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밝았다. 해는 울타리 동녘 물에서 돋고, 구름은 북쪽 흙에서 오는 법이라는데. 나는 연필과 종이를 꺼내 들고 올 한해 지인들의 생일을 정리한다. 적어도 일 년에 한 번. 친구들의 생일 때는 잊지 말고 안부라도 전해야겠다는 것이 올해의 내 첫, 결심이다. 당신도 지금 새 달력과 새 수첩 앞에서 어떤 첫, 결심을 하고 계시는지? 첫, 이라는 말은 누구나의 가슴에 물고기처럼 싱싱한 설렘을 풀어놓기 마련이다. 지난 2012년 12월은 참으로 뜨거운 시간이었다. 내 나라 대통령을 내 손으로 뽑는 사건. 우리는 저마다의 마음에 낙점한 대선 주자를 향해 맹렬히 응원하고, 열렬하게 맞섰다. 무모한 진보와 꼴통 보수의 대결처럼 코앞에서 민망하게 얼굴 붉히기도 했었다.
가보지 않은 길과 너무나 자명한 길에 관하여 갈등하고 흥분하고 가끔은 우울했다. 그렇게 가마솥의 도가니처럼 나라가 들썩했다. 국민은 웬일인지 정치 앞에서 정신없이 소용돌이쳤다. 저마다 안보를 의심했고 소문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나라의 안녕과 질서와 발전과 이웃의 사랑에 대해 가슴에 새 한 마리씩 품고 있었다. 그리하여 동이 트는 시간부터 해지는 시간까지 투표 했고, 우리는 마침내 새 대통령을 맞이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헌정사상 최초로 뽑힌 첫, 여성 대통령! 첫, 과반의 투표율. 부녀가 함께 대통령을 나눠 가진 첫 번째 사례. 첫, 첫, 첫, 처녀의 순결처럼 위태롭기까지 한 첫, 이라는 모험과 투쟁과 도전과 야망. 두껍고 어려운 책의 첫 장을 여는 것처럼 우리는 모두 새롭게 태어난 첫, 여성 대통령을 향해 설렘과 공정과 신선함과 야릇한 두려움과 어쩌면 높고 깨끗한 아름다움까지도 공유한다.
대통령 당선인은 지금부터 국민의 뱃속에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 법고창신! 옛것을 본받되 구속되지 말아야 하며, 새것을 창조하되 불경하지 말아야 하는 일. 지금은 고용 없는 성장시대. 고학력 백수들의 고독. 상대적 빈곤. 어쩌면 지금은 영혼의 고갈시대인지도 모르겠다. 국회에서 통과된 예산 324조. 그중에서 복지가 100조라는데. 복지 중에서도 으뜸은 일자리 창출이 아닐까. 우리 집 옆에는 삼 층짜리 예쁘장한 건물이 하나 있다. 천정도 높고 마당도 넓어서 쓰임새가 많은 것 같았는데 도무지 사람 구경이라곤 할 수 없었다. 간판에는 (주)케이디티 씨스템즈, 라고 쓰여 있다. 본사가 다른 곳으로 이사 가면서 이곳은 썰렁하게 비워둔 듯했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 공장이 활발하게 돌아갈 때는 초부리 전체에 단비를 뿌리는 듯 마을에 활기가 대단했다고 한다. 그리고 오늘 함박눈 오시는 날, 한산한 마당에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알고 보니 (주)케이디티는 안재봉 사장이 이끄는 CIMON이라는 상표로 국제적 산업 자동화 기업과 당당히 경쟁하는 대한민국 산업 자동화 전문기업이라 한다. 그리고 2013년 새해부터는 이곳에 다시 공장을 세워 부품을 자체 생산할 계획이라 한다. 우리의 두뇌로, 우리의 기술로, 우리의 노동으로, 우리의 제품을 생산하는 일. 복지 중의 복지가 아닐까. 어릴 적 읽었던 동화 거인아저씨의 집에는 사람의 그림자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들이 하나둘씩 집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차례로 새들이 찾아오고 꽃들이 피고, 그 해 사과나무에서는 첫, 사과가 열렸다. 물론 거인 아저씨는 웃음을 되찾았다는 이야기. (주)케이디티 씨스템즈 마당에 불이 켜지고, 일하는 손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봄이 되면 한적했던 마당의 철쭉은 어느 쪽을 향해 꽃향기를 나를까. 대한민국의 첫, 여성 대통령께 드리는 초부리 주민의 정성어린 꽃다발이라 하면 되겠다. 손 현 숙 시인
오피니언
손현숙
2013-01-06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