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예술의 도시 파리인가?

노 경 화 멀티미디어 작가
기자페이지

예술의 도시 파리의 공기 안에는 위대한 예술가를 탄생시키는 마력이 있다. 그리스, 로마도 있건만 왜 파리가 예술의 대명사가 됐을까? 스페인 태생의 피카소, 러시아 태생의 샤갈, 네덜란드 태생의 빈센트 반고흐와 몬드리안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위대한 예술가들이 자신들의 모국보다 파리의 이름을 빛내줬다. 또한 오늘날까지 전세계 예술가들이 끊임없이 예술의 둥지 파리를 찾아들고 있다.

그들은 왜 뉴욕도 아닌 파리를 선택하는가? 필자가 예술가로서 환상없이 파리를 선택한 이유는 간단하다. 정치·경제·사회 위에 성숙한 예술문화가 있는 나라가 프랑스이기 때문이다.

파리는 서울의 6분의 1 크기밖에 되지 않는 작은 도시다. 인구 또한 250만여명에 불과하다. 우리나라의 경기도라고 할 수 있는 일드프랑스(파리 반경 100㎞ 지역)에는 1천100만여명이 살고 있다. 이곳에는 베르사이유궁전을 비롯, 퐁텐블로와 같은 옛 고성들과 사르트르 대성당 등이 운치를 더하고 있다.

15~16세기 르네상스시대 이후 브르봉왕조의 베르사이유궁전은 루이 14세(1638~1715년)부터 루이 16세까지, 즉 프랑스 대혁명까지 절대왕권시대의 극치를 볼 수 있는 귀족 문화예술의 상징이자 중심이기도 했다.

태양왕 루이 14세의 절대왕권시대에는 귀족을 통제할 목적으로 귀족들이 베르사이유궁전을 중심으로 한곳에 모여 살았다. 궁전에는 동시에 3천여명의 식사를 준비했다는 식당도 있다. 강력한 절대왕권에 의해 귀족계급의 인테리들이 한곳에 모여 탐닉한 건 다름아닌 축제·연극·문화·예술이었다고 한다. 즉 오늘날 예술의 나라 프랑스의 확고한 기반이 베르사이유궁전을 중심으로 시작된 것이다.

19세기 중반 프랑스 제2제정시대에 오스만(1809~1891)은 1853년부터 17년동안 파리지사를 지내며 파리를 근대화시킨 인물이다.

당시 파리는 인구 급증으로 규모가 확대됐고 계속되는 폭동으로 인해 치안을 유지할 목적으로 대대적 재건축이 필요했다. 오스만은 시내를 관통하는 현재의 큰 도로 체계와 건축물, 시내도로망과 상·하수도 등을 정비했고 시테를 행정과 성당 중심지로 만들었으며 불로뉴숲과 뱅센느 공원, 파리 오페라하우스 등 파리 시내가 온통 그의 도시계획에 의해 재정비됐다. 현재와 같은 파리는 오스만에 의해 변모한 젊은 도시인 셈이다.

예술에 죽고 예술에 사는 나라. 두사람만 모이면 예술과 철학에 대해 깊이 있게 이야기하는 나라. 70대 할머니들이 단장하고 미술관 앞에서 친구들과 함께 작품을 감상하는 곳.

인구 250만명인 파리에서 흥행에 성공한 전시는 1년동안 100만명의 입장객들이 든다. 입구 나무바닥이 입장객 발길로 닳아져 늘 페인트칠을 하는 곳. 비가 내리나 눈이 오나 수백m를 줄을 서 전시를 관람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 이런 대규모 전시가 쉼없이 동시에 열리고 대통령이 직접 후원하는 전시를 하는 나라. 영화·연극·음악·건축·무용·패션·요리는 또 어떠한가?

레이몬드 윌리엄은 문화의 개념을 특정한 사회나 집단의 구성원들이 공유하고 있는 행동양식이나 사고방식으로서 영혼·라이프스타일, 예술적 활동 등 3가지 형태로 분류한바 있다. 문화평론가 기 소르망이 IMF의 원인을 분석하면서 “한국을 대표할만한 문화적 상품이 있는가? 경제 교류는 단순히 상품을 주고 받는 게 아니라 문화적 가치를 주고 받는 것”이라고 말했다. 세계 12번째 경제국가인 우리가 경제수준과 균형 등을 이루는 우리만의 예술문화·건축문화·간판문화·토론문화 등이 존재하는지 자문해보아야 한다.

/노 경 화 멀티미디어 작가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