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면서] 생활유품정리 소고

우리나라는 현재 5천155만명 중 노인 인구가 18.3%인 950만명으로 2025년에는 20%대에 진입하는 초고령사회를 목전에 두고 있다. 한편 2천177만4천가구 중 1인 가구는 34.5%인 750만2천가구로 이 중 26.3%인 197만3천가구가 홀몸노인 가구다. 가구가 1인 또는 부부 중심으로의 독립 형태로 변환되고 있다. 1인 가구와 홀몸노인 가구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고독사 문제 외에 필연적으로 생활유품과 거소의 반듯한 정리가 필요하다. 장례 직후에 요구되는 생활유품정리는 ‘언젠가는 내가, 나의 가족이 마주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일본과 달리 행정적 및 사회적으로 생활유품이 쓰레기 또는 폐기물이 돼 청소업체가 위탁 처리하는, 즉 정리 관점에서 인식이 안 돼 있다. 유품은 망자가 살아온 인생이자 기록물이라는 점에서 ‘정리’와 ‘처리’가 다르듯 올바른 사회적 인식이 필요하다. 생활유품정리업은 비즈니스 측면에서 거소를 포함해 유품분류 및 정리, 유품소각, 특수청소 및 악취 제거로 구분된다. 웰다잉(Well-dying)의 분명한 한 축인 생활유품정리업의 행정적 제도화를 협회 현안으로 삼고 생활유품정리사 민간자격등록 및 한국표준직업분류 등재를 위해 장례의 마무리 명분에서 수년간을 장례 업계와 공조해 보건복지부에 신청해오고 있으나 ‘장사 등에 관한 법률’에 부적합하다고 인증을 거부 당하고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한편 경기도에서는 2016년 제정한 ‘웰다잉 문화조성에 관한 조례’를 2021년 전부개정해 지자체 최초로 유품정리를 추가하고 용어 정의를 ‘사망자가 생전에 사용하던 물건과 거주지에 대한 정리, 청소 보관 및 처분 등의 행위를 말한다”고 명시했다. 2006년 초고령사회인 일본은 2010년 NHK에서 1인 가구의 고독사 증가 등 사회 문제를 제시한 ‘무연(無緣)사회’ 다큐멘터리 방영을 계기로 ‘종활(終活) 문화’, 즉 웰다잉이 생활화됐다. 한편 2002년 설립된 일반사단법인 유품정리사인정협회가 행정적으로 제도화돼 현재 1천여개의 전문기업과 3만여명의 민간자격 유품정리사가 유족들의 신뢰로 일자리 창출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2002년 창업해 7개 지사까지 둔 키퍼스의 캐치프레이즈 ‘천국으로의 이사를 도와드립니다’는 생활유품정리가 장례의 종료 단계임을 시사하고 있다. 협회가 유품정리사를 ‘생활유품정리사’로 한 연유는 자격등록 신청 과정에서 그릇 하나라도 유산이므로 법무부 소관이라는 왜곡된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유족으로부터 위탁받은 생활용품과 거소를 동시에 정리한다는 점을 강조해 상속재산이 아닌 점을 분명히 하며 법적사항은 일절 관여하지 못한다고 ‘생활유품정리사 민간자격 관리·운영 규정’에 명시했다. 협회는 웰다잉단체협의회 창립 회원이며 특히 2023년 7월 발족한 한국장례문화포럼 일원이 됐다. 한편 생활유품정리는 임종 후가 일반적이지만 협회는 우리의 장례 및 상조 관행과 정서에 부합하는 ‘생전생활유품정리’를 웰다잉문화로 연계해 생전에 재활용이 가능한 가전제품 등 생활용품을 사회취약계층과 민간복지시설에 기증하는 문화운동을 사회봉사 일환의 캠페인으로 주도해 나가고 있다.

[아침을 열면서] 불완전우성

오스트리아의 가톨릭 수도 사제 그레고어 멘델은 자가 수분으로 재배한 완두에서 후대에 나타나는 콩과 콩깍지의 모양과 색깔 그리고 꽃의 색깔 등의 표현 형질이 일정한 법칙을 가지고 나타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멘델은 1865년과 1866년 이 연구 결과를 통계적 객관성에 근거해 합리적으로 정리, 발표했지만 당시에는 학계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멘델의 연구는 1900년에 들어서야 휴고 드 브리스를 포함한 여러 학자에 의해 알려지게 됐다. 멘델의 법칙으로 정리가 되고 있는 우열의 원리, 분리독립의 법칙은 유전학이 체계적으로 자리를 잡게 된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 우성과 열성으로 구분되는 유전적 대립형질을 설명할 때 인자형과 표현형으로 구분한다. 인자형은 유전형질의 유전적 구성에 대한 본질을 나타낸다. 반면 표현형은 대립형질의 조합 결과에서 표현되는 외형을 나타낸다. 우열의 원리는 일반적으로 대립형질의 열성인자는 표현되지 않고 우성인자만 표현됨을 설명한다. 부계와 모계의 각 생식세포가 합체돼 대립형질 조합을 이루기 때문에 특정한 표현형이 동일해도 인자형으로 보면 구성이 다를 수 있다. 우성과 열성이 조합된 인자형은 우성과 우성이 조합된 인자형과 그 표현형이 다르지 않다. 우성이 열성의 표현을 완전히 억제하지 못해 두 형질이 모두 표현되는 현상을 불완전우성(Incomplete Dominance)이라고 한다. 멘델이 붉은 꽃 부계와 흰 꽃 모계를 둔 자손에서 새롭게 분홍 꽃이 나타나는 분꽃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다면 멘델의 법칙은 정리되지 못했을 수 있다. 우열의 원리로 본다면 술어와는 다르게 붉은색과 흰색이 모두 우성이다. 매우 복잡한 물리와 화학의 법칙들이 더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생명 현상은 멘델의 법칙처럼 단순한 법칙으로 일관화해 설명하기는 매우 어렵다. 비멘델성 유전인 불완전우성이 대표적인 예다. 사람도 생물이라 특정한 법칙으로 일관화해 사람을 설명하기 매우 어렵다. 거울에 45도로 들어오는 빛은 135도 반사돼야 한다. 일정 조건에서 수소와 산소가 만나면 물이 생산된다. 그러나 손바닥 위에 개구리를 올려놓고 동일한 힘과 자극으로 개구리를 자극할 때 반응해 튀어나가는 개구리의 시기, 거리, 방향은 모두 개구리 마음대로다. 사람의 사고와 행위에는 개구리의 마음이 있다. 그러나 사회는 그 부류를 내 법칙으로 구분해 정리하고 싶어 한다. 사람의 눈꺼풀, 머리카락, 이마 모양 등 어떤 외양은 멘델의 우열의 원리를 따라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과 의지는 그렇지 않다. 더군다나 그 뜻을 표현하는 형질에 우열은 없다. 불완전우성에서 보는 분홍빛을 내기 위해 붉은빛과 흰빛은 ‘따로 또 같이’ 서로 우성으로 존재한다. 조금만 떨어져 보면 우리 사회의 붉은 점과 흰 점의 ‘따로 또 같이’에서 아름다운 핑크가 보임을 알 수 있다.

[아침을 열면서] 도전 받는 남극, 더 이상 ‘세상의 끝’ 아니다 ①

최근 BBC가 미국 빙설정보센터(NSIDC) 데이터를 인용해 보도한 바에 따르면 남극의 해빙(바다얼음) 면적이 1천700만㎢로 관측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세종과학기지에도 남극 겨울인 6월과 7월에 비가 내렸으며 지난해에는 세종기지 관측 사상 역대 최고기온(13.9도)을 기록하기도 했다. 남극도 최근 관심이 급증한 북극 못지않게 도전을 받는 중이다. 첫째, 지구온난화에 따라 남극이 녹으며 남극의 환경이 도전받고 있다. 남극 얼음이 녹으면 직접적으로 전 지구적 해수면 상승뿐만 아니라 녹아든 얼음물은 해수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현상은 곧바로 남극해 탄소 흡수 능력과 해류에도 영향을 줘 지구 열 순환에도 변화를 초래한다. 또 얼음이 줄어든 남극은 해빙 위에서 번식하는 황제펭귄 개체수와 남극 식물의 곰팡이 감염 등 생태계 전반에도 변화를 초래하기 때문에 남극은 환경 측면에서 일차적으로 도전받고 있다. 둘째, 1961년 발효된 남극조약은 그동안 부침이 없지 않았지만 영유권 주장 동결과 남극의 평화적 이용, 과학적 조사 자유 등의 원칙을 바탕으로 국가적 협력과 공동의 이슈 대응에 기여해 왔다. 그러나 최근 남극조약협의당사국회의(ATCM)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 등으로 불안정한 국제정치적 상황이 논의에 영향을 미치면서 근래에는 기존과 달리 당사국들의 합의로 최종보고서를 채택하지 못하고 있다. 또 최근에는 기후변화와 남극 관광 등으로 논의 이슈가 다변화되면서 2024년에는 관광 특별작업반을 신설해 논의하기로 하는 등 남극조약 협의 체계도 변화하는 중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나라 남극 과학 연구도 한 단계 도약해야 하는 도전적 상황에 직면해 있다. 우리나라는 2021년 ‘극지 활동 진흥법’을 제정하고 2022년 ‘극지 활동 진흥 기본계획’을 수립해 2027년까지 남·북극 미지의 영역 진출, 기후변화 대응 강화 등을 위해 남극 내륙 기지 기반 마련, 북극발 한반도 기상 변화 예측, 남극 빙하 감소에 따른 해수면 상승 예측 역량 확보 등의 목표를 설정했다. 올해로 36년째를 맞는 우리나라 극지 연구도 성과에 대한 국민적 기대와 기후·생태계 변화로 다양해지는 남극 이슈에 대해 해결 방향을 제시해야 하는 도전에 직면한 상황이다. 도전 받는 남극은 이제 더 이상 극지에 머물러 있는, 우리와 동떨어진 세상의 끝이 아니다. 또 높아진 우리나라의 위상만큼 도전 받는 남극을 위해 이제는 우리도 과학 연구뿐만 아니라 글로벌 거버넌스 속에서 그 책임과 역할을 확대해 나가야 하는 상황이다. 남극에 대한 다원화된 도전과 다양해진 이슈를 다루기 위해 보다 다각적으로 남극을 바라보고 접근해야 하는 변화의 시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앞으로 계속될 기고에서는 남극을 다원적으로 바라보기 위해 왜 극지 연구를 해야 하며, 극지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또 우리나라와 외국의 극지 정책에 대해 좀 더 다른 시각에서 풀어 설명하가고자 한다.

[아침을 열면서]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라는 노래가 있다. ‘새마을 노래’와 함께 1970년대를 풍미했던 소위 건전 가요 투톱이다.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 가사는 간결하고 곡조는 간절하다.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자’라는 대목에서는 절박함이 짙게 묻어 나온다. 새벽종이 울리면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자는 각오를 다지며 부지런히 일했던 세대 덕에 우리도 이제는 제법 잘 살게 됐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2021년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대한민국을 선진국에 포함시켰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과연 명실상부한 ‘선진국’인가? 자신은 없다. ‘심리적 G8 국가’라는 자화자찬도 등장하고, 우리에게는 BTS와 블랙핑크가 있다며 케이팝, K-컬쳐의 세계화를 자랑스럽게 외치고 있지만 ‘우리가 정말 문화 선진국인가?’라는 질문에는 더욱 더 자신이 없어진다. 정말로 잘 사는 문화 선진국의 꿈은 아직도 이루지 못한 목표라고 우리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류 생존 절체절명의 위기가 찾아온 빙하시대, 후기 구석기인들은 춥고 배고픈 고통스러운 삶의 현실에서 좌절하지 않고, 동굴 벽화를 그리고 구석기 비너스를 조각하면서 견뎌냈다.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해준 문화 예술이 고단했던 그들의 삶을 지탱해줬다.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하며 키워진 창의력은 인류에게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어줬다. 그렇게 문화 예술로 무장한 덕에 인류는 살아남았다. 그렇다면 도대체 문화가 무엇이길래 우리는 여전히 문화가 꽃피는 도시, 문화 중심의 정책, 문화 향유의 기회 확대 등등 ‘문화’에 목마른 것일까? 문화에 대한 정의는 수백 가지가 넘는다. 그중 필자가 꼽는 백미는 ‘문화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맛과 멋’이라고 한 한국의 문화인류학자 조흥윤의 정의다. 잘 살게 된 우리가 여전히 뭔가 허전한 이유는 아직도 우리 사회에 ‘사람답게 사는 맛과 멋’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가장 쉽게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곳은 박물관·미술관이다. 인류가 쌓아놓은 문화적 성취가 고스란히 보관된 곳이 바로 박물관·미술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기도의 박물관·미술관 정책을 다루는 부서 명칭이 문화기반팀이다. 반석과 같이 튼튼한 문화의 기초를 박물관·미술관을 통해 이루겠다는 정책적 의지를 보여주는 부서명이다. 하지만 여전히 경기도의 박물관·미술관 정책은 서울과 비교해 낙후됐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그렇다고 무작정 서울을 따라 하기도 쉽지 않다. 서로 다른 지역적 특성을 가진 31개 시·군이 모인 경기도는 넓고 인구도 많기 때문이다. 집중화된 서울과는 차별되는 경기도형 박물관·미술관 정책이 간절한 이유다. 경기도는 2024년을 ‘도립 박물관·미술관 중흥 원년의 해’로 정하고 경기도를 ‘K-콘텐츠 기회수도’로 만들기 위한 다양한 계획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늦었지만 늦지 않았다. 도립 박물관·미술관 중흥을 통해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맛과 멋’이 넘치는 경기도가 되길 바란다.

[아침을 열면서] 웰다잉

경기일보 오피니언 새 필진으로 쓰는 첫 번째 글이다 보니 책임감은 물론 특히 월요일 한 주의 새 아침을 여는 주제가 ‘다잉’이 돼 더 조심스럽다. 그래서 필자는 우리의 정서에 맞게 잘 떠나는 웰리빙(well-leaving)의 관점을 펼쳐 보려고 한다. 메시지의 주제는 큰 틀에서 ‘웰다잉과 삶’이며 연계 부제로는 웰다잉, 생활유품정리, 장례문화 및 상조 준비 등으로 나누고자 한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세상에 죽음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겨우살이를 준비하면서도 죽음은 준비하지 않는다”는 지적에 적극 공감을 구하고 싶다. 웰다잉의 필요성을 한마디로 함축한 말이다. 웰다잉, 생의 마침표, 즉 죽음을 품위 있고 아름답게 맞이하는 준비 개념으로 누구에게나 가치 있는 바람이다. 근자에 들어 연명의료결정제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회자되는 빈도가 높아지고 있다. 삶과 생명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2009년의 한 사례로 부인의 호흡기를 임의 제거한 남편에게 살인죄를 적용했는데 남편은 부인이 연명치료를 않기로 약속했다고 해 존엄사 허용 취지의 판결이 났다. 이는 환자 또는 환자 가족의 결정확인 방법에 따른 문서화된 절차를 지정된 기관, 단체에서 인증토록 해야만 효력이 있어 웰다잉의 한 영역이다. 웰다잉 관련 노후준비지원법 등과 연명의료제도 등 정책 관련 주요 이슈와 웰다잉 문화운동 등은 뒤로 미루고 시작은 관련한 상식과 준비의 당위성을 여러 측면에서 살펴본다. 왜 준비가 필요하느냐 하는 문제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 모르는 것이 세 가지가 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 그 대신 우리가 아는 것 다섯 가지가 있다. 누구나 죽는다, 순서가 없다,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한다,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그리고 미리 경험할 수 없다. 그래서 더욱 웰다잉 아니 웰리빙 준비가 필요한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좋은 죽음을 소개하면 부모 노릇 다하고, 비명횡사(객사)하지 않고, 편안하게 적정한 수명을 살고, 자식을 먼저 보내지 않고, 가족에게 “고맙다” “사랑한다” 작별인사하고, 고통 없이 외롭지 않게 마치는 것이라고 한다. 한편 멋있는 죽음은 이웃을 위한 헌신이고, 아름다운 죽음은 수명을 다하는 평안한 죽음이다. 이 같은 생의 마무리를 위해서는 우리나라 시스템과 각자의 정서 및 가정환경에 부합하는 나 자신과 주변의 정리가 필요하다. 첫째는 사전연명의향서의 작성이며 둘째는 유언장과 마침표(임종)노트(Ending Note)의 작성이다. 셋째는 유산과 물품 정리하기인 데 ▲남겨둘 것 ▲가지고 갈 것 ▲버리고 갈 것 등 유산의 기부와 생활물품의 기증을 통한 사회공헌이 있다. 넷째는 애도와 예(禮)를 담은 실용적인 장례 및 상조의 사전 준비 방법을 들 수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한 가지는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는 아름다운 삶의 마무리 문화가 바람직하며 요구된다. 따라서 잘 죽는 일은 바로 잘 사는 일 소위 웰빙(well-being)과 직결된다. 죽음에서 삶을 배우는 지혜가 필요하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의미를 함께 남기고 싶다.

[아침을 열면서] 인간관계 생명론 '호모 디비도'

생명은 번식과 생식의 기회를 높이기 위해 최적의 구조와 기능으로 진화하고 있다. 각 생물 개체보다는 종이 같은 개체군이 진화한다. 각 종의 염색체는 생식적으로 격리돼 모체와 자손은 같은 수를 유지한다. 염색체는 유전자로 구성돼 있다. 자식은 부모로부터 유전자를 받지만 모체와 부체가 생산하는 생식세포의 유전자 구성이 다양해 형제, 자매라도 유전적으로 동일한 개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흔히 범죄 현장에서는 유전자 감식으로 범인을 가려내고 있다. 생명의 적응과 연속성은 종과 개체의 다양성에 있다. 다양성은 개체군이 가지고 있는 유전자급원(Gene Pool)으로 설명한다. 돌연변이, 유전적 부동, 유전자 이주, 그리고 자연 선택이 개체군의 유전자급원 변화에 연계돼 있다. 유전자는 단백질로 발현된다. 단백질은 각 개체의 고유한 몸의 구조뿐만 아니라 신체 전반적 기능을 담당함으로써 각 개체의 차이를 뚜렷하게 만든다. 이에 따른 외형적, 생리적 차이에서 발생하는 개체의 관계는 한 가지로 통일될 수 없다. 자연 선택은 안정성 선택, 방향성 선택, 분단성 선택으로 구분한다. 산모의 체형이 다양해도 신생아의 몸무게는 유사하다. 평균값의 몸무게로 태어나는 신생아의 생존율이 높고 그 유전자는 역시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는 분단성 선택의 한 예다. 성염색체의 유전적 기능에 의한 두 성 간의 생리 대사의 차이는 매우 크다. 원시 수렵 시대에 이미 여성은 남성이 사냥해온 먹거리를 잘 관리해 육아, 저장은 물론 사냥을 지속하도록 하도록 남성을 격려한다. 여성의 관리 유전자는 복잡하고 어려운 경제와 정치 외교의 갈등 구조를 잘 해결한다.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의 예까지 가지 않더라도 여성들은 나이가 들수록 경제적 관리는 물론 그들 서로의 관계를 원활하게 유지한다.  동일한 인간은 없다. 각자의 유전적 차이로 인한 대사율의 차이로 몸무게가 달라지고 이를 유지하기 위한 음식의 섭취량도 다르다. 주변의 변화에 따라 먹고 싶은 음식도 달라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 관계를 형성할 때 나와 같은가에 중점을 두고 싶어 한다. 필요에 따라 공평과 평등의 사회적 관점을 생물학적 관점으로 해석해 스스로 분개하기도 한다. 남성을 지배하는 테스토스테론은 사냥과 같이 즉시적이고 단편적인 생각과 행동이 필요한 일에 매우 적합하다. 관계에 앞서 우선 내 편인지 아닌지를 즉각 판단한다. 전쟁과 사냥을 하는 남성에 대한 테스토스테론은 정의의 명분을 앞세워 색깔을 입히기에 좋다.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는 사고 능력이 가장 뛰어난 동물이다. 효율적인 소통 수단으로 타 개체와의 협업이 뛰어나다. 다양한 개체 중 일부는 테스토스테론의 힘으로 나만의 직관적 정의를 만들고, 이를 전파하기 위해 각 개체가 가지고 있는 다양성을 간과한다. 편 가르는 사람, 호모 디비도(Homo divido)가 돼 간다. 인간관계를 생명론으로 해석할 때 호모 디비도의 발생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개체 사고의 창의성과 다양성 또한 생명의 적응 본능이어서 호모 디비도가 유전자급원의 변화에 영향을 주지 않는 소수이기를 희망해본다.

[아침을 열면서] 돌부리와 그릇

살다 보면 돌부리를 차고 화를 내기도 한다. 홧김에 돌부리를 재차 걷어차다 그만 발부리가 아파 절절매기도 한다. 돌부리는 애초 거기 있었을 뿐 매복한 게 아니고, 또 누가 심어 놓은 것도 아니다. 사람 관계에서도 그렇다. 모르면 그저 다른 산의 다른 돌일 뿐이고 가까워지다 보면 디딤돌이 되기도 하고 또 돌부리가 되기도 한다. 디딤돌이 돌부리로 느껴지는 건 대체로 내가 보인 정성이며 공이 그쪽에서 보인 정성이며 공과 차이가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때가 많다. 그러고 보면 그 역시 이른바 정의의 문제인 셈이다. 정의도 그렇지만 정성이며 들인 공을 객관적으로, 누구나 똑같이 잴 저울이 문제다. 그런 저울이 있어야 하는지 그 타당성 여부도 문제이지만 그걸 제쳐 놓더라도 그런 저울이 있을 수 있는지의 현실성 문제도 해결하기 어렵다. 그러니 사람은 저마다 제 그릇대로 산다. 그래서 저울도 그릇에 따라 눈금이 달라진다. 그릇이 작고 보잘것없을수록 남의 떡이 커 보이고, 내 눈의 들보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타고난 운명대로 살아야 한다는 운명론자는 아니다. 오히려 환경과 자신의 노력 등으로 그릇 모양은 얼마든지 키우고 가다듬을 수 있다. 이게 창조론과 어긋난다고 보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우주 삼라만상과 마찬가지로 사람도 그 씨를 만드셨고, 기본적으로 살아갈 원리를 주셨다. 그러니 나머지는 스스로 노력하고 가다듬으며 저만의 그릇을 만들어가야 한다. 나만 해도 내 그릇을 나름대로 다듬고 키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 역시 내가 한 잘못보다 다른 사람들이 내게 한 잘못에 더 예민하다. 그릇이 작을수록 감정은 자기중심적이고 만족을 모르며, 모든 걸 자기 위주로 받아들이려 한다. 특히 안 좋았던 일에 대한 기억은 끈질기다. 경험 중에 좋고 감사한 일은 쉬 잊고 상처나 모욕은 두고두고 기억한다. 통증은 그런 감정을 더 들쑤신다. 그러면서 자꾸만 외부로 쏠린다. 감정이 밖으로 향한다고 안이 평화로워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더 걷잡을 수 없게 활활 타오른다. 그러다 보면 미래는 없고 오직 과거와 아픈 현재만 있을 뿐이다. 그러다 그릇 생각이 떠올랐다. 조금 더 감사한 마음으로 표현하자면 올해 여름 강원도 오대산 명상 길에 그런 생각들이 정리됐다. 그 덕에 그릇이 좀 반듯해지고 좀 더 커진 듯하다. 저울 들 생각을 말든가, 들어야 한다면 내 그릇에 함부로 맡기지 말자. 다른 이들 행동은 그 나름의 그릇에서 비롯한 것. 내 보기에 그 그릇이 작다거나 볼품없다거나 해서 내가 속상해 할 일이 아니다. 내 화도 결국 내 그릇에서 비롯한 것. 그러니 화내고 속상해하지 말고 그릇을 닦고 키우자. 그렇다고 단번에 해결되는 일은 없다. 모르긴 해도 죽을 때까지 닦고 키워야 할 그릇이 아닐까 싶다.

[아침을 열면서] 잼버리가 남긴 것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2023 새만금 세계스카우트 잼버리대회가 막을 내렸다. 온열질환에 시달리고 화상벌레에 물려 지쳐가는 세계 청소년들을 보며 그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미숙한 대회 운영과 책임 떠넘기기로 인한 부끄러움은 덤이었다. 한편 뙤약볕에 달구어진 텐트촌 모습에 끊임없이 머릿속을 맴도는 것은 잼버리 숙영지의 원형 경관이었다. 그곳은 애초에 갯벌이었다. 새만금 갯벌은 농게, 칠게, 짱둥어, 갯지렁이, 갯우렁이 등 뭇 생명의 터전이었다. 먹이자원이 풍부하기에 철새들의 안식처이기도 했다. 특히 호주와 북극을 오가는 도요새들에게 새만금은 매우 중요한 중간 기착지였다. 봄·가을로 도요새 무리가 떼지어 날아가면 일대 장관이 펼쳐졌다. 짙은 날개 윗면과 밝은 날개 아랫면이 번갈아 대비돼 홀로그램이 만들어졌다. 지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카드 섹션이 갯벌 위를 수놓았다. 주민들은 그레(갯벌을 긁어 조개를 잡는 도구)를 끌어 생합, 동죽, 모시조개, 죽합을 잡으며 갯벌에 기대어 살아갔었다. 노태우 정권의 대선 공약을 바탕으로 새만금 간척은 시작됐다. 타당성 고려보다는 일단 호남을 향한 카드가 필요했다. 이후 목적과 방향성은 왔다 갔다 하며 이 정권, 저 정권이 바통을 이어받아 둑을 만들고 갯벌을 메웠다. 투입 예산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늘어났으나, 사업은 지지부진했으며 자연은 자연대로 망가져갔다. 잼버리대회 유치는 고착 상태에 빠진 새만금 사업의 출구전략이었다. 국제행사를 빌미로 일단 땅부터 만들고 보자는 속셈이 작용했다. 그나마 남아 있던 해창 갯벌을 메꾼 대학살 현장에서 생명을 중시한다는 스카우트 대회가 열렸다. 매립지는 염분이 많아 애초에 나무가 자랄 수 없었다. 동진강 하구 펄을 매립토로 썼기에 원활한 배수를 기대하긴 어려웠다. 8월 강렬한 태양 아래 물이 빠지지 않는 매립지는 습식 사우나나 다름 아니었다. 환경파괴와 경제적 타당성 논란 속 새만금 사업의 유일한 승자는 토건세력이었다. 막대한 세금이 재벌 건설업체에 집중돼 돌아갔으며, 정작 지역 환원 실적은 적었다. 이 같은 상황은 새만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전국 곳곳이 공사판이다. 적자가 뻔히 보이는 공항, 목적을 잃은 댐, 한적한 도로 등 삽질을 위한 삽질이 이어진다. 수도권 집중에 대한 분노와 지방 소외 설움은 대규모 토목사업 유치로 발현된다. 선거철마다 지방 소멸 위기의식은 개발주의를 부추긴다. 세금은 살살 녹고 자연 생태계는 위협받는다. 실제 주민 삶의 개선, 지역 발전 지속가능성, 미래 세대를 위한 전략, 경관과 생명 보호 등 건전한 대안 모색은 어려운 구조다. 안전하게 태어나 양질의 교육을 받으며 자랄 수 있고, 아프면 쉽게 치료받을 수 있는 동네. 사람도 잘 살고, 동식물도 잘 살 수 있는 지역을 꿈꾼다. 물론 말이 쉽지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잼버리 실패와 도요새의 눈물을 그저 날선 책임공방만으로 때워서는 안 된다. 수도권 중심주의에 대한 반성과, 개발사업 위주 이른바 ‘지역균형발전’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이어지길 바란다. 청소년들이 빠져나가고 텅 빈, 그러나 여전히 물은 고여 있는 잼버리 대회장을 바라보며 생각이 길어졌다. 

[아침을 열면서] ‘국내용’ 클래식 페스티벌 수준을 벗어나려면

우리나라 클래식은 국제대회에 유독 강하다. 피아노, 바이올린 등 악기 연주는 물론 성악 분야의 우열을 가리는 세계 유수의 콩쿠르에서 1위를 거머쥐었다는 건 더 이상 뉴스도 되지 않을 만큼 흔한 현상이 됐다. 무더위가 절정에 달한 지난 6일 ‘클래식 낭보’가 또 전해졌는데 이번엔 지휘의 영역이었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극장에서 열린 ‘카라얀 젊은 지휘자상’ 콩쿠르에서 29세 신예 윤한결이 우승하면서 세계 클래식계를 놀라게 했다. 피아노 연주와 작곡을 겸하는 ‘멀티 아티스트’이기도 한 윤한결은 54개국 323명이 출전한 이 콩쿠르의 한국인 첫 우승이라는 기록의 주인공이 됐다. 2010년 출범해 2년마다 열리는 카라얀 젊은 지휘자상은 차세대 스타 지휘자를 배출하는 콩쿠르로 유명하다. 지휘 분야에서 주가를 올리고 있는 영국 버밍엄심포니 수석객원지휘자 미르가 그라지니테 틸라, 네덜란드 국립오페라 상임지휘자 로렌조 비오티 등이 이 대회 우승 이후 세계 지휘계 샛별로 급부상했다. 윤한결이 머지않아 이들과 동등한 반열에 오를 것이라는 기대가 나오는 이유다. 이 대회 우승자에게는 흔치 않은 지휘 기회도 주어진다. 이듬해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오스트리아 라디오방송오케스트라(ORF)를 지휘하게 되고 공연 실황은 CD로 발매한다. 세계 클래식 시장을 주무르는 큰손들이 대거 몰리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지휘 역량을 발휘할 공식 무대에 서게 되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주목해야 할 지점이 있다. 그것은 윤한결이 우승한 카라얀 젊은 지휘자상의 제정 배경이다. 잘츠부르크 출신으로 ‘지휘계의 레전드’로 불리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이름을 딴 이 대회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과 카라얀 재단이 함께 주최하고 있다. 매년 7월 중·하순부터 8월 말까지 40여일 동안 개최되고 있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은 세계 최고의 여름 클래식 축제로 꼽힌다. 유명 오케스트라 및 톱 아티스트들의 연주와 공연을 보기 위해 매년 15만명이 넘는 클래식 애호가들이 전 세계에서 몰려들면서 공연마다 전석 매진에 가까울 만큼 인기를 끌고 있지만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은 여기에 멈추지 않고 카라얀 젊은 지휘자상 콩쿠르 주최를 통해 차세대 지휘자 육성과 페스티벌 영향력 제고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통영국제음악제, 평창대관령음악제, 한화교향악축제 등의 이름으로 20여개의 클래식 페스티벌이 펼쳐지고 있으나 해외 아티스트 라인업을 비교적 탄탄하게 구축한 일부 음악제를 제외하곤 ‘국내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클래식을 보기 위해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의 모습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이러한 측면에서 카라얀 젊은 지휘자상 콩쿠르를 공동 주최하면서 음악 축제의 지평을 넓혀 가고 있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운용 전략은 시사점을 던진다. 비용 문제가 뒤따르겠지만 우리도 클래식 페스티벌과 국제 콩쿠르의 만남을 진지하게 검토할 때가 됐다.

[아침을 열면서] 웰빙에서 웰다잉으로

유엔의 기준에 따르면 전체 인구에서 65세 이상이 차지하는 비율인 고령자 인구 비율이 7% 이상이면 고령화사회, 14% 이상이면 고령사회, 20% 이상이면 초고령사회로 구분된다. 한국은 베이비붐 세대의 본격적인 은퇴와 더불어 1단계인 고령화사회를 넘어 2단계인 고령사회로 진입했는데, 문제는 그 속도가 너무나 빠르다는 것이다. 심지어 지금 추세대로라면 2024년 말~2025년 초에 마지막 3단계인 초고령사회로 진입한다는 예측이다. 사람이 늙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러나 대책 없이 늙는 것은 그야말로 재앙이다. 그런 우려를 보여주는 통계가 있다. 올해 6월 기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 중 노인 빈곤율이 가장 높은 국가는 바로 대한민국이다. 2000년대 들어 최근까지 웰빙(Well-being)이라는 주제가 우리 사회를 주도하고 있다. 쉽게 말해 잘 먹고, 잘 사는 것이다. 지금은 ‘소확행’이나 ‘워라밸’ 등의 용어로 약간 업그레이드된 느낌이다. 한국에서의 웰빙 열풍은 방송을 통해 상업적으로 변질된 감마저 있을 정도로 사람들을 열광시켰다. 그런데 이 웰빙이라는 것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환경에서만 의미가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와 코로나 사태를 거치면서 우리 사회는 경제적으로도 양극화가 심화됐고 삶의 질이 떨어진 다수의 국민들은 저렴한 편의점 도시락 등에 매달려야만 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게다가 이런 현상은 노인계층에서 더 심하게 나타나고 있다. 즉, 웰빙의 시대도 이제 내리막길에 접어들었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이 초고령사회와 맞물리면서 이제부터는 웰빙이 아니라 웰다잉(Well-dying), 즉 ‘잘 죽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전 세계 최고 수준의 초고령사회인 일본에서는 정신과 전문의인 와다 히데키가 쓴 ‘80세의 벽’이라는 책이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있다. 그는 80세 전후가 되면 평소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고, 알면 병이 되니 건강검진도 하지 말라고 한다. 심지어 암에 걸려도 치료하지 말고 고혈압이나 콜레스테롤 따위는 생각하지도 말고, 먹고 싶은 것은 뭐든지 먹고, 술과 담배까지도 원하는 대로 마시고 피우라고 주장한다. 이 80세의 벽을 넘어서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20년이 기다린다고 한다. 이제는 빈곤장수(貧困長壽) 유병장수(有病長壽) 독거장수(獨居長壽)보다 존엄사(尊嚴死)를 진지하게 고려해야 할 때가 도래했다. 노년에 벽에 X칠 하면서 의미 없이 오래 살 바에야 인간답게, 행복하게 그리고 품위 있게 죽는 게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위해 더 낫다는 주장에 과반을 훨씬 웃도는 사람들이 동의할 것으로 확신한다. 이를 위해서는 예를 들어 대중적 죽음 교육 등을 통해 미리 죽음에 대비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옛말에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하지 않았나.

[아침을 열면서] 품위 있는 노후의 주거시설

아름답게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아름답게 산다는 것이고, 나이 들어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늙어서도 가능한 한 자기 손, 자기 힘으로 삶을 꾸려가는 게 중요하고 사회는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인프라를 만들어줘야 한다. 그게 노인복지요 사회복지다. 그 인프라에는 의료와 건강, 주거, 소득, 어울림, 봉사 등 여러 가지가 있겠고 사람마다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게 다를 터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노후생활을 미리 계획하고 준비해야 하는데, 그래야 한다고 늘 이야기하고 다녔지만 정작 나 자신은 그러질 못하고 바쁘다는 핑계만 대곤 했다. 그러다 생각해 보니 노후에 품위를 잃지 않고 아름답게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마침맞은 주거시설이 중요하겠다 싶다. 이론적으로나 경험으로 살던 집에서 그대로 사는 게 가장 좋기는 하다. 노인에게 맞게 주거를 개조하는 일이 필요하기는 하겠지만….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미 사는 곳이 고향인 경우나 그곳에서 몇십년을 산 경우는 드물기에 자식들 떠나고 나면 아무래도 살던 주거시설이 거추장스러울 수 있다. 그렇다면 흔히 ‘실버타운’이라는 노인복지주택은 어떨까? 한때 실버타운 바람이 분 적이 있다. 전원형 노인 주택 바람도 있었고 나도 잠깐 생각해본 적도 있지만 다른 전원주택 바람과 마찬가지로 오래가지 못했다. 오히려 비도시지역의 노인들마저 도시로 옮기고 싶어 하는데, 가장 큰 이유가 건강 문제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노인복지 주거시설은 1988년 설립된 수원의 유당마을로 유료 양로시설이다. 1993년부터는 민간기업과 개인도 임대형 노인복지주택을 개발할 수 있게 됐고 1997년부터 민간기업도 분양형 노인복지주택 사업에 나설 수 있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도심형 노인복지주택인 서울시니어스타워와 리조트형 고창 웰파크시티도 오픈했다. 주거와 여가 그리고 교육 서비스까지 갖췄는데 무엇보다 병원재단이 주체여서 건강과 관련한 의료 서비스 부분에 강점이 있지 않을까 싶다. 최근 VL 르웨스트, 서울형 골드빌리지에 이어 경기도형 시니어스 모델 발굴 계획들이 나오면서 노인 주거시설의 다양화가 기대된다. 그런데 초고령사회 도달에도 생각보다 노인복지 주택 시장은 활발해지지 않았다. 전국의 노인복지 주택은 약 40개소에 1만가구 정도다. 지난해 기준 실버타운 입주가 가능한 전국의 만 60세 이상 인구가 약 1천348만명이니 수용률이 0.1%도 안 되는 실정이다. 시장이 계획처럼 알아서 돌아갈 때 정부는 굳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시장이 돌아가지 않으면 결국 책임져야 할 주체는 국가다. 따라서 시장이 돌아갈 정도의 적극적인 정책과 제도적 길은 닦아놓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침을 열면서] 정전 70년, 비무장지대를 바라보며

1953년 7월27일. 유엔군 사령관과 북한 및 중국 대표가 판문점에 모였다. 악수와 인사도 없이 그저 침묵 속에 정전협정 서명이 신속하게 이뤄졌다. 2년 넘게 끌던 지리멸렬한 회담과 3년을 넘긴 광기 어린 전쟁이 멈추는 순간이었다. 정전협정문 제1조 1항에는 ‘1개의 군사분계선을 확정하고 쌍방이 이 선으로부터 각각 2㎞ 후퇴함으로써 설정된 공간’이 명시됐다. 남북한의 군사적 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군사적 완충지대 즉 비무장지대(DMZ)가 탄생했다. 휴전 중인 분단국가에서 태어난 나 또한 무수한 선배들이 그러했듯 의지와 상관없이 군복을 입고, 총자루를 쥐었다. 버스는 끊임없이 북쪽을 향해 달렸고, 더 이상 북상하지 못하는 곳에서 내려졌다. 남방한계선 철책 앞에 선 초병이 됐다. 분단의 시린 풍경은 일상이 됐다. 경계근무 시에 철책 너머를 주시하다 보니 자연스레 야생이 눈에 들어왔다. 오렌지빛 투광등 아래 단골손님은 고라니와 멧돼지였다. 이따금씩 삵의 사냥 장면을 훔쳐볼 수 있었다. 야생동물과의 조우는 고단한 군 생활 중 자연이 주는 작은 위로였다. 북에서 잠을 잔 기러기 떼는 아침이 오면 일사불란하게 편대비행을 해 남으로 내려왔다. 철책 위 걸려있는 윤형 철조망엔 쇠부엉이 한 마리가 즐겨 앉았다. 녀석은 북쪽 쥐와 남쪽 쥐를 번갈아 낚아 올렸다. 물안개 피어오르는 DMZ 내부 습지에는 한쪽 다리로 몸을 지탱하며 몸을 말아 잠을 자는 두루미 가족이 보였다. 독수리는 날갯짓 한번 없이 상승기류를 타고 하늘에 떠 있었다. 범상 비행원의 남과 북에 걸쳐있었다. 새들에게는 이념도 국경도 없었다. 마냥 평화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북에선 사계청소를 위해 주기적으로 불을 질렀다. 거센 화마가 DMZ 숲과 초지를 태웠다. 땅을 파헤친 멧돼지가 건드렸는지 가끔 지뢰 폭발음이 들렸다. 대남, 대북 선전방송의 악다구니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대기를 채웠다. DMZ 자연은 인간의 직접적인 개발과 밀렵 행위로부터는 자유로운 한편 군사 활동으로 인한 교란은 끊임없이 받으며 천이가 이뤄지는 독특한 생태계를 이루고 있었다. 이제는 생태조사를 위해 DMZ 일원을 방문한다. 여러 구간을 누비고 조사해보니 DMZ는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전 세계적으로 인구밀도와 개발압력이 높은 온대지역에서 개발을 피해간 곳은 드물다. DMZ는 온대지역 생물 다양성을 유지하고 있는 생태의 보고다. 또한 사빈해안, 석호, 산지, 구릉, 범람원, 묵논, 갯벌 등 다양한 서식지가 동서로 스펙트럼처럼 펼쳐지며, 남방계 북방계 식물이 만나는 곳이다. 사향노루, 반달가슴곰 등 다양한 멸종 위기종의 보금자리이기도 하다. 정전협정이 체결된 지 오는 27일로 70주년이 된다. 선배들이 지키던, 한때 내가 서 있던 DMZ 초소에 이제는 MZ세대들이 서 있다. 분단의 아픔은 세대를 건너 이어지고 민족 간 갈등과 불신은 여전하다. 한편 DMZ 자연은 전쟁과 분단의 상처를 보듬고 많은 생명을 품고 있다. 짙어져 가는 DMZ 녹음을 우러러보며 진정한 전쟁의 종결과 평화의 도래를 소망해 본다.

[아침을 열면서] 시간 지나면 영화 관람객 올 거란 허망한 기대

1895년 프랑스 뤼미에르 형제가 파리의 한 카페에서 ‘열차의 도착’이라는 1분도 채 안 되는 무성영화를 상영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영화사(史)에서 최초의 영화로 기록되는 이 영화를 제작했다는 자부심이 앞섰을까, 아니면 ‘음성도 나오지 않는 이 정도 수준의 영화를 만든 건 과연 잘한 일일까’라는 후회가 밀려 왔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달리는 기차가 앞으로 튀어나올 듯한 영상에 놀라 혼비백산한 관람객들의 모습에 영화의 기술적 요소를 개선하려는 다짐을 했을까. 분명한 사실은 128년 전 이렇게 영화가 처음 등장했고, 이를 계기로 ‘편집예술’인 영화에 대한 관심이 서서히 고조된 측면이 있으며, 20세기 미국 할리우드 영화산업의 본격화로 자연스레 이어지는 흐름으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영화는 자본과 기술이 토대가 되는 대중예술을 대표하는 장르로 산업적으로도 가장 앞서 나가고 있다. 우리나라도 이른바 ‘K콘텐츠’의 선두에 영화가 자리하고 있으며 국가적으로도 영화진흥위원회를 통해 정책적 지원이 이뤄지고 있다. 특히 아카데미상 작품상을 수상한 ‘기생충’ 등 한국 영화들의 경쟁력이 세계 유수의 국제영화제에서도 입증된 이후 언제부턴가 우리나라에 ‘영화 강국’이라는 수식어가 추가됐다. 그런데 코로나 팬데믹 이후 한국 영화가 침체의 깊은 수렁에 빠지면서 위기론이 확산되고 있는 모습은 심상치 않다. 이것은 데이터가 확인시키고 있다. 영화 관람 데이터 플랫폼인 영화진흥위원회의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KOBIS)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기준 극장 관람객수는 코로나 팬데믹 이전인 2019년 상반기(1억931만명)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5천839만명으로 집계됐다. 특히 한국 영화의 성적은 처참할 정도로 저조하다. 같은 기간 한국 영화의 관객 점유율은 36% 수준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나마 지난 5월 말 개봉한 마동석 주연의 영화 ‘범죄도시3’가 1천만명 관객을 돌파하면서 한국 영화 통계 관련 지표를 호전시키기도 했으나 이는 한국 영화 전반이 아닌 특정 영화에 국한된 일시적 현상으로 보는 게 옳다. 한국 영화의 유례없는 부진에 대해선 다양한 분석이 뒤따른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급부상한 넷플릭스 등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에 영상콘텐츠 주도권이 넘어갔다거나 ‘기생충’ 이후 관객을 사로잡을 만한 킬러 콘텐츠가 보이지 않고 있다거나, 관객의 의견과 상관 없이 지속적으로 오른 영화 티켓값 등이 발목을 잡고 있다는 식의 지적이 대체적이다. 이 가운데 어느 한 가지 이유만으로 한국 영화의 위기가 초래됐다고 보긴 힘들지만 영화계가 안이하게 대처하고 있는 건 아닌지 성찰이 필요한 시점임에는 틀림없다. 영화의 주요 특성 중 하나가 관람이라는 소비행위를 통해 직접 경험하지 않고서는 가치와 효용을 알기 힘든 ‘경험재’라고 봤을 때 영화 제작의 눈높이를 투자자나 배급사가 아닌 관람객, 즉 소비자에게 맞추는 전략의 선회는 필수적일 것이다. 지금처럼 ‘시간이 지나면 관람객들이 돌아올 것’이라는 영화계 일각의 근거 없는 기대는 희망사항 일뿐이다.

[아침을 열면서] 인구감소는 오히려 기회다

최근 들어 대부분의 매체를 통해 ‘인구절벽, 출생률 급감, 지방 소멸’ 등의 주제가 최대의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아울러 그간 정부 차원에서 내놓은 수많은 대책이 한결같이 거의 효과가 없는, 소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도 속속 나오고 있다. 그러면서 조만간 한국 사회의 가장 큰 위험 요소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요란하게 떠들고 있다. 과연 그럴까? 분명 지금과 같은 인구 감소가 지속한다면 한국 사회가 큰 타격을 받게 됨은 반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전체 사회구성원이 고루 피해를 보는 것은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은퇴 세대에 집중포화가 쏟아질 뿐이다. 왜냐하면 그들을 부양해야 할 젊은 세대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최근 ‘부동산 가격의 급격한 하락’ 사태와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정부는 부동산 가격의 급락으로 인한 소위 경착륙을 막기 위해 각종 대책을 퍼붓고 있다. 심지어 소위 역전세 사태를 맞아 전세보증금 반환에 어려움을 겪는 임대인들을 위한 특혜성 대책도 마련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언뜻 보기에는 좋은 취지인 듯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주목적이 부동산 기득권층을 보호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작 보호 받아야 할 임차인과 집 없는 서민 계층은 간신히 낙수효과 정도만 기대할 수 있을 뿐이다. 인구 문제를 젊은 계층의 관점에서 본다면 위기가 아니라 오히려 정상화로 가는 기회일 수 있다. 오랜 기간 저성장과 높은 청년실업률에 시달리던 일본이 최근 대졸 취업률에서 98% 가까운 성과를 내고 있다는 뉴스를 접했다. 그런데 일본의 이런 성과는 경제의 성장 때문이 아니라 우리보다 앞서 맞이했던 출생률의 저하로 인한 인구 감소의 결과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전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높은 인구밀도로 인해 부동산 등 수많은 사회적 이슈가 산적해 있으며, 높은 청년실업률도 그중 하나다. 따라서 인구 감소로 인해 비정상적으로 높은 인구밀도가 정상 수준으로 내려온다면 청년들에게는 우리 사회가 오랫동안 풀지 못했던 사회적 문제들이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길이 열릴 수도 있다. 따라서 인구 감소를 인위적으로 막으려는 헛된 정책보다는 인구 감소라는 글로벌 추세를 그대로 받아들이되 그 상황에서 최대한 사회적 충격을 완화할 수 있는 실질적 대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해외로부터의 이민’을 적극적으로 검토하는 것을 들 수 있는데 ‘투자 이민, 기술 이민’ 쪽의 문호를 과감히 개방하고 일반 이민자들에 대해서는 자격요건을 강화한다면 오히려 국익에 도움이 될 여지가 충분하다 할 것이다. 이에 관한 사회적 논의가 시급하다.

[아침을 열면서] 다시 오른 대관령에서

학기 중 도시에서 살다가 방학을 맞아 다시 대관령으로 가느라 가방 몇 개 주섬주섬 쌌다. 사는 게 그렇듯 짐 싸는 것도 꼭 남거나 모자라는데 대체로 둘 다다. 어느 건 모자라고, 어느 건 남는다. 특히 책이 남는 편인데 갈 때는 읽고 싶은 책과 읽어야 할 책들을 읽을 요량으로 이 책 저 책 욕심껏 넣지만 막상 가서 다 읽은 적은 거의 없다. 매번 그러지만 이번에도 아마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래도 또 덜어내기보다 추가하는 손이다. 다시 오른 대관령, 바야흐로 푸름의 제국 전성기다. 하늘 아래 푸르지 않은 구석 찾아보기 힘들고, 푸름의 기상도 더할 바 없어 보인다. 시골 사람들 말이, 나무 제대로 보려면 적어도 3년은 걸린단다. 온탕과 냉탕을 오가듯 도시와 대관령을 오가는 생활이 1년6개월째, 아직 나무 제대로 볼 정도는 아니다. 그래서 겨울에는 나무를 구분하기 쉽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러다 이렇게 잎사귀 피고 열매가 맺히면 아, 이게 대추나무요 저게 밤나무구나 한다. 아직 열매가 제 모양 갖추지 않은 상태지만 그래도 구분할 정도는 된다. 무엇보다 울창한 전나무 숲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많은 문제가 자명하고 단순해진다. 하지 않아야 할 일과 해야 할 일에 관한 판단은 이곳 대관령에 있을 때 훨씬 자명해진다. 앞으로 전진만 할 줄 알던 지난날 과부하로 건강을 해치고 지친 육신을 여기 대관령에 의탁했다. 대관령은 책 보는 것도 좋지만 산을 더 공부하란다. 그래서 이렇게 걸음걸음 옮기며 온갖 나무며 풀과 이야기를 나눈다. ‘힘들다, 힘들다’하면서도 지금은 쉴 때가 아니라며 채찍질하던 나더러 이대로도 충분하다며 마음 편하게 쉬란다. 다 생각하고 받아들이기 나름이라고. 초록 짙은 너른 벌판을 달리던 어린 시절을 돌아보라고. 지금 따져보면 부족한 것 투성이인 시골 생활이었지만 그 당시 부족한 게 있었냐고. 거꾸로 지금은 부족한 것 없는 생활이면서도 늘 모자라 하지 않느냐고. 대관령 생활하면서 또 다른 경험을 했다. 같은 쇼팽인데 깊은 밤에 들을 때와 햇살 맑은 아침에 들을 때가 아주 다르다. 밤에는 피아노 한 음 한 음에 매달리며 쇼팽은 어떤 마음으로 이런 곡을 썼을까? 하고 어떤 슬픔과 막막함으로 헤아리곤 한다. 그런데 아침에 들리는 쇼팽은 평화롭기만 하다. 지난밤 짙은 농도의 우수는 사라지고, 아침 햇살에 빛나는 맑은 이슬 구르는 소리만 들려온다. 음악조차 그럴진대 세상일 그렇지 않은 게 뭐가 있을까? 지금 눈에 불안해 보이는 것도 때가 바뀌면 불안의 기색은 다 사그라지고 말리라. 지금 무겁게 들리는 소리도 때가 되면 가벼워지리라. 마음 가라앉자 가방 풀어 가져온 책들을 정리한다. 오늘만큼은 읽어야 할 논문들 잠시 미루고 꼭 읽고 싶었던 책과 함께 쇼팽의 선율로 대관령의 새벽을 맞이하리라.

[아침을 열면서] 용마돌이의 삶을 응원하며

회갈색과 흑갈색 조합의 털이 온몸을 덮고 있으며 머리에 검은색 뿔 한 쌍이 솟아 있다. 이마에서부터 뿔 사이를 지나 뒷목에 이르기까지 갈기와 같은 검은 털이 줄 지어 나 있고 목에는 흰색의 반점이 있다. 흰빛 꼬리는 엉덩이 아래까지 치렁치렁하다. 우리나라에 사는 야생동물인 산양의 생김새다. 흔히 산양 하면 연상할 수 있는 것이 산양유이나 시중에 유통되는 산양유는 온몸이 흰 젖염소의 유제품으로 야생 산양과는 무관하다. 산양이 좋아하는 서식지는 인적이 드물고 가파른 비탈과 바위가 많은 산악지대다. 균형감각이 뛰어나고 유연한 집게형 발굽을 가지고 있어 바위 절벽과 급경사지를 쉽게 오르내린다. 다른 동물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험준한 지형에 특화돼 자신만의 고유한 생태적 지위를 구축한다. 과거 밀렵으로 개체수가 급감해 법적으론 멸종위기야생생물Ⅰ급이자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다. 주로 민통선 일대, 설악산, 울진과 삼척 등지 험한 바위산에 분포한다. 2018년 놀라운 소식이 들려왔다. 시민에 의해 서울 중랑구 용마산에서 산양이 목격된 것이다. 기존 서식지에서도 한참 떨어져 있는 서울 도심 인근에서의 산양 출현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용마산 산양 출현을 계기로 이뤄진 조사 결과 산양은 철원과 포천 일대 한북정맥을 따라 경기 북부까지 서식 범위가 확장된 것으로 나타났다. 산양 보전 측면에 있어 개체군 회복과 서식 범위 확대의 긍정적 신호다. 그렇다면 산양은 어떻게 용마산까지 왔을까?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산양 서식지인 소요산, 왕방산 일대와 용마산 사이엔 고속도로(29·100호선), 국도(6·43호선) 등의 많은 도로와 시가화지가 존재한다. 특히 용마산에 닿기 직전엔 횡단 난이도 극강의 왕복 6차선 북부간선도로와 망우리고개를 넘어야 한다. 많은 난관을 뚫고 산양은 기어이 남쪽으로 내려오다 용마산에 정착한 것이다. 또 하나의 질문. 왜 산양은 하필 용마산에 자리를 잡았을까? 용마산은 1961년부터 1988년까지 약 27년간 서울시의 골재채취장으로 이용됐다. 폭발 굉음, 돌가루 먼지 등으로 인근 주민들을 괴롭힌 채석장은 운영 종료 이후 인공폭포가 추가된 용마폭포공원으로 거듭났다. 산양에게 있어 이곳은 바위 절벽의 존재, 안전상 사람 출입의 제한, 폭포수 물 공급 등의 괜찮은 서식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일반적으로 산양의 검은 원통형 뿔에는 주름이 있고 나이가 많을수록 주름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진다. 나무의 나이테처럼 대략의 나이를 추정할 수 있는 단서다. 또 암컷에 비해 수컷의 뿔이 보다 벌어지고 뒤로 젖혀져 있다. 센서카메라에 촬영된 용마산 산양의 뿔은 주름이 3분의 2가량을 차지하고 있으며 두 뿔 사이는 약간 벌어져 있다. 즉, 녀석은 나이가 제법 많은 수컷 산양이다. 용마산 산양은 시민들에 의해 새 이름도 얻었다. 중랑구는 산양 이름 짓기 공모를 통해 ‘용마돌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용마돌이는 가히 산양계의 콜럼버스라 할 수 있다. 다만 다른 암컷 개체의 유입은 어려워 지속적인 용마산의 산양 서식과 번식개체군 형성은 어려운 상황이다. 2023년 6월, 현재까지 5년 넘게 용마돌이는 용마산에 살고 있다. 정기조사 때마다 만나는 용마돌이의 신선한 배설물이 반갑다. 오늘 밤에도 용마돌이는 바위절벽 한 편에서 되새김질을 하며 거대 도시의 야경을 굽어보고 있을 것이다.

[아침을 열면서] 예술후원 해보신 적 있나요?

‘K-클래식’의 출발은 우리나라 아티스트들의 해외 유명 국제 콩쿠르 입상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시간을 한참 되돌려보면 백건우(피아노·1967년 나움버그콩쿠르 우승), 정명훈(피아노·1974년 차이콥스키 국제음악콩쿠르 2위), 조수미(성악·1986년 이탈리아 베로나국제콩쿠르 우승) 등이 서막을 열었다. 이후 K-클래식의 약진은 더욱 두드러져 그 사례를 일일이 거론하기 힘든 만큼 국제콩쿠르 입상 소식은 자주 들려온다. 특히 지난 10여년 사이의 성과는 놀랍다. 대중음악의 유명 아이돌 못지않은 팬덤 및 티켓 파워를 과시하고 있는 피아니스트 조성진은 2015년 쇼팽 국제피아노콩쿠르 우승으로 클래식 스타 반열에 올랐고 지난해 반클라이번 국제피아노콩쿠르에서 역대 최연소(18세)로 우승한 임윤찬도 최고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이달 초엔 바리톤 김태한이 세계 3대 국제음악 콩쿠르의 하나인 퀸엘리자베스콩쿠르 성악 부문에서 우승하면서 또 한 번 ‘클래식 강국’의 위용을 과시하게 됐다. 메이저 국제음악 콩쿠르에 유독 강세를 보이는 K-클래식을 분석하려는 시도가 국내외에서 이뤄지는 것도 주목도를 높인다. 오죽하면 지난해 벨기에 감독이 만든 ‘K-클래식 제너레이션’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 영화가 개봉했겠는가. 이 영화가 ‘클래식 강국’의 이유를 모두 설명하고 있다고 보긴 어렵지만 몇 가지 시사점은 던진다. 아티스트들이 개성을 표현하도록 장려하는 자유스러운 분위기, 후배들의 롤모델인 유명 연주자들의 활약, 국가의 집중 지원 등은 우리나라가 국제음악 콩쿠르에서 강할 수밖에 없는 동력으로 꼽는다. 반면 그늘에 대한 지적도 새겨야 한다. 1등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지나친 경쟁심리는 뼈아프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한창 배우고 연습에 매진해야 할 젊은 클래식 아티스트들이 인지도 급상승에 따른 광폭 연주활동이라는 ‘한 방’을 노려 국제음악 콩쿠르 우승에만 매달리거나 연주를 즐기면서 예술적 가치를 구현하는 수단으로서의 클래식이 아닌 경쟁 논리에 매몰돼 가는 것은 국가적으로도 불행이다. K-클래식이 외형적으로 성장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지만 빛에 가려진 그림자도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 해외 국제음악 콩쿠르를 준비하는 아티스트들의 목표가 클래식의 직업적 불안정성에 기인한다면 이를 해소할 근본적인 대책 마련이 요구된다. 그 첫걸음은 신진 클래식 아티스트들이 안정적이고 가치적인 연주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예술 후원이 활성화되는 것이다. 지금도 기업을 중심으로 메세나(문화예술 분야 후원)가 전개되고 있으나 그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미국과 유럽, 일본 등 문화예술 선진국처럼 개인 후원 및 기부가 문화예술 분야에 보편화돼야 한다. 본격적으로 사회적 논의를 시작해야 할 시점이다.

[아침을 열면서] 교육 평준화의 희생양

몇 년 전 필자는 서울시내 모 중학교에서 한 학기 동안 ‘문화재’를 주제로 자유학기제 수업을 진행한 적이 있었다. 비록 한 학기라는 짧은 기간에 걸친, 그것도 단 하나의 학교에서 2개 학급만의 경험이었지만 필자는 자유학기제 실전 경험을 통해 현재 국공립 중등교육의 현실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자유학기제는 자기주도적 학습능력을 기르기 위해 중학교에서 한 학기 동안 지식·경쟁 중심에서 벗어나 참여형 수업을 실시하고 소질과 적성을 키울 수 있는 다양한 체험 활동을 중심으로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학기제 경험 전, 필자의 교육 대상은 거의 일반 성인들이었다. 간혹 몇몇 학교에서 특강 요청이 있었지만 대부분 일회성 강의라는 예외적 사례였다. 그런 탓에 자유학기제를 교육현장에서 직접 진행해 보기 전, 필자는 자유학기제가 학교 시험에 대한 압박감에서 벗어나 자기가 선택한 과목을 자유롭게 공부하고 체험할 수 있으니 학생들에게 참 좋은 제도이고 학생들도 환영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필자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수업에 열심히 참여하려는 소수의 학생들이 있었지만 학생의 절반 이상은 아예 관심이 없었고 심지어 2, 3명은 수업 내내 강의를 노골적으로 방해했다. 그들로 인해 수업은 여러 차례 도중에 끊겼고 교실 분위기는 어수선하기 그지 없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는데, 시험이나 과제에 대한 압박이 전혀 없이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과목도 이 정도라면 정상적으로 시험을 치러야 하는 다른 일반 과목은 오죽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는 수업에 열심히 참여하려던 소수의 학생들이 측은해지기 시작했다. 너희들은 어쩌다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공부를 해야 하니?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교육 평준화의 폐해’였다. 이것은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학생 태도의 문제다. 즉, 지성의 문제가 아니라 덕성의 문제다. 공부에 전혀 의지가 없는 학생들의 짐을 왜 일부 선량한 학생들이 대신 져야만 하나. 필자는 공부를 열심히 하려는 의욕이 있는 학생과 그런 의욕이 전혀 없는 학생을 무작위로 한데 묶는 ‘평준화 만능주의’를 반대한다. 공부를 제대로 해 보려는 학생들에게 양질의 교육 받을 최소한의 기회마저 박탈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공부를 잘하는 학생과 못하는 학생을 처음부터 가려 뽑아 학교별로 차별화하는 ‘비평준화’ 방식에도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그건 국민 편 가르기에 다름 아니다. 평준화를 지향하되 그 속에서 학업 의지별, 능력별, 수준별로 교육할 수 있는 융통성 있는 교육환경이 만들어졌으면 한다.

[아침을 열면서] 챗GPT 등장과 우리의 길

요즘 Chat GPT가 세계를 휩쓸고 그 발전 속도는 1주일이 10년처럼 보일 지경이다. 스마트폰보다 세계 변화 폭이 더 크리란 예측이다. 이 챗봇의 탄생에는 일론 머스크를 비롯해 아마존이며 마이크로소프트 등 기술 발달을 이용해 현재 세계 최고 거부에 오른 사람들이 동참했다. 인공지능의 위험을 예방하기 위해서라는데, 그 반대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낳는다. 우려에 따른 문제점으로 네 가지만 언급해 본다. 첫째, 일자리다. 10년 전 옥스퍼드대 교수들의 ‘고용의 미래’라는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의 702개 직업 중 47%가 컴퓨터로 대체될 공산이 크다. 매체와 기술 발달은 직업의 종류를 바꾼다. 글씨를 반듯하게 쓰는 것만으로, 타자만 칠 줄 알아도, 컴퓨터 프로그램만 잘 다룰 줄 알아도 취직할 수 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변화로 사라지는 직업들도 많다. 지하철 매표원, 요금소 정산원들은 작은 컴퓨터로 대체됐거나 그러는 중이다. 그런데 챗봇은 논문도 써주고 그림도 그려주고 통계며 분석 등 거의 모든 일을 한다. 변화 폭이나 정도에서 이전과 비교되지 않으니 대체 가능성이 두 배 이상 뛸지도 모른다. 둘째, 대학에 있으니 논문과 리포트를 이야기해 보자. 옛날 과거시험에서도 커닝이 있었고 학위 논문을 원고지에 손으로 쓸 때도 오자나 탈자까지 그대로 베낀 논문들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컴퓨터가 나오자 아예 복사-붙이기가 유행했다. 그러자 학계에서도 컴퓨터로 표절 검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이젠 챗봇과 챗봇의 대결이 벌어질지 모르겠다. 셋째, 그간 기술 발달이 결과적으로 인류 전체에 이로움을 줬다. 그 와중에 빈부 격차와 상대적 빈곤도 따라서 커졌다. 아직 무료로 사용하는 챗봇이 있지만, 갈수록 유료화가 될 것이다. 그러면 가난한 사람들은 성능 좋은 챗봇을 이용할 수 없고, 그 결과 경쟁에서 밀린다. 넷째, 인류는 어떻게 될까? 불사를 꿈꾸는 이들이 동면이나 뇌만 살아남는 장치에 대한 상상이 있었다. 그러나 그 뇌 역시 생물학적 물질인 이상 영원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이제 챗봇에서 보이는 인공지능 발달 속도라면 아마도 기억만을 업로드한 인공지능으로 불사의 꿈을 이루려는 이들이 없을까? 아니면 인간의 두뇌 이상으로 발달한 인공지능의 반란이라는 ‘아이 로봇’ 같은 시나리오는 공연한 걸까? 일단 명확한 윤리 기준을 마련하고 법적 제도화가 필요하다. 이미 로봇 3원칙이라든가 윤리강령 등이 있지만 챗봇 세계의 독과점 방지 장치 강화도 필요하다. 이제 자칫하면 한국 인공지능 사업은 아예 고사할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챗봇의 작품에 어느 정도 자기 것이 더해져야 창작물로 인정할지 챗봇의 결과물을 자기 창작품으로 내놓을 때 받게 될 처벌 기준도 분야마다 필요하다. 그리고 빈부 격차를 줄일 수 있도록 사회복지의 강화와 새 일자리 창출에도 공을 들여야 한다.

[아침을 열면서] 고라니를 위한 변명

흔히 오월을 ‘계절의 여왕’이라 부른다. 푸르름이 산과 들을 덮고, 따사로운 햇살과 적당한 바람이 대기를 적신다. 짙어지는 녹음을 바탕으로 새 생명이 약동하고 새소리는 풍성함을 더한다. 이 아름다운 호시절에 유독 시련을 겪는 존재가 있다. 바로 우리에게 친숙한 동물, 소목 사슴과에 속하는 고라니다. 이 계절은 바야흐로 고라니의 출산철이다. 암컷 고라니는 겨울철 짝짓기 후 6개월간 배 속에 품은 새끼를 5월부터 낳기 시작한다. 어미는 단독으로 새끼를 낳고 기른다. 부단히 먹어야 젖이 나오므로 먹이활동 때에는 새끼를 갈대밭이나 관목지대에 숨겨 놓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독박육아 워킹맘의 속사정을 알 길 없는 시민들은 홀로 숨어 있는 새끼를 우연히 발견하면 야생동물구조센터에 데리고 온다. 선한 마음을 가지고 들인 시간과 노력이 결과적으론 납치가 된 셈이다. 충남야생동물구조센터의 구조 고라니 조난 원인 중 22%가 오해로 인한 새끼 고라니의 유괴였다. 홀로 숨어 있는 젖먹이 꼬물이 고라니를 발견한다면 그저 가벼운 미소를 머금고 지나치면 된다. 고라니는 대표적인 로드킬 희생양이기도 하다. 해마다 전국 도로에서 생을 마감하는 고라니는 6만여마리에 달한다. 고라니의 영어 이름 워터디어(Water Deer)에서 알 수 있듯이 고라니가 선호하는 서식지는 습지, 농경지, 하천변 등 저지대 일대다. 이런 평야지역은 사람도 많이 살고, 도로 밀도도 높기에 고라니는 로드킬 위험에 쉽게 노출된다. 1년 중에서도 고라니 로드킬은 유독 5월과 7월 사이에 많이 발생(40%)한다. 작년에 태어난 고라니들이 본격적으로 자신의 영역을 찾아 헤매는 때여서 도로 횡단 빈도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운전 시 특히 안전속도 준수와 전방주시 주의가 중요한 시기다. 고라니는 전 세계적으로 한반도와 중국 일부 지역에서만 자연적으로 서식해 분포 범위가 넓지 않다. 중국 개체군 크기는 1만여마리에 불과해 보호받고 있는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개체수가 약 70만마리에 이르는 흔하디 흔한 동물이다. 농사짓는 입장에선 고라니 존재가 정말 환장할 노릇이다. 얄밉게도 여기저기 맛있는 부위들만 뜯어 놓아 상품성을 떨어뜨려 놓는다. 때문에 유해야생동물로 지정돼 해마다 15만~21만마리가 사살된다. 전적으로 고라니를 두둔하는 건 아니지만 이 씁쓸한 현실을 달리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 고라니는 농민의 피와 땀방울, 자본의 속성을 당최 이해하지 못한다. 잘 가꿔진 밭은 고라니에게는 그저 매력적인 채식 뷔페나 다름 아니다. 더욱이 도시 및 농경지 확장으로 밀려나는 고라니에게 농작물은 뿌리치기 힘든 유혹으로 다가온다. 한편 고라니 개체수 증가의 가장 큰 원인은 상위 포식자의 부재에 있다. 이 땅에서 호랑이, 표범, 늑대를 비롯한 대형 육식동물을 몰아낸 건 우리 사람이다. 지금 겪는 환경 문제가 대부분 자업자득이듯 고라니 문제도 그러하다. 우리 원죄는 까맣게 잊고 고라니를 탓하고 증오하기만 한 것은 아닌지 반문해본다. 사실 고라니는 호모 사피엔스보다 앞서 160만년 전 한반도에 도래했다. 고라니 입장에선 인간이 침입생물이자 유해 생물일 수도 있겠다. 좋든 싫든 고라니를 한반도에서 함께 살아왔고 계속해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 운명공동체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개체군 관리 방안, 실효성 있는 농작물 피해 방지 시설 및 피해 보상 확대 지원 등 공존의 방안을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고 머리를 맞댈 필요가 있다. K-사슴, 고라니가 앞으로 조금은 덜 잔인한 봄을 맞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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