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안티고네의 비극

노 경 화 멀티미디어 작가
기자페이지

미디어는 넓은 의미로 모든 소통 네트워크 수단이다. 외견상 고대 광장문화와 현대 인터넷 문화사이에 하등의 연관관계가 없어 보이지만 그 안을 보면 기나긴 시간을 초월, 매일 만나고 있다.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예술은 대중의 공간에 진입하지 않고서는 생존할 수 없으며 도태할 수 밖에 없었다. 예술은 현실보다 연극적 요소에 가깝다. 현대인들의 필수문화코드인 인터넷으로 TV 드라마를 즐기듯 고대 그리스인들은 지중해의 온화한 기후 덕분에 노천극장에서 ‘오이디푸스왕’과 ‘안티고네’ 등의 비극에 열광했다. 그리스 연극은 디오니소스 신을 모시는 제례의식에서 비롯됐고 축제기간에는 하루 종일 연극이 상연됐다. 소포클레스(BC 497~406)는 등장인물들을 통해 인간 고뇌의 극한까지 치열하게 묘사했고 긍정적인 인물에게서 순수한 비극이 잠재됐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그의 비극 ‘오이디푸스’는 근친상간과 존속살해란 비극적 신화다. 그의 어머니이자 아내인 이오카스테 사이에서 태어난 맏딸이 바로 안티고네이다.

안티고네 숙부와 크레온왕은 왕위를 둘러싸고 형제끼리 서로 싸우다 죽은 안티고네의 두 오빠 에테오클래스와 폴류네이케스 중에서 적군을 끌어들인 반역자 폴류네이케스를 매장하지 않고 들판에서 썩어가게 내버려 둘 것을 명한다. 이를 거역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안티고네는 육친의 도리를 내세워 왕명을 어기고 반역자 폴류네이케스를 매장한다. 크레온은 국가권력 기강을 위해 안티고네를 감옥에 가두고 그녀는 비굴한 삶을 포기하고 자살을 선택한다. 그녀의 약혼자인 크레온의 아들 하이몬도 자신의 사랑을 따라 죽는다. 아들을 잃은 크레온의 아내도 죽음에 이르게 된다. 결국 안티고네와 크레온은 물론 모두 파멸에 이른다.

안티고네는 신의 법인 개인의 양심을 명분으로 내세웠고 크레온은 국가권력이란 인간의 법이자 억압된 체제를 상징한다. 극한의 두 신념이 충돌, 파멸과 죽음으로 치닫는 과정의 긴박함, 카타르시스가 소포클레스 비극의 정점이다.

안티고네가 죽기 전 “내 운명을 다 겪고 난 다음에는 내 죄가 무엇인지 알게 되겠지요. 그러나 나에게 판결을 내린 사람들에게 죄가 있다면 나에게 한 부당한 것과 같은 화를 그들도 겪게 되길 바랍니다”라고 말한다. 필자는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신념중 누가 옳고 그르다거나, 아니면 둘다 옳은 신념이란 측면에서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아무리 옳은 신념이더라도 지나치게 강하면 결국 파멸과 죽음의 결말만 기다리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현재 지구는 약 2천여개 이상의 언어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 창세기 11장 1절에는 “원래 언어와 말은 하나뿐이었다”고 기록됐다. 노아때 홍수로 심판하신 후 하나님께서 “너희는 다산하고 번성, 땅을 가득 채워 그 안에서 번성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인간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정면으로 불복종, 온 땅에 흩어지지 말고 함께 모여 살자며 성과 탑을 쌓기 시작한다. 그 탑이 바로 바벨탑이다. 하나의 강력한 인간의 언어가 바벨탑을 만들어 간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이 서로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그들이 탑과 도성을 짓는 것을 그쳤다. 이 또한 강력한 인간의 한가지 언어가 바벨탑을 세운 동기이자 탑을 무너뜨린 결정적 원인이 된 셈이다.

현대인의 강력한 무기라 할 수있는 인터넷. 그 무한한 잠재력과 역동성 안에 존재하는 혼돈과 위험. 자신이 끝내 옳다고 절규하다 죽어간 고대 안티고네의 비극이 오늘날 되풀이 되지 않길 바라면서 극한에서 멈출줄 아는 지혜가 절실함을 필자 자신 또한 느끼는 한해다.

/노 경 화 멀티미디어 작가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