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면서] 깊은 심심함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안 이후 나에게는 다른 기준이 생겼다.

만남에 대한 느낌이 그것이다. 아무리 좋은 말이 오갔던 자리였더라도 집에 다다를 때쯤이면 몸에 있던 에너지가 몽땅 소진된 듯 힘든 만남이 있다.

이런 만남은 피하고 싶어진다. 반면 만나고 나면 마음이 행복해지는 사람이 있다. 나도 그렇게 될 것 같은 고양되는 느낌을 준다. 그저께 만난 사람은 책과 더불어 살고 있다.

나에게는 즐겁고 흥미로운 시간이었는데 사람마다 같은 책을 읽고도 화제로 삼는 한 줄 문장이 모두가 다르다는 것을 비교하면서 혼자 속으로 은근히 즐기고 있었다.

최근 피로사회(한병철 저자/문학과지성사 발간)라는 책이 워낙 화제가 되었던 터라 몇 번의 다른 만남에서 제 각각 이 책에 대해 얘기했던 기억이 있다.

흥미로웠던 것은 같은 책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어떤 이는 ‘긍정의 과잉’에 대해서, 어떤 이는 ‘자기착취’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고 자기가 관심을 둔 문장처럼 그렇게 살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저께 만난 그도 역시나 피로사회 책을 꺼내 책을 펼치면서 얘기를 꺼냈다. 그가 화제로 삼은 문장은 ‘깊은 심심함’이었다.

피로사회란 책 속 ‘깊은 심심함’

독일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깊은 심심함을 경험의 알을 품고 있는 꿈의 새로 말했다고 한다.

잠이 육체적 이완의 정점이라면 깊은 심심함은 정신적 이완의 정점이라고 이 책은 설명한다.

깊은 심심함에 꽂혀있던 그는 다시 시 한편을 내밀었다. 이상국 시인의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라는 제목의 시였다.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부엌에서 밥이 잦고 찌개가 끓는 동안/ 헐렁한 옷을 입고 아이들과 뒹굴며 장난을 치자/ 나는 벌서듯 너무 밖으로만 돌았다/ 어떤 날은 일찍 돌아가는 게/ 세상에 진 것 같아서/ 길에서 어두워지기를 기다렸고/또 어떤 날은 상처를 감추거나/ 눈물 자국을 안 보이려고/ 온몸에 어둠을 바르고 돌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일찍 돌아가자/골목길 감나무에게 수고한다고 아는 체를 하고/ 언제나 바쁜 슈퍼집 아저씨에게도/이사 온 사람처럼 인사를 하자/오늘은 일찍 돌아가서/아내가 부엌에서 소금으로 간을 맞추듯/어둠이 세상 골고루 스며들면/ 불을 있는 대로 켜높고/숟가각을 부딪치며 저녁을 먹자

이 시를 읽으면서 불현 듯 ‘별일 없이 산다’라는 노래 가사를 듣고 한참 웃은 적이 생각났다. 그때 심정은 딱 울고 싶었다는 기억도 함께.

벤야민이 말한 꿈의 새가 깃드는 이완의 시간의 둥지, 사람이 깃드는 둥지가 집이 아니겠는가. 깊은 심심함으로 시작된 그의 이야기는 집으로 결론이 지어지는 자연스런 흐름을 타고 있었다.

그리고 깊은 심심함이란 문장을 꼬집어 말한 그가 역시 그렇게 살고있는지 궁금했다.

정신적 이완주는 마음의 행복

일주일에 이틀은 자신을 위한 시간으로 확보한다고 한다.

책과 더불어 사는 그는 책 속에 묻혀 알을 품는다.

새로운 경험을 창조하기 위해서.

그의 책 세계를 맛보고 나니 읽어야할 책이 족히 대 여섯 권이나 생겼다.

큰 수확이다.

갑자기 그는 “왜 말이 없으세요?” 묻는다. 딱히 끼어들 말도 없었지만 듣는 것만으로도 풍성한 시간이었다.

나의 깊은 심심함이 이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슬며시 들었다. 일찍 집에 가긴 글렀지만.

 

민 병 은 (사)한국문화의집협회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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