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쓰는 과정은 세상을 바라보는 애정으로부터 출발하는데, 그 시선은 몰입과 집중이다. 시의 첫 줄과 끝줄은 반드시 개연성을 담보해야 하는데, 이것은 마치 사람의 탄생과 죽음에 이르는 과정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한 단어, 한 이미지, 한 구절에서 오는 시 쓰기의 출발은 저마다의 세계관에 따라 각자 다른 깊이의 작품을 빗어내곤 한다. 그러나 그 속에는 반드시 제 스스로 생하고 멸하는 기운이 있어서 좋은 시와 나쁜 시는 가늠하기 조심스럽지만 큰 시와 작은 시는 존재하는 법이다.
또한, 작은 글자 수로 세상을 노래해야 하는 시 속에도 사람의 생ㆍ노ㆍ병ㆍ사와 같은 기ㆍ승ㆍ전ㆍ결의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 따라서 시인들은 누구나 전, 그러니까 전복의 과정에서 물고기가 그물에 걸리듯 깊은 고독에 빠진다.
익숙했던 관습과 습벽을 깨고 끊고 무너뜨리면서, 그러나 자기의 생각을 결말까지 관철시키는 뱃심, 그것은 결국 시를 예술로 승화시키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중요한 실마리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길게 나의 시론을 펼치는 것일까. 기존의 악습이나 폐습에 맞서기 위해서는 절지동물의 결단처럼 제 자신의 철저한 정검과 단호한 결의가 필요하다는 소릴 하고 싶은 것이다.
우편함에서 청첩장을 꺼내 들면서 가장 먼저 떠올리는 생각. 우선은 혼주와의 함수 관계가 될 것이고, 뒤를 이어서 축의금의 중량을 따져보게 되는 성가심. 그것은 비단 나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오늘의 결혼 청첩 문화는 결국 고지서 남발이거나, 을이 갑을 향한 공식적 상납의 기회에 불과하다. 명분이 분명한 인륜지대사 앞에 서로의 주고받기를 어떻게 원활하게 운영할 것인가, 아닐까?
그리하여 우리는 혹시 아이들의 신성한 출발 앞에서 하찮은 흥정에 영혼을 팔고 있는 것은 아닐까, 되짚어볼 일이다. 결혼은 부모들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어리고 여린 새 사람들의 새 출발일 뿐. 예식의 크고 작으므로 그 집안의 성과 패를 말하는 것은 너무도 조악한 세상의 잣대일 뿐이다. 내 밥값 내고 밥이나 먹으로 오는 결혼 따위, 바람직할까. 진심으로 격려하고 아끼면서 사랑이 충만한 결혼. 너무 큰 희망일까?
얼마 전 작은 결혼식에 다녀왔다. 성원자동기계의 이익재 사장과 신혜림 씨 부부는 아들 이정윤군과 며느리 송수현양의 혼인을 소문 없이 치렀다. 양가 딱 오십 명씩 두 집안 모두를 합쳐 하객은 백 명 남짓이었다. 축의금은 정중하게 사양했다. 우리는 모두 간절한 마음으로 오늘의 신랑과 신부를 축복했다.
그곳에 모인 하객들은 대부분 신랑과 신부의 성장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봤던 지인들이었다. 신랑과 신부도 절친한 벗, 몇 명만을 초대해서 따뜻한 마음을 교환했다. 예식이 진행되는 동안 자리를 뜨거나 잡담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신랑과 신부의 눈짓 하나에도 오롯이 집중했고, 모두가 뜨겁게 하나가 되어서 젊은 태양의 앞날에 두 손을 모았다. 어떻게 생각하면 계산에 어긋나는 예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뿌려졌던 축의금을 생각하면 그렇게 간단하게 결론지을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훌륭한 시 짓기의 전범처럼, 혁명처럼 단호하게 구습을 타파했던 거다. 쉬웠을까?
인디언의 결혼은 신랑과 신부를 빙 둘러서서 중천의 달이 황도광을 마중할 때까지 노래하고 춤추면서 기도하는 것이라 한다. 마음을 한곳으로 모아 하늘의 기운을 불러오는 일. 그래서 여자와 남자의 출발을 새 하늘과 새 땅에 기원하는 일. 우리도 그렇게 신성하고 장엄한 출발에 용기를 내 볼 일이다.
손 현 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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