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이 되어야 축제도 된다

축제란 한마디로 말해 날을 잡아 걸지게 잘 노는 것이다. 축제란 일을 멈추고 노는 것이지만, 사실 축제에서 노는 것은 일하는 기간 동안에 행해지는 수많은 것들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다. 희한하게도 사람들은 늘 일이 지겹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자신들이 일하는 방식으로 놀기를 좋아한다. 예컨대, 몸으로 일하는 사람들은 축구나 권투 같은 격렬한 운동을 좋아하는 것에 비해 머리로 일하는 사람들은 놀 때도 머리를 많이 쓰는 게임을 즐기는 경향이 있다.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싸움과 대립으로 움직이는 것이어서 그런지 놀이 중에는 그 본질이 싸움인 것들이 많다. 야구니 축구, 권투 같은 스포츠는 물론이고 화투나 인터넷 게임 등도 결국 본질은 싸움이다. 심지어 연극이나 토론회 등도 결국 맘 먹고 터 잡아놓고 사람 모아놓고 싸움을 벌여보는 것이다. 단 스포츠게임이나 화투, 인터넷 게임 등과 같은 것들은 승부가 분명하게 나는 싸움이지만 연극이나 토론회 등과 같은 것들은 그리 명료하게 승부가 갈리지 않는 싸움이기는 하다. 싸움이 진행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여러가지 생각과 느낌 등을 받으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 이 놀이의 특징이다. 선수들을 뽑아 싸움을 시킬 때에는 제대로 싸워주기를 기대한다. 권투 구경을 갔는데 선수들이 슬렁슬렁 봐주면서 대강 싸우면 정말 재미없고 맥 빠지는 일이다. 토론회도 마찬가지이다. 논리와 지식 등으로 싸우겠다고 터를 벌였으면 전력을 다해 자신의 이야기를 개진하고 싸움을 걸고 맞대응해야 한다. 하지만 요즘 이런 학술토론회를 만나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링 위의 선수들이 서로 봐주면서 잽을 날리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전혀 새롭지 않은 이야기들만 늘어놓고 모인 사람들끼리 서로 칭찬만 하다 시간을 보내는 경우도 태반이다. 그런 점에서 지난 1일 경기문화재단 창립 제10주년 기념 심포지엄 ‘전통음악과 대중음악의 만남과 소통, 그리고 난장’은 오랜만에 만나는 재미있는 싸움이고 축제였다. 사실 이런 주제로 심포지엄을 한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올만한 이야기가 뻔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 “전통음악은 현재의 대중과 소통해야 한다”, “대중음악도 전통을 만나야 국적 있는 음악이 된다”, “만나고 소통하는 것은 중요하다” 등 이런 뻔한 주례사 같은 이야기들만 나오다가 말 수 있겠다 싶은 것이다. 그러나 이 날은 달랐다. 비가 내리는 이른 아침부터 남산 한옥마을 토론장을 꽉 채운 관중들의 열기도 독특했거니와 무엇보다도 링 위의 선수들이 화끈한 펀치를 보여준 것이다. 이 가운데는 주례사 같은 이야기들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김수철의 성과는 전통음악에 주눅들지 않고 자신의 기타 연주의 손맛이 충실히 드러날 때 오히려 빛났다는 흥미로운 분석이나, 대중음악과 다를 바 없는 퓨전국악을 하는 사람들은 국악계 안에 숨어 있지 말고 대중음악계 안에 들어가 대중과 정면승부를 해야 한다는 도발적인 주장까지 제기됐다. 전통음악의 대중성과 현대성 등의 빛나는 성과는 지식과 돈 등이 많은 제도권의 안이 아니라, 늘 제도권의 바깥에서 생겨난다는 분석도 나왔다. 심지어 발제가 부실한 선배 평론가가 후배 연구자에게 호되게 질타를 듣기도 했다. 시간이 없어 링 위의 사람들이 충분히 치고받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싸움거리의 펀치를 충분히 날려줌으로써 이날 심포지엄은 말 그대로 ‘향연’이 될 수 있었다. 싸우려고 판을 벌였으면 제대로 싸워야, 축제도 제대로 되는 법이다. 이 영 미 대중예술연구가

문화, 공존과 존중의 미학

문화와 문명에 관한 호기심과 역마살의 옷을 입고 사는 필자에게 ‘문화와 문명의 교류(전파)’와 관련돼 서양 중심의 연구와 서술이 아닌 동양의 시각으로 접근하되, 국수적이지 않은 결과물은 없을까 라는 고민을 해결해준 책이 ‘실크로드학’을 비롯한 정수일 선생의 여러 저서들이다. 또한 그 기쁨을 배가해 주는 것은 저자와 함께 현장을 찾아보는 것이다. 며칠 전 정수일 선생과 2주일 동안 문명교류의 현장인 터키를 여러 도반들과 함께 탐사하는 호사를 누렸다. 한국 사람들이 터키를 여행할 때는 대부분 이스탄불을 비롯한 잘 알려진 서부지역에 집중되거나 일부 종교인들의 성지순례로 오지를 찾는 경향이 있으나 우리는 터키의 동부 디야르바키르와 하란 등지에서,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등의 두물머리에서 문명 발생의 고통과 흔적을 동시에 맛보는 행운을 얻었다. 세계 최초로 기독교를 공인한 도시 우르파, 거대한 호수의 도시 반, 노아의 방주로 알려진 만년설 아라라트산과 아나톨리아 루트로 알려진 앙카라, 하투샤, 카파토키아, 파묵칼레, 에페소서, 이즈미르, 이스탄불 등지를 탐사하며 핫티시대(BC 2,500년), 프리기아 시대(BC 850~300년), 알렉산더 대왕 시대(BC 334~30년), 로마의 진출(BC 133~AD 395년), 비잔틴제국 시대(AD 395~1453년), 오스만투르크제국 시대(AD 1281~1922년), 터키공화국 시대 등 짧은 기간 동안 강행군으로 동·서양 문명의 접점에서 실크로드를 통한 문명교류의 흔적을 체험할 수 있었다. 필자는 역사의 폐허에서 한반도의 우리 문명과 청동기시대부터 고대국가 고구려와 조선을 대비시켜 보기도 했다. 또한 오늘날 이율배반적이게 분쟁의 씨앗이 되어버린 종교성과 인간의 본성에 대해 고민하며 이슬람은 관용과 포용이며 다양성을 존중하고 인류문화의 공존 가치를 인정하고 있으며 신라를 비롯한 고대국가의 흔적에 다른 문명이 공존되고 있음에 비해 20세기를 지나며 한국에 전파된 종교는 지나치게 경직돼 있으며 욕심이 많고 도전적이고 호전적이고 ‘다름’에 대한 배려가 없음이 필자를 더 헐벗게 했다. 해넘이의 붉은 지중해 노천카페에서 정수일 선생에게 “1957년이면 20대인데 그때 지중해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라고 물었다. “문명사 공부를 하기 위해 카이로대학에 보내달라고 주은래에게 편지를 썼는데 받아줬어요. 장학생으로 왔고, 그때 아랍지역에는 조선 사람이 한명도 보이지 않았는데 카이로에서 국제대회가 열렸고 북한의 한설야가 왔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고고학자인 도유호 선생이 영어통역으로 왔지. 내가 그 사실을 알고 아랍어 통역을 해줬어. 도유호 선생이 얼마나 좋아하시든지 말이야. 난 청년시절에 만국의 민중들이 공존하고 존중하며 사는 세상을 생각했어.” 터키여행을 하지 전에 필자는 터키여행의 감동을 경기일보를 통해 전달해드리고 싶었다. 경기도와 우리나라 문화정책에 대해 쓴 소리를 많이 했지만 지난 1년의 기고를 정리하며 따뜻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으나 한국에 돌아온 후 지금 경기도에 돌아가는 여러 현상들은 그렇지 못함이 아쉬울 뿐이다. 조선 왕릉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에 경기도가 문화재 주변 난개발을 위한 거리 철폐를 조건부로 제시하자 문화유산을 뒷거래의 흥정물로 전락시킨다는 하소연들이 줄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심각하게 우려할 점은 행정기관의 행위나 문화기관들의 사업에 목표이자 수단은 ‘시민(공공성)’이라는 사실을 알아주기 바란다. 특정인의 권리를 위한 기관 통·폐합이나 소수 땅 부자들만을 위한 문화유적이나 환경보전 지역의 난개발이 이뤄진다면 경기도의 미래는 암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해 주기 바란다. 경기도에서 권력을 누리고 사는 분들! 들어보시라. “저는 청년시절에 만국의 민중들이 공존하고 존중하며 사는 세상을 생각했습니다.” 지난 1년 동안 필자의 졸고를 읽어주신 경기도민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황 평 우 문화연대문화유산위원장

미술대중화 이끄는 미술은행

문화관광부가 미술은행(Art Bank)을 설립한지 3년째다. 미술은행은 정부 예산으로 미술품을 구입해 공공기관이나 지방자치단체 등에 작품들을 대여해주는 제도로 서구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시행되고 있다. 영국의 정부아트컬렉션(GAC), 프랑스 국립현대미술재단(Fnac), 독일의 국제교류처(IFA), 캐나다의 캐나다공영미술은행(CCAB) 등이 그것이다. 우리나라 미술은행은 크게 세 가지 목표를 두고 설립됐다. 미술가들의 작품을 구입해 창작활동을 지원해주고, 국내 미술시장 활성화에 기여하며, 대여를 통해 국민들의 문화향수권 향상을 위한 것이다. 이러한 목표 아래 지난 2년 반 동안 매년 23억원의 예산을 들여 현재 모두 1천92점의 작품들을 구입했다. 그간 50여억원의 작품 구입으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일부 작가들에게 최소한의 숨통을 틔는 역할을 했고, 화랑미술제 등을 통한 작품 구입으로 미술시장 활성화에도 다소 기여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미술은행의 긍정적인 역할은 미술의 대중화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정부의 중앙부처나 지방자치단체, 공공미술관, 지역의 문예회관 등에 구입한 작품들을 대여해줘 시민들에게 미술작품 감상기회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미술은행은 그동안 1천500여점의 작품들을 대여한 바 있는데 전시를 했던 공공기관의 구성원이나 시민들을 통해 조사한 여론을 보면 사무실에 좋은 그림이 걸려 있어 근무환경이 좋아졌고 업무능률 향상에도 도움이 됐다는 의견이나 지방에서 수준 높은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어 좋았다는 답변들이 많았다. 특히 보령시와 마산시 등 일부 지방자치단체들은 매년 2~3차례 작품들을 대여받아 전시회를 열고 있으며, 다른 지역의 문예회관들도 매년 정기적으로 대여 전시회를 열고 있다고 한다. 이런 반응에 힘입어 미술은행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작품들을 구입, 적어도 오는 2010년까지 6천점 정도의 작품들을 소장할 계획이며, 차후 미술은행을 운영하는 별도의 재단을 설립해 운영의 전문성을 꾀하려 하고 있다. 이러한 미술은행의 긍정적인 활동으로 몇몇 지방자치단체들도 미술은행 설립에 관심을 두고 있다. 지난해 인천문화재단이 미술은행 운영을 시작했고 광주광역시도 남도예술은행을 설립, 운영하고 있다. 이로써 미술은행은 출범 2년여의 짧은 기간에 공공기관, 시민, 작가들에게 좋은 평가와 반향을 얻으며 올바르게 정착해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불만의 목소리도 있다. 작품 컬렉션 방향에 지나치게 대중성을 강조하는 점이나, 투자한 예산과 작품 분량 등에 비해 작품의 수준이 결코 우수하지 못하다는 지적도 있다. 젊은 작가와 생활이 어려운 전업 작가를 배려하지 않는다는 불만도 제기된다. 추천위원이 추천한 작품들의 낮은 구입비율도 문제점이다. 대중성의 경우 대중의 미적 수준을 하향적으로 판단할 게 아니라, 오히려 수준 높은 동 시대의 작품으로 대중의 안목과 미감을 선도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양질의 컬렉션을 위한 구입방법의 다양화와 보완 등도 필요하다. 현재의 작품 구입방식은 추천제, 공모제, 현장구입방식 등으로 이뤄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추천위원의 인맥에 의존한 한정된 추천작가의 범위, 홍보 부족으로 인한 광범위한 작가층의 공모율 저조, 대중성이 두드러지는 미술시장의 현장구입제 등의 틈새에서 수준 높고 미술사적 가치가 있는 작품들이 다수 소외받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 구입제도를 일부 참고해 볼 만하며, 추천위원의 복수추천을 통한 다수 추천자의 우대나 공공미술관의 학예연구사와 비평현장의 추천 등도 고려해 볼만하다. 무엇보다도 미술은행은 국립현대미술관과 더불어 장래 한국미술의 위상을 가늠하는 국가적 수준의 컬렉션을 해야 하고, 수준 높은 작품으로 국민들의 문화향수권을 향상시키는 게 중요한 역할이기 때문이다. 이 종 구 중앙대 교수·화가

‘중앙’-‘지방’과 문화지수

흔히 지방에서 ‘중앙’이라고 하면 ‘서울과 수도권 지역’을 아울러 표현하는 말이다. 그중에서 ‘수도권’은 냉정히 보면 ‘경기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중앙이라고 하면 ‘서울과 경기도’를 아우르는 말이다. 이 중앙과 지방의 이분법적 구분 속에서 ‘중앙’은 항상 상대적 상위 개념의 상징성을 띠고 있고, ‘지방’이라고 하면 모든 면에서 열악하고, 취약한 사회경제성의 대명사로 불린다. 그러나 경기도는 “우리가 왜 서울의 변방처럼 간주되는 수도권이냐”고 항변할 수도 있다. 서울과 당당하게 경기도지, 싸잡아 수도권이라고 해서 마치 서울에 예속된 지역으로 불려지는 것을 못마땅해서 일 것이다. 수도권은 지방에서 보는 관점에서는 규모의 경제가 형성돼 호사스럽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나름대로 단점도 갖고 있는 지역이기도하다. 또한 먼 시각으로 보면 수도권은 지나친 인구집중으로 환경의 쾌적함과 함께 성장의 여력이 적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역설적으로 보면 지방은 경제 외적인 잠재력이 있을 수 있다. 감성과 이미지의 미래 사회 시작 많은 미래학자들은 인류의 역사가 농경시대-산업시대-지식정보시대를 거쳐 다시 과거로의 회귀성을 보이게 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덴마크 미래학연구소의 롤프 옌센 소장은 이미 시작되고 있는 미래의 사회를 감성과 이미지의 ‘드림 소사이어티’로 부르고 있다. 물질문명과 첨단 기술의 발달에 식상한 사람들은 옛날의 감성과 꿈을 찾게 된다고 한다. 지금 우리가 ‘옛 적의 음식(Retroproducts)’들을 웰빙식으로 찾게 되는 것은 건강적인 측면도 있지만 그 저변에는 기 소르망도 얘기하듯이 당시의 문화와 필링(Feeling)과 감성의 맛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선은 산업화의 기반 구축이 절실한 것이 지방의 현실이다. 수도권은 이 점에서는 앞서 있을지 모르지만 지역 인구구조의 다양성 때문에 단일 문화정신(Geist)이 미흡한 점이 있다. 그래서 경기도는 본래의 문화적 뿌리였던 ‘기전문화(畿甸文化)’운동을 펼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요즘 글로벌시대를 맞아 다문화 환경이 되면서 ‘문화지수(CQ:Cultural Intelligence)’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이는 미국과 같이 다양한 인종이 모인 국가의 문화적 융합을 중시하는 데에서 비롯된 개념이지만, 이제 우리 사회도 외국인들의 유입이 많아지고, 다양한 지역의 문화적 환경과 배경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교류하고 소통하는 여건에도 적용되는 가치이다. 문화지수가 높다는 것은 개방성과 평등성을 바탕으로 한 지역사회 공동체의식이 안정돼 있다는 의미다. 지역의 연고주의는 문화지수와는 상반된 가치이다. 지역사회의 현대적 ‘新문화’ 필요 한편, 지방은 수도권으로 인구유출이 심하다보니 상대적으로 문화적 단일성이 유지될 수 있어 수도권처럼 문화 정체성의 혼돈과 같은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역이 발전하려면 다양한 환경 요소들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본래의 문화를 기틀로 현대의 ‘신문화’를 창출해 내야한다. 사회문화체계 측면에서 수도권은 지방보다 더 CQ를 높이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사회 개방이 급속한 환경에서는 어디서나 묵시적으로, 또는 명시적으로 지역 주민들의 의식 속에서 폐쇄적 연고주의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국가·지역·영역 간에 경계가 무너지는 글로벌시대에 CQ가 중시되는 이 때, 아직도 ‘○○출신’을 강조하는 의식부터 혁신하는 문화운동이 필요하다. 이 인 권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대표

‘중앙’-‘지방’과 문화지수

흔히 지방에서 ‘중앙’이라고 하면 ‘서울과 수도권 지역’을 아울러 표현하는 말이다. 그중에서 ‘수도권’은 냉정히 보면 ‘경기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중앙이라고 하면 ‘서울과 경기도’를 아우르는 말이다. 이 중앙과 지방의 이분법적 구분 속에서 ‘중앙’은 항상 상대적 상위 개념의 상징성을 띠고 있고, ‘지방’이라고 하면 모든 면에서 열악하고, 취약한 사회경제성의 대명사로 불린다. 그러나 경기도는 “우리가 왜 서울의 변방처럼 간주되는 수도권이냐”고 항변할 수도 있다. 서울과 당당하게 경기도지, 싸잡아 수도권이라고 해서 마치 서울에 예속된 지역으로 불려지는 것을 못마땅해서 일 것이다. 수도권은 지방에서 보는 관점에서는 규모의 경제가 형성돼 호사스럽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나름대로 단점도 갖고 있는 지역이기도하다. 또한 먼 시각으로 보면 수도권은 지나친 인구집중으로 환경의 쾌적함과 함께 성장의 여력이 적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역설적으로 보면 지방은 경제 외적인 잠재력이 있을 수 있다. 감성과 이미지의 미래 사회 시작 많은 미래학자들은 인류의 역사가 농경시대-산업시대-지식정보시대를 거쳐 다시 과거로의 회귀성을 보이게 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덴마크 미래학연구소의 롤프 옌센 소장은 이미 시작되고 있는 미래의 사회를 감성과 이미지의 ‘드림 소사이어티’로 부르고 있다. 물질문명과 첨단 기술의 발달에 식상한 사람들은 옛날의 감성과 꿈을 찾게 된다고 한다. 지금 우리가 ‘옛 적의 음식(Retroproducts)’들을 웰빙식으로 찾게 되는 것은 건강적인 측면도 있지만 그 저변에는 기 소르망도 얘기하듯이 당시의 문화와 필링(Feeling)과 감성의 맛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선은 산업화의 기반 구축이 절실한 것이 지방의 현실이다. 수도권은 이 점에서는 앞서 있을지 모르지만 지역 인구구조의 다양성 때문에 단일 문화정신(Geist)이 미흡한 점이 있다. 그래서 경기도는 본래의 문화적 뿌리였던 ‘기전문화(畿甸文化)’운동을 펼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요즘 글로벌시대를 맞아 다문화 환경이 되면서 ‘문화지수(CQ:Cultural Intelligence)’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이는 미국과 같이 다양한 인종이 모인 국가의 문화적 융합을 중시하는 데에서 비롯된 개념이지만, 이제 우리 사회도 외국인들의 유입이 많아지고, 다양한 지역의 문화적 환경과 배경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교류하고 소통하는 여건에도 적용되는 가치이다. 문화지수가 높다는 것은 개방성과 평등성을 바탕으로 한 지역사회 공동체의식이 안정돼 있다는 의미다. 지역의 연고주의는 문화지수와는 상반된 가치이다. 지역사회의 현대적 ‘新문화’ 필요 한편, 지방은 수도권으로 인구유출이 심하다보니 상대적으로 문화적 단일성이 유지될 수 있어 수도권처럼 문화 정체성의 혼돈과 같은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역이 발전하려면 다양한 환경 요소들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본래의 문화를 기틀로 현대의 ‘신문화’를 창출해 내야한다. 사회문화체계 측면에서 수도권은 지방보다 더 CQ를 높이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사회 개방이 급속한 환경에서는 어디서나 묵시적으로, 또는 명시적으로 지역 주민들의 의식 속에서 폐쇄적 연고주의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국가·지역·영역 간에 경계가 무너지는 글로벌시대에 CQ가 중시되는 이 때, 아직도 ‘○○출신’을 강조하는 의식부터 혁신하는 문화운동이 필요하다. 이 인 권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대표

파리의 하늘 밑, 그들이 사는 법

프랑스 대통령도 들뜬다는 여름 바캉스가 시작된 파리. 바겐세일도 끝물인 8월 초의 파리는 역들마다 바캉스를 떠나는 무리로 북적댄다. 리용 대학원에서 법학을 전공하는 조카 ‘레아’가 아이슬란드로 바캉스를 떠나기 전에 파리 필자의 집에 며칠 묵으러 왔다. 레아는 짐을 풀자마자 첫날은 파리 북동부에 있는 빌레트 과학관을 찾았고, 그 다음날은 퐁피두 국립 현대미술관으로 갔다. 레아의 관심사는 전공 이외에 현대 미술과 시네마, 과학 등 폭이 넓다. 필자의 집에는 그 흔한 TV가 없어도 우리 부부나 손님들이 불편한 적은 없다. “왜 집에 TV가 없느냐”고 묻는 사람조차도 없었다. 필자 부부는 알프스와 이탈리아로 바캉스를 떠나기 전에 오르세 미술관의 반 고흐 특별전을 감상한 후 모처럼 콘서트에 가기로 했다. 파리 12구에 있는 벵센느 공원의 꽃동산에서 느긋하게 산책을 즐기고 토요일 오후 4시부터 1시간 20분 동안 펼쳐지는 공원 야외 클래식 콘서트 장소로 향했다. 쇼팽의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와 드뷔시 곡의 연주를 듣기 위해 관객 1천여명이 이미 몰려 있었다. 태양 아래, 꽃 향기 그윽한 공원에서 시원한 여름 바람을 타고 쇼팽의 곡을 듣는다는 것은 진정 행복한 일이었다. 국제적 명성의 첼리스트 앙리와 피아니스트 브르짓뜨는 4번의 커튼 콜을 받았고 관객들은 열광했다. 또한 호수 주변의 잔디 위에는 피크닉을 나온 가족들의 무리로 가득했다. 그들의 자리에는 샴페인과 와인, 치즈, 장봉, 샐러드, 바게트 등이 풍성했고 누워서 선탠을 즐기거나 곤한 낮잠을 자고 책을 읽고 있는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없어 보였다. 이와 같이 프랑스 휴가문화는 문화생활이 특별한 행사가 아니라 생활 속에 깊이 파고 든 삶의 한 부분이며 라이프 스타일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어느 공연이든지 남녀노소가 같이 즐긴다는 점이 인상적이며 미술관, 연극, 콘서트 등에 가 보면 노년 인구가 관객들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놀라곤 한다. 70대 후반인 필자의 시어머니도 예외가 아니다. 필자보다도 한발 앞서 한국 영화를 감상하고 전시에 다녀오셔서 40대 중반의 며느리 기를 죽이 실 때가 종종 있다. 어디 그뿐인가? 신간 소설을 두루 보시고 여러모로 부족한 며느리에게 선물까지 하신다. 프랑스의 휴가는 여러 장소를 찾아가는 깃발여행이 아니라, 대부분 한 장소를 선택해 자연 속에서 장기간 머물고 책을 읽으며 심신을 충분히 쉬게 하는 여행이다. 경우에 따라서 휴가를 집에서 보내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다수가 프랑스 내 다른 지역이나 외국으로 나가는 경우들이 많다. 보통 한달이 넘는 여름휴가에서 집에 돌아오면 어김없이 우편함에서 지인들이 휴가 장소에서 써 보낸 엽서를 발견하게 된다. 대개 다섯 줄 정도의 짧은 글이지만 엽서를 받는 순간, 많은 정감이 순식간에 오가게 된다. 그 내용은 대개 여행지 미술관이나 해변가 풍경, 이국적인 낯 설음 등이 간단히 묘사돼 있다. 지난 6일, 여름비 내리는 아침에 필자는 현재 스위스 취리히에 머물고 있는 콜랙터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콜랙터는 70대 후반으로 남불의 큰 성에서 10년째 살고 있으나 2년 전부터 건강에 적신호가 생겨 스위스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녀는 이제 남불의 성을 팔고 취리히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하고자 했다. 즉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의미에서 그 동안 소장했던 필자 부부의 작품들을 프랑스 미술관에 기부하는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전화를 한 것이다. 필자는 콜랙터의 신중한 배려와 고귀한 정신에 진심으로 존경을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파리의 하늘밑이 특별한 이유는 이러한 정신이 생활처럼 숨쉬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노 경 화 멀티미디어 작가

셋째 형님

어린 시절 형제가 많은 집이 부러웠다. 6·25 전쟁으로 월남하신 아버지는 나를 얻으시곤 자식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고 한다. 북한에 아들이 다섯 명이나 있기 때문이다. 친구나 주변 사람들을 보면 형제·자매가 흥부네 박처럼 몽글몽글하여 부러울 때가 많다. 결혼 할 때 남편의 형제가 6남매라 사람 사는 집 같아 정말 좋았다. 당연히 행사도 많아 힘들기도 했지만 앞장 서서 두 팔 걷어 붙인 바로 위 셋째 형님만 졸졸 따라다녔다. 명절에는 사촌만 모여도 수십 명이다. 여섯 명의 형제들이 각자 짝을 찾아 2세들이 생기다보니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큰댁에서 차례 모시는 날은 현관 앞까지 늘어 서 있다. 조카들이 장성하여 가정을 이뤄 어엿한 가장이 되고 아기엄마가 되었다. 유치원, 초등학생 아이들이 모두 서른 살이 훌쩍 넘어 버렸으니 요술방망이의 마술 같은 느낌도 든다. 내 눈엔 아직 어린 모습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말이다. 어제는 셋째 형님을 만났다. 조실부모한 남편에겐 어머니 같은 존재다. 형님도 그 당시 고만고만한 조카들이 세 명이었는데 막내인 남편의 교육과 결혼까지 책임져 주셨다. 사실 그때는 형님이니까 당연히 그런가보다 생각했는데 나도 가정을 이루고 살다보니 그리 쉬운 일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첫 딸을 낳았을 때도 아주버님은 병실 앞에서 제수씨라 어려워 들어오시지도 못하고 필요한 것 없냐고 물으셨다. 꼭 내 아이를 얻은 들뜬 목소리를 지금도 기억한다. 곗돈을 무리하게 들어 의료보험이 안 되는 병원비를 염치없이 형님신세를 져야했다. 친정어머니도 편찮으셔서 바로 오시질 못하였다. 병실로 옮겨진 나는 출산 후 하혈로 패드의 질퍽함을 참고 있는데 선뜻 형님이 해결해주셨다. 더 이상 못 견딜 한계인지라 부끄러움은 뒤로하고 형님 손에 의해 산뜻해 질 수 있었다. 쉽지 않은 일을 미리 알고 처리해주시던 형님이 두고두고 고맙다. 심약하여 병원에 입원을 하였을 때에도 형님신세를 졌다. 그 당시 조카들이 중·고등학생이었는데 남편을 편히 자라고 떠밀어 집으로 보내고 병실 보조침대에서 함께 밤을 새워주셨다. 지금은 학교마다 급식을 하지만 그 시절은 도시락을 준비해 가야 했는데 어찌 세 명의 조카들이 아침을 챙겨먹고 갔는지 지금 생각하니 물어보지도 못했다. 힘내서 얼른 일어나라고 곰국과 찰밥을 찬합에 들고 오신 것도 당연하게 받았다. 나 살기 급급한 마음뿐이었는데 이렇게 지내다보니 무려 25년이 흘렀다. 지난 주가 형님의 결혼기념일인지라 전화를 드렸는데 그리 좋아하실 수가 없다. 함께 밥이나 먹자고 한 것이 바로 어제인 것이다. 고우시던 형님도 이젠 외손자를 둔 할머니가 되었고 나도 지천명의 중년이다. 모든 것이 서투른 새 색시로 만나 엇비슷한 초로의 여인들이 마주하고 있었다. 짧지 않은 긴 세월 모든 집안 대소사를 함께 한 형님 얼굴에 내 모습도 보였다. 한솥밥을 먹으며 산전수전 다 겪은 두 여인이 가슴을 내 보인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표현 하지 않아도 거울 같은 편안한 회상의 시간이었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들이 서로의 가슴에 촉촉이 젖어들어 순간 ‘언니’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남편으로 인해 엮어진 가족이란 둘레 속 인연에 형님을 만난 것이 행운이다. 선천적으로 고운 성격과 지혜를 겸비한 형님이시다. 작은 체구에 야무진 형님은 겹겹이 포개져 있는 장미꽃처럼 여일하다. 절대 꺾이지 않는 갈대의 강함도 소유하고 있다. 함께 개봉작 영화도 보고 작은 선물을 드렸다. 형님의 헌신적인 마음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일 뿐인데 감동해 하신다. 지는 태양이 아름답다고 느낄 즈음 그때서야 가족들 저녁준비가 생각난 우린 현실에 무사 귀환했다. ‘에구, 내 팔자야~’서로 가시 없는 한담을 나누며 서둘러 차에 오르는 형님과 다음을 약속했다. 인간의 뒷모습은 외로워 보인다고 했던가. 액셀러레이터 밟는 소리와 함께 자동차 바퀴가 굴러가는 모습이 내 시야에서 멀어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반문화적인 문화재 관람료

국립공원으로 입장하는 등산객들에게 강제적이고 일방적으로 문화재 관람료를 징수하는 것은 현행 문화재보호법 제44조 위반이다. 이 법은 “문화재를 보유한 측이 공개를 원하는 사람에게 공개하되, 관람료를 징수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징수된 문화재 관람료의 53%는 개별 사찰운영비, 12%는 조계종 종단운영비, 5%는 승가대학 운영비, 겨우 나머지 30%만 문화재 보수 관리를 위해 적립할 뿐이다. 징수된 관람료는 문화재의 관리와 보수비 등에 사용돼야 하고 민간사찰의 운영비로 사용할 수 없다. 조계종 산하 사찰들은 주변의 땅들이 자신들의 소유라고 하는데 어떤 근거로 조계종의 소유라고 하는가에 대해 진지한 역사·시대적 고찰이 필요하다. 오늘날의 조계종은 언제부터 막대한 토지를 보유하게 됐는가? 일제강점기와 천태종과 태고종과의 관계를 다시 짚어보고 환수해야 할 것이 있으면 국가로 환수해야 할 것이다. 또 사찰 주변의 토지가 사찰측의 소유라며 임대해 주고 있는 것에 대해 정확한 부동산임대업에 기초해 세금을 납부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국세청은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사찰측의 토지에서 여러가지 임대업을 하고 있는 서민들은 세금도 납부하지 않는 사찰의 무리한 토지 사용료 인상으로 인해 허리가 휘고 있는 실정이다. 조계종측은 사찰 주변의 자연과 환경 등이 등산객으로부터 훼손되는 것을 통제해야 한다고 하는데 국립공원 환경훼손의 가장 큰 원인은 등산객들이 아니라 사찰의 무분별한 중창불사이다. 물론 등산 문화도 개선돼야 할 점들이 분명히 있다. 특히 해인사는 주변 암자의 무분별하고 마치 거대한 산성 같은 규모의 중창불사로 가야산 국립공원을 훼손하고 있다. 가야산에는 해인사 소속 암자 22곳이 곳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자연을 훼손하고 있는데, 어마어마한 규모의 암자만 해도 6곳(백련암 원당암 홍제암 용탑암 길상암 희랑대)이나 된다. 해인사의 주장처럼 등산객들에 의해 가야산이 훼손된다고 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는 부당한 문화재 관람료 강제 징수의 본질을 흐리게 하는 행위일 뿐이며 전국의 국립공원이나 도·군립 공원의 산들에는 사찰들의 무원칙한 중창불사로 인해 자연과 환경 등이 망가지는 심각한 자연훼손이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문화재의 유지 보수는 모두 국민들의 혈세인 국고로부터 한해 1천억원을 지원받는다. 사찰측이 어떤 예산으로 문화재를 지키고 가꾸었나 묻고 싶다. 심지어 문화재와 관련 없는 선방을 짓거나 일주문을 짓는데도 국민들의 혈세가 지원된다. 또한 전통사찰보존법에 의해 운영비가 한해 90억원이 넘게 지원되는데 도대체 무엇이 모자란다고 하는가. 길을 막고 통행세 수입을 올리는데 인력을 투입했을 뿐이다. 사찰문화재에 대한 복원, 중건, 보수, 관리 등은 모두 국민들의 혈세인 국가예산이 투입된다. 그러나 사찰문화재 복원의 1등 공신인 국민들은 또다시 문화재 관람료를 상납해야만 사찰문화재를 관람할 수 있고, 사찰문화재를 보지 않고 입장해도 문화재 관람료라는 미명 아래 큰 액수를 강탈당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불국사의 경우, 지난 1970년대 국민들의 혈세로 복원됐으며 불국사와 석굴암 등은 하나의 문화재권역임에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싼 8천원(불국사 4천원 석굴암 4천원 별도 징수)을 받고 있다. 불국사 경내에는 골프 연습장이 만들어지기도 했다가 문화연대로부터 지적받고 철거했던 일이 있기도 했다. 해결점은 간단하다. 제자리에서 받고 사용처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미흡한 법률은 개정하면 된다. 부처님의 민중에 대한 대자 대비한 공덕을 사리사욕에 급급한 일부 정치 승려에 의해 깎아내리고 있는 오늘날 조계종의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국민들에게 사랑받는 불교가 되기 바란다. 황 평 우 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장

남편의 외박

그동안 살아오면서 아! 하면, 어! 하고 받아 줄 친구가 있었는가? 마음을 헤아려 줄 동생이 있었는가? 어려운 인생 숙제를 풀어 줄 오라버니 같은 사람이 있었는가? 오늘 어! 하는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병원 소개를 받고 싶어서였다. 강원도에서 남편과 오붓하게 회를 먹는다고 하였다. 나는 심통섞인 말로 “아이구야 정말 좋겠구나!’ 형부는 어제도 외박하고 들어와 속이 상해 죽겠는데…. 어젯 밤에 이 언니는 밤새 앓았다. 혼자서… 아마 어제 밤에 언니가 아파서 죽었다면, 형부는 웃으면서 새 장가 가겠지?” 라고 했다. 그랬더니 동생은 “언니는 인생에 대해서는 나보다 단수가 한 수 아래야, 난 그런 일에 벌써 졸업했는데 언니는 아직까지도야?” 한다. 그리고는 “ 언~니~ 요즈음 남편들은 함께 살아온 날이 있어 한 사흘은 마음 아파 하다가 새 장가 간데” 하였다. 나는 한 바탕 웃었다. 그 뒷말이 가슴을 따뜻하게 하였다. 동생은 “내일 언니 모시고 병원 갈 테니 준비하라”고 했다. 친 동생은 아니지만 오가는 정을 흠뻑 느끼게 하는 소중한 그녀였다. 남편은 ‘고스톱’을 좋아해서 신혼 초부터 외박을 밥 먹듯이 하였다. 삶에는 교과서가 있다고 믿었다. 나는 견디기가 참으로 힘들었다. 그 외박을 이해하기까진 시간의 강산이 한 두 번 변한 후였다. 이해 한다기 보다 가슴에서 수 없는 천둥 번개가 치고 난 후 포기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서로 살아온 환경이 다를수록 부부가 상대를 포기한다는 것은 피를 말리는 고통을 겪은 후라고 생각한다. 젊은 시절 내가 집 밖을 나간다는 것은 용납이 되지 않았다. 어쩌다 학교 동아리모임으로 해가 서산에 기우는 것을 모르고 있으면, 벌써 어머니는 나를 찾아 오셨다. 고2 때 친구들과 해수욕장에 놀러 갔다가 막차를 놓친 적이 있었다. 택시를 타고 동구 앞 정류장에 내렸다. 그 자리에 어머니께서 성난 호랑이 모습으로 서 계셨다. 그 후 동아리 모임도 할 수 없을 뿐 더러, 학생들은 밤에 나가면 안 되는 줄 알았다. 어른이 빨리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그래서 하였다. 집에 있는 시간은 대부분을 나는 책을 읽으며 보냈다. 어른들 몰래 이불 속에서 만화책도 읽었다. 결혼하면 정말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만 알았다. 부부는 누구나 낭만적인 비둘기처럼 살아가는 줄만 알았다. 결혼은 운명이나 행복에 대한 책임은 서로의 공동 책임인줄만 알았다. 특히 남편은 아내를 지극히 사랑해 줘야하고 지켜 주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남편은 나를 지켜주기 보다는 깊은 밤 무서움에 떨게 하였다. 부부는 경제적인 문제부터 하찮은 생활 문제까지 절대 헛된 행동을 해서는 안 되는 줄 알았다. 그 소설 같은 생각, 그 꿈 같은 생각은 남편의 외박으로 산산이 깨어지기 시작하였다. 외박하고 들어와 설친 잠을 자는 남편을 보면서 요즈음은 얄미운 생각보다 불쌍하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은 왜일까? 정말 전생에 남편한테 무슨 죄를 많이 지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 마음 때문에 그를 위해 인내하며 살아가는 희생정신이 나오는 것은 아닐까. 그동안 부모유산도 없이 맨 주먹으로 한 가정을 일으켜 세운 남편이다. 그 추운 겨울날씨에 125㏄ 오토바이 한대에 온갖 물건을 사다 나르기도 했다. 돈 한 푼 없는 시련을 당하면서도 이 만큼 농장을 만든 노고 때문에 나는 외박도 너그럽게 봐 주며 살고 있다. 남편한테 맛있는 사랑을 많이 먹고 체할 것이 아니라, 그이에게 사랑을 아낌없이 퍼 주는 삶을 사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기도 한다.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니라는 것을 느낀다. 생각과 행동이 따로 움직인다. 몇 년 전의 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 시절엔 왜 그렇게 마음을 끓이며 아파하고 살았을까. 이제는 모든 일들을 승화시키며 내 자신의 무게를 가볍게 만들 자신이 있는데…. 외박까지 하며 남편이 즐겼던 고스톱은 그 사람의 놀이문화이며 그것을 즐기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던 외박으로 분노의 눈물을 한없이 흘렸던 그 시절이 있었기에 지금 나는 내 마음의 주인 노릇을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금강산과 겸재 정선

지난 달 금강산을 다녀왔다. 그동안 외금강 코스에 한정됐던 금강산 탐방이 지난 6월부터 내금강 코스가 추가로 개방되면서 필자는 내친 김에 금강산을 찾았다. 금강산은 말 할 것도 없이 우리나라 최고의 명산이자 천하명승이라는 유명세를 가지고 있지만, 필자는 오래 전부터 조선시대 화가 겸재 정선의 그림 배경이라는 점에 관심이 컸다. 겸재는 금강산 그림을 많이 남겼다. 36세에 처음 금강산을 탐방한 이래 금강산화첩, 해악전신첩, 신묘년풍악도첩, 금강전도 등을 그렸다. 조선시대 금강산으로 들어가는 길이 철원 김화를 거쳐 단발령을 넘어 내금강으로 갔으므로 겸재는 단발령 고개에서 바라본 금강산을 필두로 장안사, 표훈사, 정양사, 만폭동, 보덕암, 비로봉으로 이어지는 내금강을 특히 많이 그렸다. 겸재 정선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중국의 관념산수화가 조선을 지배하던 시절, 겸재는 조선의 눈으로 조선의 풍경을 바라보고, 조선의 사상을 담아 성리학에 기초한 그림을 그렸다. 이른바 진경산수화이고 실경산수화이다. 겸재의 진경산수화가 출현하면서 한국회화사는 일대 변혁과 신기원을 이루게 된다. 중국의 문화 종속이 아닌 자생적인 민족의 예술을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겸재는 84세 까지 장수하면서 서울과 한강 주변을 비롯해 영남의 명승, 단양, 관동팔경, 개성의 박연폭포까지 전국의 절경명소를 거의 다 그림으로 섭렵했다. 그 중 겸재 그림의 백미는 금강산 연작이다. 특히 ‘금강전도’는 겸재 자신뿐만 아니라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이자 한국미술사에 빛나는 명작으로 꼽힌다. 내금강 풍경을 그린 ‘금강전도’는 흡사 헬기를 타고 내금강 전체를 조망한 후 그린 듯 내금강 전체의 모습을 한 화면에 담아냈다. 수많은 봉우리와 골짜기, 사찰들이 세세하게 묘사가 되었음은 물론, 그림 하단의 장안사에서 상단의 비로봉까지 원형의 태극문양 속에 넣어 왼쪽에는 숲이 우거진 토산을, 오른쪽에는 서릿발 같은 암산을 대비해 음양사상까지 표현했다. 현장의 리얼리티를 바탕으로 대상의 절묘한 함축과 종합, 그리고 철학적 세계관을 동시에 표현한 수준 높은 회화의 경지를 이룬 것이다. 필자가 ‘금강전도’를 염두에 두고 장안사터에서 비로봉의 중간인 묘길상까지 답사를 하면서 느낀 점은 계곡이든 봉우리에서든 전체가 조망되지 않는 실제의 지형에서 내금강 전체가 한 눈에 보이도록 화면을 구성한 그의 상상력이 놀라웠고, 더욱이 사진기가 없던 시절 골짜기와 봉우리의 특징을 모조리 스케치를 통해 살려낸 그의 필력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래서 18세기 겸재의 ‘해악전신첩’에 발문을 쓴 박덕재라는 이는 겸재를 가리켜 화성(畵聖)이라 지칭했고, 오늘날에도 겸재 회화 연구에 최고로 꼽히는 간송미술관 최완수 선생도 겸재를 화성이라 칭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내금강에는 겸재의 그림 소재가 되었던 절경과 함께 과거 문인 묵객들이 남긴 수많은 현장미술들도 남아 있었다. 그 중에서도 봉래 양사언이 만폭동 너럭바위에 휘둘러 쓴 글씨 ‘蓬萊楓嶽 元化洞天’은 굉음을 내며 쏟아지는 물소리와 어울려 살아있는 듯 했고, 명산대찰을 찾아다니며 수많은 글씨를 남긴 해강 김규진이 향로봉 경사면에 거침없이 써내려간 ‘法起菩薩 天下奇絶’도 금강산의 품격과 풍치를 더하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필자는 이번 금강산 답사를 하는 동안 내내 겸재를 떠올리고 그의 예술정신을 생각했다. 오늘날 서구문화와 수입된 외래 양식의 무분별한 사조가 대세인 시대에 겸재는 무엇인가, 중화사상과 사대추종이 일반이던 시절 겸재는 어떻게 조선의 독자적인 양식을 세워 당대를 평정 했는가 등등. 겸재가 진경산수화를 이룬 지 200여년이 지난 지금, 세월이 지날수록 더욱이 세계화에 이를수록 겸재의 예술과 정신은 더욱 빛나고 소중하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필자는 우거진 풀밭과 엉겅퀴 꽃이 흐드러진 장안사 터를 빠져나왔다. 이 종 구 중앙대 예술대 교수·화가

성장 마인드세트

지금 모든 지역마다 앞으로 50~100년을 내다보는 신성장동력을 창출하기 위해 모든 역량을 쏟아 붓고 있다. 하루가 바뀌는 글로벌 환경 속에서 주어진 현실에 안주하고 있다가는 국제사회에서, 작게는 지역간 생존 경쟁에서 낙오할 수밖에 없다는 절박함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지역마다 이 엄연한 현실을 직시하고 전방위에 걸쳐 차세대에 활력을 불어넣어 줄 미래 신수종(新樹種)사업의 발굴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미래 성장 전략사업의 개발은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미래에 전개될 사회문화 흐름을 예측하여 안정적으로 지속가능한 프로젝트라야 한다. 여기에 모든 당사자들과 정책가들이 힘과 지혜를 모으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미래를 준비함에 있어 중요한 것은 어떻게 우리의 마음 자세를 갖느냐 하는 것이다. 이제는 지금까지가 ‘마인드’적인 미래의 소망이었다면 앞으로는 미래의 목표가 확실한 ‘마인드세트’의 자세를 구축하고 있어야 한다. 축구경기에서 승리하려면 골결정력의 기초가 되는 세트 플레이 전술이 핵심이 되듯이 지금은 지역 발전의 골문을 열어 제치기 위한 세트 플레이가 필요한 것이다. 요즘 ‘마인드세트(mindset)’ 개념이 부각되고 있다. 마인드세트는 90%를 차지하는 잠재의식 속에 내재된 능력을 발현시켜 소기의 성공을 달성하는 정신자세로 경영에서도 키워드가 되고 있다. 마인드세트는 국가나, 사회나, 조직이나, 가정을 막론하고 그 구성원들뿐만 아니라 그 집단을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에게 더욱 필수적인 자질이다. 그래서 리더십은 바로 마인드세트의 결정체라고 할 수도 있다. 올바른 마인드세트가 갖추어져 있으면 당연히 그 조직은 온전하게 균형을 이루어 발전할 수 있으며 승리를 거머쥘 수 있다. 그래서 수많은 도전에 직면해야하며 그 속에서 기회를 포착해야 하는 현대사회를 사는 우리 모두는 스스로가 마인드세트를 정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미국 스탠포드대 심리학과의 카롤 덱 교수는 모든 사람은 두 가지의 마인드세트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하나는 항상 변화하며 발전해 나갈 수 있다는 긍정적인 자세의 ‘성장 마인드세트(the growth mindset)’와, 또 하나는 주어진 환경에 안주하여 변화보다는 현상을 유지하려고 하는 ‘고정 마인드세트(the fixed mindset)’이다. 덱 교수는 이러한 마인드세트는 ‘간단한 것이 아니라 비즈니스뿐만 아니라 운동과 사랑에 이르기까지 인간 삶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했다. 특정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모두 마인드세트를 가졌다. 우리가 막연히 소망하는 것과 구체적인 목표를 갖는 것은 다르다. 마인드세트를 갖는 사람은 막연하게 떠오르는 생각을 곧바로 실천하는 게 아니라 창의적인 사고를 통해 다각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며 정교하고 체계적인 패턴화를 거쳐 행동에 옮기게 된다. 그렇다면 국가나 조직의 경영에서 리더나 구성원들이 어떤 마인드세트를 가져야 하는지는 말할 필요가 없다. 지금 우리 사회의 혁신 바람은 다름 아닌 지금까지 뿌리 깊게 박혀있었던 고정 마인드세트에서 과감하게 탈피하여 새로운 동력의 성장 마인드세트로 궤도를 바꾸자는 의식개혁을 요구하는 것이다. 지금 지역마다 각자의 목표아래 분명 성장 마인드세트로 체질을 바꾸어가는 과정에 있다.

물레방아 인생

인생은 돌고 돈다. 마치 물레방아가 돌아가듯 말이다. 새 생명이 태어나고 태어난 생명은 언젠가는 자연으로 돌아간다. 해가 지면 달이 뜨고 달이 지면 해가 뜬다.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이 어김 없이 돌아온다. 꽃이 피고 나면 지고 지고 나면 다시 핀다. 새 순이 돋고 나면 낙엽이 지고 낙엽이 지고 나면 새 순이 돋는다. 갠 날이 있는가 하면 궂은 날도 있고 비가 내리는 날이 있는가 하면 눈이 내리는 날도 있다. 꽃다운 이팔청춘도 10년을 넘기기 힘들다. 헌 청춘이 지나가면 새 청춘이 들어선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다. 독재가 아닌 이상 권세가 10년 넘기기 힘들다. 만나면 헤어지고 헤어지면 또 만난다. 영원한 만남도, 영원한 헤어짐도 없다. 이를 생각하면 있을 때 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헤어지고 나서 후회한다. 살아가며 싸우기도 하고 화해하기도 한다. 서로의 감정과 의견 등이 다르고 자존심과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이다. 가급적이면 싸우지 말아야 한다. 싸움에서 지고 싶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정녕 싸워야 할 일이라면 감정을 자제하고 폭력이 아닌 대화와 타협 등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 실수하고 반성하며 반성하고 실수하기도 한다. 실수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했다. 그러나 자꾸 반복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되면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인생이 된다. 아팠다가 낫기도 하고 낫다가 아프기도 하다. 건강은 제일의 재산이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한다. 잃고 나면 지키기 힘들다. 특히 술과 담배는 멀리해야 한다. 적절하게 마셔야 하고 끊어야 한다. 그러나 좀처럼 잘 지켜지질 않는다.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다. 있을 때 아껴 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복구하기 힘들다. 살아가다 보면 기쁜 일도 있고 슬픈 일도 있으며 즐거운 일도 있고 괴로운 일도 있다. 마냥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을 수 없는 게 인생사인가 보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뿐이다. 미워도 한 세상, 좋아도 한 세상이다. 잘 났건, 못 났건 어울리며 사는 게 인생이다. 같은 값이면 좋은 한 세상이 백번 낫다. 좋은 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부단하게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여러가지 크고 작은 추억 속에서 이 세상을 살아간다. 오늘의 삶은 훗날 아름다운 추억이 되고, 그 추억들은 오래오래 간직된다. 오늘의 삶이 고달프고 괴로워도 훗날에 가면 아름다운 추억으로 떠오른다. 아름다운 추억이 다 지나가면 또 다른 아름다운 추억이 돌아온다. 어차피 인생은 미완성이다. 그리고 미지수이다. 단 완성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허덕일뿐이다. 오늘 어떻고 내일 어떨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기에 살아가는 재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모든 일들이 예측된다면 살아가는 재미는 별로 없을 것이다. 이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누구나가 부족한 데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기에 서로 의지하는 가운데 도와가며 살아야 한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다. 내 인생을 그 누가 감싸주거나 보살펴 주지 않는다. 내 인생을 철저히 보호하고 관리하며 살아야 한다. 어차피 주어진 인생을 충실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인생의 마디마디를 알토란같이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 인생은 모두가 소중하다. 태어난 그 자체만으로도 소중한 것이다. 소중한 인생이 덧없이 흘러가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한다. 지금도 물레방아 인생은 계속 돌아가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돌아갈 것이다. 참 아름다운 물레방아 인생이다. 권 혁 범 시인

이유있는 예술 ‘노마드’

지난달, 인사동 한 갤러리에서 20대 후반인 필자의 제자 개인전이 있었다. 석사학위 청구논문 전시여서 오프닝의 관객들은 미대 교수들과 미대 학생들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이때 참석한 프랑스 대사관의 기술담당관 부부가 필자에게 한마디 쓴 소리를 했다. 적지 않은 개인전 비용을 학생이 모두 감당한다는 사실이 이해하기 힘든 일이라고 했다. 그리고 작품이 단 한점도 팔리지 않은 것을 보고 새내기 작가를 걱정해주기까지 했다. 전시가 끝나고 제자는 “작품에 관심 있어 하는 관객들이 작품 가격을 묻고는 한결같이 ‘비싸다’고 했다”고 말했다. 참고로 제자가 부른 작품비는 액자와 물감 비용 정도 받는 것이다. 지난주에는 전업작가인 후배를 만났는데 “자신의 그림을 사겠다는 사람은 없어도 공짜로 달라는 사람은 아주 많다”며 자조적인 소리를 했다. 또 다른 한 작가의 부인은 별로 비싸지도 않은 남편의 작품비를 상식 이하로 깎으려는 사람에게 “작품 사지 마시고 그냥 감상만 하세요”라며 정중히 거절했다고 한다. 프랑스의 ‘국립 에꼴 데 보자르(국립고등미술학교)’와 미술대학의 1년 동안 학비는 30만원 선이며 보자르는 우리나라 석사과정 2년차에 작품 재료비로 학생 1인당 26만원 정도 지원해준다. 졸업을 위한 개인전은 보통 대학 내 갤러리에서 무료로 열며 오프닝 비용이나 엽서 비용 등도 마찬가지다. 학생이나 작가들이 자신들이 거주하고 있는 도시나 공공기관 등이 운영하는 갤러리나 미술관 등지에서 개인전을 열게 될 경우에도 전시 1~2년 전 포트폴리오를 제출해 심사에 통과하면 무료로 전시하게 된다. 전시 장소가 다른 도시일 경우 숙소까지 제공받는다. 물론 대관하는 갤러리들도 존재하지만 일반적으로 현지 작가들이나 학생들은 이용하지 않는다. 미대 교수들은 학생들의 작품이 좋으면 직접 작품을 구입하기도 하고 사회에 나가 학생들이 노련한 갤러리스트들을 상대하는 방법에 대해 실질적인 교육을 시킨다. 작가가 화상들에게 끌려 다니는 일을 사전에 방지하는 교육인 셈이다. 작품을 구입하는 콜랙터들은 대부분 작품비를 깎지 않고 지불하는 환경에 익숙하다. 콜랙터들은 작품이 좋아 사는 것이지, 그 작품으로 돈을 벌기 위해, 즉 투자 목적으로 사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에서 모든 세금은 19.8%가 기본이다. 그러나 식품, 책, 그림 값 등 이 세가지 세금은 5.5%로 철저하게 보호받고 있다. 작가가 실업상태면 실업수당으로 월 70만~80만원 정도 최소 생계비용을 지급받을 수 있다. 프랑스 미협에 소속된 작가들은 일반인들 보다 싼 3분의 1 가격에 주거 겸 작업실을 마련할 수 있다. 지역에 따라 차이가 많지만 협회에 신청하고 1~2년 기다리면 임대가 가능하다. 필자가 유럽에서 각국의 예술가들을 만났을 때 그들은 비디오 아티스트의 대부인 백남준을 독일인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들의 대부분은 백남준이 한국에서 태어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백남준은 독일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의식 저변에는 백남준이 작가로 성장하게 된 배경 뒤에는 모국인 한국이 아니라 독일이 있기 때문이라는 의식이 깔려 있다. 현재 국제무대에서 유일하게 통하는 한국작가 이우환(71)은 한국 태생이지만 일본과 파리를 오가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필자가 만난 유럽 작가들은 이우환을 일본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필자는 그들이 한국에 남아 작업했더라도 세계미술사에 족적을 남겼을까에 대해선 의문이다. 물론 모두가 고국을 등지고 예술환경이 좋은 타국에 나갈 필요는 없다. 그러나 개인의 이유 있는, 예술 노마드의 배경에서 척박한 한국의 예술환경을 읽는다는 것은 진정 안타까운 일이다. 노 경 화 멀티미디어 작가

이유있는 예술 ‘노마드’

지난달, 인사동 한 갤러리에서 20대 후반인 필자의 제자 개인전이 있었다. 석사학위 청구논문 전시여서 오프닝의 관객들은 미대 교수들과 미대 학생들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이때 참석한 프랑스 대사관의 기술담당관 부부가 필자에게 한마디 쓴 소리를 했다. 적지 않은 개인전 비용을 학생이 모두 감당한다는 사실이 이해하기 힘든 일이라고 했다. 그리고 작품이 단 한점도 팔리지 않은 것을 보고 새내기 작가를 걱정해주기까지 했다. 전시가 끝나고 제자는 “작품에 관심 있어 하는 관객들이 작품 가격을 묻고는 한결같이 ‘비싸다’고 했다”고 말했다. 참고로 제자가 부른 작품비는 액자와 물감 비용 정도 받는 것이다. 지난주에는 전업작가인 후배를 만났는데 “자신의 그림을 사겠다는 사람은 없어도 공짜로 달라는 사람은 아주 많다”며 자조적인 소리를 했다. 또 다른 한 작가의 부인은 별로 비싸지도 않은 남편의 작품비를 상식 이하로 깎으려는 사람에게 “작품 사지 마시고 그냥 감상만 하세요”라며 정중히 거절했다고 한다. 프랑스의 ‘국립 에꼴 데 보자르(국립고등미술학교)’와 미술대학의 1년 동안 학비는 30만원 선이며 보자르는 우리나라 석사과정 2년차에 작품 재료비로 학생 1인당 26만원 정도 지원해준다. 졸업을 위한 개인전은 보통 대학 내 갤러리에서 무료로 열며 오프닝 비용이나 엽서 비용 등도 마찬가지다. 학생이나 작가들이 자신들이 거주하고 있는 도시나 공공기관 등이 운영하는 갤러리나 미술관 등지에서 개인전을 열게 될 경우에도 전시 1~2년 전 포트폴리오를 제출해 심사에 통과하면 무료로 전시하게 된다. 전시 장소가 다른 도시일 경우 숙소까지 제공받는다. 물론 대관하는 갤러리들도 존재하지만 일반적으로 현지 작가들이나 학생들은 이용하지 않는다. 미대 교수들은 학생들의 작품이 좋으면 직접 작품을 구입하기도 하고 사회에 나가 학생들이 노련한 갤러리스트들을 상대하는 방법에 대해 실질적인 교육을 시킨다. 작가가 화상들에게 끌려 다니는 일을 사전에 방지하는 교육인 셈이다. 작품을 구입하는 콜랙터들은 대부분 작품비를 깎지 않고 지불하는 환경에 익숙하다. 콜랙터들은 작품이 좋아 사는 것이지, 그 작품으로 돈을 벌기 위해, 즉 투자 목적으로 사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에서 모든 세금은 19.8%가 기본이다. 그러나 식품, 책, 그림 값 등 이 세가지 세금은 5.5%로 철저하게 보호받고 있다. 작가가 실업상태면 실업수당으로 월 70만~80만원 정도 최소 생계비용을 지급받을 수 있다. 프랑스 미협에 소속된 작가들은 일반인들 보다 싼 3분의 1 가격에 주거 겸 작업실을 마련할 수 있다. 지역에 따라 차이가 많지만 협회에 신청하고 1~2년 기다리면 임대가 가능하다. 필자가 유럽에서 각국의 예술가들을 만났을 때 그들은 비디오 아티스트의 대부인 백남준을 독일인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들의 대부분은 백남준이 한국에서 태어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백남준은 독일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의식 저변에는 백남준이 작가로 성장하게 된 배경 뒤에는 모국인 한국이 아니라 독일이 있기 때문이라는 의식이 깔려 있다. 현재 국제무대에서 유일하게 통하는 한국작가 이우환(71)은 한국 태생이지만 일본과 파리를 오가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필자가 만난 유럽 작가들은 이우환을 일본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필자는 그들이 한국에 남아 작업했더라도 세계미술사에 족적을 남겼을까에 대해선 의문이다. 물론 모두가 고국을 등지고 예술환경이 좋은 타국에 나갈 필요는 없다. 그러나 개인의 이유 있는, 예술 노마드의 배경에서 척박한 한국의 예술환경을 읽는다는 것은 진정 안타까운 일이다.

경기도의 기관평가에 ‘문화’는 있는가

무엇에 대해 평가한다는 것은 심한 고통을 요구한다. 필자는 각종 언론매체의 요청과 기관심사, 정책평가 등에 자주 동원된다. 그때마다 비판적인 평가를 해야 할 때 결코 쉽게 말할 수 없다. 보이는 현상에 대해 단순한 판단을 하는 정량적 판단보다는 원인과 과정 결과 등에 대한 다양하고도 정성적인 판단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정부 기관이나 경기도를 비롯한 자치단체들도 기업들에게서 배운 ‘평가제도’를 도입해 기관이나 정책에 대한 평가를 하고 있다. 특히 김문수 지사의 경기도는 여러 부분에서 기관평가를 진행하고 있다. 평가 이후에 기관의 통·폐합이 거론되며 벌써부터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는 형국이며 이 과정에서 경기도박물관장은 임기를 마치기 전에 사표를 내기도 했다. 물론 평가는 냉정하게 진행돼야한다. 그러나 현행 우리나라의 평가항목이나 평가방법 등이 과연 신뢰할 수 있는 수준인가에 대해서는 매우 회의적이다. 예를 들어 박물관이나 미술관 등을 건설하는 비용을 도로와 공장 등을 지어 거둬 들이는 이익과 비교하는 단순평가라면 차라리 하지 않는 편이 낫다. 또 문화기관 평가에 있어 예년보다 관람객들이 대폭 증가했다는 양적 팽창만을 근거로 그 기관이 무조건 우수한 것으로 평가받아야 하는가이다. 대체로 우리 사회의 평가 항목을 보면 최대만족, 만족, 보통, 불만족, 극히 불만족 등의 5단계로 구성됐으며 관람객들의 다양한 요구와 만족도 등을 감성적으로 분석하지 못하는 한계를 갖고 있다. 이같은 정량적 평가 항목으로 문화기관을 평가한다는 것은 키가 크면 멋있고 작으면 볼품없다는 저급한 논리와 다를 바 없다. 또한 행정 기관의 정책이나 박물관, 미술관, 문화기관 등의 정책이나 사업 등이 이윤추구의 목적만을 가치 판단의 척도로 삼는 기업들의 평가 항목이나 방법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은 사람의 감성이나 다양성을 무시한, 마치 인간을 생산기계로 여기는 것과 다름이 아니며 과연 문화정책이나 문화행위들을 문화산업으로만 바라보며 이익을 남기고 경쟁에서 살아남아 이기는 것을 강요받아야 하는가이다. 행정기관의 정책과 문화기관의 사업의 시행은 공익과 공공성 등을 우선으로 해야 한다. 못하면 잘라버려야 하는 살벌한 게 아니다. 어려운 곳에 더 관심을 가져야하고 즐거워야 할 곳에 더 예산과 조직을 투입해야하며 못하는 곳은 미래에 대한 관점으로 더욱 잘 할 수 있게 만드는 게 공공기관이 수행해야할 일들이다. 그렇다고 방만하게 운영하는 기관들을 그대로 두자는 건 아니다. 문제는 문화기관들의 사업들을 방만하다고 바라보는 기업식 관료주의자들의 시각이다.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는 비문화적 평가방식에서 탈피한 사람냄새가 나고 문화적 감수성과 미래를 내다보는 장기적인 감성이 있는 ‘평가지표’나 ‘평가방법’ 등을 개발해 낼 수는 없는 것인가이다. 오히려 경기도가 먼저 이러한 감성평가지수를 개발하는데 앞장서보는 게 어떨까한다. 아울러 평가의 주체와 객체에는 시민(도민)들이 주인이어야 하는데 시민들은 도구가 아닌 목표가 돼야함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김문수 지사는 일을 많이 한다고 한다. 김 지사는 하는 일의 양을 기준으로 판단하려는 조급증보다는 잘 노는 사람이 일을 잘 할 수 있다는 감성이 있었으면 한다. 벌써부터 ‘노 문수’, 또는 ‘김 주사’라고 놀리는 우스갯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평가변화에 따른 예술교육의 위기

잘 알다시피 오늘날 우리나라 중등학교는 전인교육이란 말이 무색하게 입시중심의 교육에 매진하고 있다. 따라서 입시에서 중요시 되는 국어·영어·수학 등은 중심교과로 운영되며 이와 달리 예체능교과는 기타과목으로 인식되고 있는 형편이다. 필자는 과거 오랫동안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미술’을 가르친 경험이 있다. ‘미술’은 다행히 보충수업과 문제집에 치중하는 국·영·수 과목에 비해 다소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수업이 가능한 교과이다. 그래서 비록 기타 과목으로 인식되고 있을망정 아이들에게는 즐겁고 재미있는 수업이 되도록 나름대로 애썼다. 갓 입학한 아이들에게는 자신의 존재를 표현하는 자화상을 그리게 했고, 좋아하는 시를 그림으로 그리거나 퍼포먼스, 설치미술, 영화 만들기 등으로 수업을 했다. 그러다 보니 미술시간은 늘 시끄럽고 부산했다. 그들끼리의 소통과 협업과 자율성이 나름대로 보장됐기 때문이다. 그러한 수업을 하면서 필자는 궁극적으로 미술교과의 평가제도란 사실 불필요한 것이라 여겼다. 미술교육은 상상력의 발현과 체험의 과정이 중요한 것이지 규격화한 평가의 대상이 돼선 곤란하다는 생각이었다. 평가로 인해 아이들은 그 기준에 맞춘 형식과 내용, 완성도를 의식하게 되고 예술교육의 생명이라 할 자율성과 상상력의 학습이 오히려 경직되고 제한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과 판단을 공론화하거나 개선을 요구한 적은 없다. 왜냐하면 이상적인 교과운영에 앞서 오늘날 절대적인 입시중심의 교육현실은 내신을 위한 평가가 전제되지 않을 때 파행적인 운영의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교육부는 얼마 전 중·고교 음악·미술·체육 평가 기록방식을 바꾸는 ‘체육·예술 교육 내실화 방안’을 확정 발표했다. 2009학년부터 시행될 새 방안은 현재 중학교의 수·우·미·양·가 5단계 절대등급과 전교 석차, 고등학교의 9단계 상대등급의 평가를 폐지하고 우수·보통·미흡의 3단계 절대등급으로 평가를 하겠다는 것이다. 평가방식 전환의 이유로는 예체능 교과 특성상 학생들의 실력을 점수로 측정해 서열화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 학습부담의 감소, 내신 평가로 인한 사교육비 과다지출 등을 꼽고 있다. 그러나 현장의 교사들은 평가방식을 바꾼다는 것은 곧 예체능을 내신에서 제외하겠다는 것이고 이는 교과 붕괴를 뜻하며, 지금도 예체능 수업을 제대로 하기 힘든 상황인데 평가방법까지 바뀌면 수업 파행은 불가피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나아가 개선안이 강행되면 국·영·수 편중으로 공교육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한다. 시민문화단체들도 이에 동의한다. 문화연대는 이번 변경안이 예체능 교육의 몰락을 초래하고 문화교육의 쇠퇴의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한다. 필자의 경험으로 볼 때 교사들의 주장이 옳다. 우리나라 교육이 입시중심에서 변화하지 않는 한 새로운 평가 변경안은 오히려 예술교육의 파행과 퇴행을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 전인교육은 고사하고 당장 입시와 내신에 포함되지 않는 과목을 학교와 학생이 새삼 중요시 여길 리가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동안 우리의 학교현장이 보여준 태도로 미루어 볼 때 미술시간을 영어수업으로 대체하고, 음악수업을 윤리교사가 ‘때우며’ 아예 수업에 참여하지 않고 잠이나 자는 학생이 더 늘어날 수도 있으리라는 예측도 하지 않을 수 없다. 또 파행의 주체가 결코 학교장이나 교사, 학생이 아니라는 점도 쉽게 생각할 수 있다. 원인은 단 하나. 현재의 절대적인 입시중심교육의 우상과 망령 앞에서 어떠한 개선책이나 자율성도 모두 무력한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교육부의 안이 강행된다면 예체능 교과운영의 파행과 예술교육의 저하는 지금보다 더 심각해 질 것으로 판단된다.

공직사회 ‘혁신’의 의미

지난 주 전남 광양시가 마련한 공무원 혁신교육에서 특강을 할 기회가 있었다. 제철소를 지역 산업기반의 중심에 두고 있는 지방자치단체로서 주민의 평균소득이 2만달러가 넘는 지역에서의 관심은 단기적으로는 공직자들의 문화마인드를 갖추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이런 특강은 전체 공무원들의 월례조회를 이용하여 지역 현안과 사회의 이슈들에 대해 지역 공무원노조가 주도적으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처럼 각 지방자치단체를 포함하여 공공 분야에서 ‘혁신’이라는 말이 키워드가 되고 있다. 민간 부문에서는 굳이 혁신을 말하지 않고도 조직의 수익창출을 목표로 하다보면 항상 긴장하고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혁신 프로그램이 실천되고 있어 왔다. 이제는 글로벌 경쟁시대를 맞아 기업은 ‘일류’가 아니라 ‘초일류’를 목표로 두고 경영하지 않고는 안 되는 ‘초경쟁(hypercompetition) 환경’이 되었다. 원래 문화란 대표적인 인류학자 타일러가 정의한대로 호모 사피엔스로서 ‘인간이 행하는 총체적인 활동의 결정체’라고 한다면 그 문화가 21세기에 들어서며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디지털 신기술 발달과 이로 인한 인간 의식구조의 변화는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패러다임의 변환을 가져오고 있다. 이 상상을 초월하는 문화의 발전 속에서 과거의 사고습관과 생활양식을 갖고는 경쟁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면서 이제 공공 영역에서 그 문화의 흐름에 동승하기 위해서 혁신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이다. 달리 말해, 경쟁을 통해 최후의 승부를 가리게 되는 민간기업의 효과적인 경영성과 창의성을 공직사회에 도입하자는 것이다. 부단하게 자기 쇄신과 도전정신을 바탕으로 한 체질로 단련되어 있는 민간의 경쟁기반과 협력과 상생의 톱니바퀴가 되어야 하는 공공조직이 대등한 경쟁 위상을 확보하려고 하면 과거에 안주할 수가 없다. 제너럴 일렉트릭(GE)의 잭 웰치 회장이 초일류기업 목표의 경쟁력강화를 위해 주창했던 혁신이 바로 효율성 체계, 형식파괴, 학습조직 도입을 근간으로 하는 워크아웃(workout) 프로그램이었다. 그는 거대공룡같이 침체된 조직의 생산성을 배가하기 위해 각 요소요소에 만연되어 있는 관료주의를 척결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일선의 생산직 직원에서부터 고위직 간부에 이르기까지 ‘현장에서 공부하고 체험하며 얻은 아이디어와 착상을 기업 활동에 적용하게 하는 대장정’에 나서도록 한 것이다. 조직의 경영은 두 가지 목표가 있다. 과거로부터 연속되는 업무의 유지와 이를 한 단계 발전시켜나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여기에서 행정은 시스템의 현상유지에 다름 아니며, 혁신은 미래의 새로운 일을 창출해 내는 것이다. 그래서 공직사회 ‘행정’이라는 말도 전근대적인 의미가 되어버려 이제는 ‘거버넌스’가 새로운 개념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제 21세기에 하루가 다르게 변화 발전하는 문화의 현상 속에 현실에 안주하게 된다면 미래가 보장될 수 없게 된다. 혁신을 해야 하는 당위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는 비단 한 조직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도 문화의 변화 트렌드를 체감하지 못하고 자기 발전과 자기 계발의 노력을 쏟지 않으면 경쟁력을 갖출 수가 없다. 한 마디로, 지금 우리사회를 휩쓸고 있는 혁신은 다름 아닌 시대의 사회문화 흐름을 따라잡아 거기에 순응하여 미래를 준비하자는, 과거로부터의 과감한 자세와 행동의 전환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인 권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대표

생활이 예술이 된다는 것

이탈리아 중부, 로마의 북서부에 위치한 ‘피렌체’는 불어로 플로랑스(Florence)라 불리는 꽃의 도시이자 르네상스의 발상지로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브오날리티, 마키아벨리 등 불멸의 예술가들을 탄생시킨 예술의 메카다. 그 당시 베네치아인들의 명성은 화가로서 끝났지만 피렌체인들은 화가뿐만 아니라 조각가, 건축가, 시인이나 과학자 등으로서 그 영역을 확장시킨 천재들이었다. 이들은 메디치 가문의 후원으로 예술창작·연구·저작활동을 펼쳤다. 피렌체 르네상스의 주역은 그 시대의 문화 CEO 조반니 메디치(Giovan ni de Medici:1360~1429)를 중심으로 시작된다. 그는 피렌체에서 소규모 모직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르네상스 최대의 금융제국, 메디치 가문을 일궈낸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가 일군 상업자본은 정치권력으로 이어졌고 말년에 문화예술 지원과 자선사업 등에 매달렸다. 이 가문은 15세기부터 18세기 중반까지 300여년 동안 유럽의 정치와 경제를 지배하면서 뛰어난 문화적 식견으로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다. 이 가문의 최고 군주, 로랜조 데 메디치는 ‘위대한자 로렌조’로 불릴만큼 메세나(예술·문화에 대한 후원)에 정열을 기울여 피렌체를 르네상스 예술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즉 메디치가를 중심으로 부호와 귀족, 로마 교황의 보호 하에 문화가 크게 발전했는데 이것이 바로 르네상스다. 도보로 2시간 안에 둘러볼 수 있는 작은 피렌체에 두오모 성당을 비롯한 성당만해도 12채가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흔적, 미켈란젤로의 조각, 조토와 마사초, 라파엘로의 그림들…. 명성에 비해 작고 검소한 메디치궁에는 당대 최고의 지성들이 함께 모여 예술과 철학, 그리고 문학을 논했다. 이 모임은 철학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신 플라톤주의의 모태가 되기도 했다 미켈란젤로도 소년시절부터 이곳에 살았고 갈릴레리 갈릴레오도 후원받았다. 피렌체대학은 메디치 가문의 후원 아래 요한 아르기로포울로스, 테오도루스 가차, 데메트리우스, 칼콘딜라스 등의 학자들을 교수로 채용했는데 이중에서 칼콘딜라스는 데메트리우스, 크레텐시스와 함께 피렌체에서 최초로 호메로스의 인쇄본을 발행했다. 1488년에는 옥스퍼드에서 최초의 그리스어 교수가 되는 윌리엄 그로킨이 대학으로 왔고 1489년에는 윌리엄 래티머가 그로킨과 리너커를 도와 아리스토텔레스를 라틴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했다. 교황만 3명을 배출한 메디치가의 자손이 끊어졌을 때 피렌체는 자선과 기부를 기억하며 비탄에 잠겼다고 한다. 생활이 예술이 된 가문의 힘을 역사는 기억하는 것이다. 자기관리의 핵심은 삶의 가치관, 즉 철학이다. 인생에서 중요한 게 무엇인지, 그 신념은 사고 및 일상생활의 모든 결정과 선택에 초석이 되는 내면의 힘이다. 메디치 가문의 생활철학이자, 생존 방식이며 정치의 수단인 메세나는 오늘날 문화마케팅의 원류라고 할 수 있다. 코펜하겐 미래학 연구소장인 롤프 얀센(Rolf Jensen)은 “정보사회 다음은 꿈의 사회이며 이미 시작됐다. 꿈의 사회에선 상품을 사고 파는 게 아니라 상품에 든 꿈을 사고 팔게 된다. 꿈은 이야기이고 문화이다”라고 했다. 유러피안 드림의 저자인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은 “산업생산시대가 오고 있다. 앞으로 각광을 받을 사업들은 전처럼 상품과 서비스를 파는 사업이 아니라 다양하고 광범위한 문화적 체험을 파는 상품이 될 것”이라고 한다. 충실한 철학이 담긴 진지한 문화만이 신뢰와 존경,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노 경 화 멀티미디어 작가

문화와 환경은 규제가 아니다

지난 정부는 규제개혁철폐라는 명분을 내세워 그린벨트를 풀어 버렸다. 그러나 그린벨트를 풀면서 당연히 야기될 문제인 개발욕구에 대한 대책이 없었던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또한 정부와 개발업자들은 문화재행정과 환경부 행정을 ‘규제행정’ 이라 칭하며 ‘규제개혁철폐’를 이행하라고 압박이 대단했었다. 결국 정부 기관 중 환경부와 문화재청은 ‘문제아 부서’가 되고 있었다. 심지어 문화마인드가 높다는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는 덕은리 고인돌을 지칭하며 문화재 때문에 경제가 죽고 있다는 망언을 했으며, 중앙 정부 다음으로 큰 규모의 지자체인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청계천 매장문화재를 보고 “돌덩어리 가지고 웬 난리냐” 라는 식의 망언을 했었다. 지난달 15일 대한상공회의소는 기업들이 공장을 짓기 위한 ‘입지선정’에서 ‘설립승인’까지 적용규제수가 ‘35개’이며 수도권의 경우 4개가 더 추가된다고 하면서 공장설립 시 각종 영향평가제도 등 관련부처와 협의가 필요한 부분에서 명확한 기준이 없다보니 담당자의 주관에 따라 시간이 달라지며, 사전환경성 검토 인허가 기일이 ‘30일’로 규정되어 있지만 거듭된 보완요청으로 몇 개월씩 걸리는 경우도 있다고 강변했다. 심지어 역사문화유적의 기본 조사인 ‘문화재 지표조사’를 불필요한 제도가 기업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등의 주장을 했는데 이는 대한상공회의소의 몰역사성·몰문화성·반환경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문화재와 환경에 대한 정책과 행정은 ‘규제’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보험성 정책’이다. 문화재보존과 환경보전 행정이 어떻게 규제라는 용어로 해석되는가? 더욱 답답한 것은 다른 기관이나 사람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문화재청과 문화재관련 종사자들까지 규제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학계와 문화재청은 최근 문제가 되는 문화재보호구역내 재산상 피해를 보고 있는 주민에 대한 보상대책에 힘을 모아야하는데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예산(돈)으로 해결하려한다. 물론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직접화폐(현금)를 지원하는 방식이지만 국가예산규모로는 한계가 있으며 반드시 현금보상이 최선의 방법은 아니다. 국가 정책은 긴 호흡으로 이루어져야한다. 즉 간접화폐 지원 방식인 제도나 법률을 개선해서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발굴 후 문화재보호구역으로 결정되거나 문화재주변의 개발제한, 천연기념물 보호구역내에 있으면서 경제적인 피해를 보는 주민들에 대한 제도적 지원을 강구해 보아야한다. 즉 문화재보호구역, 천연기념물보호구역 및 기타 국가가 정하는 개발제한구역이나 보존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가칭)국가유공자’에 준하는 혜택(간접화폐)을 주자는 것이다. 미래의 국가유공자는 전쟁이나 스포츠에서 승리자가 아니다. 한 국가의 문화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불이익과 고통을 받는 사람들도 엄청나게 훌륭한 국가유공자이다. 이러한 ‘문화보존 국가유공자’에게 일반 국가유공자와 마찬가지로 자녀학자금면제, 차량구입 시 특소세할인, 항공료, 철도 등 교통비 면제, 주민세, 재산세 면제 등 직접 직접화폐(현금)지원보다 문화재구역에 살면서 고통 받는 것을 자긍심으로 전환해 주는 간접화폐(법률적 제도)지원 제도를 만들어야한다. 그리해서 오히려 고통을 받아도 문화재보호구역내로 이주를 하겠다는 사람이 늘어나는 즐거운 고민을 하는 정책을 만들어보는 것이 어떨까한다. 중앙 정부나 국회, 문화재청, 학계는 지금부터라도 반목과 내분을 떨쳐내고, 합리적인 대안을 마련할 때이다. 간접화폐 지원제도를 만드는 것에 대해 막연하게 어렵다고 할 것이 아니라 발상의 전환을 통해서 상생의 기틀을 마련해보아야 할 것이다. /황 평 우 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장

6월항쟁과 걸개그림의 기억

신록이 짙어가는 유월이다. 올해는 유난히 지난날 유월의 기억을 더듬는 일들이 많아졌다. 유월항쟁 20주년을 맞았기 때문이다. 시사잡지마다 유월항쟁을 회고하고 평가하는 특집과 글이 실려 있는가 하면, 이를 기념하는 시민축제도 여럿 준비되고 있다. 필자도 젊은 시절 많은 시간을 거리에서 보냈던 80년대 유월의 기억은 새롭다. 그중에서도 거리와 여러 집회장소에서 만났던 수많은 걸개그림의 기억은 각별하다. 걸개그림이란 1980년대 초부터 시작된 민중미술의 한 형태로서 80년대 민주화운동·노동운동의 열기와 함께 확산되기 시작한 현장미술이다. 주로 시위현장이나 대중 집회에서 메시지 전달을 위해 그려졌으며, 대형의 그림을 단기간 내에 완성해야 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작품의 완성도보다는 거칠고 투박한 형식적 특징을 갖고 있다. 걸개그림은 80년대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탄생한 세계미술 사조에 유례없는 독특한 형식의 미술로 평가된다. 당시 80년대 군사독재시대는 진보적인 미술가들은 물론 정의를 생각하던 젊은 작가들이라면 현실의 문제에 깊이 고민할 수밖에 없었으며, 미술을 전공하는 대학생들도 학교 실기실을 비워두고 거리로 나가 싸웠다. 그들은 거리에서 오늘날 공공미술의 시초라 할 벽화와, 유인물·포스터 제작을 위한 목판화와, 깃발과 집회용 걸개그림을 제작하며 시민들을 선동했고 사회변혁을 꾀했다. 김봉준, 최민화, 홍성담, 유연복, 김환영, 홍성민, 전승일, 최병수 등의 개인은 물론 두렁, 광주시각매체연구소, 엉컹퀴, 활화산, 낙동강, 겨레미술연구소, 가는패, 갯꽃, 둥지, 민미협창작단, 홍익대창작단 등의 미술가조직은 노동자투쟁, 농민운동, 민족통일 등을 주제로 걸개그림을 생산하며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그들 중에서도 걸개그림의 대표작가로는 최병수를 꼽는다. 그가 그린 ‘노동해방도’나 ‘장산곶매’ 등도 높은 수준의 작품이지만 그중에서도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그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80년대 수많은 걸개그림 가운데 단연 압권으로 평가된다. 1987년 6월 10일, 한 일간신문에 보도된 연세대생 이한열씨가 최루탄을 직접 머리에 맞고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사진을 보고 분노한 최병수는 이를 모티브로 학생들과 며칠 밤을 새워 높이10m 폭7.5m의 대형그림을 완성해 연세대 학생회관 외벽에 걸었다. 이 그림은 곧 학생들의 저항과 투쟁에 기름을 붓는 역할을 했고, 시민들의 항쟁 또한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다. 며칠 후 전두환 정권은 6·29선언으로 국민에게 항복을 했고 한국현대사에 빛나는 민주화의 역사적 전기를 맞는다. 일찍이 세계의 미술사에서 그림이 세상을 바꾸는 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예는 드물다. 탐미주의와 부끄러운 친일미술을 기록한 한국현대미술사는 더욱 그렇다. 이제 뜨거운 아스팔트의 광장에서 민주화의 열망을 담아 분위기를 압도하며 펄럭이던 걸개그림의 시대 유월항쟁도 어느덧 이십년이 흘렀다. 두 번의 강산이 변하는 동안에 우리의 이념과 사회와 삶의 방식도 크게 변화했다. 정의와 양심과 아름다운 세상을 향해 그림 그리던 당시 젊은 작가들이 중년이 된 지금, 그들의 세대를 대체한 오늘의 젊은 작가들은 과연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그리고 있을까? 행여 미술시장이 활성화되었다고 그에 대한 관심과 진출만을 꿈꾸거나 세계화의 물결 속에 국적불명의 양식에 빠져 허둥대고 있지는 않을까 염려도 해본다. 이념보다는 자본이, 양심보다는 소비가 미덕이 되어 인간을 끈질기게 유혹하고 있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이 종 구 중앙대 예술대 교수·화가

오피니언 연재

지난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