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면서] 사회적 약자의 문화예술 향유 권리 ‘배리어프리’

비장애인에게 문화예술 향유는 하나의 ‘일상’으로 받아들여지는 측면이 있다. 시간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야 하고 공연·전시 관람 등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이 일차적으로 수반돼야 한다는 전제가 붙지만 비장애인의 문화예술 향유는 근본적으로 개방성의 특징을 지닌다. 문화예술 소비는 미국의 심리학자 매슬로가 제시한 인간의 다섯 가지 욕구 중 가장 높은 단계인 ‘자기실현’ 욕구, 즉 자기계발과 자아실현에 해당한다. 소비자는 다양한 문화예술 참여 활동을 통해 자기실현을 도모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심각한 불균형이 발생한다. 비장애인의 거침없는 문화예술 소비 접근과 달리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의 문화 향유에는 커다란 장벽이 버티고 있다. 이를 전문 용어로 ‘배리어'(Barrier)’라 부르며 자막이나 수어 통역, 음성 해설 등을 통해 문화예술 관람 장애를 없애려는 시도를 ‘배리어프리’라고 한다. 사회적 약자에게 문화예술 소비는 설렘과 즐거움의 대상이기보다는 두려움의 대상이라고 보는 게 옳다. 그 원인은 접근성의 결여에서 찾을 수 있다. 신체적 불편함을 안고 살아가는 사회적 약자들이 보고 싶은 연극이나 콘서트, 전시, 영화 등 문화예술 콘텐츠 제공 시설에 무난하게 접근하기란 구조적으로 어려움이 따른다. 가족이나 친구 같은 조력자가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문화예술 공간 접근 자체가 버거운 일이다. 가까스로 문화예술 시설에 들어서는 데 성공했더라도 사회적 약자를 위한 배리어프리 인프라가 확보돼 있지 않으면 문화예술 향유는 또 한 차례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이는 정부 데이터에서도 확인된다. 예술경영지원센터가 발표한 ‘2021 공연예술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장애인석을 갖춘 공연장은 전체의 57.5%에 불과했고 대학로 공연장 120곳에 대한 조사(2018년 기준)에서는 휠체어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도움 없이 들어갈 수 있는 공연장은 불과 14곳뿐이었다. 대학로 공연장의 대부분이 통로가 비좁고 계단이 가팔라 사회적 약자에게 심각한 ‘배리어’가 되고 있다는 결론이다. 장애인 전용석은 거의 맨 앞이나 맨 뒤에 위치해 시야가 보장되지 않거나 선택의 자유를 막고 있다. 문화예술 분야의 배리어프리가 걸음마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쉽다. 배리어프리가 적용되고 있는 문화예술 콘텐츠는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을 받은 콘텐츠가 사실상 전부나 마찬가지다. 만성적인 재정난을 겪고 있는 민간 극단이나 제작사 등은 배리어프리 도입 시 소요될 별도의 예산 때문에 엄두도 못 내고 있는 실정이다. 관람 방해 등을 이유로 배리어프리에 부정적인 비장애인들의 인식은 개선되지 않고 있다. 장애인들이 배리어 걱정 없이 비장애인처럼 유명 가수의 콘서트를 즐기고, 인기 뮤지컬에 환호하고, 클래식 연주에 푹 빠져 드는 경험을 하는 것은 우리 헌법과 문화기본법에도 규정된 문화적 권리다. 주말에 문화예술을 향유하는 장애인은 6.9%에 불과한 반면 비장애인은 20.1%라는 정부 통계 수치(2019년 기준)는 사회적 약자 대상의 배리어프리 확대 필요성을 시사하고 있다. 김진각 성신여대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

[아침을 열면서] 지하철 탄 풍경

얼마 전 필자가 탔던 지하철에서 작은 소동이 있었다. 객차 내부는 착석한 승객과 입석 승객의 숫자가 엇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한눈에도 70대쯤으로 보이는 큰 덩치의 백발 노인이 탑승한 뒤 경로석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경로석에는 노인들 사이에 중장년쯤으로 보이는 작은 체구의 승객이 한 명 있었다. 백발 노인은 그 사람 앞에서 “어른이 앞에 서 있는데 왜 경로석에 앉아 있느냐”라면서 시비를 걸었다. 처음에는 앉아 있던 승객이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자 주변 승객들이 들으라는 듯 백발 노인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급기야 ‘배운 것도 없는 어린 놈의 자식’이라는 등 거친 언사를 쏟아내자, 이번에는 앉아 있던 승객도 지지 않고 자기도 나이 먹을 만큼 먹었다며 응수했더니 심한 욕설이 난무하는 말싸움이 돼 버렸다. 주변 노인들이 말려도 별 소용이 없었다. 결국 앉아 있던 승객이 자기 주민증을 꺼내 보이며 “내가 보기에는 염색해서 그렇지 XX년생이다. 너는 몇 년생이냐? 네 주민증 한번 까봐라” 했더니 객차 안의 승객들 시선이 일제히 그 백발 노인 쪽으로 쏠렸다. 그러자 백발 노인은 갑자기 바닥에 드러누워 발악을 하기 시작했다. 십중팔구 자기보다 더 나이가 많았으리라. 사람들이 흔히 하는 실수는 자신의 감각을 기준으로 사물을 판단하는 것에서 온다. 하지만 객관적인 측면에서 우리의 감각이란 신뢰할 수 있는 척도가 전혀 아니다. ‘착시현상’이 대표적이다. 똑같은 크기의 옷이라도 가로 방향 줄무늬보다 세로 방향 줄무늬가 더 키를 크게 보이도록 만든다. 미국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퇴역 군인들을 대상으로 장기간에 걸쳐 추적 조사를 한 보고서가 발표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군인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신의 전투 경험담이 점점 강화되는 추세를 보였고 심지어 행정병이어서 전투현장에 없었던 군인들마저 그런 경향이 보고됐다. 즉, 기억의 왜곡이 일반적으로 관찰됐으며 대부분은 왜곡된 기억을 진실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현대물리학에서는 원자와 그 이하의 미시적인 세계를 다루는 ‘양자역학’이라는 분야가 있다. 그런데 완전히 상반되는 두 상태가 한 시점에 공존할 수 있다는 양자역학의 해석을 둘러싸고 한 세기에 걸쳐 유명한 논쟁이 있었다. 예를 들면 동전을 던지면 앞면 또는 뒷면의 두 가지 경우만이 나와야 하는데 앞면과 뒷면이 동시에 존재하는 경우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흔히 ‘슈뢰딩거의 고양이’라고도 표현되는 양자역학의 모순점은 분명 우리의 감각 세계에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다. 그러나 현대물리학은 이렇게 되묻고 있다. “왜 인간의 감각과 언어가 척도가 돼야 하나?” 그래서 현대물리학은 양자역학의 모순점에 대한 공격에 이렇게 답한다. “Shut up, and calculate it!(닥치고 계산이나 해!)” 즉, 양자역학의 내용을 인간의 감각과 표현으로는 모순점을 도저히 해결할 수 없지만, 그건 인간의 문제이지 자연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양자역학의 파동방정식은 현재 모든 전자제품의 제조에 전혀 오차가 없이 적용되고 있다. 즉, 내게 보이고 들리는 것이 모든 것이 아니다. 따라서 내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것까지 고려해야 한다. 심지어 내가 알지 못하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그러려면 겸손해져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그릇을 계속 키우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을 되새겨 보자. 최동군 지우학문화연구소 대표

[아침을 열면서] 세월이 가르쳐 주는 것

나이 들면서 얻은 좋은 배움 하나가 있다. 바로 천천히 운전할 줄 아는 능력이다. 언젠가 그런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천천히 운전할 줄 아는 것도 능력이라고. 젊을 때여서인지 말이야 막걸리야 하며 흘려듣고 말았다. 그때는 속도제한 아래로 가는 게 손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속도제한이 없는 구간이 있는 아우토반을 달리며 학생 처지의 차라서 더 빨리 달릴 수 없는 걸 아쉬워하며 빠른 속도감을 만끽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면 차의 진행을 가로막는 앞의 차들이 한심하다 못해 부아를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빨리 달리지 않을 권리를 인정하지만, 그러려면 그에 합당한 차선을 타면 되는데 느리게 달리면서 굳이 1차선을 고집하는 심보는 뭐란 말인가. 클랙슨 울리는 걸 무척 삼가는 독일에서도 저런 경우에는 사정이 없다. 다같이 위험하기 때문이다. 다른 데서 그렇게 경적을 울리면 고소를 당할 수도 있다. 나이가 들면서 비로소 속도제한을 넘지 않고서도 느긋하게 달릴 줄 알게 됐다. 앞에서 꾸물거려도 이제는 무슨 사연이 있겠지 하며 이해가 된다. 지인 중에 느지막이 학원 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있다. 언젠가 이런 소리를 했다. 처음 한 6~7개월 운전하다 보니 동네가 작아서 그런지 신호 순서를 다 외우게 됐단다. 그때부터 효율성을 추구하는 성과주의란 뱀이 머리에 똬리를 틀었단다. 그래서 유난히 신호대기가 긴 신호가 바뀐다 싶으면 길을 우회하기도 하고 때로는 무리하기도 하면서 빨리빨리를 실천해 갔다. 그러자니 앞에서 꾸물거리는 차들에 화가 나 어느 순간 욕이 튀어나오더란다. 아이들 태운 차에서…. 그 순간 정신의 급브레이크를 밟고는 그 효율이 대체 얼마나 되나 짚어보았더니 아무래도 위험 가능성이며 스트레스를 상쇄하고 남을 정도는 되지 않겠다 싶더란다. 그때부터 애써 마음을 비우며 신호를 생각하지 않고 따르려고 했단다. 녹색 신호등이면 가고, 다른 불이면 멈추고. 그러며 얼마 지나니 운전하며 피로하거나 스트레스 받는 일이 거의 없어졌단다. 사회의 지도자가 아니더라도 줄에서 앞에 선 사람은 남보다 정신을 더 차려야 한다. 신호를 기다리는 차들에서 맨 앞의 차를 모는 사람이 해찰해 시간을 까먹으면 혼자 시간만 버리는 게 아니라 뒤에 있는 사람들 모두의 시간을 빼앗는 셈이다. 그래서 그건 일종의 에티켓이자 사회적 책임이기도 하다. 그렇긴 하지만 사람이 살다 보면 모르는 사이에 실수하기도 한다. 젊어서는 용납되지 않지만 나이가 들면서 화를 내기 전에 분노의 클랙슨이 아니라 넌지시 보내는 주의의 짧은 경적을 보내거나 아니면 기다려줄 줄도 알게 됐다. 바로 나이의 선물이다. 계절의 흐름을 따라 나무들이 나뭇잎 다 떨구고 시린 알몸으로 침묵의 동안거 수양에 들어갔다. 세월 따라 결따라 살자고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아 본다. 세월이 가르쳐준 그 진솔함에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김근홍 강남대 교수·한독교육복지연구원장

[아침을 열면서] 우리 곁으로 돌아온 수달

몇 해 전 일이다. 어둠이 내려앉은 오산천 둑길을 걷는데 어디선가 고주파 소리가 들려왔다. ‘삐익삐익’, 밤중에 웬 새 소리인가 싶었다. 소리가 나는 쪽에선 자맥질을 하며 수면 위 파동을 남기는 괴생명체의 실루엣이 보인다. 길고 매끈한 몸뚱이에 도톰한 꼬리를 가진 녀석의 정체는 바로 수달이다. 시민들의 발걸음과 가로등 불빛, 자동차 소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수달 두 마리의 유영은 한동안 이어졌다. 수달은 식육목 족제빗과에 속하는 포유동물이다. 다른 동물들과 달리 숲과 들이 아니라 강과 저수지 등 물을 끼고 살아간다. 몸길이의 3분의 2에 달하는 긴 꼬리는 물속에서 방향타 역할을 한다. 머리는 납작하고, 몸은 유선형으로 물의 저항을 최대한 줄일 수 있다. 다섯 개의 발가락 사이엔 물갈퀴가 있어 헤엄치기 좋다. 귀는 작고 콧구멍은 수중에서 자유자재로 여닫을 수 있다. 입 주변에 난 수염은 물흐름과 물고기 이동을 추적하는 레이더 역할을 한다. 그야말로 수달은 수중생활에 최적화된 신체구조를 가지고 있다. 하천에서 주로 생활하고, 수영을 잘하는 만큼 수달의 먹이는 물고기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블루길, 배스 같은 생태계 교란종을 잡아먹기도 한다. 그 밖에도 개구리, 민물게 등 양서·파충류와 갑각류를, 드물게 흰뺨검둥오리, 물닭, 논병아리 같은 수변에 사는 새를 사냥하기도 한다. 이처럼 수달은 우리나라 하천 생태계 먹이사슬에서 최정점에 자리 잡고 있으며, 수생태계의 건강성을 나타내는 지표종이기도 하다. 수달이 서식한다는 것은 그만큼 하천의 먹이사슬 구조가 안정적이라는 것을 입증한다. 또 수생태계의 질서, 즉 먹이사슬의 균형을 조절해주는 핵심종으로 그 역할이 중요시되고 있다. 수달은 세계자연보전연맹(IUCN) ‘멸종위기근접종’, 환경부 ‘멸종위기 1급 야생생물’로 지정된 멸종위기종이지만 다행히 과거에 비해 서식 분포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서울 중랑천, 부산 온천천, 대구 신천, 전주 전주천 등 도심하천에서도 수달 서식이 확인되고 있다. 경기도에도 황구지천, 안성천, 오산천, 탄천, 경안천 등 과거 서식 기록이 없던 하천에서 수달이 출현하고 있다. 하지만 서식 범위가 확장되었다고 해서 결코 수달 보호에 대한 긴장의 끈을 놓아선 안 된다. 수달은 하천을 따라 생활하므로 생활기반이 좁으며 하천생태계 교란에 취약하다. 한정된 서식공간을 두고 개체 간 경쟁도 치열하므로 서식밀도는 높지 않다. 하천을 직강화하고 콘크리트 제방을 쌓는 등의 하천정비사업은 수달의 은신처와 보금자리를 앗아간다. 댐, 수중보 같은 하천구조물은 수달의 이동과 개체군 교류를 막는 장애물로 작용한다. 또한 수달은 최상위 포식자인 만큼 화학물질과 중금속 생물농축에 취약하며, 물고기를 잡기 위해 설치한 그물이나 통발에 희생되기도 한다. 일본의 경우 수달이 1980년대 들어 자취를 감췄으며 결국 일본 정부는 2012년 수달 멸종을 공식 선언하기에 이른다. 우리나라를 찾은 일본 동물학자들은 한국의 수달 존재 자체를 부러워한다. ‘있을 때 잘하자’라는 교훈을 되새겨 봄직하다. 경기도를 적시는 하천별로 맞춤형 수달 보호종합계획을 마련해 서식지 보전방안을 실천하고 위협 요인을 줄이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 산에 호랑이 표범은 사라졌지만 우리 강에 수달은 살아남아 참으로 다행이다.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오고 있는 수달을 반갑게 맞이하자. 우동걸 국립생태원 박사

[아침을 열면서] 원로배우 전성시대, 그 묵직한 함의

20세기 초 러시아의 저명한 연극 연출가이자 연기 이론가인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1863~1938)와 스타니슬랍스키의 사실주의 연극 기법을 한국에 처음 소개한 연극의 선구자 이해랑(1916~1989)이 살아있었어도 지금의 한국적 연극 상황을 감지하진 못했을 것 같다. 전례 없는 ‘원로배우 전성시대’가 펼쳐지고 있는 이 현실을. 순수예술 장르를 대표하는 연극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주인공이 연기에 한창 물이 오른 30, 40대의 배우가 아닌 70대 이상의 원로배우라는 사실은 한편으론 놀라우면서도 그것의 함의는 결코 가볍지 않다. 무대에서 열정을 쏟아붓는 원로배우들의 행보는 데이터로 확인된다. 티켓 예매 사이트인 인터파크에 따르면 올 들어 11월 현재까지 연극 티켓 판매 점유율 중 70대 이상의 배우들이 주연을 맡거나 조연으로 등장한 연극들이 대거 상위권을 점령하고 있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으로 유명세를 탄 오영수(78)와 신구(80)가 주연한 ‘라스트 세션’이 전체 5위를 기록한 것을 비롯해 박정자(80), 손숙(78), 전무송(81) 등이 출연한 ‘햄릿’ 6위, 오영수와 박정자가 출연한 ‘러브레터’ 18위, 신구와 정동환(73), 서인석(73)이 주연한 ‘두 교황’은 19위에 각각 올랐다. 90세를 바라보는 이순재(88)가 백일섭(76), 노주현(76)과 함께 열연 중인 ‘아트’ 역시 흥행 순항을 하고 있다. 예전에도 대중적으로 알려진 원로배우가 주연으로 나선 연극이 큰 관심을 끌면서 티켓 파워를 과시한 사례가 있긴 하지만, 그것은 일부 공연에 국한됐다. 올해처럼 연기 경력 50년 이상(이순재는 66년의 연기 경력을 갖고 있다)의 원로배우들이 대거 연극계에 뛰어들어 흥행몰이를 주도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현상은 연극의 대중화 기여라는 측면에서 일단 긍정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와 드라마 등 대중적인 영상매체를 통해 익숙한 유명 원로배우의 농익은 연기는 연극의 주 관객층인 20, 30대 여성은 물론 연극 장르에 무관심했던 중·장년층을 공연장으로 이끌면서 문화예술 콘텐츠의 기초가 되는 연극의 저변 확대에 일조한다. 그럼에도 놓쳐선 안 될 지점이 있다. 원로배우들의 활약이 연극을 넘어 공연예술 전반의 성장으로 이어지는 동력이 돼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작품의 흥행 못지않게 신인 연기자를 육성하고 전문 배우의 연기력을 키워야 하는 숙제가 문화예술계, 특히 공연예술계에 주어져 있으나 해법이 난망하다, 더구나 이 같은 상황에서 흥행을 위해 유명 배우와 지명도 높은 연출가를 앞세운 이른바 ‘스타 마케팅’이 공연 제작의 공식처럼 고착화된다면 연극적 토양은 척박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원로배우 전성시대는 공연예술 발전의 기회이자 위기이기도 하다. 나이를 잊은 원로배우들의 거침없는 활동이 연극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데 촉매제가 됐다면, 남은 과제는 코로나19 이후 위축된 공연계를 돌아보고 발전을 도모하는 데 모아져야 한다. 원로배우의 역할은 무대에 머물러선 안 된다. 이들의 연기적 노하우와 혜안을 정책 당국의 의지와 접목해야 할 때가 왔다. 김진각 성신여대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

[아침을 열면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장면 1 : ‘초등학교 1학년생에게 모르는 어른이 다가와 우체국으로 가는 길을 자세히 알려 달라고 한다면?’ 아마 대부분의 성인들이 기대하는 대답은 ‘아는 대로 자세하고 친절하게 말씀드린다’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초등학교에서는 조금 다르게 가르친다고 한다. ‘아는 곳이더라도 낯선 사람이 길을 물으며 특히 같이 가달라고 하면 단호하게 거절한다’가 정답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정말 도움이 필요한 어른이라면 어른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초등학생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그래서인지 요즘 주변의 초등학생들에게 뭔가를 물어보거나 말을 걸면 상냥한 태도로 대하기보다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자신을 훑어보는 것을 직감할 수 있다. ‘세상이 참으로 각박하게 변하고 있구나’를 느끼는 순간이다. 장면 2 : 코로나가 전 세계로 무섭게 확산하던 2020년 상반기의 일이다. 저녁에 식구들과 거실에서 TV를 보던 중 뉴스에서는 미국의 쇼핑센터에서 사재기가 극성이며, 특히 두루마리 화장지를 확보하려고 사람들이 서로 주먹다짐까지 하는 장면이 흘러나왔다. 세계 최강국이며 선진국인 미국에서 사람들이 겨우 두루마리 화장지를 놓고 싸움까지 하다니, 나와 아내는 혀를 끌끌 찼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무심결에 ‘화장지가 없으면 신문지를 써도 될 텐데…’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그때 내 아이들이 나를 쳐다보는 눈길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곧이어 딸이 한마디 내뱉었다. “아니 어떻게, 아빠가 그런 말도 안 되는….” 그렇다. 우리 아이들 역시 화장실에서 뒤처리할 때는 비데와 화장지 외에 해 본 적이 없다. 우리 아이들은 이미 선진국의 아이들이다. 어려서부터 집에 자가용이 있었고, 먹고 싶고, 하고 싶고, 가지고 싶은 것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원하는 대로 이룰 수 있었다. 아마 이 지구상의 한 시점과 한 장소에서 선진국의 아이들, 중진국의 부모들, 후진국의 조부모들이 공존하는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한 것 같다. 그래서인지 세대 간의 간극이 쉽게 좁혀지지 않는 듯한데, 특히 노인 세대가 느끼는 정도는 더 심한 것 같다. 전쟁까지 겪고 피와 땀으로 조국의 산업화를 이루었지만, 지금은 사회에서 철저히 구조적으로 소외되고 있다. 사실 역사적으로 노인 세대의 소외라는 현상은 늘 있던 일이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예전에는 노인들의 삶의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것도 있었고 집안에서도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권위는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찾아볼 수 없다. 특히 지금과 같은 4차 산업사회 환경에서는 노인들은 거의 디지털 문맹이므로 인터넷 또는 온라인상에서 처리할 수 있는 일이 드물다. 고작해야 휴대폰의 유튜브 채널로부터 편협된 세상과 만나는 것이 고작이다. 이제는 노인 세대를 위한 적극적인 정책을 펴야 한다. 개인에게 문제 해결을 기대할 수는 없다. 하지만 현재 사회는 걱정만 할 뿐이고 실효적인 대책은 없는 것 같다. 국가가 발 벗고 나서야 한다. 단지 금전적인 지원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노인들이 삶의 의미를 되찾을 수 있는 방안을 다각도로 찾고 이를 전 세대와 함께 풀어갈 해결책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 노인 문제를 전반적으로 관리할 국가 조직을 제안하는 바다. 최동군 지우학문화연구소 대표

[아침을 열면서] 유리창 너머 세상

가끔 대관령에서 생활하면서 비로소 유리창 너머의 세상이 보인다. 유리창 하나를 두고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마음에 들어온다는 말이겠다. 세상을 대하는 마음이 달라진 덕이 아닐까. 그간 생활해 왔던 어디인들 유리창이 없었겠는가 싶지만, 늘 유리창 안에서 살았던 듯하다. 아니, 사실 제대로 의식할 여유도 없었다. 그러다 유리창 안에 있다는 사실을 이곳 대관령 700고지에서 배워간다. 포슬포슬한 햇감자는 좋아하나 딱딱한 땅을 뒤집고 씨감자를 심는 일은 힘들어하고, 정부의 정책에 분노하지만 대안 제시에 게으르고, 학생들을 사랑하나 학업에 게으른 것 꾸짖음은 망설이며, 재난당한 사람들 처지를 안타까워하면서도 선뜻 나서 작은 실천 하나 하지 못하는, 아니 하지 않는 것과 같다. 남을 보며 나를 반성하는 게 말처럼 쉽지 않았는데, 나이 들어 조금씩 배워간다. 유리창 너머를 바라보며 그 안의 나를 함께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나이 육십이 될 때까지 세상과 대화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 대화는 어떤 의미에서 일방적이었다. 설득하되 설득당하지 않는다. 의식적으로 그 정도로 막무가내는 아니었지만, 나 자신을 대상으로 함께 두고 살펴보지 못했으니 일방에 치우친 셈이다. 이제 자신과 차분히 대화할 때가 됐다. 그러면서 밖을 보니, 유리창이 보이기 시작했다. 밖과 안을 갈라 놓으면서 이어주는 유리창이.... 나뭇잎 떨어져 뒹굴고 수북이 쌓인 가랑잎을 밟으며 걷는 대관령 700고지 11월 창밖의 여백이 그렇게 다가왔다. 무려 열 달을 공들이다가 마지막 사력을 다해 피운, 꽃보다 붉은 단풍. 그러나 이내 떨어져 바람에 몸을 맡기는 가랑잎들은, 할 일을 다한 잎사귀의 득도인가. 옅은 바람에 갈색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11월, 지금까지 알던 사람들을 모르는 척 떠나는 발걸음이 아프다. 이태원 핼러윈 압사 참사 희생자의 영면을 빌면서 주말 아침 어김없이 ‘치유의 숲’에서 웅장한 전나무 길을 걷다 보니, 처음 만나는 들꽃들이 말을 건넨다. 안녕, 유리창 밖으로 나왔구나. 어떻게 바람 잦은 대관령까지 왔다니, 가을에도 꽃이 핀다. 단풍의 화려함에 치여 잘 보이지 않지만, 눈여겨보면 여기저기 많다. 눈에 보여야 말귀도 알아듣는 자세라면 아무리 고함을 질러도 보려고 하지 않는 사람 귀엔 들리지 않는 법이다.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났고, 총체적 부실을 저질러 놓고도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그들에게 사회 안전과 질서에 믿음을 다시 맡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치유의 숲 산책길에 고요함과 적막함에는 도시와 다른 질서와 아름다움이 있다. 허공이 있고, 바람이 있고, 울창한 나무가 있고, 바위도 있다. 그러나 전도유망(前途有望)한 많은 젊은이들을 지키지 못한 자책의 마음이 무겁고 발걸음도 힘겹다. 김근홍 강남대 교수·한독교육복지연구원장

[아침을 열면서] 길 위의 비극, 로드킬

몇 해 전 깊은 밤, 차를 몰고 한적한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별안간 길섶에서 고라니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찰나의 순간, 어찌 손쓸 틈도 없이 그대로 들이받고 말았다. 한동안 운전대 잡기가 힘겨웠다. 충돌 당시 전해진 둔탁한 울림은 여전히 생생하다. 도로 위 많은 동물 주검을 지나치면서 설마 내가 사고를 내진 않겠지라고 생각했지만, 우려가 현실이 되고 말았다. 이처럼 동물이 차량과 충돌해 죽거나 다치는 사고를 우리는 ‘로드킬’이라 부른다. 전국 도로 연장은 11만3천405㎞에 달하며 그 위를 2천507만대의 차량이 달린다. 거미줄처럼 얽힌 도로와 도로 사이사이에서 야생동물이 살아간다. 동물(動物)은 말 그대로 살아서 움직이는 존재다. 야생동물이 살아가려면 부단히 이동하며 먹이를 구하고 잠자리를 정하며 짝을 찾아다녀야 한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인간의 길을 건너 다닐 수 밖에 없다. 산과 산, 산과 들을 잇는 동물 길과 도시와 도시를 잇는 사람 길의 어긋난 만남, 비극의 시작이다. 해마다 우리나라 도로에서는 고라니 6만여마리를 비롯해 약 200만마리의 척추동물이 로드킬로 희생된다. 야생동물 개체군 존속과 생물다양성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 어마어마하다. 사람의 안전 또한 위협받는다. 동물을 피하려다 도로를 이탈하거나 다른 차량과 충돌하는 등 인명 피해가 발생하기도 한다. 특히 요즘과 같은 가을철에 로드킬이 집중적으로 발생한다. 이즈음 희생되는 개체들은 대부분 올봄에 태어난 아성체다. 사람으로 따지면 질풍노도의 청소년기에 해당한다. 야생의 세계에서 포유류 새끼들은 어느 정도 자라나면 어미의 영역에서 벗어나야 한다. 더 이상 어미에게 있어 새끼는 자기 배 속에 품고 젖을 먹인 핏줄이 아니라 제한된 서식공간과 자원을 두고 다투어야 하는 경쟁자다. 바야흐로 가을이 되면 폭풍 성장한 새끼들은 어미 품을 떠나 새로운 서식지를 찾기 위한 대장정에 돌입한다. 이 과정에서 낯선 공간을 탐색하며 끊임없이 도로를 건너야만 한다. 어쩌면 야생동물에게 있어 혹독한 시련의 계절은 정작 겨울이 아닌 가을일 수 있다. 하늘은 높아지고 동면을 앞둔 야생동물은 살찌는 한편, 도로 위의 죽음은 늘어난다. 틀에 박힌 말이지만 로드킬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전방 주시와 규정속도 준수 등 안전운전이 우선이다. 주행 중 동물을 발견했을 때는 가급적 급정거나 갑작스러운 차선 변경을 자제해야 한다. 상향등을 끄고 속도를 서서히 줄이며 경적을 울려 동물이 도로 밖으로 벗어날 수 있도록 유도한다. 도로 위 사체를 발견하면 도로관리기관에 신고하는 것이 좋다. 안전한 곳에 정차하고 정부 통합민원서비스 110으로 신고해 도로관리기관에 알려준다. 사체가 도로에 오랫동안 방치될 경우 이를 피하고자 자동차들의 곡예운전이 계속된다. 또한 사체를 뜯어먹기 위해 도로로 접근하는 동물들로 인한 2차 로드킬이 발생하기도 한다. 불운은 불운을 낳고, 죽음은 죽음을 몰고 온다. 정부는 해마다 로드킬 다발 구간을 중심으로 저감 조치를 시행하고 있지만, 다양한 도로 조건과 주변 여건으로 인해 도로 전 구간의 로드킬을 획기적으로 줄이기엔 역부족이다. 편리한 자동차라는 문명의 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계속 안고 가야 하는 문제라 가볍게 넘기기엔, 로드킬로 인한 사회적 비용은 가히 천문학적이다. 윤리적 측면, 국민안전, 국민정신건강, 자동차 수리비용, 생물다양성 감소 등 로드킬로 인한 피해는 다차원적이다. 로드킬 문제에 대한 꾸준한 사회적 관심과 지속적인 저감조치 확대가 필요한 이유다. 절정에 다다른 단풍잎만큼이나 붉디붉은 도로 위 선혈이 주는 의미를 되새겨 볼 때다. 눈부신 가을 날, 길 위에 선 모든 운전자와 뭇 생명의 안녕을 빈다. 우동걸 국립생태원 박사

[아침을 열면서] K콘텐츠, 창작자 권리보호와 팩트 왜곡 사이

한국의 드라마와 영화, 웹툰 등을 총칭하는 개념인 K콘텐츠는 갈수록 위세를 확장시키고 있다. 이른바 ‘글로벌 K콘텐츠 전성시대’라고 부를 만하다. 특히 드라마와 영화는 높은 화제성과 작품성을 앞세워 글로벌 문화시장을 달구고 있다. K콘텐츠의 놀라운 성과는 세계 최대 규모의 대중예술 시장인 미국에서 개최되는 대중예술 콘텐츠 관련 각종 시상식에서 입증된다. 가깝게는 ‘방송계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올해 에미상 시상식에서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남우주연상과 감독상 등을 수상했고, 영화 ‘기생충’은 앞서 2020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을 거머쥐었다. BTS와 블랙핑크 등 아이돌이 이끄는 K팝의 위상은 아시아를 넘어 미국과 유럽, 남미로 확산되는 흐름이 지속되고 있다. 이쯤 되면 K콘텐츠는 남부러울 것 없는, 흠 잡을 데 없는 순항 그 자체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면을 들여다보면 샴페인을 터뜨리기에는 불편한 진실이 곳곳에서 목도된다. K콘텐츠 한쪽에서는 영화와 드라마 등의 성공을 등에 업고 감독과 작가 등 창작자들이 ‘정당한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영화감독조합(DGK) 소속 감독과 작가들이 최근 국회에 모여 저작권법 개정에 한목소리를 낸 것은 K콘텐츠의 그늘을 시사한다. 콘텐츠 창작자들은 ‘영화 제작자들이 저작권을 취득하면 특약이 없는 한 그 저작권은 제작자들이 양도받은 것으로 본다’는 현행 저작권법 100조 1항 규정을 따진다. 이 조항에 따라 지난해 ‘오징어 게임’이 전 세계에서 선풍적 인기를 누릴 때에도 창작자인 황동혁 감독은 추가 보상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즉, K콘텐츠 저작권이 창작자가 아니라 제작사에 넘어가도록 돼 있는 현행 조항이 창작자 권리를 침해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에 대한 적합한 보상이 있어야 한다는 논리다. 이와 달리 K콘텐츠 다른 한쪽에서는 팩트 왜곡 논란이 심상치 않다. 국내에서 1천200만 관객을 동원하고 전 세계 132개국에 선판매된 영화 ‘범죄도시2’가 베트남에서 상영 금지됐다. 베트남 최대 도시 호찌민을 강력범죄 무법지대처럼 묘사한 것이 원인으로 지적됐다. 최근엔 tvN 드라마로 인기를 모으며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를 통해 소개됐던 ‘작은아씨들’이 역사 왜곡 논란으로 베트남 넷플릭스에서 전격적으로 퇴출됐다. K콘텐츠의 흥행 속에 숨어 있는 이러한 논란이 함의하는 바는 적지 않다. 작금의 K콘텐츠는 우리나라 문화예술산업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국가의 경쟁력이기도 한 문화예술산업을 하나의 비즈니스 영역으로 파악한다면, K콘텐츠가 수익성 추구에 올인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렇더라도 간과해선 안 될 지점이 있다. 특히 다른 나라 역사와 관련한 콘텐츠의 팩트 왜곡은, 그것의 허구적 상황과 관계없이 K콘텐츠 전반에 대한 불신과 거부감을 확산시킬 수 있다. K콘텐츠의 빛과 그늘을 면밀히 살펴야 할 때가 왔다. 김진각 성신여대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

[아침을 열면서] 세상에 공짜는 없다

옛날 어떤 임금이 그 나라의 최고 학자들을 불러 놓고 세상의 모든 진리를 담은 책을 만들라고 했단다. 그래서 학자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한 권의 책이 완성됐다. 임금이 보기에 한 권도 분량이 많으니 더 줄이라고 해서 무려 한 장짜리 보고서가 완성됐다. 임금은 내친김에 더 줄여보라고 했더니, 그 다음 날 다음과 같은 단 한 줄의 문장이 만들어졌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상을 살다 보면 누구든 자신이 의도했든 아니든 다양하고 많은 갈등 상황에 부딪치게 된다. 그래서 예부터 세상살이가 그리 녹록지 않다고 하는 말이 전해 내려오는 것 같다. 그런데 갈등이란 피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듯이 갈등은 어떤 비용을 치르든 깨끗하게 해결해야 한다. 만약 갈등을 미봉책으로 덮고 가면 훗날 더 큰 비용을 치르게 됨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호미로 막을 것을 굳이 가래로 막을 이유가 없다. 우리를 둘러싼 갈등의 대표적인 사례를 꼽는다면 정치적 갈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정치적 갈등이라고 해서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는 말이 있듯이 오히려 진통을 겪으면서도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의 정치 수준이 한층 더 올라갈 수도 있다. 오늘날 서구권의 민주주의 수준이 높은 것은 그간 수많은 시민이 흘린 피의 대가였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다. 그런데 현재 대한민국이 당면하고 있는 정치적 갈등 상황은 매우 우려할 만한 수준으로 보인다. 심지어 흔히 밀월 기간이라고 하는 정권 초기임에도 불구하고 선거에서 상대 진영뿐만 아니라 현 정권을 지지한 사람들마저 절반 가까이가 국정의 전반적인 운영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할 정도라면 이런 정치적 갈등 상황을 초래한 정권 측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봄이 타당하다. 결자해지가 마땅하다. 그런데도 현 정권 측에서는 스스로 만든 갈등조차도 해결을 애써 외면하면서 갈등 해결을 위한 적절한 노력과 비용을 지불하지 않으려는 것으로 비친다. 정치를 비롯해 모든 협상이 내 것을 내놓아야 비로소 시작된다. 정치란 원래 그런 것이다. 내 것을 내놓지 않고 남을 것만 뺏으려면 그것은 정치가 아니다. 정치의 ‘정(政)’ 자에는 ‘바르다(正)’는 뜻과 ‘친다(攵)’는 뜻이 합쳐져 있다. 내가 바르지 않으면 상대방을 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다수의 국민 눈에는 현 정권이 스스로 정정당당하지 못하면서 상대방을 칠 궁리만 하는 것으로 보인다. 제발 기본으로 돌아가자. 그렇지 않으면 5년간의 고통은 오로지 국민의 몫이다. 최동군 지우학문화연구소 대표

[아침을 열면서] 나도 나를 모르는 생각 멈춤

고대 그리스어 ‘에페케인’이란 말은 ‘멈추다’, ‘삼가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판단 중지를 뜻하는 ‘에포케(Epoche)’가 나왔다. 에드문트 후설(1859~1938)의 현상학에서도 비슷한 뜻으로 쓰인다. 일상적 관점을 괄호 안에 넣어 생각과 의식을 멈춰 순수한 체험, 순수 의식을 얻는 걸 말한다. 너무나 당연하고 더구나 객관이라고 아는 걸 괄호 안에 넣기는 쉽지 않다. 불교에서 아상(我相) 이야기도 비슷하다. 내가 있다는 생각, 내가 만들거나 내게 주입된 관념을 버리란 말이다. 왜? 집착과 분열과 갈등이 생기지 않도록. 개인 안에서 저런 것들이 생기면 혼자 괴롭지만, 사회에서 저런 것들이 쌓이면 사회적 갈등이 일어난다. 공부와 학문에서는 정답과 오답의 구분이 제법 확실하다. 그러나 감각, 감정, 생각, 의식 등에서는 그런 구분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건 동물, 인간, 동양인, 한국인 그리고 어느 집안 사람으로서 타고난 유전적 특성들과 살면서 굳어진 상(相), 곧 나의 상 때문에 나타난 거지 그게 꼭 옳고, 그것과 다른 게 그른 건 절대 아니다. 일본의 혐한(嫌韓)이나 유럽인의 유대인 혐오가 다 그렇게 만들어졌다. 우리 사회 안에도 그런 게 얼마나 많겠는가. 다름은 상대를 존중할 때 다양성이 돼 모두에게 도움을 준다. 상대에 대한 존중이 없을 때 다름은 왕따를 낳고 혐오와 갈등을 낳는다. 심하면 살인이 나고 인종 말살 전쟁이 난다. 나도 여전히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일어나곤 한다. 저 짓은 왜 하지? 저걸 어떻게 먹지? 거긴 왜 가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지? 어느덧 그럴 때마다 아상과 에포케를 되뇐다. 공부 때문에 유럽에 나가서 지내던 딸이 객원교수를 명받아 일시 귀국해 모처럼 외식하기로 했다. 딸이 태국 레스토랑을 골랐다. 전 같으면 벌써 한마디 나왔을 텐데 에포케, 잘 참았다. 걱정과 달리 음식도 제법 맛있었다. 나 자신이 외국에서 꽤 오래 생활했는데도 낯선 음식에는 유난히 사리는 편이다. 의식 한편에 모름지기 ‘음식이란...’ 생각이 상이 돼 박혔던 탓이다. 그래 봤자 부모님이 남겨 주시고 자라면서 입에 익은 것뿐인데 말이다. 나도 나를 잘 모르는데 조금 더 들어가 보면, 두 눈으로 직접 보았다고 그것이 반드시 실재고 그게 본디 모습이라고 할 수도 없다. 시야가 다르고 시력도 다르며, 시각정보를 해석하는 뇌도 다르기 때문이다. 하물며 학교에서 배운 독서나 경험으로 얻은 지식도 마찬가지다. 진리로, 공리로 인정된 것이라면 몰라도 적어도 자기 지식이 더 낫다고 우기지는 말아야 한다. 우길 게 아니라 그냥 증명해 보여주면 된다. 무엇보다 서로 상대를 존중해 다양성의 꽃을 피우면 좋겠다. 김근홍 강남대 교수·한독교육복지연구원장

[아침을 열면서] 자연을 관찰해보자

‘차르르르’ 암컷을 부르는 수컷 귀뚜라미는 앞날개를 열심히 비벼 댄다. ‘끼룩끼룩’ 시베리아에서 출발한 기러기 제1진은 일찌감치 한반도를 찾아왔다. 콘크리트 구조물로 가득 찬 도심에도 기어이 가을은 온다. 뜨거운 여름 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은 않고, 창밖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청량감을 가득 안겨준다. 개인적으론 1년 중 서늘함이 반가운 이 시기를 가장 반긴다. 하늘은 높되 여전히 숲은 푸르다. 만추의 서글픔과는 아직 거리가 있어 안도한다. 뭇 생물들은 저마다 생명 활동을 통해 우리에게 계절의 변화를 알려준다. 가까이 존재하는 자연과 생명이지만 사실 대다수 시민들은 자연에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동네에 피어 있는 야생화나 새에 대한 지식보다 날마다 접하는 주가지수나 연예계 뉴스에 익숙하다. 자연과 멀어져 있기에 그만큼 더 쉽게 자연의 훼손과 소멸을 간과하게 된다. 우리 곁에 살아가는 생명체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면 우리 사회는 보다 지속 가능하고 자연 친화적인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다. 우선 일상 속 자연의 존재에 눈을 뜨는 것이 시작이다. 자연에 주의를 기울이고 관찰하다 보면 경외심과 기쁨이 따라온다. 우리를 둘러싼 많은 생명이 존재하며 함께 살아가는 이웃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보다 의미를 확장시키자면 시민과학(Citizen Science)에 직접 참여하는 방법도 있다. 시민과학은 대중 모두가 함께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과학을 일컫는다. 시민들이 협업하고 데이터를 수집해 과학적인 성과를 이뤄 갈 수 있다. 특히 생태학에 있어서는 일상에서 시민들의 생물 관찰 기록이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학자나 전문가가 매 순간 모든 곳에서 생물을 관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빅데이터 처리 기술과 휴대 전자기기 발달로 시민과학의 중요성과 위상은 높아지고 있다. 시민과학 앱을 사용하면 휴대전화로 쉽게 발견한 생물을 기록할 수 있다. 굳이 멀리 갈 필요는 없다. 부담 갖지 말고 주변에 눈에 잘 띄는 동식물을 중심으로 사진과 관찰 기록을 업로드하면 된다. 동네 공원 개화 달력 만들기, 유리창 충돌 조류 기록 등 특정 미션에 참여할 수도, 새로운 미션을 만들어 볼 수도 있다. 꾸준히 참여하다 보면 관찰 기록이 쌓여 가며 성취감과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관찰한 종(種)의 이름을 몰라도 된다. 시민과학에 참여하는 재야의 고수들과 전문가들이 종 이름을 알려주기도 하고, 오류를 바로잡아 주기도 한다. 시민들의 집단지성이 발휘돼 비로소 자연을 지킬 수 있는 소중한 자료로 거듭나게 된다. 꼭 멸종위기종, 희귀종을 찾는 것만이 가치 있는 일은 아니다. 우리 주변 생물 정보는 생물계절, 기후변화, 외래종 확산, 서식종의 변화 등 생태계 보전과 관리에 있어 중요한 단서가 된다. 지금까지 시민 활동에 의해 수원청개구리 울음소리 수집, 제비 도래 시기 파악, 남방큰돌고래 분포 조사 등의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내가 사는 고장에 어떠한 생물들이 깃들어 있는지 자랑해보자. 시민 한 명 한 명의 관찰이 쌓이고 쌓여 마침내 위대한 우리 동네 생태지도가 만들어진다. ‘2022년 9월 12일 수원시 영통구 XX아파트 정원에서 김XX님이 촬영한 여치 사진’은 절대적 고유성을 가지며 대체 불가한 가치를 가진 기록이다. 생명의 존재를 알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같이 살아가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야생생물과 과학은 결코 먼 곳에 있지 않다. 우리 더불어 시민과학자가 되어 보자. 우동걸 국립생태원 박사

[아침을 열면서] ‘임윤찬 신드롬’이 계속되려면

조성진과 임윤찬. 클래식 음악에 익숙하지 않더라도 문화 이슈나 트렌드에 관심이 있다면 한 번쯤 들어봤을 이름들이다. 두 사람은 영재 교육을 받은 피아니스트라는 공통점 외에도 각각 20대 초반과 10대 후반의 나이에 각 나라의 기라성 같은 연주자들이 경연하는 국제 메이저 콩쿠르에서 당당히 우승해 세계 클래식 음악계의 주목을 받았다. 지금은 클래식계의 BTS(방탄소년단)급 스타가 된 조성진(28)이 21세 때인 2015년 쇼팽 국제 피아노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했을 때만 해도 더 이상 세계 최고 수준의 피아노 콩쿠르에서 20대 초반 한국인 연주자의 우승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제2의 조성진’ 탄생에 대한 기대감과 함께 클래식 유망주를 집중 육성할 전기가 마련됐다는 시각도 존재했다. 그로부터 꼭 7년이 지난 2022년 6월, 이번엔 경기 시흥 출신 임윤찬이 조성진이 우승했을 때 나이보다 세 살 어린 18세에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1위를 거머쥐었다. 세계 메이저 피아노 콩쿠르의 하나로 꼽히는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의 역대 최연소 우승 기록이었기에 클래식계는 환호하고 흥분했다. 쇼팽 콩쿠르 우승 이후 ‘흥행 보증수표’가 된 조성진처럼 임윤찬 역시 클래식 아이돌로 초고속 성장하고 있다. 그의 공연은 독주든, 협연이든 연주의 형태와 상관없이, 티켓 가격과 관계없이 팬들을 동원하며 매진 행렬을 이어가고 있으며, 음악학원 마다 피아노 레슨에 대한 문의가 쇄도하고 있다는 보도가 뒤따른다. 조성진이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다음에 나타난 ‘조성진 신드롬’이 ‘임윤찬 신드롬’으로 고스란히 옮겨간 모습이다. 사실 문화예술산업적 관점에서 보자면, 대중화가 더뎌 산업 규모 역시 대중음악이나 영화, 방송 드라마 같은 대중예술과 비교조차 하기 어려운 순수예술 분야의 척박한 환경에서 조성진과 임윤찬 같은 차세대 클래식 스타가 배출된 것은 경이로운 사건에 가깝다. 이와 같은 배경에는 다양한 요인이 있지만, 민간 분야의 지원이 한 몫 했다고 봐야 한다. 조성진과 임윤찬은 어릴 때부터 기업이 만든 문화재단을 통해 레슨과 연주활동 등에 소요되는 경비를 지속적으로 지원 받으면서 ‘꿈’을 향한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이것은 기업의 문화예술 분야 지원을 의미하는 메세나가 톡톡히 위력을 발휘한 사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인기가 개인적 신드롬에 머물러선 안 되며, 클래식 전반의 관심과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계기가 돼야 한다. 이렇게 하려면 음악영재를 중심으로 한 지원 대상의 범위를 보다 넓히는 시도가 정책적으로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정부는 메세나 활동에 대한 기업의 세제 혜택을 확대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함으로써 기업이 보다 많은 예술영재를 육성할 기반을 마련해줘야 하고, 지방자치단체는 해당 지역에 거주하는 클래식 유망주에 대한 실태를 파악해 지원 방안을 수립해야 할 시점이다. 예술적 재능을 갖추고 있지만 형편이 어려워 중도에 포기하는 클래식 유망주들이 적지 않다는 점은 문화예술의 근간이 되는 순수예술 발전을 가로막고 국가의 문화예술 발전을 저해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수년 뒤에도 클래식 분야의 ‘000 신드롬’이 나타날 수 있을까. 김진각 성신여대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

[아침을 열면서] 폐지 수레와 손길

초록불이 반짝 켜진 횡단보도. 폐지 수레를 힘들게 끌고 건너는 할머니가 있다. 뒤에서 속삭이던 두 청춘이 후다닥 달려가 수레 뒤를 밀었다. 그 순간 할머니가 큰소리를 쳐서 주변이 다 놀란다. 그냥 두라는 것! 고맙지만 됐다고 말하면 될 것을, 지나던 사람들마저 멈추게 한 폐지 수레의 한 장면이었다. 뜻밖의 모습에 놀라 뒤를 따라봤다. 이후 할머니는 좁은 길로 들어가서도 큰소리와 함께 수레를 당당하게 밀고 갔다. 뒷모습만 봐도 머쓱함이 짚인 두 청춘은 어디론지 사라졌다. 힘든 할머니 수레 좀 밀어 드리려는 좋은 마음에 벼락 치듯 닥친 거절이 퍽이나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이 그러할진대, 당사자야 말할 수 없이 쑥스러워 다른 골목으로 피한 듯싶다. 며칠 전에 본 폐지 수레의 뒤끝이 여러 생각을 일깨운다. 남을 돕는다는 것. 그것은 이타적인 마음이 있어야 가능한 행동이다. 두 여성은 힘들어 뵈는 할머니를 잠깐이라도 돕자는 선한 동기에서 묻지도 않고 수레를 밀었을 것이다. 그런데 폐지 수레 할머니는 도움 받을 마음이 애초에 없었던 게다.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았는지 모른다. 그렇더라도 할머니는 왜 선의가 무안하도록 큰소리 거절을 했을까. 그 속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도움도 서로의 이해를 전제로 이뤄져야 편하다는 생각을 돌아보게 된다. 어떤 순간만 아니라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실천이 필요한 정책들처럼. 그 장면을 돌려보니 ‘주다’라는 말의 안팎도 다시 뵌다. 표현에 민감한 입장에서는 ‘가지도록 건네거나 베풀다’라는 뜻풀이의 ‘베풀다’도 좀 걸린다. 선물을 준다는 말은 괜찮은데 어떤 경우에는 시혜적 표현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동등한 사이에서 ‘밥 살게’ 하면 편할 것도 ‘밥 사줄게’ 하면 기분이 좀 다르게 닿는 것이다. 실제로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베푸는 듯한’ 말투나 태도는 젊은 층의 거부감을 부른다. 이와 비슷한 상황을 일찍이 집어낸 소설(김유정, ‘동백꽃’)에 무릎을 친 적이 있다. 마름 딸 점순이가 소작인 소년 ‘나’에게 감자를 주면서 “느 집엔 이거 없지?”라고 해서 호의가 더 마음 상하게 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폐지 수레와 관련해 시선과 표현을 다시 본다. 문학에서도 어려운 타자를 연민과 동정의 대상으로 쉽게 그려온 시선의 반성이 늘었다. 복지 같은 문제 제기를 떠나 일방적인 태도나 시선에 담긴 대상화의 우려 때문이다. ‘상명하달’ 같은 위계적 태도에 대한 반발이 성찰로 이어지는 것도 이런 의식과 닿아 있다. 진심의 연민도 상대의 입장에서 깊이 살피는 태도가 필요한 것이다. 이해와 배려도 대등하고 평등한 마음으로. 정수자 시조시인

[아침을 열면서] 문화융성과 컬처노믹스

백범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 마지막 편에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로 시작해서 “오직 한없이 갖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라며 문화강국을 만들고 싶어 했다. 1947년 ‘나의 소원’이란 제목으로 발표한 글이다. 21세기에 이른 지금 세계 각국은 문화융성에 방점을 찍고 산업을 개발하고 문화를 발전시키려고 노력한다. 과거처럼 군사력과 경제력만으로 세계 주류에 진입할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1990년 덴마크 코펜하겐대 페테르 두엘룬 교수가 문화(culture)와 경제(economics)를 합성한 ‘컬처노믹스(Culturenomics)’를 주창했다. 문화와 산업의 융합, 문화 예술을 산업으로 개발, 문화를 바탕으로 한 사회 질서 만들기 등 우리의 생활 전반에 걸쳐 문화를 접목하는 작업이 21세기의 성장동력이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실제로 지금 세계 각국은 컬처노믹스의 꽃을 피운다. 전자제품에서부터 일상 도구까지 문화의 서사(敍事)를 접목하지 않은 상품은 살아남지 못하는 시대가 됐다. 철강과 조선산업이 사양길에 들어서면서 쇠락하던 스페인 바스크 지방에 있는 도시 빌바오는 구겐하임미술관을 세워 도시를 다시 살렸다. 또한 카탈루냐 지방에 있는 조그마한 시골 마을 피게레스는 달리 미술관 하나로 수많은 관광객을 불러 모으고 있다. 광복 77년이 지나 오늘에 이른 우리는 광복 직후 다시 일으켜 세울 우리나라를 문화가 융성한 나라로 만들고 싶다고 외친 백범 김구 선생의 선견지명이 어느 정도 이뤄졌을까. 한없이 부끄러운 마음이 앞선다. 문화를 융성시켜 문화강국을 만들려면 먼저 인문학을 살려야 한다. 문사철(文史哲), 즉 문학·역사·철학이 바로 세워져야 문화가 융성할 수 있다. 문화는 스스로 움직이며 세포분열로 확산하는 생명력이 있다. 이 살아 움직이는 문화를 창조하고 누리는 원천(源泉)이 인문학이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2021년 국민 독서 실태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성인 한 사람이 1년에 책을 4.5권 읽는다고 한다. 이 숫자에는 중요한 의미 하나가 숨겨져 있다. 이 수치는 이보다 더 많이 읽은 분들과 아예 한 권도 안 읽는 분들을 섞어서 평균 낸 것이다. 책을 한 권도 안 읽은 사람이 몇 명인지는 알 수 없다. 왜 이런 건 밝히지 않는지 한번 새겨보고, 1년에 나는 책을 몇 권 읽는지 남들이 한껏 높여 놓은 통계를 얼마나 삭감하고 있는지 한 번 되돌아보라는 의미가 이 수치에 숨겨져 있다. 김호운 소설가·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

[아침을 열면서] 유한한 삶이 주는 성찰

우리는 일상을 살면서 종종 착각을 하곤 한다. 20대 청년 대학생들에게 ‘나의 생은 앞으로 얼마나 남아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보면 대부분 40년 혹은 60년이라고 답한다. 평균 수명에 따라 그렇게 셈했을 것이다. 최근 보건복지부 발표에 따르면 한국의 평균 수명이 2030년도에는 81.9세에 이르러 세계 최고 수준의 장수국가가 된다고 한다. 요즘은 100세 시대라고 해서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아직 80여년이 더 남아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명백한 착각이다. 역사적으로 장수를 누린 사람은 있었지만, 단 한 명도 죽지 않고 영생한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죽음이 나와는 무관한 일이고, 인생은 삼세판이 가능한 시간적 여유가 충분하다고 착각하고 시간을 허비한다. 스티브 잡스는 췌장암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는 도중, 2005년 스탠퍼드대 졸업식에서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17세 이후 33년간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면서 스스로에게 말했다. 만일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나는 오늘 하려는 것을 할까? 그리고 여러 날 동안 그 답이 ‘아니요.’라는 것으로 이어질 때, 나는 어떤 것을 바꿔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오천원짜리 지폐에 새겨져 있는 율곡은 16세 때 인생의 큰 역경을 겪는다. 스승이자 어머니인 사임당 신씨가 홀연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인생에 대해 깊은 회의에 빠진 그는 삼년상을 마친 이후, 머리를 깎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불경공부에 몰두했다. 꼬박 1년 동안 죽음이란 무엇이고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다 뜻한 바가 있어 산을 내려와 자신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오죽헌에 돌아온 후 제일 처음 한 일은 스스로를 경계하는 글인 ‘자경문’을 지은 것이다. 모두 11조목으로 이뤄져 있는데 첫 문장이 뜻을 세우는 것으로 시작한다. ‘뜻을 크게 가지고 성인을 본받되, 조금이라도 미치지 못하면 더욱 노력해야 한다.’ 첫 단추를 잘 꿰어야 나머지 단추들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다. 잘못 꿰면 단추는 어색하고 불편하다. 삶도 마찬가지다. 맹자는 말한다. “사람마다 자기에게 귀한 것이 있지만, 생각하지 않을 뿐이다(人人有貴於己者, 弗思耳).” 경제적인 부유함과 사회적인 높은 지위가 자신을 귀하게 한다는 것은 착각이다. 내면의 선한 양심을 드러내며 각자 처한 위치에서 자기답게 살았을 때, 비로소 가치롭고 귀한 존재가 될 수 있다. 유한한 삶에 대한 자각은 자신이 가장 가치롭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성찰하게 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삶으로 이끈다. 이제는 매 순간 스스로에게 절실히 물어야 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그것은 세상을 이롭게 할 수 있는 것인지. 정해지면 주저말고 뚜벅뚜벅 그 길을 걸어가야 한다. 고재석 성균관대 성균인문동양학아카데미 주임교수

[아침을 열면서] 그리운 백야

하얀 밤이라니. 백야(白夜)는 낭만적 매혹이었다. 우리와는 거리가 먼 북반구의 현상이기 때문인가. 소설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백야들은 낯섦의 유혹으로 마음을 더 당겼다. 밝은 밤이라는 백야의 환상이 빙하 이상의 동경을 품게 한 것이다. 하지만 아주 먼 곳의 매력이라 벼르던 백야 체험은 쉽지 않았다. 실제로 맞아 보니 백야는 훤한 저녁이었다. ‘위도 48.55° 이상의 지역에서 여름 동안 밤하늘이 밝아지는 현상’이라는 백야도 곳에 따라 다른 게다. 대낮처럼 태양이 떠 있어 ‘한밤의 태양’이라 불리는 지역이 아니면 대부분 밝은 저녁의 지속이다. 저녁 10시와 새벽 3시의 하늘빛이 거의 같다. 가장 어두울 새벽 3시에서 5시 사이에도 불빛 없는 뜰에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개똥벌레 불빛으로 공부했다는 옛날 선비의 형설지공(螢雪之功)도 아니고, 백야 설렘에 잠은 계속 밀려났다. 오 백야의 난간에서 책을 읽다니, 불면이 대책 없이 깊어져 여정은 힘들었지만. 무릇 여행은 낯선 것을 만나러 가는 길. 낯선 곳에서는 낯선 생각들이 낯선 감각을 깨워낸다. 백야도 먼 곳의 낯선 매혹으로 우리를 낯선 시공간에 세운다. 6월 하지부터 8월 중순까지의 신비로운 백야. 처음 맞은 사람도 그러한데, 현지인들은 밤새 마시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크랴. 8시 이후 마트의 주류 판매 금지에 끄덕이게 된다. 매년 백야를 다양한 축제로 즐기는 문화도 당연한 인생의 찬가라 할 것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오래된 전언처럼. 그런데 다른 지역에서는 백야 아닌 열대야로 고문 중이다. 갈수록 심해지는 지구별의 기후 차별 속에서 곳곳의 산불 비명도 터져 나온다. 빙하가 가속도로 녹는 환경오염에 맞물려 폭염이 점점 거세질 것이라고 한다. 앞으로도 몇 년 간은 폭염이 드셀 전망이라니, 그야말로 세계적 대책과 실천이 시급한 때다. 독하게 길어지는 열대야에 우리도 비책을 마련해야 뜨거운 여름을 웬만큼 넘길 것이다. 하여 낮일 대신 밤일을 늘려볼까. 노트북을 붙잡고 씨름하며 기나긴 열대야를 노려본다. 이 또한 지금 이 곳에서의 백야라고, 새롭게 사귀어볼 수 있을지 마음을 내어본다. 밤새 뒤척거리다 보면 조금 서늘해지는 새벽 공기의 맛. 그런데 새소리, 매미소리, 벌레소리가 또 뜨겁게 달라붙는다. 낭만적이던 매미소리마저 그악스러워지니 자연의 소리들이 열대야의 공범 같다. 모두 피해자려니 하지만. 활짝 열어놓은 창으로 소음의 열기가 들이치며 서서히 달궈진다. 아 팔팔 끓는 8월이 온 게다. 그래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 찬물 끼얹으며 열을 식혀본다. 백야 며칠 즐기다 와 열대야에 늘어지다 들러보니, 코앞에 입추가 있다. 곧 서늘한 바람 데리고 처서도 준비할 터, 다시 오늘의 자세를 가다듬는 한여름 아침이다. 정수자 시조시인

[아침을 열면서] 에센셜리즘과 화광동진

중국의 수필가 린위탕(林語堂)은 “삶의 지혜는 중요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데 있다”고 말했다. 에센셜리즘(Essentialism ; 본질주의)을 좇아 필요한 때 필요한 생각과 행동을 할 수 있는 에센셜리스트(essentialist ; 본질주의자)가 되라는 말이다. 최근에 재미있는 책 한 권을 읽었다. 『에센셜리즘(Essentialism)』(그렉 메커운, 김원호 옮김, 알에이치코리아, 2021.)이다. 요약하면 잡다하게 이 일 저 일 손대거나 관심 두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 하나에 집중하라는 것이다. 에센셜리즘이란 말의 원래 뜻은 본질주의로, 사물의 핵심 의미를 추구하는 걸 말한다. 이를 우리가 일상에서 하는 행동에 적용했다. 이 일 저 일 여러 가지 일에 관심을 쏟거나 감 놔라 배 놔라 하며 남의 일에 쓸데없이 간섭하는 행동을 살펴서 필요 없는 건 버리고 ‘지금’ 내게 꼭 필요한 일 하나를 선택해서 성취하는 데 힘을 쏟으라고 충고하는 책이다. 막 소설가로 등단해 활동하던 젊은 시절, 소설가 김동리 선생님으로부터 ‘화광동진(和光同塵)’이라 쓴 글 한 폭을 받았다. 김동리 선생님은 세배를 오거나 방문하는 사람 가운데 특별히 눈길 가는 분의 이름을 기록해 두고(대학노트에 빼곡하게 이름을 적는다) 마음 내킬 때 휘호를 준비해 건네주는 걸로 유명하다. 순서대로 주는 게 아니라 건너뛰기도 한다고 했는데, 그 기준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장부에 기록은 됐어도 언제 글을 받을지 모른 채 무작정 기다리는 것이다. 미리 써 달라고 채근해도 소용없다. 그냥 기다린다. 짧게는 몇 개월이 될 수도 있고 길게는 몇 년이 지나도 못 받는 분도 있다. ‘화광동진’은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말로 ‘빛을 감추고 먼지 같은 하찮은 일들과도 잘 어울리며 살라’는 뜻이다. 바꿔 말하면 자기 재주를 뽐내지 말고 겸손하게 세상과 잘 어울리라는 말이다. 『에센셜리즘』을 읽다가 불현듯 이 ‘화광동진’이 생각나서 옷깃을 여몄다. 내 재주만 믿고 이 일 저 일 붙잡다가 혹여 놓친 건 없는지 누군가에게 내가 잘났다고 으스댄 일은 없는지 나 혼자 다 해결할 줄 안다고 세상일을 간섭하며 나서지는 않았는지 잠시 시간을 되돌아보면서 살폈다. 이 생각 끝에 나를 더 단단히 다잡은 게 바로 ‘화광동진’이다. 노자는 ‘무위이화(無爲而化)’, 즉 무엇을 억지로 고치고 다듬지 말고 자연의 변화에 순응하며 살라고 했다. 이 역시 화광동진이다. ‘나’를 주체로 세상을 끌고 가지 말고 객체로 세상과 어울려야 나도 세상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가 함께 참 행복을 누리며 사는 ‘무위이화’다. 김호운 소설가·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

[아침을 열면서] 공부, 기쁘지 아니한가!

‘현량자고(懸梁刺股)’라는 말이 있다. 자는 시간도 아까워 끈으로 머리를 묶어 들보에 매달았다는 현량의 고사와 잠이 오면 송곳으로 넓적다리를 찔러가며 공부했다는 소진의 고사가 결합된 말이다. 공부에 빠져 공부를 위한 삶을 살았던 사례는 같은 방식은 아니더라도 여전히 수많은 학생들을 잠 못들게 하며 영향을 주고 있다. 빠르면 초등학교 입학하는 순간부터 옆 눈 가린 경주마처럼 입시의 긴 터널을 통과하기 시작한다. 대학 가면 해결될 줄 알았던 공부 열풍은 스펙 쌓기로 지속되고, 취업 후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경쟁으로 계속된다. 수단으로 전락된 공부 때문인지, 최근 배움의 전당이 흔들리고 있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에서 도쿄대가 찻잔과 같은 전문적 바보를 양산해왔다고 진단한다. 우리는 왜 공부를 하는 것일까. ‘공부(工夫)’의 ‘공(工)’은 땅을 다질 때 쓰던 돌 절굿공이를 형상하고 있다. 절굿공이로 땅을 다지듯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히는 것을 의미한다. 공부를 의미하는 ‘학습’도 논어 첫 문장에서 기인한다. ‘배우고 부단히 익혀라[學而時習]’. ‘배움[學]’은 새가 하늘을 날기 위해 부단히 힘쓰는 ‘익힘[習]’의 과정이 수반돼야 한다. 자율적인 의지를 발현해 선현들의 지혜를 학습하는 것이 우선돼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공자는 배움의 목적이 ‘자기를 위한 것[爲己之學]’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남의 시선이나 외부 기준에 부합하는 공부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공부는 자기다움을 완성하기 위한 과정이어야 한다. 퇴계는 깊은 산 무성한 숲에 홀로 피어난 난초가 남에게 향기를 자랑하기 위해 꽃 피우지 않듯이, ‘천성(天性)’ 그대로 꽃을 피우고 향내를 풍기는 자기 함양의 노력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장미꽃은 장미꽃대로, 안개꽃은 안개꽃대로 묵묵히 자기 모습을 꽃피워야 아름답다. 스티브 잡스는 말한다. “다른 사람들의 견해가 여러분 자신 내면의 목소리를 가리는 소음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의 마음과 직관을 따라가는 용기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나다움’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나 사회적 통념에 나를 맞추느라 시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울려오는 직관에 귀 기울이고, 그 모습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논어는 공부의 결과가 기쁨(不亦說乎)이라고 강조한다. 배움의 과정이 고통스럽다면, 지금 하는 공부가 남을 위한 공부인지 나를 위한 공부인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나다움을 찾아가는 공부는 결과의 좋고 나쁨과 무관하게 그 자체가 기쁨을 줄 수 있다. 나를 위한 공부는 그것이 무엇이든 자체가 목적이고 과정도 의미 있다. 즐거움은 덤이다. 고재석 성균관대 성균인문동양학아카데미 주임교수

[아침을 열면서] 마침내

‘마침내’ 이 말에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면? 마침내 <헤어질 결심>을 본 소회와 영상이 겹칠 것이다. 칸 국제영화제에서 박찬욱 감독에게 감독상을 안긴 그 영화. 영화제 동안 현지 평점도 최고라서 부풀었던 <헤어질 결심>의 황금종려상 기대는 감독상으로 서운함을 달래야 했다. 마침내는 영화에서 한국어를 잘 못하는 중국동포(탕웨이)가 쓴 말이다. 그 단어가 새삼 이색적으로 도드라지게 닿은 것은 대사도 영화의 미장센처럼 만드는 감독의 힘이겠다. 마침내가 ‘결국, 끝내, 기어코, 급기야, 필경, 드디어’ 같은 유의어보다 일상어로 덜 쓰이는 까닭일 수도 있다. 아무튼 마침내는 ‘마지막에 이르러’를 강조하는 느낌이 강하게 전해지고 잔상이 오래 남는다. ‘어떤 경과가 있은 후 마지막에 이르러’라는 말뜻이야 다른 유의어에도 비슷이 담겼지만. 다 알다시피 영화는 문학, 미술, 음악 등을 영상에 녹여 담는 종합예술이다. 대략 두 시간에 예술성은 물론 세계인을 휘어잡을 대중성까지 담보하는 장르적 융합으로 작품을 빛낸다. 한때는 세계 영화판을 쥐락펴락한 양대 산맥으로 미국영화의 대중성과 유럽영화의 작품성을 대별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 칸영화제에서 보듯, 한국영화도 세계의 주목이 집중될 만큼 비약적 발전과 위상을 갖췄다. 그런 중에 감독상과 남우주연상은 큰 성취로 지면을 즐겁게 달궜다. 봉준호 감독의 황금종려상 수상 후이지만 한국영화사에 남을 역사를 쓰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영화를 찾아보며 아쉽게 여겨진 대사도 달라졌다. 철학과 문학을 녹여 담은 명대사는 명장면과 함께 오래 회자되며 영화의 위상을 높여왔다. 그 전에는 나만의 허전함이었는지 모르지만, 곱씹을 대사로 거듭 호명되는 영화들에 한국영화는 별로 많지 않았다. 요즘은 대사의 매력을 다시 쓰며 활용하는 눈 높은 관객들의 호응과 향유를 받는 게 많아졌지만 말이다. 책 속에 잠자던 단어나 문장이 영화에 나오면 그것을 다시 즐기며 한국어의 영역을 넓히는 맛이 좋다. 〈헤어질 결심〉에서도 여러 명대사가 운위되는데 ‘마침내’ 또한 묘한 매력으로 되새김 중이다. 마침내, 기다린 영화에 ‘N차 관람’ 관객도 늘고 있다고 한다. 대중적 흡인력은 적은 편이라도 찐 관객의 여러 번 관람이 영화를 한층 풍요롭게 한다. 영화도 관객이 같이 키워가는 것, 보는 사람이 늘수록 더 새롭고 다양한 영화를 만날 기회도 많아진다. 그렇듯 마침내 한국영화를 즐겨 찾는 외국인이 확연히 늘기까지 영화계는 얼마나 많은 피눈물을 바쳤을지. 그래서 마침내보다 계속 더! 널리 세계로 나아가길 바라는 마음이다. 연일 폭염이라 마침내 더위가 물러간다는 소식이 간절하다. 마침내 뭔가를 이루는 것도 좋지만, 지금은 지독한 폭염만이라도 물러가주면 좋겠다. 정수자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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