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는 미국과 영국에 이어 많은 병사들을 한국전쟁에 파병했다. 1950년 7월25일 파병을 결정하고 10월17일 한국에 도착해 1966년 7월10일 귀국하기까지 전사자와 부상자를 합하여 무려 3천64명에 이르는 터키의 젊은이들이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하여 피를 흘렸다.
터키군은 군우리, 와원, 신림리, 의정부, 연천, 퇴계원, 금화, 철원, 단장의 능선으로 불린 양구, 판문점 동ㆍ북방, 안양시 수리산, 용인시 김량장동 전투에 참여한 후 휴전 이후에는 의정부 후방의 경계를 담당했다.
터키군은 어느 나라의 병사들보다도 용맹했다. 가장 혁혁한 전공(戰功)은 단연 용인시 김량장동 전투에서의 백병전이었다. 151고지 전투에서 터키의 용사들은 12명의 사망자를 내면서 1천900여명의 중공군을 사망에 이르게 했다. 가히 1당 100의 맹위를 떨친 전공이 아닐 수 없다.
터키는 오랜 세월 우리의 혈맹이었다. 역사적으로 터키를 구성하고 있는 주요민족인 투르크족은 돌궐민족을 말한다.
“돌궐은 고구려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군사적 협력과 교류를 하였다”고 607년 수나라는 기록하고 있다.
또한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에 있는 아프라시압벽화에는 731년 돌궐제국의 왕 빌게 카간의 장례식에 조우관(鳥羽冠)을 쓴 고구려 사신이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근거들을 통해 돌궐과 우리 민족은 오늘날의 투르크 민족과 오랜 세월 혈맹관계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터키정부의 한국전 파병결정이 지연되자 터키의 고등학생들은 데모를 벌였다고 전한다.
“형제의 나라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하였는데 왜 군대를 파견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현재 터키의 교육과정에서 한국은 다양한 분야에서 전체적으로 빈번하게 소개되고 있다. 터키군의 여단장이었던 야지즈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병사들에게 “한국을 조국처럼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라! 한국은 우리의 혈족이다”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터키인들의 한국사랑은 이렇듯 각별한 것이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터키용사의‘나는야 한국전쟁용사’란 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난 한국 전쟁 용사요/평안한 세상 위해 싸웠네/…/군대에 자원해서 한국에 갔네/일대 삼으로 싸웠지, 다섯 명도 해치우고/세계평화 위해 그야말로 애썼네./그곳에서 친구들은 순직했네/ … 터키 정부의 훈장은 없지만 노여워 않네/ …조상님께 어울리는 곧고 곧은 내 성품만이 남겨졌네.”-시인은 할릿 허자올루이며 번역은 터키 카이세리에 있는 에르지예스대학의 하티제 교수가 하였고 필자가 교정을 도왔다.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던 시인의 말과 같이 터키의 병사들은 절제와 용맹, 충성심, 과감성을 생명처럼 여기는 가지(Gazi)정신을 중요한 윤리 덕목으로 지키고 있다. 김량장동 전투에서의 혁혁한 전공은 한국을 형제의 나라로 인식하고, 한국을 자신의 나라처럼 수호하고자 한 가지정신에서 발현된 것이라 생각한다.
터키와 터키군인들이 보여준 한국사랑은 비단 전투를 통해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니었다.
터키의 군인들은 전쟁고아를 데려다가‘아일라’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돌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모여드는 전쟁고아들이 늘어나자 수원에‘안(앙)카라 학원’을 세웠다. 학원을 운영하는 경비는 군인들의 월급 가운데 자투리 돈들을 모아서 충당했다고 한다.
1988년 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터키인들은 들떠 있었다. 형제의 나라에서 올림픽이 열리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작 한국인들은 터키를 잘 몰랐다. 섭섭함을 감출 수 없었던 터키인들은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한국, 더 이상 짝사랑은 그만두자”다행스럽게도 2002년 월드컵을 통해 두 나라의 우애가 회복됐다.
6월을 맞아 한국전쟁에서 희생된 호국영령과 참전국의 전사상자, 그리고 투르크의 용사들의 희생과 한국사랑의 정신을 기리고자 한다.
김용국 문학박사 동아시아전통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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