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동북아균형자론 성공하려면

최근에 정부가 발표한 동북아균형자론을 둘러싸고 실효성 여부와 미칠 파장에 대하여 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는 과정에서 100년 전에 조선이 처한 상황과 비교하려는 논의도 있다. 그런데 우리역사에서 동아시아의 중핵에서 조정역할을 해서 성공한 나라가 있었다. 고구려이다. 광개토대왕은 광개토라는 시호와 일반인들의 인식처럼 단순하게 영토를 넓힌 임금이 아니었다. 그가 정치한 시대는 21세기처럼 국제질서가 전면적으로 재편되고 있었다. 한족은 패배하여 남쪽에서 피란정권으로 연명하였고, 북쪽은 유목종족들이 각축하면서 나라를 세우는 5호 16국 시대였다. 고구려는 연나라와 요동지방 쟁탈전을 벌이고, 남쪽에서는 백제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대왕은 이러한 대분열과 열전의 국제질서를 이용하여 고구려가 신질서의 중핵에서 역학관계를 조정하는 역할을 국가의 발전표로 삼고 다양한 정책을 구사하였다. 남쪽으로는 백제의 수군을 동원하여 한성을 공격하고, 경기만을 점령하였으며, 보병과 기병을 파견하여 신라와 가야, 왜에 대하여 영향력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북으로는 연을 공격하여 요동을 완전하게 확보하였고, 연해주 일대도 영토로 편입시켰다. 아버지의 정책을 계승한 장수대왕은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에 백제의 서울을 점령하였고, 남진을 계속하였다. 그리하여 경기만에서 소백산맥 이남을 거쳐 삼척선에 이르는 한반도 중부 이북을 영토로 만들었고, 황해중부이북과 동해중부 이북의 해상권을 장악하였으며, 만주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확실하게 하였다. 명실공히 대륙과 해양을 장악한 해륙국가를 만들어 이른바 동아지중해(東亞地中海)의 중핵이 되었다. 장수대왕은 남북으로 분단된 중국(즉 북경정권, 상해정권)의 분열과 갈등을 이용하여 철저한 등거리 외교를 추진하고, 한편으로는 몽골유목국가인 유연과 남쪽의 송나라를 연결시켜 가운데의 북위를 압박하였다. 뿐 만 아니라 백제 신라 가야 왜 등 주변부가 외교를 통해서 국제질서의 중심으로 진입하려는 시도를 해상봉쇄로서 방해하였다. 즉 정치 외교적으로 동아시아의 중핵(core)에서 모든 나라들 간의 균형뿐 만 아니라 역학관계를 조정하는 역할을 하였다. 아울러 동아시아의 모든 육로와 바다길이 만나는 물류의 허브(hub)에서 중계무역 등 무역활동을 활발하게 벌였고, 또한 다양한 종족들과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이고 전파하는 문류(文流)의 인터체인지(IC)역할을 추진하면서 국제성과 정체성을 조화시킨 고유한 문화를 창조하였다. 광개토대왕과 장수대왕은 동아시아 질서가 변화하는 과정과 본질을 파악하는 통찰력을 지녔고, 전통적인 육지위주의 질서를 기본으로 삼고, 새롭게 성장하는 해양적인 질서를 수용하면서 복합적인 정책을 구사했다. 즉 군사력과 해양력을 토대로 정복활동을 펴면서 지정학적으로 중핵(core)위치를 확보한 후에 모든 나라들을 연결함으로써 거대한 網(net-work)을 단계적으로 구축했으며, 결국은 성공했다. 국가정책과 발전모델은 집단의 생명과 존속이 걸린 만큼 관념적인 이상이나 아이디어 수준으로 제안하거나 공명심에 취해 졸속하게 추진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상에서 유효성이 있고 검증된 모델들을 다양하게 만들어 놓고, 급변하는 상황에 따라 취사선택을 하면서 탄력적으로 적용해야 한다. 21세기에 들어서 국제질서가 전면적으로 재편되고 있다. 이 과정과 결과에 따라 앞으로 50년에서 100년간에 걸친 우리민족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다. /윤 명 철 한국해양문화연구소장

문화카페/아름답고 잔인한 봄

유난히 길고 지루했던 겨울이 지나고, 마침내 봄이다. 봄! 그 야무지고 앙증맞은 이름을 중얼거리면 입안에 새콤달콤한 침이 괴는 것 같다. 이런 봄날엔 아무래도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기가 힘들다. 당장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일상이 아무리 분주하다고 해도, 그럴수록 더욱 몸은 바깥으로 달려 나가고 싶어 들썽거린다. 때 아닌 폭설과 이상한파로 뒤늦게 온 봄인지라 꽃들은 순서 없이 그야말로 앞 다투어 피어난다. 목련, 산수유, 진달래, 개나리 그리고 조롱조롱 망울을 매단 벚나무와 앵두나무까지. 아무리 솜씨 좋은 화가가 정교하게 그려낸대도, 저 수선거리는 연녹색 향연을 흉내 낼 수는 없을 것 같다. 나는 감탄하고 거듭 감탄한다. 인간이 예술이라는 지고한 가치를 지어낸 연원도 자연을 모방하고자 하는 심리에 있다지만, 어찌한대도 ‘스스로 그러한’ 자연을 완벽히 본떠 옮기지는 못할 것이다. 자연과의 투쟁에서 승리한 인간이 문명이라는 놀라운 바벨탑을 쌓아올린 것도 사실이지만, 과학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생활이 편리해질수록 한편으로 자연에 귀의하고픈 본능이 커진다. 꽃이 피고 지고, 벌 나비가 넘나들며 화분을 옮기고, 열매가 맺히고 낙엽이 지는 지극히 단순하고 도저한 이치. 아무리 의학이 발달하여 수명을 연장하고 난치병을 치유한데도 인간의 삶과 죽음 역시 종내는 그 ‘자연스러운’ 과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얼마 전 강원도 양양에서 큰 산불이 일어났다. 산불의 특성상 최초 발화 지점에 목격자가 없는 한 정확한 원인을 알 방법이 없다고 하지만, 관계자들은 산길을 지나던 운전자가 함부로 버린 담뱃불 때문이 아닐까 추정한다고 한다. 산불 지역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하여 복구 작업을 벌이고 소방방재시스템을 구축하고 대대적으로 “담배꽁초를 차창 밖으로 버리지 맙시다!”라는 캠페인을 벌인다지만, 그 모두를 단 번에 예전처럼 되돌릴 수는 없다. 사람이 지어낸 것은 사람이 다시 만들 수 있겠지만, 자연이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하는 데는 오직 ‘시간’이라는 약밖에 없을 것이다. 담배꽁초 하나, 인간의 안이하고 무례한 행동 하나가 물이 오르던 나무들과 난만히 피어나던 꽃들과 그 안에서 살아가던 작고 여린 생명들을 죽였다. 그리고 그 와중에 양양 출신의 소설가 이경자 선생의 집필실도 불탔다. 이경자 선생이 쓰린 속내를 애써 감추며 내민 두 장의 사진 속에는, 작가의 땀과 눈물과 손때가 밴 소박한 한옥 한 채와 그것이 몽땅 녹아내린 듯 말끔하게 사라져버린 공터가 선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오랫동안 모았던 소설의 자료들도 화마의 아가리에 삼켜졌다. 작은 ‘실수’ 하나가 이처럼 많은 것들을 앗아갔다. 오만한 인간들은 가끔씩 저희가 자연을 이겼다고 착각한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기 마련이기에 어떤 희생과 헌신도 당연하다 생각해버리는 이기적인 철부지처럼, 밑바닥을 드러낼 때까지 마구 퍼내어 써도 무방하리라 생각한다. 그러다 이따금 ‘재앙’을 맞은 후에야 그 무서운 위력을 새삼스레 느낀다. 자연은 한없이 자애로우면서도 엄격한 부모다. 그는 한 번도 인간을 보살피거나 가르치는데 소홀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교훈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오직 미욱한 인간의 잘못일 뿐이다. 다시 봄이다. 아름답고 찬란한 봄, 그러나 그것에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에겐 얼마든지 가혹하고 잔인해지는 계절이다. 더 낮아질지어다. 높은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이 내 귀에 속살거리는 것만 같다. /김별아 소설가

문화카페/문화와 서비스

현재 대학로에서 공연되고 있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세계적 극작가 아리엘 돌프만의 디 아더 사이드의 회당 유료관객은 평균 100명이 채 안 된다. 객석 700여석 대비 15%에도 미달하는 초라한 숫자이다. 작년 일본 신국립극장이 한국의 연출가 손진책을 초빙하여 세계 초연, 일본 연극계로부터 찬사를 받은 한국판 공연으로 권성덕, 김성녀 두 배우들의 섬세한 내면연기가 단연 돋보이는 뛰어난 무대임에도 불구하고 관객의 관심은 극히 저조한 것이다. 순수예술의 위기에 대한 염려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그 정도로 심각한 지경에 이르고 있음을 경고하는 징표인 셈이다. 대학로 극장의 연극관객이 줄어들고 서점에서는 시집이 팔리지 않는다. 지난 달 고양에서 열린 아트 마켓에서도 연극과 무용에 대한 반응은 그리 신통치 않은 형편이다. 삶에 대한 진지한 통찰이나 구도자적인 자세로 혼신을 다한 순수예술보다는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흥미 위주의 볼거리에 사람들이 몰려든다. 공연 기획자들 역시 관객동원이 수월한 작품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화부가 공연예술과를 기초예술진흥과로 명칭을 바꾸고 갖가지 대책을 마련하려는 노력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정부와 일선 문화공간 운영자들은 시민들이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가치, 그러나 문화토양을 기름지게 하는 정말 중요한 가치에 대해서도 시민들을 계도, 관심을 이끌어 내야 할 의무가 있다. 우선 문화예술 장르들, 그리고 문화예술 공간의 서비스 체계에 대한 점검이 필요하다. 우리의 예술 현장에는 문화소비자에 대한 서비스 정신이 부족하다. 21세기는 문화의 시대이니만큼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문화예술의 소비를 늘려야 한다는 지극히 타당한 구호만으로 대중을 설득하기란 사실상 어렵다. 예술은 소비자에게 이를 수용하는데 대한 편리함도 제공해야 하고, 내용에 대한 과대포장 없이 겸허하게 정보를 제공하여야 한다. 물론 예술가와 극장 관계자 어느 누구도 이같은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문화공간을 운영하는 한사람으로서 명백한 의무를 치열하게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책감에서 반성을 한다. 무엇보다도 부대시설의 안락함과 청결함에서부터 시작해서 소비자에게서 받는 입장료에 합당하거나 그 이상의 프로그램을 제공하는데 신명을 다하고 있는지 자문해 보지만 실제로 그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술경영이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 어느 부문에서나 질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다. 즉 극장에서 제공하는 프로그램과 서비스에 대해 신뢰를 쌓아 시민들의 지지를 확보하여야 한다. 극장을 찾지 않는 시민들의 무관심을 탓하기 전에 문화예술의 진정한 가치를 실감할 수 있도록 예술가와 예술경영자들이 과학적인 마케팅과 교육을 병행하여 차근차근 풀어가는 방법밖에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장구한 세월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높은 지위, 넓은 아파트 혹은 가족의 이익만큼이나 더 중요한 그 무엇에 대한 합의와 공감이 이뤄질 때라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날이 반드시 올 것임을 의심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구 자 흥 의정부 예술의전당 관장

문화카페/우리 역사의 터, 독도

동해라는 망망대해의 한 가운데 돌섬이 홀로 있다. 그래서 석도라고도 부르고, 독도라는 이름도 있다. 그 이전에는 武陵島 三峯島 子山島 干山島 라는 이름들이 있었다. 늘 그래왔지만, 또 다시 일본이 독도가 자기땅이라고 우겨댄다. 그러자 또 늘 그랫듯이 한국은 파르르 떨며 부산을 떤다. 마치 영유권 분쟁지역인 것처럼 변한다. 독도는 독도이다. 독도는 울릉도의 품안에 있고(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산1~37번지), 울릉도는 우리의 삶이고 역사이다. 이미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은 동해를 건너 일본열도에 도착했다. 고구려도 동해중부지역에서 출항하면 자연스럽게 200여 km 남짓한 이 해역을 거쳐 일본 혼슈의 곳곳에 도착했다. 울릉도와 독도는 망망대해의 동해를 건너는데 등대나 오아시스 역할을 했다. 고구려와 신라가 삼척 강릉지역을 놓고 전쟁을 벌이고, 신라의 이사부가 우산국을 점령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발해인들은 220년 동안 무려 34차례나 사신선을 파견했고, 746년에는 민간인들만 1100명이 건넌 적도 있었다. 호피 초피 웅피 인삼 꿀 명주 대모(거북껍질 술잔) 등을 수출하기 위해서다. 그들도 중기이후에는 울릉도 독도 해역을 경유하여 오키제도나 시마네현, 돗토리현, 후쿠이현 등에 도착했다. 수천 년 전부터 독도를 바라보면서 건너간 우리조상들이 개척한 터이다. 고려 시대에도 울릉도와 독도는 다이나믹한 삶의 터전이었고, 동해의 해적인 여진족들의 공격을 받아가면서도 지켜온 우리의 땅과 바다였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와 바다를 천시하는 정책을 펴면서 조상들의 해양활동과 문화를 오랫동안 망각해 왔다. 울릉도는 물론 독도의 가치와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다가, 결국은 1905년 1월 28일, 일본각의가 독도를 일본령으로 편입할 것을 결의하게 방치하였다. 그 자그마한 빌미 때문에 이렇게 곤욕을 치르고, 자칫하다간 일본의 간계(奸計)대로 영토분쟁지역으로 오해받을 지경에 이르렀다.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독도의 날’을 제정하는 시마네현의 마쓰에시 청사 앞에는 오래전부터 ‘독도여 돌아와라’ 라는 간판이 높게 서 있다. 1994년 유엔에서 신해양법이 발효된 이후에 EEZ( 200해리 배타적 경제적 수역)가 실효성을 지니고 바다는 실제영토가 되었다. 1996년에 EEZ를 선포한 일본은 세계에서 5위의 해양영토대국이고, 해군력은 세계 제 2위이다. 해양의 세기인 21세기에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가치가 높은 독도를 소홀히 할 수는 없다. 더구나 동아시아의 국제질서가 전면적으로 재편되고, 지분확보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는 상황 속에서 우리 역사와 삶의 터를 치욕스럽게 이유없이 또 한번 탈취 당할 순 없다. 동해로 들어가 독도를 돌아볼 때 마다 늘 여러 생각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사라지지만, 그래도 늘 한결같은 마음은 경외심이다. 이 너른 망망대해의 시공을 홀로 대하고 있는 그 존재감에 목이 메이고 무릎을 꿇고 싶어진다. 홀로 있는 존재는 외롭다. 늘 돌봐주고 관심을 쏟아주지 않으면 자의식이 강해도 서러움을 느끼고, 때로는 고까운 마음까지 든다. /윤 명 철 한국해양문화연구소장

문화카패/매너있는 관객이 됩시다

공연장은 관객을 대상으로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래서 공연장을 찾는 관객의 편의를 배려하기 위해 로비와 출입구, 공연장안에서 관객들의 쾌적한 관람환경을 위해 안내 도우미를 배치한다. 그런데 이 안내 도우미들이 상식 밖의 꼴불견 관객 때문에 당황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몇 해 전 서울에 있는 예술의 전당 안내 도우미들은 그런 당황스런 경험을 토대로 ‘ 반갑지 않은 고객- 최악의(Worst)10’을 뽑았다. 그에 이어 서울 세종문화회관의 안내 도우미들도 또한 ‘ 꼴불견 관객 - 최악의 7’을 뽑은 적이 있다. 여기에는 물론 공연장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다양한 사례들이 소개가 되었다. 이후 관객들의 매너가 성숙하여 많은 부분들이 개선되었음에도, 그 중에서도 다음과 같은 꼴불견은 몇 해가 지난 지금까지도 종종 공연에 방해를 주고 다른 관객의 인상을 찌푸리게 한다. 하나, 휴대전화를 꺼달라는 안내방송에도 불구하고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휴대전화, 그리고 몰래 카메라를 가지고 입장한 카메라에서 터지는 플래시. 둘, 7세 이하의 어린이는 입장할 없는 안내문에도 불구하고 “우리 아이는 영특해서 절대로 울거나 음악회를 방해하지 않는다”고 우기는 관객. 셋, 껌을 씹으며 반바지 차림에 슬리퍼를 신고 입장하는 관객. 넷, 술 냄새를 풍기며 앞좌석 등받이에 발을 올려놓고 코까지 골며 자는 관객. 다섯, 초대권을 구해서 입장하고는 좌석이 나쁘다는 등 불평하고는, 초대권을 현찰로 바꿔달라고 떼쓰는 관객. 심지어 지난해 말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는 어떤 해외 유명 소프라노 공연에 한 관객이 공연장에 입장이 금지된 애완견을 몰래 안고 들어왔다가 휴식시간에 발각되어 퇴장당하는 사건까지 있었다. 도우미들의 저지에 이 관객은 오히려 화를 내며 자신의 강아지는 훈련이 잘 되어 있어서 짖지 않는다는 둥, 후반부 공연을 보지 못하게 되었으니 입장권을 환불해달라는 둥 떼를 쓰기까지 했다고 한다. 공연장은 즐거움, 감동, 휴식, 교육, 교양을 위해 찾는 장소이다. 이 곳을 찾은 관객들은 친구와 함께, 가족과 함께 여가 시간을 활용하기 위해 즐거운 마음으로 최상의 서비스를 받기 원한다. 그래서 개인적인 공간에서 혼자 즐기는 것과 달리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지켜야 할 예의가 있다. 최근 공연장들도 관람객을 대상으로 공연장의 관람예절에 관한 안내 책자를 마련하는 등 공연장의 기본예절, 음악회, 연극, 전시장에서 숙지해야 할 에티켓을 알리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소수의 꼴불견 관객들이 자취를 감추고, 더 나아가 싫은 기색 없이 쾌적한 공연 환경을 위하여 애쓰는 안내 도우미들에게 공연장을 떠나면서 “수고했어요”라는 인사 한 마디씩 건넨다면 공연장의 표정이 더욱 밝아지지 않을까 한다. /이 종 덕 성남문화재단 상임이사

문화카페/외로움은 어디에 있는가

요즘은 초창기의 열기가 한풀 꺾인 듯하지만, 한동안 인터넷 누리꾼(네티즌)들에게는 ‘미니 홈피’라는 것이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다. 새것에 민감하고 변화에 발 빠른 특성상 젊은 세대들이 그 열풍의 중심을 이룬 것은 당연하였다. 그리하여 그것을 가지고 있는지 그렇지 못한지가 마치 세대를 구분하는 또 다른 기준이 된 듯하였고, 유행이란 것이 본래 그러하듯 적잖은 추종자와 함께 적잖은 소외자들을 양산했다. 물론 나는 그런 새롭고 별난 것을 만들 재주도 여유도 없다. 하지만 인터넷 서핑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몇몇 미니 홈피를 방문할 기회가 생겨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내가 겪지 못한 새로운 세대에 대한 이해를 가져다주기도 했다. “제 미니 홈피를 방문해 주셔요”라고 조심스럽게 소통을 시도해오는 시도에 이끌려 그 ‘주소’를 클릭하면, 익명의 누군가를 향해 열어놓은 한 사람의 은밀한 공간이 단번에 내 눈앞에 펼쳐졌다. 어린 시절의 추억으로부터 엊그제 찾았던 레스토랑에서 먹은 음식 메뉴까지, 가까운 친구 동료로부터 우연히 찾아든 익명의 누군가에 이르기까지, 그 공간을 채운 사진들과 방명록의 글귀들이 사뭇 신선하고 아기자기하게 느껴졌다. 그 속에는 소소한 일상의 즐거움이 있었고, 정보의 바다인 냉랭한 인터넷 속에나마 인간의 온기를 불어넣으려는 애틋한 소통의 시도가 있었다. 그래서 얼굴이나 한 번 보았을지 알 수 없는 무작위의 누군가와 ‘일촌’을 맺는 일도 아주 낯설게 느껴지지만은 않았다. 정작 현실의 ‘일촌’인 부모와는 어제 저녁 잘 자라는 인사나 제대로 나누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만큼이나 자신을 속속들이 열어 보여준 누군가가 어쩌면 부모보다 가까운 촌수로 느껴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열어 보여준 은밀하고도 노골적인 공간을 누비는 동안, 나는 어느덧 그들 세대의 숨은 외로움을 엿보고야 만 듯하였다.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 올린 사진첩의 사진들은 하나같이 밝고 즐겁고 예쁜 그림들이다. 그래서 그는 항상 밝고 즐겁고 예쁘고 풍요롭고, 그리하여 행복하게 살아가는 듯하다. 방명록에 오른 친구들과의 서로 안부를 묻는 다정한 인사말과 덕담은 그가 관심과 사랑을 듬뿍 받으며 사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들은 싸우지도 않고 갈등으로 뒤척이지도 않을 듯하다. 그런데 정말 현실에서 그러할까. 그가 스스로 꾸며 보여준 그림들만이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기실 ‘미니 홈피’의 열풍은 노출증 혹은 과시욕과 관음증이 기묘하게 결합된 우리 사회의 독특한 문화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존중되기 어렵고, 인간관계가 복마전처럼 얽힌 곳이다. 그런 곳에서 스스로 자신의 사적인 부분을 노출한다는 것은 “내가 보여주는 것만 보아라!”는 일방 소통의 웅변이기도 하다. 웃는 모습만, 즐거워하는 모습만, ‘잘 산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그 이면의 슬프고, 괴롭고, 외롭고, 부대끼며 갈등하는 어떤 부분은 철저히 감춰둔다. 그들은 사진 속에서 활짝 웃고 있지만, 실로 외롭다. 외로워서 더욱 밝게 웃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자기만의 방이 필요한 만큼 타인과 더불어 나눌 광장이 필요하다. 그래서 인터넷에 칸칸이 들어찬 은밀한 공간은 그만큼 우리에게 광장이 없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외로움은 어디에 있을까. 과연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그것을 치유할 수는 있을까. /김 별 아 소설가

문화 카페/천상병 그리고 의정부

시인 천상병이 수락산 자락 끄트머리 장암동에서 말년을 보낸 것은 의정부로서는 행운이다. 그리고 천시인의 시와 삶을 관현악곡과 무용극으로 만든데 이어 올해 연극 ‘소풍’을 선보일 수 있는 것 역시 나로서는 행운임에 틀림없다. 지역의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 혹은 전래 설화나 민요 등을 소재로 하는 무대는 지역 주민에게 연대의식을 갖게 하고 지역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지금 나는 일생 중 가장 소중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는 생각과 함께, 살아온 모습이 전혀 다르기에 실제로는 어렵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혹시 하늘에서 천 시인을 만나게 되면 의정부로의 소풍은 정말 아름다웠다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살아생전에 유고시집이 발간되었고, 시보다는 많은 기행으로 알려진 시인 천상병-그는 만나는 지인들로부터 거둔 세금으로 마시는 막걸리 한 사발에 행복을 만끽하는 영원히 소박한 청년이었다. 그가 하늘로 돌아간 지도 어언 10여년이 흘렀건만, 세상에 대한 날카로운 안목, 삶을 초월한 관조의 눈을 담고 있는 초기 서정시부터 우주의 근원, 죽음과 피안, 차가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후기 생활시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은 꾸준히 독자들의 사랑을 누리고 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천상병 시인의 의미는 단순하고 분명하다. 자기 몫을 챙기느라 정의 앞에서도 쉽게 고개를 숙여버리는 우리네 평범한 사람들과 달리 그는 평화와 자유 그리고 인정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실천하며 살았다. 치열한 경쟁에 시달리는 학생이나 직장인 모두에게 작금의 세태는 어지럽고 던적스럽기까지 하다. 물론 이런저런 눈치를 보며 살아가는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어쩌면 순진무구한 그의 시혼과 삶의 역정을 통해 나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보기 위해 천상병을 무대화하는 일에 집착하는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그는 스스로에게 편지를 쓰면서 맑게, 밝게, 아름답게 살겠다는 다짐을 수없이 반복한다. 엊그제 막을 올린 천상병 연극 ‘소풍’을 본 일반 관객들은 대체로 연극 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한 무대라는 긍정적인 반응이다. 그러나 일부 연출가와 평론가들은 그를 너무 교훈적으로 그리고 있어 감동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각박한 현실을 고단하게 살아가는 시민들에게 작은 위안을 안겨주며, 진정한 삶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임은 분명하다. 앞으로 모자라는 점을 지속적으로 보완하며 고정 레퍼토리로 정착시킬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져 본다. 많은 사람들에게 천상병 따라하기란 결코 쉽지도 않고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바람은 소리 없이 이는데 / 이 하늘, 저 하늘의 / 순수균형을 / 그토록 순수히 지탱하는 새 한 마리”의 시선을 가끔 돌아볼 필요는 있다. /구 자 흥 의정부예술의전당 관장

문화카페/문화발전, 입장권 구매로부터…

경기 침체와 함께 소비 심리도 위축되고 있다. 2004년 공연 예술계에 의하면 2003년 대비 20~30%의 입장권 매표가 줄었다고 한다. 경기가 안 좋으면 먼저 기업은 꼭 필요한 비용만 지출하는게 보통의 일인데 그중에서도 광고 예산의 삭감이 제일 먼저라고 한다. 가정에서도 먼저 문화, 여가 소비 등을 줄여 가계의 부담을 더는게 일반가정의 일반적인 현상일 것이다. 요즘 문화시설을 찾는 이들의 수가 부쩍 줄어들고 있다. 문화산업 그중에서도 공연, 전시산업에선 대중적이고 대형화된 공연, 전시만 그런대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순수 공연, 전시 등은 점점 사양화 되어가고 문화산업의 위기와 함께 문화시설엔 관객이 없어 어려운 상황이다. 특히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연주자와 관계가 있는 제자, 학부모, 친지들을 초청하여 연주하는 눈도장공연, 지인들만이 봐주는 공연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들을 제외하고 실제로 입장권을 구매하여 공연을 관람하는 순수관객은 찾아보기가 힘든 실정이다. 또한 경기침체의 여파로 기업협찬, 광고 등의 섭외가 어렵고 입장권 판매도 부진하여 공연기획자들이 스스로 공연을 포기하는 현실이다. 문화예술향수실태를 조사한 통계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 전체 인구 가운데 연중 무대예술 공연을 관람하기 위해 입장권을 구입하여 관람하는 비율은 3~4%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부끄러운 수치는 국내에서 활동하는 예술인들을 더욱 힘들게 하여 예술가들의 창작 의욕을 꺾고 있다. 특히 사회 저명인사들 중에는 입장권 구입을 부끄러워하고 초대권을 얻어야 권위를 내세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예상외로 많다. 공연 기획자 중에는 관심의 대상이 되는 공연의 초대권 요청을 감당치 못하여 아예 공연 예매 기간에 잠적해 버리는 경우도 있다. 최근 대전, 고양, 안산을 비롯하여 서울의 중구, 광진구, 노원구 등 지방자치 단체 등이 새로운 공연장을 짓고 개관을 하였거나 하려고 하고 있다. 문화시설의 개관과 함께 지역 문화예술은 비약적으로 발전을 할 것이다. 문화시설은 새로운 건물 그 자체의 매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지역의 새로운 문화 인프라를 구축하여 문화 예술가들의 창작욕을 북돋아 더욱 차원 높은 문화 예술 발전을 이룩하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개관 행사를 추진하는 문화시설을 보면 지역의 오피니언 리더 시의원, 구의원, 지역인사, 지역 유지들을 모시기 위해 초대권을 배포하는 일은 적잖게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지역 문화시설에서 지역의 소외된 분들을 위해 초청하는 일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외국의 경우 대통령을 비롯해 많은 저명인사들이 예술가들을 위해 입장권을 사서 관람하면서 ‘우리가 입장권을 사서 공연장을 찾아주지 않으면 누가 우리나라의 예술가들을 보호하겠느냐’고 이야기했던 것이 기억난다. 2005년 10월이면 수도권 중심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할 (가칭)성남문화예술회관이 개관하게 될 것이다. 지금부터 우리 국민 모두가 이러한 생각으로 문화예술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을 가질 때라고 본다. 이제 우리도 주 5일 근무제 시행을 맞이하여 주말에는 옷장 속에 보관해둔 가장 멋진 옷을 골라 입고 가족들과 함께 음악회 입장권을 사서 공연장을 찾는 문화적 풍요와 여유가 깃든 삶을 누릴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 종 덕 성남문화재단 상임이사

문화카페/장보고 드라마와 발전모델

요즈음 ‘해신’이라는 방송드라마가 뜨고 있다. 해상왕 장보고를 드라마로 만들어 방영하는 것이다. 본적이 없지만, 자문에 참여한 적은 있다. 5~6년전부터 장보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학문적인 연구성과는 물론이고 만화영화, 게임 등도 만들어졌다. 필자는 장보고호라는 뗏목을 만들어 중국남쪽에서 한국의 인천 완도 제주도를 거쳐 일본까지 이르는 해상항로를 답사하였다. 이렇게 장보고가 1200년 만에 부활하여 대중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처음에는 김대중 정부의 정책과 이미지화작업의 한 부분인 면도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시대적인 상황이 그를 요구한 것 같다.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이기 때문이다. 변화무쌍한 세계질서의 대양 속에서 좌초를 면하고 성공적인 항해를 이룩하는 모델의 하나로서 필자는 장보고의 ‘동아지중해 물류장역할’을 들고 있다. 21세기는 경제행위를 통해서 세계화(globalization)와 지역화가 동시에 추진되는 시대이며 물류통로 및 해양자원으로서 해양의 경제적 가치가 부각되는 시대이다. 한국 무역품들의 99.7%는 해양으로 이동한다. 또한 한류에서 확인하듯이 문화와 경제가 함께하는 시대이며, 개방과 다양성의 시대이다. 그리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극복할 통찰력과 리더십을 가진 인재가 필요하고, 강한 공동체의식이 절실한 시대이다. 바로 장보고가 살았던 시대가 그러했고, 그는 그 시대를 활용하여 오히려 그만의 나라를 건설하였다. 장보고는 변화하는 국제질서의 실상을 인식하고 충분하게 활용한 전환기의 리더였다. 9세기 초는 본격적인 국가간의 경제교류도 활성화되고, 느슨한 형태나마 동아경제권의 형성이 필요해졌다. 북방 서역 남방에서 당의 경제권으로 수입된 물건들과 자체생산물들은 신라와 일본으로 수출되어야 했다. 신라와 일본의 토산물과 공산품들도 당에 수출해야 했다. 특히 산업이 발달하고 교역능력이 뛰어난 신라는 일본시장을 개척하고, 당시장도 개척할 필요가 컸다. 그는 ‘大使’라는 독특한 직책으로 政軍商을 장악하여 청해진에 본거지를 차리고, 동아지중해의 ‘해상왕’(The Trade Prince of the Maritime Commercial Empire. 라이샤워 설)이 되었다. 그의 성공을 뒷받침한 것은 조선술 항해술(sea power) 같은 하드웨어 외에 소프트웨어가 있었다. 장보고는 동아지중해의 물류체계를 유기적으로 네트워크화하는데 성공하였다. 당나라에는 대운하의 주변과 해안가의 중요한 지역에 신라인 집단거주지가 있었다. 특히 신라방 자치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일종의 자유무역항 혹은 경제특구에 해당한다. 그는 環黃海圈의 요소요소에 포진한 거점도시들을 유기적으로 연결시켰고, 청해진을 본격적인 자유무역지대로 삼았다. 장보고는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인적자원 또한 유기적인 시스템 속에 네트워크화 시켰다. 국적이 다른 재당신라인과 본국신라인, 재일신라인의 민간상인조직을 연결시켜 청해진에서 관리하고, 필요와 장소에 따라 역할분담을 조정하였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항선조직을 일원화시켜 해로(sea lane)를 안정적으로 확보하였다. 현재 중국은 대중화경제권을 구축할 목적으로 전세계에 산개된 화교들을 네트워크화하고 있다. 우리는 조선족을 비롯하여 재일교포, 까레에스키 등이 동아지중해권의 여러 지역에 포진하고 있다. 장보고처럼 이들과 본국의 국민을 연결시키고, 이들의 경험과 지식, 보유한 물류시스템 등을 수용하고, 반대로 이들에게 지원을 하면서 하나의 통일되고 유기적인 시스템 속에 편재시킨다면 한민족경제권의 형성에 유리할 것이다. 장보고는 그 외에도 포용성 스케일 인간애 등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다양한 발전모델을 제시할 수 있다. /윤 명 철 한국해양문화연구소장

문화카페/누구에게나 살아갈 권리가 있다

춥지 않은 겨울이 계속되고 있다. 지구 온난화로 극지의 빙산이 녹고 머지않은 미래에는 한반도도 아열대 기후가 될지 모른다 하니, 인간의 탐욕을 응징하는 자연의 저항인가 싶어 따뜻한 겨울도 마냥 반갑지 않다. 하지만 예년 같지 않은 포근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이번 겨울에 느끼는 추위는 별다르다. 침체된 서민경제가 끝을 모르고 추락하면서 연일 들려오는 가슴 아픈 소식들 때문이다. 엊그제도 세상에 저항력을 잃은 무기력한 한 가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자살이라는 가장 극한 방식으로 자기의 절망을 호소하며 스러졌다. 자살에 대한 도덕적인 비난은 밀쳐두자. 하지만 그가 목숨을 끊기 전 다섯 살짜리 아들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낸 일에 대해서는 분노하고 책망하지 않을 수가 없다. 고작 다섯 살 배기 아들의 미래를 왜 아버지 마음대로 재단하고 판단했는지, 그가 아들을 ‘살해’한 것이 아니라면 자식은 결국 부모의 소유물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 한 아이의 어미인 나는 원치 않았던 죽음을 맞이한 어린 생명을 생각하며 가슴 아팠다. 아이가 세상에서 아버지에게 느낀 ‘공포’라는 마지막 감정보다, 아이를 거친 세상에 홀로 두고 떠나지 못해 함께 데리고 가야 했던 아비의 ‘사랑’이 더 컸을까? 나는 아무래도 그 무서운 사랑을 용납할 수 없다. 세상이 고아에게 얼마나 가혹한지 전부 상상할 수는 없다. 아이를 죽여야 했던 아버지도 오직 그 가혹함을 상상하기만 했을 뿐 실제로 겪지는 못했을 것이다. 세상의 냉대와 비정함은 상상보다 클 수도 있지만, 아이가 그것을 견디고 극복하여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는 가능성 역시 아버지의 상상을 뛰어넘을 수 있다. 고아원에서도 아이들이 자란다. 교육을 받고 훌륭한 시민으로 성장한다. 부모의 공백은 영원한 결핍으로 남겠지만, 최소한 자기 몫의 삶을 살아갈 권리를 가진다. 우리 사회가 아직 관용으로 충만한 곳이 아닌 것은 사실이지만, 어쩌면 비정한 사회보다 더 무서운 것이 가족에게 개인의 행복에 관한 모든 것을 떠맡기고 그 배타성을 허용하는 가족이데올로기다. 아침 산책길에 자주 만나는 아이 하나가 있다. 등교 시간은 벌써 한 시간쯤 지났는데, 아이는 이제야 학교에 가고 있다. 늦잠을 잔 것이 아니다. 아이의 다리는 휘청거리고 어깨에 멘 가방이 무거워 보인다. 내 아들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에는 두 개의 특수학급이 있는데, 다운증후군 장애를 가진 아이는 그 반의 소속인 듯하다. 3학년쯤 되어 보이는지라 배웅하는 부모 없이 혼자 등교한다. 언제까지 부모가 부축해줄 수는 없기에, 모질게 마음을 먹고 등 떠밀어 내보낸 길이리라. 아이는 작은 돌부리 하나에도 몸의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기 일쑤다. 늘 통과하는 작은 교문이 닫혀있으면 큰 교문이 활짝 열려있어도 들어갈 길을 찾지 못해 헤맨다. 손을 끌어 큰 교문으로 들어가라고 하니 초점이 잘 맞지 않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꾸벅 인사한다. 발길을 멈추고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세상을 살아가기에 아무리 버거운 장애가 있어도 아이는 간다. 살겠노라고, 제 몫의 삶을 감당하리라고 아이의 뒷모습이 웅변한다. 누구에게 타인의 삶을 행복하리라 불행하리라 추측하고 판단할 자격이 있는가. 사회도, 그를 낳은 부모마저도 그럴 권리는 없다. 빗나간 어리석은 ‘사랑’으로 살해된 어린 생명의 명복을 빈다.

문화카페/實學의 道이려면

경기도민이 부럽다. 인구는 날마다 늘어나고, 땅값도 계속 오르고,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곳인데다, 학문과 사상, 철학과 문화까지 가장 높은 수준의 역사를 지닌 곳이 경기도이기 때문이다. 학계에서 통설로 정해진 사실의 하나는 조선 5백년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학문과 사상은 왕조의 후기에 이룩된 실학사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실학사상의 대표적 학자로 세분을 드는데, 한분은 반계 유형원(磻溪 柳馨遠)이요, 두 번째 분은 성호 이익(星湖 李瀷)이며 세 번째 분은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이다. 반계는 그의 학문을 전라도에서 완성했으나 경기도에 묘소가 있고, 후손들이 과천에서 살았다고 한다. 성호는 안산에서 살면서 거기서 학문과 사상을 이룩하고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내서 경기실학의 확고한 바탕을 다진 분이다. 다산이야 다 알고 있듯이 경기도에서 태어나 자라고 커서 대학자가 된 뒤, 경기도에 묻혀 경기도를 자랑스럽게 만든 분이다. 그들뿐인가. <동사강목>의 대저를 남겨 역사관을 바르게 세운 순암 안정복이나 추사 김정희도 경기도에서 학문과 사상을 완성한 희대의 학자들이었다. 담헌 홍대용이나 연암 박지원 같은 분들도 서울에서 살았지만 경기도와 무관할 수가 있겠는가. 담헌의 스승은 미호 김원행으로 경기도 양주에서 후학들을 길러냈고, 담헌이야 경기도에서 학문을 이룩하고 연암도 미호의 문화를 출입했던 분이니, 이 또한 경기도와의 인연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처럼 기라성 같은 학자 모두가 실학의 대가들이니 경기도가 실학의 도임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문제는 과연 경기도가 실학의 도라는 내용을 제대로 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실사구시의 논리로 도정(道政)은 제대로 펴고 있는가, 도민들의 마음에 참다운 실학정신이 담겨 있어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실학이라는 논리로 경기도의 정체성은 확보되어 있는가. 다산의 <목민심서>라도 제대로 읽어 경기도의 공무원들은 다른 지역의 공무원들보다 청렴하고 도덕적인 봉사행정을 펴고 있는가. 실학사상의 중심에 있는 위민(爲民)정신을 제대로 발휘해서 경기도 도민들이 다른 지역 주민들과는 다르게 대접받고 있는 것인가. 이런 모든 질문에 과연 그렇다 하더라도 수긍할 주민이 얼마나 될까. 실학자들이 활동한 역사가 많지 않은 경상도 주민들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충청도나 강원도의 주민들과의 차이는 있는 것인가. 가장 많은 실학자들의 고향이라고 자부하는 광주(廣州) 시민들은 다른 지역주민들과 차이가 있을 것인가. 이런 문제도 명쾌한 답을 듣기는 어려운 현실이 아닌가. 이제는 경기도가 실학의 도이기 위해서는 새로운 다짐이 있어야 한다. 실학현양 사업이나 실학축전 등의 행사들이 예전에 비하여 활발하게 전개되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행사만으로 끝나는 현양사업이어서는 안 된다. 실학박물관도 짓고 실학에 관한 유물이나 유품의 수집보관도 중요하지만 실학의 마음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모든 도민들이 실학으로 돌아가자는 구호를 내걸고 실학에 관한 교육이 제대로 행해지고 실학에 관한 저서들을 독파하는 독서운동이 전개되어야 한다. 실학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행동으로 옮길 수 있지 않겠는가. 초·중등 학교에서부터 다른 도와는 다르게 훌륭한 실학교재를 개발해서 교육을 제대로 시켜야 한다. 최소한 경기도에 있는 대학에는 실학강좌가 개설되어 실학을 가르쳐야 한다. 그러한 일들이 전혀 진전이 없는데 어떻게 경기도가 실학의 도일 수 있겠는가. 물론 형식이 내용과 무관하지 않다. 현양사업을 통해 여러 형식이 전개되면서 알곡이 익어가듯 내용이 가득 채워지는 때에야 경기도는 실학의 도가 될 것이다. /박 석 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문화카페/문화봉사의 즐거움

프랑스가 문화성을 설치한 것은 1959년이고, 문화자원봉사자가 5만명을 돌파한 것은 1980년이다. 그리고 미국인의 52%가 주 3.5시간을 봉사하는데 사용함으로써 활력 있는 생활과 사회적 관계를 유지한다는 통계는 1996년의 일이다. 우리 애가 학교에서 요구하는 봉사활동을 위해 동회를 찾아가면 도움 받을 일이 없다고 거절당해 돌아오고, 우체국에 가서는 우편물을 분류, 운반하느라 파김치가 되어 돌아오곤 하던 시점이다. 미국 케네디센터는 600여 명의 봉사자들이 하루 3교대로 평균 4시간씩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평균 6시간 정도의 오리엔테이션을 받고, 3개월 수습기간을 거쳐 선발된 사람들로, 본인 희망에 따라 관람안내, 회계사무, 공연관련자료 수집 및 정리, 회지발간 등의 업무를 맡아 하고 있다. 이들에게는 봉사시간동안 무료주차와 정기홍보물의 배달, 10달러 이상의 기념품 구입시 25%할인 등의 혜택이 주어진다. 연말에는 활동기록을 증명하는 서류를 발급, 활동에 소요된 경비를 정산해 주기도 한다. 그야말로 혜택이라고 할 것도 없지만, 늘 지망생이 넘쳐 극장측이 엄격히 선발한 사람들에게만 봉사기회를 부여한다고 한다. 최근에는 우리 사회도 봉사활동이 다양한 형태로 활발해지는 추세에 있지만, 문화봉사는 아직 걸음마 단계에 머물고 있다. 대체로 단순한 관람 안내, 문화재 해설 혹은 우편발송보조에 그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문화봉사자는 지역의 문화발전을 원만하게 해주는 문화촉매자로서, 인간의 꿈과 사회의 갈망을 제시하고 실현하는 극장 기능을 확충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울러 개개인의 삶의 또 다른 가치 코드를 발견하고 창조할 수 있기에 문화봉사의 의미는 중요하다. 이미 선진사회는 기부행위나 봉사활동이 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고, 사회적 가치 또한 높이 평가받고 있지만, 우리의 현실은 아직 그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제 문화봉사의 영역을 넓혀 시민들의 적극 참여를 권유할 때가 되었다. 우리 사회는 능력과 열정이 넘치는 인적자원이 비교적 넉넉한 편이다. 뿐만 아니라 바쁜 시간을 쪼개어 1주에 한번씩 사회봉사 활동을 하는 주부 역시 주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분들로 하여금 시민의 입장에서 문화콘텐츠를 기획하고 진행, 홍보 및 모니터 역할까지 맡게 한다면, 극장이 지역사회 향상에 기여할 수 있는 시민 참여프로그램으로도 승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한해가 가고 있다. 치열하게 1년을 보낸 사람과 그러하지 못한 사람들이 느끼는 감회가 다를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연말의 시간은 늘 아쉬움을 떠올리게 한다. 아주 누구라도 마음먹고 한달 혹은 1주일에 한번쯤 문화봉사를 체험하며 스스로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지역사회 발전에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연말의 아쉬움을 조금은 덜 수 있는 방법으로 권유드리고 싶다. /구 자 흥 의정부 예술의전당 관장

문화카페/21세기 새문명의 태반, 경기도

21세기는 전 지구적으로 문명의 생명 뿐만 아니라 정치·경제·군사적으로도 생명의 파괴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세계질서가 새롭게 재편되면서 세계화(혹은 지구화, globalizaion)가 속도감 있게 전개되고 있다. 미주지역과 유럽지역을 양대 축으로 삼고 기타 세계를 종속시키려는 기도가 文明의 衝突이라는 관념과 명분으로 외장을 한 채 실현되고 있다. 한국 중국 일본 그리고 러시아의 일부가 포함되어 있는 소위 넓은 의미의 동아시아의 核(core)국가들은 세계 여타의 강력한 블록에 대응하고, 동남아지역과의 경쟁 내지는 협력을 위해서도 기존의 관계를 뛰어넘는 공동체(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의미를 지닌)를 결성해야 할 필요성이 증대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어디에선가 새로운 생명은 잉태되어야 하고, 지구를 구원하는 새 생명이 탄생하는 울림이 들려야만 한다. 즉 지구의 공멸을 막고 인류전체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우주담론’ ‘지구담론’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한편으로는 동아시아적 입장을 고려한 동아시아 담론을 만들고 주장해야 한다. 그 진원지와 역할자로서 한국이 있다. 누구나 인정하듯이 20세기 내내 인류가 만들어 낸 온갖 상처들을 치료도 않은 채 서둘러 봉합한 곳이 우리 터이다. 분단의 중병을 산소호흡기를 통해서 간신히 연명하고 있는 곳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생명수는 이 땅에서 솟아나는 것이 역사의 도리이다. 더구나 한국은 동해 남해 황해 동중국해로 이어진 동아지중해의 中核(core)에 위치하고 있다. 대륙과 해양을 공히 활용하며, 동해 남해 황해 동중국해 전체를 연결시켜줄 수 있는 유일한 나라이다. 특히 모든 지역과 국가를 전체적으로 연결하는 해양 네트워크는 우리만이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중국과 일본이라는 두 강대국의 갈등과 충돌의 개연성이 적지 않은 신질서의 편성 과정에서 중간역할을 해야만 하고, 할 수 있는 지정학적인 위치에 있다. 실제로 한국지역은 역사적으로도 중간역할을 수행하여 양 지역이 정치·군사적으로 직접 충돌하는 것을 예방하였던 경험이 있다. 또한 비교적 대륙적인 성격을 지닌 중국지역의 문화와 해양적인 성격을 지닌 일본문화를 우리지역에서 모아들여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조화시켜 각각 상대지역으로 전파함으로써 동아시아 문화의 공질성을 유지하는 역할을 하였다. 우리 지역의 이러한 역할과 기능은 21세기 동아시아 신질서의 수립과 상생, 공동체 구성에 더욱 필요해지고 있다. 남북이 긍정적으로 통일되어 중요한 해로를 장악하고, 해양조정력을 가질 경우에는 교류의 주도권은 물론 각국 간의 해양충돌 및 정치갈등도 주도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또한 인프라의 효율적인 건설과 활용만 뒷받침 된다면 동아시아에서 하나뿐인 물류체계의 거점(hub)으로서 교통정리가 가능하고 나아가서는 동아시아의 경제구조나 교역형태를 조정하는 역할까지 할 수 있다. 문화 또한 우리를 핵심로터리(I.C)로 삼아 동아시아 공동의 문화를 창조해낼 수 있다. 이러한 새한국의 지리적인 중심에 있으면서 역할 면에서도 중심에 있고, 역사적으로도 중심의 역할을 하였던 곳이 바로 경기도이다. 경기도는 20세기 내내 냉전질서와 남북 분단으로 인하여 세계사에서도 가장 많이 피해와 상처를 입은 지역이다. 그러나 이미 얼음은 녹았고, 남북의 통일이 눈앞에 다가왔다. 경기도는 민족사적으로는 남북을 연결하는 중간거점이 되며, 동아시아적으로는 중국 일본과 교섭하는 중요한 출구며 입구로서 육지와 바다, 하늘 모두가 만나는 교통의 십자로이다. 그리고 인류사적으로는 지구와 우주의 미래를 이끌어가는 새로운 문명이 잉태되는 태반이다. 그렇다면 경기도가 해야 할 역할, 경기도민이 해야 할 일은 자명하다. 1천500여 년 전에 고구려의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은 경기도를 장악하여 세계국가로서 발돋움하였다. /윤 명 철 한국해양문화연구소장

문화카페/책방에서 파랑새를 찾다

오랜만에 서울 도심의 대형서점에 들렀다. 출판가의 장기침체가 예사롭지 않다지만, 종합병원에 가면 어쩌면 아픈 사람이 이다지도 많은가 새삼 놀라는 것처럼 그래도 서점엔 책을 읽는 사람들이 많다. 서점에서 책을 고르는 일은 도서관의 서가를 거니는 것과 또 다른 재미를 준다. 빳빳한 신간서적과 베스트셀러들, 지금 이 순간의 소용과 필요를 위해 출간된 책들을 뒤적이며 종이 위에 선명하게 인쇄된 타인의 꿈을 엿본다. 하지만 서점을 돌아보는 내 발걸음은 웬지 차츰 무거워진다. 사람들이 몰려있는 매대에 높다랗게 쌓인 책들이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경박한 현실 때문이다. 책을 고르는 사람들의 표정은 자못 심각하다. 눈에 잘 띄고 발길이 닿기 좋은 곳에 아예 따로 판을 벌인 그 책들은 하나같이 날렵한 표지에 금박 은박 글자가 번쩍거린다. 저마다 원조를 내세우는 향토음식 거리처럼 이 책이야말로 ‘필수’이며 ‘실전’에 가장 적합한 우리 모두의 ‘베스트셀러’라고 광고한다. 그들의 제목에 하나같이 박힌 단어는 바로 ‘부자’. 몇 억을 몇 년 만에 버는 법, 몇 살에 몇 억대 부자 되는 법, 나는 이렇게 해서 바야흐로 부자가 되었다! 부귀와 영화를 꿈꾸는 것이야말로 인류의 오랜 소원이다. 누구든 세상에 한 번 태어나 살면서 가난과 불운에 시달리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돈은 사람이 바라는 많은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는 힘이다. 때로는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기보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기 위해 돈이 필요하기도 하다. 그래서 어찌 보면 돈은 자유의 도구다. 돈이 없고 돈을 벌 능력을 갖지 못했을 때 사람은 돈 그 자체의 노예로 예속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게 전부일까? 나는 부자가 될 의지도 능력도 없는 사람이지만, 남의 우물에 진흙 풀 듯 내가 원치 않는 소원이라고 남의 뜻을 폄하하거나 훼손할 생각은 없다. 사실 나는 서점 매대에 매달려 부자가 되는 비법을 허술한 책 몇 권에서 찾는 소박한 사람들이 모두 부자가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하지만 그렇게 될 수 없음은 그 책들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 그들조차 번연히 알게 될 것이다. 어디에도 ‘비법’이란 없고 ‘실전’은 오로지 공짜라곤 없는 세상 속에서 스스로 몸을 부딪쳐 치러내야만 한다는 것에 대해 말이다. 그리고 ‘부자’에 관해 써서 베스트셀러를 만든 저자들은 실제로 자신이 부자이기보다 그 책을 팔아 부자가 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사실도. 나는 지금도 낱장마다 글자가 빽빽하게 박힌 두꺼운 책을 좋아한다. 말초적인 감각을 자극하기보다는 지루하고 따분하나마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 둔중한 감동을 주는 고전을 사랑한다. 그것들이 진열된 서가는 해가 바뀔수록 점점 구석으로 몰리고 장소도 협소해진다. 그나마 입시생들의 ‘필독서’가 아니라면 번역되어 출판되지 못한 불후의 명작들도 수두룩하다. 발자크와 토마스 만과 에밀 졸라가 어떻게 잘 먹고 잘 사는 법을 가르치겠는가. 그들이 엿본 세계와 삶의 비의가 어떻게 좋은 대학의 간판을 따주겠는가. 오로지 그 천잡한 이유만으로, 그들의 작품은 서서히 도태된다. 초판도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한 책은 절판되어 헌책방에서도 찾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대형서점 귀퉁이 서가에 등을 기대고 앉아 가슴 두근거리며 그것들을 읽곤 한다. 모두가 파랑새를 쫓아 동분서주할 때 나는 빈 새장을 부둥켜안고 기다리리라. 나는 아직도 돈이, 물질이 행복의 절대적인 조건이 될 수 없음을 확신하는 시대착오적이고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래서 더욱 진정한 행복을 갈구하는 사람이다. /김 별 아 소 설 가

문화카페/사라져가는 명절들

추석이 지났다. 추석이 즐겁고 아름다운 명절임을 새삼스럽게 강조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 교통이 혼잡하고, 육·해·공의 온갖 통행로가 꽉 막혀 숨이 막힐듯한 형편이지만 수천만의 민족 대이동을 보고 있노라면, 역시 추석이 진짜 명절이고 막을 수도 없고 식지도 않는 민족의 최대 명절이자 고유한 미풍양속의 민족적 행사임도 거론할 필요가 없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 날만 오래 가기를!”(加也勿 減也勿 但願長似嘉俳日)이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열양세시기’라는 정조 때김매순(金邁淳)의 저서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렇게 덥고 짜증나던 여름이 지나 가을 바람이 솔솔 불어서 시원하기 짝이 없는 날씨, 하늘은 맑고 높아 청량하기 그지 없는 계절, 황금 물결로 넘실대는 아름다운 가을 들판, 햇 곡식이 나와 그래도 굶주린 배를 채울 수 있기 때문에, 오래 오래 추석날만 같기를 바라던 우리 선인들의 입장을 그대로 반영한 정서가 아닐는지. 추석이 모든 사람들에게 기쁘고 즐거운 날이지만은 않다. 흩어져 지내던 혈육과 가족들이 만나고 맛있는 음식에 재미나는 대화가 있어 누구에게도 반가운 명절이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다. “타향에서 홀로 낯선 손님이니, 명절을 당할 때마다 어버이 생각 곱절로 나네.”(獨在異鄕爲異客 每逢佳節倍思親) 저 유명한 당나라 시인 왕유(王維)의 노래다. 그 좋은 명절에 객지에서 홀로 지내며 부모를 찾아가지 못하는 쓸쓸한 나그네는, 오히려 명절이 되면 더 괴롭게 마련이니 어찌 할 것인가. 실직으로, 질병으로, 감옥에 갇힌 이유로, 교통편이 없어서 고향을 찾지 못한 서러움은, 명절을 맞을수록 더 심해진다니 인간의 일이란 늘 그럴 수 밖에 없는 것 아닌가. 남들에게는 한없이 즐거운 날이지만, 반대로 나에게는 가장 서러운 날이 되고, 나에게는 가장 재미나는 날인데, 남에게는 가장 슬픈 날이 되고 마는 세상 일, 이런 때 일수록 서러운 사람이나 외로운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절실히 요구되는 때가 아닐는지. 그래서 요런 시절에는 불우한 이웃을 돕고 형편이 어려운 주변을 챙겨야 할 필요가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추석과 설날은 아직은 우리의 명절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옛날 우리들이 어렸던 시절만 해도 얼마나 많은 명절들이 기다리고 있었던가. 설날이 지나면 바로 정월 대보름의 큰 명절이 기다리고 있었고, 음력 3월 3일의 삼짇날이 또 우리를 즐겁게 했었다. 4월이면 초파일, 5월이면 단옷날, 6월이면 유두절이 있었고, 7월의 백중, 9월의 중굿날이 기다려졌었다. 동지 팥죽을 먹던 동짓날도 모두가 크게 쇠던 명절이었다. 시골의 마을 단위로 두레를 통한 농업생산이 경제의 주축이던 때가 지나자 도시산업사회로 바뀌면서 아름다운 명절은 대부분 사라져가고 말았다. 섣달부터 시작되던 연날리기, 정월 대보름 날 저녁에는 모두 날려버리고 일터로 돌아가던 지혜있던 옛 사람들이 그립다. 중구날에 국화주를 마시며 풍류를 즐겼던 풍속도 멋진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멋진 풍류나 아름다운 풍속들은 사라져만 가고 있으니 돌이킬 방법은 없을까. 그래도 한가닥 기대를 버리지 못한다. 지방화 시대가 열리고 자치단체들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지방마다 옛것을 살리려는 축전이나 축제가 열리고 있다. 옛것을 제대로 복원하고 낭비가 방지되어 합리적이고 가치있는 방향으로만 전개된다면 그래도 다행이라 하겠다. 사라져가는 민족정서를 되살리고 야박한 민심을 순화시키기 위해서라도 미풍양속의 옛 정서나 민족혼이 살아나도록 머리를 짜낸 놀이의 재현을 바라고 희망한다. 잘못된 복원이 아닌가. 낭비만 부추기는 일은 아닌가. 제대로 따져 가치있고 바람직한 명절의 풍속이나 정서가 제대로 살아나기를 고대해본다. /박 석 무 다산연구소 소장

문화카페/살맛나는 세상

의정부예술촌으로 이름이 바뀐 잭슨 캠프에 서울과 의정부 시민들이 구름처럼 몰려든다. 7호선 수락산역을 출발, 1호선 도봉산역을 경유하는 예술촌 행 셔틀버스에는 가족단위로 혹은 연인으로 보이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프랑스 태양극단, 중국의 북경인민예술극원 그리고 극단 여행자와 극단 무연시 등 국내외 유수의 그리고 지역 극단이 펼치는 거리극 등 연극공연을 즐기기 위해서다. 미군이 평택으로 이전한 후 의정부시는 잭슨캠프에서 미군들이 사용하던 막사 등 기존건물을 원형 그대로 희망하는 극단들에게 무상에 가까운 수준으로 임대하여 연극 공연장과 연습장으로 활용케 한지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아서의 일이다. 의정부시가 한 일은 야외무대를 두어 곳 만들어 주고 환경을 관리하는 일 뿐이다. 뉴욕시가 위대한 프로듀서 죠셉 팝에게 센트럴파크를 단돈 1달러에 사용권을 주어 셰익스피어축제를 성공시킨 사례와 다를 바 없다. 누가 감히 경기북부를 문화 불모지라 하는가? 연극인들은 혼신을 다하여 갈고 닦은 기와 예를 무대 위에 펼치고, 시민들은 그들의 투철한 예술혼에 갈채와 환호로 보답한다. 이제 의정부는 한국연극의 메카로, 아시아를 넘어 세계를 향한 문화정보발신지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세상이 참으로 어수선하기에 하루 속히 그런 날이 오기를 기대하며 즐거운 상상을 해본 것이다. 행정수도 이전, 국보법개폐, 과거청산, 화폐개혁 등 굵직한 현안마다 의견을 달리 하는 사람들끼리 지루한 공방을 펼치고 있어 밥 먹고 살기에 바쁜 서민들은 걱정이 태산이다. 언론의 칼럼이나 논평은 온통 나라 걱정으로 가득하고, 반가운 소식은 장애우올림픽에서 눈물겨운 투혼을 불사르는 인간승리자들의 활약상 정도-그래서 희망에 그쳐버릴 허망한 꿈을 꾸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살맛나는 의정부’라는 구호와 함께 정보문화의 도시를 표방하고 있는 의정부이기에 마냥 불가능한 일만은 아닐 것 같다. 향후 100년쯤 앞을 바라보고 미군기지 활용계획을 세운다면 못할 것도 없기 때문이다. 공연예술은 시민들에게 위안을 제공하고, 사람답게 사는 법을 알려주고 21세기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상상력과 창의력을 키워주는 곳이다. 그래서 공장 하나 세워 당장 일자리를 늘리는 일만큼 극장문화는 중요하다. 지난 해 포천을 시작으로 덕양, 평촌, 안산 그리고 내년에는 일산까지 공립극장이 세워지고 있어 바야흐로 경기도는 문예부흥기를 맞고 있는 느낌이다. 특히 상당수 극장이 운영시스템을 재단법인화(혹은 예정)로 내실을 기하고, 스텝구성도 전문가를 영입하는 등 출발이 예사롭지 않기에 더욱 기대가 크다. 그리고 이들끼리 선의의 경쟁을 통해 프로그램은 물론 공연진행, 관객 서비스 모두 눈부시게 발전할 것임에 틀림없다. 이제 살맛나는 세상이 다가오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구 자 흥 의정부예술의 전당 관장

문화카페/스포츠에 열광하는 이유

하루하루를 길고 지루하게 만들었던 폭염과 태풍의 나날도 어느덧 지났다. 하지만 열대야는 물러간 지 오래인데 아직도 나는 불면의 밤에 종지부를 찍지 못하고 있다. 중독 된 듯 빠져 나오기 어려운 스포츠의 매력, 올림픽 경기 관람의 재미 때문이다. 나는 운동신경이 발달한 편이 아니다. 학창 시절 몸으로 경쟁하는 거의 모든 종목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고, 지금의 직업도 지극히 정적인 것이라 땀을 흘리며 숨차게 달리는 일 따위와는 완전히 무관하다. 하지만 개인적인 처지와 상관없이 나는 항상 스포츠 관람을 좋아했고 스포츠 자체를 즐겨왔다. 작은 분교의 관사에 살면서 군인아저씨들이 벌이는 ‘군대스리가’ 축구 경기를 관람하며 인류 최고의 정열적인 스포츠 축구를 즐겼고, 그것이 독재정권의 ‘3S’정책인지 무엇인지 문제의식도 가질 수 없었던 국민학교 때부터 OB베어스의 최고투수 박철순의 부침을 바라보며 퍼즐처럼 집요하면서도 그 속에 숱한 이야기를 가진 야구의 재미를 알았다. 어린 나의 영웅들은 네 번 쓰러져도 다섯 번 일어나는 홍수환과 라면을 좋아한다는 말이 라면만 먹고 뛰었다는 보도로 와전된, 어쨌든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이를 악물고 달리던 임춘애였다. 지금 생각하면 가슴이 쓰리기도 하다. 정보통제가 극심하고 욕망의 탈출구가 제한되었던 시절, 우리의 극적이고 자랑스러운 영웅들은 우리의 눈과 귀를 가리는 또 하나의 도구가 되었다. 그토록 금메달에 목을 걸고 공식적으로 집계하지도 않는 국가순위에 일희일비했던 기억은 차라리 한 편의 코미디였다. 2등은 존재하지도 않고, 그나마 메달을 따지 못한 선수들은 패잔병의 모습으로 남의 눈을 피해 입국해야 했던 시절. 그때 스포츠는 스포츠가 아니라 전투였기 때문이다. 불행한 근현대사를 가진 아시아 변방의 나라가 유일하게 스스로를 과시하고 선전할 수 있었던 기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절반의 진실이 그렇다고 하여 나머지 절반의 진실마저 부정할 수는 없다. 그들은 분명히 우리에게 감동과 환희를 주었다. 일상의 가난과 피로에 찌들고 비겁함에 주눅들은 우리를 일시에 고양시키는 신비로운 체험을 선사했다. 우리는 그 뻔하게 반복되는 드라마에 기꺼이 감동 받았다. 역경을 이겨낸 불굴의 투지, 각본 없는 휴먼 스토리. 우리와 꼭 닮은 못나고 초라한 얼굴들이 필사적으로 스스로의 틀을 깨고 솟구쳐 오르는 모습을 바라보며 우리는 비로소 생을 긍정했다. 어떻게든 계속 살아내야만 할 이유, 그 거룩한 존재의 의미를 알았다. 의미야 차치하고라도 일단 운동 경기 관람은 즐겁다. 나는 손에 땀을 쥐며 내 맘이 닿는 선수를 응원한다. 오직 맨몸뚱이 하나로 거짓 없이 이 생애와 맞서는 나의 투사를 응원한다. 여실히 아름답고 찬미할만한 육체가 한껏 기예를 펼쳐 보이며 비상한다. 이제는 그놈의 금메달 타령을 듣지 않아도 될 만큼은 세상이 성숙해지고 살만해져서 다행이다. 땀방울을 쏟아낸 선수들 모두를 치하하는 목소리들이 이번 생에서 썩 별 볼일도 없고 성적조차 시원찮은 모두를 격려하는 듯하여 듣기 좋다. 물론 번쩍거리는 금메달을 딴다면 더욱 좋겠지만, 우리의 레이스는 경기가 끝나고 관객이 모두 떠난 후에도 지속된다. 지치지 말고, 쓰러져도 일어서 끝까지 가야 할 일이다. /김 별 아 소설가

세상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경기일보가 창간 16주년을 맞아 지면을 개편하면서 오피니언 면을 대폭 강화, 각계 전문가들의 의견을 담아내는 요일별 칼럼을 신설합니다. 독자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보다 진솔한 지면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온 경기일보는 우리 사회와 국가 안팎의 이슈들에 대해 깊이있고 다양한 시각과 해법을 제시할 것입니다. ■‘경기시론’ 매주 월요일 우리 사회의 다양한 현안에 대해 깊이있고 예리한 필치로 현실을 진단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경기시론’을 신설합니다. 고순철 협성대 교수(지역사회개발학), 노태구 경기대 교수(정치학), 이원희 한경대 교수(행정학), 이종선 경기도박물관장(한국상고사학회장)의 글이 답답한 세상에 해법을 제시할 것입니다. ■‘신세묵 칼럼’ / ‘홍사종 칼럼’ 매주 화요일에는 대표적인 향토 언론인이자 소설가인 신세묵씨의 칼럼과, 경기도문화의전당 사장인 홍사종씨(숙명여대 정책대학원 교수)의 칼럼을 격주로 싣습니다. 두 칼럼니스트가 정치 사회 문화 등 다방면의 사회 이슈들에 대해 진지한 담론을 펼쳐낼 것입니다. ■‘경제프리즘’ 수요일에는 경제전문가들을 초청, 국내외 경제 흐름과 쟁점 등을 날카롭게 분석하고 미래 비전을 모색하는 ‘경제프리즘’을 마련합니다. 필진은 김인호 한양대 산업경영대학원장, 김창수 한국토지공사 토지연구원 수석연구원, 이종선 산업자원부 자문위원, 홍종운 농촌진흥청 농업기술상담위원 등입니다. ■‘시민중계석’ / ‘교단에서’ 매주 목요일에는 시민사회단체(NGO)들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시민중계석’과 교육현장의 애환과 비전을 제시하는 ‘교단에서’를 격주로 싣습니다. ‘시민중계석’은 염태영 수원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유해숙 평화와 참여로 가는 인천연대 협동사무처장, 한옥자 경기시민사회포럼 운영위원장 등입니다. 또한 ‘교단에서’는 김국회 수원 화홍고등학교 교감, 남명자 아주대 교수(교육학), 임용담 안산 석수초등학교 교장이 엮어갑니다. ■‘장병용의 아름다운 이야기’ 수원 등불감리교회 목사로 장애인들을 위한 사랑나눔운동을 펼치고 있는 장병용씨의 가슴 따뜻한 이야기가 매주 금요일 격주로 실립니다. 아름다움이 인간을 구원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미학적 글쓰기를 해온 장 목사는 ‘못난 놈들에게 부침’ ‘먹감나무 한그루’ ‘아름다운 동행’ 이라는 책을 펴낸 바 있습니다. ■‘문화카페’ 각계 문화계 인사들이 예술과 사회문화 현상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문화카페’를 금요일 격주로 마련합니다. 구자흥 의정부예술의전당 관장, 소설가 김별아씨, 박석무 다산연구소 소장이자 경기실학현양추진위원회 위원장, 윤명철 한국해양연구소장(탐험가)이 참여하는 칼럼은 세파를 일깨우는 청량제가 될 것입니다.

紙面 대혁신…새벽을 바꿉니다

1천300만 경기·인천 지역민의 애환을 대변해온 ‘자치시대의 벗’ 경기일보가 창간 16주년을 맞아 확 달라진 지면으로 독자 여러분을 찾아 갑니다. 보는 ‘신문’으로 탈바꿈 다양한 이미지와 삽화, 한눈에 기사 내용을 가늠할 수 있는 그래픽, 시원시원한 제목 등으로 그날의 전반적인 뉴스와 이슈 등을 보기 편하고 읽기 쉽게 배치합니다. 1면에는 그날 핫 이슈나 화제의 인물을 선정, 독자 여러분의 갈증을 상쾌하게 풀어 드리겠습니다. ‘보는’ 신문의 즐거움을 선사하기 위해 보다 다채로운 제목 서체도 선보입니다. 지면 전면 재구성 1면을 생활 중심으로 재구성하고 기존 18~19면에 배치했던 사회면은 3~4면으로 옮기는 한편 문화면과 체육면, 오피니언 등은 독자들이 먼저 정치나 사회·경제 분야 소식들을 먼저 읽은 뒤 좀 더 여유을 갖고 부드럽고 세심하게 생활에 활용할 수 있도록 뒷 부분으로 배치했습니다. 오피니언 대폭 강화 각계각층의 중량감 있는 인사들이 정치와 경제, 사회 전반적인 핫 이슈를 심도 있게 분석한 글들이 요일별, 테마별로 게재됩니다. 매주 월요일은 날카로운 시각으로 지난 주의 핫 이슈를 분석하는 ‘경기시론’, 화요일은 부드러운 필치로 사회 구석구석을 관조하는 ‘신세묵 칼럼’과 ‘홍사종 칼럼’, 수요일은 경제문제를 진단하는 ‘경제프리즘’, 목요일은 NGO와 교육계 목소리를 담는 ‘시민중계석’과 ‘교단에서’, 금요일은 문화계의 다채로운 의견을 들어 보는 ‘문화카페’ 등으로 독자 여러분을 찾아 갑니다. 월요일 증면·핫이슈 조명 사회 전반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주5일근무제에 맞춰 매주 월요일은 24면으로 증면, 금주의 ‘뜨거운 감자’를 선정, 현미경을 들이 대고 심층 취재, 문제점을 집중 분석하고 해결방안을 제시합니다. 토요일자는 16면으로 감면하는 대신 웰빙시대에 부합되는 꼭 필요하고 중요한 정보들만 엄선해 담겠습니다. 다채로운 기획물 신설 지구촌시대를 맞아 철의 실크로드 등 지구촌 구석 구석을 찾아 현장의 디지털시대 이후 달라진 풍물들을 전하고 지난 10여년동안 산업현장의 숨은 주역으로 활동해온 외국인 노동자들의 어제와 오늘을 담겠습니다. 특히 수시로 쏟아 지는 각종 정책들과 이에 따른 찬반 논란, 사회에 뜨거운 반향을 일으킨 사건이나 사고 등을 집중 조명하는등 기사의 질적 업그레이드를 통해 독자 여러분에게 그동안 목 말랐던 정보들을 깊이 있게 제공합니다. 그늘진 구석에 희망의 빛을… 날마다 터지고 불거지는 대형 사건과 강력 사건에 정부가 내놓는 정책들도 어지럽기만 합니다. 사회도 갈수록 메말라 가고 있는 실정에서 더불어 함께 가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소외되고 고통 받는 이웃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 넣겠습니다. 장애우, 독거 노인, 무의탁 어린이,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각종 사업과 심층 보도는 물론 베트남과 우즈베키스탄 등 지구촌 곳곳에서 심장병 등 불치병을 앓고 있는 어린이들을 무료로 수술해주는 현장도 찾아 사회의 어두운 구석을 밝혀 주는 신문이 되겠습니다.

문화의 窓/본사 - 道박물관 주최 18일까지 도박물관서

‘작품 보고… 선물도 받고’ 먹의 유혹… 색다른 감동 현대 조형서예의 오늘과 내일을 가늠해보는 ‘먹의 유혹-조형서예의 미래’展이 관람객들의 큰 호응속에 성황리에 개최되고 있다. 지난 6월 20일 개막하면서 공연과 퍼포먼스, 부채 나눠주기 등 참신한 전시내용 만큼이나 다양한 이벤트를 마련해 인기를 얻은 이번 전시는 서예인은 물론 일반인들의 많은 관심을 끌고있다. 경기도박물관과 경기일보가 공동 주최하는 이번 행사에선 지난 10일 ‘현대 조형서예의 발전방향’을 주제로 학술강연회를 열어 전시의 의미를 되짚어보며 조형서예와 관련, 심도있는 주제발표를 갖기도 했다. 전시에선 또 참여작가와 관람객이 함께하며 소통하는 축제의 장을 연출했다. 일반 전시회의 정적인 이미지를 넘어 작가들의 시연행사는 활기가 넘쳤으며 관람객들은 이를 즐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10일 오후 도박물관 로비에서 펼쳐진 전각·서각 시연에선 행운권 추첨을 통해 당첨된 관람객들에게 참여작가들이 멋진 도장을 파주었는가 하면, 부채에 직접 글과 그림을 넣어 선물하기도 했다. 또 쉽게 볼 수 없는 서각(書刻)작품도 선보여 어린이·청소년들에게 산교육의 장을 연출했다. 작가 장세훈씨는 “일반적인 시연행사의 개념을 넘어 관람객들과의 교감을 더욱 친밀하게 하기위해 이런 시간을 마련했다”며 “작가들의 작품을 보러 와준데 대한 일종의 감사의 표시이자 전시에 대한 작가의 적극적인 참여 의지를 실현시킨데 의의가 크다”고 말했다. 관람객들 또한 마냥 행복한 모습. 즉석에서 작가들의 멋진 작품을 받아든 관람객들은 기대치않은 보너스에 흐뭇해했다. 서예에 관심이 많다는 최연숙씨(여·38)는 “평소 쉽게 접할 수 없는 신선한 작품들을 보고 기분이 좋았는데 선물까지 받게돼 기쁘다”며 “특히 관람객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온 듯한 느낌은 이번 전시의 특별함이 아닌가 한다”고 말했다. ‘먹의 유혹전’은 18일까지 계속된다. /박노훈기자 nhpark@kg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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