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날레의 계절에

이 정 구 중앙대 예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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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광주와 부산에선 광주비엔날레와 부산비엔날레가 열리고 있다. 더불어 중국의 상하이비엔날레와 싱가포르비엔날레까지, 지금 한국과 아시아는 바야흐로 비엔날레의 계절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광주비엔날레는 지난 95년 시작한 이래 불과 10여년만에 세계적인 인지도를 얻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비엔날레는 격년제로 열리는 미술행사이다. 그러나 단순히 시간상의 개최형식을 넘어 미술작품을 통한 동시대의 지역·사회·문화적 담론을 매개하는 장이기도 하다. 서구에서 비엔날레의 역사는 깊다. 베니스비엔날레는 1895년 시작돼 110여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브라질의 상파울로 비엔날레와 미국의 휘트니비엔날레를 묶어 보통 세계3대 비엔날레로 일컫는다. 이들 비엔날레가 대개 서구현대미술의 현장을 보이는데 주력하고 있다면, 남아공의 요하네스버그비엔날레나 쿠바의 하바나비엔날레 등은 제3세계 국가들의 정체성과 문화를 드러낸다. 지금 동시에 열리고 있는 아시아권 비엔날레도 나름대로 서구와 차별되는 아시아적 정체성을 살리는데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광주비엔날레가 시작된 이후 우리의 미술문화가 한층 발전했다는데는 이의가 없다. 비엔날레를 통해 수준 높은 해외작가들의 작품들을 볼 수 있게 됐고, 최근 유행하는 첨단의 미술문화를 엿볼 수 있으며, 청소년들과 미술학도들에게 교육적 효과가 높은 행사로 자리를 잡았다. 특히 젊은 작가들에게 국제적인 수준의 안목으로 창작의욕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하는 건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부정적인 측면도 있다. 젊은 작가들이나 작가지망생들에게 영향력이 컸던 만큼, 이를 통해 최근 유행하고 있는 국제적인 스타일이 이들 작업에 쉽게 차용돼 모방의 전진 기지역할을 하기도 한다. 진중한 철학적인 고민이나 문제의식 등에 앞서 형식과 유행만을 맹신적으로 추종하는 건 개인의 예술적인 성장은 물론 우리나라 미술문화의 발전에도 거리가 멀다.

또 한가지. 비엔날레가 동시대 미술문화행사의 장이란 선의적인 관점을 넘어 과신적으로 권위와 권력의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는 점이다. 한 예로 지난달 10일 마친 2006 pre-국제인천여성미술비엔날레는 지역에서 ‘비엔날레란 무엇인가’를 묻는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 됐다. 인천시가 1억6천만원을 들여 개최한 이 행사는 인천시가 주최자란 이름만 걸었을뿐 실제는 한 여성미술인단체가 기획부터 실행까지 행사의 모든 과정들을 주도했다. 이 행사의 문제점중 가장 관심을 끈 건 ‘여성미술’ 비엔날레라면 당연히 핵심적인 의제와 주제가 돼야 할 여성주의(Feminism)가 중심축에 없었다는 점과 기존의 관행대로 전시되는 수준의 미술행사에 굳이 ‘국제…비엔날레’ 명칭을 사용해야 하는지 등이다. 행사에 앞서 지역 문화예술단체들이 모여 주최측에 대해 이의 제기와 공개 토론 등을 제안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급기야 비엔날레 전시장 인근에서 이 행사를 반대하는 안티비엔날레(남성미술비웃날레)가 동시에 열렸다. 결국 생산적인 미술문화의 담론과는 거리가 먼, 비엔날레란 과신적인 권위가 만든 행사로 지역사회에 큰 파장을 남긴 채 막을 내렸다.

꼭 비엔날레가 아니어도 주변에서 성공한 미술문화행사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APAP)나 포천아시아미술제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내실 있는 기획과 특성화 전략 등으로 성공한 행사로 평가받고 있다. 지역적인 특성과 미술의 공공성 요구를 정확히 읽고 거기에 맞는 기획을 충실히 했기 때문이다. 모두 안목 있고 전문성을 갖춘 기획자, 예술감독, 행정지원 등의 호흡이 잘 맞아 성공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비엔날레는 분명 우리의 미술문화를 풍요롭게 하지만 그렇다고 최선은 아닌 것이다.

/이 정 구 중앙대 예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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