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에게 ‘건축’이란 의미는 시대에 따라 변했다. 10대 시절에는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새마을 홍보에 대한 강제적 논리의 주입에 의해 건축이나 건설하면 무조건 좋은 것이고 심지어 80년대 대학에 가서도 잘사는 것의 기준은 높이만 올라가는 건축물이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세상을 바라본 20대 후반에 와서 정치와 경제, 그리고 건설간의 먹이사슬구조를 알게 됐다. 네모(건물)의 획일화된 틀에 강제된 의식의 구조를 깨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1980년 필자 생각의 전환점을 깊이 제시한 이영희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는 다양한 분야에서 논리적 전환이 가능하게 하는 책이다. 필자에게 주어진 사물이나 상황을 입어유법(入於有法)하고 출어무법(出於無法)의 자유로움을 준 지침서이다. 入於有法 出於無法은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학문을 하는 자세를 말하는 것으로 들어갈 때(입문)는 강직하고 기본부터 철저히 해야 하지만 나올 때(배우고 난 후)는 생각과 표출하는 방법이 자유롭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약 18년 전부터 우리 것이 좋아 거의 미친듯이 전국을 돌아다녔다. 무수한 건축물들을 보고 다녔다. 그러다 9년 전 신영훈 선생님을 만나 한옥을 배웠다. 6년 전부터 선생님으로부터 독립, 내 길을 가고 있다. 우리 한옥의 가치를 필자의 기준으로 말하자면 ‘술’이다. 술에도 종류가 많듯이 우리나라에 있는 한옥들의 구조가 같은 것은 근대시기에 집단으로 지어진 집장사 집을 빼곤 단 하나도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술을 즐긴다. 여러 술집들을 가보지만 술 마시기 편한 집이 따로 있다. 술 맛이 나지 않는 집이면 나와서 집 구조를 다시 살펴본다. 이런 집들은 어딘가 모르게 참으로 고약하게 지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답사를 하다보면 사람들은 건물의 외양만 보는 경우가 많다. 물론 못 들어가게 하는 집이 많아서 이지만 입품을 잘 팔면 마루바닥의 촉감을 느낄 수 있다. 외양만 보면서 “이것은 무슨 양식이고 이 집의 특징은 무엇이다”라고 잘도 말한다. 겉만 보고 논하니 그들에겐 入於有法 出於無法이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대체로 현대에 지어진 건축물들의 대부분은 入於有法 出於有法이다. 즉 느낌을 주는 건축이 없다는 것이다. 거주하는 사람이나 들어가는 사람에게 강제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자신의 틀에 가두어 놓기만 한다는 것이다.
김봉렬 선생은 “건축은 시대를 담는 그릇”이라고 했다. 옳은 말이다. 시대를 담은 그릇에 잘 익은 술을 마시고 싶다. 드높아서 아름다운 것은 건축물도 권력도 돈도 아닌 투명한 하늘과 사람의 마음이다. 드높은 건축물이 아름답기를 기대해보며 入於有法 出於無法의 자유를 주는 건축을 기대한다.
올해도 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그러나 사람살이의 도리나 세상사의 원칙을 지키지 않은 일은 반드시 탈이 났다. 그 이유는 入於有法의 이치를 실천하지 않아 오는 게 대부분이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에게 엄격하고 냉정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숨이 막히고 답답함을 불러일으키기 보다는 出於無法의 진리를 알게 할 것이다.
또 한해가 간다. 해가 바뀐다는 것은 숫자가 변화하는 것만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는, 또는 나는 과연 入於有法 出於有法했는가?
/황 평 우 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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