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면서] 잘 익은 벼는 고개 숙인다

역경(易經)에 亢龍有悔(항룡유회) 盈不可久(영불가구)라는 말이 있다. 하늘 끝까지 올라간 용은 더 올라갈 수 없으니 내려올 수밖에 없고, 무엇이든 꽉 채우면 오래가지 못한다라는 뜻이다. 계영배(戒盈盃)는 술을 70% 정도만 담을 수 있도록 만든 잔이다. 채우고 넘치도록 술을 따르면 그 잔을 든 사람이 쓰러진다. 비석(碑石)에 기록하는 비문(碑文)은 음각(陰刻)으로 새긴다. 비석 자체를 글자로 만들기 위해서다. 돌이 글자를 품었으며, 표현하고자 하는 글자는 모두 그 돌 안으로 들어갔다. 말하자면 비석의 몸인 돌 전체가 글자가 된 셈이다. 그래야 비석에 새긴 글자가 오래 살아남는다. 비석을 만들 때 돌의 질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모진 비바람을 맞는 건 글자가 아니라 글자를 품고 있는 돌이다. 비석 몸이 닳아 없어지지 않는 한 비문은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는다. 만약 비석의 글자를 도드라지게 양각(陽刻)으로 하면 글자가 비바람을 먼저 맞게 돼 돌보다 글자가 더 일찍 사라진다. 지도자의 탄생 과정도 이와 같다. 도드라진 재주가 키운 힘으로 대중(大衆)을 끌어들인 지도자, 즉 재주가 많음을 앞세워 스스로 자신을 지도자로 만들면 쉬 부서진다. 올바른 지도자는 대중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대중의 힘으로 만들어진다. 도드라져서 떠오르는 게 아니라 대중이 품도록 해야 한다. 그리하면 대중이 크고 튼튼할수록 더 오래도록 남는 훌륭한 지도자가 된다. 대중은 앞서 언급한 비석의 돌과 같다. 양각이 아니라 음각을 하면 그 지도자는 대중이 존재하는 한 살아남을 수 있다. 대중의 품에 들어가는 건 도드라진 재주가 아니라 대중의 마음 여백에 넘치지 않게 담기는 겸손이다. 잔을 든 사람을 쓰러뜨리지 않는 계영배와 같은 술잔이 되는 일이다. 이게 어찌 지도자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겠는가. 우리가 살아가는 일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자신의 재주만 믿고 제 잘났다고 도드라지면 사람들로부터 쉬 잊힌다. 나의 잘난 모습을 보이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나를 품게 만들어야 나의 존재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내가 사람들을 이끄는 게 아니다. 사람들이 나에게로 오게 하는 것, 여백(餘白)을 만드는 이 겸손이 올바른 존재가치를 만든다. 과유불급(過猶不及), 논어 선진편(先進篇)에 나오는 이 말은 공자가 제자 자공에게 지나침은 모자람보다 못하다라고 깨우쳐준 가르침이다. 김호운 소설가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

[아침을 열면서] ‘사명’에 대하여

국가행정의 수장인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언론에 사명이나 명운 같은 단어가 눈에 띄게 노출되고 있다. 후보자 모두 시대적 사명이나 정치적 숙명으로 출마했고, 국가의 명운이 선거 결과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호소한다. 사명은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를 뜻한다. 그 임무에는 실무를 담당하는 자리에 올라 주어진 책임(責任)도 있고, 지위는 주어지지 않더라도 스스로 지고 있는 자임(自任)도 있다. 해와 달이 어김없이 뜨고 지기를 반복하며 자기 역할을 해내듯, 우리는 크고 작은 책임이든 자임이든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고자 힘써야 한다. 자기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은 천지의 자연적 본질이자 인간의 당위적 목표다. 아쉬운 것은 대부분 사람들이 자기 사명을 잘못 알고 있고, 알더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것이다. 사명이 무엇인지 자각하는 지명(知命)의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 자기 역량을 넘어서고, 자기 자리가 아님에도 자신의 사명이라 굳게 믿고, 자신만이 해낼 수 있다고 착각하면, 사명을 모르는 것이다. 금세 무너질 담벼락 옆에 서 있으면서 그것이 자신의 숙명이라고 말하는 경우와 같다. 욕심은 마음의 눈을 가려, 자신도 주변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고, 스스로를 망치는 길로 이끈다. 자신을 성찰하고 욕심을 제거해 자기 천성대로 살아가기 위한 수신의 노력이 요구된다. 사명을 알았거나 임무가 부여됐다면, 엄중하게 수용하고 굳세게 실천하는 외명(畏命)의 자세가 수반돼야 한다. 욕심에 혹은 중압감에 주저하거나 외면하면 자기 임무를 방기하는 것이다. 엄숙하게 자신의 사명을 수용하고 사명 완수를 위해 매진해야 한다. 사명의 실현 과정은 순조롭지 않을 수 있다. 진심이 곡해되고 비난이 점철돼 외로울 수 있다. 남들의 평가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묵묵히 자기 길을 걸어가야 한다. 주어진 임무를 착실하게 수행하다 보면, 객관적 한계인 운명과 마주하게 된다. 이상이 실현되는 것도 명이고, 중도에 좌절되는 것도 명이다. 운명은 시도도 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대충하고, 요행만을 바라는 자들에게는 찾아오지 않는다. 자기 사명을 자각하고 실현하고자 최선을 다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임무를 다할 기회를 얻으면, 성급하게 성과를 내려 하기 보다 해야 할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구분하고, 차근차근 해나가야 한다. 사명은 순수한 마음을 지닌 사람만이 알 수 있고, 굳센 실천을 지속하는 사람만이 바르게 할 수 있다. 맑은 마음을 회복해 자기 천성을 자각하고, 결과에 상관없이 사명의 완수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지도자가 선출되고 다듬어져 국가의 명운이 한층 더 밝아지기를 희망한다. 고재석 성균관대학교 성균인문동양학아카데미 주임교수

[아침을 열면서] 3월의 자세

새뜻한 3월. 새 맛은 역시 3월이다. 한 해 시작인 1월보다 출발의 느낌을 더 새롭게 깨워낸다. 그래서 자세도 새로 가다듬고 걸음도 더 바르게 걸어야 할 것만 같다. 새 책, 새 공책, 새 학년이니 입학 같은 새로운 출발의 큼직한 단위나 기억들이 오래 작동하는 까닭이겠다. 사실 2월은 쉬어가는 달처럼 조금 느슨히 보내기 쉽다. 2월 봄방학을 두던 우리네 학기 운용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2월은 이삼일이 짧아서 미처 못 다한 일도 봐주고 싶어진다. 여느 달보다 짧은 만큼 아량은 더 있는 셈이랄까. 그렇게 2월 보내고 3월의 입구에 서면 긴장감이 확 몰려온다. 자, 이제 본격적인 출발인데 무엇부터 어떻게 실행해야 하지? 묵은 먼지를 털며 괜히 서성이다 주변 공기마저 팽팽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그렇듯 마음 다잡게 하는 무슨 채근이 3월에는 더 있는 게다. 예전에는 3월이 싫었다. 얼고 녹기를 반복하는 흙길 때문에 더 그랬다. 신발이며 바짓단에 진창이 들러붙기 일쑤라 풀이 자라던 가장자리만 딛는 발자국들로 새 길이 날 정도였다. 질척거리긴 마당도 마찬가지여서 봉당이며 댓돌까지 묻어 다니는 흙들에 비질이 바빴다. 그러던 3월 진창길 대신 지금은 미세먼지로 괴롭다. 온화한 봄날의 복병인 미세먼지군단. 제국의 점령처럼 뒤덮던 황사보다 더 치명적인 미세먼지 예보에 걱정이 앞선다. 오미크론 대확산까지 겹친 먼지세상이라니 암울하다. 벌써부터 눈과 목이 따끔대는 노약자나 기저질환자는 봄을 또 어찌 살아낼 것인가. 그런 중에도 꽃소식은 여전하니 3월을 새롭게 만드는 즐거움이다. 얼음 속에 먼저 피는 이른 봄꽃들 뒤를 따라 우리 산하를 피워낼 꽃들이 골목골목 즐비하다. 간간이 치는 꽃샘추위쯤 다 물리치면서 봄꽃들은 그렇게 희망을 피워 새록새록 건넬 것이다. 어김없이 새 꽃을 피워내는 자연에 우리는 또 사람이 못 주는 꽃 위안을 받으리라. 특히 올 3월은 사람 꽃이 환히 피길 바랄 테지만, 그와 다르면 어느 꽃도 꽃이 아닐 것이다. 내 마음의 꽃이 펴야 정작 참다운 꽃봄이라고 환대하듯. 그나저나 3월은 춘삼월이다. 웅크렸던 어깨 펴고 나서는 자세가 필요하다. 조금 풀어진 채 보낸 2월을 털고 달력을 펼쳐본다. 무엇이든 시작하라고 곧 많은 프로그램이 손짓을 더할 것이다. 덩달아 우리의 설렘이나 들렘도 뭐가 새로이 할 만한 일인지 눈을 밝힐 것이다. 새로운 시작이든 도전의 재도전이든, 코로나 시국에도 할 수 있는 것들을 챙겨 나서리라. 지쳤다고 주저앉아 바이러스 탓만 하며 우리 앞의 시간을 그냥 보낼 순 없지 않은가. 그렇게 추켜보니 바닥났던 기운이 좀 솟는다. 세상사 마음먹기 달렸다고, 너 자신을 피우라는 어린 꽃망울들의 채근도 들리는 듯싶다. 멀리 꽃피는 소리에 다듬어보는 봄맞이 자세다. 정수자 시조시인

[아침을 열면서] 상대의 언어로 대상 바라보기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觀點)에 따라 사물(事物)의 모습과 내용이 달라진다. 관점이 다른 여러 사람이 본다면 이 사물은 여러 개 모습으로 각기 다르게 보일 것이다. 같은 사물을 보는 데도 관점이 다르면 이처럼 대상이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 하나의 사물을 두고 사람마다 달리 말하는 건 관점이 달라서다. 낱낱으로 나뉘면 모두 진리라고 주장하나 총화(總和)로 보면 이처럼 오류로 뭉쳐있다. 올바르지 않은 관점이 혼돈과 혼란을 일으켰다. 올바른 관점은 내가 아닌 상대의 언어로 대상을 바라볼 때 생긴다. 장자(莊子)가 이걸 보았다. 남쪽 바다 임금 숙(儵)과 북쪽 바다 임금 홀(忽), 그리고 중앙 땅을 다스리는 임금 혼돈(渾沌)을 등장시켜 장자는 장자의 혼돈 이야기로 이 문제의 답을 만들었다. 숙홀(儵忽)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 숙홀은 숙홀하다의 어근(語根)으로 홀홀(忽忽)하다라는 형용사의 뿌리 말이다. 뜬금 없다거나 조심성 없이 가볍다, 혹은 빠르게 달린다고 할 때 이 말을 사용한다. 그 이야기는 이렇다. 숙과 홀이 가끔 중앙의 혼돈 땅에 모여 즐겁게 한담하고 간다. 혼돈은 귀눈입코가 없다. 마치 풍선처럼 생겼다. 귀눈입코가 있는 숙과 홀은 겉으로 보고 듣고 맛보며 세상을 알지만, 혼돈은 귀눈입코가 없으니 속으로 상대의 언어를 듣고 사물을 보며 마음으로 음식 맛을 봄으로써 세상을 이해한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숙과 홀이 혼돈에게 하루에 한 개씩 구멍 일곱 개(귀눈입코)를 뚫어준다. 마지막 일곱 번째 구멍을 뚫자 혼돈이 그 자리에서 죽어버렸다. 혼돈이 사라진 이때부터 세상은 혼란에 빠진다. 숙홀혼돈이 사는 곳은 바다와 땅으로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혼돈을 중심에 둔 건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겪어야 할 피할 수 없는 숙명으로 혼돈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제각기 생각과 관점이 다를 수밖에 없으며 장자는 이를 피할 수 없는 가치로 보았다. 부정이 아닌 긍정의 시선으로 혼돈을 정의(定義)한 것이다. 여기에서 장자는 자신의 언어가 아닌 상대의 언어로 대상을 바라보았을 때 그렇다는 지혜를 이 이야기에 담았다. 숙과 홀이 자기들 관점에서 구멍 일곱 개를 뚫어주자 혼돈이 죽어버린 건 그렇게 하면 세상이 혼란에 빠진다는 경고다. 나의 언어가 아니라 상대의 언어로 세상과 소통해야 한다. 우리는 나무를 보고 나무라고 하지만 정작 나무는 자신의 이름이 나무인 줄 모른다. 인간의 언어로 나무를 정의 내리고 그렇게 믿으라며 강요한다. 나무를 바라볼 때는 나무의 언어로 대화해야 한다. 나무도 우리처럼 자유로운 생명으로 자라고 있다. 이것이 자연의 질서며 그렇게 해야 관점이 다른 사람들끼리 서로 이해하며 평화롭게 잘 살아갈 수가 있다. 김호운 소설가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

[아침을 열면서] 일에서 큰 성과를 이뤄내는 지름길

어떤 일을 할 때 뜻한 바를 이뤄내면 스스로의 성취감에 뿌듯하고 남들의 인정에 기분도 좋아진다. 그런데 일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쉼 없이 다그치며 조급해 하고 불안해 하기도 한다. 아마도 성과도 없고 방향도 잃어서일 것이다. <논어>는 말한다. 빨리 이루려 하지 말고 조그만 이익을 탐하지 말아야 한다. 빨리 이루려 하면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조그만 이익을 탐하면 큰 일이 완성되지 않는다. 자하가 노나라 지방 도읍 행정을 책임지는 지위에 오른 후 정치의 요법을 물어오자, 공자는 명분을 바로잡고 솔선수범하며 경제와 교육의 토대를 구축하는 것 등 중요한 것이 많음에도, 원대한 포부를 지니지 못한 제자의 단점을 직시했다. 또 빨리 이루려 하거나 작은 이익에 연연해 하면 성과도 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정책의 방향도 상실하게 됨을 경계했다. 성과에 주목해 성급히 무리하면,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가 흉기로 돌변하듯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일을 도모할 때 남들에게 성과를 과시하기 위해 일을 조급하게 추진하면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 가시적인 성과가 없더라도 긴 안목을 가지고 본질에 힘쓸 필요가 있다. 물론 원대한 목표를 유념하고 있더라도,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할 수 있다. 이상만을 바라보며 빨리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욕심 부리다 보니, 현실을 소홀히해 일을 그르치는 것이다. 현실 상황과 한계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할 수 있는 범위와 해야 할 목표를 엄밀하게 구분해 현실적인 정책을 추진해야 목표에 근접할 수 있다. <맹자>를 보면, 알묘조장 고사가 나온다. 송나라 어떤 사람이 모내기를 한 후 벼 이삭이 늦게 자라자, 조급한 나머지 논 속의 흙을 돋운 뒤 모를 뽑아 그 위에 다시 심었다. 집에 돌아와 가족들에게 벼 이삭이 빨리 자라도록 돕느라 힘든 하루 보냈다고 큰소리쳤다. 아들이 급히 논으로 달려가 보니 벼 이삭이 이미 말라 죽어 있었다. 맹자는 벼가 자라는데 도움 될 것이 없다고 버려두는 자는 돌보지도 않는 자이고, 억지로 조장하는 자는 벼 이삭을 뽑아 다시 심는 자이므로, 모두 일을 그르치는 어리석은 자라고 비판한다. 그리고는 어떤 일을 도모할 때, 성과를 미리 기약하지 말고, 마음에서도 잊지 말며, 억지로 조장하지도 말아야 한다고 경계한다. 빨리 이루려 욕심내면 오히려 성과를 내지 못하고 목표를 이루지 못할 수 있다. 일의 방향성을 늘 유념하되, 인내심을 갖고 본질에 힘쓰면서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나가야 한다. 어떤 일을 시작하거나 중요한 직책을 맡으면, 성과를 이루고 싶은 마음이 앞서 조급해질 수 있다. 그럴수록 조급해 하지 않는 것이 더디지만 위대한 성과를 이뤄내는 지름길임을 <논어>는 말하고 있다. 고재석 성균관대 유학대학 교수

[아침을 열면서] 샛길

그냥 새버릴까 샛길을 보면 문득 만발하는 생각들이 있다. 그것도 매양 반복되는 출퇴근길에서라면 더더욱. 하지만 대개의 샛길은 바라보다 돌아서는 한숨의 사잇길이다. 위험할 수도 있는 샛길이 그토록 마음을 헤집는 것은 평소와 다른 길의 유혹 때문일 것이다. 샛길은 새고 싶은 마음만 아니라 빨리 가려는 욕망도 부추긴다. 샛길이 공원에도 많이 생기는 것을 보면 그런 심리가 더 보인다. 공원 안의 길은 기존의 보행 노선을 고려해 잘 배치했지만 어느새 질러가는 샛길이 난다. 그것도 길옆의 잔디밭으로 지름길이 홀연히 만들어지는 것이다. 어떤 길은 본래부터 있었나 싶을 만큼 묵은 길맛이 제법 난다. 대부분 새로 난 길의 풋내를 풍기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걸음의 흔적들이 매끈하게 다져진다. 본래의 길을 버젓이 놔두고 그 옆으로 오종종 생긴 자국들이 샛길로 위치를 드러내는 것이다. 누군가 걷기 시작하고 따라 걸은 흔적들. 처음엔 따라 걷기도 망설여진다. 공원 안의 샛길이 대부분 잔디밭에 나 있는 까닭이다. 샛길의 유혹 앞에서 선뜻 못 들어서는 것은 지엄한 명령의 기억도 작용한다.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시오. 어린 시절 곳곳에서 눈을 부라리던 경고의 팻말은 얼마나 오래 가는 것인지. 그에 대한 저항으로 일부러 밟은 발길도 더러 있었다. 겨울 보리밭처럼 밟아줘야 잔디에도 좋다나. 하지만 잔디가 남아 있는 길은 미안스러워 머뭇대게 마련이고, 초록이 다 진 겨울에야 편하게 걸을 수 있다. 특히 시멘트나 벽돌 길에 발바닥이 아플 즈음이면 푹신한 잔디밭의 유혹이 아주 크다. 추운 마룻방에서 따스한 안방을 그리듯 흘끔거리며 바라보다 에잇 잔디밭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공원에 점점 늘어나는 반려견 산책자들 또한 다른 마음을 불러낸다. 그들이 거의 다 잔디밭을 마음껏 걷고 뛰기 때문이다. 개들이 끄는 대로 따라가는 사람들이 마지못해 잔디밭을 걷는지는 모르지만, 개 없는 산책자들 입장에서는 묘한 느낌이 든다. 견권이 인권보다 앞이던가? 누구든 잔디밭을 왜 걷느냐고 따지면 개가 사람보다 먼저냐고 나름의 응대를 장착하고 잔디밭을 걸어본다. 개들은 저리 마구 다니는데 사람은 왜 견제하느냐 준비했는데, 잔디밭 산책은 아무에게도 시비 당하지 않는다. 그것도 겨울 산책일 뿐, 봄여름가을이면 잔디밭은커녕 잔디밭 속 샛길조차 잔디에게 미안해서라도 못 들어간다. 그러고 보니 샛길에 때때로 끌렸다. 낯설고 색다른 호젓한 샛길. 인적 드문 산속이나 들판에서 희미한 샛길을 만나면 따라 가고 싶어 설렜다. 무슨 생의 샛길을 꿈꾸다 다 지나오니 마음만 먼저 들떠 걷는 게다. 비유를 떠나 길 자체만 봐도 번다한 큰길보다는 호젓한 샛길의 매력이 크다. 더 들어가 보고 싶은 묘한 끌림과 울림. 그런 속삭임에 샛길이 자꾸 생기나 보다. 정수자 시조시인

[아침을 열면서] 우공(愚公)과 지수(智叟)

우공과 지수는 열자(列子) 탕문편(湯問篇) 고사(古事)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이다. 이름에서 보듯이 우공(愚公)은 어리석은 사람이며 지수(智叟)는 지식을 쌓은 똑똑한 사람이다. 이야기는 이렇다. 바깥으로 나다니기 힘들게 마을 앞을 가로막은 태행산(太行山)과 왕옥산(王屋山)을 우공이허물려고 한다. 산을 허문 흙은 수레에 싣고 700여리 떨어진 발해만으로가져가서 버려야 하는데 거기까지 한번 다녀오자면 거의 일 년이 걸린다. 나이 90에 이른 우공이 이 엄청난 일을 시작하자 지수가 참 어리석다며 비웃는다. 그러자 우공은 내 생애에 다못하면 내 자식이 할 것이고 내 자식이 다 못하면 내 손자가 할 것이니, 자자손손 대가 이어진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이 두 산이 없어질 것이다라고했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고사성어가 이 이야기에서 나왔다. 우리는 우공이산을 열심히 하면 반드시이룰 수 있다는 뜻으로만 알고 있으나 여기에 깊은 의미 하나가 더 숨겨져 있다.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분별하라는 가르침이 그것이다. 할수 있는 일을 하지 않는 사람도, 어리석지만 할 수 없는 일인데도 굳이 하려는 사람도 어리석다. 그러하므로 할수 있는 일은 열심히 하면서 할 수 없는 일에 손대지 않는 이가 참 지혜로운 사람이다. 이런 지혜로운 사람이모이면 버리는 일 없이 모두 제 할 일을 잘해서 세상의 결이 반듯하게 잘서게 된다. 그런 지혜로운 사람이 필요한데 세상에는 내남없이 오만과 편견에 빠진사람들이 득시글거린다. 제 일은 팽개쳐 두고 마치 제 것이기나 한 양 남의일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며 입에 거품물고 훈수 드는 걸 정의로운 행동이라여기는 사람들이 세상에 차고 넘친다.그러다 급기야 내 편 네 편으로 패거리 지어 서로 다투기까지 한다. 이런혼탁한 세상이 올 줄 오래전에 예단한 열자(列子)가 우공(어리석은 사람)을 지혜롭게, 지수(똑똑한 사람)를 어리석게 이름이 주는 의미를 뒤집어서이야기를 만들었다. 사람들은 우공이산에 숨겨 놓은 이 깊은 뜻을 새기지 못하고 나만 할 수 있다며 여전히 오만과 욕망을 좇는다.어느 모임에 참석했을 때다. 독설가로 소문난 한 문학평론가가 지식인들이 지금 우리 사회를 망치고 있다고 했다. 지식인들이라 자처하는 분들이 들으면 언짢아할지 모르나 듣고 나서 가만히 새겨 보니 영 틀린 말은 아닌 듯해 나는 씁쓸하게 속웃음을 웃었다. 참지식인은 켜켜이 쌓은 지식(知識)을 말로 드러내지 않고 그 지식을 녹인 지혜(智慧)로 행동한다. 우공이산에 나오는 우공이 그러한 사람이다. 김호운 소설가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

[아침을 열면서] 아름다운 경쟁을 위하여

넷플릭스 9부작 한국드라마 오징어게임이 장안에 화제였다. 개봉하자마자 넷플릭스 TV쇼 부문 최장 기간 1위에 이어 전 세계 1억1천100만가구 이상 시청해 역대 최고 기록을 경신했다. 잔혹하고 폭력적인 내용이 불편하면서도 생존 경쟁 앞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결승선을 넘어야 한다는 게임의 룰이 현재의 삶과 닮아 있다는 공감 때문이지 않을까 추론해 본다. 옆 눈 가리고 질주하는 경주마처럼 쉼 없이 앞만 보며 경쟁에 내몰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경쟁은 과연 삶에서 필요한 것일까? 엄혹한 무한경쟁 말고 아름다운 경쟁은 없는 것일까? 동양고전 『중용』에서 공자는 과정이 공정한 경쟁을 칭송했다. 활쏘기는 군자다운 모습과 유사하다. 활을 쏘아 정곡을 맞추지 못하면 돌이켜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는다.(射有似乎君子. 失諸正鵠, 反求諸其身.) 고대에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사냥으로 전투기술을 연마했고, 사냥을 대신해 짐승 가죽을 과녁으로 삼아 포획하는 활쏘기 연습을 했다. 평시에는 활쏘기가 덕행을 함양하거나 인재를 선발하는 수단으로 활용됐다. 활쏘기는 마음이 편안하고 몸이 바르며, 활과 화살을 잡은 것이 모두 확고해야 적중할 수 있다. 자기가 바른 후에 활을 쏘고, 적중시키지 못하면 반구저기(反求諸己)라 하여 돌아봐 자신에게서 잘못의 원인을 찾는다. 패자는 승복하고 벌주를 마시며 승자를 원망하지 않는다. 승자 역시 술을 권하고 축하받되 과시하지 않는다. 자신을 이긴 자에 대해 원망하지 않는 것은 적중의 실현 여부가 자신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경쟁은 승패를 다투는 것이 기본이지만 활쏘기의 목적은 힘자랑을 하거나 남을 이기는 데 있지 않다. 자신의 수준을 파악하고, 집중하며 활을 쏘아 자기 수준을 향상시키는 데 있다. 경쟁에서 실패의 원인을 자신에게 찾지 않고 환경 탓, 남 탓만 하며, 이기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면 경쟁의 목적이 자기함양이 아닌 남을 이기는 데만 있는 것이다. 그런 경쟁은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하여 잔혹하게 만든다. 서로에게 발전을 가져오는 경쟁, 지고 나도 아쉽지 않은 경쟁은 경쟁의 과정에서 스승에게도 양보하지 않을 정도로 최선을 다하고 스스로 떳떳하도록 정해놓은 규칙 안에서 공정하게 해야 가능하다. 물론 경쟁의 과정과 결과가 좋은 것은 목적이 바르기 때문이다. 경쟁의 목적은 자기답게 살고 자기를 완성하는 데 둬야 한다. 남들이 규정하고 사회가 우선하는 기준에 부합하기 위해 영혼없이 메마른 경쟁을 하는 게 아니라 죽는 순간에도 아쉽지 않은 가슴 뛰는 일에 매진해야 경쟁이 즐겁고 결과와 상관없이 후회되지 않는다. 경쟁은 모름지기 방향도 올바르고 과정도 정직해, 경쟁으로 승패가 나뉘어도 참여한 사람 모두 격려받고 자아실현의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아름다운 경쟁이어야 한다. 아름다운 경쟁은 자신의 삶을 의미 있게 가꾸면서, 나로 인해 주변에 감동을 선사하는 가슴 뛰고 멋진 일이다. 고재석 성균관대 유학대학 교수

[아침을 열면서] 마음과 근육

근력은 여전하시고? 어른들이 주고받던 아침 인사였다. 근력이 기운인지 기분인지, 갸우뚱거린 어린 시절 기억의 하나다. 그때 근력이란 어른들끼리 통하는 표현으로 담아뒀다. 그런데 요즘 실감하는 말이 근육이고 근력이다. 그것도 구체적으로 새록새록 일깨워주는 실감이다. 최근에는 연금보다 근육이라는 표현도 자주 보인다. 근육이야말로 노후를 뒷받침하는 힘이자 장수의 바탕인 게다. 건강을 잃어봐야 소중함을 깨닫듯, 근육도 소실이 일어나야 비로소 중요성을 알게 된다. 계속 다지지 않으면 근육도 노화로 빠져나간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부터 대응을 마련해야 하는 게다. 그나마 남아 있는 헐렁한 근육이라도 지키자면 꾸준한 운동이 필수라는 경고다. 요즘은 시에도 근육이 많이 불려나온다. 마음의 근육이라는 낯선 표현이 등장하나 싶더니 비슷한 표현들이 늘었다. 마음에도 근육이 있었던가. 비유로 보면 없다고 할 수도 없으니 신선한 활용으로 다양해지는 것이다. 실제로 마음 근육 키우기 같은 심리프로그램이 벌써 나왔는데 멘탈 헬스 영역에서 많이 다룬다. 특히 경쟁이 치열한 기업의 스트레스 관리로 마음 챙김이며 명상 프로그램에 활용 중이다. 한때 힐링이 유행하며 매스컴을 휩쓸더니 마음의 근육이니 회복 탄력성이 확산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실체가 없는 마음에 근육을 붙인 점에서 무척 신선했다. 회복 탄력성의 느낌이라도 더 구체적으로 뚜렷해지는 기분이랄까. 그런데 마음 근육의 세 가지 구성요소를 자기조절력, 대인관계력, 자기동기력이라고 한 견해를 짚어보면, 그동안 써온 표현들을 달리 집약한 거나 진배없다. 자기조절은 일찍부터 강조해온 자기 수양의 하나고, 자기동기력도 자신이 동기부여를 해야 효율적인 능력 발휘가 된다고 익히 들어온 바와 같다. 대인관계력 또한 적응과 대응 그리고 포용력과 크게 다르지 않은 표현이라 하겠다. 그보다 크게 닿는 것은 회복 탄력성이다.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랭보)라는 외침처럼, 살면서 누구나 상처를 주거나 받는다. 그것을 빨리 딛고 일어서는 힘이 필요한 것이다. 그 힘을 회복 탄력성으로 보면 이 또한 마음의 근육에 상관성이 크다. 웬만한 상처쯤 훌훌 털어내려면 마음의 근육부터 단단해야 하니 말이다. 그럼에도 예민한 사람은 상처가 물이 될 때까지 곱씹어야 천천히 낫겠지만. 마음의 근육도 결국은 자신이 키워야 하는 것. 어떤 도움도 마음이 따르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 그러고 보면 마음의 근육을 키우는 데는 독서만 한 게 없다. 타인의 이야기를 읽는 동안 이해와 배려 같은 정신의 성장을 얻는다. 그 과정에서 위안과 정화도 큰 힘을 발휘하니,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설파한 카타르시스의 작용이다. 시를 읽는 일 또한 마음의 근육을 키우는 아름다운 일. 그렇게 꼭 덧붙이고 싶은 새맑은 아침이다. 정수자 시조시인

[아침을 열면서] 매월당 김시습의 ‘사청사우’

2022년 새해 벽두에 문득 매월당 김시습의 시 사청사우(乍晴乍雨)를 떠올린다. 사청사우는 날이 개었다 비가 내렸다 한다는 뜻이다. 한 해를 여는 문 앞에서는 대개 밝고 행복한 이야기를 한다. 희망은 언제 들어도 반가운 말이다. 그러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입에 발린 소리보다 좀 더 솔직한 이야기가 희망에 한 걸음 다가가는 덕담일 듯해 있는 그대로 세상 이야기를 하고 싶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에서나 바람 잘 날 없다. 어떤 분은 삶이 다 그런 거라고 말한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게 살면 그렇게 살아가는 거려니 하겠으나 이왕이면 그 빈틈에 아름다운 꽃 한 송이라도 피우는 여유를 가진다면 더 향기로운 인생이 되지 않을까. 옥토만이 땅이 아니다. 바위틈을 비집고 나와 자라는 꽃도 있다. 코로나19가 창궐해 세 해째 우리 삶을 위협하며 괴롭힌다. 자영업을 하는 분들은 영업이 안 돼 생계를 위협받고, 평범한 시민들 가운데는 일상을 빼앗겨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분들도 있다. 이 난국을 빠져나가야겠는데 어느 곳을 돌아보아도 당장은 딱히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힘을 모아도 모자랄 판에 정치하는 분들은 이런 현상이 보이지 않는지 서로 자리를 안 뺏기겠다며 싸움질만 한다. 국민은 어느 쪽이 나를 도와줄까 눈치를 보며 저울질해 보지만 어느 쪽도 쉬이 희망을 가져다줄 것 같지 않다. 잠시 개었다 다시 비가 오고, 비가 오다가 다시 날이 개는구나 하늘의 이치가 이러하거늘 하물며 세상의 인정이랴 나를 칭찬하던 이가 오히려 나를 헐뜯고 공명을 피하던 이가 다시 명예를 구하려 하네 꽃이 피고 지는 것을 봄이 어찌 상관할 수 있으랴 구름이 가고 오는 것을 산은 다투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아, 모름지기 내 말 잘 새겨들으시오 즐겁고 기쁜 일을 평생 누리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오 - 매월당 김시습 사청사우 전문 행복과 희망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내 가슴에 있다. 내 안을 못 보고 욕심스레 밖에다 산처럼 쌓는 행복은 크게 쌓일수록 빨리 무너진다. 즐겁고 기쁜 일을 평생 누리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오 하는 매월당의 시구처럼 평생 누릴 수 있는 행복은 밖에 있는 게 아니라 무너지지 않는 내 안에 있다. 한 편의 문학 작품이 이렇듯 가슴에 묻어둔 자신의 마음과 세상을 제대로 보는 눈을 만들어준다. 사청사우(乍晴乍雨)를 음미하며 꽃이 피고 지는 내 안의 봄을 보게 되면 바위에서 피는 꽃도 볼 수 있다. 김호운 소설가ㆍ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

[아침을 열면서] 자기다움을 위한 길

평소 거울을 볼 때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는가. 만족스러운지, 아니면 쌍꺼풀이 있었으면 좋겠다, 코가 조금 높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누구처럼 닮아가기 위해 성형을 고민하지는 않은지. 남과의 비교는 자신을 가꿔가는 분발의 계기가 되기도 하지만 자신을 초라하게 하고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시작이 되기도 한다. 스스로를 존중하고 자기답게 사는 방법은 무엇일까? 동양고전 논어는 말한다. 자공이 남과 비교하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는 어진가 보다. 나는 그럴 겨를이 없다.(子貢方人, 子曰 賜也, 賢乎哉! 夫我則不暇) 자공은 스승보다 31세 어렸지만, 언변과 정치에 뛰어나 노나라와 위나라의 재상을 역임했다. 공자의 이름이 천하에 골고루 알려지게 된 것도 그가 앞뒤로 도왔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공자는 자공이 예측을 잘한다고 평가했다. 한번은 공자가 제자 자천을 군자답다고 칭찬하자, 자공은 자신은 어떤 사람인지를 묻는다. 공자는 그릇(器)과 같다고 말했다. 그릇은 하나의 고정된 기능만을 지녔기에, 군자가 경계해야 할 인재의 모습이다. 제자의 좌절이 염려된 공자는 다시 그릇 가운데 제사에서 쓰이는 화려한 예기(瑚璉)와 같다고 말해준다. 남과 비교하는 것은 자신이 남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확인해 만족을 느끼려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끊임없이 비교하고 비교당해왔다. 성적, 외모, 대학, 취업, 결혼 등을 위해 남과 비교하며 끊임없이 자신을 학대해왔다. 어른이 되면 그칠 줄 알았던 비교는 자동차, 집, 승진, 자녀 등으로 전환돼 지속되고 있다. 비교는 끊임없는 부족을 야기해 불행의 씨앗이 되곤 한다. 자기 모습을 부정하고 남만 모방해 자신을 다그치면 나은 능력을 지닐 수는 있지만 오히려 공허하게 될 수 있다. 비교 대상이 자기에게 있지 않고 남에 있기 때문이다. 남과 비교를 통해, 내가 남보다 나은 점이 있다 해서 우쭐댈 필요는 없다. 자기 모습대로 삶을 가꿔가는 자들은 비교를 통해 우열을 평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남과 비교를 통해 얻은 우월감은 지속적인 자존감을 주기 어렵다. 그럴 여유가 있다면 그 시간에 자신을 성찰하고 부족을 메우는 노력이 필요하다. 꽃은 제 모습대로 피어날 때 아름답고 감동스럽다. 장미꽃이 인기가 있다고 해서 안개꽃을 빨갛게 염색하고 가시를 단다고 장미꽃이 될 수 없다. 비교는 자기다움을 찾고 완성하는 과정에서 이뤄져야 한다. 어진 이의 행동을 보면 그와 같아지기를 생각하라.(見賢思齊焉)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남의 좋은 점을 배워 자기다움을 완성하는 비교는 공자도 권장했다. 거울을 보며 나를 자세히 바라보고, 나의 모습에 애정 어린 시선을 가져보자. 그리고 나의 일상을 돌아보며 나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고, 나의 장점에 대해 살펴보는 자세를 가져보자. 자기 모습을 존중하고 자기다움을 완성하기 위해 분발하는 비교는 자기답게 사는 지름길임을 논어는 말하고 있다. 고재석 성균관대 유학대학 교수

[아침을 열면서] 마감

무엇으로 쓰는가. 도구를 묻는다면 연필이고 펜이다가 자판으로 바뀌었다. 손글씨 원고를 보기 어려울 만큼 모두 자판을 두드려 쓴다. 조용히 쉬는 자판을 마구 깨워내서 때리며 쓰기 부역을 시키는 것 같다. 한동안 엉덩이로 쓴다는 말이 회자됐다. 엉덩이는 의자에 꾹 눌러앉은 붙박이 시간의 비유다. 쓰기 노동을 날마다 수행하는 소설가들에게 더 합당한 표현이었다. 그만큼 쓰기라는 게 의자와 뗄 수 없이 맞물린 관계인 것이다. 작가만 아니라 모든 필자가 그러하다. 사무직도 대부분 그렇지만, 쓰기 노동자야말로 의자에 앉아있는 시간과 비례하는 쓰기가 있다. 그러고 보면 엉덩이론에 공감할 사람이 많겠다. 한때는 의자에 자신을 묶거나 졸음 대비용 바늘을 책상에 깔아놓았다는 연구자의 전설도 있었다. 지난 시절 얘기지만, 오래 앉아 있기가 쓰기의 한 전제임은 분명하다. 읽어야 쓰고, 읽은 만큼 쓰듯, 앉아있는 시간만큼 쓰기가 쌓이는 까닭이다. 쓰기의 양이 꼭 질의 담보는 아니어서 퇴고의 시간도 포함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또 다른 말도 가능하다. 글은 마감이 쓴다. 얼마 전부터 지어 쓰는 말이다. 마감이 코앞에 닥쳐서야 머리 싸매고 쓰는 필자가 많은 까닭이다. 마감이 닥치면 머릿속에 맴만 돌던 것들까지 죄다 끌려나와 쓰기에 복무하게 된다. 마감의 채근이 쓰고 고치고 다시 쓰기에 마침표를 찍게 만드는 게다. 보통 원고를 쓰고 보내는 과정을 보면 마감의 독촉이 크게 느껴진다. 마감이 곧 전쟁임은 신문사가 더할 터라 이만 줄이지만, 무릇 글은 마감이 있어서 마무리에 이르지 싶다. 그런 마감이 때로는 좋은 핑계도 된다. 마음에 덜 차는 글도 마감을 앞세워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퇴고를 해도 미흡할 때, 지친 쓰기 노동자 앞에 마감은 구세주 같다. 그렇게 또 한 편의 덜 여문 글을 지면에 내보내기도 하는 것이다. 엉덩이로 쓰거나, 마감으로 쓰거나, 쓰기라는 업에서 살아남게 하는 마감은 채근과 긴장의 든든한 근육이다. 간혹 마감에 자유롭던 필자도 있었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다. 필자가 많아져서 마감 못 지키는 자유까지 굳이 지켜주지는 않는 것. 원고도 마땅한 것 없다고 한두 번 사양하면 이후 청탁이 끊기니 쓰기 동네 사정은 비슷하다. 그래서 매번 좋은 작품일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더 나은 작품을 내려 애쓰지만, 글이 영 모자라도 웬만하면 보내는 것이다. 사실 100% 마음에 드는 글은 불가능하므로 80%만 돼도 괜찮다고들 한다. 그 수준의 유지 혹은 이상의 어려움이 상존하는 가운데도. 마감, 그것이 늘 문제다. 실은 어떻게 쓰느냐가 더 문제다. 어떻게 사느냐가 더 무서운 문제이듯. 그래도 마감이 있어 부족함도 맺고 넘어간다고 자신을 추스른다. 올해 마감은 무엇을 어떻게 칠 것인지, 두려운 직전이다. 미룬 원고부터 얼른 마무리해야겠다. 정수자 시조시인

[아침을 열면서] 나비를 잡는 아이의 마음으로

나비를 잡는 아이의 마음이 사람을 바꾸고 세상을 바꾼다. 사기를 집필한 중국의 사마천이 그러했다. 나비를 잡는 아이의 마음은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 절친이자 경쟁자였던 창애(蒼厓) 유한준(兪漢雋, 1732~1811)에게 보낸 편지글에 나오는 말이다. 창애가 사기를 다 읽은 기쁜 마음을 연암에게 편지로 전했다. 그러자 연암은 사기의 내용을 읽은 일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나비를 잡는 아이의 마음으로 사기를 완성한 사마천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라고 답장을 보냈다. 책을 읽을 때는 지은이의 마음도 함께 읽으라는 뜻이다. 나비를 잡기 위해 아이는 잔뜩 몸을 낮추고 엄지와 검지를 ㄷ모양으로 만들어 조심스럽게 나비에게 다가간다. 그러고 나서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힘으로 나비를 잡아야 한다. 힘이 넘치면 잡은 나비에게 상처를 입히고 힘이 모자라면 나비를 놓친다. 넘치는 것보다 모자라는 게 더 낫다는 걸 알기에 아이는 자주 나비를 놓친다. 나비를 놓친 아이는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음에도 주위를 한번 돌아보며 부끄럽고 아쉬운 마음을 혼자서 달랜다. 나비를 놓친 텅 빈 이 아이의 가슴에는 이제 세상을 담을 아름다운 꿈 하나가 싹을 틔울 것이다. 나비를 잡는 아이의 이런 마음이 세상에 사기를 남기게 했다. 우리 문학인들이 남기는 작품 역시 그러하다. 우리가 나비를 잡는 아이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러한 세상은 참 아름답고 평화로울 것이다.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준 세상과 지혜를 쌓게 해준 자연을, 그 스승과 벗을 액자에 갇힌 좁은 잣대로 움직이려 하거나 거스르려고 하면 자연과 세상은 우리에서 멀어진다. 연암이 열하(熱河)로 갈 때 요동 땅 고죽성 옆을 흐르는 롼허강을 지나갔다. 함께 가던 사신 일행들이 빼어난 풍광을 보고 산수(山水)가 그림 같다며 감탄하자 연암은 그대들은 그림도 모르고 산수도 모르네. 그림이 산수에서 나왔는데 어찌 산수를 보고 그림 같다고 하는가하고 나무랐다. 자연을 보지 못한 채 산수화(山水畵)만을 보고 감탄하는 사람은 액자 속에 든 그 산수가 자연의 모든 것인 줄 안다. 그래서 그림을 그린 화가의 마음을 보지 못한 채 액자(틀) 안에 갇힌 시선으로 자연과 세상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아는 건 보고 배운 틀 속의 모양일 뿐이다. 그 작은 그릇에 세상을 다 담았다고 여기면 그릇은 깨지고 만다. 깨지지 않은 넉넉한 그릇을 가진 사람만이 세상을 바로 보고 바로 세운다. 김호운 소설가ㆍ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

[아침을 열면서]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을 때

흔히 사람을 두고 사회적 존재라고 한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살기란 사실상 어렵다는 것이다. 우리는 매 순간 직간접적으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의 긍정적인 평가나 알아주는 인정은 행동의 중요한 동력이 되곤 한다. 나를 알아주고 인정해 주면 기분이 좋아지고 힘도 난다. 남들이 나를 인정해주는 맛에 세상을 산다고 말하기도 한다. 나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기 때문이다. 반면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않으면 존재감 없는 자기 모습에 처량한 생각도 들고 서운하면서 화도 난다. 남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고 인정해 주지 않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다른 사람이 나를 인정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인정받아 나의 존재가 빛날 수 있는 길에 대해 『논어』는 말한다.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음을 근심하지 말고, 자신이 능력 없음을 근심해야 한다.[不患人之不己知, 患其不能也ㆍ불환인지불기지, 환기불능야] 좋은 학벌과 번듯한 직장은 분명 다른 사람의 시선을 끄는 조건 가운데 하나다. 특별한 재능이나 탁월한 능력을 지닌 사람 역시 인정받는다. 많은 돈(富)과 높은 지위(貴)를 지녔다면 어딜 가든 조그만 행동에도 주목받는다. 하지만 나의 존재 가치는 남들이 정해놓은 기준이나 외부적인 조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을 때, 남이 요구하는 것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거나 돈과 권력을 뽐내기 위해 주력하기보다, 시선을 안으로 전환해 내면을 살필 필요가 있다. 『명심보감』에서는 말한다. 세력으로 사귀는 사람은 가까이하던 세력이 다하면 관계가 없어지고, 재물로 사귀는 사람은 긴밀하게 여기던 재물이 다하면 관계가 소원해지며 여색으로 사귀는 사람은 친히 여기던 여색이 쇠해지면 관계가 끊어진다.[勢交者, 近勢竭而亡, 財交者, 密財盡而疎, 色交者, 親色衰而絶ㆍ세교자, 근세갈이망, 재교자, 밀재진이소, 색교자, 친색쇠이절] 육체적 욕망과 물질적 욕구는 지속적인 만족을 주기 어렵다. 그보다 강력한 것이 나오면 인정의 대상은 옮겨가게 돼 있다. 권세가 약해지고, 재력이 고갈되며 육체가 노쇠해도 나를 진정으로 알아주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것은 자기답게 살아갈 때 비로소 가능하다. 진정한 인정은 나의 존재 자체에 대한 인정이어야 한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을 때 남의 인정을 갈구해 하기 싫은 것도 억지로 하며 자신을 학대하거나 자신을 몰라주는 것에 화를 내기보다 시선을 거두어 들여 스스로 성찰해 보는 것은 어떨까?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존중하는지, 그리고 나에게 부족한 것을 직시하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지. 물론 남이 나를 알아주는 것은 객관적인 한계가 존재할 수 있다. 자기 모습을 존중하고 자기다움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했음에도 남들이 몰라주는 경우다. 지리산 산속에서 대지의 기운을 한껏 받으며 자라나는 소나무는 보는 순간 경이로움을 선사한다. 광화문 대로에서 매연과 조명 속에서 자라나는 소나무도 지나가는 이들에게 마음의 휴식을 안겨준다. 부단히 노력하여 자기 모습을 꽃피우는 소나무는 모두 감동을 줄 수 있다. 감동의 넓이는 다를지라도 깊이는 동일하다. 남의 평가나 인정이 나의 존재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기에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성낼 이유가 없다. 자기다움을 완성하기 위해 부족한 것을 부단히 메워가는 노력이 진정한 인정을 받아 나를 빛나게 하는 길임을 고전 『논어』는 말하고 있다. 고재석 성균관대 유학대학 교수

[아침을 열면서] ‘꾼’의 발견과 이면

무슨 회의에 가면 직장(직업) 소개가 편치 않다. 명함을 주고받을 때도 좀 그렇다. 무슨 서류들 앞에서도 난감하긴 마찬가지. 시인이라 적기도 뭣한 직업란에 딱히 채울 것도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왜 직책까지 적으라는지, 그런 관행의 속내는 알 수가 없다. 가끔은 글꾼으로 적어본다. 흔히 글쟁이라고들 하지만, 꾼이 더 어울릴 법해서다. 일꾼, 농사꾼, 장사꾼, 살림꾼 등은 직업에 일종의 표식으로 꾼을 붙인다. 춤꾼, 소리꾼처럼 전문가 행위에 붙이기도 한다. 하지만 즐기는 쪽에 능숙한 사람을 낮잡는 말로 술꾼, 노름꾼, 사기꾼이라 쓸 때는 편치 않을 수도 있다. 게다가 최근에는 사랑에까지 꾼을 붙여 쓰는 판이니 꾼 붙여 쓰기도 조심스럽긴 하다. 하지만 꾼이 요즘은 편한 높임으로 느껴질 때가 많다. 특히 소리꾼이 그러한데 방송의 높임 분위기에 따른 영향이 아닌가 싶다. 아무튼 소리꾼은 예나 지금이나 소리꾼이다. 그런 호칭이 다른 느낌을 환기하니 세간의 인식 변화도 돌아보게 한다. 무엇보다 한국 홍보 영상에서 국악의 색다른 매혹을 활짝 깨워낸 이날치의 공이 크지 싶다. 이날치라는 천하의 소리꾼 이름을 딴 것부터 자부심 어린 명명이라 우리 소리의 창의적 확장까지 바람을 얹어보게 된다. 일찍이 꾼처럼 ㄲ이 들어간 표현에 주목한 말이 있었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꿈, 끼, 깡, 끈, 꾀 같은 5ㄲ이 있어야 한다나. 말놀이 같아도 가만 보면 바람직하고 필수적인 자질과 요소의 조합이다. 끈이 우리 사회의 고질인 ~연(緣)의 면면을 건드리지만, 좋은 연 만드는 능력(네트워킹)으로 보면 괜찮다. 한참 지나온 말인데 ㄲ의 나열이 볼수록 올차고 차지다. 이 모두의 합을 잘만 발휘한다면 진정한 꾼으로 우뚝 설 것 같으니 말이다. 젊은 소리꾼들을 안타깝게 보다가 꺼내본 생각이다. 풍류대장이라는 뜻밖의 이름을 단 모 방송국 프로그램의 소리꾼들 앞에 놀랐다. 소리에 바친 생은 절절해도 눈앞은 캄캄하건만, 소리를 위해 자신을 불사른다. 득음에 생을 거는 소리꾼들의 고난 행군 앞에는 변방의 글꾼이 무색할 지경이다. 특히 국악과 양악의 합을 통해 새로운 흥과 한과 가락을 펼쳐내는 꾼들의 신명에는 넋을 앗긴다. 국내보다 국외에서 우리 소리의 깊은 맛을 찾고 즐긴다는 현실은 씁쓸하지만. 이참에 얹는 것은 우리 소리의 더 폭넓은 향유와 드높은 활약이 터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이리저리 보니 꾼이 새삼 크게 닿는다. 판소리의 이면 같은 것도 비친다. 득음까지는 멀어도 피맛 삭인 저만의 소리를 질러보는 꾼들. 어느 분야나 비슷하니, 글도 쓰고 버리고 다시 쓰는 기나긴 수행 끝에 자기 문체를 조금 얽게 된다. 끈기 없이는 꿈도 못 꿀 끼와 깡의 발현인 꾼, 그 앞에 새삼 글길 여미는 아침이다. 정수자 시조시인

[아침을 열면서] 책 속에서 길을 찾는다

문청(文靑) 시절 수차례나 읽기를 반복하다가 겅중겅중 건너뛰며 읽다가 결국 완독하지 못하고 꽂아두었던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를 얼마 전에 다시 꺼내 읽었다. 그동안 어쩌다 이 작품이 화제에 오르면 나도 모르게 슬그머니 꽁지를 내리곤 했던 내게 실존철학에 대한 콤플렉스를 안겨준 작품이다. 이 작품을 다시 읽고 싶어진 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 해답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인간과 사회는 참 복잡한 구조로 엮여 있다. 알면 알수록 더 혼란스럽다. 그래서일까. 관심은 가지지만 알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똑똑할수록 더 단순하게 생각하며 그냥 흘러가는 대로 많은 사람이 가는 길을 따라가고 싶어 한다. 반복되는 학습효과에 빠져버렸다. 보편적인 게 행복하다는 등식이 굳어진 이 틈을 비집고 들어온 적당히 아는 사람들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변질했다(더닝 크루거 효과ㆍDunning Kruger effect). 실존주의의 선언임과 동시에 문학예술에 대한 설득이다라고도 하는 소설 구토는 문학과 철학의 경계에 서 있다. 주인공 앙트와느 로캉탱(Antoine Roquentin)은 실존과 본질 사이를 오가며 현실에서 부조화가 일어날 때마다 구토 증상을 일으킨다. 토악질이라 번역했지만, 사실은 그런 증상이다. 이 증상은 존재의 가치를 줄타기하며 다람쥐 쳇바퀴 돌듯 차이와 반복을 계속한다. 어쩌면 이것은 사르트르가 프랑스어로 젊어 보이려고 하는 늙은이라는 뜻을 가진 roquentin(로캉탱)을 주인공의 이름으로 선택한 까닭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일까.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가 20세기를 정리할 철학자라며 극찬했던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가 차이와 반복이라는 두툼한 철학서를 우리에게 화두로 던졌다. 이 책 역시 젊은 날 내가 읽다가 내던진 구토처럼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올 한 해 동안 다 읽을 수 있을까 고민하던 터에 다행히 우리에게는 사르트르가 있었다. 후덥지근한 좁은 방에 갇혀 있던 우리에게 그는 신선한 공기였으며, 시원한 뒷마당의 상큼한 바람이었다라고 한 질 들뢰즈의 말을 발견하고 사르트르의 구토를 꺼내 다시 읽었다.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을 이해하게 될 때 제대로 사는 방법 또한 알 수 있을 것이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가 사르트르 저작 중 가장 뛰어나다고 했던 소설 구토, 그리고 질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을 완독하고 나면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을 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생긴다. 김호운 소설가ㆍ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

[아침을 열면서]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

당당함이 먼저 떠오르는 MZ세대에게 최근 명품 플렉스 문화가 유행하고 있다. 통계에 따르면 수입차를 가장 많이 구매한 연령대가 30대라고 한다. 명품매장에서 가장 많은 소비를 하는 연령대 역시 2030세대라고 한다. 명품은 분명 이름값을 한다. 품질이나 구성 면에서 소비자를 만족시킬 만한 탁월함이 있다. 다만 좋은 명품을 소비하며 자신을 꾸미는 일에 신경 쓰는 노력에 동의가 되면서도, 부끄럽지 않고 당당할 수 있는 계기가 그저 명품 소유에서 가능하다는 흐름은 다소 의문이 들게 한다. 부끄러움은 무엇일까?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논어는 말한다. 선비가 도에 뜻을 두고서도, 거친 옷과 맛없는 음식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아직 함께 도를 의논할 수 없다. 남루한 옷을 걸치고 초라한 음식을 먹고 있으면 누구나 부끄러운 마음이 들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물질적 빈곤은 자신을 초라하게 만들고 부끄럽게 하는 원인 가운데 하나로 여겨졌던 것 같다. 악의악식(惡衣惡食)은 몸을 장식하고 살찌우는 외물을 상징한다. 물론 경제적인 여건이 허락돼 화려한 옷과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은 자연스런 일일 것이다. 또한 다른 것을 절약하더라도 자기 노력으로 가치를 두고 있는 것에 과감히 소비해 당당하게 꾸미는 것은 자신에 대한 투자일 수 있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부끄러움(恥)은 나를 당당하게 만드는 것이 그저 남의 평가와 인정에 의해 결정되거나 명품 같은 물질적인 과시를 통해 충족될 수 있다고 여기는 현상을 지칭한 것이다. 부끄러움의 의미를 담은 恥자는 마음(心)에서 수치심을 느끼면 귀(耳)가 붉어지는 모습을 형상하고 있다. 수줍으면 얼굴이 빨개지고, 부끄러우면 귀가 빨개진다. 양심은 스스로의 잘잘못을 명확하게 알고 있는 맑고 밝은 마음이다. 양심에 거스르는 행위를 하면 저절로 마음이 찔리고 얼굴도 화끈거린다. 부끄러움은 양심 없는 것에 있지, 허름한 옷과 거친 음식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공자는 지혜를 갖춘 선비를 갈망하는 자라면 외물이 아닌 선한 마음에서 드러난 도(道)에 뜻을 두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매순간 내면의 선한 마음에서 길을 찾겠다고 노력하는 선비가 외물의 조건이 남보다 못한 것을 부끄러워한다면 겉으로만 도에 뜻을 두고 있거나, 실천의지가 부족한 경우이다. 지혜로운 자는 내면의 마음을 중시하고 외면의 물욕을 경계한다. 도에 뜻을 두었다고 말하면서도 외부 사물에 쉽게 이끌려 변하니 안타깝다. 부끄러움은 내 마음의 생명력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반가운 증표이다. 부끄러움이 없다면 자율적인 힘으로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는 절망이다. 부끄러움에 아파하며 부끄럽지 않기 위해 주어진 길을 바르게 걸어가야겠다는 실천의지는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지혜로운 인간의 최고 경지에 이르게 할 수 있다. 고재석 성균관대 유학대학 교수

[아침을 열면서] 손님처럼 맞는 일상

날마다 반복되는 보통의 일. 일상은 대부분 지루한 반복이었다. 소중히 여겨지지도 않았다. 때로는 일상 자체가 삶을 옥죄는 밧줄 같았다. 끊어버릴 순 없지만 틈만 나면 벗어나려 꾀를 쓰기도 했다. 별 탈 없는 일상 속에서도 호시탐탐 탈출의 기회를 엿봤다고 할까. 그러던 일상이 근자에 소중해졌다. 일상의 회복도 간절해졌다. 매일 출근을 힘들어하다 퇴직 후 문득 지난 아침들을 그리워하듯, 친구가 멀리 떠나고 나서야 치고받은 시간의 온도를 되새겨보듯, 그저 그렇고 그랬던 일상의 힘을 새삼 깨워준 것은 팬데믹이다. 팬데믹이라는 지구적 위기는 삶의 다른 힘들도 일깨웠다. 무심히 지내온 사람들의 안부까지 물으며 무릇 곁들이 애틋해진 것이다. 그뿐인가 긴 방역의 고독 속에서 새삼 자기를 발견하거나 눌러둔 자기 계발을 더하기도 했다. 그토록 기다려온 일상의 회복을 이달 들어 조금씩 시도하고 있다. 팬데믹 이전과 똑같을 수는 없을 거라는 예측이 많지만. 그나날이 같은 날이라고 하품을 했던 팬데믹 이전의 일상도 실은 매일 다른 날이었다. 나날의 차이를 별로 못 느낄 만큼 어슷비슷 반복이라 평범함의 귀중함을 지나친 것이다. 아무튼 모두가 간절히 바란 일상을 되찾고 있지만, 이 또한 오래되면 평상의 지루함에 빠질 것이다. 틈만 나면 일상 탈출이며 새로운 즐거움을 찾아 다시 몸을 뒤틀 것이다. 그럼에도 일상을 삼가 맞이하는 중이다. 먼 데서 오는 반가운 손님처럼. 회복도 단계적이라니 본래 삶의 모습을 조심스럽게 되찾는 초입이다. 돌파감염 같은 예측불허도 있어서 방역의 해방까지는 시간이 꽤 걸릴 터다. 그럼에도 이전의 일상을 조금씩 찾아가며 삶도 가꾸기 나름이라고 주변을 돌아본다. 우리에게 똑같이 주어진 것은 시간밖에 없으니 시간 잘 쓰기부터 다시 본다. 시간도 여럿이 내어야 더 즐거운 저녁의 표정들도 그려본다. 소소한 즐거움도 더 찾고 오늘의 것으로 만들어야 수수한 일상의 구석이 환해지니 말이다. 요즘 하늘에는 별이 없다고 쓸쓸해했던가. 한적한 공원 같은 데서 오래 올려다보면 별은 아직 거기 있다. 우주 어딘가에서 지구의 당신을 보고 있다고 반짝 눈을 맞추기도 한다. 가을이 지나가는 하늘을 보며 그리움을 부르듯 별을 불러보는 것도 마음 회복에 좋은 일이다. 지난날 함께 웃고 울던 사람을 잃은 입장이라면 성심껏 잘 보내는 시간이 더 필요할 것이다. 그렇듯 떠난 영혼을 배웅하며 다가오는 것들을 새뜻이 맞는 것도 사람다운 세상의 일이겠다. 입을 막고 사는 동안 깊어진 일상의 발견. 사람과 삶의 귀함을 다시 느끼며 아침의 자세를 가다듬는다. 평범한 나날이라고 시큰둥했던 일상을 손님처럼 맞이하다 보니 단풍 끝물이 한결 찬란하다. 조금씩 되찾는 일상의 소중함을 또 놓치지 않도록 나날이 마음을 새롭게 차려본다. 정수자 시조시인

[아침을 열면서] 문학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가

어릴 때 동화책을 사달라는 내게 어머니는 책에서 밥이 나오냐, 떡이 나오냐하면서 책을 사주지 않았다. 어머니의 이 말이 몹시 서운해서 나는 돌아서서 한참 울었다. 책 한 권보다 쌀 한 됫박이 더 소중했던 현실을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어머니의 이 말에 대한 해답은 내가 소설가가 된 뒤 평론집 『한국 문학의 위상』(김현, 문학과지성사, 1977)을 읽으면서 찾았다. 김현 선생은 이 저서에서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역설적이게도 문학은 그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고 있다라고 대답했다. 문학은 곧장 쓸모 있게 써먹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의미다. 당장 무엇을 만들어 써먹을 수 있는 게 아니기에 문학은 인간을 구속하지도 억압하지도 않는다. 여기에서 쓸모 없다는 의미는 순수하다 또는 자유롭다와 통한다. 인간을 억압하는 건 인간에게 쓸모 있어 보이는 것들이다. 유용하기에 사람들은 아귀다툼해서라도 그걸 손에 쥐려 하고, 이 욕망으로 인간은 쓸모있는 것에 붙들려 자유로운 삶을 포기했다. 문학은 그 쓸모없는 눈으로 쓸모있는 걸 바라보며 쓸모 있음 뒤에 감추어진 허상을 투시한다. 그리하여 쓸모있는 것으로부터 억압당하거나 노예가 된 사람들에게 그 사슬을 풀고 자유로운 세상으로 나오도록 부추긴다. 문학으로 곧장 무엇을 만들 수는 없으나 문학은 그렇게 사슬을 풀고 나온 사람들에게 향기로운 삶을 만들도록 해준다. 이것이 문학이 가진 힘이다. 문학의 이러한 속내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문학이 쓸모없는 게 될 것이고, 이 향기를 맡은 사람에게는 문학이 그 어느 것보다 강한 삶의 지혜가 된다. 이것이 문학의 총체(總體)며 문학의 기능이다. 하늘 한가운데를 두 팔로 헤치며 2044 우렁차게 가지를 뻗는 나무들과 다른 게 있다면 2044 내가 본래 부족한 나무라는 걸 안다는 것뿐이다 2044 그러나 누군가 내 몸의 가지 하나라도 2044 필요로 하는 이 있으면 기꺼이 팔 한 짝을 2044 잘라 줄 마음 자세는 언제나 가지고 산다 - 도종환 시 가죽나무 중에서. 『장자』의 소요유(逍遙遊) 마지막 편에 가죽나무 이야기가 나온다. 벌판에 비뚤비뚤하게 자란 커다란 가죽나무 한 그루가 있다. 사람들이 쓸모없다며 내버려 둔 나무다. 쓸모없다고 여겼기에 이 나무는 오히려 제 결대로 잘 살아서 사람들에게 쉴 수 있는 그늘을 제공하며 천수를 누렸다. 죽죽 잘 자라 쓸모 있다며 사랑받던 나무들은 모두 제명대로 살지 못하고 잘려나가 목재로 사라졌다. 유용한 걸 많이 쥐어서 돋보이는 게 아니라 온전하게 결대로 사는 게 올바로 가는 길(道)이다. 이런 나무들이 함께 모이면 아름다운 숲이 된다. 김호운 소설가ㆍ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

[아침을 열면서] 개고기는 잘못이 없다

지난달 27일 문재인 대통령은 청와대 주례회의에서 유기 반려동물 관리체계 개선 관련 대책을 보고받고, 이제는 개 식용 금지를 신중하게 검토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일부 대선주자도 인간과 정서적 교감을 하는 반려동물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개 식용은 사회적 폭력일 수 있다며 환영의 뜻을 표했다. 동아시아, 특히 동이의 후예들이 활동한 지역에선 개를 가축으로 간주한 사례가 많이 발견된다. 맹자를 보면 닭과 돼지, 개와 멧돼지의 번식 때를 놓치지 않게 하면 칠십 넘은 노인들이 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언급이 나온다. 사면이 바다인 섬에서 물고기 음식이 발달하고, 드넓은 초원이 펼쳐진 곳에서 양고기 음식이 발달하듯, 산과 들이 많아 농경을 생업으로 삼은 사람들에게 가축문화는 자연스럽게 형성됐으리라 짐작된다. 다만 가축 중 소와 말은 농업과 전쟁에 필수적인 동물이라 함부로 도축ㆍ판매할 수도, 먹을 수도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사사로이 소와 말을 도살하는 것을 금지하고, 한성부가 이를 관장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국의 전통사회에서 개고기는 백성들의 배를 불려주고 병을 치료해주는 민중의 음식이자 약으로 기능했다. 18년간 강진 유배를 간 다산 정약용은 당시 함께 유배를 떠나 흑산도로 보내진 친형 손암 정약전이 보낸 편지에서 짐승 고기를 전혀 먹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것이 어찌 생명을 연장하는 도리느냐며 질타한다. 섬에 들개(山犬)가 수천마리 있을 테니 그물이나 덫을 설치해 5일에 한마리씩 잡아 삶아 먹으면, 1년에 52마리를 먹게 돼 충분히 고기를 섭취할 수 있다고 권유한다. 또 조선시대 실학자 홍만선은 농업 관련 지식이나 일상생활의 지혜를 수록한 산림경제에서 약의 조제와 복약 금기 등을 기술하며, 개고기(狗肉)도 상세히 적었다. 사실 개고기 식용 금지를 주장하는 입장의 본질은 동물학대 반대도, 인간과 교감하는 개를 차마 먹을 수 없다는 감정의 문제도 아니다. 주장 이면에 내재해 있는 문화에 대한 치우친 태도가 핵심이다. 미국과 유럽의 Pets 문화가 유입되고 융합하면서, 익숙했던 문화와 가치적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다. 동물학대 문제는 간과해서도 용납해서도 안 된다. 다만 자신이 지닌 삶의 방식과 문화인식을 중심이나 보편으로 간주하면, 다른 삶의 방식과 문화인식을 계몽의 대상이나 제거의 적폐로 여기게 된다. 문화에는 중심이나 보편의 잣대가 적용돼선 안 된다. 그러면 반드시 자신과 다른 상대의 문화는 옳음을 지향하더라도 천박하고 척결의 대상이 돼 충돌이 불가피하다. 주체와 객체의 다름을 존중하고 관계 속에서 새롭게 규정되는 주체를 전제해야, 각기 다른 상황 속에서 변화하는 옮음을 인정할 수 있고 그 안에서 새로운 차이와 다름의 문화가 꽃필 수 있다. 개고기 식용 금지 문제는 대중의 자발적인 선택으로 결정될 것이다. 문화의 형성은 그렇게 순조롭다. 비록 다수가 익숙했던 문화를 폐기하고 서양의 Pets 문화를 수용한다 할지라도, 다수가 옳다는 규정은 위험하다. 소수의 다름에 대한 존중과 배려는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20여년 전 국토훼손이란 명목으로 수천년간 이어져 온 매장 문화가 순식간에 화장 문화로 대체됐다. 한국 철학사상의 원형은 밝음에 있다. 밝음을 숭상해 반만년을 상장례에서 흰 옷을 주로 입었던 민족이, 이제 검은 옷을 입는다. 다른 종교ㆍ문화ㆍ사유 등과의 만남에서 익숙했던 것들이 공정하게 매도되지 않는 현상이 안타까울 뿐이다. 우리의 근대는 그렇게 불공정했고, 여파는 여전하다. 다시금 문화의 공정한 만남과 융합, 그리고 창조를 기대한다. 개고기는 잘못이 없다! 고재석 성균관대 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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