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면서] 계절에 따른 식생활

못생긴 농산물을 정기 구매하고 있다. 개성 있는 무농약 제철 채소가 오니 계절을 알 수 있어 좋다. 품질 좋은 농산물이 못생겼다는 이유로 폐기되지 않고 착한 소비를 통해 지구를 살린다 하니 기분도 좋다. 오늘 배송받은 박스에는 냉이가 들어 있다. 매섭게 추운 날 봄의 전령사 냉이를 접하니 반가웠다. 절기 중 소한과 대한 사이가 가장 추운데 혹한 속에서도 언 땅을 뚫고 와 줬으니 자연의 힘이 느껴진다. 조심스럽게 냉이를 손질하며 마음이 설레니 봄이 오긴 오나 보다. 마지막 절기 대한이 지나면 설 이후 자연의 시작을 알리는 새해의 첫 절기, 입춘이 온다. 새해를 시작하기 전에 습관적으로 하는 일이 다양한 기관의 자료를 살펴보며 트렌드를 정리하는 것이다. 미래 식품산업 방향의 키워드는 ‘편의성, 안전성, 기능성’으로 갈 것이며 전통식품의 고부가가치화, 기능성식품, 간편식품 개발 추세가 이어질 전망이다. 의식주 라이프스타일 트렌드는 ‘자연과 기술의 융합, 개인화, 지속가능성’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음식과 로봇, 첨단 기술이 만나는 푸드테크의 시대에서도 식품 트렌드는 건강과 영양을 기본으로 K-푸드, 전통성, 지속가능성을 공통적으로 꼽는다. 글로벌 식문화 안에서 세분화되는 개인의 가치를 추구하며 지속가능성을 실천할 수 있는 식생활은 무엇일지 생각해 본다. 전통적으로 농경문화였던 우리나라는 절기에 따른 계절의 변화에 맞춰 생활의 질서를 이어가는 세시풍속이 있었으며 제철에 나는 재료를 이용해 특별한 세시음식(歲時飮食)을 만들어 왔다. 세시음식은 한 해의 절기나 계절에 나는 식재료를 이용해 세시풍속일에 먹는 음식이다. 보통 세시음식은 시절음식이라 해 ‘무엇을 언제 먹으면 어디에 좋다’고 알려져 있다. 설날에 떡국을 먹고 대보름에 오곡밥을 먹는 풍습 같은 절식(節食)과 가장 맛있는 시기의 재료를 먹는 시식(時食)은 사계절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럽게 형성돼 온 전통적인 식생활문화다. 이런 자연의 흐름을 따르는 식생활을 위해 이십사절기를 챙겨보자. 이십사절기는 태양의 위치에 따라 1년을 24개로 나눠 정한 날들이다. 농사에서 씨를 뿌리고, 가꾸고, 수확하는 주기를 알려주는 달력으로 활용됐지만 지금도 계절의 흐름에 맞춰 실천하면 생활리듬을 조율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스마트팜과 냉장 배송으로 연중무휴 모든 재료를 구할 수 있는 세상이지만 2주 단위로 절기를 느끼며 자연의 리듬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계절이 바뀌어 있다. 바쁘고 여유 없는 일상 속에서 절기에 따른 식재료와 풍습으로 작은 이벤트를 만들고 소소하게 채워 나가다 보면 삶이 얼마나 낭만적이고 행복한가. 제철 재료가 나오는 시기에 맛있는 밥상을 준비하고 식재료를 핑계 삼아 시기에 맞춰 지인들과 음식을 나누면 충분히 즐거울 것이다. 추우면 추운 시간, 더우면 더운 시간 등 순환하는 계절의 변화를 존중하고 이십사절 절기를 따라 자연의 시간을 챙기면 우리 삶은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라 확신한다. 자연의 시간이 생산하는 재료를 통해 지혜로운 소비를 알고 자연과 공존하는 작은 실천으로 지속가능한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아침을 열면서] 새해 책 많이 받으세요!

연말연시엔 만나는 이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덕담을 주고받는다. 해마다 이맘때면 건네는 의례적 인사이고 가벼움과 무거움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서로의 안녕과 행운을 빌어 주는 마음만큼은 진심일 것이다. 설 명절 전후로는 실제 선물을 주고받으며 본격적으로 새해 인사를 나누는 경우도 많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선물의 사전적 의미를 선물의 물성에 중심을 두고 ‘남에게 어떤 물건 따위를 선사함. 또는 그 물건’이라며 설명한다. 그러나 선물을 주고받는 물건 정도로만 생각하는 이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프랑스 인류학자 마르셀 모스는 저서 ‘선물(The Gift)’을 통해 선물에 담긴 의미를 더 깊이 설명하고 있다. 그는 선물이 오가는 과정 안에 ‘주기’와 ‘받기’라는 행위가 이뤄지는데 이는 단순히 물건이 오가는 차원이 아니라 주고받는 관계 간 의무와 책임이 뒤따르는 사회문화적 행위라고 이야기한다. 선물을 받으면 되돌려 줘야 하는 의무 혹은 부담이 생기는데 이렇게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상호 유대감이 형성된다는 이론이다. 즉, 선물에는 경제적 교환과 함께 사회문화적 결속력 강화라는 가치가 담겨 있다는 의미다. 또 그는 되돌아오는 것을 기대하지 않고 주고받는 공짜 선물은 유대감 형성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도 말했는데 길에서 공짜로 받은 판촉물에 빚진 느낌을 갖지 않는다거나 무언가 바라지 않는 마음으로 선물을 줬다 하더라도 계속 주기만 하고 하나도 받지 못하면 받기만 하는 이에게 서운함이 느껴지는 게 이상하지 않은 것을 보면 선물 주고받기가 사회적 유대감 형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그의 이론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 외에는 선물에서 여러 의미와 가치를 찾아볼 수 있다. 선물은 생일이나 결혼기념일 같은 특정한 순간의 사건을 기념하거나 기억하는 매개체 역할을 하기도 하고 작은 선물 하나에 개성이나 취향 등이 반영되기에 주고받는 사람들의 정체성 그 자체라는 상징적 의미를 갖기도 한다. 따라서 선물이나 그 준비하는 과정을 보면 선물을 주는 사람이 선물을 받는 사람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다수에게 보내는 의례적 답례품조차 심사숙고해 결정하기 마련인데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에게 보내는 선물에 들인 정성이 적을 리 없다. 내가 아끼고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는 이들이 좋아할 만한 선물을 주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소에 선물을 주고 싶은 사람들의 생활을 세밀하게 관찰하며 원하는 것을 탐색하거나 어떤 선물을 받고 싶은지 직접 물어보지 않는 한 정말 마음에 딱 드는 선물에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인지 종종 명절이나 생일에 받고 싶은 선물이라든지 어린이날이나 성탄 선물로 받고 싶은 선물 목록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가 보도되곤 한다. 연령대나 성별, 조사 목적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지만 다양한 조사 결과에서 가장 받고 싶은 선물 1위로 제일 많이 보이는 건 ‘현금’이다. 그 외에 고가의 선물이나 받은 이의 자율적 활용도가 높은 상품권도 인기 있는 선물 중 하나다. 받기 싫은 선물 목록도 함께 언급되곤 하는데 대부분 성의 없이 느껴지는 선물류다. ‘책’은 최악의 선물은 아니지만 그다지 인기 있는 선물도 아닌 듯하다. 하지만 책만큼 상대에 대한 높은 애정이 담긴 선물은 없다고 말하고 싶다. 상대의 취향이나 관심이 무엇인지 잘 알아야 그에 맞는 책을 선물할 수 있고 책을 함께 읽는다면 이를 매개로 서로 지속적인 대화와 소통도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물성의 가치에 비해 그 안에 담긴 지적·감성적 무한 성장 가치를 생각하면 책이야말로 상대에 대해 갖고 있는 내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표현할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 새해엔 서로 기쁘거나 축하하고 싶은 일이 생길 때 다른 여러 선물도 좋지만 상대방이 관심을 가질 만한 책을 선물하면 어떨까 한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2025년 푸른 뱀의 해를 시작하는 독자들께 새해 인사를 건네고자 한다. 모두 새해 책 많이 받으세요! 복도 많이 받으시고요!

[아침을 열면서] 어둠에서 빛을 꺼내듯

“불을 들고 어둠 속을 걸을 것이다.” ‘영화 하얼빈’의 대사가 불꽃을 일으킨다. 덩달아 후끈 달아오르는 ‘까레아 우라’도 있다.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 저격 후 러시아식으로 세 번 외쳤다는 ‘대한독립만세’(김훈 소설에서는 ‘코레아 후라’로 나온다). 절로 뜨거워지는 이런 문장은 뒤를 잇는 울림도 크게 마련이다. 불을 들고 어둠 속을 함께 걸었던 기억들을 불끈 다시 꺼내보게 하는 것이다. 영화관을 나오면 다시 어수선한 상황. 그러잖아도 한 해 마무리에 정신없이 바쁠 때인데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들 황망한 표정이다. 지금 이전의 일상만큼이라도 얼른 되찾을 수 있기를. 그러면서 어둠 속으로 나아갈 불을 든 손이든, 코앞의 일에 붙잡힌 손이든, 평온한 삶의 회복을 바랄 뿐이다. 인류사를 보면 지옥 같은 큰 전쟁은 확실히 줄었고 삶의 질도 확연히 나아지고 있다는 연구자들의 진단이 맞을 테니 말이다. 그런 가운데 불을 들고 나서는 눈빛들을 돌아본다. 우리가 불을 들고 하는 일이란 대체로 경건한 의식이나 기도였고 지금도 그러하다. 기나긴 불의 역사를 떠나 근래의 경험치 안에서만 보더라도 불을 드는 일은 손을 모으는 행위로 이어졌다. 일상의 성냥불도 손을 모아 전했지만, 광장의 촛불들도 시대의 어둠을 밝혀나갈 손을 모으는 일이었다. 즐거운 경험으로 캠파이어의 불을 봐도 촛불 들고 고백하기나 부모님께 편지 쓰기처럼 자기 내면 들여다보는 손 모음이 대부분이었다. 초를 켜거나 연등을 달며 손 모으는 모습들은 보는 사람까지 숙연케 하는 힘을 품고 있다. 어둠의 물리침을 넘어 지금보다 나은 삶을 위한 바람을 불 앞에서 더 간절히 올렸다고 할까. 새삼 불을 들고 서는 마음가짐이 뜨겁게 닿는 때. 큰 고비마다 불끈 솟던 횃불이며 들불의 격정적인 마음의 발화를 생각한다. 그 안에는 슬픔을 다독이며 위로를 나누던 연민의 마음도 들어 있었다. 함께 어깨 겯고 어둠을 헤쳐 가려는 연대의 마음도 꿈틀거렸다. 어떤 마음으로 불을 들거나 뜨거운 마음의 분출이 모여 더 널리 번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피우고 전하고 나누는 불 앞의 마음 모음은 어둠 속에서 빛을 꺼내는 행위다. 서로서로 빛을 꺼내 더 환한 세상으로 가는 길을 밝히는 빛의 행진이다. 꺼지지 않는 불의 상징으로 유독 반짝이는 응원봉 속에도 그런 빛의 행진이 어둠 속에서 더 싱싱하게 피어나고 있다. 동지가 지나자 이제부터는 밤이 짧아질 일만 남았다는 말이 이마를 번쩍 쳤다. 밤이 짧아지면 어둠도 줄어들 테니 당연한 말이련만 시대적 함의에 따라 파문이 파랗게 일었던 게다. 자연의 어둠은 순리를 따라 줄었다 늘었다 계절을 조절한다. 하지만 인간이 만든 어둠은 인간의 마음이 불을 피우고 모으며 물리쳐 갈 것이다. 그런 마음 모음으로 우리네 새벽을 열어 왔듯 겨울밤 거리에서 외치는 이들도 더 환한 아침을 위해 추운 어둠 속을 더불어 걷지 않겠는가. 아침을 연다는 것. 예사로 쓰던 말이 세상에 없는 날빛으로 닿았던 2024년 12월을 보낸다. 밤새 안녕을 뒤집었던 새벽을 지나 더 소중한 나날을 맞고 있으니 서성이는 마음도 다잡는다. 이제부터 밤보다 낮이 길어지듯 이 난데없는 어둠도 잘 물리치고 새로 또 나아가리라.

[아침을 열면서] K-민주정치

2024년 12월, 보름도 안 되는 기간에 한국 국민은 역사에 길이 남을 엄청난 정치적 사건을 경험했다. 12월3일 밤에 대통령이 느닷없이 계엄령을 선포해 무장 군인이 국회에 총부리를 겨누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고 용감한 시민들이 그들을 맨몸으로 막는 사이에 국회가 계엄 해제를 신속히 의결했다. 그 후 10일 가까이 대통령의 이 무도한 행위에 분노한 국민의 거국적인 촛불 시위가 뜨겁게 타올랐고 국회에서는 현직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을 가결했다. 이 일련의 사건은 너무도 ‘한국적’이어서 국제사회는 이를 온전히 다 이해하지 못한다. 이 사건의 어떤 점들이 한국적인가. 대다수 한국인은 대통령의 계엄령과 계엄군 동원을 공포스럽게 지켜보며 1980년의 비상계엄과 광주학살을 떠올렸다. 정치적 좌파와 우파의 대립이나 최근 극우세력의 득세가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정치적 ‘색깔’을 덧씌워 잔인무도한 국가폭력을 정당화하는 행위는 우리에게는 깊은 상흔으로 남아 있다. 게다가 역사의 시야를 좀 더 넓혀 보면 그 같은 국가폭력은 20세기 전반기의 독립운동가 탄압, 19세기의 100년 가까운 천주교 박해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역설적이지만 자신이 믿는 정치적 신념 체계가 현실에서 탄탄한 기반을 잃을수록 권력욕에 사로잡힌 자들은 그 신념을 더욱 절대화하고 다른 신념은 적대시함으로써 체제를 유지하려 한다. 안타깝게도 한국의 정치문화는 이런 고질병을 앓고 있다. 그래도 계엄 사태에 기민하게 대처해 해제를 압박하고 마침내 탄핵소추안 가결까지 추동한 한국 국민에게는 다른 나라 사람들은 쉽게 따라가지 못하는 역동적인 면모가 분명히 있다. 이를 간파한 국내외 언론에서는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가 비상한 시기에 시민들의 기민한 정치적 행동으로 표출됐다고 하기도 하고 응원봉을 손에 쥐고 케이팝을 개사한 노래를 흥겹게 부르는 시위대의 거대한 ‘물결’을 보고는 K-시위 문화라고 명명하기도 한다. 엄밀히 말해 ‘빨리빨리’는 가속 기술을 추구하는 근대 상공업사회의 공통된 특징이지만 외국인이 이구동성으로 한국 문화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빨리빨리’를 지적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는 근대 이후 한민족이 가혹한 환경에서 살아 남기 위한 생존술을 몸에 익혔기 때문이겠지만 인간의 원초적 본능인 야성 혹은 신기(神氣)가 문화 전통이 돼 한국인의 마음속에 면면히 흘러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옛적에 이 땅에 살았던 백성들이 양반의 횡포에 맞서 풍자와 해학으로 쌓인 한을 푸는 놀이판을 벌였던 그 전통을 계승해 21세기에 한국인은 신명 나는 축제의 장으로 시위문화의 새로운 전범을 만들어 가고 있다. K-민주정치가 비상한 시기에 일시적으로 주목되는 것을 넘어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리는 현 시대에 참으로 의미 있는 정치적 대안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 그러려면 무엇보다 사익을 ‘옳음’으로 둔갑시켜 정치적 성향이 다른 이를 악마화하는 정치풍토를 일소해야 한다. 그런 풍토로 인해 우리 사회에는 비단 대통령이나 정당 지지의 문제뿐 아니라 여성, 성소수자, 환경 등과 관련한 21세기의 중요한 정치 의제에 대해서도 무관심, 무지, 혐오가 난무한다는 점을 생각할 때 더욱 그러해야 한다.

[아침을 열면서] 한 해를 시작하는 1월의 금주

얼마 전 30대 젊은 지인을 만났다. 회사에 대한 고민이 많다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부서를 옮기고 싶은 가장 큰 이유가 직속 상사가 술을 너무 많이 마신다는 것이다. 요즘도 술을 권하는 사람이 있냐며 놀랐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다양한 자리에서 술을 마시며 어울리는 것을 즐기고 있다. 술이 건강에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회생활 속에서 술을 완전히 멀리하기는 쉽지 않다. 특히 직장에서의 음주문화는 여전히 뿌리 깊어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선택은 어색할 수도 있는 현실이다. 새해가 되면 많은 이들이 건강한 한 해를 다짐하며 다이어트, 운동, 금연과 함께 금주를 신년 계획으로 세운다. 하지만 의지와 실천은 별개다. 술을 자제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영국에서는 2013년부터 1월 한 달 동안 술을 마시지 않는 ‘드라이 재뉴어리(Dry January)’ 캠페인이 시작됐다. ‘건조한 1월’ 정도로 직역할 수 있는 신조어다. 연말 모임으로 과도한 음주를 했던 12월의 후유증을 벗어나 건강하게 새해를 시작하자는 취지다. 이후 ‘Dry January’라는 이름을 상표로 등록하면서 캠페인은 성공적으로 자리 잡았고 참여자들은 한 달 동안 금주를 실천하며 서로를 응원하고 몸과 마음을 새롭게 정비한다. 이 캠페인은 놀라운 성과를 보여주고 있는데 매년 800만명 이상이 참여하며 참여자 중 70% 이상이 이후에도 음주를 줄이는 데 성공한다고 한다. 술을 입에 대지 않는다고 해서 단기간에 얼마나 큰 건강 효과가 있을까 싶지만 연구 결과를 보면 금주의 효과는 예상외로 높다. 한 달간 금주하면 간의 지방 함량이 평균 15~20% 감소하고 체중이 줄며 수면의 질도 10% 이상 개선된다고 한다. 장 건강 회복과 염증 감소, 수면 개선으로 면역력이 향상되고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 수치가 평균 16% 감소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또 알코올 섭취를 줄이면 업무와 일상생활에서 더 높은 집중력을 경험할 수 있으며 우울증 발병률이 약 20% 낮아질 수 있다고 한다. 경제적인 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 하루 두 잔씩 마시는 사람이 술을 끊는다면 1년간 약 600만원 이상을 절약할 수 있다. 특히 한 해를 시작하는 1월의 금주는 이후 음주 습관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한 달의 실천이 절주 또는 장기적인 금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요즘 Z세대와 밀레니얼세대는 음주를 단순히 건강 문제가 아니라 자기관리를 위한 선택으로 본다.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 건강한 삶을 위한 실천이자 개인의 신념과 가치를 표현하는 방식이 되고 있다. 이러한 세대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음주를 강요하지 않는 분위기는 점차 확산되고 있다. 이제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 더 이상 특별한 선택이 아니고 술을 권하는 문화가 점점 낯설어지는 세상이 오고 있다. 앞으로 금주하는 청년들이 사회에서 더 높은 위치에 오르면 음주 중심의 직장문화에도 큰 변화가 예상된다. 드라이 재뉴어리 캠페인처럼 특정 시기에 함께 금주를 실천하는 문화가 한국에서도 자리 잡으면 어떨까. 꼭 새해가 아니더라도 한 달간의 금주는 건강과 마음을 새롭게 정비할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아침을 열면서] 역사 현장에서 찾아낸 희망

흥미로운 대상이나 새로운 걸 보면 탐색 및 관찰하는 걸 좋아하는 기질적 특성에 더해 어려서부터 일상에서의 지적 탐구나 문화예술 향유 체험을 함께해주신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어딜 가든 방문지에 있는 문화유산이나 역사 공간을 살펴보게 된다. 최근 방문지 중 한 곳인 안동에서는 공식 일정 전후로 여러 곳을 둘러봤다. 그중 예끼마을과 임청각은 처음 간 곳이다. 업무차 한국국학진흥원을 여러 번 다녀왔음에도 그 바로 앞에 예끼마을은 이번에야 알게 됐다. 마을 곳곳에 벽화와 트릭아트 그림이 그려져 있고 옛 지명을 따온 선성현문화단지 안에 동헌이나 객사 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1974년 안동댐 건설로 살던 곳이 수몰된 마을 사람들을 위해 조성된 곳이라는 사연은 역사관을 통해 알 수 있다. 안동호 위에 부교로 만들어진 선성수상길이 유명해서 걸어 봤다. 부교의 중간쯤에 책걸상과 풍금 조형물 등 수몰 지구 내에 있던 초등학교 교실을 재현해 둔 쉼터가 있다. 한때 수많은 아이가 뛰어다니던 곳에 조용히 출렁이는 물소리만 들리니 쓸쓸한 느낌이 들었다. 국가 발전과 공공의 이익을 위해 조상 대대로 살던 터전을 내놓고 하루아침에 사방으로 흩어져야 했던 사람들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갈 때마다 들를 기회가 없던 임청각도 이번에는 다녀왔다. 국권이 일제에 의해 찬탈된 후 독립운동에 헌신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이상룡의 집이다. 온 일가와 전 재산을 국가와 민족을 위해 내놓을 때의 심정이 어땠을지, 감히 흉내 내기 어려운 숭고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방문지인 제주도에는 ‘너븐숭이 4·3 기념관’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숙소 근처에 있어 우연히 들르게 됐다. ‘제주 4·3 평화공원’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4·3 관련 다른 기념관이 있는 줄은 몰랐다. 정보를 찾아 보니 제주도 내에 4·3 유적지가 600여곳에 달하고 관련 기념관도 다섯 곳이나 됐다. 북촌리 너븐숭이 일대가 현기영 작가의 작품, ‘순이 삼촌(군경에 의한 양민 학살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자가 평생 그 트라우마로 고통받다가 결국 세상을 등진다는 내용)’의 무대라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기념관의 공간 구성이나 전시 콘텐츠는 동영상 및 사진과 글로 정보를 나열하는 방식이었기에 특별할 게 없었다. 그러나 실상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제주 4·3은 서로 다른 이념에 의해 같은 민족끼리 죽고 죽이는 비극을 넘어 국가폭력에 의해 저질러진 학살이 얼마나 잔인했고 무도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북촌도 마을 전체가 소각됐고 군의 총에 의해 죽은 희생자의 수가 수백명에 달했다. 희생된 아이들의 애기무덤들을 보면서 가슴에 미어졌는데 가장 많이 죽은 연령대가 유아부터 10대 이하 아이들과 60대 이상의 노약자라는 기념관 관계자의 설명을 듣는 순간 숨이 막혔다. ‘군에 들어와서 사람을 죽여본 적이 없으니 경험 삼아 죽여 보자’는 이유로 방어권을 갖지 못한 양민들이 오전부터 오후 4시까지 끊임없이 울리는 총성 속에 차례차례 끌려가 죽고 그 모습을 봐야 했다니. 상상하기조차 힘든 비극의 현장이었다. 이런 비극은 되풀이되면 안 되는데 국가 권력에 의해 국민이 희생되거나 힘들어지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슬퍼지는 요즘이다. 하지만 공공의 이익과 나라를 지켜내기 위해 자신을 내놓은 백성과 국민 또한 우리 역사 내내 존재했고 현재까지도 흘러넘치고 있으니 희망을 보게 되는 요즘이기도 하다. 민주공화국의 국민으로서 주권을 지키고 정당하게 행사하려는 의지를 잃지 말아야겠다.

[아침을 열면서] 닭이 방귀를 뀌면

무릇 격언은 쉬운데 심오하다. 오랫동안 벼린 촌철살인의 묘수를 담아온 품이다. 처세든 철학이든 삶의 지혜를 농축해온 말의 힘이다. ‘닭이 방귀를 뀌면’은 그런 격언 중에도 아프리카에 전해 오는 격언의 앞 구절이다. 그 뒤를 어떻게 받을지, 무슨 수수께끼처럼 상상력을 촉발하는 표현이다. 웃음까지 물리는 뒤 구절은 ‘땅이 불편하다’, 의외의 표현에 정신이 확 깬다. 독자에게도 예상을 뛰어넘는 조금은 웃기고 놀라운 문장일까. 그런데 볼수록 오묘한 시적 표현처럼 생각을 부르는 말이다. ‘닭이 방귀를 뀌면 땅이 불편하다’, 얼핏 보면 당연하지 싶다. 어떤 존재의 방귀를 편히 받는 상대는 없을 테니 말이다. 소의 방귀가 지구 환경에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지 수없이 보고 듣지 않았던가. 그런데 ‘닭의 방귀’라니, 그런 소리나 표현은 본 기억이 없다. 아프리카니까 가능한 말이라며 되짚어 보니 두루 통하는 보편적인 내용의 비유다. 방귀처럼 사소한 일이나 행동이 세상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경계였던 것이다. 이와 비슷한 격언은 꽤 있건만 생소한 표현에 끌려 눈에 들더니 여운도 길게 만든다. 지금 이곳의 도처에 들끓는 불편한 세상사를 일깨워 ‘땅이 불편하다’는 말에 더 머물렀는지도 모르겠다. 먼 아프리카의 격언을 다소 에두르는 에누리 변 같긴 하지만. 그런 갸웃거림을 무릅쓰고 보면 닭의 비유 중에는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말의 파장이 컸다. 최근에는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차별적 속담도 ‘흥한다’로 뒤집는 시대적 변용이 흔히 쓰인다. 이런 격언이나 속담의 전복적 활용은 그동안 앞서 나간 걸음의 영향을 넓히는 경우다. 앞의 아프리카 격언과는 다소 다른 예지만 닭에 담아온 비유 중에서도 홰치는 소리가 큰 영향력의 확장이겠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닭처럼 애꿎은 짐승을 빌려 자신이 원하는 뜻을 전했다고, 새삼 미안해지는 마음이다. 더욱이 일생 먹거리로 사육당하다 몸 바치고 가는 닭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가당치 않은 인간중심주의가 아닐까. 다시 ‘땅이 불편하다’는 말을 새겨보면 불편한 땅은 아프리카를 넘어 지구 전체에 해당되지 싶다. 우리를 먹고살게 해주는 땅을 전보다 더 많이 착취하고 학대해 더더욱 황폐하게 만드는 일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상황이다. 그래서 조금 낡은 듯싶은 격언 ‘닭이 방귀를 끼면 땅이 불편하다’는 말에서 전 지구적 땅의 불편을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땅이 지금은 무수한 생명을 길러낸 후의 잠시 휴식에 들어갈 때다. 닭의 방귀가 아니라도 진기 다 빼앗겨 불편한 몸을 뒤척이며 봄이 오면 새로이 움트는 것들 키워낼 힘을 조용히 길러갈 것이다. 우리도 한 해의 소출을 돌아보는 마지막 달이다. 새해의 다짐들은 그럭저럭 이뤘는지, 아니면 바람처럼 어느새 새나가고 말아 자신의 삶에도 미안하고 불편하진 않은지. 또 의도치 않았는데 방귀처럼 발설해 버린 말로 주위 누군가에게 심각한 불편을 끼친 일은 없는지. 애초엔 사소했으나 점점 커지는 꼬리로 몸통 흔드는 말의 태풍이 여전히 많기 때문이다. 하긴 말이 곧 생각이고 인격이니 당연한 귀결이겠다. 그래서 또 챙겨둔다. 어떤 불편이든 덜 만들며 가보자고.

[아침을 열면서] 인공지능 엄마와 진짜 엄마

인공지능(AI) 기술의 혁신 속도가 매우 빠르다. 요즘 많은 사람이 사용하는 챗GPT만 봐도 그 점을 실감할 수 있다. 이 대화형 챗봇은 외국어의 정확한 번역, 프레젠테이션 슬라이드에 들어갈 이미지 제작, 대형 사전에도 수록되지 않은 전문용어에 대한 설명 등을 훌륭히 한다. 심지어 대학생들의 각종 보고서, 학자들의 논문 심사서, 심지어 신을 향한 갖가지 기도문까지 그럴듯하게 써낸다. 챗GPT의 이 놀라운 능력에 경탄하며 사람들은 타인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본다. ‘이 작업은 사람이 한 걸까, 아니면 AI가 한 걸까.’ 그러나 이런 일반적인 수준의 경탄과 의심은 기성세대나 하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인공지능 기술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더욱 다양한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대담한 상상을 한다. 필자는 최근 두 건의 행사에서 이 주제에 관한 대학생들의 생각을 들을 수 있었다. 첫째 행사는 지난 9일 열린 단국 융합철학 워크숍이다. 단국대 연극 동아리 학생들이 돕고 철학과 학생들이 주도해 사랑에 관한 철학적 생각을 6편의 연극으로 표현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한 편에는 자기중심적이고 변덕스러운 사람과는 달리 늘 상대를 배려하고 한결같이 신실한 챗봇이 등장하고 다른 한편에는 베일에 가려져 있던 엄마가 알고 보니 AI 엄마였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진짜 친구보다 신실한 챗봇 친구, 진짜 엄마보다 더 한결같이 자식을 위하는 AI 엄마를 상상하며 학생들은 아무리 신실해도 챗봇은 가짜라고 외치기도 하고 반대로 AI 엄마도 엄마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 묻기도 한다. 둘째 행사는 지난 15일 ‘디지털 전환(DX) 시대의 유교적 전망’을 주제로 한국유교학회가 성균관대에서 개최한 대학생 논문 발표회다. 기존 학술대회의 틀을 깨고 학부생이 주인공으로 참여한 이번 대회에서는 생성형 AI 기술 윤리와 인의예지(仁義禮智), 디지털 페르소나의 문제와 유학적 양심, 딥페이크 디지털 성범죄와 공감 교육 등 총 6편의 논문이 발표돼 첨단 기술이 낳은 갖가지 사회 문제를 해결해 가는 데 유교가 어떤 시사점을 줄 수 있는지 토론했다. 위 두 행사에서 젊은이들이 펼쳐 보인 생각들에서 기성세대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 첫째, 첨단 기술에 대한 윤리적 숙고가 지금보다 훨씬 더 강화돼야 한다는 점이다. 한국의 걸출한 사상가 함석헌은 현대 기술문명을 비판하면서 기술은 결코 가치 중립적이지 않음을, 기술은 인격의 발현임을 역설했다. 이 점은 AI 기술도 마찬가지다. 다른 여러 현대의 테크놀로지와 마찬가지로 그것 역시 이윤의 극대화라는 상업적 가치를 최우선적 고려 사항으로 삼는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둘째, AI 기술이 전통적으로 인간이 했던 일들을 대체하면서 변화돼 가는 인간의 위상과 역할을 재정립해야 한다는 점이다. 미래에도 인간만이 할 수 있거나 적어도 AI보다 여전히 잘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이웃과 뭇 생명의 아픔에 공감, 공명하고 돌보고 섬기는 일, 적어도 엄마처럼 따뜻하게 세상을 어루만지는 일은 인간 엄마가 AI 엄마보다는 훨씬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

[아침을 열면서] 밥상머리교육, 식탁에서 배우는 예의범절

‘조립식 가족’이라는 제목의 드라마를 우연히 봤다. 드라마 속에는 다양하게 모인 구성원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며 식사하는 장면과 도시락이 자주 등장한다. 엄마도 아닌 아빠가 손수 밥을 하고 함께 식사하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며 집밥과 도시락으로 정성 들여 키운 아이들이 바르게 잘 커 나가 따뜻함을 느꼈다. 가족과 함께하는 식사 자리가 단순히 음식을 먹는 시간이 아니라 소통과 사회성을 위해 중요한 시간이라는 점은 많은 연구와 전통적인 가치에서 강조되고 있다. 밥상머리교육은 작은 예절 교육장이면서 강한 유대감을 형성하고 행복감을 충전하는 시간이다. 그러나 1인 가구 증가와 개인화된 식문화의 확산으로 인해 가족이 함께 밥상에 둘러앉는 풍경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1인 가구는 전체 가구의 33.4%를 차지하며 이는 2040년까지 40%를 초과할 것으로 예상한다. 가족과 함께 식사하는 사람들에 비해 혼자 식사하는 사람들은 우울증 유병률이 1.6~2배 높다고 한다. 특히 함께하는 식사는 유대감을 강화하고 정서적 안정과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돼 청소년의 경우 학업 성취와 정신건강, 노인에게는 영양 불균형 해소와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줄 수 있다. 우리 선조들은 밥상머리교육에서 더불어 사는 삶의 지혜와 인내, 배려 등의 사회성을 배웠다. 식탁에서 예의범절을 배우고 편안한 대화를 통해 우울증을 예방하는 것은 좋지만 전통적으로 모여 살 수도 없는 일이고, 개인화된 생활방식 속에서의 연결 지점은 없을까. 두 개념은 상반되지만 현대와 전통은 연결 가능하리라 본다. 1인 가구의 비율이 꾸준히 증가하는 시대에 밥상머리교육의 전통적 역할을 이어가는 방법을 고민할 일이다. 1809년 쓰인 규합총서에는 사대부에게 가르치는 식사 예절이 있다. 식사 한 끼가 내게 오기까지의 수고와 고마움을 느끼며 식사하라는 내용이며 식시오관(食時五觀)은 지금도 충분히 적용 가능한 철학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상을 차린 정성을 헤아리고 그것이 어디서 왔는가를 생각한다(計功多少 量彼來處·계공다소 양피내처). 둘째, 자신의 덕행을 살펴 보아 밥을 먹을 자격이 있는지를 생각한다(忖己德行 全缺應供·촌기덕행 전결응공). 셋째, 과식을 피하고 탐욕을 절제한다(防心離過 貪等爲宗·방심이과 탐등위종). 넷째, 음식을 좋은 약으로 생각하고 부족한 듯이 먹는다(正思良藥 爲療形枯·정사양약 위료형고). 다섯째, 일을 이루고 음식을 받아야 함을 생각한다(爲成道業 應受此食·위성도업 응수차식)이다. 이러한 생각은 혼자 식사하는 상황에서도 의미가 있다. 음식을 먹기 전에 내게 오기까지의 과정을 떠올리고 감사함을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본다. 혼밥이라도 정갈하게 식탁을 차리고 디지털 기기를 멀리하며 그 시간에 자신의 내면과 대화하는 습관을 들여본다. 혼자 있을 때 형성된 감사와 배려의 태도는 타인과의 식사 자리에서도 자연스럽게 표현될 것이다. 온라인 시대이니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이나 친구와 영상통화를 통해 식사를 함께하는 새로운 형태의 밥상머리도 가능할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가까운 사람들과 식사를 함께하며 소규모 모임으로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도 좋다. 밥상머리교육은 단순한 훈계가 아니라 용서와 격려, 화목이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자리다. 혼자든 여럿이든 마음과 정성을 담은 식사 시간이야말로 건강하고 행복한 삶의 첫걸음이다. 음식에 담긴 고마움을 느끼고 그 시간 속에서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이해하는 과정은 시대와 관계없이 변하지 않는 가치로 남을 것이다.

[아침을 열면서] 책이 있는 곳으로 가을여행 떠나자

기상청이 발표한 ‘2024년 여름철(6~8월) 기후분석 결과’에 따르면 열대야일수가 20.2일로 역대 1위를 기록했고 전국 폭염일수도 역대 3위로 24일에 달했다. 전국적으로 맹위를 떨친 폭염 때문에 올해는 홈캉스로 여름을 나는 사람들도 많았다. 보통의 여름나기였다면 가족이나 친구들과 산과 들, 바다와 계곡 등 시원한 곳으로 떠나거나 해외여행 등으로 휴가를 보냈겠으나 올해는 어디든 숨 막히는 더위뿐이니 아예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 집에 있는 게 더 편안한 쉼이라는 이유에서다. 휴가 비용으로 집에서 에어컨 시원하게 틀어 놓고 OTT 플랫폼으로 미뤄 뒀던 영화를 보거나 멀지 않은 곳으로 한나절 나들이를 다녀오며 맛있는 음식점을 방문하는 게 더 가성비와 가심비 있는 여름휴가라는 데 고개가 끄덕여졌다. 많은 이들의 휴가 패턴까지 바꿔 놓을 정도로 지독했던 더위가 가을 중후반까지도 이어져 한낮에 반소매 차림의 사람들도 심심치 않게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계절의 시계가 거꾸로 돌아갈 리 없으니 결국 선선한 바람이 불어 왔고 이제야 어딜 가든 답답하지 않을 가을이 시작됐다. 가을을 수식하는 표현 중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말이 있다. 실제로 사람들이 가을에 책을 많이 읽을까. 계절별 독서량이 통계치로 나온 건 없다. 다만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출판유통통합전산망의 판매량 통계로 추측해 볼 수는 있다. 2022~2023년 데이터 결과를 보면 가을에 오히려 판매량이 줄어든다. 가을에 책이 더 안 팔린다는 것은 책을 그만큼 안 읽는다는 의미로 연결할 수 있다. 가을이 독서의 계절이라는 말도 책이 너무 안 팔리니 책을 사서 읽게 하려고 관련 업계에서 만든 말이라는 설이 있을 정도다. 너무 덥지도 춥지도 않으니 책 읽기에 더없이 좋을 것 같지만 그런 이유로 더 책을 안 읽게 된다. 날씨가 너무 좋기 때문이다. 두 뺨과 코끝을 스치는 선선한 바람, 높고 푸르른 하늘, 청명한 공기, 아직 남아 있는 녹음과 알록달록한 단풍이 서로 조화를 이뤄 눈을 즐겁게 하고 발을 들썩이게 하는데 책 읽을 여유가 있을 리 있겠나. 지구의 여름은 너무 뜨거워지고 겨울 이상 한파 현상도 잦아지고 있다. 여름과 겨울이 차지하는 기간도 점점 길어지고 있단다. 사계절이 뚜렷했던 우리나라도 가을이 머무는 시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다. 이 아름다운 계절을 즐길 시간이 충분하지 않기에 바깥으로 나가 가을을 만나고자 하는 마음이 더 간절해질 법도 하다. 그렇다고 책과 데면데면하게 지내는 걸 그냥 두고 보기엔 뭔가 마음이 편치 않다. 가을도 즐기고 책과 친해질 방법은 없을까. 없는 게 없는 대한민국인데 왜 없겠는가. 찾아 보면 다 있다. 가장 실천하기 쉬운 건 동네 한 바퀴 가을 산책을 하면서 걸어 가까운 동네 도서관이나 동네 책방을 방문하는 것이다. 차비가 들지 않고 걷기를 통한 일상 속 건강을 챙기면서 마음에 드는 책을 데려와 읽으면 지식정보가 늘어나고 스트레스도 줄어드니 정신 건강 측면도 강화된다. 여러 면에서 이득이고 부담스럽지도 않다. 책 공간을 찾아 한나절 가을 나들이를 떠나도 좋겠다. 서울이나 인천, 제주도에서는 지역 내 지역서점이나 독립서점 등을 서로 연결한 서점 지도가 있다. 책방 순례 코스에 따라 길을 걸으며 가을을 느끼고 책 공간을 살피고 새로운 책과 만나보는 건 어떨까. 독립책방 성격의 소규모 서점의 경우 각자 자기만의 특성을 반영해 공간을 꾸미거나 책 큐레이션을 해놓기 때문에 여러 책 공간을 다채롭게 경험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여름 내내 더위로 휴가를 미뤄 뒀다면 책과 함께 인생 추억을 쌓을 수 있는 곳으로 가을 책 여행을 떠나보는 것도 좋겠다. 순천이나 원주 등 그림책을 테마로 한 전시관 등 문화 공간을 찾거나 책과 인쇄 관련 공간을 꾸며 놓은 삼례책마을이나 고창의 책마을해리, 괴산의 숲속작은책방이나 강화도의 바람숲그림책도서관 등의 북스테이도 추천할 만하다. 11월 말에 부산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부산국제아동도서전을 여행 코스 안에 포함해도 좋겠다. 2009년 영국의 서식스대에서는 6분간의 독서만으로도 스트레스지수가 68%나 감소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더 추워지기 전에 가을도 즐기고 스트레스도 해소할 겸 책이 있는 공간을 찾아 여행하고 책도 읽으면 좋겠다.

[아침을 열면서] 사이를 다시 보는 ‘사이사이’

11월은 사이가 더 느껴지는 달이다. 1과 1이라는 숫자의 나란한 모습에서 사이를 시각적으로 확연히 보듯. 어쩌면 가을과 겨울 사이에 낀 느낌의 인상이 그렇게 구체화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선입견을 접고 일상의 거리만 훑어도 한층 멀어지는 나무들에서 사물의 사이를 실감한다. 잎이 지면서 나무들도 가지 사이를 더 드러내고, 그렇게 비어가는 곳곳의 사이들이 휑하니 쓸쓸해 보이는 것이다. 그 곁을 지나는 사람들 어깨 사이나 바람의 걸음 사이도 더 성글어지는 느낌이다. 문득 사이를 되짚는 것은 세간의 사이들이 더 보이는 계절 때문이다. 어떤 이미지에 걸려 그에 따르는 연상들을 곱씹듯 사이의 사유며 사달 같은 게 겹쳐온다. 사이는 시간이며 공간의 간격만 아니라 사람이나 사물의 관계나 거리 같은 것들을 포괄해온 말이다. 사이 속의 다면이 새록새록 손을 흔드는 즈음, 간명한 단어에 얼마나 많은 함의를 담아 왔는지 되작이게 된다. 그 말에서 시각과 촉각과 청각 같은 인지와 시간이나 공간의 감각들을 다시 본다. 11월의 이미지로 불러본 사이라는 표현이 그 안팎에 서린 정서적 거리감이며 서정적 표현까지 조곤조곤 깨우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사이에서 발생하는 일들이 이루는 게 생의 궤적이지 싶다. 바로 직전까지 더없이 좋은 사이에서도 자칫 마음 상하는 말을 했다가 돌이킬 수 없는 사이를 만들듯 사이는 종종 어떤 일을 발생하고 파생한다. 그런 사이가 만드는 사달 중에서도 세상 센 것은 ‘우리가 남이가’라는 관계의 과시가 아닐지. 누구보다 끈끈한 관계를 바탕에 깔고 엮는 사이에서 자칫 부정적인 일로 연결되는 일이 많았던 것이다. ‘남이 아닌’ 사이로 혈연보다 깊어지다 함께한 일에서 문제로 비화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우리 일상은 연약해 새로 잇거나 자르는 세상의 사이에 따라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고 복잡한 영향을 받는 게다. 때로는 사람과 사람의 사이가 거미줄 같다. 생존을 위해 먼 데까지 줄을 치고 거기서 먹이를 얻고 아름다운 문양도 이루지만 센 바람이 닥치면 끊어지는 거미줄 말이다. 세간의 관계 설정이나 거리 조정이나 사람 사이를 함축해온 줄의 유지는 그만큼 어려움이 많다. 현대인의 사이는 5년마다 재조정된다는 말이 있었는데 사이라는 연줄의 다면이 상황에 따라 자주 변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적 관계의 사이사이를 더 복잡하게 타고 사는 이즈음은 재조정의 시기가 더 짧아졌을 법하다. 갈수록 마음이 아주 편한 사이만 오래 다독이며 함께 사는 세상이랄까. 그러면서 돌아본다. 요즘 저자와 독자와의 사이는 어떠한가. 독자에서 저자로 가는 머나먼 꿈을 실현해도 마음에 두었던 독자와의 사이는 대부분 더 멀고 지난하다. 책도 신문도 많이 나오는 만큼 예전 종이책이며 신문이 누리던 호시절은 회복이 어려운 시절이다. 최근에 노벨상 선정 소식이 나오자 수상 작가 책을 사려고 줄 서는 모습에서 많은 생각이 스쳤다. 그런 열풍만도 저자와 독자 사이의 회복에 기여하려니 믿어본다. 그렇게 책갈피 사이를 높이는 마음의 온도를 등불 삼아 외롭고 높고 쓸쓸한 나날을 건너기도 하려니.

[아침을 열면서] 유교 중국과 인문학의 자리

필자는 10월18일부터 21일까지 중국 베이징에서 공자 탄신 2천575주년과 국제유학연합회 결성 30주년을 기념하는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했다. 그런데 이 학술대회는 여러 가지로 놀라웠다. 학술대회 개막식을 우리의 국회 격에 해당하는 인민대회당에서 했고 개막 연설을 중앙정부의 핵심 간부인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이 했다. 대회 규모 역시 전 세계 110개국, 300여명의 외국인을 포함 730여명이 참가한 초대형이었다. 흡사 ‘유교 올림픽’이 열린 분위기였다. 대회 스태프로 참여한 중국 대학생들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의 자원봉사자들과 매우 흡사한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한국인이 이런 소식을 들으면 대부분 유교가 뭐라고 국가가 나서 그런 행사를 벌이냐고 의아해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중국에서 유교는 중국 정부의 정치이념, 사회교육, 국제문화 교류 등을 아우르는 키워드다. 정치적으로는 중화주의, 책임과 돌봄 등의 유교적 정치사상으로 중국적 사회주의 정치이념을 보완한다. 사회교육 측면에서는 정부의 지원을 받는 각종 민간 단체가 대중화된 유학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해 대중의 문화적 소양을 고취한다. 그리고 이 같은 교육에 힘입어 중국인들은 오늘날 중화 제국의 공민으로서 문화적 자긍심을 외국인과의 문화 교류상에서도 한껏 드러낸다. 사실 오늘날 중국에서 유교의 드높은 지위는 한 세기 전에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주지하다시피 20세기 내내 중국에서 유교는 근대화의 커다란 걸림돌로 여겨졌다. 대표적으로 1915~1924년 중국을 서구화하려는 신문화운동이 일어났을 때 일부 지식인들은 공자 타도를 구호로 내걸었다. 급기야 1960~1970년대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유교를 낡은 사상, 낡은 관념 등으로 취급하며 공자와 유학을 남김없이 중국인의 삶에서 지우려 했다. 그러다가 중국이 개혁개방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유교도 서서히 복권된다. 1980년대에 유학 재평가가 조심스럽게 이뤄지더니 1990년대부터는 국학 열기가 끓어오르고 2010년대 이후에는 유교 중국이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유교의 지위가 격상한다. 오늘날 중국에서 유교가 높은 위상을 차지한 덕분에 필자는 이번 베이징에서의 체류 기간 매우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그러다 귀국길에 오르며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느낌이 들었다. 하나는 부러움이다. 의도야 무엇이든 유학 내지는 철학, 더 넓게 말하면 인문학이 한 사회의 중심부에서 묵직한 소리를 내고 사회 각계에서 이를 경청하는 사건이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노벨 문학상 정도는 받아야 비로소 주목하는 우리 사회의 인문학에 대한 냉담함이 씁쓸하다. 다른 하나는 답답함이다. 중국 정부의 유학에 대한 전폭적 지원의 이면에 학문 사상에 대한 과도한 통제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학이 정치권력과 밀착하면 제왕학으로 변질된다는 사실은 이미 고대 유학의 역사가 말해 주고 있지 않은가. 유교 혹은 인문학과 정치권력 사이의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적절한 자리는 어디쯤일까.

[아침을 열면서] 유연한 채식주의자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으로 한없이 자랑스럽고 기쁘다. 하지만 대표 도서인 ‘채식주의자’는 제목만 보고 반가운 마음으로 도전했다가 읽기 불편해 여러 번 포기했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채식주의자(Vegetarian)는 육식을 모두 거부하는 사람이라 생각하지만 식단에서 동물성 식품을 제한하는 정도에 따라 ‘비건, 프루테리언, 플렉시테리언, 락토, 오보, 락토-오보, 페스코, 폴로’ 등 다양한 단계의 채식주의 방식이 있다. 완전한 채식주의자로 동물성 식품을 전혀 먹지 않는 비건(Vegan)은 유제품, 달걀, 꿀같이 동물에서 얻은 식품을 섭취하지 않고 가죽옷이나 화장품 원료 등 동물성 제품도 완전히 배제한다. 프루테리언(fruitarian)은 극단적인 채식주의자로 식물의 뿌리와 줄기, 잎, 과일과 곡식만 먹는 더 엄격한 식단을 실천한다. 락토(Lacto) 베지테리언은 유제품은 섭취하고 오보(Ovo) 베지테리언은 달걀은 섭취한다. 락토-오보(Lacto-Ovo) 베지테리언은 유제품과 달걀은 먹는다. 페스코(Pesco) 베지테리언은 생선과 해산물은 먹지만 육류는 피한다. 폴로(Pollo) 베지테리언은 닭고기나 오리 같은 가금류는 먹는다. 우리의 삶 중에서 ‘어떻게 먹을 것인가’는 한 번쯤 생각해 볼 만한 고민이다. 음식을 동물, 채소, 가공식품에서 고를 수 있다면 내가 실천하고 있는 성향은 플렉시테리언(Flexitarian)이다. 건강을 위해 기본적으로 채식 식단을 유지하면서 가끔 육류나 생선을 섭취한다. 엄격한 의미에서 ‘채식주의자’라고 부르기는 어렵지만 ‘유연한 채식주의자’로도 불리며 고기를 피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적합한 방식이다. 채식 지향적인 삶의 방식은 하나의 트렌드가 됐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건강한 채식주의 식단이 대중화되고 식당과 제품도 늘어나 접근성도 높아졌다. 국내에서도 사회적 인식의 변화와 함께 젊은 소비층을 중심으로 채식 성향과 비건문화가 빠르게 발달하고 있다. 기후 변화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환경보호와 동물 윤리에 대한 인식 증가로 채식주의를 선택하는 사람도 늘고 있다. 종교적 이유도 있다. 채식을 많이 하는 나라를 살펴보면 전 국민의 30~40%가 채식주의자인 인도가 1위이고 대만이 4위다. 힌두교, 자이나교, 불교, 도교처럼 종교의 영향이 클 수도 있다. 인도의 경우 종교적, 문화적 요소가 얽혀있어 채식주의자 비중이 높을 수밖에 없지만 세계화와 더불어 다양한 제품을 접하고 육류 소비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고 있어 앞으로의 방향은 또 모를 일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사찰음식이 유지되고 있어 채식을 보다 다양하고 맛있게 즐길 수 있다. 최근에는 사찰음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소개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채식주의 확산에 기여하고 있다. 사찰음식은 한국의 전통적인 채식 문화로 현대의 채식주의자들에게 윤리적, 철학적 영감을 주는 중요한 식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건강한 삶을 위해서는 균형 잡힌 식습관과 규칙적인 운동이 필수적이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돌보고 건강한 생활 습관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식습관은 나에게 맞는 방식으로 더 나은 방향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아침을 열면서] 우리말과 우리글을 사랑하세요

20여년 전, 국내 유명 어학당에 다니던 외국인들에게 우리말 가운데 그 뜻을 제대로 알기 전까지 가장 예쁘다고 생각한 낱말이 무엇인지 들었던 적이 있다. 여러 답변 중 지금까지도 확실하게 기억하는 건 ‘옷’과 ‘물집’이다. 옷은 사람이 땅에 발을 딛고 서서 두 팔을 벌린 것 같은 모양 자체가 재미있고 환영한다는 느낌이 들어 좋다고 했다. 듣고 보니 그럴듯해 그 이후 옷이라는 글자를 쓸 때마다 옷이 나를 반기는 기분이 들어 혼자 웃곤 했다. 물집은 꽤 의외였다. 뜨거운 것에 데거나 벌레에 물려 피부가 부풀어 오르면서 생기는, 쓰라리고 아픈 느낌의 물집이 그들에겐 전혀 다른 이미지였다. ‘물’과 ‘집’의 뜻을 알고 두 낱말을 연결해 투명하고 동그란 물방울 모양의 집을 떠올린 것이다. 그들이 물집의 제 뜻을 모른 상태에서 혹시라도 피부 상처인 물집을 매개로 나와 함께 대화해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아마 서로 엉뚱한 이야기만 나누는 동상이몽이 벌어졌을 것이다. 말과 글로 소통하려면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정확하게 아는 것뿐만 아니라 제대로 잘 쓸 수 있어야 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느꼈던 경험이었다. 올해 초 콘텐츠 개발 회의 중에 수석연구원이 요즘 문해력 저하는 비단 아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꺼냈다. 초등 4학년 첫째 아이가 다니는 학교의 알림장 문구 중에 ‘중식’이라고 써오던 걸 ‘중식(점심식사)’으로 표기한다든지 괄호 안에 따로 낱말 뜻풀이가 달리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단다. 아동이든 성인이든 사회 전반적으로 문해력과 독서력이 하락세를 보이고 있음은 1990년대 중반부터 줄곧 인지하고 있던 터라 새삼스럽지 않았으나 자세한 사례들을 듣고 보니 흘려들을 일이 아니었다. 급식 메뉴를 왜 중식(중국 음식)으로만 제공하냐며 항의하는 학부모가 있다는 뉴스 기사도 봤으나 실제로 그런 일이 필자 주변에서도 일어나고 있음을 확인하니 여간 걱정스러운 게 아니었다. 문해력 저하 문제는 단순히 낱말의 뜻을 알고 쓰는 차원이 아니라 소통 부재 현상과 이어지고 부정적 사회 문제로도 비화될 여지가 있기에 가볍게 여길 사안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독서교육을 전공했고 30년 가까이 독서 현장에 종사해 왔기에 문해력 저하 문제를 단시간에 해결해 줄 방안이 무엇인지 알려 달라는 요청을 많이 받았다. 전문가라고 해서 ‘단번에’ 문해력을 향상시킬 방법이 있다고 말하긴 어렵다. 문해력은 보편적 언어 교육 외에도 학습자의 언어 감수성과 개별 특성의 영향을 받는 데다 시간과 노력과 경험이 켜켜이 쌓여야 길러지기 때문이다. 문해력 전문 교육을 받으면 실력이 나아지겠지만 많은 비용과 시간이 들기에 쉬운 선택지는 아니다. 그래서 누구나 일상에서 실천 가능한 문해력 향상 비법을 하나 알려주고자 한다. 평소에 잘 듣고 깊이 생각한 후 정돈해 말하며 다양한 글을 제대로 읽고 짧은 글이라도 꾸준하게 쓰는 습관이 바로 그것이다. 이 또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문해력 문제가 심각하게 발생한 후에 전문적 교정을 받아야 하는 수고로움에 비한다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사람은 말과 글에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담아 표현하며 다른 이와 소통하고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문화를 전수한다. 생각과 마음이 있다 해도 이를 표현할 만한 말과 글이 없었다면 인류 문화가 이렇게까지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바벨탑 시절부터 인류에게 수천개의 말이 있어 왔으나 문자는 몇 백개뿐이었고 현재 일상에서 쓰이는 것은 한글을 포함해 겨우 60여개뿐이라고 한다. 고유어로 말하고 듣고 고유의 문자로 읽고 쓸 수 있다는 건 정말 대단한 문화의 힘이고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일이다. 한글날이 있는 10월의 어느 저녁, 멀리 스웨덴으로부터 우리 말과 글로 창작하는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낭보가 전해졌다. 기쁜 마음과 함께 최근 대두되는 문해력 저하 현상의 심각성이 떠올랐다. 우리 말과 글을 이해하지 못하는 현상이 점점 심해져 전 세계인이 공감하는 우리 문학작품을 정작 우리가 알지 못하게 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이런 우려가 단지 기우이길 바라며 평소에 잘 듣고 깊이 생각한 후 정돈해 말하며 다양한 글을 제대로 읽고 짧은 글이라도 꾸준히 써보기를 권한다.

[아침을 열면서] 오늘의 설렘을 찾아

설레니. 어느 날 스쳤던 말에 새삼 설렌다. 두 청춘의 대화가 날아든 것은 막 우산을 펴는 순간이었다. 친구의 답은. 나도 모르게 쫑긋 커지는 눈귀를 얼른 돌렸다. 지나는 대화에 덩달아 설레는 기분이라니, 마침 문학 강의를 마친 가을 오후라 더 그랬을지도 모른다. 오다 말다 하는 빗발에도 설렘이 묻었는지 파문이 내내 번졌다. 그들은 그 오후의 설렘을 어떻게 펼쳐 놀았을까. 신선했던 설렘이 문득 떠오른 것은 아무래도 가을하늘 탓이지 싶다. 사실 우리네 일상에서는 설렘이랄 것이 많지 않다. 아니 설렘의 감정을 자주 갖기 어렵다고 할까. 일과 사람과 장소의 규칙적 반복, 그게 현대인의 평범한 나날이니 말이다. 그렇게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 쌓여 일생이 된다. 별다른 무엇을 찾아 나서지 않는 한 어제와 별다르지 않은 오늘을 감내하듯 살아내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일상이라는 반복의 지루함을 견디는 것도 일종의 수행인 셈이다. 어쩌다 예기치 않은 사고나 시련이 닥치면 그때서야 지루해 몸을 뒤틀던 일상의 반복도 고맙고 소중하게 받들긴 한다. 그러다 일상을 되찾으면 그 안온함에 안도하면서도 금세 또 지루함에 뒤척이기 십상이지만. 설렘은 들떠 두근거리는 것. 그런 감정의 발현은 가슴을 뛰게 하고 감각의 각질을 떼어내 준다. 아무 두근거림도 없는 지루함으로 자신을 갉아 먹히는 느낌에 들뜨는 균열을 내주는 것이다. 그러니 더 무기력해지기 전에 소소한 설렘이라도 변화를 찾고 만들어 갈 필요가 있다. 잠시라도 지루함을 깨는 설렘을 찾고자 마음만 먹으면 큰 비용과 시간을 안 들이고도 가능한 게 많다. 그런 마음 자체가 두근댐의 시작이니 새로운 재미에 설렘의 감각까지 깨울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사람과 함께하는 세상이니 만남의 약속이 그럴 만하고 영화나 전시회 혹은 음악회 등도 설렘의 감각을 불러낼 좋은 시간을 준다. 그냥 어제와 다른 길이나 골목을 찾아 오늘의 산책을 해보는 것도 낯익은 대상과 새롭게 만나는 설렘을 즐길 수 있겠다. 오늘의 설렘은 하늘에서도 찾을 수 있다. 너무너무 높푸른 날 누군가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서정주)고 외친다면. 무슨 도발이라도 하듯 시구(詩句)를 던져 봐도 그리움 같은 감응이 일지 않는다면 감정이 무뎌진 것이다. 때로 무디다는 게 편한 면도 있겠지만 대부분 무딤은 감수성이 굳어 가는 징조다. 피부 각질이 두꺼워지고 귀가 어두워지듯 다른 감정이 무뎌지면 감각도 늙는 까닭이다. 세간의 변화에 무덤덤해지면서 생각마저 경직되면 자신의 삶 자체를 뒤처지게 만든다. 그럴수록 자신을 일으켜 어떤 일이나 대상 앞에서 새롭게 두근거릴 수 있도록 설렘의 감각을 찾아 즐겨야 한다. 나를 설레게 하는 것. 그렇고 그런 일상에 낯선 충격을 가하는 것. 그런 설렘을 찾아야 더 두근거리는 감정과 젊은 감각을 유지한다. 설렘을 자주 만들다 보면 자신이 찾아온 생의 가치를 더 많이 담아갈 수 있다. 설렘이야말로 자신을 새롭게 맑게 하는 감정의 다정한 여행이니 말이다. 오늘 아침의 하늘빛에 설렜다면 두근두근 맞이할 일이다. 그 안에 숨겨져 있던 설렘의 보석을 발견하고 내 앞의 나날에 더 눈부시게 새겨갈 테니.

[아침을 열면서] 늦게 온 가을과 생태 재앙

유난히 심하고 길었던 무더위가 가고 마침내 가을이 왔다. 가을이 갑작스럽게 온 탓에 사람들은 방 안에 놓인 선풍기는 그대로 둔 채, 쌀쌀한 밤공기를 막을 가을 이불을 서둘러 꺼낸다. 그래도 오랜 기다림 끝에 맞이한 가을인지라 높고 푸르른 하늘과 뺨을 스치는 시원한 바람이 새삼 고맙고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에 우리를 우울하게 하는 소식들이 여전히 심심치 않게 들린다. 폭염은 해마다 더욱 심해질 가능성이 커서 어쩌면 올해 우리는 그래도 가장 시원한 여름을 보낸 것일지도 모른다는 전망, 이상 고온으로 사과, 배를 비롯한 과일 공급량이 부족해 멀지 않은 장래에는 과일도 서민은 사 먹을 수 없을 것이라는 예측 등이 그것이다. 기후 위기로 대표되는 오늘날의 생태 위기는 더는 미래 세대의 문제쯤으로 치부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현세대가 생생하게 체험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문제다. 특히 오늘날에는 그 누구보다 자연을 세심하게 관찰하는 과학자들이 지구의 건강 상태를 앞장서서 걱정하고 있다. 국내만 해도 대기학자 조천호는 오늘날 인류가 기후 위기에 신속하고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한다면 가깝게는 경제위기, 더 멀게는 인류 멸종의 위기를 겪게 될 것이라 역설한다. 오늘날 생태 재앙의 원인은 물론 인간에게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상업이 이끄는 갖가지 향유에 대한 끝없는 욕망, 그리고 공업이 현실화하는 자연 지배의 기술에 있다. 따라서 이 향유의 욕망 추구를 여전히 삶의 최우선 가치로 삼고, 첨단 기술이면 다 된다고 안이하게 생각해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오늘날 우리나라를 포함한 각국이 탄소중립의 과제를 수행하는 데 더딘 발걸음을 보이는 까닭 역시 다른 데 있지 않다. 바로 생태 재앙의 낭떠러지 앞에 서 있으면서도 최대의 효율과 이익의 극대화라는 경제 성장의 가치를 잣대로 해 여러 생태적 기술의 사회적 정착을 유보하기 때문이다. 욕망, 효율, 이익 등을 전혀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지구의 위중한 건강 상태를 고려한다면 그것들이 최우선의 가치가 돼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병이 위중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람에게 재물이나 명성이 무슨 의미인가. 이 이치를 생각할 때 오늘날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일에 힘써야 한다. 첫째, ‘나’의 건강과 행복을 생각하는 절반만이라도 신음하는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관심이 자연으로도 향하도록 삶의 여백을 만들자. 둘째, ‘내’ 욕망 충족이 아니라 생명 살림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는 삶을 살아보자. 똑같은 돈을 ‘나’보다 ‘남’을 위해 쓸 때 사람은 더 큰 행복감을 느낀다고 한다. 셋째, 생태적 생활양식을 사회적으로 확산할 수 있도록 애쓰자. 기업에서의 기술 개발, 정부에서의 행정 조치, 언론에서의 사회적 감시, 교육 현장에서의 교육 내용, 상업에서의 유통, 가정에서의 소비 등이 모두 최대한 생태적인 성격을 띨 수 있도록 노력하자. 이같이 생각하고 행동할 때 이 재앙에서 벗어날 출구가 보이지 않을까.

[아침을 열면서] 고령 인구와 편의점, 새로운 고객층

얼마 전 일본 홋카이도에 다녀왔다. 차로 이동 중에 세븐일레븐을 찾았는데 눈에 안 띄고 ‘세코마(seicomart)’라는 편의점만 보였다. 세코마에는 특이하게도 핫셰프(hot chef)라는 간판이 달린 주방시설이 있었는데 홋카이도의 쌀과 농산물을 이용해 편의점 내에서 조리해 판매하는 따뜻한 음식이라 한다. 도시락 외에도 신선해 보이는 과일, 흙 기운이 남은 농산물도 꽤 많은 종류가 진열돼 있었다. 주방에서 바로 만든 삼각김밥의 따끈함을 손으로 느끼는 순간 궁금해져 지역에서 특화된 편의점 세코마에 대해 알아봤다. 세코마는 홋카이도 지역의 우유나 특산물을 이용한 자체개발(PB) 상품이 유명하고 낮은 인구밀도를 고려한 특화 서비스를 제공해 고객들로부터 사랑받는 기업 이미지를 형성한 ‘고객만족도 전국 1위’인 편의점이라 한다. 차별화를 위해 도쿄나 오사카 등 대도시 지역에 진출하지 않고 홋카이도 지역에만 집중하는 철저한 로컬 전략을 고수하는 기업이라 한다. 직영점 위주로 운영하는 세코마의 사업 이념은 홋카이도 지역을 공부하고 그곳에 있는 재료를 사용해 주민과의 신뢰를 형성하는 것이다. 지진이나 태풍 등 재난 상황에는 구호물품을 준비해 두기도 하고 대기전력 공급이나 후불 결제방식 등 적극적인 지원으로 홋카이도 주민의 ‘라이프 라인’ 역할을 수행하면서 사랑받는 기업이 됐다고 하니 일본의 편의점 절대강자인 세븐일레븐을 제칠만 하다. 편의점은 주로 젊은층이 이용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홋카이도 시골 마을의 세코마는 고령 인구를 위한 편리한 쇼핑 장소이며 식당, 약국이며 마음을 나누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025년 우리나라는 65세 이상 인구가 1천만명을 넘어 고령 인구 비중 20.6%로 초고령사회에 진입하게 되며 2035년 30%, 2050년에는 40%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되고 10가구 중 네 가구가 1인 가구일 것이라 한다. 편의점은 1인 가구 증가, 24시간 운영, 다양한 생활 서비스 제공 등 확장된 역할로 급격히 성장했으며 최근에는 점포 수가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는 평가다. 지역특화 편의점은 관광지, 대학가, 농어촌, 도심, 주택가 등 각 지역의 특성과 소비자 요구에 맞춰 제품 구성 및 서비스를 차별화하는 전략이 매우 중요하다. 단순히 식품과 생필품을 파는 공간을 넘어 생활에 필요한 제품을 경험할 수 있는 허브로 변모할 수 있다. 편의점은 집 근처에 위치하고 24시간 운영되기 때문에 언제든지 방문할 수 있다. 특히 운전을 할 수 없는 고령층은 필요한 물품만 빠르게 찾을 수 있는 가까운 편의점 쇼핑을 선호할 가능성이 높고 주요 생활필수품 구매처가 되는 경우가 많다. 온라인 주문과 오프라인 수령을 결합한 O2O(Online-to-Offline) 서비스가 결합되면서 고령화사회의 라이프 스타일을 더욱 편리하게 해 줄 것이다. 공과금 납부, 택배, 간단한 금융 거래 등 디지털에 익숙한 액티브 시니어들은 편리한 부가 서비스를 적극 활용할 가능성이 크다. 무인계산대, 비대면 상품 픽업 서비스, 무인점포가 늘더라도 쉽게 적응하리라 본다. 고령 인구를 겨냥한 바이오 및 헬스케어 시장과 함께 편의점의 중요성이 커지며 고령층을 위한 케어푸드(care food)와 같은 제품 구성과 맞춤형 서비스도 함께 발전될 것이라 기대해 본다.

[아침을 열면서] 멋으로라도 책을 읽어라

9월은 독서문화진흥법에 의거, 국민의 독서 생활을 지원하고 책 읽는 문화를 조성하기 위해 국가가 지정한 ‘독서의 달’이다. 문화체육관광부의 발표에 따르면 올해도 전국 각지의 2천684개 기관, 단체, 기업이 주관하는 1만704건의 강연, 책 축제, 전시, 독서 마라톤, 낭독, 함께 독서, 체험 프로그램, 캠페인 등이 온·오프라인에서 진행될 예정이다. 민간 영역에서 자유롭게 이뤄지는 독서문화 콘텐츠까지 합하면 대한민국 전체가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는 한 달이 될 것이다. 해마다 바쁘게 독서의 달을 보내고 나면 ‘국민들이 다양한 독서문화 콘텐츠를 함께 향유했는데 이를 통해 독서 인구는 얼마나 늘어났을까, 과연 책 읽는 문화가 공고해졌을까, 이 답은 어디에서 구할 수 있을까’ 같은 물음이 생긴다. 전국에서 실행된 독서문화 행사의 참여자 설문 등을 통해 대략 현장 반응을 확인할 수 있겠으나 전국 현장을 망라한 독서의 달 효과성을 직접 확인하기엔 무리가 있다. 그나마 문체부가 2년마다 실행하는 ‘국민독서실태조사’ 결과로 간접적 확인이 가능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난 10년간 국민 독서율과 독서량은 점점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다. 2013년 연평균 9.2권이던 성인의 독서량은 2023년에는 3.9권으로 반 이상 줄어들었다. 국가가 독서의 달을 지정하면서까지 해마다 독서문화 확산에 예산을 들이고 많은 이들이 시간과 정성을 쏟아부었음에도 왜 독서문화 확산에는 가속도가 붙지 않는 걸까. 그렇다면 독서의 달 의미가 없는 걸까. 독서 현장에서 어떤 독자를 만나든 ‘책을 왜 읽어야 할까. 왜 책을 안 읽게 되는가’라는 질문을 한다. 지식 세계 확장과 같은 학습적 목표, 마음의 휴식과 같은 정서적 이유, 재미와 같은 오락적 목표로 책을 읽는다는 답변과 너무 바빠 읽을 시간이 없다거나 다른 재미있는 게 많아 안 읽는다는 의견이 대다수다. 15년 전 독서코칭 워크숍 진행차 갔던 중학교에서도 같은 질문을 했고 어느 답변 내용에 다소 충격을 받았다. 다른 멋진 취미가 많은데 굳이 ‘고루하고 없어 보이는’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는 게 아닌가. 심지어 독서를 제일 좋아하고 많이 읽지만 ‘진지충’으로 보일까 두려워 책 읽는 모습을 다른 이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학생도 있었다.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들의 눈에 ‘없어 보이는’ 독서의 중요성과 효용성을 이야기하러 온 내 모습이 어떻게 비칠까 잠시 동공이 흔들렸으나 더 열심히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그 시절 ‘없어 보여서 안 읽는다’는 독서 감수성 그대로를 유지하며 성인이 된 아이들이 점점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는 성인 연간 독서량의 주체가 된 것일지도. 그렇다면 앞으로 독서의 사회적 가치, 효용성은 이대로 생명력을 잃게 되는 걸까. 단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식 정보를 간편 소비하는 사람들 위에 유의미한 지식을 생성해내는 이들이 있었다. 정보의 홍수 시대, 유용한 정보를 취사선택해 지식화하는 다양한 채널이나 플랫폼이 등장하고 생성형 AI라는 최첨단 기술까지 더해져 점점 직접 애를 써가며 생각할 필요가 없어지는 세상으로 변하고 있지만 그럴수록 통찰력을 지닌 이들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자기 주도적 사고 과정을 거친 통찰력은 언어사고력에 기반해 형성되며 어휘력이 그 바탕을 이룬다. 어휘력이 읽기를 통해 길러진다는 점은 책만이 주요 지식화 채널이었던 과거뿐만 아니라 다매체, 디지털 시대인 현재에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고루한 진지충으로 보이기 싫어 책을 읽지 않는다는 시절도 있었는데 최근에는 독서하는 모습이 멋있어 보여 책을 사거나 독서 모임에 참여하고 책 읽는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일명 ‘텍스트힙(Text Hip)’ 현상이다. 보여주기 위한 독서가 무슨 독서냐며 삐딱하게만 볼 일이 아니다. 책의 기능 중 장식적 요소도 있는데 멋내기용 독서도 문제 될 건 없다. 어떤 이유로든, 어떤 방식으로든 책을 접하고 조금이라도 꾸준히 읽다 보면 독서의 깊은 맛도 알게 될 것이다. 책 읽는 문화 정착에 도움이 되는 이런 사회적 움직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즐겁고 유익한 독서 경험을 함께 향유하고 지원하는, 전국 각지의 독서의 달이 올해도 성황리에 진행되기를 기원한다.

[아침을 열면서] 바람을 맛나게 맞으며

오늘 바람은 맛있다. 잠을 깨는 순간 반갑게 닿는 바람의 촉감. 창을 열고 오늘의 온도를 재듯 바람을 흠뻑 마신다. 맑아진 바람의 결이 한층 상큼하게 밀려온다. 며칠 새로 삽상하다는 어감에 딱 맞게 바람의 감촉이 달라졌다. 바람을 한껏 들이며 드디어 가을이라고, 가을이 오긴 왔다고 뇐다. 폭염에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쓸어주는 바람의 위무를 받으니 살맛도 살짝 솟는다. 늘 같은 아침도 바람에 따라 색다른 기분이 된다. 새롭게 차려오는 바람의 걸음새에 마음이 움직이고 몸도 일으켜지는 것이다. 그렇듯 때에 따라, 곳에 따라 바람이 사람살이에 끼쳐온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해마다 새 잎과 꽃을 피우고 과일이며 곡식을 익히는 등등 세상을 경영해온 바람의 힘이 새삼 짚인다. 물론 태양과 비와 구름과 더불어 하는 일이라지만. 아무튼 태풍 같은 게 아니면 대부분의 바람은 우리네 삶을 널리 이롭게 하는 일로 지구를 분주히 돌고 도는 것이다. 그런 중에도 처서 바람은 더 각별하게 맞는다. 그때부터 시원해지는 바람이 예를 갖춰 맞이할 만큼 고마운 까닭이다. 예의란 다름 아니라 바람의 위무를 크게 맞이하는 번개 치기다. 세상 불쾌하게 끈적대던 폭염 습도를 확 내리고, 선도는 상큼하게 올리는 가을바람을 애타게 기다려온 우리의 소소한 마중이다. 동네 골목 어디서든 만나 온몸으로 바람을 맞으면서 여름 내 고생했다고 위무하는 바람의 맛과 깔을 더 높이 즐기는 것이다. 행복에는 즐거움의 강도보다 빈도가 중요하다지 않는가. 그러고 나면 더 기운 내서 가을을 맞이하고, 할 일도 챙겨 보게 된다. 시큰둥하던 일상이 축제 후에 새삼 소중해지고 조금 더 열심히 살려는 마음을 새기는 것처럼. 사실 바람은 ‘두 장소 사이에 존재하는 기압차에 따라 일어나는 공기의 움직임’이니 지구에 오래 존재해온 대기의 순환이다. 그런 특성에 이름도 많고 역할도 많고 관련되는 비유며 함의도 넓은 게 바람이다. 이름도 미풍, 순풍, 돌풍, 솔바람, 산들바람, 명지바람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고 바람의 신, 바람의 딸, 바람의 계곡 등등 예술적 차용과 활용도 부지기수다. 그럼에도 이즈음의 바람을 두 팔 벌려 맞이하는 것은 기나긴 무더위를 물리치며 오기 때문이다. 점점 숨쉬기도 힘든 찜통 폭염을 떨쳐주는 특유의 처서바람이라 다른 때보다 대접을 더 받는 셈이다. 올해는 그토록 기다리던 처서도 며칠은 더 지나서야 선선해져 가을바람맞이 번개를 하고 넘었지만. 구월 아침을 설레게 하더니 바람이 무슨 말인지 천변에도 전하고 다닌다. 무성히 벋기만 하던 풀들도 조금씩 초록을 줄이며 마무리를 준비하는 모습이다. 아직 덜 익은 사과들은 바람의 말을 귀담으며 더 달게 익을 테고 콩깍지 속의 콩알들은 튀어 나갈 태세로 단단해질 것이다. 그렇게 바람을 맞이하는 세상의 고샅마다 제 앞에 주어진 시간을 마저 익히는 가을의 마음으로 그윽이 깊어갈 것이다. 이런저런 전언을 둘러보며 맞으니 오늘의 바람이 더 맛있다.

[아침을 열면서] 우리가 사랑한 아파트

“정말~ 한국 사람들은 참 똑똑한 것 같아.” 몇 해 전 지방을 함께 여행하던 독일 친구가 한적한 시골 마을에 뜬금없이 나타난 고층아파트 단지를 바라보며 나에게 툭 던진 말이다. 내 눈에는 우리 주변에 흔한 그런 성냥갑 아파트였기 때문에 똑똑하다는 게 무슨 뜻이냐고 되물었다. 그 친구의 대답은 독일에서는 이런 고층아파트보다는 단독주택을 선호하기 때문에 집을 짓기 위해 엄청난 면적의 녹지가 훼손되고 있어 큰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고층아파트를 짓고 거기에 모여 사는 것이 오히려 환경을 보호하며 주택난도 해소하는 현명한 방법이 아니겠느냐는 설명이었다. 덕담성 발언이었지만 제법 그럴듯한 해석이었다. 얼마 전 방문한 LH 토지주택박물관의 기획전 ‘아파트: 새로운 삶을 담다’에서 만난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인 마포아파트의 뒷이야기가 흥미롭다. 마포아파트는 당초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고 중앙난방과 수세식 화장실을 갖춘 10층 11개동의 최신식 아파트단지로 설계됐다. 하지만 기름 한 방울도 나지 않는 나라에서 무슨 중앙난방이냐는 비난 여론에 못 이겨 결국 연탄보일러를 설치했다고 한다. 마실 물도 없는데 수세식 화장실은 물 낭비라는 서울시 수도국의 반대가 심했지만 다행히 수세식 화장실은 관철됐다고 하니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전력 낭비의 원흉으로 지목된 엘리베이터를 없애기 위해 결국 6층 6개동으로 규모가 축소돼 1962년 준공된 마포아파트에는 총 450가구가 입주했다. 그때는 아무도 전 국민의 63%가 아파트에 모여 살게 된 오늘을 상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파트는 전시 제목처럼 우리의 새로운 삶을 담는 그릇이 됐다. 이제 우리의 주거문화에서 아파트는 주인공이 됐다. 그래서 우리나라를 흔히 아파트 공화국이라고도 부른다. 이 말에는 좀 부정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아파트가 비록 최선은 아니라 할지라도 지금까지는 우리가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주거환경임을 부인하기 어려운 것도 현실이다. 우리의 새로운 삶을 담았던 아파트의 미래는 어떨까?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도 아파트고 바람 부는 갈대숲을 지나도 아파트다. 우리 주변이 아파트로 꽉꽉 채워지고 있지만 여전히 아파트는 부족하다. 아파트가 우리 시대의 욕망이 됐기 때문이다. 저출산과 초고령화 그리고 1인 가구가 현실이 될 미래에도 지금 같은 대단지의 고층아파트가 여전히 대세일까. 아닐 것 같다. 그래서 아파트의 미래는 불안하다. 아파트의 미래를 제대로 준비해야 한다. 아무리 잘 지은 아파트라도 50년을 넘기기는 어렵다. 이쪽에서는 헐고 저쪽에서는 그린벨트를 해제해서라도 새로 짓고야 마는 무한 반복의 아파트 공화국이 우리의 미래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변화하는 삶을 담을 새로운 그릇을 차근차근 준비하는 주도면밀한 혜안의 대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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