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안티고네의 비극

미디어는 넓은 의미로 모든 소통 네트워크 수단이다. 외견상 고대 광장문화와 현대 인터넷 문화사이에 하등의 연관관계가 없어 보이지만 그 안을 보면 기나긴 시간을 초월, 매일 만나고 있다.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예술은 대중의 공간에 진입하지 않고서는 생존할 수 없으며 도태할 수 밖에 없었다. 예술은 현실보다 연극적 요소에 가깝다. 현대인들의 필수문화코드인 인터넷으로 TV 드라마를 즐기듯 고대 그리스인들은 지중해의 온화한 기후 덕분에 노천극장에서 ‘오이디푸스왕’과 ‘안티고네’ 등의 비극에 열광했다. 그리스 연극은 디오니소스 신을 모시는 제례의식에서 비롯됐고 축제기간에는 하루 종일 연극이 상연됐다. 소포클레스(BC 497~406)는 등장인물들을 통해 인간 고뇌의 극한까지 치열하게 묘사했고 긍정적인 인물에게서 순수한 비극이 잠재됐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그의 비극 ‘오이디푸스’는 근친상간과 존속살해란 비극적 신화다. 그의 어머니이자 아내인 이오카스테 사이에서 태어난 맏딸이 바로 안티고네이다. 안티고네 숙부와 크레온왕은 왕위를 둘러싸고 형제끼리 서로 싸우다 죽은 안티고네의 두 오빠 에테오클래스와 폴류네이케스 중에서 적군을 끌어들인 반역자 폴류네이케스를 매장하지 않고 들판에서 썩어가게 내버려 둘 것을 명한다. 이를 거역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안티고네는 육친의 도리를 내세워 왕명을 어기고 반역자 폴류네이케스를 매장한다. 크레온은 국가권력 기강을 위해 안티고네를 감옥에 가두고 그녀는 비굴한 삶을 포기하고 자살을 선택한다. 그녀의 약혼자인 크레온의 아들 하이몬도 자신의 사랑을 따라 죽는다. 아들을 잃은 크레온의 아내도 죽음에 이르게 된다. 결국 안티고네와 크레온은 물론 모두 파멸에 이른다. 안티고네는 신의 법인 개인의 양심을 명분으로 내세웠고 크레온은 국가권력이란 인간의 법이자 억압된 체제를 상징한다. 극한의 두 신념이 충돌, 파멸과 죽음으로 치닫는 과정의 긴박함, 카타르시스가 소포클레스 비극의 정점이다. 안티고네가 죽기 전 “내 운명을 다 겪고 난 다음에는 내 죄가 무엇인지 알게 되겠지요. 그러나 나에게 판결을 내린 사람들에게 죄가 있다면 나에게 한 부당한 것과 같은 화를 그들도 겪게 되길 바랍니다”라고 말한다. 필자는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신념중 누가 옳고 그르다거나, 아니면 둘다 옳은 신념이란 측면에서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아무리 옳은 신념이더라도 지나치게 강하면 결국 파멸과 죽음의 결말만 기다리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현재 지구는 약 2천여개 이상의 언어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 창세기 11장 1절에는 “원래 언어와 말은 하나뿐이었다”고 기록됐다. 노아때 홍수로 심판하신 후 하나님께서 “너희는 다산하고 번성, 땅을 가득 채워 그 안에서 번성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인간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정면으로 불복종, 온 땅에 흩어지지 말고 함께 모여 살자며 성과 탑을 쌓기 시작한다. 그 탑이 바로 바벨탑이다. 하나의 강력한 인간의 언어가 바벨탑을 만들어 간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이 서로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그들이 탑과 도성을 짓는 것을 그쳤다. 이 또한 강력한 인간의 한가지 언어가 바벨탑을 세운 동기이자 탑을 무너뜨린 결정적 원인이 된 셈이다. 현대인의 강력한 무기라 할 수있는 인터넷. 그 무한한 잠재력과 역동성 안에 존재하는 혼돈과 위험. 자신이 끝내 옳다고 절규하다 죽어간 고대 안티고네의 비극이 오늘날 되풀이 되지 않길 바라면서 극한에서 멈출줄 아는 지혜가 절실함을 필자 자신 또한 느끼는 한해다. /노 경 화 멀티미디어 작가

入於有法 出於無法

필자에게 ‘건축’이란 의미는 시대에 따라 변했다. 10대 시절에는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새마을 홍보에 대한 강제적 논리의 주입에 의해 건축이나 건설하면 무조건 좋은 것이고 심지어 80년대 대학에 가서도 잘사는 것의 기준은 높이만 올라가는 건축물이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세상을 바라본 20대 후반에 와서 정치와 경제, 그리고 건설간의 먹이사슬구조를 알게 됐다. 네모(건물)의 획일화된 틀에 강제된 의식의 구조를 깨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1980년 필자 생각의 전환점을 깊이 제시한 이영희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는 다양한 분야에서 논리적 전환이 가능하게 하는 책이다. 필자에게 주어진 사물이나 상황을 입어유법(入於有法)하고 출어무법(出於無法)의 자유로움을 준 지침서이다. 入於有法 出於無法은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학문을 하는 자세를 말하는 것으로 들어갈 때(입문)는 강직하고 기본부터 철저히 해야 하지만 나올 때(배우고 난 후)는 생각과 표출하는 방법이 자유롭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약 18년 전부터 우리 것이 좋아 거의 미친듯이 전국을 돌아다녔다. 무수한 건축물들을 보고 다녔다. 그러다 9년 전 신영훈 선생님을 만나 한옥을 배웠다. 6년 전부터 선생님으로부터 독립, 내 길을 가고 있다. 우리 한옥의 가치를 필자의 기준으로 말하자면 ‘술’이다. 술에도 종류가 많듯이 우리나라에 있는 한옥들의 구조가 같은 것은 근대시기에 집단으로 지어진 집장사 집을 빼곤 단 하나도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술을 즐긴다. 여러 술집들을 가보지만 술 마시기 편한 집이 따로 있다. 술 맛이 나지 않는 집이면 나와서 집 구조를 다시 살펴본다. 이런 집들은 어딘가 모르게 참으로 고약하게 지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답사를 하다보면 사람들은 건물의 외양만 보는 경우가 많다. 물론 못 들어가게 하는 집이 많아서 이지만 입품을 잘 팔면 마루바닥의 촉감을 느낄 수 있다. 외양만 보면서 “이것은 무슨 양식이고 이 집의 특징은 무엇이다”라고 잘도 말한다. 겉만 보고 논하니 그들에겐 入於有法 出於無法이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대체로 현대에 지어진 건축물들의 대부분은 入於有法 出於有法이다. 즉 느낌을 주는 건축이 없다는 것이다. 거주하는 사람이나 들어가는 사람에게 강제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자신의 틀에 가두어 놓기만 한다는 것이다. 김봉렬 선생은 “건축은 시대를 담는 그릇”이라고 했다. 옳은 말이다. 시대를 담은 그릇에 잘 익은 술을 마시고 싶다. 드높아서 아름다운 것은 건축물도 권력도 돈도 아닌 투명한 하늘과 사람의 마음이다. 드높은 건축물이 아름답기를 기대해보며 入於有法 出於無法의 자유를 주는 건축을 기대한다. 올해도 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그러나 사람살이의 도리나 세상사의 원칙을 지키지 않은 일은 반드시 탈이 났다. 그 이유는 入於有法의 이치를 실천하지 않아 오는 게 대부분이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에게 엄격하고 냉정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숨이 막히고 답답함을 불러일으키기 보다는 出於無法의 진리를 알게 할 것이다. 또 한해가 간다. 해가 바뀐다는 것은 숫자가 변화하는 것만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는, 또는 나는 과연 入於有法 出於有法했는가? /황 평 우 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회 위원장

세계화와 한국미술

최근 우리나라 젊은 작가들의 작품들이 해외 미술시장에서 각광을 받고 있다. 그동안 박수근·김환기 등 작고 작가들의 작품들이 주로 해외시장에서 인정받아 왔다면, 아직 국내에서 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젊은 작가들이 해외 미술시장에서 기대 이상의 성과를 올리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이제 갓 20대 후반에 불과한 한 여성 작가가 올 한해 해외 경매에서 무려 2억9천만원 이상의 매출을 올려 놀라게 했고, 이밖에도 5~6명의 작가들이 1억원 이상의 판매실적을 올렸다고 한다. 이들의 그림 값도 국내미술시장의 5배 이상 높은 가격으로 낙찰되는 등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미술품 호황이 오랜 기간 침체로 어두웠던 미술시장을 밝게 해주고 있다. 이에 앞서 몇해 전부터 중국 작가들은 이미 해외미술시장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려왔다. 중국 작가중 대표 주자의 한사람인 장 샤오강은 지난달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텐안먼 광장을 그린 풍경화가 21억5천만원에 낙찰돼 세계 미술시장을 놀라게 했다. 그동안 미술시장의 변방이었던 아시아의 작가들이 최근 국제무대에서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고 약진하는 모습은 아주 고무적인 현상이다. 서구 작가들은 자국에서 인정받으면 바로 세계미술시장에서 인정받을 수 있었지만, 제3세계와 비 서구작가들은 자국에서의 성공과 별도로 국제무대라는 또 다른 장벽을 개척해야만 하는 어려움이 엄연히 존재해 왔기 때문이다. 이제 아시아의 미술도 당당하게 국제무대에서 인정을 받고, 더욱이 한국의 젊은 작가들이 작품성을 인정받아 높은 대우를 받는 건 곧 한국미술의 위상이 크게 높아진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국 작가들이 해외시장에서 인정받아 높은 값에 작품이 팔리는 현상의 이면에는 아쉬운 점도 있다. 일부에선 중국 작가들의 틈새시장에서 생긴 거품에 불과하다는 부정적인 시각도 있지만, 그보다도 본질적인 건 한국 작가들의 작품에 담긴 정체성의 문제가 아닌가 한다. 한국 작가들의 작품들인데도 서구에서 유행하는 서구 작가들의 작품과 내용적으로 차별성이 없다는 것이다. 요즘 잘 팔리는 작품들을 보면 대개 지난날 서구에서 유행했던 극사실주의나 팝아트 틀에서 국적 불명의 이미지와 아이콘의 결합, 독특한 재료의 사용, 소재주의 등 한국적 삶의 깊이가 담겨 있지 못하다는 평가가 많다. 그런 면에서 국제미술시장의 선풍을 주도하는 중국작가들은 지난날 자신들의 역사나 인물의 도상을 서구의 팝아트와 결합, 중국적 특성이 짙은 작품으로 중국 미술의 정체성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일전에 미술사학자 안휘준 선생은 한국미술사에 편입될 수 있는 작품과 작가의 원칙과 기준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 바 있다. 창의성·한국성·대표성·시대성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성과 시대성 등을 강조한다. 국적 불명의 미술, 아류의 미술, 시대성과 무관한 미술 등은 당대에 아무리 인기가 있어도 결코 한국미술사에 편입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한국미술사는 보편적인 한국인의 삶과 민족정서를 바탕으로 생산된 한국미술의 족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미술사의 족보는 사람의 족보와 달리 역사적 가치가 있는 명작과 명품만을 기록한다. 조선시대 선조들의 삶과 문화 등을 탁월하게 그린 정선·김홍도·신윤복이나 현대의 박수근·이중섭·김환기 등은 굳건히 한국미술사 중심에 서 있다. 모두 민족성과 시대성이 강한 작품을 남긴 작가들이다. 예술은 국경이 없지만 예술가는 국적이 있다는 말이 있다. 지금 국제미술시장에서 통하는 우리의 젊은 작가들도 당장 서구인들의 인기에 연연하지 말고 근본적으로 한국·민족미술 관점에서 고민하고 창작한다면 더욱 당당하게 세계화에 이르고 국제무대에서 존경받는 한국미술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 종 구 화가·중앙대 교수

지식과 지혜를 아우르는 리더십

한국 속담에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라는 말이 있다. 한편 서양에는 ‘두 사람의 머리도 합치면 낫다’라는 속담이 있다. 한국 속담은 서로 힘을 모으면 좋다는 의미이고, 서양 속담은 혼자보다는 여럿이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으면 더 좋다는 뜻일 것 같다. 우리는 흔히 지식과 지혜를 같은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같은 면도 있겠지만 엄연히 다르다. 공부를 많이 하고 지식을 쌓다보면 지혜가 생길 수 있다. 그러나 학문적으로 배운 게 많지 않아도 다양한 경험과 인생의 연륜을 쌓다보면 지혜가 생기게 된다. 우리 옛 조상들의 지혜는 그들이 무슨 학문을 깊이 연구하고 현대문명의 혜택을 통해 얻은 지식의 기초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보고 듣고 느끼는 과정에서 배어나오는 ‘삶의 진국’인 것이다. 그래서 한 조직에서도 경륜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지혜의 폭도 넓어진다. 빠르게 돌아가는 현대사회의 첨단지식은 조금 부족할 지 몰라도 사람들과 오랜 관계를 맺으며 경험을 통해서 얻게 되는 지혜가 풍부해지기 때문이다. ◇디지털-아날로그 세대의 간극 상존 그런데 우리 사회가 서구체제를 닮아가면서 구조조정이란 미명하에 ‘오륙도’나 ‘사오정’ 등의 유행어들이 생겼다. 그뿐인가. 근래에 ‘삼팔선’이니 ‘이태백’이니 하는 자조 섞인 신조어들도 범람했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조직사회의 근간을 이뤘던 중년세대들이 내몰리더니 이제는 디지털 지식의 첨병으로 각광받던 젊은 세대들까지 엑소더스 대열에 끼고 있으니 말이다. 날로 새로워지는 지식을 습득하려 하지 않으며 좋은 시절에 조직의 울타리에 안주했던 중년세대, 오랜 경륜과 연륜에서 우러나오는 지혜를 시대에 맞지 않는 옛 얘기쯤으로 치부해 버렸던 젊은 세대,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않고 갈등의 골을 키워 온 모두가 문제다. 그리고 두 세대의 화합을 이뤄내지 못하고 이해의 간극만 벌려놓은 우리 사회가 더 큰 문제다. 디지털과 아날로그로 대변되는 세대간의 갈림은 한 조직의 차원을 넘어 우리나라 전체 사회의 갈등과 반목의 단초가 되고 있기도 하다. 한 국가의 조직사회(Corporate World) 문화는 바로 사회 전반의 문화현상으로 쉽게 옮겨가게 돼 있다. ◇포용성과 객관적 합리성 가치 중요 이런 과정에서 20세기적 지혜의 가치와 21세기적 지식의 가치가 서로 융합되지 못한 채 우리 사회 모든 부문에서 부딪치고 있는 형상이다. 지혜와 지식이란 이분법적 논리로 사회의 문화구도가 고착돼 가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제 그 두가지 가치가 서로 융화하고 보완하고 결합, 시너지를 만들어 내야겠다는 각성이 필요하다. 이러한 역할을 감당해 낼 수 있는 리더십이 우리에겐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대를 맞고 있다. 과거의 관습과 패턴으로는 새롭게 전개되는 변화와 변혁의 시대에 경쟁력을 갖출 수 없다. 지금의 리더십은 지식과 지혜를 아우르는 포용성과 주관적인 철학보다는 객관적인 합리성이 기본정신이 되는 바탕이 돼야 한다. 리더십의 대칭점에는 반드시 팔로우어십(Followership)이 있다. 이 두 관계 사이에 의사가 소통되고 정서가 교감돼 이해의 공감대를 쌓는 과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의미다. /이 인 권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대표

문화지수 행복지수

인문사회과학계의 석학 피에르 부르디외에 따르면 지식인은 문화의 영역에서 권력을 갖고 있는 문화지배권력이라고 한다. 사회 전반에 걸쳐 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담론을 전제로 예술에 적극적으로 접근하고 토론하며 작가와 소통이 활발한 유럽의 한 예를 들어보자. 필자 부부의 작품 콜랙터중 한 분은 70대 중반 독일인으로 현재 파리 남부 작은 고성에서 만년을 보내며 한폭의 그림처럼 살고 있다. 미술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평생 개인 사업을 했던 분이다. 그런데도 학예 예술사를 능가하는 현대미술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필자를 매번 놀라게 한다. 토론할 때도 한없이 깊고 풍부한 문화적 지식과 예술철학을 바탕으로 작품들을 읽고 분석할 줄 알고 때때로 유머를 곁들인 신랄한 비평·풍자와 함께 자신의 느낌을 표현한다. 이 분은 “자신의 멋진 행복을 위해 작품을 구입한다”고 표현한다. 또한 자신이 죽게 되면 자녀들에게 예술소장품을 상속하는 게 아니라 현재 거주하고 있는 남불지역 현대 미술관에 작품을 기증하겠다고 한다. 10여년 전 이 분의 작은 성 앞채를 보수했다. 지역 주민들을 위해 집안에 갤러리를 만든 것이다. 1주일에 이틀, 평소에 굳게 닫힌 대문을 활짝 열고 주민들이 자신의 현대미술 소장품들을 무료로 관람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일관되게 수십년동안 구입한 몇몇 작가들의 카달로그들은 물론 도록 등도 펴내기도 한다. 자신의 소장품 작가와 수십년동안 깊은 유대를 유지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들의 성장을 지켜보며 조건없는 메세나(예술가의 지원활동)를 실천하는 것이다. 이 갤러리에선 1년에 2~3번 기획전시를 여는데 콜랙터로서 작품을 수집한 안목은 탁월하다. 문화지수가 곧 행복지수인 분을 콜랙터로 둔 필자 부부는 행운인셈인데 어느새 필자도 이 분처럼 늙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우리나라 미술계는 부익부 빈익빈으로 양분화된다. 재벌가의 부인이 어느 작가를 선호한다고 하면 미술시장의 패러다임이 그쪽에 맞춰지고 가격이 폭등하는 사례도 있다. 유럽은 작가의 지명도보다 콜랙터 자신이 선호하는 작품을 구입하며 누가 뭐라고 하든 자신이 원하는 작품이 최상이지 대가의 작품이라는 이유만으로 구입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그만큼 자신들만의 탄탄한 안목을 갖고 예술을 읽고 해석하는 문화 풍토가 전반적으로 형성돼 있다. 지난 10월 서울대 미대 60주년 기념 동문작품전에서 496점을 60만원에 균일가로 판매한다고 하자 10일동안 3만여명이 관람했고 작품 7만5천건에 대한 구매신청이 쇄도했다고 한다. 서울 미대측에 따르면 평균 150 대 1의 경쟁률을 보였고 대가 몇분 작품은 3천 대 1 정도의 경쟁이었다고 했다. 한마디로 한국미술계의 로또사건인 셈이다. 이같은 내용을 접한 필자는 여러 생각들이 머리를 스쳤다. 한국에 이처럼 숨은 미술애호가들이 많다면 진심으로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한국의 콜랙터중에 아무리 세계적 대가의 작품이 싼 가격에 나왔어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사지 않을 배짱 두둑한 사람들은 없는 것일까? 작가나 작품 등에 대한 별다른 이해 없이 작품을 재테크 수단으로 구입한다면 하루 아침에 금전적 이득을 취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문화인으로 순식간에 둔갑할 순 없다. 사회 전반에 걸쳐 진정한 문화를 만들어가는 인식이나 노력 없이 형성된 허울뿐인 반짝문화는 사상누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노 경 화 멀티미디어 작가

프랑스는 독일에게 배워라!

지난 9월 독일의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방문을 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 고고학과는 파르테논 신전의 조각을 한 점 소장하고 있었고, 문화재는 원산지에 있어야 한다는 판단에 그리스로 아무 조건 없이 돌려주었는데 그 이유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며칠 전 귀중한 가치가 있는 겸재 정선의 그림 21점을 독일의 한 수도원이 한국의 수도원에 되돌려 주었다. 이 그림들은 1925년 독일 성 오틸리엔 수도원장이 지인에게서 선물 받은 그림을 수도원에 기증한 작품들이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가 강탈해간 외규장각 도서처럼 ‘약탈 문화재’ 가 아닌, 그야말로 대가를 치루고 사간 그림이다. 민간인이 정상적인 경로로 구입한 그림이니만큼 돌려주지 않아도 우리는 아무런 이유나 항변을 할 수 없는 것들이다. 올해는 한·불 수교 120주년을 기념하는 문화교류 이벤트로 프랑스의 전시가 100여 건에 이른다. 덕수궁미술관에서는 장 뒤뷔페(1901~85)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뒤뷔페는 피카소나 다니엘 뷔랑 만큼 프랑스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작가라고 한다. 또 국립중앙박물관은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소장품 전을 열고 있고,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니키 드 생팔(1930~2002) 조각전이 열리고 있다. 사립기관에서도 환기미술관은 프랑스 설치작가 4인의 ‘공간의 시학전’, 가나아트센터는 프랑스 젊은 작가들의 ‘카오스전’ 등 많은 전시가 열리고 있다. 그러나 프랑스와의 이러한 문화교류가 일반 시민에게는 와 닿지 않고 있음을 솔직한 심정으로 프랑스 당국이 알아야 할 것이다. 독일로부터 기증받은 겸재 그림 21점이 프랑스가 야심차게 준비한 100여건의 문화교류를 단숨에 역전시킨 것이다. 한국 정부와 시민단체인 문화연대는 현재 파리국립도서관에 있는 외규장각 도서 297권의 반환을 15년째 요구하고 있다. 1993년 미테랑 대통령은 고속철도 판매를 위해 한국을 방한해서 김영삼 대통령과 ‘교류 방식으로 영구히 대여한다’는 원칙에 동의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전리품’이다. “한국은 관리 능력이 없다.” “100년 넘게 있었으니 귀화문화재로 봐야한다. 프랑스에 많은 외국인이 와서 보니까 한국보다 유리하다.”라는 억지 주장을 하면서 돌려주지 않고 있다. 프랑스는 한국에 자국의 문화를 알리는 데는 우월감에 사로 잡혀 조직적이고 순발력 있게 처리하면서 정작 한국의 정당한 외규장각 약탈 문화재 반환에는 그 어떤 반응도 없다. 정작 프랑스는 수십 년간의 끈질긴 요구 끝에 2차 대전 중 나치가 약탈한 모네·고갱·세잔 등의 그림을 1994년 독일 정부로부터 돌려받았다. 문화연대는 지난달 28일에 프랑스 정부(문화부 장관)에 외규장각 약탈품을 돌려달라는 공문을 보냈다. 대응이 없을 경우 반환소송을 진행하려한다. 약탈당한 문화재를 찾기 위해 정부 차원의 노력이 있어야 하지만 민간 차원에서도 끈질기게 요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 프랑스는 자타가 인정하는 문화의 나라이다. 문화강국은 다양한 나라의 문화다양성을 인정하고 문화민주주의를 실천하는 토대를 바탕으로 해야만 의미가 있다. 유럽사회에서 가장 이기적이며 자국의 이익만을 위하고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문화강국 프랑스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황 평 우 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회 위원장

경기도미술관 개관에 거는 기대

지난달 25일 안산시 화랑공원에 자리 잡은 경기도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국내 여러 시·도가 이미 공립미술관을 개관한 것에 비해 비교적 후발주자로 건립된 경기도미술관은 수도권에서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시립미술관 등에 이어 규모면에선 최고 수준이라 할 만하다. 더욱이 미술관을 운영하는 자치단체 규모가 국내 최고의 인구와 도시를 갖췄다는 점에서 앞으로의 역할에 거는 기대가 크다. 지금은 개관 첫 전시회로 ‘호안 미로, 상징의 세계전’을 열고 있다. 호안 미로는 피카소와 더불어 스페인이 낳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작가이다. 사물의 이미지를 단순화시킨 간결한 선과 색채, 절제된 화면과 장식적 효과, 그리고 초현실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독특한 형상의 작품으로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이 전시회를 위해 미술관측은 미로재단과 지난 2년여 기간을 함께 준비했고 미로의 대표적인 작품 100여점을 가져와 전시하고 있다. 전시장 내부는 높고 육중한 벽면과 자연광선을 간접 조명으로 잘 이용했고 작품 이미지를 최대한 고려한 듯 변화 있게 구성된 동선과 빨강·파랑·검정색 등으로 간간이 효과를 준 칸막이까지 그 어느 전시회보다도 섬세하고 세련된 디스플레이가 돋보였다. 아름다운 건축의 미술관과 동시에 잘 꾸며진 전시회는 개관전으로 손색이 없고 품격이 있어 보였다. 그러나 미술관이 새로 집을 짓고 집들이하는 행사로선 뭔가 허전하고 부족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예컨대 집들이 행사장과 가까운 친지나 동네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명망 있고 지체 높으신 손님 한사람을 초대, 안방에다 모셔놓은 형국이라고 할까? 새로 개관한 미술관으로서 참신함과 특성이 보이지 않았다. 개관전이라고 상투적으로 국내 대표 작가나 지역 연고 작가를 초빙해 전시회를 여는 것을 염두에 둔 건 아니다. 관객과 주민 등이 참여하는 이벤트성 행사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지금 개관전으로 열고 있는 ‘호안 미로전’은 그동안 전시기획사와 언론사들이 매년 학생들의 방학기간을 이용, 예술의 전당이나 서울시립미술관 등지에서 관행적으로 펼치는 수준의 전시회와 내용과 형식 등에 있어 큰 차별성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매머드급 공공미술관으로, 더욱이 앞으로 미술관의 성격과 방향 등을 가늠하게 되는 개관전 내용으로선 조금 실망스럽다. 이때문인지 돛단배 이미지를 형상화했다는 새로 신축한 아름다운 외관의 미술관은 다소 덩치만 커보였고 전시장은 조금 썰렁하게 느껴졌다. 시간의 냄새, 사람의 냄새, 지역의 냄새 등이 빠졌기 때문일 것이다. 미술문화는 동시대의 삶과 정신을 바탕으로 생산되고 미술관은 그것을 담아내는 그릇이다. 21세기 미술관은 더욱 그러한 것을 요구한다. 물론 조급하게 개관 전시회 하나만 보고 앞으로 미술관 수준과 성격 등을 예단할 순 없다. 더구나 개관 일정에 급급, 원래 미술관이 지향하는 제 모습을 드러낼 여유가 없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바라건대, 앞으로 경기도미술관이 소장품 규모나 예산 등에서 비교하기 힘든 조건이긴 하나 근년에 개관, 성공을 거둔 유럽의 미술관들인 빌바오 구겐하임이나 테이트 모던과 같이 색깔있고 참신한 모습을 갖췄으면 한다. 미술관으로 연간 관광객 수백만명이 찾고 지역경제 발전은 물론 도시와 국가의 위상이 크게 높아진 것을 보면 오늘날 미술관의 역할과 힘을 새삼 생각하게 된다. 부디 경기도미술관이 새롭고 창조적인 운영으로 국내 미술문화를 선도하는 대표적인 미술관으로 발전하길 기대해 본다. /이 종 구 중앙대 예술대 교수·화가

문화는 바로 경쟁력이다

얼마전, 성웅 이순신 장군의 뛰어난 전략의 지혜와 경영술이 장안의 화제가 됐었다. 새삼 이순신 장군이 관심을 끄는 건 통상적인 관점으로 보면 위기였던 상황을 전대미문의 승리로 역전시켰던 탁월한 지략(智略)이 현대사회의 기업이나 국가의 운영에서도 절실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건 왜적에 대한 문화를 잘 이해하고 있었던데서 비롯된다. 그 문화의 이해를 바탕으로 이순신 장군은 거북선이란 세계 최고 전함을 만드는 아이디어를 낼 수가 있었다. 당시 일본의 전함들은 전통적으로 접전시 배의 방패판을 상대방의 배로 딛고 넘어가는 다리로 사용, 상대방 배 위에서 백병전을 감행하던 단병(短兵)전술을 구사하고 있었다. 이를 간파했던 이순신 장군은 당시 전함의 주류를 이뤘던 덮개가 있었던 판옥선(板屋船)을 개조, 거북선을 만들어 당당히 왜군을 물리쳤다. 당시 이순신 장군이 상대방의 전술적 문화를 파악하지 못했었던들 해상국가로서의 막강함을 자랑하던 일본을 제압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문화역량은 곧 정보력 이처럼 문화는 곧 경쟁력을 의미한다. 다른 의미로 문화의 역량은 정보력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상대방을 이길 수 있다는 건 그들의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을 이해해야만 그에 대한 대비책이 생겨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문화의 속성을 이해하지 못한 채 우리는 흔히 우리의 주관적인 생각과 판단에 얽매이는 경우가 많다. 경쟁이란 반드시 상대방이 있어야 성립되는 개념이다. 우리가 다른 지역과 이기려면 그 지역 문화를 알아야 한다. 그들의 생각은 어떻고, 그들의 전략은 무엇인가를 파악해야 한다. 우리가 세계화를 이루려면 세계의 무대가 어떻고, 그들의 행동패턴, 즉 글로벌 스탠더드가 어떤 것인지를 비교할 줄도, 이해할 수도 있어야 한다. 다른 지역, 나아가 세계의 문화를 알고 있어야 우리 지역 문화의 위상을 가늠해 볼 수 있다. 그래서 다른 지역이 우리보다 낫다면 적극 배워야 하고 우리 것이 좋다면 이 또한 철저히 알리고 자랑할 일이다. 이것이 바로 교류와 소통을 근간으로 하는 문화이다. 그래서 문화는 폐쇄적이고 일방적이고 단선적인 게 아니라 개방적이고 쌍방향적이고 복선적인 가치이다. 지역주의의 극복이 필요 남성우월주의에 익숙해 있던 일본의 중·장년 여성들에게 ‘겨울연가’는 욘사마로 상징되는 한류의 열풍을 가져와 관련 상품의 월 매출이 무려 12억엔(120억원)에 달했다. 일본의 여성들이 갈구하던 남성의 ‘멋’을 일시에 충족시켜 준 결과이다. 그런가하면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받고, 미국에 진출한 영화 ‘올드보이’가 미국의 유력지들로부터 ‘초폭력적(Ultraviolent)’이란 혹평을 받았었다. 주인공이 일식집에서 산 낙지를 먹는 장면을 보고 그렇게 평한 것이다. 우리로선 이해할 수 없는 문화와 정서의 차이가 아닐 수 없다. 이 두가지 경우에서 보듯 상대방 문화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문화를 알 때 길이 보이고 방법이 찾아지는 것이다. 이게 바로 문화마인드이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이순신 장군은 문화마인드가 강한 지휘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이 즈음해 혹시, 우리는 우리나라의 틀 속에 안주하며 경쟁을 얘기하고 세계화를 외치는 것은 아닌지를 냉정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인 권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대표

왜 예술의 도시 파리인가?

예술의 도시 파리의 공기 안에는 위대한 예술가를 탄생시키는 마력이 있다. 그리스, 로마도 있건만 왜 파리가 예술의 대명사가 됐을까? 스페인 태생의 피카소, 러시아 태생의 샤갈, 네덜란드 태생의 빈센트 반고흐와 몬드리안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위대한 예술가들이 자신들의 모국보다 파리의 이름을 빛내줬다. 또한 오늘날까지 전세계 예술가들이 끊임없이 예술의 둥지 파리를 찾아들고 있다. 그들은 왜 뉴욕도 아닌 파리를 선택하는가? 필자가 예술가로서 환상없이 파리를 선택한 이유는 간단하다. 정치·경제·사회 위에 성숙한 예술문화가 있는 나라가 프랑스이기 때문이다. 파리는 서울의 6분의 1 크기밖에 되지 않는 작은 도시다. 인구 또한 250만여명에 불과하다. 우리나라의 경기도라고 할 수 있는 일드프랑스(파리 반경 100㎞ 지역)에는 1천100만여명이 살고 있다. 이곳에는 베르사이유궁전을 비롯, 퐁텐블로와 같은 옛 고성들과 사르트르 대성당 등이 운치를 더하고 있다. 15~16세기 르네상스시대 이후 브르봉왕조의 베르사이유궁전은 루이 14세(1638~1715년)부터 루이 16세까지, 즉 프랑스 대혁명까지 절대왕권시대의 극치를 볼 수 있는 귀족 문화예술의 상징이자 중심이기도 했다. 태양왕 루이 14세의 절대왕권시대에는 귀족을 통제할 목적으로 귀족들이 베르사이유궁전을 중심으로 한곳에 모여 살았다. 궁전에는 동시에 3천여명의 식사를 준비했다는 식당도 있다. 강력한 절대왕권에 의해 귀족계급의 인테리들이 한곳에 모여 탐닉한 건 다름아닌 축제·연극·문화·예술이었다고 한다. 즉 오늘날 예술의 나라 프랑스의 확고한 기반이 베르사이유궁전을 중심으로 시작된 것이다. 19세기 중반 프랑스 제2제정시대에 오스만(1809~1891)은 1853년부터 17년동안 파리지사를 지내며 파리를 근대화시킨 인물이다. 당시 파리는 인구 급증으로 규모가 확대됐고 계속되는 폭동으로 인해 치안을 유지할 목적으로 대대적 재건축이 필요했다. 오스만은 시내를 관통하는 현재의 큰 도로 체계와 건축물, 시내도로망과 상·하수도 등을 정비했고 시테를 행정과 성당 중심지로 만들었으며 불로뉴숲과 뱅센느 공원, 파리 오페라하우스 등 파리 시내가 온통 그의 도시계획에 의해 재정비됐다. 현재와 같은 파리는 오스만에 의해 변모한 젊은 도시인 셈이다. 예술에 죽고 예술에 사는 나라. 두사람만 모이면 예술과 철학에 대해 깊이 있게 이야기하는 나라. 70대 할머니들이 단장하고 미술관 앞에서 친구들과 함께 작품을 감상하는 곳. 인구 250만명인 파리에서 흥행에 성공한 전시는 1년동안 100만명의 입장객들이 든다. 입구 나무바닥이 입장객 발길로 닳아져 늘 페인트칠을 하는 곳. 비가 내리나 눈이 오나 수백m를 줄을 서 전시를 관람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 이런 대규모 전시가 쉼없이 동시에 열리고 대통령이 직접 후원하는 전시를 하는 나라. 영화·연극·음악·건축·무용·패션·요리는 또 어떠한가? 레이몬드 윌리엄은 문화의 개념을 특정한 사회나 집단의 구성원들이 공유하고 있는 행동양식이나 사고방식으로서 영혼·라이프스타일, 예술적 활동 등 3가지 형태로 분류한바 있다. 문화평론가 기 소르망이 IMF의 원인을 분석하면서 “한국을 대표할만한 문화적 상품이 있는가? 경제 교류는 단순히 상품을 주고 받는 게 아니라 문화적 가치를 주고 받는 것”이라고 말했다. 세계 12번째 경제국가인 우리가 경제수준과 균형 등을 이루는 우리만의 예술문화·건축문화·간판문화·토론문화 등이 존재하는지 자문해보아야 한다. /노 경 화 멀티미디어 작가

어이없는 날의 연속

최근 1개월은 어느 외국 기자가 말한 대로 한국에서 취재하기가 너무 좋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이다. 이중 문화유산과 관련해 여러 사건들이 있었는데 역시 경주였다. 역사·문화도시 경주의 문화원장이 조합장으로 있는 곳에서 유적지 옆 대규모 아파트단지 건설에 대해 경주시가 허가해 줬고, 세계문화유산인 경주 남산에 마치 귀곡산장(?)과 같은 야간조명을 설치, 역사문화경관을 해치고 있으며, 초기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알 수 있는 덕천리에 대규모 유적이 나와도 공사를 강행하겠다고 하는 나라! 이에 질세라 서울시는 혈세 30억원을 들여가며 문화재위원회가 덕수궁과 원구단의 역사성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그토록 거부하고 있는 서울시청 신청사 설계를 변경해 가며 남들은 한번 내기도 어려운 문화재 주변 형상 변경을 무려 3번이나 심의를 요구하고 4수에 도전하는 만용을 부리고 있다. 서울시는 청계천 중건시 약속했던 흥인지문(동대문) 주변 도성복원계획을 나몰라라 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체육시설인 동대문운동장을 밀어버리고 디자인센터를 짓겠다고 한다. 동대문운동장의 철거는 청계천 중건시 문화연대는 도성 복원이 장기과제로 갈 경우 그대로 존치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우리나라 체육이 엘리트 체육이라는 한계가 있는데도 세계 체육사에 10위권에 도달한 원동력이자 산 역사는 바로 동대문운동장 역사와 같이 하기 때문이다. 체육이 세계 10위권에 도달했다면 정치나 자치단체 역량은 과연 몇위일까? 서울시는 세계문화유산 종묘 앞에 세운상가를 헐고 높이 150m 규모의 대형 재건축단지를 조성한다. 역사문화경관을 무시한 처사이다. 경복궁 앞에 대형 건물 신축을 허가해주고, 덕수궁 후원인 상림원에 최고급 아파트가 들어서는 것을 허가해주면서 서울시는 서울을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하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용산공원에 대해선 중앙정부와 입장을 달리한다. 과연 서울시는 용산공원에 대한 개발에 반대할까? 대답은 절대 아니다. 용산공원에 대해 서울시가 중앙정부에 반대하고 있는 건 진정으로 용산공원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개발 주체가 서울시가 아닌 중앙정부에 있음에 대한 헤게모니 싸움에서 밀려 있음에 대한 물타기작전에 불과하다. 서울시는 독일의 쾰른성당이 세계문화유산에서 제외될뻔 하다 쾰른시가 유네스코의 무분별한 건물 신축 금지 권고안을 받아들여 겨우 탈락위기에서 구한 것을 상기해야 한다. 자치단체가 이러다 보니 중앙정부도 질 수 없었는지,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수장고에 있는 유물을 가져오게 해 관장실의 인테리어 소품으로 전락시켜버렸다. 도무지 이해가지 않는 부분이다. 박물관 유물이 관장실의 인테리어 소품이라니? 여기에 문화재청장은 관례라는 입장으로 복원한 낙산사 동종에 시민의 세금(복권기금)으로 복원한 종에 자신의 이름을 곱게 새겨 넣었다. 그리고 여론의 질타가 있자 국가문화재위원회를 소집해 자신의 명분을 얻기 위해 혈안이 돼 있다. 문화재도 아닌 동종 때문에 소집에 응한 문화재위원회나 소집한 문화재청이나 한심하기는 매냥 같으니…. 여기다 한수 더 뜨는 산업자원부는 현행 ‘평’과 ‘돈’과 같은 전통적 계량단위를 사용하거나 홍보하면 과태료 200만원에서 700만원을 물게 하겠다고 한다. FTA협정이 체결되면 계량단위를 통일해야 하고 불확실한 전통단위로 국민들의 불편이 가중된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전통적 계량단위는 문화요, 전통이다. 즉 문화다양성의 일종이다. 기존 전통적 계량단위에 m법과 같은 단위를 규정화하면 될 것을 과태료를 매기겠다는 발상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관습법을 인정한 헌법재판소에 산업자원부도 이름을 올리고 싶은 것인가? 산업자원부 직원들은 장롱을 구입할 때 ‘자’로 장롱을 사지 않고 m로 구입했는지 묻고 싶고 앞으로 m로 구입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과태료를 물릴 것인지도 묻고 싶다. 왜 미국의 마일이나 미식축구의 야드, 피트, 파운드 등은 그대로 두고 굳이 자국의 전통적 관습이자 인본주의에 입각한 계량단위를 무시하려는가? 오히려 잃어버린 우리의 시간(우리는 일본 기준시간에 살고 있다)을 찾기 바란다. 음력을 포기하면서도 자신들의 연호를 쓰는 일본은 무엇인가? 기가 막히고 어이없는 일들의 연속이다. 제발 정신 차리기 바랄뿐이다. /황 평 우 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장

비엔날레의 계절에

요즘 광주와 부산에선 광주비엔날레와 부산비엔날레가 열리고 있다. 더불어 중국의 상하이비엔날레와 싱가포르비엔날레까지, 지금 한국과 아시아는 바야흐로 비엔날레의 계절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광주비엔날레는 지난 95년 시작한 이래 불과 10여년만에 세계적인 인지도를 얻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비엔날레는 격년제로 열리는 미술행사이다. 그러나 단순히 시간상의 개최형식을 넘어 미술작품을 통한 동시대의 지역·사회·문화적 담론을 매개하는 장이기도 하다. 서구에서 비엔날레의 역사는 깊다. 베니스비엔날레는 1895년 시작돼 110여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브라질의 상파울로 비엔날레와 미국의 휘트니비엔날레를 묶어 보통 세계3대 비엔날레로 일컫는다. 이들 비엔날레가 대개 서구현대미술의 현장을 보이는데 주력하고 있다면, 남아공의 요하네스버그비엔날레나 쿠바의 하바나비엔날레 등은 제3세계 국가들의 정체성과 문화를 드러낸다. 지금 동시에 열리고 있는 아시아권 비엔날레도 나름대로 서구와 차별되는 아시아적 정체성을 살리는데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광주비엔날레가 시작된 이후 우리의 미술문화가 한층 발전했다는데는 이의가 없다. 비엔날레를 통해 수준 높은 해외작가들의 작품들을 볼 수 있게 됐고, 최근 유행하는 첨단의 미술문화를 엿볼 수 있으며, 청소년들과 미술학도들에게 교육적 효과가 높은 행사로 자리를 잡았다. 특히 젊은 작가들에게 국제적인 수준의 안목으로 창작의욕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하는 건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부정적인 측면도 있다. 젊은 작가들이나 작가지망생들에게 영향력이 컸던 만큼, 이를 통해 최근 유행하고 있는 국제적인 스타일이 이들 작업에 쉽게 차용돼 모방의 전진 기지역할을 하기도 한다. 진중한 철학적인 고민이나 문제의식 등에 앞서 형식과 유행만을 맹신적으로 추종하는 건 개인의 예술적인 성장은 물론 우리나라 미술문화의 발전에도 거리가 멀다. 또 한가지. 비엔날레가 동시대 미술문화행사의 장이란 선의적인 관점을 넘어 과신적으로 권위와 권력의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는 점이다. 한 예로 지난달 10일 마친 2006 pre-국제인천여성미술비엔날레는 지역에서 ‘비엔날레란 무엇인가’를 묻는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 됐다. 인천시가 1억6천만원을 들여 개최한 이 행사는 인천시가 주최자란 이름만 걸었을뿐 실제는 한 여성미술인단체가 기획부터 실행까지 행사의 모든 과정들을 주도했다. 이 행사의 문제점중 가장 관심을 끈 건 ‘여성미술’ 비엔날레라면 당연히 핵심적인 의제와 주제가 돼야 할 여성주의(Feminism)가 중심축에 없었다는 점과 기존의 관행대로 전시되는 수준의 미술행사에 굳이 ‘국제…비엔날레’ 명칭을 사용해야 하는지 등이다. 행사에 앞서 지역 문화예술단체들이 모여 주최측에 대해 이의 제기와 공개 토론 등을 제안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급기야 비엔날레 전시장 인근에서 이 행사를 반대하는 안티비엔날레(남성미술비웃날레)가 동시에 열렸다. 결국 생산적인 미술문화의 담론과는 거리가 먼, 비엔날레란 과신적인 권위가 만든 행사로 지역사회에 큰 파장을 남긴 채 막을 내렸다. 꼭 비엔날레가 아니어도 주변에서 성공한 미술문화행사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APAP)나 포천아시아미술제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내실 있는 기획과 특성화 전략 등으로 성공한 행사로 평가받고 있다. 지역적인 특성과 미술의 공공성 요구를 정확히 읽고 거기에 맞는 기획을 충실히 했기 때문이다. 모두 안목 있고 전문성을 갖춘 기획자, 예술감독, 행정지원 등의 호흡이 잘 맞아 성공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비엔날레는 분명 우리의 미술문화를 풍요롭게 하지만 그렇다고 최선은 아닌 것이다. /이 정 구 중앙대 예술대 교수

문화를 안다는 것의 의미

우리는 ‘문화’라는 말을 자주 쓴다. 여기에 ‘문화예술’이 한 단어처럼 쓰일 때 우리는 쉽게 문화를 예술과 동일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문화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생활 가운데 행하는 모든 개인 행동이나 사회적 활동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그래서 문화는 인간세계에서만 존재한다. 로젠블래트의 말대로 인간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교류하는 모두가 문화의 범주에 속한다. 문화의 큰 틀 속에는 예술이 담겨진다. 그래서 예술은 곧 문화일 수 있지만 문화가 예술인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문화인’이라고 할 때는 인간이 갖는 가치를 존중하고 모든 생활의 행위에서 품격과 격조를 갖춘 사람을 의미한다. 어떻게 보면 문화인으로 인정받는다는 건 우리가 살아가면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이며 대접이다. 우리나라가 경제적 여유를 갖게 됐지만 아직 사회 전반의 품격이 부족한 건 정치에 앞서 문화의 기반이 부실하다는 방증이다. ‘정치인’은 많았지만 ‘정치문화인’이 없었다는 얘기다. 이처럼 문화를 안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어렵다기 보다 진정 문화를 알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이다. 하물며 담을 넘어 다른 나라의 문화를 안다는 건 더더욱 어렵다. 우리가 글로벌 마인드니 글로벌 스탠더드니 하는 건 국경의 벽이 허물어지는 국제화시대에 외국의 문화를 알자는 의미다. 그들과 무한경쟁을 벌여 나가려면 그들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다른 나라 문화를 속 깊이 이해하려는 게 아니라 겉핥기에 급급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영어를 하는 이유는 그들의 문화를 알기 위한 방편이지 말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막연한 영어열풍에 휘말려 있다. 마치 한복을 입으면서 넥타이를 매고 있는 형상으로 말이다. 말은 국제적 언어를 쓰려고 하면서 생각은 한국식으로 하는 상호 배치되는 이중성을 보인다. 우리가 선진국의 속 문화를 모르고 껍데기만 가져와 이런 이중성을 갖는 제도가 우리 주변에 많다. 주5일제가 이중 하나다. 주5일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1주일에 이틀을 쉬는 개념이 아니다. 1주일중 하루 토요일을 직장이 아니라 가정에서 근무하라는 취지다. 선진국에선 부부가 함께 사회생산활동을 하고 어린 자녀들은 탁아시설을 이용하게 된다. 그래서 토요일에는 온 가족이 대화하며 집안의 일을 함께 하라는 사회복지차원의 배려다. 우리와 달리 가정의 가치와 가족간 대화가 중시되는 문화에서 사회가 가정의 근로를 사회복지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다. 사회제도나 직장풍토와 삶의 가치관이 우리와 엄연히 다른 환경에서 실시되는 제도가 우리의 여건에 꼭 맞는 건 아니다. 이는 우리가 선진사회 문화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5일제 도입 후 가정불화와 이혼율이 증가했다는 통계는 아이로니컬하다. 이것은 ‘이틀 쉬는 의미만’ 알도록 하고 취지와, 또 우리 여건에 맞는 방법론을 깨우쳐 주지 못한 정책입안자들의 문화의식 부재의 소치다. 한 사회의 정책이나 제도는 문화적 토양이 갖춰져야 소기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우리 사회의 리더가 되는 지도자일수록 문화적이어야 함은 바로 그런 이유다. 문화를 안다는 것,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경쟁력이며 생활가치이다. /이 인 권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대표

예술문화의 블루오션

예술은 아낌없는 시간과 통찰력을 바탕으로 한 창조적 영역이며 끊임없는 가치 혁신이 뒤따르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진정한 예술가는 가치혁신주의자(Value Innovationist)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시점에서 미래를 읽을 수 있는 블루오션은 경쟁이 없는 비경쟁 시장공간을 말한다. 즉 현재 존재하지 않는 모든 산업들을 말하며 미개척 분야의 재창조 공간을 일컫는다. 블루오션 창조자들은 한결같이 벤치마킹을 하지 않고 서로 다른 장르의 시장 경계선에서 완전히 다른 컨셉을 만들어 내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의 전략적 통찰력은 우연한 천재성이 아니라 문제의 핵심에 대한 관찰을 통해 명확한 대안을 찾아내고 경쟁의 경계선에 끊임없이 도전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위대한 예술가와 훌륭한 경영자들의 창조적 마인드는 전략적인 공통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문제를 보는 포커스를 이동시킬 줄 알기 때문에 관념에 젖은 경쟁자들이 보지 못한 보물을 찾아낼 수 있다. 예를 들면 서커스업계 신화로 불리는 캐나다의 시르크 뒤 솔레이유회사가 있다. 지난 84년 열악한 환경과 만성적인 적자로 세계적으로 사양산업이었던 서커스! 그러나 이 회사는 연극과 서커스의 경계를 허물고 테마가 있는 복합공연, 세련되고 쾌적한 환경, 고품격 음악과 무용 등 새로운 차원의 비서커스적 요소를 도입하고 스타급 곡예사와 동물쇼를 삭제, 비용을 과감히 줄이는데 성공했다. 또한 서커스의 재미와 스릴에 연극의 지적 섬세함을 새로운 형태의 예술로 재구축, 서커스 의미를 극적으로 화려하게 부활시켰다. 20여년 전 죽마 곡예와 불을 삼키는 묘기를 했던 기 라리 베르테는 시르크 뒤 솔레이유의 최고 경영자다. 길거리 공연가 몇몇이 모여 공연한 것을 시작으로 현재 이 서커스 회사의 공연은 세계 90여 도시에서 4천여만명이 관람한 기적과도 같은 기록을 갖고 있으며 캐나다 최대 문화산업 수출업체로 손색이 없다. 즉 관찰을 통해 가치비용의 상충관계를 거부하고 차별화된 전략을 추구한 결과다. 블루오션에 성공한 사례들은 포커스가 확실하고 독창적이며 커뮤니케이션이 쉽다는 특징이 있다. 요즘에는 예술문화분야는 물론 대기업 가치혁신 프로그램센터도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현재 블루오션 창출은 서비스산업에서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감성과 기능을 동시에 충족시키고 있다. 예술의 블루오션 아이디어를 실행하는 과정에 지적이고 감성적인 인식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미 유럽이나 미주 예술계에선 미술·사진·연극·문학·무용·미디어 등 근대의 장르 구별과 패러다임이 파괴돼 서로 상생하는 문화의 통합개념(CT)으로 정착됐다. 멀티미디어 또한 예술과 IT가 만난 첨단예술 장르로 미술, 음악, 편집기술, 프로그램, 설치 등을 총체적으로 다루는 공간 종합예술로 볼 수 있다. 이외에도 전자·컴퓨터·영화·산업디자인 등이 결합된 영상공학 부문도 다양한 전문지식과 현장경험을 바탕으로 엔터테인먼트 테크놀로지(ETC)를 꿈꾼다. 이처럼 각 장르의 경계선을 주목하고 관찰해 벽을 허물고 새로운 가치창조를 만들어낸 복합예술은 미래예술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고정관념을 바꾸는 현명한 전략적 이동은 예술의 블루오션 창조에 절대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세상이 예술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게 아니라 예술가의 창조적 마인드와 열정이 세상을 바꾸는 원동력이 될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노 경 화 멀티미디어 작가

문화공간! 작은 것이 아름답다

최근에 재미있었던 것은 경기도의 큰 행사마다 각 시·군이 내건 슬로건이 모두 ‘문화도시’를 지향한다고 되어 있다. 대단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웃어넘길 수도 있지만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달리 보면 경기도에 터를 잡아 살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문화 지향적’이라는 아주 중요한 문화자산이 있다는 것인데, 다가올 미래의 가장 중요한 자산은 바로 ‘사람, 즉 시민’이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면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다.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현대인의 거친 마음을 타인에 대한 배려의 마음으로 묶을 수 있는 아이덴티티(identity)! 이것이 바로 문화임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동시에 가장 소중하고 큰 문화공간은 ‘사람’이며, 아울러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진실을 알았으면 한다. 최근 경기도의 문화 공간 확보는 대형화, 즉 거창한 건물부터 신축하는데 치중하고 있다. 물론 문화공간의 구성요건은 건물, 주제, 사람(전문 인력), 예산이다. 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건물에만 치중하거나 예산을 건물 치장하고 유지하는 데만 사용하고 있다면 처음부터 잘못된 시작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경기도내 다양한 지역의 정체성을 무시하고 역사·문화 환경을 고려하지 않은 무리한 공간 확보는 오히려 부작용만 양산할 것이다. 즉 청동기 유적을 마구 밀어버리고 어마어마한 전자공단을 지으며 얼어버린 땅을 마치 60·70년대 군대에서나 있을법한 마구잡이식 발굴조사를 자랑스러워해서는 곤란하다. 과연 전자제품의 잉여가치가 경기도를 살릴 지, 청동기 유적의 보존과 활용이 경기도에 역사 문화관광으로 인한 잉여가치를 줄 지는 냉정하게 판단해 보아야 한다. 반면 세계적인 구석기유적에 대한 보여주기식 대형 전시관이나 박물관을 짓는 것도 바람직한 방법은 아니다. 선사전시관의 건설은 충분한 연구와 조사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무리하게 진행하다 보니 전시관 예정 부지는 또 다른 유물이 분포하고 있었다. 고구려가 부각되다 보니 서로 고구려역사관을 건설하겠다고 한다. 도대체 경기도내 고구려연구가 얼마나 되어 있어서 이런 발상을 할까? 문화강국! 진정한 의미에서 문화강국이란 말은 없다. 오히려 문화적인 생각이나 행동이 보편화되어 타인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이 일상화 되어 있는 사회를 말할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사람과 사람이 소통되어야 한다. 거대한 구조물과 사람은 쉽게 소통하기 힘들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작은 것, 느린 것과의 소통에 익숙한 존재이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것은 ‘재활용’의 의미를 포함한다. 동사무소, 마을회관, 양로원, 교회, 사찰, 방과 후 학교의 교실 개방, 문화예술인이 거주하는 작업실, 의지가 있는 작은 카페, 사찰의 성보 박물관 심지어 다방까지도 활용해 보자는 것이다. 행위자와 관객이 예술의 우수성과 우월함에 나태하거나 만용을 부리지 않고 거리감 없이 직접 향유할 수 있는 작지만 귀중한 문화공간이 필요하다. 행정력은 문화공간이 전무한 작은 마을에 이러한 문화공간을 발굴해 내고 활용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체계가 되어야 할 것이다. /황 평 우 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장

인간화를 위한 미술, 삶과 소통하는 미술

지난 9일부터 경기문화의전당에선 ‘조국의 산하전·평택-평화의 씨를 뿌리고’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전시회 개막 행사에서 평택 미국기지 확장 예정부지에 들어 있는 팽성읍 도두리가 고향인 가수 정태춘씨가 나와 자신의 고향을 지키려는 의지를 담아 직접 만든 노래를 비장한 목소리로 불렀고, 미술가 60여명은 미군기지 확장으로 인해 고향과 삶터로부터 쫓겨 날 위기에 처한 주민들과 대추리 마을을 지키려는 마음을 담은 작품들을 걸어 놓았다. 개막 행사 막바지에 대추리에서 올라온 주민 10여명이 일일이 소개되자 순간 전시장 분위기는 한껏 고조되고 비장한 분위기로 달아올랐다. 와인 잔을 들고 덕담을 나누며 그림을 감상하는 여느 전시회와는 확실히 다른 행사였다. 이 전시회는 지난 봄부터 작가 수십명이 대추리를 드나들며 미군기지 확장과 관련된 주제의 작품을 제작했고 이를 지난 여름 현지에 비어있는 농협창고에서 전시회를 열었던 것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도심 전시장으로 옮겨 온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이 행사는 개인적인 문제를 담은 일반적인 작품전이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를 공동의 관심으로 작업, 바로 그 현장에서 직접 전시회를 열었다는 점에서 강한 사회적 소통을 목적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른바 현장미술이요, 참여미술이라고 할 수 있다. 참여미술은 이미 군사독재시절인 지난 80년대 민중미술이란 이름으로 위세를 떨쳤다. 민중미술은 정치·사회 민주화와 인간의 존엄성을 향해 외쳤던 저항미술로 민주화운동에서 일정한 역할을 했을뿐만 아니라 미술사적으로도 국내에선 물론 서구의 진보적인 비평가들로부터 높이 평가받아 왔다. 80년대말 서울올림픽기념 국제현대미술전을 기획한 바 있는 미국의 저명한 미술비평가 킴 레빈은 한국의 과천 국립현대미술관과 인사동에서 열리는 수많은 전시회를 본 후 최근 서구에서 유행하는 미술문화와 크게 다르지 않은 한국현대미술에 시큰둥 했다가, 어느 지하의 화랑에서 전시되고 있는 민중미술작품들을 보고 한국미술을 새삼 존경하게 됐다는 말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바로 자신들의 삶을 중심에 놓고 그것을 놓치지 않고 치열하게 대결하고 극복하려는 인간 본연의 삶의 의지가 담긴 예술, 앞선 나라에서 유행하는 사조를 따르지 않고 한국의 특수한 정치적 상황에서 스스로의 내용과 형식을 만들어 탄생한 자생적인 미술운동이라는 점에서 그랬다. 미술은 시대의 산물이다. 지금 대추리에는 많은 벽화와 조각들이 마을의 여기저기를 덮고 있다. 공공기금 지원을 받은 것도 아닌데 대추리 문제에 관심이 많은 작가들이 스스로 찾아와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 물감과 붓을 사고 철판과 용접봉 등을 사 빈집의 벽에 그림을 그리거나 철판을 잘라 조각 작품을 만들어 마을의 여기저기에 세워놓은 것이다. 물론 고통을 받고 있는 주민들을 위로하고 마을을 지키고 나아가 한반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다. 역사적으로 예술가는 늘 자유와 평화와 평등을 꿈꿔 왔다.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그렇고 케테 콜비츠의 작품들이 그렇다. 미술작품이 소수자를 위무하고 세상의 평화와 평등을 위해 역할을 한다면 그것은 진정 아름답다. 아름다운 예술이란 개인의 천재적 상상력에 의존하는 모더니즘 시대의 유물이 아니라 개인과 세상, 세상과 세상과 소통하며 인간화를 향한 것일 때 우리에게 진정한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닐까. 이 글을 막 탈고한 직후, 국방부는 대추리의 빈집을 철거했으며 벽에 그려진 일부 미술작품들도 무자비하게 파손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 종 구 화가·중앙대 예술대 교수

부모들의 영어교육 有感

두 가지 재미있는 기사가 신문에 실렸던 적이 있다. 하나는 요즘 학교에서 시험을 보면 초중고생의 국어실력이 형편없으면서도 영어시험은 잘 본다고 한다. 또 하나 기사는 감사원이 재외공관 등에 대한 감사를 실시한 결과 해외에 파견된 공무원의 영어 소통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발표했다. 글로벌 시대에 영어의 중요성을 두고 보는 양면의 모습이다. 분명 영어는 우리나라의 경쟁력을 높이는 무기가 될 수 있다. 인도와 같은 영어권의 나라가 IT 분야에서 우리보다 앞서 있을 수 있는 것은 영어능력이라는 결정적인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영어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은 크나 큰 이점이다. 그래서 영어열풍이 거세게 일고 있다. 해외 유학이다, 조기 영어교육이다 해서 영어에 관련되어서는 찬반 논쟁이 뜨겁다. 모든 논쟁과 관심의 중심을 들여다보면 왜 영어를 잘 해야 하고, 어떻게 영어를 배워야 하는가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나 기준도 없다. 그러다 보니 영어 열기가 드센 나라치고 ‘영어로 말은 하지만 영어는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이러니를 낳고 있다. 필자가 영어를 혼자 힘으로 터득해 영어 칼럼니스트와 외국어 컨설턴트로도 활약한 경험에 비추어 보면, 한국에서 영어를 잘 한다고 하면 국어의 구사력이 철저한 가운데 영어 표현력과 감각을 가져야 한다. 그렇게 되면 영어를 지식으로 아는 게 아니라 국어와 영어라는 매체를 통해 지적 능력을 다양하게 키울 수 있으며 지식 정보의 수준을 넘어 지혜의 사고 구조를 갖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불고 있는 자녀들의 영어 열풍을 보면서 점검해야 할 사항을 필자의 체험에 비추어 몇 가지만 지적해 보도록 한다. 첫째, 자녀들의 영어교육은 국어실력을 갖추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앞서 신문에 보도된 것처럼 영어의 어려운 단어 ‘caterpillar’는 쓰면서 이를 우리말로 ‘에벌레’, ‘애벌래’라고 쓰는 학생이 70%였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다. 이런 학생들이 사회에 진출하게 되면 영어를 잘 하기에 앞서 먼저 국어능력 미달로 도태되기 쉽다. 둘째, 조기교육이든 아니든 영어와 국어의 동시 교육은 주도면밀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자녀들의 두뇌 지력이 형성되는 시기에 언어의 구조가 정반대이고 언어가 내포하는 문화가치가 다른 두 가지를 체득하게 될 때 자녀들은 잠재의식 속에서 ‘언어의 주변인(marginal man)’ 이 되어 정체성의 혼란이 있을 수 있다. 셋째, 영어교육 시 부모가 먼저 영어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분명 영어를 익히면 시야나 생각의 깊이와 넓이가 달라지게 되어있다. 그러나 감수성이 민감한 시기에 영어를 배우는 자녀를 체계적으로 계도하지 않으면 오히려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감성이나 정서가 고착될 수가 있다. 글로벌 시대에 영어는 분명 필요하다. 그러나 그 영어교육을 하기에 앞서 부모들이 영어교육 방법에 대한 지식을 갖도록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영어를 배운다는 것은 언어 지식을 통해 글로벌 경쟁시대의 ‘지혜’를 얻는데 있다. 성공학의 대가 스티븐 코비는 앞으로 인간사회는 지식정보 시대를 지나 지혜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다. 교육당국에서도 영어교육이라는 단순한 사안만 다룰 것이 아니라 그 교육이 가져올 사회문화적 결과도 헤아려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인 권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대표

마음을 여는 정신문화

국내 최대 민간 기부단체인 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기부금 영수증 발급건수가 지난해말 기준으로 18만6천976건이고 금액으로는 2천147억원이라고 발표했다. 총 기부건수 가운데 90%는 개인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000년 836건으로 510억원이었음을 감안할 때 우리의 기부문화가 만 5년동안 큰폭으로 확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얼마 전 빌 게이츠 마이크로 소프트사 회장에 이은 세계 2위 부자인 워렌버핏 회장이 370억달러를 기부했다. 기부문화가 생활이 돼버린 미국이지만 워렌버핏 회장이야말로 나누는 기쁨을 아는 진정한 부자란 생각이 들었다. 이처럼 상류층의 도덕적 의무 같은 자선활동인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에 뿌리를 둔 기부도 아름답지만 풀뿌리와도 같은 서민들의 기부 또한 값지다. 자선적 기부는 있는자들만의 특권이 절대 아니다. 어릴 때부터 나누는 습관, 즉 기부행위는 학습에 의해 형성되고 이것이 반복돼 습관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기부문화는 돈의 문제라기보다는 정신문화에 뿌리를 둔 것이다. 생각이 바뀐 후에 실천이 따르듯 가정이나 학교, 사회 등지에서 교육을 통해 기부를 자주하는 생활문화를 유도해야 할 필요가 있다. 후원이란 돈뿐만 아니라 자신이 갖고 있는 전문지식이나 기술, 자원봉사 등을 포괄하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돈이 없어, 또는 부자가 아니어서 기부할 수 없는 게 아니라 기부문화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이에 무관심하거나 차일피일 미루게 되는 것이다. 기부의 형태중 프랑스어인 메세나(Mecenat)는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활동이나 지원자를 뜻한다. 이 운동은 기업 또는 개인이 문화예술 활동을 지원하는 문화사업으로 역사적인 어원은 고대 로마제국시대 아우구스트 황제의 대신이자 문화예술 운동가, 정치가, 시인이었던 마에케나스(Maecenas)의 이름에서 유래됐다. 마에케나스는 그 시대 유명한 시인이었던 호러스(Horace)나 버질(Virgil), 프로페르즈(Properz) 등 당대 예술가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그들의 예술·창착활동을 대가없이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결과적으로 예술가들은 작품 활동에 전념할 수 있었고 예술적 성과로 답하게 되었으며 로마제국은 예술부국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미국이나 일본, 유럽 등 선진국에선 20여년 전부터 기업 이윤의 사회 환원과 기업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기업인들이 참여하는 메세나협의회를 조직해 각종 문화예술 활동을 지원해왔다. 우리나라는 지난 94년 4월 기업메세나협의회가 창립돼 200여 주요 기업들이 회원사로 참여하고 있다. 스폰서십은 메세나스의 조건없는 후원에서 비롯됐다. 즉 메세나의 개념은 마음을 여는 정신문화로 타인들을 위해 예술문화의 여러 분야를 지원하는 개념이다. 후원자는 순수하게 좋은 일을 하고 만족하며 그 이상의 반대 급부를 생각지 않는다. 따라서 그 규모를 정확하게 파악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후원자들이나 기업들이 보통 익명을 쓰는 조건으로 후원 활동을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술문화를 지원하는 기부문화가 뿌리를 내리기 위해선 실천할 명분과 힘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바로 기부의 필요성과 가치를 재발견하고 반복하는 일이다. 메세나 운동은 교육을 통한 충만한 정신문화 환경을 만들기 위해 나름대로 꾸준히 실천하는 사람들에 의해 싹튼다. 때가 돼 저절로 형성되는 게 아니라 시민들의 노력에 의해 정신문화의 불씨를 가꾸고 메세나의 풍토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노 경 화 멀티미디어 작가

괴물은 살아 있다

영화 ‘괴물’은 공포의 결정판이라고 할만하다. 한여름 밤 괴물이 등장하는 무서운 영화는 인간의 상상력을 극도로 자극하고 재미를 더해주기 때문에 삼복더위를 이겨내는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그래서 끔찍한 괴물의 출몰무쌍하는 영화는 공포를 느끼고 즐기고 싶어 하는 심리적 반응을 최대로 이용한 영화 산업의 한 핵심이 된지 오래다. 공포(恐怖)의 사전적 의미는 ‘무서움’ 또는 ‘장차 고통이나 재앙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할 때 일어나는 정서적 반응’이다. 즉 구체적인 공포는 결정적으로 자신의 신체적 위험에 직면해 생존이나 미래, 또는 자신에 대한 안위를 위협받을 때 나타나는 정서적 상태를 말하고 있다. 이는 현실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들에 대한 상상의 극단적 결과물인 동시에 미래를 보여주는 묵과할 수 없는 현현(顯現)이라고 할 수 있는데 최근 공포영화로 주목받고 있는 ‘괴물’이 그것이다. 영화 ‘괴물’에서 한반도의 젖줄인 한강에 출몰하는 거대한 괴물은 주한미군이 무단 방류한 독극물의 영향으로 탄생된다. 한강에 방류한 독극물이 초인적인 힘을 가진 괴물의 형상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이는 지난 2000년 발생한, 이른바 ‘맥플란드’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이 사건은 용산 미군기지에서 포름알데히드란 독극물을 하수구에 방류한 것을 한국측 군무관의 양심선언으로 전쟁과 평화의 양면적 가면을 쓴 미국을 재진단하게 한 사건이다. 그래서 영화는 괴물이라는 상상의 생명체를 소재로 하지만 서막에 ‘맥플란드’ 사건을 인용, 한반도 현실을 상기시키고 숨겨진 미국의 정치적 의도에 미묘하게 접근하게도 한다. 부연하자면 미국이 정면에선 세계 평화를 내세우는 동안, 주한미군이 방류한 독극물로 오염된 한강 속에선 문제의 거대한 힘을 가진 정체불명의 괴물이 태동된 것이다. 이로 인해 ‘괴물’은 반미영화란 지탄을 혹자들로부터 받고 있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기존에 개인이나 가족의 불가항력적인 죽음에 순응하고 전통적인 애환을 다룬 우리의 정서적인 영화의 구도를 벗어나 눈앞에 나타난 괴물이란 재앙을 가족애로 물리치는 새로운 시도라는 점에서 주목할만한 성과이다. 나아가 괴물로부터 존립마저도 위협받고 있는 우리의 현실상황에서 안위를 보장받기 위해선 싸울 수밖에 없는 현실을 드러내 보여주는 일종의 적신호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궁극적으로 한미관계에서 스크린쿼터제가 축소·폐지되면 좋은 한국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는 토양도 사라진다. 현재 추진중인 한·미FTA(자유무역협정)가 체결되면 사회 양극화가 더 심해져 농민의 80%가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된다는 게 공론인 점을 감안하면 미국이란 존재는 여전히 한반도의 젖줄인 한강에 살고 있는 거대한 괴물이기에 맞서야 하는 관계에 놓여 있는 것으로 확대 해석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한편, 전쟁과 평화라는 전략적 양면성과 유연성을 가진 미국은 그동안 우리의 삶이 풍요로워지고 아름다워지는 것을 알게 모르게 방해, 또는 지연시켜 왔음을 역사는 말해 주고 있다. 이를 알면서도 방치하거나 관망한다면 미국이란 괴물은 어쩌면 우리가 물리칠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한 힘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분명한 건 영화 ‘괴물’이 상상력의 소산이면서 과거의 잘못으로 인해 다가올지도 모를 미래의 재앙을 예감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이다. 사실이 끝나는 곳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야기의 발화지점은 언제나 현실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권 성 훈 문학평론가

노는 법을 배우자

지난 연휴에 남편이 이유없이 짜증을 냈다. 이유인 즉슨 무언가 해야 하는 데 하지 못하여 불안하거나 허전하다는 것이다. 이에 필자는 그것도 병이라고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 소리를 듣고 ‘나도 안다. 알면서도 그런 것을 어떡해.’하면서 내일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 산에도 가고 낮에는 영화도 보러 가고 등등 거창한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연휴 내내 잠을 자거나 넋을 놓고 TV 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대다수의 40대 후반 이후 세대는 경제발전을 위해 쉴 틈 없이 일만 했기에 놀 줄을 모르며, 그 흔한 취미도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이 태반이다. 또한 어떻게 놀아야 할지, 어디서 놀아야 할지, 노는 것이 어떤 것인지 대한 구체적 고민도 못하고 성장하였다. 그래서 자신뿐만 아니라, 자녀 세대의 놀이문화, 노는 것에 대한 이해도 부족한 편이다. 요즘 주5일제가 본격적으로 시행되면서 갑자기 여가 시간이 많아져서 ‘오늘 무엇을 해야 할까’고민은 하지만 정작 해결방안이나 대안은 없는 실정이다. 준비없이 찾아온 여가일 수도 있지만 이를 잘 활용한다면 더 큰 개인, 사회, 국가 발전의 원동력으로 환원될 수도 있기 때문에 여가프로그램의 개발을 위해 사회 각 분야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시기라고 본다. 기업은 종업원의 여가활용 프로그램을 마련함으로써 생산성을 증대할 수 있을 것이며, 중앙정부나 지자체에서도 여가활동을 위한 시설 확보, 프로그램 확보, 인적자원 육성 등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심적인 역할은 아마도 문화계가 아닐까 싶다. 세상에 이런 말이 있다. 사람은 처음에 돈을 벌어 부자가 되고 싶어 하고, 부자가 되면 슬그머니 권력 욕심이 생기고 다음에는 예술을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술은 서민이 향유하기에는 사치로 여겨지기도 한다. IMF시절을 지나면서 중산층이 무너지고 경제적 여유는 넉넉하지 못한데다가 미래마저 불투명한 상황에서 여가활동을 즐기기는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민들의 여가활동을 위해 문화예술의 대중화와 문화복지의 확대를 가속화 할 필요가 있다. 각 도시마다 공원, 학교, 공공시설 등을 문화공간화 하여 문화소비자를 찾아가는 문화관련 프로그램을 운영한다면 시민들의 여가는 건강한 문화활동으로 연결되고 이것이 자연스럽게 삶의 윤택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에 부천문화재단은 부천 전역에 흩어져 있는 쌈지 공원을 이용하여 찾아가는 문화공연을 실시하고 있다. 소사고등학교, 은데미공원, 테크노파크 등은 지역주민을 위한 찾아가는 문화공연의 명소로 자리잡았다. 앞으로 많은 지역에서 더 많은 문화공연을 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정비함으로써 시민들이 보다 여가시간을 이용해 문화공연을 즐길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또한 취미서클에서 강의를 받고 수료한 자를 대상으로 동아리를 조직통합하여 문화상품사업단으로 발족, 문화예술 생산자로서 활동하게 함으로써 지역문화에 기여하고 있다. 최근 언론과 정치권에서 연일 ‘바다이야기’가 화제가 되고 있다. 근래 들어 사행성 오락게임장이 급증한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사행성 오락게임산업이 번창하는 것이 여가시간과 여가활동 간의 괴리현상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닌지 문화예술행정가로서 못내 걱정스럽다. 문화활동은 가족 또는 이웃과 같이 여가활동을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장점을 갖고 있다. 이제 휴일이면 모든 시민들이 가족, 이웃과 같이 문화공간으로 모여 즐겁고 보람된 여가활동을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박 두 례 부천문화재단 상임이사

예술의 힘, 문화의 힘

계속되는 찜통더위에 머리 속까지 “윙”하는 소리가 나며 공항상태다. 인간들이 만들어낸 지구 온난화의 덕분(?)이다. 뭘 써야 좋을지 모르겠다. 가장 최근에 경험한 일을 쓸 수밖에 별 도리가 없는 것 같다. 지금 막 필자는 공주 국제자연미술비엔날레와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돌아왔다. 찜통더위 속에서도 문화예술행사를 즐긴 셈이다. 즐겼다는 표현을 쓰긴 했지만 예술을 위해 고행(苦行)했다는 표현이 더 솔직할지도 모르겠다. 공주 국제자연미술비엔날레는 공주의 금강변, 곰나루 건너 곰의 전설이 있는 연미산에서 열리고 있다. 국내외 작가 50여명이 만든 자연미술을 감상하며 연미산 자락을 오르락 내리락 하다보면 어느새 정상이 가까워진다. 30년 가까이 재직하면서 연미산을 그린 적은 있지만 오르기는 처음이다. 정상에 오르니 공주를 끼고 ‘U’자 형으로 돌아가는 금강 자태가 한 눈에 들어온다. “와!!!”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그야말로 인간들이 만든 작품에 넋이 빠져 정상에 오르니 신이 만든 자연미술을 만난 셈이다. 행사용 의상을 몽땅 땀으로 적셨다. 그 다음날은 충청도를 가로 질러 증평·음성·충주를 거쳐 충주호를 요리저리 돌아 행사장인 제천 청풍단지에 도착했다. 가는 도중 충주 근처 길거리에서 사먹은 이 지방 특산 ‘대학옥수수’는 그야말로 별미였다. 약속한 일행들과 만나 충주호반 여기저기를 관광하고 저녁 무렵 청풍단지에 차려진 개막식 장소로 갔다. 가는 도중에도 그렇거니와 입장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영화배우를 비롯, 여럿 유명 인사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필자 자신부터 완전 축제 분위기로 들뜰 수밖에 없었다. 야외무대에서 행사가 시작되고 어느덧 개막작이 상영될 때는 주변이 캄캄해지고 수변무대는 각종 조명과 하늘에 뜬 보름달과 별들이 빛나기 시작했다. 개막작은 실제 브라질의 유명가수 일대기를 그린 영화였다. 촬영감독 출신이 만든 영화여서 그런지 화면이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내용이 슬플 때 머리를 제쳐 하늘을 보았다. 하늘에 뜬 달과 별을 보는 척 하면서 사실은 눈물을 훔친 것이다. 이 두개의 문화예술행사는 둘 다 이번이 두번째이다. 공주의 미술행사는 비엔날레로 행사를 시작하기 오래 전, 그러니까 지난 80년대 초반부터 일군의 젊은 미술인들이 야외로 미술을 끌고 나간 ‘야투’로부터 시작됐다. 이러한 젊은 미술인들의 열기에 자극을 받아 외국의 비슷한 작업을 하는 자연미술인들이 합세하고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들이 이를 지원, 점점 더 국제적인 지명도를 얻어가고 있는 중이다. 또 하나의 음악영화제는 완전히 제천이란 지방정부의 작품이다. 아니 엄태영이란 민선시장 작품이다. 그가 한 건 전문 영화축제 기획자들에게 모든 것을 맞기고 그는 지원만 했을뿐이다. 전문가들에게 모든 걸 맡기고 지원만 했기 때문에 성공한 셈이다. 물론 독특한 음악영화를 매개로 한 축제가 청풍명월 고장답게 아름다운 풍광을 배경으로 했기 때문에 휴가를 겸한 관광객들에게 더욱 인기가 있었을 것이다. 이제 휴가와 관광도 풍광이나 먹거리와 행락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시대가 됐다.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본 영화 가운데 ‘레지나’란 작품이 있다. 레지나라는 가난한 아이슬란드 소녀가 노래로 세계적 보석 절도범들을 잡고 과부인 자기 엄마와 옆집 소년의 홀아비 아빠와 사랑을 나누게 한다는 내용이다. 흔한 내용이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가 아주 적절한 것 같다. 우리 사회는 IMF를 거치고 한미FTA 같은 세계화의 압력으로 더욱 양극화의 길로 들어설 것이다. 아니 벌써 여기저기서 ‘위험사회’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럴 때 일수록 우리 사회 여러 병적인 징후들을 치유하고 우리 사회를 위험사회로부터 ‘문화사회’로 이끌어 가기 위해 문화예술의 힘을 빌려할 것이다. /김 정 헌 공주대 교수·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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