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깎이 공무원 ‘이재흥’씨는 지천명(知天命)을 넘어선 초로의 신사였다. 그는 지난 7월 9급 공무원 공채에 합격해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물리적인 시간으로 따지자면 그는 이제 모든 공무에서 떠나 뒷짐을 져도 누가 뭐랄 것 없는 나이다. 그런 그가 왜 공무원에 도전했을까. 아니 그것보다는 나이 제한 없이 기회를 부여하는 우리나라 공무원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는 한 달여간의 인턴을 마치고 “역시 공무원은 사회에 이바지한다는 소명의식이 없으면 힘들 것 같네요”라고 자신의 소회를 털어놓았다. 현장근무가 많고 주민 곁에서 생활을 살펴야 하는 공무에 내심 놀라면서도 보람을 느끼는 듯했다.
얼마 전까지 내게 ‘공무원’은 왠지 불편한 심경을 불러오는 무엇이었다. ‘공무원’하면 떠오르는 단어들은 ‘탐관오리, 철밥통, 칼퇴근, 업무태만, 무사안일, 기강해이, 복지부동…’ 그런 부정적 의미들이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들 뒤에는 또 대답이 명쾌하지 않은 질문들이 꼬리를 이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왜 공무원이라는 직업을 선호하는가. 혹시 그 속에는 인간의 본질을 바라보는 ‘선(善)’이라는 자리가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공무원에 대한 생각을 전복시킨 한 권의 시집을 받았다. 제목도 ‘공무원’ 이었고 표제시도 ‘공무원’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공무원 신분의 시인이었다.
시집에서 느낀 공무원의 생각
정겸 시인이 쓴 시의 첫 줄은 ‘그녀는 나를 우측 통행자이거나/뒷문 통로와 연결된 지하계단에서 은밀한 거래를 즐기며/꽃밥을 훔쳐 먹는 언더그라운드 이코노미 정도로 알고 있다’로 시작했다. 그리고 시는 이렇게 끝이 난다. 황사가 몰려와도 공무원 탓이라 믿는 사람들. 돌 맞고 곰보가 되고 돌하르방이 되어도 꼿꼿하게 그들을 지키고 서 있겠다, 다짐한다. 그렇게 그는 시집의 곳곳에서 병자와 노숙자와 소외된 가장들과 아픈 영혼들에 대해 연민한다. 손수 소매를 걷어붙이고 구제역의 현장과 수해지역의 물 텀벙 속을 뛰어들어 행동한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면서 하루를 산다, 아니 근무한다. 그가 쓴 시작메모에는 청풍양수(淸風兩袖)라는 고사성어가 등장한다. “두 소매에 맑은 바람만 넣고 천자를 알현하는 것이 신하의 도리이며 백성의 입에 오르내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명 황제 때 ‘우겸’의 청렴을 예로 들었다. 무릇 공무원에 대한 자세를 굳힌 것이리라.
시인은 부패공무원에 대한 생각도 밝혔는데, 순금의 정의가 99.9%라면 정부발표 현 공무원의 숫자가 100만 명. 만약 그중에 0.01%의 공무원이 불의의 사고를 쳐도 그 숫자는 1천명을 선회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99.9% 공무원은 국민의 공복임을 단 하루도 망각해 본 적 없다고 그는 공무원의 소신을 시의 문체로 밝혔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삶을 형성하는 것보다는 삶이 우리를 형성하는 때가 훨씬 많다. 규율과 규범이 때로는 사람을 정의하기도 한다. 공무원들은 촘촘한 틀 속에서 공무를 수행한다. 엄격한 지휘체제 안에서 그들은 명령받고 행동해야 하는 공무의 집단이다. 때로는 이런 것들이 공무원을 답답하게 규정짓는 실마리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곰곰이 짚어 보면 그들은 언제나 민생의 편이었다. 그들은 국민이라는 대명제 아래 생활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국민은 바로 자기 자신일 것이다. 아무도 자기 자신을 함부로 여기는 사람은 없다.
국민이 자기 자신인 사람들
내가 이사 온 초부리의 밤은 별들의 나라이다. 고개를 꺾어서 밤하늘을 구경하는 일은 참으로 장관이다. 그러나 여기는 발등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깜깜한 나라. 용인시 생활민원 도로과에 전화해서 “칠흑 같은 밤은 무서워요” 라고 민원을 넣었다. 다음 날, 집 앞 가로등이 희망처럼 켜지고 늦게 귀가하는 가족들의 걸음은 어제보다 가볍다.
손현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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