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이다. 산천의 초록은 무르익어서 해 아래 사람들은 서로가 눈부시다. 이맘때쯤이면 달력의 첫 장을 넘길 때 결심했던 모든 것들이 희미해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다시 일 년의 반을 채울 빛나는 계획을 세워보는 것은 어떨까.
어쨌거나 유월은 세상이 살아서 절정을 이루는 때,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몇몇 문청들이 모여서 시 토론을 하는 수업에서 자기소개를 하는 편지글이었다. 빛나는 청춘! 가능성 100%의 청춘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것일까. 이상하게 설레고 두렵고 한편으로는 젊음에 질투가 나기도 하면서, 그들의 생각이 궁금했다. 그러나 내 생각과는 다르게 그들은 모두 캄캄한 암흑 속을 헤매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일까.
자기소개의 글들은 모두 자기의 스펙으로 도배를 해서 진정한 자기를 드러낼 줄 몰랐다. 모두 회사에 입사를 목적으로 하는 기계적인 자기소개 글들이었다. 어쩌면 그렇게 판에 박아 한 틀에 두 얼굴처럼 모두 한결같았다. 배경이 온전한 자기가 될 수 있는 걸까. 고민스러웠다. 속에서 채워진 생각들이 밖으로 배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쓸어 담은 생각들로 자기를 채우면서 살아가는 오늘의 청춘.
나는 왠지 저들을 보면서 무척 혼란스러웠다. 저들의 이마 위에서 분초 단위 간격으로 짓누르는 취업의 고민과 무작정으로 달려드는 내일의 불확신을 어떻게 해결하고 새로운 답을 낼 수 있을까. 넓은 세상에 대해, 바다 저 건너 둥근 수평선 밖의 경이에 대해, 해가 지고 해가 뜨는 세상의 신비에 대해, 무엇보다 자기를 긍정하는 방법에 대해, 나는 무어라 저들을 위로 할 수 있을까.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만이 이 세상이 아니라고, 그런 것들이 세상을 사는 이유가 된다면 삶은 참으로 가볍고도 어이없는 현실이라고, 어떻게 저들에게 당차게 웅변할 수 있을까. 잘 먹고 잘 입는 것이 꿈의 끝이 아니라는 것을, 바다 저 건너 자기만의 파도를 타고 넘으면 새로운 땅이 열린다는 것을, 어떻게 저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 답을 여기 세상의 청춘들에 들려주는 ‘김명인’ 시인의 ‘아들에게’라는 시로 대신할까 한다.
풍랑에 부풀린 바다로부터/ 항구가 비좁은 듯 배들이 든다/ 또 폭풍주의보가 내린 게지, 이런 날은/ 낡은 배들 포구 안에서 숨죽이고 젊은 선단들만/ 황천(荒天) 무릅쓰고 조업중이다// 청맹이 아니라면/ 파도에게 저당 잡히는 두려운 바다임을 아는 까닭에/너의 배 지금 어느 풍파 갈기에 걸쳤을까// 한 번의 좌초 영원한 난파라 해도/ 힘껏 그물을 던져 온몸으로 사로잡아야 하는 세월이니/ 네 파도는 또박또박 네가 타넘는 것/ 나는 평평탄탄(平平坦坦)만을 네게 권하지 못한다// 섬은 여기 있어라 저기 있어라/ 모든 외로움도 결국 네가 견디는 것/ 몸이 있어 바람과 맞서고 항구의 선술로/ 입안 달게 헹구리니// 아들아, 울안에 들어 바람 비끼는 너였다가/ 마침내 너 아닌 것으로 돌아서서/ 네 뒤 아득한 배후로 멀어질 것이니/더 많은 멀미와 수고를 바쳐/ 너는 너이기 위해 네 몫의 풍파와 마주 설 것! - 김명인 ‘아들에게’ 전문.
온전한 자기로 돌아오는 일은 자기의 격랑과 싸워 이겨서, 자기와 온전히 마주 섰을 때 가능한 일이 될 것이라 시인은 일갈한다.
아들아, 딸아, 그리하여 청춘아! 생명을 받아 단 한 번뿐인 지금, 너는 너를 온전히 사랑하고 있는 것이냐?
손현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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