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록이 짙어가는 유월이다. 올해는 유난히 지난날 유월의 기억을 더듬는 일들이 많아졌다. 유월항쟁 20주년을 맞았기 때문이다. 시사잡지마다 유월항쟁을 회고하고 평가하는 특집과 글이 실려 있는가 하면, 이를 기념하는 시민축제도 여럿 준비되고 있다. 필자도 젊은 시절 많은 시간을 거리에서 보냈던 80년대 유월의 기억은 새롭다. 그중에서도 거리와 여러 집회장소에서 만났던 수많은 걸개그림의 기억은 각별하다. 걸개그림이란 1980년대 초부터 시작된 민중미술의 한 형태로서 80년대 민주화운동·노동운동의 열기와 함께 확산되기 시작한 현장미술이다. 주로 시위현장이나 대중 집회에서 메시지 전달을 위해 그려졌으며, 대형의 그림을 단기간 내에 완성해야 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작품의 완성도보다는 거칠고 투박한 형식적 특징을 갖고 있다. 걸개그림은 80년대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탄생한 세계미술 사조에 유례없는 독특한 형식의 미술로 평가된다. 당시 80년대 군사독재시대는 진보적인 미술가들은 물론 정의를 생각하던 젊은 작가들이라면 현실의 문제에 깊이 고민할 수밖에 없었으며, 미술을 전공하는 대학생들도 학교 실기실을 비워두고 거리로 나가 싸웠다. 그들은 거리에서 오늘날 공공미술의 시초라 할 벽화와, 유인물·포스터 제작을 위한 목판화와, 깃발과 집회용 걸개그림을 제작하며 시민들을 선동했고 사회변혁을 꾀했다. 김봉준, 최민화, 홍성담, 유연복, 김환영, 홍성민, 전승일, 최병수 등의 개인은 물론 두렁, 광주시각매체연구소, 엉컹퀴, 활화산, 낙동강, 겨레미술연구소, 가는패, 갯꽃, 둥지, 민미협창작단, 홍익대창작단 등의 미술가조직은 노동자투쟁, 농민운동, 민족통일 등을 주제로 걸개그림을 생산하며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그들 중에서도 걸개그림의 대표작가로는 최병수를 꼽는다. 그가 그린 ‘노동해방도’나 ‘장산곶매’ 등도 높은 수준의 작품이지만 그중에서도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그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80년대 수많은 걸개그림 가운데 단연 압권으로 평가된다. 1987년 6월 10일, 한 일간신문에 보도된 연세대생 이한열씨가 최루탄을 직접 머리에 맞고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사진을 보고 분노한 최병수는 이를 모티브로 학생들과 며칠 밤을 새워 높이10m 폭7.5m의 대형그림을 완성해 연세대 학생회관 외벽에 걸었다. 이 그림은 곧 학생들의 저항과 투쟁에 기름을 붓는 역할을 했고, 시민들의 항쟁 또한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다. 며칠 후 전두환 정권은 6·29선언으로 국민에게 항복을 했고 한국현대사에 빛나는 민주화의 역사적 전기를 맞는다. 일찍이 세계의 미술사에서 그림이 세상을 바꾸는 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예는 드물다. 탐미주의와 부끄러운 친일미술을 기록한 한국현대미술사는 더욱 그렇다. 이제 뜨거운 아스팔트의 광장에서 민주화의 열망을 담아 분위기를 압도하며 펄럭이던 걸개그림의 시대 유월항쟁도 어느덧 이십년이 흘렀다. 두 번의 강산이 변하는 동안에 우리의 이념과 사회와 삶의 방식도 크게 변화했다. 정의와 양심과 아름다운 세상을 향해 그림 그리던 당시 젊은 작가들이 중년이 된 지금, 그들의 세대를 대체한 오늘의 젊은 작가들은 과연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그리고 있을까? 행여 미술시장이 활성화되었다고 그에 대한 관심과 진출만을 꿈꾸거나 세계화의 물결 속에 국적불명의 양식에 빠져 허둥대고 있지는 않을까 염려도 해본다. 이념보다는 자본이, 양심보다는 소비가 미덕이 되어 인간을 끈질기게 유혹하고 있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이 종 구 중앙대 예술대 교수·화가
오피니언
이 종 구 중앙대 예술대 교수·화가
2007-06-01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