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그동안 앓던 왼쪽 다리의 통증이 격화돼 참지 못하고 한동안 신음했다. 그저 아프지만 않으면 바로 그게 건강이고 행복이 아니겠는가. 나으면 생각이 바뀔 것이지만 절실한 심정으로 오랜만에 병자의 모습을 나는 내게서 보고 있다. 후회막급이지만 이렇게 된 원인은 허리가 부실한데도 한 열흘 의자에 앉아 컴퓨터를 사용하면서 그 자세가 나도 모르게 불량하였기 때문이다. 불량한 자세가 관절 관련 병을 부른다는 사실을 다시 통감한다. 자업자득(自業自得).
그런데 우리 삶에서 어디 이뿐이랴. 일상의 대화에서도 불량한 자세는 상대를 화나게도 하며 관계를 갈등으로 몰아넣는다. 사람의 의사표현에는 본인의 의도와 관계없이 말의 메시지뿐만 아니라 관련 어조와 말투, 표정과 눈빛과 제스처도 밀접하게 관련된다. 메시지 자체는 감내 가능하여도 그것들이 불량하면 상대는 기분이 손상되고 반감이 야기되며 언성이 높아지다가 결국 서로 한바탕 증오 어린 언쟁을 벌이게 된다. 하나 마나 한 이야기인가.
하지만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면 그렇다고 하기 저어 된다. 특히 국회의 국정 관련 질문과 대답에서 장관과 국회의원들이 대화하는 양상을 보면 서로 자신의 입장과 이해에 몰두하여 상대에의 자세가 불량하다. 아무리 이해가 다르고 당리당략이 있다고 하더라도 국민 앞에서 국사를 다룬다면 국민을 의식하며 격식을 갖춰야 할 것이다. 국민은 그런 자세에 실망할 뿐만 아니라 본인들의 의도를 떠나 국민을 경시하는 듯한 방약무인(傍若無人)에 불편해한다는 사실을 새삼 알아야 한다. 그 자세가 국민을 진영으로 나누고 자기 진영의 성원을 의식한 자제하지 않은 연출이라면 국민은 더욱 불쾌할 것이다.
국민 다수는 어느 편이 아니다. 어느 편이 이기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당리당략이나 이데올로기가 시시비비를 넘어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의 관점에 따라 동어반복을 계속하며 상대의 관점을 외면하거나 배타하는 시선과 표정과 말투는 상대뿐만 아니라 국민도 상대로 하겠다는 것이다.
여와 야, 진보와 보수는 실은 그 자체가 아니라 절충과 승화를 위해 존재하지 어느 진영을 위한 세력이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도 계속된다면 일방 태도들에 결국 나라가 아플 것이다. 쑤시고 저린 통증에 나라의 기력이 고갈되어 간다면 기가 찬 국력 낭비가 아니겠는가. 상호 배려하고 존중하며 이성하기(怡聲下氣)로 국사를 조리 있게 검토하고 검증하여 유불리를 떠나 국가의 기율을 바로 세워야 할 것이다.
프란츠 카프카는 「변신」에서 벌레가 되어 가는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의 비극을 그렸다. 엉뚱한 비유일지 모르겠지만, 공정과 시비를 제치고 이해와 당리당략에 몰두하면 할수록 우리는 마침내 다른 버전, 즉 자업자득의 그레고르 잠자가 될지 모른다.
김승종 연성대 교수 시인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