 영혼들로 혼란했던 저들의 이야기를 곰곰 받아 적었던 일 년이었다. 처음부터 개와 고양이를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지금도 개와 고양이들을 몸살 나게 좋아하지는 않는다. 다만 동물복지단체인 동물자유연대와 출판사 넥서스 지식의 숲과 손을 잡고 나는 사랑입니다를 집필하는 동안 내 운명은 분명히 바뀌었다. 기적처럼 자연이 내 속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나 또한 자연 속에서 잠시 시간을 여행하고 돌아가는 시간 여행자라는 생각을 굳힐 수 있었다. 저렇게 비참하게 버려지고, 더러는 다시 사랑을 얻어서 삶을 살고 있는 반려동물들 역시 나와 똑같이 시간을 여행하고 있는 시간여행자라는 사실. 저들도 나와 같이 지금 이 순간을 통과하고 있는 자연의 일부라는 자명한 현실. 그리고 자연은 누구도 감히 버리고 버려질 수 없는 존재라는 두려움. 그것이 내가 일 년 동안 저들을 안고 뒹굴면서 얻은 결론이다. 누가 인간만이 느끼고 울고 웃고 슬퍼한다고 감히 단정했을까. 커다란 자연의 기운 속에서 귀를 확 열어젖히고 저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면 어느덧 저들의 숨소리에서도 감정을 느끼게 되는 순간에 닿기도 했다. 두려움 비슷한 것에 시달리면서 하늘의 문이 깜깜 닫혔던 아득함. 하늘에서 보면 땅이 하늘이고, 죽음 쪽에서 생각하면 삶을 부리는 이곳이 어쩜 또 다른 형태의 죽음일 수도 있는 거다. 나는 사랑입니다는 60가지의 사연을 가진 유기동물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저마다의 버려진 사연 속에서 동물보호연대로 옮겨지면서 저들의 삶은 지속되었던 것이다. 더러는 따뜻한 가정으로 입양되어서 새 삶을 찾은 녀석들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은 버려졌다는 사실에 부정하고 분노하고 타협하고 우울하고 수용하는 과정을 거치는 동안 제 명을 다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상한 경험은 유기동물 대부분이 자기 자신이 버려졌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저들은 대부분 버려진 장소에서 멀리 떠나지 않았다. 주위를 맴돌면서 주인은 반드시 자기를 데리러 오리라는 믿음을 보였다. 그리고 대부분 거리에서 삶을 마감했다. 생명을 물건처럼 버린 손과 그 손을 서슴없이 믿어버린 동물들. 그 사이에는 도대체 어떤 서사가 존재했던 것일까.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경기도 미술관에서는 가족이되고싶어요-반려동물이야기展을개최한다. 제3의 가족이라 할 수 있는 반려동물에 관한 미술작품들과 동물자유연대의 유기동물들에 관한 사연들을 모아서 5월 3일부터 총 80일간 전시를 한다. 이번 전시에는 생명의 존귀함에 대한 사회적 발언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해 온 여러 분야의 작가들이 마음을 함께한다. 아이들 손을 잡고, 혹은 노부모와 함께 가족 나들이를 이곳으로 하는 것도 뜻이 있을 것 같다. 버려진 것들에 대한 사색. 어쩌면 우리 모두 어느 별에 버려진 가뭇없는 생명일지도 모르겠다. 손 현 숙 시인

[아침을 열면서] 복숭아꽃과 복숭아 사이

여의도에서 근무하는 선배 호출(?) 덕으로 벚꽃이 절정을 이루었던 날에 벚꽃 아래를 거닐 수 있었다. 쌀쌀한 밤바람에도 사람들은 연인들과 친구들과 가족들과 무리를 지어 차 없는 아스팔트 위를 자유롭게 거닐었다. 사람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사람들을 피해 사진을 찍었고, 또 그 사람들을 피해주느라 서로 비껴가기도 했던, 지천이 꽃과 사람들이었다. 복잡한 거리였으나 하늘을 가득 메운 꽃은 20년쯤 전에 와봤던 그 때와 변함없이 황홀했다. 단, 인공조명만 아니라면 완벽에 가까운 황홀의 재연이었을 것이다. 얼마 전 워크숍을 진행했다. 전국 각지에 있는 문화의집운영자들과 동아리회원 혹은 예술강사들과 함께 올해 진행될 내용을 함께 협력기획 해 가는 과정이었다. 일도 일이지만 각 지역에서 겪는 개인들의 사정과 상황을 얘기하면서 경험을 서로 공유하는 소중한 자리이기도 했다. 1박2일 동안 진행되는 과정 중에 어떤 지역 상황을 듣게 되었는데 복숭아꽃 축제가 복숭아 축제로 바뀌면서 축제 내용은 물론 개최시기도 바뀌었다는 얘기였다. 스치듯 잠깐 들은 얘기인즉슨 복숭아나무가 많아 4월 중순 이후면 복숭아꽃이 만발하여 복사꽃 축제가 열렸다고 했다. 그런데 복숭아 축제로 바뀌면서 일정도 9월로 바뀌었고 만발한 복사꽃이 아니라 복숭아가 주인공 자리를 대체하게 된 것이다. 복숭아꽃과 복숭아 사이에서 문득 꽃의 향연에서 열매 판매장으로의 변화가 아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복숭아라는 물질적 대상으로서의 가치도 중요하다. 복숭아 과수원은 축제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생존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지역만이 갖는 독특한 생산물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생겨난 선물과 같은 꽃 축제가 작더라도 지속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보태진 것이다. 사람들이 그곳을 기억한다는 것은 일반적 공간에서 특별함이 들어있는 장소가 태어나는 순간이다. 꽃에 대한 황홀은 그곳만이 갖는 장소에 대한 기억과 그 경험을 공유한 사람들과의 공감하는 보이지 않는 공통의 장을 마련해준다. 이것은 새로운 관계의 생성이며 삶과 생산활동의 분리를 어느 정도 메워주는 기능을 할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감수성은 보이지 않는 현상을 이해하는 능력을 키운다고 한다. 어머니의 말보다 기계의 말을 더 많이 배우는 세대를 살아가는 아이들 그리고 현재의 우울한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복숭아꽃과 복숭아의 연결은 새로운 공유된 감정과 공통된 공간을 가져다주지 않을까? 거기서 만들어지는 사회적 관계는 더 풍요로울 것이다. 20년 후에 다시 그곳을 찾게 될 이유는 복숭아의 맛 보다 복숭아꽃의 아름다움 때문일 것이기에. 민병은 한국문화의집협회 상임이사

[아침을 열면서] “신랑, 신부에게 고함”

바야흐로 결혼의 계절이 돌아왔다. 신랑과 신부들이여! 행복하신가? 어느덧 TV 채널권을 빼앗긴 채 살고 있지만 돌이켜 보니 내게도 헤게모니를 쟁취하려 버둥거리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주도권을 쥐고 의기양양해 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런데 가정의 행복이란 부부가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 피어나는 꽃이요 향기요 보람이었다. 새내기 신랑과 신부들이여! 궁합은 보셨는가? 혹 금요일에 태어난 신부와 월요일에 태어난 신랑이 계신가? 그리고 4월에 결혼을 하시는가? 미얀마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나름의 비방이 없는 것은 아니나 미얀마의 풍속으로는 불가능에 가깝다는 말이다. 그리고 신랑들이여! 함 값은 섭섭하지 않게 받으셨는가? 말레이시아에서는 오히려 신부집에 뇌물(?)을 주어야 신부집 문이 열린다는 사실을 아시는가? 결혼의 문화도 이렇듯 국가와 민족 간의 엄연한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아시안의 결혼 풍속 남자의 권위가 살아있다는 방글라데시에서는 남자는 밖의 사람, 여자는 방바닥 사람으로 인식한다. 남자는 바깥주인, 여자는 안주인이라고 인식하였던 우리의 풍속과도 같다. 무슬림의 경우 네 명의 아내를 둘 수 있으며, 남자가 이혼을 세 번 거론하면 이혼이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남자의 의사에 의하여 이혼을 하게 되었어도 여자가 아이들의 양육을 책임져야 한다. 라오스에서는 남편이 경제적으로 무능하면 아내가 이혼할 수 있고 남편은 집에서 쫓겨난다. 경제권도 자식의 양육책임도 여자의 몫이지만 아들보다 딸을 선호한다. 캄보디아도 모계사회의 풍속을 유지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혼례는 신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신랑은 지참금을 내고 신부집에서 처가살이를 하게 되는데 또한 처가집의 일을 돕게 된다. 필리핀은 아들보다 딸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다. 필리핀의 장녀는 우리의 장남과 역할이 같다. 자식이 결혼을 하여도 어머니의 영향력은 유지되어 손자의 세례의식도 시어머니의 몫이다. 미얀마의 경우 남편이 경제력이 없거나, 앓거나하여 무능하여지면 이혼이다. 그리고 남편에게 문제가 없는데 아내가 남편에 대한 애정이 없거나, 남편의 말을 거역하면 남편도 이혼을 결정할 수 있다. 그럼에도 아들을 선호한다. 베트남의 신화는 바다의 신 락 롱과 산신의 딸 어우 꺼의 결합으로 100명의 아들이 탄생하였고 가정에 충실하지 못한 락 롱으로 인하여 이혼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혼과 함께 부부는 각각 50명의 아들을 데리고 산과 바다로 이주하여 오늘날 베트남을 형성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베트남은 신화를 통하여 남성과 여성이 평등하다는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이렇듯 아시아 사람들의 풍속은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같다. 남성과 여성의 역할도 차이가 존재한다. 그렇게 보면 여자라서 행복한 것도 남자라서 불행한 것도 아니다. 어떠한 문화적 환경에서 태어나느냐에 따라 역할이 달라지는 것일 뿐이다. 양성(兩性)이 동등해야 스코틀랜드의 작가인 새무얼 스마일즈(Samuel Smiles)는 인격론에서 남성이 인간의 뇌라면 여성은 인간의 심장이다라 말한 바 있다. 이 말에 따르면 남성은 이성적이고 여성은 감성적이라는 말이다. 뇌와 심장이 건강해야 인체가 건강하듯 부부가 건강하여야 가정이 건강한 것이다.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길이 가장 멀다고 한다. 이 말은 남자가 여자를, 여자가 남자를 이해하는 데에 그만큼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모쪼록 좋은 봄날 새롭게 부부로 출발하는 이들의 가정마다 아름답고 향기롭고 보람되기를 기원한다. 김 용 국 문학박사 (사)동아시아전통 문화연구원장

[아침을 열면서] 거리의 밥

어느 시절이나 대학을 어렵게 다니는 사람들은 있을 겁니다. 요즘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을 겁니다. 아니 요즘은 학생들이 대학 다니기를 더 힘들어 하는 것 같습니다. 대학 등록금이 무서운 수준이라 그럴 겁니다. 사실 언제나 대학 등록금은 집의 기둥을 빼먹는 일이었지요. 하지만 집에 기둥이 없는 학생들은 장학금을 받거나 아니면 아르바이트 등을 해서 학비를 충당해야만 했지요. 저 역시 대학 등록금으로 갖다 바칠 기둥이 없었던 터라 혼자 모든 걸 해결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니 대학을 다니다 쉬다 할 수밖에 없었지요. 대학에 입학하던 그 첫해에는 등록금은 고사하고 하룻밤 등 붙일 숙소조차 없었지요. 가방 두 개를 끌고 다니며 하루는 이 집에서 또 하루는 저 집에서 빌붙어 잠을 청하고는 했습니다.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거리에서 하늘을 이불 삼아 잠을 자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별로 서럽지 않았습니다. 글을 쓸 수 있는 타자기가 있었고 책 읽을 수 있는 눈과 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세월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지요. 어느 날 문득 기사를 하나 보게 되었습니다. 노숙자로 살던 한 여자 아이였는데 하버드 대학교의 대학생이 되었다는 기사였지요. 카디자 윌리엄스라는 흑인 여성이었습니다. 엄마도 어린 나이에 윌리엄스를 낳았더군요. 갈 곳이 없어 노숙자 쉼터나 거리에서 생활했던 엄마와 소녀였습니다. 그나마 윌리엄스의 엄마는 자신의 딸이 자신처럼 노숙자로 남기를 바라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자신의 딸이 적어도 고등학교까지는 졸업을 시키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고 합니다. 아이에게 책을 읽게 하고 아이가 학교에 갈 때면 거리에서 입었던 옷을 벗기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혀 학교에 보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저는 잘 압니다. 윌리엄스나 그녀의 엄마처럼 긴 세월 거리에서 살지 않았지만 그래도 짧지 않게 경험했던 시간들 덕에 모녀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가늠이 되더군요. 아침에 일어나면 씻을 곳이 마땅치 않아 공중화장실의 세면대를 이용해야 하고 먹을 것 또한 여의치 않아 무료 급식소를 찾아가야만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학교를 간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저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만약 비나 눈이라도 오면 낭팹니다. 그럴 땐 정말 난감합니다. 안면에 철판을 깔고 동기들의 자취방 방문을 두드립니다. 옷이나 가방 따위가 비나 눈에 젖지 않게 하기 위해 제 가방에는 항상 우산과 우비가 들어 있었지요. 하룻밤 신세 지는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빨래까지 하겠다고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요. 차라리 방학 때는 좀 낫습니다. 공사장의 직영 인부로 들어가면 숙소와 밥이 해결되고 돈까지 벌 수 있으니까요. 저는 그렇게 2년 가까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카디자 윌리엄스는 20년을 그렇게 살아온 겁니다. 그녀와 그녀의 엄마에게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녀의 인내와 노력 그리고 버리지 않고 키워 온 꿈이 기특하고 가상했습니다. 요즘은 개천에서 용이 안 나오는 시대라고들 말합니다. 교육에 있어서도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이 정착되어 가면서 집안에 여유가 있지 않으면 좋은 대학가기도 힘들고 대학에 가서도 대학 공부에만 전념하기 힘들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이 부조리함을 카디자 윌리엄스가 훌륭하게 뒤집어엎었지요. 가진 게 없으면 용이 되는 게 불가능하다는 세상의 생각을 보기 좋게 녹다운 시켰던 겁니다. 그녀는 거리에서 자랐어도 세계 최고의 명문대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걸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건 누구나 가능하다는 사실도. 전 민 식 소설가

[아침을 열면서] 독도에 대한 단상

울릉군에서 가장 이름난 곳이 울릉읍 도리에 속하는 독도다. 북위 37도, 동경 131도에 위치한 독도는 울릉도에서 동남쪽으로 92㎞쯤 떨어져 있는 우리나라 섬이다. 독도 주변에는 가제바위ㆍ구멍바위ㆍ지네바위 등 아름다운 바위들이 있고 서도(西島)에는 그 윗부분이 평탄하여 등대와 경비초소가 세워져 있다. 이처럼 독도의 하늘과 바다와 땅은 오롯이 우리의 것, 우리의 터전인데 일본이 지속적으로 독도(獨島)에 대한 망언을 하고 있다. 일본의 독도망언은 역사왜곡 문제와 맞닿아 있다. 광복 70년이 다가오지만 일본은 여전히 독도에 대해 도발적인 책동을 지속하고 있다. 일본의 극우 보수주의자들이 주도하는 이 같은 반역사적 책동들은 한일 양국의 미래에 매우 부정적인 어두운 그림자이다. 과거 일본정부는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는 각서를 한국에 보내왔다. 그리고 2010년 3월, 일본 정부의 지침에 따라 독도를 일본 땅으로 표기한 초등학교 교과서 및 해설서가 일반에 공개됐다. 지금은 중고교 교과서 전부에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왜곡된 기술이나 지도가 들어갔다. 일본 교과서가 바뀔 가능성이 없는 현실에서 유일한 대안은 바로 독도교육 강화인데 우리 학생들에게 영토주권의식과 국제법적역사적지리적 논리에 근거해 독도에 대한 교육을 체계적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지난 2월 22일 일본 시마네현에서는 우리나라 땅 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우기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일본정부 고위인사도 참석한 이 행사는 일본 우경화의 위험한 징표라고 할 수 있다. 참으로 독도의 역사를 모르는 무지한 행위들이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 일본 록밴드인 벚꽃 난무류는 위안부 할머니들을 모독하는 노래를 CD에 담아 광주 위안부 나눔의 집으로 보내 충격을 주고 있다. 역사는 천년만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이다. 역사에 대해 사죄는 하지 못할망정 적반하장으로 한국인을 비하하면서 위안부 할머니 가슴에 대못을 박고,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의 모습에 우리들은 분노를 금치 못하고 있다. 경기도의회에서는 1천200만 도민과 함께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고 도민들의 영토주권의식과 강력한 의지를 바탕으로 독도 수호를 위해 힘과 지혜를 모아 나갈 것이다. 한편, 독도가 우리나라 영토임을 입증하는 충분한 역사적 자료가 있다. 현존하는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이다. 이 책에는 독도가 울릉도와 더불어 우산국이었으나 서기512년 신라에 귀속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외에도 고려사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도 독도는 우리 땅임이 계속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1900년 대한제국이 칙령 제41호로 독도가 우리의 땅임을 선포한 바도 있다. 일본 역시, 명치정부시절에 태정관이 울릉도(죽도)와 독도(송도)는 조선영토임을 확인한다는 결정문을 비롯해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부속령으로 밝힌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 독도를 한국영토로 그린 일본지도 총회도 등 다수의 자료들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우기며 독도에 대한 망언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이 망언에 대한 우리의 대처는 보다 적극적일 필요성이 있다. 독도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와 조직구성을 통하여 일본의 망언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리가 이 땅에 사는 이유가 되어야 한다. 윤 화 섭 경기도의회 의장

[아침을 열면서] 겨울아, 꽃들을 데려오느라 수고했다!

퀼트로 만든 작은 가방을 선물 받았다. 친구 수용이가 한 땀 한 땀 손으로 박음질해서 만든 휴대전화 집이었다. 한 사람이 한 사람만을 생각하며 만들어준 명품이었다. 나는 그것을 꽃이라 부른다. 친구는 그 가방을 만드는 동안 정성스럽게 친구를 생각해 주었으리라. 퀼트의 매력은 아마도 오래 참고, 오래 기다리면서, 오래 상상하는 인내의 시간에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오래 손안에 붙들어서 꽃을 불러오고 나비를 날게 하고 하늘위에 구름도 띄우는 동안 그녀는 몰입, 자기도 모르는 세상을 보았을지도 모르는 일. 그것은 아마도 겨울 지나 봄이 오는 그 얼음의 시간 속에 꽃들은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던 것과 다름이 없으리라. 누가 알랴, 겨울은 꽃들을 데려오기 위래서 그 길고 추운 시간을 맨발로 견디고 있었다는 것을. 이번 겨울 추위는 참으로 절절해서 절대로 봄이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하루걸러 눈 오시고, 하늘은 삼한사온도 잊으신 듯 연일 땅은 꽝꽝 얼어서, 내 집에서 옆집까지도 천 리 길이었다. 내가 사는 용인 모현면의 초부리는 깊은 시골이어서 겨우내 사람의 그림자구경도 힘들었다. 밤새 눈 내리고 아침에 창문을 열면 설국! 그것은 세상의 모든 소리와 모습과 사람의 죄까지도 침묵! 그 속에 고요히 침잠하는 모습이었다. 밤이 오면 물먹은 하늘도 얼어붙어서 그 깜깜 속에 별들은 눈만 깜빡, 깜빡. 그것은 마치 시간을 결박하는 이상한 동화처럼 삶과 죽음이 한 덩어리로 형형한 우주의 초월을 보는 듯했다. 그런 것들을 골똘하게 생각하며 내가 매일 다니는 산책길, 고양이 한 마리 얼어 죽어 있었다. 긴 겨울 정수리쯤의 일이었다. 고양이는 손수건만 한 볕뉘 위에 앞발 뒷발 꽃잎처럼 포개 누워있었다. 추운 발은 저절로 고양이를 외면하고 나만의 길을 동동질치며 걷곤 했다. 그러기를 일주일째 꿈자리 영 뒤숭숭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맨발. 그 뒤로는 깜깜한 시냇물이 흐르고 죽은 자의 발목 위에 또 발목. 그 아래 맨발. 산 사람의 모습에서는 도무지 찾을 수 없는 이상한 모습으로 아버지는 매일 나를 찾아오셨다. 원래 죽은 자의 어법은 겨울의 언어를 닮아서 소리가 없는 법. 그래서 겨울을 잘 견디면서, 결빙의 시간을 오래 지켜봤던 사람은 죽은 자의 침묵도 소리로 알아듣는 법이라는데. 그런 경지는 꿈도 꾸지 못하는 나는, 도무지 어지러운 시간 속을 헤매는 수 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긴 겨울은 그렇게 얼어붙은 마음으로 사람의 주위를 빙빙 돌고 돌았다. 나는 내 잠이나 실컷 재울 속셈으로 삽 한 자루 배낭에 지고 길 나섰다. 그날도 눈발은 훨훨 날렸던가. 그렇게 고양이 한 마리 무덤 하나 지어주었다. 빈손으로 가볍게 주검의 무게를 받아 땅속에 다독다독 꽃씨 하나 묻었다. 꽃 한 송이 자장자장 재웠다. 순한 짐승의 숨소리 들리는 듯했다. 어쩌면 꽃들이 돌아오는 소리? 흙에서 사람의 살 냄새 풍겼다. 그렇게 겨울의 긴 침묵이 끝이 나고 기러기들 남쪽으로 모두 날아간 때. 고양이 무덤 위에 새순이 반짝, 했다. 언뜻, 아직은 눈에 가득 차진 않지만 저것은 흙을 헤치고 먼 길 돌아온 자연의 당당함이리라. 신기해서 그 자리에 앉아 맨손으로 흙을 다독다독 다듬었다. 아직은 겨울의 냉기 손바닥으로 올라왔다. 그래도 그것은 생명의 소리처럼 경이었다. 동네 사람들 모두 약속이나 한 듯 밭으로 나와 흙을 갈아엎는 오늘, 내 친구 수용이의 순연한 바느질처럼 머지않아 저 속으로도 꽃과 나비와 벌들이 무진장 찾아들리라. 그것들을 위해서 겨울은 춥고 긴긴 밤과 낮을 속수무책 견뎠으리라. 갑자기 세상이 환해지면서 겨울아, 고맙다, 수고했다!. 손 현 숙 시인

[아침을 열면서] 봄과 상상

봄은 살아있지 않은 것은 묻지 않는다 매년 3월이 되면 떠오르는 기형도 시 구절이다. 3월7일이 기형도시인의 기일이다 보니 유독 그의 시 나리나리 개나리는 따뜻한 봄과 함께 기억되곤 한다. 죽은 그는 산사람들을 불러내어 자신의 시를 읽게 하고 이야기를 나눈다. 봄은 살아나는 것들에게 상상의 향연을 베푼다. 프랑스 문학비평가이며 철학자인 가스통 바슐라르는 인간의 이미자와 상상을 주관적인 욕망의 발현이라고 보았고, 이는 인간의 객관적 인식을 저해하는 요인이므로 인간 정신활동에 오류를 범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미지를 체계적으로 분류하겠다고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으나 오히려 인간만이 갖는 상상력에 대해 긍정적인 가치를 찾게 된다. 특히 바슐라르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시각적 이미지에서 오는 형태적 상상력보다 물질에서 오는 상상력이었다. 물질성 즉 질료에 의해서 갖게 되는 이미지와 상상력은 물질성을 기반으로 발전해가는 상상으로 인간들이 갖고 있는 물질에 대한 원초적 보편성으로 안내한다. 바슐라르가 말하는 물질적 상상력은 정신적 활동이라고 본 것이다. 봄은 생명에 상상력 불어넣어 상상하라, 창조하라 근 10년 동안의 외침이었다. 모든 것에서 창조력의 힘과 상상하는 힘이 강조되고 강요되어 왔으나 왜 상상해야 하며 또 어떻게 상상하는 것이며, 창의력이 필요한 이유를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고, 지금도 그러하다. 바슐라르가 말하는 정신활동으로서의 상상은 아주 천천히 만들어지는 것이며 유아ㆍ청소년기의 문화적 접촉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한다. 물론 시대가 갖는, 또는 지역이 갖는 보편적 사회성이 문화에 포함된다고 할 때, 교육되어지는 사회적 관습이나 전통에 의해 성찰 자체를 지배하는 비성찰적인 태도가 형성될 것이지만, 이러한 습득되는 사회적 보편성과 상상과의 연결고리를 알아채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는 말한다. 이미지, 상상, 창의 이러한 것들은 오로지 많이 교육받은 자들이 갖는 정신적 활동에 근거한 지극히 이성적 활동이라고만 생각해왔다. 솔직히 말하건대 상상력이라는 것이 어디서 어떻게 발생되어 발현되는 것인지 설명할 수 없었다. 박식한 자들이 해석한 내용을 더 많이 교육받아 평범 그 이상을 보여주는 것을 창의력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과학이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기재로 작동하던 시대에 물질적 상상력에 대한 바슐라르의 주장은 많은 영감을 가져다주었다. 나만의 삶의 방식 고민해 볼 때 우린 감성지체 장애사회에 살고 있다. 크게 기뻐할 일도 크게 슬퍼할 일도 없을 것 같은 얼굴로 살아간다. 좋아와 싫어로 응답되는 반응은 모든 감정을 빨아들인다. 개나리 나뭇가지에 바늘처럼 맺힌 꽃눈은 곧 접혔던 꽃술을 펼 것이다. 봄은 오래 기다려주지 않는다. 땅 위로 올라온 냉이 내음을 맡아보자. 아직 식지 않은 겨울의 찬기운도 손끝에서 느껴보자. 물질이 곧 정신활동임을 알아차릴 때 바슐라르의 물질적 상상력 그 너머를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훌륭한 철학자의 주석으로 남지 말고, 나만의 삶의 방식을 고민해 보자. 봄이 가기 전에. 민 병 은 한국문화의집협회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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